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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수는 만들지 말자
- “아니! 이 xx가 너 상병이 일병한테 맞아도 싸! 이런 개xx를 봤나!" 군 시절 일등병인 필자가 순간적으로 화가 나 상급자인 상등병의 귀싸대기를 때렸다. 주위에는 내무반장급인 하사도 있었고 병장 등 고참병사가 수두룩했다. 저녁식사 후 내부반 자유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순간적으로 화를 참지 못했던 필자의 하극상 전말은 이러했다. 당시 일등병인 필자는 대대급 부대의 보급품을 다루는 보급사병이었다. 그날따라 상급 부대에서 군화가 몇 켤레 내려왔는데 이를 갖고 산하 중대에 가서 제일 낡은 군화부터 바꿔주라는 임무를 선임하사로부터 받았다. 새것이고 공짜였는데 너 나 할 것 없이 병사들이 필자 주위를 감싸더니 자기 것도 바꿔달라며 떼를 썼다. 하나하나 검증하면서 교체해주던 중 상병 한 명이 슬쩍 자기 신발을 두고 군화를 집어 가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대로 묵인하면 질서가 금방 무너질 상황이었다. 순간적으로 화가 폭발해 이것저것 생각할 겨를 없이 뛰어가 상급자인 상병의 따귀를 때리고 군화를 뺏었다. 김 상병과 조 일병 사이에 일어난 물건 도둑질과 하극상 사건이었다. 순간적으로 벌어진 일이었지만 김 상병은 자기가 한 잘못이 있어 대항하지 못했고 상황을 알아차린 내무반장이나 상급 병사들도 모른 척 딴 곳을 바라보는 것으로 사태는 일단 수습이 되었다. 돌이켜보면 부정한 행위에 화를 참지 못하고 욱하는 성질로 저지른 행동이었다. 계급절대사회인 군대에서 그것도 여러 병사가 보고 있는 내무반에서 하급자에게 따귀를 맞은 김 상병의 자존심은 그날 엄청나게 구겨졌을 것이다. 서둘러 보급을 마치고 돌아서 나오는데 뒤에서 싸늘한 병사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언젠가 보복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까지 생겼다. 두려움은 곧 현실로 나타났다. 김 상병이 유격훈련장 조교로 전출을 갔다. 병사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훈련이 유격훈련이라는 것은 군대를 갔다 온 사람들은 다 안다. 몇 달 뒤 우리 중대도 매년 실시하는 유격훈련을 받게 되었다. 틀림없이 김 상병에게 보복을 당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지만 그렇다 해서 유격 훈련에 빠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가 필자를 알아보지 못하거나 운 좋게 직접 대면하지 않았으면 하는 간절함만이 절실했다. 유격훈련장 두세 코스를 돌고 가장 난이도가 높은 훈련코스가 시작됐을 때 눈앞에 빨간 모자를 쓴 유격 조교가 서 있었다. 김 상병이었다. 순간 그가 저승사자처럼 무서웠다. 그는 필자에게 앞으로 나오라며 까닥까닥 손짓을 했다. 음성은 낮았지만 분노로 가볍게 떨리고 있음이 감지됐다. “내가 너 오면 죽여버리려고 벼르고 있었다.” 복수심과 증오로 이글이글 타는 그의 눈과 마주쳤다. 유격 조교가 사람을 죽이지는 못하겠지만 훈련이라는 이름으로 무지막지한 신체적 고통을 안겨줄 수도 있었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무슨 일인지 그의 표정은 이내 풀어졌다. “막상 너를 보니 내 마음이 풀어지는구나! 훈련 잘 받고 가라. 나는 다른 코스로 갈란다”하며 필자 어깨를 가볍게 툭 치고는 가버렸다. 그는 후임 유격 조교에게 자신이 있던 부대의 후배들이 왔으니 잘 봐주라며 부탁까지 했다. 잔뜩 겁에 질려 있었던 필자는 갑자기 돌변한 그의 태도에도 안심하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고만 있었다. 김 상병이 복수심으로 화풀이를 했다면 필자의 마음속에는 하극상을 일으켰다는 뉘우침보다는 보급품을 제대로 나누어주기 위한 정상적인 행동이었다고 자신을 합리화하는 일에 급급했을 것이다. 김 상병의 용서로 필자는 상황만 보고 사람을 보지 못하는 잘못은 하지 말자고 뉘우쳤다. 자신의 잘못으로 감옥살이를 하고도 범죄 사실을 신고한 사람에게 앙심을 품고 찾아가 보복을 했다는 섬뜩한 뉴스도 많다. 내 잘못은 덮어두고 남의 잘못만 지적하지 말자. 아무리 억울하고 화가 나도 역지사지를 해보고 숨 한 번 크게 쉬고 다시 들여다보면 이해되고 참을 수 있는 일이 많다. 세상살이를 하면서 원수는 만들지 말아야 한다. 원수는 반드시 외나무다리에서 만나게 되어 있다.
- 2017-08-09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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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사(酒邪) 때문에 생긴 트라우마
- 주사(酒邪)는 ‘술을 마신 뒤에 나쁜 버릇으로 하는 언행’을 말한다. 생전의 아버지는 주사가 심했다. 언행에 더해 고압적이고 폭력적이었다. 그 당시는 필자가 사춘기라서 그런 주사를 참지 못하고 욱하곤 했다. 그 결과는 가출이었다. 한창 감정이 예민했던 고등학생 때 무려 4차례나 가출을 했다. 아버지는 시골에서 맨손으로 상경해 서울에서 장사를 하며 자리를 잡았다. 한때는 우리가 살던 용산 지역의 돈은 우리가 다 쓸어 담는다는 소리도 들었다. 복잡한 재래시장에서 주류 대리점을 열고 주류 배달 화물차를 무려 58대나 운행했으니 어지간한 기업이었다. 그렇게 집안을 부유하게 일으키는 과정에서 아버지는 엄청난 스트레스가 있었을 것이다. 전쟁 후의 사정이 어디든 그랬듯 먹고사는 것은 또 하나의 전쟁이었다. 경쟁에서 지면 문 닫는 것이고 이겨야만 살아남았다. 돈이 모이는 곳이 조용할 리 없다. 동네 폭력배부터 경찰, 경쟁업체, 상인조합, 거래처 등 분쟁이 끊이질 않았다. 세상은 전쟁터이고 그런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남자는 강해야 한다며 복싱, 유도, 태권도, 합기도 등 격투기를 배워 반드시 초단 이상까지 따라고 가르쳤다. 아버지는 무서운 것이 없었다. 나름대로 맨땅에 헤딩해서 성공했다는 자부심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우쭐하고 으스대는 면이 강했다. 경찰 출신으로 당시로서는 큰 키인 185cm 장신에 힘도 세서 당할 사람이 없었다. 다른 사람이 말릴 수 없을 정도로 폭력적인 면도 있었다. 특히 술에 취해 주사를 부리면 동네 사람들이 다 불안해했다. 집에 있는 우리 어린 형제들은 더 공포스러웠다. 아버지가 만취한 날은 밖에서의 주사 소문이 먼저 들려왔다. 집에 들어오셨을 때는 우리 형제들을 이유 없이 나무라셨다. 우리는 자는 척하기도 했고 장롱 속에 숨어 아버지의 주사가 어서 잦아들기를 기다리기도 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집에 들어오면 집안 분위기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잘못이 있으면 마땅히 벌을 받아야겠지만, 술이 올라 벌게진 얼굴로 아무 잘못도 없는 우리들에게 큰 소리로 마구 호통을 치니 그런 주사를 점점 참기 어려웠다. 기껏 하는 반발이 가출이었다. 다른 형제들은 잘 참는데 필자는 아버지의 주사를 볼 때마다 분노 조절이 안 되었다. 욱하는 마음으로 가출했으니 돈이 있을 리 없었다. 당장 하루 세끼 먹는 것이 문제라 배를 곯아야 했다. 어쩌다 친구들 집에서 신세를 지기도 했지만, 그 집 부모님들이 눈치 채면 더 이상 신세를 질 수도 없었다. 하루에 호떡 하나로 허기를 달랜 적도 있었다. 아버지는 여러 자식 중 하나가 가출했다고 생각했는지 크게 상심하지도 않았다. 어떤 때는 가출했는지조차 모르는 경우도 있었다. 그럴 때면 필자만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대판 시끄럽게 하고 나면 아버지는 숙취로 만사 제쳐두고 고생하셨다. 그러니 집 나간 자식 생각할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아버지”라고 하는 사람들을 보면 부럽다. 결혼을 일찍 한 것도 일단 집에서 나와야겠다는 생각이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러면 아버지의 주사를 더 이상 안 봐도 될 것 같았다.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신 것도 아버지의 주사 때문이라고 생각했을 정도다. 아버지의 주사는 두고두고 트라우마로 남았다. 술로 벌게진 얼굴과 되지도 않는 논조의 큰 목소리가 바로 트라우마다. 그래서 지금도 술집에 갔을 때 옆자리 사람들 목소리가 커지면 당시의 생각이 나서 나와버린다. 당구장에 갔을 때 취객들이 들어와 당구를 치면서 너무 시끄럽게 굴면 게임을 하다가도 나온다. 주인에게 자제시키라는 주문을 해보기도 했지만, 손님 떨어질까봐 대답만 하고 모른 체한다. 늦은 시각 전철 안에서도 취객이 너무 떠들면 다른 칸으로 이동한다.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의 주사를 봐온 필자는 술을 마시면 곧바로 조용히 잔다. 술김에 자녀들이 귀엽다며 무슨 얘기를 해봐야 주사가 되기 쉽다. 평소에 맨정신으로 할 말을 왜 술에 취해 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 물론 술이 오르면 기분이 좋고 흥도 오른다. 그럴 때 조심해야 한다. 어느 날 술이 취해 귀가하면서 전철을 타고 오다가 스마트폰 SNS를 하고 있는 필자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술이 취한 상태에서는 실수하기 쉽다. 그 기분에 SNS를 하는 것은 주사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손주를 보러 갈 때마다 아들 집 근처에서 한잔하고 갔다. 손주가 아직 어려서 그런 할아버지의 모습을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좀 더 크면 기억할 테니 자제해야 할 일이다. 우리 형제 중 동생이 바로 아버지의 주사를 닮았다. 평소에는 말도 없고 얌전하다가도 술만 취하면 알 수 없는 넋두리에 목소리가 커진다. 더 큰 문제는 술에 취해서 한 행동이 그다음 날 기억이 안 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무라면 “술은 취하려고 마신다”며 큰일 아닌 것으로 생각한다. 필자가 “술은 즐기기 위해서 마시는 것이고, 어느 정도 취하면 술 마시는 속도를 조절하든지 그만 마셔야 한다”고 말해주면 그런 사람과는 술 마실 맛이 안 난다는 한다. 자기는 술김에 속마음 풀기 위해 술을 마시는데 안 취하려고 발버둥치는 사람은 계산적인 것 같아 같이 마시고 싶은 생각이 안 든다는 것이다. 한번은 둘이 술을 마시다가 형님에게로 갔다. 이미 많이 취했지만 좀 더 마시겠다며 간 술집에서 동생이 마구 큰 소리로 욕설을 하는 바람에 분위기가 깨져버렸다. 마침 민감한 문제로 어색해하던 형제들 사이가 그날 일로 인해 아예 끊어져버렸다. 동생에게 실수에 대해 형님에게 사과하라고 하자 사과는 했다. 그러나 정작 형님은 사무적으로 사과를 받아들였을 뿐 섭섭한 마음을 풀지 않았다. 술 취해서 한 행동에 대해 너그러운 사회이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분명히 있다. 술 좋아하는 우리 집안에 술은 필요악이다. 술을 끊어야겠다는 생각은 없다. 아버지도 돌아가실 때까지 술을 드셨다. 그러니 필자도 술을 오래오래 즐길 것이다. 그러나 필자로 인해 다른 사람이 트라우마가 생기는 일이 없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생각은 늘 한다.
- 2017-08-09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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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모됨을 축하해요
- “오늘 당신 딸은 더없이 아름다운 오월의 신부였다오” ‘2017년 5월 28일 오후 5시 더 라움 4층’ 전달 중순쯤 날아온 카톡 메시지다. 놀라움과 반가움이 동시에 겹친다. 벌써 일년! 세상사가 무상하다지만 생사의 갈림길은 언제여도 쉽지 않다. 성여사는 20년 지기 필자의 지인이다. 초등 1학년 아이의 학부모로 아파트 이웃에서 시작 된 인연이 결혼식을 알리는 사이로 이어 온거다. 작년 이맘쯤! 필자 여식의 혼례를 무사히 마치고 기분 좋은 피곤함을 즐기고 있었다. 신혼여행을 떠난 신참 부부에게 축하와 당부를 전하며, 축하해 준 지인과 친인척들에게 감사 인사를 올리느라 분주한 며칠을 보냈다. 그 와중에 받은 부고 소식에 순간 감전되었다. 병고에 투병 중이던 지인이 생을 달리했다는 소식은 몇 번을 들어도 믿기지가 않았다. 결혼 전에 찾아가서 인사를 시킬까 했다. 아니 신혼 여행 다녀와서 시간을 내봐야겠다고 미루어 두었던 자신을 탓하였다. 삼오제 후에도 한동안 충격이였다. 자기 탓이라며 격하게 슬퍼하는 지인의 둘째 딸아이 고백에도 위로의 말을 찾을 겨를이 없었다. 그렇게 보낸 지인과의 마지막 대화가 좋은 사윗감을 찾아봐달라는 것이였음을 늘 부채처럼 지니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일 년이 흐르고 지인의 큰딸아이 혼례에 참석하게 되었다. 단아하게 꾸민 신부대기실에 앉아있는 아이를 보니 급 마음이 내려앉는다. 그 친구가 그립다. 어디선가 분명 보고 있으리라 믿지만 아쉽고 아쉽다. 많이 좋아라 했을텐데... 5월의 신부답게 눈부시게 아름다운 모습을 보니 울컥한다. 드레스, 신혼집, 가전제품, 만만치 않은 혼례준비를 혼자하느라 애썻을 생각을 하니 마음이 아리다. 활짝 웃으며 인사를 전하는 신부의 옆모습에서 제법 어른스러움이 보인다. 화촉점화를 생략했다는 신부아버지의 멘트에 또 한번 빈자리를 떠올리며 안녕을 빌어본다. 아침고요 수목원, 남이섬, 수많은 맛집들.....아이들과 함께했던 기억들이 빠르게 지나간다. 무탈무고하게 잘 자라 인생의 반려자를 맞이한 우리 모두의 아이들에게 축복을 빈다. “성여사! 장모됨을 축하해요!”
- 2017-06-12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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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성회가 만난 CEO 스토리] 인생 3막의 장밋빛 인생, 이길원 국제PEN클럽 한국본부 명예이사장
- 나이 듦은 원숙일까, 낡음일까. 누군가에겐 연륜으로 작용하지만, 누군가에게는 고집불통의 외통수를 만들기도 한다. ‘불로초’를 찾아 헤매는 ‘영원한 젊음에 대한 집착’도 안쓰럽다. 또 ‘너희는 늙어봤냐, 나는 젊어봤다’로 나이를 계급장인 양 밀어붙이며 유세하는 것도 볼썽사납다. 여기 밥 잘 사고 젊은이들과 무람없이 농담을 주고받으며 지덕체의 균형을 이루며 사는 진정한 ‘어른’이 있다. 바로 이길원 국제PEN클럽 한국본부 명예이사장이다. 영원한 현역으로 산다는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글 김성회 CEO리더십연구소장 정보화 사회의 키워드인 사이버는 그리스어 ‘키베르니테스(kybernetes)’에서 유래했으며 ‘키’를 잡고 있음을 의미한다. 원로가 젊은이와 다른 것은 인생에서 ‘가상의’ 키를 잡고 저어갈 줄 아는 능력이 있다는 점이다. 이길원 국제PEN클럽 한국본부 이사장(72)을 이 코너 인터뷰 대상자로 섭외한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다. 늘 젊은 친구가 모여들고, 일상을 놓지도 않고 꽉 움켜쥐지도 않은 채 여유롭게 ‘키를 제대로 잡고’ 지덕체의 균형을 이루며 사는 ‘어른’이라 생각해서였다. 처음 인터뷰 섭외를 청했을 때, 그는 눈웃음을 지으며 “90까지는 활동해야 하는데 인생 은퇴가 어디 있느냐”며 “나는 영원한 현역이다. 단지 노는 물이 달라졌을 뿐이다”라고 손사래를 치며 사양했다. “박수칠 때 떠나라는 말이 있지요. 저는 패러다임을 바꿀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박수칠 때 새로운 것을 시작하라는 것으로요. 옛날에는 인생을 2막으로 나누었지요. 30세까지의 준비기와 60세까지의 활동기로 양분했습니다. 이제는 90세까지 사는 세상. 저는 인생을 3막으로 구분합니다. 태어나서 20대 후반까지가 준비기, 그 이후부터 60대까지가 활동기 그리고 90대까지가 서드 에이지(third age)입니다. 서드 에이지 시기에도 마음먹기에 따라 하고 싶은 것 얼마든지 할 수 있어요.” 이길원 이사장은 장년기에는 성질이 불같아 아내와 티격태격 싸움도 자주 하고 밖으로 나돌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나이가 드니 역시 배우자뿐이라는 생각이 든단다. 서로 등 긁어주는 배우자가 최고란 마음이 절로 들면서 부부금실도 좋아졌다고 털어놓는다. “건강이 최고로 중요하다”는 그는 아내에게 “아프면 범죄다. 무슨 짓을 해도 좋으니 아프지만 말라”며 오후 4시엔 무슨 일이 있어도 손잡고 꼭 헬스클럽엘 간다. 아내 역시 “지금이 인생에서 가장 절정기”라며 행복해한단다. 자녀들도 자립했고, 이제는 스스로의 삶에서 뭔가를 이뤄야 한다는 강박관념도 없어 욕망을 내려놓으니 마음이 평화로워지고 자유로워진다는 설명이었다. 회장님의 본업 내지 생업은 사업이십니다. 국제PEN클럽 이사장 등 활동을 활발히 하시면서도 시를 500편, 시집은 8권이나 발간하셨습니다. 대외적으로는 시인으로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만…. “제 본업은 시를 쓰는 일이고 생업이 사업이지요. 그런데 사업가와 시인은 모순된 것이 아닙니다. 사업이 인간의 마음을 얻는 것이라면, 시 쓰기는 인간을 탐구하는 작업입니다. 서로 통합니다. 제 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마음에 드는 시 한 편을 쓰고 나면 짜릿한 쾌감을 느낀답니다. 시를 쓰면 사물이나 사람을 폭넓은 시각으로 이해하고 공감하게 됩니다. 그런 것이 사업에도 도움이 됐습니다.” 국제PEN클럽 회장을 역임하셨지만 본래 특수인쇄업체인 스티커 회사 ‘태평양그랜드’를 창업, 38년간 운영해오셨지요. 오너 경영자들은 한결같이 스스로 현직에서 물러나기 쉽지 않다는 말씀을 하시던데요. “내가 죽고 난 후 회사가 어떻게 될 것인가를 먼저 생각해보았어요. 그렇게 생각하니 결론이 간단하더군요. 책상을 빼는 것이 회사 간판을 내리는 것보다 낫다. 나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욕심입니다. 성공한 기업이란 나 아니면 쓰러지는 것이 아니라 나 없이도 잘 굴러가는 기업이라고 다시 정의를 내려봤어요. 저는 단계적으로 후계자 교육을 시켰습니다. 제 시대 땐 경영자 혼자 장군 멍군 다 일을 했는데, 아들에게 일을 시켜보니 팀워크로, 시스템으로 일을 처리해 나보다 더 잘해낼 것 같더라고요. 내가 며칠 걸려 조사한 일도 반나절에 해내는 걸 보고 물려줘도 되겠구나 싶었습니다.” 경영 승계 수업을 할 경우 아버지의 ‘질문’이 ‘심문’으로 변해 갈등을 빚는 경우도 종종 있던데요. “묻고 기다려준 것이 내 나름의 비결입니다. 일찍부터 ‘너라면 이 경우 어떻게 하겠느냐? 상대라면 어떻게 할 것 같으냐?’라는 질문을 습관적으로 했어요. 직원들에게나 고객들에게나 경영자로서 얼굴이 서려면 물려받아 얻은 게 아닌 나름의 업적을 세워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게 부담을 준 말의 전부일 겁니다. 실패를 했을 때도 ‘네가 그러면 그렇지’ 하며 못미덥다고 전권회수를 하기보다는 ‘내가 방풍벽으로 있을 때 실수를 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실수도 경영 수업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아들들과는 편하게 술친구도 하지요.” 삼성 이병철 회장―이건희 회장―이재용 부회장은 3대에 걸쳐 사업 교훈으로 ‘경청’을 물려주었다고 하는데요. 자제분들에게 강조하신 것은 무엇인지요. “한마디로 신뢰입니다. ‘영업이란 제품을 파는 것이 아니라 너 자신을 파는 것이다, 능력이 야 웬만한 사람들이 다 갖고 있지만 호감을 얻거나 신뢰를 받는 사람은 흔치 않다, 사업의 기초는 상대방에게 신뢰를 주는 것이다, 신뢰하지 않는 사람과 누가 사업 파트너가 되겠느냐, 사업의 핵심은 호감이다, 아무리 힘들어도 임기응변으로 얼렁뚱땅 넘기려 하지 말고 솔직해져라, 한 가지 거짓말을 덮기 위해서 백 가지 거짓말을 하게 되는 법이다’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이야기했지요. 사업을 한 지 10년쯤 되자, 아버지 말이 무슨 말인지 ‘머리’가 아닌 ‘몸’으로 알겠다고 하더군요.” 2선으로 후퇴해 이른바 ‘뒷방 노인’이 되면 심리적으로 외롭다고들 하십니다. 한 퇴직 오너분은 실무 경영에 참여하고 싶어도 ‘(현직 사장인) 아들이 부르기 전엔 절대 집무실에 들어가지 않는다며 피눈물 나는 맹세와 마음수련을 거듭했다고 합니다. “허허, 저는 할 일이 많아서인지 더 즐겁던데요. 일주일에 한두 번 회사에 나가면 직원들이 모두 좋아해요. 제가 수전노처럼 굴지 않기 때문이에요. 경영 승계를 한 후 부자갈등이 일어나는 것은 아버지가 손을 놓지 못하고 간섭하려 들기 때문입니다. 우리 집은 오히려 아들이 ‘너무 회사에 무관심한 것 아니냐’고 제게 불평할 정도입니다. 저는 문단활동, 국제PEN클럽 활동, 망명 북한작가 돕기, 시창작 강의 등 할 일이 많습니다. 돈 문제도 내가 버는 만큼이 내 돈이 아니라, 내가 쓰는 만큼만이 내 돈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음 맞는 사람들과 밥 먹고 술 마실 때 쓸 수 있을 정도면 되지, 뭘 더 바라겠습니까.” 흔히 나이든 분들은 젊은이들과 어울리고 싶은데, 그들이 어렵다며 피한다고 합니다. 젊은이들과 잘 어울리시는 비결이라도 있으신지요. “나이를 먹으면 남을 통해 행복을 찾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반대가 돼야 합니다. 스스로 행복해지는 방법도 찾아야 하고, 사람들에게 행복을 나눠주기도 해야 합니다. 역설적이지만 외로움을 즐길 줄 알아야 사교적인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내가 즐거워야 남도 즐겁지요. 안 그러면 주변 사람들을 성가시게 하거나 피곤하게 만듭니다. 나이 많다고 거들먹거리며 대우나 받으려 하고 폼만 잡으면 꼰대로 소외당하지요.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저는 모임에 나가면 대우받으려 하기보다는 사람들과 잘 적응할 방법을 찾습니다. 나이 든 선배로 깍듯하게 예의를 차리려고 하면 오히려 ‘식욕, 성욕 다 당신들 못지않다. 당신들보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더 젊다’고 농담을 하며 벽을 허물곤 한답니다.” 밥 잘 사고 젊은이들과 무람없이 농담을 주고받는다고 해서 그를 ‘세상모르는 팔자 좋은 금수저 출신 어르신’이라고 보면 오산이다. 이길원 이사장은 전형적인 외유내강형이다. 사업이 잘나갈 때는 있는 약속도 취소하면서 만나던 사람들이 사업이 어려워지자 없는 약속도 만들어 핑계를 대며 피했다. 이런 인간의 온갖 행태를 다 경험하고 목격했기에 그는 더 단단해질 수 있었다. 인간의 원초적인 모습을 보며, 조변석개의 인심을 겪으며, ‘사람은 누구나 제 입에 밥알 털어넣기 바쁘다’는 진리를 뼈저리게 터득했단다. 사람들에게 기대지 않을수록 외로움을 덜 탄다. ‘자립심=사교심’이 그의 지론이다. 역설적이지만, 경제적으로든 심리적으로든 혼자서 버틸 줄 아는 내(耐) 고독력이 사교력과 모임적응력의 바탕이 되고 있다는 이야기다. 플루트를 새로 배우신다고 들었습니다. 특별한 계기가 있으신지요? “어려서부터 음악을 좋아했습니다. 다시 태어나면 음악가가 되겠다는 생각을 할 정도였지요. 고등학교 때 아버지가 과학자가 되라고 강권하셔서 화학과로 진로를 정했는데, 막상 가보니 적성에 안 맞지 뭡니까. 또 사업을 할 때는 바빠서 악기를 배울 겨를이 없었습니다. 그때 풀지 못한 원을 고희가 지난 지금 이루고 있는 것이지요. 지금 나이에 뭘 새로운 걸 배우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얼마나 즐거운지 모릅니다. 날씬한 플루트 몸매는 내 손놀림에 따라 음계를 달리합니다. 낮은 음으로 속삭이다가 높은 비음으로 유혹하면 저절로 감성에 젖게 되지요. 게다가 휴대도 간편해 노후에 배울 악기로 딱 안성맞춤이라 생각합니다.” 이길원 이사장을 만나는 날 겨울바람이 매섭게 불어댔는데 그날도 플루트 레슨을 받고 오는 길이라고 했다. 그는 “지금은 초보 수준이지만 프로 수준에 이를 때까지 꾸준히 연습할 생각”이라며 “손자들 앞에서 데뷔 음악회를 여는 게 향후 목표”라고 환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인생 3막, 서드 에이지에 대해 쓴 시가 있는지 물어보자 그는 노년의 관조와 여유를 다룬 자작시를 나직하게 암송하기 시작했다. 때론 강한 목소리로, 때론 부드러운 목소리로 시를 읽어나가는 그에게서 거친 파도와 싸우는 손마디 굵은 어부와 열정적으로 연기를 펼치는 배우의 모습이 느껴졌다. 낭만가객, 음유시인의 면모를 잃지 않고 고독하게 인생의 파도를 헤쳐 온 그에게 커튼콜의 힘찬 갈채를 보내고 싶어졌다. “브라보! 브라비시모, 유어 라이프!” 마침표 연습 2 이길원 내 연기(演技)가 비록 마음에 들지 않았더라도 아이야 커튼콜하며 무대 비우는 배우에 갈채 보내듯 박수를 쳐라. 최선을 다한 나의 연기다 막이 내린다고 우는 사람 있더냐. 촘촘히 등 돌려 무대 내려오는 나는 박수를 받고 싶다. 내 서던 무대에 누군가 또 열정을 보일 것 이제는 너의 차례 신(神)이 누구에게나 한 번 주는 배역 비록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최선을 다해라 산다는 건 주어진 역할에 따르는 한 편의 연극 같은 것 김성회 CEO리더십연구소 소장 연세대학교 졸업. 경영학 박사. 서울과학종합대학원 겸임교수. 리더십 스토리텔러. 세계일보에서 CEO 인터뷰 전문기자로 활약했다. 세계경영연구원(IGM)과 삼성경제연구소 등에서 강의했다. 저서로는 , , 등이 있다.
- 2017-01-23 0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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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의 인상학] 당신의 표정은 어떤가요?
- 글 박정희 혜담(慧潭) 인상코칭 연구원장 ilise08@naver.com 평균수명이 늘어나면서 사회활동을 하는 시기도 길어졌다. 우리가 행복하게 살아가야 할 기간도 길어진 것이다. 그러나 어느 날 엘리베이터 거울에서 문득 마주하게 된 자신의 얼굴이 낯설 때가 있다. 늙어가는 자신의 모습이 서글퍼지는 것은 모두가 공감하는 부분이다. 장자(莊子)의 에 ‘오상아(吾喪我)’라는 말이 나온다. 나를 잊은 나, 내가 나를 잊어야 진정한 내가 된다는 의미다. 현실은 어땠는가. 나를 잊을 정도로 바쁘게 살아오면서 진정한 내가 되었는가? 아니, 그런 생각을 할 겨를도 없었을 것이다. 철학적 사유를 하면서 그동안 삶의 목적이 무엇이었는지 한번 돌아보고 싶은 마음은 나이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또 거울 속의 너무 늙어버린 얼굴이 서글픈 탓만도 아닐 것이다. 행복한 시간을 살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면 더 늦기 전에 내 삶의 여정을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우선 지금의 나를 가장 잘 알 수 있는 얼굴을 마주하자. 그리고 내가 좋아하고 즐거운 일을 하고 있는지 물어보자. 그러기 위해서는 본연의 나[吾]인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먼저 생각해봐야 한다. 내[吾] 안에서 활동하고 공감하는 나[我]를 찾아야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 이제부터 자아를 찾아가는 방법을 살펴보자. 먼저 상대방에게 확고한 인상을 심어주자. 미국 남자들 대부분은 골드토(Gold Toes) 양말을 한 켤레씩은 갖고 있다고 한다. 골드토 양말은 발가락 끝부분에 금색 장식이 되어 있으며 남성용 양말 중 최고 인기를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이 양말은 단지 품질이 좋고 견고하며 오래 신어도 탄력이 있는 양말이 아니다. “당신의 발을 빛나게 하라”를 외치며 양말에 금색 실을 사용해 수를 놓음으로써 황금색이 주는 고급스러움과 화려함을 차별화 전략으로 내세워 소비자를 단박에 사로잡은 양말이다. 골드토가 금색의 수를 놓아 다른 양말들과 차별화를 시도한 것은 제품에 대한 애정과 자신감, 그리고 경쟁에서 반드시 살아남아야겠다는 생존 전략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들은 스스로를 어필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을까. 누군가와 처음 만날 때 가장 강하게 어필이 되는 신체 부위는 얼굴이다. 몇 번을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말은 자신의 얼굴을 위해 시간을 투자하라는 말이다. 거울을 통해 자신의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흐뭇하고 행복한 미소가 저절로 지어지도록 스스로를 가꾸라는 주문이다. 내 모습이 만족스러워야 어느 곳에서든 자신 있게 나설 수 있다. 거울 속에서 나를 만날 때마다 이렇게 이야기해보자 “너는 왜 그렇게 멋있니?”, “당당해서 보기 좋아!” 이러한 칭찬이 자신감을 만들어주는 데 큰 작용을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그다음으로는 관심의 대상이 되도록 노력하자. 거리를 나가 보면 유행하는 옷을 똑같이 걸쳐 입은 비슷비슷한 분위기의 사람들이 너무 많다. 대체적으로 개성과 색깔이 안 느껴지는 모습이다. 우리는 이러한 일반화된 유행에서 탈출해야 한다. 아침이 되면 매일 뜨는 태양, 그러나 사람들은 정작 태양에는 관심이 없다. 너무 익숙하고 친숙한 일상의 한 부분이 되었기 때문이다. 자기 색깔이 없는 얼굴은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 나이 들어가는 주름진 얼굴이니 어쩔 수 없다고 포기하지 말고 조금씩이라도 변화를 줘야 한다. 개성과 색깔은 젊고 예쁜 얼굴을 말하는 게 아니다. 개성 있는 얼굴을 만들어주는 것은 마음의 작용이다. 마음이 움직이는 방향으로 얼굴 분위기도 함께 바뀌어간다. 그래서 마음이 가는 방향은 매우 중요하다. 누구에게나 다른 사람들과 차별화되고 관심을 받고 싶은 욕구가 있다. 그러면서도 정작 자신을 바꾸는 일에는 게으르다. 욕구만 있고 마음이 일어서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노력하지 않으면 바뀌는 건 절대로 없다. 어떻게든 자신을 바꿀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왜? 왜 그래야 하지?”라는 질문에 분명한 답변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막연하고 자신감이 없는 답변은 어떤 것도 변화시킬 수 없다. 나를 바꾸고 싶다면 왜 바꾸고 싶은지 정확한 이유부터 찾아보자. 이유가 찾아진 뒤에는 실천을 해야 한다. 자신의 매력 포인트를 찾아보자. 남보다 잘하는 것이 있으면 그것을 어필하면 된다. 자신의 강점을 부각하다 보면 어느 새 차별화가 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저 친구 말을 들으면 늘 좋은 일들이 생겨.”, “저 사람은 볼 때마다 기분이 좋아.” 이런 소리를 듣는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다. 차별화된 나를 만들었다면 내 매력이 상대방에게도 유익한지 생각해봐야 한다. 갈고 닦아 만든 개성이 상대방에게 거부감과 불쾌함을 안겨주면 개성 없는 사람보다 못한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평소에 칭찬을 잘해주고 좋은 말도 많이 해주는데 이상하게 만날 때마다 기분이 안 좋은 사람이 있다. 억지로 하는 칭찬과 아부는 얼굴에 다 드러난다. 얼굴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진심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눈빛이 흔들리지 않고 부드럽다. 저절로 미소가 가득한 얼굴이 된다. 이런 모습을 봐야 상대방이 진심을 느끼고 즐겁고 행복한 기분이 되는 것이다. 인간관계에서는 얼굴 생김새가 중요한 게 아니라 표정이 중요하다. 표정이야말로 인간의 감정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신호이기 때문이다. 지나치게 과묵하고 어두운 표정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자신의 의견을 잘 전달하기 위해서는 많이 웃고 상대에게 긍정 에너지가 전달될 수 있도록 밝은 표정을 지어야 한다. 이런 태도가 습관화되고 일상화되면 어디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사람이 될 것이다. 외모와 인상은 스스로 노력하면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 평소에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특히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야 하는 일을 하고 있다면 따뜻한 미소와 부드러운 표정을 잃지 말자. 무엇보다 큰 경쟁력이 될 수 있다.
- 2016-12-22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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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츠 인물열전] 홍수환 말보다 더 유명해진 말 "그래 수환아, 대한 국민 만세다!"
- 신명철 스포티비뉴스 편집국장 전 스포츠서울 편집국장 서울 강남의 한 복싱 체육관이 건장한 중년 신사의 감격적인 포옹으로 뜨겁게 달아올랐다. 복싱 올드 팬들이 추억의 일기장에서 꺼내들 만한, 그러나 얼굴은 많이 변한 두 복서가 또다시 만남의 기쁨을 함께했다. 주인공은 ‘4전 5기’ 신화 홍수환(66) 한국권투위원회 회장과 엑토르 카라스키야(56) 파나마 국회의원이다. 딱 10세 차이인 두 사람은 39년 전 링에서 맺은 인연을 여전히 이어오고 있다. 한국인 첫 프로 복싱 세계 챔피언의 영광은 김기수가 차지했지만 그의 경기 장면을 TV로 본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당시 대부분의 스포츠 팬들은 김기수가 챔피언 벨트를 허리에 감는 장면을 ‘대한뉴스’ 화면으로만 봐야 했다. 1960년대에는 TV 보급률이 매우 낮았기 때문이다. 1970년대의 흑백 TV 시절, 최고의 프로 복싱 스타는 단연 홍수환이다. 그의 복싱은 한마디로 스마트하면서 호쾌했다. 복싱 팬을 끌어들이는 마력도 있었다. 먼저 홍수환과 카라스키야의 인연부터 살펴보자. 두 사람은 1977년 11월 27일 WBA(세계복싱협회) 슈퍼 밴텀급 초대 챔피언 결정전에서 맞붙었다. 경기 장소가 파나마여서 홍수환으로서는 절대적으로 불리한 경기였다. 당시 홍수환은 27세의 베테랑 복서였고 카라스키야는 17세의 어린 나이에 11전 11KO승을 자랑하는 샛별 복서였다. 별명이 ‘지옥에서 온 악마’였으니 파나마 복싱 팬들이 그에게 건 기대는 미뤄 짐작할 만하다. 홍수환은 2라운드에서 네 번이나 다운되면서도 오뚝이처럼 일어섰고 마침내 3라운드에서 카라스키야를 KO로 눕히고 챔피언 벨트를 차지했다. 마침 이 무렵에는 1라운드 3회 다운이면 자동 KO가 되는 규칙이 아니고, 무제한 다운제가 시행되었다. ‘4전 5기’의 신화가 이뤄질 수 있었던 배경이다. 이후 카라스키야는 1978년 황복수와의 경기를 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한 뒤 38년 만에 다시 한국을 찾았다. 당시에는 현역 복서였지만 이번에는 국회의원으로 한국에 왔다. 파나마 국회의 교통·통신위원장을 맡고 있는 그는 한국국제교류재단의 초청으로 방한했다. 그 사이 두 사람은 1999년 한 방송사의 프로그램 출연을 계기로 파나마에서 만났고 17년 만에 한국에서 재회했다. “어머니, 나 챔피언 먹었어”라는 일화와 관련된 내용도 재미있다. 홍수환은 1950년 서울 종로구 내수동에서 태어났다. 당시 스포츠인으로서는 만나기 쉽지 않은 서울 토박이다. 어렸을 때부터 골목대장 노릇을 도맡아 했지만 주먹이 세서 그랬던 건 아니다. 복싱에는 큰 관심도 없었다. 복싱은 아버지가 좋아했는데 홍수환이 중학교 2학년 때 갑자기 타계했다. 아버지의 손을 잡고 복싱경기장을 다녔던 홍수환은 그때부터 복싱 경기 포스터만 봐도 아버지 생각이 났다고 한다. 특별한 홍보 수단이 없던 시절, 서울 시내 동네 담벼락에는 영화, 프로 레슬링, 프로 복싱 광고 포스터들이 여기저기 붙어 있었다. 어머니의 반대가 있었지만 홍수환은 어렵게 글러브를 끼게 된다. 그러나 아마추어 대회에서도 이렇다 할 성적을 올리지 못한 그는 곧바로 프로로 전향했고 이 결정은 그의 복싱 인생에서 ‘신의 한 수’가 됐다. 그리고 홍수환이라는 이름 석 자를 복싱 팬은 물론 거의 모든 국민이 알게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1974년 7월 3일, 당시에는 멀고 먼 나라였던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라디오로 중계방송된 홍수환의 승전보는 많은 복싱 팬의 귀를 의심하게 했다. 홍수환이 그곳에서 타이틀매치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골수 복싱 팬을 빼고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홍수환은 그날 더반에서 열린 WBA 밴텀급 타이틀매치에서 챔피언 아놀드 테일러를 전원 일치 판정으로 누르고 한국인 복서로는 김기수에 이어 두 번째로 프로 복싱 챔피언이 됐다. 프로 복싱에서 원정 온 도전자가 판정승을 한다는 건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홍수환은 그럴 만한 경기력을 보여줬다. 경기 초반 아놀드 테일러를 3차례나 링에 쓰러뜨렸고 14회에서 승리에 쐐기를 박는 네 번째 다운을 빼앗았다. 세계 프로 복싱 관계자들은 아놀드 테일러가 마치 다른 복서처럼 경기를 했다고 평가했다. 거꾸로 보면 그만큼 홍수환이 뛰어난 복싱을 했다는 얘기다. 그런데 당시 홍수환은 현역 사병이었다. 그 무렵 서울 주변의 주요 부대에는 프로 복서 몇 명이 군 복무를 하면서 기량을 연마하고 있었다. 특별한 신분이 아니면 여권은 꿈도 못 꿨고 여권을 받아도 단수였던 시절 현역 군인이 외국에 가서 타이틀매치를 한다는 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김기수의 타이틀매치가 열린 장충체육관으로 직접 갔을 정도로 복싱을 좋아했다. 챔피언에게 줄 개런티(달러) 문제까지 해결한 박정희 대통령은 그 시절 프로 복서들에게는 최고의 후원자였다. 1974년 청년 홍수환이 ‘약속의 땅’인 더반까지 가는 길은 멀고도 멀었다. 서울 김포국제공항을 출발해 도쿄, 홍콩, 스리랑카, 요하네스버그 등을 거치는 험난한 여정이었다. 비행기를 여섯 번이나 갈아타야 했다. 그러나 홍수환은 이기겠다는 일념뿐이었고 결국 승리했다. 어떻게 경기를 치렀는지 제대로 되돌아볼 겨를도 없이 중계팀이 홍수환의 귀에 이어폰을 꽂았다. 방송국 스튜디오에 나와 있던 어머니가 “수환아!”라고 부르는 소리가 이어폰 너머로 들려왔다. 이때 홍수환의 한마디가 오랜 기간 회자됐다.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 그런데 홍수환 말보다 더 유명해진 말이 있다. “그래 수환아, 대한 국민 만세다!” 홍수환의 어머니는 ‘대한민국’이 아닌 ‘대한 국민’이라고 외쳤던 것이다.
- 2016-12-07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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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니어의 패션, 어디까지 신경 써야 할까
- 어느 날 남자 시니어들의 모임이 있었다. 입고 나온 옷이 공통점이 있었다. 모두들 잔잔한 격자무늬의 옷을 입고 있었다. 필자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웃었다. 그렇다. 남자 시니어들의 패션은 잔잔한 격자무늬가 많다. 거기다 침침한 무채색이다. 어딘지 고상하고 품위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유행도 타지 않는다. 그러나 그 패션이 “나는 시니어라오~” 하는 것 같아 쓴웃음이 나왔다. 눈에 띄게 무늬가 있는 옷은 소화해낼 자신이 없다. 그렇다고 무지단색의 옷은 너무 단조로워 보인다. 시니어들의 패션은 독자적으로 튀기보다는 다른 사람들과 비슷해야 한다는 것에 세뇌되어 있는 것 같다. 군대생활과 직장생활을 하면서 그렇게 훈련되어진 것이다. 그래서 이라는 책을 사서 들여다봤다. 이 분야의 여러 전문가들이 쓴 책이다. 먼저 패션이 무엇인가에 대한 설명이 나와 있다. 패션은 특정한 시기에 지배적으로 나타나는 스타일이라고 한다. 즉 유행을 말한다. 시기와 대중의 수용도 충족되어야 한다. 반면, 스타일은 어떤 특징을 가진 독특한 형태라고 말한다. 스커트를 미니, 미디, 롱스타일로 구분하는 것이 그렇다. 시니어들의 격자무늬는 클래식 스타일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베이직 아이템으로 세월이 흘러도 유행을 별로 타지 않는다. 물론 젊은이들도 격자무늬를 입는다. 유니클로 같은 경우는 베이직 아이템 위주라서 전 연령대의 고객을 상대한다. 이 책은 현대 패션의 흐름, 유명 패션 컬렉션과 디자이너, 소재, 체형과 스타일링, 피부관리, 헤어스타일링, 메이크업까지 커버한다. 패션이 단지 의상만 얘기하는 것은 아니라 이런 것들을 모두 포함한다는 것이다. 유명 패션 브랜드들에 대한 설명도 있다. 명품 대접을 받는 브랜드들이다. 파리, 런던, 밀라노, 뉴욕 컬렉션에 들어 있다. 우리는 도저히 범접하지 못할 분야 같지만 이들 대부분이 태동한 시기는 일부를 제외하면 20세기 중반이 많단다. 우리는 전쟁으로 폐허가 되어 먹고 살기가 바쁠 때였으므로 패션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런데 우리도 이제 세계 10대 경제 강국이 되었으므로 넘볼 때도 되었다. 더구나 섬유 왕국이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인프라도 튼튼하다. 20세기 이전만 해도 패션이라는 것이 없었다. 전통적으로 몸보다 정신세계를 더 높이 쳐주었다. 몸에 대해 신경을 쓰는 것을 경박스럽게까지 생각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패션에서 그 사람의 정체성까지 본다. 고유한 개성을 중심축으로 하여 유행과 상황에 맞게 적절한 치장을 하기 시작한 이유다. 패션은 매력적으로 보이게 할 뿐 아니라 능력도 있어 보이게 만드는 것이다. 물론 명품을 걸친다고 그 사람이 명품이 되는 것은 아니다. 자칫 패션의 희생자가 될 수 있다. 그 정도의 지출을 결심하려면 자신의 경제력과 자신에게 정말 어울리는지 심사숙고할 필요가 있다. 옷은 실용성과 쾌락이라는 두 가지 덧칠을 해준다. 실용성만 추구하다 보면 격자무늬만 입다가 한 세월 그렇게 간다. 쾌락을 추구하자니 실용성 때문에 구경으로 끝나기 일쑤다. 그러나 평생 밥만 먹고살 수는 없다. 가끔은 빵도 먹고 고기로 배를 채울 때도 있어야 사는 맛이 있다. 자신을 위해서 자기 만족감을 위해 패션에 관심을 가질 필요는 있다. 이발을 금방 하고 나왔을 때 남들은 몰라도 본인의 기분은 산뜻한 것이다. 패션도 그렇다.
- 2016-12-06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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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원식이 만난 귀촌(귀티나는 촌사람)] 참을 수 있는 고난, 참을 수 없는 흙 사랑
- 글 박원식 소설가 항구에 닻을 내린 배는 안전하다. 그러나 그러자고 배를 만든 게 아니다. 항해에 나선 배라야 배답다. 거친 파랑을 헤치고, 멀거나 새로운 항로를 개척하는 배는 인생을 닮았다. 모험이나 도발이 없는 삶이란 수족관처럼 진부하지 않던가. 도시에서 회사원으로 살았던 이기순(52)씨가 남편 이병철(57)씨의 손을 잡아끌어 시골로 들어간 건 모험적 항진이었다. 하지만 애석하다. 이기순씨의 시골살이는 암초에 걸려 허우적거린다. 대해를 표류 중이다. 취재 섭외를 위해 통화를 할 때, 이기순씨의 입에서 흘러나온 건 겸사(謙辭)였다. “남들은 그럴싸하게 바라보지만, 사실 속사정은 그게 아니에요. 아마도 저희 부부의 현실은 실패 사례로 더 어울릴 거예요. 그냥 차나 한 잔 드시고 간다는 기분으로 오세요.” 이기순씨는 오랫동안 암벽 등반을 즐겼다. 휴일이면 쪼르르 산으로 달려가 잔나비처럼 바위에 매달렸다. 그러다가 추락사고를 당해 온몸에 부상을 입었다. 이후 그녀는 지금까지 진통제를 달고 산다. 이 불행한 사고는 용케도 시골로 이주하는 계기가 되었다. 공기 좋은 시골에 살며 건강을 돋우자는 착상을 했던 거다. 그즈음 중소기업 상무이사였던 남편 이기철씨는 명퇴의 강박감에 시달리며 전전긍긍 활로를 모색하던 중이었다. 이 역시 도시 탈출의 배경이 되었다. 말하자면 부부가 의기투합했던 것. 까짓것, 우리 시골로 가서 새로 시작합시다! 이기순씨가 앞장서 선창을 했다. 그래그래, 그러세! 남편이 후렴을 읊으며 선선히 뒤를 받쳤다. 그게 4년 전의 일이었다지. 시골 살림을 결단하며 꿈꾸고 그린 게 많았을 게다. 우선은 볕이 잘 드는 남향 터를 잡아야 할 테고, 폼 나게 수려한 전원주택을 지어야 하고, 철따라 꽃이 피어 요요하게 속삭일 정원을 꾸며야 하며, 달빛과 별빛이 비단처럼 흘러내리는 밤에 부부 둘이 마주앉아 술잔을 기울일 만한 정자를 짓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의치 않았다. 생활이라는 게 흔히 돈이라는 요물의 농간에 휘둘리게 마련인데, 이들 부부도 자금이 넉넉하질 않아 두통을 앓았다. 그래서 소득을 흐벅지게 올릴 수 있는 방책을 찾았다. 그 결과로 시작한 게 오이농사였다. 이들이 사는 천안시 병천면은 오이의 최대 주산지. 재배 기술도, 유통 루트도 탄탄한 지역이다. 부부는 2000평에 달하는 농지에 오이를 재배하는 것으로 시골생활의 시동을 걸었다. 농토는 임대를 했다. 그 위에 설치된 시설 하우스는 매입을 했다. 거창한 시발이었다. ‘가브리엘 농장’이라는 팻말도 새겨 걸었다. 하지만 업무에 바쁜 행운의 여신은 그들에게 사소한 윙크조차 보내주질 않았다. 첫해는 물론 둘째 해, 셋째 해까지 내리 실패를 보고 말았다. 이기순씨의 얘기를 들어볼까. “농사라는 게 정말 어렵다는 걸 온몸으로 깨달았어요. 안간힘을 다해 노력해도 매년 결과는 참담했어요. 기술력 부족으로 생산량이 저조해 낭패를 보기도 했고, 풍작일 경우에도 가격폭락으로 적자가 크게 났어요. 칼자루를 쥔 중도매인들의 횡포에 당하기도 했고요. 갖고 있던 돈을 모두 까먹었고, 빚이 늘어 파산지경에 몰렸어요. 그래도 쌀독에 쌀은 떨어지진 않았어요(웃음). 예산 산골에서 농사를 지으시는 친정엄마가 쌀을 보내주셔서….” “상당한 수준의 기술을 요하는 게 원예농업이죠. 미리 사전 교육을 받진 않았나요? 남의 농장에서 일단 실력을 길렀다거나….” “별다른 준비 없이 무작정 뛰어들다시피 했어요. 일단 일을 저지르자, 뭐 잘되겠지, 하는 기분으로.” “저런! 환상적인 귀농이었던 거예요?” “다분히 그런 면이 있었죠. 귀촌이나 귀농을 하려는 분들에게 요즘 제가 강조하는 얘기가 있는데요, 낭만적인 생각으로 시골에 들어와서는 절대 안 된다는 거예요. 산이 좋다고 무작정 산골로 가고, 바다가 좋다고 해변으로 귀촌하는 식의 출발은 극히 위험해서죠. 사실 저희 부부가 단순한 환상으로 귀농을 할 만큼의 바보들은 아니에요. 충분치는 않았을망정 나름대로 사전 준비를 한다고 했지만, 그런데도 그게 농촌 현실에서 큰 도움이 되지 않았어요. 예상하지 못한 수많은 변수와 악재들이 들이닥치더라고요.” “차라리 초기에 발을 빼는 게 현명했을까?” “이미 호랑이 등에 올라탄 격이었기에 포기 같은 걸 생각할 겨를조차 없었어요. 내년엔 좋아지겠지, 차차 타산을 맞출 수 있겠지, 그런 희망으로 더욱 공을 들이고 땀을 쏟았어요. 농사에 어느 정도 물정이 트이면서 우환 중에도 희망이 솟구치곤 했죠. 내 손길을 통해 건강하게 잘 커가는 작물들을 바라보는 경이로움도 견딜 수 있는 힘이었어요. 폭염에 시들시들 말라가는 오이를 볼 때는, 마치 어린 자식이 병상에서 가쁜 숨을 내쉬는 것 같아 너무도 괴로웠지만, 그런 경험조차 농사에 애착을 갖게 하는 긍정적 체험이었어요. 정작 후회는 다른 문제에서 왔어요. 마을 원주민들과 어울리는 일이 참 힘들었거든요. 이른바 텃세라는 것 말예요. 이곳은 남편의 고향이지만 한동안 이방인 취급을 받았어요.” 마을 원주민들의 텃세를 견뎌내는 일이 농사보다 더 어려워 전통적으로 유목사회와 달리 농경사회 구성원들은 내 땅, 내 영토에 대한 질긴 집착을 가지고 살아왔다. 공동체 의식도 발달했다. 외지인들이 끼어드는 게 달가울 리 없다. 여기에서 ‘텃세’ 문제가 야기되지만, 토박이들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전원생활자들의 무신경하고 비사교적인 위세가 갈등을 일으키는 경우가 다반사다. 믿을 만한 소식통에 따르면, 무례를 범하지만 않으면 텃세에 걸려들 일이 없다는 게 아닌가? 그러나 이기순씨 내외가 겪은 텃세는 워낙 자심한 것이었던 것 같다. 그녀는 시골 인심이 예전과 다르다는 항간의 논평을 몸으로 직접 체험해 확인한 모양이다. 삶이라는 생존의 들판치고 어딘들 전장(戰場) 아닌 곳이 있을까. 코피 터지는 경쟁의 난리 블루스, 그게 세태이지 않던가. 이기순씨는 시골의 텃세라는 걸, 허공에 미만한 공기처럼, 세상살이에 당연히 붙어 다닐 수밖에 없는 기본 조건으로 치부하기로 한 것 같다. “차라리 마을을 떠날까, 그런 궁리를 할 만큼 눈에 보이지 않는 텃세에 부대꼈지만 그냥 감수하기로 했어요. 어차피 원주민들과 저희의 정서가 서로 다를 수밖에 없으니까요. 서로 살갑게 어울려 지내는 게 힘들다면,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가면 그만이라는 생각도 했어요. 그러자 마음이 편해지더라고요.” “흙이나 작물들은 텃세를 부리는 법이 없죠?” “저나 남편이나 농사라는 건 난생 처음 해보는 일이에요. 그렇지만 흙이 지닌 생명력과 식물들의 정직한 성장에 곧바로 매료됐어요. 아아, 흙 냄새, 작물들의 숨결은 또 얼마나 좋은지…. 해마다 농사에 연패를 해 실의에 빠지기도 했지만, 땅을 상대로 한 농사라는 게 신성한 직업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돼요.” “이상해요. 당신은 지난해 천안시가 선정한 우수농민이지만 사실은 곤경에 처했다는 거!” “농촌의 현실을 보면 겉과 속이 다른 경우가 흔해요. 수억대 소득을 올리는 농가들이 매스컴에 등장하지만, 매출과 실소득은 크게 다르죠. 저희도 연간 매출이 1억쯤 되지만 갖가지 투자비용을 제하면 오히려 적자가 나더라고요. 적자가 해마다 거듭되다 보니 빚이 눈덩이처럼 커지고, 빚을 내서 빚을 갚아야 하고, 이런 식의 악순환이 이어지는 거예요.” “어이하나?” “혹독한 공부 과정이었다고 생각해요. 좌절도 많았고, 눈물도 많이 흘렸지만, 어느덧 단련이 되고 나름의 내공도 생긴 거 같아요. 이젠 비로소 길이 보여요. 저비용 고효율 농업으로 가야 하는데, 대안이 보이고 있어요. 일단은 작물을 다양화할 예정이에요.” 기죽을 게 뭐람, 괜찮아, 괜찮다구! 이기순씨 내외는 오이 하우스 안에서 산다. 7평짜리 컨테이너에서 살림을 한다. 이 옹색한 정경을 목도한 친정엄마가 눈물을 흘리고, 친구들이 쯧쯧 혀를 차지만, 그녀는 이마저도 오히려 복되지 아니한가, 하는 투로 담담하다. 애당초 근사한 집을 짓기 위해 대지 150평을 장만해두었으나 빚잔치 통에 순간에 날아갔다. 그 바람에 컨테이너에서 살 수밖에 없었는데, 그녀는 이 회피할 수 없는 현실을 냉큼 받아들이기를 이미 오래전에 했다. 싱긋 웃는 그녀의 얘기를 들어보시라. “‘난 말이야, 2000평 정원에 7평짜리 원룸에 살아. 이 정도면 나쁜 건 아니지 않니?’ 제가 친구들에게 하는 말이 그래요. 남들에겐 철딱서니 없는 허세처럼 들릴 수도 있겠죠. 그러나 컨테이너에 산다고 해서 기죽을 게 뭐람. 괜찮아, 괜찮다구! 그렇게 제가 저에게 들려주며 용기를 잃지 않으려 노력해요. 지금의 형편에서 방바닥에 등 붙이고 부부가 함께 따뜻한 잠을 잘 수 있다는 것만도 큰 다행 아니겠어요?” “왜 아니겠어요? 참새는 옷 한 벌 입은 게 없이 나뭇가지 한 줌을 움켜쥐고 엄동의 밤을 무사히 지내죠. 최소한의 의식주만으로도 기꺼이 견딘다는 건 일종의 절경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도시에 살 땐 제가 돈을 펑펑 썼어요. 해외여행이며 쇼핑이며, 돈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이미 다 해봤어요. 그래서 지금의 어려운 형편에 정신까지 약해지진 않아요. 남편 역시 강인하고 똑똑한 사람이라 끄떡없어요. 돈 때문에 허둥지둥 고생하는 모습을 지켜보자면 안쓰럽지만, 우리 부지런히 뛰어 멋지게 농장을 살려내자고 등 두들겨 격려하죠. 남편은 원래 영어와 일본어를 잘하는데요, 요즘도 잠들기 전에 꼭 외국어 공부를 해요. 나중에 외국인들이 우리 농장에 견학 올 것을 대비해서죠.” “산에서 당한 사고로 온몸을 다쳤다 했죠? 지금은 매우 건강해보여요. 그건 귀농 덕분일까요?” “처음 이곳에 들어왔을 땐 걸음새조차 나사 풀린 바퀴처럼 휘청거렸어요. 그러다가 농사일에 매달리는 사이 건강이 크게 좋아졌죠. 농사를 노동이 아니라 운동으로 여긴 덕분이겠죠. 정신은 더욱 건강하게 깨어난 것 같아요. 경제 면에서는 시련의 연속이었지만 감성이나 정서는 더 밝고 풍부하게 성숙하는 기분? 그런 걸 느껴요. 하우스 안의 작물들, 바깥으로 펼쳐지는 자연 풍경이 자주 순수한 감정을 불러일으켜요. 저의 어릴 적 꿈은 문학이었답니다. 요즘도 좋은 글을 찾아 읽거나, 뭔가 느낌이 떠오르면 즉시 메모장을 꺼내 글을 써요. 주로 시골생활에 관한 단상이지만, 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시간이기도 하죠. 이 역시 귀농이 준 행복이라 여겨요. 이쯤이면 괜찮게 사는 거 아녜요(웃음)?” “사람이 농사를 통해 작물을 기르지만, 동시에 농사가 사람을 키우기도 하는 거예요?” “당연하지 않겠어요? 흔히들 돈에 사로잡혀 살지만, 남에게 돈 빌리지 않을 정도만 되면 잘사는 것일 테고, 더 중요한 문제는 자신이 선택한 일에 만족하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을 텐데, 저는 농사에 만족해요. 흙에 뜨거운 애정을 느껴요. 비록 아직은 고전하고 있지만, 비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크는 나무가 있겠어요?” 가시밭길을 거치지 않고 도달할 수 있는 꽃길이 있나? 파도를 타넘지 않고서 바다를 건널 수 있던가? 이기순이라는 이름의 선박은 암초를 만나 표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건 잠정적인 조짐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등의 저서가 있다.
- 2016-11-30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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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EO 인문학 포럼 디너 토크
- 상공회의소 CEO인문학포럼에 강사로 초대받아 갔다. 2008년 수료 후 8년째 이어지고 있는 현직 CEO들의 모임이다. 문학, 역사, 철학을 좋아하는 사장단 모임이다. 필자 주제는 ‘CEO와 댄스스포츠’였다. 그간 댄스스포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편견과 직접 몸으로 부딪혀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접근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토크쇼로 진행한다니 어디 한번 알아나 보자는 마음으로 가볍게 댄스스포츠를 알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강의 자료는 미리 유인물로 파일 제본하여 배포하고 내가 먼저 강의하고 질문과 답을 하는 형식이었다. 의외로 높은 관심과 열띤 질문이 있었다. 이미 외국 주재원 생활을 하면서 댄스의 필요성을 톡톡히 깨닫거나 크루즈 여행에서 춤을 못 춰서 낭패를 봤다는 사람도 있었다. 댄스스포츠는 인문학 부문과 굳이 연결지으라면 역사와 연결이 된다. 우산 우리나라 춤의 역사와 문화사를 보면 정비석의 자유부인, 박인수 사건, 7공자 사건 등 어두운 역사 때문에 춤에 편견을 가진 사람이 많다는 사실, 루이 14세부터 체계화되어 발전해온 발레의 역사, 궁정댄스의 문화, 유럽 귀족 사회에 댄스스포츠가 정착하게 된 문화사, 미술 등에 묘사 된 춤의 문화 등이 관심사가 될 것이다. 추가로 CEO들은 나이가 들었기 때문에 댄스스포츠와 시니어 건강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다. 건강을 위하여 운동을 했는데 오히려 건강을 상하는 경우도 있고 운동 자체가 시간도 많이 걸리고 돈도 많이 들어 거부감이 들 때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댄스스포츠는 시간이나 돈도 많이 안 들고 접근성이 좋아 쉽게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고 설명했다. 역시 가장 관심이 있어 한 부분이 댄스스포츠가 커플댄스라서 부득이하게 동반되는 스킨십에 관한 것이었다. 남녀가 손을 붙잡고 춤을 추다 보면 바람이 나거나 이상한 마음이 들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질문자는 쑥스러워하지만, 지극히 당연한 질문이다. 춤을 추기 위해 처음에 이성과 손을 맞잡는 홀드를 하게 되면 양자가 모두 긴장하게 된다. 그런 마음에서 혹시 상대방에게 실수라도 하지 않을까 조심하게 된다. 그 마당에 다른 이상한 생각할 겨를이 없다. 음악은 흐르고 스텝을 하기에도 바쁘니 그런 마음을 갖는다는 것 자체가 어렵다. 댄스스포츠는 밝은 조명 아래에서 배운다. 전면 거울이 한 명이상 있고 단체반에서는 서로 보는 눈이 많다. 그런 분위기에서 이상한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싶다. 이성과의 스킨십에서 댄스스포츠는 라틴댄스에서는 남자 왼손 여자 오른손으로 서로 움켜쥐면서 엄지만 여자 위로 살짝 올라간다. 모던댄스에서는 손바닥을 맞잡는다. 손바닥은 손 등과 민감성 면에서 떨어진다. 남자 오른 손이 여성의 등 뒤 견갑골을 잡지만 살짝 대고 있는 느낌이지 붙잡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스킨십이라고 하기에는 무리이다. 다리 사이에 다리가 들어가는 것도 야하지 않느냐는 질문이 있었다. 얼핏 그렇게 보이지만 남자 오른쪽 다리가 여자 다리 사이로 들어가면 여자는 왼발을 뒤로 빼므로 사이로 들어간다는 개념과 다르다. 오른쪽으로 회전하는 동작에서 주로 오른쪽 다리끼리는 축이 되어야 하므로 접촉이 있긴 하지만 남자의 민감한 부분과 반대 편 다리라서 참으로 과학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왼쪽으로 돌 때는 어떻게 되느냐는 질문이 당연히 나온다. 왼쪽으로 도는 리버스 턴은 여성을 먼저 보내고 남성이 뒤따라가는 형식이라 참으로 감탄스럽다. 무슨 스포츠를 하든 마음속에 바람피울 생각이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댄스스포츠라고해서 유난히 바람이 많이 나는 종목은 아니다. 오히려 조심하기 때문에 그런 일이 덜 일어날 수 있다. 바닥도 좁아서 그런 행동을 하는 사람은 댄스 계에 살아남을 수 없다고 답했다. 토크 디너 쇼는 반응이 아주 좋았다. 참석자들끼리 단체반을 구성하여 같이 배우라는 팁을 줬다. 내 댄스 토크 디너의 소식이 전해지자 부득이하게 결석했던 사람들도 다음 달에 앙코르 강연을 해달라는 요청이 들어 왔다.
- 2016-07-05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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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주 병법 PART1] 육아 일기 쓰는 할아버지 “내 자식 키울 땐 몰랐던 육아 재미 손자로 알게 됐어요”
- 이창식 번역가( 저자) 나이를 먹긴 먹었는지, 요즘 들어 내 인생을 자주 되돌아보게 됩니다. 어떻게 살아야 잘 살았다 할 수 있을까? 만년에 이르러서야 내 나름대로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너무 소박해서 성공적인 삶이라 주장하긴 낯간지러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1) 나보다 나은 삶을 사는 자식을 지켜보는 것 2)손주들과 즐겁게 노는 것 3) 조강지처가 곁을 지켜주는 것. 이 세 가지를 위해 오늘도 나는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나의 일상을 한 번 살펴보면 쉽게 수긍할 수 있을 거예요. 아침 6시 정각에 내 휴대폰 알람은 울립니다. “오 해피데이~” 노래 가사와는 달리 내 허리와 다리는 묵직합니다. 그래도 일어나야 해요. 꾸물대다간 딸과 사위의 출근에 지장이 있습니다. 우리 부부가 딸네 집으로 먼저 출근해야 그들도 출근할 수 있거든요. 여섯 살 외손자와 세 살배기 외손녀를 인수인계해야 하니까. 늙은 몸을 일으켜 거실로 나갑니다. 냉장고에서 계란 두 개를 꺼내 냄비에 담고 물을 부어 가스레인지 위에 올립니다. 10분쯤 끓여야 익죠. 베란다 광에서 고구마를 꺼내 깨끗이 씻은 뒤 그릇에 담아 전자레인지에 넣고 돌립니다. 6분쯤 돌리면 익습니다. 계란과 고구마가 익는 동안 파프리카, 비트, 사과, 토마토를 꺼내어 깨끗이 씻은 뒤 칼로 잘라 커다란 접시에 담아냅니다. 한 입에 쏙쏙 들어갈 크기로 말이죠. 아침마다 하는 일이라 손길이 제비처럼 날렵합니다. 커다란 컵 두 개에 우유를 반쯤 따르고 미숫가루를 탑니다. 아내가 특별 제조한 종합 영양식이죠. 현미, 검정콩, 수수, 귀리, 보리, 율무, 약콩 등으로 만들었습니다. 티스푼으로 다섯 술씩 넣고 잘 저은 뒤 식탁에 올려놓고 익은 계란과 고구마를 접시에 담아내면 아침식사 준비 끝입니다. 샤워하고 화장을 끝낸 아내가 때 맞춰 부엌으로 나옵니다. 여자는 젊으나 늙으나 준비하는 시간이 오래 걸려요. 남자는 젊으나 늙으나 그런 여자를 기다리고 달래야 할 운명을 타고난 것 같습니다. 아침 식사 준비는 자연히 내 차지가 될 수밖에요. 즐거워야 할 아침 식사지만 새벽같이 일어나 무슨 입맛이 나겠어요? 그래도 먹어야 또 하루를 버틸 수 있다는 생각에 아내와 나는 그냥 욱여넣다시피 합니다. 식사하면서 행복한 표정을 지었던 적이 언제였던가 싶습니다. 느긋하게 커피 한 잔 마실 겨를도 없이 집을 나섭니다. 평생 운전할 일이 없을 줄 알았던 나는 요즘 마누라 잔소리를 보슬비처럼 맞으며 운전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잔소리가 심할 땐 더러 저항도 해보지만, 대개는 지당한 말씀인지라 내 목소리엔 힘이 실리지 않습니다. 분당 딸 집에 도착하면 7시 반. 손자 손녀는 이미 깨어나 뛰놀고 있습니다. 재영이는 유치원 2년생, 희영이는 어린이집 1년생이에요. 8시쯤 딸과 사위가 출근하고 나면 아이들은 우리 책임입니다. 나는 부엌에서 거실로, 안방으로 도망다니는 손자 녀석 쫓아다니며 아침밥을 먹이고, 아내도 똑같이 손녀를 따라다니며 먹입니다. 식사 끝나면 손자 세수시키고 유치원복 입혀 셔틀버스에 태우는 일은 내 책임이고, 손녀를 어린이집에 데려다 주는 일은 아내 몫이죠. 아내는 오후 4시에 어린이집에서 손녀를 데려오고, 나는 오후 5시쯤 유치원에서 손자를 데려옵니다. 그때까지가 우리들의 자유시간인 셈이죠. 나는 CGV에서 영화를 감상하거나 거실 소파에 앉아 미국 메이저리그 야구를 보며 휴식을 취합니다. 아내는 근처 수영장에서 수영을 하며 쉽니다. 유치원에서 외손자 녀석을 데리고 돌아오는 시간은 항상 즐겁습니다. 아파트 단지 안으로 이어진 산책로를 따라 걸으며 녀석은 쉴새없이 지껄입니다. ‘하찌’는 무슨 얘기든 잘 들어준다고 생각하거든요. 우리는 동요를 합창하기도 하고, 보도블록을 따라 깡총깡총 뛰며 가위 바위 보 놀이도 합니다. 미리 챙겨 간 과자와 우유를 녀석에게 먹이는 것도 잊어선 안 되죠. 녀석이 지껄이는 얘기는 대체로 두서가 없습니다. 줄거리도 없고 내용도 없을 때가 더 많죠. 그래도 나는 열심히 들어주며 맞장구를 치고 가끔 추임새를 넣기도 합니다. 어쩌다 기막힌 얘기를 할 때도 있거든요. 같은 반에 있는 시아란 여자아이와 사랑에 빠진 얘기 같은 것 말이죠. 언젠가부터 녀석은 “재영이는 시아를 사랑해!”를 입에 달고 살았어요. 유치원에서 시아랑 결혼까지 했다는 겁니다. 아마 ‘웨딩게임’ 같은 걸 했나봐요. 시아와 결혼한 아이가 저 말고도 둘이나 더 있었다니까요. 또래 중에는 여자보다 남자가 월등 더 많거든요. “결혼하려면 프로포즈를 해야 하는데?”라고 내가 말했더니, “프로포즈가 뭐야?” 하고 되묻습니다. 내가 보도블록에 한 쪽 무릎을 탁 꿇고 두 손을 앞으로 내밀며, “나와 결혼해 주세요라며 여자한테 꽃다발을 바치는 거야”라고 했더니 녀석은 대뜸, “그렇게 했어”라고 대답했습니다. “정말 그랬단 말이야?” 하도 어이가 없어 다시 물었더니 녀석은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며 말했어요. “응, 그렇게 하고 결혼했어.” 껄껄 웃을 수밖에 없었죠. “엄마하고 시아하고, 누굴 더 사랑해?” 하고 물었더니, 녀석의 표정이 갑자기 심각해졌습니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엄마.” 라고 조그맣게 대답했어요. 아직 어린애거든요. 그런데 그 다음 말이 기가 막혔습니다. “근데 시아한텐 그 말 하면 안 돼, 알았지?” 하는 겁니다. “알았어.” 나는 고개까지 끄덕이며 대답할 수밖에 없었어요. 녀석을 안심시켜야 했으니까요. 유치원에서 돌아오면 아내는 이미 어린이집에서 손녀를 데려와 목욕시키고 있습니다. 손자 녀석 샤워는 내 책임이죠. 바로 이 임무를 수행하다가 내 허릿병이 도졌는데, 녀석 몸무게가 어느새 부쩍 는 걸 간과하고 덥석 안았던 탓이었죠. 허리에서 우지끈 소리가 나는 것 같았습니다. 벌써 열흘째 한방치료를 받고 있는데도 아직 허리가 묵직하고 왼쪽 다리가 저리답니다. 사위와 딸이 귀가하는 8시까지는 하루 중 가장 힘들고 길게 느껴지는 시간입니다.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는 손자 손녀 따라다니며 저녁밥 챙겨 먹이고, 우리도 대충 한술 떠야 합니다. 집에 가면 밤 9시가 넘어 따로 차려 먹을 시간이 없거든요. 엄마 아빠 기다리는 아이들도 지쳐 짜증을 부리거나 칭얼대기 일쑤죠. 녀석들을 달래야 하는 우리 노부부도 진이 빠질 대로 빠지고요. 그래도 살살 달래며 같이 놀아줄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손녀가 울음을 터트리면 늙고 지친 아내가 둘러업어야 하고, 그러면 힘이 몇 배로 더 드니까요. 아이들과 즐겁게 노는 일은 그래서 매우 중요합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날마다 즐겁게 놀아야 한다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죠. 고도의 내공이 필요합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나 자신이 바로 ‘아주 재미있는 아이’가 되어야 합니다. 손자 손녀의 친구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죠. 아이들의 머리에 ‘하찌=재미있는 친구’로 새겨져야만 합니다. 눈높이뿐만 아니라, 마음 폭도 같아져야만 해요. 그러려면 실력을 쌓아야 하겠죠? 웬만한 동요는 다 부를 줄 알아야 하고, 무용도 곁들일 수 있으면 금상첨화입니다. 동요와 무용에는 우는 아이도 금방 달랠 수 있는 힘이 있거든요. 심하게 울던 아이도 하찌가 신나게 동요를 부르며 무용을 하면 뚝 그치고 빠져들 때가 많아요. 상황 연출력도 필요합니다. 울거나 투정부리는 녀석을 한순간에 다른 세계로 끌고 들어가는 기술 말이죠. 말로 설명하기 어려우니 한두 가지 사례를 들어보죠. 세 살배기 희영이가 악을 쓰며 웁니다. 아직 말을 할 줄 모르니 이유를 알 수 없어요. 할매가 아무리 달래도 소용없습니다. 또 둘러업어야 할 판이에요. 이럴 때 분위기를 바꾸어 버리는 게 상황 연출입니다. 옆에 앉은 재영이한테 대뜸 이러는 거죠. “재영아, 코끼리 어디 갔지? 방금 여기 있었는데. 소파 밑으로 들어갔나? 돼지는 어디 있지?” 그리곤 소파 아래를 들여다보며 계속 떠들어댑니다. 코끼리나 돼지나 염소 등은 희영이가 갖고 놀던 장난감이거든요. 이쯤 되면 희영이도 울음을 그치고 함께 소파 밑을 들여다보기 시작합니다. 나는 한참 찾는 척하다가 장난감들을 슬쩍 꺼내며 다음 상황을 연출하기 시작하죠. 동요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오리는 꽥꽥, 오리는 꽥꽥, 염소는 음메에, 염소는 음메에, 돼지는 꿀꿀, 돼지는 꿀꿀, 소는 음무, 소는 음무.” 상황 연출은 자기가 울고 있었다는 사실을 아이가 완전히 잊어버릴 때까지 충분히 오래 끌어야 합니다. 다른 세계로 완전히 밀어 넣어야 하니까요. 여섯 살배기 손자 녀석이 울 때는 그보다 정교하고 급박한 연출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소도구도 달라야 합니다. 녀석이 즐겨 갖고 노는 장남감들을 총동원하는 거죠. “재영아, 덤프트럭이 버스와 충돌했어! 트럭이 넘어지고, 버스도 뒤집히고, 굴삭기와 경운기도 쓰러졌네! 어쩜 좋아? 사람들이 많이 다쳤을 거야! 그러니까 운전할 땐 조심해야 한다고 그랬잖아. 하찌가 그랬어, 안 그랬어? 빨리 구급차를 불러. 삐뽀! 삐뽀! 경찰차도 불러야지. 애앵! 애앵!” 상황은 새로운 내용을 보태며 계속 발전시켜 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최대한 진지하고 박진감 넘치게 끌고 나가야죠. 아이가 울고 있던 사실마저 까맣게 잊고 “알았어. 지금 전화할게” 하고 끼어들 때까지. 그래서 마침내 하찌와 함께 즐거운 게임을 벌일 때까지. 귀가한 사위와 딸에게 아이들을 인계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9시 뉴스가 방영되고 있습니다. TV를 보며 대걸레로 방바닥 먼지만 대충 훔치고 곧바로 잠자리에 들죠. 6시에 울릴 휴대폰을 머리맡에 놓아두고요. 후유,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나? 주말 휴식이 월요일부터 기다려집니다. 그래도 잠자리에 누우면 재영이와 희영이의 웃는 얼굴이 맨먼저 떠오릅니다. “고것들 참!”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옵니다. 녀석들 아니면 도대체 웃을 일이 없을 것 같습니다. 할매·하찌 기운을 쏙 빼놓지만 동시에 수많은 웃음을 선사하니 참으로 신비한 존재들입니다. 내년이면 희영이도 네 살이 되니 좀 수월해지겠지, 생각하며 안 오는 잠을 억지로 청합니다. 당신의 삶은 어떠했나요? 지금은 어떤가요? 그만하면 성공한 인생이라 생각하나요? 사람마다 판단 기준이 다르겠죠. 신입사원 시절 저는 가전회사 판촉부에서 근무했습니다. 10년을 채우고 사직한 뒤엔 영미 추리소설을 번역하며 먹고살았죠. 칠순을 코앞에 둔 지금 되돌아보니, 냉장고 세탁기 팔려고 뛰던 그 시절이나 남들이 쓴 책 번역하느라 골머리 앓던 그 시절이 다 부질없게 느껴집니다. 내게 남은 건 뭔가 곰곰이 생각해보니 저절로 이런 결론에 도달하게 되더군요. 1. 나보다 나은 삶을 사는 자식을 지켜보고 있다. 2. 손주들과 날마다 즐겁게 놀고 있다. 3. 조강지처가 내 곁을 지켜주고 있다. 자, 이래도 내가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십니까?
- 2016-06-27 1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