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아침을 깨우는 기분 좋은 음악과 소리
- 매일 아침 일어나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무엇인가? 비몽사몽간에 리모컨을 집어 들고 TV부터 켜지는 않는가? 하지만 몸이 늘어지면서 오히려 더 피로함을 느낀 경험이 있을 것이다. 이젠 TV 시청 대신 다른 아침 습관을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 이른 아침은 황금 같은 시간이다.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고요한 시간을 오롯이 자신만을 위해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귀한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몰라 그저 흘려보내고만 있다면, 조용히 눈을 감고 아침을 여는 기분 좋은 음악과 소리에 귀 기울여보자. 사운드 힐링, 고요함 속에서 눈뜨기 현대인들은 각종 소음에 노출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기술 발전에 따른 강렬하고 화려한 자극들로 인해 피로가 누적되어 있다. 이럴 때 잠시라도 자연의 소리를 들으면 알파파가 증가돼 몸과 마음이 조화를 이루고 집중력이 강화된다. 또 ‘행복 호르몬’으로 불리는 뇌의 신경전달물질 ‘세로토닌’ 분비가 촉진돼 우울증, 식욕 부진 등을 방지할 수 있다. 자연의 소리가 신체에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사실은 과학적으로도 입증됐다. 영국 브라이튼앤서섹스 의과대학 연구팀이 실험 참가자들에게 다양한 소리를 들려준 후 뇌의 변화와 과제 수행 능력을 관찰한 결과, 인공적인 소리보다 자연의 소리를 들었을 때 몸과 마음이 이완되는 변화를 보인 것이다. 특히 스트레스 지수가 높은 사람일수록 긍정적 효과가 높았는데 새소리, 물소리, 바람소리 등 자연이 들려주는 소리를 단 몇 분 들었는데도 몸에 변화가 나타났다. 부드러운 선율의 음악도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을 감소시켜준다는 실험 결과가 있다. 고요한 아침, 자연의 소리와 잔잔한 음악을 들으며 명상에 잠겨보고, 차분히 하루를 계획해보자. 이렇게 아침 시간을 활용한다면 기분 좋게 하루를 시작할 수 있다. 특히 청각 명상은 청력이 약해지는 것을 늦춰주기 때문에 시니어에게 더 효과적이다. 편한 자세로 앉아 범종이나 시계 등이 내는 규칙적인 소리나 자연의 소리를 들으면서 불필요한 생각을 멈추는 게 청각 명상법이다. 마음이 편안해지는 소리는 유튜브(YouTube)에서 ‘자연 소리’, ‘ASMR’을 키워드로 검색하면 쉽게 찾아 들을 수 있다. 네이버가 운영하는 ‘오디오클립’도 오디오북, 팟캐스트, 자연 ASMR 등 다양한 소리 콘텐츠를 제공한다. 앱을 설치하면 더 간편하게 활용할 수 있다. 하루의 컨디션을 결정하는 아침, 이제는 좋은 소리와 함께 깨어나보자. 아침이 기다려지는 음악 서비스도 있다. 매주 목요일 아침, 새로운 음악과 이야기를 배달해주는 ‘오디티 스테이션’. 음악 편지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옛 대중가요와 팝송부터 밴드 음악, 클래식, 최신 대중가요까지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소개한다. 음악 편지를 받고 싶다면 ‘오디티 스테이션’ 홈페이지에 접속한 후 이메일만 작성하면 된다. 홈페이지에서는 지난 음악 편지도 보고 노래도 들을 수 있다. 네이버 ‘오디오클립’ 추천 채널 월간 소리 풍경 우리 고유의 소리를 찾아 전국 각지를 여행하는 사운드 매거진이다. 소리와 함께 직접 촬영한 사진과 글을 통해 보고 듣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강릉 오죽헌의 대나무 숲 바람소리, 봄나물 뜯는 소리, 시원한 계곡물 소리 등 듣는 것만으로도 이른 아침 숲속에서 상쾌한 공기를 들이마시는 듯한 느낌이 든다. 현재 구독자가 8000명에 달하며, 매주 월요일 그달의 주제에 맞는 자연의 소리, 우리 고유의 소리를 들려준다. [뮤직테라피] 소리에 음악을 입히다 스튜디오 톤즈(STUDIO TONES)가 운영하는 채널로 말 그대로 소리에 음악을 입힌 색다른 음악을 연재한다. 세수하는 소리, 밥 짓는 소리, 비·바람·파도 소리 등 일상과 자연의 소리에 멜로디를 입혀 매주 목요일에 한 곡씩 연재한다. 편안하고 감성적인 선율에 매료되어 6000명에 달하는 사람이 구독 중이다. 자연(1, 2편), 일상(1, 2편), 아이, 반려동물, 비, 시간 등 총 8개 시리즈로 나뉜 100여 편의 음악을 감상할 수 있다. 매일 아침 듣고 싶은 소리가 있는가 하면 정말 피하고 싶은 소리도 있다. 바로 알람 소리다. 아침형 인간이 되어보리라 매번 다짐하지만, 알람이 울릴 때면 이불 속으로 더 파고들곤 한다. 아침에 몸을 일으키는 게 유난히 힘든 사람들을 위해 색다른 알람 앱을 소개한다. 좋은 아침입니다 수면의 질을 높여주는 스마트 알람 상쾌한 아침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잠을 잘 자는 것이 중요하다. 알람 앱 ‘좋은 아침입니다’는 알람 기능은 물론 수면 패턴까지 분석해준다. 잠자고 있는 동안에도 매트리스의 진동을 감지해 깨어 있는 시간과 선잠, 깊은 잠 등을 기록한다. 자고 일어나면 수면 리포트로 잘 잤는지 확인할 수 있다. 수면 목표도 설정할 수 있고, 축적된 정보는 한 주 단위로 통계가 나온다. ‘알람 범위’ 설정 기능도 있어 최적의 시간에 기상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기상 시간을 오전 6시에 맞춘 후 알람 범위를 10분으로 설정하면 5시 50분에서 6시 사이에 알람이 울린다. 숙면에 도움을 주는 모닥불 타는 소리 등도 들려준다. 잘 잤니? 매일 새로운 음악을 들려주는 뮤직 알람 매일 같은 알람 소리가 싫증나거나, 이미 익숙해져버린 알람 음악 때문에 기상하기 어려운 사람들에게 안성맞춤인 앱이 있다. 바로 알람 앱 ‘잘잤니?’이다. 사용 방법은 간단하다. 동그란 판을 LP판처럼 돌려서 알람이 울릴 시간과 요일을 설정하면 매일 다른 알람 음악을 들을 수 있다. 지난 알람 음악은 화면을 왼쪽으로 넘겨 정보를 확인할 수 있고 다시 들을 수도 있다. 잠에서 깨며 다양한 음악도 들을 수 있어 일거양득이다.
- 2019-04-18 13:50
-
- ‘미성 오솔길’과 정드는 시간
- 관악산 위로 먼동이 터오면 나는 창문을 열고 아침을 맞는다. 그리고 공기가 맑은지 살핀다. 해가 늦게 뜨는 동절기에는 ‘반딧불 손전등’을 손목에 차고 나만의 아침 산책을 위해 ‘미성 오솔길’로 나선다. 아침 일찍 일어나는 습관은 사회생활을 할 때부터 시작됐다. 젊을 때는 더러 늦잠이 달콤했지만 중년이 되면서부터 ‘5시 기상’을 목표로 삼았다. 그런데 실천이 문제였다. 그 시간에 일어나는 ‘재미’가 있어야 했다. 다행히 그 무렵 지금 사는 곳으로 이사를 왔다. 35년 전에 숲속에 지어진 아파트에 입주하는 행운을 얻게 된 것이다. 미성 오솔길은 아파트 정문에서 바로 이어진다. 여느 산책로와 달리, 인공이 거의 가해지지 않은 ‘흙길’이다. 체력과 시간에 맞춰 운동시간을 조절할 수 있는 보기 드문 산책로다. 좁다란 오솔길로 들어서면 산책객들과 만난다. 애완견에게 헉헉거리며 끌려가는 사람의 얼굴에는 땀방울이 솟는다. 서너 명의 한 무리는 운동기구 앞에서 이야기꽃을 피운다. 목소리 큰 사람이 일장 연설을 하면 나머지는 고개를 끄덕인다. 산책을 할 때마다 자주 보는 얼굴들이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건강하세요!” 하며 즐겁게 인사를 나눈다. 좀 더 걸으면 체육공원에 이른다. 경쾌한 음악소리에 맞춰 에어로빅을 하고 배드민턴을 치는 사람들이 보인다. 만수천은 물맛이 좋고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특급 약수터다. 길은 곧 선우공원으로 연결된다. 조그만 계곡에 생태연못이 꾸며져 있다. 어린아이들과 가족놀이하기 좋은 곳이다. 부채꼴 모양의 능선은 마치 하얀 실타래를 풀어놓은 모양새를 한 채 ‘원시 오솔길’로 길게 이어진다. 서울 시내에 이런 길이 또 있을까? 여기까지가 왕복 한 시간여 거리다. 아침 산책 시간으로 적당하다. 시간 여유가 있어 더 걷고 싶으면 왕복 두어 시간 걸리는 호암산 자락길까지 가면 된다. 삼림욕을 즐길 수 있는 호암산 잣나무 삼림욕장이 호암사 뒤편으로 있다. 여름철에는 하루살이, 모기 등 해충이 없어 휴식하기에 편하고, 그늘이 커서 자리 깔고 쉬어가기 좋은 곳이다. 잣나무 잎이 두툼하게 쌓이는 이곳은 눈이 오는 겨울에도 따뜻해 추위를 느낄 수 없다. 관악구 ‘미성 오솔길’에 정들어 산 지 35년이 넘었다. 하루 만보걷기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아침 산책을 마친 후에는 샤워를 한다. 나머지 시간에는 손주도 돌보고, 재능기부 자원봉사도 한다. 창작활동도 빼놓지 않는다.
- 2019-04-02 09:34
-
- 차가운 절벽 끝에서 기어이 견디는 저 겨울나무
- 맵찬 추위 때문이겠지. 길 위에 인적이 끊겼다. 산과 산 사이 길에 적막감만 흥건하다. 풍광은 곳곳마다 수려해 미학의 경연을 펼친다. 티 없이 미끈한 기암과 정교한 단애, 백색 비단을 치렁치렁 휘감은 양 하얗게 얼어붙은 냇물, 거기에 나목들이 수묵을 입히고 솔숲이 초록을 칠하니 가히 가작이다. 저마다 자신들의 살과 뼈를 재료로 써 화폭을 채운 게 아닌가. 길을 덮은 포장재와 몇몇 상점들이 이물감을 자아내지만 그건 시야에서 걷어내면 그만일 일. 발길에 탄력이 붙는다. 화양구곡(華陽九曲)은 화양동 일대에 전개되는 아홉 군데 승경을 일컫는다. ‘곡(曲)’이란 일테면 자연 속의 정원이다. 원본은 중국의 무이구곡(武夷九曲). 경영주는 주자(朱子). 주자는 무이구곡을 노닐며 성리학적 유토피아를 구가했다. 이 주자학파의 충실한 당원이었던 조선의 거유(巨儒)들도 무이구곡을 본 삼아 흔히들 ‘곡’을 꾸렸다. 그들은 벼슬에서 물러난 뒤엔 청산에 은거해 무욕의 노년을 누리는 게 선비의 도리라 여겼다. 때가 되면 낙향을 했다. 감흥이 돋는 경승지에 ‘곡’을 조성해 공부와 음풍영월을 병행했다. 화양구곡의 경영주는 우암 송시열이다. 고요한 길을 걷자니 안심이랄까, 허심이랄까, 모처럼 평온해진 마음을 자각한다. 헐벗은 겨울나무 숲을 바라보자니 짠하여 애틋하나 알고 보면 정말 짠한 건 나의 진상임을 자각한다. 맥락 없이 엄습하는 자괴감이 싫지만, 그러나 이 순간 나는 나로 돌아온 셈이다. 헌걸찬 바위벼랑에 굳세게 선 소나무의 내심엔 무엇이 들었을까? 메마른 절벽 끝에서 기어이 견디는 일, 살아남는 일. 미친 듯이 두 눈을 부릅뜨고 폭풍 속을 항해하는 어부의 위험이 이보다 더할까. 초록은 어디서 건져오는가? 차고 흐린 겨울 하오에 눈부신 초록을 뿜는 솔이 경이롭다. 저 요동치는 초록을 보라. 잎잎이 낱낱이 기적이지 아니한가. 초록이라곤 미세한 기미조차 없는 이슬과 빛과 바람을 움켜쥐고서 소나무는 초록을 토한다. 지수화풍을 능히 거머쥐는 실력과 전략이 아니고서는 엄두도 낼 수 없는 창의가 아닐 수 없다. 바위틈에 틀어박은 실낱같은 잔뿌리 하나하나마다 용을 쓰지 않고서는 도저히 이룰 수 없는 생존이니 찬연하다. 계곡을 건너 숲으로 스며드는 뱁새 한 마리는 또 어떠한가. 놈은 옷을 지어 입을 방법이 없으니 그냥 맨몸으로 산다. 태어날 때 걸치고 온 한 벌 털옷만으로 혹한을 견딘다. 단지 나뭇가지 하나나 마른 덤불을 집삼아 겨울밤을 보내며, 새벽이면 부리나케 깨어 명랑하고도 낙천적인 노래를 부른다. 세찬 날개를 펼쳐 거침없이 허공을 비상한다. 산야의 얼음 같은 겨울을 사는 뱁새의 생의(生意)에서 또 느낀다. 그 완벽한 자립을. 그 고독한 자유를. 화양구곡의 절승은 아무래도 암서재(巖棲齋) 일원이다. 암서재는 냇가 숲속에 세워진 아담한 조선 정자. 기묘하게 늘어서거나 솟거나 겹친 바윗장 틈서리에 들어앉은 우암의 서실이다. 우암이 세상의 풍파와 겨루었던 항해일지는 영광과 파란의 이중주로 점철되었다. 노론(老論)의 우두머리로 정쟁의 회오리 속에서 살았던 그는 결국은 임금의 사약을 받고 세상을 떠났다. 우암의 사후 이곳 화양동엔 그를 사액한 화양서원이 들어섰다. 이때부터 화양동은 정치적 불나방들의 소굴로 둔갑했으며 각축과 폐단과 착취가 극에 달하게 되었다. 오죽했으면 매천 황현이 화양서원의 건달들을 일컬어 ‘서민들의 가죽을 뚫고 골수를 빨아먹는 남방의 좀’이라 했을까. 대원군조차 화양동을 말을 탄 채 진입했다고 해서 유생들에게 패대기를 당했다. 오늘따라 미세먼지가 짙다. 유목민처럼, 난민처럼 허공을 떠도는 저 누런 혼돈. 산림에 들어와서조차 미세먼지를 들이마셔야 하다니. 황당무계한 현실이지만 자연을 거스른 문명의 야만이 불러들인 필연이다. 알 수 없는, 알 수 없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 저 카오스. 탐방 Tip 널리 알려진 관광지구이지만 사람 드문 겨울엔 호젓하게 걸을 만하다. 숲과 기암과 물의 하모니를. 눈 내리면 사진가들이 일부러 찾아든다. 우암의 유적지로는 암서재, 화양서원, 만동묘 등이 있다.
- 2019-02-07 08:30
-
- 처음 가본 나라 ‘네팔’ 이야기
- 히말라야 트레킹 때문에 네팔이라는 나라에 처음 갔다. 네팔은 한반도의 약 70% 정도 면적이며 인구는 대략 3000만 명이다. 인도, 중국, 부탄, 방글라데시에 둘러싸여 있는 내륙 국가다. 1인당 GDP가 2011년 기준으로 835달러에 불과한 빈국이기도 하다. 한국에 약 5만 명의 네팔 근로자가 와 있으며 한 해에 1만여 명이 입국을 대기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경쟁률이 8대 1이나 되어 한국행도 쉽지 않다고 했다. 전 인구의 90%가 농업에 종사한다. 종교는 대부분 힌두교를 믿는다. 세계 10대 고봉 가운데 8개를 보유한 산악 국가라 등산을 좋아하는 한국인이 2017년 기준 약 5000명이나 다녀갔다고 한다. 트레킹 비수기인 지금도 오가는 사람들이 온통 한국 사람이다. 이번 히말라야 트레킹 프로그램에는 네팔 시내 관광도 있었다.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를 찍고 3일간 하산한 후에 포카라 시와 수도 카트만두 시내를 관광했다. 포카라 시는 그나마 좀 나았으나 카트만두 시내는 그야말로 먼지구덩이 속 같았다. 1월이 건기라서 더 그랬겠지만 마치 밀가루 같은 흙이 비산하며 먼지를 일으켰다. 서울도 미세먼지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는데, 카트만두는 마스크 없이는 돌아다니지 못할 정도였다. 서울은 먼지를 쓸어내는 살수차가 다녀서 깨끗한 편이다. 그러나 카트만두는 엉망이다. 2015년 7.8도의 강진이 지나간 후 도시도 많이 파손되어 있었다. 세계문화유산들도 거의 절반이 이때 파괴되어 복구 중이다. 네팔이 행복지수 세계 3위 국가라는 사실이 내 관심을 끌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물었다. 현지 가이드는 한국에서 10년간 일하면서 한국과 네팔을 비교해봤다고 했다. 네팔 사람들은 욕심이 없다고 했다. 너무 열심히 일하는 한국 사람들에 비해 네팔 사람들은 얘기하는 것을 좋아해서 일의 능률이 안 오른다고 덧붙였다. 우리 일행은 산촌의 한 학교에 컴퓨터 12대를 기증했다. 50년 역사에 컴퓨터 구경은 처음이라고 했다. 시장과 내외빈이 많이 참석했다. 그런데 공연을 포함한 축사가 무려 3시간 동안 이어졌다. 현지 가이드는 5분이면 충분할 축사를 각자 20~30분씩이나 하는 현장 사례를 들어 네팔인을 설명했다. 네팔 사람들은 순박한 편이다. 한국에 5만 명이나 와 있는데도 큰 문제 없이 조용히 일하고 있어서 우리가 잘 몰랐던 것이다. 카트만두에서 세계문화유산 중 하나인 박타푸르를 방문했다. 사원 및 여러 유적들이 있는데 이곳도 지진으로 파손되어 복구 중이었다. 좁은 골목에는 오토바이와 트랙터가 복잡하게 오가서 정신이 없었다. 시내 몇 곳을 더 다녔는데 세계문화유산이라는 것이 모두 사원이었다. 네팔인들이 이마 한가운데 그리는 빨간 점은 ‘제3의 눈’이라 한다. 부처님이 보고 있다는 의미라 했다. 누구나 그렇게 신을 믿고 사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티베트 난민촌을 돌아보고 중국이 무자비하게 티베트를 공격한 역사로 볼 때 네팔도 중국의 눈치를 많이 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마음만 먹으면 네팔도 중국이 공격할 수 있는 것이다. 인도도 이웃 대국이라 눈치를 본단다. 오일 등의 공산품을 인도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르카’라는 네팔 용병은 용감하기로 유명하다. 시내에서 구르카 용병들이 사용하는 칼을 파는 가게가 많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구르카다’라는 서양 작가의 소개 글과 함께 구르카의 다양한 모습들을 보여준다. 이들 용병들이 해외에서 번 돈으로 히말라야의 계곡에 여러 개의 다리를 만들어 기증했다는 표석도 붙어 있다. 네팔은 10년 전까지만 해도 왕정국가였다. 지금은 민주공화국이다. 반군이 10년간 산에 숨어 살며 내전을 일으키기도 했다. 워낙 고산이 많아 호랑이, 곰 등 맹수가 있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산속에 숨어 살던 반군들 덕분에 맹수가 많이 사라졌다고 한다. 히말라야 눈이 녹은 물은 당연히 1급수라 생각하고 마시고 싶었으나 풍토병이 우려되니 마시지 말라고 했다. 수력발전으로 전기를 만들고 있지만 전력 사정이 열악하다. 숙박업소인 롯지에서 휴대폰 충전료로 2000원 정도를 받고 있을 정도다.
- 2019-01-24 09:01
-
- 네팔 히말라야 100km 트레킹 완주
- 1월 6일부터 20일까지 네팔의 히말라야 트레킹을 다녀왔다. 전남불교환경연대가 주관하고 청소년 13명이 포함된 총 27명 팀에 나도 합류한 것이다. 목표는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등정이었다. 8박 9일간의 일정에 네팔 수도 카트만두와 제2의 도시 포카라 관광도 포함되어 있었다. 네팔은 한국과 3시간 15분 시차가 나는 나라다. 남한보다는 약간 크고 인구는 약 3000만 명이다. 세계 10대 최고봉 가운데 8개의 봉우리를 보유한 산악 국가다. 히말라야에서는 해발 7000m가 넘지 않으면 ‘마운틴(mountain)’이라는 이름이 붙지 않는다. 심지어 세계 3대 미봉으로 불리는 마차푸차레도 피크(peak)로 불린다. 8박 9일간의 히말라야 트레킹은 비행기를 타고 카트만두에서 포카라로 이동하고 다시 버스로 2시간 만에 당도한 나야풀에서 시작되었다. 첫날부터 고전이었다. 4시간짜리 코스였는데 돌계단으로 된 오르막을 오르느라 땀을 뻘뻘 흘렸다. 숙소에 돌아와 땀에 젖은 옷을 말려봤으나 습도가 높아 귀국하는 날까지 마르지 않았다. 다음 날에는 7시간을 걸어 고라파니까지 갔다. 계속 오르막 돌계단이 나왔고 소똥, 말똥이 마구 방치되어 있어 냄새가 진동했다. 이날부터 체력 미달로 탈락자가 한 명 나왔다. 끝없이 이어지는 돌계단, 등에 진 짐이 부담스러웠다. 원래 짐을 날라주는 포터를 2인당 한 명씩 고용했는데 포터가 가지고 가는 짐 외에도 개인이 지고 가야 할 짐이 있었는데 그 무게가 만만치 않았다. 날씨 또한 한국의 늦가을 정도의 기온이라 내복을 입은 사람들은 진땀을 빼며 고전했다. 3일 차에는 새벽 일출을 보기 위해 푼힐 전망대에 올랐다. 우리는 이미 3000m 고도까지 올라와 있었다. 이때 가장 걱정하던 고산병 증세가 여러 사람에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여기서 버티지 못하면 목적지인 4130m의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까지 갈 수 없다고 했다. 샤워도 하지 말고 특히 머리를 따뜻하게 유지하라고 했다. 샤워는 물론 세수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털모자를 쓰고 자고 아침에 일어나면 물티슈로 눈곱만 겨우 닦아내는 고양이 세수를 했다. 남자들은 아예 면도를 포기했다. 자외선 차단제도 땀이 워낙 많이 나서 소용없었다. 무엇보다 날마다 땀에 젖어도 목욕을 못하는 것이 고역이었다. 4일 차에는 타다파니에서 촘롱을 거쳐 시누와까지 6시간, 5일차에는 도반, 히말라야 롯지, 데우랄리까지 6시간을 걸었다. 길도 가파랐지만 데우랄리는 해발 3150m라서 고산병을 적응하는 구간이었다. 도반부터는 눈길이었다. 아이젠 없이는 걸을 수 없는 겨울 날씨에 진눈깨비까지 내려 길이 사라지기도 했다. 6일 차는 디데이였다. MBC로 불리는 마차푸차레 베이스캠프(해발 3700m), ABC로 불리는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해발 4130m)까지 갔다가 다시 마차푸차레 캠프로 돌아와 숙박했다.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입구에는 트레킹 완주 축하, 환영 간판이 있었다. 그 위쪽으로 故 박영석 대장과 히말라야에서 숨진 산악인들을 추모하는 묘비가 있었다. 베이스캠프에서는 안나푸르나와 마차푸차레가 마치 서울의 인왕산처럼 마음만 먹으면 올라갈 수 있을 것처럼 바로 눈앞에 있었다. 그러나 안나푸르나는 8091m, 마차푸차레는 6993m이다. 전문 암벽 등반 기술이 필요한 구간이다. 고산병 증세가 여러 사람에게서 나타났다. 두통에 심하면 구토 증세까지 보였다. 소화도 안 되어 방귀도 자구 뀌게 된다. 약을 먹는 사람도 있었지만, 가이드 말로는 소용없는 일이라고 했다. 이날은 긴장이 많이 됐다 기대감과 동시에 두려움이 엄습해왔다. 신령한 산으로 쉽게 등정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마차푸차레가 눈앞에 다가와 있고 그 아래 양쪽으로 눈 덮인 산들과 계곡을 보고 있자니 태고에 혼자 서 있는 느낌이었다. 설산의 한기와 찬바람은 이불 안쪽까지 뚫고 들어왔다. 7일 차부터는 하산을 했다. 밤부까지 내려온 뒤 8일 차에는 촘롱에서 갈림길로 지누단다까지, 9일 차에는 나야풀까지 매일 8시간을 걸었다. 8박 9일 동안 우리는 약 23만 보, 100km를 걸었다. 히말라야는 여러 산이 겹쳐 있다. 그래서 산 하나를 넘어가려면 계곡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그다음 산을 올라야 한다. 당연히 오르막과 내리막길이 반복되었다. 급경사의 내리막길을 내려가다 보면 또다시 급경사로 오르막길을 올라가야 했다. 그마저 돌계단은 우기에 홍수와 산사태가 자주 없어진단다. 도반까지는 돌계단이 많지만 그 뒤부터는 자연스런 흙길이다. MBC에서 ABC까지는 왕복 4시간 코스. 양옆에 트인 계곡이 있어 분위기가 호젓했다. 68세의 나이로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트레킹 코스를 완주했다. 이 코스에 도전한다고 했을 때 주변에서 모두 말렸다. 체력적으로도 무리일 뿐 아니라 특히 고산병이 위험하다고 했다. 그러나 위험한 상황도 없었고 고산병 증세도 겪지 않았다. 평소의 체력만으로도 젊은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같이 행동할 수 있었다. 시니어의 버킷리스트에 히말라야 트레킹이 들어 있어도 소망일 뿐 실행하기가 쉽지 않다. 이제 뿌듯한 마음으로 버킷리스트 항목 하나를 지운다. 탄탄해진 무릎 위 근육과 허벅다리 뒷 근육을 만져본다. 숙박과 숙식 롯지(Lodge)는 우리나라 민박집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숙박 시설이 열악하다. 샤워하기가 어렵다. 더운 물을 쓰려면 200루피(한화 2000원) 정도 내야 하고 방은 난방이 안 된다. 싼 건축 자재로 만들어진 건물이라 문도 틀어져 있어 바람이 숭숭 들어온다. 침낭만으로는 추위를 이길 수 없다. 수단껏 이불을 구해왔고 150 루피 정도에 뜨거운 물을 사서 물통과 핫팩을 안고 자야 했다. 식사 메뉴도 다양하지 못해 전통 음식인 달 바트를 자주 먹었다. 돈을 더 주면 한국 라면과 밥을 먹을 수 있다. 김치찌개 등 한국 음식을 파는 롯지도 있다. 화장실은 공동으로 사용하는 좌식 변기라 불편했다. 휴대폰 충전과 와이파이를 사용할 때도 100~200루피의 돈을 받는다. 높은 곳으로 올라갈수록 롯지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성수기에는 예약 없이는 숙박도 어렵다. 독방도 있지만 대부분 한 방에서 4~6명이 자야 한다. 보통 6시에 저녁식사를 마치지만 특별히 여가시간을 즐길 거리가 없어 다음날 아침 6시까지 자는 경우가 많다. 복장 1월의 날씨이지만, 카트만두는 낮 기온이 약 20℃나 된다. 그러나 고산에서는 영하 15℃까지 떨어지므로 옷을 다양하게 준비해야 한다. 아침시간에는 손이 곱을 정도로 춥고 트레킹을 하다 보면 땀이 나서 하나씩 벗게 된다. 포터가 짐을 날라주지만, 포터 짐에 더 이상 넣을 공간이 없으면 나머지 짐은 스스로 메고 가야 한다. 기온 편차가 심해 여름옷에서 겨울옷까지 갖춰야 하니 짐이 많아질 수밖에 없다. 포터는 여러 사람 짐을 합쳐서 지고 가기 때문에 바퀴 달린 여행 가방은 가져가면 안 된다.
- 2019-01-21 10:07
-
- 千佛千塔 이야기 ⑧ 서산 보원사(普願寺) 터
- 겨울의 시작을 알리는 첫눈이 내리더니 대설(大雪)을 넘어 동지(冬至)가 다가오기도 전에 매서운 추위가 들이닥쳤다. 이렇게 되면 야외활동이 많이 위축되고 문화유산 답사도 지장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지금, 산과 들이 낙엽 지고 썰렁하다 못해 가슴 한가운데로 찬바람이 뚫고 지나가는 계절적 처연함이 가득한 늦가을과 초겨울이 엉겨 붙는 이때가 폐사지 답사에는 제격이다. 폐사지가 처량하면서도 아름답고 황량하면서도 존재감이 드는 것은 그곳이 한때는 번성하던 절터였기 때문이다. 말없이 우리를 대하는듯하지만 궁금한 것들은 차근차근 일러주는 미덕이 있으며 감추는 것 없이 있는 그대로 진솔하게 보여주는 사실과 증거가 널려있다. 충남 서산 보원사 터 (사적 제316호) 충남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 계곡은 내포(內浦) 지방의 진산 가야산(677m) 줄기 북쪽 봉우리 상왕산(象王山) 자락을 마주하고 서쪽으로는 개심사(開心寺)가 위치하고 있으며 그 산줄기 동쪽으로 깊은 계곡이 흐르는 곳이다. 지금은 국립용현자연휴양림이 있지만 그 옛날 이곳에는 100개의 절집과 1,000명이 넘는 승려들이 있었다고 전해지는 곳으로 백제가 공주를 지나 부여에 자리를 잡고 있을 때 당진(唐津)을 통하여 중국과 왕래하던 중간지점쯤 되는 중요한 지역이었다. 통일신라 말 최치원이 지은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에 '웅주 가야협의 보원사가 화엄 10찰이다'라고 기록되어 이즈음 창건된 사찰로 보기도 하지만 백제 금동여래입상이 발견되는 등 백제 때의 절일 가능성도 있다. 조선시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보원사가 상왕산에 있다’는 기록을 볼 때 16세기까지 그 사세가 지속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후 서산과 태안의 지방지 격인 호산록(湖山錄)에 보원사가 강당사(講堂寺)로 바뀌었다거나 철불의 양손이 없다는 기록 등이 있어 이때부터 사세가 기울어진 것으로 보이며 일제강점기 때 사진에는 석조물만 남아있을 뿐 절의 흔적을 찾기 어렵다. 1959년 근처에서 백제의 미소라 부르는 서산마애삼존불(국보 제84호)이 발견되었으며, 1968년에는 금동여래입상이 발견되었고 2006년부터 2012년까지 총 7차례에 걸쳐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에서 대규모 발굴조사를 실시한 바 있다. 현재 사적 제316호로 지정되었으며 102,886㎡의 웅장한 규모의 절터에는 당간지주, 석조, 오층석탑, 법인국사 승탑과 탑비 등 보물 5점이 있다. 당간지주 (보물 제103호) 절에서는 기도나 법회 등의 의식이 있을 때, 절 입구에 당(幢)이라는 깃발을 달아둔다. 이 깃발을달아두는 장대를 당간(幢竿)이라 하고 당간을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고 한다. 세월이 흘러 깃발(幢,당)이나 깃대(幢竿,당간)는 남아있지 않지만 돌로 된 기둥(支柱,지주)만 남아있으니 우리가 폐사지나 현존하는 절집 초입에서 자주 만나는 유적이다. 보원사 터 당간지주는 4m가 넘는 큰 석물이지만 전혀 위압적이지 않고 화려한 조각 없이 밋밋해 보이지만 찬찬이 살펴보노라면 의외로 멋진 모습이다. 전체적으로 하단이 상단보다 넓어서 안정적이며 기둥 안쪽은 아무런 장식이 없지만 바깥쪽으로는 띠를 두르듯이 조각하였다. 윗부분은 둥글게 궁굴려서 부드럽게 마감하였으며 마주 보는 기둥의 중앙에는 구멍을 뚫어 당간을 고정했다. 상단의 고정 부분은 열린 형태로 파내었고, 당간 받침대는 나중에 따로 만든 듯하며 큼직한 안상을 시원스레 조각했다. 중간에는 당간을 세울 때 받치는 자리, 즉 간대(杆臺)는 옛 모습 그대로 놓여있다. 저 넓은 3만 평 넘는 부지에 절집이 번성하던 시절, 이 당간지주에 힘차게 휘날리던 화려한 깃발(幢,당)을 생각해보면 참 멋지다. 주변에 사하촌 마을까지 들어차 얼마나 번화했을까. 오층석탑 (보물 제104호) 당간지주를 지나면 절터 중간을 횡단하여 흐르는 개울이 있다. 예전에는 징검다리로 불안하게 건너 다녔는데 최근에는 간이 철제 다리를 놓아 편리하다. 생각해보면 그 옛날 이곳에는 멋진 돌난간을 두른 큼직한 극락교나 해탈교 등이 놓여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다리를 건너 절집 안으로 들어서면 길게 높지 않은 축대가 쌓여있다. 그 중앙에 계단이 놓여있으며 위로 올라서면 중앙에 오층석탑 하나 서 있다. 멀리서부터 눈에 띄는 자태가 멋스러운 석탑은 상륜부를 치장하였던 찰주가 비죽 나와 있을 뿐 전체적으로 온전한 모습이다. 기단 위에 1층 몸돌이 얹히는데 그 사이에 굄대를 올린 것이 특이하며 충청도 지역 고려석탑에서 볼 수 있는 특징이다. 1층 몸돌의 각 면에 문비를 새겼으며 2층부터는 급격히 줄어들어 솟아오름이 강조되지만 지붕돌이 넓고 평탄하여 안정감을 준다. 상륜부에는 노반만 남아있지만 1945년 광복 전까지만 해도 아름다운 복발, 앙화, 보륜, 보개, 보주 등의 부재가 완전하게 남아있었다고 한다. 1968년 완전 해체, 복원 시 나온 부장품들은 현재 국립부여박물관에서 보관, 전시 중이다. 법인국사탑과 탑비 (보물 제105호, 제106호) 오층석탑 뒤로는 금당 터가 발굴되었으며 중앙에 불대좌로 보이는 흔적이 있다. 그 뒤로 산자락에 연하여 다소 높직한 축대가 쌓인 곳에는 법인국사의 승탑과 탑비가 있다. 법인국사 탄문 스님은 고려 4대 임금 광종(光宗)을 위한 불사에 앞장섰으며 968년에는 왕사(王師), 974년에 국사(國師)가 되었고 975년에 보원사로 돌아와 76세에 입적하였다. 스님이 타계하자 국왕은 ‘법인(法印)’이라 시호를 내리고, ‘보승(寶乘)’이라는 사리탑의 이름을 내렸다. 그러면 승탑은 보승탑(寶乘塔)이라 불러야 맞는데 그냥 법인국사승탑이라 적었다. 승탑은 지대석 위의 기단부 8각 면마다 안상 모양을 파내고 그 안에 다양한 모습의 사자를 한 마리씩 돋을새김으로 새겼다. 중대석 받침돌은 8각이 다소 둥글게 보이는데 구름과 용무늬, 즉 운용문(雲龍紋)을 사실적으로 새겼다. 중대석은 아무 장식 없이 높고 큰 배흘림기둥이며 상대석은 연꽃무늬가 화려하고 그 위로는 난간을 조각하였다. 승탑의 몸돌은 8각의 앞뒷면에는 문비를 새겼고 나머지 6면에는 사천왕상과 알 수 없는 인물상 둘이 새겨져 있는데 설명이 아쉽다. 팔각의 지붕돌은 아깝게도 귀꽃이 많이 깨어진 상태이며 상륜부에는 연꽃을 새긴 복발 위로 보륜이 있다. 왼쪽에 세워진 탑비에는 법인국사(法印國師)가 광종 25년(974)에 국사(國師)가 된 후 이듬해에 입적하였으며, 비는 경종 3년(978)에 세웠다고 하니 비슷한 시기에 승탑도 세운 듯하다. 용 네 마리를 새긴 탑비의 이수 중앙에는 伽倻山 普願寺 故國師 制贈諡 法印三重大師之碑題額(가야산 보원사 고국사 제증시 법인삼중대사지비)라고 제액(題額)이 씌어 있으며 비석에는 모두 4천5백여 글자를 새겼다. 석조(石槽) (보물 제102호) 석조는 절집에서 물을 담아 쓰던 돌그릇으로 통돌을 파내서 만드는데 보원사지 석조는 현존하는 국내 최대 크기로 약 4톤의 물을 담을 수 있다고 한다. 철불(鐵佛) 보원사 절터에서는 지난 1968년에 9.3cm의 자그마한 백제 금동불이 나와 국립부여박물관에서 보존하고 있으며 일제강점기 때인 1910년경 이곳에서 출토된 철불 2구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져 전시되고 있다. 백제의 미소,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 (국보 제84호) 보원사 폐사지를 둘러보고 용현계곡을 빠져나오다 보면 오른쪽 개울 건너 작은 산 중턱에 백제의 미소로 유명한 국보 마애불이 있다. 1958년 한 나무꾼 제보로 우연히 발견되었는데 우리나라 마애불 중 최고로 손꼽힌다. 특히 벙글벙글 웃는 모습이 시간대별로 달라지는 햇빛에 따라 변하는 것이 특이하다. 최고의 국보 마애불을 보러 갔다가 폐사지를 둘러보든지, 쓸쓸한 폐사지를 둘러보러 갔다가 나오는 길에 국보 마애불을 만나보든지 아무튼 이 가을철에 가볼만한 답사지이다.
- 2018-12-13 15:05
-
- ‘알프스의 심장을 걷다’ 북이탈리아 돌로미티 트레킹
- 어떤 나이에는 인간이 만든 문명들을 보며 지식을 키우는 시기가 있었다. 언제부터였을까? 인간이 만든 미술관이나 박물관은 그것이 아무리 대작이라 할지라도 별 감흥이 일어나지 않았다. 아마도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있는 에너지 없는 에너지를 다 끌어모아 대자연 탐험을 시작한 것은…. 힘든 만큼 더 단단해지고, 땀흘린 만큼 충전이 되는 여행이 바로 트레킹 여행이었다. 알프스의 대자연을 온몸으로 느끼는 1200km의 돌로미티 트레킹! 겨울에는 스키 천국으로, 여름엔 트레킹 천국으로 변신한다. 지구라는 이름의 건축가가 만들어낸 웅장한 조각품에 감탄하는 시간 속으로 떠나보자. 이탈리아가 숨겨놓은 천상의 트레일, 돌로미티 알타비아 넘버원 북부 이탈리아 알프스의 동쪽 끝자락에 솟아오른 바위 산맥 돌로미티(Dolomite)는 해발 3000m 이상의 봉우리를 18개나 품고 있는 웅장한 산악지대로 2009년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에 등재된 곳이다. 기묘한 바위 봉우리들과 에메랄드빛 빙하 호수, 울창한 숲과 계곡, 산상화원을 보는 듯 군락을 이룬 야생화가 어우러져 알피니스트들의 요람이자 암벽 등반가들의 성지가 된 돌로미티는 제1차 세계대전 때 오스트리아군과 이탈리아군이 치열한 접전을 펼친 역사적인 의미가 깊은 곳이기도 하다. 돌로미티를 가기 위해 베네치아로 들어가 ‘알타비아 넘버원(AV1)’의 관문도시 격인 코르티나담페초에서 짐을 풀었다. 아웃도어 매장과 레스토랑이 아기자기 모여 있는 마을이 너무 청량하고 예뻐서 굳이 어딜 가지 않고 그곳에 머물러만 있어도 행복할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이 마을은 여배우 오드리 헵번이 자주 와 머물렀고, 헤밍웨이도 집필활동을 한 곳이라고 했다. 다음 날 드디어 ‘높은 길’이라는 뜻의 ‘알타비아’ 트레킹을 시작했다. 해발 2000~3000m의 고원을 걷는 길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첫날 오르막길이 계속되는 것을 제외하곤 난이도가 아주 높진 않아서 천천히 음미하며 걸었다. 니체가 사랑하고 르코르뷔지에가 극찬한 아름다움 니체는 돌로미티를 두고 “등산의 기쁨은 정상에 올랐을 때 가장 크다. 그러나 나의 최상의 기쁨은 험악한 산을 기어 올라가는 순간에 있다. 길이 험하면 험할수록 가슴이 뛴다. 인생에서 모든 고난이 자취를 감췄을 때를 생각해보라. 그 이상 삭막한 것이 없으리라”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어떤 이는 다시 내려올 산을 뭐하러 힘들게 오르느냐고 묻지만 인생에서 아무 어려움도 없고 그것을 이겨냈을 때의 희열도 없다면 니체가 말한 대로 삭막하고 의미 없는 삶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세계적인 건축가 르코르뷔지에 또한 돌로미티를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연 건축물이라고 말할 정도로 독보적인 풍광을 지닌 돌로미티는 14좌를 알파인 스타일로 오른, 현존하는 최고의 등반가 라인폴트 매스너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며, 그가 고작 다섯 살일 때 이곳 3000m급 암봉을 올랐다고 전해지는 곳이기도 하다. 실제로 트레킹을 하다 보면 세 살도 안 된 아이를 목마 태우고 마치 동네 공원 산책하듯 가벼운 차림으로 험준한 산을 오르는 가족들이 있다. 또 주말에 친구들과 그룹을 짜서 걷다 쉬다 하면서 놀이하듯 등반하는 모습도 흔히 볼 수 있다. 이곳 사람들에게 알프스 트레킹이나 암벽등반은 마치 우리가 매일 동네 산책을 하는 것과 같은 일상적인 일로 보였다. 트레커의 로망, 알타비아 넘버원 히말라야, 로키와 함께 세계 3대 명산에 속하는 알프스 산맥, 그중에서도 돌로미티는 트레킹 코스만 해도 수백 개에 이른다. 가장 유명한 3개의 봉우리 “트레치메(Tre Cime)”는 돌로미티를 말할 때 늘 대표 사진으로 등장한다. 가장 높은 치마그란데(Cima Grande) 봉우리의 높이는 무려 3003m에 이른다. 해가 지는 기울기에 따라 갖가지 색으로 변신하는 바위의 장관은 눈부시게 아름다워서 유명 사진작가들로부터 한결같은 사랑을 받고 있다. 세체다(Seceda) 봉우리를 비롯한 거대한 암봉들이 압도적 풍광을 선사하는 알타비아 넘버원은 돌로미티에서도 가장 클래식한 트레킹 루트다. 거대한 암봉군 사이를 걸으며 만나게 되는 풍경들은 그동안 수없이 유럽을 들락거렸지만 단 한 번도 체험해보지 못했던 유럽 문화의 진수를 맛보게 해줬다. “여행의 백미는 트레킹”이라는 어느 트레커의 말이 비로소 이해가 되었다. 눈이 녹아 싱그러운 빛깔을 뽐내는 알프스 산자락의 맨살은 가는 곳곳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했고, 그늘이 많지 않은 돌산이지만 첫날과 마지막 날을 제외하고는 너른 평지를 걷는 코스라 생각만큼 힘들지는 않았다. 길을 잃기 쉬운 돌로미티 트레킹은 현지 이탈리아 산악 가이드와 함께 했는데 이들의 스틱 사용법이 우리네와 달라 참으로 신기했다. 그가 등산 스틱을 쓰는 모습은 마치 스키를 타는 것처럼 보였다. 이곳 산장 사람들이 겨울이면 스키를 교통수단으로 삼아 이 산장에서 저 산장으로 다닌다고 하니 이해가 되었다. 해가 뜨면 걷기 시작해 다음 산장까지 걷다가 경치 좋은 곳에 자리를 깔고 알프스 품에 안겨 도시락을 먹을 때의 기분을 잊지 못한다. 오후 서너 시가 되면 다음 산장에 도착해 짐을 풀고 휴식을 취했다. 그 막간의 시간에도 산악 가이드는 산장집 어린 아들과 암벽등반을 하러 갔다. 그 모습을 보며 이들에겐 정말이지 산악 스포츠가 밥 먹는 것 같은 일상이구나 싶었다. 산악 가이드는 그늘 하나 없는 길을 긴 등산 바지를 입고 걷는 나를 보더니 왜 반바지를 입지 않느냐고 물었다. 한국에서는 풀독이라도 오를까봐 늘 긴 바지를 입었던 나는 내리쬐는 햇살 속에서도 긴 바지 차림이었던 것이다. 돌로미티는 한국의 산과 다르고 바위산이라 풀독이 오를 일도 없다. 다음 날 반바지를 입었더니 몸이 날아갈 듯 가벼웠다. 유러피언들은 햇살을 즐긴다. 내 긴 바지가 당연히 이상하게 보였을 것이다. 그림 같은 알프스 산장, 그리고 이탈리아 음식의 진수 돌로미티 트레킹은 겨울이면 스키어들의 성지인 산장과 산장 사이를 걷는 것이다. 눈이 없는 알프스의 아름다움을 이보다 더 잘 느끼는 방법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없을 듯하다. 케이블카도 있어 걷기 싫은 곳에선 이용할 수 있다. 눈뜨면 알프스의 압도적인 풍광들 사이를 걷다가 휴게소에서 최고의 이탈리아 코스요리를 먹고, 해가 지면 해발 2000m가 넘는 드라마틱한 풍경 속에 위치한 최고급 전망을 자랑하는 산장에서 잠을 자고 알프스의 일출을 날마다 맞이하는 일은 호사롭다. 이탈리아 음식이라면 피자와 파스타, 후식이라면 고작 카푸치노와 에스프레소만을 떠올린다면 이탈리아 음식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이번 여행에서 알았다. 트레킹 여행이니 다이어트가 좀 될 거라는 희망은 무궁무진 미각을 자극하는 이탈리아 코스요리 앞에서 물 건너 가버렸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정말 많이 먹는다. 보름 동안 매일 맛본 요리의 순서를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① 우선 스프리츠 같은 식전주로 입맛을 예열한다. ② 프리미라는 일종의 전체요리다. 주로 덤플링(완자탕), 굴라시, 라비올리, 야채스프, 마카로니, 파스타 중 선택하는데 양이 메인디시 수준이다. ③ 세콘디 피아티라는 메인 요리를 먹는데 스테이크 종류, 감자 요리, 폴렌타, 스파게티 등이 나왔다. ④ 디저트로 팬케이크, 브라우니, 푸딩, 젤라토(아이스크림)를 먹는다. ⑤ 식후주로 그라파같이 향이 좋은 술이나 에스프레소를 마신다. 트레치메 앞 산장에서 먹었던 라비올리의 맛과 트레킹이 끝나던 날 마지막 산장에서 마신 스프리츠의 황홀함을 잊을 수 없다. 환상적인 풍경을 벗 삼아 한 번도 맛보지 못했던 이탈리아 정찬의 세계를 느껴보는 일, 전통주 그라파 한 잔에 피로를 풀고 밤이 되면 쏟아지는 별빛 아래 대자연과 하나 되는 일, 모두가 잠든 새벽 알프스 정상에서 고요한 일출을 맞이하는 일. 이것이 바로 알타비아 트레킹의 진수다.
- 2018-10-12 10:45
-
- 지리산 청학동에 사는 영화감독 김행수
- 지리산 중턱, 해발 800m, 계곡 물소리 쿵쾅거리는 산중이다. 한때 도류(道流)의 은둔 숲이었던 청학동 구역이다. 이젠 관광지로 변해 차들이 물방개처럼 활개 치며 드나들지만, 특유의 깊고 외진 풍색은 여전하다. 영화감독 김행수는 이 심원한 골을 일찍부터 자주 찾아들었더란다. 2년 전부터는 아예 집을 짓고 눌러 산다. 우레처럼 요란히 소쿠라지는 개울물을 건너고, 허리띠처럼 비좁은 비탈을 오르자 길 끝에 나타나는 외딴집 한 채. 김행수의 거처다. 마당에서 일하고 있던 그가 장승처럼 우뚝 멈춰 서서 객을 맞이한다. 얼마 전 미친 듯이 퍼부은 폭우로 무너진 돌담 귀를 보수하던 참이었다. 웃통을 벗어젖힌 바람에 드러난 몸피가 듬직하다. 볕에 그을린 구릿빛 살갗으로 내비치는 근골이 두루 짱짱하다. 산중 살림이란 노역(勞役)의 연속이기 십상이다. 해서, 몸이 단련되고, 그 와중에 마음도 덩달아 양양해지는 바가 있을 테지. 암자 터에 혼자 지은 흙집 김행수의 나이는 예순다섯. 흔히들 은퇴를 해 세상의 뒷전으로 물러날 걸 고려하는 나이다. 경치 좋은 시골에 들어가 자연을 벗 삼은 평온한 생을 꿈꿀 만한 시점이다. 모아둔 재물이나 연금을 쪼개 쓰며 만족과 안식이 있는 일상을 추구할 시기다. 그러나 김행수의 생각과 지향과 현실은 사뭇 다르다. 영화를 삶의 반려로 삼은 그에게 일단 은퇴란 없다. 수려하고도 으슥한 산속으로 귀촌을 했지만 자연을 완상하며 한가하게 노닥거리길 목적으로 삼지도 않았다. 손에 쥔 게 별반 없는 물적 현실은 빈 술잔처럼 따분하지만 기죽을 일 없는 깡으로 버틴다. 독특한 양상이다. 남다른 이색과 이채가 서려 있는 삶일 게다. 김행수의 집터엔 과거 한때 암자가 있었단다. 불자 이상의 수행자이기도 한 그가 우연찮게도 폐사지에 들어앉았으니 궁합이 맞는 터다. 그는 한동안 이 터전에 비닐하우스를 대충 짓고 대충 지냈다. 그러다가 2년 전에 흙집 한 채를 지어 붙박이로 눌러 살기 시작했다. 그가 ‘토굴’이라 부르는 이 집은 작고 허술하나 창의(創意)의 산물이다. 꾸밈과 치레가 없이 투박하나 통뼈의 집적처럼 늠름하다. 지붕 한쪽은 그저 투명 비닐 한 장으로 마무리해 별이 뜨고 지는 걸 바라볼 수 있게 해두었다. 햐, 놀라워라. 이 기발한 흙집을 혼자 지었다는 게 아닌가. “간신히 비바람이나 가릴 수 있는 비닐 움막도 딱히 나쁠 건 없었어요. 하지만 여기에 주민등록을 이전하고 살려면 도로명 주소가 있어야 한다 하더라고. 그러자면 가건물이라도 지어야 했어요. 그래 혼자서 주변의 통나무와 흙을 모아다 근 1년에 걸친 공사로 집을 지었어요. 그런데 이게 완전 실패한 집입니다.” “실패? 어떤 점에서?” “집 안의 습기나 냄새를 빨아들인다는 점에 흙집의 장점이 있다는 걸 실감하지만, 그 외 이 집에선 보잘 게 없으니 실패일 수밖에. 집짓기 경험도 식견도 없는 채로 엉성하게 지은 탓입니다. 흙에 볏짚이라도 버무려 벽을 쌓았다면 좋았을걸, 그리 하지 않았더니 벽이 마구 갈라집디다. 쩍쩍 벌어진 틈새로 지네 따위 별별 벌레들이 다 기어들어 와요. 바람이 숭숭 새들어오고 말이죠.” “그건 적절하게 보완하면 되는 거 아네요? 이 후미진 산중에 손수 집 한 채를 지었다는 게 진기해요. 야생의 힘 같은 게 느껴져서.” “뭐 골병만 들었습니다.(웃음) 그나마 자랑할 건 구들장을 제대로 놔 불을 때면 바닥이 절절 끓는다는 점이죠. 하지만 여름엔 온실처럼 덥고 겨울엔 냉장실처럼 차가워요. 벽채 단열 부실하지, 판자와 비닐로 지붕을 대충 얹었지, 이거 참 심란합니다.” “비용은 얼마나 들었죠?” “별로 돈 들어간 건 없어요. 철근이나 쇠파이프, 중고 창문, 구들장 정도를 구입하느라 돈을 좀 썼을 뿐이니까. 좀 더 작게 지었다면 지출을 더 줄일 수 있었겠지만 공사를 하다 보니 커지더라고.” 산방에 눌러앉아 쓴 소설, 올봄 출간 공사가 커졌다지만 자그마한 산방이다. 허세와 허영으로 뒤발한 건축이 난무하는 세상이지만 몸뚱이 하나 눕힐 공간이면 족하지 아니한가, 그런 생각으로 흙집을 지은 것 같다. 그런 소박한 태도로 이 난잡한 세속사회를 조용히 견뎌왔으며, 그런 허심한 인생관으로 애환의 연극무대인 삶을 줏대 있게 버텨온 것 같다. 그러하니 자신의 지향을 놓치지 않았다는 자족이 있겠으나, 상처 역시 은연중에 고여 일쑤 고독에 휩싸일 수도 있겠지. 훨훨 날아다니는 품새로 존재의 빛을 발하는 자에게만 눈이 쏠리는 게 세태이지 않던가. 김행수는 1985년 영화 ‘단(丹)’으로 감독 데뷔를 했다. 이후 다수의 시나리오를 썼다. ‘신라승 김교각’, ‘재일동포, 아! 나는 누구인가’ 같은 로케이션 다큐를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불운하게도 지난 20여 년간 영화를 만들지 못했다. 영화감독이 영화를 만들지 못하는 건 정신의 지옥을 사는 일과 다를 바 없다. 그 괴로운 수렁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는 적막한 산방에 눌러앉아 소설 하나를 써 올봄에 출간했다. 불교 구도소설 ‘공유(空有)’가 바로 그것. 소설쓰기란 방울방울 혼신의 피를 뿜는 일. 그의 뚝심을 알아볼 만하다. “오래전부터 불교영화를 하나 만들고자 나름 치열하게 노력해왔어요. 시나리오를 완성해 주머니에 품고 살며 근 20년간 영화화하기 위해 진력했죠. 하지만 제작투자자가 붙질 않더라고. 자본이 있어야 영화를 만들 텐데 길이 열리지 않았던 겁니다. 그래 시나리오를 소설로 바꿔 출간했어요. 제작비 마련의 계기가 되길 바라면서였죠.” “소설의 반응은?” “신통치 않지만 기대를 버리지 않고 있어요.” “제작자가 붙질 않는 이유, 뭐라 보시죠?” “상업영화 시장은 대기업 중심의 자본논리로 돌아갑니다. 돈 될 영화가 아니면 거들떠보지도 않죠. 게다가 저처럼 나이 든 사람보다 말랑말랑한 신인을 선호해요. 나이 들었으니 고리타분할 것이다, 새롭지 않을 것이다, 라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어요. 이게 한심한 편견이죠. 나이 먹어 오히려 새로울 수 있는 게 아닌가?” “충분히 신선하다면, 충분히 흥행할 수 있는 매력적인 시나리오라면 덤벼들지 않을까?” “불교영화? 그게 돈 되겠어? 그런 선입견이 팽배해 있어요. 비애를 느낍니다. 당신의 시나리오 품질에 혹은 연출력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니냔 얘기도 듣지만 진지한 감독이라면 누구나 최선을 다하기에 자부심을 갖게 마련이에요.” “물심양면으로 불황이 깊은 세월이었겠어요. 결례되는 얘기이지만, 영화를 포기할 생각은 하지 않았나요? 자그마치 20년을 공들인 일에 활로가 찾아지지 않는다면 후다닥 바꾸는 게 상책일 수도 있지 싶어서.” “영화가 아니면 무엇을 하나? 제작환경이 저열하고 열악하지만, 평생의 일이자 꿈인 영화를 포기하고서야 삶에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비슷한 처지의 감독들은 부업을 찾거나 아예 직업을 바꾸기도 하지만 제 경우는 그게 안 돼요. 내게 아직 운이 오질 않았어, 기다려보자, 그렇게 자위하며 때를 기다립니다.” 영화를 생각하면 소년처럼 들뜨는 사람 영화를 위해 태어난 사람을 자처하는 김행수의 행보엔 갈지자가 없다. 비바람 속 난항이지만 주저앉을 수 없다는 결의는 날로 굳어진다. 운명의 여신은 거칠게 다룰수록 복종한다지? 우직한 열망, 김행수는 그 하나로 운명과 거칠게 겨루는 사람으로 보인다. 일테면 꾀를 쓰는 기회주의로 강자에게 빌붙는 방식 따위에 그는 관심도 요령도 없다. 자신의 적성과 실천은 불교적 수행에 부합한다는 게 아닌가. 실제로 그는 거의 승려처럼 산다. 그렇기에 김행수는 외롭고 적막하고 돈 없는 산방의 소탈한 살림살이에 자족한다. 가만히 바위처럼 눌러앉아 시나리오를 쓰기 위해 산골에 들어왔지만, 물질에 시달리지 않을 무욕의 삶을 밀어붙이기 위해서도 산중 살림이 적격이었던 모양이다. 대체로 사람들은 물신에게 절을 하며 산다. 가난을 원수로 여긴다. 김행수의 생각은 썩 다르다. “소설 ‘공유’는 불교의 근본 교리인 ‘진공묘유(眞空妙有)’를 풀어나간 작품입니다. 생겨나지도 멸하지도 않는 절대의 진리, 공에도 유에도 치우치지 않는 경지, 이게 진공묘유인데 본래의 성품인 참마음을 닦을 수 있는 이치를 알려주는 묘리죠. 마음이라는 거, 그거 하나를 잘 쓰면 무엇에 걸리거나 시달릴 게 없어요. 모두들 돈, 돈, 돈 하지만, 돈을 산처럼 모았다고 마음이 저절로 편해질까? 오히려 재산을 지키려고 더 불편하게들 살지 않던가요?” “수행에도 예술에도 최소한의 물적 토대는 필요합니다. 돈에 목을 걸 일은 아니겠으나 지나친 궁색은 불편의 원천이기도 하죠.” “돈의 노예로 사는 건 위험하다는 얘기입니다. 움켜쥔 손, 즉 욕망을 탁 놔버리는 그 순간이 부처의 자리이며 본래의 마음으로 돌아가는 조짐이에요. 그런 사람이라면 물질에 시달릴 까닭이 전혀 없는 것이고.” “욕망을 무슨 수로 탁 놓을 수 있을까? 욕망 중에서 좋은 욕망을 잘 가려 쓸 수만 있더라도 내공이겠죠. 무욕으로 포장된 말만의 청빈보다는, 때 묻을 수밖에 없는 돈벌이로 응분의 밥을 벌어 가족을 부양하는 일은 더 떳떳한 수행이자 내공이겠고 말이죠.” “가족보다 직장보다, 오롯이 나 자신의 시간을 나답게 쓰고 가는 게 더 소중해요. 나 아닌 남들에게 시간을 다 빼앗기고 나면 결국 나 자신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 아니겠어요? 이런 생각을 하는 저를 두고 이기주의자라고도 하지만, 이건 양보할 생각이 없습니다.” 김행수는 쉰 살이 넘어 결혼을 했다. 아내와 어린 딸은 현재 도시에 살고 있다. 영화 하나에 홀려 평생을 살아온 그는 용케도 가족부양의 의무를 면제받았다. 가족들이 그를 숫제 포기한 덕분이라지. 이토록 요상한 행운이라니. 아직 도착하지 않은 행운은 언제 오려나. 자나 깨나 그가 기다리는 건 영화제작자의 출현이지만 아직은 진도가 더디다. 영화를 생각하면 그는 소년처럼 들뜬다. 세상의 외면에 분노의 아드레날린이 굶주린 짐승처럼 혈관을 달리기도 한다. 그럴 때면 산이 성큼성큼 가슴으로 걸어 들어와 위안의 밀어를 건네줄 테지. “산중에 살며 점점 산을 닮아가는 걸 느껴요. 저의 몸이 영혼의 집이라는 걸 깨달아요. 남들은 무위도식하는 걸로 오해하기도 하지만, 영화 외의 모든 걸 다 놓고 사는 삶은 낭비가 없기에 분주하고, 지루할 게 없어서 생동해요. 물론 때로 오욕칠정에 휘둘리지만…. 영화를 생각하면 자주 괴롭지만….” 번뇌도 보약이겠지. 괴롭고 슬퍼야 빛깔이 짙어지는 법이니까. 영화를 향한 간절한 열망, 그게 투명한 감옥일지언정 허공으로 비끼는 몽환일 리가. 해 저물어 자리를 털고 일어서려는데 김행수가 소박한 밥상을 차려낸다. 텃밭 부추를 밥에 넣고 비빈 부추비빔밥이다. 상큼한 부추향이 산방에 번진다. 김행수 감독이 주는 귀촌 준비 Tip 도시를 벗어나 시골에 사는 삶은 한결 만족스러울 수 있다. 도시에서는 더 많이 가지고 더 많이 모으려는 사람들을 닮아갈 수밖에 없다. 경쟁에서 이겨야 하고, 질 경우엔 낙오자 취급을 받지 않던가. 그러나 산골에선 경쟁 대상이 없을 뿐만 아니라 자연을 닮게 마련이다. 이보다 더 행복한 삶이 있겠는가. 즉각 행동에 옮기는 게 옳다. 귀촌을 망설일 이유가 없다.
- 2018-09-27 10:19
-
- 가을 갯벌의 붉은 카펫, 해홍나물
- 바다에 빨간 단풍이 들었네요. 바다에 빨갛게 불이 났군요. 그러나 119 소방차 부르면 절대 안 돼요. 우리 그냥 한없이 불구경하기로 해요. 꽃 찾아 산을 오르고, 계곡을 헤매고, 들로 나가고, 강에도 가도, 물속에도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급기야 바닷가에도 갔습니다. 가서 바닷가 벼랑 위에 핀 둥근바위솔도 만나고 해국도 보았습니다. 석호(潟湖) 가장자리 모래톱에 핀 갯봄맞이도 만났습니다. 그러나 정작 바다에 핀, 바닷물이 드나드는 갯벌 한가운데 핀 꽃들은 눈여겨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어느 가을날 단풍보다 더 붉게 타오르는 거대한 물결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야말로 “오매, 단풍 들것네”라고 외마디 탄성이 절로 나오더군요. 꼭 1년 전인 지난해 10월호에 고창 선운사와 함평 용천사, 영광 불갑사에서 열린 진홍의 꽃무릇 축제를 소개하면서 가을이 가기 전 그 장관을 놓치지 말라고 했는데, 서·남해안 갯벌을 커다랗게 수놓는 해홍나물의 붉은 단풍 역시 놓쳐서는 안 될 가을의 축복이라 말하기에 한 치의 부족함도 없습니다. 갯벌은 오랫동안 간척과 매립 등 개발의 대상이었으나, 최근 들어 다양한 생물의 보물창고요 자연재해를 막는 스펀지, 바다와 지구를 지키는 허파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그 가치가 새롭게 조명되고 있습니다. 다행히 우리나라 서·남해안에는 작지 않은 규모와 양질의 갯벌이 남아, 바닷물의 소금기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염생식물(鹽生植物)들이 강한 생명력을 발산하고 있습니다. 오늘 소개하는 바다의 붉은 나물이라는 뜻의 해홍(海紅)나물, 그리고 해홍나물의 사촌이라 일컬을 만큼 잎이나 줄기 등 전초가 매우 유사한 칠면초와 나문재, 방석나물, 퉁퉁마디, 수송나물 등이 그것입니다. 특히 연두색 싹이 자라서 짙은 자주색으로 변하는 가을까지 이파리 등 전초의 색이 일곱 차례나 변한다고 해서, 아니 꼭 일곱 차례는 아니어도 칠면조(七面鳥)처럼 여러 번 바뀐다고 해서 그런 이름을 얻은 칠면초나 해홍나물은 가을이 되면 거대한 군락이 끝없이 펼쳐져, 드나드는 바닷물마저 물들일 듯 붉게붉게 타오릅니다. 물론 우리 눈에 들어오는 붉은색은 식별도 되지 않을 만큼 자잘하게 피는 꽃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줄기와 잎 등 식물체 전체가 단풍이 들듯 변하는 데서 오는 것입니다. 참, 지난해 가을 필자의 블로그에 해홍나물과 칠면초가 뒤섞인 군락이 붉게 물들어가는 서해 작은 섬의 정경을 올리자 ‘내사랑’이란 아이디를 가진 이가 사진보다 멋진 댓글을 달았기에 글 앞머리에 인용, 소개했습니다. Where is it? 서울에서 가까운 강화도에서 전남 순천만에 이르기까지 서·남해 바닷가에 광범위하게 펼쳐지는 갯벌(또는 개펄)이 모두 해홍나물과 칠면초 등 염생식물의 자생지다. 명아주과 나문재속 한해살이풀인 해홍나물과 칠면초는 같은 갯벌에 섞여 자라기도 하는데, 해홍나물이 칠면초보다 키도 크고 잎도 긴 편이다. 해홍나물 군락지는 2017년 6월 석모대교 개통으로 자동차로 한 시간이면 서울에서도 닿을 수 있는 석모도 해안(사진)에서 쉽게 만날 수 있다. 강화도 선두리 포구나 영종도 공항 가는 길에 있는 운염도에서도 나문재, 칠면초와 함께 볼 수 있다. 전남 순천만은 대규모 칠면초 군락을 만날 수 있는 갯벌로 이름이 높다. 전남 신안 증도의 소금 생산지인 태평염전도 칠면초 사진 촬영지로 인기다.
- 2018-09-20 10:34
-
- 일본 지진 소식에 떠오른 홋카이도의 추억
- 뉴스에서 이웃 나라 일본의 지진 소식이 심각하다. 홋카이도 지방에 지진이 나서 산사태가 일어나고, 건물이 무너지고, 정전도 되어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꽤 많은 우리나라 관광객도 항공편이 중단돼 발이 묶여있다고 한다. 유명 온천 관광지인 노보리베츠에서 어떤 기자가 아나운서와 통화로 그곳 상황을 알려주고 있었다. 귀에 익은 노보리베츠 온천지나 삿포로라는 지명을 들으니 언젠가 삼총사 친구들과 떠났던 홋카이도 여행이 떠올랐다. 우리가 즐겁게 여행했던 곳에서 이런 재해가 발생하다니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노보리베츠는 온천도 좋지만 여기저기 유황 냄새를 풍기며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연기로 지옥을 연상시키는 계곡이 매우 인상 깊었다. 마침 우리가 여행 갔던 그 시기에만 볼 수 있다는 도깨비 축제를 만난 건 행운이었다. 많은 관광객이 빙 둘러앉은 야트막한 무대를 향해 인근 언덕부터 세찬 불꽃놀이를 펼치며 내려오던 도깨비 군단의 퍼포먼스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곳곳에 커다란 방망이를 든 도깨비 모형과 양쪽으로 즐비한 상점이 아기자기한 볼거리를 주는 재미있는 동네였다. 트라피스치누 성당이 있는 수도원은 무사할까? 걱정이 되었다. 아름답고 유서 깊은 건물과 수녀들이 만든 빵과 잼을 맛볼 수 있어 기억에 남은 곳이다. 피해가 크다는 삿포로와 오타루 운하가 있는 지역도 잊을 수 없는 예쁜 추억이 있다. 예전에는 큰 무역이 이루어지던 운하였다는데 지금은 조금 넓은 개천 정도여서 실망했지만, 양옆으로 창고로 사용했다는 붉은 벽돌 가게가 역사를 말해주듯 당당하게 자리 잡고 있어 의미가 컸다. 오타루 운하를 지나 오르골가게가 골목으로 가는 길은 새로 만들어진 것처럼 산뜻하고 깔끔한 가게가 연이어 있었다. 예쁜 가게들을 구경하며 가다가 우리는 가게 앞 길가에 나와 초콜릿 조각이 담긴 은쟁반을 든 미소년을 만났다. 맛보라며 내미는 손이 예뻐 하나씩 먹어 보고는 그 가게에 들어가 초콜릿 한 봉지씩을 샀다. 맛있어서라기보다는 소년의 미소에 홀리듯 샀다며 우리끼리 한참을 웃었던 기억이 잊히지 않는다. 정해진 시간이 되면 울린다는 시계탑의 은은한 오르골 소리를 듣는 것도 즐거웠고, 가게 안 풍경에 놀라기도 했다. 이 세상 오르골은 다 모여 있는 듯 다양한 오르골이 진열되어 있었다. 화려한 보석으로 치장한 것부터 소품 하나하나까지 정성 들여 아름답고 신기한 모습이었다. 흠이라면 가격이 비싸서 마음에 드는 걸 살 수 없었다는 점이다. 결국 손녀를 위해 태엽을 감으면 디즈니랜드의 주제곡이 아름답게 흘러나오는 인형 오르골을 하나 골랐다. 오르골을 받고 기뻐하는 손녀를 본 게 엊그제 같은데, 멋진 추억으로 가득한 홋카이도에 이런 재난이 생겨 가슴이 아프다. 하루빨리 지진의 피해에서 벗어나 다시 관광 명소로 주목받길 바란다.
- 2018-09-12 18: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