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형!
독하게 추운 겨울입니다. 한파가 그야말로 맹위를 떨치고 있습니다. 수도가 얼고 비닐하우스의 농작물도 성장을 멈추어 서민들의 마음이 무겁습니다. 수십 명의 목숨을 앗아간 연이은 화재 참사도 한파 이상으로 춥게 합니다. 기후 온난화를 꽤 걱정했으나 올겨울은 그런 분위기는 아니었습니다. 입춘 절기가 코 앞인데 추위는 물러갈 줄 모릅니다. 예전부터 입춘 추위가 있다 했으니 봄기운은 더 멀리 머물고 있나 봅니다. 이런 겨울이면 지리산 청학동 계곡 언덕배기 자그마한 마을 초가집에 살던 때가 생각납니다. 방문 틈새로 들어오는 차가운 겨울바람을 막기 위하여 문풍지를 달곤 했습니다. 요즘 같은 좋은 바람막이가 아닌 종이를 잘라 풀로 붙여 칠흑 같은 자정이면 고요를 타고 문풍지를 울리며 찬바람이 새어들기 마련이었습니다.
문형!
집 안에 도배해 본 경험이 있나요? 저는 도배를 많이 해 보았습니다. 요즘엔 도배 전문가에게 맡깁니다만, 예전엔 직접 했습니다. 저 같은 촌놈은 대부분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쉬울 것 같아도 그리 만만하지 않습니다. 제가 어린 시절에 살던 마을은 정말 심심산골이었습니다. 반듯한 집이 아닌 허술한 초가집으로 요즈음 그림에 나오는 운치 있는 모습은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곧 쓰러져 갈 것 같았고 기둥들이 곧지 못하여 방의 벽은 평평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처럼 황토벽돌을 만들어 사용하지 않고 기둥과 기둥 사이에 넣은 대나무 거푸집에 잘게 썬 지푸라기를 넣어 반죽한 황토를 채워 벽을 만들었습니다. 으레 벽면이 울퉁불퉁해서 도배는 쉽지 않았습니다. 칼바람이 윙윙대는 깊은 겨울 저녁이면 그런 시절이 생각납니다. 나이가 들어감은 추억을 되돌려보며 나름의 행복에 젖는 시간이 늘어납니다. 어린 시절에 살던 초가집은 마을 사람들이 힘을 합쳐 정성껏 지었으나 설계도나 자재가 오늘날 같지 않아 방안이어도 찬바람이 귓전을 때리기 예사였습니다. 외풍이라 했습니다. 차가운 공기는 내려앉고 따뜻한 공기는 위로 올라가는 과학이 외풍을 설명합니다. 외풍을 조금이라도 덜기 위해 도배가 필요했습니다. 지금의 인테리어 측면도 있으나 당시는 벽에서 방바닥으로 떨어지는 흙 부스러기를 막고 찬바람을 다소라도 줄이는 방편이었습니다. 도배한 방은 그렇지 못한 방보다 훨씬 따뜻했습니다. 도배는 우리를 따뜻하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외부에서 스며드는 찬바람을 막아주고 보기 흉한 부분을 감춰주기도 했습니다. 도배는 삶의 한 단면이었습니다. 도배라는 말에 정감을 느끼는 이유입니다.
문형!
저는 신혼 살림집의 도배와 페인트칠을 안사람과 함께 직접 했습니다. 그 버릇이 남아 어지간한 집안의 페인트칠은 직접 합니다. 전문 일꾼들에게 비할 수는 없어도 돈이 덜 들기에 그렇게 합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엔 하찮고 옹색해 보이기도 했으나 힘이 들어도 보람이 있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일이 그러지 싶습니다.
문형!
밤이 깊어 갑니다.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에 별이 총총합니다. 자연과 함께함이 좋아 전원에 작은 집을 짓고 삽니다. 이 마을에도 다양한 생각과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모여 살아갑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런저런 사람이 함께 어우러져 사는 곳입니다. 사람은 누구도 완벽할 수 없습니다. 때론 잘못도 저지르고 죄인이 되기도 합니다. 미처 생각하지 못한 일로 본의 아니게 다른 사람의 노여움을 사기도 합니다. 지나 놓고 보면 내가 잘못하였다는 후회가 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일흔 살에 가까워지니 깨닫고 반성하고 그러면서 세월을 가꾸어 가는 것이 인생살이란 생각이 더 들어갑니다. 젊은 시절의 나의 아집이 부끄러워지기도 하니 이제 철드나 봅니다. 차가운 겨울날씨만큼이나 세상도 어려워 보입니다. 정치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습니다만, 국민 대통합을 이끌 수 있는 진정한 지도자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국내외적으로 정말 어려운 국면에 놓여있지 싶습니다. 한때 촛불과 태극기로 양분된 국민의 마음을 하나로 묶을 방법은 없을까요? 어떤 정치인은 입만 열면 모든 것을 촛불에 대입하고 있어 걱정됩니다. 왜냐하면, 그 반대쪽에 섰던 사람들을 또다시 내모는 표현으로 들려서 그렇습니다. 통합의 의지가 아닌 배척의 길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선거에서는 편이 갈릴 수 있으나 선택된 지도자는 양편을 다 끌어안아야 바른 지도자가 되어 더 나은 나라를 만들 수 있기에 그렇습니다. “어 다르고 아 다르다” 오늘날 새겨 보아야 할 금언입니다.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며 더 나은 세상을 함께 만들어야 합니다. 미래보다는 과거에 집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나만의 일일까요? 상처를 받은 이웃들의 뚫린 마음에 몰아치는 찬 바람을 막아 줄 도배가 필요합니다. 비뚤어진 마음의 벽에도, 외풍이 심해 찬바람이 쌩쌩 이는 냉랭한 분위기의 방에도 따사한 기온이 감도는 여유로운 무늬의 도배지를 바르고 싶습니다.
문형!
지난번 만났을 때 얘기했듯이 올해엔 행복은 덧셈, 나이는 뺄셈, 재물은 곱셈, 기쁨은 나눗셈 되었으면 합니다. 우리가 가끔 거닐던 산언저리에 쌓인 눈이 녹고 봄기운이 도는 춘삼월의 따뜻한 봄날을 택해 빈대떡에 소주 한잔 기울입시다. 그때까지 건강하기를 바랍니다. 우리 나이에 건강보다 더 중요한 사항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제 세상과 싸우지 말고 자아실현을 해야 할 시기입니다. 미끄러운 길은 특히 조심하셔야 합니다. 이만 줄입니다.
산중에 눈이 내린다. 폭설이다. 천지가 마주 붙어 눈보라에 휘감긴다. 어렵사리 차를 몰아 찾아든 산간 고샅엔 오두막 한 채. 대문도 울도 없다. 사람이 살 만한 최소치의 사이즈를 구현한 이 갸륵한 건물은 원시적이거나 전위적이다. 한눈에 집주인의 의도가 짚이는 집이다. 욕심일랑 산 아래 고이 내려놓고 검박하게 살리라, 그런 내심이 읽힌다. 대한성공회 윤정현 신부(64)의 집이다. 그가 이 산중으로 귀촌한 건 3년 전.
귀촌 초기, 윤 신부는 자그만 중고 컨테이너를 산기슭에 앉혀 거기에 살았다. 그러나 불편이 컸단다. 여름엔 찜통처럼 더웠고, 겨울엔 냉장고처럼 차가워서였다. 그래 용한 꾀를 냈다. 컨테이너 뒷면에 흙벽을 쌓고 지붕을 얹은 두 평 반짜리 골방 하나를 지어 붙였던 것. 말하자면 철제 건조물과 흙집이 한 몸으로 붙은 복합건축이다. 이 흔치 않은 오두막 한 채로 그의 주거는 완성에 도달했다. 더 이상 늘리거나 꾸밀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않는다는 게 아닌가.
집 안으로 들어서자 일종의 절경이 펼쳐진다. 컨테이너 공간은 서재로, 골방은 거실 겸 침실로 쓰는데, 그저 소소한 생활도구들이 놓여 있을 뿐이다. 책과 옷가지들, 다구와 식기, 전기장판과 이불 한 채. 이게 그가 깃들어 사는 집 내부를 이룬 사물의 거의 전부다. 그러니 절경! 단순한 삶을 추구하는 한 사람의 지향과 실천이 완연히 비친다. 자칫 욕망 쪽으로 흘러가는 머리를 쓰는 대신 몸을 주로 써 수행을 닮은 생활을 하자는 게 그의 귀촌 푯대. 쾌활한 언사를 구사하는 이 단구(短軀)의 사제는 흙집을 혼자 지었다. 한 달 여에 걸친 신역으로.
“주변에 널린 돌과 흙을 퍼 나르는 걸로 일에 착수했어요. 비용은 별로 들질 않습디다. 창문과 출입문을 가져오며 고물상에 치른 돈이 36만 원, 장작난로 구입에 30만 원, 시멘트나 각목, 연장, 못을 사는 데 들어간 얼마간의 비용 등, 총 80만 원을 들여 지었어요. 흙집의 탁월한 단열 효과, 그거 참 놀랍더라고요. 초기의 불편이 일거에 해결됐죠. 화장실은 없지만 삽 한 자루 들고 숲으로 들어가면 그만이에요.(웃음) 욕실도 없지만 가끔 읍내 목욕탕엘 가서 때를 벗기죠. 식수는 계곡물을 끌어다 탱크에 받아 쓰고.”
그는 연세대학교 신과대학을 졸업 뒤 성공회대학교 사목신학연구원에서 사제 양성 과정을 밟아 1987년 사제 서품을 받았다. 이후 여러 곳의 교회에서 사목활동을 했으며, 영국 버밍엄대학교로 유학을 가 신학박사 학위도 받았다. 귀촌 직전까진 청주 수동교회 관할 사제직을 맡았다. 성공회 사제의 정년은 65세. 그는 정년을 코앞에 둔 시점에서 귀촌을 위한 휴직을 신청했으며, 이것으로 교회의 일은 사실상 마감되었다. 성공회 사제는 은퇴 뒤 자력으로 여생을 꾸려야 한다. 연금이라는 게 없으며, 거처도 제공되지 않기 때문에. 예순 나이에 접어들 즈음 그의 마음은 자연으로 쏠렸다. 이미 손에 쥔 게 별로 없는 삶이었지만 더욱 소박한 쪽으로 생활을 바꾸고 싶었더란다. 해서, 득달같이 나서 귀촌을 단행했다.
욕심과 노여움과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면 행복하다
“평생 하느님을 섬기며 살고 있지만 제게는 정신의 스승이 한 분 계십니다. 다석(多夕) 류영모 선생(1981년 작고)이죠. 동서고금의 종교와 철학에 능통했던 다석 선생께선 기독교와 불교, 유교와 도교를 조화하고 상호 보완할 수 있는 웅대한 사상체계를 정립했어요. 저는 다석의 혜안을 빌려 서구 신학적 관점이 아닌 동양 신학적 관점으로 성서를 새롭게 이해할 수 있었어요. 종교와 종파와 교리를 뛰어넘어, 모든 인류가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시각을 가질 수 있었던 것도 다석 사상을 공부하면서였죠.”
“박사 논문 주제도 다석사상이죠? 다석은 정인보, 이광수와 함께 1940년대 조선의 3대 천재로 통했죠. 오산학교 교장을 지내다 은퇴한 뒤에는 농사를 지으며 제자들을 가르쳤어요. 유 신부님의 귀촌은 다석의 행장에 영향을 받은 선택?”
“삶을 돌아보면 어떤 ‘보이지 않는 손’이 항상 저를 이끌었다는 걸 알겠습디다. 진리라고 말할 수 있는 그 뭔가의 힘 말이죠. 순리나 무위자연의 흐름일 수도 있겠지. 다석 선생의 가르침 역시 길잡이였죠. 선생께선 농사를 자주 권장했어요. 농사짓는 사람이 예수라는 말도 늘 했어요.”
“농사의 정신을, 땅에 땀을 쏟는 노동의 신성한 가치를 말한 거겠죠?”
“그렇죠. 귀촌을 해 몸을 쓰는 노동을 하며 이거 참 좋구나, 하는 느낌을 자주 경험합니다. 우선은 몸이 건강해져요. 정신도 맑아지고, 영성에 대한 각성도 하게 돼요. 현재 닭과 산양을 치고, 소규모의 농사를 짓지만 향후 영성공동체랄까, 자율공동체로 가꿔나갈 참이에요. 이미 집 둘레의 임야 1만 평을 확보해뒀어요. 저의 뜻에 공감한 산주(山主)께서 좋은 가격에 땅을 넘겨준 덕분이죠.”
“자율공동체엔 어떤 사람들이 모이죠?”
“누구나 다! 내 안의 영성을 일깨울 실천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영성공동체의 뜻에 동감하는 사람이라면 종교와 상관없이 누구든 함께 살아가야죠. 공동체 참여자는 이곳의 너른 산림 한 곳에 농막이나 움집을 짓고, 공동 생산을 해 함께 나누는 생활을 하게 될 겁니다.”
브래드 피트가 열연한 영화 ‘티벳에서의 7년’엔 인상적인 장면이 나온다. 극장을 짓기 위해 땅을 파던 인부들이 지렁이가 나오자 공사를 즉각 중단하고 정성스레 지렁이를 안전한 곳으로 옮겨준다. 생명을 가진 모든 것들을 귀하게 여기는 감성이란 아마도 영성적 에너지일 게다. 생명 모두에 깃든 존귀함을 의식하는 자는 이미 자신 안의 영성을 일깨운 존재일 테지. 그러나 때 묻히지 않고 생존할 방법이 있던가. 살길을 찾기 위해 영혼까지 팔아서야 안 되겠지만, 내 안의 영성을 유리그릇처럼 투명하게 닦는 일은 우리네의 관심사 자체가 못된다. 산야에서, 야생에서 담백한 생활을 지속할 경우엔 문제가 달라지나?
“영성생활이란 피안의 세계로 가자는 게 아닙니다. 욕망이 이끄는 대로 사는 일에서 벗어나 평온한 마음의 상태를 유지하자는 것, 상생하자는 것, 개인의 자족만이 아니라 사회변혁까지도 실천하며 살아가자는 것, 그런 걸 위해서는 영성 회복이 필요하다 보는 거예요. 모두들 물신주의에 사로잡혀 무한경쟁을 벌이는 세태에서 과연 사람들은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을까? 빈부 양극화만 날로 심해지는 것을…. 저는 말이죠, 적게 가지고 적게 쓰는 쪽으로 마음을 두는 게 훨씬 현명하다고 봐요. 이기심에서 벗어나 타인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키우는 게 행복과 만나는 가장 빠른 길이라고 봐요. 초목들의 동향과 동물들의 삶을 통해 세상에 적용할 교훈을 얻을 수 있는 야생이란, 일테면 교실 같은 곳이죠.”
세상의 광기와 아귀다툼이 침범 못할 적막한 산중. 거기에 오두막을 짓고 홀로 들어앉았으니 완전한 고립 속에 있는 것 같지만 그의 희망과 실천은 사방으로 활달하게 열려 있다. 에피쿠로스는 인생의 목적을 쾌락 추구에 두었다. 욕망을 채우는 쾌락이 아니라, 욕망을 비우는, 비워서 마음의 고통을 몰아내는, 마침내 평안과 안락의 상태에 접어들어 단순 담박한 생활을 하는 게 에피쿠로스의 ‘쾌락’이다. 윤 신부가 추진하는 공동체란 어쩌면 ‘에피쿠로스 스쿨’이겠지. 육체와 욕망,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에서 벗어난 삶이 행복을 데려다준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인생은 한바탕의 ‘소풍’
집 밖엔 한파가 맵차지만 골방은 훈훈하다. 난로 속에서 관솔 내음을 솔솔 풍기며 타는 소나무 장작불이 열을 뿜어서다. 창문가엔 벚꽃 잎처럼 분분히 내리는 눈 풍경. 집 뒤편 언덕배기 닭장에선 오골계들이 세찬 눈발을 피하고 있고, 산마루에선 산양들이 전설처럼 눈을 흠뻑 뒤집어쓴 채 양양하게 뛰논다. 윤 신부는 닭들에게서 계란을 얻는다. 산양의 젖을 짜 우유 대용으로 먹는다. 자급자족이 그의 목표다. 산 아래 농부들과 물물교환을 통해 부족한 양식은 보충해나갈 계획이다.
“점차 농사 규모를 키우고, 작목 수효도 늘려나갈 작정이에요. 귀촌 3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해야 할 일들이 많아요. 그간에 터를 다듬고, 연못을 만들어 연(蓮)을 심거나 잉어를 넣어 길러왔어요. 이 산림엔 원래 공동묘지가 있었어요. 그걸 용케도 거의 다 이장시켰죠. 무덤이 많아 산 아래 토착민들조차 무섭다며 아예 접근하길 꺼린 땅이었는데, 보시다시피 이젠 달라졌죠. 수시로 드나들며 찬탄합니다.”
“사제란 세상에 빛을 보태는 존재겠죠. 그런데 말이죠, 성직자들은 늘 옳은 얘기, 반듯한 말만 하지만 정작 실천과는 먼 경우가 많다는 게 중론이에요. 동화작가 고(故) 권정생 선생은 본인이 크리스천이었지만 차라리 이 땅에 기독교가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더 나은 사회가 됐을 거라는 얘길 했죠.”
“예수님이 가르친 핵심은 간단합니다. 하느님을 네 몸처럼 섬겨라,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요약하면 그 두 가지예요. 그러나 종교인들의 노력이 부족해요. 수행을 일삼는 수도원에서조차 이기심의 충돌이 잦아요.”
성공회 사제에게 결혼은 금기가 아니다. 윤 신부의 처자는 먼 곳에 따로 산다. 아내는 김포에서 미혼모의 자녀들을 돌보는 쉼터를 운영한다. 아내가 곁에 없으니 주야간에 외기러기처럼 외로울 것 같지만, 서로 자유롭게 선택한 길을 존중하며 지내는 것으로 사랑을 확인한다.
“인생이란 한바탕의 소풍이에요. 소풍을 잘 즐기는 나그네의 짐은 가벼워요. 이전의 편리를 다 버린 귀촌생활의 불편이 사실 한둘이 아니지만, 거꾸로 사는 인생 같지만, 자유로운 나그네로 살기 위해선 세태를 거스를 수밖에 없어요. 세태의 물살에 무기력하게 떠밀린 채 비문명적 야생생활을 누리거나 무소유를 실천하기란 불가능하니까.”
“인생은 육십부터라고들 하죠. 이건 맞는 말일까?”
“중생(重生), 즉 영적으로 새 사람이 될 수 있는 계기나 동기부여가 되는 구호이니 썩 긍정적인 명제가 아닐까.”
“돈이나 욕망을 앞세우지 않고서도 행복을 누릴 방도를 슬슬 찾기 시작하는 게 시니어죠. 무소유까지야 어렵겠고, 각자 주어진 현실 여건을 어떻게 활용하는 게 좋다고 보나요?”
“돈·권력·명예를 나만을 위해 쓰지 않고 남도 덩달아 이로운 쪽으로 사용하는 게 좋겠죠. 돈이란 잘 쓰면 사랑이 되고, 권력을 독점하지 않고 나누면 평화의 초석이 되죠. 명예 역시 정의롭게 사용하면 상생의 힘이 될 테고.”
“당신은 사제예요. 천국은 어떤 곳이죠? 사후엔 무엇이 오죠?”
“마음을 비우고 애착과 집착을 다 놓을 수 있다면 죽음이 두려울 리 없겠죠. 모든 하루를 최고의 날로 산다면, 내일 죽어도 진정 여한이 없을 사람이라면 그는 이미 하느님 나라, 천국을 사는 겁니다. 사후? 그건 잘 모르겠어요. 그 누구도 다녀온 사람이 없으니.”
집착도 후회도 슬픔도 없는 인생이라면 이미 성자이겠지. 그에겐 과거도 미래도 없는 것과 같겠지. 그러나 과욕과 과속으로 어긋나기 쉬운 게 오늘 하루. 눈 쏟아지는 하오의 귀로에 어둠살이 내린다. 삶을 돌아보면 어떤 ‘보이지 않는 손’이 항상 저를 이끌었다는 걸 알겠습디다. 진리라고 말할 수 있는 그 뭔가의 힘 말이죠.
박원식 소설가 >>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천년 산행’, ‘암자에서 듣다’, ‘산골로 간 예술가’ 등의 저서가 있다.
서울 일부 지역의 집값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다. 정부의 부동산대책은 백약이 무효다. 젊었을 때 입주하여 산천이 세 번 넘게 바뀌도록 이사 한번 안하고 관악구 같은 집에서 산다. 이때쯤 관악에서 사는 아유를 밝힐 때가 되었다. 몇 년 전 사회은퇴를 앞두고 오랜 도시생활을 벗어나 전원생활을 하고 싶은 생각을 하였다. 전원이주 지인들을 살피면서 취향은 맞는지 환경변화는 어떠한지 검토하였다. 취향과 성격에 어울리는지가 제일 큰 문제였다. 전원은 어릴 적 추억일 뿐, 이미 도시민이 되어있는 자신을 발견하였다.
젊었을 때 휴가철이나 휴일에 짬짬이 시간을 쪼개서 여행을 즐겼다. ‘아! 아름답다. 또 와야지’ 감격을 먹고 다시 올 것처럼 다짐을 하였으나 같은 곳으로 또 갔던 기억은 거의 없다. 추억은 얼마 지나면 잊어버리고 새로운 곳을 찾아가는 여행이 더 즐거웠다. 한 곳에서만 꼼작 못하고 살아야 할 아무 이유가 없었다. 전원으로 이주하기 어렵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편리한 도시에서 살면서 쾌적한 전원으로 여행’하는 방법을 선택하였다. 전원이 그리울 때는 주말농장을 찾으면 되었다.
서울 어디서든지 한 시간이면 갈 수 있는 관악·북한·청계산은 우리의 전원이다. 수도권 전철 경춘·중앙·경강선을 타면 가는 곳마다 명승지다. 매주 친구들과 서울근교·원거리 산행을 즐기고 있다. 봄꽃·여름녹음·가을단풍·겨울함박눈 따라 학교동창·자원봉사동료·사회평생교육동기들과 산행을 즐긴다. 각자의 신체조건에 맞춰서 산을 찾으면 바로 그곳이 전원이다. 관악전원마을에서 즐겁게 사는 이유다.
첫째, 관악산이 포근히 감싸는 천혜의 자연을 자랑한다.
관악산은 관악구를 포근히 감싸고 있다. 연주대 정상에 오르면 암자가 추녀 밑 제비집처럼 앙증맞게 매달려 있다. 서울둘레길·관악산둘레길이 잘 정비되어서 등산을 하거나 산책하기에 편리하다. 관악산 계곡과 도림천은 여름철 물놀이 천국이다. 잣나무 삼림욕장은 천혜의 치유광장이다. 어디서나 몇 십 분이면 관악산에 연결된다. 아침마다 뒷동산 체육공원에서 건강을 다질 수 있다. 울창한 숲 덕분에 여름철에도 에어컨이 필요 없을 정도다.
둘째, 관악은 교육특별구다.
집주위에는 초·중·고등학교가 연이어 있고, 가까운 곳에 대학교가 있다. 한곳에서 오래 사는 덕분에 아들과 딸은 전학 한번 없이 교육을 마쳤다. 결혼 후에는 가까운데서 살고 있다. 쌍둥이 손녀와 손자가 아들이 다녔던 초등학교에 다닌다. 아들과 손주는 도시에서 보기 드문 ‘초등학교 부자동문’이 되었다. 앞으로 오래도록 관악에서 더 재미있게 살아야할 이유다. 손주를 정성껏 돌보자. 올바른 시민으로 기르는 인성교육 첫걸음이다.
셋째, 오순도순 분위 좋은 전원마을이다.
관악구청·평생학습관·문화원에서 열리는 사회교육이 활발하고, 도서관 운영은 최고수준을 자랑한다. 청운의 꿈을 키우는 젊은이가 많아 생기가 넘치는 곳이다. 늦었던 사회개발도 경전철 등 지역발전에 불을 댕기고 있다. 골목길·고갯길·사이길 등 도시화가 덜 된 ‘시골길’이 많다. 정이 넘쳐 활기 찬 골목길이 있는가 하면 인적이 뜸해 정을 그리워하는 고갯길도 있다. 도심 같지 않는 포근한 사이길이 있다. 다른 곳에서는 주민 간 통행 문제로 다투는 일이 종종 있으나 이곳은 오히려 이웃과 상생하는 정이 넘치는 곳이다.
필자는 국립공원인 북한산과 가까운 동네에 살고 있다. 요즘 등산하는 인구가 많아져서 산은 항상 붐빈다. 남들은 자가용이나 버스로 이곳까지 와서 산에 오르지만, 필자는 운동화 끈만 질끈 매고 문을 나서면 언제라도 산에 오를 수 있으니 비록 땅값 집값이 싼 동네라지만 만족하고 공기 좋은 우리 동네를 사랑하고 있다. 잠시 전에도 산에 다녀왔다. 흰 눈이 내린 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하얀 눈이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모습이 마치 보석처럼 느껴지는 아름다운 설경이었다. 계곡을 따라 눈이 많이 쌓였고 군데군데 작은 폭포도 흐르던 모양 그대로 얼음 조각상이 되었다.
한여름에 웅장하게 쏟아져 내리던 커다란 연못도 작은 구멍을 남기고는 모두 꽁꽁 얼어버렸다.
그래도 난간에 기대어 지난번 보았던 연못 속의 물고기가 있으려나? 찾았더니 살얼음이 얇은 곳에 여전히 작은 물고기가 유영하는 모습이 보여서 반가웠다.
이렇게 추운데 물속은 어떠냐고 혼잣말을 하며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이제는 무릎도 아프고 산길도 좀 미끄러워서 높게는 못가고 중간 약수터까지만 올랐다. 쨍하는 차가운 날씨지만 오랜만에 오르는 산은 쾌적하고 산뜻한 기분이 든다.
몇 년 전에 필자는 일 년간 새벽 6시에 하루도 빠지지 않고 산에 오른 적이 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였는데, 어느 폭우가 쏟아졌던 장마철, 징검다리에 물이 넘쳐서 건널 수 없었던 날 하루를 그냥 돌아온 걸 제외하면 정말 비가 오면 우산을 받치고 눈이 오면 두툼한 옷으로 무장을 하고서 하루도 거른 적이 없었다. 물론 첫 번째 이유는 건강 지키기, 다이어트 때문이었고 다른 이유는 새벽 6시 이전에는 무료로 산에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에는 국립공원이 1200원씩 입장료를 받았다. 돈이 그렇게 궁한 것은 아니어도 매일 1200원씩 내야만 산에 갈 수 있다는 건 이 동네에 사는 사람으로서 작은 불만이었다. 그런데 새벽 6시 이전엔 아직 매표소가 문을 열지 않아 그냥 들어갈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정말 열심히 산에 올랐었다, 그 새벽에, 2.5 킬로미터쯤 오르면 영추사라는 절이 있는데 그곳까지 매일 다녔다. 다이어트에 얼마나 효과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건강에 도움은 되었을 것이라 확신한다.1년쯤 산행이 계속되던 어느 날 국립공원 입장료가 폐지되었다. 참 이상하다, 그렇게 열심히 새벽마다 산에 갔는데 이제는 하루 중 아무 때나 무료로 입장할 수 있다니까 새벽 등산을 게을리하게 되었다. '가고 싶을 때 가면 되지'하는 안이한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필자의 새벽 등산은 중단되었고 그 후로는 가끔씩만 산에 가고 있다.꼭 입장료 때문에 그 새벽에 나갔던 것일까? 그건 아닐 텐데 리듬이 무너져버린 지금 다시 새벽등산을 하라면 못 할 것 같다. 건강을 위해서라도 아쉬운 기분이다.
58개띠들이 하면 유행이 된다. 폭발적인 우리 사회 인구증가의 한복판에 자리 잡은 58년생들은 사회 변화와 유행을 주도한, 지금으로 치면 ‘완판남’·‘완판녀’로 부를 수 있는 세대다. 그들의 문화적 파괴력은 굉장했다. 여러 분야 중 특히 여행과 관련한 58개띠들의 문화주도도 눈여겨볼 만하다. 빈궁에서 벗어나 경제성장의 혜택을 보기 시작한 이들은 다양한 여행을 경험해나갔다.
1978년. 58개띠들이 만 스무 살이 되던 해. 당시 8월 17일자 경향신문에는 재미있는 기사가 하나 실린다. ‘바캉스 파장 … ‘고요’ 되찾는 산하, 연인원 5천만 기록’이라는 제하의 기사는 당시 여름휴가를 위해 산과 계곡, 바다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몰렸는지를 증언한다. 재미있는 내용 중 하나는 작년 대비 피서객이 40% 늘었다는 대목이다. 예년보다 높은 기온이 가장 큰 이유였겠지만, 성인이 된 58개띠들이 피서객 증가에 한몫하지 않았을까.
당시에도 제주도는 관광지로 인기가 좋았다. 평소 600석 내외로 운영되던 서울-제주 간 항공편은 피서기간에는 1000석 이상으로 증편돼 관광객을 실어 날랐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 탓인지 다음 해인 1979년, 철도청은 고급여행을 원하는 관광객을 위해 새마을호 객차 확충을 서둘러 진행했다.
물론 58개띠들이 여행 보따리를 맘껏 싸기 시작한 원인에 경제성장의 수혜도 빼놓을 수 없다. 1977년은 우리 경제의 상징적인 시기였다. 1인당 GDP가 처음으로 1000달러를 돌파해 1034달러를 기록했고, 수출 역시 최초로 100억 달러를 돌파했다. 배고픔은 점차 잊히고 있었다.
가장 원하는 신혼여행지는 ‘제주도’
그렇다면 58개띠들의 신혼여행은 어땠을까. 통계청이 2011년 발표한 ‘최근 30년간 초혼자료 분석’에 따르면, 1981년의 남성 초혼 연령은 26.4세, 여성은 23세로 나타났다. 이를 바탕으로 유추해보면 58개띠들의 결혼이 이뤄진 시기는 이들이 23세에서 26세를 지낸 1981년에서 1984년 사이라고 봐도 될 것 같다.
1982년 5월 27일자 동아일보에는 당시 젊은이들의 신혼여행에 대한 생각을 엿볼 수 있는 기사가 등장한다. 한국갤럽이 18세 이상의 남녀 1218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가장 많이 다녀온 신혼여행지는 부산(21.6%), 경주(12.6%) 순이었다. 아무래도 비용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는 제주도는 3위(12.2%)를 기록하는 데 그쳤다. 재미있는 것은 순위에 자리 잡고 있는 ‘서울’의 존재다. 당시 지방 거주민들에게 서울은 충분히 매력 있는 여행지였다. 신혼여행으로 서울을 선택한 이들은 5.4%나 됐다.
가고 싶은 신혼여행지로는 역시 제주도(46.5%)가 가장 많이 꼽혔고, 당시 왕래가 여의치 않았던 외국을 꼽은 이들도 13.1%나 됐다. 3위는 설악산(11.8%)이 꼽혔는데, 다녀온 여행지에서 7위에 불과했던 것에 비하면 높은 수치다. 설악산이 관광지로 개발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말. 1978년 진갑을 맞은 박정희 대통령이 선택한 관광지도 개발이 막 시작된 설악산이었다.
해외여행 자유화로 ‘천지개벽’
58개띠가 해외 땅을 밟은 것은 ‘여행’보다 ‘일’이었다. 물론 해외 출장이라고 쉬운 것은 아니었다. 1980년대 고위직 공무원이나 주요 기업의 임원이 해외 출장이라도 나가면 모두 기삿거리가 됐다. 그만큼 해외 방문은 쉽지 않았다. 출장이 목적이어도 회사의 매출 규모가 낮은 기업은 여권을 받기도 어려웠던 시절.
중동에서 일어난 건설 붐은 58개띠들의 해외 구경의 좋은 구실이 됐다. 굳이 따지자면 58년생은 1970년대 말에서 1980년대 말까지 일었던 중동 붐의 막차를 탄 세대다.
1985년 해외로 나간 한국인은 약 48만 명이었다. 일본과 미국을 방문한 이가 가장 많았고, 다음으로 사우디아라비아가 많았다. 지금과는 판이하게 다른 결과다.
서울올림픽 개최 다음 해인 1989년이 되면서 전 국민 해외여행 자유화가 이뤄졌다. 1983년만 하더라도 50세 이상인 사람이 관광예치금을 200만 원 이상 맡겨야 관광여권을 받을 수 있었지만 매년 대상 연령이 낮아지다가 1989년에 완전 자유화가 이뤄졌다.
해외여행 자유화는 우리 사회의 많은 것을 바꿔놓았다. 1990년부터 신문 지면에는 ‘배낭여행족’이라는 신조어가 등장했고, 즐겨 찾는 신혼여행지는 제주도에서 태국이나 필리핀으로 바뀌었다.
세운상가 외제장사 아시나요?
해외여행 자유화 이전, 해외 출장 근로자들의 부업 중 하나는 바로 소니와 산요로 대표되는 일본 가전제품을 내다 파는 일이었다. 이들이 면세점 등에서 구매해 들여온 카메라, 오디오, 전기밥솥 등은 세운상가 상인들에게 늘 환영받았다.
그러다 1989년 해외여행 자유화가 이뤄지면서 소비자들이 해외에서 직접 물건을 사갖고 들여오는 문화가 확산됐다. 이런 문화의 아이콘으로 ‘코끼리 밥통’이 있다. 일본 조지루시 전기밥솥은 밥맛이 좋다고 입소문을 타면서 고소득층 사이에서 필수품 대접을 받았고, 점차 대중화되어갔다.
매일경제신문은 1992년 광복절 ‘일제선호 불치병인가’란 기사를 통해 당시 상황을 소개했다. 일본 버블경제의 거품이 꺼져가면서 가전제품 상점가가 몰려 있는 아키하바라역 인근 가게들은 불황을 겪고 있지만, 한국 관광객들이 너도나도 밥통 등 가전제품을 사주는 덕에 상권이 유지되고 있다고 기사는 전하고 있다. 최근 중국 관광객 유커들이 백화점에서 한국산 밥통을 사재기하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당시 58개띠들의 나이는 34세였다. 김포공항 입국 수속 행렬에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지 않았을까.
당시 신문에 게재된 해외여행 광고를 보면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다. 국가도 일본, 미국, 동남아로 지금과 차이가 나지 않았고, 도쿄 4일 여행상품이 70만 원 선, 필리핀 4일 여행 상품이 48만 원 선으로 가격도 비슷하다. 다만 다른 부분이 있다면 중국 관광의 유무다. 58개띠들이 중국 관광지를 방문할 수 있었던 것은 1994년 중국여행 전면자유화 이후부터다.
[추억 한토막] 대전역 가락국수 맞먹는 앵커리지공항 우동의 추억
경부선과 호남선이 지났던 대전역. 선로가 붐비고, 대기시간이 길었던 탓에 대전역 승강장의 가락국숫집은 승객들이 꼭 들러야 하는 명소가 됐다. 비행기 여행과 관련해서도 대전역 가락국수와 비슷한 추억의 공항이 있다. 다소 엉뚱하게도 미국 알라스카 앵커리지공항이 그곳이다.
대한항공이 1975년 서울-파리 여객노선을 개설한 것을 시작으로 미국과 유럽 노선이 늘기 시작하면서 앵커리지 공항은 상당수 여객기가 들러야 할 경유지였다. 당시 여객기들의 비행거리가 짧았고, 냉전으로 인해 소련 영공을 지날 수 없었기 때문에 필연적인 절차였다. 이런 사정은 일본도 마찬가지. 버블시대 해외 여행객이 폭발적으로 늘었던 일본의 항공사들도 이곳을 들러야 했다.
환승보다는 급유의 목적이 컸기 때문에 앵커리지에서 머무는 시간은 짧지 않았다. 때문에 당시 해외 출장이 잦았던 상사맨들이나 항공사 관계자들은 당시 앵커리지의 추억을 기억한다. 항공사 승무원으로 근무했던 안영희 동년기자는 “한 시간은 있어야 했는데 승객들이 딱히 할 만한 것이 많지 않았어요. 그래서 면세점들이 장사가 잘됐죠”라고 설명한다.
이 공항에서 인기가 가장 높았던 매장은 바로 ‘우동’. 해외 왕래가 잦았던 한국과 일본의 ‘밀리언 마일러’ 사이에선 반드시 거쳐야 할 일종의 성지였다. 일본의 몇몇 사이트에 남아 있는 기록의 편린을 맞춰보면, 앵커리지 우동은 주인이 두 번 바뀌었다고 전해진다. 첫 번째 주인은 미국계 일본인으로 육수 제작과 제면을 직접 하는 정통파여서, 본토 일본인들도 인정할 정도였다고. 가격은 10달러 내외로 비싼 편이었다. 지금도 일본에선 ‘앵커리지 우동’이란 단어는 여행지에서 만나는 수준 높은 우동집을 칭하는 대명사처럼 통용되고 있다.
장사가 잘되자 한 항공사 자회사가 주인을 밀어낸다. 일종의 젠트리피케이션. 물론 우동은 인스턴트로 바뀌었다. 냉전의 종말과 항공기 성능의 향상으로 앵커리지 경유 노선이 줄자 이 우동집은 한국인 사업가에게 넘어간다. 맛도 한국식으로 변했고, 단무지는 별매여서 원성을 사기도 했다.
대한항공에서 정년퇴직한 정용진 기장은 “당시 조종사들 사이에서 앵커리지공항의 우동은 자주 언급될 정도로 유명했어요. 우동과 함께 팔았던 연어 고기도 한국에선 구하기 힘든 물건이어서 인기가 많았죠”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가족·친구들과 어울려 ‘송년주’ 한잔 나누기 딱 좋은 시기다. 헌데 나에게 지난 여름부터 금주령이 내렸다. 송년은 커녕 친구들로부터 외면당할 처지에 이르렀다. 친구들과 가끔 소주잔을 기울이는 나에게 ‘송년금주’는 어려운 숙제가 되었다. 술 배운 후 처음 맞는 이 난국을 이겨내고 금주에 성공할 수 있을까, 금주 금단증상은 얼마나 심할까 생각이 깊어갔다.
담배를 끊으면서 금단증상으로 엄청 고생했던 기억이 머릿속을 스쳤다. 군대복무 시절 늦게 배운 담배가 제대 때는 골초가 되었다. 20여 년 전 어느 휴일, 친구와 등산을 마치고 ‘일요담배’를 맛있게 한대 피웠다. 헌데 월요일부터 생담배 타는 냄새 같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악취가 코에서 진동하였다. 금연경험자가 ‘금단증상의 한 형태 같다.’고 말하였다. 손 떨림·체중증가·우울 등은 종종 들었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 겪는 일이었다. ‘담배를 한 대만 피워도 금단증상이 다시 처음처럼 강해진다.’고 하였다. 완전히 끊자 다행히 금단증상의 강도가 점점 낮아졌다. 10년 넘어 금연에 성공하였다.
금주를 시작한지 어느덧 몇 달 지났다. 군대생활 중에 발생한 발톱무좀을 치료하러 피부과 의원에 갔더니 “무좀약을 복용하는 동안에 술을 마셔서는 안 된다.”고 의사가 말하였다. 발톱이 제 기능을 못하면 ‘관절손상이 크다’고 경고하였다. 발의 관절을 보호하고 건강을 유지하려면 이 기회에 완치하여야 한다. 치료를 하면서 금주를 시작하였다. 아직까지는 금단증상이 없어서 다행이다. 송년모임이 매우 허전하게 느껴졌다. 술잔을 돌리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친구들이 정겹게 보였다.
왁자지껄 떠드는 친구들의 모습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나도 저랬을 텐데!’ 아름다운 추억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학창시절 산행시작 때는 산에서 취사가 허용되었다. 석유버너에 불붙이는 방법을 익히고 코펠까지 준비한 다음에야 등산 패에 낄 수 있었던 옛이야기다. 몇 명이 어울려 각자 쌀·찌개거리·반찬을 가져와 합동취사를 하였다. 버너를 준비하여 밥을 짓고 찌개를 끓이는 담당을 하였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변치 않고 술을 준비하였다. 한겨울에는 눈을 걷어내고 고기를 구워서 소주 한잔으로 추위를 달랬다.
세월이 지나면서 산에서 취사가 금지되고 정상까지 오르는 본격산행이 시작되었다. 도시락을 푸짐하게 준비하여 산상 뷔페식을 즐겼다. 덩달아 산술의 참맛을 알기 시작하였다. 계곡이나 식당에서 마셨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한잔 술에 가슴이 탁 트이곤 하였다. 어려웠던 일을 다 잊을 수 있었다. 푸른 하늘로 날아오르고 구름 위를 거닐었다. 새로운 생각이 떠오르고 간이 부풀었다. 발아래에 세상이 조개껍질처럼 엎드렸다. 술을 즐기지 않는 친구도 한모금쯤 입에 댔다. 술 향기에 취하고 흥에 겨웠다.
여기까지는 즐거운 추억이다. 옛날에는 등산복에 배낭 메고 나서면 놀러가는 한량으로 보는 경향이 일부 있었다. 이제는 산행이 단순한 놀이가 아니고 건강을 다지는 필수 운동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지금도 하늘을 날 것 같은 마음은 변함이 없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능선 어려운 길을 멀리하고, 쉬운 둘레길을 찾는 횟수가 많아졌다. 대여섯 시간 산행이 두세 시간으로 확 줄었다. 정상까지 오르지 않던 옛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친구들도 막걸리 한잔을 입에 댔다 떼기를 반복하였다.
사회은퇴 후 사회평생교육장, 재능기부 봉사장에서 새로운 친구를 많이 만났다. 그들과는 학창시절의 동창이나 사회생활에서 만났던 동료들과는 또 다른 정을 느끼고 있다. 세상풍진을 털어내고 고향 뒤안길에서 만난 어릴 적 동무 같다. 누구의 손이라도 덥석 붙잡고 싶은 그런 송년이다. 텁텁한 막걸리 한사발이면 딱 좋을 것 같다.
헌데 송년금주다.
한국 시니어블로거 협회에서 주관하는 토요3시간 걷기 행사가 남양주에 있는 수종사에서 있었다. 경의중앙선 열차를 타고 운길산역에서 내려 도보로 수종사까지 한 바퀴 도는 것이다. 필자는 며칠 동안 감기 기운으로 망설이던 끝에 전 날 저녁에 참석하기로 최종 마음을 정했다. 상봉역에서 만난 회원들이 경의중앙선 운길산역에서 내렸다. 미리 도착한 회원들까지 11명의 회원들이 합류하여 수종사를 향해서 걷기 시작하였다.
해발 610m 운길산 중턱에 자리 잡은 수종사는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쳐지는 두물머리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천혜의 절경을 감상할 수 있는 사찰이다.
영하5도의 쌀쌀한 날씨에 살랑살랑 불어대는 산바람이 제법 매섭게 옷깃을 파고들었다. 운길산 역에서 수종사로 가는 길은 계곡의 등산로나 시멘트 포장길을 따라 가파른 경사로를 힘들게 걸어서 올라가야 한다. 필자 일행은 처음에는 계곡의 산길을 따라 오르다가 중간에 가파른 시멘트 포장길로 들어섰다. 등산로와 산비탈 여기저기에는 적지 않은 눈이 쌓여있어 여간 미끄럽지가 않았다. 헐벗은 겨울 산 나뭇가지 사이로 옹알옹알 들려오는 새소리를 들으며 언덕길을 오르다 보니 어느새 땀이 차오른다.
이 길은 필자에게는 지울 수 없는 추억이 깃들어 있었다. 단풍이 곱게 물들던 10여 년 전의 어느 가을날, 지인과 함께 자전거를 타고 이 곳을 찾았다가 수종사 입구에서 운명처럼 만난 여인과 불타는 사랑에 빠졌던 필자의 지인이 문득 생각났기 때문이다. 추억을 꺼내 두런두런 음미를 하다 보니 어느덧 수종사 일주문이 눈에 들어올 때 쯤엔 등까지 땀으로 흠뻑 젖었다.
운길산 수종사는 대한불교조계종 봉선사의 말사로 창건연대의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세조와 관련된 일화가 있다. 부스럼을 앓던 세조가 오대산 상원사에서 문수보살을 만나 깨끗이 낫고 한강을 따라 환궁하는 길이었다. 양수리까지 오니 밤이 이슥해 쉬어 가는데 운길산에서 종소리가 들려왔다. 신하가 알아보니 천년 고찰 터 암굴 속에 십팔 나한상이 앉아 있고 천장에서는 물방울이 떨어지면서 종소리를 내는 것이라 했다. 세조는 이곳에 절을 복원해 수종사라 부르고 이 은행나무(500년)를 하사했다고 한다.
500년 수령 느티나무 두 그루의 환영을 받으며 경내로 들어서자 겨울 속에 빠진 사찰의 고즈넉함이 불쑥 다가왔다. 경내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나니 마당 앞에 아담하게 지어진 전각 다실, 삼정헌(三鼎軒)이 눈에 들어왔다. 필자 일행은 툇마루에 배낭을 벗어놓고 다실 안으로 들어갔다. 무료다실 삼정헌에서는 약수를 끓여 이곳을 찾는 중생들에게 차를 제공하고 있었다.
투명하고 탁 트인 통유리 밖으로 두물머리의 풍경을 감상하며 녹차 한 잔을 여유롭게 마실 수 있는 삼정헌은 수종사만의 아주 특별한 공간이다. 은은한 녹차향이 후각을 자극하고 정오를 갓 지난 말간 겨울 햇살이 섬섬옥수처럼 다실 안을 비추고 있었다. 가파른 경사로를 따라 경내까지 당도하느라 이미 땀으로 촉촉해진 몸이 한기(寒氣)가 엄습하기 이전에 이곳에 들어올 수 있어 참으로 다행이었다. 이 곳 삼정헌에서 보살님의 녹차 공양은 덤으로 맛볼 수 있는 행복이다. 시원한 전망과 유리창을 통해 쏟아지는 햇살은 마음에 찌든 때까지 말끔히 거두어간다. 잔잔한 음악을 들으면서 도란도란 둘러앉아 우려낸 녹차 한잔을 나누면서 얘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뻑뻑했던 피로는 가시고 젖어있던 속옷도 대충 말라가고 있었다. 운길산 수종사를 한번쯤 찾았던 사람들은 이런 맛에 잊지 않고 다시 이 사찰을 찾아오곤 하나보다. 따뜻한 다실 분위기에 공짜로 차까지 얻어마셨으니 어찌 고맙지 않을 손가? 나오는 길에 시주함에 소박한 정성을 담았다.
삼정헌에서 감미로운 시간을 보낸 필자 일행은 하산 길에 올랐다. 낮에 잠깐 녹았던 길이 저녁이 되면서 다시 살얼음이 살짝 얼어 무척이나 미끄러웠다. 내리막길에서 우려하던 일이 기어코 일어나고야 말았다. 2명의 대원이 급경사로에서 미끄러져 넘어지고 말았는데, 부축을 해서 일으켜 놓고는 하늘을 향해 네 팔 벌린 나무 같다고… 유쾌한 농담을 주고받았다.
몸과 마음이 한없이 움츠러드는 겨울, 12월의 첫 주말에 시니어 회원님들과 더불어 운길산 수종사를 찾아 활기차고 좋은 시간을 보냈다. 엄동설한 맹추위에 대항하여 가슴을 활짝 펴고 씩씩하게 걸었던 회원님들의 얼굴에서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북한산 백운대 산행을 위하여 새로 개통한 북한산우이선 경전철을 탔다. 좌로 흔들, 우로 뒤뚱거리면서 무인 경전철은 잘도 달렸다. 사람이 만든 꼬마 전철은 운전원도 없이 사람들을 실어 날랐다. 도선사 입구 종점이 말끔하게 새 단장을 하였다. 산행인파가 근래에 보기 드물게 많았다. 능선을 따라서 지원센터를 거쳐 하루재에 이르렀다. 가을이 조용히 지나가고 있었다.
산장을 지나서 떠밀리듯 천천히 올랐다. 위문을 지나 정상까지는 밧줄을 붙잡고 바위를 오르는 본격적인 등반이다. 오르는 사람과 내려오는 등산객이 뒤엉켜서 정체가 발생하곤 하였다. ‘우측보행’ 누군가 부르짖지만 이내 인파에 묻히고 말았다. 서다가기를 수없이 반복하였다. 북한산의 주봉인 백운대 정상은 발 디딜 틈을 찾기 어려웠다.
친구와 품앗이로 기념사진 한장 겨우 남겼다. 미세먼지로 하늘이 희부옇다. 마치 구름 위에 떠있는 것 같다.맞은편의 깎아지른 듯 인수봉이 울긋불긋 단풍에 둘러싸여 있다. 암벽등반가들이 꽃술처럼 매달려 있는 모습이 장관이었다.
북한산 국립공원은 1983년에 15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그 면적은 서울특별시와 경기도에 걸쳐 78.5㎢에 이른다. 우이령을 중심으로 남쪽의 북한산 지역과 북쪽의 도봉산 지역으로 구분된다. 북한산국립공원은 보기 드문 도심 속의 자연공원으로 연평균 탐방객이 500만에 이르고 있어 ‘단위면적당 가장 많은 탐방객이 찾는 국립공원’으로 기네스북에 기록되어 있다.
북한산 기슭에는 세검정과 성북동·정릉·우이동 등 여러 계곡들이 있다. 거대한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주요 암봉 사이로 수십 개의 맑고 깨끗한 계곡이 형성되어 산과 물의 아름다운 조화를 빚어내고 있다. 삼국시대 이래 과거 2,000년의 역사가 담겨진 북한산성을 비롯한 수많은 역사·문화유적과 도선국사가 창건한 도선사를 비롯하여 태고사·화계사·문수사·진관사 등 많은 사찰, 암자가 곳곳에 산재되어 있다.
비봉에는 신라 진흥왕이 세운 진흥왕 순수비의 복사본이 있다. 이는 신라 진흥왕이 세운 순수척경비 가운데 하나로, 한강 유역을 신라 영토로 편입한 뒤 진흥왕이 이 지역을 방문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비문의 주요 내용은 진흥왕이 지방을 방문하는 목적과 비를 세우게 된 이유 등이 기록돼 있으며, 대부분 진흥왕의 영토 확장을 찬양하는 내용으로 이뤄져 있다. 진흥왕 순수비는 1972년에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북한산은 백운대(837m)·인수봉(810m)·만경대(800m) 세 봉우리가 마치 뿔처럼 날카롭게 솟아있는 데서 유래해 고려시대부터 근대까지 삼각산이라 불려졌다. 1915년 조선 총독부가 북한산이란 명칭을 사용한 이후 1983년 북한산국립공원 지정과 함께 북한산이란 명칭이 공식화됐다.
북한산성 입구로 내려가는 길은 울긋불긋 단풍이 한창이었다.
9월 26일 화요일 8시에 강남 시니어 플라자 해피 미디어단은 오대산 월정사를 향하여 출발했다. '노인 영화제'에 출품할 영화 촬영을 하기 위해서였다. 우리 미디어단은 메인 기자와 두 세 명이 보조하여 영화를 찍고 나머지 단원은 엑스트라 역할을 했다.
뒤늦게 서양화가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우배순 선배님은 영화 시나리오까지 써서 우리를 놀라게 했다. 얼마 전 공개 오디션으로 선정된 남 주인공과 여 주인공도 우리와 함께 탑승했다. 해피미디어단 서포터팀장인 임은정과장님도 함께 했다.
단원 중의 한분인 최기자님이 병환 중이라 같이 참석을 못하게 되었다. 덩달아서 낭군님도 편찮은 부인 곁을 지켜야 해서 부부가 다 못 가게 되니 정말 서운했다. 시니어들은 친구들을 위해서도 아프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차! 어떡하지! 화장품이 들어있는 파우치를 깜박 했네'
어제 아침 집에서 50m쯤 나왔는데 생각났으나 집에 다시 들렸다 나오면 늦을 것 같아서 포기했다. 남에게 흐트러진 모습 보이는 것을 용납 못하는 내 성격에 여간 신경 쓰이는 것이 아니었다. 고맙게도 친절한 육 선배님이 립스틱 셋트를 몇 번이고 빌려주어서 무사히 해결 되었다. 피부에 직접 닿는 화장품을 빌려주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육 선배님은 어제 나를 여러 번 감동시켰다. 낭군님과 통화 하는 걸 보니 여간 깍듯하고 공손한 모습이 아니었다. 지난 금요일 바자회 때 구입한 무농약 사과를 한 상자 통 채로 들고 왔다. 20여명 되는 미디어단원들이 마음껏 먹을 수 있도록 수시로 잘라서 나눠주었다. 꽤 번거로울 그 작업을 환한 미소를 머금은 채 기꺼이 하고 있었다.
"그 무거운 걸 어떻게 가져오셨어요?"
걱정되어 묻는 내게 낭군님께서 차로 가져다 주셨다 했다. 서로 배려하고 존중하며 살아가는 모범적인 부부의 예쁜 모습이었다.
월정사 가는 버스 안에서는 앞자리부터 돌아가며 노래를 했다.
사회를 맡은 총무님의 재치있는 말솜씨로 버스 안은 웃음꽃이 가득 피어났다.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외로움도 사람만이 느끼는 감정일까?
나는 노래 대신 원초적인 외로움의 존재. 사람의 마음을 다독여주고 위로해 주는 정호승시인의 를 낭송했다.
"아까 울컥 했어요"
소감을 밝히는 단원의 말에 '내가 시의 분위기를 제대로 살렸나' 싶어서 흐믓했다.
물 맑고 공기 맑은 월정사 주변의 전나무 숲길은 힐링코스이다. 오랜만에 수많은 사람들의 욕망이 뒤섞인, 탁한 공기의 서울을 떠났다. 청량하고 신선한 숲속의 공기를 마음껏 마실 수 있었다. 커다란 바위 사이로 흐르는 계곡물이 나를 유혹했다. 애써서 발을 담그고 싶은 마음을 떨쳐내야만 했다. '놀러 온 거 아니거든. 취재활동 왔걸랑.' 아마추어 연기자로 최단장님과 호흡을 맞춰보았다. 서로 사랑하는 연인의 애틋한 감정을 연기해야 하는데 그게 만만한 게 아니었다. 반복해서 코치를 해도 그럴듯한 분위기가 나오지 않으니 메인 촬영기자인 이정임님이 속 터져했다. 여러 번 엔지를 내고도 영 어색한 우리를 보고 단원들이 어이가 없어서 웃음을 터트렸다. 코메디가 따로 있나? 이런 게 바로 리얼 코메디다. 나에겐 없는 끼를 한탄해야만 했다. 주문진 횟집에서의 점심은 맛있고 푸짐했다. 갑각류의 천적인 나를 빠알간 대게가 기다리고 있었다. 달착지근하고 고소한 대게는 너무 매력적이다. 요즘 트렌드. 선찍후식을 해야만 하는데 깜박 잊어버렸다. 그건 순전히 대게 탓이다 걔한테 온통 마음을 빼앗겨서 생긴 일이다.
점심 메뉴인 회 정식 사진을 올려주신 분이 많이 고맙다.
그 다음 코스는 주문진 바닷가 씬이다. 바다! 그 바다에 왔다. 이성을 잃을 정도로 좋아하는 바다가 날 너무 강력하게 유혹해서 파도와 숨바꼭질을 했다. 밀려갔던 파도가 다시 밀려와서 내발에 닿을 것 같으면 신발이 젖을까봐 뒤로 도망갔다가 파도 눈치를 보며 살며시 다시 앞으로 나갔다. 심심한 파도는 처얼썩! 쏴아! 쉼 없이 노래하며 춤을 추고 있었다.
'감성이 살아있어야 살아있는 것이다.'
나의 강력한 주장이다.
감성은 그대로인데 세월만 간듯하다. 단원들 모두 바다에서 즐거운 한 때를 보냈다. 모래로 두꺼비집을 짓는다거나, 나 잡아봐라 놀이도 하며 화알짝 웃는 모습이 푸른 하늘을 닮았다.
다음 코스는 때마침 백일홍 축제가 열리고 있는 평창이다. 상당히 넓은 밭에 색색의 백일홍이 활짝 피어서 우리를 반가이 맞아주었다. 백일홍꽃 사이에 있는 의자에 앉아서 한 컷, 꽃길 사이를 걸으며 한 컷. 사진을 찍으며 우리의 소중한 추억을 만들어갔다. 우리 미디어단은 매주 목요일 강남 시니어 플라자 3층에 있는 미디어실에서 만나서 회의를 했다. 모처럼 영화 촬영 취재를 위해 산과 바다로 나오니 힐링도 이런 힐링이 없다. 완전 재밌고 행복했다.
엔돌핀이 무한대로 나온듯 싶다.
야호! 해피 미디어단 만세!
겸재(謙齋) 정선(鄭敾, 1676~1759)을 우리나라 진경산수(眞景山水)의 시발(始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있는 그대로의 풍경을 관념의 이입(移入) 없이 자연스럽게 펼쳐 보이자’는 화풍은 특히 중국의 관념적이고 과장된 그것에 비해 스케일이 적고 다소 초라해 보일지라도, 우리의 풍광을 소박한 그대로, 진솔하게 그림으로 남기는 데 큰 의의가 있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풍경을 화폭에 정지시켜야 하는 속성상, 실제의 입체 공간을 평면화하자면 화가의 고민이 깊어진다.
평론가나 미술기자들은 ‘오지호(吳之湖, 1905~1982) 이래 우리에게도 매우 친숙해진 인상파풍의 과학적 특성을 철저히 연구, 우리나라 언덕길의 전형적 각도, 전형적 시야, 경상 지방의 낯익은 한국의 땅이 그 살가죽을 부끄럼 없이 다 드러내놓는 겨울을 많이 그리는 작가’로 이원희(李源熙, 1956~)를 으뜸으로 꼽는다. 그의 구도는 웅혼하여 일체의 장식이나 꾸밈이 없다. 거칠고 척박한 산비탈 뙈기밭을 그대로 그려낸다. 봄부터 씨앗을 뿌리고, 김매고, 물 주고 가꾼 농작물들이 나름대로 결실을 맺고, 농부의 손길로 추수되고 난, 빈 밭에 서리가 희끗하다. 이제 이 황토의 밭들은 겨우 내내 찬바람 눈서리에 뒤척이다, 다음 봄 새 씨앗을 심을 때까지 아픈 몸부림을 할 것이다.
이원희 화가는 경북 의성 안평리의, 궁벽한 마을 산비탈에 서서 내려다본 풍경을 눈에 가득 담는다. 야트막한 왼편 언덕을 따라 이어진 황톳길이 작은 밭을 나누어 가며 구릉을 지나 야산으로 이어진다. 계곡이 깊지 못하니 물이 흐를 리 없고 땅 모습이 평평하지 못하니 경사 따라 밭둑을 이루며 대여섯 곳의 밭 자리를 구분 짓는다. 길섶 소나무의 모습을 보니 이곳은 바람받이임에 틀림없다. 가시나무 떨기 몇 그루만 자라는 척박한 곳이지만 농부는 한 삽, 한 삽, 돌을 골라내고 풀뿌리도 솎아내며, 오랜 날들 뙈기밭을 일구었을 터다.
화가는 경북 경산에서 나고 자라며 노상 접했던 풍경이기에 원숙한 필치로 이 현장을 실경으로 그려냈다. 이 작가의 다른 그림에서도 추수 후의 황량한 논밭은 대표적 주제가 되었다. 모교인 계명대학교에서 제자를 가르치되 데생 과정을 혹독하게 검증해 ‘계명대 출신은 스케치 실력이 제일 뛰어나다’는 칭송을 받고 있다.
인물화도 마음까지 그려낸다는 중평이다. 섬세한 극사실의 화필로 고(故) 김영삼 전 대통령의 표준 초상화, 박근혜 전 대통령의 초상화를 그렸고, 역대 대법원장 두 분, 국회의장 다섯 분의 초상화 또한 이 화백의 작품이다. 대기업 총수를 비롯한 유명 인사들의 초상화도 밀려 있어, 내 아내의 초상을 그려주겠다는 약속은 언제나 지켜지려는지….
이 그림 는 최근 온라인 옥션에서 270만원을 주고 낙찰받았다. 고향의 선산(先山) 가는 길과 얼마나 흡사하던지, 거실 벽 중앙에 바다 그림과 바꾸어 걸고, 해지도록 뙈기밭에서 뛰놀던 유년을 회억하는 달콤한 향수에 젖는다.
김승연(金承淵, 1955~)은 홍익대학교에서 서양화를 전공, 뉴욕 주립대에서 서양화와 판화로 석사학위 취득 후 모교 판화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그는 ‘서울의 야경’, ‘거리의 낮 풍경’을 리얼하게 판화로 표현하고 있다. 1970~1980년대의 채색 판화에서 1990년 초부터는 흑색 단색의 동판화 , 시리즈를 제작 발표해왔다. 서울의 야경은 불빛에 갇힌 거리에, 건물들과 차량의 그림자들을 메조틴트(mezzotint) 기법으로 디테일하게 묘사해 보는 이들에게 블랙홀에 빠지는 듯, 꿈꾸는 듯, 환상의 파노라마를 경험하게 한다. ‘사진이 표현할 수 없는 세계를 표현하는 데 성공했다’는 심사평과 함께 1993년 ‘루블리아나 국제 판화 비엔날레’에서 ‘차석상’을 수상하고, 2011년 ‘국제메조틴트 페스티벌’에서도 ‘전통판화상’을 수상하면서 서울 야경이 국제적으로 명성을 얻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대영박물관에서도 작품을 소장하는 영예를 안았다.
“밤 풍경이 낮의 풍경보다 사실적이고 감성적 느낌이 풍부하고, 불빛 하나하나가 자기의 존재를 알리려는 아우성 같은 느낌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는 데 보통 한 달이 걸리는 고행(?)을 작가는 계속해오고 있다.
는 벌써 15년 전에 인사동 어느 화랑에서 60만원을 주고 구입한 작품이다. 판화는 그때나 지금이나 작품의 복제성 때문에 다른 미술품에 비해 가격이 저렴한 편이다. 작가는 한 작품당 대개 10~30여 점씩 판화로 찍는다고 했다. 그러나 전시회에서도 판매되는 작품이 4~5점에 불과해 작품 구상에서 완성까지 두어 달, 틀과 유리를 맞추고 10여 점을 판매해도 500여 만원의 수입이 안 되니 허무한 일이다.
“두 개 또는 그 이상의 작품들이 같은 것이란 사실이 발견되면, 예술성에 대해 만족하거나 행복해하는 게 아니라, ‘하나를 제외한 나머지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유일한 예술 작품을 향한 환상 속에서 판화의 인식과 보편성이 무시되고 있다”고 작가는 고백한다.
란 작품은 뉴욕의 예스런 건물의 계단에서 기둥과 추녀, 그리고 건물 앞에 선 나무의 그림자까지 한낮의 풍경을 정밀하게 찍어내어 현지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 작가는 우리 일상에 너무나 접하기 쉬운 풍경들을, 그러나 깊은 관찰과 섬세한 손길로 예술성 높은 독특한 작품으로 완성시키고 있다. 하염없이 작품에 눈길을 맞추다 보면, 우리는 작가의 의식 너머 고요한 심연(深淵)에 다다를 수 있지 않을까.
이재준(李載俊) >>
아호 송유재(松由齋). 1950년 경기 화성에서 태어났고 미술품 수집가로 활동 중이다. 중학교 3학년 때 , 을 읽고, 붉은 노을에 젖은 바닷가에서 스케치와 깊은 사색으로 화가의 꿈을 키웠다. 1990년부터 개인 미술관을 세울 꿈으로 미술품을 수집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