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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행문화 변천사
- 북한산, 도봉산. 관악산에는 빨강, 파랑, 노랑으로 차린 멋쟁이 등산객으로 붐빈다. 사회발전만큼 산행문화도 많이 변하였다. 수십 년 산을 찾으면서 느꼈던 산행문화의 변천사를 살펴본다. 복장이 화려해졌다. 예전에는 전문 산악인을 제외하고는 등산복을 따로 갖추지 않았다. 평소에 입던 셔츠와 바지, 운동화만 있으면 삼삼오오 산에 올랐다. 면바지, 셔츠에 땀이 흠뻑 젖어 생쥐처럼 보기 민망한 모습을 자주 보았다. 아웃도어 발달로 통풍과 발수는 기본이요, 패션전시장이 되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철따라 유행을 쫓아가기에 허리가 휜다. “운동 중에서 등산이 제일 돈이 적게 든다.”는 통설이 깨진지 이미 오래다. 유학 온 산행을 즐기는 학생이 어느 방송에서 “한국 등산객이 화려하게 입고, 많이 먹으며 산행은 적게 한다.”고 지적하였다. 외장보다는 내실을 다지는 산행문화가 필요한 대목이다. 취사가 사라지고 식당 뒤풀이로 발전 옛날에는 버너와 코펠이 기본 장비였다. 석유버너에 불 피우는 방법을 익히고 알코올버너, 코펠까지 갖춰 배낭을 메고 등산을 하였다. 산에서 지지고 볶아서 식사를 해결하던 때였다. 근래 등산복 브랜드로 사람의 외양을 구별하는 것처럼 유명 버너가 산행자의 위세를 판가름하였다. 친구들과 산에 갈 때에는 각자 역할을 정했다. 당시 전화통신 부족으로 연락할 수 없는 불참자를 예방하는 수단이기도 하였다. 필자는 버너 준비와 밥하기, 그리고 지금까지 변하지 않고 정상주를 담당하였다. 사회에 진출 후에는 젊은 시절에 부족하게 느꼈던 먹거리를 배낭에 가득 채우고 다녔다. 친구들과 어는 산에 갔을 때 이야기다. 고기를 구워서 막 먹기 시작하는데, 학생 한 명이 “고기 좀 먹고 싶다.”고 하였다. 옛일을 생각하여 합석을 흔쾌히 승낙하였다. 잠시 후 일행이었던 나머지가 우르르 몰려왔다. 그들에게 그 자리를 내주고 학생 때처럼 감자 된장찌개로 소주잔을 기울였던 아름다운 기억이 났다. 산마다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오르고, 계곡에는 음식물 찌거기가 쌓였다. 석유버너에 불을 잘 붙이는 사람은 귀한 대접을 받기도 하였던 먼 옛날이야기다. 취사가 금지되면서 환경이 정화되고 버너와 코펠은 자취를 감췄다. 다음부터는 도시락이 취사를 대신하였다. 친구끼리 어울리면 푸짐한 산상 뷔페가 열렸다. 맛 자랑 대회가 열렸다. 학창시절 소풍 때보다 더 즐거웠다. 정상에서 막걸리 한잔으로 천하를 호령하였다. 요즘에는 도시락 문화도 시들해지고 하산 후 뒤풀이를 즐긴다. 산행을 마무리하고 식당에서 오순도순 우정을 나누는 문화가 산행안전에 매우 바람직하다. 등산 출입로 식당은 항상 등산객으로 차고 넘친다. 산행은 놀이에서 필수 운동으로 성숙 대부분의 산 입장료가 있었다. 아침 7시 입장료 받기 전에 등산객이 몰리는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십여 년 전부터 입장료가 거의 없어졌다. 남녀노소 누구나 즐겨 찾는 산이 되었다. 옛날에 등산복에 배낭 메고 나서면 여행가는 한량으로 보는 경향이 있었다. 산행이 이제는 놀이가 아니고 건강을 다지는 필수 운동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쓰레기 되가져오기 등으로 산행문화가 성숙하였다.
- 2016-07-06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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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니자서전] 60살에 배운 사진, 도랑치고 가재잡다
- 1, 지리산 청학동서 세상을 만나다 필자는 촌놈이다. 지리산 삼신봉 아래 청학동 계곡에서 세상을 만나서다. 청학동은 경남 하동군 청암면 묵계리 일원을 이른다. 삼신봉에서 발원한 맑은 물이 기암괴석으로 둘러쳐진 계곡을 돌고 돌아 섬진강으로 이어진다. 하동읍까지 40리(약 15.7㎞), 진주시까지 100리(약 39.3㎞)다. 지금은 관광지로 많은 사람이 찾지만, 앞산 토끼와 뒷산 토끼가 서로 발맞출 수 있는 두메산골이었다. ‘정감록’을 비롯한 몇몇 옛 문헌에 신선들이 사는 이상향으로 등장한다. 청학이 노닐고 흉년, 질병, 난리가 없는 지상 낙원으로 신라 말기부터 전해오는 마을이다. 할아버지도 거창군 가조면 율리에서 그 이상향을 찾아 이곳에 삶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유불선합일경정유도교"의 신자들도 1960년대 초반부터 이곳에 보금자리를 틀었다. 한복을 입고 결혼 전에는 댕기 머리를 땋고 결혼 후에는 남자는 상투를 틀고 여성은 쪽 지은 머리에 비녀를 꽂는 풍습의 도인촌이다. 이곳으로 이주한 조부모와 부모는 화전을 일구어 밭농사를 지었다. 계곡 주위의 다소 반반한 터를 잡아 다랑논을 만들었다. 어느 가을날 그 밭에서 일하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빨치산에게 붙잡혔다. 부역을 시키거나 총살을 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소나무 둥치에 포박하여 둔 채로 그들은 떠나갔다. 어둠이 깔리자 두 분은 묶인 손의 밧줄을 간신히 풀고 일궈놓았던 논밭과 익어가던 곡식을 팽개친 채 빈 몸으로 10리(약 3.9㎞) 떨어진 대밭 몰이라는 아랫마을로 소개하여 삶의 터전을 새로 마련했다. 필자는 청학동서 배태하여 이곳에서 삼 형제 중 늦둥이 막내로 태어났다. 음력으로 1950년 2월 초나흘 새벽닭이 울 무렵이었다. 배냇저고리에 쌓여 한국전쟁을 겪었고 그곳에서 유소년시절을 보냈다. 끼니를 챙기는 어머니 곁에서 딸처럼 아궁이에 불을 지피어 드리기도 하고 들녘에서 나물을 캐기도 하였다. 닳고 닳은 놋쇠 숟갈로 감자 껍질을 벗겨드리기도 하였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하동읍에 있는 하동중앙중학교에 입학했을 때도 등잔불을 켜고 살았다. 밤에 공부하고 나면 콧구멍이 까맣게 그을렸다. 등잔불에 넣을 기름도 40~ 50분 걸어가야 하는 면사무소 근처의 가게에서 기름때 진득하게 낀 됫병에 짚으로 꼰 새끼줄을 묶어 조심스레 들고 와야 했다. 어머니 나이 33세에 필자를 낳았다. 큰 형님과는 10세, 둘째 형님과도 6세 터울이다. 할아버지의 만류로 9세에 초등학교에 입학(1958)했다. 징검다리가 있는 개울을 건너 신작로 고갯길을 돌고 도는 1시간 거리에 있는 청암초등학교였다. 공부 잘하고 달리기, 웅변, 그림 그리기 등 모든 부분에서 두각을 보였고 전교 학생회장도 했다. 중학교 역시 수석으로 입학하였고 3년 동안 1등을 놓친 적이 없는 수재로 지역주민의 기대를 받고 자랐다. 중학교 때는 같은 학년의 친구 집에 입주하여 공부를 도와주고 숙식을 해결한 적도 있다. 중학생이 가정교사로 일한 것이다. 중학교를 졸업한 후 초등학교 모교 졸업식에서 축사한 특별한 경험이 있다. 동네 결혼식의 축사도 도맡아 했다. 2. “당신은 중책을 맡게 될 거야!” 거창대성고등학교를 졸업(71)한 후 72년 곧바로 국민대학교 행정학과에 입학하여 1학년을 마치고 공군에 자원입대하여 관제병으로 3년 만기 전역했다. 이후 77년 10월, 대학 졸업 직전에 쌍용그룹 고려화재해상보험㈜에 공채로 입사했다. 특종보험 언더라이팅 업무를 하다 기획조사부로 발령되어 신상품 개발 업무를 하여 국내 최초 골프보험, 낚시보험 등의 레저보험을 개발하였다. 79년 4월 15일, 다섯 살 아래인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결혼하였다. 보험감독원 등 외부기관 연수에서 늘 우수한 성적을 거두고, 재무부 장관 표창도 받았다. 83에는 스위스 취리히에 있는 스위스보험연수소(SITC)를 수료(사진)했다. 중견 사원이 되었을 때는 운영상 문제가 있었던 제주지점, 대전지점, 동대문지점장으로 부임하여 업적을 크게 올렸다. 그런 덕으로 96년 초 직장의 별인 임원으로 승진해 부산, 경남, 제주를 관장하는 본부장(부산 주재)을 지냈다. 3, 47세에 용도폐기 호사다마라 했던가? 임원으로 승진한 지 2년이 채 되지 않았던 1997년 12월 말 갑작스럽게 해임되었다. 충격이었다. 나이 47세 때다. 유능한 직원으로 인정받으며 회사 일에 매달려온 지난 날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한창 일할 나이였고 두 아들도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다닐 때였다. 아버지로서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이 필자에게 거는 기대를 생각하면 더 얼굴을 들 수 없었다. 넥타이를 매고 정상 출근하듯 집을 나서 공원에서 배회하다가 퇴근 시간에 맞춰 귀가하는 사람들의 얘기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필자가 바로 그 처지가 되었다. 4. “당신 제 명에 살게 하려고” 해임된 그 날 집으로 돌아가면서 어떻게 아내에게 알려야 하나를 고민했다. 믿고 있는 아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망설여지기도 하였으나 그날로 아내에게 사실을 알렸다. 가족의 의미가 무엇인가? 서로를 알고 서로를 도울 수 있어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지만, 용기를 내어 알렸다.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던 일이어서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잠시 시간을 보낸 아내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참 잘 됐어요. 당신 제 명에 가게 하려고 하늘이 도왔나 봐요! 그동안 애 많이 쓰셨어요. 어디 산 입에 거미줄 치겠어요.” 우리 세대들이 다 그러했듯 나 역시 목표달성을 위하여 몸을 사리지 않고 밤낮으로 일했다. 거래처 접대와 직원 격려를 위한 회식 자리로 자정 무렵에야 겨우 혼자 살던 사택으로 돌아가기 일쑤였다. 이렇게 살다가는 필자가 제 명에 갈 수 없겠다 싶은 생각을 수차례 하였을 것이다. 5. “설상가상”, 이런 때 쓰는 말이구나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퇴직한 다음 해 IMF 위기가 닥쳤다. 먹고 사는 일이 걱정거리로 등장했다. 재취업하려 발버둥 쳐봤지만, 필자가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다단계 모집 광고에 빠져들기도 하였다. 그런 현실은 분노를 부추겼고 속이 더 상했다. 분노를 일간신문 독자 투고란에 토로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행동은 필자에게 도움이 되지 않음을 깨닫고 마음을 비워가기 시작했다. 체면이나 자존심을 조금씩 버렸다. 그런 과정에서 마음을 가장 잘 가라앉혔던 생각은 “나의 직장 운이 거기까진 데 어이하겠어”라고 현실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마음이 한결 안정되었다. 주어진 현실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를 찾기 시작했다. 6, 마당쇠가 되다 생계유지를 위한 일을 찾아야 했다. 퇴직 6개월이 지나서야 고용노동부 고양시고용센터에 들러 실업급여를 청구했다. 처음엔 쑥스럽고 창피하여 신청을 미루고 있었다. 국민연금을 해지하여 생활비로 사용했다. 다른 보험도 모두 해지하였다. 그 후 별별 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아는 사람의 도움으로 만화방을 창업했다. 누워서도, 엎드려서도 만화책을 볼 수 있는 새로운 시스템 도입으로 좋은 호응을 얻어 사업이 잘됐다. 수입을 조금이라도 늘리기 위하여 라면을 직접 끓여 팔기도 하였다. 하지만 시대조류였던 PC방이 성업하면서 이 업종도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그래서 이 사업을 접고 경기 부천시 상동에서 부대찌개 음식점을 창업해 운영했다. 90% 이상이 성공하지 못한다는 통계를 누누이 들으면서도 많은 퇴직자가 덤벼드는 것이 요식업이다. 필자도 그런 사람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처음엔 고전을 면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회사 다닐 때 몸에 익힌 고객서비스 정신이 도움되어 친절한 음식점으로 소문이 나기 시작하면서 수익이 괜찮아졌다. ‘이런 맛에 음식점을 하나보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몸이었다. 계속 아팠다. 특히 나이도 환갑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진정한 삶이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계기를 맞았다. 때마침 가게를 욕심내는 사람이 나타나 적정한 가격 협상 끝에 가게를 넘겼다. 그 후에도 먹고 살기 위해서 다양한 일을 이어갔다. 월 40만 원을 받으며 작은 회사의 조경관리사로 취업하여 매일 아침 긴 대나무 빗자루로 마당을 쓸고 쓰레기봉투를 치우는 일도 하였다. 마당쇠가 된 셈이다. 대형 고깃집 일산한우마을 점장도 하였고 일당을 받기 위하여 MBC 드라마 ‘주몽’ 엑스트라 출연도 해보았다. 마음을 내려놓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좋은 경험이 되었다. 강의 콘텐츠가 생산되었기 때문이다. 7, 친구의 비명횡사, 인생의 전환점 되다 57세 때 가까운 친구를 비명횡사로 잃었다. 두 살 아래의 직장 친구였다. 평소 술은 하지 않았고 담배도 수년 전에 끊어 건강한 사람이었다. 그는 추석 전날 다른 친구들과 남한산성에 올랐다. 산행 중 가슴에 통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구급 차량을 불렀으나 고향 가는 차량 행렬에 막혀 늦게 도착한 119차량에 실려 가까운 성남시의 한 병원으로 가는 도중에 숨을 거두었다. 정말 황당했다. 친구의 죽음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퇴직 후 보낸 10년의 세월을 되돌아보았다. 열심히 산다고는 했지만, 내로라할만한 일은 이루지 못하였다. 이렇게 살다가는 필자도 친구와 같이 무의미한 생을 마감하겠구나 싶었다. ‘100세 장수시대를 맞아 보람 있고 즐거운 생활을 하기 위해선 무엇을 해야 할까’하는 고민을 시작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이제부터는 필자를 위한 삶을 살아야겠다는 것이었다. 8, 60살에 사진 배우다 직장생활과 생업으로 잊고 있었지만, 은퇴하면 햇살 좋은 언덕에 캔버스를 세우고 수채화를 그리는 꿈을 꾸곤 했었다. 그런데 우연한 기회에 필자가 사는 고양시에서 무료로 하는 사진강좌를 알게 되었다. 당시에 필자는 블로그 ‘촌놈의 세상보기’를 운영하면서 사진을 곁들인 글을 쓰고 있었다. 좀 더 좋은 사진을 생각하고 있던 때여서 강좌에 참여했다. 화필 대신에 카메라를 잡은 셈이다. 2010년 7월부터 한 달에 3회 6개월 강좌를 들었다. 필자 나이 60대 중반이었다. 사진에 특별한 재능이나 솜씨를 갖고 있지 않은 초보자였다. 카메라도 소형 디지털카메라 한 대가 전부였다. 하지만 지리산 청학동 계곡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감성과 초등학교 때 수채화를 그렸던 경험, 전 직장에서 맡았던 홍보 관련 일과 사보편찬 업무가 도움돼 일취월장했다. 사진 취미활동은 여가를 무료하지 않게 보내면서 건강도 챙기고 여러 사람이나 자연과 함께함으로써 외롭지 않게 보낼 수 있게 했다. 때로는 작품으로 부가적 소득과 재능기부도 하면서 평생을 현역처럼 살 수 있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 했다. 사진을 배우기 시작한 3개월 뒤인 2010년 10월부터 공인 사진작가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일반인이 사진작가가 되는 길은 한국사진작가협회가 인정하는 전국사진공모전에서 입선 이상을 하여 획득한 점수가 50점을 넘겨야 했다. 입선하면 2점을 받는다. 일 년 동안에 28회 출품해 절반 이상 낙선하였으나 어쨌든 15회의 수상으로 사진작가 명함을 달았다. 첫 번째로 출품했던 제1회 너브내전국감성사진공모전에 ‘형상II’이 동상의 영예를 안겨주어 출발이 순조로웠으나 다른 공모전에선 잘 뽑히지 않아 포기할 생각도 수차례 하였다. 그러나 사진 자체가 재미있었다. 꾸준하게 찍으며 관련 서적을 사서 공부하고 기회가 되면 망설이지 않고 재능기부도 마다하지 않았다. 사진을 배우기 시작한 3년 만인 2013년 7월 국전인 대한민국사진대전에 ‘무한 질주’라는 작품이 입선했다. 2013년 10월에는 보건복지부와 국민연금공단에서 주관한 ‘8만 시간 디자인공모전’의 사진 부문에 ‘몰입’이라는 작품이 우수상을 받았다. 11월에는 부산일보 주최 제21회 ‘부일 전국사진대전’에 출품한 ‘닭장’이 1,166점 중에서 좋은 심사평으로 2위인 우수상 영예를 안았다. 부산일보는 2013년 12월 26일 자 기사에서 이렇게 전했다. "변용도 씨의 우수상 '닭장'은 울타리 안에서 바깥세상을 바라보는 닭의 붉은 머리 부분을 어두운 배경에서 강렬하게 보여 주어, 닭의 모습에서 감옥에 갇힌 사회의 한 단면을 풍자하는 듯한 표현이 출중했다는 평을 받으며 수상작으로 선정됐다." 9. 사진취미, 인생이막의 텃밭이 되다 필자는 사진을 ‘카메라로 쓰는 이야기’로 정의하고 ‘포토스토리텔러’라 자칭한다. 사진은 찍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다.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하여 끊임없는 노력을 한다. 지금까지 찍은 사진의 숫자가 37만 장이다. 카메라는 가장 아끼는 친구다. 늘 함께한다. 사진은 취미가 아닌 일상이 됐다. 사진 활동이 바탕이 되어 다양한 분야로 활동영역이 확대되어 다용도(多用途)로 후반생을 바쁘고도 보람 있게 산다. 사진이 인생이막의 텃밭이 되었다. 필자는 그 텃밭에 글솜씨, 강의 솜씨를 추가로 뿌렸다. 그런 씨앗에서 싹이 돋고, 잎이 무성해지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기 시작했다. 2008년에는 ‘미역국’ 외 다수의 작품으로 ‘순수문학지’ 신인상에 당선되어 수필가 명함을 달았다. 2012년에는 필자의 블로그 ‘촌놈의 세상보기’가 대한민국 100대 우수블로그로 선정됐다. 사진작가, 사진 칼럼니스트, 수필가, 저자, 강사(은퇴준비, 생애 재설계, 변화관리, 사진), 방송인(KBS 1TV ‘아침마당’, SBS라디오 ‘유영미 마음은 언제나 청춘’ 시니어리포터, 머니투데이 행복특강, 토마토TV 강연, 아리랑TV, CBS라디오, 한국직업방송), 기자(시니어조선 사진명예기자, 사회연대은행 KDB시니어브리지센터 두드림기자), 유어스테이지 시니어리더 겸 시니어리포터, ‘디카와 놀자’와 세화포토클럽 운영자다. 최근엔 경제신문 이투데이 자매지 브라보 마이라이프의 동년기자로 활동을 시작했다. 2013년 11월 ‘아름답게 보니 아름다워’, 2016년 1월 ‘카메라로 쓴 아름다운 이야기’를 출간하여 인터넷 교보문고에서 판매 중이다. 대우조선해양㈜와 미래창조과학부 산하 국가과학기술인력개발원, 고려대 평생교육원 액티브시니어전문가과정 전임강사다. 서울시 서초구 우면동에 있는 우면청춘대학의 사진강좌를 2년째 맡아오고 있다. 사진이 근간이 되어 활동 영역이 확대되었다. 10. 도랑 치고 가재 잡다 대학을 입학하면서 서울 생활이 시작되었고 지금은 경기 고양시 외곽의 한적한 전원 마을에서 자그마한 주택을 지어서 살고 있다. 경제적으로 넉넉하지는 아니하여도 현실을 인정하고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하고 싶은 일 하며 일상을 즐긴다. 즐겁지 않으면 인생이 아니라고 한 어느 노부부 여행가의 생활 철학을 닮아가려 한다. 젊은 시절에 느끼지 못하였던 보람을 느끼며 산다. 전반생보다 후반생을 더 바쁘고 활기차게 보낸다. 그 바탕에 사진이 있다. 많지는 않아도 용돈도 번다. 그야말로 도랑 치고 가재 잡는 형국의 삶을 산다. 2차 성장을 한 셈이다. 하버드대 성인발달연구소 윌리엄 새들러 교수가 “내 생애 최고의 순간을 재창조하는 것이 인생의 2차 성장이라고 말하고 있듯이 제2의 절정기를 만들기 위해 성장을 멈추지 않는다. 변함없는 도전이다. 필자의 이름을 ‘변함없는 용기로 도전하는 남자’로 풀이해본다. 그런 덕분에 누구나 한 번쯤 출연해보고 싶은 KBS 1TV의 ‘아침마당’(2014, 11, 24)에 섭외를 받아 출연했다. ‘다시 시작하는 인생- 나의 두 번째 직업을 소개합니다’란 주제였다. 사진작가로, 은퇴준비강사로 안사람과 함께 출연해 삶의 정점을 새로 찍었다. 11, 생애 최고의 순간을 찾아 세계적 사진작가 프랑스의 마크 리부가 있다. ‘에펠탑의 페인트공’, ‘꽃을 든 여인’ 등 유명한 작품을 만든 현존하는 사진작가다. 기자가 물었다. “선생님의 작품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은 어느 것입니까?” 리부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일 찍을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를 감동하게 한다. 세계 최고의 경지에 이른 작가이지만, 더 나은 작품을 얻기 위하여 계속 노력하겠다는 꿈을 꾼다. 희망으로 산다. 진정한 대 작가의 마음이란 생각이 든다. 그런 마음과 자세가 새로운 경지로의 작품세계를 창조한다고 볼 수 있다. 오늘에 머무르지 않고 발전을 거듭하려는 삶의 철학이, 남이 넘볼 수 없고 흉낼 수 없는 작품 세계를 만드는 것이라 여겨진다. 미래를 향해 또 다른 꿈을 꾼다. 필자 또한 늘 이제 시작이라는 마음으로 아직 오지 않은 생애 최고의 순간을 찾아 도전의 발길을 멈추지 않으련다. 또한 하늘이 인생의 구석구석에 베풀어주신 은혜에 보답하고 경험과 지혜를 이웃과 사회를 위하여 아낌없이 다 쓰고 가리라.
- 2016-07-04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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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공예 체험장을 찿아서
- 경북 울진군 하면 한손을 허리 등쪽으로 올리고 또 한손은 머리 아래쪽으로 내렸을 때 등 뒤에서 닿지 않는 곳이라고 한다. 지리적 위치가 도시와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어서 같은 하늘 아래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 문화 혜택을 거의 받지 못 하는 곳이 기도 하다. 그러나 넓고 깨끗한 바다와 해수욕장, 깊은 계곡과 병풍처럼 둘러싸인 높은 산, 전국에서 물 좋기로 유명한 온천, 바다에서 싱싱하게 잡히는 울진대게, 가을이면 소나무 밑에서 자라는 자연산 송이버섯, 지방색을 갖춘 지역축제 등 아직도 때묻지 않고 공기 좋고 물 맑은 곳이고 노후에 살기 좋은 곳이라고 생각한다. 요즘 점점 셀프가구나 DIY 제품이 나오면서 집안가구나 인테리어 등을 내손으로 만들어 보자고 하시는 분들이 많으시죠. 하지만 혼자 배우기엔 매일 만들 것도 아닌데 공구도 사야하고, 재료도 구해야 되고 번거로운 건 사실이고 만들면 뿌듯하지만 필자가 그런 분들을 위해 목공예 배우는 곳을 소개시켜 드립니다. 이곳에서는 도시에서도 배우기 힘든 목공예 체험장을 남중학 소장 부부가 운영하는 유아 단체반, 초등 저학년반, 초등 고학년반, 자연생태공예 지도교사반, 이번에 새로 생긴 시니어반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중에서도 시니어반의 활동이 가장 왕성하고 적극적이라고 한다. 엑스포 공원내에 위치하고 있어서 아쿠아룸, 솔밭 산책로, 도자기 체험장 등 다양한 시설을 이용할 수 있어서 스트레스 해소와 휴식 공간 할용에도 안성 맞춤이다. 처음 입교하면 목재의 성질에 대해서 배우게 되는데 목재는 나무에서 얻는 천연재료 이기 때문에 일정하지 않고 각기 다르다고 한다. 바람, 양지, 음지, 토양, 입지, 강우, 나무 사이의 경쟁 등으로 인해서 각 나무는 색상, 밀도, 나뭇결의 형상, 생산 목재의 기능적 특징 등이 다르다고 한다. 목재를 이용해서 가구를 만들면 각 판재는 사용 공구를 통해서 각기 독특하게 표현할 수 있다고 한다. 나무의 생물학적 측면과 자라는 과정에서 생기는 변수를 이해 하려는 노력이 목공의 출발점이라 한다. 그리고 울진에서 목공자재로 유명한 것은 금강소나무라고 한다. 금강소나무의 특성은 생육조건이 좋지 않은 척박지나 암반지역에서 더디게 자라고 껍질은 박피로 병충해에 강하며 나이테가 일반소나무에 비해 3배 가량 촘촘하고 뒤틀림이 적고 송진의 함유량이 많아 강도가 높고 쉽게 썩지 않는다고 한다. 400년이 지난 조선시대 무덤에서 발견된 황장목관의 나이테가 그대로 보였고 600년이 넘은 봉정사 극락전이나 경복궁에 사용된 금강소나무를 다시 재활용 자재로 쓸 정도로 그 보존성이 뛰어나다고 한다. 이러한 금강소나무가 금강송이다. 금강송의 가치는 탁월한 목재, 우수한 산림유전자원, 풍부한 산림문화자원으로 그 가치는 무궁무진하다고 한다. 필자도 목공에 관심이 있어서 배워보기로 했는데 우선 안전수칙에 대하여 교육을 받은 후 수공구 및 전동공구 사용법을 설명들은 후 공구박스를 제작해보기로 했다. 목재를 자르는 방법, 다듬는 방법, 목재 핀으로 고정 하는 방법을 교육받은 것과 같이 시행 해본 결과 시간가는 줄 모르고 조금 미흡하지만 멋진 작품이 탄생되어 신기하기만 하였고 나무에서 내뿜는 피톤치드 향은 향수보다 좋은 냄새를 풍겼다. 목공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기회가 있으면 이용해 보시기를 적극 추천한다.
- 2016-06-29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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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 이주! 찬성 VS 반대] 제주는 설렘으로 남겨둔다.
- 시니어를 대상으로 ‘어디서 살 것인가’라는 주제로 강의할 때마다 제주에서 살고 싶은 사람을 조사해 본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제주에서 살고 싶다고 선뜻 대답하는 사람이 뜻밖에 적은데 놀란다. 그때마다 왜 제주에 가서 살기를 꺼리는지 그 이유를 물어본다. 맛난 음식도 매일 먹으면 물리는 것처럼 제주도 그곳에 살면 감동이 반감할 거라는 논리가 그 하나다. 그래서 가끔 여행하는 건 좋지만 가서 살기는 싫다는 것인데 충분히 이유가 되는 것 같다. 또 다른 사람들은 제주의 기후를 들었다. 겨울에 육지보다 따뜻한 건 좋은데 비와 바람이 많고 태풍이 올라오는 길목이라서 특히 서쪽과 남쪽은 살기 좋지 않다는 것이다. 제주가 중국 사람들의 세상으로 변해 가는 것 같고 외국인들의 범죄도 잦아 무서워서 가기 싫다는 사람들도 있다. 실제로 제주는 오래전부터 중국인들의 투자지로 주목받고 있다. 그들만의 거대한 게스트 하우스가 곳곳에 건설되고 있는 게 사실이다. 최근 뉴스를 보니 지난해 제주에 무비자로 입국한 외국인이 60만 명을 넘었고 불법 체류자도 4,000명을 넘었다고 한다. 그 부작용으로 외국인들의 범죄도 상당히 잦다고 하니 이런 이유도 수긍이 간다. 그 외에 육지로 왕래하기 불편하다든가 의료시설이 부족하다는 등의 이유를 드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필자는 조금 다른 이유로 제주에서 사는 것을 꺼린다. 우선 그동안 서울에 살면서 형성해 놓은 인간관계를 오프라인으로 계속 유지하고 싶다. SNS가 일반화되었다고 하나 서로 대면하는 것과 비교할 수 없다. 대학교와 고등학교 동창들과의 모임은 예외로 하더라도 몇 군데 활동하는 포럼의 정기모임, 걷기 행사, 당구 모임, 저자 강연 등에서 만나는 시니어들과 막걸리 나누면서 사는 이야기 하는 것이 좋다. 갑자기 모이는 번개팅도 무료한 일상에서 특별한 활력을 준다. 지하철이 편리한 교대 앞 곱창집이나 사당동 보쌈집이 번개팅 장소로 좋다. 강의 요청을 받을 때면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설렘으로 기다려진다. 강의 후에 몇몇 분들과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고 교류한다. 때로는 그들로부터 새로운 강의 요청을 받기도 한다. 그림이 보고 싶으면 지하철 타고 인사동으로 간다. 갤러리를 돌고 나서 북촌에서 초등학교 친구를 만나서 소주 한잔한다.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영화를 골라 볼 수 있고, 공연티켓을 가끔 선물 받을 때는 정장을 입고 아내와 예술의전당을 찾는다. 봄에는 어린이대공원 벚꽃 비를 맞는다. 여름에는 도봉산 계곡에 앉아 작은 물고기들을 보면서 새소리, 바람소리를 듣는다. 가을에는 낙엽이 흩날리는 창덕궁을 걷는다. 서울에서 이런 일상의 재미를 누리고 살다가 성산포의 일출과 외돌개 쪽빛 파도에 반사되던 보석 같은 햇살, 용눈이 오름을 뒤덮은 억새와 바람, 곶자왈의 검은 바위와 원시림의 습한 향기, 김대건순례길에서의 묵상 등이 지독히 그리운 어느 날 제주행 항공기에 몸을 싣고 싶다. 그 가슴 벅찬 설렘을 위해 제주는 마음 속에 남겨두고 싶다.
- 2016-06-27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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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휴가지에서 생긴 일] 설악산 옥녀탕에서 이런 일도.
- 요즘은 다들 형편이 좋아졌는지 휴가철이나 무슨 때만 되면 외국으로 나가는 사람들로 인천공항이 북새통이 된다고 한다. 소시민인 필자는 아이가 어릴 적부터 어른이 되어 더는 아빠 엄마와 휴가를 같이 보내려 하지 않게 되었을 때까지 여름휴가나 겨울휴가 여행을 국내, 특히 동해안으로 갔다. 우리나라 곳곳 다 아름답지만, 그래도 한계령을 넘어 설악산으로 가는 구불구불 길이 좋았다. 고개 넘어 맞닥뜨리는 동해의 탁 트인 파란 잉크 빛 바다와 특히 내가 좋아하는 먹거리 해산물이 풍부하다는 점이 그곳을 여행지로 꼽는 첫 번째 이유였다. 가수 양희은 씨의 노래처럼 한계령은 나에게 어서 오라고 손짓하는 것만 같아 정답고 한계령 올라가는 길에 있는 한옥 민박집이나 바람불이라 불리던 계곡 야영장은 우리 가족에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남겨주었다. 지금은 어딜 가도 호텔이나 콘도, 화려한 리조트로 쾌적한 숙박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 우리 가족은 텐트를 준비해 자연 속에 머무르는 방법을 택했는데 남편이 아들에게 숲 속에서 지내는 낭만을 알려줘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고 나도 도심과 다르게 밤하늘의 쏟아질 듯 촘촘히 빛나는 별빛을 볼 수 있고 풀벌레 소리 들리는 야외가 마음에 들었다. 아들이 고사리손으로 제 아빠를 도와 텐트 치는 걸 보는 것도 대견하고 즐거웠다. 아무튼, 우리 가족은 아들이 서너 살 무렵부터 차에 온갖 캠핑 장비를 싣고 여행을 떠났다. 엄마인 나는 휴가 동안 먹을 밑반찬이며 간식까지 완벽하게 준비해 바닷가에서 회를 사 먹는 일 외에는 집에서와 똑같이 먹을 수 있도록 준비했다. 요즘은 어디를 가도 그 근처의 특산품이 무언지 맛집은 어디 있는지 찾아다니며 식도락을 즐기지만, 그땐 왜 그리 힘들게 양념 하나까지 준비했는지 아마 그게 현명한 아내와 엄마의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 우습기만 하다. 자청해서 고생한 거지만 그런 게 또 즐거웠고 준비하는 동안 행복했었다. 승용차에 텐트며 오색파라솔 달린 테이블, 온갖 캠핑 장비를 갖추고 떠나는 날은 가족 모두 들떠서 가슴이 설레었다. 설악산으로 가는 길로 미시령과 한계령이 있는데 미시령 쪽도 휘몰아치는 물살이 시원한, 계곡을 끼고 달릴 수 있는 멋진 길이지만 주로 한계령을 지나서 갔다. 한계령은 필자가 정말 좋아하는 곳이다. 꼭대기에 있는 한계령 휴게소는 그림처럼 아담하고 경치가 좋아 마음에 들었다. 가끔은 온통 안개에 휩싸여 한 치 앞도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일 때도 있긴 했지만 대부분 맑고 청량한 공기와 둘러 보이는 경치가 너무나 멋졌다. 짙은 갈색의 휴게소 건물도 운치 있고 안으로 들어가 테라스의 나무로 된 테이블과 의자에 앉아 강원도 명물 음식을 맛보는 것도 큰 즐거움이었으며 특히 테라스 끝쪽에서 사진을 찍으면 구름 위에 떠 있는 듯 정말 멋진 풍경의 사진이 되어서 매번 그 자리에서 사진을 찍곤 했다. 그래서 설악이나 동해안에 갈 때는 항상 한계령을 거쳤는데 요즘은 빠른 길이 생겨서 한계령 고개를 넘는 차량이 많지 않다는 소식이 들려 어쩐지 애잔하고 마음이 쓸쓸하다. 한계령에 오르기 전 초입에 시원한 물줄기가 모여 옥빛의 깨끗한 연못을 이룬 옥녀탕이라는 계곡이 있는데 그곳에 나는 재미있는 추억 하나가 있다. 어느 해인가 설악산으로 휴가를 갔을 때였다. 시끌벅적한 동해안 대진항의 분위기도 만끽하고 맛있는 회와 싱싱한 해산물 구경도 실컷 하는 등 좋은 시간을 가졌으며 다음날은 그곳에서 좀 떨어진 동명항이라는 작은 포구에도 들러서 또 다른 맛과 즐거움을 느끼기도 했다. 그런데 정작 설악산에서는 너무나 피곤했다. 모든 사람이 다 여기로 모인 듯 인파에 뒤덮여 온통 계곡이나 길이 복잡하고 소란스러웠다. 여행 마지막 날에 나는 몸과 마음이 지쳐서 몹시 피로함을 느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예외 없이 한계령을 지나 구불구불 산길을 내려오다가 옥녀탕 앞에 이르렀다. 여기서 잠깐 쉬어가자고 내려서 보니 정말 맑고 깨끗한 계곡 물이 있었다. 필자는 물을 너무 좋아한다. 수영을 그리 잘하는 것도 아니면서 물만 보면 뛰어들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설악산의 계곡에서 실망했던 마음이 옥녀탕을 보니 다 풀어지고 티셔츠와 핫팬츠 차림이었던 나는 옥녀탕 물속으로 뛰어들고 말았다. 정말 시원하고 기분이 좋아서 두 팔로 물을 휘휘 저으며 수영을 했다. 남편이 그만 나오라고 손을 흔들었는데 그때 지나가던 순찰차에서 마이크로 “옥녀탕에 계신 분 빨리 나오세요, 들어가면 안 됩니다.” 라는 소리가 들렸다. 주변에서 쉬고 있던 관광객들도 웃으며 빨리 나오라고 손짓을 해 댔고 누군가는 휘파람까지 불었다. 깜짝 놀라서 재빨리 나왔는데 어찌나 부끄러웠는지 모른다. 그곳에 들어가면 안 되는 줄 몰랐고 주변 어디에도 들어가지 말라는 안내판이 없었다고 변명처럼 중얼거렸다. 벌금이라도 내야 하나 걱정했지만, 경찰관을 태운 순찰차는 자리를 떴다. 그저 산에서 내려오는 물이 있는 설악산 계곡이니 들어가도 괜찮을 줄 알았는데 순찰차의 경고를 듣고는 이름 있는 계곡에 무단 침입한 건 잘못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변에 있던 많은 관광객에게도 무척 부끄럽고 미안했던 기억이 난다. 자연을 아끼고 보호해야 하는데 깨끗한 물이라고 텀벙 뛰어들다니 너무 철없는 행동을 했다. 그후에도 휴가 갈 때 올 때 그곳에 들러 보았다. 들어가지 말라는 팻말이 없어도 물에 들어간 사람은 없으니 많은 사람은 나처럼 지각없지는 않은 모양이다. 그때를 생각하면 반성도 되고 너무 창피하지만, 그래도 나는 설악산 옥녀탕에서 수영해 본 사람이라는 생각에 즐거운 미소가 떠오른다.
- 2016-06-07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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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휴가지에서 생긴일] 시부의 휴가계획… 며느리 민낯보기
- 은퇴한 시니어들이 집을 줄인 것을 후회할 때는 명절이다. 아이들이 많은 딸네에게 안방을 내어주고, 아들 식구는 건너방, 그리고 부부는 서재에서 자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며칠 간의 명절을 위해 예전의 집을 그대로 유지할 수도 없다. 그래도 장난감들이 가득한 손자들만의 방을 꾸며 자식들의 방문을 살짝 유혹하지 못하는 아쉬움은 남는다. 오늘날 3대가 같이 자고 먹는 기회를 갖는다는 것은 그리 쉽지 않다. 그래서 여름휴가철은 시니어에게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그렇지만 자식들의 휴가 일정에 맞춰 시기를 선택하고 그들이 선정한 장소로 출발하여 그네들이 운전하는 차에 얹혀 돌아오는 휴가는 뭔지 초대받은 손님이라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이번 여름만큼은 스스로가 휴가계획을 짜서 애들을 소집하는 호기를 한 번 부려보고 싶어진다. 사실 휴가란 자식들에게 또 다른 부담으로 다가온다. 바쁜 직장, 가정 생활 속에서 휴가 여행을 계획하고 진행해야 하는데, 그 와중에 모시지 못 하는 있는 부모님들도 눈에 밟힌다. 이럴 때 한 번쯤은 시니어들이 주도하는 휴가여행을 제시하고 진행한다면, 그네들도 그리 싫지만은 않으리라는 상상도 해 본다. 물론 숙박 경비정도는 지불할 각오는 돼 있어야 하지만. 먼저 자식들의 휴가 일정을 대강 파악해 부담이 가지 않도록 그네들의 일정 중 1박 2일 정도만 할애하도록 유도한다. 사실 2박 3일 이상은 비용과, 만족도라는 측면에서 위험부담이 크다! 말을 꺼내면서 ‘숙박은 내가 예약을 하고 경비도 지불한다’고 하면 대개‘ 마침 저희도 휴가 중 부모님들을 모실 계획이었는데 마침 잘 됐네요’라는 효자성 멘트가 날아온다. 만약 애들 사정으로 못 가게 되더라도 필자는 일단 어른으로서의 폼은 다 잡았다. 이 무산된 필자의 성의는 그네들에게 계속 커다란 압박으로 작용할 것이므로 결코 밑질 게 없다. 일정이 확정되면, 어디로 가 어디에서 묵을까를 직접 정해야 한다. 먼저 장소다. 그런데 손자들은 무조건 바닷가다. 그러면 바다는 다른 일정에 그네들끼리 가라고 해야 한다. 필자와 떠나는 1박 2일만큼은 계곡이나 휴양림지역이라는 것을 양보해서는 안 된다! 어린 아들, 딸을 데리고 갔던 젊은 시절의 바닷가를 절대 잊으면 안 된다. 광대한 바다에서의 안전사고 위험, 세찬 바닷바람, 젊은이들의 소음, 온몸과 음식에 끊임없이 파고드는 그 모래들…. 그래서 애들을 계속 씻기고 수영복 빨래한 후, 햇볕에 익은 살갗에 연고를 발라주던 밤을 잊을 수가 없다. 이제 이 나이에 파라솔에서 식구들 짐 지키며 햇볕, 모래와 싸우고 싶지 않다. 다음으로는 묵을 곳이다. 그러면 호텔과 콘도가 먼저 떠오른다. 모두 각종 부대시설이 잘 갖춰져 있고 또 경관이 좋은 곳에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휴가철의 비싼 비용도 비용이거니와 예약의 번거로움을 생각하면 망설여진다. 무엇보다 끊임없는 에너지로 계속 들락날락대는 손자들에게 자연을 만끽하게 하고 싶은 생각이라면 제외하고 싶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펜션으로 넘어간다. 최근의 숙박 형태에 대한 한국관광학회 연구보고서(2013년)도 전체 숙박시설 중 펜션, 서비스드레지던스 등의 ‘생활숙박시설’에 대한 선호도가 상승하고 있음을 얘기하고 있다. 펜션의 장점은 먼저 취사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물론 콘도에서도 취사가 가능하지만, 넓은 야외 바비큐장이나 독립된 베란다에서 고기를 직접 굽기에는 한계가 있다. 또한 복층펜션이나 독립된 방갈로식 펜션의 경우, 다세대가 함께 숙박하면서 한 집 식구라는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무엇보다 콘도의 경우는 어린 아이들이 마음 놓고 자주 바깥출입을 하지 못하는 데 반해 펜션은 문만 열면 마당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리고 펜션들은 마을 속에 함께 자리잡고 있어 해당 지역의 문화를 만끽할 수도 있다. 식사 후 동네 어귀 구멍가게의 평상에 앉아 막걸리 한 잔하며 동네이야기를 푸근하게 들을 수 있어 좋다는 얘기다. 또, 펜션을 운영하는 이들은 거의 다 시니어들이다. 그래서 같은 세대의 공감대와 하룻밤을 묵는 정을 바탕으로 그 지역의 유기농 특산물이나 좋은 식당들에 대한 생생한 정보를 얻을 수도 있다. 새로 지은 펜션의 경우는 베란다에 야외욕탕들을 마련한 경우도 많아 하늘의 별을 보며 온몸을 담글 수 있는 한 여름밤의 낭만도 맛볼 수 있다. 다만 부대시설이 미흡하고 소음에 취약하지만, 아직도 사생활 보호(?)를 중시하는 시니어가 아니라면 펜션을 이용하는 데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펜션들 중, 제대로 된 펜션을 고르는 방법들은 무엇일까? 시니어의 경우 원거리는 배제하고 2-3시간 거리의 지역을 선택한 후 ‘떠나요닷컴’이나 ‘ 우리펜션’ 등의 펜션관련 사이트에서 실시간 빈방 검색을 한다. 다음으로 풀빌라펜션, 수영장펜션, 월풀, 독채형 등의 유형을 정해 예약을 진행하면 된다. 선정 시엔 먼저 ‘펜션정보’에서 건립연도를 파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일단 최근에 생긴 펜션을 우선으로 선택해야 한다. 전문적인 관리를 하지 못하는 펜션들의 특성상, 호텔이나 콘도에 비해 시간이 갈수록 급하게 시설이 낙후되기 때문이다. 또한 인터넷 사이트에 보이는 펜션들의 사진들에 현혹되지 말아야 한다. 특히 야간 조망사진은 너무 낭만적이라 혹하기 쉬운데, 그 조명발에 절대 넘어가면 안 된다. 그리고 주인들의 셀프댓글들이 많으니 칭찬 일색의 사용후기들도 유심히 봐야 한다. 특히 ‘주인이 직접 재배하신 상추에 삼겹살을 주인 식구들과 너무 맛있게 먹었다’는 글을 보고 그런 상황을 기대하면 마음에 상처만 얻는다. 숙박비는 보통 10만~20만 원 대이지만 대부분 휴가철에는 성수기요금을 따로 책정하고 있어 확인이 필요하다. 최근에는 수도권을 중심으로 특급호텔보다도 훨씬 비싼 최고급 펜션들도 많아 선택의 폭이 더욱 넓어졌다. 마지막으로 ‘구매 후 의심’을 버려야 한다. 직접 선택한 것들이 불만족스러울 수도 있지만 ‘우리 아버님이 펜션 잡아 주셔서 다녀온 휴가’라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요즘 세상에 함께 먹고 자며, 며느리 민낯 보는 게 어찌 예사로운 일인가! 이런 자신를 대견스럽게 여기며 이런 선택에 대해 절대 후회하지 말자! 사실 겁이 살짝 나기는 나지만….
- 2016-06-01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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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니 자서전] 촌뜨기가 국가품질명장이 되기까지
- 가뭄이 들어 세상이 모두 타들어 가더라도 마르지 않는 곳이 있다. 바로 계곡이다. 계곡은 세상의 모든 것이 말라도 마르지 않는다. 가장 낮은 곳에 있기 때문이다. 낮은 곳으로 임하는 ‘계곡의 정신’은 강하게 살아남을 수 있는 경쟁력의 원천이다. 이 같은 계곡 정신을 그려 노자는 ‘도덕경’에서 곡신불사(谷神不死)라고 했다. 진정한 승자는 세월이 지나봐야 드러난다는 뜻이다. 이것은 필자가 마음속 깊숙이 간직하면서 괴롭고 힘들 때 되뇌이는 생활신조다. 필자는 전기도 들어오지 않고, 지하수를 식수로 사용하는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미 암소 1마리를 키우면서 새끼를 낳으면 가축시장에 팔아서 생활비와 교육비를 충당하고, 논과 밭을 소작해 먹을 것은 해결하며, 산 비탈길에서 잡목을 베서 집까지 지게지고 와서 말린 후 땔감으로 사용하는 그런 집이었다. 필자 집에선 여름철 더위는 볏짚으로 만든 멍석을 마당에 깔아 놓아 이기고, 모기와 벌레는 잡풀로 연기를 만들어서 퇴치했다. 또 부러진 소나무 옹이를 태워서 저녁 밤을 밝혔다. 이렇듯 옹색했으나 낭만도 있었다. 구름 한 점 없는 저녁 밤하늘의 반짝이는 유난히도 많고 별들을 누나와 동생들이랑 ‘저 별은 나의 별, 저 별은 너의 별’ 하면서 별의 개수를 셌다. 부모님은 무척 지혜로운 분들이었다. 귀뚜라미와 여치, 소쩍새와 부엉이 소리를 들으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으면 당시에는 시계도 없는데도 달그림자가 기울어진 정도와 대기 온도 차이로 시간을 말씀하시곤 했다. 아무리 시골이지만 초등학교 입학식 때나 어린이날, 각종 행사 때는 부유한 집안의 친구 부모들은 화려한 의상을 차려입고, 돈 들여 파마까지 하고 온다. 특히 생전 처음 보고, 먹어보는 음식과 다과를 가지고 온다. 이런 음식을 필자는 내내 계속 얻어먹기만 했다. 필자는 이들의 이런 생활을 보면서 분노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를 목표로 삼았다. 미래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를 생각할 기회를 줬다는 점에서 부자 친구와 부모들에 감사한다. 그 당시에는 하루하루 시간이 너무 지루하고 길게만 느껴졌으나 돌이켜보면 너무 짧은 추억의 그림자처럼 소리 없이 흘러간 세월이 너무 아쉽기만 하다. 중학교와 고등학교 시절 시내 아이들은 학원 다니고 공부하는 동안 소 풀 먹이고, 소 풀 베면서 잠깐의 틈바구니 시간을 활용해 공부했다. 그래서 항상 손에 책을 들고 다녔다. 공부는 열심히 했지만 먹고 살기 힘든 집안에서 대학은 꿈도 꿀 수 없는 먼 나라 이야기 동화에 나오는 ‘상상의 우주선’이었다. 초등학교를 6살에 조기 입학해 고등학교 졸업반일 때는 공무원 시험을 볼 수 있는 최소 연령에 미달해 응시도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바로 직업 전선에도 뛰어들 수 있는 실력도 없어 공학도가 되기로 했다. 관련 자격증을 취득해 기술자가 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대학 전기과에 입학했다. 남들은 대학의 낭만을 즐기고 여행가는 사이 자격증 취득 공부와 취업준비에 매달린 결과 졸업반 여름에는 최연소 기사자격증 3개를 취득하고 국가공무원 및 한전 입사 시험까지 동시 합격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필자는 두 가지 직장 가운데 국가공무원을 선택했다. 공무원으로서 첫 발령지는 연고도 없는 서울이었다. 덕분에 난생처음 서울에서의 직장 생활이 시작됐다. 하지만 호사다마라던가. 기대에 부풀어 첫 월급을 받았는데 숙박비와 식비도 충당도 못 하는 수준이었다. 공무원 생활을 계속해야 한다면 계속 통장 잔액가 마이너스 되는데 이걸 누구에게 손 벌릴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이렇게 고민만 쌓이는 사이 한국전력공사 신입사원 연수원 입교통지서가 날아왔고 미련 없이 공무원은 사직서를 내고 한전에 입사했다. 한전은 월급이 공무원의 3배가 넘었다. 그 당시엔 후회 없이 잘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한전연수원 교육을 마치고 화력발전소에 처음 부임해 교대근무 37개월 후 원자력발전소 건설 현장으로 보직을 변경됐다. 그런데 우선 용어와 도면, 시방서, 서류가 모두 영어로 돼 있다. 우리나라가 원자력 건설 기술이 없어 외국인들이 같이 투입됐는데 이들과도 영어로 소통해야 했다. 영어와 사투하느라 힘들었으나 그래도 신기술 분야여서 정말 흥미로웠다. 하루 종일 보고, 배우고, 현장 쫓아다니고, 온통 정신없이 업무에 몰두하다 보면 하루해가 언제 가고 오는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건설현장에는 외국인은 오전 9시 출근에 오후 5시 퇴근하게 돼 있었지만 한전 직원은 오전 8시 출근에 오후 퇴근 시간이 따로 없을 정도로 한마디로 일에 미친 미치광이처럼 업무에 몰두했다. 필자의 원자력 건설 처음 10년은 외국인들에게 배우는 시기였고, 그다음 10년은 국산원자력발전소 1호의 건설에 참여하는 성장기의 단계였으며, 이어 10년은 선행호기 문제점을 찾아 개선하고 품질을 최우선으로 하는 자립기로 볼 수 있다. 이렇게 발전하기까지 기술자의 한사람으로서 이바지했다는 생각이다. 특히 이런 공로로 국가품질명장에 선정되기도 했다. 세계 최고의 품질상은 말보르상이지만 국내에서는 품질경영상이 여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기업이 아닌 개인이 도전할 수 있는 최고의 품질상은 국가품질명장이다. 제안 실적, 설비개선 건수 및 개선 실적, 꾸준한 품질 개선 활동 실적, 자격증 취득 건수, 품질교육 실적, 사회봉사활동 시간, 현장 경력, 품질경진대회 포상실적 등으로 1차 서류심사를 한 뒤 2차 필기시험, 3차 현장실사, 4차 면접시험을 거쳐서 최종합격자를 가린다. 선출된 품질명장은 매년 10월 정부주관 품질명장 및 뺏지 시상식이 부부 동반으로 거창하게 치러지고 있다. 국가품질명장이 되면 사내에서는 사장상 공로 1등급과 해외교육, 사내외 품질개선활동 심사위원, 품질교육 등 다양하게 후진을 양성하도록 기회가 주어진다.
- 2016-06-01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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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휴가지에서 생긴 일] '화이트 하우스 온 더 힐'
- 강원 평창군 대화면 백석산 중턱에 ‘화이트 하우스 온 더 힐(White house on the hill’이란 곳이 있다. 인생의 2막을 코앞에 두고 인천과 서울에 살고 있는 필자를 비롯한 일곱 명의 초등학교 동창들이 특별한 계기에 합심해 언덕 위에 화이트칼라로 아기자기하게 지어놓은 팬션이다. 쉬고 싶을 때는 누구든, 언제든 올 수 있는 곳이다. 어느 해인가는 여름 휴가 때 특별히 부부동반으로 이곳에서 함께 보냈다. 이곳은 말 그대로 별유천지였다. 백석산 줄기에서 계곡을 타고 내려오는 물소리는 집 앞 다리 밑에서 폭포를 이루며 장관을 연출한다. 산 아래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전망 때문에 그냥 마당에 서 있기만 해도 가슴속이 탁 트이고 후련해지는 것은 물론이고 사방을 둘러봐도 푸르름이 가득해 눈마저 시원하다. 어린 시절, 대개의 농촌 소년이 그랬듯 학교에 다녀오면 바로 뒷산에 올라 소꼴이나 나무 한 등짐씩 지고 내려오곤했다. 그리고 뒷산을 내려오던 중 어스름이 내려온 동네 집집마다 굴뚝에서 저녁 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올라오고 누룽지 익는 냄새가 스멀스멀 코끝을 자극해 오면 내려오는 걸음을 총총 서두르곤 했다. 그런데 어린 시절의 그 친구들이 모였으니 오죽했을까? 각자 일곱 집에서 만들어온 반찬을 펼쳐 놓으니 그야말로 진수성찬이다. 노각으로 오이상치를 만들고 도토리묵을 사다가 김치 송송 썰어넣고 시원하게 묵창국을 만들었다. 파김치와 오이 무침, 그리고 조개젓갈…. 우리가 어린 시절에 맛보았던 반찬들이 한 상 가득 차려지고 적당하게 삶아진 수육이 올라오면 주고받는 소주 한 잔에 우정(友情)이 새록새록 다져졌다. 저녁을 먹고 모두들 마당가에 나와 앉으니 도시에서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유성(流星)이 흐르고 은하수 건너 북두칠성과 카시오페아 자리, 그리고 전갈자리를 비롯한 별자리들이 눈과 마음을 호강시킨다. 이름 모를 수많은 별을 헤아리고 있자면 밤벌레 소리가 고요한 계곡에 울려퍼지면서 환상의 오케스트라가 연주되고 우리 일행은 관객이 돼 황홀한 휴가지에서의 멋진 첫날 밤을 보냈다. 다음 날, 필자는 동료들과 함께 평창강으로 레프팅하기 위해 출발했다. 간단한 안전교육과 준비체조를 한 다음 평창강의 푸른 물결을 가르며 드디어 보트는 하류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천천히 미끄러지듯 내려가다가 급한 물굽이를 만나자 보트가 빙그르르 소용돌이 친다. 모두들 비명인지 환호성인지 모를 소리를 질러댄다. 조금 지나 바위 아래로 물살이 뚝 떨어질 때, 기우뚱! 물보라가 머리 위에서 한 바퀴 휘돌아나간다. 격한 비명을 질러대면서도 상기된 얼굴로 합심해 열심히 노를 젓다가 인접한 보트를 만나면 서로에게 물을 뿌려대면서 흥미를 유발하니 스릴도 있고 재미도 있었다. 레프팅이 끝났을 때에는 아쉬움이 남아 다음엔 좀 더 긴 코스로 가자고 모두들 한마디씩 보탠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대화면에 들러 허기진 배를 시원한 막국수 한 그릇과 메밀꽃동동주 한사발로 채우고 나니 세상 부러울 게 없었다. 지금도 눈감으면 청정하기 그지없었던 ‘화이트 하우스 온 더 힐’이 스쳐지나간다. 이제는 빛바랜 수첩에서나 꺼내어 볼 추억이 되어버렸지만 머지않아 금년 여름에는 그때의 약속처럼 레프팅 코스가 비교적 길고 스릴 있는 동강의 어디쯤으로 떠날지도 모르겠다.
- 2016-05-31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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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동강 700리 자전거 종주기] (3) 을숙도를 향하여
- 5월의 산은 온통 연두색 이파리들이 점령한 가운데 중간중간 하얀 이팝나무 꽃 무리가 섞여 마치 파스텔화 같다. 온통 생명으로 가득한 5월은 말 그대로 ‘계절의 여왕’답다. 경북 상주보를 지나 긴 교량을 타고 넘으니 상주자전거박물관이라는 이정표가 눈에 띄었다. 잠시 그곳에 들러 자전거의 발자취를 돌아보고 휴식을 취한 다음 구미보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강 주위로 길게 펼쳐진 평야에서는 일손 바쁜 농부들의 바쁜 일상이 고스란히 눈에 들어왔다. 엊그제 비가 온 덕분에 찰랑찰랑 물 잡힌 논에서 농사 준비에 바쁜 그들의 옆을 지나칠 적에는 은근히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개구리의 합창 소리가 가슴을 적셔왔지만 어린 시절, 이맘때쯤이면 농촌 들녘을 장악했던 ‘송아지 찾는 어미 소의 헤설픈 울음소리’는 간데없고 트랙터의 굉음만이 가득해 마음이 허전했다. 서울에는 이틀 연속 비가 온다고 하는데, 이곳만은 햇살이 싱그러웠다. 전국적으로 비가 온다는데 우리의 자전거길만이 햇살이 비추니 이만한 행운이 또 어디에 있을까? 오늘의 본래 계획은 칠곡군이었다. 칠곡군에서 부산 을숙도까지 점프해 3일 차의 힘든 여정을 대비하기로 했는데, 구미시 구미보에 도착해 전망대를 구경하면서 잠시 쉬다가 아뿔싸, 너무 오랫동안 지체한 것이 화근이었다. 발 뻗은 김에 누워버린다더니 노곤한 몸으로 더는 못 가겠다는 회원들의 아우성에 다시 중지를 모아 오늘은 여기까지 라이딩을 마치기로 했다. 구미보에서 차를 불러 타고 부산 을숙도를 향하는 중에 을숙도를 불과 30여 분 남겨두고 고속도로에 장사진을 친 차량 행렬을 만났다. 할 수 없이 일정을 변경해 경남 김해시에서 묵어가기로 하고 차를 돌렸다. 애초에 부산에 가면 자갈치시장에 들러 꼼장어 구이나 붕장어 회에 소주 한잔은 꼭 먹어야 한다고 강조했는데, 일정이 차질을 빚어 부산은 가지도 못한 것이다. 더구나 김해시에서 장어집을 찾는 데만도 꽤 시간이 걸렸다. 비록 늦은 저녁이나 세 분 회원님들의 찬조로 바닷장어의 깊은 맛을 맘껏 느끼고 내친김에 펜션까지 소개받아 김해시 신어산 자락에 있는 신라농원펜션에 여장을 풀고 하룻밤을 묵게 됐다. 상동면에 있는 신라농원펜션은 신어산 자락에서 불어오는 싱그러운 바람과 계곡 물소리가 일품이어서 지칠 대로 지친 몸과 마음의 피로를 다소나마 내려놓을 수 있었다. 피로가 엄습해 왔지만 소주잔을 기울이면서 자전거 하룻길에 대한 담소를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른 채 이어갔다. 정녕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것일까? 신어산 자락의 초승달도 구름에 숨고 밤벌레 소리만 적막한데 여기저기서 코 고는 소리와 잠꼬대 소리가 창문을 넘었다. 그렇게 둘째 날 밤도 깊어만 갔다.
- 2016-05-26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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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강산에서 길을 찾다 '소정 변관식 전'
- “금강산 찾아가자 일만 이천 봉~” 어릴 적 이 노래를 부르면서 궁금한 점이 많았다. ‘정말 산봉우리가 1만 2천 개나 될까? 산이 대체 얼마나 큰 거야? 그 정도면 산맥이라고 해야 되지 않을까?’ ‘그 많은 봉우리는 누가 센 걸까?’ 등이다. 연전에 어느 신문 칼럼에서는 1만 2천 봉은 봉우리 수가 아니고 금강산 속 절들의 부처님 숫자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게다가 ‘볼수록 아름답고 신기한 산’이란다. 물론 노랫말이라 미화시켰겠지만, 여간 궁금한 게 아니다. 가 볼 수 없으니 더 답답하다. 마음속 깊은 곳에 묻어 둔 이런 생각을 다시 끄집어낸 것은 금강산의 화가 ‘소정 변관식의 40주기 전’이다. 그림으로나마 의문을 풀고 대리만족이라도 해볼 양으로 성북미술관에 들렀다. 성북미술관은 해마다 이름난 화가의 기획전뿐만 아니라 예술 영화 상영도 해서 자주 찾는 곳이다. 위치도 성북동 언덕배기라 조용하고 새소리도 들리니 퍽 평화롭다. 그러나 더 큰 즐거움은 끝난 후에도 있다. 출출한 배에 얼굴 크기만 한 옛날 왕돈까스냐 감칠맛 넘치는 돼지 불고기냐 하는 이 지역 명물을 고르는 것도 성북동을 찾는 적지 아니한 이유이다. 익히 알려져 있듯이 변관식의 산수화는 적묵법(옅은 색 먹부터 짙은 색 먹으로 그 위에 먹을 쌓아가는 방법)과 파선법(진한 먹을 튀기듯 찍어 선을 파괴하는 방법)을 사용해 금강산의 깊은 산중과 그 기백을 힘차게 드러냈다. 작가의 대표작 을 보면 한가운데 힘차게 솟은 봉우리가 하늘을 향해 쭉 뻗은 기상이 그의 기법과 잘 어우러진 걸작이다. 그의 산수화 중 재미있는 것은 대부분 하늘 향해 쭉쭉 뻗은 산세 사이에는 쬐끄만 집이 한두 채 있고 사람들도 간간이 있다는 점이다. 사람 중에는 지팡이를 45도쯤 뻗쳐 들고 도포 자락 휘날리며 어딘가를 바삐 가는 선비도 있다. 평민들의 모내기, 아낙의 새참 나르는 모습 등 그 시대의 풍속도 담겨 있다. 계곡 물은 산세에 비해 마냥 부드럽게 흐른다. 하지만 후딱 보아서는 알 수 없고 숨은 그림 찾듯 유심히 들여다보아야만 보인다. 여기서 작가의 마음이 보인다. 일제강점기 암울한 시절 묵묵히 금강산을 그리며 세월을 낚는 모습이다. 그의 사진 속 굳게 다문 입은 그 시절 독립운동가의 모습을 닮았다. 그 강인한 정신 속에 부드러움과 해학은 쬐끄맣게 그림 속에 숨어 있다. 그의 말대로 ‘욕심 없이 지묵에 싸여 살아온 나의 지난날’이 그림에 녹아 있다. 문득 아버지 경순왕이 나라를 들어 고려 왕건에게 바치자 모든 것을 버리고 금강산에 숨어든 마의태자가 떠오른다. 그의 뜻이 어떻건 간에 금강산은 한 나라와 바꿀만한 폭과 깊이를 지닌 명산임에 틀림없다. 어쩌면 한평생을 금강산에 바친 화가의 마음도 그렇지 않았을까. ‘고희가 지나 7년이 지났는데도 그림에 대한 정열이 더욱 강렬해진다.’라는 작가의 고백은 그런 의미에서 금강산에 바치는 헌사일 것이다. 금강산의 한 귀퉁이나마 그림으로 보니 그 속살을 살짝 엿본 듯 갈증이 조금은 풀린다. 옛 그림과 먹의 정취도 좋지만, 숨은그림찾기도 참 재미있었다. 그러나 일만 이천 봉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 봉우리를 세다가 어느덧 숫자를 잃어버렸다. 그렇다. 그것은 꿈의 숫자다. 봉우리 세기는 다음번 전시에서 다시 도전해 보기로 하고 미술관 문을 나섰다.
- 2016-05-24 18: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