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를 시작한 지 십년이 되었다. 그동안 많은 자료를 다음과 같이 분류해서 블로그에 저장해 두었다. 내 사진과 개인자료/ 나의 글/ 가족 이야기/ 고등학교 친구/ 대학교 친구/ 건축 프로젝트 자료/ 포럼활동 자료/ 사진과 짧은 이야기/...
오늘까지 블로그에 저장해 둔 글과 사진 항목 수가 총 1,582개다. 과거 아나로그 사진은 스캔을 받거나 디지털 카메라로 찍어서 저장한다. 그 결과 필자의 어린 시절 흑백사진도 모두 디지털 사진으로 바뀌어 있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 졸업까지의 성적표와 졸업장, 그림 사생대회에 나가서 받은 상장도 모두 블로그에 그림파일로 들어있다. 어머니 아버지의 아주 오래된 사진도 블로그에 들어있다. 결혼 후 아내의 앨범에 들어있는 어릴 때 사진과 아이들 사진도 디지털화해서 보관중이다. 가끔 써둔 수필을 모아두었더니 수필집 한 권 분량이 되었다. 언제든 정리하면 책을 낼 수 있겠다. 건축을 하면서 주요 프로젝트의 도면과 서류, 건축현장의 사진도 블로그에 보관하고 있다.
분류해 둔 카테고리 중에 ‘사진과 짧은 이야기’에 자료가 제일 많다. 휴대폰 사진 해상도가 좋아서 요즘은 카메라를 가지고 다니지 않아도 된다. 언제 어디서든 사진도 가능하고 동영상 촬영도 가능한 세상이 되었다. 길을 걷거나 등산을 하다가 혹은 여행을 하다가 찍은 사진에 대해 간단한 이야기를 적고 날짜를 기록하여 저장해 둔다. 이렇게 모아둔 사진은 글을 쓰거나 강의를 할 때 자료로 사용한다. 식물원이나 고궁, 또는 산에 계절마다 찾아가서 같은 자리에서 찍은 사진을 비교하는 재미도 있다. 계절에 따라 변하는 자연은 신비롭다.
북한산에는 진달래능선이 있다. 수유리 4.19묘역 근처와 우이동 계곡을 따라 오르는 길이 있다. 매년 이곳 능선을 수차례 오른다. 특히 봄에는 매주 오르면서 찍은 사진을 블로그에 저장해 두었다. 진달래 능선의 진달래는 우리가 생각하는 작은 나무가 아니다. 어른 키보다 훨씬 큰 진달래 고목이 2킬로미터가 넘는 능선 양쪽과 비탈에 빽빽하다. 만개한 진달래 터널을 매년 걷는 것은 참 행복하다. 그러나 진달래 만개 날짜는 봄 날씨에 따라서 차이가 난다. 블로그에 저장해 둔 사진들을 죽 열어봤더니 어느 해는 4월 초에 만개했고, 어느 해엔 4월 말에 만개했다. 작년에는 바쁜 일이 많아서 진달래능선을 잠시 미루었다가 4월 말에 갔더니 이미 다 지고 연녹색 이파리가 돋은 걸 보고 많이 아쉬워했었다. 통계상으로 보면 대체로 4월 중순에 만개한다.
올 해 한국시니어블로거협회 회원들이 만개한 시점에 진달래 능선을 걷기로 했다. 필자에게 날짜를 정하는 임무가 떨어졌다. 사전에 행사 날짜를 공지해야 하므로 만개 시점을 맞추어야 했다. 사전 답사 차 3월에 두 번 능선을 걸었으나 아직 몽오리만 보였다. 예년 날씨와 몽오리 상태를 보니 4월 중순에 만개할 것으로 예측이 되었다. 그래서 4월 16일로 행사 날짜를 정했다. 그 날 진달래 능선 걷기 행사에 참석한 시니어들은 모두 어린아이가 된 듯 진달래 터널을 걷는 내내 감탄사를 터뜨렸다. 그야말로 온 산에 진달래로 붉게 물들었다. 아울러 진달래 만개 날짜를 잘 맞춘 필자에게 찬사가 쏟아졌다. 이 찬사는 모두 블로그로부터 얻은 혜택이다.
4월이다. 봄기운이 완연해지니, 이 산 저 산에 상춘객들이 붐빈다.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산을 좋아하는 나라가 또 있을까? 몸이 안 좋으면 산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등산을 하면 우리 몸에는 어떤 변화가 생길까?
복식호흡으로 바뀐다
평지에서 조깅을 하면 거친 숨을 내쉬게 된다. 즉 가슴으로 숨을 쉬는 흉식호흡을 빠르게 하게 된다. 그러나 오르막길을 올라가는 등산을 하면 아랫배와 전신을 움직이면서 거친 숨을 헉헉 몰아쉬게 된다. 즉 복식호흡을 하게 된다. 오르막길에서는 평지보다 산소 소모량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숨이 가빠지는 것이다.
쓰는 근육도 다르다. 우리 몸은 이러한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횡격막을 더 아래로 끌어내려서 한 번에 더 많은 숨을 들이쉬게 된다. 숨을 더 많이 들이쉬기 위해서는 더 많이 내쉬는 것이 필수다. 단전호흡을 할 때도 내쉬는 호흡이 더 길어야 한다. 얻기 위해서는 먼저 내놓아야 하는 것이다. 더 많은 숨을 내쉬기 위해 몸은 가슴을 옥죄는 것이 아니라 아랫배를 옥죈다. 그래서 단전과 허리에 힘이 들어가게 된다. 아랫배를 옥죄던 힘을 풀면 호흡이 아랫배까지 깊이 내려가면서 자동적으로 복식호흡이 된다. 이러한 복식호흡은 단전호흡 또는 단전에 뜸을 뜨는 것과 같은 효과를 나타낸다.
도시생활을 하면 머리만 쓰고 몸을 쓰지 않기 때문에, 머리는 뜨겁고 배는 차가운 상열하한증(上熱下寒證)이 생기기 쉽다. 머리가 뜨거워져서 열이 나면 잠을 제대로 못 자고 눈도 충혈되고 건조해지며 어깨와 뒷목은 자주 뭉친다. 반면 아랫배가 차가우면 소화가 안 돼 아랫배가 나오고 전립선이 붓고 정력이 떨어지며 다리와 무릎 힘이 약해지고 손발이 시리며, 여자는 자궁 기능이 나빠진다. 그리고 발바닥을 지압하면 몹시 아프다. 머리와 가슴에 열이 몰리면 화병의 상태와 유사하다. 당연히 컨디션이 좋을 리 없어 학생들의 경우는 학습 효과가 떨어진다. 등산을 하면 자연스럽게 복식호흡을 하게 된다. 이때 인체 상부에 몰린 열은 복식호흡을 통해 아랫배까지 내려가 손발 끝까지 퍼져나간다. 그래서 등산을 하면 잠도 잘 오고 어깨 뭉침도 잘 풀리고 머리와 눈이 맑아지고 밥맛이 나며 정력이 강해지고 다리 힘이 강해지는 것이다. 손발 시림도 많이 완화된다. 머리와 가슴의 열이 내려가므로 화병과 스트레스도 개선된다.
등산을 하지 않던 사람이 등산을 하면 오르막길에서 굉장히 힘들어하며 숨을 가쁘게 쉰다. 하지만 참고 계속 오르다 보면 어느 순간 호흡이 편안해진다. 이때가 바로 뭉쳐 있던 배가 풀리면서 흉식호흡이 복식호흡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특별한 질환, 심장 관련 질환이 없다면 복식호흡으로 바뀌는 순간까지 힘들어도 참고 등산하는 것이 좋다. 빈속에 등산하면 복식호흡으로의 전환이 더 빠르다.
밥맛이 좋아진다
등산을 하면 밥맛도 좋아진다. 한의학에서는 섭취한 음식물을 비위가 맷돌처럼 갈아서 소화를 시킨다고 표현한다. 이때 맷돌을 더 잘 돌리려면 팔다리를 많이 움직여야 한다. 등산은 팔다리를 적극적으로 쓰므로 소화에 좋은 운동이다. 동시에 복식호흡으로 횡격막이 내려가면서 배 운동까지 된다. 다시 말하면 더 많은 숨을 내쉬기 위해 아랫배를 옥죄면서 위장의 연동운동이 더 잘돼서 더부룩함이 사라지고 소화에 좋은 것이다.
현대인들에게는 정신적 스트레스가 질병의 중요한 원인이 되기도 한다. 한의학에서는 이럴 때 기를 돌려서 몸을 치료한다. 약재로는 박하, 귤껍질, 향부자 같은 향이 나는 약재를 많이 사용한다. 기(氣) 편에는 “한가로우면 기가 막힌다”는 내용이 있다. 또 “한가롭게 노는 사람은 몸을 움직여 기력을 쓰는 때가 많지 않고, 배불리 먹고 나서 앉아 있거나 눕는다. 이렇게 하면 경락이 통하지 않고 혈맥이 막혀 노권상이 생긴다. 그래서 귀한 사람은 겉모습이 즐거워 보여도 마음은 힘이 들고, 천한 사람은 마음이 한가해도 겉모습은 힘들어 보인다”면서 “흐르는 물은 썩지 않고 지도리는 좀을 먹지 않으니, 사람도 이처럼 적당히 움직여야 한다”고 지적했다.
등산하면서 내쉬는 숨과 땀을 통해 우리는 정신적 스트레스를 풀고 몸을 단련할 수 있다. 특히 현대인들은 하루 종일 컴퓨터나 스마트폰 등 인공의 빛에 노출돼 있는데 이처럼 가까운 것만 보기 때문에 시력에 더 문제가 생기고 마음도 좁아진다. 등산을 하면서 자연의 빛을 받아들이면 눈도 마음도 밝아진다. 따라서 현대인들에게 등산은 매우 필요한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뼈가 튼튼해진다
우주 비행사들에게는 골다공증이 직업병처럼 발생한다. 무중력 상태에서는 뼈가 그다지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몸이 뼈를 발달시키지 않는 것이다. 중력이 없는 바다에서도 뼈가 필요하지 않아 문어, 오징어가 바다에서 살고 있다. 자연에는 사치가 없다. 자연은 필요 없는 것은 발달시키지 않는다. 어릴 때 많이 맞고 자라면 통뼈가 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뼈는 중력, 즉 압박을 받아야 골밀도가 높아진다.
골다공증 환자가 배낭을 메고 산을 오르면 뼈에 강한 압력이 걸리면서 뼈가 단단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나라는 어느 산을 가 봐도 40~50대 주부들이 많다. 이것은 등산이 그분들에게 적합하기 때문이다. 다만 뼈의 상태를 봐서 정도에 맞게 운동해야 한다.
하산하다가 무릎을 다쳐 한의원에 오는 환자들이 제법 있다. 대부분은 산을 오를 때보다 내려올 때 다친다. 등산할 때는 먼저 몸을 푼 뒤 올라가야 한다. 또 하산할 때는 정면으로 내려오지 말고 옆걸음이나 뒷걸음질 치듯 비스듬한 자세로 내려오는 게 좋다. 무릎 충격이 한결 덜하다.
계곡 길을 땀을 뻘뻘 흘리면서 올라갔다가, 능선에 올라서자마자 불어오는 찬바람에 맞아 독감에 걸리는 경우도 많다. 땀구멍이 열린 상태에서 능선의 강한 바람을 맞으면 바람이 몸속 깊숙이 들어가기 때문에 감기가 심하게 걸리고 오래간다. 따라서 능선에 오르기 직전에 방풍이 되는 옷을 입어주는 것이 좋다. 감기에 걸렸을 때는 온탕에서 온몸을 풀어준 다음, 쌍화탕이나 생강차를 마셔주면 좋다.
최철한(崔哲漢)
본디올대치한의원 원장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졸업.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본초학교실 박사. 생태약초학교 ‘풀과나무’ 교장. 본디올한의원네트워크 약무이사. 저서:
광활한 사막을 사나이가 홀로 걷고 있었다. 멀리 보이는 아득한 수평선엔 끝없는 모래와 하늘이 가느다랗게 맞닿아 실눈을 뜨고 있었다. 머리 위의 뜨거운 태양도 간혹 부는 모래바람도 그를 달래주지는 못했다. 발에 푹푹 파이는 모래를 바라보며 걷던 사나이는 돌아섰다. 그리고 비로소 안도했다. 모래 위로 난 자신의 발자국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고도 너무 외로워서 뒷걸음질 치며 자신의 발자국과 같이 걸었다.
사막
그 사막에서 그는
너무도 외로워
때로는 뒷걸음질로 걸었다.
자기 앞에 찍힌 발자국을 보려고
-오르텅스 블루 -
파리 지하철 공사에서 공모한 시 콩쿠르에서 8천편의 응모작 중 1등 당선된 시다. 오래전에 이 시를 읽으며 울었다. 지독한 외로움을 겪어 본 사람은 이 시에 공감할 것 같다. 모든 사람이 외롭다. 둘이 있어도 더 많이 함께 있어도 결국은 외롭다. 군중 속의 고독이라지 않는가.
그런데 왜 그런 걸까?
인간관계가 부드러운 사람은 외로움을 느끼는 강도가 약하겠지만 대부분 그렇지 못하다.
자의식이 높은 사람, 자신만 아는 이기적인 사람이 더 외로움을 탄다고 한다. 종종 자기만의 세계에 갇히기 때문이다. 이기심, 욕심, 자만심이 일정 수위를 넘으면 이웃이 안 보이게 된다. 자기 입장만 주장하게 되며 다른 사람의 처지를 들여다보는 마음의 창을 닫아버리게 된다. 물론 자신을 들여다 볼 수도 없어진다. 밖을 내다 볼 수도 없어 눈 뜬 장님이 되어 버린다. 사방이 막힌 스스로의 감옥에 자진해서 유폐되는 것이다. 주변에서 불편한 사람으로 남게 된다. 아무도 그의 곁에 머물고 싶어 하지 않으니 외로움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외로운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바보들로부터 벗어난 ‘천재의 외로움’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랑을 주는 방법을 한 번도 학습해 보지 못한 것 같은 사람이 의외로 많다. 그것이 오히려 ‘남자답다’ 거나 ‘순진하다’는 것으로 미화되던 시대는 지났다. 모자란 건 모자란 것이다. 자연스런 감정의 교류가 있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다. 그것은 신선한 물에서 나는 향기와 같고 끊임없이 흐르며 종알대는 계곡의 물처럼 건강하다.
외로움을 극복하고 줄이는 방법으로 ‘수다’를 권한다. 카톡도 좋고 전화도 좋다. 말하기 쑥스러우면 한 마디만 해도 좋다.
“보고 싶다.”
미안하다고 말하면 혀가 굳어 버리기라도 하듯 망설이는 사람도, 한 번 해보면 미안한 상황에서 가만히 있는 것 보다는 그것이 훨씬 편안하다는 것을 느낄 것이다.
결국은 소통인데 말만큼 쉽지는 않다. 어려서부터 가정에서 자연스런 소통을 경험한 사람에게는 그리 어렵지 않을 것 같다.
가끔 어떤 사람은 자신이 속한 집단에서 불의한 일을 보고도 공동체에서 쫓겨날까 두려워 입을 다문다. 말이 꼭 필요한 순간에도 입을 다무는 비굴한 모습을 본다. 피곤한 일에 끼어들기 싫은 것이다. 냉정하고 이기적인 모습이다. 점점 사람들이 떠난다. 신뢰할 수 없음으로. 큰 나무는 자라며 큰 그늘을 키운다.
이제 지독한 외로움에서 벗어날 우리들의 차례다.
우리 자신을 비추는 거울을 닦는다. 또 세상을 바르게 바라보는 거울을 빛나게 닦는다. 이제 밝은 눈으로 왜곡 없이 바라 볼 차례다.
전남 진도의 고군면 회동리에서 의신면 모도리까지 2.8km의 바다가 해마다 두 번씩 3월에 사흘, 4월에 나흘간 조수간만의 차(差)와 인력(引力)의 영향으로, 수심이 낮아지고 물이 양쪽으로 갈라지며 한 시간 동안 폭 40여 미터의 길을 연다. ‘모세의 기적’에 비견되기도 하는데, 열리는 바닷길을 걸으며 갯벌을 체험하는 ‘바닷길 축제’가 올해는 4월 26일부터 29일까지 열린다.
아득한 옛날부터 그랬듯이, 어부는 이때를 놓칠세라 등짐을 잔뜩 지고, 어부의 딸은 봇짐을 머리에 이고 그 길을 가고 있다. 한쪽 바다는 격랑의 물결이 사납다. 두려운 이 길을 건너고 있는 부녀는 불편한 돌길에 두 발을 묻고 있다. 옥주산인 김옥진(沃州山人 金玉振, 1928~2017)의 한국화 은 고향의 어느 봄날의 실경(實景)이다. 진도군 임회면에서 출생, 진도의 옛 이름인 옥주(沃州)에서 옥주산인(沃州山人), 옥산(沃山)을 아호로 취했다. 조선 남종화의 시대를 연 운림산방 소치 허련(小痴 許鍊, 1809~1893)의 아들 미산 허형(米山 許瀅, 1862~1938)에게서 방손(傍孫)의 의재 허백련(毅齋 許百鍊, 1891~1977)이 묵화를 배우고 그를 사사한 옥주산인이 같은 남종화의 길을 걸었다. 또 일제에 의해 타율적으로 만들어진 동양화(東洋畵)라는 명칭을 한국화(韓國畵)로 바꿔야 한다고 주창하고 실천했다.
옥주산인 김옥진
1979년 제28회 국전에서 영예의 초대작가상을 받은 은 전통적인 문인화에서 벗어난 작품으로 진도 앞바다 울돌목(이순신 장군의 명량해전 격전지)의 소용돌이치는 실경을 파격적으로 표현했다. 옥주는 처음 의재를 뵈올 때도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의 임화(臨畵)를 그려와 펼쳐 보였을 정도로 남달랐다. ‘진도농업실기학교’를 다닌 바 있는 그는 의재를 사사하며 의재 선생이 1947년 광주에 세운 ‘농업고등기술학교’ 교사를 역임하기도 했다. 10여 년간 시서화(詩書畵)뿐 아니라 춘설헌(春雪軒, 의재 허백련 선생이 1956년 차밭 아래에 화실로 사용했던 곳)의 차 재배와 생산 및 다도(茶道)의 보급 등 명실공히 의재의 고고한 선비정신까지 계승했다. 주위의 예술인들은 “큰 바위와 같이 굵직한 인품을 지니고, 다정다감하면서도 안목이 굉장히 예리하다”고 칭한다.
오래전 한 도예가의 작업실에서 코발트와 철화(鐵畵), 진사(辰砂)의 안료를 붓에 찍어 도자화를 그리던 옥주 화백을 만나 뵈었는데, 두어 시간 차를 마시며 안광(眼光)을 빛내 열강하던 ‘개결한 예술인의 품성’을 잊을 수가 없다. 그날 수선화를 그린 소품도 받았는데, 그 순간 1972년 무등산자락 ‘춘설헌’으로 의재 선생을 찾아가 큰 절로 뵈었을 때 따라주셨던 ‘춘설차’의 깊은 향이 맴도는 듯했다.
을 통해 옥주 화백은 ‘스스로 걷고 있는 예도(藝道)를 표현하고자 한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해본다. 지고(至高)하되 그러나 신산한 그 길이 이 어부가 식솔과 가고 있는 두렵고 불안한 천형(天刑)의 바닷길과 같을 것이다. 발을 삐끗하면 격랑의 물결 속에 매몰될 것이고, 빨리 지나가지 않으면 이 길은 바닷물에 덮일 것이기 때문이다. 친한 수집가에게서 빼앗다시피 해서 갖고 온 이 그림을 펼쳐놓을 때마다 ‘나는 과연 내 길을 바르게 걷고 있나?’ 하고 자성(自省)하게 된다.
우현 송영방
봄기운이 슬며시 산자락 밑 개울의 얼음을 녹이더니, 어느새 낮은 산 양쪽 계곡으로 물이 모여 제법 넓은 내를 이루었다. 개울 위 한쪽에는 좁은 섶다리도 놓였고 두 개울이 만나는 얕은 둔덕에 마른 잡초도 촉촉한 생기로 일어서고, 물가의 버들개지일까 잎끝이 연두의 점을 찍었다. 소나무들이 곧게 자라서 무리를 짓거나 작은 길 둔덕에 즐비하다. 개울 건너 경사가 완만한 조그만 산밭에서는 늙은 촌부가 누런 소에 쟁기 매어 밭갈이 한창이고, 노처는 고개 숙여 씨앗을 묻기에 여념 없다. 쟁기를 지고 왔던 지게와 씨앗을 담아온 종다래끼가 빈 밭의 허전한 구도를 깨고 있다. 한 해의 첫 봄갈이가 시작된 것이다. 먹의 농담만으로 그려진 산봉우리는 가로 그은 옅은 붓질이 겹쳐 유현한 빛을 발하고, 담박(淡泊)한 선으로 단숨에 그려진 개울이며 산밭이며 소나무들까지 소박한 실경을 그대로 표현했다. 여느 풍경화보다 고향의 산자락을 생각나게 해, 온라인 경매에서 낙찰받았다.
를 그린 우현 송영방(牛玄 宋榮邦, 1936~)은 경기 화성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국전에서 특선을 하며 화업의 길로 들어선 분이다. 대학 3학년 중반까지 서양화를 그리다 “물감의 느끼한 기름기가 싫어서 한지에 먹으로 그리는 붓을 잡았다”고 술회했다. 대학 스승 월전 장우성(月田 張遇聖, 1912~2005)과 산정 서세옥(山丁 徐世鈺, 1929~)에게서 문인화의 높은 경지를 사사한 그는 유년기에 한학을 하던 선친에게서 붓 잡기를 익혔고 고향집 벽장, 두껍닫이에 붙은 민화(民畵)를 따라 그려보곤 했다고 회고했다. 신문이나 잡지에 삽화(揷畵)를 그려 용돈을 마련했던 대학 시절에는 하찮게 여기던 삽화의 경지를 심의(心意)의 그림으로 고양(高揚)시켰다는 출판인들의 찬사를 받았으며 삽화를 삽도(揷圖)라 바꾸어 부르기도 했다. 법정(法頂, 1932~2010) 스님 수상집 표지화 등은 지금도 ‘격조 높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2015년 3월 31일부터 6월 28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은 그의 화업을 정리하는 회고전이었다. 오채라 함은 먹의 농(濃), 담(淡), 건(乾), 습(濕), 초(焦)나 흑(黑)을 가리키며 먹색의 풍부한 변화를 의미한다. 그는 불교 재단인 동국대학교에서 교수와 예술대학장으로 정년퇴임을 한 뒤에도 불가의 오묘한 세계를 그리기도 했다. 그의 아호는 12세기 북송 말엽 곽암사원(廓庵師遠, 생몰년대 미상) 선사(禪師)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에서 ‘우(牛)’를 취하고, 노자(老子)의 제1장에 나오는 현지우현, 중묘지문(玄之又玄, 衆妙之門, 멀고 또 그윽하도다! 뭇 묘함이 그 문에서 나오는도다!)에서 ‘현(玄)’을 취했다고 한다.
그는 먹을 풀어 담담한 문인화풍의, 그러나 실경을 농축된 심경으로 진솔하게 나타내고자 노력했다. 그의 많은 그림의 특징은 채색 물감을 극도로 절제하고 있다는 데 있다. 먹만으로 완성했음에도 결코 어둡거나 무겁지 않다. 또 먹의 선이 간결하고 날씬하되 요체(要諦)를 응집시켜 군더더기나 부족함이 없다. “그림을 그릴 때 채색을 피하고 먹을 위주로 그리는데 그 이유는 먹의 오묘함이 어떤 화려한 색보다 그 전달력에 있어 능란하기 때문입니다. 나의 바람은 나의 개성 표현에 있습니다. 자기다운 것을 하기 위해 예술을 덩어리화시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화려한 색채의 화초보다는 길섶의 질경이꽃같이 살고 싶습니다.” 한 인터뷰에서 우현이 한 말이다.
>>이재준(李載俊)
1950년 경기 화성 출생. 아호 송유재(松由齋). 미술품 수집가, 클래식 음반 리뷰어.
춘삼월(春三月)이라고는 하나, 산골짝의 계절은 아직 봄이라기보다는 겨울에 가깝습니다. 나뭇가지는 여전히 깡말랐고 산기슭과 계곡엔 갈색의 낙엽이 무성하게 쌓여 있습니다. 낙엽 밑엔 미끌미끌한 얼음이 숨어 있어 함부로 내딛다가는 엉덩방아를 찧기 십상입니다. 저 멀리 남쪽에선 2월 하순부터 보춘화가 피었느니 변산바람꽃이 터졌느니 화신(花信)을 전해오지만, 높은 산 깊은 계곡에선 3월 초순 잘해야 너도바람꽃 한두 송이가 가냘픈 꽃송이를 치켜들 뿐입니다. 그렇듯 메마른 3월의 산중에서도 눈 밝은 동호인은 파릇파릇 돋아나는 묘한 야생화를 찾아냅니다.
“이게 정말 꽃이 맞아요?”
“무슨 꽃이 이렇게 생겼을까!”
“꽃잎은 어디에 있나요?”
처음 보는 이는 익히 알던 꽃과는 전혀 다른 형태에 신기해합니다. 그러곤 이런저런 질문 끝에 ‘앉은부채’란 이름을 그럴싸하다고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앉은부처’로 잘못 알아들었음을 알고선 다시 갸우뚱합니다. 한가운데 도깨비방망이처럼 생긴 게 일견 불두(佛頭)를 닮아 ‘앉은부처’라고 불린다고 이해했는데 그게 아니라니 뭔 사연인지 설명해달라고 채근합니다.
앉은부채는 우선 촛불 모양의 독특한 꽃으로 눈길을 끕니다. 꽃잎인 듯싶은 자갈색의 타원형 이파리는 불염포라 불리는 꽃 덮개입니다. 그 안의 도깨비방망이가 육수(肉穗)꽃차례라고 불리는 꽃 덩어리인데, 거북의 등처럼 갈라진 조각조각이 4장의 꽃잎과 4개의 수술, 1개의 암술을 갖춘 각각의 꽃송이입니다. 부처의 광배(光背)를 닮은 꽃 덮개와, 역시 부처의 머리를 닮은 육수꽃차례로 인해 ‘명상에 잠긴 부처’라는 별칭으로 또는 ‘앉은부처’로 잘못 불리기도 하지만, 원래는 꽃이 진 뒤에 무성하게 나는 잎이 부채처럼 넓다고 해서 앉은부채란 이름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앉은부채가 가장 우리를 놀라게 하는 건 강인한 생명력에 있습니다. 이른 봄, 눈 속에서 꽃 덮개를 뾰족뾰족 세운 앉은부채는 마치 백상아리가 등지느러미를 곧추세우고 망망대해를 유영하듯 대견스럽습니다. 꽁꽁 언 땅속에 1m 넘게 뿌리를 내리고, 그 깊은 뿌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로 얼음 구들을 녹이고 독특한 형태의 꽃을 피우는 앉은부채의 놀라운 생명력은 경이 그 자체입니다. 강원도에선 겨울에서 봄 사이 부채처럼 넓게 이파리를 펼치다 보니 겨울잠에서 갓 깨어난 곰이나 산짐승들이 가장 먼저 먹는 풀, 즉 ‘곰풀’로 불렸다고도 합니다. 또 지방에 따라 삿부채, 우엉취, 취숭(臭崧) 등 여러 이름으로도 불립니다. 유독성 식물로 잎은 풍성하지만 먹을 수 없다고 하여 ‘호랑이 배추’라는 별칭도 얻었습니다.
꽃 덮개가 노란 앉은부채의 경우 정명은 아니지만 ‘노랑앉은부채’로 불리는데, 어쩌다 귀하게 만난 노랑앉은부채를 보고 있노라면 염화시중(拈華示衆)의 미소로 겨울을, 꽃샘추위를 저만치 물리치는 듯한 진한 따스함이 전해져옵니다. 학명 중 속명 심플로카르퍼스(Symplocarpus)는 결합한다(symploce)와 열매(carpos)라는 그리스어 합성어로 씨방이 열매에 붙어 있다는 뜻, 종소명 레니폴리우스(renifolius)는 콩팥 모양의 잎을 가졌다는 의미입니다. 영어로는 스컹크 캐비지(Skunk Cabbage)라고 합니다.
Where is it?
전국에 분포하는데, 수도권 인근에선 천마산이 개체 수도 풍성하고 ‘노랑앉은부채’도 만날 수 있는 자생지로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충북 청원군 낭성면의 한 작은 산 입구에는 앉은부채 자생지라는 안내 표석(사진)이 세워져 있다.
설악산은 사계절 만년설이 있는 산도 아닌데 이름은 ‘설악(雪岳)’이다. 국내에 산은 많아도 이렇게 ‘설자(雪字)’가 붙은 산은 유일하다. 대청(大靑), 공룡능선(恐龍稜線), 용아장성(龍牙長城), 천불동(千佛洞 ) 등 멋진 이름들이 있다. 누가 언제 이토록 멋진 이름들을 붙였을까. 그저 감탄할 뿐이다.
설악산 능선 중 고전이라고 할 수 있는 공룡능선으로 향한다. 용대리에서 백담사까지 이어지는 포장도로의 백담사에서 출발해 중청대피소에서 1박한 다음 이튿날 공룡능선을 일주한 뒤 소공원으로 하산하기로 했다.
백담사 경내는 스님들의 동안거로 쥐죽은 듯 고요했다. 오전 11시, 일행은 백담사 마당을 말없이 한 바퀴 돈 뒤 봉정암으로 향했다. 오늘의 목적지는 중청대피소. 백담사에서 중청대피소까지는 약 12km. 해가 지기 전까지 그곳에 도착하는 것이 임무다.
기자는 1년 전 무더웠던 여름날 소공원을 기점으로 공룡능선 일주를 한 적은 있지만 눈 쌓인 공룡능선을 오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래서 더욱 기대가 됐고 그만큼 불안했다.
백담사에서 봉정암까지는 약 10km. 오후 3시 봉정암에 도착했다. 백담사에서 영시암을 거쳐 봉정암까지는 불자들 사이에서 유명한 성지순례길이다. 걷다 보면 스페인의 산티아고 트레일에 버금가는 지극한 성정(性情)과 마주할 수 있다. 봉정암으로 이어지는 돌너덜 된비알을 오르는 길에 문득 숙연해졌다. 머리 허옇게 새고 허리는 활처럼 굽은 보살들의 간절한 마음을 떠올리며 지금 이 세상의 고통, 나와 우리의 아픔을 위해 기도했다. 아직까지 절 인심이 살아 있는 까닭에 밥때가 훌쩍 지난 시간이었음에도 일행은 미역국에 밥을 말아 공양했다. 자판기 커피도 무료로 제공하고 있어 불자가 아닌 등산객들도 오며가며 두루 신세를 지는 산방(山房)이 바로 이곳 봉정암이다.
봉정암에서 소청을 지나 중청대피소까지는 1.7km. 소청대피소에서 바라본 설악의 전경은 여전히 할 말을 잃게 했다. 공룡능선을 중심으로 용아장성, 천화대, 울산바위가 비경을 선사했다. 그리고 저 멀리서 멈춘 듯 흐르는 동해의 푸른 물빛.
중청대피소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5시였다. 배낭을 풀고 요깃거리를 챙겨 취사장으로 내려가니 어느덧 해가 다 저물어 있다.
다음 날 아침 7시, 중청대피소에서 빈 몸으로 대청까지 올라갔지만 안타깝게도 일출의 찰나는 잡을 수 없었다. 켜켜이 밀려 있던 안개와 구름이 걷히니 어느새 여명이 온 세상을 데웠다. 흡사 냉동고에 들어 있던 고기처럼 얼어붙은 대청의 비석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서둘러 희운각대피소로 향했다. 그곳에서 아침식사를 할 계획이었다. 스패츠와 아이젠을 차고 새하얀 눈을 저벅저벅 밟으며 길을 냈다. 중청대피소에서 희운각대피소까지는 2.1km. 경사가 제법 있는 내리막이라 특히 더 조심해야 했다. 희운각대피소에 도착했을 때는 9시 30분. 여전히 우리뿐인 취사장에서 라면을 끓여 먹었다.
1년 전 여름의 내 기억 속 공룡능선은 도통 그 거리가 줄어들지 않았다. 능선상 거리는 5km에 불과하지만 신선대, 1275봉, 큰새봉, 나한봉 등 1000m 이상의 봉우리를 오르내려야 하기 때문이다. 과연 아무도 지나가지 않은 눈길이라 걸음에 속도가 붙질 않았다. 일행은 말없이 이동했다. 무너미고개를 넘자 바람은 더 차고 거세졌다. 신선대 위에 서니 천화대 일원이 장관이다. 장군봉, 유선대, 범봉, 세존봉, 마등령이 한 줄로 이어졌다. 그리고 뒤돌아 우리가 올랐던 대청, 중청, 소청 능선을 바라봤다. 저 멀리 외따로 떨어져 솟은 귀때기청봉이 아련하다. 대청 아래로 흐르다가 지금은 하얗게 얼어붙은 죽음의 계곡에 시선이 멈췄다. 우리가 아침에 지났던 희운각대피소와 관련이 있다. 1969년 2월 14일 한국산악회 소속 제1기 에베레스트 원정대가 히말라야 원정을 위해 죽음의 계곡(옛 지명 반내피)에서 등반 훈련 중 눈사태를 당해 전원 10명이 사망한 사건을 계기로 현재 위치에 지어졌다. 대피소 이름이 ‘희운각’인 이유는 희운(喜雲) 최태묵 선생이 ‘이 자리에 산장이 있다면 이러한 사고를 미연에 막을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본인의 사재를 들여 지었기 때문이다.
희운각대피소에서 200m 떨어져 있는 곳에 솟은 무너미고개는 공룡능선의 관문과 같다. 전신재 저 에 따르면 무너미고개는 가야동계곡과 천불동계곡, 그러니까 내설악과 외설악의 분기점인 곳이다. 이름 그대로 물이 넘는 고개[水踰峴]. 물이 전에는 외설악으로 넘어갔는데 지금은 내설악으로 넘어간다고 한다. 무너미에 관한 또 다른 설은 ‘산 너머’의 고어(古語)라는 추측이다. 순우리말로 뫼너머, 메너머, 무너머를 거쳐 무너미로 정착했다는 설. 공룡능선을 기준으로 내설악과 외설악이 갈라지므로 물 넘어, 산 너머 모두 설득력 있는 이야기로 들린다.
“오래전에는 누가 어디서 공룡능선 일주했다 하면 정말 대단하다는 소리 나왔어. 지금은 그 어려움과 명성이 그때 같지는 않지. 그래도 빡세긴 여전히 빡세!”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인 2006년 국지성호우로 설악산에 산사태가 나면서 모든 등산로를 재정비했고, 그 결과 공룡능선에도 난간이나 밧줄 등이 설치돼 산행이 훨씬 수월해진 덕이다.
가까스로 도착한 마등령 삼거리. 이곳에서 오세암을 거쳐 다시 백담사로 내려서는 길, 그리고 비선대를 거쳐 소공원으로 내려서는 길이 나뉘는데 오세암에 이르는 1.4km 구간은 산사태 발생 및 추가붕괴 위험을 이유로 올해 5월 15일까지 통제된다. 시간은 오후 3시, 소공원까지 남은 거리는 6.5km. 배낭 깊숙이 들어 있던 헤드랜턴을 꺼내 바람막이 주머니에 넣고 소공원을 향해 속도를 낸다.
파워 블로거이자 미국의 미술 잡지 기자인 조이스 리(Joyce Lee·70)는 우리나라에서 세 번의 개인 전시회를 가졌다. 그녀는 블로그(‘커피 좋아하세요’)를 시작하면서 사진에 입문하여 미국 곳곳의 자연을 찾아다니며 찍은 사진들과 재미있는 이야기로 블로거들에게 인기를 얻었고, 60세에 본격적인 기자로 데뷔했다. 그런데 그녀의 전직은 패션 디자이너. 대체 그녀의 인생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강한 제스처와 자그마한 몸, 진한 눈 화장, 쭈뼛쭈뼛 서 있는 머리, 영혼을 빨아들이는 목소리에서는 쉬이 범접할 수 없는 인디언 추장 같으면서 천진스런 어린왕자를 보는 듯했다.
“내가 좀 말이 많아요. 내 안에 있는 것들을 쏟아내야 하는 강박관념 때문에 이렇게 돼버렸어요. 나를 이해하려 하지 마세요(웃음). 그냥 그렇게, 보이지 않는 것도 있어요.”
조이스 리와의 인터뷰는 꼭 숨바꼭질 같았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여전사의 옷자락을 잡고 마냥 헤맸다고 생각했는데, 또다시 멈추고 싶은 말들이 오갔다.
Art&Culture 매거진 기자로 세 번의 사진 전시회를 가진 조이스 리는 오래전 명동에서 ‘이동희 부틱’을 운영했던 디자이너였다. 나름대로 자리 잡은 전문 디자이너였던 그녀가 미국으로 떠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서른두 살에 낳은 딸이 하나 있어요. 그 아이가 중학교 1학년이었을 때 막 조기유학 붐이 불었죠. 그때 남편의 형님이 미국에서 살았고, 딸이 유학을 가고 싶다고 해서 보내기로 했어요. 아이를 먼저 보냈는데, 처음에는 나는 갈 생각이 전혀 없었어요.”
하지만 운명이라는 것은 어떻게든 작용을 하기 마련인가보다. 딸의 친구 어머니가 딸에게 충고를 했단다.
“그분이 ‘네 엄마가 오든지, 네가 들어가는 게 좋겠다’라고 말씀하시더라는 거예요. 바른말을 한 거지. 사춘기를 겪고 있는 자식 문제인데, 가게 문 닫고 달려갔어요. 저는 재단사 자격증이 있었던 덕분에 영주권을 얻는 것은 쉬웠죠. 그래서 미국에서도 패션 디자인 일을 할 수 있었어요.”
미국에서 뿌리내리기 위해 조이스 리 부부와 딸은 비장한 각오로 견디며 버텼다.
60세에 시작한 기자로서의 삶
그녀는 2008년 기자로 입사했다. 그때 나이가 미국 나이로 60세였으니 좀 놀랍다.
“어느 날 남편의 신장이 멈췄어요. 신장 투석을 일주일에 세 번씩 하면서 남편은 직장을 관두게 됐죠. 그런데 미국에서는 둘이 벌어도 융자를 감당하는 게 어려웠어요. 그래서 작은 아파트로 옮겨서 살았죠. 그리고 힘든 시간으로부터 도망가지 않으려고 시작한 것이 블로그를 통한 세상과의 소통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컴퓨터를 배우고 사진을 시작했습니다. 블로그를 하기 위해서.”
그녀는 다음 블로그의 우수 블로거가 400명이었던 시절에 그 중 한 명으로 뽑힐 만큼 성공적인 블로그 운영을 했다. 하루에 2000명 정도가 다녀갈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 와중에 그녀의 글을 눈여겨보던 사장이 그녀를 사진기자로 캐스팅했다.
“경향신문에 연재되던 안의섭의 라는 만화가 있었어요. 그 네 컷짜리 만화가 정치, 경제, 사회를 다 다뤘잖아요? 그런 느낌으로 이 여자의 글도 실어보자는 게 잡지사 사장의 의도였다는군요. 그런데 그 의도보다 내가 좀 더 잘했다고 해요(웃음). 하긴 정말 사명감을 가지고 다녔어요. 기자생활을 위해 손톱도 안 기를 정도였거든요.”
그녀는 컴퓨터를 배우고 기자가 된 게 참 잘한 일이라고 거듭 말했다. 무엇보다 자신을 써주는 데가 있다는 사실이 너무 감사했다는 것이다.
“제 첫 번째 라는 책이 나온 게 2012년이었어요. 어느 날 지나가던 사람이 제 책을 들고 와서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어요. ‘50이 되고 갱년기가 와서 인생이 너무 슬픈데 선생은 60부터 이걸 하셨다니 놀라워요. 제가 60이 되려면 앞으로 10년이 남았는데, 10년을 더 노력하면 무엇인들 안 되겠습니까’라고요. 많은 사람들에게 그런 희망을 줄 수 있으면 좋겠다 생각했어요.”
정신심리학 박사인 김효숙 교수는 조이스 리의 사진을 수천 장 넘게 갖고 있다고 한다. 그녀가 찍은 사진이 심리치료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기자의 시선으로 왜곡되지 않은 자연의 모습을 보여주는 조이스 리 사진의 힘일지도 모른다.
일주일에 5일은 일하고 주말에 홀로 미국 대륙의 수천 마일을 오가며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자연인이 된다. 작은 체구이지만 그녀의 눈빛과 몸짓에서 뜨거운 용트림이 느껴진다. 그 에너지가 견딤의 실체라는 걸 알아채는 데는 얼마 안 걸린다.
20만 번의 셔터 누름, 결국 고장 난 카메라
“닷새 동안 3000마일이 넘는 먼 거리를 혼자 돌아다니다 집에 돌아와 네 시간 정도 잔 후 새벽 3시에 일어나 다시 작업을 시작해 정오까지 마치고 시장을 다녀왔어요. 남편은 그런 나를 보고 철인 3종 경기에 나가도 챔피언이 될 거라며 혀를 찼습니다.”
그녀는 다시 태어나면 꼭 누군가의 남편이 되어 아내가 마음 놓고 여가를 즐기며 쉬엄쉬엄 여행도 할 수 있도록 배려하겠다고 수없이 다짐한다. 그녀가 사진을 배운 것은 철저히 필요에 의해서였다.
“기자는 본격적으로 사진을 다룰 줄 알아야 하니까요. 50대 후반의 나이에 컴퓨터를 배우는데 어찌나 어려운지. 봄여름 학기와 가을겨울 학기 중 네 명의 장학생을 선발해 포토샵을 무료로 가르친다더라고요. 그게 욕심이 나서 열심히 공부했죠. 대상포진이 두 번이나 올 정도로 무리를 했어요.”
카메라 셔터 수명은 대략 15만 번 누르면 고장이 난다고 한다. 그러나 조이스 리의 카메라는 5년 정도 사용하면서 20만 번을 찍었고 결국 셔터는 고장이 나고 말았다. 셔터의 감각을 익히고자 했던 그녀의 집중력을 알 수 있게 해주는 대목이다.
“제가 싫어하는 게 왜곡이에요. 그래서 어안렌즈는 아예 구매를 안 했어요. 줌도 잘 안 써요. 그런데 작가라는 이름을 안 쓰는 이유는 아직 카메라를 못 다루기 때문이에요. 저는 그냥 지나가다가 좋으면 찍거든요. 그러니 작가라고 말하지 못하죠.”
그녀는 글쓰기에도 욕심을 부린다.
“현재 집필중인데, 2년 후에 소설을 발표할 거예요. 제가 미국 서부의 내셔널 공원을 다 가봤는데 가장 아름다운 곳이 그랜드 티톤이었어요. 그곳에 가면 엘크 떼 수백 마리를 아침에 만날 수 있어요. 저는 엘크에서 느껴지는 거대한 남성성을 좋아해요. 그리고 버펄로, 울창한 숲, 거대한 연못과 그리즐리, 스네이크 리버도 있죠. 그곳에 가면 대자연을 만날 수 있어요. 소설은 그곳에서 일어나는 서정적인 이야기들이에요. 세계에서 최초로 한국어와 영어로 쓰인 인터넷 소설이 될 거예요.”
나의 전생은 ‘인디언’
역마살을 타고난 여자, 조이스 리는 어느덧 9년차 기자가 됐다. 인터뷰 후 얼마 있다가 잡지가 나오는데 이번에 그녀가 심혈을 기울인 것은 인디언 문화다.
“요즘 미국 사람들이 자기들 역사는 아니지만 본래 그 땅의 주인공들인 인디언들에 대해 관심이 많아졌어요. 저는 이전부터 인디언에 대해 관심이 굉장히 많았는데, 3~4년 후에는 기자의 눈으로 만난 인디언들 얘기를 책으로 쓸 거예요.”
원래 미국의 인디언들은 거의 서부에 있었다고 한다. 동부에는 체로키족이 있었는데 이들이 유럽인을 가장 먼저 만나 백인 중심 인텔리 사회로 편입할 수 있었다. 그에 반해 서부에는 아직 야생의 문화가 남아 있다고 한다.
그녀의 인디언에 대한 관심과 집착은 남다르다. 심지어 과거에 열렸던 조이스 리의 사진전 이름도 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전생에 인디언이었다고 주장한다.
“난 믿어 의심치 않아요. 그들에 대한 알 수 없는 연민이 있거든요. 그리고 언덕에서 붉은 계곡을 내려다볼 때 느끼는 감동 같은, 마음으로 통하는 데자뷔를 느껴요. 그것은 굉장한 희열이에요.”
지금 당장은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일이 결국에는 인생을 아름답게 채색해준다면 누구라도 그 험한 세상을 향해 달려갈 것이라고 그녀는 말한다.
손주 시후의 일기를 쓰는 여전사 할머니
영어와 한국어에 능통한 조이스 리의 딸은 지니프러덕션 L.A. 전산실에서 근무하고 있다.
“손주는 이제 막 학교에 들어갔는데 공부를 진짜 못해요. ‘0점’만 받아와요. 그래도 자연에 대한 감수성은 굉장히 좋아요. 이 아이에 대한 이야기, 를 요즘 페이스북에 올리고 있어요.”
는 할머니의 시선으로 손주의 마음을 그려내는 글이다. 독특한 관점이다.
“네가 이렇게 자랐다, 할머니는 네가 이렇게 생각할 것이라고 여겼지만 정말 이렇게 생각할 줄은 몰랐다…. 현실을 바라보는 하나의 상상인 거죠. 제 딸이 사춘기에 방황을 했어요. 저는 딸이 형제가 없어서 그렇게 방황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손주만큼은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라요. 손주가 엄마랑 비밀이 있겠지만 저랑도 비밀이 있으면 좋겠어요. 자기편이 있다고 생각하면 힘들지 않잖아요.”
손주를 바라보는 그녀의 시각은 항상 밝다. ‘빵점 맞으면 어때. 그리고 설마 영어를 못하겠어? 긍정적 시각으로 미래를 보라 이거야.’ 손주 시후에게 항상 희망을 심어주는 그녀만의 특별 도구다.
“손주의 자랑이라면 유머가 풍부한 편이에요. 지금 시대는 먹고사는 걱정이 크지 않기 때문에 즐겁게 사는 게 중요해졌잖아요. 이 아이는 그렇게 살 수 있을 거예요. 그래서 저는 손자의 개구쟁이 짓을 절대로 야단 안 쳐요. 어른을 놀려먹으려고 하는 게 아닌 이상은.”
손주가 어렸을 때 밥을 먹다가 먹던 것들을 컵에다 붓고 손가락으로 주무르는 행위를 자주 했다고 한다. 다른 식구들은 “저걸 왜 내버려둬” 하면서 경악했지만 그녀는 “지금 재미있는 놀이를 하는 거다, 2년만 지나면 안 한다”라고 말했단다. 그녀는 손주가 촉감을 익히는 중이니 내버려두는 게 맞다고 생각한 것이다. 손주 시후에게는 언제라도 미소를 지어주는 할머니다.
틀에 갇히지만 않는다면 시니어와 젊은이의 삶은 다르지 않다
이미 제2의 인생을 성공적으로 펼쳐나가고 있는 조이스 리는 멋진 인생을 살고자 하는 시니어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했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것 중 하나가 ‘야 이놈아 네 나이가 몇이냐?’ 하는 말이에요. 그 말을 해서 얻는 건 경멸밖에 없어요. 안 그래도 요즘 젊은이들은 노인네를 인류의 한 부족으로 생각하잖아요. 그러지 말고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어렵지만 앞으로 함께 나아가면 좋겠어요. 대화를 통해 지혜를 나눠주되 절대 잘난 척하지 말아야 하고, 나이 같은 건 의식하지 않으면 좋겠어요.”
본능처럼 여겨온 삶의 철학, 느낌과 경험을 축적해 체득한 깊은 진심이 묻어났다. 조이스 리는 틀에 갇히는 것을 거부한다. 간절함을 미끼로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사람이다. 한숨 쉬어갈 수 있는 삶의 여유를 찾았으면 하는 프레임, 그리고 그 안에는 세상 그 무엇보다 다정하고 따뜻한 마음이 담겨 있다. 그녀의 사진처럼 말이다. 그녀가 세상 사람들에게 간절히 전하고 싶은 메시지다.
◇ by 조이스 리
몬순기에 장대 같은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하면 대지가 거의 바위로 이어져 있는 계곡 때문에 물이 그대로 강물이 되어 내달린다. 이 물의 힘이 수수만년 이어지면서 협곡이 생기고 겹겹의 층 사이를 깎아내어 아름다운 속살을 드러낸 골짜기가 형성되었다.
산타페의 대표적인 건물은 어도비(Adobe)식 흙집으로, 해발 2200미터가 넘는 고지대인 이 지역의 혹독한 겨울과 뜨거운 여름을 잘 견뎌내도록 지어졌다. 두께가 50센티미터가 넘는 두꺼운 벽이 외부의 온도를 차단해주기 때문이다.
모래언덕 데스밸리. 여름 5월부터 9월까지는 날씨가 섭씨 50-60도를 웃돌므로 피하고 가을 한철 또는 이른 봄에 방문하는 것이 좋다. 이와 같은 척박한 사막의 땅에도 봄이면 야생화가 만발하고 동물들이 삶을 이어가고 있어 경이로움을 느끼게 한다.
토요일이기도 하고 날씨도 좀 어두컴컴한 것 같아 늦게까지 침대에 있었다.
그때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되게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려대기 시작했고 받아 보니 친구의 명랑한 목소리가 잠을 확 달아나게 했다. “눈 온다!”
친구는 벌써 다른 친구와 일산 어디의 멋진 카페에서 창밖의 눈을 감상하고 있다고 한다.
필자가 잠자리에서 게으름 피우는 동안 고마운 친구는 벌써 외출해 맛있는 커피를 마시면서 첫눈을 즐기며 필자에게 올 첫눈 소식을 전해주었다.
벌떡 일어나 거실 창문 밖을 내다보니 새하얀 눈이 펄펄 내리고 있다. 올겨울 첫눈이 아주 풍성하게 쏟아지는 중이다.
물론 뉴스에서 북쪽 지방이랑 산간에선 눈이 내렸다고 이미 보도되었었지만, 필자 눈으로 이렇게 가깝게 폭설처럼 쏟아지는 깨끗하고 예쁜 눈을 보는 건 올해로선 처음이어서 감동이다.
북한산 국립공원 근처인 우리 집은 서울 변두리 산 밑이라서 눈이 많이 내리면 보이는 곳곳이 멋진 동양화의 그림같이 변한다.
산등성이를 휘두르며 마른 겨울나무와 계곡을 채우는 흰 눈을 감상하는 건 너무나 장관이어서 그 장면을 볼 수 있는 게 필자의 행운이라고까지 생각이 든다.
하얀 눈이 너무나 깨끗해 보이고, 시원한 얼음 가루인 것 같아서 어릴 땐 마당 장독 위에 쌓인 눈을 집어 먹기도 했는데 요즘은 그러고 싶은 마음이 들어도 선뜻 그러지 못하는 현실이 좀 안타깝다.
환경 공해 때문에 언제부터인지 눈은 맛보면 안 되는 거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첫눈-하면 가장 먼저 연상되는 건 첫사랑...아닐까?
지금은 아무리 생각해도 첫사랑이 언제였는지 누구였는지도 가물가물하기만 해 이렇게 그만 메말라버린 감정이 아쉽기도 하지만 펑펑 내리는 눈을 바라보니 그래도 소녀 같은 감상이 느껴져서 수줍은 미소가 지어진다.
첫사랑이 누구였는지 생각나지는 않아도 팔팔했던 젊은 날 남자친구와 흰 눈을 맞으며 무작정 걸었던 예쁜 추억은 있다.
그때 그 녀석이 누구였는지 도무지 얼굴이 떠오르진 않지만 송추 쯤이었던가 어느 넓은 눈밭에서 러브스토리 주인공 따라 한다며 털썩 눕기도 해 보았고 나무 밑의 눈을 한 움큼 입에 넣어보기도 했다.
그땐 모든 게 즐거워서 환경공해 때문에 눈을 먹으면 안 된다는 생각 같은 건 하지 않았다.
젊었을 땐 그렇게 모든 게 아름답고 즐겁기만 했는데 시니어가 된 지금은 다른 생각도 하게 한다.
이렇게 눈이 많이 내리면 한때 보기는 좋지만, 눈이 녹으면서 길은 질척해질 테고 교통도 막힐지 모른다. 그리고 날이 더 추워져 빙판이라도 되면 엉금엉금 조심해야 할 것이 걱정스럽다는 낭만적이지 못한 염려가 되니 서글프다.
그래도 펄펄 내리는 흰 눈은 기분 좋게 해준다.
이런저런 생각을 떨치고 아무리 날이 춥고 썰렁해도 옷 단단히 챙겨 입고 눈을 밟아보러 나가야겠다.
지난 6월호에서 손주의 잉태 소식을 ‘생명은 기계가 아닙니다’라는 제목으로 전해드렸습니다. 이제 그 아기를 만나보고 몽골로 돌아왔습니다. 드디어 세상에 태어난 아기를 만나러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따로 따로 버스를 타고 비행기를 갈아타며 다시 빨리 달린다는 열차와 자동차로 이름도 생소한 독일 에어랑엔(Erlangen)의 헤르초게나우라흐(Herzogenaurach)에 밤늦게 도착했습니다.
제 아내, 즉 아기의 할머니는 나보다 먼저 출발했고 할아버지인 나는 한 달 후에 닿은 것입니다. 세 살과 네 살인 아기 오빠는 아직 동생이 생소합니다. 언제라도 뛰어가 안길 수 있었던 엄마의 품안엔 아직 잘 이해가 되지 않는 아기가 있습니다. 자기들과 항상 놀아주던 엄마와 아빠가 새 아기와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모습이 생소하면서도 한편으론 이해가 될 듯도 합니다. 자기들과 비교할 수도 없는 너무나 어리고 여린 생명을 경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예 경쟁을 포기하고 자기들끼리 눈치껏 알아서 노는 데 익숙해지고 있는 중입니다. 그래도 어른들이 보기에 착하게만 굴 수 없는 나이라서 어른들이 챙겨줘야 할 일들은 끊이지 않고 터집니다. 두 녀석의 활기찬 에너지는 언제나 생기가 넘쳐 어른 한두 명이 감당하기가 벅차다는 것은 현장에 도착하기 전 이미 아내의 카톡을 통해 내 머리에 입력되었습니다.
밤늦게 도착해 자고 나서 현장에 투입되니, 역시 내 주된 일이 그 두 녀석과 노는 것입니다. 내가 도착하기 전 아내는 어떻게 혼자서 이 일들을 감당하고 있었는지 존경스럽습니다. 나 혼자서도 만만치 않은 개구쟁이 두 녀석을 돌보는 일을 아내는 짬짬이 하는 곁다리 일로 담당했다니!
몸을 추스르고 있는 며느리가 행여 나중에라도 뒤탈이 있을까봐 아내는 모든 빨래와 집안 정리와 청소, 거기에 세끼의 식사를 정성을 다해 준비하고 있습니다. 단독주택이라 지하층부터 3층 다락방까지 오르내리기를 쉬지 않습니다. 두 녀석 유치원엘 자동차로 데려다주고 데려옵니다. 장을 봅니다. 그 와중에 아이들과 친분이 있는 가족들을 초대해 칭찬받을 대접도 하였습니다. 한국 아줌마의 놀라운 힘을 곁에서 직접 보니 정말 여러 번 혀를 내둘러야 했습니다.
그렇게 며칠을 지내다 드디어 늦게 일어나도 되는 토요일 새벽입니다. 다 쉬고 있는 새벽입니다. 깊이 자고 있는 저를 깨워 보여줄 게 있다며 아내가 조용히 문을 열고 골목골목을 돌아 데려간 곳은 새벽안개가 피어나고 있는 벌판이었습니다. 삶의 현장을 떠나 갑자기 다른 세상에 온 것입니다. 공간적으로의 이동뿐 아니라 시간의 공백도 느껴졌습니다.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읽은 헤르만 헤세의 시가 정확히 떠올랐습니다. ‘Im Nebel(안개 속에서)’였습니다. 전혀 내 머릿속에는 이미 없을 거라고 당연히 치부하고 있었던 독일어 수업시간이 너무나 생생하게 기억되었습니다. 정말 기적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 하며 꿈에도 생각 못했던 독일의 안개 속에 오십 년의 시간적 공백을 느끼며 바라보았습니다.
Im Nebel
Seltsam, im Nebel zu wandern!
Einsam ist jeder Busch und Stein,
Kein Baum sieht den andern,
Jeder ist allein.
Voll von Freunden war mir die Welt,
Als noch mein Leben licht war;
Nun, da der Nebel fallt,
Ist keiner mehr sichtbar.
Wahrlich, keiner ist weise,
Der nicht das Dunkel kennt,
Das unentrinnbar und leise
Von allem ihn trennt.
Seltsam, im Nebel zu wandern!
Leben ist Einsamsein.
Kein Mensch kennt den andern,
Jeder ist allein.
안개 속을 헤매면 이상하여라!
숲과 돌은 저마다 외로움에 잠기고
나무도 서로 보지 못한다.
모두가 다 혼자다.
내 삶이 아직 밝던 시절엔
세상은 친구들로 가득했건만
이제 안개 내려
아무도 보이지 않는구나.
어쩔 수 없이 조용히 모든 것에서
사람을 떼어놓는 그 어둠을
조금도 모르고 사는 사람은
참으로 현명하다 할 수 없다.
안개 속을 헤매면 이상하여라.
인생이란 고독한 것.
사람들은 서로 모르고 산다.
모두가 다 혼자다.
그렇게 그 시를 조금은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우리의 나이를 헤아려보며 아내의 손을 조금 더 느껴보았습니다. 조금 더 넓게 보기 위해 구릉에도 올라가 보았습니다. 풀에 맺힌 안개 이슬로 신발과 바지 섶이 젖었습니다. 마을로 되돌아와 아들 집에 이를 때 안개 속에 뿌옇게 떠오르는 해를 보며 조금 더 굽어진 나의 등을 실감하였습니다. 아직 오십 년의 시간을 되돌리고 있는 중이었나봅니다. 아내의 한마디에 정신이 확 깨었습니다.
뭐해? 셀라 트림시키지 않고.
셀라: 지금 독일 회사에서 일하고 있는 둘째 아들의 셋째 아이 이름입니다. 성경 시편에 나오는 ‘멈춰서 들으라, 내용을 묵상하라’는 뜻의 후렴구, 추임새. 셀라! 제 입에 넣고 굴릴수록 너무나 마음에 드는 이름입니다. 셀라.
개인적인 생각을 안개로 전하면서, 우리 대한민국이 자꾸 보고 싶어집니다. 이럴 때 이런 기회에 사랑하는 나의 대한민국에 전하고 싶은 믿음이 제게 하나 자라고 있습니다. 외국에서 겪을 수 있었던 우리의 놀라운 힘입니다.
전 한국전쟁의 비참한 문제들 가운데 자랐습니다. 철이 들면서 4·19를 보았고, 돈벌이를 위해 중동과 해외를 다녀야 했습니다. 6·29선언을 거쳐 IMF를 맞을 때, 세계는 우리 대한민국을 비웃으며 놀렸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놀림이 놀람으로 바뀌는 사건을 현장에서 겪었습니다. 이번에 당면한 놀림거리로도 우리는 다시 한 번 더 세상을 놀라게 할 것을 확실히 믿고 있습니다.
여기 몽골에서는 고려가 몽골의 속국이었다는 징기스칸제국의 지도를 자주 만나는 곳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가 세계 어느 나라보다 더 큰 사랑과 진정으로 몽골이 잘되도록 도와주고 있음을 서로 간에 알고 있습니다.
역사를 배우며 우리는 세상의 비웃음에 처했을 때마다 언제나 그들의 놀림을 딛고 일어나 그들을 놀라게 해왔던 자랑스러운 민족임을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이번에도 국가적 부끄러움을 만났지만 이 안개가 걷히면 우리 대한민국의 저력으로 오히려 세계가 놀라게 되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소용돌이치는 우리의 힘이 드디어 응집되고 있습니다. 고요히 흐르던 물이 지금 바로 깊고 좁은 계곡을 만났습니다. 급변할수록 우린 서로 끌어안는 힘! 대동단결, 두레의 에너지가 분출되는 한민족이기 때문입니다.
>> 함철훈(咸喆勳) 사진가·몽골국제대학교 교수
1995년 민사협 초청 ‘손1’ 전시를 시작으로, 2009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 2012년 이탈리아 밀란시와 총영사관 주최로 전을 FORMA에서 개최. 2006년 인터액션대회(NGO의 유엔총회)서 사진으로 대상 수상. 저서로 , 등이 있다.
어느덧 세모(歲暮)의 달 12월입니다. 2016년 한 해도 이제 역사 속으로 영영 사라져가니 아쉽기는 하지만 해가 기운다고 속상해하지는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스러짐이 마냥 슬픈 것은 아닙니다. 석양이 만드는 저녁노을은 그 얼마나 황홀합니까. 얼마 전 흘려보낸 만추의 가을은 얼마나 화려했습니까. 만산홍엽의 단풍 사이로 난 오솔길이 갈수록 그윽하고 다정다감하게 다가오듯, 나이를 먹을수록 그만큼 삶도 농익고 완숙해지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기온이 영하로 곤두박질치는 한겨울이면, 그리고 ‘고요한 밤 거룩한 밤~’ 노랫소리가 들릴 즈음이면 유난히 소개하고픈 야생화가 있습니다. 경기·강원·충북·경북 등 여기저기서 가을에 피는 좀바위솔입니다. 바위솔·정선바위솔·연화바위솔·포천바위솔·둥근바위솔·가지바위솔·울릉연화바위솔·난쟁이바위솔 등 국내에 자생하는 8~9종의 바위솔 중 하나로, 바위솔에 비해 전초도 꽃차례도 작아서 ‘좀’이란 접두어가 붙었습니다.
그런 좀바위솔이 유독 세모에 생각나는 까닭은 천지가 울긋불긋 물든 깊은 산중 커다란 바위 겉에 오뚝 꽃대를 세우고 있는 모습에서, 황혼 무렵 세상이 제아무리 요동을 쳐도 아랑곳없이 의연히 자신의 길을 가는 작은 거인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인생 2막인 ‘브라보 마이 라이프’를 그렇게 살아가고 싶은 마음 때문이겠지요. 게다가 만추의 계절 좀바위솔이 자생지인 높은 산이나 깊은 계곡에 무더기로 활짝 피어 있는 광경은 그 자체가 멋진 가을 풍경화가 되기도 합니다.
좀바위솔은 끝이 뾰족한 비늘 모양의 녹색 잎 수십 개가 빙 둘러 난 정중앙에 9~10월쯤 길어야 어른 손가락만 한 이삭꽃차례를 곧추세웁니다. 여러해살이풀이어서 뿌리가 다치지 않으면 해마다 연분홍색의 꽃을, 벼나 보리 등의 곡식 이삭처럼 다닥다닥 피웁니다. 그런데 수년 전부터 각종 바위솔 식물들이 암 치료 효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암암리에 뿌리째 남벌되는 수난을 겪고 있는 게 우려스러운 현실이기도 합니다. 실제 깎아지른 절벽과 유유히 흐르는 옥색의 강물, 불이라도 붙을 듯 붉게 물든 단풍 등 3박자와 어우러져 최고의 좀바위솔 자생지로 꼽히던 한탄강 변의 좀바위솔 자생지가 몇 해 전 괴멸되었습니다. 그러나 다행스러운 것은 자연은 스스로 대단한 치유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걸 보여주겠다는 듯 작년부터 하나둘씩 좀바위솔이 다시 피어나고 있어, 또다시 못된 손만 타지 않으면 수년 내 집채만 한 바위를 가득 덮었던 장관이 되살아나기를 기대하게 합니다.
Where is it?
경기·강원·충북·경북의 몇몇 좀바위솔 촬영지가 야생화 동호인에게 알려지면서 자생지가 그 주변 지역으로 국한된 듯 이야기되지만, 실제로는 훨씬 더 폭이 넓을 것으로 추정된다. 위에서 말했듯 강원도 철원 한탄강 변 자생지(사진)는 지금은 많이 훼손된 상태다. 철원의 상해계곡에서도 수는 많지 않지만 만날 수 있다. 경기도 연천의 지장산과 고대산, 가평의 화야산 등에는 제법 많은 개체가 자생한다. 강원도 인제군 상남면 미산계곡, 충북 단양의 송림사와 경북 봉화의 청량사 등의 주변 바위에서도 좀바위솔이 앙증맞게 핀 모습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