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여성성(習與性成)이라는 말이 있다. 곧 습관이 천성을 이룬다는 말이다. 습관에는 마음의 습관과 몸의 습관이 있다. 두 습관은 서로 연결되어 있지만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큰 스승 퇴계가 마음을 어떻게 다스려 고결한 성품을 갖게 되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논어’ 첫머리에 학이시습지불역열호(學而時習之不亦說乎)라는 말이 나온다. ‘배우고 배운 것을 때때로 익히니 기쁘지 아니한가’라는 뜻이다. 여기서 익힌다는 습(習)의 뜻은 몸으로 실천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퇴계는 살아서도 존경받는 대학자였지만 사후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조선 유학의 큰 별이 되었다. 그의 생애와 생활 습관을 살펴봄으로써 퇴계의 인품이 습관을 통해 어떻게 가꾸어졌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퇴계는 죽는 순간까지 타인을 향한 겸양과 섬김의 자세, 귀함과 천함을 가리지 않고 사람을 대하는 평등사상을 실천했다.
퇴계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은 두 학자가 있는데 성호 이익과 다산 정약용이다. 다산 정약용은 퇴계에 대해 이르기를 “공정한 인물평, 흐트러지지 않는 수양 공부, 겸양의 태도, 연구와 진리 추구, 순수하고 지극한 정성, 바르고 곧고 엄격하고 과단성 있는 점, 이러한 것들이 퇴계를 사숙하고 흠모하는 이유”라고 밝혔다.
퇴계의 어린 시절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부친은 그가 태어난 지 7개월 만에 마흔 나이로 죽고 모친 박 씨는 남은 7남매를 키우느라 농사일과 양잠 등으로 고된 삶을 살아야 했다. 어머니는 자식들을 훈계할 때 남을 위해 희생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과 사람으로서 해야 할 것과 해서는 안 될 일들을 엄하게 가르쳤다. 아버지의 부재는 그를 경서 공부로 이끌었고, 성현들의 가르침을 통해 배운 것을 실천하는 삶을 살았다.
퇴계의 언행록에 그의 습관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데 “새벽에 일어나 반드시 향을 피우고 조용히 앉아 하루 종일 책을 읽으셨다. 한 번도 나태한 모습을 뵐 수 없었다”고 했다. 무더운 여름날 퇴계가 의관을 정제하고 책 읽는 모습을 본 형이 옷을 벗고 시원하게 앉아 공부할 것을 권했지만 듣지 않았다. 혼자 방 안에 있어도 천 사람, 만 사람의 가운데 앉아 있는 것처럼 생각해야 한다며 굽히지 않았다고 한다. 퇴계의 독서법은 다독이 아닌 정독과 숙독이었으며, 공부의 목적은 사람다운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었다.
공부는 ‘중용’에 나오듯 철저하고 독실하게 했다. 첫째 넓게 공부하고(博學), 둘째 자세히 묻고(審問), 셋째 신중하게 생각하고(愼思), 넷째 바르게 분별하고(明辯), 다섯째 돈독하게 행동하는(篤行) 것을 목적으로 했다. 그는 항상 거경궁리(居敬窮理)하는 자세, 곧 경건함 가운데서 사물의 이치를 찾으려고 했다.
퇴계가 평소에 좌우명으로 삼고 지키려 한 내용이 목판본으로 제작되어 전해지는데, 먼저 간사하고 사악한 생각을 하지 않는 것(思無邪), 자기 스스로를 속이지 않는 것(毋自欺), 홀로 있을 때도 늘 삼가는 것(愼其獨), 공경하지 않음이 없는 것(毋不敬) 네 가지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실천하기 어려운 것이 남이 보지 않는 곳에서 자신을 속이지 않는 것이다. 곧 자기 자신에게 진실한 것이다. 퇴계는 공경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갈고닦은 후 이를 근거로 이웃을 편안하게 하고자 했다.
학문을 통해 퇴계가 추구한 것은 경쟁에서 승리도 아니요 지식으로 명성을 얻기 위함도 아닌 오직 사람다운 삶, 향기를 지닌 난초와 같이 인격을 갖춘 모습이었다. 사람에게 부여된 성(性)은 인의예지다. 유학에서 공부란 바로 감정의 발현이 치우치지 않도록 가다듬는 것이다. 모든 상황에서 중용을 유지하며 앎을 몸소 실천하는 사람, 곧 사람다운 사람이 되는 것이 군자이고 성인이다.
퇴계 이황(李滉, 1501~1570)은 조선 전기 성균관대사성, 대제학 등을 역임한 문신이며 성리학을 연구한 성리학자다. 주자는 성리학에다 태극도설에서 말하는 태극과 음양의 이론을 구체화해서 성리학의 우주론, 이기론을 완성한다. 태극은 이고 음양과 오행은 기에 속한다. 이와 기가 합해져서 만물이 태생한다는 이론이다. 퇴계는 주자의 이기론을 연구하여 이를 상위 개념인 우주만물의 근본 원리로 규정하고, 기를 하부 개념으로 분리해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완성했다. 퇴계는 이기론에 근거한 사단칠정론을 통해 인간의 인의예지와 칠정의 발현을 깊이 연구하고 윤리와 도덕을 통한 인간성 회복을 꿈꾸었다.
퇴계의 부부관은 서로 공경하되 친밀성을 잃지 않는 것이었다. 서로를 손님처럼 대하는(相敬如賓) 것이다. 그는 말하기를 “군자의 도가 부부에서 시작된다고 한다. 그런데도 세상 사람들은 모두 예와 존경을 잊어버리고 서로 버릇없이 친하여 마침내 모욕하고 거만하고 인격을 멸시해버린다. 이런 일은 서로 손님처럼 공경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퇴계는 두 번 결혼했는데 첫째 부인 허 씨는 다섯 살과 한 달 된 어린 자식을 남겨두고 세상을 떠났고, 둘째 부인 권 씨는 정신이 온전치 못하여 정상적인 부부생활을 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그런데도 부인을 정성껏 보살피고 공경했다. 순천에 사는 제자 이함형이 부인과 사이가 좋지 않아 혼인하고도 동침하지 않았는데, 순천 집에 가는 제자를 불러 아침 식사를 대접한 후 부부의 도리에 관한 서간을 써주어 부부 금슬을 좋게 하고 자녀를 낳아 행복하게 지내게 했다고 한다.
퇴계는 편지 3154통을 남겼는데 거의가 60세 이후의 것으로 평균 3일에 두 통의 편지를 쓴 것이다. 손자 이안도의 혼인 때도 한 통의 편지를 보냈는데 내용은 “천 번 만 번 경계하거라. 무릇 부부란 인륜의 시작이고 만복의 근원이니 아무리 지극히 친밀하고 가까워도 지극히 삼가야 하는 자리다”라며 부부의 바른 도리를 전하고 있다.
인향만리(人香萬里)라는 말이 있다. 배우고 깨달은 경서의 내용을 좌우명 삼아 덕행일치의 삶을 실천함으로써 우리나라 유학의 큰 스승으로 우뚝 선 퇴계 선생의 인품의 향기가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기업평가사이트 CEO스코어에 따르면, 일반 직장의 상무(이사 포함)급 임원의 평균 연령은 52세인 것으로 나타났다. 인생 연륜으로는 지천명이라 이르는 나이이지만, 새내기 리더로서는 아직 경험하고 알아야 할 게 많은 시기이기도 하다. 이에 리더들이 겪을 수 있는 몇 가지 문제에 대해 슬기로운 해결책을 모색해봤다.
도움말 김성남 리더십 컨설턴트(‘아직 꼰대는 되고 싶지 않습니다’ 저자)
“공정하게 했는데도, 매년 인사평가를 하면 결과를 수긍하지 않는 직원이 생겨요”
↳ 이미 결과가 나온 뒤 대처하기보다는 평소 관리가 필요한 문제다. 많은 연구 결과를 보면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직원들이 자신의 인사 평가에 수긍하지 않는 요인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 목표 수립이 잘못됐을 때다. 가령 직원의 의견이나 역량과 무관하게 상사가 임의로 목표를 정하거나, 지나치게 과도한 목표를 주거나, 애매한 목표를 설정해 후에 오해의 소지를 만드는 경우 등이다. 둘째, 피드백을 제때 하지 않아서다. 인사평가 결과 피드백도 필수이지만, 평소 적시에 하는 피드백도 중요하다. 인사평가에 영향을 미칠 만한 실수나 업무 결과가 나왔다면 적어도 일주일 안에는 짧게라도 피드백한다. 이런 과정을 지나치면 직원이 자신의 과오는 쉬이 잊고, 좋은 성과 위주로만 기억하게 돼 인사평가 결과를 이해하지 못할 수 있다.
효과적인 피드백을 위한 노하우
제때 자주 피드백하기: 인사고과 등 연 1회의 평가 때만 피드백을 하는 것은 비효율적이다. 프로젝트 주기나 업무량 등을 고려해 적절한 피드백 타이밍을 잡는다.
피드백 미팅은 간소하게: 피드백이 길어지면 집중력을 떨어뜨리고 반감을 갖게 한다. 한 조사에 따르면 90년대생의 67%가 적절한 피드백 시간을 5분 이내라 답했다.
데이터에 기반해 구체적으로: 두루뭉술하게 ‘더 노력해라’ 식의 이야기는 설득력이 부족하다. 납득할 만한 객관적 데이터를 통해 문제를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목표도 함께 제시하기: 목표 없는 피드백은 공허하고 무의미하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목표와 피드백을 함께 전달했을 때 업무 수행 향상 노력이 60% 증대된다.
사람과 행동 구분하기: 직원의 인격이나 가치관, 성향 등에 대한 언급과 비난은 삼가고 업무 관련 행동과 역량에 한정해 피드백한다.
잘한 것도 언급하기: 긍정 행동에 대해 칭찬을 먼저 해주면 피드백의 부정성이 완화된다. 그렇다고 억지로 잘한 점을 지어내 말할 필요는 없다.
미래지향적인 대화하기: 피드백의 근원적인 문제는 과거지향성에 있다. 문제에 대한 지적과 반성은 짧게 하고, 개선 방법을 제안한다.
“나이 많은 시니어 인턴을 뽑게 됐어요.조직원들과 잘 지낼까요?”
↳ 시니어 인턴의 경우 개인 역량이나 신체적 특성을 고려한 직무 설계가 필수다. 상대적으로 난이도와 강도는 낮지만 경륜과 판단력이 필요한 일들을 주는 것이 좋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비교적 연장자에 대한 존중을 잘 하는 편이어서 갈등을 빚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보다는 적합하지 않은 직무와 역할로 인한 문제가 당사자와 다른 조직원의 불편을 초래하고 트러블을 일으킬 수 있다. 어른에 대한 공경 차원이 아닌, 시니어 직원 역시 회사의 인사정책에 따라 공평하게 대우하고, 결과 중심의 객관적인 평가를 한다.
“회식도 하고 사생활 이야기도 듣고 싶은데, 코로나도 우려되고 다들 거부하는 분위기네요”
↳ 직원들이 회식을 거부하는 이유는 두 가지다. 그 방식이 싫거나, 유대감 형성을 위한 자리에 불편한 사람이 있는 경우다. 이런 회식은 오히려 역효과만 생긴다. 방식의 문제라면, 어떻게 해야 편안하고 유연한 회식 문화를 만들지 의견을 도모해도 좋겠다. 특히 요즘처럼 거리두기 상황에서는 ‘랜선 회식’이 유행이다. 줌이나 구글 미트 등에 접속한 뒤, 각자 원하는 음식을 배달해 식사를 하며 대화하는 형태다. 이때 식사비용은 회사나 리더가 지불한다. ‘괜찮을까?’ 싶겠지만 의외로 즐길 만하다는 반응. 이러한 회식 자리에서도 친밀감을 표한다고 사적인 부분을 자주 언급하는 건 좋지 않다. 업무 이외 대화가 하고 싶다면 가벼운 관심사 소재 정도가 적당하다.
조직원이 느끼는 간섭과 관심의 차이
•관심은 상대를 이해하는 행동이고, 간섭은 상대를 평가하는 행동이다.
•관심은 순수한 호기심 때문이고, 간섭은 다른 의도가 숨어 있다.
•관심은 듣는 사람의 자아존중감을 높이고, 간섭은 자아존중감을 낮춘다.
•관심이 없어지면 외로움을 느끼고, 간섭이 없어지면 해방을 느낀다.
•관심을 보이면 대화가 이어지고, 간섭을 하면 대화가 끊어진다.
“왜 이렇게 무기력하고 의욕이 없죠? 리더도 때론 지치나봅니다”
↳ 리더가 지치고 힘들 정도로 업무가 많다는 건 혼자 일을 너무 많이 쥐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직원들에게 적절히 업무를 나누고 위임해야 한다. 사실 리더의 위치 정도에 올랐다면 일의 의미를 못 찾거나 회의감이 드는 경우는 드물다. 그런 마음이 계속 든다면 새롭게 하고 싶은 일은 없는지, 지금 일을 계속 해도 좋은지 등을 고민해 과감한 결정을 내리는 것이 좋다. 별다른 수가 떠오르지 않는다면 심리·상담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현재 일의 의미와 앞으로의 방향성을 모색해나가야 한다.
“리더의 자리에서 물러나기 전 어떤 준비가 필요하죠?”
↳ 정년퇴직처럼 그 끝을 알면 계획적으로 준비할 수 있지만, 부득이하게 자리를 내려놓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어느 시점부터는 언제라도 회사를 떠날 수 있다는 걸 염두에 두는 것이 좋다. 중국의 아마존이라 불리는 징둥닷컴에서는 임원이 되고 3년 안에 자신의 후계자를 완벽히 육성해야 한다. 빠르게 성장하는 회사일수록 그 규모에 따라 리더 인력도 많아져야 하기에, 안정적인 운영을 위해 세운 방침이란다. 그러니 임원급이라면 3명 정도, 팀장급이라면 1~2명 정도의 후계자를 미리 발탁해 업무 코칭 등을 선행하면서 이후의 삶을 준비하면 좋다.
지리산 청학동은 나의 고향이다. 유소션 시절을 삼신봉 아래에서 보냈다. 근래에는 자주 들리지 못하지만 정신적 터전이다. 당연히 청학동과 관련한 자료에 관심이 많다. 그중 하나가 풍수지리설로 유명했던 옥룡자 도선 스님(827~898)이 쓴 ‘청학동 비결(秘訣)’이다. ‘조선비결전집’에 수록돼 있다. 일제강점기에 민간에 널리 유포된 비결들을 입수해 연구 가치가 있거나 보존 의미가 있는 것들을 묶은 책이 조선비결전집이다. 이러한 자료들을 통해 현재 지리산 청학동이 명실상부하게 자리매김했다. 이 비결에는 청학동의 산세 등이 구체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우리나라 관광지로 거듭나고 있는 청학동에 얽힌 전설을 한 번 읽어봄직하다.
한세상 제때 만나기를 기다리는 보배로운 세 고을이 있다. 선을 쌓은 사람이 이곳에 들어가서 후세를 기를 것이다. 그중 하나가 청학동이다. 운세가 길(吉)하여 천년이 되면 하늘의 문창성을 지키고 땅은 흑서(黑鼠)가 흥하고 오성(五星)이 모여든다. 때가 되면 세 가지 기이한 빛이 봉우리를 비추어 삼대(三坮)가 분명해진다.
땅은 넓어 평탄하고 북쪽이 높고 동쪽이 낮으며 남쪽으로 통한다. 남쪽의 백운산 세 봉우리가 우뚝 솟았다. 임좌병향(壬坐丙向)으로 혈(穴)이 낮다. 운이 전해지면 갑좌(甲坐)가 다음의 길지(吉地)다. 주위가 사십 리며 석문이 그곳을 가로막고 있다. 아름다운 이곳이 천년의 기반으로 이 나라와 함께 길이 보전되리라. 비록 작은 나라에 있지만, 중국의 명승지보다 훨씬 나은 곳이다. 그곳이 개벽이 될 때는 황계(黃鷄)가 하늘에서 울 때다.
이곳에서 나는 것은 하늘 가득한 것이 떨어지는 땅이라. 이곳을 지켜 20년이 되면 석문(石門)이 우레 소리를 내며 깨어지고 30년을 살면 사마(駟馬)가 땅에 드나들 것이니 공명이 세상을 덮는다. 청학이 세상을 더욱더 높게 날면 많은 공경(公卿)과 재상(宰相) 그리고 명사(名士)와 현인(賢人)이 배출되리라.
공문(孔門)에 사숙(私淑)한 자는 누구인가. 국가의 사부가 그것을 맡으리라. 기내(畿內)의 사람들이 최고의 명승으로 만들어 별천지가 되리니 천지개벽이 일어나리라. 선학(仙鶴)이 골에서 날아오르니 유(柳) 씨의 복지(福地)요. 학의 등에 타고 피리를 부니 강(姜) 씨의 복지(福地)요. 금 거북이 진흙 속으로 들어가니 권(權) 씨의 복지(福地)요. 선학이 알을 품으니 정(鄭) 씨의 복지(卜地)요. 청학이 밭에 내려앉으니 서(徐) 씨의 천지(穿地)요. 학이 옥녀에게 내려오니 황(黃) 씨의 복지(福地)요. 달리던 노루가 어미를 돌아보니 김(金) 씨의 소지(召地)요. 선인(仙人) 춤추는 소맷자락 같으니 이(李) 씨의 응지(應地)요.
매가 꿩을 쫓아 내려가니 방(方) 씨의 복지(卜地)요. 황룡이 배를 업고 가니 하(河) 씨의 유지(留地)요. 옥등(玉燈)이 벽에 걸렸으니 천(千) 씨의 필지(必地)요. 다섯 신선이 둘러앉아 바둑을 두니 박(朴) 씨의 복지(卜地)요. 소가 학림에 누워 잠자니 장(張) 씨의 유지(留地)요. 선학이 쫓아서 가니 허(許) 씨의 복지(福地)요. 소가 학림에 누웠으니 노(盧) 씨의 수지(守地)요.
상서로운 붕이 하늘에 날개를 펼쳤으니 작은 달이 10필(疋), 오운(五雲)이 싸우며 여인이 관을 쓰고 벼슬을 한다. 풀이 풍성한 들판에 사슴이 놀고 소(丑) 좌편에 가로 누워 있도다. 청학이 서편으로 날아가니 산새가 크게 응하도다. 대숲에서 봉황이 우니 10일을 날마다 길하리라. 한가운데 신선의 베개가 있으니 원형이정(元亨理定)이 마한(馬韓)에 갖추어졌도다. 선학(仙鶴)이 좇아서 가버리니 청학이 하소연하는 것 같도다.
하소연도 말고 상소도 말고 오직 후인(後人)을 기다리며 조화를 미루어볼지라. 건곤(乾坤)에 기운이 가득 모이니 복점(卜占)으로 그 주(主)를 지키리라. 전해 받고 조응(照應)하니 상서로움을 맡아 인재를 배출한다. 복록과 길상(吉祥)이 서좌(西坐)로 향하니 가장 아름답고 그다음에 길하도다. 사람들이 오직 이곳을 찾으니 신풍(神風)을 한(恨)하도다. (참고자료: 향토지 ‘청암’, 하복조 편저)
요즘은 서민들 사이에서 경제가 어려워졌다는 얘기를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다. 정부에서는 조금만 더 기다리면 경제가 좋아질 것이라는 얘기를 하지만 이제 그 말을 믿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은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말이 가까워 오니 주민센터마다 노인잔치를 벌인다. 노인잔치 스케줄은 입소문을 타고 시니어들 사이에서 오간다. 어느덧 노인잔치에 초대받을 나이가 되었지만 관심을 안 두었으나 돌보아드리는 어르신이 같이 갈 것을 권하는 바람에 따라나섰다.
막무가내 노인들
서울시 강동구의 한 주민센터에 어르신과 함께 찾아갔는데 열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행사장은 꽉 차있었다. 행사의 원활한 진행을 위하여 앞자리부터 차례대로 앉기를 권하지만 요지부동이다. 중간 중간에 앉은 여자 분들이 꿈쩍도 않는다. 자원봉사자들이 애원해도 말이다. 이유는 미리 자리를 맡아 놓기 위해서란다. 오히려 남자 분들은 그런대로 잘 따르는 모양새였다. 나이가 들면 성호르몬이 바뀐다더니 맞는 말인 것 같다. 미리 차려놓은 반찬 몇 가지는 기다리는 동안 허기를 참지 못한 노인들이 앞에 있는 음식을 드시기 시작했다. “여기 떡하고 김치 좀 더 갖다 주슈!” “머리고기가 떨어졌어!” 행사 시작도 전에 밥상은 텅 비어 갔다.
오겠다던 시간에도 나타나지 않는 지역행정 수장 때문에 기다림이 길어졌다. 100여명의 시니어가 모이다 보니 행사 진행이 쉽지 않았다. 더구나 노인들을 위한 공연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저 앞에 있는 음식에만 자꾸 눈길을 줬다. 공연장이 아니다 보니 스피커가 무용지물이었다. 무대에서 가수가 신나게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어도 뒤에 앉은 노인들은 즐기지도 못하고 관심 밖. 빨리 식사가 나오기만을 기다리는 표정이 역력했다.
행사시간에 늦게 와서 행사가 끝나기도 전에 빠져나간 외빈들
드디어 행사를 주관하는 수장이 등장하자 사회자는 우레와 같은 박수를 유도한다. 무표정한 노인들은 사회자의 요구에 따라 건성건성 박수쳤다. 문제는 내, 외빈 소개시간이었다. 지역 국회의원, 시의원, 구의원, 각종 단체장 등 얼핏 들어봐도 20여명이 훌쩍 넘는 사람들이 호명됐다. 그럴 때마다 박수를 유도하고 인사말을 듣지만 ‘소귀에 경 읽기’. 끝나고 나면 1년 동안 수고했다는 공무원과 단체들의 상장수여식이 이어졌다. 고생하고 잘 한 사람에게 상을 주는 것은 좋지만 하필 노인들을 불러다 놓고 밥 한 끼 대접하면서 지루한 행사를 이어나가는 것은 크게 바람직하지 않아보였다. 낮 열두시가 가까워오자 여기저기서 불만의 소리가 터져 나오기도 했다.
아우성 또 아우성
점심식사는 열두시가 가까울 무렵 시작됐다. 고기를 듬뿍 넣고 끓여낸 국밥이 배달됐다. 테이블마다 서로 먼저 달라고 소리쳤다. 봉사자들은 식사배달 쟁반을 들고 허둥거린다. 이 때, 테블마다 목소리 큰 노인이 등장한다. 아예 일어서서 손을 흔들어가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참으로 볼썽사납지만 누구하나 말하는 사람은 없다. 헌데, 옛 속담에 ‘우는 아이 먼저 젖준다’는 말과 같이 설쳐대는 테이블에 식사가 먼저 도착한다. 어디 그 뿐이랴. 테이블 마다 올려놓은 홍시를 잽싸게 가방에 챙겨 넣은 노인들. 자원봉사자를 부르더니 홍시가 없다고 아우성이다. 살기 어렵던 1960~70년 대. 동네잔치에 가서 콧수건에 떡이며 과자를 챙겨오시던 할머니 생각이 났다. 그래도 맛있게 식사 하시는 노인들의 얼굴에는 주름이 훈장처럼 자글자글하게 열려있다. 어려운 시절에 자식들 먹여 살리느라 뼈빠지게 고생했던 세대이기도 하다. 식사를 맛있게 끝낸 할머니들은 부리나케 자리를 챙겨 빠져나가고 할아버지들은 그나마 막걸리 잔을 기울이며 시간을 보낸다. 게다가 노인들이 식사하던 자리를 찾아 인사했던 내, 외빈의 모습은 찾아 볼 수 가없었다. 행사를 위해서 잠깐 얼굴 보이고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 사람들을 기다리던 시간에 비하면 너무 성의가 없는 건 아닐까?
외롭고 쓸쓸하게 지내는 노인들을 위한 진정한 잔치가 되었으면 좋겠다
매년 10월 하순부터는 노인들을 공경하고 수고로움에 보답하는 행사가 많이 열린다. 바람이 있다면 조금만 더 행사에 신경을 썼으면 하는 것. 보여주기 식 행사는 조금 더 간단하게하고 노인들이 행복하고 화기애애하게 식사할 수 있도록 배려했으면 좋겠다. 노인들을 위한 잔치이니 세심한 주의와 보살핌이 힘을 기울여야할 것이다.
검정고무신, 아이스께끼, 초가지붕, 푸세식 화장실…. 지금은 까마득한 시절의 우리나라 풍경을 오롯이 기억하는 사람. 1969년 미8군 장병으로 한국을 방문한 스물한 살 청년은 소와 함께 밭을 갈고, 어른을 공경하며 사는 순박한 사람들의 나라가 무작정 좋았다. 미국으로 돌아간 뒤에도 어떻게 하면 한국에 가서 살 수 있을까 궁리하는 날이 많았다. 그리고 마침내 40대에 그 소원을 이뤘다. 그가 사는 동네에서는 ‘엉클 밥’으로 불리는, 솔브릿지 국제경영대학교 로버트 그라프(Robert Graff·70) 교수의 이야기다.
그라프 교수를 만나러 가는 길은 주말 나들이객들과 벌초 성묘객들이 몰고 나온 차들로 빼곡했다. 4시간여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강릉 허균·허난설헌 기념관 쪽으로 들어서자 ‘엉클 밥’ 간판이 걸린 카페가 모습을 드러냈다. 흰색과 파란색 옷을 입은 2층 건물은 초록 논밭을 배경으로 우뚝 서 있었다. 무더위와 막 헤어지고 온 초가을 바람이 살랑대는 오후였다. 대전에 있는 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느라 주말에만 강릉에 와 있다는 그는 카페테라스에서 중학생과 마주앉아 있었다.
“우리 동네에 사는 학생인데 제가 올라오는 날 영어를 가르쳐주기로 약속을 했어요. 배운 지 이제 일주일 됐는데 아주 잘하고 있어요. 인터뷰할 때 통역 좀 해보라 할까요?(웃음)”
그가 장난치듯 말하자 학생은 당황한 듯 손을 내저으며 쑥스럽게 웃었다. 안 그래도 평창올림픽 때 외국 관광객을 상대해야 하는 택시 기사들에게 무료로 영어 회화를 가르쳐 신문과 방송에도 소개됐던 그는 여전히 더불어 사는 삶을 실천하고 있었다.
“2007년도에 아내 고향인 강릉으로 이사 왔어요. 평창올림픽 개최를 2년쯤 앞두고 있던 어느 날 시청 공무원이 택시 기사분들께 영어 좀 가르쳐줄 수 있겠냐면서 도움을 요청해왔어요. 강릉 시민으로서 뭐라도 보탬이 되고 싶어 흔쾌히 수락했죠. 터미널이나 역에 내린 외국인들이 처음 상대하는 사람들은 택시 기사예요. 그분들이 강릉의 얼굴인 셈이죠. 그래서 영어로 하는 대화가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회화 교실에서 공부를 시작한 뒤 기사분들이 많이 달라졌어요. 그동안은 외국인을 만나면 대화가 안 돼 태울까 말까 망설였는데 이제는 당황하지 않고 ‘Hello, welcome to 강릉!’ 하면서 인사 몇 마디 나눌 정도는 됐다고들 말해요.”
마을 사랑방이 된 ‘엉클 밥’ 카페
영어 회화 교실은 지금도 일주일에 두 번씩 그의 카페에서 열린다. 여러 상황에 대비한 표현들을 배우는 시간이다. 자주 만나 공부하고 대화를 나누다 보니 친해져서 이젠 가족 같은 사이가 됐다.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함께 나눠 먹고 술도 한잔씩 마시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카페를 연 지는 3년 정도 되어갑니다. 2층 집을 짓고 나서 1층을 우리 부부 놀이터로 만들었는데 주변에서 그러지 말고 커피도 한번 팔아보라 해서 시작했어요. 돈을 벌겠다는 생각은 없어요. 누구든 편하게 와서 쉬었다 가는 공간이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커피가 팔리든 말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그는 카페 창문에 페인트마카로 크게 써놓은 글을 보여준다. ‘It’s not the coffee. It’s the people’. 아침에 일어나 카페에 내려올 때마다 한 번씩 쳐다보기 위해 써놨다는 글이란다. 들여다보니 커피보다는 사.람.에 방점이 찍혀 있다. 누구에게나 첫 마음을 잃지 않기 위해 무던히 노력하는 시절이 있듯 강릉에서의 그의 삶도 그러해 보였다.
‘엉클 밥’은 그의 애칭. 동네 사람들은 그를 ‘밥 아저씨’라 부른다. 카페 이름도 ‘엉클 밥’으로 지은 걸 보면 자신의 애칭이 무척이나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그가 대전에서 강의를 마치고 올라오는 주말에는 카페 주차장이 시끌벅적하다. 영어를 배우는 택시 기사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모여들기 때문이다. 그렇게 엉클 밥 카페는 어느새 동네 사랑방으로 바뀐다.
소가 밭 갈던 풍경이 그립다
젊은 시절, 그의 한국 사랑은 특별했다. 1969년 미8군 장병으로 처음 한국 땅을 밟은 그는 이 나라가 마치 오래된 고향처럼 편안했다.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을 겪은 가난한 나라였지만 헐벗고 가난한 모습보다는 아름다운 경치와 순박한 사람들의 얼굴이 더 많이 다가왔다. 특히 마을에서 뛰어 노는 아이들 모습에서 한없는 평화를 느꼈다.
“농기계가 없어 소와 함께 밭을 갈던 농부의 모습이 지금도 기억나요. 농부는 힘들었겠지만 제게는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운 풍경이었어요. 버스를 타고 가다가 어른이 차에 오르면 자리를 양보하던 젊은이들 모습도 인상적이었고요. 예절을 중시하고 어른을 공경하는 한국 문화가 좋았어요. 제가 살던 미국에는 그렇게 깊고 오래된 문화가 없거든요.”
1년간 짧은 사병 생활을 마친 후 미국으로 돌아간 그는 평화봉사단을 통해 다시 한국을 방문한다.
“처음에는 정부가 가라 해서 한국에 왔지만 그다음부터는 자발적으로, 제 의지로 왔어요. 더 오래 머물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해 아쉬웠고, 다시 가고 싶었어요. 방법을 고민하다가 평화봉사단을 생각해냈어요. 제대 후 대학교에 있던 평화봉사단을 찾아가 한국에 갈 기회가 있냐고 물었지요. 인연이 되려고 그랬는지 3개월 후에 그럴 계획이 있다 하더군요. 당장 단원 가입을 했죠.”
다시 한국을 방문했을 때는 전라도 영광, 광주 지역에서 3년여 봉사활동을 했다. 한국말은 이때 많이 배웠다. 이제 막 일흔을 넘긴 그는 시간여행을 하듯 20대 시절로 돌아가더니 하숙집 이야기, 맥주 마시러 아이스께끼 파는 가게로 갔던 일, 어니언스·펄 시스터즈·김추자·서유석 등 가수 이름들을 줄줄 꿰며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영광읍에서 공무원인 하숙생과 친하게 지냈어요. 가수 최희준의 노래 ‘하숙생’을 같이 불렀던 기억도 나네요. 어디서든 노인을 공경하고 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가족들이 많았어요. 닮고 싶은 모습이었어요. 물론 불편한 점도 있기는 했죠. 그때는 한국에 가정용 냉장고가 거의 없었던 시절이라 맥주가 마시고 싶으면 아이스께끼 파는 가게로 가야 했어요. 거기는 제법 큰 냉장고가 있었거든요. 푸세식 화장실도 경험했지요. 냄새도 나고 낯설었지요. 그때 새마을운동도 한창이었는데 초가와 기와집이 없어져서 저는 너무 섭섭했어요.”
결혼, 그리고 귀화
그 후로도 한국에 대한 그의 관심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미네소타 주립대학교 MBA 과정을 마치고 은행에서 일하던 그는 휴가 때마다 자비를 들여 한국에 들어왔다. 그리고 자신의 업무와 관련된 기업을 찾아다니며 한국에서 일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운 좋게 1994년 광주은행 IT 보안 업무를 맡아 들어왔다가 삼일회계법인에서 IT 매니지먼트 일을 담당하게 된다. 드디어 그의 바람대로 한국에서 직장을 얻어 살게 된 것이다.
미국에서 공부하던 유학생 소개로 아내를 만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최화순(66) 씨는 남편을 처음 만났을 때 이상하게 측은지심이 밀려왔다고 했다. 그 마음이 부부의 인연으로 이어질지는 당시엔 그녀도 몰랐을 터.
“남편 키가 너무 커서 깜짝 놀랐어요. 197cm였거든요. 그렇게나 큰 키에 테가 굵은 안경을 쓰고 있는 남자를 한번 상상해보세요. 왠지 쓸쓸해 보였어요. 남편은 화가 나도 내색을 잘 안 하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아주 작은 일에는 엄청 기뻐하고 크게 웃더라고요. 작은 것들을 참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그때부터 저 사람이 좋았어요.”
이들 부부는 지금도 여전히 서로를 존중하고 사랑하지만 가끔 네 나라, 내 나라 하면서 부부싸움을 하기도 한단다.
“최근 남편이 TV를 보면서 요즘 왜 그렇게 먹는 프로그램이 많은지 모르겠다면서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고 말하더라고요. 제가 애국자는 아니지만 우리나라를 비판하면 은근히 화가 나더군요. ‘하도 가난해서 못 먹던 시절이 있어서 그런다, 그런 당신네 나라는 뭐가 그리 대단하냐’ 하면서 다툽니다. 제가 거의 일방적으로 떠들지만요.(웃음)”
그라프 교수가 한국말이 유창하지 못해 애를 먹은 적도 있다.
“어느 날 몸이 아프다 해서 약국에 가서 소염제를 사 먹으라 했는데 수면제를 받아가지고 온 거예요. 기겁을 했지요. 남편은 분명 소염제라 말했을 거예요. 발음이 정확하지 않아 약사가 잘못 알아들었던 것 같아요. 그 후로 큰일 나겠다 싶어서 꼭 함께 다녔어요. 지금은 혼자 다녀도 문제없지만요.”
그는 현재 대전에 위치한 솔브릿지 국제경영대학교에서 IT 관련 비즈니스 강의를 하고 있다. 강릉에선 동네 아저씨처럼 푸근한 인상이지만 학교에 가면 학생들에게 “여기 놀러 왔냐, 배수의 진을 치고 공부하라”고 호통을 치기도 한다.
2007년 삼일회계법인에서 퇴직한 후 한국인으로 귀화한 그에게 그동안 향수병은 없었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괜한 질문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로움이란 심리적 거리의 문제이지 물리적 거리에서 오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그는 한국 땅을 처음 밟았을 때, 마치 오래 떠나 있었던 고향에 돌아온 것 같았던 그 기분을 강릉에서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도시 사람들은 늘 바쁘고 옷, 백화점, 돈, 물건에 관심이 많은데 강릉 분위기는 좀 다릅니다. 도시에서는 길에서 서로 눈 마주치기가 쉽지 않아요. 그러나 여기서는 인사도 하고 손도 잡습니다. 오래전 한국의 시골에서 봤던 아름답고 평화로운 풍경들을 다시 만나고 있습니다.”
그를 만나고 돌아왔을 때 한 통의 메일이 와 있었다. “여기까지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또 오면 즐겁게 쉬다 가셔요.” 이웃에 대한 관심과 나눔. 이것이 엉클 밥, 로버트 그라프 교수가 한국을 사랑하는 방식이다. 그가 이웃과 만들어내는 공명(共鳴)이 더 멀리 울려 퍼질 것 같다.
경로석에서 나이 드신 분들이 서로 옥신각신하는 볼꼴 사나운 광경을 심심찮게 목격한다. 내가 나이를 더 먹었으니 경로석에 앉을 우선권이 있다는 논리가 싸움의 시작이다. 경로석은 정확히 말하면 노약자석이다. 임신을 한 아녀자나 나이는 젊지만 병으로 거동이 불편한 사람도 앉을 권한이 있다. 경로석이 아니고 노약자석인데도 더러는 경로석으로만 알고 있다.
우리사회는 대화나 논쟁을 하다가 이론적으로 수세에 몰리면 ‘너 몇 살이야.’ 한술 더 떠서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녀석이 어따 대고 두 눈 부릅뜨고 대들어.’ 라고 한다. 심한 말로는 너는 애비 어미도 없냐!’ 까지 나간다. 원래 언쟁의 본질은 사라지고 나이타령으로 넘어가면 아주 강한 심장을 가진 젊은이가 아니면 피하게 된다. 주위 많은 사람들이 우선은 보이지 않는 나이라는 벼슬을 인정하고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젊은이에게 눈총을 쏴대기 때문이다.
원래 동물의 세계는 나이가 아니고 힘이 지배한다. 늙은 수사자는 새로운 젊은 사자를 힘으로 제압하지 못하면 대장이라는 자리에서 내려온다. 힘이 벼슬이지 오래 살아 늙었다는 것이 동물의 세계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사람만이 부모를 공경하고 웃어른을 배려하는 것이 미덕이라는 교육을 받아왔기 때문에 나이가 통한다.
증자가 말하길 ‘朝廷莫如爵 조정막여작, 鄕黨莫如齒 향당막여치,輔世長民莫如德, 보세장민막여덕’ 이라고 했다. 이 말은 ‘조정에는 벼슬만한 것이 없고 시골 마을에서는 나이만한 것이 없고 세상을 돕고 백성을 잘 살게 하는 데는 덕(德)만한 것이 없다’라는 말이다. 나이도 벼슬처럼 인정받는 근거다. 수평적 평등사회가 아닌 나이를 매개로 하는 수직적 상하구조를 만드는데 나이가 힘을 발휘하였다.
우리는 처음 만나 통성명을 하고 나이를 물어 ‘그럼 선배님으로 모시겠습니다’하면 위계질서가 만들어진다. 삼강오륜에 장유유서(長幼有序)가 있는데 윗사람과 아랫사람의 차례와 서열이 있다는 말이다. 이런 서열이 빨리 정해지면 오히려 펀하다. 이것도 옳고 저것도 옳은데 옥신각신 할 때 제일 연장자가 ‘그럼 이렇게 하지!’하고 정해주면 승복하는 근거로 아주 편하다.
자랄 때 형제간에 싸움을 하면 부모는 힘이 약한 동생 편을 드는데 이것이 잘못이란다. 형이 부모의 위력에 눌려 잠시 승복하는 것이지 속마음으로는 불만을 품고 승복하지 않는다. 부모가 없을 때 동생을 때린다. 형에게 우선권을 주어야 가정의 위계질서가 선다. 먹을 때도 형이 먼저고 좋은 것도 형이 먼저라는 것을 심어주면 자연히 형제간 분쟁은 없어지고 동생은 자신이 후순위라는 권력을 인정하고 기다린다. 대접을 받는 형은 승자의 아량으로 자기 먹을 것을 동생에게 스스로 양보하는 미덕을 보인다. 이것은 아직 미 성숙된 아이 때의 질서법이다.
이제는 민주주의 시대다. 모두가 성인이 되면 수직문화에서 수평문화로 바뀌어야 한다. 손자뻘 같은 놈을 교육측면에서 한 대 때리기라도 하면 폭행범인으로 바로 입건이 되는 세상이다. 나이라는 벼슬은 없어졌으니 덕으로 더 젊은 사람을 대해야 한다. 어느 모임에서도 저 사람은 나이가 많으니 우리의 리더인 회장으로 뽑아야 한다는 말은 점점 설득력이 없어져 가고 있다. 나잇값을 해야 나이대접을 받는 세상이다.
제2차 세계대전 패망 후, 부와 명예를 누려왔던 안조가(家)는 백작 지위는 물론, 빚에 몰려 저택마저 포기해야 하는 지경에 이른다. 그럼에도 파리 유학을 다녀온 화가 아버지 타다히코(타키자와 오사무), 이혼당해 집으로 온 맏딸 아키코(아이조메 유메코), 피아노나 두드리는 방관자 아들 마사히코(모리 마사유키) 모두 과거에의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보다 못한 차녀 아츠코(하라 세츠코)는 지난 시절과 결별하기 위한 마지막 무도회를 열자고 한다. 빚을 지게 획책했던 교활한 사업가 신카와 류자부로(시미즈 마사오)가 안조 집안을 삼키려는 걸 간파한 아츠코는 집안 운전사였던 건실한 사업가 토야마(간다 다카시)에게 도움을 청한다.
‘안조가의 무도회’(1947)는 몰락한 귀족 저택에서 열리는 마지막 무도회라는 연극적 설정 하에, 전후 일본 사회가 어디로 가야하는가를 묻는 영화다. 신구세대를 대변하는 인물 간 갈등, 그리고 이들이 무너지고 반성하고 개안하는 과정을 통해 답을 구한다. 아츠코의 밝은 얼굴 위로 엔딩 자막을 흘리는 데서 답은 분명해지지만, 좋았던 시절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인물에게도 일말의 측은함을 싣는다.
아버지는 여전히 신카와를 믿으며, 그의 딸 요코(츠시마 케이코)와 아들이 결혼만 하면 모든 게 해결되리라는 희망을 버리지 못한다. 하녀 치요(무라타 치에코)의 애정 어린 호소를 무시하던 아들은 신카와의 속내를 간파하고는 요코를 강간하려 든다. “마음은 아직 귀족”이라고 외치는 장녀는 자신을 사랑해온, 그리고 자신도 사랑하는 토야마를 차마 받아들이지 못한다. 인물의 성격과 내면은 그들 방에 걸린 서양화로도 읽을 수 있다. 아버지 방에는 조르주 루오 의 ‘늙은 왕’이, 하녀를 농락하는 아들 방에는 프란시스코 고야의 ‘벌거벗은 마야’ 그림이 걸려 있는 식이다.
안주, 패배 의식을 버리지 못하는 아버지와 아들, 장녀. 군수 물자로 부를 축적한 기회주의 사업가 신카와와 새로운 부르주아 계급으로 떠오른 건실한 토야마. 마지막까지 충심을 바치려는 집사장. 새로운 시대를 건강한 정신으로 받아들일 각오가 되어 있는 유일한 인물 아츠코의 고군분투로 모든 인물과 관계가 바로 잡힌다. 심지어 아츠코는 홀아비인 아버지와 오래 정분을 나눠온 게이샤를 무도회에 초대해, 결혼 발표를 하게 만든다. 초대받은 이들 모두가 비아냥거리던 가운데 갈등이 봉합되는 대단원은 저택 입구를 지키던 사무라이 장수의 갑옷이 쓰러지는 것으로 상징된다.
안톤 체호프의 ‘벚꽃동산’에 영향 받은 신도 가네토의 오리지널 각본에 기초한 ‘안조가의 무도회’는 1947년 '키네마 준보 베스트 10' 1위 선정 작이자, '키네마 준보 올타임 베스트 일본영화 100'에 꼽힌 일본 흑백 고전이다. 이러한 평가에 가장 큰 기여를 한 인물은 2015년 세상을 떠난 배우 하라 세츠코(原節子)다.
하라 세츠코는 오즈 야스지로, 구로사와 아키라 등의 거장 영화에 출연하며 1940~50년대 일본 영화 황금기를 대표했던 전설적 여배우다. 26년간 107편의 영화에 출연했던 하라 세츠코는 미모와 연기력이 여전했던 42세가 되던 해 돌연 은퇴한다. 그레타 가르보와 마찬가지로 "더 이상 쇠락해가는 모습을 보여드리는 게 죄송합니다"라며 영화 산업, 언론, 팬으로부터 완전히 모습을 감추었다. 1963년, 자신의 영화 스승 오즈 야스지로 장례식장이 마지막 공식 석상이었다. 이후 카마쿠라시에서 친지들과 함께 지내고 있다는 소식만 간간이 들려올 뿐이었는데 2015년, 사망 뉴스가 뒤늦게 전해졌다.
평생 결혼을 하지 않았고, 출연작 이미지와 완벽한 자기 관리 덕분에 하라 세츠코는 '영원한 성처녀'로 불리었다. 2000년 ‘키네마 순보’가 선정한 '20세기 영화 스타-일본 편'에서 여배우 부문 1위로 선정될 만큼, 현대에도 일본을 대표하는 여배우로 사랑받았다. 자서전 ‘이대로의 삶의 방식으로’에서 밝혔듯, 나이 든 일본인에게 향수를 자아내는 전전(前戰)의 가치관, 즉 남편을 잃고도 홀로 꿋꿋하게 살아가는 미망인의 의지가 읽혔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웃고 있어도 눈물을 머금고 있는 듯 아련한 분위기를 풍기는가 하면, 심신이 밝고 건강한 딸과 어머니를 모두 연기할 수 있었고, 기품 넘치는 기모노 차림과 단정한 신여성 차림도 잘 어울리는 정결한 미모로 인기를 얻었던 하라 세츠코. 그녀의 미모와 기품, 연기력을 꽃피운 감독은 오즈 야스지로다. ‘만춘‘과 ’맥추‘에서는 결혼을 마다하는 노처녀 마음을 섬세하게 연기했고, 오즈 야스지로의 최고 작품으로 꼽히는 ’동경이야기‘에서는 남편을 잃고도 시부모를 진심으로 공경하는, 젊고 아름다운 직장인 며느리로 분했다. 하라 세츠코의 이미지를 순종적이면서도 현명하고 건강하고 밝고 기품 있는 여성으로 그려낸 이 세 작품은 하라 세츠코의 극 중 이름을 딴 '노리코 삼부작'으로 불린다.
가족과 효, 결혼이 주제였던 오즈 야스지로 영화에서 하라 세츠코는 전통적 여성상으로 향수를 자극하는 한편 부드럽지만 결코 나약하지 않은, 쾌활하면서도 의지 강한 여성상을 구축했다. ‘안조가의 무도회’ 역시 이러한 여성상을 십분 발휘한 초기 대표작으로 꼽힌다.
염문설이 있기도 했던 오즈 야스지로 사망 이후 영화계에서 사라진 하라 세츠코. 1963년, 60세 생일에 암으로 사망한 오즈 야스지로 역시 평생 결혼하지 않았다.
노인이 돌아가시면 동네도서관 하나가 사라지는 것처럼 지혜의 보고가 사라졌다고 호들갑을 떨지만 살아있을 때 노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드물다. 하지만 필자가 살아보지 못한 삶을 먼저 살아 본 인생선배의 말씀에 귀기울이고 반면교사로 삼는 것을 좋아한다.
올해 86세인 ‘이00’ 할아버지는 필자와 치매센터에서 봉사활동을 함께 하시는 분이다. 치매환자가 대부분 할아버지보다 나이가 어리다. 형님이 동생들을 케어 하는 형상이다. 이분은 6·25전쟁 때 함경남도에서 피난을 내려왔는데 그때 나이가 19세였다고 한다. 19세라는 한창 때에 피난을 오다보니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산처럼 쌓여있다. 명함에 함경남도 중앙도민회 지문위원이라는 직함을 새겨서 다니신다. 치매봉사활동을 열심히 하시는 이유도 건강관리에 있다며 고향땅을 밟아 보기 전에는 절대로 죽을 수가 없다고 하신다. 고향 사랑이 워낙 크다보니 고향 사람이 큰일을 당하면 부조금이나 축의금으로 몇 십 만원씩을 낸다. 그 바람에 아내의 눈 밖에 나서 매월 600만 원씩 들어오는 건물 가게세의 처분권도 아내 손으로 넘어갔다.
올해를 마감하는 치매센터 월례회에 정신과의사인 센터장이 참석한 가운데 각자 한해를 보내는 소감 한마디를 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00’ 할아버지가 몸이 늙어감에 대해 안타까운 말씀을 하시는데 손자 손녀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을 때 참 답답하다고 하신다. 손자 손녀를 보면 이름을 부르고 싶은데 이름이 생각이 나지 않아 ‘그래 너 왔구나!’라고만 말해야 할 때 아! 나도 늙어가는구나 혹 나도 치매가 아닌가하고 겁이 덜컥 난다고 말씀하신다. 손자 손녀들이 할아버지가 자기 이름을 잊어버린데 대해 섭섭해 하는 눈치가 보일 때는 미안하다는 말씀도 하신다.
정신과 의사인 센터장이 대답으로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고 절대 치매가 아니며 그 연세에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 것이 정상이라고 위로의 말씀을 했다. 그리고 그럴 때를 대비해서 끊임없이 메모하고 적어야 하는 점을 강조 했다. 치매전문가이며 정신과 의사가 말씀 하시니 맞는 말이다. 노인의 필수품으로 메모장이 각광받아야 한다.
필자는 ‘이00’ 할아버지께 이렇게 말씀 드렸다. ‘제 어머니도 여럿 자식을 두었는데 급하게 부를 때는 자식들 이름을 바꾸어 부르고는 아차 하고 다시 고쳐 부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손자 손녀에게 할아버지 상태를 미리 말씀해 두면 어떨까요. 즉 “할아버지가 이제 나이가 많아 깜빡 할 때가 있으니 앞으로는 할아버지를 보면 ’할아버지 저 00이가 왔어요’하고 미리 이름을 말하게 하면 해결될 것 같습니다” 하고 말씀 드렸다.
친자식의 이름도 잘 생각이 나지 않는데 한 다리가 먼 손자손녀의 이름을 다 기억한다는 것은 노인으로서는 어려운 일이다. 노인과 대화를 나눌 때 어른을 공경한다고 일방적으로 듣기만 하지 말고 기억이 가물거리는 부분에서 추임새처럼 한마디씩 거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사람은 울어야만 산다. 태어나면서도 울고 죽어서도 운다. 태어날 때는 자신이 울고 죽을 때는 유족이 울어준다. 이처럼 울음은 사람의 일생과 함께한다. 슬퍼도 울고 기뻐도 운다. 운다는 것의 실체는 눈물이다. 인간은 눈물을 흘림으로써 마음을 정화하고 눈을 보호한다. 눈물은 각막·결막에 영양을 공급할 뿐 아니라 눈꺼풀을 부드럽게 움직이게 하며, 세균과 자외선으로부터 눈을 보호해주기도 한다. 사람들이 희극보다는 비극에서 더 깊고 긴 여운을 느끼는 것은 이런 자기보호 본능의 발로일지도 모른다. 이른바 카타르시스다. 그러나 비극도 비극 나름이다. 정말 피하고 싶은 비극 중 하나는 상속에 따른 분쟁이다. 가족관계의 파탄을 불러오고, 때로는 죽음까지 불러오기도 하기 때문이다. 셰익스피어의 을 통해 잘못된 상속의 결말이 얼마나 비참한지 살펴보고 반면교사의 교훈을 얻어보자.
셰익스피어는 상속과 관련한 두 가지 참담한 사례를 중심으로 의 스토리를 엮어 나간다. 하나는 리어왕 자신의 잘못된 판단이 부른 참화이고, 다른 하나는 재산을 노린 자식의 간계로 박살난 글로스터 백작 가문 이야기다. 이 두 이야기가 씨줄과 날줄로 얽혀 의 스토리는 비극의 정점으로 달려간다.
리어왕은 80세가 넘자 자신의 왕국을 세 딸에게 물러주고 은퇴하기로 결심한다. 그러면서 자신을 가장 사랑하는 딸에게 3등분한 영토 중 가장 좋은 땅을 주겠다면서 세 딸에게 거래를 제안한다. 첫째 딸과 둘째 딸은 온갖 아첨을 떨며 아버지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막내딸 코델리아는 자녀의 의무에 따라 아버지를 사랑할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말한다. 코델리아의 말에 이성을 잃은 리어왕은 장녀와 차녀인 고너릴과 리건에게 코델리아의 상속분까지 나눠준다. 코델리아는 지참금이 필요 없다는 프랑스 왕을 따라 프랑스로 떠난다. 극도로 흥분한 리어왕은 충언을 고하는 켄트 백작마저 내쫓아버린다.
한편 글로스터 백작 집에서는 둘째 아들인 서자 에드먼드가 형 에드가를 모함하는 편지를 위조한다. 형이 자기에게 보냈다며 글로스터 백작에게 보여준 편지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노인을 공경해야 한다는 세상의 인습 때문에 인생을 가장 향락할 수 있는 청춘 시절을 씁쓸하게 지내야 하고, 늙어서 상속받는 재산도 쓰지 못한 채 제대로 맛을 즐길 수 없게 되지. … 노인들이 우리를 지배하는 건 실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감수하기 때문이야.” 동생의 간계에 휘말려 생명마저 위태롭게 된 에드가는 걸인 행세를 하며 왕국을 떠돌아다닌다.
한 달씩 교대로 두 딸의 집에 머무르기로 한 리어왕은 딸들이 부양하기로 한 100명의 기사를 거느리고 먼저 큰딸이 거처하고 있는 올버니 공작의 저택으로 간다. 이곳에서 리어왕은 큰딸 고너릴로부터 계획적인 냉대를 받고 고너릴의 지시를 받은 집사로부터도 무시를 당한다. 급기야 기사를 50명으로 줄여야 한다는 고너릴의 말에 분노한 리어왕은 기사들을 거느리고 둘째는 그러지 않을 거라는 철석같은 믿음을 갖고 당당하게 리건을 찾아 나선다. 줄곧 곁에서 리어왕에게 우스움과 즐거움을 선사하던 광대가 미래를 예견이라도 하듯 이렇게 노래한다.
“아비가 누더기를 걸치면 자식은 모르는 척하지만, 아비가 돈주머니 차고 있으면 자식들은 모두 다 효자지. 운명의 여신은 인정머리도 없는 창녀인데 가난한 사람에게는 문도 열어주지 않지.”
믿었던 리건으로부터 더 철저한 냉대를 받은 리어왕은 격노하여 이성을 잃은 채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산야를 헤매며 광기에 빠진다. 이런 소식을 들은 켄트 백작이 변장을 하여 리어왕을 보좌하기 위해 나선다. 폭풍우 속을 헤매던 리어왕과 켄트 백작은 비를 피하기위해 찾아든 허름한 오두막에서 걸인이 된 에드가와 조우한다.
한편 에드먼드는 “젊은이가 일어서는 건 늙은이가 쓰러질 때야”라며 아버지를 철저하게 배신하고 역적으로 내몬다. 결국 글로스터 백작은 체포돼 두 눈을 빼앗긴 채 광야에 내버려진다. 길을 헤매다 에드가와 만나지만 그를 알아볼 수 없다. 에드가는 자신을 숨긴 채 아버지를 애틋하게 보살핀다. 리어왕의 복수를 위해 군대를 이끌고 영국으로 온 코델리아는 아버지를 만나지만 에드먼드가 이끄는 영국군에 패하여 포로가 된다. 그리고 감옥에서 에드먼드가 보낸 자객에게 살해되고 만다. 첫째 딸과 둘째 딸은 에드먼드를 배우자로 차지하기 위해 다투다 결국 둘 다 죽고, 에드먼드 역시 에드가와의 결투에서 입은 부상으로 숨을 거둔다.
일세를 호령하던 왕은 미쳐버리고, 그의 자식들은 모두 젊은 나이에 불행한 최후를 맞이한 이런 비극의 근원은 무엇일까? 현명하지 못한 상속에 그 답이 있지 않을까. 리어왕은 ‘훗날 골육상잔의 불씨를 없애기 위해 왕국을 세 개로 쪼개기’로 했지만, 감정에 휘둘린 나머지 이성을 잃고 오히려 분쟁의 불씨를 키우고 말았다. 리어왕에게도 이런 비극을 피할 길은 있었다. 코델리아에게 주기로 한 영토를 두 딸에게 나눠주기로 했을 때 켄트 백작이 “심사숙고하셔서 이번의 경솔하고 망측한 처분을 거두세요. … 목소리가 낮아 쩡쩡 울려대지 않는다 해서 진심이 비어 있는 것도 아니고요. … 훌륭한 의사는 죽이시고, 매독 같은 아첨에게 사례를 하세요”라며 충언을 했기 때문이다.
상속은 인생에서 유종의 미를 거두기 위한 생의 마지막 중요 이벤트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이 이벤트의 중요성을 간과한다. 자식을 믿는 부모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지만, 정말로 자식의 행복한 미래를 생각한다면 상속에 더 신경을 써야 한다. 리어왕과는 시대가 다르고 문화도 다른 요즘이지만 여전히 뒤끝이 없는 상속은 쉽지 않은 과제다. 상속은 논공행상이 아니다. 너무 늦지 않은 시점에, 정신이 멀쩡할 때, 나의 사후 가족의 행복한 미래를 설계한다는 심정으로, 이것이 내가 가족에게 할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이란 마음으로 상속에 임해야 한다. 이는 셰익스피어가 리어왕을 통해 21세기 우리에게 주는 선물이기도 하다.
청춘의 낭만을 품은 도시, 강원도 춘천. 이곳에 남다른 교육열을 불태우는 멘토 4인방이 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인생나눔교실을 통해 국군장병들을 위한 인생 멘토링에 참여하게 된 이백우(66)·이정석(67)· 차관섭(67)·허남신(43)씨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가르치는 수업’이 아닌, ‘함께 나누는 교감’을 통해 청춘들을 품고 있는 그들을 만나봤다.
인생나눔교실을 통해 ‘멘토’라는 이름으로 그들이 함께하게 된 데에는 이백우씨의 역할이 컸다. 영어교사 은퇴 후, 인생나눔교실 1기에 지원해 3년째 멘토링 활동 중인 그는 고등학교 동기인 차관섭씨와 제자였던 허남신씨를 짝꿍으로 맺어주었다.
차관섭 “강원도청 산림정책관 등을 맡으며 반평생 공직생활을 했어요. 수직적인 직장 문화를 벗어나 수평적인 관계를 지향하는 멘토링 프로그램에 적응하는 것이 초반엔 걱정스럽더라고요. 그때마다 이 친구(이백우)가 ‘당신은 할 수 있을 거야!’라며 희망을 준 덕분에 활동할 수 있게 됐어요.”
그리고 또 한 사람, 차씨의 곁엔 환상의 짝꿍 허남신씨가 있다. 그녀 역시 고등학교 선생님이었던 이백우씨의 추천으로 인생나눔교실에 참여하게 됐다. 그렇게 그들은 사제지간에서 멘토로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됐다.
이백우·이정석 멘토, 교직의 보람을 잇다
춘천여자고등학교 교장을 지냈던 이정석씨는 은퇴 후 봉사활동에 눈을 뜨며 인생나눔교실에 참여하게 됐다. 동갑인 데다가 음악을 좋아하고, 같은 영어 교사 출신이라는 공통점이 있는 멘토링 파트너 이백우씨와는 자연스럽게 가까워질 수 있었다. 그렇게 두 사람이 함께한 지도 3년째, 이제는 눈빛만 봐도 서로 호흡이 척척 맞는다. 이들의 수업 목표는 바로 ‘대화를 통한 공감’이다. 무언가를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강의 형태에서 벗어나 한 가지 주제를 가지고 세대 간 공감을 이뤄나가고 있다.
이정석 “두려움은 없었어요. 40년을 교육자로 지냈으니까. 하루는 종이접기를 하려고 색종이를 가져갔는데, 멘티들이 초등학교 때 추억이 생각난다며 종이에 코를 박고 냄새를 맡더라고요. 그런 걸 보면서 이들이 간직한 동심, 그런 감성적인 것들을 끌어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이백우 “신세대와 쉰세대 간의 공감·소통·배려에 중점을 두고 있어요. 최근 ‘욜로(YOLO)’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는데, 우리 기성세대와는 생각이 참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죠. 욜로는 한 번뿐인 인생 즐기며 살자는 건데, 어른들은 저축도 하고 앞날 생각하며 살길 바라니까 긍정적으로 보지는 않잖아요. 그런데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럴 수도 있겠구나’ 싶더라고요.”
차관섭·허남신 멘토, 멘토링 속 멘토링
차관섭·허남신 멘토 콤비 역시 ‘노 티칭(no teaching)’을 원칙으로 대화와 이해를 통한 수업을 진행한다. 사실 두 사람은 그야말로 아버지와 딸뻘이다. 함께하는 데 불편한 점은 없는지 묻자 이구동성으로 ‘전혀 없다’는 답변이 나왔다.
차관섭 “같이 군부대에 갈 때면 카풀(carpool)을 하는데, 1시간 반 정도 걸리거든요. 내가 살아온 이야기도 하고, 허 선생 사는 이야기도 듣고 하면서 오늘은 어떤 방법으로 수업을 진행할지 등등을 의논하게 되죠. 어떻게 보면 딸 같지만, 때로는 친구 같고 그래요.”
허남신 “나이 차가 많이 나는데, 상하적인 느낌이 들었다면 부담스러웠을 거예요. 차 선생님은 저를 굉장히 존중해주시고, 같은 멘토로서 대해주셔요. 또 둘이 있을 때는 제게 멘토 역할을 해주시거든요. 저는 A가 맞다 생각했는데, 차 선생님은 ‘그게 아니야’라는 말 대신 ‘B도 있고 C도 있는데, 나는 D도 해봤어’라는 식으로 말씀하시죠. 그런 유연성, 배려 속에서 선생님 인생을 나누고 제 인생도 나누는 것 같아요. 인생나눔교실의 또 다른 성과인 셈이죠.”
멘티에게 배운 ‘요즘 아이들’
네 명의 멘토가 입을 모아 이야기하는 보람된 순간은 바로 자신으로 인해 멘티들의 삶이 긍정적으로 변화했을 때다. 모두를 만족하는 수업이 되기는 어렵지만, 단 한 명이라도 그 시간을 통해 작은 깨달음을 얻어갈 수 있길 바라는 그들이다.
차관섭 “얼마 전, 한 장병이 쉬는 시간에 쪽지를 하나 주고 갔어요. 나처럼 공직생활을 꿈꾸고 있는데 현실적인 조언을 듣고 싶다고요. 그야말로 내 인생을 나누고 도움을 줄 기회잖아요. 언제라도 시간이 되면 따로 만나서 그동안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진솔하게 들려주고, 그 아이가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돕고 싶어요.”
물론 그들이 일방적으로 자신의 인생만을 나누는 것은 아니다. 멘티와의 생각나눔을 통해 배우는 것 또한 적지 않다.
이정석 “작년에 최전방에 있는 장병들에게 버킷리스트를 작성하라 했는데, 제대하고 돈 벌어서 아버지 차 사드리겠다, 부모님 해외여행 보내드리겠다 등을 적더라고요. 대개 우리 세대는 요즘 애들이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다고 여기는데,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어요. 오히려 이들은 이렇게까지 생각하는데 나는 내 부모에게 어땠는가 반성하게 되더라고요.”
실수하는 멘토가 되고 싶다
국군장병을 위한 수업이지만, 사실 그 외에는 공통점이 없다는 게 나름 고충이라고 한다. 사는 지역, 나이, 학벌, 가치관, 장래희망 등 각양각색의 성향을 지닌 이들이 모여 있기 때문에 늘 어느 것 하나에 치우치거나 차별이 되지 않도록 하고 있다.
이백우 “예전에 아이들에게 ‘아버지’로 삼행시를 지으라 했는데, 한 아이가 아버지에 대한 원망 섞인 시를 지었더라고요. 생각해보니 요즘은 편부모나 조손 가정이 많아졌잖아요. 누군가는 상처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뒤로는 주제를 정하거나 대화를 나눌 때도 마음 다치는 아이가 없도록 배려하고 있죠.”
특별히 더 신경 쓰는 것은 언어다. 아무래도 나이 차가 나기 때문에 서로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해 대화에 불편함이 생길 수 있어 이 점을 늘 염두에 둔다고.
이정석 “어느 날 ‘계모’라는 단어가 나왔는데 아이들이 잘 모르더라고요. 그런 것처럼 멘티들이 알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하고, 또 유행어나 줄임말 같은 신세대 언어도 이해하려고 애쓰는 중이에요.”
이정석씨가 그토록 언어에 신경 쓰는 까닭은 ‘쉽게 대화할 수 있는 멘토’로 기억되고 싶기 때문이다. 말이 나온 김에, 각자가 바라는 멘토의 모습에 대해 물어봤다.
이백우 “재미있는 멘토, 얼핏 생각나는 멘토, 그렇게 기억되면 좋겠어요.”
허남신 “여유 있는 멘토, 실수하는 멘토 그런 인간미 넘치는 멘토가 되고 싶습니다.”
차관섭 “나는 그들의 멘토보다는 형으로 남았으면 해요. 인생의 형이 되어주고 싶어요. 그냥 형처럼, 정말 형처럼 내 모든 것을 그들에게 주려고 해요. 그들이 그렇게 나를 형으로 생각해준다면 더 바랄 게 없죠.”
인생나눔교실은?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하고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주관하는 인생나눔교실은 선배세대(멘토)와 후배세대(멘티)가 나눔·소통·배려 등 인문 가치와 삶의 지혜를 공유한다. 2015년부터 인문적 소양을 갖춘 은퇴자 및 인문·문화 분야 전문가를 대상으로 수도권·강원권·충청권·영남권·호남권 등 5개 권역으로 나뉘어 멘토를 선발한다. 올해는 3월 지원자를 받아, 4월부터 12월까지 총 250명의 멘토가 3000여 회의 멘토링을 진행한다(자세한 사항은 인생나눔교실 블로그 참조 blog.naver.com/arko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