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세라니? 전혀 믿기지 않는다. 주혜란 박사의 몸매와 패션을 보고 깜짝 놀라지 않을 사람은 아마 별로 없을 것이다. 자칭 타칭 한량인 이봉규가 그동안 수많은 여인을 만나봤지만 70세가 넘은 섹시한 여성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나보다 열 살이나 많은 누나인데 딱 달라붙는 원피스에 망사스타킹을 입고 춤추며 노래하는 모습은 언뜻 스치듯 보면 40대로 보인다.
아무리 자세히 관찰해도 스테이지에 선 그녀의 모습은 최소한 스무 살은 젊어 보인다. 한량의 잣대로 좀 더 솔직하게 외모를 분석한다면 몸매는 30대이고 얼굴은 50대, 목소리는 60대로 보인다. 71세에 신인 가수로 활동하면서 제2의 인생을 만끽하고 있는 그녀는 인생은 70부터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갓 잡아 올린 생선처럼 에너지가 넘친다.
프랭크 시나트라의 ‘My Way’와 레이 찰스의 ‘I Can′t Stop Loving You’를 멋들어지게 부르면서 흑인들이나 취할 수 있는 몸짓을 한다. 얼마 전 그녀의 하우스콘서트에서 라운지를 꽉 메운 100여 명의 관객들은 그녀의 노래와 춤과 섹시한 모습에 흠뻑 취했다.
주혜란 박사의 과거가 얼마나 화려했고 집안이 대단하건,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단지 지금 주혜란의 70대 가수 인생에서 펼쳐지고 있는 모습에 박수를 보낼 뿐이다.
콘서트를 지켜보고 있노라면 그녀의 재능도 대단하고 용기도 높이 평가하고 즐길 줄 아는 철학도 존경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녀는 무대에서 마치 ‘Bravo My Life!’를 온몸으로 토해내는 것 같다.
사실 그녀가 살아온 이력과 집안 내력을 알면 지금 스테이지에서 열창하는 모습은 조금 생소하고 과하게 보일 수도 있다. 1975년 고려대학교 의대를 졸업하고 그 이듬해에 충북 청원군에 있는 작은 마을 보건소에 소장으로 부임하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보건소장이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그 후 UN과 워싱턴 정가에서 에이즈 퇴치운동 등 각종 국제적인 사회활동을 하면서 특유의 친화력과 유창한 영어 소통 능력으로 이름을 알렸다. 힐러리 클린턴, 카터 전 대통령 부부와도 인연이 깊다.
김대중 대통령을 오빠라고 부르는 누나
1984년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도 만나 친해졌다. ‘오빠’라는 호칭으로 스스럼없이 지낼 정도였다. 그녀의 두 번째 남편인 임창렬(전 경기지사) 씨와 데이트를 하면서 결혼을 망설일 때도 DJ의 조언이 결정적이었다고 털어놓았다. “똑똑한 사람 같다”는 DJ의 말에 결혼을 결심했다.
임창렬 전 지사와는 산전수전 다 겪고 살다가 이혼하고 지금은 친구처럼 지낸다고 한다. 임창렬 전 지사와 부부 관계일 때 정치적으로 성공해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유명해진 탓에 불필요한 오해도 많이 받고 살았다. 그때만 생각하면 천당과 지옥을 한꺼번에 오간다. 그 당시 구속도 당하면서 “이것이 정치구나!” 통감했다고 회상한다. 세월이 지난 지금 또다시 그때의 일을 자세하게 묻는 것은 실례가 될 수도 있고 행복한 그녀의 지금 삶을 방해하기 싫어서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 당시 노래가 아니었다면 아마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아서 진작 죽었을지도 모른다. 양평 강가에서 스트레스 풀려고 목이 터져라 노래하면서 돌아다녔다”고 주저 없이 말하는 주혜란의 모습에서 처음 어두운 표정이 묻어나온다.
부친 주인호 박사 그리고 100세 모친
주혜란이라는 이름과 ‘Helen Chu’라는 영문 이름은 이승만 박사가 지어줬다고 한다. 예방의학계의 개척자이자 주혜란 박사의 부친인 주인호 박사는 27세 때인 미군정 시기 의정국장(醫政局長, Medical Police) 자리에 있었는데 인연이 된 이승만 박사가 딸(주혜란)의 이름을 지어주었다. 주인호 박사는 함경도 함흥 출신으로 서울대 의대를 졸업하고 ‘보건’이라는 단어를 한국에서 처음 사용했고 한국에 노인대학을 최초로 설립한 분이다(2000년 80세로 타계). 아프리카 대륙을 돌본 한국의 슈바이처로 알려진 분이기도 하다.
그는 1996년부터 17년 동안 아프리카에서 세계보건기구(WHO) 수석고문관으로 활동하면서 각종 전염병 퇴치에도 앞장섰다. 세계 최초로 일본뇌염바이러스 분리에 성공한 의학자로서도 명성이 자자하다. 이 정도로 세계가 알아주는 의사였는데도 “아버지는 평생 자가용보다는 버스나 전철을 이용하시고 검소한 삶을 사신 분이었다”고 딸 주혜란은 말한다. 아버지 생각만 하면 존경심이 저절로 묻어나온다.
주인호 박사의 제자 중 한 명은 2000년 8월 9일 중앙일보 홍혜걸 의학전문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3남 4녀 모두 해외로 유학을 보냈기 때문에 일부에선 재력가로 알고 있지만 실제로는 한국전쟁 이후 지금까지 왕십리에 있는 허름한 18평 자택에서 살고 있다. 무소유의 철학을 평생 실천하고 사신 분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녀의 어머니도 신여성 엘리트로서 아버지 못지않았다. 이화여자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했고 서울여자의대(현 고려대 의대 전신) 출신의 의사였으며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러시아어, 일어, 이탈리아어 등 6개 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했다.
올해 100세인데 작년까지만 해도 아침에 피아노와 가야금을 연주할 정도로 총명했고 혼자 미국 여행을 할 만큼 건강했다. 그런데 3월 초에 갑자기 치매 판정을 받아 지금은 병원에서 요양 중이다. 갑자기 치매가 발명한 이유는 올해 미국을 방문하려니까 작년까지 요구하지 않던 진단서를 갑자기 가져오라 하더라는 것. 어머니는 “내가 의사인데… 내가 건강하게 여행을 할 수 있다는데… 100세가 되었다고 작년까지 요구하지 않던 진단서를 요구하다니… 나도 이젠 죽을 때가 되었구나!” 하는 마음에 큰 충격을 받았고 그래서 치매로 이어진 게 아닌가 하고 주혜란 박사는 추정하고 있다.
71세 된 딸이 100세 어머니가 조만간 자기 곁을 떠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어 바쁜 스케줄에도 불구하고 매일 아침저녁으로 병원을 찾는다 한다. “70년 동안 ‘엄마’를 부르며 살다가 엄마의 삶이 얼마 안 남았다고 생각하니 슬프다”고 말하며 그녀의 눈은 어느새 충혈된다.
“너무 바빠서 늙을 시간도 없다”
분위기를 바꿀 겸 해서 조심스레 물었다. “100세나 되시고 작년까지 미국 여행도 다니실 정도로 건강했으면 어머님이나 딸인 주 박사도 여한이 없는 것 아닙니까? 욕심이 크신 것 아닙니까?”라는 이봉규의 우문(愚問)에 주혜란의 현답(賢答)이 돌아왔다. “어머님이 몇 년 만이라도 더 건강하게 살아주셔서 행복한 시간을 같이 보내주길 바라는 것이 인간의 욕심”이라고 말하며 살짝 미소를 띠웠기 때문에 분위기가 다소 진정되었다.
사실 그녀의 어머니는 아프리카 지역 5개 나라 대통령의 주치의를 하셨고, 불과 몇 년 전까지 연천 통증의학과에서 90대 중후반의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열심히 환자를 돌보셨기 때문에, 비록 100세라고는 하지만 갑자기 치매 판정을 받은 사실을 어머니나 주혜란 박사도 믿지 못하고 충격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어머니가 100세 직전까지 왕성한 활동을 하셨기 때문일까. 주혜란은 늘 “노인들이여, 움직여라, 행복할 때까지!”를 주창하고 다닌다. 대한노인회에서 의료봉사단장을 비롯해 문화, 예술 등 다방면으로 활동하면서 최근 서울시노인회의 행복건강이사를 맡아 ‘노인행복전도사’를 자청하고 나섰다. 본인도 71세의 노인이지만 “너무 바빠서 늙을 시간도 없다. 신바람 나게 생활하면 젊어진다”고 힘을 주어 강조한다.
유식하고 에너지 넘치고 늙음을 거부하는 주혜란은 어느 인터뷰에서 멋진 말을 남긴 적이 있다.
“If I rest, I rust!(쉬면 녹슨다). 이 말은 플라시도 도밍고가 인생의 모토로 삼고 있는 문구입니다. 저 역시 이 말에 100% 동감합니다. 노년이라는 상황을 어차피 피할 수 없다면 건강하고 즐겁게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봉규가 아무리 평론가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지만 주혜란의 과거 사교계와 정치계의 경력을 이제 와서 가타부타 평가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71세의 나이에 가수로 제2의 인생을 신바람 나게 한바탕 놀고 있는 그녀가 지금은 무척 존경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