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12일~5월 8일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는 근대미술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백년의 신화’라는 제목으로, 한국근대미술의 거장전인 화가 변월룡, 이중섭, 유영국의 작품전시회가 열렸다. 그 중 첫 번째로는, 한국 최초로 전시하는 작품이며, 앞으로는 또, 언제 다시 전시를 하게 될지 기약이 없는, 아주 특별한 화가, 변월룡의 첫 회고전인 ‘삶과 예술’ 전이 개최됐다.
그런데, ‘변월룡 화가’는, 처음 들어보는 생소한 이름이다. 지금부터 100년 전인 1916년에, 러시아 연해주에서 태어났으며, 레닌그라드의 레핀 예술대학교에서 미술교육을 받고, 화가가 된 고려인이다. 그는 국권을 상실한 조국의 국경 밖에서 태어나, 이주의 땅에서, 소수자의 삶을 살았지만,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려고 애썼다. 자신의 디아스포라적인 실향민의 운명을, 예술에 대한 뜨거운 열정으로 승화시킨 화가다. 세상과 자기 내면을 향한 시선을, 화폭에 담은 흔적이 그의 작품에서 나타나고 있다.
그는 레핀 예술아카데미의 교수로 있을 때, 독·소 전쟁이 일어나, 사회주의 리얼리즘 작품으로 정치 포스터를 많이 그렸다. 그런데 1953년, 그가 레핀 예술아카데미 부교수로 있을 때, 소련 문화성의 지시에 따라 북한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평양미술대학 학장과 고문을 역임했다. 15개월 정도 평양을 다녀온 것이다. 후에 다시 가려 했으나, 북한과 러시아가 정치적으로 문제가 생겨 입국을 거부당했다. 이후로는, 변월룡은 소나무를 즐겨 그리기 시작했다.
소나무는 러시아에서는 별로 볼 수 없는 나무지만, 한국에서는 가장 흔한 나무다. 그의 소나무 그림을 보면, 반듯하고 곧게 뻗은 나무가 없고, 대부분 뒤틀리고, 심하게 구부러져있다. 화가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에 대한 고뇌가 잘 드러나 있는 작품이다. 그리고, 조국을 그리워하면서 언제나 조국을 향해 달려가는 마음으로 소나무를 그렸다.
소나무를 그린 작품 중에서 ‘금강산 소나무’는,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작품이다. 한국의 대표적인 명산, 금강산을 배경으로, 홀로 고고히 서 있는 소나무를 그린 것인데, 이 작품의 특징은 다른 소나무들과는 달리, 모습이 뒤틀린 것이 아니라 나무가 곧게 뻗었다는 것이다. 이는 그에게 내적 변화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작품이다. 이 소나무는 작가가 그의 삶을 마감하는 이생의 끝에서, 영혼이나마 조국으로 돌아가, 비로소 그의 고뇌를 내려놓고, 영원한 안식을 얻고 싶은, 화가 자신의 마음을 표현 한 것은 아닐까?
변월룡은 그토록 그리던 조국을 끝내 가보지 못한채, 1990년 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근래 ‘금수저’, ‘은수저’, ‘동수저’, ‘흙수저’라는 새로운 시사용어가 회자되고 있다. 우리 사회의 양극화를 조장하는 표현으로 웃어넘기기보다 거북하게 다가오는 것은 ‘네오 계급론’의 냉소적 내음이 묻어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같은 동양 문화권인 한중일 삼국의 식탁 중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왜 숟가락을 볼 수 없으며, 왜 우리는 숟가락 없는 식탁을 상상할 수 없을까 곰곰 생각해본다.
일본 나라(奈良) 현 도다이지(東大寺)에 자리한 일본 왕실 유물들의 보관 창고 쇼소인(正倉院)에는 “756년 쇼무 왕이 죽자 왕비는 그의 명복을 빌기 위해 숟가락을 비롯한 칼·거울·무기·목칠 공예품·악기 등 600여 종의 애장품을 49재(齋)에 맞춰 헌납하였다”(참고: )는 기록이 있다. 즉, 옛 일본 왕가에서는 숟가락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필자는 수년 전 일본 나라 현 소재 덴리교(天理敎) 대학교를 방문한 적이 있다. 안견(安堅, ?~?)의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 1447)’를 비롯해 그곳에 소장된 조선 시대 귀인(貴人)들의 초상화를 연구하기 위해 덴리교 대학교 도서관을 찾은 것이다. 그때 대학 부속 세계민속박물관에서 일왕의 식탁을 찍은 영상 자료를 보았는데, ‘놀랍게도’ 우리의 잔치 밥상을 연상케 하는 그 식탁에 숟가락과 젓가락이 나란히 놓여 있던 기억이 생생하다.
요컨대 일본 식탁에서 숟가락을 볼 수 없는 것은 일본 왕실의 생활 문화와 평민의 생활 문화 간에 넘지 못할 장벽이 존재했음을 암시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중국에서는 숟가락을 사용하는 풍습이 왜 없을까? 필자는 오래전 대만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중국 송(宋)나라(960~1279) 휘종(徽宗, 1082~1135) 시대에 그려진 ‘문회도(文會圖, 184.4×123.9cm, 1100~1125?)’에서 숟가락을 본 적이 있다.(참고: 사진 자료 1,2) ‘문회도’는 당시 궁중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자료인데, 상 위에 숟가락과 젓가락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중국에서는 기원전 5000년 전의 것으로 추정하는 숟가락이 출토되기도 했다. 이런 사실로 보아 중국인은 숟가락을 오랫동안 생활 용기로 사용해왔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명나라 이후 차츰 기름지고 뜨거운 음식에 숟가락보다 젓가락을 사용하는 게 보편화되면서 숟가락이 설 자리를 잃었다고 한다. 이와 달리 한국은 온갖 찌개류와 국물류가 주도하는 식탁에서 숟가락을 빈번하게 사용해온 것이다.
숟가락과 관련해 흥미롭게도 중국의 경우에는 ‘진화 의식’을, 일본의 경우에는 ‘순응 의식’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한국의 경우에는 예나 지금이나 사회를 지배하는 ‘평등 의식’을 엿볼 수 있다.
근래 우리 사회에서 회자되고 있는 ‘금수저’, ‘흙수저’ 논쟁을 보며 숟가락을 사용하지 않는 중국과 일본의 사회 계층 간 갈등은 어떤 양상을 띠고 있을지 사뭇 궁금해진다.
‘한중일 식탁 문화의 차이점을 찾아서’, 월간지 내용과 일부 겹침을 밝혀둔다.
>>>글 이성낙 현대미술관회 회장
독일 뮌헨의대 졸업(1966),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피부과 교수, 아주대학교 의무부총장, 가천의과대학교 총장, 가천의과학대학교 명예총장(現), 한국의약평론가회 회장(現), 간송미술재단 이사(現)
북유럽의 가장 북쪽에 위치한 핀란드의 겨울은 아주 길다. 겨울이 일찍 찾아들고 오후 3시만 되어도 어둠컴컴해지는 추운 나라. 추워서 핀란드 사우나를 일상으로 즐기는 이 나라는 한겨울이면 산타클로스, 요정, 루돌프, 오로라, 이글루 등으로 여행객을 유혹한다. 그것보다 더 재밌는 것은 헬싱키~스톡홀름을 잇는 실자라인 크루즈 여행이다.
800년간 스웨덴·러시아 지배받아
핀란드는 3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항구도시로 한반도의 약 1.5배 크기다. 유럽 중에서도 사회복지가 잘 되어 있는 나라이며, 잘살기로 유명한 나라지만 1914년까지는 약 100년이나 러시아의 속국으로 살았다. 아직도 핀란드에 입국하려면 비자를 받아야 한다. 러시아 지배를 받기 전, 12세기부터 1809년까지 약 700년 동안이나 스웨덴의 지배를 받았다. 스웨덴의 지배시절 러시아와의 잦은 전쟁으로 핀란드는 황폐했다.
이후 러시아가 핀란드를 장악하자 알렉산드르 1세는 스웨덴이 세운 수도 투르쿠(Turku)를 싫어해 1812년 러시아에 가까운 헬싱키로 수도를 옮겼다. 이때부터 헬싱키는 급속히 성장했다. 1904년, 러시아 총독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보브리코프가 암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러시아가 러일 전쟁(1904~1905)에서 패배함으로써 강압정책이 다소 완화되었다. 러일 전쟁 패전 이후 러시아 국내 정세가 불안한 상황을 이용해 1906년에 입법기관을 민주적인 단원제 의회로 개혁했다. 그러니까 핀란드가 속국에서 벗어난 것은 110년이 조금 넘어났을 뿐이다.
헬싱키 랜드 마크는 원로원 광장
헬싱키 시내 여행은 어렵지 않다. 걷거나 트램을 타면 된다. 헬싱키의 가장 중심부는 원로원 광장(세네트 광장, Helsinki Senate Square)이다. 스웨덴의 지배가 끝나고 러시아의 속박이 시작된 1818년부터 30여 년에 걸쳐 독일 건축가 카를 루트비히 엥겔(Carl Ludvig Engel)에 의해 이 광장이 조성된다. 넓은 광장에는 약 40만개의 화강암 포석이 깔려 있고 중앙에는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2세(Aleksandr II)의 동상이 있다. 핀란드를 하나의 독립국가로 인정해 의회의 구성과 핀란드어 사용을 허용했던 황제다. 이곳에 핀란드를 상징하는 대표 건축물인 루터란 대성당(Tuormiokirkko)이 있다. 왕궁 스타일로 지은 이 건물은 바다에서 바라볼 때 한층 더 아름답다.
그 주변에는 사우멘 판키(Suomen Pankki, 1812년 설립)라는 중앙은행이 있다. 세계에서 네 번째로 오래된 은행이다. 건물 앞에는 핀란드의 민족주의 운동을 이끌었던, 철학자이며 정치인이었던 요한 빌헬름 스넬만(1806~1881)의 동상이 있다. 그가 이곳에 있는 이유는 핀란드의 독자적인 화폐 발행(1860)에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바로 앞 1891년에 귀족의 집으로 건립된 사아티탈로는 현재 핀란드 정부기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화려한 건축 양식이 눈길을 끈다.
또 카우파토리(Kaupatori) 광장 앞쪽으로는 대통령관저 및 집무실, 헬싱키 시청, 스웨덴 대사관이 있다. 대통령관저 및 집무실은 근위병이 보초를 서지 않으면 눈여겨보지 않을 정도로 소박하다. 바닷가 옆 길을 따라 가면 러시아 정교회인 우스펜스키 성당(Uspenskin Cathedral)이다. 이 성당은 핀란드가 러시아의 지배하에 있던 1868년, 러시아 건축가 알렉세이 고르노스타예프(Aleksei Gornostaev)가 19세기에 비잔틴 슬라브 양식으로 세운 곳이다.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가장 규모가 큰 정교회다. 성당 안으로 들어서면 그리스도와 12사도의 그림, 돔탑, 파이프오르간 등이 있다. 안온한 느낌이 드는 성당 내부다.
영화 에서 주인공들이 순록고기를 사러 간 하카니에미 마켓(Hakaniemi Market)도 걸어갈만한 거리다. 2층짜리 벽돌건물 안에는 식품코너 말고도 아울렛과 구제숍, 공예품 숍이 있다.
헬싱키 중앙역 주변 볼거리 가득
헬싱키 중앙역 주변에도 볼거리가 산재해 있다. 중앙역사의 건물이 예사롭지 않다. 공모전에서 우승한 핀란드 건축가 엘리엘 사리넨(Eliel Saarinen, 1873~1950)이 설계해 1919년에 완공된 역사다. 아르누보 양식이 가미된 적갈색 화강암 건물로 정문의 멋진 대형 아치와 높이 49미터의 시계탑, 벽면에는 램프를 들고 있는 네 개의 거대한 조각상이 있다. 19개의 승강장을 갖추고 있는 초고속 열차 노선인 펜돌리노(Pendolino)를 비롯해 다양한 등급의 열차가 있다. 역사 지하에는 헬싱키 지하철, 라우타티엔토리 역(1982년 완공)이 있다.
중앙역 주변으로도 멋진 건축물이 즐비하다. 그중 1902년에 개관한 핀란드 국립극장의 건축물이 눈길을 끌어 당긴다. 건축가 온니 타르야네(Onni Tarjanne)가 설계했으며, 당대 북유럽에서 유행하던 국가적 낭만주의 양식으로 지어졌다. 국립극장의 시작은 핀란드 극장(1872년 설립)에서 비롯되었다. 핀란드에 설립된 최초의 핀란드어(Suomi) 연극 전문 극장이었다. 스웨덴과 러시아 제국의 오랜 지배에 저항하는 핀란드 민족주의 문화운동의 일환이었다. 1954년과 1976년에 소극장 시설이 추가되었다. 855석 규모의 대극장과 2개의 소극장, 스튜디오, 회의실 등의 부대시설을 갖추고 있다.
영화거장 카우리스마키 흔적없어 아쉬워
극장 앞에는 핀란드의 대표적인 작가 알렉시스 키비(Aleksis Kivi)의 동상이 있다. 알렉시스 키비는 누르미야르비 출생으로 가난한 시골 양복점 아들로 태어났다. 헬싱키 대학에 입학했으나, 대학도 중퇴하고 일생 동안 심장병과 정신병으로 고통을 겪다가 38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겨우 10년간의 창작활동밖에 하지 않았지만, 핀란드 문학의 창시자로 인정받고있다. 그의 작품은 핀란드 문학사상 최초의 고전이 되었다. 대표작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은 소설 가 있다. 핀란드에서는 다음으로 치는 고전적인 작품이다.
무엇보다 필자는 핀란드의 영화 거장, 아키 카우리스마키(Aki Kaurismaki)의 영화 포스터가 눈에 띄길 바랐다. 국내 영화 마니아들은 이 감독을 모르는 이 없을 것이다. 는 칸영화제를 비롯 많은 상을 휩쓸었다. 그 외에도 가 있고 도 기억에 남는 작품이다.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의 영화에는 항상 그만의 특유의 스타일이 존재한다. 인물들은 무표정으로 일관하고 무성영화를 연상시키듯 대화가 없는 장면이 부지기수다. 얼굴이 익숙한 유명 배우들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가 만든 작품속에는 카티 오우티넨(Kati Outinen)이라는 여배우가 등장한다. 결코 예쁘지 않고, 차라리 못생긴 편에 드는 이 여배우는 감독과 늘 함께 한다. 비록 그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으나 그가 숨쉬고 있는 이 도시에 와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일이다.
그 외에도 주변에는 아테네움 미술관, 키아스마 현대 미술관이 있다. 멀지 않은 곳에 나무로 만든 캄피(Kamppi)교회도 주목할 만하고 암석교회(Temppeliaukio Kirkko)도 유명하다.
또 국립박물관(Kansallismuseo)과 핀란디아 홀(Finlandia Hall), 올림픽 스타디움도 관광 목록에 빠지지 않는다. 또 유명한 관광지가 시벨리우스 공원(Sibelius Park)이다. 민족음악파인 얀 시벨리우스(Jean Sibelius, 1865~1957)를 기리기 위해 만든, 600개의 철제 파이프로 제작한 기념비가 있다.
실자리안 나이트 클럽 체험 잊지 못해
여행의 백미는 헬싱키~스톡홀름으로 떠나는 선상 여행이다. 오후 3시 30분 경, 올림피아 터미널에는 사람들이 몰려 든다. 실자라인(siljaline) 여객선은 어마어마한 크기다. 1991년에 건조한 이 배는 약 6만 톤으로 선상에서의 높이만도 6층이다. 자동차 400대와 버스 60대를 탑재 할 수 있으며 탑승인원은 3000명에 육박한다. 2002년에 새롭게 리모델링한 배다. 배 안으로 들어서면 신천지다. 3인조 젊은 클래식 밴드가 연주하면서 환영한다. 일반 식당 여러 개, 뷔페 식당, 면세점, 옷가게, 바와 가라오케, 카지노, 나이트클럽, 사우나 등. 오후 5시에 출발한 배는 그 다음날 오전 9시 30분경에 스웨덴 스톡홀름에 도착한다. 이 선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체험은 나이트 클럽이다. 환히 불이 켜진 무대에서는 올드 팝송이 울려 퍼진다. 목소리가 흐느적거리는 에릭 클랩튼의 ‘원더풀 투나잇', 이럽션(Eruption)의 노래지만 우리나라 가수 방미가 불렀던 ‘원 웨이 티켓’, 일본인들이 많이 타는지 일본 노래도 부른다. 주변을 둘러보면 거의 다 노년층이다. 플로어에서는 나이든 커플이 춤을 춘다. 넓은 무대에 새로운 무희와 가수가 등장하면 조명은 더 화려해진다. 밤이 깊어가도 클럽을 떠날 수 없을 정도로 매력이 발산되는 곳. 분명코 어느 누구라도 이 크루즈 여행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Travel Tip!
항공편 핀에어(www.finnair.com/kr)가 인천~헬싱키 구간에 직항 편을 운항 중이다. 소요시간은 약 9시간 30분으로, 오전 10시 20분에 인천에서 출발하면, 당일 오후 2시에 헬싱키에 도착한다.
현지교통 핀란드 교통카드를 이용하면 된다. 장거리 여행을 하려면 버스를 이용하는 것이 좋다. 운행 시각이 정확하며 열차 환승도 편리하다.
예약사이트 www.tallinksilja.com, 한국사이트: www.siljaline.co.kr
통화 유로 전압 220v
언어 핀란드어와 스웨덴어가 공용어, 어디서든 거의 영어로 대화 가능.
시차 한국보다 7시간 늦다. 서머타임 적용 시에는 6시간 느리다.
기온 헬싱키는 12월~3월 평균 기온이 영하 5도를 웃돈다. 때로는 4월 초까지 눈이 내리기도 하며 매서운 바람이 불기도 한다.
물가 헬싱키의 물가는 스칸디나비아 반도 지역의 국가들 중 가장 낮다. 특히 헬싱키 카드와 ‘가족 요금 제도(Family Tickets)’는 핀란드 배낭여행의 부담을 줄여주는 좋은 제도다.
쇼핑 정보 헬싱키의 주요 쇼핑지역은 에스플라나디 공원, 알렉산터린카, 구시가지 등이며 상점은 보통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문을 연다.
음식 정보 헬싱키 에스플라나디 광장과 원로원 광장 근처에 레스토랑과 카페가 많다. 헬싱키 마켓광장에서는 저렴한 가격에 생선요리를 맛볼 수 있다. 살미아키(salmiakki)라는 투명한 검은색의 단단한 젤리가 나름 유명. 단, 특유의 암모니아 향 때문에 익숙해지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
숙박 정보 요금과 운영기간이 시즌마다 천차만별이다. 단 헬싱키의 호스텔은 시트비를 따로 받지 않는 것이 장점이다.
주변 볼거리 시간이 많다면 오로라를 볼 수 있는 라플란드(Lapland) 이발로(ivalo)나 산타 마을 로바니에미(Rovaniemi)를 찾아도 좋을 것이다. 그 외 사우나의 본고장에서 리얼 사우나 체험도 해 봄직하다. 핀란드에는 약 250만여 개의 사우나가 있다고 한다. 사우나 카페, 사우나 바, 사우나 아일랜드, 사우나 버스 그리고 심지어 곤돌라 사우나까지 있다.
글·사진 이신화(의 저자, www.sinhwada.com)
2011년, 삼성 미술관 리움이 주관한 조선시대 분청사기(粉靑沙器)전이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서 열렸다.
전시된 59점의 분청사기가 뉴욕은 물론 전 세계 미술 애호가의 눈을 매료시켰다는 소식이 국내 언론에 보도되자 감동보다는 덤덤하거나 의아해하는 분위기였다. (주해: 사기(沙器)보다는 자기(瓷器)라는 용어가 더 적합하다고 생각하여 이후 자기로 쓴다)
그만큼 조선시대의 자랑스러운 우리 문화 예술품에 대한 이해나 관심이 높지 않다고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분청자기가 외관상 고려청자나 조선백자 그리고 조선 청화백자에서 느낄 수 있는 ‘고귀하거나 우아함’과는 거리가 먼 ‘자유분방함과 대담함’에 현대미술에서 볼 수 있는 ‘추상미’까지 갖추고 있다 보니 많은 이에게 오히려 혼란스럽게 다가가는지도 모른다.
조선 분청자기와 관련한 우화 같은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1962년 역사적인 ‘한국 고미술 5천년전’이 프랑스 파리에서 열렸다. 그때 국립박물관(훗날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감독관으로 혜곡(兮谷) 최순우(崔淳雨, 1916~1984) 선생이 파견되어 현장을 지켰다. 그런데 당시 그곳 파리에서 유학하던 한국 학생들이 전시장을 찾아왔다가 전시된 조선시대 분청자기를 보고 “저런 옹기그릇을 무슨 국보라고 전시 하느냐? 창피하게!”라고 내뱉고는 전시장을 나갔다고 한다. 당시 국내 최고의 미술 평론가로 이름난 혜곡 선생이 이런 막말을 들었을 때의 심정이 어떠했겠는가 짐작이 된다.
그런데 다음 날, 파리 일간지들이 우리 전시회를 소개하며 “한국에는 500년 전에 피카소가 있었다”며 극찬했다. 금불상, 조선 회화를 비롯해 고려자기, 조선백자 등 다양한 전시품이 많았는데 유독 조선 분청자기를 두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혜곡 선생은 이 기사를 보고 더없이 위로받았으며, 그 막말을 뱉은 한국 유학생들이 신문 기사를 읽고 반성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서독 프랑크푸르트 전시장에서 혜곡 선생이 필자를 만났을 때 들려준 에피소드이다.
혜곡 선생은 아마도 그 유학생들이 점토(clay)가 원료인 옹기(甕器)는 가마에서 800도에 이르면 힘없이 부스러지는 반면 자기(瓷器)는 1200도에서 더욱 경질화(硬質化)된다는 본질적 차이를 모른다는 사실에 더 속상해했는지도 모른다. 게다가 전시장에서 본 분청자기에 묘사된 색채나 그림이 전혀 우아하지 않았기에 문화적 자긍심을 못 느낀 것이라고 유추해본다. 그런데 바로 그 격 없는 간결함과 엄격한 틀에서 벗어난 대범한 자유분방함이 현대미술과 직결되는 요추였다는 점에서 서양 미술계는 놀라워한 것이다.
이렇듯 16세기에 현대미술적 감각이 스며든 도자기는 물론, 회화 작품 그리고 동양권은 물론 서양 미술계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독보적 미감을 지닌 도자기가 바로 우리의 분청자기다. 곱지도 않고, 우아하지도 않은 분청자기를 마다하지 않고 생활 미술품으로 받아들인 당시 소비자 계급인 조선 양반들의 눈높이를 가늠할 수 있다. 위의 두 작품에서 어느 것이 더 해학적인가를 보면 왜 파리지앵이 조선시대의 분청자기에서 피카소를 보고 놀라워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민주화를 위해 독재정권에 각을 세웠던 그다. 그의 아버지도 그랬고, 그의 아들도 그랬다. ‘3대가 시위 투쟁 집안’이라는 기사까지 났다. 그랬던 그가 20년 넘게 모은 토기 1582점을 국가에 기증했다. 그것도 모자라 그 이후 모았던 토기들도 다섯 차례 더 기부했다. 토기가 부업이라면 청동 수저 수집은 취미 같은 것이었는데 그것마저 모두 내놓았다.
글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최영도(崔永道·77) 변호사를 수식하는 단어는 다양하다. 인권변호사로 유명하지만, 1971년 사법파동의 주역으로 찍혀 1973년 유신 때 재임명 탈락 전까지는 법복을 입고 판사로 활동했다. 또 민주화 운동에 앞장선 젊은이들을 위해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다 민변의 창립발기인이자 회장을 맡았고, 참여연대의 공동대표,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까지 맡는 등 다양한 활동을 해 왔다.
문화예술 분야에서는 클래식 음악에 관한 에세이를 엮은 와 유럽 미술관들을 다룬 등 여러 저서를 내기도 했다.
그의 이름이 더 널리 알려지게 된 사건 중 하나는 2001년 평생 모아온 토기를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한 일이다. 모두 6차례에 걸쳐 토기 1668점과 청동 수저 51점 등 도합 1719점의 유물을 기증했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는 그의 이름으로 된 기증실에 약 60여 점의 토기가 전시되어 있다. 수집 과정과 기증 후의 이야기까지 엮어 이라는 책도 냈다.
토기 박물관 만들자 결심해 수집 시작
그가 유물 수집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1973년 해직판사가 돼 변호사 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다. 처음엔 백자 연적이나 유병(油甁)과 같은 도자기 소품을 모으다 고미술 시장에서 만난 후배의 권유로 토기에 관심을 갖게 됐다. 가치 있는 토기들을 모아 박물관을 건립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것도 그즈음이다.
“당시만 하더라도 투박한 토기는 청자, 백자 등 다른 유물들에 비해 박물관이나 학계의 관심을 받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외국인들이 사들여 해외로 유출하고 있었죠. 그래서 토기들을 수집해 박물관을 차리고 싶었습니다. 판사복을 벗었으니 평범한 법률가로 남겠다 싶었는데 인생의 목표가 생겼던 것이죠. 아내가 대찬성을 해줘 즐겁게 수집할 수 있었습니다.”
토기는 멀게는 신석기 시대부터 삼국 시대를 거쳐 조선 시대까지 오랜 기간 우리의 삶과 함께했다. 현재는 장례 때 많은 토기를 부장품으로 넣는 것이 유행했던 가야 때 것이 가장 많이 남아 있고, 장묘제도의 변천으로 부장품을 적게 넣어 출토가 적은 고려, 조선 시대 토기가 가장 보기 힘들단다. 그가 기증하기 전까지 국립중앙박물관도 고려, 조선 시대의 토기는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 거의 없었을 정도. 수집가들의 기증문화가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단면을 보여주는 사례다.
물론 이러한 수집은 쉽지 않았다. 포기해야 할 것도 있었다. 라운딩 한 번 나갈 돈이면 저렴한 토기 1~2점은 살 수 있었기 때문에 골프도 끊고, 술도 줄였다. 인사동과 장안평을 샅샅이 뒤지느라 1000원짜리 감자탕으로 끼니를 때울 때도 많았고, 차에서 전투식량으로 요기를 하기도 했다.
유물의 해외 유출을 막기도 했다. 1983년 인사동에서 백제토기 ‘쇠뿔잡이항아리’를 만나 반했지만, 200만 원이라는 비싼 가격에 망설였다. 그러다 평소 눈독을 들이던 프랑스 외교관이 곧 사갈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듣고, 돈을 마련해 갈 테니 항아리를 숨겨 두라고 부탁해 겨우 확보하기도 했다.
감정방법부터 관리방법까지 이론 익혀
초창기부터 박물관 건립을 고려했기 때문에 수집 형태도 남달랐다. 개인적 기호와는 무관하게 시대, 지역, 기형, 문양 등 4가지 기준을 놓고 학술적 가치까지 고려해 수집했다. 학술적 가치가 있다면 싼 것도 모았고, 상품가치가 없을 수 있는 파편도 사들였다.
수집을 위한 연구와 노력 덕분에 토기와 관련한 전문적인 지식도 얻었다. 토기를 감정하는 나름의 7가지 방법을 터득해 진위뿐만 아니라 학술적인 분류까지 할 수 있게 됐다. 예를 들어 토기를 보면 살짝 혀끝을 그릇에 대보는데, 진품인 경우 토기 내부에 다공층이 있어 혀가 잠깐 달라붙는다고. 그때 나는 기분 좋은 곰삭은 냄새는 즐거운 덤이다. 토기를 구입하면 경질토기와 연질토기를 구분해 각각의 특성에 맞게 세척하거나 건조하는 방법도 익혀야 했다.
실제로 그가 기증한 유물 1719점에 대한 초록을 제작할 때, 박물관 측과 유물 분석에 대한 수십 건의 이견이 있었지만 몇 건을 제외하곤 대부분 그의 의견이 받아들여졌다. 2010년 발간된 이 은 그가 제안한 분류법대로 편집됐다.
그렇게 20년 이상 수집이 진행돼 고미술 시장에서 더 이상 사고 싶은 토기를 보기 어렵게 되자, 본격적인 박물관 건립을 추진했지만 현실은 쉽지 않았다.
“서울 인근에 소박하게 아이들이 와서 보고 갈 수 있는 규모의 박물관이 되려면 300억 원 이상 필요하겠더라고요. 제 돈으로는 어림도 없어 대기업이나 정부에 모아놓은 것을 모두 무상 기증할 테니 토기 박물관을 지어 달라고 요청했지만 퇴짜 맞기 일쑤였습니다. 그렇게 끌어안고 고민만 하다가 국립중앙박물관 측에서 여러 차례 요청이 와 기증을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기증을 결심하게 된 계기 중 하나는 모아놓은 토기들에 대한 걱정이 너무나 컸던 것도 있다. 혹시 사고라도 당하게 되면 그 토기들이 어떻게 될까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실제로 그는 해외를 나갈 때, ‘내게 문제가 생기면 토기들을 국·공립 박물관이나 대학 박물관에 무상기증을 하라’는 내용의 유서를 반드시 남겨놨다고 했다. 여행을 할 때마다 유서를 쓰고 찢기를 반복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횡단보도에서 이러다 교통사고라도 당하면 토기들은 어떡하나 하고 똑같은 걱정을 반복하다, 아끼는 것일수록 박물관에서 오래도록 전시돼야 한다는 생각으로 기증 결심이 섰다고.
오래 관리되고 기억되길 원해 기증 선택
기증처가 국립중앙박물관이 된 것은 그전부터 이어오던 인연 때문이다. 1997년 국립중앙박물관 토기 전시회에 44점을 찬조 출품한 것이 계기가 됐다. 그 이후 국립중앙박물관이 지금의 위치인 용산으로 이전을 계획할 때, 기증관 구성을 의욕적으로 추진하면서 최영도 변호사 측에 제안해 기증이 이뤄졌다. 물론 다른 박물관에 비해 뛰어난 국립중앙박물관의 유물 관리, 전시 능력도 매력적이었다. 그는 이 과정을 국립중앙박물관으로부터 “선택받았다”라고 표현했다.
2001년 기증 후에도 그의 토기 수집에 대한 습벽은 쉽게 멎지 않았다. 그만해야지 싶다가도 좋은 유물이 나타났다는 전화에 흔들리기도 했고, 궁금해서 일단 보면 지갑 열기를 멈추지 못했다. 아예 눈을 닫으려고 하면, 상인들이 토기를 들고 사무실로 들이닥쳐 외상으로 맡기고 갔다. 이렇게 토기들이 더 모여 몇 차례 계속 기증하길 반복했다.
한눈에 반한 토기를 만나면 며칠이고 침대에 두고 끌어안고 잘 정도로 사랑이 남달랐던 그다. 때문에 시집보낸 딸처럼 토기들이 눈에 아른거릴 법도 한데, 기증한 지 10년이 넘은 지금도 잘했다 싶단다.
“평생을 바쳐 모은 수집품들이 주인을 잃고 나서 허망하게 시장에서 뿔뿔이 팔려 나가거나, 풍비박산이 나는 경우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또 사설 박물관도 후대로 넘어가면 초심이나 전문성을 잃는 사례가 있습니다. 때문에 기증문화의 발전은 문화유산의 보존을 위해 중요합니다. 유물은 국가와 국민의 소유이고, 수집가들은 그것을 잠시 맡아 두는 창고지기일 뿐입니다.”
모든 토기를 기증하고 나서는 기쁨과 해방감을 함께 맛봤다고 말했다.
“무거운 관리 책임에서 벗어났다는 생각에 어깨가 가벼워짐을 느꼈습니다. 수집은 명예인 동시에 속박이라는 것을 느꼈고, 모두 다 기증하고 나니 마음이 가볍고 자유로워졌습니다. 박물관에게 고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쉽게 기증 결정할 수 있게 제도 개선돼야
해외 미술관을 돌며 관찰해 이를 엮어 책까지 발간한 그이기에 기증문화에 대한 의견은 현실적이다. 특히 기증을 하는 것만큼이나 기증을 받는 쪽의 태도 변화도 절실하다고 이야기한다.
“학계나 관련 기관에서는 수집가나 고미술 상인을 낮춰보거나 신뢰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만 이는 잘못된 것입니다. 수집은 단순히 돈을 주고 가져오는 것 이상으로 복잡하고 신중한 과정을 거치는데, 직접 해 보지 않으면 알 수 없습니다. 그런 과정을 거친 만큼 수집품에 대한 지식과 애정 또한 상상 이상입니다. 그런 ‘귀한 자식’을 받아주는 일인 만큼 받는 쪽에서도 애정을 갖고 기증품을 다뤄줬으면 합니다. 전시 과정에서도 기증자에 대한 부각이나 배려가 고려된다면 보람도 느낄 수 있고, 기증에 대한 동기유발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기증자들이 스스로를 박물관의 ‘가족’이라고 생각하고 소속감을 느낄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해외 미술관이나 박물관의 경우 기증자의 이름이 잘 보이도록 크게 써 놓거나, 아예 액자에 새겨 넣기까지 하는 경우도 있다.
최영도 변호사는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의 기증자 대표로 기증 후 몇 년간 추대 받아 활동하기도 했고, 국립현대미술관과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서 기증과 관련한 강연 등의 요청이 와 이런 의견들을 밝힌 적도 있다고 했다.
최영도 변호사는 문화 발전을 위한 제도적 장치 마련이 절실하다고 조언했다.
“수집가라고 모두 다 엄청난 재산가는 아닙니다. 수집을 위해 평생의 재산을 바치는 경우도 허다한데, 이런 경우 기증 후에는 생계를 걱정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우려가 기증에 장애가 될 수도 있는 것이죠. 때문에 수집가들을 위한 세제 혜택이나 연금제도의 도입 등을 고려해야 합니다. 세제 혜택 제도는 기증품에 대한 평가가 어려워 법까지 만들어 놓고 시행하지 못한다니 답답할 노릇입니다.”
특히 세제 혜택 마련의 걸림돌이 되고 있는 기증품에 대한 가치평가와 관련해선 전문가들이 머리를 맞대면 될 일이라고 강조했다.
“관과 학계, 업계, 수집가들로 구성된 공동평가기구를 만들어 기증품의 가치를 정확하게 평가할 수 있게 된다면 세제 혜택뿐만 아니라 기증을 후원할 수 있는 다양한 길이 열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글 이재준 미술품 수집가 joonlee@empas.com
화가 김환기(1913~1974)와 화가 도상봉(1902~1977)은 유난히 달 항아리를 좋아했다. 김환기는 여러 점의 달 항아리를 수집하기도 했을 뿐 아니라, 여기저기 그림의 소재로 삼았고, 종이 오브제로 직접 달 항아리를 만들기도 하였다.
도상봉도 도자기를 좋아해서 아호를 도천(陶泉)으로 삼았다고 한다. 1950년대 많은 정물화에 도자기가 등장한다. 특히 직접 구입한 달 항아리를 그린 그림도 여러 점 전해진다. 시인 김상옥(1920~2004)은 조선백자를 평생 사랑하여 한때 인사동에서 고미술점 ‘아자방(亞字房)’을 직접 운영하며 수많은 조선백자를 수집하였고, 달 항아리도 여러 점 소장하여 백자를 주제로 한 주옥같은 시조를 남겼다.
‘조선백자 대호(大壺)’가 정식 이름인 달 항아리는 두둥실 하늘에 뜬 보름달과 같다 해서 붙여진 별칭이다. 고미술학자나 현대 도예가들의 공통된 견해는 높이 40cm 이상이고 둘레가 120cm 이상의 구형(球形) 순백자에, 제조기법상 아래 위 반구형 두 개 결합해서 소성(燒成)하고 맑은 백자유를 시유해 1250도~1300도에서 구워낸 도자기를 대호라 이른다.
물레를 돌려 빚는다 해도 완성품보다 1.3배 정도 더 커야 하는 고로(번조 과정에서 약 30% 정도는 축소됨) 무게와 부피가 한 아름이 넘는다. 초벌구이 과정에서도 자체 무게 때문에 주저앉거나 파열되기 일쑤다. 이를 그대로 전승하고자 하는 도예가들도 열에 한두 점 완성품을 건지기 고작이다. 또한 전래품들은 술을 담거나 간장을 담는 등 생활용기로 사용했으므로 파손이 심해 남아 있는 수효가 극소수로 그 희소가치가 높다.
리움미술관 호림미술관국립박물관 등과 지방의 전시회를 쫓아다니기 30여 해, 안복(眼福)은 누렸으나, 수집의 기회는 오지 않았다. 그래서 백자를 꾸준히 연구하고 만들어 내는 현대 도예가들에게 주목하게 되었다.
여성도예가 김익영(1935~ )은 서울대 공대에서 화공학, 홍익대에서 공예미술을 전공한 뒤, 미국 뉴욕의 알프레드 요업대학원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원, 국민대학교에서 후학들을 길러냈다. 유학 중 영국 공예가 버나드 리치(1887~1979)의 초청 강연에서 ‘한국의 조선백자가 현대인이 추구해야 하는 미의 세계’라는 열강을 듣고 감복, 백자를 연구하기로 결심하였다고 한다. 순백자의 담백하고 고졸(古拙)한 멋에 젖어 여러 형태의 백자를 빚고 구워보았으나, 1960년대에는 도자 가마가 적어 백자를 시연하기에 어려움이 많았다.
그럼에도 1965년 일본 전시를 비롯해 지금까지 30여 회 가까운 전시회에 참여하였다. 도자의 실용성을 강조해서 생활용기의 격을 높이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1975년부터 국민대 교수로 많은 제자를 길러내면서 태토(胎土)의 선별부터 가마의 과학적 제조, 특히 백자유약 데이터의 체계적 정리와 실행에 이르기까지 백자의 고급화를 이끌었다. 1978년 개인 가마 ‘우일요’를 개설하고 그만의 개성 강한 도자기를 만들어 냈다. 특히 ‘면 깎기’라는 고난도 작업으로 합(盒), 푼주, 제기(祭器)등 전통 조선백자에 근원을 두되 이를 재해석하고 변용한 도자를 빚었다.
몇 년째 창덕궁 담 옆의 ‘우일요’를 드나들며 여러 기물을 보고 만지고 연적, 필통, 벼루 등을 사 모으던 중이었다. 달 항아리를 왜 안 만드시느냐고 여쭙자, “전에 몇 점 만들어 보았는데, 이제 무릎이 안 좋아 힘에 부치고 완성품을 얻기가 어려워 망설인다”는 노도예가의 진솔한 대답이었다. 조카따님을 졸라 2008년 여름에야 김익영의 달 항아리를 만날 수 있었다. 설백(雪白)의 유현(幽玄)한 유약의 흐름과 당당한 자태에 반해 덥석 끌어안고 말았다. 이 달 항아리 앞에선 그 어떤 말도 필요치 않다. 나주 반닫이 위에 앉히고 바흐의 무반주 첼로조곡을 서너 시간 들으며 몰아의 경지에 젖었다.
아키야마 준(秋山 潤·1970~ )은 일본인으로, 경제학을 전공한 사람이다. 그는 우연한 계기로 도자에 매료돼 10여 년 공방을 찾아다니며 도자 공부를 한 뒤에 조선백자의 연원을 찾아 2002년에 한국에 왔다. 한국 부인의 영향도 있었으리라. 경남 창원에 스스로 가마를 짓고 조선백자를 잇는 순백자를 굽기 시작하였다.
한국의 도예가들을 찾고, 숱한 시행착오를 거치며 백자 도예의 길을 정진하였다. 그 첫 결실로 2006년 드디어 인사동에서 백자전을 열었다. 그 이듬해에는 경북 청도로 옮겨 현재까지 백자를 굽고 20여 회 전시에 참여하고 있다. 극도로 절제되고 유약이 너그러운 인사동 전시작품이 눈에 어려, 그의 가마를 찾고 싶어 알아본 끝에 어렵사리 연락이 닿았다. 2008년 봄날에 그의 초대로 청도의 공방을 처음 방문하였다. 그의 작품처럼 검소하고 정갈한 작업실을 거쳐 내실로 들어서면서 그의 달 항아리를 만났다.
수십 점을 소성해 보았으나 겨우 두 점만 얻었다며 망설이는 부부를 설득하여 한 점을 입수하기로 하였다. 열차로 운송하기가 어렵다며 며칠 후 서울의 집까지 손수 가져다주었다. 다른 일본 예술인 두 명과 함께 자리한 우리 거실에서 조촐한 다과와 함께 소리꾼 장사익의 절창 ‘허허바다’를 음반으로 듣던 순간이 선연히 떠오른다. 지금은 침실에 두고 밤을 함께하고 있다. 그의 백자유약은 난백(卵白)으로 부드럽기 그지없다. 흰빛이 너무 차가워 색을 바꿔 보았다고 하지만, 고국에 대한 향수가 녹아든 것이리라.
오늘날에도 많은 도예가들이 조선백자를 전승하거나, 모티브로 삼아 달 항아리를 만들고 있다. 그 무슨 마력이 그 힘들고 경제성 없는 고단한 길을 가게 하는 것일까? 노자(老子)는 도덕경(道德經)에서 ‘진흙을 반죽해서 그릇을 만들지만, 그릇은 그 속이 비어 있음으로 해서 그릇으로의 쓰임이 있다’고 하였다.
김익영도 “용(用)이라는 공예의 사회성이 중요하다”고 언급한 바 있다. 쓰임으로 보면 달 항아리는 경제성이 취약하다. 적지 않은 돈(이,삼백만 원에서 수천만 원)을 주고 사다가 간장 된장을 담고, 술을 담아 사용하겠는가. 귀하게 모셔놓고 완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텅 빈 공간에 애틋한 마음을 가득 채우고 허리를 두 팔로 안아보면, 어느새 휘영청 밝은 달은 심신을 정화해 주거늘, 어찌 세속의 시선이 두려우리요.
>> 이재준(李載俊)
1950년 경기 화성 출생. 아호 송유재(松由齋). 미술품 수집가,
클래식 음반리뷰어
꾸밈없는 표현의 소박한 풍격(風格)으로 독자적인 작품세계를 이룩한 한국화가, 그림이 불타더라도 남은 한 획만으로 자신의 작품이었음을 알기 원하는 작가, 우현 송영방(牛玄 宋榮邦, 1936~ )의 전시가 6월 28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열린다.
展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포인트
근경(近景), 중경(中景), 원경(遠景)을 즐겨보기
전시장은 마치 오두막에서 창을 열어보듯 근경, 중경, 원경을 보도록 꾸며져 있다.
두 번째 설명을 읽은 후 뒤를 돌아보면 근경이 시작된다.
가끔은 지정된 동선을 살짝 벗어나 작품을 즐기는 것도 재미있지 않을까?
작가의 일상 살짝 엿보기
수묵화만이 우현 선생의 작품세계가 아니었다. 드로잉 등 작은 소품들을 모아 우현 선생의 일상생활과 주변인을 살짝 엿볼 수 있다.
국립현대미술관(관장 직무대행 김정배)은
한국미술의 역사와 자취를 함께 느끼는 문화공간으로 자연 속 휴식을 제공하는 과천관(1986년), 국내외 근대미술을 조망하는 덕수궁관(1998년), 동시대의 미술을 소개하는 도심 속 서울관(2013년)이 있으며, 2017년에는 수장기능을 한층 강화한 청주관을 개관 할 예정이다. 마지막 수요일(6월24일)은 ‘문화가 있는 날’ 행사로 오후 9시까지 관람 가능하다.
국립현대미술관은 한국현대미술사 연구발전의 토대를 마련하고자 기획한 '한국현대미술작가시리즈'의 개막전으로 7월 6일까지 '구름과 산 - 조평휘'展을 과천관에서 개최한다. 이 전시는 한국현대 산수화가의 원로작가 운산 조평휘(1932~)의 60년 작품세계를 조망하는 대규모 회고전으로 드로잉을 포함한 100여 점의 작품을 선보인다.
조평휘는 한국 근대 한국화분야의 거장 청전 이상범과 운보 김기창의 제자로, 전통산수화를 계승·발전시킨 원로작가다. 1958년 제7회 국전에서 인물화로 입선하며 화단에 등단해 1960년대에 추상미술이 풍미하던 시대조류에 따라 추상작업에 주력했다. 그러나 1974년, 추상작업에 회의를 느끼고 전통산수화로 회귀하여 이후 줄곧 산수화에 몰두하여 1990년대에 마침내 장엄한 '운산산수'를 정립하였고, 83세인 현재까지 끊임없이 작품제작에 몰두하고 있다. 전통산수화의 맥을 이어 산수화분야의 계승과 발전이라는 역사적 사명을 감당해 낸 작가는 우리 화단의 큰 산과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이번 전시는 총 4부로 구성되며, 추상작업에 동참했던 1960년부터 1974년의 작품을 볼 수 있는 1부 '추상의 모색', 전통산수화로 방향 전환이후 1974년부터 1980년대 산수화를 선보이는 2부 '산수로의 회귀', 운산산수의 모태가 된 1975년부터 최근까지 드로잉을 모은 3부 '모태로서의 사생'으로 나눠진다. 마지막으로 1990년대 이후 그의 나이 60대에 완성한 운산산수의 대표작들을 볼 수 있는 4부 '운산산수의 정립'으로 구성돼 작가의 연대별 작품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 특히, 70대 이후에 절정기를 맞이한 작가의 대표작 '대둔산'이 주목된다.
△추상의 모색 = 1960년, 대학 졸업과 함께 작가는 국전을 떠나 이후 15년간 당시 한국화단에서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었던 추상작업에 동참하며 전통적인 지필묵을 이용해 현대적인 조형성을 모색했다. 작가가 그의 작품을 설명할 때 반드시 덧붙이는 '타블로에서의 문학성의 배제'는 추상미술의 강령으로, 이 시기부터 그에게 화두로 각인돼 이후 현재까지의 의식적인 영역에서 일관되게 흐르는 그의 예술관이 됐다.
△산수로의 회귀 = 1974년, 작가는 추상의 모색에서 전통산수화의 추구로 방향을 전환한다. 그에게 있어 현대적 흐름을 도외시하고 전통회화로 귀의하고자 한 결정은 힘든 것이었다. 그러나 서양적인 작업을 하면서 갈등을 느끼고 있었던 작가는 동양화가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전통에 대한 탐구에 깊이를 더하는 것에서 의의를 찾고자 '전통으로의 회귀'라고 하는 시간의 역행을 단행한다.
△모태로서의 사생 = 이번 전시에는 1975년도 드로잉부터 최근의 작품까지 총 40여 권의 도록과 파일이 전시된다. 산 뿐 아니라 인물, 나무, 꽃 등을 모두 포함하는 작가의 드로잉은 사생단계부터 조형성에 대해 고민한 흔적들이 그대로 묻어나는 수작들이다.
△운산산수의 정립 = 작가는 1990년대 나이 60대에 '운산산수'라고 부를 수 있는 독특한 산수화 양식을 정립한다. 대관 산수에서는 장엄함을 엿볼 수 있으며, 작은 크기의 작품에서는 젊은 시절 추상작업을 통해 습득했던 자유롭고 호방한 필묵의 유희가 돋보인다. 그는 시대에 구애받지 않고 이 시기에 추상작업의 경험과 전통의 모색, 그리고 사생을 통해 '운산산수'를 완성시켰다. 이것은 근대 6대가 이후 우리나라 산수화의 맥을 잇는 미술사적인 성과로 평가될 수 있다. 이 전시를 통해 전통과 현대를 모두 아우르고 있는 장엄하고 역동적인 작가의 산수화와 공명하는 경험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대전일보 최신웅 기자
올해부터 매월 마지막 수요일에 국민 누구나 영화ㆍ공연ㆍ스포츠 및 전시 문화재 등을 무료 또는 할인된 가격으로 즐길 수 있게 된다.
문화체육관광부와 문화융성위원회는 올해 매월 마지막 수요일을 ‘문화가 있는 날’로 정하고 연휴가 시작되는 오는 29일 ‘문화가 있는 날’이 첫번째로 시행한다고 21일 밝혔다.
'문화가 있는 날'은 국민 누구나 문화시설을 쉽게 이용할 수 있도록 관람료 무료ㆍ할인 혜택을 제공하고, 야간개방 및 문화프로그램 등을 확대해 시행하는 날이다. 이 날은 유료로 운영중인 국·공·사립 전시 관람시설은 물론 영화, 프로스포츠, 관람료 부담이 큰 공연프로그램도 큰 폭으로 할인된다. 아울러 국공립 박물관·미술관· 도서관은 야간개방도 실시해 온 가족이 좀 더 쉽고 여유롭게 문화시설을 이용할 수 있는 기회가 확대될 전망이다.
이 정책은 공공기관 뿐 아니라 민간 분야도 적극 동참한다. 먼저 CJ E&M은 ‘문화가 있는 날’에 뮤지컬 등 주요 공연을 할인하고 다양한 문화 나눔 활동을 이어 나갈 전망이다. 신세계그룹도 준비기간을 거쳐 오는 3월부터 전국 자사 백화점 문화홀에서 문화가 있는 날 특별공연을 무료로 개최한다.
나종민 문화체육관광부 예술국장은 이날 브리핑을 열고 "자율적 참여 분위기 속에서 ‘문화가 있는 날’이 보다 다양한 문화 분야와 민간시설로 확산되고 국민 모두가 문화를 쉽고 친숙하게 접할 수 있도록 할 것"이라며 "자연스럽게 문화예술 관람 수요가 늘고 문화 수요와 공급이 선순환 발전하는 건강한 예술생태계가 형성될 것"이라고 말했다.
먼저 영화 관람료가 대폭 할인된다. CJ CGV, 롯데시네마, 메가박스 직영관, 서울극장, 대한극장, 전주시네마 등 전국 주요 영화상영관에서 저녁 시간대(6~8시)에 상영을 시작하는 영화 1회분에 한해 관람료를 8000원에서 5000원으로 영화를 관람할 수 있다.
아울러 국립공연시설에서 공연 관람료를 무료관람 또는 할인을 진행한다. 국내 프로 스포츠인 농구와 배구 경기장에 자녀(초등학생 이하)와 부모가 동반 입장할 경우 입장료를 반값 할인한다. 오는 29일 경기가 열리는 남자농구(부산, 고양), 여자농구(청주), 남자배구(천안), 여자배구(화성) 등이 첫 대상이다. 올 3~4월에 개막하는 프로축구, 프로야구는 현재 협의 중에 있다.
전국 국·공·사립 박물관, 미술관, 과학관 등 전시관람 문화시설을 무료 또는 할인해 관람이 가능해 진다. 유료로 운영 중인 주요 국·공립 전시문화시설을 대부분 모두 무료로 관람 가능하며, 사립시설의 경우 미술관은 한국사립미술관협회 소속 회원관이 거의 모두(전체 98개관 중 95개 참여) 참여하고, 박물관은 운영여건을 감안 1월 시행이 가능한 70개관이 우선 참여한다.
지난해 새로 개관한 △국립현대미술관-서울관 개관 특별전 무료 관람(관람료 7000원) △ 예술의 전당 미술관(한가람미술관?디자인미술관) 외부 기획전 야간 연장개장 및 야간 관람객 한정 관람료 50% 할인 △국립과학관(중앙, 과천, 서울, 대구) 무료 관람(과천 과학관은 50% 할인) △유료 시?도 박물관?미술관(대구, 광주, 경기, 전남, 경남, 제주 등) 무료 관람 △국립수목원 무료 입장 등이 가능하다.
유료 시설인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등 조선 4대 궁궐과 종묘, 조선왕릉(14개 관리소) 등도 무료로 입장 할 수 있다. 공립 문화재 시설로는 제주의 목관아와 삼양동 유적지를 무료 관람할 수 있다. 단 국립문화재 시설은 특별한 시기에 별도 야간개방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어 덕수궁(상시 야간 개방) 외에 문화가 있는 날에 야간개방을 실시하지 않는다.
한편 '문화가 있는 날' 정보는 ‘통합정보안내웹페이지’(www.culture.go.kr/wday) 또는 문체부 홈페이지(www.mcst.go.kr)을 확인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