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황혼기에 맞은 손님
감독 토마스 맥카시
주연 리차드 젠킨스, 히암 압바스
제작연도 2007년
상영시간 104분
20년째 코네티컷의 한 대학에서 경제학을 가르치고 있는 장년의 교수 월터 베일(리차드 젠킨스). 단조롭고 열의 없는 나날을 무기력하게 이어가던 월터는 논문 발표를 위해 뉴욕 출장을 갔다가, 오랫동안 비워두었던 자신의 아파트에서 불법 체류자인 타렉 칼릴(하즈 슬레이만)과 자이납(다나이 거라이라) 커플과 마주친다. 월터가 갈 곳 없는 젊은 커플에게 잠자리를 제공하자, 타렉은 감사의 뜻으로 월터에게 자신의 생계 수단인 젬베(Djembe 혹은 jembe; 아프리카에서 기원한 원추형 모양의 가죽 드럼) 연주를 가르쳐준다.
타렉과 함께 센트럴 파크에서 젬베를 연주하면서 이따금 미소를 짓게 된 월터는 타렉이 불법 이민자 단속에 걸려 수용소에 들어가자 타렉과 자이납, 그리고 소식 없는 아들을 찾아온 타렉의 어머니 모나 칼릴(히암 압바스 Hiam Abbass)의 운명과 얽히게 된다.
모든 좋은 영화가 그러하듯 의 초반부는 주인공 월터의 무뚝뚝한 캐릭터와 잿빛 삶을 이렇다 할 대사 없이 간결하게 전한다. 무거운 짐을 들고 밤거리를 걷는 월터의 처진 어깨, 귀가하여 홀로 와인을 마시는 월터의 쓸쓸한 표정. 얽은 얼굴에 안경을 걸친 반대머리 월터는 먼저 말을 걸어보고 싶을 만큼 호감 가는 인물이 아니다. 개인 사정으로 리포트가 늦었다고 사정하는 학생을 냉정하게 내쫓는 그의 유일한 관심은 피아니스트였던, 그러나 세상을 떠난 지 오래된 아내와 함께 듣던 클래식 음악 감상뿐. 아내의 피아노로 교습을 받아보기도 하지만 선생들 잔소리가 듣기 싫어 번번이 내쫓고, 마침내 네 번째 선생 바바라(마리안 셀데스)로부터 “당신은 재능을 타고 나지 못한 사람이다. 그 좋은 피아노를 팔려거든 내게 팔아라”는 말을 듣기에 이른다.
월터가 학회에서 발표한 논문마저 공동저자가 아닌, 단지 이름을 빌려준 것뿐이고 새 책을 거의 다 써가고 있다고 했지만 아직 손도 대지 못했고, 한 과목뿐인 강의도 성의 없이 되풀이하고 있을 뿐이다. 월터의 지루하고 무기력한 삶이 전제로 묘사되었기에, 자신의 집을 점거한 불법 체류 외국인 커플을 다시 불러들여 잠자리를 제공하는 설정은 설득력을 갖는다. 또 타렉과 자이납이 채 챙겨가지 못한, 그들의 다정한 한때를 담은 사진, 그리고 월터가 창밖으로 내려다본 밤거리에서 초조하게 잠자리 구걸 전화를 거는 커플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관객의 공감을 얻어내는 세심한 연출력을 발휘했다.
월터가 젬베 연주에 금방 빠져드는 장면 또한 월터가 클래식 음악을 즐겨 듣던 음악 애호가라는 초반의 설정 덕분에 쉽게 이해가 된다. 월터를 경계하는 진중한 자이납과 달리 낙천적이고 영리한 타렉은 월터에게 차근차근 연주의 기쁨을 가르치며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똑똑한 사람이지만 젬베 연주 때는 생각하지 말고 두드려야 한다. 4박자 클래식에 익숙하겠지만 아프리카 리듬은 3박자다.”
시리아에서 왔다는 타렉이 아프리카 타악기인 젬베를 연주하는 것은 “내가 원하는 건 자이납과 젬베뿐이다”라고 설명하는 대사에서 짐작되듯 타렉은 세네갈 출신인 자이납을 깊이 사랑한다. 이처럼 음악이 중동인 타렉과 아프리카인 자이납을 연결시켜주었듯, 백인 월터와 중동인 모나의 내적 교류에도 큰 몫을 한다.
학사 일정 때문에 코네티컷으로 돌아간 월터가 바바라에게 피아노를 주는 장면은 과거의 아내 혹은 그녀의 음악과 이제 거리를 두기로 했다는 결심으로 읽힌다. 반면 그가 뉴욕 집으로 돌아왔을 때 모나가 청소를 하며 월터 아내가 연주한 클래식 CD를 듣고 있는 장면은, 음악이 이들을 연결시켜주고 있다는 은유로 읽힌다. 월터는 CD를 하도 많이 들어 거의 외우다시피 했다는 모나를 위해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브로드웨이의 마제스틱 극장에서 장기공연 중인 을 예매한다. 타렉이 수용소에 갇혀 있는 절박한 시점에 만난 낯선 장년 남녀가 뮤지컬 감상을 통해 웃음의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다.
학교 수업에 관해 이야기하기를 꺼리는 월터는 “책을 안 써본 사람과는 말이 쉽지 않다”며 모나의 관심을 일언지하에 끊어버리지만, 결국엔 자신이 “바쁜 척, 책을 쓰는 척했지만 일에서 손 놓은 지 오래다. 남의 논문만 읽고 똑같은 과목을 20년 강의했을 뿐이다”라고 고백한다. 모나는 진심을 말해줘 고맙다며 “교수가 아니면 뭐가 되고 싶었냐?”고 묻는다. 모르겠다는 월터에게 모나는 ”그래서 더 신나지 않나요?“라며 웃는다. 낙천적인 타렉의 어머니답게 모나 또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강인한 여성임을 드러내주는 대사다.
런던에 사는 아들이 있다는 대사만 있을 뿐, 월터 아들의 존재는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아들과 살갑게 지내지 않는 듯해 보이는 그가 타렉에 대한 관심과 보살핌은 아들에 대한 속죄의 마음일 수 있고 이는 아들을 위해 자신의 행복을 기꺼이 포기하는 모나의 깊은 모성과도 연결된다.
는 아무런 사건도 인연도 없이 생의 끝점에 이를 것 같던 월터의 삶에서, 음악을 매개로 한 이국인들과의 만남이 얼마나 큰 마음의 변화를 일으키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9·11 사건 후의 미국 정부(는 2007년 작품이다) 태도가 다인종 국가인 미국의 정체성을 얼마나 훼손하고 있는지를 간접, 직설적으로 지적하기도 한다.
타렉이 지하철에서 경찰의 불심 검문을 받고 끌려갈 때 월터가 경찰에게 진정하라며 신음하듯 내뱉던 외침, 퀸즈의 불법 체류자 수용소 외관을 창고처럼 보이게 의도했다는 월터와 모나의 대화, 모르겠다고만 하는 수용소 직원들에 대해 “시리아와 똑같다”(저널리스트였던 모나의 남편은 반정부 글 때문에 7년을 징역살이하다 죽었고, 그 때문에 모나는 아들 타렉을 데리고 미국으로 왔으며, 본국 귀환 명령서를 받고도 이를 무시한 채 타렉을 키웠다고, 시리아로 떠나기 전 날 밤 월터의 품에 안겨 고백한다)고 하는 모나의 탄식, 타렉이 강제 송환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월터가 외치는 절규 등이 그러하다.
거리, 관공서, 공항에서 인물 뒤로 보이는 거대한 성조기. 수용소 벽에 쓰여 있던 구호 ‘미국의 힘은 이민자들로부터’도 그렇고, 자유의 여신상 그림도 마찬가지다. 모나는 “까매도 너무 까맣다”며 놀랐던 아들의 연인 자이납을 만나 아들이 좋아했던 장소로 데려가 달라고 한다. 자이납, 모나, 월터가 자유의 여신상을 바라볼 수 있는 페리를 타게 된 연유다. 그때 모나는 월터에게 묻는다. 자유의 여신상에 올라가본 적 있냐고. 월터는 한 번도 꼭대기에 올라가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미국을 대표하는 주인공 월터는 이민자들이 미국의 상징으로 여기는 것들, 즉 자유의 여신상이나 브로드웨이 뮤지컬에 전혀 관심 갖지 않고 살아온 것이다. 그랬던 월터가 세 사람과 만나면서 국가를 대신해 사과까지 하게 된다. “저들이 나를 테러범 취급한다”며 불안해하는 타렉에게도, 추방된 타렉을 따라 시리아로 돌아가기로 한 모나에게도 미안하다고 중얼거리는 월터(하필 그의 세미나 발표 주제는 ‘개발도상국 경제’란다). 국가를 대신한 월터의 사과는 통상적인 할리우드 영화처럼 해피엔딩에 이르지 못한다.
수용소로 면회 갔을 때 유리벽을 마주하고 탁자와 가슴을 두드리며 협연을 할 만큼 음악을 사랑하고 마음이 통했던 월터와 타렉. 타렉이 “손님이 많은 저기서 연주하고 싶다”던 지하철 바로 그 공간에서 월터는 홀로 젬베를 연주한다. 이 마지막 장면은 여운과 기대에도 불구하고 현실을 인정케 한다. “월터가 우리를 경찰에 고발할 거야”라며 두려워했던 자이납의 경계심은 우려로 그쳤지만, 그 불안의 정체는 월터 개인이 아닌 미국이라는 국가였음을 알게 해준다.
엄혹한 현실을 인정하며 절제된 감정으로 긴 여운을 남기는 는 뉴욕대학의 케보키안 센터, 킴벨 센터, 헌드레드 에이커스 레스토랑, 그리고 타렉이 연주하는 이스트 빌리지의 뱀부 하우스와 줄스 비스트로, 자이납이 직접 만든 액세서리를 파는 소호의 길거리 시장 등을 뉴욕의 명소가 아닌, 시민권자도 불법 체류자도 함께 살아가는 공간으로 묘사한다.
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안정적인 카메라(올리버 보켈버그), 음악, 그리고 연기다. 클라식과 젬베 연주가 화답하는 영화답게 베토벤의 ‘Sonata No. 21 in C Major’가 흐르는가 하면, 타렉으로 분한 하즈 슬레이만이 직접 협연에 참여한 ‘Darius Blues’와 ‘In Memory of the Dead’와 같은 재즈풍 연주가 청각을 만족시킨다.
연기 앙상블이 빼어난 것은 감독 토마스 맥카시가 배우 출신이라는 것과 무관해 보이진 않는다. (2005), (2005), (2006) 등에 출연해온 조연 배우 토마스 맥카시는 2003년 직접 각본을 쓴 독립 영화 로 선댄스, 산세바스티안, 스톡홀름 등의 영화제에 초대되었다. 역시 직접 각본을 쓴 와 (2011)도 데뷔작과 마찬가지로, 소외된 중장년층의 소통을 담백하게 그려내 잔잔한 감동을 안겨줬다. 세 작품 모두 톱스타가 아닌, 그러나 연기력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배우들을 캐스팅하여 아카펠라 화음을 이끌어냈는데 그 솜씨를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전 세계 영화제에서 18개의 트로피와 17번의 후보 지명을 받은 는 로버트 젠킨스에게 2009년 아카데미영화제 남우주연상 후보와 2008년 모스크바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안겨주는 등 네 명의 주연 배우와 조연 배우들의 연기 앙상블이 각본과 연출보다 더 많은 주목을 받았다.
1953년생 리차드 젠킨스를 주연으로 캐스팅한 건 미국판 리메이크 실패작인 (2004) 촬영장에서, 젠킨스의 부드러운 음성과 눈빛을 확인한 후라고 한다. 리차드 젠킨스는 “나를 주연으로 하면 제작비 조달이 어려울 텐데”라고 우려했다고 한다. 토마스 멕카시 감독은 "의 아이디어는 베이루트를 여행했던 나의 경험에서 가져왔으며, 한 사람의 삶이 우연한 짧은 만남으로도 영향받을 수 있음을 그리고 싶었다"고 인터뷰한 바 있다.
21세에 미국으로 이민 온 레바논 출신의 하즈 슬레이만과 미국으로 이민 온 짐바브웨 출신 부모에게서 태어난 다나이 거라이라 모두 로 연기력을 인정받았지만 아직은 TV가 주 무대다.
이 두 젊은이보다 더 오래 시선을 사로잡는 기품 넘치는 여배우들이 있으니 히암 압바스와 마리안 셀데스다. 1960년, 이스라엘 나사렛 출신인 히암 압바스는 에란 리클리스의 (2004)와 (2008), 아모스 기타이의 (2005) 등에 출연해온 이스라엘 대표 여배우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2005) 등에도 출연하며 반경을 넓히는 한편, 연기 지도까지 병행하고 있는 재원이다. 단 두 장면 출연으로 위엄을 보인 마리안 셀데스는 1928년생. 토니상 수상에 빛나는 ‘브로드웨이의 디바’로 무대와 브라운관, 스크린을 넘나들며 멋있게 늙어가고 있다. 히암 압바스가 더 나이 들면 마리안 셀데스처럼 따뜻한 위엄이 더해지지 않을까 싶다.
“아시시에 살고 싶어요. 거긴 천국 같아요. 아시시나 토디 근처에 새집을 장만할까 합니다.” 영국의 글램 록 가수의 대명사인 데이비드 보위가 한 말이다. 그는 1990년대 중반, 한 이탈리아 신문을 통해 “자신이 지상에서 본 천국은 아시시”라고 말했다. 아무런 선입견 없이 이 도시를 찾았을 때의 첫 느낌은 분명코 데이비드 보위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탈리아의 ‘푸른 심장’ 아시시
아시시(Assisi) 여행은 혼자가 아니다. 시에나(Sienna) 숙소에서 만난 남미계 미국인 신디아(38세)와 동행한다. 그녀는 3개월간 혼자 여행 중이다. 시에나에서 아시시까지는 매우 복잡한 여정을 거쳐야 한다. 버스, 기차를 여러 번 바꿔 타면서 조용하고 한적한 시골 느낌을 주는 아시시 간이역(1866년 개통)에 내린다. 메인 타운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타원형의 고풍스러운 타운. 스바지오 산 언덕 위에 오롯이 모여 있는 아시시를 보고 서로 감탄을 금치 못한다. “리, 너무 아름답다. 시에나보다 나은걸.” 표정이 풍부한 신디아는 아시시의 첫 느낌을 한껏 표출하고 있다. 가파른 언덕길로 버스가 올라서자 많은 사람들이 우르르 내린다. 정류장에서 성문을 따라 걸어 들어간다. 숙소가 서로 다른 신디아와는 클라라 성당 앞에서 다시 만나기로 하고 헤어진다.
아시시는 이탈리아 중부, 움브리아(Umbria) 주 북부의 아펜니노(Appennino, 켈트어로 ‘산봉우리’라는 뜻) 산맥의 남서쪽 기슭 위에 있다. BC 1000년경, 움브리아인들이 처음 정착했고 이후 에트루리아인들의 손에 넘어갔다. BC 295년, 로마인들이 아시시움(Asisium)을 건설하면서 현재의 도시명 ‘아시시’가 됐다. 2000년에 유네스코에 등재된 이 도시는 이탈리아의 ‘푸른 심장’이라는 애칭을 갖고 있다. 오래된 가옥, 울퉁불퉁한 골목길마다 긴 세월의 흔적이 녹아들었다.
성 프란치스코 출생지, 코무네 광장
클라라 성당 앞에서 다시 만난 신디아와 함께 도심을 걷는다. 클라라 성당을 비껴 키에사 누오바 교회가 있는 골목으로 들어간다. 1615년, 후기 르네상스 양식의 이 교회는 성 프란치스코의 생가 위에 세워졌다. 교회가 생기기 두 해 전(1613년), 프란치스코의 생가는 부서질 위기에 처했다. 이걸 본 스페인인 ‘비카’는 자국의 펠리페 3세(1578~1621) 왕에게 자금을 지원받아 교회를 지었다.
성당 앞쪽에는 성인의 부모님 동상이 있고 성당 안쪽에는 성인이 갇히게 된 감옥이 있다. 성인은 이곳에 갇혀 신의 부름에 답하고 고행의 길을 가기로 작정했다고 전해온다. 길을 따라 남쪽으로 더 내려오면 아시시에서 가장 오래된 코무네 광장이다. 로마의 흔적들이 남은 곳으로 사자상 분수대가 눈길을 끈다. 미네르바 신전 위에는 산타마리아 성당이 있고 그 옆에 포로 로마노 박물관이 있다. 포로 로마노 박물관에서는 부서진 로마의 유적과 함께 폼페이에서 본 똑같은 스타일의 벽화를 봤다. 1997년에 발견된 고대 로마의 빌라 유적지에서 발굴된 것이리라.
‘빈자의 성인’ 성 프란치스코의 도시
남쪽 끝에는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이 있다. 수도복 입은 수도사들이 삼삼오오 짝을 이뤄 거리를 누빈다. 수도사들은 스스럼없이 다가와 함께 사진을 찍어준다. 유럽 전역에서 ‘아시시’ 하면 ‘성 프란치스코(St Francis, 1182~1226)를 떠올린다. 수많은 순례자들은 ‘가난과 결혼한 수도자’, ‘예수 그리스도와 가장 닮은 그리스도인’으로 불리는 그의 헌신적인 삶을 기린다. 부유한 직물 장사의 아들로 태어난 프란치스코는 군대에 입대했다가 포로로 잡혀 감옥에서 살기도 했다. 두 번째 군 입대 후 ‘환시’를 체험하고 아시시로 돌아와 스스로 ‘빈자의 성자’ 삶을 선택한다. 이때부터 최소한의 먹거리를 직접 구하며 청빈한 초막생활, 영성적 삶을 시작한다. 무수한 일을 해냈고 여러 번의 기적을 보여줬다. 그러다 건강이 급속히 안 좋아져 눈이 반쯤 멀고 심한 병까지 얻어 포르치운콜라(Porziuncola)의 작은 오두막에서 84세로 선종했다.
프란치스코의 유해는 우여곡절 끝에 대성당 지하에 안장되었다. 대성당에서는 프레스코화, 스테인드글라스 등이 눈길을 끌었고, 1230년부터 수사들이 기거해온 대성당 수도원이 특별하다. 프란치스코 대성당 앞 정원 쪽으로 올라오면 ‘패잔병 프란치스코’의 동상이 있다. 페루지아 전쟁터에 나갔던 23세의 청년 프란치스코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아시시로 귀환하던 날을 표현해낸 동상이다. 말 위에서 방향 감각을 잃은 듯 고개를 떨군 모습은 해질 무렵이라서 그런지 더 처량하게 느껴진다.
프란치스코의 여제자 성 클라라
패잔병 프란치스코의 동상 앞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해걸음을 벗 삼아 신디아와 저녁을 먹는다. 무척 배가 고팠다는 것을 표정으로 보여주는 신디아. 그녀가 “수도자의 삶을 어떻게 생각해?”라고 묻길래, 난 일언지하에 “싫어. 평생 싱글로 사는 것은 좋지 않아”라고 말했더니, 한국어로 숫총각은 뭐라 말하느냐고 묻는다. ‘동정남’이라고 말해줬더니 그 말을 그대로 따라하며 흉내를 낸다. “그러면 너넨 뭐라고 말하니?”라고 물었더니 남녀 상관없이 ‘버진(virgin)’이란다. 그녀는 아시시에서 단 하루밖에 머물지 못하고 이른 아침, 로마로 가서 포르투갈로 가야 한다. 그녀를 위해 시간을 더 할애해준다.
길을 거슬러 처음 만났던 산타 키아라 성당(1257~1265년에 건축) 앞에 선다. 멋진 건축물이다. 이 성당엔 성 프란치스코의 여제자 클라라(Clara, 1193~1253)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 떠나기 전에 아시시에서 가장 높은 로카 마조레는 꼭 가보고 싶다는 신디아의 뒤를 따른다. 가는 길목에 루피노 대성당이 있다. 이 성당과 종탑 앞 아치형 건물 사이에 클라라 생가가 있다.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클라라는 이 성당에서 세례를 받았고, 이곳에서 성 프란치스코의 설교를 듣고 제자가 됐다.
클라라는 프란치스코와는 달리 밀폐된 공간에서만 기도하며 살았다 그녀가 살았던 산 다미아노 수도원은 처음부터 엄격한 봉쇄의 장소였다. 그녀는 매일 허리를 끈으로 묶는 허름한 수도복을 입었고, 사시사철 맨발로 다녔으며, 삭발한 머리에는 흰 두건과 검은 수건을 쓰고 다녔다. 잠자리는 맨바닥 위의 요였고, 베개는 나무토막이었으며, 공동 침실은 춥고 적막했다. 식사는 대개 하루에 한 끼만 먹었고 주일과 성탄절에만 두 끼를 먹었다. 고기와 포도주는 언제나 금했고, 주로 빵과 채소를 먹었다. 계란이나 우유가 생기면 병자들에게 주었다. 그녀는 가난을 ‘그리스도인의 특전’이라고까지 불렀다. 클라라는 프란치스코가 죽은 지 30년 만(60세)에 죽음을 맞았다. 클라라의 삶을 되새기면서 ‘조선의 테레사’로 불리는 서서평(1880~1934) 미국 출신 여성 선교사가 떠올라 자꾸 눈가에 이슬이 맺힌다.
아시시 ‘뷰포인트’ 로카 마조레 요새
로카 마조레(Rocca Maggiore)는 아시시의 북동쪽, 가장 높은 언덕 위에 있어서 골목과 계단을 따라 지그재그로 올라야 한다. 신디아는 “운동을 해서 살을 빼야 해” 하면서 몇 번이나 숨을 고르면서도, 가로등 불빛에 더욱 아름답게 보이는 발코니에 걸린 꽃 화분을 보며 감탄을 연발한다. 성곽 일부에만 서치 조명이 아름다운 요새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신디아와 아쉬운 작별을 고한다.
다음 날, 일찍 요새에 올라 박물관이 오픈하기를 기다리면서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본다. 아시시 마을과 움브리아 전원풍경은 한 폭의 그림처럼 평화롭고 아름답다. 넓은 평원에 감탄하고 아름다운 아시시의 전경에 넋을 놓는다. 더 작은 요새인 미노레 성채의 남은 흔적도 찾아낸다. 성곽 안에는 유명 인물의 연보와 중세의 물건들, 음악회, 연극이 열렸던 사진들이 걸려 있다.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아시시를 떠나 역에 도착해 짐을 맡기고 산타 마리아 델리 안젤리 성당을 찾아가 포르치운콜라 예배당을 본다. 종교와는 전혀 무관한 한 여행객일 뿐인데도, 이 도시는 발길을 부여잡는다. “아직 넌 볼 것도 할 것도 많아”라는 ‘환청’이 들리는 듯하다.
Travel Data
현지 교통 정보 로마에서 열차와 버스를 이용하면 된다. 테르미니 역에서 하루 네 번(토요일 3회) 직행 열차가 운행된다. 약 2시간이 소요되며 환승을 하면 2시간 40분 정도 걸린다. 또 로마 티부르티나 역 광장에도 버스(7시, 10시 30분)가 있다. 일요일과 공휴일은 1회(8시 15분) 운행된다.
아시시 박물관 카드 로카 마조레 외에 두 군데의 박물관을 더 볼 수 있는 ‘아시시 티켓’이 있다.
맛집 정보
타운에는 수많은 레스토랑이 있고 매일매일 색다른 코스 요리를 선보이는 레스토랑이 많다. 빵 위에 다양한 재료를 얹어 먹는 애피타이저 브루스케타가 깔끔하다. 호텔 추천 레스토랑은 할인이 가능하다. 길거리 음식인 파니니 등도 맛있다.
숙박 정보 아시시에는 호텔, B&B, 게스트하우스가 부지기수로 많다. 개개인의 상황에 맞게 선택하면 된다. 또 가톨릭 신도가 아니더라도 델 질리오 수녀원을 이용할 수 있다.
어탭터 정보 다른 지역과 달리 3핀 어탭터가 꼭 필요하다. 미리 준비 못했다면 타운 숍에서 구입 가능하다.
시니어 한 달 여행 포인트 아시시 시내만 보게 된다면 딱히 할 일이 없을 것 같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천천히 순례지(Eremo della Carceri, San Damiano) 등을 찾아 트레킹을 즐기면 된다. 또 아시시 주변의 페루지아(Perugia), 아멜리아(Amelia), 나미(Nami), 토디(Todi), 오르비에토(Orvieto), 구알도타디노(Gualdo Tadino), 구비오(Gubbio), 치타디카스텔로(Citta di Castello)와 시에나를 거쳐 토스카나까지 여행을 즐기면 된다. 이탈리아는 한 달 여행으로는 턱없이 부족한 나라다.
글박원식 소설가 사진 오병돈 프리랜서(Studio Pic) obdlife@gmail.com
귀촌을 하자고, 시골의 자연 속에서 노후의 안락을 삼삼하게 구가하자고, 흔히 남편 쪽에서 그런 제안을 먼저 내놓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는 발칙한 발상이라 규탄당하기 십상이다. 아내에 의해서 말이다. 무릇 여자란 명민하게 머리를 쓰는 버릇이 있는 종족이다. 감관이 발달한 이 고등한 생물체는 도시의 아파트라는 쾌적한 온실과 결별하고 시골이라는 야생으로 이주하는 ‘거사’에 따라붙을 온갖 불편과 고생을 미리 훤히 내다본다. 일테면, 시골엔 손쉽게 쇼핑을 즐길 마트나 백화점이 없으며, 우아한 사교를 즐길 문화공간도 열악하고, 자칫 고독을 벗 삼아야 할 신세로 전락할 우려가 있으며, 그 무엇보다 풀이나 해충에게 시달릴 일이 정말이지 몸서리치게 싫다고 판단한다. 그래서 대뜸 반기를 들 공산이 크다.
그럴 경우, 귀촌을 선창한 남편은 머리칼을 득득 쥐어뜯으며 부르짖는다. “아아, 괴롭고 괴롭도다. 마누라는 어쩌면 그토록 나와 취향과 이상이 다르단 말인가? 이는 무슨 잔인한 운명의 농간이란 말이냐!” 소나기처럼 쏟아지려는 눈물을 간신히 참으며, 비감에 젖어 속으로 악을 쓰는 것이다. 이쯤에서 어떤 남편들은 자신의 불운을 타박하며 귀촌의 꿈을 허공으로 날려 보낸다. 귀촌생활에의 도도한 로망과 세찬 영감에 사로잡힌 어떤 남편들의 경우엔, 불굴의 의지를 발동해 아내를 기차게 구워삶을 정교한 방책을 새삼 모색한다. 당나귀처럼 드센 고집으로 한사코 도리질을 하는 아내를 설득할 만한, 자못 그럴싸한 유인책을 진지하게 숙고하는 단계에 들어간다. 이 단계에서 충분히 합리적이고 매력적인 청사진을 개발할 경우, 그는 비로소 성공을 거둔다.
나는 지금 경북 예천 풍양면의 시골마을에 있는, 정진성(69)씨 내외가 사는 집 거실에 앉아 있다. 정씨의 귀촌은 순탄한 과정을 밟았다. 상당수의 귀촌 부부들이 난해하고도 예리한 충돌과 협상을 거쳐 어렵사리 귀촌에 이르지만, 그는 아내의 갈채와 자비에 힘입어 쾌조의 시발을 했다는 게 아닌가.
부부가 의기투합한 귀촌
서울에서 살았던 정씨는 침상에서 벌떡 일어난 어느 날 아침, 평소에 하지 않았던 이색적인 생각이 퍼뜩 머릿속에 떠오른 걸 알아차렸다. 서울을 냅다 걷어차고 시골로 내려가고 싶다는 충동이 초저녁별처럼 영롱하게 들솟았던 것이다. 인파와 차량이 들끓고, 소음과 미세먼지가 난무하고, 계산과 꿍꿍이가 창궐하는 대도시, 그 머리 아픈 정글을 탈출하고 싶다는 기분을 느꼈던 거다. 이 심상치 않은 기분은 점점 자라 확고한 신념으로 비약했다. 이후 그는 드디어 아내에게 귀촌을 제안했다. 아내 전용숙(64)씨의 반응은 뜻밖에도 매우 우호적이었다. 선선히 동의했으니까 말이다. 결과적으로 정진성씨는 귀촌을 둘러싼 아내와의 논쟁이나 힘겨루기를 일거에 면제받은 셈이다. 그렇게 단숨에 의기투합해서 부부가 시골에 내려온 게 지금으로부터 3년 전의 일. 아내 전용숙씨의 얘기를 들어볼까.
“보통은 여자들이 귀촌을 반대한다고 하지만, 저는 그러지 않았어요. 시골로 가자는 남편의 제안이 차라리 고마웠어요. 남편이나 저나 서울생활에 흥미를 잃어가던 시절이었으니까요. 서울을 떠나 조용한 시골에서 노후를 보내는 게 이상적이라는 생각을 했던 거예요. 게다가 제가 자연을, 그중에서도 꽃을 매우 좋아하는 취향이라서 반대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지요. 귀촌을 하면 실컷 꽃을 가꾸며 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가슴이 설어요.”
“꽃의 그 무엇을 매우 좋아하죠?”
“음. 꽃은 그 아름다운 모습이나 향기 자체로 감동을 주기도 하지만, 비바람 같은 심한 고통을 겪으며 피어난다는 게 참 좋아요. 크거나 작거나, 소박하거나 화려하거나, 모든 초목마다 제 나름의 역경을 이겨내고서야 꽃을 피우니까. 그런 점에서 저는 꽃을 통해 위로와 용기를 얻습니다.”
“남편께서 귀촌을 발상한 배경은 무엇이었을까요?”
“서울생활이 주는 피로감이 한계에 이르렀던 것 같아요. 남편은 토목 기술자로 평생 공사 현장에서 뛰었어요. 대림산업 부장으로 재직했던 1996년엔 석탑산업훈장을 받기도 했습니다. 유능한 엔지니어로 토목 현장을 누빈 사람이었죠. IMF 직후엔 심각한 시련을 겪기도 했지만, 자부심을 갖고 직분에 최선을 다했다고 봐요. 엔지니어에겐 정년이 없습니다. 일흔 살이 넘어서도 직장생활이 가능하죠. 그러나 60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심신에 공히 무리가 오기 시작했어요. 특히나 비즈니스상의 술자리가 잦아 더 이상 일을 계속하다간 몸부터 무너질 거라 판단했던 것 같아요. 그즈음 귀촌을 착상했는데, 다행히 남편의 고향에 시부모님께서 돌아가신 뒤로 10년째 비어 있는 집이 있어 결정과 실행이 빨랐어요. 그러고 보면 저희는 귀촌이자 귀향을 한 경우라 봐야겠죠.”
“예수조차 고향에선 배척당했다고 해요. 노년에 고향으로 돌아온 부부에게 쏠렸을 이웃들의 각별한 관심이 불편하진 않았나요?”
“텃세랄까, 그런 거 말이죠? 처음 그런 문제에 염려가 없지는 않았지만, 실제로는 아무런 불편이 없었어요. 워낙 인심 좋고, 반듯한 풍속이 정착된 시골이라서 오히려 과분한 환대를 받았습니다. 게다가 남편이 술을 좋아하는 사람답게 매우 사교적인 성격이라 융화가 쉬었던 것 같아요. 남편은 현재 우리 마을의 노인회장이에요.”
전용숙씨 내외가 사는 집의 풍색은 소탈하다. 시부모님들이 살았던 당시의 구색을 가급적 그대로 놓아두거나 살려냈다. 꼭 필요한 부분에만 약간의 손질과 약간의 단장을 했을 뿐이다. 인간이 마침내 한 줌 흙으로 돌아가듯이, 집이라는 사물 역시 결국은 자연으로 귀환하는 법이니 굳이 거창한 인위를 가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에서다. 햇볕이 물살처럼 찰랑이며 들이쳐 화단의 풀꽃들을 어루만지는 광경을 바라볼 수 있는 마당이 있으니 이미 만족스럽고, 대기의 입자를 흔들며 불어오는 솔바람, 강바람이 무시로 드나들 수 있는 유리창이 있기에 더욱 흡족하다는 게 전씨의 생각인 것 같다. 그녀가 시골살이 3년을 통해 배우거나 얻은 것 중에 최상의 것은 무욕(無慾)이 주는 마음의 평안이라지.
시골생활이 부여하는 절호의 기회들
집 뒤편으로는 제법 너른 텃밭이 딸려 있다. 12월의 텃밭은 철 지난 해변처럼 썰렁하지만 온기라 할 만한 기운이 여전히 감돈다. 서울에서 아파트 베란다에 꽃을 키워 자연과 땅에 대한 갈증을 간신히 채웠던 전씨에게 시골 텃밭은 숫제 낙원이다. 봄부터 가을까지 그녀는 갖가지 작물을 심어 기른다. 풀을 뽑아내는 일이 고역스럽다기보다는 미안스러워 내심에서 우러나는 애도를 보낸다. 텃밭이니 가혹할 정도의 노동은 필요치 않다. 시장에 내다 팔 물건이 아니기에 소출에 욕심을 낼 까닭도 없다. 그럼에도 비지땀을 흘려 공을 들이는 건 작물들이 갓 태어난 손주나 노랑 병아리와 다를 바 없는 애틋한 생명체라는 생각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녀는 텃밭 농사를 서정적으로 즐긴다. 도시의 여자들이 찜질방에서 즐기듯이, 찻집에 둘러앉아 애먼 남편들의 흉을 푸짐하게 늘어놓으며 수다를 즐기듯이, 그녀는 텃밭에서 유유하게 노닌다.
텃밭보다 더 오래, 더 오붓하게 즐길 수 있는 오락은 꽃밭에서 구현한다. 그녀는 해마다 30여 종의 화초를 가꾼다. 꽃철이면 울안에도 울밖에도 온통 꽃이다. 경북대 농대에서 원예학을 전공한 그녀에게 꽃은 만고에 친애할 만한 동무다. 유심한 눈길로 꽃을 바라봐 꽃과 바람이, 꽃잎과 햇살이 어떻게 속삭이는지를 재빨리 간파한다. 폭풍에 찢긴 꽃대의 고통을 마치 자신의 고통처럼 느낀다. 만개한 꽃들의 환희를 자신의 것으로 삼아 마음에 기쁨을 담뿍 담는다. 그렇기에 시골의 나날은 태반이 꽃날이렷다. 이런 자각을 할 때면, 그녀는 서둘러 일찌감치 귀촌을 하지 않은 것을 살짝 아쉬워한다.
“서울에 살 때 실내원예연구회라는 단체에서 활동했어요. 실내조경협회 부회장을 맡기도 했고요. 문화센터 원예 강좌에 강사로 나가기도 했어요. 꽃을 즐기며 다양한 경험을 했던 거예요. 원예치료사 자격증도 있어 장애인들을 대상으로 한 원예치료 봉사활동도 했습니다. 일상 안에 꽃 사랑이 들어와 있을 경우, 한결 안정되고 조화로운 생활이 가능한 것 같아요.”
“꽃을 너무 편애하는 건 아네요? 사람도 꽃 아닌가(웃음)?”
“맞아요. 사람과 꽃이 다를 게 없다는 걸 시골에 살며 더 실감해요. 일부 도시 사람들은 요즘의 시골 인심도 도시와 다를 게 없다고 보지만 그건 사실과 달라요. 적어도 우리 마을에선 그래요. 뭐든 나누고 돕는 풍속이 여전하거든요. 귀촌한 뒤 원주민들에게 배척당하는 사람들이 있다죠? 그건 시골의 바탕에 깔린 나눔의 정서에 부응하지 못한 탓이라 봐요. 무조건 나누고 베풀어야 해요. 그런 처신이 손해를 가져오는 게 아니라 결국은 이득을 얻는 현명함이라는 걸 아셔야 해요.”
“시골생활이란 이웃들과 나눌 줄 아는 실력을 기를 수 있는 기회라는 얘기로 들립니다.”
“절호의 기회라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요? 제가 저 자신에게 바라는 인간상은 이웃에게 쓸모가 있는 인간, 바로 그런 것이에요. 나만을 중심에 놓는 이기심에 매몰되지 않고, 남들의 어려움이나 외로움에까지 손을 뻗을 수 있는 사람으로 산다면, 그건 참 잘 사는 인생이지 않겠어요?”
남을 진심으로 배려할 수 있다는 건 그 사람의 마음이 이미 평온한 상태에 놓여 있음을 뜻할 게다. 그러나 마음이라는 망둥이는 자주 길길이 날뛰어 소란 속으로 들어간다. 이와 같은 마음의 동향을 주시해서 단속할 수 있는 기회를 시시때때로 부여받을 수 있는 게 귀촌생활이라는 게 전씨의 생각인 것 같다. 사실 시골생활을 무난하게 누리기 위해서는 생각과 마음의 스케일을 확대해야 한다. 마을 전체를 나의 집으로, 마을 사람 전부를 내 가족으로 바라보는 광폭의 마음, 그리고 소소한 풀꽃에까지 연민을 느낄 줄 아는 감성까지 가세한다면 귀촌의 나날들은 안전하게 흘러갈 수밖에 없다.
“시골에 살며 저는 많은 걸 얻었어요. 서울에 살 때엔 부부간에 대화가 거의 없었지만 여기 내려온 뒤부터는 많은 대화를 나누게 되었어요. 그렇다 해도 남편이라는 존재는 영원한 미스터리이지만, 남편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포기할 건 딱 포기해버릴 수 있는 능력을 키울 수 있었어요. 서울에서 지출했던 생활비의 절반쯤이면 너끈히 살아갈 수 있는 경제적 이점도 매력적이죠. 천성이 게으른 사람들에겐 오직 스트레스로 다가올 수 있을 갖가지 노동도 운동이나 춤처럼 즐길 줄 아는 힘이 생겼고요, 덕분에 건강도 좋아졌어요. 남모를 애환? 숨기고 싶은 고민? 그런 게 전혀 없을 수 있겠어요? 인간이란 사실 굉장히 불안하고 모순적인 존재잖아요? 마음에 소용돌이가 칠 때면 강변을 산책해 속을 비워냅니다. 우리 마을의 멋진 강변 풍경을 보여드리고 싶어요. 함께 걸어보실래요(웃음)?”
전씨 내외가 앞장서 강변으로 향한다. 첼로의 저음처럼 깊어가는 12월의 강변 오솔길. 강가에 늘어선, 잎 떨군 나무들엔 실존의 깊이가 있다. 군더더기를 다 털어버리고 본질만 남은 모습으로 비쳐서. 사람이 어떻게 저 겨울 나목의 허심(虛心)을 온전히 닮을 수 있을까마는, 가급적 비우고 또 비우라는 소식은 비처럼 쏟아진다. 전용숙씨가 누리는 소박한 시골생활의 즐거운 지향도 비우기에 있다는 것이고.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 , 등의 저서가 있다.
글 배국남 대중문화 평론가 knbae24@hanmail.net
2016 병신년(丙申年). 올 한 해 새로운 문화 트렌드와 콘텐츠가 등장했다. 디지털과 컴퓨터, 통신기술의 발달과 1인가구의 증가 등 사회적인 변화 등으로 인해 등장한 새로운 문화 트렌드와 콘텐츠는 2016년 대중생활에 적지 않은 변화를 주었다.
먼저 실감(實感) 콘텐츠의 강세가 뚜렷하게 나타났다. 드론, 360도 카메라 등 촬영기구와 HMD(Head Mount Display) 기기의 발전으로 인해 실제 눈앞에서 보는 것과 같은 현장감과 실재감을 제공하는 실감 콘텐츠(Reality-contents)가 주목을 받은 것이다. 그중 증강현실(Augmented Reality, AR)과 가상현실(Virtual Reality, VR)이 가장 대표적인 실감 콘텐츠로 꼽힌다. AR은 실재와 허구의 세계를 자연스럽게 혼합했고 VR은 100% 허구의 세계를 구축하는 차이가 있는데 눈앞에서 현실처럼 느껴지는 현장감과 몰입감을 높인 콘텐츠라는 점은 공통점이다.
올해 전 세계를 강타한 AR 모바일 게임 ‘포켓몬 고(Pokemon Go)’의 열풍은 실감 콘텐츠의 위상을 단적으로 보여줬다. AR, VR은 게임뿐 아니라 뉴스, 다큐멘터리, 스포츠 중계, 광고, 공연, 영화 등 미디어와 대중문화는 물론 교육, 의료 분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큰 변화를 초래하고 있다. 또한 VR과 AR은 황금알을 낳는 산업으로 인식되면서 IT 기업뿐만 아니라 전자업체, 영화사, 방송사 등 문화산업 업체들이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펼치고 있다.
2016년에 두드러진 또 하나의 문화 현상 중 하나는 바로 모바일이나 PC, SNS 등을 통해 짧은 시간에 간단하고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스낵컬처(Snack Culture)의 도약이다. 유·무선 인터넷의 이용시간이 급증하면서 웹툰, 웹소설, 웹드라마, 웹예능 등 스낵컬처를 이용하는 사람들도 크게 늘었다.
미래창조과학부가 2월에 발표한 ‘무선통신 서비스 통계 현황’에 따르면 이동전화 가입자는 5927만 명에 달하고 하루 평균 스마트폰 이용시간은 2.8시간으로 나타났다. 한국언론진흥재단 보고서 ‘2015 언론수용자 의식조사’에 따르면 하루 평균 미디어 이용시간은 TV가 153분으로 가장 길었고 다음이 스마트폰 등 이동형 인터넷 56분, 고정형 인터넷 47분, SNS 22분으로 조사됐다.
이처럼 스마트폰 등을 이용하는 시간이 급증하면서 웹툰, 웹드라마, 웹소설, 웹예능 등 스낵컬처가 큰 인기를 끌고 있다. 네이버 웹툰 일일 이용자만 620만 명에 달하는 것을 비롯해 웹툰 사이트 상위 5개사 누적 회원만 9590만 명에 이른다. 한국콘텐츠진흥원 자료에 따르면, 지난 2013년 1500억원에 달하던 웹툰 시장은 2015년 4200억원을 돌파했으며 2016년 올해 웹툰 시장 규모는 5845억원에 달할 것으로 전망된다.
웹소설 역시 2014년 200억원, 2015년 400억원대로 두 배가량 성장했고 2016년 웹소설 시장도 2000억원대로 크게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2013년 2월 선보인 로 모습을 드러낸 웹드라마는 2013년 17편, 2014년 23편, 2015년 67편으로 꾸준히 증가했다. 이 밖에 tvN의 를 비롯한 다양한 웹예능도 이용자의 인기가 높아짐에 따라 제작사들이 앞다퉈 웹예능 제작에 나서고 있다. 웹툰, 웹소설 등 스낵컬처는 가장 강력한 대중문화로 성장했을 뿐만 아니라 영화, 드라마, 게임의 원천이자 한류 상승의 기폭제 역할까지 하고 있다.
급증하는 1인가구도 2016년 문화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통계청이 최근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1인가구는 520만 가구로 전체 가구(1911만 가구) 중 27.2%를 차지하고 있다. 1인가구는 2인가구(26.1%), 3인가구(21.5%), 4인가구(18.8%), 5인 이상 가구(6.4%)를 제치고 가장 많은 가구 형태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1인가구의 증가는 문화와 생활에 큰 변화를 초래했다. 1인가구의 증가로 혼자서 밥을 먹거나 술을 마시는 ‘혼밥’, ‘혼술’ 문화가 일상적인 풍경으로 자리를 잡았을 뿐만 아니라 혼자 영화를 보고 여행을 하는 ‘혼영’, ‘혼행’ 문화도 대중화했다.
1인가구를 소재로 한 문화 콘텐츠도 크게 늘었다. , , , 등 급증하는 1인가구를 소재로 한 드라마와 예능 프로그램이 쏟아졌다.
방송, 영화, 음악 등 대중문화 분야에서도 새로운 트렌드가 등장했다. 최대 한류 시장으로 떠오른 중국 시장을 의식해 사전제작제로 만들어진 가 큰 성공을 거두면서 , , , 등 방송 전 제작을 완료한 드라마들이 등장해 사전제작제가 자리를 잡았다. 또한 지난해 강세였던 쿡방과 먹방, 오디션 프로그램의 열기가 떨어지는 대신 올해는 음악 프로그램에 게임, 경연 등 다양한 예능 장치가 가미된 , , , , 등 음악 예능이 큰 인기를 얻었다.
2016년 영화계는 세월호 대참사를 떠올리게 하는 과 , 독립운동과 친일 문제를 생각하게 하는 , 위안부 문제를 다룬 등 사회 문제와 연관된 영화들이 흥행에 성공했다. 또 (1156만 명)의 공유와 마동석, (970만 명)의 강동원과 황정민, (749만 명)의 송강호와 공유, (712만 명)의 하정우, (704만 명)의 이정재와 이범수, (687만 명)의 곽도원과 황정민, (652만 명)의 유해진 등 600만 관객을 넘긴 한국 영화 7편 모두가 남자 스타 주연작으로, 남자 스타 주도 흥행 현상이 더 심화됐다.
2016년 대중음악계에 떠오른 주요 트렌드로는 비주류에 머물던 힙합 음악의 부상 그리고 트와이스, 여자친구, 마마무로 대표되는 걸그룹 세대 교체, 젝스키스, S.E.S, NRG, 클릭비 등 원조 아이돌 그룹의 귀환을 꼽을 수 있다.
이 밖에 2016년 올 한 해 대중문화계를 강타한 사건으로는 정부의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결정에 따른 중국 내 한류의 위축, 박유천, 이진욱, 유상무, 엄태웅 등 남자 스타 연예인들의 잇따른 성폭행 혐의 피소, 송강호와 김혜수 등 수많은 대중문화인의 정부의 블랙리스트 포함 등이 있다. 2016년 대중의 곁을 영원히 떠난 스타는 구봉서, 김성민 등이다.
1인가구의 증가는 문화와 생활에 큰 변화를 초래했다. 1인가구의 증가로 혼자서 밥을 먹거나 술을 마시는 ‘혼밥’, ‘혼술’ 문화가 일상적인 풍경으로 자리를 잡았을 뿐만 아니라 혼자 영화를 보고 여행을 하는 ‘혼영’, ‘혼행’ 문화도 대중화했다.
중학교때, 작문시간엔 일주일에 꼭 책 한 권씩 읽고 원고지에 독후감을 써서 내는 숙제가 있었다. 숙제를 내면, 선생님이 빨간 펜으로 밑줄을 그어 가면서 평을 써 주었는데, 선생님이 평이 무척이나 궁금해서 숙제를 돌려 받는 날이 기다려지곤 했다. 문학을 사랑하는 작문선생님을 만나게 된 덕분에, 문학작품을 많이 읽게 되었는데, 그때 감명 깊게 읽은 작품 중의 하나가 심훈의 소설 ‘상록수’였다.
심훈은 1935년, 농촌계몽운동 소설 ‘상록수’를 썼다. 상록수는 일제강점기에 우리나라 농촌의 비참한 현실을 보여주고 농촌계몽운동에 헌신하는 지식인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중학생 이였던 필자의 눈에 여자주인공 채영신은 아주 멋진 사람이었고, 필자가 닮고 싶은 사람이었다.
그 시절에 영화도 보았는데,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 하나는 농촌실습을 마치고 실습 결과를 보고하는 ‘학생농촌계몽대귀환보고회장’에서 채영신은 당찬 목소리로 “농민들에게 희망의 정신을 심어주고, 우리 남녀가 모두 일어나 한몸 희생하여 농촌을 붙들어주지 않으면 이 민족은 영원히 일어나지 못 할 것입니다.”“여러분이 학교 졸업 후 의자에 앉아 월급만 받으려는 생각은 버리십시오. 여러분이 화려한 도시생활만 꿈꾸고, 허영의 탐리에 빠진다면 이 민족은 어찌 되겠습니까?”하고 외쳤다. 이 장면에서 필자는 가슴 속에서 울컥하는 것이 올라오고, 큰 감동을 받았다. 또, 하나는 일본 면서기의 지시에 따라 제한된 수의 학생 밖에는 가르칠 수가 없게 되었을 때, 예배당 안에 들어 올 수 없는 아이들을 바라보는 채영신의 가슴아파하던 장면과,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예배당 밖에 서있는 아이들을 위하여, 창문가에 칠판을 세우고, 글씨를 크게 써서 창 밖에서도 볼 수 있도록 해, 울먹이면서 큰소리로 읽어가며 글을 가르치는 장면은 지금 생각해도 필자의 가슴이 먹먹해지고 눈물이 절로 난다. 마지막은 남자주인공 박동혁이 채영신에게 ‘샘골 강습소’ 마당에 걸어둘 ‘종’을 선물하는 장면인데, 너무 가난하여 종을 살 돈이 없어서, 샘골 까지 발이 부르트도록 걸어서 오고, 차비를 아껴 그 돈으로 종을 사온 것이다.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는지를 알 수 있는 아름다운 장면이다.
이런 멋지고 아름다운 소설과 영화 속의 여주인공 채영신의 실제 모델이 바로 ‘애국계몽독립운동가 최용신’이다. 소설도, 영화도, 실제의 최용신을 잘 표현
최용신은 1928년, 서울 감리교 협성여신학교에 입학 했을 때, 여성독립운동가 황애덕을 만나게 된다. 황애덕의 가르침으로, 민족을 위하여, 기독교정신인 ‘한알의 밀알’이 되고자 농촌계몽운동의 꿈을 키웠다. 그러던 중, 기독교청년회(YMCA) 농촌사업부는 1931년 그를 수원 샘골로 파견했다. 최용신은 가난으로 글을 배울 기회조차 없었던 농촌의 아이들에게, 글을 모르는 아이들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글을 가르치며, 농촌계몽운동을 통한 독립운동에 전 생애를 바치기로 결심한다. 또, 산수, 재봉, 수예 등을 가르치고, 위생 등의 생활을 개선하기 위하여, 농촌 계몽에 헌신적이었다. 그는 샘골 마을 아이들을 ‘조선의 싹’이라고 부르고, 조선어가 국어임을 가르쳐, 조국에 대해 크게 눈뜨게 했으며, “나라를 되찾으려면 공부를 해서 힘을 길러야 한다.”고 아이들에게 독립의식을 심어주는 교육을 했다. 그러나, 최용신은 1909년에 태어나, 겨우 26년을 살고, 1935년에, 제대로 먹지도 못한 채 과로에 시달리다가 애석하게도,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의 훌륭한 삶과 정신을 후대에 길이길이 전해서 ‘애국계몽독립운동가 최용신’과 같은 사람들이 이 땅에 많이 나오기를 진심으로 소망한다.
이재준(아호 송유재)
꼭 42년 전 이맘때, 설악산 장군봉의 금강굴에서 홀로 7일을 지낸 일이 있었다. 군 제대 후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깊은 생각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매일 마등령을 오르내리며, 세찬 바람에 스쳐지나가는 운해(雲海)의 그림자 밑에 누워 마음을 비우려 안간힘을 다했다. 새벽마다 비선대까지 내려가 찬물에 얼굴을 담그고, 그 물빛만큼이나 맑디맑은 푸른 영혼을 꿈꾸기도 했다.
옛 선승(禪僧)들은 면벽(面壁) 십년으로 화두를 풀었다는데, 고작 이레 만에 어떤 경지에 이를 수는 없었으나 나름 마음 정리를 하기는 했다.
산을 바라보면 가까운 풍경에서 먼 정경까지 끊길 듯 이어지는 아스라한 능선들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다. 사계절 어느 때라도 아득히 바라보는 것만으로 마음이 안온해진다. 거친 심성이 순치(馴致)되고 아픔의 멍울이 서서히 풀린다. 산으로 들어가 한 발 두 발 걸어보면 걸음이 가뿐하고 머릿속이 맑아진다. 교만과 오만함을 내려놓게 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현자(賢者)들은 산 속에 머물며 인격을 도야(陶冶)해 왔다.
그래서 산 그림도 늘 인기가 좋다. 좁은 실내 그 어느 곳에다 산 그림을 걸어도 마치 숲 속에 들어와 있는 듯 마음이 열린다.
박고석(1917~2002) 화백은 산의 화가라 일컫는다. 우리나라 서양화의 1세대 작가로, 일본대학 예술학부 미술과에 입학한 1935년 무렵의 일본 화단은 이전의 아카데미즘에 반하는 새로운 양식이 물밀 듯 밀려와 구상파, 야수파, 입체파, 초현실파, 추상파등 신사조에 빠르게 젖어들었다.
박고석은 1940년 대학 동창으로 구성된 격조전(格調展)으로 화단에 데뷔했다. 1943년 동경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8·15해방과 6·25 등 역사의 격랑을 그림과 함께 건너왔다. 1960년대에는 짧은 시기 추상에 머물기도 했으나 회화 작업에 회의를 느끼고 한동안 화필을 놓기도 했다. 1967년 창립된 구상전(具象展)을 통해 화단 활동을 재개했다.
그는 이 무렵부터 산행을 하며 산 그림을 그렸다. 1974년 공간화랑의 개인전에서 산 그림 연작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이 화가의 산 그림은 여느 산 그림과 다른 특색이 있다. 화가 스스로 산으로 들어가서 깊은 산행을 하며 생생한 현장감이 살아 있는 그림을 그리기 때문이다. 가벼운 스케치나 유채의 짙은 작품 모두 산중에서 완성된다. 산행도 아마추어 수준을 넘어 전문 산악인에 준하는 장비로 암벽 등반까지 했으며, 수년간 설악산에 거주하며 실경(實景)의 산 그림을 그렸다. 설악산에서 남녘 홍도에 이르기까지 전국의 산들을 화폭에 담았다.
지리산 자락 ‘쌍계사 가는 길’의 벚꽃으로 짓이겨진 유화도 가히 이 작가만의 명작이라고 누구든 손꼽고 있다. 이 화가의 산 그림은 대부분 20호(72.7cmx60.6cm) 이하의 비교적 작은 화폭이지만 그림 앞에 서면 그 밀도 높은 구도와, 두터운 마티에르로 그려낸 산봉우리, 그리고 거대한 암반의 질감이 입체적, 구체적으로 다가선다.
1980년대를 지나면서 작가는 산에 밀착하던 치열한 화풍을 벗어나 물감의 칠이 서서히 엷어지면서 그윽이 바라보는 시선의 폭이 넓어진다. 직접 산을 오르지 못하더라도 산자락에 화구를 펴고 관조(觀照)의 마음을 담뿍 화폭에 담았다.
이 그림 ‘북한산’은 그 무렵의 작품이다. 그림 수집가들에게는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박고석의 그림은 경매나 화랑가에 유통되는 숫자가 아주 적어서 수집 기회도 적고 또 그림을 만나도 가격이 만만치 않아(10호 산 그림 3000만~4000만원) 망설여진다. 몇 년간 돈을 모아오다 이 그림을 사고 말았다.
이상국(1947~2014) 화가의 산 그림은 구상을 벗어난 반추상의 작품들이 주조를 이룬다. “1980년대까지 나는 그림을 집짓기처럼 구축해가는 과정으로 생각했지요. 그런데 최근 작품들, 특히 풍경화는 해체되는 방식으로 그리고 있어요. 철거된 산동네 그림도 그런 식이지요. 그런 해체 과정에서 가슴 아픈 느낌과 동시에 어떤 새로운 에너지, 기(氣)를 느끼게 되는 것 같아요.”
서울대 미대에서 동양화를 전공했으나 졸업 후 서양화로 화풍이 바뀌면서 “그림을 그리는 일은 무당이 칼 위에 선 것같이 긴장된 일이다.”라고 마음을 다잡던 화가였다. 2011년 3월 11일부터 4월 3일까지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렸던 그의 열두 번째 개인전이자 대학 졸업 40년간의 회고전은 이상국의 작품세계를 남김없이 펼쳐 보였다. 북한산, 인왕산, 홍제동의 달동네 등 서울 변두리 산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독특한 화풍의 그림을 남겼다. 7~8년의 암 투병 중에도 생의 마지막까지 화실을 지키며 그림을 그렸다.
나는 일찍이 ‘미술평론가 10인이 추천한 유망주’에 이상국을 ‘한국적인 것, 그 전통의 계승에 그는 내면을 파고 들어가 그 본성을 파악하려 한다. 요컨대 이상국은 박수근이나 이중섭이 걸어간 그 길을 걷고 있는 드문 작가의 한 사람이다.’라고 추천한 바 있다.
이 그림 ‘인왕산’은 겨울날 눈이 소복이 내린 정경을 그린 구상에 가까운 관념 풍경화에 속한다. 서울의 서촌 일대를 산책하다가 사간동의 단골 화랑에서 눈에 띄어 외상으로 구입한 작품이다. 평소 이 화가의 전시를 봐 왔고, 목판화를 구입한 바도 있어서 쉽게 결정하였다. 아내와 함께 택시에 싣고 와 거실에 놓고 몇 주 동안 눈 맞춤을 하였다. 가족 모두의 공동 감상평으로 눈 내린 삭막한 인왕산인데도, 한참 바라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포근하게 차오른다고 하였다. 바위틈마다 하나하나 눈을 얹으며 화가는 무슨 상념에 빠졌을까.
“형이상학적인 관념의 세계에서 탈출하여 현실로 귀환하고 싶었다. 정말 나 자신을 벌거숭이로 만들어 표현하고 싶었고, 울고 싶도록 깊숙이 파고드는 외로움을 그리고 싶었다.” 어느 미술잡지와의 인터뷰에서 한 이 화가의 말이다.
두 해 전 3박 4일의 일정으로 옛 친구와 둘이서 지리산 종주(縱走)를 한 적이 있었다. 노고단에서 천왕봉을 거쳐 증산리로 하산하는 약 35km의 코스를 하염없이 걸었다. 눅진한 안개가 몸을 무겁게 하고, 갑자기 비바람이 세차게 몰아쳐도 묵묵히 걸어야만 했다. 날이 저물자 언제 그랬냐는 듯 둥근 달이 떠오르고, 달그림자에 휘감긴 산봉우리의 장중한 숨결이 피곤한 몸을 어루만졌다.
한 알의 풀씨도 소중히 키우고, 거친 눈보라 폭풍도 기꺼이 안으며, 언제나 그 자리에 의연한 산이 있기에 우리들은 산을 오른다. 비틀린 몸과 마음으로도 산문(山門)에 들어 한 발짝 두 발짝 발을 옮기며 한 그루 나무가 되어 볼 일이다.
△이재준(李載俊)
1950년 경기 화성 출생. 아호 송유재(松由齋). 미술품 수집가, 클래식 음반 리뷰어.
※한강을 따라 자유로를 달리다 보면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진다. 강변을 가로막고 선 철책 때문이다. 하지만 어찌하랴. 이것이 우리의 현실인 것을. 그렇게 분단의 아픔으로 이어진 그 길 끝에 임진각이 있다. 슬픔을 간직한 역사의 현장 임진각, 그 속살을 들여다보자.
글ㆍ사진 김대성 여행작가
◇전쟁의 아픔이 아로새겨진 임진각
군사분계선에서 남쪽으로 7km 지점에 있는 임진각. 참혹했던 전쟁의 그림자를 고스란히 품고 있는 곳이다. 65년의 세월을 품은 전쟁의 상처는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라는 오명을 쓴 채 여전히 아물지 않고 있다.
임진각 마당에는 망배단이 조성되어 실향민의 마음을 위로한다. 망배단은 북녘땅을 향해 제를 올리는 공간으로 이산가족의 아픔이 서려 있는 곳이다. 망배탑을 둘러싼 7개의 화강석에는 북한 지역의 문화와 경관을 새겨 넣어 망향의 근심을 달래주고 있다. 망배단 뒤편에 놓인 ‘자유의 다리’는 전쟁포로의 교환을 위해 가설한 임시교량이다. 1953년 휴전협정 후 12,773명이 자유를 찾아 이 다리를 건너왔다. ‘자유로의 귀환’이라는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어 한국전쟁을 대표하는 유산이기도 하다. 다리 아래로 내려가 연못가를 천천히 거닐어 보는 것도 제법 운치가 있다. 다리 앞에 전시된 증기기관차도 놓칠 수 없는 볼거리. 검붉게 녹슨 몸체와 1,000개가 넘는 총탄 자국이 당시의 처참했던 상황을 짐작하게 한 다. 이 열차는 연합군의 군수물자를 운반하던 중 폭격을 받 았다. 그 후 반세기가 넘도록 비무장 지대에 방치돼 있다가 지금의 위치로 옮겨온 것이다. 비록 흉물스런 몰골이 돼 버 렸지만, 남북분단의 상징물로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임진각에는 특별한 공간이 숨어 있다. 바로 BEAT 131. 이곳 은 전쟁 당시부터 사용해온 실제 지하벙커다. 지하로 내려 가는 입구에 M15 대전차지뢰가 놓여 있어 지뢰 밟는 느낌을 경험할 수 있다. 터지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왠지 움찔하 게 된다. 벙커 내부는 상황실과 영상체험실로 꾸며졌다. 통 신시설과 군용물품이 전시돼 있고 DMZ와 북한 선전마을을 실시간 영상으로 볼 수 있다. 모니터에 메시지를 적으면 모 스 부호와 함께 저장되는 미디어아트도 흥미를 끈다. 어둡 고 좁은 공간이라서 한 번에 20명까지만 입장이 가능하다.
임진각 본관 건물에는 다양한 편의시설이 들어서 있다. 지 하 1층에는 북한 술, 토산품, 액세서리 등을 판매하는 기념 품점이 있으며, 지상 1층과 2층에는 DMZ 홍보관, 한정식 식 당, 커피숍, 패스트푸드점 등이 들어서 있어 방문객들의 쉼 터 역할을 한다. 3층은 망원경을 통해 북한 지역을 직접 볼 수 있는 옥상 전망대다. 이와 함께 임진각관광지에는 평화 의 종, 장단콩 전시장, 망향의 노래비, 6·25전쟁 참전기념비, 평화랜드 등의 시설이 있다.
매년 수백만 명의 내·외국인이 임진각을 찾아온다. 분단국 가에서만 만날 수 있는 풍경 때문일까. 꼭 그 때문만은 아니 다. 분단의 상징으로만 여겼던 이곳에 불어오는 변화의 바 람도 한몫하고 있을 것이다. 이렇듯 임진각은 아픈 역사가 관광 상품이 되는 아이러니 속에서 그 상처를 치유하며 조용 히 변화하고 있다.
◇바람도 쉬어가는 평화의 쉼터
임진각에서 몇 걸음만 옮기면 또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자연과 예술 그리고 사람이 조화를 이루는 세상, 바로 평화누 리 공원이다. 개성 넘치는 예술 작품들이 새로운 문화를 만 들어가는 곳이기도 하다. 부드러운 구릉을 따라 수놓아진 3,000여 개의 바람개비는 한반도를 오가는 자유로운 바람을 표현한다. 또한, 북녘 하늘을 바라보고 서있는 거대한 인물 상은 ‘통일부르기’라는 작품이다. 연속적으로 나타나는 4개 의 대나무 인간을 통해 통일의 염원을 표현하고 있다. 그 외 에도 소망나무, 솟대집 등 곳곳에 설치된 다양한 작품이 발 길을 이끈다. ‘음악의 언덕’으로 불리는 광활한 잔디광장의 중심에는 ‘어울터’가 있다. 어울터는 2만 5000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야외공연장으로 계절별로 다양한 공연이 펼쳐지는 곳이다.
평화누리는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전시와 공연 그리 고 기부프로그램 등 다양한 문화예술을 접할 수 있는 복합 문화공간이다. 다소 무거운 기운이 흐르던 임진각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킨 평화누리가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단 하나의 특별한 땅, 비무장지대
DMZ 투어를 다녀오는 것도 특별한 추억이 된다. 임진각 주 차장 옆 DMZ 매표소에서 출입신청 절차를 거쳐 이용할 수 있다. 셔틀버스를 타고 통일대교를 건너 제3땅굴, 도라전망 대, 도라산역 등을 돌아보는 코스로 3시간 정도 소요된다. 오 전 9시 20분부터 오후 3시까지 평일에는 9회, 주말에는 14회 운행한다. 제3땅굴 관람방법은 도보와 셔틀승강기 두 가지 로 나뉘는데, 셔틀승강기 표를 사는 것이 좋다. 도보관람을 선택하면 땅굴관람 시 후회하기에 십상이다. 또한, 비무장 지대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신분증이 필요하니 참고하자.
도라산역은 경의선 남측 최북단 역이자 북쪽으로 가는 첫 번 째 역이다. 이곳은 서울역에서 56km, 개성역에서 17km 떨어 진 곳에 있다. 철도가 중단된 지 52년만인 2002년 건설되었으 며 남북교류의 관문이기도 하다. 도라전망대는 남측의 최북 단 전망대로 개성시와 김일성 동상, 송악산, 기정동 마을 등 을 볼 수 있는 곳이다. 포토라인이 정해져 있어 함부로 촬영 은 할 수 없다. 제3땅굴 역시 촬영이 금지되어 있어 가방과 카 메라를 보관함에 맡기고 들어가야 한다. 탈북자의 제보에 의 해 발견된 이 땅굴은 한 시간에 3만 명의 병력이 이동할 수 있 는 규모로 지금까지 발견된 땅굴 중 가장 큰 것이라고 한다.
DMZ는 정전협정으로 출입이 통제되면서 놀라운 변화를 겪 었다. 국내는 물론 세계적인 자연생태계의 보고로 여겨질 만큼 귀중한 생태자원을 갖게 된 것이다. 또한, 생태계적 가 치뿐만 아니라 안보적 가치와 역사의 산 교육장 등 다양한 요소로 인해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쓰라린 역사의 현장 이 기회의 땅으로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처절했던 그날의 흔적들이 조용히 잠들어 있는 비무장지대. 이곳에도 따스한 희망의 바람이 불어와 하루빨리 과거의 상처를 털어내고 새로 운 땅으로 거듭나길 조심스레 기대해 본다.
남북이 3년4개월만에 시행한 이산가족 상봉 행사의 참가자들은 오랫동안 그려왔던 혈육을 만나 그동안의 그리움을 눈물로 쏟아냈다. 일각에서는 이산가족들의 고령화가 진행되는 상황에서 상봉의 정례화 추진이 제기되고 있다.
남북 이산가족 상봉 1차 대상자 82명과 동반가족 58명 등 140명은 20일 금강산호텔에서 북측의 가족 178명과 재회했다.
북측 가족들 가운데 지난 1972년 12월 서해상에서 조업 중 납북된 오대양61호 선원 박양수(56)씨와 1974년 2월 서해 백령도 인근에서 납북된 수원 33호 선원 최영철(59) 수원33호 선원 최영철(59)씨 등 전후 납북자 2명도 포함됐다. 이들은 40여년만에 만나 “행님아”“막내야”를 외치며 서로를 부둥켜 안았다.
이영실(88) 씨는 치매가 심해진 탓에 북쪽의 둘째 딸 명숙(67)씨와 동생 정실(85)씨를 알아보지 못해 안타까움을 샀다.
고령에 따른 건강 악화도 절박함을 막지는 못했다. 거동이 불편한 김섬경(91)씨와 홍신자(84)씨는 “죽더라도 금강산에서 죽겠다”는 상봉 의지로 구급차를 타고 상봉장을 찾았다. 정부 관계자는 “두 분의 건강상태가 좋지 않은 상황이어서 의료진 및 가족들과 협의 끝에 내일 21일 오전 개별상봉을 마친 뒤 조기 귀환시킬 계획”이라고 말했다.
상봉자들은 북측 혈육을 위해 선물을 마련했다. 1인당 30㎏으로 제한된 가운데 가장 많이 챙겨간 선물로는 ‘초코파이’가 꼽혔다. 이 밖에 선물 꾸러미에는 오리털 파카와 털옷 등 방한용 옷과 영양제, 진통제 등 의약품 및 화장품, 칫솔 등 생필품도 담겨 있었다.
정치권과 시민단체 등에서는 이번 상봉을 계기로 행사를 정례화 해야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새누리당 황우여 대표는 20일 “지난해 추석 당시 이산가족 상봉 명단에 있던 분들 가운데 14분이 돌아가셨다”며 “이산가족 상봉은 시간을 다투는 문제”라고 밝혔다.
민주당 문재인 의원도 이날 자신의 트위터에 “이산가족 상봉이 정례화되고 참여정부 때 금강산에 건설해놓은 상설면회소가 하루빨리 가동되면 얼마나 좋을까요”라고 말했다. 이에 북측 이산 추가 상봉에 적극성을 부여 우리 정부가 쌀·비료 등 인도적 지원을 확대하는 방안을 검토할 여지가 있다.
한편 이산가족들은 21일 이틀째 만남을 통해 못다한 말을 나눌 예정이다. 이들은 금강산에서 개별상봉과 공동중식, 단체상봉 등 3차례에 걸쳐 2시간씩 모두 6시간을 함께한다. 상봉 대상자는 오전 9시 외금강호텔에서 개별상봉을 한 뒤 금강산호텔에서 정오에 단체 식사를 하고, 오후 4시에는 단체상봉을 한다.
“이제 개인은 할 만큼 해 봤다. 자기계발도 했고, 자신이 추구하는 ‘행복’의 범위를 최소한으로 줄여 보기도 했다. 죽기 전에 꼭 해 보고 싶은 ‘버킷리스트’를 작성해 실천해 보기도 했다. 그러나 삶의 근원적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올해 초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은 힐링을 벗어나 문학 읽기를 통한 삶의 성찰이 출판계의 큰 흐름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 해가 저무는 지금 과연 그의 말대로 됐을까.
◇소설의 강세 = 2013년 서점가를 설명하는 키워드로 소설을 빼놓을 수 없다. 작품 수로도, 인기로도 풍년이었다. 인터파크도서가 최근 1년여간 집계한 베스트셀러 상위 20위 도서(2013년 1월 1일 ~11월 30일)를 보면 절반이 소설이다. 그중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이하 색채가 없는)’가 판매량 40만 부를 기록하며 소설의 강세를 입증했다. ‘색채가 없는’은 출판계 대목인 여름방학(7월) 출간과 동시에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하루키 신작의 그늘에 가려 있던 ‘정글만리’는 꾸준히 베스트셀러에 머물더니 9월 정상을 차지했고, 최근 100만 부(1·2·3권 합계)를 넘었다. 정유정의 ‘28’도 6월 출간 후 베스트셀러에 지속적으로 포진했고 김진명의 ‘고구려’도 눈에 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제3인류’, 댄 브라운의 ‘인페리노’도 인기를 끌었다. 인터파크도서 정지연 대리는 “지난해에는 주목할 만한 소설이 많지 않았다”면서 “올해에는 이름 있는 작가들의 신작이 이어져 소설의 강세가 뚜렷했다”고 했다.
◇중견의 귀환 = 소설의 강세와 더불어 중견작가들의 귀환도 한 흐름을 형성했다. 이권우 도서평론가는 2013년 한해를 “중견 귀환의 해”라고 설명했다. 원로 중견작가 김원일은 지난 9월 아버지의 시대와 아들의 유년을 그린 자전 장편소설 ‘아들의 아버지’로 돌아왔다. 한국일보문학상, 동인문학상, 이상문학상, 우경문학예술상 등을 수상한 걸출한 작가의 귀환이었다. 그는 ‘노을’(1978), ‘바람과 강’(1986), ‘겨울 골짜기’(1986), ‘마당 깊은 집’(1988), ‘늘 푸른 소나무’(1993), ‘아우라지로 가는 길’(1996), ‘사랑아, 길을 묻지 않는다’(1998) 등을 통해 한국문학을 살찌운 대표 원로 작가다.
중견작가 김훈과 이외수도 나란히 단편을 발표했다. 김훈은 단편 ‘손’을 계간 문학동네, 이외수는 단편 ‘파로호’를 계간 소설문학 겨울호에 각각 발표했다.
◇TV를 잡아라 = 이제 방송은 출판계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가 돼 버렸다. 그 흐름은 올해도 여전했다. 예능 프로그램에 나오기만 하면 베스트셀러가 됐다. 지난 2월 KBS ‘달빛 프린스’ 3회에 이보영이 들고 나온 책 ‘꾸뻬씨의 행복여행’이 대표적이다. 예능치고는 저조한 시청률인 4.2%(닐슨코리아 제공)를 보였음에도 그가 소개한 책은 불티나게 팔려 나갔다. 그리고 100만 부를 넘어섰다. 출판 관계자는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겼고 ‘달빛프린스’는 종영돼 ‘꾸뻬씨의 행복여행’을 남겼다”는 우스갯소리까지 했다.
인기리에 방영 중인 드라마 ‘상속자들’에서 은상(박신혜)이 읽던 책 ‘원더보이’도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며 베스트셀러에 오르기도 했다. 지난 9월 예능 프로그램 ‘힐링캠프-기쁘지 아니한가’에 출연한 이지선씨의 책 ‘지선아 사랑해’의 개정판도 방송 이후 한동안 베스트셀러 상위권에 머물렀다.
이 밖에도 ‘힐링캠프’의 신경숙 작품 ‘무한도전’에서 단 몇 초간의 노출로 폭발적 관심을 불러모은 박인권의 ‘여자전쟁’ 등이 방송의 파급력을 과시했다. 이에 대해 출판계는 반가움과 우려를 동시에 드러냈다. 정윤희 출판저널 편집장은 “시청자들이 TV를 본 후 독서로 이어지게 되는 긍정적 영향이 있다”면서도 “방송 노출이 자본력을 갖춘 출판사들만의 전유물이 되지 말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영원한 청년 작가 최인호의 별세= 지난 9월 25일 문학계의 큰 별이 졌다. 1970년대 청년 문화를 대표하는 아이콘으로 대중적 사랑과 문단의 지지를 얻은 작가 최인호가 고인이 됐다. 이는 문화계 전반에 안타까움을 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