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이 겪는 혐오는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노인의 삶과 인식에 대한 자료 및 통계를 기반으로 67세 김영수 씨의 하루 일과와 그가 마주할 혐오의 장면을 가상으로 구성해봤다. 우리가 만나볼 영수 씨는 홀로 거주하고 있으며, 시내 빌딩의 오후 교대 경비원으로 근무 중이다. 그의 하루를 따라가 보자.
참조 ‘2021 노인실태조사’(보건복지부), ‘우리나라 연령주의 실태에 관한 조사연구’(노인인력개발원), ‘온라인 혐오 표현 인식조사’(국가인권위원회), OECD ‘한눈에 보는 연금’ 보고서(Pensions at a glace 2021) 이슈브리프(국민연금연구원), ‘2021 성인지 통계: 통계로 보는 서울 여성’(서울시), ‘2019년 드라마 속엔 재벌과 전문직 남성이 많았다’(민주언론시민연합 방송모니터위원회)
오전 5시
새벽에 눈을 뜬 영수 씨. 시계를 보니 오전 5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다. 아침 식사를 간단히 해결하기 위해 냉장고에서 계란을 꺼냈다. 매일 아침 밥친구는 뉴스 아나운서다. 모 정치인이 사석에서 연금을 수급하는 노인을 두고 폐를 끼친다는 식의 발언을 해 정치권에서 논란이라는 소식이 들려온다. 이전에도 정치인들이 주목받고자 일부러 논란을 일으키는 경우가 있었지만, 점점 발언의 수위가 심해지는 것 같다. 아, 그보다 언론이나 정치인이 오히려 혐오 표현을 널리 알리는 주체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사석에서 나온 이야기까지 굳이 보도할 필요가 있을까. 씁쓸한 기분으로 그릇에 밥을 꾹꾹 눌러 담았다.
지난해 5월 발표된 국가인권위원회의 ‘온라인 혐오 표현 인식조사’에 따르면 온·오프라인 통틀어 2019년보다 2021년 조사에서 혐오 표현 경험 비율이 전반적으로 증가한 경향이 드러났다. 또한 정치인들의 혐오 표현이 과거에 비해 ‘늘었다’고 생각하는 응답이 46.8%를 기록했다. ‘감소했다’고 답한 응답자는 9.6%에 불과했다. 또한 혐오 표현에 대한 정치인의 역할에 대해 ‘확대 조장하는 역할’이라고 응답한 비율은 46.6%에 달했다. 정치인이 혐오 표현을 줄이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답한 응답자는 12.1%에 불과했다. 10대를 제외한 모든 연령대에서 정치인이 ‘확대·조장’ 역할을 하고 있다고 답했다.
오전 7시 30분
식사 후 나갈 채비를 마친 영수 씨. 생각이 많아져 조금 늦게 나온 탓에, 늦을까 허겁지겁 버스에 올라탔다. 지난달부터 시작한 빌딩 경비직 출근을 위해서다. 8시까지 출근해야 하는데, 아슬아슬하게 늦지 않을 것 같아 한시름 던다. 다행히 일찍 자리가 나서 앉았다. 아까 들은 기사가 생각나 스마트폰으로 포털 사이트를 켜 뉴스난을 들어가 본다. 가장 위에 떠 있는 기사를 확인하니 국민연금 재정 고갈을 우려하며, 연금 지급 방식에 변화가 필요하다는 내용이다. 기사를 훑으며 시선을 밑으로 내리다 ‘노인들은 정치 참여 말고 물러나라, 아예 노인들만 한데 모여서 살라’며 욕하는 댓글을 발견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댓글 창을 눌러 다른 댓글들을 확인해보니 노인을 향해 손가락질 하는 사람들이 잔뜩이다. 도를 넘는 심한 표현도 있어 손이 떨린다. 신고를 할까 생각했지만, 어떤 절차를 밟아야 할지 모르겠고 신고해봤자 속 시원한 처리가 이뤄지지도 않을 것 같아 그만뒀다.
한국노인인력개발원에서는 전국의 20~69세 근로자 3500명을 대상으로 ‘우리나라 연령주의 실태에 관한 조사연구’를 진행했다. 그 결과 ‘노인 인권(권리)보장을 위해 노인들 스스로 정치적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라는 항목에는 응답자의 65%만이 동의했다. ‘노인이 되면 비슷한 연령대의 사람들끼리 같은 지역에 사는 것이 낫다’에는 63.7%가 동의하며 노인을 회피하거나 거부하는 모습을 보였다. 또한 ‘온라인 혐오 표현 인식조사’에 따르면 온라인 혐오 표현을 가장 많이 겪은 장소는 뉴스기사와 댓글(71.0%)이었다. 또한 혐오 표현이 발생하고, 심화하는 원인으로 ‘언론의 보도 태도’라고 답하는 이는 79.2%에 달했다. 그러나 ‘신고를 해도 조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아서’ 무대응하는 이들이 43.5%에 달했다. 특히 4050대 응답자는 청년층에 비해 ‘신고나 절차가 번거로워’ 온라인에서 혐오 표현을 발견해도 대응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낮 12시
빌딩 미화원으로 일하는 미숙 씨와 점심 식사를 함께했다. 어찌 보면 직장 동료인 셈이지만 출근 시간이 훨씬 이른 탓에 오늘 처음으로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눴다. 통성명 후 형식적인 안부를 주고받던 그녀는 대뜸 깊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 돈 받으려고 몸도 성치 않은데
짜증스런 ‘아줌마’ 소리 들어가며 일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푸념이 뒤를 잇는다. 작은 실수를 했는데 필요 이상으로 신경질을 부리기에 미안하기도 전에 기분이 상했다나. “연금 받는 것만 조금 넉넉해도 아끼면서 살 텐데….” 한숨 섞인 목소리에 그저 고개를 끄덕여준다.
OECD ‘한눈에 보는 연금’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은 노인빈곤율 단독 1위 국가다. 그중에서도 여성 48.3%, 남성이 37.1%로 여성 노인의 빈곤율이 더 높다. 그러나 기초생활보장 및 국민연금 수급자는 남성이 더 많다. 서울시 ‘2021 성인지 통계’를 보면 기초생활보장 수급자는 2020년 기준 남성이 여성보다 2만 3000명, 국민연금 수급자는 12만 6000명이 더 많았다. 복지 급여가 넉넉지 않으니 일을 해야 하지만, 근로 현장에선 더 많이, 자주 혐오에 노출된다. 한국노인인력개발원의 조사에 따르면 ‘여성 근로자가 남성 근로자보다 성차별에 더 많이 노출되고, 남성 노인보다 여성 노인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강하기 때문’이다.
오후 3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주차와 관련해 불편함을 토로하는 직원들의 대화 소리가 들려온다. 영수 씨가 도울 수 있는 수준의 일이었지만 굳이 나서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며칠 전 도와주러 나섰다가 고맙다는 인사 대신 ‘알아서 할 수 있는데 잔소리를 한다’라는 볼멘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다른 일을 찾거나, 여지껏 경험해본 적 없는 새로운 분야에 도전할까 고민했지만 그런 생각도 금방 접었다. ‘글쓰기 공부를 제대로 해서 책을 쓰고 싶다’고 했을 때 취업 알선 기관 담당 상담사가 난처해하며 말렸던 기억이 떠오른 탓이다. 그때 포기했으니 지금 이 일이나마 하고 있는 거겠지. 매일 마시던 믹스 커피가 오늘따라 쓰다.
‘우리나라 연령주의 실태에 관한 조사연구’에 따르면 고령자에 대한 부정적 연령주의는 노동 시장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는 30~50대에서 가장 강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노인은 다른 사람에게 잔소리를 많이 한다’, ‘노인은 실력보다 나이, 경력, 직위 등으로 권위를 세우려 한다’는 문항에 대해 각각 71.7%, 63.7%가 ‘그렇다’고 응답해 부정적 인식을 드러냈다. 또한 노인에 대한 고정관념 중 ‘노인은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다’(47.9%), ‘노인은 창의성이 낮다’(42.9%), ‘노인은 새로운 것을 배우기 어렵다’(46.3%), ‘노인은 경제적 생산성이 낮다’(43.7%) 등에 응답자 열 명 중 네 명이 ‘그렇다’고 응답했다.
오후 10시
퇴근 후 돌아와 씻고 누운 영수 씨. 습관처럼 켜둔 TV에서는 드라마가 방영 중이다. 평소라면 보는 둥 마는 둥 하다 잠들었을 텐데, 오늘따라 잠이 오질 않아 평소보다 집중해서 스토리를 좇고 있다. 그런데 보다 보니 웬만큼 비중 있는 인물은 전부 20~30대다. 또래로 보이는 인물이라곤 주조연급까지 범위를 넓혀야 한두 명 있을 뿐이다. 그나마 대사가 많은 인물은 눈치 없이 굴어서 젊은 사람들에게 눈총받는 존재로 등장했다. 나이 들었다고 해서 저런 사람들만 있는 건 아닌데. 애꿎은 화면만 노려보다 뉴스 채널을 틀어놓고서 눈을 감았다.
민주언론시민연합 방송모니터위원회는 지상파(KBS1, KBS2, MBC, SBS), 종합편성채널(JTBC, TV조선, 채널A, MBN), CJ계열 PP(tvN, OCN) 등 총 10개 방송사의 2018년 10월부터 2019년 10월까지, 12부작 이상 종·방영 드라마 123편을 대상으로 분석 보고서를 냈다. 이에 따르면 모니터 대상 드라마에 등장한 447명 중 60대 이상(추정 포함) 연령대의 등장인물은 10명으로, 약 2.2%에 불과했다.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와 방송통신위원회의 ‘미디어 다양성 조사연구’에 따르면 2017년 지상파·종편·tvN·OCN 드라마 주연 등장인물 중 10~20대 38.3%, 30~40대는 55.5%로 총합만 93.8%에 이르렀다. 게다가 드라마 속 노인의 이미지는 얄팍하기 그지없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쥔 대기업 회장, 가족에게 헌신적인 어머니 등의 단편적인 이미지나 갈등 조장에 필요한 주변 장치로 쓰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사람을 알고 싶었어요.” 사람이 궁금했던 소극적인 이공계생은 삼성전자 최초로 ‘세일즈엔지니어’가 되었고, 우리나라 정보통신산업에 한 획을 그었다. 24개월 약정과 단말 보조금, 통신요금 납부 시스템, 해지 방어 시스템 등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이동통신사의 모든 정책의 뿌리를 만든 사람, 이문호(65) 머큐리 사장의 이야기다.
“직장생활을 하든, 사업을 하든 사람을 아는 게 기본이라고 생각했어요. 사람과의 관계에서 모든 게 시작된다는 생각이었죠.”
이공계 전공으로는 사람을 만나는 일을 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 이 사장은 부전공으로 경영학을 선택하고 영업과 마케팅 직무에 관심을 두게 된다. 그리고 삼성전자에 입사해 신입사원은 영업사원으로 발령을 내지 않는다는 불문율을 깨고 최초의 이공계생 영업사원이 됐다. 얼마나 극적이었던지, 당시 삼성전자에서 받은 발령장을 지금까지 보관하고 있다. 그렇게 10년을 삼성전자 대리점 마케팅 영업을 했다. 그는 영업이 ‘생각을 전달하는 과정’이라고 강조했다.
“‘이 제품 사세요’가 아니라 내 생각을 상대에게 전달하는 거예요. 자기 주관적으로 이해하는 게 아니라 상대 주관적, 시장 중심적으로 이해해야 하죠. 상대는 왜 이걸 필요로 할까에 답을 할 수 있어야 해요. 대화할 때는 진정성이 필요합니다. 준비를 많이 하면 진정성이 나와요. 인격적으로 상대를 존경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이 만남을 위해 얼마나 많은 준비를 했느냐를 말합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건 ‘차별화’예요.”
공짜폰의 효시 ‘삐삐’
서울이동통신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고, 중소기업에서 새로운 도전을 해보고 싶었던 그는 삼성전자를 떠났다. 지금이야 공짜폰이라는 말이 익숙하지만, 이전에는 공짜폰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이 사장은 서울이동통신에서 통신 보조금의 효시가 된 마케팅을 처음으로 시도했다. 삐삐를 쓰던 시절에는 모토로라가 브랜드로서 압도적인 인지도를 갖고 있었다. 이때 이 사장은 삼성전자에서 개발한 삐삐 신제품을 공짜로 판매하자는 아이디어를 낸다. 삼성전자에는 100만 대를 팔겠다고 약속하면서 기계 가격을 낮춰달라고 했다. 어떻게 그런 약속을 할 수 있었는지 묻자 “숫자는 중요하지 않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내가 100만 대를 팔 수 있다는 판단을 한 게 아니라 실제로 이루어질 방법을 찾았다는 게 핵심입니다. 새로 나온 삐삐를 공짜로 소비자에게 풀었을 때, 우리 회사에 유리하다고 판단했던 거죠.”
성공적으로 삐삐 판매의 물꼬를 튼 이 사장은 이동통신사 KTF의 전신인 한국통신프리텔에서 또 한 번 스카우트 제의를 받는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을 거치며 삐삐라는 신규 사업에서 성공을 이루었듯, 이번에는 공기업에서 PCS(개인휴대통신)라는 신규 사업에 도전해보고 싶었다. 한국통신프리텔에 들어간 이 사장은 ‘24개월 약정할인’, ‘단말 보조금’, ‘인터넷 패키지 정책’ 등 소비자의 휴대폰 구매 부담은 줄이면서 휴대폰 제조사의 판매도 늘릴 수 있는 정책들을 만들었다. 1999년 이동통신 역사상 처음으로 시도했던 요금제와 단말기 패키지는 KTF의 쇼킹스폰서로 업그레이드됐고, 이제는 모든 이동통신사의 정책으로 자리 잡았다. 지금이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제도지만, 당시만 해도 ‘말도 안 된다’고 모두가 반대했던 일이다.
“설득의 바탕은 신뢰예요. 신뢰는 평소에 쌓아둬야 하는 거고요. 상대가 나를 믿게 하려면 그 사람과의 관계에 성실해야죠. 첫째로 자신이 뱉은 말을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만약 그렇게 못 했을 때는 피드백을 주어야 해요. 두 번째는 진심으로 상대를 대해야 하고요. 세 번째는 그 사람의 가려운 부분을 찾아내 해결책을 제시해주어야 해요. 그러니까 대화하는 과정에서 이 사람에게 필요한 게 뭘까 알아챌 수 있어야겠죠? 경청은 집중력인 것 같아요. 지나가는 식으로 던진 말에서 아이디어를 얻는 거죠.”
시장을 읽는 점쟁이
KTF에서 부사장 자리까지 올랐던 이 사장은 KTF를 나와 통신 장비 및 광케이블 전문 업체 머큐리의 수장이 되었다. 당시 머큐리는 구조조정을 해야 할 정도로 위기의 시기를 겪고 있었다. 이 사장은 무선 공유기인 AP를 머큐리의 성장 동력으로 점찍고 시장 안착에 성공했다. 지금 우리가 흔히 보는 통신사 와이파이 공유기를 생각하면 된다. 이후에는 ‘기가 와이파이’라는 신기술을 선보이기에 이른다.
이 과정에서 선진 기술을 개발하기 위해 무작정 해외에 있는 협력사들을 찾아가 함께 일하자고 설득했다. 갑자기 찾아와서는 허풍 같은 이야기를 늘어놓는다고 생각했지만, 함께 해보니 그의 아이디어가 다 맞아떨어지는 걸 보고 협력사들은 이 사장에게 ‘포춘텔러’(Fortune Teller, 점쟁이)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어떤 관점으로 시장을 바라보고 있었기에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시하고 성공해낸 걸까.
“저도 돌아보면 어떻게 그랬을까 싶네요.(웃음) 제가 머리가 좋은 것도 아니고, 어디서 교육을 받은 것도 아니고요. 다만 어떤 현상이 발생했을 때, 어떤 문제가 일어났을 때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현실적인 방법을 고민했던 것 같아요. 거기서 자그마한 아이디어가 나온 거고요.”
아주 사소한 아이디어라도 생각이 떠오르면 즉시 노트에 적어둔다. 그리고 매일 아침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을 갖는다. 그는 아이디어를 복기할 때 “오래 끌면 안 된다”고 했다. 하루를 넘기지 않는 게 핵심이다. 기존에 없던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낼 수 있었던 건 다른 사람의 말을 허투루 넘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상대의 가려운 지점을 긁어주려면 대화에 집중해야 한다는 그의 영업 지론과도 일맥상통한다. 머큐리에서 세계 최초로 개발한 가정용 신기술 와이파이 802.11ax(와이파이6)는 지나가는 말을 허투루 넘기지 않은 이 사장의 제안으로 탄생했다.
이렇게 컴퓨터, 삐삐, PCS, CDMA, 휴대전화, AP 등 국내 통신 산업에서 약 40년 동안 정보통신 발전에 이바지한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해 12월에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 표창을 받았다.
끝없는 증명이 이뤄낸 도전의 아이콘
이 사장을 가리켜 사람들은 ‘고생을 사서 한다’고 했다. 삼성전자에서 마케팅 본부에 발령을 받았을 때 아무도 가려 하지 않는 지방으로 자원해서 떠났다. 서울이동통신에서 국내 최초로 30대에 임원직을 달아놓고 한국통신프리텔에 갈 때는 직급과 급여를 낮춰 이동했다. 1999년 한국통신프리텔은 성공적으로 코스닥 시장에 상장했다. 공기업에서 부사장 자리까지 올랐으니 그대로 승승장구하면 될 것 같았던 그는 돌연 머큐리라는 회사에 들어갔다. 위기에 빠져 있던 머큐리는 어엿한 상장 기업이 됐다. “인생은 나 자신을 끝없이 증명해 보이는 것”이라고 말하는 그는 우직하게 자신의 신념대로 움직였다. 그야말로 도전의 아이콘이다. 이 사장은 새로운 도전은 막연하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직장의 복리후생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우선으로 둬야 할 것은 자신이 추구하고자 하는 일입니다. 내가 한번 해보고 싶은 일이라면 소위 승부를 건다고 할까요? 기존에 하던 일이 싫증 나서가 아니라, 그냥 이거 한번 해볼까가 아니라 ‘이거 하나만큼은 내가 전문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자신감을 가져야죠. 삼성전자에서 10년 동안 대리점 관리를 하면서 이것만큼은 자신 있다고 생각해서, 새로 시작하는 삐삐 회사 서울이동통신으로 옮겨 대리점 관리에 새롭게 도전할 수 있었던 거예요. 현실에서 회사를 옮긴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잖아요. 저도 며칠 밤낮을 고민했는지 몰라요. 내가 잘하는, 혹은 잘하고 싶은 직무를 맡아 성취감을 느끼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새로운 곳에서 무언가를 끊임없이 증명해내야 하는 일에 부담을 느끼지는 않았을지 궁금했다. 이 사장은 부담감을 책임감으로 받아들였다. 결과보다 과정에 집중했다. 내 의지대로 결과가 나오지 않더라도 그 과정에 최선을 다했다면 어떤 결과든 받아들였다.
“과정은 어설펐지만 결과가 좋았다면 운이 따른 거고, 과정에서 최선을 다했는데 결과가 안 좋다면 격려받을 일이죠. 모르는 건 모른다, 실수한 건 실수했다,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개선하려고 노력하면 됩니다.”
이 사장은 현업에 있으면서 또 하나의 도전을 했다. 평범한 직장인으로 시작해 지금까지 성과를 이룬 내용을 담아 ‘영혼 있는 도전’이라는 책을 쓴 것. 일과 글쓰기를 병행한다는 건 그에게 또 다른 도전이었다. 언제나 새로운 시장을 보려고 노력했던 이 사장의 다음 도전은 무엇일까.
“여자가 어떻게 군대를 갑니까?”
노기에 찬 여학생의 질문에 창구 직원의 입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아마 그에게는 그저 운수 나쁜 날이었으리라. 회사의 신입사원 입사원서를 접수하는 날. 당연히 남자들만 지원받고 있는데, 다짜고짜 여자가 찾아오다니. 결국 이날의 항의는 무위로 끝났지만, 그녀는 그 불공정의 억울함을 잊지 않았다. 그것은 여성 권익 향상을 위한 평생의 연료가 된다.
이복실 세계여성이사협회 회장은 당시 기업들이 남자 지원자만 받기 위해 내건 조건은 ‘군필’이었다고 설명했다.
“1988년 남녀고용평등법이 시행될 때까지 악습은 계속됐죠. 여성들이 기업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특채’ 이외에는 방법이 없었어요. 그나마 결혼하면 퇴직하겠다는 조건이 붙은 서약서를 써야 가능한 일이었죠. 그런 시대였어요.”
무작정 선택한 공무원의 길
때문에 대학을 졸업한 여학생들은 선택할 수 있는 진로가 다양하지 않았다. 금융권이나 교직 정도가 선호되는 직업이었고, 아예 취업을 포기하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80학번이었던 이 회장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공무원의 길에 도전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마땅히 다른 방법이 없었다.
“꼭 경제적 능력을 갖고 싶었어요. 우리 어머니들의 삶이 남성에게 종속적이었던 것은 경제적으로 독립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직업은 반드시 있어야 했어요. 하지만 사회 분위기는 여성이 다양한 직업을 선택하기 어려웠죠. 제 전공이 도시행정학이다 보니 선배들이나 동기들이 모두 행정고시 공부를 하는 분위기였어요. 동기가 함께 공부하자고 권해서 자연스레 저도 시작하게 됐죠. 1학년 때 행시에 합격한 3학년 선배를 우러러본 적이 있는데, 자연스레 롤모델로 삼은 것 같아요.”
그녀는 당시 공무원이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몰랐다고 털어놓으며 웃었다. 선배에게 물어보니 ‘기안’을 잘하면 된다는 대답이 돌아와 “그 기안이란 게 뭐냐”고 되물었던 기억도 있다고.
공무원이라는 직업은 미지의 세계였지만, 느긋한 마음으로 덤벼든 것은 아니다. 선택의 수가 많지 않은 상황에서 이 시험에 떨어지면 그토록 원했던 ‘경제적 자유’를 얻지 못한다는 상황 인식은 그녀를 다급하게 만들었다.
“상대적으로 남학생들은 자신감이 넘쳤죠. 따르고 배울 롤모델도 많았고, 떨어지더라도 취직할 곳이 많았으니까요. 하지만 우리는 절박했어요. 그래서 붙고 나서도 ‘공무원이 되었다’는 성취감보다는 ‘직업을 가졌구나’란 기쁨이 더 컸을 정도니까요.”
기업에 찾아가 부당함을 항의했던 그 여학생은 당당하게 행정고시에 합격한다. 여성으로는 네 번째다. 한 손으로 꼽을 수 있는 선구자라는 뜻은 반대로 해석하면 남성들만의 세계에서 경쟁하고 살아남아야 했다는 뜻이 되기도 한다.
“처음 출발은 문교부(지금의 교육부)였어요. 그곳에서 10년을 일했죠. 당시엔 부처들 중에서도 굉장히 관료적인 분위기가 강한 곳이었어요. 여성 사무관이 비집고 들어가기 어려운 부분이 많았어요. 그래서 나의 능력을 알아주는 부처로 가자고 과감한 선택을 했죠. 그래도 다행인 점은 공무원 조직은 기본적으로 능력을 중심으로 평가가 이뤄지는 곳이에요.”
그녀가 선택한 곳은 정무장관 제2실. 제6공화국 출범과 함께 새로 설치된 기관으로 사회 문화에 관한 업무들, 그중에서도 여성과 아동, 청소년, 노인 문제 등과 관련한 정책 건의, 연구 개발 등을 담당하는 곳이었다. 이 선택은 이후 인생에 큰 영향을 주었다. 여성 정책이라는 큰 사회적 책무와 마주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 정무장관실은 10년 후인 1998년 대한민국 여성특별위원회로 개편되었고, 3년 후인 2001년 여성부로 개편된다. 지금의 여성가족부 전신이다.
“제가 느꼈던 여성에 대한 차별을 개선해야겠다는 의욕이 컸죠. 당시만 해도 정시 퇴근은 지켜지지 않는 것이 당연했고, 재택근무 같은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어요. 육아휴직이란 단어조차 없었죠. 산후휴가제도가 있었지만 60일에 불과했어요. 보육 시설이나 어린이집은 꿈도 못 꾸고요. 그러다 보니 친정어머니나 시어머니의 도움을 받아야 했어요. 다른 사람의 조력 없이는 직장을 다니지 못하는 거죠. 엄마와 직업인이라는 두 가지 역할을 병행하는 것이 개인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니 직장이나 사회 혹은 국가가 도와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경험을 바탕으로 한 이러한 생각은 유연근무제나 직장 보육시설 지원 등 일·가정 양립 지원제도 개선 등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특히 어린이집의 양적·질적 확대에 대한 정책은 공직 생활의 뿌듯한 성과 중 하나다.
“현직에 있을 때 보육정책국장을 2년 6개월 역임했어요. 여성들이 안심하고 일을 하기 위해서는 아이들을 맘 편히 맡길 수 있는 곳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죠. 엄마 입장에선 아이들이 하루 종일 어떻게 지내는지 전혀 모르잖아요. 또 프로그램이 어린이집마다 제각각이면 그것도 엄마 입장에선 신경 쓰이죠. 그래서 표준보육과정을 만들어 어느 어린이집을 가도 아이들이 같은 보육을 받을 수 있도록 했어요. 또 어린이집의 통합 관리가 가능한 보육행정 전산망도 구축하고요. 보육교사를 위한 교육 프로그램도 확충했죠. 제 스스로가 워킹맘으로 살면서 아쉬웠던 부분들을 개선하고 정책화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무척이나 보람 있었어요.”
여성은 눈에 띄어야 살아
이 회장은 2013년 3월 여성가족부 차관에 오른다. 임명직인 장관을 제외하고, 공무원이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커리어에 발을 딛은 것이다. 이후 조윤선 장관이 정무수석으로 옮겨가면서 한 달간 장관직무대행까지 했다.
“차관으로 발탁되리라고는 전혀 생각도 못 했죠. 당시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탄생하면서 여성 관련 정책을 추진할 수 있는 환경으로 바뀔 것이라는 기대감은 있었어요. 하지만 차관급 후보에 오를 만한 여성 고위 공무원이 많지 않았던 시기이고, 선발을 하려고 해도 사람이 없다는 말이 이상하지 않았던 시절이니까요. 다행히 각 부처에서 일 잘하는 유능한 여성을 발탁하자는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차관에 오를 수 있었죠.”
남성 중심의 사회, 그것도 폐쇄적인 조직이라고 평가받는 정부 조직 안에서 그녀는 늘 개척자여야 했다. 따르고 배울 만한 롤모델도 없었고, 무엇이 옳고 그른지 스스로 판단해야 했다. 하지만 그녀는 성장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늘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 살았던 것 같아요. 승진할 수 있을까, 저런 기회를 잡을 수 있을까 하고 말이죠. 사무관일 때는 서기관이 될 수 있을까, 그러고 나면 과장이 될 수 있을까, 이런 식이었죠. 당시엔 여성이 극소수였고, 우리에겐 기회가 안 주어지는 것이 당연했으니까요. 차관이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죠. 그만큼 힘들었던 세월이지만, 열심히 하면 날 알아봐 주는 상사들 덕분에 성장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이 회장이 여전히 사회 곳곳에서 부당함이나 편견과 맞서 싸우고 있을 후배들에게 강조하는 것은 태도다. 남들과 같은 방식이나 같은 정도의 노력으로 접근하려고 한다면 성공하기 어렵다고 이야기했다.
“소수자가 인정받으려면 일반 다수자의 2배, 3배의 일을 해야 합니다. 똑같이 일하면 절대 인정 못 받아요. 열심히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도 중요해요. 소수자의 운명 같은 것이죠. 다른 접근 방식으로 일하고, 벌여놓은 일을 반드시 책임지는 식으로 일했어요. 회의 석상에서도 적극적으로 발언했고요. 소수자는 남들의 눈에 띄지 않으면 절대 보이지 않아요. 물론 그런 태도와 함께 성과도 인정받아야 하고요. 소수자의 숙명에 맞서 살았죠.”
바뀐 신분도 열정 막지 못해
공직 생활을 마무리한 후 이 회장은 하루도 쉬지 않았다. 남들처럼 느긋하게 여행을 하거나 취미생활에 몰입할 법도 한데, 한가한 선택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공무원 생활할 때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세계를 접하는 데 매료된 상태라고 한다. 그녀가 좋아하는 글쓰기에도 집중해서 다양한 매체에 글을 연재하거나, 그간의 경험을 정리한 저서 ‘나는 죽을 때까지 성장하고 싶다’, ‘여자의 자리 엄마의 자리’ 등을 집필했다. 또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의 부인 정희자 전 서울힐튼호텔 회장의 자서전에도 참여했다. 친분이 있던 사이는 아니었지만 글솜씨를 인정받아 대필작가가 아닌 공저자로 이름을 올렸다.
“퇴직을 앞둔 후배들에게 끝났다고 생각하지 말라고 말해요. 퇴직 후 그 다음 날부터 일하라고 말하죠. 커리어를 중단하지 말고 이전과 똑같이 일하라고 당부합니다. 몇 달 쉬겠다고 생각하면 그것에 익숙해지거든요. 퇴직 후의 인생을 만드는 것은 현직 시절의 삶인 것 같아요. 저의 경우에는 여성 정책에 대한 경험이나 양성평등에 대한 노력 등 당시의 가치관과 철학이 지금의 삶까지 영향을 주고 있어요. 세계여성이사협회도 마찬가지죠.”
세계여성이사협회는 전 세계 60개국 80여 지부에서 8500여 개 기업의 이사로 활동하는 3700여 명의 여성 이사로 구성된 비영리 단체이며, 한국 지부는 2016년 9월에 창립됐다. 창립 당시에는 회원이 40여 명에 불과했다. 동의하는 여성이 적어서가 아니었다. 우리 사회에 이 모임의 가입 조건인 상장기업이나 공기업의 등기이사 등과 같은 요건을 충족하는 여성의 수가 적었기 때문이다.
“당시 기업의 이사회에 여성이 참여하는 국내 비율이 3%가 안 됐어요. 일본도 9% 정도 되고 유럽 국가들은 30~40%나 되는데 우리는 매우 낮았죠. 그래서 우리도 법 개정을 추진했어요. 다양한 법 중에서도 자본시장법을 개정해서 여성의 비율 의무화를 시도했죠.”
그래서 은퇴 후 다시 국회를 찾았다. 사실 이 회장에게 국회는 그리 좋은 기억이 있는 곳은 아니다. 국회는 여성 공무원에 대한 편견이 있었다. 과장 때는 국정감사 자리에서 다리를 꼬았다는 이유로, 나중에는 옷차림이 화려하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수시로 호출당하기도 예사였다. 다행히 그 경험은 법 개정의 돌파구가 됐다. 최운열 더불어민주당 의원을 설득해 상장사 여성 이사 할당제 도입에 관한 법안을 발의할 수 있었다.
“세계 기업들 사이에선 ESG 경영, 즉 지속가능한 경영을 위해 환경(Environmental), 사회(Social), 지배구조(Governance)를 핵심 요소로 꼽아야 한다는 흐름이 있어요. 여성 이사 할당제는 이 지배구조의 다양성과 연관이 있죠. 글로벌 기업들은 지배구조를 개선하지 않는 기업에는 투자조차 안 해요. 우리 기업들도 변해야 하는 시점이고, 저희의 노력이 우리 기업들의 체질 개선에 긍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라 생각해요.”
세계여성이사협회의 주도로 개정된 자본시장법은 올 8월 시행을 앞두고 있다. 자산총액 2조 원이 넘는 기업은 특정 성별로만 이사회를 구성할 수 없게 된다. 즉 최소한 1명 이상의 여성을 임원으로 두어야 한다는 뜻이다.
“개인적으로는 NGO라는 민간인 자격으로 선봉장에 서서 공무원 못지않게 사회를 바꾸는 일에 참여했다는 것에 큰 보람을 느껴요. 물론 이제 시작이죠. 상장기업 외에 공공기관의 이사회에도 여성이 참여할 수 있도록 확대되면 공공기관 역시 여성 임원을 찾게 되고,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여성에 대한 제한이 사라지리라 생각합니다. 시너지가 생길 거예요.”
소설가 스티븐 킹은 이런 말을 했다. “소설은 독자를 움켜쥐고 한 대 후려갈기는 것처럼 위력적이어야 한다.” 그는 독자들에게 충격과 전율을 야기하는 작품을 쓰고 싶었던 것이다. 사람의 관습과 관점을 타격하려는 예술가로서의 목적의식이 선명하기로는 비디오아트 창시자 백남준(1932~2006)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기발하고 기이한 작품 행위를 통해 대중의 굳은 의식을 비트는 데 이골이 난 사람이었다. 어디로 튈 줄 모르는 럭비공, 그것도 도발과 전복의 메시지를 다탄두로 장착한 럭비공처럼 날아가 사람들의 타성을 가격한 백남준의 작품은 전례 없는 새로운 것이었다는 점에서 창조의 원본이었다. 사람들은 초기 한때 그의 작품에 어지러워 야유를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갈채는 뜨거워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이렇게 탁월한 예술혼의 작품 다수를 한꺼번에 만날 수 있는 곳이 있다. 경기도 용인시에 있는 백남준아트센터다.
백남준아트센터는 도시 외곽 야트막한 동산 아래에 있다. 유리로 외부를 두른 3층 규모의 대형 단독 건물을 지어 미술관을 꾸렸다. 첫눈에 감흥을 맛보기는 다소 어려운 형상이다. 물결처럼 굽이치는 건물 뒤편 곡면이 매우 유려하지만 미감을 자극할 만한 디테일 요소는 부족한 편이다. 설계를 주도한 이는 독일 건축가 마리나 스탄코비치. 그는 “자연과 인공의 조화를 최우선으로 했으며, 건물 외벽을 유리로 만들어 안과 밖이 연결되도록 했다”고 밝힌 바 있다. 주변 지형을 흐트러뜨리지 않고 지었다는 점은 이 건물이 지닌 커다란 미덕이다.
건물의 형상은 동서 방향으로 눕혀진 ‘P’자를 닮았다. 주변의 언덕과 골짜기를 배려하 는 한편, 가용 부지를 최대한 활용하면서 귀결된 형상이 그렇다. 이 ‘P’자 모양은 그랜드피아노의 형태와 비슷하다. 그래서 피아노를 퍼포먼스 오브제로 즐겨 동원했던 백남준의 경향을 이미지화한 건물 형상이라 유추하는 이들이 많다. 설계자가 의도적으로 건축에 담은 백남준의 상징물은 외벽 유리 커튼월에 즐비한 가로줄이다. 이는 백남준이 구사한 작업의 핵심 매개체인 TV 화면의 이미지를 형상화한 것이다. 과거 흑백 TV의 화면 조정 시간 때 지지직거리며 출렁거리는 줄무늬에서 착안한 것. 재미있게 음미할 만한 요소가 적지 않은 건물인 셈이다. 그러나 백남준이라는 거대한 콘텐츠를 담은 그릇치고는 평범하고 소박하다. 실험과 도발을 일삼았던 백남준을 닮았더라면, 건물을 척 보는 순간 감동과 상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들솟을 텐데. 세계적 수준의 예술가는 세계적 수준의 건축에 담아야 아귀가 맞는 게 아닐까.
정신의 대륙붕에서 융기한 준봉
이 미술관은 백남준의 작품 130여 점을 소장했다. 해마다 두어 차례 펼쳐지는 백남준 상설전에 소장품 일부를 번갈아 전시한다. 현재 ‘아방가르드는 당당하다’전이 열리고 있다. 올해로 탄생 90주년을 맞이한 백남준의 놀라운 예술 세계를 재조명하기 위해 마련한 전시회다. 1층 전시장에서 맨 먼저 관람객을 맞이하는 작품은 ‘TV정원’이다. 열대성 식물로 채운 인공 정원에 경쾌한 뮤직비디오가 흘러나오는 TV 모니터들을 배치한 이색으로 눈길을 붙잡는 작품이다. 식물과 기계, 또는 자연과 기술의 컬래버레이션이다. 조물주의 작품이라 할 만한 식물을 오브제로 끌어들여 예술의 경계를 확장했다. 언뜻 대수롭지 않은 조합처럼 보이지만 백남준의 작품이라 뭔가 대수로운 걸 열심히 찾아보게 된다. 이게 예술의 소구력이자 백남준의 힘이다. 평범하거나 따분한 세상과 사물을 한 걸음 더 들어가 흥미진진하게 바라볼 수 있는 새로운 눈을 달아주는 게 그의 예술이지 않던가.
백남준의 예술 여정은 전위음악으로 시작됐다. 1960년 그는 ‘피아노포르테를 위한 연습곡’을 공연하면서 피아노를 박살내고 스승 존 케이지의 넥타이를 잘라 청중을 경악시켰다. 그건 예상을 초월한 급진적 퍼포먼스였다. 텔레비전을 오브제로 동원, 비디오아트의 신호탄을 쏜 건 ‘음악의 전시’라는 개인전을 통해서였는데, 이번엔 잘린 소머리까지 진열했다. 틀에 갇힌 예술 관행을 질타하고, 위선의 이웃사촌인 엄숙주의를 조롱했던 거다. 이때부터 백남준은 ‘문화 테러리스트’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그러나 국내에서 백남준을 알아보는 눈은 많지 않았다. 언론의 보도 자체가 드물었다. 기사를 쓰더라도 백남준의 작업이 희한하지만 그게 과연 예술인지 뭔지 모르겠다는 투의 의문을 제기하는 글에 그쳤다. 첼리스트 샬롯 무어만과 나체 퍼포먼스를 하다 경찰에 연행됐다는 외신을 가십으로 전하는 정도에 그쳤다. 이후 백남준이 비로소 국내에서도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건 ‘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계기로 해서였다.
전시장에선 백남준의 출세작 ‘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볼 수 있다. 1984년 새해 벽두,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 중계로 한국, 미국, 독일, 프랑스에 생방송된 이 퍼포먼스는 현대미술사의 명장면으로 회자된다. 조지 오웰은 소설 ‘1984년’을 통해 기계문명의 폐단을 암울하게 묘사했다. 그러나 백남준은 ‘1984년’을 비디오아트로 패러디, 오웰의 어두운 미래 전망을 뒤엎었다. 기술 발전으로 오히려 인간 해방이 가능하다는 낙관적인 세계관을 개진했다. ‘굿모닝 미스터 오웰’로 백남준은 드디어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으며, 국내에서도 주목하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전시실의 백남준 작품은 10여 점에 불과하다. 하지만 한 시대를 태풍처럼 휩쓴 거장의 작품들이니 반색하지 아니할 수 없다. ‘칭기즈 칸의 복권’에는 말 대신 자전거를 탄 20세기 칭기즈 칸 로봇이 등장한다. 자전거의 짐받이에는 TV가 가득 실려 있다. 왜 칭기즈 칸인가? 백남준은 자신의 진취적 성향의 출처를 ‘몽골 유전자에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 작품은 비디오아트로 세상의 모든 예술을 압도하겠다는 야심의 표명? 그는 다만 머리와 기교로 예술을 성취하지 않았다. 어릴 적에 가족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언어를 만들어 사용할 정도의 기찬 상상력, 어마어마한 독서량, 정밀한 철학적 논문 등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로 벼린 통찰력…. 그의 예술은 정신의 대륙붕에서 융기한 하나의 준봉이었을지도.
2층 전시실에 있는 ‘메모라빌리아’(Memorabilia)는 뉴욕 소호에 있었던 백남준의 작업실을 그대로 옮겨 재현한 공간이다. 백남준의 숨결이 선연히 느껴지는 공간이라 기억에 남겠다. 작품 관람을 마친 뒤엔 건물 뒤편을 굽이치는 산책로를 즐길 일이다. 돌을 바닥에 깔고 경사지의 곡면을 채웠으니 돌의 성채다. 구간은 짧지만 매우 아름다워 강렬하다.
내 기억 속에 무수한 사진들처럼 사랑도 언젠가는 추억으로 그친다는 걸 난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신만은 추억이 되질 않았습니다. 사랑을 간직한 채 떠날 수 있게 해 준 당신께 고맙단 말을 남깁니다.
영화는 애잔해도 때로 설렘을 던진다. 누군가의 가슴속에선 상상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정원(한석규 扮)의 목소리가 가슴에 남아있다. 그들의 이야기는 오랫동안 울림이 남는 종소리처럼 여운이 길다. 때론 소리나 냄새로 또는 순간의 풍경으로 기억하는 여행이 있다. 군산은 영화 한 편만으로도 가능하다.
기억 속의 나만의 풍경이나 대사 몇 줄로도 군산을 떠올리게 하는 힘,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의 초원 사진관은 군산 월명동의 어느 골목에 찰떡처럼 잘 어울리게 자리 잡았다. 그곳이 영화 속 정원과 다림(심은하 扮)이 정말 일상생활을 했던 곳인 양 착각하게 한다.
1998년의 영화였다. 벌써 20년이 훌쩍 넘은, 이제는 고전 명작이라 할 때가 되었지만 지금 다시 보아도 절제된 연출과 섬세한 감정선을 조용히 담아낸 세련됨이 보는 이에겐 그저 잔잔하다. 어느 TV의 영화 프로그램에서는 “어쩜 20년 전인데도 촌스러움이 1도 없어요” 란 말을 했던 이가 있었다. 드라마틱했을 사랑과 죽음을 다루었음에도 아릿하지만 도무지 신파스럽지 않다. 군산엘 가면 나만의 보폭으로 나만의 영화적 감성으로 그 골목을 산책하듯 정원과 다림의 이야기를 들춰보는 일, 그것만으로도 특별한 여행일 수 있다.
초원사진관은 여전히 소박하다. 영화 속에서도 수수해 보이지만 그 모습이 푸근하고 친근하다. 8월의 크리스마스 제작진은 기획 당시 세트 촬영을 배제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전국의 사진관을 찾아다니다가 군산의 한 카페에 쉬러 들어갔다가 창 밖으로 내려다본 곳에 나무 그림자가 드리워진 차고를 발견한 것이다. 주인에게 어렵사리 허락을 받아 개조하여 초원사진관이 되었고 영화 대부분이 이곳을 배경으로 촬영되었다. 그 후 철거되었다가 군산시에서 다시 영화 배경 속 모습으로 복원하는 탁월한 선택 덕분에 영화로운 군산을 찾는 이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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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의 현실을 들여다보는 것은 환상을 깨는 일일 수도 있다. 일단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 선 듯 주춤주춤 다가가게 된다. 스튜디오에는 8월의 더위에 지친 심은하에게 시원한 바람을 보내던 선풍기, 문틈으로 끼우던 편지, 영화 속의 스틸컷이 스토리 섹션별로 벽면에 그대로 붙어있고 심은하와 사뭇 다른 사람들이 심은하처럼 앉아서 사진을 찍으려고 줄을 잇는다.
사진관 주변으로 정원이 타던 스쿠터와 주차요원이던 다림의 근무용 소형차 티코, 심은하가 한석규의 오토바이를 함께 타고 통과했던 해망굴, “내가 어렸을 적 아이들이 모두 가 버린 텅 빈 운동장에 남아있기를 좋아했다. 그곳에서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하고, 아버지도 나도 언젠가는 사라져 버린다고 생각을 하곤 했다.” 망연히 앉아 독백하던 초등학교 운동장, 삶이 다해 가는 정원이 창문 넘어 어렴풋이 다림을 바라보는 텅 빈 감성의 섬세한 눈빛, 이 모든 것들이 초원사진관 주변으로 이루어진다. 영화의 자취를 따라 걸어볼 만하다.
허진호 감독의 8월의 크리스마스 촬영 이후 군산이 배경이 된 영화나 드라마가 늘어났다. 장군의 아들, 타짜, 바람의 파이터, 말죽거리 잔혹사, 마더, 화려한 휴가, 마파도, 변호인, 남자가 사랑할 때. 시네마 투어를 떠나도 좋을 군산이다.
군산을 걷다
볼거리가 대부분 가까운 근처에 있다. 발길 닿는 대로 천천히 걷는 여행이 가능한 군산이다. SNS 명소인 경암동 철길마을은 조금 멀리 있으니 택시 이용이 좋겠다. 보고 느끼고 기억하는 오감 만족의 여행을 누릴 수 있는 지방 도시에서 보내는 하루는 여유롭다.
초원사진관에서 걸어서 5분 정도 거리에 있는 신흥동 일본식 가옥은 일제 강점기에 유명한 포목상이던 일본인 히로쓰가 살던 목조 주택이다. 당시 호남지역은 전국 최고의 곡창지대여서 부유한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했다. 빨간 담장 안으로 잘 가꾸어진 정원이 단정하다. 일본식 고급 주택 양식의 전통 가옥 특징을 그대로 보여준다. 이곳에서 장군의 아들, 타짜, 바람의 파이터와 같은 영화가 촬영되었다. 쭉 돌아보고 나오려는데 입구에서 안내하시는 분이 뒤편 뜰의 복(福)이라는 글자를 알려준다. 안으로 들고나는 뜰 바닥에 복(福) 자가 쓰였는데 복이라는 글자를 밟고 들어가야 복을 받는다는 말이다. 믿거나 말거나. 등록문화재 제183호다.
신흥동 일본식 주택 근처에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일본식 사찰 동국사가 있다. 그리고 부근에 일제강점기 일제가 식민지 지배를 위해 설립한 대표적인 금융시설 구 조선은행 군산지점, 이 금고가 채워지기까지 우리 민족은 헐벗고 굶주려야만 했다는 금고 속 조선은행 이야기를 읽으며 분노가 치민다. 수탈의 잔혹사가 전해진다.
군산 근대건축관, 근대역사박물관, 군산 내항의 일명 뜬 다리 부잔교, 다다미룸 미즈 커피, 장미갤러리 근대미술관을 지나 근대역사박물관 바로 왼쪽으로 구 군산세관에서 거두어들이던 세금은 또 어땠을까. 지금 보아도 우리 민족의 고통이 피부로 느껴지는데 그 시절엔 얼마나 치를 떨었을지 짐작해 본다.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힐 시간이 필요하다. 1908년에 지어진 옛 군산세관 창고가 정담(情談)이라는 인문학 창고로 재탄생되었다. 꽉 찬 서고의 든든함과 다양한 인문학 강좌와 놀이문화가 명물이 된 오래된 창고에서 기다린다. 정담 앞의 잔디밭과 담쟁이덩굴이 아름다운 곳에서 고종황제가 즐겨 마셨다는 커피 한잔의 휴식을 누려볼 일.
군산은 거리 곳곳의 표지판이 온통 근대 역사와 관련된 흔적과 문화들로 새겨진 도시다. 마침 이런 발자취를 따라 맘 편히 여행할 수 있는 군산 근대항 스탬프 투어 도보 코스가 있다. 근대역사박물관에서 시작되는 스탬프 투어 도보 코스는 걷기에 따라 약 2~3시간 정도 소요된다. 다니다 보면 스탬프 투어를 코스대로 관람하는 여행자들을 자주 본다. 어른들은 물론이고 스탬프 도장을 찍어가며 생기발랄한 촬영을 하는 젊은 커플들의 모습이 풋풋하다. 혹시 도보로만 다니기에 심심하다면 군산시에서 마련한 공용자전거 대여가 있다. 바람을 맞으며 달려보는 군산 거리도 즐거운 일이다.
이 밖에도 볼거리는 지천이지만 군산 여행도 식후경이다. 단팥빵 사러 이성당 빵집을 들러야 하고 짬뽕도 먹어야 한다. 탁류 길의 군산 짬뽕 특화 거리엔 군산에서 가장 오래된 중국집인 빈해원이 있다. 실내는 흡사 홍콩영화 속의 한 장면과도 같다. 요즘 멋지게 꾸며놓은 ‘신상’ 명소와 달리 오래된 집이 주는 깊이는 확실히 다르다. 이 또한 근대문화 거리 근처에 있으니 금방 찾아갈 수 있다.
귀갓길엔 금강 변에 정박한 배의 모양을 한 채만식 문학관에 들러볼 일. 풍자적 글쓰기로 근대문학을 일군 탁류(濁流)의 채만식 문학관은 작가의 특별한 삶의 여정을 보여준다. 특기할만한 것은 한 코너에 채만식의 친일 작품이 나열되어 있고 '풍자적 작가 민족의 죄인'이라는 자료도 볼 수 있었다. 친일 활동에 참여한 스스로를 민족의 죄인이라고 철저히 반성하는 자의식은 의미 있다. 금강 들판이 내다보이는 문학관 광장을 나와 금강 갑문을 지나며 영화로운 군산 여행의 마무리를 한다.
군산 당일 여행
자동차: 서울 시준 약 두 시간 반 내외
기차: 군산역이 외곽에 있으므로 기차를 탈 경우 KTX 익산역 하차 후 군산행 시외버스가 용이함. 약 두 시간
강남고속터미널: 군산 약 2시간 30분
주소: 전북 군산시 구영2길 12-1 초원사진관
상처 없이 매끈한 인생이 어디 있겠는가. 누구에게나 유독 아프고 쓰라린 기억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꺼내기조차 쉽지 않고, 내 책임 같아 품에 안고 살았을 과거의 상처. 어떻게 치유하고, 독립하는 게 좋을까?
동트기 직전의 새벽이 가장 어둡다지만, 상처를 품에 안고 사는 사람의 마음속 어둠은 해소될 길 없이 번져만 간다. 이럴 때 시끄럽고 혼란스러운 일상을 벗어나 고요한 공간에서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살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처음에는 마음에 쌓인 불순물이 쏟아지겠지만 어느새 감정 분출이 끝나고 치유가 마무리되는 시점이 올 것이다.
과거를 마주하는 글·그림
과거의 나와 독립하기 위해서는 상처를 치유하는 것이 중요하다. ‘글쓰기’는 자신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적고, 내면을 마주하면서 스스로 위로를 건넬 수 있다. 두려움을 발설할 계기를 마련하는 셈이다. 박미라 치유하는 글쓰기 연구소장은 우울, 불안, 무기력, 트라우마를 견디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글쓰기를 처방한다. 박 소장이 30여 년간 심리상담자로 활동하며 가장 먼저 쓰게 하는 글감은 ‘죽도록 미운 당신에게’다. 10분이나 20분 정도로 시간을 정해두고 그 안에 글을 쓰도록 한다. 망설임을 줄여 최대한 빨리 내면을 끌어내는 방법이다. 그러면 욕하며 무시했던 사람들만 ‘죽도록 미운 당신’으로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일찍 돌아가신 아빠, 집을 나간 엄마, 실은 사무치게 그리웠던 이들을 대상으로 꽁꽁 숨겨뒀던 마음을 털어놓는다. 이외에도 박 소장은 ‘내 인생이 서러운 100가지 이유’,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 ‘미처 하지 못한 말’, ‘자기 비난 실컷 하기’ 등의 글제를 제시했다.
그림을 이용한 치유 방법도 있다. 예비사회적기업 카툰캠퍼스가 여러 노인 기관들과 협력해 진행하는 ‘시니어 만화창작학교’에서는 2014년부터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만화 자서전을 완성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해왔다. 해당 프로그램에는 사물이나 인물 그리는 법, 소묘 등 그림 그리기 수업 외에도 스토리 전개 수업이 포함된다. 어릴 적 사용했던 소품 그리기, 기억에 남는 추억의 장면 그리기 등 주제를 던져 이야기를 유도하는 식이다. 이 과정은 아픈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상담소이자 앞으로의 인생 방향을 알려주는 현명한 가이드가 될 수 있다. 프로그램을 진행한 현상규 강사는 “어르신들이 열심히 살아왔던 과거의 일들을 떠올리며 정체성을 다지는 것은 물론, 참여자들 간에 격려와 공감을 주고받아 심리적으로 긍정적인 변화를 주는 효과가 있다”고 말했다.
몸으로 하는 내면 위로
신비롭고 종교적인 수행법으로 인지되던 명상이 대중화되고 있다. 정신과나 심리상담소에 갈 경제적·물리적 여유가 없는 사람들이 스마트폰을 이용해 간편하게 마음을 가다듬기 위함이다. 유튜브 검색창에 ‘명상’이라는 키워드로 검색해보면 다양한 형태의 콘텐츠가 쏟아진다. 고요한 음악을 배경으로 내레이션이 흘러나오기도 하고, 자연 소리 ASMR(뇌를 자극해 심리적인 안정을 유도하는 영상), 매일 예뻐지는 주문 등 샤머니즘 요소가 담긴 명상 음악도 있다. 이는 불면증 치료, 생활 습관 교정, 자존감 회복 등 활용 범위가 넓다. 유튜브 명상이 인기를 끌면서 전문 ‘명상 유튜버’가 등장할 정도다. 명상 문화를 일찌감치 받아들인 미국 등 서구 국가에서는 애플·나이키·페이스북·인텔·위워크 같은 많은 기업이 사내 명상센터를 개소하거나 명상 프로그램을 도입했다. 월스트리트저널에 따르면 미국 내 명상 인구는 최근 5년간 3배 정도 늘어났다.
미국을 기점으로 확산된 치유 방법의 하나로 춤 치료, 댄스 테라피(Dance Therapy)가 있다. KBS ‘생로병사의 비밀’에서는 댄스 테라피의 신체적·심리적 효과에 대한 연구 사례를 분석했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춤이 사람의 보행 속도, 균형성 개선뿐 아니라 심리적으로 효과를 느낀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유방암을 앓고 있던 60세 최순덕 씨는 “우울감과 상실감으로 고통스러운 시기를 보내던 중 우연히 만난 훌라댄스 덕분에 네 번의 항암 치료와 서른세 번의 방사선 치료를 견딜 수 있었다”며 마음의 병을 이겨낸 사연을 풀어냈다. 남희경 명지대학교 예술심리치료학과 겸임교수는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느끼는 불안, 우울, 분노와 같은 감정은 가장 먼저 ‘몸’으로 나타난다. 몸은 마음이 사는 실체이기 때문이다. 불안하면 몸이 경직되고, 우울하면 무기력해진다. 또 화가 나면 압력솥처럼 끓어오르기도 한다. 따라서 타인과 소통하기 위해 말이 필요하다면, 나 자신과 소통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몸을 감각할 수 있어야 한다”며 몸을 기반으로 마음을 돌보는 것에 대해 조언했다.
소상공인에게 배달 플랫폼은 매우 중요한 무기다. 시니어 점주들도 이를 인지하고 있고, 그래서 플랫폼을 ‘잘’ 운영하고 싶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막막하기만 하다. 이에 배달 플랫폼 1위 기업 배달의민족이 시니어 점주들을 위해 나섰다.
코로나19의 장기화로 소상공인들은 배달 플랫폼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매출이 워낙 감소했기 때문에 수수료 부담이 커도 배달 플랫폼을 찾게 된다. 위기를 기회로 바꾼 사장들도 있다. 사진을 잘 찍는다거나, 재치 있는 리뷰 이벤트로 플랫폼의 장점을 활용해 고객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디지털 소통과 거리가 먼, 나이 많은 점주들에게는 이런 일련의 과정이 어렵게 다가온다.
이에 배달의민족 운영사인 우아한형제들은 온라인 홍보와 디지털 소통에 어려움을 겪는 시니어 점주들을 위해 디지털 집중 교육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스마트 사장님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지난해 7, 8월에 8주간 진행됐다. 총 19명의 시니어 점주들이 참여했다.
당시 교육에서는 가게 홍보를 위한 글쓰기부터 휴대폰으로 직접 음식 사진을 찍고 이미지를 만드는 방법, 인스타그램 계정을 만들고 디지털 콘텐츠를 제작해 SNS에 올리기까지의 전 과정을 알려줬다. 또 배민 앱 내 가게 공지사항과 메뉴 등록은 물론 고객과의 온라인 소통을 돕는 교육도 진행됐다. 교육은 배민아카데미 전문 강사진이 진행했고, 디지털 튜터(사장님 맞춤형 디지털 교육 도우미)가 보조 강사로 함께하며 이해를 높였다.
시니어 점주들을 위한 디지털 교육은 과연 효과가 있었을까. 우아한형제들의 교육 담당자, 그리고 교육을 수료한 시니어 점주와 이야기를 나눠봤다.
시니어 디지털 교육의 필요성
우아한형제들의 가치경영마케팅팀 김민지, 정욱진 씨는 “시니어 사장님들은 ‘하고는 싶은데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 몰라서’라는 말씀을 정말 많이 하셨다. 그걸 보며 가장 필요한 것은 디지털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장벽을 낮추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면서 시니어 점주를 위한 교육이 마련된 배경을 설명했다.
교육을 수강한 박기웅(66) 씨는 서울 강북구 ‘미삼참치’의 사장이다. 10년 넘게 식당을 운영한 그도 코로나19를 피해갈 수 없었다. 이에 배달의민족도 이용하게 됐고, “온라인을 해야 하나 생각했지만, ‘내 나이가 몇인데…’라는 불안감과 걱정이 컸다”고 밝혔다. 때마침 공고를 접하고 교육을 듣게 됐다.
시니어 디지털 교육 이후 변화
우아한형제들 측은 시니어 점주들이 교육 이후 성장한 점에 대해서 높은 만족감을 드러냈다. 김민지, 정욱진 씨는 “졸업식에서 사장님들이 소감으로 가장 많이 하신 말씀이 ‘이제는 스스로 할 수 있게 되어 정말 뿌듯하다’였다. 사장님의 성장을 목표로 기획됐기에, ‘나도 할 수 있다는 용기’, ‘스스로 해냈다는 성취감’이 가장 큰 성과였다”고 말했다.
‘미삼참치’의 박기웅 씨는 “온라인은 젊은 사람만 하는 특권이라는 생각이 처음에 있었다. 어떻게 저렇게 메뉴를 예쁘게 찍고, 온라인 홍보물을 만드는지. 나와는 전혀 관계없는 일이라 생각했다”면서 교육 이후 생각이 바뀌었다고 털어놓았다.
박 씨는 SNS도 새로 오픈했고, 이제 온라인 소통에도 문제가 없다. 그는 “손님들이 호응도 해주시고, 매출도 굉장히 상승한 것이 눈에 보일 정도다”라고 얘기했다. 그러면서 “제일 중요한 점은 이번 교육을 통해, 앞으로도 내가 온라인으로 장사를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열정을 갖게 되었단 점이다”라고 덧붙였다. 교육을 수강한 대구의 ‘집밥집’ 박창란 씨 역시 매출이 상승했다고 밝혔다.
시니어 디지털 교육 확대되어야
우아한형제들은 이번 시니어 점주 교육이 효과를 발휘했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점주들은 이제 SNS 소통, 블로그 운영, 카드뉴스 제작도 가능한 상태가 됐다고 한다. 무엇보다 점주들과 젊은 층 간의 소통이 자연스러워졌고, 매출도 증진된 점이 큰 성과라고 할 수 있다. 배달의민족은 시니어 점주들을 위한 교육을 더욱 확장할 계획이다.
‘미삼참치’ 박기웅 씨 역시 교육 프로그램 수강을 독려했다. 직접 온라인 홍보와 소통을 해보면서 차이를 피부로 느낀 그는 플랫폼에서 디지털 격차를 줄이고 활용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배운 것 같다. 이에 박 씨는 다른 시니어들도 고충에서 벗어나길 바라는 마음을 전했다.
“나이를 먹으면 막연히 불안감이 생깁니다. 뭔가를 새롭게 한다고 하면 주변에서 눈치도 보이고, 괜히 주책이라는 소리도 들을 것 같고요. 그리고 무언가 시작하기까지는 과연 ‘내가 잘할 수 있을까? 해낼 수 있을까’라는 스스로에 대한 의심도 크고요. 그런데 그런 의심과 불안함이 오히려 교육을 듣기 시작하면서 ‘나도 할 수 있다’는 확신으로 변했습니다. 사장님들, 요즘 너무 힘드시죠? 하지만 66세인 저도 배웠고, 해냈습니다. 불안하고 힘드시겠지만, 이런 좋은 교육과정에 한 걸음 용기를 내시면 열 걸음의 보답으로 돌아오리라 확신합니다. 지금 시작하세요.”
사실 흔쾌히 하고 싶은 인터뷰는 아니었다 고백하고 시작해야겠다. 익명으로 활동하는 사람은 신분 확인이나 팩트 체크가 어려울 수 있고, 독자의 신뢰를 얻기도 힘들다. 게다가 상대는 작가. 전문적인 글쓰기를 하는 상대는 실력을 겨루는 느낌까지 들어 신경이 쓰인다. 그럼에도 그를 모시고 싶었던 이유는 단 한 가지. 그가 연구해온 부자가 되는 방법이 궁금해서다. 카메라 앞이 아닌 무장해제된 상태에서 부자들이 고백한 돈 버는 비밀 말이다.
명칭에서 느껴지듯 유령작가, 즉 고스트라이터(Ghostwriter)는 흔한 직업이 아니다. 정치적 영향력이나 정치후원금 등의 이유로 출판기념회가 필요한 정치인의 회고록이나 연예인, 스포츠 스타의 성공담, 기업공개를 앞둔 기업가의 자서전 등의 출판물을 집필하는 이름 없는 작가를 말한다. 출판사의 기획의도나 의뢰인의 목적에 맞게 대신 글을 써주고, 본인의 이름은 드러나지 않는 대필 작가이기 때문에 고스트라이터라 불린다.
출판업계의 이름난 구원투수
이 유령작가에 대해서는 당연히 인터뷰 후 그가 어떤 인물인지 확인해야 했다. 사진 속 가면을 쓴 그의 모습이 다소 우스꽝스러울 수 있겠지만, 사실 그는 꽤 번듯한, 막 중년이 된 사내다. 누구나 알 만한 대기업의 팀장으로 활동 중이며, 출판계에서는 꽤 이름난 작가로 본인 이름으로 낸 자기계발서도 10권이 넘는다.
그가 고스트라이터가 된 것도 출판사와의 인연 때문이었다. 괴팍한 부자 의뢰인의 등쌀에 못 이겨 다른 작가들이 연이어 쓰러졌을 때 편집자가 그를 찾았고, 단시간 내에 만족스러운 결과물을 내놓은 것이 계기가 됐다. 글솜씨와 친화력, 빠른 일처리 등의 장점이 그를 곤란할 때마다 찾는 업계의 대표적인 ‘구원투수’로 만들었다. 의뢰인의 성향이나 과거의 행적을 확인하기 위해 습관을 따라 하거나 등장하는 장소를 찾아가는 고집스러움은 그를 롱런하게 했다.
그를 만나게 된 계기는 최근 출간한 한 권의 책이다. ‘히든 리치’란 제목 그대로 숨겨진 부자들을 만나 부를 형성한 과정과 현재 자산의 정도에 대해 노골적으로 물어본 책이다. 그는 과거 유령작가로 활동하면서 작성한 집필 노트를 오랜만에 들여다보다 이 책을 기획하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모든 직장인이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겠지만, 저 역시 부자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돈은 이 세계에서 가정을 지키고 생존할 수 있는 수단인데, 직장에서의 소득은 충분한 버팀목이 되어주지 못하니까요. 나름 열심히 살아왔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손에 쥔 것은 많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무슨 방법이 있을지, 어떻게 시드머니를 준비할지 고민하던 중 본가에서 대필 작업할 때의 노트를 발견했고, 일반인들이 따라 할 수 있게 내용을 엮어봐야겠다고 생각했죠.”
단지 과거의 노트를 요약해 끄적인 책은 아니다. 과거 대필해주었던 책 속 주인공이나 그 과정에서 인연을 맺은 이들을 다시 찾아 노크했다. 그러고는 세 가지 질문을 던졌다. “당신의 현재 자산은 얼마입니까”, “처음 시작할 때 수중에 얼마가 있었습니까”, “어떻게 자산가가 될 수 있었습니까”이다. 물론 모든 이들이 정성껏 대답해주진 않았다. 문전박대를 당하기도 했다. 그중에서 성심껏 취재에 응해준 24명의 이야기를 자산 형성의 유형별로 구분해 한 권의 책으로 엮었다. 그는 책에서 부자의 유형을 일단 아끼고 보는 ‘고전형’, 위험을 무릅쓴 ‘전투형’, 자신의 전문 분야를 기반으로 한 ‘안전형’, 천재에 가까운 ‘변칙형’, 물려받은 자산을 늘린 ‘보수형’, 감을 갈고 닦아 수단으로 삼은 ‘천리안형’으로 분류해 설명했다.
뻔하지만 따라 하기 힘든 비결
그는 이 책을 부자가 되고 싶은 대중을 위한 일종의 자기계발서라고 이야기했는데, 읽어본 소감을 더하자면 부자가 된 사람들의 세밀한 사례집에 가깝다. 그들의 자산 형성 과정이 가감 없이 솔직하게 나온다. 더 매력적인 것은 다양한 부자들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자산의 규모로 보면 상대적으로 수수한(?) 백억대 부자에서부터 수천억대 자산가의 이야기도 다룬다. 직업이나 자산 형성 과정도 다양하다. 그 과정에서 느낀 공통점은 바로 ‘돈에 대한 욕망’이었다. 모두 남에게 쉽게 지지 않을 만한 욕망의 소유자로 느껴졌다. 작가도 동의했다.
“책 속에 등장한 한 분이 이런 질문을 던졌어요. 얼마면 무릎을 꿇을 수 있냐? 1만 원? 10만 원? 쉽게 대답하지 못했죠. 그랬더니 이런 말을 하더라고요. 나라면 1원에도 꿇는다. 돈이 생기는 일인데 무릎 꿇는 것이 무슨 대수냐며 말이죠. 그럼 절을 한다면 얼마를 주겠냐고 되묻기도 했어요. 저울질 따위는 필요 없죠. 다만 작은 돈과 큰돈이 있을 뿐이죠. 돈에 대한 욕망을 바탕에 둔 실용적 사고는 평범한 사람들이 이기기 힘들어요. 아마 그 과정에서 비리나 부정이 발생하기도 하는 것이겠죠.”
아끼고, 발품 팔고, 돈을 놀게 놔두지 않고, 가치를 찾아내는 것은 사실 누구나 이미 알고 있는 돈 버는 기본기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기본적인 덕목은 이 책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그럼에도 부자가 되는 비결은 이 기본기를 알고 모르고의 차이가 아니라고 작가는 설명했다.
“사실 책 속 부자들의 자산 모으는 방법은 누구나 알 만한 내용이에요. 하지만 부자들은 그 뻔한 방법 중 자신에게 맞는 길을 찾아 실천했다는 점이 다르죠. 실제로 만나보면 같은 정보를 접하더라도 그것을 대하는 민감성이나 실천력의 차이가 매우 커요. 저는 이 책을 통해서 평범한 사람들도 ‘나도 도전해야겠다, 나도 부자가 되어야겠다’는 욕구가 생기길 바랐어요.”
빚투 그리고 재테크
작가는 복권이나 코인에 매달리는 청춘들에게도 조언을 전했다. 최근 경제지를 중심으로 MZ세대라 불리는 20~30대들이 직장을 통한 자산 형성을 기대하지 않고, 코인이나 주식에 매달리는 ‘빚투 열풍’을 지적하는 기사들이 연이어 보도되고 있다. 20대의 복권 구입 비용은 코로나 이전보다 300% 넘게 증가했단다. 그러나 실제 부자들을 만나보면 월급쟁이 부자들도 적지 않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사회가 계층화되고 고착화되었다는 분석이 많죠. 사다리가 치워져 젊은 세대가 계급을 극복하기 어렵다는 평가도 있고요.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오를 길이 잘 안 알려져 있을 뿐이에요. 블록체인, 메타버스 같은 첨단 기술의 발전은 젊은 직장인들이 부자가 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고 있어요. 사실 이런 첨단 분야는 전통적인 부자들이 접근하기 힘들죠. 정보를 가지고 분석할 수 있는 사람이 유리할 수밖에 없어요. 예를 들어 일반인은 호재가 있을 때 삼성전자에 투자하지만 기술과 공정, 소재를 이해하는 사람은 관련주에 투자해 더 큰 이익을 얻기 마련이죠. 마치 용의 머리는 작게 움직이지만 꼬리는 크게 휘청이는 것과 같아요. 기술의 맥락을 이해해야 하는 것이죠. 이런 능력은 회사 생활에 전념하지 않으면 생겨나지 않죠. 또 그들이 근무하는 판교나 가산디지털단지에서 어떤 회사가 망해 나가고, 빈자리에 어떤 회사가 들어오는지, 주변의 동향을 파악하고 이해하는 과정이 투자의 소재가 될 수 있어요. 옛날처럼 큰 시드머니가 필요하지 않은 것이 최근의 투자 트렌드이기도 하고요. 갈수록 기회도 많아지리라 생각해요.”
제2의 인생을 꿈꾸는 ‘마음만은 청년’인 시니어들에게도 기회는 열려 있다는 이야기도 했다. 그의 책을 자세히 보면 직업상담사나 창업 컨설턴트들이 하는 이야기와 맥락이 닿는다.
“은퇴 후 평생 직업이었던 분야를 접고 새로운 분야를 찾아 도전하시는 분이 많잖아요. 하지만 성공 확률은 대단히 낮죠. 부자가 되는 방법도 비슷해요. 본인이 직장 다닐 때 잘 알던 해박한 분야에서 더 공부하고, 성과를 낼 수 있는 업무 영역으로 확장시키는 노력이 더 유리해요.”
흔히 몇 차례 소심한 시도가 실패하는 경험을 하면 재테크 무용론자가 되기 십상인데, 이 책에는 재테크를 통해 부자가 된 여러 사례가 등장한다. 각종 자기계발서에 나오는 재테크의 전형 같은 부자도 등장한다. 이에 대해 작가는 “부자가 목표는 아니더라도 재테크는 하는 것이 맞다”고 이야기한다.
“큰돈을 벌지 않더라도 재테크는 누구나 해야 하는 수단이라고 생각해요. 거시적 관점에서 보면 부는 팽창하고 있고, 세상 사람들은 조금씩 부자가 되고 있어요. 모두 다 움직이고 있는데, 나 혼자만 멈춰진 일상을 유지한다는 것은 결론적으로 조금씩 가난해지고 있다는 뜻이 돼요. 사회가 부유해지는 것에 맞춰 재테크를 통해 나의 재산을 조금씩 늘려야 소득수준을 유지할 수 있어요. 재테크는 사회생활을 하는 모든 사람에게 필수적인 일이 된 셈이죠. 과거에는 가만히 있어도 시간의 흐름만으로 연공서열에 따라 월급이 오르고 집값이 올랐지만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닙니다. 관심을 갖고 흐름에 맞춰 함께 달려줘야 해요.”
뒷조사까지… 부자들의 ‘면접’
각 분야의 성공한 명사들을 취재하다 보면 첫 만남은 ‘테스트’로 느껴지는 경우가 있다. 본인을 상대하는 기자의 능력이나 이해도가 어느 수준인지 궁금해한다. 일종의 면접이다. 작가는 “부자들 중 대부분이 그런 테스트를 즐기고, 상대가 대필 작가라면 그 강도는 훨씬 세진다”고 말했다.
“간단히 훑어보거나 몇 마디 이야기 나누는 것으로 ‘테스트’가 끝나는 경우도 있지만, 심한 경우도 흔해요. 감당 못 할 만한 행동을 던지고 반응을 보는 경우도 있어요. 약속 시간에 늦는다거나, 들어주기 힘든 부탁을 하는 식이죠. ‘이거 하면 얼마 버냐’며 묻기도 하고. 또 말없이 빤히 쳐다보는 경우도 있고, 일부러 단답형으로 인터뷰에 응하는 부자도 있었죠. 제 뒷조사를 몰래 한 분도 있었어요.”
그 까다로운 면접들을 어떻게 통과했냐고 물었더니 대답은 간단했다. ‘있는 그대로 보이는 것’뿐 다른 비결은 없었다고 한다. 그는 “그저 비굴해 보이지 않게 있는 그대로 보여줬다”고 설명했다.
그런 과정을 통해 만난 부자들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작가는 간단히 유형화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드라마 속 부자와 같은 스테레오 타입은 오히려 만나기 힘들다고 그는 설명한다.
“최근에는 젊은 부자들이 많아져서, TV 속 회장님 같은 분은 그리 많지 않아요. 자린고비 같은 타입이 있는 반면, 설렁설렁 있는 대로 벌고 쓰고 하는 사람도 있죠. 애써 공통점을 찾자면 본인들이 자신의 길을 선택했다는 점이에요. 가장 인상 깊었던 분은 가족을 위해 애쓰셨던 분이에요. 흔히 부자가 되면 가족이나 친척들과 등을 진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아요. 가난한 부모에 가정사가 행복하지 않은 분이었는데, 부자가 된 뒤 가족에게 베풀면서 사시더라고요. 흔히 알고 있는 부자의 이미지와는 반대되는 분이셨죠.”
부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하고 싶었던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작가는 부자가 되었을까? 부자가 되기 위해 노력 중이라면 어떤 길을 가고자 할까?
“아직 부자가 되진 않았죠. 많은 이들과의 교류 속에서 배우려 노력하고 있어요. 자신의 비법이나 투자 방법 등을 서슴없이 알려주는 분도 많아요. 부자들은 자기 비법을 숨긴다는 것도 옛말이죠. 그렇다고 당장 부자가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안 해요. 회사원 신분에서 제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도 그리 많지 않으니까요. 책의 구분법으로 설명하자면, 지금은 ‘고전형’과 ‘안전형’의 방식을 따르는 정도입니다. 제가 잘 아는 분야를 바탕으로 기회를 엿보는 중입니다. 다만 부자들과 함께하면서 저 스스로를 그들과 동일시하거나 혹은 부정적으로 변하지 않으려는 노력을 꾸준히 하고 있어요. 곁에 있다 보면 그들에 대한 대접을 저에 대한 것으로 착각하기 쉽거든요. 그저 삶의 좋은 자극이 될 수 있게 유지해나가고 싶습니다.”
중년은 삶의 인터미션이자 새로운 기로에 선 시기다. 늦은 때는 없다지만 새로운 도전은 겁이 난다. 가슴 뛰는 열정은 사라진 지 오래. 연극 연출가 안은영(55)도 평범한 중년들과 다르지 않았다. 연극에 마음을 빼앗기기 전까지는. 불의의 사고로 인한 시련도 있었으나, 연극은 활기찬 2막을 위한 불쏘시개가 됐다. 아마추어 극단을 이끄는 연출가로서 연습실에 들어설 때 가장 행복하다는 그녀를 만나 연극의 매력과 도전하는 중년의 삶에 관해 얘기를 나눴다.
코로나19 이후 막을 펼치지 못한 채 굳게 닫힌 극장이 수두룩하다. 시니어 배우들과 함께 극단을 이끄는 그녀도 연출가로서 고심이 깊었다.
“아마추어 극단이라 아직 연습실과 극장이 없다. 지난해에 연습실과 극장이 문 닫으면서 한동안 참 힘들었다. 대안으로 단편영화나 다큐멘터리를 찍거나 UCC 공모전에 작품을 제출하면서 단원들과 영상 분야로 과감히 뛰어들었다. 50·60대분들이 반사판을 들거나 카메라로 촬영하면서 스태프로 임했다. 하지만 할수록 연극에 대한 갈증이 더 커졌다. 줌(ZOOM)으로도 연습을 했는데 한계가 많았다. 그래서 현재는 조심스럽지만 일전에 무대에 올렸던 ‘강 여사의 선택’을 바탕으로 대본을 보고 진행하는 입체 낭독극을 준비 중이다. 대본을 보고 하는 연극이지만, 80% 이상을 암기한 상태로 진행하고 실제 연극과 유사하게 음향이나 조명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자 한다. 우리가 찾은 현실적 대안이다. 지금도 매주 연습을 하고 있다.”
여성의 이름을 되찾는 일
연출가로 시작한 인생 2막. 이전에는 직장 때문에 10년 넘는 세월을 미국과 멕시코에서 보냈다. 타지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귀국하려던 찰나, 큰 교통사고를 당해 죽음의 문턱을 잠시 밟았다가 돌아왔다. 그 교통사고 때문에 척추 쪽에 심각한 장애가 생겼다.
“정말 고통스러워서 밤마다 울었다. 살아 있다는 게 기적과도 같았다. 그래도 다행인 건 심리적 절망에는 빠지지 않았다. 하지만 현실의 벽은 정말 무서웠다. 타지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는데, 너무나 준비 없이 귀국했다. 중장년의 재취업을 안일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취업도 안 되고 경제적 형편도 어려웠다. 이래저래 몸과 마음이 편할 날이 없었다. 심지어 삶을 비관하고 저버릴 마음도 품었었다. 귀국해서 심리적 바닥을 제대로 찍었다.”
연극은 고통의 나날 속에 찾아온 멋진 반전이었다. 서울시50플러스재단 홈페이지에 뜬 연극교실 모집 공고가 우연히 눈에 들어왔다.
“공고를 보는 순간 파노라마처럼 지난날이 생각났다. 어린 시절 동네 아이들을 모아서 동화 ‘의좋은 형제’로 연극 놀이를 하던 장면이 퍼뜩 떠올랐다. 생각해보니 학교, 직장, 행사 등 어디서든 필요할 때마다 연극을 연출하고 있었더라. 잊고 있었던 그 시절의 즐거움을 다시금 내 삶에 등장시키고 싶었다. ‘내일 죽어도 오늘은 연극 한바탕 하고 죽자!’는 마음이었다. 물론 성치 않은 몸 탓에 죽을 만큼 아픈 고통을 감수해야 했지만, 후회는 없다.”
이를 계기로 연극교실에서 만난 인연들과 함께 ‘강 여사의 선택’, ‘말괄량이가 길들이기’와 같은 창작극 2편을 무대에 올렸다. 평균 나이 55세 배우들과 함께 이뤄낸 결과였다.
“몸을 생각하면 정말 무모한 도전이었지만, 오히려 연극을 하면서 체력이 많이 길러졌다. 버티는 힘이 생긴 것이다. 연극이 정말 좋은 재활치료가 됐다. 또한 연출가로서 중년의 목소리를 연극을 통해 알리고 싶었다. 우리 사회는 중년 여성에게 ‘여성다움’을 요구할 뿐, 정작 그들의 마음이 어떤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묻지 않더라. 이름은 있으나 누구의 엄마, 누구의 딸로 불리며 무명(無名)이 된 그녀들에게 연극으로나마 다시금 존재의 의미와 정체성을 되찾아주고 싶었다.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하나의 꽃이 된다는 어느 시인의 시처럼 말이다.”
창작극 ‘강 여사의 선택’은 늙어가는 부모와 커가는 자녀들 사이에서 중년의 주인공이 겪는 애환과 동시에 존엄사를 둘러싼 선택에 관한 내용이다. 존엄사를 바탕으로 삶과 죽음의 의미를 중년 여성인 주인공의 목소리를 통해 묻는다. 덧붙여 ‘말괄량이가 길들이기’는 셰익스피어의 원작과 달리 미혼의 중년 여성이 길들여지는 객체에서 벗어나 주체적으로 오디션을 통해 배필을 찾는다는 얘기로, 그 과정에서 중년 여성의 주체적인 사랑을 보여준다. 오롯이 중년에 의한 그리고 중년을 위한 창작극이다.
문화적 게릴라를 꿈꾸며
그녀는 2019년부터 단원들과 함께 표현하는인생연구소협동조합을 설립하고, 이 협동조합의 대표이자 치유적 글쓰기와 표현력UP 훈련 강사로 활동 중이다.
“삶에서 표현이 정말 중요한데, 우리나라 중년들은 표현에 서툴다. 나 역시 그랬다. 표현이 서툴면 오해가 생기고, 오해가 쌓이면 불화로 이어진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연극을 바탕으로 표현력을 기르는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연극은 표현의 예술이고, 배우는 하나의 캐릭터를 통해 삶을 배우지 않나? 이처럼 창작극을 통해 다양한 역할을 체험하면서 감정을 느끼고, 공유하면서 서로의 다름을 직접적으로 체험하는 것이다. 말로 힘들면 글로 써보게끔 한다. 그 과정에서 삶의 희로애락(喜怒哀樂)을 다시금 배운다.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인 동시에 다양한 표현을 익힐 기회다. 표현이 다채로울수록 중년의 삶은 더 풍요로워진다.”
그렇다면 연출가와 대표를 오가며 활약하고 있는 그녀의 희로애락은 무엇일까?
“협동조합의 대표보다 연출가란 말이 좋다. 물론 대표로서 늘 책임감을 느낀다. 조합원인 우리 단원들을 위해 여러 가지 활동을 시도하고 있다. 책도 쓰고, 강연도 다닌다. 아직 수익 모델이 없기에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다. 현실의 벽이란 게 참 무섭다. 연극을 위한 살림을 꾸린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다. 하지만 연습실에 올 때만큼은 정말 행복하다. 배우들과 함께 호흡하며 구현하고자 하는 캐릭터에 대한 견해를 나눈다. 물론 서로 조금씩 어긋날 때도 있지만, 그럴수록 나의 의도를 명확히 설명하고 또 설득한다. 완벽히 역할에 몰입한 배우를 보면 정말 아름답다.”
끝으로 중년에게 필요한 마음가짐을 설명하며 앞으로의 계획을 밝혔다.
“중년에게 필요한 건 존중과 에너지다. 늙어갈수록 자신을 하찮게 여기기 쉬운데 이러한 태도는 남을 대할 때도 고스란히 이어진다. 반대로 자신을 존중하고 아낄수록 남도 귀하게 대한다. 또한 우울감에 빠져서 혼자 있는 것보다는 밖에 나오기를 추천한다. 밖에서 어울리며 창작활동을 통해 자신 안에 감춰진 에너지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 나 역시 그랬다. 중년도 할 수 있다는 걸 꾸준하게 보여주고 싶다. 최종적으론 문화적 게릴라가 되고 싶다. 중년으로 구성된 문화집단으로 문화예술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고 싶다.”
자기다움의 아름다움
사랑과 감기는 숨길 수 없다고 했나? 연극에 대한 그녀의 애정과 열정은 인터뷰한 소극장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 안에는 중년을 바라보는 깊은 사유와 자신의 성찰을 바탕으로 한 내공이 존재했다. 그녀에게 연극은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그녀는 연극을 통해 중년‘다움’, 남성‘다움’, 여성‘다움’ 등 규격화된 이해가 아니라, 자기다움을 바탕으로 한 아름다움을 좇고 있었다.
인터뷰를 통해 그녀의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지만, 이 시간을 통해 일종의 아마추어리즘(Amateurism)을 엿볼 수 있었다. 흔히 아마추어를 초보자로 비견하지만, 아마추어리즘의 핵심은 가능성과 순수한 열정이다. 물론 가능성과 열정으로 해결하기엔 현실의 벽이 높을 때도 있다. 하지만 삶에서 무언가를 꾸준히 좋아하는 것만큼 귀한 재능은 없다. 그녀가 가진 아마추어리즘의 아름다움이 더 많은 이들에게 닿기를 기대하며 마친다.
긴긴 산중 살림을 정리하고 충주 시내 복판에 있는 아파트를 정처로 삼은 것도 어쩐지 그답지 않지만, 술을 자못 꺼리는 기색이야말로 이변이라면 이변이다. 마주 앉자마자 술부터 목으로 털어 넣는 게 김성동(75)의 관습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객이 들고 간 술병을 아예 쳐다보지도 않는다. 6, 7년 만에 재회한 참이다. 완연하기론 무자비한 세월이 그를 훑고 지난 뒷자리의 스산함이다. 백조 털처럼 희디흰 머리칼이야 개결한 느낌을 주지만, 눈빛에 실린 기운은 예전과 딴판이다. 억병으로 취하고도 몽롱해지는 일 없이 시퍼렇던 눈빛에 이젠 우수와 피로가 반반씩 얹혀 있다.
김성동은 시대가 낳은 소설가다. 시대를 대표할 지경으로 이름을 드날린 작가이기도 하지만, 질곡의 한 시대가 그를 문학의 바다에 밀어 넣었던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양친이 살았던 시대의 파랑이 그에게까지 엄습해 평생의 족쇄로 작용했다. 소설가가 되지 않았다면, 문학이라는 쪽배를 얻어 타지 않았다면 벗어나기 어려웠을 굴레였다.
“나 같은 출신이 정상적으로 살 수 있었겠나? 좀도둑, 부랑아, 또는 알코올중독자로 전락하기 십상이었다. 나에겐 그나마 재능이라는 게 있어 타락하지 않고 소설가로 살아온 셈이다.”
김성동이 말하는 ‘출신’이란 실로 광기에 찬 시대의 산물이며 천형처럼 가혹한 것이었다. 한마디로 그는 ‘빨갱이’의 자식, 불온한 씨앗이었다. 일제강점기 때 좌익 독립운동가였던 아버지는 한국전쟁 와중에 처형됐고, 남편의 이념과 이상을 공유했던 어머니 역시 지역의 여성동맹 위원장으로 활동한 죄목으로 옥살이를 했다. 할아버지와 큰삼촌 역시 좌익 간부였다. 집안이 통째 소용돌이에 뛰어들었으니 이후의 풍비박산과 후유증의 크기와 깊이에 대해선 두말하면 잔소리. 김성동은 철들기 전부터 철창 없는 감옥 같은 세상에 던져졌으며, 철들고 나서는 두려움과 외로움 외에 자신의 내면에 들어 있는 정서가 아무것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저주와도 같은 붉은 낙인. 삐딱한 시선들. 전망 부재의 미래. 무엇보다 괴로운 건 연좌제의 사슬이었단다.
“연좌제에 묶여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어려웠다. 공무원으로 취직할 수 없었고, 군인이 되더라도 장교가 될 수 없었으며, 사법고시에 붙을 경우에도 임용의 길이 막혀 있었다. 이게 연좌제에 따른 ‘삼불(三不)의 덫’이다. 출세를 꿈꾸기는커녕 당장의 호구지책이 막막했지. 그래 고3 때 출가해 절밥을 얻어먹고 살았다. 절 아니고는 갈 곳이 없었고, 중 아니고는 할 짓이 없었던 거다.”
승려 생활을 하다가 소설가로 등단했지? 장편 ‘만다라’로 문단과 대중을 사로잡았고.
“세상에서 박수를 치더라고. 돈과 명예도 얻었다. 이렇다 할 ‘쯩’을 가지기 힘들었던 나에게 소설가라는 ‘쯩’이 주어진 건 하나의 활로였다. 연좌제가 나를 문학으로 밀어 넣은 셈이다.”
2018년엔 6권짜리 대하소설 ‘국수’(國手)를 출간해 저력을 과시했다. 자그마치 27년간의 집필을 통해 완간한 이 소설로 선생의 존재감이 새삼 부각됐다. ‘국수’를 완간한 감회가 각별했겠다.
“일을 좀 해냈다는 안도감과 해방감을 느꼈다. 미심쩍긴 하지만 비로소 말년에 소설을 좀 썼다는 기분, 그런 거.”
미심쩍다?
“제대로 된 소설이 아니라는 얘기다. 원래 15권으로 완성을 보려 했으나 미완에 그쳤으니까. 한 시대의 뒤안길에서 이름 없이 살다 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장강대하로 펼치고자 한 의도에 미달한 작품이라 만족할 수 없었다. 그보다 아쉬운 건 순수한 조선말을 더 많이 찾아내 문장에 끌어들이지 못했다는 점이다.”
“‘국수’를 완독한 평론가가 있을까?”
‘국수’는 조선 말엽의 정치사회적 격변을 민중사적 관점으로 세밀하게 풀어헤친 작품이다. 세월 따라 허공으로 흩어진 전통사회의 토속어들을 푸짐하게 되살려내기도 했다. 고고학자가 유물을 발굴하듯이 지독한 집념으로 수집한 조선말을 문장에 대대적으로 도입했는데, 이는 ‘국수’가 가진 정체성의 핵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휴가 때 손에 든 책이라는 게 알려지면서 대중의 관심을 사기도 했다.
나는 김성동 소설의 애호가지만 ‘국수’를 다 읽지 못했다. 조선말들의 도도한 행진에 질려서다. 오염되지 않은 순정한 토속어들은 아름답고 고귀하지만 소화하기 어렵더라. 평단의 반응은 어땠나?
“반응? 평론? 그런 거 거의 없었다. 평론은 고사하고 ‘국수’를 완독한 평론가가 단 한 사람이라도 있었을까? 순수한 우리말들 앞에서 다들 그냥 나가떨어진 것 같다.”
진땀을 빼게 하는 작품이 ‘국수’만은 아니다. 김성동이 자신의 대표작으로 꼽는 구도소설 ‘꿈’에서도 조선말을 소낙비처럼 쏟아냈다. 원로작가 서정인은 ‘꿈’에 대해 말하길, ‘이를 악물고 읽었지만 완독에 실패했다’고 했다.
쉽게 읽히면서도 재미와 가치를 느낄 수 있는 작품이 아니고선 독자들의 환심을 사기 어려운 게 요즘의 독서 시장이다. 조선말을 과도하게 구사했다는 생각은 안 해봤나?
“전혀! 조선말에 관한 나의 관심은 신앙에 가까울 정도다. ‘찔레꽃머리’라는 조선말의 뜻을 아나? ‘모내기철’을 뜻하는 단어인데 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우리 조상들이야말로 타고난 시인이었다.”
언어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천한다. 시대의 감수성을 반영하며 자생적으로 유전한다. 게다가 한글은 어떤 말이든 흡수하는 포용력을 갖고 있지 않나?
“요즘의 우리말은 이미 왜색과 양색에 물들어 심각하게 훼손되었다. 적어도 시인과 소설가라면 모국어의 원형을 지켜낼 책무를 다해야 하지 않겠나? 순교처럼 치열하게.”
작가라면 다들 개성을 돋우기 위해 방울방울 피를 뿜듯이 글을 쓴다. 한국 작가들의 소설 품질에 관해서는 어떤 생각을 하는지?
“자기만의 빛깔을 내는 작가가 드물더라. 하나같이 영어나 일본어 번역체 문장에 길들여져 개성을 느끼기 어렵다. 저자의 이름을 가리고 작품을 읽어보면 한 사람이 쓴 소설처럼 문체가 다 똑같더라고. 문장 한 줄만 읽고도 누구의 작품인지 대번에 알 수 있는 문체를 구사하는 작가가 하나라도 있던가?”
김성동은 널찍한 아파트에서 혼자 산다. 베란다로 들이치는 햇살을 비스듬히 받으며 의자에 고즈넉이 앉은 그의 몸에 음영이 짙게 드리워져 한 점 조각상을 바라보는 것 같다. 벽마다 가득 채워진 책장. 심심파적으로 쓴 서예들. 그가 ‘성자’라 부르는 부모님 사진들. 비승비속(非僧非俗)의 그가 새벽마다 그 앞에 좌정하는 미륵불상 하나. 예전의 산중 살림과 크게 다를 게 없는 집 안 풍경이지만 뭔가 밋밋한 분위기다. 문장의 미화 작업에 도가 튼 반면, 환경미화엔 젬병이라 그저 어질러놓고 사는 건 여전하지만 생기의 함량이 예전과 다르다. 전에는 발이 달렸는지 날개가 달렸는지 책들이 우르르 책상과 방바닥으로 내려와 춤을 추었다. 육필 원고 더미들이 덩달아 생동하는 스텝을 밝았다. 말하자면 전엔 창작 열기로 후끈했다. 그가 사는 곳이 창작의 천국 아니면 지옥임을 알게 했다. 한데 지금은 공기가 다르다.
연좌제와 사찰이 글 쓸 힘을 추동해
내가 아는 김성동은 소설이라는 기저질환을 앓는 이다. 온몸으로 소설의 현(鉉)을 탄주하는 인물이다. 소설이 써지지 않으면 마치 지구에 빙하기가 도래한 듯 몸을 떨며 절규하고, 날밤을 지새워 술을 마시며 뜻대로 풀리지 않는 작품에 사무쳐 각혈과도 같은 넋두리를 토하기를 밥 먹듯이 하던 사람이다. 그의 술타령은 과도해 징그러운 구석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순정한 문학정신엔 경이로웠다. 그런데 이제 소설을 손에서 놓았나? 75세란 물러설 나이? 그가 말하길 “힘이 빠져 소설을 쓸 엄두를 낼 수 없다”는 게 아닌가.
“소설은 기운이 있어야 쓸 수 있다. 난 ‘국수’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소진했다. 나이도 있고, 이제 일을 벌이기보다 정리하는 단계다. 절대적인 에너지를 갖고 소설에 몰입했던 시절은 저문 셈이다. 여전히 글을 쓰긴 한다. 소설 대신 역사 에세이를.”
올해 72세인 하루키는 새벽마다 1시간씩 마라톤을 한다더라. 재능보다 체력으로 승부를 내는 세계, 그게 소설 쓰기의 한 측면일지도.
“힘이 달리면 글을 물고 늘어질 수 없다. 단어 하나를 끝없이 파고드는 게 나의 글쓰기인데 그게 되지 않더라고. 몇 날 몇 밤씩 육필 원고를 쓸 수 있었던 과거의 체력은 이제 남아 있지 않다. 술 마시기도 힘에 부치더라. 마시다 보면 어느 순간 필름이 딱 끊기거든. 뭘 해도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
소설을 쓰지 않는 선생을 예상하지 못했다. 죽는 그날까지 펜을 잡을 기세에 충천했었으니까.
“요즘 내가 평생 맛보지 못한 안도감을 느낀다. 왜냐고? 연좌제 사슬이 풀렸기 때문이다. 2년 전에 어머니가 타계하면서 끈질기게 따라붙었던 사찰(査察)에서 비로소 해방됐거든. 어머니 작고 전에는 매달 한 번씩 기관원이 찾아왔었다. 그 공적 라인이 사라지자 평온감이 몰려들더라고. 한편으로는 서운하던데!”
후련한 게 아니고 서운했다고?
“난 글을 쓰기 시작한 이후 평생 글 감옥에 갇혀 살았다. 목이 조여드는 것 같은 강박감을 가지고 소설을 썼거든. 사방팔방으로 꽉 막힌 유폐의 심정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편이 소설이었으니까. 소설이 아니고선 살 수 없었다. 바꿔 말하자면 연좌제와 사찰이 나로 하여금 글 쓸 수 있는 힘을 추동시켰다고. 그런데 사찰이 끝나자 긴장감이 확 풀리더군. 이게 소설을 쓸 힘을 앗아간 요인이기도 하다.”
비바람의 횡포가 있어야 꽃을 피우는 나무. 그가 체화한 창작의 생태계가 그쯤? 족쇄가 사라지자 맥이 풀려 소설 쓸 맛을 잃었다는 얘기에 삶의 역설이 느껴져 씁쓸하다. 감시와 억압의 공기를 마시며 우울하게 살아온 사람에게 뒤늦게 찾아온 평온과 고통의 산물인 소설의 빛, 이 둘 중 어느 쪽이 더 값진 인생의 열매일까.
노년이란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기 좋은 때다. 눈길이 순해지고, 적당한 둔감으로 인생을 더 따뜻하게 바라볼 수 있을 터인데, 김성동의 구름처럼 나른한 눈빛으로 보자면 그는 어느덧 바깥보다 안을 무심히 들여다보는 일에 익숙해졌나 보다. 맵찬 언설을 예사로 쏟아냈던 그의 입에서는 이제 온순한 언어들이 데굴데굴 굴러 나온다. 이런 그를 여전히 기습하는 건 외로움, 또는 허무다.
“불경(佛經)은 가르치길 일체가 무상하니 집착을 놓으라 한다. 그러나 무슨 수로 집착에서, 욕망에서 벗어나겠나? 소설이라는 반성문을 통해 정직하게 나를 들여다보기를 거듭했지만 가벼워지기 어려웠다. 끈질기게 들러붙는 건 늘 외로움이라는 놈이었다. 실존의 고독, 이건 어쩔 수 없는 화두다. 더 큰 덩어리에서 보면 인생은 결국 허무한 것이고.”
보이는 것 없는 길 위에서 홀로 앓기. 인생사 그렇게 덧없더라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