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도 저물어가는 12월 10일. 마포아트센터에서 우연히 정미조 콘서트를 관람 할 수 있는 행운을 얻게 되었다. 브라보마이라이프 동년기자 몇 명에게 특별히 연말보너스 처럼 돌아온 선물이었다. 오래된 서재에서 먼지를 털어내고 꺼내 든 책 한 권, 책장을 넘기다 책갈피처럼 끼워진 빛바랜 네잎클로버나 꽃잎들을 발견할 때가 있다. 빛바랜 책갈피에 우러나오는 은은한 향기처럼 정미조는 우리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번 콘서트는 정미조가 1년 반 만에 발표하는 새 앨범을 기념하는 무대다. 그는 45년의 긴 세월 동안 가수에서 화가로, 다시 가수로 돌아오는 드라마틱한 여정을 걸어왔다. 정미조는 작년, 37년 만에 가요계에 극적으로 복귀하며 많은 화제를 만들었다. 컴백 앨범은 언론과 평단으로부터 “청취의 환희” “결코 세월이나 명성에 빚지지 않은 앨범” 등의 절찬을 받았다. ‘휘파람을 부세요’ ‘불꽃’ ‘사랑의 계절’ 등 주옥같은 히트 곡을 줄줄이 쏟아냈다. 1972년 한국 가요사에 불멸(不滅)로 남은 ‘개여울’을 발표하고 일약 스타덤에 오른 후, 돌연 가요계 은퇴를 선언한 1979년까지 7년간은 정미조를 위한 시간이었다. 그의 ‘마이 웨이’는 아직 진행 중이다.
이번 공연엔 12살 ‘제주 소년’ 오연준이 특별 게스트로 출연했다. 오연준은 정미조의 새 앨범에 수록된 ‘바람의 이야기’를 함께 불렀다. 그리고 오연준 소년 단독으로 크리마스 캐럴을 불러 많은 갈채와 사랑을 받았다.
공연이 끝나고 나오면서 네 명이 근처에 있는 자그마한 음식점으로 들어갔다. 18시 공연이라 저녁을 먹지 않고 관람했기에 '오삼불고기'를 시켜 뒤풀이 삼아 막걸리잔을 돌렸다. 건조한 공연장으로 컬컬했던 목을 추기면서 공연에 관한 뒷담화를 나누기 시작하였다. 지나간 세월만큼 원숙하면서도 열정적으로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던 그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최고의 히트작으로 꼽혔던 ‘개여울’은 김소월 시에 곡을 입혀 부른 노래로 유명하다. 개여울은 어떤 여울일까? 누군가 궁금해 했다. 개여울은 명사로써 개울에 물이 얕거나 폭이 좁아서 물살이 빠르게 흐르는 곳이라는 뜻이다. 그리 깊지는 않지만 물살이 빠른 곳으로 개울의 여울목이란 뜻이기도 하다. 노래 가사 중에 ‘가도’는 ‘가기는 가도’의 줄인 말로 개여울가에 앉아 여울져 흐르는 물을 바라보며 연인인 그가 간다는 허전함을 애써 마음 쓰지 않으려는 애틋한 마음과 연민의 정을 느끼게 한다. 우리가 어린시절 여울에서 돌수제비를 날리던 기억도 어렴풋 떠오른다.
한창 잘 나가던 시절, 음악을 접고 갑자기 파리로 미술 유학을 떠난 정미조의 삶이
과연 성공적이고 좋았던 삶이었을까? 하는 논제를 가지고 서로의 생각을 들어보는 시간도 가졌다. 의견의 차이는 있었지만 대부분 “꽤나 의미 있고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한 세상 살아가면서 ‘우물을 판다’ 의미도 중요하겠지만, 음악 말고도 자신이 좋아하던 일을 선택한다는 것이 쉬운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유학을 떠나 새로운 배움을 통해 다시 돌아와 대학에서 당당하게 미술을 가르치는 교수로 자리매김한 삶이 칭찬받아 마땅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그는 고희[古稀] 가까운 나이에 잊고(?) 지내왔던 음악계로 컴백했다. 작년에는 신곡 귀로(歸路)를 발표하면서 앨범도 내고, 이렇듯 콘서트를 통해서 음악적으로 자신의 건재함을 끊임없이 과시하는 모습이야말로 경이적이 아닐 수 없다. 특히 귀로(歸路)의 노랫말과 영상은 정미조의 해석처럼 ‘담벼락에 기대 울던 작은 아이’ 같은 자신의 어린 시절이 생각나 울컥한다는 의미에 공감이 간다.
중년의 세월을 묵묵히 이고 가는 우리가 그를 보면서 용기를 북돋을 수 있어 의미가 깊었다. 홀짝홀짝 막걸리 네 병을 해치우고 밥 두 공기를 볶아서 마무리 하면서 겨울 밤의 우리들만의 파티는 끝났다. 밖으로 나오니 찬바람만 휭 하니 몰려와 취기를 건드린다.
“어린 꿈이 놀던 들판을 지나 아지랑이 피던 동산을 넘어 나 그리운 곳으로 돌아가네~”…
필자는 3년 전에 은퇴를 했다. 은퇴를 몇 년 앞두고 이후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심하게 된 것은 은퇴 준비 없이 살아가는 노인들의 비극적인 삶이 매스컴을 통해 보게 되면서부터다.
필자도 쉼 없이 달려온 직장생활 43년 만에 완전한 자유인이 되었다. 각박한 사회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쳤던 깨알 같은 시간들을 뒤로 한 채 텅 빈 세상 속으로 내동댕이쳐진 듯한 허전함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한 집안의 가장으로, 남편으로, 두 아이의 아버지로 허둥대며 살아왔던 시간들을 돌아보니 정녕 자신은 잊어버리고 살아온 지난날이었다.
어린 시절, 고향집 사랑방은 필자의 큰아버님께서 운영하시던 서당(書堂)이었다. 밤이 되면 사랑방에서 천자문 읽는 소리가 낭랑하게 울려퍼졌다. 틈틈이 서당으로 불러 천자문을 읽고 쓰기를 가르쳐주셨던 큰아버님의 배려로 제법 붓 잡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서예 대가 김상용 선생님께 사사
정년퇴직 후에는 그동안 잊고 살아온 서예를 다시 해보겠다는 희망의 불씨를 가슴속에 품고 있었다. 아마도 어린 시절의 천자문 읽는 소리와 아련한 묵향이 내면에 잠재되어 있었던 것 같다. 퇴직이 몇 년 안 남은 어느 날 우연한 기회에 서예 대가 김상용 선생님을 만나 정식으로 서예를 배우기 시작했다. 비록 늦은 나이에 입문했지만 누구보다 열심히 연마하던 필자에게 선생님은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지도해주셨고 글쓰기 이전에 마음가짐의 정갈함을 늘 강조했다.
어느 날 오후, 종로3가에 있는 서실(書室)을 찾았다. 일주일에 한 번씩 서예 개인지도를 받는 곳이었다. 필자는 각별히 신경을 써주시는 스승님을 위해 가끔씩 간식을 준비해 찾아가곤 했다. 그날도 간식거리를 준비해 서실을 찾았는데 마침 후배 문하생이 지도를 받고 있었다. 느닷없이 필자가 등장하자 그날의 마지막 수업을 끝내신 선생님께서는 막걸리 한잔 하자며 극구 붙드셨다.
평소에도 선생님과 가끔씩 들르는 종로3가 단골 녹두빈대떡 집에서 스승과 제자가 막걸리 사발을 앞에 놓고 세상 사는 얘기에 푹 빠졌다. 선생님은 값비싼 양주에 진수성찬을 차려준다 해도 이렇게 조촐한 이야깃거리를 안주 삼아 기울이는 막걸리 한 잔이 훨씬 더 행복하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선생님과 호젓한 빈대떡집에 마주 앉아 ‘막걸리 한잔의 행복!’으로 담소삼매경에 빠지다 보니 어린 시절 시린 손 호호 불며 주전자 들고 막걸리 받으러 가던 추억이 떠올랐다. 고사리손에 주전자 들고 고개를 넘던 기억은 아버지와 관련한 소중한 추억 중 하나다.
필자는 서예에 입문하면서 선생님의 지도하에 남다른 노력을 기울이면서 붓글씨를 배워나갔다. 다음 시간까지 해갈 과제물을 숙제로 받아오는 날이면 자정이 넘는 시간까지 몇 번이고 쓰기를 반복했다. 다음 날, 그중 제일 잘 썼다고 생각되는 한 점을 골라 의기양양하게 서실로 달려가면 선생님은 가차없이 따끔한 지적을 하셨다.
어쩌랴! 다음번 과제물을 받아와 선생님께서 지적했던 부분을 염두에 두고 또다시 붓과 씨름했다. 묵향에 취해 어질어질할 때까지 멈추지 않고 정진했다.
선배 문우들과 함께한 전시회
2010년 초, 우연한 기회에 중국 산둥 성의 동남부에 위치한 린이(臨沂) 시를 여행하게 되었다. 당연히 린이 시에서 한 시간 정도 떨어져 있는 왕희지의 고택을 방문했다. 서성(書聖)으로 존경받는 동진의 서예가 왕희지는 지금의 산둥 성 린이 현에서 태어났으며 동한 시대에 시작된 해서(楷書), 행서(行書), 초서(草書)의 실용서체를 예술적인 서체로 완성시킨 인물이다. 서예 공부를 하던 중 돌아보게 된 왕희지의 발자취는 필자를 더욱 분발하도록 했다.
가을 냄새가 물씬 풍기던 2013년 11월의 어느 날, 인사동 모 전시회관에서 그동안 틈틈이 갈고닦았던 서예작품 전시회를 가졌다. 턱없이 부족한 필력이었지만 까마득히 높은 선배 문우들 틈에서 몇 점을 출품하게 되었다. 비록 열심히 했다고는 하지만 경력이 일천한 관계로 선배 문우님들 눈에는 그저 보잘것없는 작품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좀 더 정진하는 계기로 삼고자 겁 없이 전시회에 명함을 내밀었다. 하기야 처음부터 잘 쓴 사람은 없겠지만 공부를 할수록 어렵다는 생각에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을 떠올리며 스스로 부족함을 깨닫고자 해서였다.
쉼 없는 도전정신은 내면의 자아를 새롭게 발견하게 해준다. ‘정년퇴직’은 은퇴자의 무덤이 아니다. 비로소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즐기도록 해주는 반전의 기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시니어들이여, 용기를 내어 하고 싶은 일에 도전해보자!”
1~2년 전부터 오락가락하시던 어머님의 정신세계는 아흔여덟이 되던 해에는 하루 중에 많은 시간을 현실과 다른 세상으로 여행을 떠나시곤 했다. 어쩌다 마주하는 자녀들의 모습을 환한 미소로 반기시다가도 깜박깜박 기억을 잊으실 때마다 가슴이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던 것은 아마도 여섯 자녀 모두의 마음이 아니었을까?
노환까지 겹쳐 힘들어하시는 어머님을 요양병원으로 모시게 된 것은 그해 4월 초순경이었다. 자식들이 모여 의논 끝에 일단 병원으로 모셨다. 낯선 환경에 갑자기 노출된 어머님이 밤잠을 설치시고 웅얼거리는 소리가 다른 환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는 간병사의 얘기를 듣고도 어머님을 다시 집으로 모셔야 된다는 얘기를 선뜻 하는 자식은 없었다. 어머님은 잠깐씩 맑은 정신세계로 나오실 때마다 집으로 가고 싶다고 되뇌셨다.
어버이날을 불과 나흘 앞두고 필자는 3일간의 어머님 휴가를 병원에 신청했다. 요란한 경광등 소리를 내며 응급차를 타고 어머님이 필자의 집으로 오셨고
그날부터 어머님 침대머리에서 간이의자를 펴놓고 뜬눈으로 밤을 새우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밤이 되면 “애야, 저기 창문을 좀 열어놓아라” 하시고는 연신 밖을 내다보시면서 알듯 모를 듯 젊은 시절의 기억을 떠듬떠듬 풀어내시곤 했다. 그런데, 그 지명(地名)이나 단어 하나하나는 어렴풋이 어린 시절에 들었던 말들이 틀림없었다. 다음 날 출근하는 관계로 너무 피곤한 나머지 깜박 졸다가 깨어보니 밤새 설치시던 어머님의 머리가 침대 밑으로 축 처져 있었다. 소스라치게 놀라서 어머님을 흔들어 깨우니 푸시시 하고 감았던 눈을 뜨셨다. “아~”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제 어머님이 집에 오신 지 이틀이 지나고 내일이면 다시 병원으로 가시는 날이다. 퇴근길에 사가지고 간 옷을 보여드리고 입혀드리자 어머니는 무척이나 좋아하시면서 얼굴이 상기되셨다. 옷을 다 입혀드리고 나니 곱디고운 아흔여덟의 어머니가 그곳에 계셨다. 카네이션도 한 송이 달아드렸다. 어머니와 함께 이러저러한 포즈를 취하면서 사진을 찍었다. 어머니는 시키는 대로 표정도 밝게 하시고 포즈를 취해주셨다. 노래 좀 해보시라고 하니 처음에는 입술만 달싹달싹하시다가 누님이 “어머니 좀 크게 해보세요!” 하면서 귀에 대고 소곤소곤 아리랑 선창을 하니 어머님께서 힘을 내어 아리랑을 따라 부르기 시작하셨다. 너무 고운 자태로 차분하게 불러보시는 아리랑! 이것이 마지막으로 불러보는 어머니의 아리랑이련가? 어머니가 즐겨 부르시던 노래 중에 ‘사발가’라는 노래도 있었다.
“석탄 백탄 타는데~ 연기만 펄펄 나고요. 요네 가슴 타는데~ 연기도 김도 안 나네~”
카메라를 들고 촬영을 하던 필자의 가슴속에서 알 수 없는 뜨거운 불덩이가 목젖을 타고 올라왔다. 급기야는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슬픔이 몰려와 결국은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끼고 말았다. 함께 노래를 부르던 누님도, 아내도 모두가 얼싸안고 흐느끼는데, 정작 어머니만큼은 차분하게 그리고 끝까지 아리랑을 이어서 부르시는 것이었다.
이 세상에서 두 번 다시 들어볼 수 없는 어머니의 노래일까? 아니 어머니 가슴에 달린 빨간 카네이션을 두 번 다시 사드릴 수 없는 세상이 오는 건 아닐까? 수만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치면서 깊은 슬픔을 꾸역꾸역 참아냈다.
어버이날을 하루 앞두고 그렇게 눈물의 파티는 성대하게(?) 끝이 났다. 그날, 병원으로 돌아가신 어머니는 그 후에도 5년을 더 사시다가 2년 전 103세의 연세로 하늘나라에 가셨다.
‘初志一貫’은 필자가 초급장교(포대장) 시절에 부대훈(部隊訓)으로 삼아 액자에 넣어 병사들의 내무반에 걸어두었던 글귀였다.
왜 ‘초지일관’이었을까? 지휘자가 아닌 지휘관으로서 첫 발을 딛는 순간에 공인(公人)으로서의 필자의 자세를 가다듬고자 좌우명으로 삼아 늘 잊지 않고 공명정대하게 부대를 지휘하겠다는 마음에서였다.
첫마음, 그 첫마음처럼 훈련과 교육에는 추상같이 엄격하면서도 부하들을 내 혈육같이 사랑하여, 사랑과 정으로 똘똘 뭉친 부대를 이루겠다는 생각을 늘 잊지 않겠다는 무언의 다짐이었다. 공(功)과 사(私)를 분명히 하고자 노력했지만 24개월의 지휘관 시절동안 많은 사건(事件)들이 때로는 잠못이루는 밤으로 초대하기도 했다. 불의의 사고로 유명을 달리 한 부하의 영정 앞에서 슬픔에 겨워 소리없는 통곡을 하기도 했다.
그럴때마다 액자에 걸려있는 첫마음, 초지일관을 마음속에 깨알처럼 새기며 흐트러졌던 본연의 자세를 뒤돌아보곤 했다.
운동을 좋아하던 필자는 병사들과 함께 땀흘리며 운동장에서 축구, 배구, 족구 등으로 전우애를 다졌고 인접부대와의 대항전에서 거의 80%이상의 승률을 올리며 병사들의 사기를 올리기도 했다.
아울러 각종 부대시험에서도 오를대로 오른 병사들의 사기를 바탕으로 승승장구하면서 모범이라는 글자를 항상 접두사로 달고 다니던 시절이 있었다.
언젠가 늦가을 얼음이 얼기 직전에 일주일간의 야외숙영훈련을 하던 때의 일이었다. 전투는 예고 되는게 아닌 만큼, 상대방의 허를 찌르는 작전이야 말로 아군의 승리를 담보 할 수 있다는 것쯤은 군복을 입고 군 생활을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음이었다. 그래서 필자는 훈련은 늘 전투같이 해야 한다고 강조하곤 하였다.
포병훈련 특성상 야간 진지점령 훈련시에는 은밀하고 조용한 가운데 순식간에 점령이 이루어져야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소와 달리 그 날따라 훈련상태가 산만하고 일사불란(一絲不亂)하지가 못했다. 어둠속 곳곳에서 점검관들이 일거수 일투족을 체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날따라 병사들간에 손발이 맞지 않았다. 그로 인해 두런거리는 소리가 지휘관인 필자의 귀에까지 들려왔다. 뿐만 아니라 장비들을 다루는데도 평소답지 않게 거친 소음이 자주 발생하여 수검을 받는 지휘관으로써 몸둘바를 모를 정도로 당황하게 만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훈련이 종료되고 점검관들의 강평이 시작되자, 예상했던대로 몇가지의 지적을 받아 그다지 좋지 않은 평가를 받으며 마무리 되었다.
점검관들이 모두 돌아가고 훈련장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병사들은 물론이고 중간 간부들까지 모두 지휘관인 필자의 눈치를 살피고 있음을 어둠속에서도 느낄 수가 있었다. 평소답지 않은 훈련 태도에 마음이 상할대로 상한 필자는 병사들을 모두 데리고 훈련장 가운데 흐르는 개울가로 갔다. 물론 개울의 물 깊이는 종아리에서 깊은 곳은 허리쯤 닿은 곳이었는데, 필자를 포함한 전원이 팬티바람에 물속으로 들어갔다.
11월의 개울물은 만만치 않도록 차가웠다. 처음에는 진저리를 치던 병사들이 일단 물속에 잠기고 나니 추위는 아랑곳 하지 않은 채 오리걸음을 한다. “정신일도 하사불성, 꽥꽥!꽥꽥!…” 구호를 외치며 개울물을 거술러 어둠속으로 몰려가고 있었다. 자신들이 훈련에서 무엇을 잘못했는지 각성할 때까지 물오리 걸음은 10여분간 이상을 계속되었다.
100명의 부대원들과 함께 물속에서 오리걸음을 하던 필자는 그 순간도 ‘초지일관’ 을 머릿속에 각인하며 혹, 감기는 걸리지 않을까? 깊은 우려를 했지만 모두가 거뜬하게 그 순간을 넘기고 있었다. “아~ 젊음이 참으로 좋긴 좋구나!”
돈주고도 살 수 없는 젊음은 11월의 물오리떼가 어둠속에서 단체로 낄낄 거리는 에피소드를 남겨 두고두고 회자(回刺)되었다. 얼음짱같이 추운 물속에서 반성의 시간을 가졌던 부대원들을 물 밖으로 내 놓고 보니 뽀얀 김이 무러무럭 하늘로 오른다.
그 순간 구름에 숨어 있던 달이 빼꼼이 얼굴을 내밀어 웃음기 가득한 그 친구들을 비추어 주고 있었다.
지금은 오십대 중반을 구비구비 넘기면서 이 사회 어딘가에서 열심히 살고 있을 젊은 날의 내 전우들이여…참으로 그립구나.
‘초지일관’은 내 젊은 날의 좌우명이었다.
필자는 직업군인으로서 젊은 시절에 전·후방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군대생활을 했다. 따라서 아이들도 필자의 이동에 따라 여러 곳을 전전하면서 학교를 다녀야 했다. 그 부분이 부모로서 늘 미안했다. 그래도 다행히 공부를 곧잘 해 재수, 삼수라는 걸 모르고 대학에 들어갔다. 그런 아이가 대학 졸업을 불과 한 학기 남겨놓고 미국으로 어학연수를 다녀오겠다며 훌쩍 떠나버렸다. 기왕에 어학연수를 목표로 가는 것이니 가급적 교포가 많지 않은 곳으로 가야 목적 달성에 유리하다며 고르고 골라서 간 곳이 미국 콜로라도였다.
2년여의 연수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온 아이는 남은 한 학기를 마치고 대학을 졸업한 후 보따리를 싸서 다시 미국으로 향했다. 부모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는 군대를 막 제대한 아들놈까지 데리고 가버렸다. 당시에도 한국 사회는 고용불안이 심각했고 이로 인한 청년실업이 사회 문제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좀 더 넓은 세상에서 마음껏 기지개를 한번 펴보겠다는 자식의 의지를 꺾을 부모는 없다.
빠듯한 월급으로 두 아이의 대학 및 유학 뒷바라지까지 한 필자 부부는 나름 자식에 대한 기대가 컸다. 그런데 아이들이 미국으로 간 지 1년 후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딸아이가 임신을 했다는 소식이었다. 아버지의 기대를 알고 있던 터라 죄송하다며 엄마에게만 살짝 알렸는데 아내가 필자의 눈치를 이리저리 살피다가 한 달이 훌쩍 넘어서야 조심스레 털어놓았던 것이다. 그야말로 필자에게는 경천동지(驚天動地)할 만한 대사건이었다.
딸아이의 배신에 필자는 몇날 며칠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것도 한국에서 부모 따라 이민 간, 그야말로 불알 두 쪽만 달랑 찬 녀석이 뭐가 그리 좋다고 임신부터 덜컥 했단 말인가? 시대가 아무리 변했다 해도 결혼은 인륜지대사(人倫之大事)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 가장 근본이 되는 일이라는 뜻 아니겠는가?
그렇게 세월이 흘러갔고 얼마 후 아이가 태어났다는 소식과 함께 사진이 왔다. 사진 속 손자 녀석은 무럭무럭 잘 크는 듯했고 커갈수록 예쁘기만 했다. 필자는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혼수 대신 지원할 수 있는 방법이 뭘까 고민한 끝에 안정된 주거공간이 필요할 듯해서 집을 사고 ‘블랙카우델리’라는 음식점을 개업하는 데 일정 부분을 도와주었다. 부모에게 실망을 안겨줬다는 죄책감 때문인지 더욱 열심히 노력한 딸네 부부는 사업을 잘 일궈 튼튼한 기반을 잡았고 ‘블랙카우델리 2호점’을 1호점 인근에 또 냈다.
필자는 직장 때문에 딸네 부부를 만나러 가지 못하고 차일피일 미루다가 정년퇴직 후에야 미국행을 결정했다. 손자가 초등학교 3학년이 되던 2년 전 일이다. 미국에 가서 딸아이의 유학생활이 결코 녹록지 않았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다. 그렇게 어려운 시절, 지금은 사위가 된 친구의 헌신적인 보살핌으로 무사히 유학생활을 마쳤고 이제는 단란한 가정까지 꾸려 행복하게 살고 있는 딸의 모습을 보니 얼음장처럼 굳어 있던 필자의 마음도 서서히 녹아내렸다. 그리고 필자 앞에 늘 죄스러운 마음으로 움츠러들어 있던 사위의 등을 두드려주면서 열심히 살 것을 당부했다.
원하는 삶을 당당하게 선택하고 자신이 택한 길이 틀리지 않았음을 스스로 실천하고 있는 딸 덕분에 이제는 해외여행도 자주 하고 풍요로운 노년의 삶을 살 수 있겠다는 희망을 갖게 되었으니 이보다 더 좋은 혼사가 있을까 자위해본다.
얼마 전 직장에서 있었던 일이다. 동료들은 은퇴 후 다시 다니는 직장이라 대부분 협력회사 비정규직이다. 비정규직 근무자에 대한 차별이 있지만 이것저것 가릴 처지도 못 되고 은퇴자로서 일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 자위(自慰)하면서 근무하고 있는 실정이다. 과부 심정 홀아비가 알아준다는 말이 있듯이 동료들끼리 서로의 형편을 이해해주고 의지하면서 일하다 보니 마음 맞는 사람끼리 자연스럽게 자주 만나게 되었다. 그러다가 친목도 다지고 정보도 공유하면서 지내보자는 의미로 ‘요산요수(樂山樂水)’라는 모임까지 만들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회원이 “날씨도 더운데 퇴근길에 시원한 막걸리나 한잔 합시다”라며 단체 카톡방에 글을 올렸다. 소위 번개를 친 것이다. 특별한 상황이 없다면 땀 흘려 일하고 퇴근길에 막걸리 한잔 하자는데 굳이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아홉 명의 회원 중에 네 명이 모였다. 다른 회원들은 3교대 근무라는 특수 상황 때문에 야간 근무나 오후 근무를 해야 했기에 참석할 수 없었다. 필자는 당일까지 작성 처리해야 할 기사가 있어 참석을 하지 못하고 귀가하자마자 저녁도 대충 먹고 책상에 앉아 컴퓨터 자판과 씨름했다.
잠시 후 카톡 오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궁금해서 슬며시 휴대폰을 열어보니 가관이었다. 막걸리 집에서 한상 가득 차려놓고 먹고 마시고 건배하는 장면 등을 실시간으로 찍어 올리면서 참석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자극적인 말들을 쏟아냈다. 처음에는 그러려니 하고 ‘좋은 시간 되시라’는 댓글도 달아줬다. 하지만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자 노골적으로 미참석자들을 자극하는 멘트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흥에 겨워 그러는 거겠지 하며 이해를 했다. 그러나 도를 넘어 유치할 정도의 수준에 이르자 슬그머니 속이 뒤집어지기 시작했다. 만난 사람끼리 기분 좋게 한잔 마시고 담소를 나누면 될 일이지 근무하느라 참석 못한 사람들을 계속 자극해서 뭐하겠다는 것인가? 그중 연장자인 한 회원도 한마디 한다. “오늘 번개에 못 온 놈들 약오르지? 약오르면 지금이라도 달려오면 돼!” 이게 할 소리인가? 더운 날씨에 힘들게 근무하는 회원들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도 없는 행동이었다. 참으로 너무한다 싶어 화가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특히 ‘요산요수(樂山樂水)’의 회장직을 맡고 있는 입장에서는 더욱 참기가 힘들었다. ‘참으로 나잇값도 못하는 사람이네, 본인은 기분 좋아 지껄이는 말일지 몰라도 피치 못할 사정으로 참석 못한 회원들을 조금이라도 배려하는 마음이 있다면 이렇게 행동해서는 안 되지!’ 속에서는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것 같은 욕설이 가득했다. 그러나 가까스로 참고 내뱉은 한마디는 “개코같은 소리, 자중하세요”였다. 그러고는 휴대폰을 덮어버렸다.
카톡 들어오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지만 더 이상 대꾸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자정이 가까운 시간에 또 한 번의 카톡 소리가 들려와 확인해 보니 사과 멘트였다. 필자 역시 죄송하다며 사과를 했다. 화가 나서 부지불식간에 내뱉은 한마디. 시간이 지나니 좀 더 참을걸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너무 심한 말을 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어 사전까지 뒤적여 ‘개코같은 소리’의 의미를 찾아봤다. (상태나 모양이) 하찮고 보잘것없다는 의미로 쓰이는 형용사였다. 필자가 회원들에게 던진 ‘개코같은 소리’에 함축되어 있는 의미는 여러 가지였다. 어쨌든 적나라하게 표현할 수 없었던 마음속 말들을 그 한 문장에 함축시켜 일갈(一喝)해버림으로써 그날의 사건은 다행스럽게 일단락되었다.
필자가 중학교에 들어갈 때는 입학시험을 치르던 1960년대 중반이었다. 시골이긴 했어도 중학교 입학시험을 치를 때는 지역 내 4개 초등학교가 모여 경쟁을 했다. 필자는 운 좋게도 전체 차석(次席)으로 입학시험 결과통지서를 받았다. 그러나 그러한 기쁨은 잠시, 8남매 중 끝에서 두 번째인 필자가 입학시험을 치르던 해에 집안이 풍비박산 났다. 빚쟁이들이 몰려와 집은 물론이고 그 많던 전답을 팔아 빚잔치를 하고 말았다. 당연히 중학교 입학금을 낼 형편이 안 되어 등록을 못하고 말았다. 차석이어서 수업료 절반을 면제받았는데도 나머지 3300원을 내지 못해 포기했던 것이다. 뒤늦게 집안 사정을 알게 된 교장선생님이 입학금 전액 면제라는 특별 혜택까지 줬지만 결국 중학교 문턱도 밟아보지 못했다. 참으로 기구한 운명이었다.
이후 아버지는 입도 하나 덜고 배곯지 말라고 이웃 마을 부잣집으로 필자를 머슴살이 보냈다. 훗날 어머니는 필자를 볼 때마다 “남들 다 보내는 중학교에도 못 보냈는데, 기죽고 풀이 죽어 있을 아이를 어쩌자고 한 입 덜겠다고 머슴살이를 보낸단 말이냐. 그것도 바로 이웃 마을로…”라며 미안하신 마음을 표현하시곤 했다.
어린 마음에 창피하기도 했지만 태어나 처음으로 부모님 곁을 떠나야 했던 필자는 두려웠다. 하지만 그 시절 아버지의 말씀은 거역할 수 없는 지상명령이었다.
다행히 초등학교 특별활동 시간에 주산을 배워뒀던 필자는 집주인으로부터 각별한 사랑을 받았다. 그 집으로 들어간 후 과수원과 큰 농장에서 일하는 일꾼들과 함께 밥을 먹었는데 집주인이 가끔 식사를 마친 필자에게 “김군은 잠깐 남아 있어라” 했다. 그리고 일꾼들이 나가면 주판을 주고는 장부책을 펼쳐놓고 숫자를 쭉 불렀다. 그러면 필자는 주판알을 굴리며 열심히 계산을 했다. 며칠에 한 번씩 하던 이 일을 통해 어린 나이임에도 집주인으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사모님도 늘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에 보면 수북하게 담긴 흰 쌀밥이 필자 앞에 놓여 있곤 했다.
어머니는 평생의 한처럼 말씀하셨지만 그때 처음으로 공동체 생활을 경험했고 이를 통해 소중한 교훈도 얻었다. 어떤 환경이든 다 자기 할 탓이었다. 시키는 대로 열심히 일하자 3개월이 금세 흘러갔다.
하루는 점심 무렵 닭 모이를 물지게에 지고 닭장으로 가던 중 초등학교 친구와 마주쳤다. 먼발치에서도 친구임을 단번에 알아차린 필자는 창피한 마음에 지고 가던 지게와 닭 모이통을 내동댕이치고 숨어버렸다. 단정하게 교복을 입은 친구가 부럽기도 했고 지게를 지고 있는 모습이 너무 창피했다.
그 후 세월이 흘러 도회지로 나간 필자는 주경야독으로 그토록 하고 싶었던 공부를 했고 마침내 수업료 걱정은 안 해도 되는 사관학교에 당당하게 입학했다.
밥이라도 배불리 먹으라고 필자를 머슴 보냈던 아버지의 처사를 두고두고 원망하셨던 어머니는 말끝마다 “네 아버지의 주책!”이라고 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그 주책(?) 때문에 살아야 했던 3개월의 머슴살이가 필자에게는 오히려 많은 힘이 되었다. 오늘 문득 그 시절이 참으로 그립다. 그리고 부모님도 보고 싶다.
긴 가뭄의 갈증(渴症)은 해소되지 않은 채 30도를 오르내리는 한낮의 열기는 때 이른 초여름으로 접어들었다. 때 이른 더위에 온종일 직장에서 시달리던 몸은 퇴근 후에는 파김치가 되어 가까스로 저녁 한 술 뜨고 TV앞에 앉지만 이내 밀려오는 피로에 눈꺼풀은 천근만근 견디지 못하고 스르르 감기곤 한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반복되는 생활패턴에 생체리듬은 자꾸만 다운되고, 먹고 바로 자는 버릇 때문에 내장지방은 쌓여만 가니 반갑지 않은 배만 불룩 나왔다. “이러면 안 되는데…” 머릿속에서만 맴돌 뿐, 한번 길들여진 육체는 생각대로 움직여 주지를 않는다. 오늘은 큰맘 먹고 집을 나선다. “기필코 운동을 시작해야지…” 집을 나서자 거센 바람이 몰아쳐 으스스 한기가 느껴지는 바람에 황급히 되돌아가 바람막이를 걸치고 나왔다. 어느덧 어둠이 내려앉은 하늘에는 달은커녕 별님조차 보이지를 않은 채 먹구름만 잔뜩 끼었다.
백운산 숲속으로 발길을 옮겼다. 산으로 올라가는 길은 어느새 어둠이 장막처럼 내려와 코앞도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깜깜했다. ‘휘리릭~’ 다소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에 나뭇가지가 우수수~ 흔들리니 섬뜩한 느낌이 등골을 타고 내려간다.
‘저벅저벅, 달그락 달그락’ 고요한 적막을 깨고 필자의 발자국 소리만 유난히 크게 울려 퍼진다. 초입(初入)을 지나 한참을 올라가니 산비둘기 구구대는 소리에 이어 ‘소쩍소쩍’ 청아하게 울려 퍼지는 소쩍새 울음소리가 잃어버린 추억을 살려낸다. “아~ 얼마 만에 들어보는 소쩍새 울음소리이던가!” 정겨움이 샘솟는 한편 짙은 어둠속으로 진입하는 낮설음에 순간 무서움이 엄습한다. 더구나 올라가는 중간에 예비군 훈련장이 있었는데, 교육보조재료로 설치 해 둔 시설물들(모조집, 동굴, 돌무덤, 적군의 형상 등)이 어둠속에서 불쑥 불쑥 나타나니 자신도 모르게 심장이 쫄깃해졌다. 발걸음은 빨라지고 어느새 등줄기에서는 송골송골 땀이 배어나오기 시작할 무렵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려온다. 백운산 중턱 어디쯤에 필자의 고향친구가 살고 있다. 이곳에서 태어난 친구는 필자와는 초등학교 동기동창인데, 졸업 후에 한동안 왕래를 하지 못했다. 필자가 전·후방 각지에서 많은 세월을 보내는 동안 친구는 고향의 터전을 지키면서 살았다. 드디어 희미한 불빛이 보이기 시작하면서 친구의 집이 가까워졌음을 알 수가 있었다. 밤늦은 시간에 불쑥 찾아온 필자를 친구는 반색을 하며 맞아준다. 사실 산속에서 저녁 아홉시쯤이면 한밤중이나 다름없는 시간인데도 스스럼없이 반겨주는 친구가 고마웠다. 잠시 땀을 식히며 친구와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었다. 얘기꽃은 꼬리를 물고 이어졌지만 깊어가는 시간에 마냥 앉아 있을 수만은 없어 “다시 오마” 작별을 하니 거실 한 귀퉁이에 캐다 놓은 햇감자 한바가지를 봉지에 담는다. 많이는 필요하지 않다고 극구 사양하는 필자에게 가득 한 봉지를 담아 배낭에 넣어준다. 밭에 금세 나가 이것저것을 뜯어다 줄 기세인 친구를 뒤로 하고 황급히 하산(下山)하기 시작했다.
친구는 이 산속에서 닭이며 염소를 키우는데, 필자에게 주말쯤에 미리 전화를 하고 올라오면 토종닭 한 마리를 잡아놓겠다고 신신당부를 한다. 내려오는 내내 어린 시절 친구의 따뜻한 정이 마음속을 촉촉하게 적셔준다.
무기력한 일상에서 벗어나고자 숲으로 들어간 필자에게 어둠속에서 들려오던 소쩍새 울음소리는 멀리 지나가버린 어린 시절을 떠올릴 수 있어 좋았다. 참으로 오랜만에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려앉은 적막한 산길을 홀로 걸어보니 태고적 신비를 체감할 수 있어 또한 좋았다. 뭐니 뭐니 해도 가진 것 아낌없이도 주고 싶어 하는 친구의 따뜻한 정과 마음을 얻었으니 이 또한 큰 행운이 아니던가, 이제부터라도 가끔씩 어둠이 짙게 깔린 숲으로 들어가 보아야겠다.
지난해에는 나라가 온통 뒤숭숭하고 시끄럽더니 급기야 ‘장미대선’이라는 초유의 사태까지 발생했다. 나라를 발전시키고 국민의 삶을 보다 풍요롭게 해달라는 온 국민의 기대와는 달리 오히려 국민이 정치권을 걱정하는 기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이로 인해 국민의 삶마저도 피폐해져버렸다.
그리고 장미대선에서 한 번의 패배를 경험했던 진보 성향의 후보가 오뚝이처럼 일어나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당선된 후에는 인천국제공항을 깜짝 방문해 후보 시절에 약속했던 비정규직 철폐 공약의 일환으로 공기업의 비정규직을 모두 정규직으로 바꾸라는 서슬 퍼런 지시를 내렸다. 그동안 소 닭 보듯 무관심했던 기관장들은 허리를 깍듯이 굽혀 읍소하며 전원 정규직화하겠다는 답변까지 내놓았다. ‘비정규직 전원을 정규직으로 전환한다?’ 멋지다. 그동안 노골적으로 차별받아온 비정규직 직원들의 가슴을 뻥 뚫어준 그 약속은 가뭄 속 단비 같은 희망으로 다가왔다.
필자도 비정규직으로 근무한다. 정규 직원으로 40여 년간의 직장생활을 마치고 정년퇴직을 한 후, 반백이 성성한 나이에 대기업 협력회사에 우연히 취직을 하게 되었다. 인천공항 물류단지 내에 있는 회사다. 사실 60대 초반의 나이에 정년퇴직을 쉰다는 것은 국가적으로 보나 개인적으로 보나 아까운 일이다. 뚝배기 장맛처럼 깊은 맛을 낼 수 있는 질 좋은 노동력을 사장시켜버리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더구나 백세시대에 말이다.
하지만 사회 분위기가 그런 걸 어찌하랴. 최저임금에 주말은 물론 공휴일조차 보장되지 않는 협력회사의 사정은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마저도 하기 싫으면 말라는 식의 분위기가 시니어들을 더 주눅 들게 만든다. 그렇다. 싫으면 사직서를 던지면 될 일이다. 하지만 하루 벌어 하루 먹기 빠듯했던 젊은 시절, 자녀들의 뒷바라지에 허리가 휘도록 고생만 해왔던 시니어들은 은퇴 준비도 제대로 못한 채 이렇듯 비정규직 현장으로 내몰리고 있다. 나이 먹는 것도 서러운데 이렇듯 차별받는 세상에서 신세가 처량하기만 하다.
지난겨울 출퇴근길에서 만난 건설 현장의 잡부들은 모두 머리가 희끗희끗한 비정규직 시니어들이었다. 그들은 이른 새벽부터 작업 현장에 도착해 살을 에는 듯한 추위에 떨어가며 작업 준비를 하고 있었다. 폐드럼통에 폐목재로 장작불을 피워놓은 것이 이들이 몸을 녹일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그렇게 부지런을 떨고 성실하게 일해도 작업 현장에서 무시당하기 일쑤다. 급여는 최저임금. 휴일도 제대로 없는 열악한 환경이 이들의 살아가는 현실이며 현주소다.
진보 대통령의 등장으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처우가 얼마나 개선될지는 아직 두고 볼 일이지만 노동자들은 실낱같은 희망의 끈을 붙잡고 있다. 인천공항공사에 직속해 있는 비정규직 직원들이야 기관장이 대통령과 약속을 했으니 정규직 전환이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수많은 협력회사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현실은 아직 암담하기만 하다. 그러한 약속들이 아직 피부로 와 닿지 않는 그저 그림의 떡일 뿐이다.
그래도 한 가지 희망이 있다면 최저임금의 적정한 상승이다. 그것만이라도 해결되어 수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하루빨리 그런 날이 오면 좋겠다는 간절한 생각은 필자도 비정규직 노동자이기 때문일까?
아내가 어느새 일어나 부엌에서 아침식사 준비를 위해서 달그락 거리는 소리에 어렴풋 잠이 깼다. 인천공항 근처에 원룸을 얻어 주 중에는 그 곳에서 생활하다가 주말에만 서울로 올라오는 주말부부 생활도 벌써 9개월째로 접어들었다. 어느 날, 우연히 찾아온 은퇴 후의 삶이 이렇게 바뀔 줄은 나도 잘 몰랐다.
어제는 갑자기 서울에서 해결해야 할 일이 생겨 회사 통근버스를 타고 서울로 올라왔다. 최근 며칠사이 목감기로 인해 깊은 잠을 못 이루고 설치다 보니 늘 피로감이 따라다녔는데, 모처럼 집에 와서 편해진 마음으로 갚은 잠에 빠져들었는데 ‘달그락’ 거리는 소리에 눈을 떠보니 아침이었다.
아내는 이것저것 몸에 좋다는 식재료를 사용해서 정성껏 준비한 아침식사를 뚝딱 차려주었으나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영 입맛이 돌지를 않아 젓가락만 께지락 거리다가 아침상을 물렸다. 식사를 마치고 집을 나서니 오월의 싱그러운 바람이 옷깃에 스민다. 상쾌했다. 지하철을 타고 잠실역에서 내려 지상으로 올라오는 엘리베이터를 타던 중에 한 젊은이와 본의 아니게 입씨름을 하게 되었다. 한 택배회사의 직원인 듯 한 그 친구는 자신의 키보다 높은 4층짜리 카트를 밀고 요란하게 다가오더니 엘리베이터 안으로 급하게 카트를 쑥 들이밀면서 미리 타고 있던 나를 아슬아슬하게 밀치고 들어섰다. “쯧쯧, 조심할 것이지…”은근이 불쾌한 감정이 울컥 올라왔지만 참고 있던 중에 지상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카트를 우악스럽게 내리는 과정에서 나의 팔을 슬쩍 치고 나갔다.
순간 나도 모르게 볼멘소리가 나갔다. “아니 조심을 좀 해서 내려야 하는 것 아니에요?” 정중하게 항의를 했지만 나도 모르게 말꼬리가 올라갔다. 그 친구는 엘리베이터에서 나가다 말고 선채로 나를 한참을 쳐다보더니 “그래서요?” 하고 시비조로 나온다. 그 친구의 말투에 멈칫하다가 “아니, 보아하니 젊으신 분 같은데, 좁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카트를 이동할 때에는 주위 사람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요? 또 볼멘소리가 나갔다.”그래서 어쩌겠다는 건데요. “눈을 아래위로 부라리면서 아예 시비조로 나가는 젊은이를 보면서 참으로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어 더 이상 말을 섞다가는 어떤 봉변을 당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부리나케 그곳을 빠져나왔다.
참으로 세상 말세로다.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라와 스트레스로 돌아온다. 온갖 잡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타인을 배려하기는커녕 아래 위도 무시하고 나대는 이 젊은이의 한심스러운 작태는 앞으로 우리 사회가 안고 가야할 아킬레스건 같은 것은 아닐까? 이런 막돼먹은 현상이 비단 그 젊은이 한사람에게만 국한된 문제일까? 아니면 우리 사회전체에 팽배해진 개인 이기주의와 자기중심적 사고에 함몰된 현실적인 문제는 아닐까? 우려 아닌 우려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상쾌했던 기분은 한 순간에 사라져버리고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회사 통근버스에 올랐다.
통근버스는 새벽공기를 가르며 쏜살같이 잠실대교를 넘고 있었다. 잠실대교 밑의 한강물이 아침햇살에 잔잔하게 출렁거린다. 서울의 거리는 어느새 출근하는 차량들로 꽉 채워졌다. 하루의 출근전쟁이 이미 시작된 것이다. 창밖으로 흐르는 5월의 푸르름이 눈을 호강시킨다. 잠시전의 불쾌하기 짝이 없던 언쟁이 잔상으로 떠올랐지만 상큼한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면서 모두 날려 보낸다.
그래도 이 멋진 세상이 날마다 나를 환영해 주는데, 무엇을 더 바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