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보마이라이프 동년기자 2기 출범식에서 의례적인 선물처럼 건네받은 책이 바로 기시미 이치로가 쓴 라는 책이다. 바쁜 일상과 맞물려 책은 한동안 거실 한 귀퉁이에 처박혀 버렸고 잊을만한 시간에 ‘독후감’ 이라는 것을 써야 한다는 당부의 말이 떠올라 먼지를 뒤집어 쓰고 책상밑에 팽개쳐 졌던 책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첫장을 넘기면서 격한 공감과 함께 책 속으로 빠져들면서 단숨에 한 권을 통독해 버렸다.
아들러 심리학의 권위자인 기시미 이치로가 ‘나이 든 부모와 어떻게 지낼 것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직접 자기 삶에서 체득한 심리학적 고찰을 바탕으로 제시했다.
평균 수명이 늘어나며 '나이 든 부모와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화두는 개인을 넘어 사회 문제로 확대되고 있다.
저자인 기시미 이치로는 젊은 나이에 뇌경색을 앓아 재활 중에 죽음을 맞이한 어머니를 목전에서 경험하고 삶의 궤도가 전혀 새로운 방향으로 전환하는 계기를 맞이한다. 그리고 돌아가신 어머니의 나이를 지나 심근경색으로 쓰러진 자신에게 인생이란 어떤 것인지 나이가 들어가는 것은 어떤 것인지 사유(思惟)하는 계기를 경험한다.
부모님 두 분을 병수발 했던 저자이기에 현실에서 직접 맞닥뜨리게 되는 사소한 부분을 언급할 때 크게 공감하게 된다. 별것 아닌 일이지만 우리가 실제로 부딪치게 되는 것은 항상 작고 사소한 것들임을 감안하더라도 경험담에서 나오는 이야기가 귀를 기울이게 만든다.
저자는 어머니의 병수발과 아버지의 치매로 인해서 ‘나이든 부모’ 와 살며 그들을 이해하는 일이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당부한다. 매우 뻔 한 소리 같지만 실제로 해 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조언이라는 것을 조금만 읽어보면 알게 된다. 부모님도 몸이 아파 누군가에게 의지해서 생활하는 것이 처음이고, 그런 부모님을 지켜보며 직, 간접적으로 간호해야 하는 자식들도 처음인 것은 마찬가지이다. 그래서일까 고령화 사회로 접어드는 우리 사회에서도 더 이상 병간호에 대한 책임을 가족에게만 지어서는 안 된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아픈 사람도 그 사람을 지켜봐야 하는 가족 누구도 죄인이 아니지만 사랑으로 시작한 일이 한 가정을 파탄 내는 경우를 우리는 종종 보게 된다. 결국은 가족이라고는 하나 그것 또한 인간관계이다.
후회를 하지 않게 되게끔 ‘하루하루 이 사람과 사이좋게 생활하자’ 라고 끊임없이 생각하는 것이 존경입니다.(P.104).
병이 든 상태가 가장 낮은 위치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P.117).
자식 눈에 아무것도 안하고 하루를 보내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부모님의 현재가 불행한 것은 아니니까요.(P.127),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일본의 철학자 기요카즈는 그의 저서 『끊을 수 없는 생각』에서 “무언가 하지 않고도 그저 가만히 옆에 있어주는 것이 얼마나 힘이 되는지 우리 사회는 잊고 있다” 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 말에 극히 공감이 가는 것은 나에게 있어 2년 전 103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나신 어머님을 떠올리게 된다. 어머님은 90의 중반까지는 비교적 정신적으로 건강 하게 사셨으나 그 이후에는 오락가락하는 정신과 육체적인 피폐로 인해 병원과 요양원 신세를 지게 되셨다. 불완전한 모습의 어머니이지만 살아 계실 때에는 마음의 많은 위안이 되었고 형제, 자매들을 잇는 끈이 되어주셨다. 어머님이 돌아가시자 허탈함에 우울한 감정이 지속되기도 하였거니와 형제, 자매를 이어주던 끈도 끊어지고 말았다.
본문에서 아버지에게 “하루 종일 이렇게 주무시기만 하니 제가 안와도 되겠네요.”라고 하자 아버지는 “그런 게 아니야, 네가 옆에 있으니까 안심하고 잠드는 거야”(P.147),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드는 건 생산성으로만 가치를 측정하는 이 사회가 낳은 문제이기도 하다.
부모님을 떠올렸을 때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후회’ 다. 언제나 더 상냥하고 친절하게 대해 드려야지 싶다가도 내 기분에 따라 행동은 확연히 달라진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이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화는 보통 지르고 난 뒤에 후련한 마음이 드는 경우가 있는데 반해, 부모님과의 갈등은 내가 화를 내고 돌아서는 순간부터 후회가 밀려온다는 것이다. 화를 낸 상대는 나지만 속이 후련하기 보다는 “조금만 더 참을걸. 하는 죄책감이 물밀 듯이 밀려온다.
순간적으로 화가 끓어오르더라도 부모님과 사이좋게 지내고 싶다면 가능한 권력 싸움에서 물러나야 한다. 사이가 좋아지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쓸데없이 에너지를 낭비하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을까?(P.173).
누군가와의 관계를 개선하고 싶다면, 상대의 표면적인 말과 행동만 받아들이지 말고 좋은 의도를 발견하도록 노력해야 한다.(P.180).
진지하되 심각해지지 말라
부모님을 간병하는 일은 진지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심각해 질 필요는 없다. 진지한 것과 심각한 것은 다르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부모님을 보살필 때에는 다치지 않도록 온 신경을 집중해서 배려할 필요가 있다. 간병이 힘들다고 미간에 주름잡고 한숨을 쉴 필요는 없다. 그런 심각한 표정을 짓는데 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간병하는 일이 얼마나 큰일인지 부모님이 알아주었으면 하고 바라기 때문이다. 둘째는 다른 형제들이 간병의 고단함을 알아주길 바라기 때문이다. 물론, 간병이 큰일이긴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에 내색할 필요는 없다. 간병이 힘든 일이란 걸 다른 이에게 과시하기 시작하면 간병하는 사람은 진지해 지기 보다는 심각해지고 만다.
여건상 103세에 세상을 뜨신 어머니께서 생전에 계실 때는 나는 한참 사회활동을 하고 있을 때였다. 하루 온종일 두서너 평의 작은방에서 보내셔야 했던 어머니는 가끔씩 전화를 하셨다. 대화 내용은 뻔했다. 어머니의 생각 속에 잠겨 있는 말들을 반복해서 하시곤 했는데, 한창 일처리에 바쁜 상황에서 계속해서 어머니의 얘기를 들어 드릴 수는 없었다. 얼마나 답답하고 아들이 그리웠으면 그랬을까? 하는 생각은 수없이 했으나 현실은 바쁘다는 핑계로 대충 얼버무리고 끊곤 했다.
그 때를 생각하면 뒤늦게 후회가 참 많이 된다. 그 상황에서 어머니의 얘기를 들어드리는 일 말고 더 급한 일이 무엇이었을까? 뒤늦은 반성을 해 보지만 어머니는 이미 안계시니 그립기 짝이 없다.
이제 어머니의 나이를 향해 쏜살같이 흘러가고 있다. 그러니 어차피 사람은 늙어 갈 수밖에 없고 ‘나이 든 부모를 사랑할 수 있습니까’ 라는 화두는 결국은 나의 문제로 대두 되고 있다. 이 한권의 책을 통해서 나이 든 부모를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을 사회는 물론 우리 모두가 자각하여야 할 듯하다.
4월 14일 동년기자단 2기 발단식이 열렸다. 지난 1년간 감동과 연륜이 묻어나는 글로 두각을 나타냈던 1기 동년기자 26명을 포함한 총 48명의 2기 동년기자단이 꾸려졌다. 각자의 인생과 삶의 철학은 다르지만, ‘동년(同年)’이라는 이름으로 함께하게 될 그들이 첫 만남을 가졌다.
3월 1일부터 15일까지 온라인 지원과 서류 심사를 거쳐 선발된 48명의 동년기자가 설렘을 안고 한자리에 모였다. 이날 발단식 이후, 이듬해 3월까지 1년간 각자의 역량에 따라 활발한 활동을 펼칠 계획이다. 2기 동년기자들은 1942년생부터 1966년생까지, 평균나이 61세로 1기 동년기자단(평균나이 54세)보다 연령대는 높지만, 저마다의 깊은 연륜과 강한 열정으로 앞으로의 활동에 기대를 불어넣고 있다.
공감과 감동이 있는 기사 기대돼
이날 행사는 명함 및 기자수첩 수여, 윤리강령 채택, 동년기자단 1기 활동 보고, 개인 프로필 및 단체사진 촬영, 자기소개 등으로 이뤄졌다. 발단식에 참석한 길정우 이투데이 총괄대표이사는 “동년기자들의 눈높이로 일상의 행복한 일, 감동을 주는 이야기 등을 기사로 쓴다면 중장년 독자와의 공감대를 잘 형성할 수 있을 것”이라며 “좋은 글을 많이 써서 우리 주변에 행복과 기쁨을 나눠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어 강혁 이투데이PNC 대표이사는 “매호 동년기자의 글을 감동적으로 읽고 있다. 1기 동년기자단의 활동 덕분에 문화체육관광부 선정 우수콘텐츠 잡지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며 2기 동년기자단의 활약을 기대했다.
보람만큼 책임감 더한 기사로 발전하길
동년기자단 1기를 이끌었던 강신영 단장은 “처음에는 얼떨떨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시행착오도 있었지만, 모두 액티브 시니어로 활동하는 분들이라 잘 자리 잡을 수 있었다”며 지난 활동에 대한 소감을 이야기했다. 아울러 “블로그나 SNS 등에만 쓰던 내 글이 잡지와 온라인 사이트에도 실리는 것에 무척 보람을 느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보게 되는 만큼 글과 사진의 수준을 올리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동년기자단’을 작명한 임철순 이투데이 주필 겸 이사는 “동년이란, 같은 나이라는 뜻도 있지만, 과거 시험에 함께 합격한 이들을 일컫기도 한다. 서로 나이는 차이 나지만, 친구로 동무로 어울리며 망년지교(忘年之交)하길 바란다. 열심히 글을 쓰고 보람찬 활동을 하면 좋겠다”며 그 의미를 되새겼다.
남자 25명, 여자 23명 / 50대 20명, 60대 23명, 70대 5명 / 평균나이 61세
가나다순 48명
가재산(63·남), 강신영(65·남), 김수영(64·여), 김영선(65·여), 김종범(61·남), 김종억(64·남), 김진주(57·여), 김태형(57·남), 박기원(51·남), 박미령(63·여), 박수남(54·여), 박애란(66·여), 박정하(51·여), 박종섭(62·남), 박혜경(65·여), 배인휴(65·남), 백외섭(66·남), 변용도(67·남), 성경애(60·여), 성미향(54·여), 손웅익(59·남), 신용재(68·남), 안영란(55·여), 안영희(70·여), 양복희(60·여), 옥선희(59·여), 육영애(71·여), 윤영애(56·여), 윤재훈(58·남), 윤정자(75·여), 윤종국(70·남), 이경숙(65·여), 이두백(67·남), 이미숙(56·여), 이석현(56·남), 이찬만(58·남), 이현숙(59·여), 장영희(61·여), 전용욱(59·남), 정성희(57·여), 정원일(60·남), 조왕래(66·남), 주상태(51·남), 최원국(61·남), 최은주(54·여), 최현식(64·남), 한정수(71·남), 홍재기(57·남)
겨울의 한가운데서 추위가 연일 맹위를 떨치더니 밤새도록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던 어느 날, 눈 쌓인 남한산성을 등반을 하기로 했다. 송파에 살고 있는 필자에게 남한산성은 매우 근접해 있어 매일같이 조망할 수 있으니 마을 뒷산 같은 느낌이 들곤 했다. 늘 그곳을 조망하면서 건강을 위해서 최소한 매주 한번 정도는 등산을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지만 실제로는 일 년에 두서너 번이 고작이다.
어제 저녁 내내 소복소복 눈이 오더니 아침에는 제법 많은 눈이 쌓였다. 시내는 눈이 내리면서 녹았지만 산에는 낮은 기온으로 인해 많은 눈이 쌓여있어 모처럼 설원을 구경하면서 역사의 숨결 따라 멋진 눈길산행을 해 볼 요량으로 지인들과 함께 산행 길에 나섰다. 지하철 5호선 마천역에서 내려 만남의 광장에서 합세한 일행은 성불사를 들머리로 산행을 시작하였다. 고즈넉한 사찰의 기와위에 소복하게 쌓인 눈이 눈부시도록 정겹다.
등산을 좋아 하는 많은 사람들 속에 섞여 본격적으로 산을 오르기 시작하자 드디어 미끄러운 등산로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나뭇가지에 소복하게 걸터앉은 눈꽃이 바람이 불적마다 후드득 머리위로 떨어지고 까마귀 울음소리가 까악 까악 산중에 울려 퍼져 우리를 반겨주는 듯 했다. 터벅터벅 올라가는 산행 길에서 만났던 멋진 설경은 덤으로 주어진 귀한 선물이었다. 올라가면서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댄다. 오르락내리락 한 시간을 훌쩍 넘겨서 걷다보니 어느새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힐 무렵, 드디어 산성이 보이기 시작한다. 산성 기와에 소복하게 쌓인 눈은 한층 멋들어진 한 폭의 그림이었다. 산성 위에서 내려다 본 도시(都市)는 엄동설한(嚴冬雪寒)에 묻혀 고즈넉하고 평화로운 풍경을 연출해 내고 있었다. 송파 쪽으로 바라보니 눈을 흠뻑 뒤집어쓴 도시 한가운데에 빌딩 하나가 우뚝 솟아 눈앞으로 다가온다. 124층짜리 잠실 제2롯데 빌딩이 그 웅장함을 보여주고 있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빌딩이 이제는 완공단계에 접어들어 그 멋진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반대로 돌아 하남시 쪽을 내려다보니 전형적인 농촌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눈 속에 푹 파묻혀있는 그곳의 풍경을 내려다보고 있노라니 왠지 모를 평화로움이 마음 한 구석에서 샘솟듯 올라온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눈 속에 깊게 묻힌 산성은 고요와 함께 태고적 신비로운 모습을 고스란히 느낄 수가 있었다. 수많은 외침을 겪은 민족이지만 특히 병자호란 중에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던 인조임금이 결국은 오랑캐에게 항복을 하기 위해 어떤 심정으로 이 문을 나섰을까 감히 상상해 본다. 인조14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여 47일간 항전을 하였다. 청나라의 12만 대군의 침략을 받은 인조가 서울을 버리고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여 항전하다가 끝내 청나라에 굴복하여 송파 삼전도에 나와 청태종 홍타이지 앞에 3번 절하고 9번 머리를 조아린 뒤 무릎을 꿇고 항복하는 치욕적인 굴욕을 당해야 했는데 이를 삼전도의 굴욕이라 불렀다.
인조가 땅바닥에 연이어 머리를 짓치며 피를 흘릴 때에 이를 보던 백성들과 신하들은 얼마나 피눈물을 흘렸을 것인가?
예나 지금이나 힘이 없는 나라의 백성은 그 대가를 혹독하게 치러야 한다는 역사의 교훈을 되새겨야 할 것이다. 이제라도 나라의 근간을 든든하게 하여 두 번 다시 이민족으로부터 핍박 받는 백성이 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하지만 작금의 정치상황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수렁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은 아닌지 역사의 숨결이 어린 남한산성 위해서 심히 걱정스러운 마음이 드는 것은 기우(杞憂)일까?
다시 신발을 졸라매고 하남시를 향해서 눈길을 헤쳐 나갔다. 남한산성과 하남 의 이성 산성으로 이어지는 위례둘레길을 걷기로 했다. 대체로 길이 평평하고 무난한 코스이긴 하지만 등산로에 많은 눈이 쌓여 있어 다리에 한층 힘이 들어갔다. 눈길을 걸은 지도 어느덧 서너 시간이 지나고 나니 다리도 아프고 배도 고팠다. 양지 바른 곳에서 잠시 배낭을 풀고 갈증이 나던 차에 시원한 막걸리 한 잔으로 목을 축이니 이보다 더 행복할 순 없었다. 멋진 설경속에서 따끈한 커피 한잔은 세상 그 어떤 커피보다 맛이 있었다.
다시 산행을 시작하여 이성 산성을 거쳐 덕풍골쪽으로 하산했다. 산행을 시작한지 거의 4시간 반이나 걸려서 끝난 산행에 비록 몸과 마음은 지치고 피로했지만 멋진 설경에 도취되었던 시간들은 두고두고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될 것이다.
동년기자로 활동한 지도 어느덧 만 1년이 돼가고 있다. 일상의 삶 속에서 나태(懶怠)에 빠져 글쓰기를 망각하지 않으려 부단히 노력했지만 “내가 정말 글다운 글을 썼을까?” 하고 뒤돌아보며 반성을 하게 된다. 글쓰기에 대한 열정은 지난 1년 동안 한시도 사그라들지 않았다.
기자생활 1년 동안 덤으로 얻은 행운도 많았다. 대학로에서 두 번씩이나 연극을 관람했고 올 초에는 압구정동에서 이라는 뮤지컬도 관람했다. 젊어서는 살기 바빠 문화생활을 못했고 나이 들어서는 관심이 떨어져 고작해야 1년에 영화 한 편 보기도 쉽지 않았는데, 지난 1년 동안 동년기자로 활동하면서 문화생활까지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 감사한 마음이다.
지난 2월 22일에도 큰 공연을 볼 수 있었다. 여의도 KBS홀 본관에서 공연된 이투데이 신춘음악회 에 초대된 것이다. 필자는 며칠 전부터 설레는 마음으로 공연을 기다렸다. 그런데 당일 아침부터 날씨가 잔뜩 흐리더니 오후가 되자 오락가락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필자가 사는 인천공항 근처에는 진눈깨비와 비가 섞여 내리면서 을씨년스럽기 그지없었다.
퇴근시간에 맞춰 막내아들에게 회사로 나오라고 했다. 공연장까지 가는 방법을 인터넷 검색을 통해 몇 번이나 확인해보았지만 쉽게 가는 노선이 잘 찾아지지 않았다. 결론은 회사 통근버스로 김포공항까지 이동한 다음 공항전철역에서 9호선 급행열차로 갈아타고 가는 방법이 최선이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시간이 더 걸려 저녁 먹을 시간이 없었다. 가다 보니 허기는 또 얼마나 몰려오든지…. 서둘러 현장에 도착해 일단 표를 받아놓고 시간을 보니 공연시작 20분 전이었다. 빠듯하긴 했지만 저녁을 굶고 관람할 수는 없어 근처 김밥 집으로 달려갔다. 모처럼 아들과 둘이 마주 앉아 김밥과 라면을 시켜 먹으면서 오랜만에 서로의 관심사를 물으며 대화할 수 있어서 좋았다. 식사가 끝나고 부리나케 공연장으로 돌아오니 공연은 이미 시작되었고 겨우 안내를 받아 착석하고 관람을 했다.
오프닝 무대로 타악그룹 RUN의 ‘두드림’은 힘차고 역동적으로 리듬을 타고 있어 오랜만에 필자의 마음을 심쿵하게 만들었다. 겨울 끝자락에서 만난 ‘마음이 따뜻해지는 콘서트’는 오는 봄을 맞이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필자의 마음을 녹여줬다. 아들은 가수 린의 인기 드라마 OST곡을 제일 좋아했다. 자신의 세대와 공감이 되고 감성이 맞아떨어진다는 것이었다. 깜찍한 걸그룹 ‘모모랜드’의 공연은 싱그러워 젊은 층의 관람자들은 물론이고 시니어들도 한마음으로 공감하고 어우러진 멋진 공연이었다.
중견가수 김장훈의 넘치는 끼와 재치는 마력이 있었다. 관객과 함께 호흡하면서 어우러지는 모습에서 문화는 대중과 함께 호흡을 해야 그 힘이 발휘된다는 생각을 새삼 해보았다. 마지막으로 메인무대를 장식한 가수는 등장하기 전부터 한껏 기대를 갖게 한 대형 록 가수 전인권이었다. 가늠할 수 없는 울림통, ‘전인권 밴드’의 현란한 연주, 관중을 사로잡는 매력과 포스가 한껏 발휘된 무대였다. 공연의 마지막을 향해 치닫는 시간에 갈 길이 먼 필자와 아들은 아쉬움을 남긴 채 자리를 떠야 했다.
아들은 공연장을 빠져나와 지하철을 타러 가는 내내 공연의 잔상(殘像)에서 벗어나지지 않는지 따뜻하고 멋진 공연이었다고 끊임없이 조잘댔다. 황급히 돌아오면서 9호선 국회의사당역을 찾느라 이리저리 헤맨 필자와 아들은 영락없는 촌뜨기 신세였다. 겨우 지하철을 타고 두어 정거장쯤 갔을 때 무심코 안내방송으로 다음 정차할 역이 노량진이라는 멘트를 듣고는 깜짝 놀랐다. 반대 방향으로 가는 전철을 타고 만 것이다. 일찍 집에 도착하려고 공연 엔딩도 보지 않은 채 조금 일찍 빠져나왔는데 반대로 가는 지하철을 타다니! 필자와 아들은 마주보면서 멋쩍은 웃음을 나누고 노량진역에서 내려 부리나케 반대 방향으로 가는 전철을 갈아탔다. 우여곡절 끝에 공항전철을 타고 목적지에 도착했지만 너무 늦은 시간이라 택시 잡기가 힘들었다. 승강장을 보니 택시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30여 미터나 늘어서 있었다. “에라 모르겠다. 일단 걸어가다가 택시가 보이면 타자. 그게 더 빠르겠다.” 아들에게 그렇게 말하고 걷기 시작했는데 그날 밤, 집에 도착할 때까지 택시는 잡히지 않았다. 한 시간여를 눈길을 걸었다. 칼로 에이는 듯한 바람이 불어와 옷깃을 여미고 귀를 손으로 감싸면서 걸었지만 아들과 도란도란 이야기들을 나누면서 걸어가는 길이 싫지 않았다. 오랜만에 부자가 함께 걷는, 눈 내린 밤길은 따뜻한 콘서트만큼이나 훈훈했다.
스마트폰 알람소리를 듣고도 이불속에서 꼼지락 거리며 늑장을 부리고 있다. 깊은 잠을 못 이루고 뒤척이다가 새벽잠이 들 때면 따끈따끈하게 데워진 방바닥에 접착제라도 발라놓은 것처럼 깊은 잠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러니 알람소리가 달가울 리가 없다. 그러나 통근버스를 놓치는 날이면 생으로 고생할 것을 생각하면 무턱대고 늑장을 부릴 수도 없으니 주섬주섬 이불을 정리하고 거실로 나온다. 지금부터가 출근전쟁이다.
작년 9월부터 집에서 좀 떨어진 고향에 취직이 돼 은퇴 후의 삶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처음에는 임시로 친구네 집에 방 한 칸을 빌려 출, 퇴근하기 시작하다가 눈치도 보이고 여의치 않아 조금 떨어진 곳에 원룸을 얻어 따로 나왔다. 물론 서울집에는 주말에 올라가니 늘그막에 팔자에도 없는 주말부부가 됐다.
거실로 나와 일단 TV를 켜고 아침뉴스를 보면서 몸은 이미 샤워실로 향하고 있다. 샤워를 마치고 나오면 어제 먹던 찌개를 덥히고 프라이팬에 계란을 깨 올려놓은 다음, 냉장고에서 몇 가지 되지도 않는 밑반찬으로 상을 차리기 시작한다. 한편으로는 머리를 말리고 속옷을 갈아입으면서 출근복장으로 변신하기 시작한다. 어쨌거나 밥 한 숟가락을 먹고는 지난주에 아내가 챙겨준 녹용보약까지 살짝 데워 쭉 들이킨다. 이 시간만큼은 참으로 바쁘게 설쳐댄다. 그렇지 않으면 통근버스를 놓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스마트폰 배터리를 바꾸어 끼우고 설거지를 시작한다. 설거지가 끝나면 문을 대충 열어놓고 청소기를 돌리기 시작한다. 나이 탓인지 아니면 계절 탓인지 요즘 들어 부쩍 머리카락이 빠져 바닥에 나뒹구는데, 그냥 출근하기가 내키지 않아 아침마다 청소기를 돌리곤 한다. 청소가 끝나고 시간을 보니 통근버스 탑승 5분전이다. 허둥대는 마음으로 보일러와 렌지를 확인점검하고 전등을 모두 끈 다음 문단속까지 하고 황급히 점퍼를 걸치고 뛰어나왔다.
아! 5분, 최소한 10분전까지는 집에서 출발해야 여유 있게 정류장까지 갈 수 있는데, 5분이라?…한두 번 있던 일도 아니고 드디어 정류장까지 숨이 턱에 차도록 뛰기 시작했다. 달리는 중에 휴대폰을 깜박 집에 두고 나온 것을 알았지만 되돌아가기에는 이미 시간이 부족했다. “에라, 오늘 휴대폰 없는 세상에서 한번 살아보자” 스스로 위안을 하면서 통근버스에 올라탔다. 그런데, 생각하면 할수록 하루 종일 휴대폰 없이 산다고 생각하니 심심하고 답답해서 어쩔까? 하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를 않는다. 한편으로는 “언제부터 휴대폰에 의지했다더냐. 예전에는 흎대폰 없이도 잘살았는데 뭐! 참고 견디어 봐야지”
사실 요즘 사람들은 너무나도 휴대폰에 빠져 살고 있으니 어찌 보면 중독 수준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런데, 좀 더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면 요즘처럼 바쁘게 돌아가는 정보화 시대에 정보와 지식의 산실인 휴대폰은 현대인의 필수품일 수밖에 없다. 그 어떤 궁금증도 똑똑한 스마트폰 하나만 있으면 대부분 해소 할 수 있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서로 통할 수 있으니 좋다.
SNS의 발달로 인해 언제든지 상대방에게 자신의 생각을 주고받을 수 있으며 이제는 외국에 나가 있는 자녀들과도 바로 이웃한 것처럼 대화를 할 수 있으니 예전의 손 편지나 쪽지편지는 이미 구시대의 유물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요즘의 젊은이들은 물론이고 시니어들까지도 눈을 뜨고 있는 이상 휴대폰을 습관적으로 들여다보는 세상이 되었으니 어찌 보면 상대방에 대한 무관심을 부채질하여 삭막하기 그지없는 세상으로 빠져들어 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문명의 이기는 어디까지가 그 한계일까?
어쨌거나 휴대폰 없는 하루를 살겠노라고 단단히 벼르고 별렀건만 회사의 업무 중에도 여전히 머릿속은 궁금증으로 가득 찼다. 혹시 급한 전화는 오지 않았을까? 미국에 있는 아이들에게서 카카오톡이 오지는 않았는지? 회사의 누군가 커피 같이 마시자고 연락은 오지 않았는지? 생각할수록 휴대폰 없는 세상은 답답한 것은 물론이고 심심하기 짝이 없었다.
오전을 잘 넘기고 점심식사가 끝난 후, 잠시 휴식시간에도 허전하고 재미없기는 마찬가지이니 이 나이에 휴대폰에 중독이라도 됐단 말인가? 그래도 노력하니 참을 만 해졌다. 습관은 어느새 중독으로 진화해 가는 요즘 세태에 휴대폰 없이 하루를 견디어냈다. 이제 가끔은 휴대폰 없는 하루를 만들어 보아야 겠다는 생각을 해 보지만 퇴근시간이 가까워오자 어느새 마음은 휴대폰을 놓고 나온 집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고향에 둥지를 틀고 주말부부로 생활한 지도 어느덧 6개월로 접어든다. 아직도 마음은 반반이다. 사실 고향이라고는 하지만 초등학교 시절만 달랑 보낸 시간은 불과 14년이지만 나머지의 대부분을 서울에서 보냈으니 어찌보면 내고향은 서울이라고 해도 잘못된 것은 없으련만 아직도 고향은 영종도라는 고정관념은 지워지지 않는다. 아마도 영원히 고향은 영종도일지도 모르겠다. 조상대대로 터잡아 살아왔고 나 또한 이곳에 탯줄을 묻었으니 이곳이 고향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몇십년을 살아온 서울은 자연스럽게 타향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고향에서 홀로서기를 하는데는 나름 인내심이 필요했다. 달랑 거실 딸린 방하나 얻어서 숙식을 하고 회사에 출,퇴근을 하다보니 평소 겪어보지 못했던 불편한 일상의 많은 것들 앞에서 당황해 하기도 했다. 밥짓고 국이나 찌개 끓이고, 물론 기본 밑반찬은 서울에 있는 아내가 챙겨주지만 나머지 모든 것을 나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그나마 고교시절에 자취생활을 했던 경험을 되살려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열심히 살다보니 이제는 나름 살림의 지혜도 새록새록 늘어가고 있다.
외로운 고향생활(?) 중에서도 그나마 위안을 삼는 것은 어린 시절 소꿉친구들이다. 초등학교 졸업이후 각자의 처한 삶의 자리에서 열심히 살던 친구들이 은퇴시기를 맞이하여 고향에서 다시 뭉쳤으니 그 반가움이야 오죽하랴. 육십 중반을 넘어가고 있는 나이에 소꿉친구들은 고향에서 의기투합했다.
매주 토요일이면 당연스레 아지트가 되어버린 당구장으로 모인다. 다섯명의 소꿉친구들이 모여 신나게 당구를 치고 저녁을 함께 먹으면서 반주도 겯들인다. 아느새 어린 시절로 돌아간 친구들은 잊혀져 가던 어린시절의 별명을 불러가며 걸죽한 입담을 자랑한다. 참으로 정겹다. 늦은 저녁을 먹고는 우르르 몰려가는 곳이 바로 나의 보금자리 원룸이다. 그곳에서 다시 바둑을 둔다. 고만고만한 실력에 서로 훈수 두지 말라고 손사래를 치면서 으름장을 놓지만 구경하는 입장에서는 입이 근질근질하여 훈수를 안하고는 못배긴다.
그렇게 밤 11시가 넘은 시간까지 왁자지껄 떠들면서 놀다보니 이제는 재미가 붙어 다음 약속까지 챙기고서야 헤어진다. 오늘은 주말도 아닌데 호출이 왔다. 퇴근하는 즉시 당구장으로 오란다. 퇴근시간이 은근히 기다려지는 이유다. 꽃피는 봄이 오면 주말에 모여서 이곳 저곳 고향 근처의 섬탐방을 계획하고 있다. 여름에는 텐트하나 싣고 무인도에라도 가서 낙시줄을 드리우다가 운수 사납게 걸려나온 물고기로 매운탕을 끓여 소주 한 잔으로 우정을 다져볼 생각이다.
붉게 물들어가는 석양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수평선 아래로 꼴까닥 넘어가며 마지막으로 활활 타오르는 용광로처럼 가라앉는 일몰을 바라보면서 기울어져 가는 소꿉친구들의 삶을 관조해 보는 시간도 가져볼 요량이다.
어둠이 장막을 치면 모닥불을 피워놓고 하룻밤 야영을 하면서 조개도 줍고 낙지도 잡아 영양보충도 하면서 뒤늦은 우정을 활짝 피워볼 생각이다. 생각만 해도 설레이는 소꿉친구들, 이래저래 소꿉친구들과의 우정이 깊어가는 삶을 구상하고 있다.
겨울 떠나보내고 봄을 재촉하며 창가를 소곤소곤 두드리는 비가 밤새도록 귓전에서 맴돈다. 어느덧 절기상으로 ‘우수’가 성큼 다가와 봄을 기다리는 마음에 사위어가는 한 줄기 희망의 모닥불을 살려냈으면 좋겠다.
24절기중 두 번째 절기인 우수(雨水)는 봄으로 들어서는 입춘(立春)과 겨울 잠자던 개구리가 놀라서 깬다는 경칩(驚蟄) 사이에 있는 절기이다. 우수는 '눈이 녹아서 비가 된다.'는 말로 이때가 되면 추운 겨울이 가고 대지에는 봄기운이 돌기 시작한다.
겨우내 서해바다에서 모질게 불어대던 서풍한설(西風寒雪)도 주춤하고 훈훈함이 설핏 묻어있으니 조금은 살만하다.
이제야 봄은 오려나? 겨우내 나라 안팎은 시끌벅적하고 을씨년스러웠다. 그 모진 한파속에 수많은 촛불이 바람에 나부끼고 태극기가 맞불작전으로 세과시(勢誇示)를 하면서 서로에게 쏟아낸 혐언(嫌言)들은 공허하게 부딪치는 파열음이 되어 서민들의 마음을 허탈하게 만들었으며 자괴감마저 들게 했다. 흑백의 논리가 판을 치고 외눈박이사랑처럼 자신의 진영만이 옳다는 짝사랑식 막말을 쏟아부은채 표류하는 허송세월이 길어지고 있다. ‘배려’라는 단어는 이미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서로에게 자신의 논리를 강요하고 있다. 자신의 논리에 부응하지 못하는 사람은 이미 반대편 사람으로 의심과 경계의 눈초리를 보내며 반쪽짜리 사회를 심화(深化)시켜 가고 있다.
인간은 어차피 사회성(社會性, social qualities)을 가지고 있기에 혼자서는 이 풍진 세상을 살아내기는 어렵다. 어차피 둘이상이 모여 살아가는한 사유(思惟)의 상이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상식과 보편, 관습과 배려를 모두 동원해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의 핵심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각자의 이해관계가 실타래처럼 얽히고 설켜 있다. 해결되지 않는 시시비비를 법으로 규정하고 있는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사회이지만 요즘은 초법적 발상이 활개를 치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흔히 말하는 ‘떼법’이 ‘헌법’의 상위에 있는지 궁금하다. 뭐니뭐니 해도 편가르기식 정치를 등에 업고 무엇인가 변화를 설레발치는 수준 미달(?)의 정치인들의 영향으로 사회는 더욱 양분화 되어 갈등을 조장해 낸다.
이래저래 이번 겨울은 차가운 한파와 더불어 서민들의 마음마저 꽁꽁 얼어붙게 만들었다.
봄은 언제쯤 오려나? 봄이 오기는 할까? 봄을 기다리는 마음이 모락모락 피어오르지만 이러 저리 표류하는 이 사회는 좀처럼 오는 봄을 두 팔벌려 맞이하려는 기세가 보이지를 않는다.
세상만물의 조화는 오묘한 것. 아무리 추운 엄동설한도 때가 되면 해동이 되고 나뭇가지에는 물이 올라 만물이 기지개를 켤 준비를 하겠지. 혹독했던 지난겨울은 그 겨울에 묻어버리고 이제는 따뜻한 봄기운으로 삼천리 방방곡곡 대지를 물들였으면 좋겠다. 이 겨울의 갈등과 반목은 잠시 접어두고 꽃피는 봄이면 우리 모두가 하나의 마음으로 어우러졌으면 좋겠다.
많은 나라를 여행해 보지는 못했지만 우리나라만큼 수려한 경관을 자랑하는 나라는 흔치 않다. 사계절이 뚜렷하여 계절마다 조화롭고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는 금수강산은 우리나라만의 축복이요 선물이지 않겠는가? 자손만대에 물려줄 이 멋진 나라를 더욱 잘 가꾸고 꽃을 피워내 오늘을 살아내는 필자가 훗날 멋지고 아름다운 선조였다는 말을 후손들에게 들었으면 좋겠다.
겨울도 어느새 그 정점을 찍고 하나, 둘 봄을 헤아리는 마음이 가슴속을 살며시 물들여갈 무렵인 2월 중순에 산과 바다, 그리고 호수를 조망할 수 있는 코스로 산행을 나섰다.
사실은 주6일 근무하느라 주말쯤이며 심신이 피로함에 젖어 아무것도 하기 싫고 그저 시간에 쫒기지 않고 하루를 늘어지게 쉬고 싶다는 생각을 감출 수는 없었지만, 동해안 최북단 ‘해파랑길’은 나에게 아련한 추억이 서려있어 선뜻 승낙하고야 말았다.
다소 이른 시간에 서울에서 출발한 버스는 겨울산의 스산함을 파노라마처럼 스치면서 어둠속을 질주하고 있었다. 비몽사몽(非夢似夢)간에 몇 시간을 달렸는지 드디어 진부령 고개가 눈앞에 나타났다.
‘낯익은 山河’ 굽이굽이 고갯길을 넘으니 흘리~장신리를 지나 드디어 뻥뚫린 듯 바다가 눈에 들어오더니 버스는 대대리 검문소를 유유히 빠져나가고 있었다. 대대리~거진 구간은 내 젊은 시절 푸른 제복에 땀 마를 날이 없이 동분서주하며 훈련하던 곳이라 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의 모습을 차창으로 내어다 보니 애틋함이 샘솟아 나도 모르게 슬그머니 미소가 떠올랐다.
포병병과의 위관장교시절 이곳 대대리 하천 일대와 반암리 솔밭진지에 진지편성을 해놓고 포탄사격 훈련을 하던 그 시절은 내 인생의 황금기요 젊은 혈기로 똘똘 뭉쳤던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하루의 고단한 훈련을 마치고 병사들은 온종일 훈련의 고단함에 젖어 모두들 텐트에서 코를 골며 깊은 단잠에 빠져있던 시간에 난 쉽사리 잠을 이루지 못하고 진지 순찰을 하던 중이었다. 다음 날, 실시될 포탄사격훈련에서 어떻게 해야 표적 안에 많은 량의 포탄을 명중시킬 것인가? 에 대한 염려와 고된 훈련 뒤의 병사들의 취침상태를 확인하고자 진지 주변을 돌고 있었다.
우연히 때는 보름달이 중천에 덩그러니 떠있었고 쏟아지는 별무리가 아름답던 그 밤에 파도소리는 유난히도 철썩이고 있었다.
출렁이는 물결에 비추인 달빛은 마치 황금 고기비늘처럼 일렁거렸고 수평선 너머에서 너울파도가 간간이 밀려오고 있었으니 환상적인 야경에 그만 넋을 놓고 한동안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 곳이 바로 지금 차창너머로 지나치고 있는 반암진지였다. 그 시절의 솔밭은 숱한 세월을 견디어 내고 노송(老松)이 되어 동해의 쪽빛 바다와 어우러져 멋진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드디어 해파랑 길이 시작되는 거진항에 도착하여 기념사진을 찌고 본격적으로 산행에 들어갔다. 초입의 가파른 계단에서 숨을 몰아쉬며 오르다 보니 다리는 뻐근하다 못해 쥐가 오를 지경이었다. 능선에 올라서고 나니 그다지 높지 않은 숲길이 길게 연결되어 있었다. 아기자기하게 이어지는 능선 따라 숲길을 걸으니 마음속에 어느새 봄기운이 가득 밀려들어왔다. 더구나 동해의 푸른 바다를 조망하며 불어오는 바닷바람을 마음껏 들이키니 한층 상쾌함이 더해져 갔다.
어느새 몇 굽이를 돌아 ‘화진포 성(城)으로 가는 표지판이 나타나자 좌측으로는 멀리 건봉산 산줄기가 보이기 시작했다. 아직도 그 산에는 겨우내 내린 눈이 그대로 쌓여있어 설산의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오른쪽으로는 파도가 하얗게 밀려오는 동해바다가 눈에 들어오니 최상의 멋진 코스임이 분명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한국의 산하이던가!” 어찌하여 이 평화로운 곳에 살벌한 철조망을 치고 남북이 서로 차가운 총부리를 맞대고 있단 말인가?
산행이 막바지에 이르자 하얀 눈이 소복이 쌓여 겨울에 푹 빠져 있는 화진포 호수가 한 눈에 들어왔다. 산 위에서 내려다 본 호수위에는 백색의 고요만이 물들어 있어 마치 한 폭의 동화나라를 보는 듯 한 느낌이었다.
그 산을 내려오는 끝자락이 ‘화진포성’이라 불리는 김일성 별장이 있었으니 아픈 과거의 역사를 되돌아보게 하는 산행이었다. 전망 좋은 별장의 옥상에 올라보니 멋진 설산과 바다가 한 눈에 들어왔다. 동해바다의 쪽빛 물결은 오늘따라 파고가 높아 하얗게 밀려와 부서지는 모습이 환상적이었다.
파도소리를 들으며 모래사장을 걸었다. 모래에 새겨진 발자국 마다 세월의 흔적이 차곡차곡 쌓여만 간다.
대진항 바로 옆 양지바른 곳에서 고단했던 발걸음을 멈추고 소박한 점심으로 허기를 달랬다. 이 멋진 산행 끝에 먹는 점심식사는 그 어떤 산해진미와 비교할 수 없이 그야말로 꿀맛이었다. 소주와 막걸리를 곁들인 채, 산행담(山行談)에 열을 올리며 모두들 행복해 하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으면서 슬그머니 내면으로부터 솟아오르는 행복바이러스가 멀리 퍼져갔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아버지는 섣달그믐날 저녁에는 밤새도록 온 집안에 불을 밝혀놓아야 조상님들이 잘 찾아오실 수 있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어느새 해가 지면서 집안 곳곳에 불이 밝혀졌다.
어머니는 며칠 전 동네 방앗간에서 뽑아다 놓아 꾸덕꾸덕해진 가래떡을 써셨다. 설날 아침에 끓일 떡국 떡을 준비하시느라 밤늦도록 떡국떡 써는 소리가 고요한 밤의 정적을 깨뜨리곤 했다. 섣달그믐날에 잠자면 눈썹이 하얘진다는 속설 때문에 아이들은 졸린 눈을 비비면서 억지로 버티다 결국 자정 조금 넘은 시간에 모두 곯아떨어졌다.
어김없이 설날 아침은 밝아왔다. 아버지는 꼭두새벽에 일어나 큰 마당은 물론 아랫동네로 내려가는 마을 어귀까지 50여 미터 이상 말끔히 쓰레질을 하고 들어오면서 전날 늦잠을 자는 바람에 아직도 이불 속에서 꼼지락거리는 우리들을 대갈일성(大喝一聲)으로 깨우셨다. 새벽에 아버지가 말끔히 쓸어놓으신 길 따라 두루마기 옷고름 휘날리면서 사촌 남동생들 앞세워 휘적휘적 대문 안으로 들어서시는 작은아버지의 손에는 정종병이 달랑 들려 있었다.
드디어 대청마루에 정성껏 차례상이 차려지고 조상님의 상청이 열렸다. 설빔으로 모두 갈아입고 대청마루에 서니 그 숫자만 해도 열서너 명쯤 되어 보인다. 필자의 형제는 8남매, 그중 아들이 5형제. 작은아버지의 자손들까지 순서대로 늘어서 있으니 대청마루가 꽉 찼다.
차례 예식이 시작되면 조상 윗대 할아버지에서부터 차례차례 떡국과 빚은 술을 정성껏 올리신 후 아버지는 나직한 헛기침을 하셨다. 그 신호에 맞추어 우르르 엎드려 절을 올렸다. 필자를 포함해 고만고만한 아이들이 어른들 따라 대청마루에 쪼르르 엎드린 채 어른들이 언제 일어나나 좌우로 눈치를 살피곤 했는데 그때마다 항상 늦게 일어나는 아이가 있어 킥킥대며 웃기도 했다. 모두가 일어설 때 엎드리고, 엎드릴 때 일어서는 아이 때문에 안 그래도 겨우 참고 있었던 웃음보가 터지면 참으려고 애를 써도 웃음은 멈추질 않았다. 열 번도 넘게 절을 하는 동안 킥킥거리는 아이들 때문에 신경이 날카로워진 아버지는 산만해진 아이들 쪽을 쓱 한번 훑어보셨다. 그러면 일순간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고 모두들 움찔 놀라 얼어붙은 표정이 됐다.
침묵이 흐른 다음 아버지는 다시 눈빛을 풀고 차례를 마치셨고, 불호령이 떨어질 줄만 알았던 아이들은 아버지가 “조반을 서두르거라!” 한마디 하면 “휴! 천만다행이다!” 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어머니의 정성이 깃든 떡국으로 아침상을 물린 후 아버지가 미리 준비해놓은 음식 보따리를 들고 집을 나서면 아이들도 따라 부지런히 선산(先山)으로 향했다.
산소 위에 남은 잔설을 치울 때도 있었지만, 눈이 아주 많이 왔던 어느 해에는 눈 위에 그대로 돗자리를 펴고 절을 했다. 조상님에 대한 아버지의 설명이 길어질수록 아이들은 손과 발이 시려 꼼지락거리기 일쑤였다.
성묘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는 동네 어르신들이 모인 사랑방에 들러 한 분 한 분께 세배를 하며 새해 인사를 올렸다. 이때 어르신들은 덕담과 함께 세뱃값으로 한과(漢菓)나 떡, 식혜 등을 내놓았으며 슬그머니 눈깔사탕을 손에 쥐어주셨다. 달콤했던 그 맛은 두고두고 잊을 수 없는 간식거리였다. 세뱃값으로 먹을 것을 내놓았던 그 시절은 참으로 마음이 풍요로웠던 시절이었다. 우리는 요즘 아이들처럼 세뱃돈 받으려고 미리 계산을 하거나 떼를 쓰지도 않았다.
어제는 동지였다. 동지 하면 바로 팥죽이다.
예로부터 동지에는 팥죽을 쑤어먹지 않으면 쉬이 늙고 잔병이 생기며 잡귀가 성행한다는 속신이 있어, 동지팥죽을 먹는 풍습이 있었다. 팥의 붉은색이 양색이므로 음귀를 쫓는 데 효과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팥죽을 먹는 것이 악귀를 쫓는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고향에 정착을 한지도 어느덧 4개월째로 접어들고 있다. 고향의 중심에는 백운산이 있고 그 산 중턱에 천년고찰 용궁사가 자리하고 있다.
용궁사에 대한 추억은 어린 시절 봄이 되면 어김없이 이곳으로 봄소풍을 갔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올라가는 길 따라 벚꽃이 지천으로 피어 있었으며, 용궁사 경내가 가까워지면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벚꽃냄새가 매캐한 향냄새와 어우러져 황홀지경에 빠질 정도였다. 특히 소풍날이나 운동회 날이나 되어야 맛볼 수 있었던 사이다의 톡 쏘는 맛에 취해 마냥 행복했던 그 시절이 생각난다.
그런데, 용궁사에서 동짓날 팥죽을 무료로 제공한다는 현수막이 눈에 띄어 기회가 되면 꼭 한번 가보겠다는 결심을 했다. 드디어 동짓날이 되어 어린 시절 친구에게 같이 갈 것을 권고하니 흔쾌히 동행해 주었다.
점심시간을 이용하여 12시에 산 아래에서 만나 쉬엄쉬엄 백운산을 오르기 시작한지 불과 20여분 만에 용궁사가 눈에 들어왔다. 멀리서 보아도 경내 주차장에 여러 대의 차가 주차되어 있었고 절간 마당에 많은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팥죽을 먹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마침, 아는 사람들 몇이 그 곳에서 팥죽 봉사를 하고 있다가 필자를 보고는 반색을 하며 자리를 안내해 준다. 김이 설설 오르는 팥죽 한 그릇에 동치미까지 곁들여서 차려 내왔다. 시장하던 차에 게눈 감추듯이 한 그릇을 뚝딱 해치우고 나니 떡에 커피까지 대접을 받게 되었다. 뒤꼍으로 가니 커다란 솥에 불을 지피고 대형 주걱으로 팥물을 휘휘 저으면서 팥죽을 쑤고 있었다. 어찌 그냥 지나칠쏘냐. 대형 주걱을 받아들고 노력봉사를 자청하고 나섰다. 팥죽이 끓으면서 솥바닥에 눌어붙지 않도록 부지런히 주걱을 저어야 한다고 귀띔을 해주니 참으로 열심히 노력봉사를 했다. 덕분에 내려올 때에는 포장용기에 팥죽을 여섯 개나 선물로 받아 휘파람을 불면서 내려왔다.
동지 날에 먹는 팥죽은 잡귀를 쫓고 풍년을 기원하는 의미도 있지만 팥죽은 몸에도 좋다고 한다. 여러 가지 의미로 일석이조라고 할까?
동지에는 팥죽을 사람이 드나드는 대문이나 문 근처 벽에 뿌리기도 한다. 또한 팥죽을 먹는 풍습에는 풍작을 기원하는 의미도 있다고 전해지고 있다.
동짓날 우연히 천년사찰 용궁사에서 팥죽을 얻어먹었으니 이제 잡귀는 모두 물러가고 내년에는 좋은 일들만 있으리라는 생각을 하면서 산새가 지저귀는 오솔길을 따라 내려왔다. 포근한 고향의 정이 듬뿍 느껴지는 동짓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