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이 치욕의 역사였다면, 정유재란은 왜군이 충남 이북에 발도 못 붙인 구국승전의 역사다. 그 전적지는 진주, 남원, 직산 등 삼남지방 곳곳에 있지만 옛 자취는 찾기 어렵다. 뚜렷한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은 왜군이 남해안을 중심으로 농성하던 성터들이다. 주로 경남 중동부 해안에 밀집한 왜성 터들도 오랜 세월 허물어지고 지워져 갈수록 희미해져간다. 왜성이라는 이유로 사적지 지정이 해제된 탓이다. 근래 일부 지방자치단체는 그 중요성에 눈을 떠 옛 모습대로 복원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는 아직도 방치되어 있다. 치욕의 역사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다. 더 늦기 전에 지금 모습이라도 남겨둬야 한다. 더 사라지고 훼손되기 전에 역사 현장 보전의 필요성을 일깨우고, 정유재란의 역사적 의미를 천착하기 위해서라도 그 흔적을 돌아볼 필요가 있어 ‘브라보 마이 라이프’에 게재하기로 한다.
'임진ㆍ정유왜란 피랍인 후손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이는 14대 심수관이다. 일본 도예의 대명사가 된 사쓰마 야키(薩摩燒) 중흥의 주인공이라는 게 그 이유일 것이다.
1969년 그를 주인공으로 설정한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의 소설 ‘고향을 어찌 잊으리오’가 화제가 되자 그의 명성도 부풀어 올랐다. 정유재란 때 납치된 도공들이 규슈 가고시마(鹿兒島) 땅에 터를 잡고 400년 동안 조선인 혈통을 이어가며 살아온 이야기가 독자들의 심금을 울린 것이다.
한국에서는 ‘노란 셔츠 입은 사나이’로 유명했다. 1974년 한국에 온 그는 서울대학교 강당에서 강연했다. 질의응답 시간에 일제 치하 36년에 대해 묻는 학생들에게 “여러분이 36년을 말한다면 나는 370년을 말해야 합니다. 과거에 매이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답했다.
그 순간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지면서 유명한 노래의 합창이 울려 퍼졌다. 마침 그가 노란 티셔츠를 입고 있었던 것이다. 14대째 한국 이름을 쓰고 있는 데 대한 존경과 사랑의 표시였다. 그 일을 계기로 그는 박정희 대통령을 예방하는 행운을 누리기도 했다.
그건 오래전 이야기이고, 근래에는 고(故) 노무현 대통령이 그의 집을 방문하고, 한일 각료회담 간담회가 그의 집에서 열린 일로 유명해졌다. 2004년 12월 18일 가고시마에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이 끝난 뒤, 유명 온천 휴양지 이부스키(指宿)로 가는 길에 노 대통령이 그의 집에 들러 차 한 잔을 마신 일이 있었다.
1998년에는 가고시마 한일 각료회담 후 양국 각료들이 그의 집에서 간담회를 가진 일도 있었다. 30년째 주일 한국대사관 명예 총영사직을 수행하고 있는 그의 가교역할이 필요하기도 했지만, 양국이 서로 편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1981년 도쿄에서였다. 정확히 말하면 그의 작품과의 만남이었다. 게이오대학교 신문연구소에서 공부할 때 우연히 신주쿠 이세탄(伊勢丹)백화점에서 ‘심수관 도예전’이 열린다는 신문기사를 보고 달려갔다. 먼저 놀란 것은 작품 값이었다. 막사발로 보이는 그릇 하나에 30만 엔짜리 가격표가 붙어 있었다. 도예에 까막눈이었던 젊은 기자의 눈에는 큰 놀라움이었다.
두 번째로 놀란 것은 그가 심수관이란 이름을 쓰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분명 일본인이었고, 그의 선대가 납치되어온 지 400년을 바라보는데 아직도 우리나라 이름을 쓴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재일동포 대부분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숨기려고 통명(通名)이라는 일본식 이름을 쓰고 있지 않은가.
그 일이 있은 후 꼭 한 번 그를 만나 인터뷰를 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 소원은 10년 만에 이루어졌다. 1990년 7월, 주일 특파원으로 발령받아 도쿄에 부임하자마자 가고시마로 달려갔다. 도쿄에서 신칸센으로 후쿠오카까지 7시간, 거기서 특급열차로 가고시마까지 5시간, 다시 로컬 열차로 30분을 달려, 시골 역에서 택시로 30분을 더 가야 했다. 중간에서 하룻밤을 머문 여정이었다. 미야마(美山)라는 지금의 마을 이름보다 나에시로가와(苗代川)라는 옛 이름이 더 유명한 곳이다.
그는 10년 지기처럼 환대해주었다. 수장고에서 선대들의 작품들을 둘러보는 사이, 14대가 가마에서 나왔다는 전갈이 왔다. 수염이 덥수룩한 얼굴이 이웃집 아저씨 같은 푸근한 인상이었다. 잉크빛 작업복은 개량한복 같았다. 따스한 손길에 이끌려 사랑채에 오르니, 낡은 선풍기 저편 벽에 ‘백세청풍(百世淸風)’이라는 글씨가 눈길을 끌었다.
“선친께서 조선에 가셨을 때 황해도 해주의 어느 정자에서 탁본을 떠온 것이오. 우리 집 가보요.”
수인사가 끝나고 액자를 화제 삼자 그는 이렇게 대답하며, 가문의 내력부터 설명하기 시작했다.
많은 것을 물었고, 많은 말을 들었다. 정유재란 때 붙잡혀온 도공 후예들이 사는 마을이라기에 당신처럼 조선 이름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되느냐고 물었더니, “우리 집뿐이오” 했다. 성은 그대로인 임(林) 씨가 있지만, 읽기는 일본식(하야시)으로 하는 집이 하나, 나머지는 모두 일본 성으로 바뀌었다 했다. 200여 호 가운데 50%는 조선 도공 후예들이고, 나머지는 메이지(明治)유신 이후 흘러 들어온 일본인들이라 했다.
“지금은 달라졌지만 메이지 유신 무렵까지만 해도 마을에 서당이 있어 글 읽는 소리가 낭랑했답니다. 조선의 혈통을 보전시키려는 사쓰마 번(藩)의 보호정책 덕분에 모두가 사족 대우를 받으며 경제적으로도 유족하게 살았지요.”
그는 나에시로가와 마을이 번 당국으로부터 어떤 보호를 받았는지를 강조하는 사례로, 마을 사람 하나를 죽인 범인과 관련자 6명이 모두 처형당한 사건을 들었다.
서당 이야기가 끝나자 그는 잠시 자리를 뜨더니 ‘한어훈몽(韓語訓蒙)’과 ‘숙향전(熟香傳)’ 고본을 들고 왔다. 한어훈몽은 자녀들에게 우리말을 가르칠 때 쓰던 교과서다. ‘매오 다’(매우 좋다), ‘책을 닐러라’(책을 읽어라) 같은 우리말 고어 옆에 일본 글자로 훈이 붙어 있었다. 그렇게 가르친 우리말로 자녀들에게 ‘숙향전’ 같은 책을 읽혔다는 것이다.
아직도 우리말 잔재가 많고, 한동안은 개고기를 먹는 풍습에서부터 제례 혼례에 이르기까지 조선 색채가 남아 있었다 했다. 그가 어렸을 때 돈이 없다는 말은 ‘동가 샤가나이’, 방귀 뀌었다는 말은 ‘방구 시타’라고 했다. 공방과 가마에는 그런 표현들이 더 많다. ‘안질통’은 가마에서 일할 때 쓰는 간이의자다. 물그릇은 ‘무루사쿠’, 흙덩이는 ‘동그레’, 주걱은 ‘비코세’, 막대기는 ‘찌르레’, 흙을 두드려 펼 때 쓰는 연장은 ‘슈르레’, 장작은 ‘찍순’이라 했다. 일본어에는 없는 말들이다.
점심 대접을 받은 뒤 그가 운전하는 벤츠 승용차를 타고 단군사당 옥산궁(玉山宮)부터 찾아갔다. 자동차 라디오에서 우리말 방송이 나왔다. KBS 제주 방송이었다.
“우리말을 알아들으시네요.”
“아닙니다. 뜻은 몰라도 들으면 편안해서 그냥 틀어놓습니다.”
우리말을 몰라서 미안해하는 표정에 어린아이 같은 부끄러움이 묻어 있었다.
차를 내려 차 밭 사이로 난 나지막한 언덕길을 잠시 오르니 대숲 가에 옥산궁이 모습을 드러냈다. 개량기와로 지붕을 이은 정자 같은 건물 앞에 작은 도리이(鳥居, 신사 입구에 세운 기둥문)와 돌 등롱이 서 있었다. 일본 신사 분위기가 나지 않아 다행이었다. 가까이 가 보니 사당은 많이 퇴락해 있었다. 상주 관리인이 없는 탓인지 잡초가 무성했다.
“오래전에 신관이 죽고 새 사람을 모실 수 없어 이렇습니다. 아무나 신관으로 앉힐 수도 없는 일이라서… 다시 사당을 부활시키자는 논의가 있으니 머지않아 문을 열게 되겠지요.”
그렇게 된 것이 자기 책임이라도 된 듯, 표정에 미안해하는 빛이 역력했다. 그러면서 얼른 옥산궁의 유래를 말하기 시작했다.
“살기에 여유가 생기고부터 마을에 갈등이 심했던 모양입니다. 서로 자기 가문이 잘났다고 티격태격한 것이지요. 어느 날 밤 현해탄 쪽에서 커다란 불덩이 하나가 날아와 이곳에 떨어졌는데, 다음 날 아침에 와 보니 큰 바위가 있더래요. 사람들은 서로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살라는 단군의 계시로 알고 이 자리에 사당을 세웠답니다.”
옥산궁이 생긴 뒤 매년 설날과 추석에 단군제가 열렸다. ‘오노리소’라는 신축가가 그때부터 불렸는데, 이제는 노랫말 뜻도 제대로 전해지지 않는다.
도자기 작품에 새겨져 내려오는 노랫말은 ‘오는 날도 오는 날도 매일 매일이 오늘과 다름없네. 날이 저물고 또 해가 떠올라도 오늘은 오늘, 언제나 같은 세월’이라 돼 있다. 고국에 돌아갈 날만 손꼽아 기다리는 인고의 세월에 오늘과 내일의 차이가 있겠느냐는 체념과 실망의 의미를 담은 글이다.
옥산궁을 떠난 자동차는 이웃 구시키노(串木野) 시가지를 지나 시마비라(島平) 해안에 멎었다. 1598년 겨울, 1대 심수관 일행 42명이 표착한 해안이다. 주차장에 차를 세운 14대는 성큼성큼 해변으로 걸어가더니, 검은 빗돌 아래에서 잡초를 한 움큼 뽑아냈다. 선조들의 도래 400주년을 앞두고 그가 세운 기념비다.
비석에는 ‘게이초 경장 3년 겨울, 우리들의 개조 이 땅에 상륙하다’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돌을 세운 경위를 설명하고 나서 그는 해안 바윗돌에 올라, 먼 지평선을 가리키며 고난의 역사를 설명했다. 조선을 떠난 피랍인 배는 3척이었다. 두 척은 맞은편 가고시마 해안에 상륙했는데, 그들의 조상 42명을 태운 배만 이곳에 표착했다. 그 까닭은 아무도 모른다 했다.
오랜 굶주림과 뱃멀미에 시달린 도공들은 뭍에 오르자마자 지쳐 쓰러졌다. 배 안에서 숨을 거둔 사람도 있었다. 그 무덤들이 아직도 남아 있다. 아녀자들은 신음 섞인 울음을 그칠 줄 몰랐다. 당장 먹을 것과 바람을 피할 움막이 필요했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마른풀과 잔가지를 꺾어 움막을 짓고, 진흙을 파서 가마부터 만들었다. 먹고살 방도는 그것뿐이었다.
이상한 말을 쓰는 사람들이 구워내는 그릇은 곧 현지 마을의 화제가 되었다. 곡식과 채소를 가져와 바꿔가기도 했고, 돈을 가져오는 사람도 있었다. 맨손으로 와 빼앗아가려는 무리도 있었다. 어느 날 왜인들이 떼 지어 몰려온다는 소문이 돌았다. 무리의 지도자 심당길과 박평의(朴平意)는 의논 끝에 마을을 버리기로 결정했다.
유약과 공방 도구부터 챙겨 넣고 옷가지와 취사용품은 남부여대(男負女戴)한 채 하염없이 걷다가 발을 멈춘 곳이 나에시로가와였다.
“여기 지형이 남원 천지와 너무 흡사하지 않은가!”
발길을 멈추고 짐을 내린 이유는 단 하나, 그들의 고향 남원 땅을 닮은 곳이라는 것이었다. 그곳에 새 둥지를 틀자마자 번 관리가 성하촌(城下村)으로 이주하라는 명을 가져왔다. ‘성주인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의 명령’이라 했다. 마을 어른들은 단호히 거부했다. “군부(君父)를 팔아먹은 원수와는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다”는 게 그 이유였다. 남원성 함락 때 요시히로 군을 지름길로 안내한 주가전(朱嘉全) 같은 자들이 거기 모여 산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으니 거기 그대로 살게 하라. 대신 그들의 조선인 혈통을 철저히 보전토록 하고, 도자기 생산을 적극 지원하라.”
히데요시가 죽은 뒤 열도의 패권을 겨룬 세키가하라(關が原)전투에서 돌아온 요시히로는 애써 붙잡아온 도공들이 생각난 듯, 적극적인 보호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도공 마을에 잡인의 출입을 금하라, 조선의 언어와 풍속을 이어가게 하고 반드시 동족끼리만 혼인하도록 하라, 한 번 결혼하면 이혼할 수 없게 하라, 도자기 생산에 필요한 지원을 아끼지 말라. 생산된 제품은 모두 성에 납입하도록 하라….”
보호·지원정책에 힘입어 조선 도공 마을의 도자기 산업은 날로 융성했다. 번의 지원을 받은 박평의가 백토를 발견한 뒤로 도자기 생산이 가능해졌다. 유명한 ‘시로 사쓰마(白薩摩)’의 탄생이다. 도자기란 자석(磁石) 없이는 아름다운 색과 빛을 낼 수 없는데, 흰 자석을 쓰게 되니 금상첨화가 된 것이다. 당시 일본에서는 시로 사쓰마 한 점이 ‘일국일성(一國一城)에 값한다’는 말로 평가되었다. 차(茶) 문화는 발달했으나 다기(茶器)가 조잡했던 문명의 수준 탓이었다. 이렇게 양산된 사쓰마 야키는 번 재정에 엄청난 보물단지가 되었다. 나가사키 항을 통해 외국에 수출하고 국내 시장에도 출하해 막대한 수입을 거머쥘 수 있었다.
정유재란 때 일본 무장들이 도공 납치에 혈안이 되었던 까닭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메이지유신 때 사쓰마 번이 조슈(長州, 현재 야마구치) 번과 함께 중심 역할을 한 것도 그에 힘입은 것이었다. 사쓰마 야키는 1873년 오스트리아 만국박람회에 출품한 12대 심수관 작품이 은상을 수상한 것을 계기로 국제적으로도 유명해졌다.
심수관 가 수장고에 있는 ‘히바카리(ひばかり)’ 막사발은 일본 국보로 지정돼 있다. 이를 만든 도공도, 흙도, 유약도 모두 조선의 것인데 오직 불 하나만 일본 것이라는 뜻이다. 사쓰마 야키 개조 심당길이 표착 초기에 만든 이 작품은 1998년 서울 일민미술관에서 열린 ‘400년 만의 귀향전’에 출품되어 화제가 되었다. 사쓰마 야키 400년 기념 행사의 일환으로 14대가 주관한 전시회였다.
14대와의 두 번째 만남은 1993년 8월 대전엑스포 ‘한국의 도자기 귀향비교전’ 취재 때였다. 고국과 오랜 왕래가 있었던 그는 친한 도예 작가들과 얼싸안고 재회의 기쁨을 나누었다. 말은 통하지 않아도 뜻이 통하는 것 같았다. 같은 처지이지만 고국과 유대가 없어 서먹서먹해하는 도공 후예들에게는 친절한 가이드 역할을 했다.
일본 도자기의 신이 된 이삼평(李參平)의 12대 가네가에 삼페에(錦が江三兵衛), 가라쓰 야키 13대 나카사토 다로에몽(中里太郞衛門), 다카도리 야키 12대 다카도리 하루산(高取八山), 하기 야키 12대 사카 고라이자에몽(坂高麗左衛門), 고다 야키 11대 아가노 사이츠케(上野才助) 등이 ‘한국의 도자기 귀향비교전’ 출품자들이었다.
이들 중에는 자신이 한국계라는 사실을 확신하지 못한다는 사람도 있었고, 조상이 어디서 붙잡혀 갔는지 확실한 연고지를 몰라 “이번 기회에 꼭 확인하고 싶다”는 사람도 있었다. 고국에 올 때마다 조상이 붙잡혀간 남원과 관향인 경북 청송읍을 찾아보는 14대와는 너무도 대조적인 삶이었다.
‘400년 만의 귀향전’ 때 그는 불까지 조국의 것으로 하자는 뜻으로 남원 교룡산성에서 채화된 불씨를 일본으로 가져가는 행사를 주관했다. 그 불씨는 지금도 미야마 도유관(陶遊館)에서 꺼지지 않고 타오르고 있다. 후손들은 가마에 불을 지필 때마다 거기서 불씨를 채화한다.
400주년 기념 행사들을 마친 뒤 14대는 “이제야 선대의 비원을 이루어 감회가 깊다. 특히 400년 사업을 부탁한 선친의 유언을 받들어 기쁘다”고 했다. 그 모든 사업이 단군의 보살핌 덕분이었다는 말도 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헤어질 때 귀중한 선물을 받았다. 돌아와서 열어보니 아름다운 꽃병이었다. 나무상자 안쪽의 친필 휘호에 감격했다. ‘本是同根-14代 沈壽官’ 생면부지의 특파원을 동족으로 대해준 따뜻한 마음이 오래도록 가슴에 남았다.
그가 심수관 도원 당주 자리를 아들에게 물려준 지도 30년째다. 그는 이탈리아 유학에서 돌아온 아들을 또 한국으로 유학을 보냈다. 도예의 기본은 옹기에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 아들의 아들도 벌써 공방과 가마를 드나들며 흙일을 배우고 있다.
올해 93세가 된 그는 16대를 습명(襲名, 선대의 이름을 계승함)하게 될 손자에게 흙일을 가르치고 있다. 근래 한국 기자와의 인터뷰에서는 “거동이 불편해 2013년 이후 한국에 가지 못하고 있다”면서, 지금도 최후의 여행을 꿈꾸고 있다고 말했다. 일본어를 아는 택시 운전사를 만나 한국의 각 지방을 돌며 고향 산천과의 작별을 고하는 게 마지막 소원이라 했다.
4차 산업혁명, 근래 들어 회자하고 있는 최대 화두가 아닐까? 비트코인도 어떻게 보면 같은 부류로 여길 수 있지 싶다. 많은 사람이 시대 변화를 어느 때보다 더 실감하면서도 직접 참여는 머뭇거리는 듯하다. 변화의 속도가 빨라 사안에 대한 뚜렷한 대책이나 나름의 확신이 서지 않은 점도 있어 관망한다. 지난해 ICT(정보통신기술, Information & Communication Technology) 업계에 따르면 인공지능에 의한 음성인식 수준이 인간의 대화 인식 수준을 따라잡았다고 전한다. 사람과 사람의 대화에서 이해도는 95%에 그친다고 한다. 사람끼리의 대화도 그 내용을 100% 이해하지 못하는데 인공지능 음성 인식도가 지난해에 95%를 넘어섰다. 음성인식 로봇이나 관련 장치가 사람이 명령하는 말을 사람끼리 서로 말하고 이해하는 수준인 95%와 맞먹게 되었다. 사람과 같은 수준으로 사람 말을 이해한다는 의미이다. 정말 놀라운 발전이고 한편으로 두려움마저 든다.
최근엔 음성인식 인공지능을 활용한 가전제품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리고 있는 세계가전박람회 “CES 2018”에도 예상 이상의 다양한 제품을 선보이고 있다. 리모컨을 사용하지 않은 상태에서 TV를 향해 필요한 채널을 말하면 TV는 제가 알아서 채널을 찾아준다. 요즘 구글, 아마존, 네이버 등에서 활용하는 인공지능 스피커가 대중에게 기하급수적으로 보급되고 있다. 알렉사, 아리아, 헤이카카오, 기가지니, 샐리야, 시리야, 오케이 구글 등이 해당 회사의 스피커 이름이다. “아리아, 신나는 음악 틀어줘~!”라고 명령하면 신나는 음악이 흘러나온다. 스마트폰에 이미 말로 검색하는 기능이 생활 속에 깊숙하게 들어와 있다. 대부분 사람은 문자로 검색하는 데 익숙해 음성인식 기능 활용엔 다소 무디다. 음성인식 지능을 이용한 활용도는 날이 갈수록 높아질 수밖에 없다. 글이나 문자보다 말로 하는 일이 훨씬 수월하고 빨리 접근할 수 있어서다. 또한, 자율주행 자동차를 떠올리면 쉽게 이해가 갈 기계의 눈이라 할 수 있는 시각지능도 마찬가지다. 고양이와 애완견을 식별한다. 사람의 표정을 보고 기분을 파악하여 대응하는 로봇도 개발되었다. 말 잘 듣고 제가 알아서 기분을 맞춰주는 인공지능 로봇을 파트너로 활용할 수 있다. 애완 로봇이 등장했다. 4차 산업혁명 시대는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빠르게 다가온다. 혹자는 “빅도미노”라고 부르기까지 한다. 어느 순간 세상을 확 바꿀 수 있다는 의미다. 앞의 예처럼 인공지능을 활용한 로봇이나 장치가 일상생활 속으로 들어서게 됨은 불을 보듯 뻔하다.
이러한 환경에서 장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남들과 같은 생각으로 대비해서는 살아남을 수 없는 현실이다.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인 토머스 프리드먼은 “세계는 평평하다”는 저서에서 이렇게 경고한다. “이제 자기만의 두드러진 가치를 찾아야 한다. 평균 시대는 끝났다.” 로봇과 소프트웨어 등의 발달로 남들과 같은 일을 하면 평균 이하의 삶을 살 수밖에 없다는 의미다. 자기만의 두드러진 가치, 즉 개인 브랜드를 가져야 함을 이른다. 다른 측면에서 보면 우리가 전 반생에서 한 경험이 미래엔 큰 역할을 하지 못할 수도 있다. 대학 시절에 배운 이론들이 지금 효용 가치가 있는지 반문해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어릴 적부터 우리 세대, 베이비붐 세대는 경쟁 속에서 살아왔다. 남과 비교하여 우위에 서기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했다. 그런 수단과 방법을 공부해왔다. 블루오션이 아닌 레드오션 전략을 구사했다. 돌이켜보면 경쟁이 능사가 아니었음을 깨닫는다. 누구에게나 보이는 넓은 길이 아니라 선뜻 보이지 않는 좁은 길을 선택해 성공한 사례들이 주목받고 있다. 눈앞에 보이는 돈이 아니라 인생의 가치를 남기는 직업을 찾아낼 필요가 있는 시대다. 후반생은 자기실현의 시기로 살아야 하므로 더욱 그렇다. 관점을 조금만 달리하면 보이게 되는 데도 과거지향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이 사실이다. 환경이 다른 시대에서 한 경험이 변화된 환경에서 이용할 수 없는 잡동사니가 될 수 있음을 인식할 전환이 필요하다.
100세 장수 시대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120세 시대도 머지않았음을 예측한다. 100 현역은 아니어도 80세까지는 현역으로 살아야 하고 남은 20년은 인생을 되돌아보고 정리하는 시기로 하여야 한다. 쉽고 편한 길로만 가려 하지 말고 어렵지만, 남들이 가지 않는 길로 가려는 도전 정신이 필요하다. 자기만의 독특한 브랜드를 만들어 가자. 앞으로 제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인간이 인공지능과 로봇에게 많은 일자리를 내어 줄 수밖에 없다. 인공지능이나 로봇이 하지 못하는 자기만의 일을 만들어 보자. 남들이 흉내 낼 수 없는 일을 만들어가는 길이 4차 산업혁명 시대 노후준비의 답이다. 그런 일을 찾아내어 자신만의 직업으로 승화시키면 평생 경쟁 없는 직업을 갖고 살아갈 수 있다.
2017년은 참으로 다사다난했던 한 해였다. 아울러 2015년부터 3년간 써온 필자의 한문 산책 역시 마무리할 때가 되었다. 그동안 필자의 칼럼을 읽어주신 독자들에게 지면을 빌려 감사를 드리며 한 해를 마무리 짓는 시제를 골라봤다. 한 해를 마무리 짓는 시로서 가장 오래된 작품은 무엇일까? 중국의 가장 오래된 시가(詩歌) 문학을 대표하는 ‘시경(詩經)’에서 세모의 시는 바로 당풍(唐風)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실솔3장(蟋蟀三章)’이다. ‘실솔(蟋蟀)’이란 귀뚜라미를 의미하는데, 3장으로 이루어진 이 시의 제1장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蟋蟀在堂(실솔재당) 귀뚜라미가 마루에 있으니
歲聿其莫(세율기모) 해가 드디어 저물었도다.
今我不樂(금아불락) 이제 우리가 즐거워하지 아니하면
日月其除(일월기제) 해와 달이 (우리를 버리고) 가리라.
無已大康(무이태강) 너무 편안하지 아니한가.
職思其居(직사기거) 자신의 직책을 생각하여
好樂無荒(호락무황) 좋아하고 즐거워함을 지나치지 않음이
良士瞿瞿(양사구구) 어진 선비의 두려워하고 조심함이니라.
귀뚜라미가 마루에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당시 주나라 빈(豳) 지방의 노래였던 ‘빈풍(豳風) 칠월(七月)’을 보면, “七月在野(칠월재야:칠월이 되면 귀뚜라미가 들에 있고), 八月在宇(팔월재우: 팔월이 되면 집 안에 들어오고), 九月在戶(구월재호: 구월이 되면 문 안으로 들어오고), 十月蟋蟀(시월실솔: 시월이 되면 귀뚜라미가), 入我牀下(입아상하: 내 침상 아래로 들어오느니라)”란 표현이 있다. 귀뚜라미가 날이 추워지자 사람들이 거주하는 공간인 집으로 찾아 들어오는 모습으로 한 해가 지나감을 표현한 것인데, 빈풍의 노래들은 하나라의 월력인 하력(夏曆)을 사용한 관계로, 한 해의 마지막 달이 12월이 아닌 10월로 표현되어 있다. 따라서 ‘귀뚜라미가 마루에 있다’는 표현은 하력으로 따지면 9월에서 10월 초, 그리고 주나라 이후 사용된 주력(周曆)에 의하면, 11월에서 12월 초 정도의 시점에서 나온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시는 한 해의 노고를 돌아보며 즐기되 지나치지 않음을 강조한 시다. 이후 많은 곳에서 인용되었는데, 주로 한 해의 마지막을 나타내는 세모 또는 선비가 스스로를 다지는 마음가짐을 표현할 때 사용되었다. 예컨대, ‘고시19수(古詩十九首)’ 중 ‘동성고차장(東城高且長)’을 보면 그것을 알 수 있다.
四時更變化(사시경변화) 사계절은 변화하기 마련이라지만,
歲暮一何速(세모일하속) 연말이 돌아옴은 어찌 그리 빠른 것인가?
晨風懷苦心(신풍회고심) ‘시경’ 신풍편(晨風篇)에는 버림받은 신하의 괴로움을 나타내고 있고(벼슬 못하는 괴로움),
蟋蟀傷局促(실솔상국촉) ‘시경’ 실솔편(蟋蟀篇)에는 구속되어 살아감[局促]을 상심하는 뜻을 나타내고 있네(벼슬살이하는 괴로움).
한편 조선시대 기대승(奇大升)의 ‘고봉집(高峰集)’ 천상추기근(天上秋期近)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亹亹送流年(미미송류년) 세월이 갈수록 자꾸 흐르는 해를 전송하게 되는구나.
奔走紅塵裡(분주홍진리) 세상 풍진 속에 혼자 분주하니,
空吟蟋蟀篇(공음실솔편) 부질없이 실솔편만 읊조리누나.
3년간 써온 한문 산책을 마감하니 위의 ‘空吟蟋蟀篇’이라는 구절이 마음에 와 닿는다.
새해가 밝았다. 오늘도 그냥 추운 겨울의 어떤 하루에 불과하건만, 왠지 이날은 특별한 듯해 보인다. 그래서 너도나도 깊은 밤 추위를 무릅쓰고 산에 오르거나 동해 바다로 몰려들어 새벽에 돋는 해를 바라보곤 한다. 날이 밝으면 만나는 이들에게 덕담을 주고받으며 마치 상이라도 받은 얼굴로 미소가 가득하다. 아마도 이날은 특별한 음식도 먹으리라. 요즘 유행하는 말로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요.”
인간은 온갖 사물에 의미를 부여하고 이름 붙이는 행위를 통해 자연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해 왔으며, 시간에 질서를 부여하고 문명을 건설했다. 그것이 사실이고 아니고는 중요하지 않다. 나라나 민족에 따라 첫해의 시작이 다른 경우가 있는 것은 이를 입증한다. 그저 자기 나름대로 자연현상을 이해하고 해석하면 그만이다. 동아시아에서는 올해가 무술(戊戌)년이란다. 풀이하면 ‘황금 개’의 해다.
지난해가 닭의 해라 해서 특별히 닭을 많이 먹거나 닭과 관련한 일을 한 것도 없었듯이 올해가 개의 해라서 개가 우리에게 특별할 일도 없으리라. 사실 올해가 왜 개의 해인지도 알 수 없다. 간지에 등장하는 동물 중에는 우리 풍토와 거리가 먼 것도 있으니 멀리 중국에서 흘러들어온 유행에 편승했을 수도 있다. 다만 간지에 가축이 많은 것은 나름 인간의 생존에 끼친 공로가 크기 때문일 것이다.
최근 국내에 번역된 책 중에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고인류학자인 팻 시프먼 교수가 쓴 '침입종 인간'이 흥미로운 주장을 했다. 종래의 연구에 따르면 인간이 개를 가축화한 것이 대략 1만 5천 년 전쯤 메소포타미아 유역에서 농경 생활과 함께였을 것으로 생각해왔으나 2008년 벨기에에서 3만 2000년 전 개의 유골이 발견되고 2011년에는 시베리아에서 3만 3000년 전 개의 두개골이 발견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팻 시프먼 교수는 위의 책에서 현생인류인 호모사피엔스가 3만 5천 년 전 개와의 동맹을 통해 점차 네안데르탈인을 이기고 지구의 지배자가 되었다는 가설을 제시한다. 그러니까 늑대를 길들인 개와의 협업을 통해 더 많은 사냥감을 획득하였고 이로 인해 네안데르탈인보다 생존 능력에서 우위에 서게 되었다는 추측이다. 물론 개도 이러한 협업을 통해 안정적으로 먹이를 얻었고 안전을 보장받았다.
시프먼 교수는 개와의 동맹이야말로 인류의 생존과 발전에 획기적인 전환점을 이루었다고 본다. 유발 하라리는 그의 저서 에서 호모사피엔스에게는 누구보다 뛰어난 ‘픽션을 창조하는 능력’이 있었기에 다른 영장류를 이기고 지구를 지배하는 종족이 되었다‘라고 주장했는데 어쩌면 그러한 창조적 상상 능력이 발휘된 놀라운 결과물이 바로 개들과의 동맹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니까 개는 인간에게는 최초의 친구이며 가축인 셈이다. 그 덕에 개도 인간과 함께 지구상에 번성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개는 뛰어난 충성심으로 오늘날에도 반려동물 1위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과거 개와 관련한 미담이 많다. 경북 구미에는 의구총(義狗冢, 의로운 개의 무덤)이 있을 정도로 개와 친숙하다. 비록 너무 친숙해서 서양 선진국의 눈총을 받기도 하지만.
고령화가 가파르게 진행되고 독신 가정이 늘어갈수록 반려동물로서 개의 수요는 늘어날 것이다. 늙으면 개와 벗하며 지내게 될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인간으로 못 할 짓을 하면 보통 개만도 못하다고 한다. 인간사회가 개만큼의 신의만 있어도 한결 좋은 세상이 되리라. 그러니 새해에는 개 관련한 욕은 사용하지 않았으면 한다. 모두 개에게 부끄럽지 않은 한해 되시길 빈다.
서정주시인은 말했다.
자신을 키워준 것은 8할이 바람이라고.
나를 키워준 것은 8할이 그리움이었다.
열네살 여름.
태양이 이글대는 아스팔트 포도 위에 부서지던 것은 “레이 찰스”의
‘I can't stop loving you’였고 내 가슴 또한 부서지고 있었다.
사랑은 어디서부터 오는 것일까?
단테가 베아뜨리체를 피렌체의 한 다리 위에서 만난 것은 그의 나이 아홉 살 때였다.
그 후 단테는 평생 동안 그녀에 대한 환상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게 되는데 그의 작품 ‘신곡’은 이런 배경에서 탄생됐다.
야학교의 B선생님을 처음 뵌 것은 내 나이 열네 살 때였고 이후 그것은 지워버릴 수 없는 화인이 되어 버렸다.
세월이 갈수록 숨이 막히도록 좋아할 수 있는 분은 이 세상에 오직 한 분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때 이후로 어떤 사람도 내 마음을 그 선생님 같이 뿌리째 흔들어놓지는 못했다.
그것은 하얀 도화지 위에 뿌려진 첫 번 째 물감이므로.
나보다 일곱 살이 위인 B선생님은 전체적으로 약간 마르신듯한 호리호리한 체격에 눈매가 깊숙했으며 얼굴형은 군살이 붙지 않고 단아한 모습이어서 마치 그리이스 조각 같은 분이었다.
또한 키가 크신 B선생님은 걸음걸이가 ‘사뿐사뿐’하셨다.
장로님의 맏 아드님이며 독실한 크리스챤인 선생님은 어느 모로나 깍듯한 모범생의 면모를 보이셔서 나쁜 행동 옳지 않은 말은 전혀 하지 않으실 분 같았다.
아니 나쁜 면으로는 아예 생각조차 하지 못하실 분 같았다.
한마디로 그 당시 내 눈에 비친 그분은 완벽한 이상형의 남성상이었다. 우리에게 ‘모짜르트의 자장가’를 가르쳐 주시던 선생님의 진지한 눈빛을 잊을 수가 없다. 우리가 잘못하면 몇 번이라도 되풀이해서 자상하게 가르쳐 주시던 선생님의 열성. 그것은 제자들에 대한 깊은 애정이 없으면 불가능한 것이리라.
음악을 깊이 사랑하셨으며 노래를 썩 잘 부르셨던 선생님이 좋아하시던 노래는 ‘고향의 폐가’ ‘너와 나의 시간’ 등이다.
우리에게 과학을 가르쳐 주셨던 B선생님이 방학숙제로 모터 만들기를 내주셨을 때, 다른 애들은 만들 엄두도 못 내었지만 나는 갖은 방법을 다 동원하여 재료를 수집하였기에 무사히 모터를 만들 수 있었고 그것을 보신 B선생님의 칭찬을 들으니 그동안 만드느라고 힘들었던 기억은 말끔히 사라지고 가슴이 금 새 기쁨으로 가득해졌었다.
서둔교회를 다니던 B선생님이 그곳에서 성가대를 지휘하실 때 뵙게 되면 너무도 멋지게 보여서 마치 ‘꿈속의 왕자님’ 같았다. 그 진지한 눈빛에, 날렵한 몸짓이라니.
그렇지만 다른 애들은 춤을 추는 것 같다고 ‘킥킥’댔고 나는 그 애들이 너무도 미웠다.
그 애들 중에는 내 초등학교 때부터의 단짝 친구 정재화도 있었는데 그때만큼은 그 애마저도 미웠다
어느 해 방학동안에는 내가 버릇없이 엽서에다 소식을 담아드렸는데(졸필이라서 편지지에 많은 글씨를 쓰기는 너무 부담스러워서) 선생님은 곧바로 답장을 편지로 해 주셨다.
그때 선생님은 ‘고사리 같은 너의 손으로 쓴 편지 잘 받아 보았다’라고 쓰셨는데 의아스러운 것은 아무리 내 손을 앞으로 제쳐보고 뒤로 뒤집어봐도 고사리 같이 작은 손은 아니었다.
그리고 나는 엽서를 사용했는데 선생님은 편지로 보내 주신 것이 못내 죄스러우면서도 선생님의 성실성에 머리가 조아려졌다.
이 일은 무엇보다도 인간의 덕목 중 성실성에 후한 점수를 매기는 내게 선생님이 결정적으로 좋아지는 계기가 됐다.
그냥 흠모하였다.
멀리서라도 그분의 모습만 뵙게 되면 반가움에 가슴이 뛰고 너무 좋아서 숨이 막혀왔다. 친구들은 그 선생님이 오신다는 거를 내 모습을 보고 알았다. 친구들과 놀던 중에도 B선생님 모습만 보였다하면 아무 말도 못하고 얼굴이 빨개졌기에. 내 초등학교 동기동창생의 언니가 그 선생님과 데이트 중이라는 말을 듣고는 성실하고도 선한 그 언니가 이유도 없이 미웠다. 선생님이 배구를 하려고 상의를 벗어서 내게 맡기셨을 때는 어찌나 소중하던지 조심스럽게 안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구겨지면 안 되니까.
B선생님이 야학교를 떠나실 때는 내 가슴이 온통 ‘휑’하니 뚫려 버린 듯한 허전함과 세상을 모두 잃어버린 듯한 망실감에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깊은 슬픔에 빠져버렸다.
나의 기쁜 맘 그대에게
바치려 하는 이 한 노래를
들으소서 그대를 위해 지은 노래
............................
쇼팽의 연습곡에 가사를 붙인 '이별의 노래’인데 B선생님이 우리들에게 마지막으로 가르쳐주고 떠나신 곡이다. 내 나이 16세때 일이었고 그후 십여년이 넘어서도 나는 어디서라도 그 연습곡만 들으면 눈물을 흘리곤 했다. 이별의 상처가 쉽게 아물지 않았던 것이다.
야학을 졸업한지 2, 3년의 세월이 지난 후였다.
그날 버스에서 B선생님을 뵌 나는 얼마나 반가웠는지 몰랐다. 선생님은 ROTC마크가 새겨진 서울대학교 교복차림이었다. 너무 좋아서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던 나는 선생님께 조용히 다가가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선생님 저…… 할 말이 있는 데요’
사무치게 그리웠던 선생님의 깊숙한 눈이 나를 응시하며 내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목소리는 이렇게 물으셨다
‘그래....... 뭔데?’
그리고는 나를 따라 내리셨다.
비가 온 뒤의 연습림은 온통 청신한 초록빛이었다.
갈참나무의 여린 새순은 연초록으로 빛났고 오솔길의 기다란 풀잎에는 물방울이 ‘또르르’ 굴러 내리고 있었다.
흰 구름이 이따금씩 흐르고 있는 파아란 하늘을 쳐다보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 궁금해 하시는 선생님 안색을 살피다 나는 어렵게 어렵게 말을 꺼냈다.
‘선생님 저…’
‘있잖아요 ………’
‘저기요……만 몇 번 하다가 그만 꿈이 깨어버렸다.
'선생님을 좋아하고 있어요’ 꼭 한마디 하고 싶었는데 끝내는 그걸 못 해보고 꿈에서 깬 나는 가슴을 주먹으로 치며 스스로를 질책했다.
‘이 바보야 생시에 고백을 못하면 꿈에서라도 해야지’
세익스피어가 말했다.
‘짝사랑처럼 고독한 것은 없다’고
모파상의 단편 ‘사과나무 아래서’와 ‘의자 고치는 여인’에 나오는 가련한 두 여주인공들을 나와 동일시하여 자신이 너무 비참한 신분임을 뼈저리게 느끼곤 했다.
사랑이란 익모초 달인 물을 삼키는 것이다.
그리움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임은 물같이 까딱도 하지 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
추억
잊어버리자고
바다 기슭을 걸어보던 날이
하루
이틀
사흘
여름 가고
가을 가고
조개 줍는 해녀의 무리 사라진 겨울
이 바다에
……………
청마 유치환시인의 ‘그리움’과 시인 조병화님의 ‘추억’을 몇 번이고 되뇌이며 아픈 가슴을 홀로 달래었다.
좁디좁은 야학교운동장을 천천히 몇 바퀴씩 거닐며.
또 유치환님의 '바위’를 좋아한 이유는 ‘차라리 애증의 갈등을 느낄 수 없는 바위가 되었으면'하는 내 심정을 너무도 잘 표현했기 때문이다.
어느 해 크리스마스를 앞두고서였다.
선생님께 무언가 마음의 선물을 꼭 드리고 싶었던 나는 며칠간을 골똘히 생각해 본 결과 일기장이 가장 적당할 것 같았다.
있는 돈을 다 긁어모아 봤다.
시내의 큰 문방구점을 몇 곳을 전전하여 간신히 마음에 드는 것을 살 수 있었다.
일기장 뒷장에다 ‘난이 드리옵니다’ 라는 짤막한 글을 적는 데도 워낙 졸필이기에 연습장에다 몇 십번을 연습해서야 겨우 적을 수가 있었다. 포장지도 제일 예쁜 것으로 골라서 포장을 했으며 리본으로 꽃모양을 만들어서 붙인 후 서둔 교회에서 성가대를 지휘하고 계신 선생님을 찾아갔다.
교회의 뾰족탑도 전나무 위에도 온통 은세계였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캐롤 송을 열심히 지도하고 계신 선생님의 모습을 뵌 나는 눈이 20cm이상 쌓여 있는 교회 창문 밖에서 언 발을 구르며 무려 2시간 이상을 기다렸다.
나의 뜻밖의 등장에 의아해 하시는 선생님께 ‘선생님 이거요’ 모기소리로 말하며 조심스럽게 두 손으로 내밀었다.
순간 깊숙한 눈매에 진지한 표정의 선생님은 다소 당황해 하시다가는 '고맙다' 웃으며 받으셨다.
다시 한번 내게 따뜻한 미소를 보낸 후 발길을 돌리시던 선생님이었다. 춥고 힘든 줄도 모르고 기다리던 그 시간이 행복했고 선물을 전해 드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내 가슴은 온통 기쁨으로 출렁거렸으며 발이 땅에 닿나 싶었다.
엄마의 결혼생활을 어려서부터 쭉 지켜봤던 나는 근본적으로 결혼에 대해서 회의감 내지는 환멸감을 가지고 있었다.
B선생님을 남몰래 혼자 애 태우며 10년 이상의 세월을 외곬수로 흠모했으면서도 내 스스로가 ‘결혼’이라는 단어와는 결부시키는 것조차도 용납하지 않았다.
그런다는 것 자체가 불결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내가 스물두세살 때 선생님이 결혼하신다는 소식을 듣고는 너무 가슴이 아팠던 나는 결혼식장에는 차마 가 보지도 못하고서 뜨거운 눈물을 ‘펑펑’ 쏟았다.
눈물이 강물이 되도록 울고 또 울었다.
장선생님이나 진선생님 등 다른 선생님들의 결혼식에는 다 참석을 해서 축하를 해 드렸으면서.
‘선생님, 난이 여기 있는데 어디로 가시옵니까’
그날 일기장에는 이렇게 쓰여졌다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라면 어느 누구의 것인들 소중하지 않으랴.
누가 감히 걸인부부의 사랑이, 사랑을 위하여 왕관을 포기한 윈저공의 사랑보다 못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모든 거짓 없는 사랑은 위대하다.
내 짝사랑이 운명적으로 비극인 것은, 나는 그분을 결혼 대상자로 생각한 것이 아니었다.
처음서부터 끝까지 단지 동경의 대상이었고, 언제나 먼 하늘의 별님이었다. 그러면서도 그 분이 막상 다른 여자와 결혼했을 때는 천지가 무너진 듯한 절망감으로 목을 놓아 울었으니 이 무슨 모순된 행동이었던가. 그분을 연모하던 내가 무엇보다도 괴로웠던 것은 그분이 내 진심을 하찮게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었다. 내 순정은 세상의 어떤 것보다도 소중하고 고결한 것인데도 도덕적으로 전혀 흠이 없는 그분은 선생님으로서의 가슴은 따뜻했지만 여자인 나를 대하는 눈길은 차갑기만 했기에 나는 늘 거기에 상처를 받고는 못 견디게 괴로워했다.
나 스스로에게 어처구니가 없는 것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보며 스칼렛이 자기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모든 허물을 사랑으로 감싸주는 레트한테는 북풍 같이 차갑고 상처만 주면서 이미 다른 여자의 남편인 애쉴리만 생각하는 것을 너무도 안타까워했다는 점이다. ‘저 여자는 왜 저렇게도 멍청한가’
그러한 내가 현실 속에서는 그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이미 결혼을 해 버린 B선생님만을 가슴에 담아 두고 연모하느라고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하나 하나 내게서 떠나 보냈다는 사실이다.
야학 시절 친구들은 개성이 너무 강하고 고집불통이며 지독한 외곬수인 나를 스칼렛이라고 했었다. 스칼렛과 성격상 이미지가 흡사하다고. B선생님은 나의 애쉴리였다.
'아티스트 다시 태어나다 (The Artist: Reborn)' 영화는 김경원 감독 작품으로 독립영화제에서 매진될 정도로 관심을 끌었다고 한다. 주연에 화가 지젤 역으로 류현경, 갤러리 대표 재범 역으로 박정민이 출연했다.
이 영화를 보고 나면 영화라는 게 미남 미녀 배우가 나와야 하고 엄청난 물량을 투자해야 좋은 영화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류현경이나 박정민이나 그리 잘 알려진 배우도 아니다. 그리고 크게 돈 드는 세트를 만든 것도 아닌데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영화이다.
지젤은 덴마크에서 동양화를 전공하고 귀국했다. 무명 화가인 그녀에게 국내 화단이 싸늘한 대우를 할 것은 빤한 일이다. 그러나 어느 유명 갤러리 대표 재범을 만나고 그녀는 하루아침에 재범의 수완으로 한국 화단의 신데렐라가 된다. 그녀의 그림 값은 천정부지로 뛴다. 그녀는 물론 갤러리도 돈 방석에 앉는다. 어느 날 아침 눈을 떠보니 유명인이 되었다 듯이 이제 잘 나가는 화가로 날아갈 일만 남았다.
그런데 갑자기 지젤이 심장마비로 죽는다. 그녀의 그림은 유작이 되어 희소성 때문에 더 뛴다. 재미있는 것은 죽었던 그녀가 영안실에서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다. 의학적으로는 죽었는데 심폐 소생 시술 후 자동 소생한다는 ‘라자루스 증후군(Lazarus syndrome)’ 이라는 것이다. 기독교 성경에서 예수가 되살린 라자로 (Lazarus)에서 이름을 따 왔다고 한다. 작가들은 이런 의학지식을 잘도 찾아낸다.
무명화가이므로 알려진 것도 별로 없다. 그리고 갑자기 죽었다. 재범은 특유의 마케팅 기법으로 그녀의 작품 값을 높여가는 중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다시 살아났다.
그대로 죽어 있으면 그녀의 작품은 날이 갈수록 고가로 팔리게 되는데 그녀가 살아났으니 그간의 마케팅 수법은 더 이상 안 통하게 생겼다. 신비주의는 벗겨지고 희소성이라는 가치도 소멸될 판이다. 재범은 지젤에게 세상에 나타나지 말고 몰래 한 해에 5편 정도만 그리라고 제안한다. 재범은 지젤이 마치 생전에 그렸던 것처럼 화랑에 내걸어 고가에 팔 전략을 내세운다.
그러나 그녀는 그 제안을 거부한다. 작가는 그림을 그려야 하는데 마케팅에 의해 거짓 지젤이 존재하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표한다. 재범은 결국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그녀가 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녀를 목 졸라 살해하려 한다. 죽은 줄 알았던 지젤은 죽지 않고 겨우 살아난다. 두 번 째 살아 난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작품은 고가의 작품만 거는 화랑이 아니라 공공 기관에 희사하거나 거리에서 전시회를 한다.
이 영화는 예술이란 무엇인가, 예술계의 허구적 마케팅과 작품의 가치 등을 되돌아보게 한다. 예술 작품의 가치는 누가 정하는가, 진정한 예술가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같은 명제를 되짚어보게 한다. 요즘 예술은 과거보다 많이 가깝게 다가 와 있지만, 예술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볼만한 영화로 추천하고 싶다.
“아직도 꽃 타령이냐?”
허물없는 친구들에게 자주 듣는 말입니다. 그 난감한 질문에 이젠 저도 어렵지 않게 되묻습니다.
“꽃이 뭔지 알아?”
사진을 하면서 누구 못지않게 꽃을 대할 기회가 많았기에 대답합니다.
꽃은 만날수록 그 깊이를 가늠하지 못하겠습니다. 가까이 볼수록 감탄이 커집니다. 처음에는 그저 유명하고 낯익은 꽃에 눈이 갔습니다. 차츰 스쳐 지나며 보잘것없다고 치부했던 꽃들의 단순함과 섬세함에 놀라고, 독특함에 놀라고, 거리와 각도에 따라 새롭게 드러나는 면의 깊이가 선으로 모이고 응축되어 점점으로 흩어지듯 다시 이어짐에 놀랍니다.
하나일 때도 있지만 둘, 셋이 모여 다시 수십, 수백, 천으로 이어질 때도 있습니다. 그때도 한 송이, 송이송이 여러 송이마다 다릅니다. 바람에 따라 흔들림이 또 그 군락의 아름다움에 변화를 만들어냅니다. 조합으로 색이 빛을 만들어냅니다. 이번 홍콩 전시에서도 꽃 사진이 꽤 많았습니다. 홍콩에서는 지난해에 이어 두 번째 전시(風流 ‘Pung Ryu’ HK Ⅱ)라서 더 긴장하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전시장(HONG KONG VISUAL ART CENTER)을 관리하는 직원으로부터 좋은 말을 꽤 많이 들었습니다. 예를 들면 관람객 수를 점검하는 직원은 ‘날이 갈수록 방문객이 늘어나 결국 천 명을 넘었다’고 자부심을 전해주었으며, 수석 큐레이터는 “작년에 이어 수준 높은 전시에 감동했다”며 “앞으로 계속 관계를 갖자”는 제안을 해왔습니다. 그리고 좋은 일은 작품이 작년보다 더 많이 팔렸으며, 더 다양한 나라로 보내졌다는 것입니다.
이번 전시 초대 글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보지 못했던 것을 보았습니다. 휘몰아치는 바람을 보았고, 모이고 흩어지는 물방울을 보았습니다. 기쁨을 보았고 각각의 색이 우렁차게 외치는 소리를 보았습니다. 말로 전달할 수 없는 그 모든 것, 빛과 소리와 향기를 우리는 사진에 담기로 했습니다. 그러자 멈추어 있는 시간 속에서 모든 것이 살아 움직였습니다. 평면인 사진 속에 공간이 스스로를 명확히 드러냈습니다. 과거에 찍은 사진 속에 현재가 흐르고 있었고, 그 안에 사진을 찍은 내가 있었습니다. 아무리 많은 말로 설명을 해도 충분히 전달할 수 없어서 전시회를 준비했습니다. 우리가 느낀 놀라움을 이제 세상과 함께 나누려 합니다.
어느 때부터인지 꽃은 제게 더 이상 구상도 아니고 더더구나 정물도 아닙니다. 요즘 제게 꽃은 하늘의 아름다움과 비밀을 짐작해보는 단초라는 생각이 자주 듭니다. 이건 꽃받침이고, 수술이며, 줄기이고, 턱이며, 영양분을 나르는 동물의 핏줄과 같은 맥이 그물 망사 같은 것도 있고, 서로 평행으로 나란한 것도 있어 그물맥과 나란히 맥으로 구분한다는 생물 시험의 답안지가 아직 기억나지만, 꽃마다 잎마다 왜 그런 오묘한 색을 띠고 있는지, 꽃을 보면 볼수록 점점 더 모르겠습니다.
꽃들마다 갖고 있는 서로 다른 선들의 부드러움과 반투명한 질감, 그리고 시시각각 바뀌는 색들의 변화를 카메라의 렌즈로 들여다보고 있는 그 자체가 경이입니다. 셔터를 누름으로 작품이 된다는 것마저 잊어버리게 됩니다.
꽃의 이름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카메라에 아름다움을 찾아 담겠다는 나의 욕심을 놓치고 창조주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들 때입니다. 그때 꽃은 창조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아름다움이 세상을 이어주고 이끌어주는 질서이기도 하고, 혼돈임을 보여줍니다.
어느 꽃에서도 아름다움의 아르케를 눈치 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성들은 어떻게 이런 과정 없이 꽃을 잘 알고 있는지 그게 제겐 신비입니다.
정유년인 올해는 정유재란(1597.1~1598.12) 발발 420주년이다. 임진왜란으로부터는 427주년.
임진왜란이 치욕의 역사였다면, 정유재란은 왜군이 충남 이북에 발도 못 붙인 구국승전의 역사다. 그 전적지는 진주, 남원, 직산 등 삼남지방 곳곳에 있지만 옛 자취는 찾기 어렵다. 뚜렷한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은 왜군이 남해안을 중심으로 농성하던 성터들이다. 주로 경남 중동부 해안에 밀집한 왜성 터들도 오랜 세월 허물어지고 지워져 갈수록 희미해져간다. 왜성이라는 이유로 사적지 지정이 해제된 탓이다. 근래 일부 지방자치단체는 그 중요성에 눈을 떠 옛 모습대로 복원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는 아직도 방치되어 있다. 치욕의 역사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다. 더 늦기 전에 지금 모습이라도 남겨둬야 한다.
더 사라지고 훼손되기 전에 역사 현장 보전의 필요성을 일깨우고, 정유재란의 역사적 의미를 천착하기 위해서라도 그 흔적을 돌아볼 필요가 있어 에 게재하기로 한다.
통영 한산도는 이순신이 창건한 조선수군의 수도였다. 조선 개국 이래 버려져 있던 섬이 ‘이순신 수국(水國)’의 서울이 되어 국방과 경제·산업의 심장이 되었다. 그가 삼도수군통제사로 지낸 3년 8개월 동안 국가 경제의 중심지였고, 피란민을 구제한 사실상의 수도이기도 했다.
싸우면 이기는 막강 조선수군의 병권을 쥐고 독자적인 행정 사법제도에, 과거(무과)까지 시행해 민중의 신망이 높아진 이순신은 차차 왕의 의심을 사기에 이른다. ‘한산수국’이 강대해지자 위협을 느낀 선조는 끝내 그에게 죄를 씌워 죽이려 했다. 그 사이 통제사 자리를 꿰찬 원균이 첫 전투에서 궤멸당해 한산도는 다시 이름처럼 한산한 섬이 되고 말았다.
이순신이 한산도에 수영을 차린 것은 전라좌수사 시절인 1593년 7월 16일의 일이다. 왜적이 들끓는 경상도 수역에 자주 지원 출동을 나가게 되자, 여수에서 힘들게 노 저어 가 싸우고, 되돌아가기가 버거웠다. 7월 8일 한산대첩 때 이 섬의 가치를 눈여겨보았던 이순신은 조정에 이진(移陣)을 품신(稟申), 허락이 떨어지자 신속하게 진을 옮겼다.
이진의 필요성은 왕래의 불편함만이 아니었다. 남의 관할에서 싸우는 객장(客將)의 위치가 불편했을 것이다. 전투의 주장(主將)은 번번이 경상우수사 원균이었다.
그해 5월 이순신은 “적의 퇴로를 차단하고 적을 섬멸하라”는 어명을 받았다. 즉시 여수를 떠나 걸망포(통영), 칠천량(거제), 세포(거제), 역포(고성) 등을 돌며 잠시 머물 진지를 찾았다. 그러나 배를 감추고 기동이 편리한 포구를 찾지 못해 한산해전 때 봐두었던 섬으로 옮겨갔다. 한산도 두을포(豆乙浦), 지금의 두억리다.
한산도는 바다에서 보면 밋밋한 섬이다. 그러나 가서 보면 배를 숨기기 알맞은 포구를 감추고 있다. 섬 한가운데 제법 높은 산(망산·293m)이 있어 남해바다를 감제하기 안성맞춤이다. 무엇보다 견내량(見乃梁) 바다가 가까워 왜적의 동태를 파악하기에 편리한 곳이다. 통영과 거제도 사이의 좁은 물길 견내량은 전라도 해로의 길목이다.
이순신의 편지글에는 한산도를 선택한 까닭이 드러나 있다. “호남은 나라의 울타리인데 만약 호남이 없다면 나라도 없을 것입니다(湖南國家之保障 若無湖南 是無國家). 그래서 어제 한산도로 옮겨 진을 치고 바닷길을 가로막을 계획을 세웠습니다.” 이진 다음날 지평 벼슬에 있던 현덕승(玄德升)에게 보낸 답서에 그는 이진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조정의 공도(空島)정책으로 그때까지 한산도는 무인도였다. 완만한 경사지 너른 풀밭에서 말을 기르는 목장이 있을 뿐이었다. 이 한산하던 섬이 삽시간에 번잡한 군사 도시가 되었다. 이진 1개월 만에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자 사람과 물자의 이동이 빈번해진 것이다.
이순신과 원균의 불화가 전쟁 수행의 장애 요인이라고 판단한 영의정 겸 도체찰사 유성룡이 이순신의 직첩을 높여 원균을 휘하에 두도록 배려했다. 삼도수군통제사는 그때까지 없던 직급이었다. “그대 휘하의 장수로서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는 그대가 군법대로 시행하라”는 선조의 교지에 그 뜻이 숨어 있다. 이때까지는 싸우면 이기는 이순신이 미뻤던 모양이다.
삼도수군통제사란 지금으로 치면 해군참모총장이다. 육군은 존재감이 미미했고, 오직 수군만이 왜적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바다를 끼고 있는 70여 개 고을이 통제사 관할 아래 들어왔으니 가히 ‘수국’이라 할 만했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교서지 한 장만 내려왔을 뿐이다.
조정은 지원은커녕 일선 장수들에게 손까지 내밀었다. 조정에서 요구하는 물품을 올려 보낸다는 이순신의 장계가 여럿 전해온다. 1592년 9월 18일 행재소에서 소용되는 종이를 넉넉히 올려 보내라는 지시를 받고 “우선 장지 10권을 보낸다”는 장계를 시작으로, 9월 25일 의연곡(義捐穀, 기부한 곡식)을 모아 한 배로 보낸다는 장계도 있다. 신하가 왕에게 종이와 쌀을 모아 보낸 것이다. 1594년 6월 26일자에는 “단오절 진상물을 보냈다”는 기록도 있다.
수많은 장병을 먹이고 입히고, 전함과 무기 화약 등 각종 군수품을 조달할 책임은 당연히 그의 어깨에 달려 있었다. 그 문제를 해결한 것이 유명한 둔전(屯田)책이다. 그에게는 전라좌수사 때 영남에서 몰려든 피란민을 구휼할 방책으로 돌산도 둔전을 시행한 경험이 있다. 통제사가 되자 군량 해결책으로 둔전 개간을 청원한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전라좌수사 시절 “전라좌우도 소속 1만7000명 군사를 먹이는 데 적어도 하루 100석, 한 달에 3400석이 필요하다”고 한 장계를 근거로 추산하면, 3도 수군의 하루 군량이 얼마나 될지 짐작할 수 있다. 이 많은 군량을 조달하기 위해 그는 연안 지역과 빈 섬의 버려진 땅을 개간해 경작자들에게서 세곡을 받아들이자는 방안을 낸 것이다.
공도정책에는 어긋나지만 당장 뾰족한 방도가 없는 조정으로서는 허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당장 둔전에서 식량이 나오는 것은 아니었다. 개간 기간과 수확이 나오기까지의 군량을 조달하기 위해 그는 병사들을 동원해 칡을 캐고 고기잡이를 했다. 칡은 대용양식, 물고기는 부식이 되었다. 남는 고기는 내다 팔아 곡식으로 바꾸었다.
여러 병영에서 필요한 갖가지 경비를 조달할 방책으로는 소금을 구워 팔았다. 그 시절 소금은 ‘백금’이라 불릴 만큼 값진 식품이었다. 미역, 다시마, 김 등 해조류와 조개류를 채취해 경비에 보탰다. 200여 년 공도정책 덕분에 남해 연안 지역과 섬들마다 황금어장이었다.
에는 쇳물을 부어 철부(鐵釜, 다리가 없는 솥)를 만들었다는 내용이 자주 나온다. 소금 굽는 쇠솥을 주조했다는 말이다. 남해안의 소금 제조는 바닷물을 오래 끓여서 만드는 전오(煎熬) 제염법이 주류였다. 그만큼 많은 쇠솥이 필요했을 것이다.
개간이 끝난 농지에서 쌀과 잡곡이 나오기 시작한 뒤로 사정은 좋아졌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한 것은 아니었다. 200척이 넘는 전선을 건조하고 총포와 화약, 창과 칼, 활과 살 등 무기와 장비를 확충하기에 돈은 턱없이 모자랐다. 그것들은 관련 산업을 일으켜 해결했다.
특히 조선업 진흥은 지역 경제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고을마다 솜씨 좋은 목수들이 한산도와 각 지역 수군병영으로 떼 지어 몰려들었다. 좋은 소나무와 참나무 같은 목재들이 실려 오고, 대장간마다 쇠 소리와 풀무질 소리가 그칠 날이 없었다.
“군사 1283명에게 밥을 먹여 산에서 선재용 나무를 끌어왔다.” 이런 일기가 자주 보이는 것으로 보아, 전선(戰船) 건조사업의 규모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그렇게 만들어진 배들이 날로 늘어갔다.
“새벽에 일어나 창문을 열고 멀리 바라보니 우리의 배들이 바다에 가득 차 있다. 적이 비록 쳐들어온다 해도 섬멸할 만하다.” 1594년 5월 10일자 일기에는 수많은 전선이 건조된 것을 뿌듯이 여기는 마음이 가득하다.
조총까지 제조되었다. 임진년(1592년) 4월 부산포에서 우리 병사들을 공포의 도가니 속으로 몰아넣었던 그 총을 만들어냈다. 왜적에게서 노획한 총을 본떠 만든 것이다. 1593년 9월 14일자 일기에는 “정철총통(正鐵銃筒)은 전쟁에서 제일 중요한 무기이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만드는 법을 몰랐다. 오랜 연구 끝에 이제야 만들어냈다. 왜의 총보다 성능이 좋아서 명나라 사람들이 진중에 와서 시험사격을 해보더니 다들 잘되었다고 칭찬하였다. 이제는 그 묘법을 알았으니 순찰사와 병사에게 견본을 보내고 공문을 돌리도록 하였다”고 기록했다.
그 뒤의 일기에 “총통 두 자루를 부어 만들었다” 같은 내용이 자주 보이는 것으로 보아, 거푸집을 만들어 두고 필요할 때마다 만들어 쓰고 선물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환도(還刀) 대검(帶劍)을 선물로 사용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주물 공업의 발달상을 알 만하다.
임진왜란 직후 300년 동안 조선수군의 수도였던 통영에 전통 공업이 발달한 이유는 바로 그것이다. 통영에는 옛날부터 12공방이 있다고 일컬어져 왔다. 나전칠기, 갓, 놋쇠, 부채, 신발, 목가구, 질그릇, 은세공 등등 격조 있는 집기와 일상생활의 소소한 일용품 제조업 발달에 한산도 시대의 몫이 컸다.
이 정도로 ‘수국’이라 할 수는 없다. 끈질긴 상소 끝에 한산도에서 독자적인 무과(과거)시험을 실시한 것이 한산도를 ‘한산수국’ 수도로 만든 결정적 사건이었다. 과거시험 출제와 관리를 군대 책임자에게 넘겨준다는 것은 비상시가 아니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1593년 12월 이순신은 전주에 내려와 분조(分朝, 임진왜란 때 임시로 세운 조정)를 떠맡은 세자 광해군에게 당돌한 장계를 올린다. 수군만의 무과를 자신의 주관으로, 그것도 전주가 아닌 한산도에서 시행하게 해달라는 요청이었다.
“…12월 27일 전주부에 과거 시험장을 열도록 명령하셨다고 하니, 진중의 모든 군사들이 달려가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물길이 멀고 왜적과 대치해 있는 상황이라 뜻밖의 일이 일어날 수 있어 정예용사들을 한꺼번에 내보낼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수군에 소속된 군사들에게는 진중에서 시험을 볼 수 있게 해주시어 그들의 소원을 풀어주시옵고….”
수하들을 이끌고 전주에 와서 과거를 보라는 분조의 지시를 따를 수 없으니 시험장을 한산도로 해달라는 요구였다. 분조에서는 이를 불쾌하게 여기는 세력이 있었지만, 그 명분을 외면할 수 없어 이순신의 건의는 채택되었다. 날짜는 4개월 늦춘 1593년 4월이었고, 합격자 100명도 거의 진중의 장병이었다. 시험과목 중 말을 타고 달리면서 쏘는 기사(騎射)는 편전(片箭)으로 바뀌었다. 이순신의 요구가 100% 수용된 셈이다.
한산도의 번영과 영광은 그때까지였다. 이순신이 함거에 실려 한양으로 끌려가고 몇 달 뒤 한산도는 한순간에 잿더미로 변했다. 그의 자리를 차지한 원균이 첫 출전 부산포 해전에서 대패하고, 경상우수사 배설이 자신의 함대 12척을 이끌고 돌아와 병영을 불 지르고 자취를 감추었던 것이다. 유성룡의 에는 그때의 일이 이렇게 기록돼 있다.
“원균은 자기 수하의 배만 이끌고 지키고 있다가 적이 공격해오자 달아났기 때문에 그의 군사들은 화를 면할 수 있었다. 한산도에 도착한 그는 무기와 양곡, 건물 등을 모두 불태워버리고 남아 있는 백성들과 함께 대피했다.”
뒤따라 한산도에 들이닥친 왜적은 그동안 이순신에게 당한 분을 풀어보려는 듯 닥치는 대로 파괴하고 분탕질을 했다. 한산도에 진을 치고 전라좌수영까지 점령해 남해를 자기네 안마당으로 만들었다.
오늘의 한산도에서는 제승당 포구에 자리 잡은 요트 선착장이 세월의 힘을 대변하고 있다. 나라의 운명이 걸린 격전의 현장에 생겨난 레저시설이라니! 오전 10시 통영 여객선 터미널을 떠난 페리 연락선에는 금요일 오후의 여가를 역사의 현장에서 즐기려는 관광객으로 만선이었다. 긴 물거품을 끌고 달리는 페리 갑판 위에서 갈매기들에게 먹이를 던져주는 아이들의 환호성이 비명처럼 높았다.
30여 분의 항해 끝에 다다른 제승당 포구는 호수처럼 잔잔했다. 배가 들어온 쪽을 돌아보니 사방이 뭍으로 둘러싸였다. 고동산 돌출부와 한산대첩비 돌출부가 길게 뻗어 나와 내해를 방파제처럼 에워싸고, 그 너머로 미륵도와 통영 반도가 겹겹이 둘러싸고 있다.
멀리서 접근해오는 호화 요트 두 척이 제승당 포구에 들어와 접안하는 것을 보고야 그곳이 관광요트 선착장이라는 걸 알았다. 420년 사이 이렇게 평화로운 세상이 되었음을 충무공에게 고하려 함일까!
현장에 가서 본 수루(戍樓)의 위치는 참으로 절묘했다. ‘섬 안의 반도’라 해야 할 내해의 곶이었다. 그 위에서 바라보면 개미 새끼 한 마리의 움직임도 포착할 수 있었겠다 싶었다. 제승당 뒤편 망산 꼭대기에서는 견내량을 감제하고, 좌우 물길과 뭍으로 신호를 주고받을 수 있으니 그런 지리(地利)를 가진 곳이 또 없다. 이곳에서 유명한 ‘한산도가(閑山島歌)’를 지었다는 달밤이 저절로 상상됐다.
수루 뒤편 중앙에 잡은 제승당(制勝堂)은 본래 이름이 운주당(運籌堂)이었다. 이순신이 수하 막료들과 작전 계획을 세우고 장졸들의 의견도 듣던 곳으로, 집무실 겸 주거 시설이었다. 이런 곳에 원균은 첩을 들이고 울을 둘러 수하들의 출입을 막았다. 배설이 불태워 폐허가 되었던 자리에 1739년 제107대 통제사 조경(趙儆)이 건물을 복구해 제승당으로 당호를 바꾸었다.
통제영 시설 가운데 또 하나 눈길을 끄는 곳이 활터 한산정(閑山亭)이다. 바다를 끼고 145m 건너편 산비탈에 과녁 셋이 있다. 밀물과 썰물 교차를 이용해 해전에 필요한 실전거리 적응을 위해 일부러 바다 낀 곳을 골랐다는데, 아마도 국내에 이런 활터는 없으리라 했다. 매일같이 활쏘기를 연마하던 이곳에서 “수하들과 내기를 해 진 편에서 떡과 술을 내 배불리 먹었다”는 기록이 자주 보인다. 1594년의 과거시험 활쏘기 시험장으로도 이용된 역사의 현장이다.
원균의 패전 이후 통제영은 통영으로 옮겨갔다. 통영에서 제일 유명한 곳은 국보 제305호 세병관(洗兵館)이다. 1604년 6대 통제사 이경준(李慶濬) 시절 두룡포(오늘의 통영)로 통제영을 옮기고 이듬해 건물을 지었다. 두 차례 증개축을 통해 앞면 9칸, 옆면 6칸의 목조 건물이 되었다. 여수 진남관과 함께 바닥 면적이 가장 넓은 객사 건물로도 유명하다.
뭐니 뭐니 해도 통영을 대표하는 것은 그 땅의 지명이다. 300년 동안 수군통제영이 있었던 곳이라는 유래에서 비롯된 이름이어서 주민들의 자부심이 대단하다. 박정희 정권 시대 충무공 시호에서 유래된 ‘충무’로 불리기도 했지만, 옛 지명을 선호하는 여론 때문에 다시 통영이 되었다.
“라디오코리아 뉴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 1989년 2월 1일, LA의 한인들은 눈물을 흘렸다. 라디오를 틀었는데 한국어가 나오고 한국 노래가 나왔던 거다. 이역만리 ‘미국’ 땅에서 말이다. 그렇게 수많은 한인들을 울렸던 목소리는 지금도 매일 오후 3시가 되면 어김없이 흘러나온다. 28년 동안, 그가 마이크를 놓았던 날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다. 그저 방송이 좋아 방송쟁이로 살아왔을 뿐인데, 어느덧 라디오코리아는 그의 인생이 되어 있었다.
최영호 라디오코리아 부회장(69). 그는 부인할 수 없는 LA의 라디오 스타다.
“죽을 때까지 하자던 장희는 울릉도로 가버리고, 글쎄 나만 이러고 있네요. 하하하.”
올해로 28주년을 맞은 라디오코리아와의 인연을 묻자 최영호 부회장은 웃음부터 터뜨렸다. 그랬다. 불과 10년 전까지만 해도 라디오코리아는 ‘이장희’로 통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장희가 홀연히 떠났고 라디오코리아는 위기설까지 나돌았다. 하지만 이후 10년, 라디오코리아는 여전히 건재하다. 그동안 광역주파수를 가진 자체 라디오방송국도 마련했고 캐나다를 포함한 북미 지역과 하와이까지 지국을 넓혔다. 최근엔 한국의 종편채널 ‘TV조선’과 손잡고 TV까지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최영호 부회장의 공이 적지 않았다.
라디오코리아의 주인도 바뀌고, 건물도 바뀌고, 모든 것이 바뀌었는데 그는 바뀌지 않았다. ‘부회장’이라는 묵직한 타이틀을 달았지만 여전히 그의 자리는 스튜디오 안 마이크 앞이다. 28년을 한결같이 들어온 목소리. 이제 사람들은 라디오코리아 하면 ‘최영호’를 떠올린다.
‘라디오코리아’ 너는 내 운명
“참 재미있는 것이 인생이에요. 미국에 오기 전 장희(가수 이장희)가 진행하던 라디오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동아방송 이라고. 장희랑은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친구예요. 친구가 일하는 방송국에 가서 재미 삼아 원고도 써주고 음악도 고르며 놀곤 했어요. 그때 김병우 PD도 알게 됐고요. 나중에 세 사람이 모두 미국 LA에서 만난 거예요. 운명이었죠. 우리에게 라디오코리아는.”
1974년, 대학(연세대학교 물리학과)을 졸업하고 큰누이가 사는 LA에 와 있던 최 부회장은 김병우 PD의 러브콜을 받았다. 그때가 1988년, 무역회사에 잘 다니고 있을 때였다. 한인 라디오 방송국을 만들어보자는 말에 최 부회장은 짜릿함을 느꼈다. 곧 이장희까지 합세, 세 사람은 의기투합했다.
“라디오 방송을 하려면 주파수(스테이션)를 사야 하는데 값이 어마어마합니다. 때문에 같은 주파수를 여러 다른 커뮤니티가 시간별로 렌트해서 나눠 쓰기도 합니다. 우리도 그렇게 시작했어요. 아시안 라디오 Am1300에서 오후 1시부터 6시까지 방송을 하기로 계약을 했어요. 김병우 PD가 한국에 레코드판을 사러 간 사이 우리는 방송 인력을 뽑았어요. 프로를 원했기 때문에 필기시험, 실기시험 갖출 건 다 갖춰서 했습니다. 다섯 명을 뽑았는데 그들이 라디오코리아 공채 1기입니다. 그중엔 현재 라디오코리아 보도본부장을 맡고 있는 송봉후씨도 있었습니다. 그때 목소리가 상당히 좋았어요. 지금도 좋지만…(웃음).”
최 부회장은 1989년 2월 1일 12시를 잊을 수가 없다. 애국가가 울려 퍼진 후 송봉후 아나운서의 조금은 떨리는 목소리가 전파를 탔다.
“친애하는 동포 여러분! 여기는 라디오코리아입니다!”
전화벨은 쉴 새 없이 울리고 수화기 너머의 한인들은 감격에 겨워 울음을 터트렸다. 사람들은 “이 방송이 진짜냐, 내일도 하느냐?” 하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이장희가 맡은 음악 프로그램 는 그야말로 대박이었다. 방송이 나가는 시간이면 방송국 앞으로 찾아온 사람들로 한바탕 난리가 나곤 했다. 그야말로 미주 한인 이민사의 한 페이지였다.
잊을 수 없는 그날, 4월 29일
“라디오는 참 매력적인 매체입니다. 들으면서 뭐든 다 할 수 있으니까요. 한인들은 삶의 현장에서 라디오를 들었죠. 봉제공장에서, 미장원에서, 방앗간에서, 운전을 하면서 모두가 라디오를 들었던 겁니다. 한 공장에서 미싱을 돌리던 수백 명의 한국인 여직원들이 동시에 웃음을 터뜨려 미국인 감독이 깜짝 놀랐다는 일화는 유명합니다. 힘들었지만 낭만이 있던 시절이죠.”
라디오코리아는 한인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성장했다. 함께 울고 웃었다.
가장 떠오르는 일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최 부회장은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다며 1992년 4월 29일의 LA폭동 이야기를 꺼냈다.
“퇴근을 하려는데 흑인 로드니 킹을 폭행한 백인 경찰관들이 무죄판결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뭔가 일이 터지겠구나 싶더라고요. 직원들에게 퇴근하지 말고 상황을 지켜보자고 했습니다.”
사우스 센트럴 일대는 순식간에 무법천지가 되었다. 폭도들은 북쪽으로 밀고 올라와 코리아타운을 습격했다. 불길이 치솟아도 소방대는 오지 않았고 떼를 지어 가게 물건들을 약탈해가도 경찰은 보이지 않았다. 한인들은 라디오코리아에 전화를 하기 시작했다.
“리쿼스토어인데 폭도들이 쳐들어온다.”
“지금 창문을 깨고 불을 지르고 있다.”
“웨스턴 길로는 들어오지 않는 게 좋겠다.”
최 부회장은 재빨리 특별 생방송을 결정하고 시시각각 들어오는 소식을 그대로 전했다. 폭도들의 위치를 알려주면 상인들은 미리 대비를 했고, 운전자들은 자동차에서 방송을 들으며 안전한 길로 갈 수 있었다.
“상상해보세요. 스마트폰도 GPS도 없던 시절이었어요. 눈앞에서 폭도들이 날뛰고 건물이 불타는 전시 상황과 같은 곳에서 라디오코리아 방송은 한인들에게 목숨 줄이었습니다. 경찰이 한인타운을 지켜주지 않자 한인들은 스스로 지킬 수밖에 없었죠.
1세들이 이민 와서 피땀으로 일궈낸 모든 것이 초토화될 상황이었습니다.”
폭동이 진압된 후에는 엄청난 피해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가 급한 일이었다. 한인 공무원, 회계사, 변호사들을 불러 모아 함께 방송을 했다. 라디오코리아를 중심으로 한인 사회가 똘똘 뭉치는 모습에 미국 주류 사회의 이목이 집중됐다.
“하루는 화이트하우스에서 전화가 왔어요. 백악관 말입니다. 부시 대통령이 라디오코리아를 방문하겠다고요. 믿을 수 없는 일이었죠. 현직 대통령이 로컬 언론사를 직접 찾는 일은 처음이고 아마 앞으로도 없을 거라고 하더군요. 비서실장이 직접 한 말입니다. 언론의 역할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고… 제 개인 삶에도 많은 영향을 끼친 사건이었어요.”
야구광, 다저스를 만나다
최영호 부회장은 유명한 야구광이다. 미국으로 이민 온 이후 다저스의 팬이 되었고 특히 ‘다저스의 목소리’라고 불리는 빈 스컬리 캐스터의 중계를 듣는 것은 그에게 큰 즐거움이었다.
라디오코리아를 개국한 이듬해인 1990년, 최 부회장은 당시 LA 다저스의 구단주 피터 오말리를 찾아갔다. 거두절미하고 그가 던진 말은 “라디오 중계 좀 합시다!”였다고.
“한인들이 다저스 중계를 들으면 얼마나 좋아할까 싶었습니다. 야구 중계를 한번 해보고 싶은 욕심도 있었고요. 재미있었던 것은 오말리 구단주가 기다렸다는 듯이 ‘예스’를 한 거였어요. 당시 메이저리그 중계는 영어, 스페인어, 프랑스어 이렇게 세 가지 언어로만 했는데 한국어가 네 번째가 된 겁니다. 그해 9월 다저스와 신시내티와의 경기 중계를 하러 다저스구장에 갔지요. 그때의 감격이란… 그날 경기 녹음테이프는 뉴욕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에도 있습니다.”
또 한 번의 역사적인 날이었다. 미국 메이저리그의 야구 중계를 한국어로 들을 수 있는 날이 올지 그 누가 알았겠는가. 게다가 최 부회장의 중계는 재미를 더했다. 경기 상황은 물론이고 선수들의 뒷이야기 등 미국 야구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담긴 그의 중계는 한인 다저스 팬들을 만들어내는 데 일조를 했다. 다저스 구단으로서도 대만족이었다.
“다저스 구단 측에 기회가 있을 때마다 팀에 한국 선수가 하나 있으면 너무 좋을 거 같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당시 외국 선수를 기용하는 데 꽤 적극적인 분위기였기 때문에 말을 꺼내기도 쉬웠죠. 4년 뒤인 1994년, 마침내 박찬호 선수가 LA에 오게 되었죠. 정말 기분이 좋더라고요. 마이너리그에서 뛰는 2년 동안 라디오코리아는 전 경기를 중계방송했어요. 당신을 응원하는 한인들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죠. 이후의 메이저리거 활약은 모두를 신바람 나게 했어요. 박찬호 선수와 지금 뛰고 있는 류현진 선수를 보고 있으면 저 혼자 느끼는 보람 같은 것이 있습니다.”
최 부회장은 지금도 다저스 경기에서 캐스터와 해설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각본 없는 드라마라고 했던가. 야구 중계만이 주는 짜릿함이 있다. 방송 경력 28년에 다저스 경기 중계만 27년, 그는 단연코 가장 재미있는 일이라며 무한애정을 드러낸다.
“간혹 나이도 있는데 언제까지 힘들게 일할 거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럴 때마다 이렇게 얘기해줍니다. 빈 스컬리는 67년간 다저스 중계를 하다가 88세에 은퇴했다고(웃음).”
“인호 형의 작품을 모두 소장하고 있어요”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최영호 부회장은 2013년 작고한 고 최인호 작가의 친동생이다. 세상없는 우애를 나누던 형이자 국민 작가를 떠나보낸 지 어느덧 4년. 아직도 가슴이 먹먹하다. 최인호 작가는 유독 LA와 인연이 깊었다. 3남 3녀 중 누이들과 동생인 최 부회장이 1970년대에 일찌감치 미국으로 이민을 와 있었던 까닭에 자주 찾아와 오래 머물다 가곤 했다. 참고로 최 작가의 대표작 중 하나인 (1982년 이상문학상 수상작)은 LA와 데스밸리 여행 중에 구상된 작품이다. 잡지 에 35년간 연재된 자전적 소설 을 비롯해 고인의 작품 곳곳에는 홀어머니와 그 밑에서 어렵게 자란 형제들에 대한 애틋함이 담겨 있다.
“작가 아니랄까봐 까칠하고 예민한 구석이 없지 않았지만 인호 형과 나는 누구보다도 서로를 이해하는 가까운 사이였습니다.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형의 글 쓰는 모습만 떠올라요. 자고 일어나 문틈으로 보면 역시나 글을 쓰고 있었고… 이사할 때마다 형의 습작들이 한 짐이었지만 어머니는 단 한 장도 버리지 않고 간직하셨습니다.”
형 최인호와 아우 최영호만이 아는 신춘문예 비하인드 스토리도 있다.
“형이 군대를 가면서 자신이 공책에 끄적거려놓은 게 있으니 원고지에 정필해 신문사에 보내라고 했어요. 나름대로 정성껏 써서 신문사에 보냈죠. 그렇게 당선된 작품이 196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견습환자’예요. 원고지 첫 장에 식은땀이 날 정도로 정성을 들여 한자(漢字)로 썼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 심사위원이었던 이어령씨가 글씨가 너무 유치해서 읽지 않으려 했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듣고 형과 한참을 웃었던 기억이 있어요.”
소주잔을 기울이며 고민을 나누던 친구 같은 형이었지만 장례를 치르는 동안 최 부회장은 새삼 깨달았다고 한다. 작가 최인호는 자신이 범접할 수 없었던 ‘거인’이었다는 것을.
“정치, 경제, 문화, 예술계 전체가 애도를 표해왔지요. 끝없이 이어지는 조문객들과 분향을 하고 흐느끼는 독자들을 보면서 형님이 얼마나 위대한 작가였는지, 한 시대를 품었던 예술가였는지 알게 됐어요. 아, 내 형님이 이런 분이었구나, 내가 더 존경해야 했던 분이었구나 회한이 밀려와 많이도 울었습니다.”
최 부회장은 형의 작품을 모두 소장하고 있다. 서고의 벽 하나를 다 차지하는 적지 않은 양이다. 형이 하늘로 간 후로 지금까지 그는 그 책들을 하나하나 다시 꺼내 읽고 있다. 라디오코리아 그의 사무실 책상에도 작가 최인호의 주옥같은 책들이 꽂혀 있다. 늘 곁에 두는데도 볼 때마다 마음이 철렁한다. 첫 장에는 어김없이 ‘영호에게’로 시작되는 형의 짧은 메시지가 담겨 있다. 보물들이다.
“갈수록 무뎌져야 하는데 어떻게 된 게 갈수록 보고 싶어요. 큰누이를 잃고 많이 울던 나에게 형은 누이를 가슴에 묻으라 했어요. 인호 형도 그렇게 가슴에 묻어야겠죠. 그는 나에게 영웅입니다. 형에 대한 존경심은 점점 그 깊이가 더해져요. 형 없이 나 혼자 늙어가는 것이 서글프기도 하지만 또 많이 감사합니다. 형으로 인해, 형의 글들로 인해 깨닫는 것이 많아지니까요.”
지키고 싶은 이름, 방송인 최영호
세월은 흘렀고 세상은 변했다. TV보다는 인터넷을, 라디오보다는 MP3가 더 편한 세대다. 최영호 부회장은 방송은 변하지만 방송을 하는 정신은 변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것은 ‘라디오코리아’의 존재 이유이기도 하다.
“로컬 방송의 생명은 바로 우리들 이야기를 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한인 동포들이 라디오코리아에게 가지고 있는 믿음은 정말 소중한 겁니다. 라디오코리아는 미주 한인의 자본으로 만든 한인언론이에요. 진짜 우리의 생각을 전하고 이익을 대변하는 ‘우리 방송’인 거죠. 저는 한인 사회가 있는 한 라디오코리아도 존재할 거라고 믿습니다.”
지금도 마이크 앞에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하다는 그는 스스로를 뼛속까지 방송인이라고 칭한다.
“나는 마이크 앞에 방송할 때가 가장 행복해요. 감투도 싫고 명예도 귀찮습니다. 나이가 더 들어 목소리가 변하면 청취자가 싫어할까요? 그래도 같이 늙어가는 친구 같은 분들이 있지 않을까요? 그분들을 위한 좋은 음악방송을 하고 싶어요. 깊은 밤에 함께 음악도 듣고 지난 얘기도 나누고요. 와, 이런 얘기 방송에서 해도 되나 싶은 것도 막 이야기하면서 말입니다(웃음).”
정유년인 올해는 정유재란(1597.1~1598.12) 발발 420주년이다. 임진왜란으로부터는 427주년. 임진왜란이 치욕의 역사였다면, 정유재란은 왜군이 충남 이북에 발도 못 붙인 구국승전의 역사다. 그 전적지는 진주, 남원, 직산 등 삼남지방 곳곳에 있지만 옛 자취는 찾기 어렵다. 뚜렷한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은 왜군이 남해안을 중심으로 농성하던 성터들이다. 주로 경남 중동부 해안에 밀집한 왜성 터들도 오랜 세월 허물어지고 지워져 갈수록 희미해져간다. 왜성이라는 이유로 사적지 지정이 해제된 탓이다. 근래 일부 지방자치단체는 그 중요성에 눈을 떠 옛 모습대로 복원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는 아직도 방치되어 있다. 치욕의 역사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다. 더 늦기 전에 지금 모습이라도 남겨둬야 한다. 더 사라지고 훼손되기 전에 역사 현장 보전의 필요성을 일깨우고, 정유재란의 역사적 의미를 천착하기 위해서라도 그 흔적을 돌아볼 필요가 있어 에 게재하기로 한다.
노량(露梁)해전 대승첩이 없었다면 조선은 얼마나 가련하고 부끄러운 나라였겠는가! 만일 이순신 장군이 도망치는 왜적의 앞길을 가로막고 “한 척도 살려 보내지 않겠다”고 분전하다가 살신성인하지 않았다면…. 조선은 정말 의기도 결기도 없는 나라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임진년 국난 이래 중국에만 매달려 주권을 포기한 나라로 종전을 맞았다면, 수오지심도 모르는 나라가 되었을 것 아닌가.
1592년 4월 13일, 부산포에 상륙한 왜군은 무주공산을 달리듯 치고 올라와 채 20일도 못 되어 국도를 손에 넣었다. 대륙 교두보 상륙작전 같은 전쟁이었다. 지방 수령들은 소문만 듣고 도망쳤고, 조선 최고 장수라는 사람은 천험(天險)의 요새인 문경새재를 버리고 충주 탄금대에 진을 쳤다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벼랑에 떨어져 죽었다. 그는 최고 사령관 교지를 받고 전장으로 떠날 때, 군사가 없어 사흘을 모집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홀로 떠났다. 조선이라는 나라의 실상을 웅변하는 사실(史實)이다.
왜적 침입보고가 한양에 당도하는 데는 나흘이 걸렸다. 긴급 보고체제인 봉수체계도, 역참제도도 다 고장 난 탓이었다. 상주에 진을 쳤던 어떤 장수는 적이 10리 밖에 온 사실도 모르고 있다가 “적이 가까이 왔다”고 알린 백성의 목부터 쳤다. 다음 날 적이 나타나자 그는 혼자 줄행랑을 놓았다. 임금은 적이 아직 멀리 있는데도 궁궐을 버리고 달아나면서, 중국에 내부(內附·복속)할 궁리만 했다. 전쟁이 터지기 10년 전, 1년 치 양곡과 재정비축이 없는 점을 들어 “진실로 나라가 아니다”라고 상소한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한탄처럼, 조선은 나라라고 할 수 없는 나라였다.
이순신을 죽이려고 임금과 조정 중신들이 눈에 핏발을 세운 사이, 원균은 수군총수 자리에 앉았다. 그가 첫 전투에서 조선수군을 통째로 수장시켜 나라를 풍전등화에 내놓은 정유재란의 끝을 이순신이 통쾌하게 설욕했다. 그 노량해전 승첩이 있어 지금 옛일을 돌아보는 일이 부끄럽지 않다. 육전과 해전을 망라한 7년 전란 중 그렇게 통쾌하게 적을 토멸한 일이 없었기에 더욱 그러하다.
노량전투 엿새만인 1598년 11월 25일자 에는 전과가 이렇게 기록되었다. “왜적의 배 100여 척을 포획하고 200여 척을 불살랐으며, 500여 급을 참수했고 180여 명을 생포했다. 물에 빠져 죽은 자는 아직 떠오르지 않아 그 수를 알 수 없다.”
뒷날의 집계로는 적 병력 1만5000명 이상을 수장시킨 것으로 돼 있다. 일본 측도 , 같은 기록을 인용한 에서 “일본 배가 더 많이 불타고 파손되었다”,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가문의 함대 피해가 매우 컸다”는 식으로 패전을 전하고 있다.
노량해전 승첩 현장인 노량 바다에는 그날의 흔적이 없다. 이순신이 구국의 충혼을 불사른 관음포 바다는 거듭된 간척사업으로 내해가 훨씬 좁아졌다. 후세에 건립된 이락사(李落祠) 아래 올봄 준공된 ‘이순신 순국공원’의 시설물은 너무 현대적이고 크기만 해 오히려 옛일을 더듬고 추념하기에 불편했다. 100억 원이 넘게 들었다는 기념관의 시설물에는 갖가지 모조품류와 책에 다 나오는 상황도 설명문 류만 가득해 애써 찾는 이의 발품에 값하지 못했다. 오히려 진짜 유적인 이락사가 가려진 느낌이었다.
남해대교 아래 숨어 있는 충렬사(忠烈祠)와, 경내 초빈(草殯) 자리에 만들어놓은 장군의 가묘(假墓)가 옛일을 증언하고 있다. 1970년대 연육교의 효시였던 남해대교 아래 연안을 둘러보면서, 노량 바다의 오묘한 지리를 터득한 것은 현장을 찾아본 보람이었다. 남해대교 폭은 400m 정도다. 경상도 수역에서 전라도 바다로 들어서는 물목인 하동군 금남면 노량리와 남해 섬 북단의 거리가 그것이다. 명량해협보다 조금 넓은 정도다.
그 물목을 지켜 섰다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를 구원하러 출동한 왜 함대 500척을 관음포 바다로 몰아넣고 독 안의 쥐잡듯한 전투가 노량해전이었다. 조명 연합수군의 압박을 견디다 못한 왜군은 남해 섬 뭍으로 상륙해 산을 넘어 도망치는 상황이었다. 그 틈을 타 유키나가는 남해 섬을 멀찌감치 돌아 구사일생으로 달아났다.
노량해전을 앞두고 이순신은 명나라 수군도독 진린(陳璘)과 크게 다투었다. 순천왜성을 탈출하려는 유키나가의 뇌물작전에 넘어가 포위망을 풀어주려 한 것이다. 왜성 코앞인 광양만을 봉쇄하고 있던 그는 노량해전 3일을 앞둔 11월 16일 “남해 섬의 적을 먼저 쳐야겠다”면서 떠나려고 했다. 곱게 성을 비워주겠다는 감언이설에 혹한 것이다.
“남해의 적이란 왜적에게 포로로 잡힌 우리 백성들이오.”, “왜적에 붙었으니 적이 아니면 무엇이오?”, “귀국 황제께서는 작은 나라 백성을 구하라 하셨다는데, 약한 그들을 죽이는 것은 황제의 뜻이 아닐 것이오.”, “우리 황제께서 누구라도 명을 어기거든 징치하라고 내게 긴 칼을 주셨소.”, “한 번 죽는 것은 두렵지 않지만 우리 백성을 죽이도록 두고 볼 수는 없소.”
칼을 꺼내 들고 위압적으로 나오는 진 도독에게 이순신이 의연한 자세를 굽히지 않은 이야기는 유명하다.
11월 18일 왜의 대선단이 노량으로 몰려온다는 탐망군의 보고를 알리자 진 도독도 따라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조명 연합수군 합동작전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이순신의 조카 이분(李芬)이 쓴 에 따르면, 그날 밤 늦게 광양만을 떠나기 전 이순신은 배 위에서 손을 씻고 무릎을 꿇고 하늘에 빌었다. “만일 이 원수들을 없앨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此讐若除 死則無憾].” 그러고는 모든 병정에게 하무를 물리고 조용히 진군했다. ‘하무’란 군사들이 떠들지 못하도록 입에 물리던 나무재갈이다.
임진년 이래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조명 연합수군의 규모는 전선 250여 척에 병력은 2만1000명(조선군 8000명, 명군 1만3000명)이었다. 진 도독이 기함, 좌선봉은 명군 제독 등자룡(鄧子龍), 우선봉은 이순신이었다. 18일 늦은 밤 광양만을 떠난 연합함대는 19일 이른 새벽 노량해협에 이르렀다. ‘해협을 가득 메운 왜선들의 불빛이 긴 뱀처럼 줄지어 있었다.’ 행록에 묘사된 이 문장이 왜적의 규모를 말해준다. 사천 선진리 왜성에 주둔했던 시마즈 요시히로 군뿐만이 아니라, 멀리 울산에 있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원군까지 합세한 500척 대함대였다.
연합함대가 캄캄한 노량 바다를 저어오는 왜적의 앞길을 가로막으면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행록에는 ‘밤 10시쯤 조·명군이 함께 출발하여 새벽 2시쯤 노량에 도착, 적선 500여 척을 만나 아침이 되도록 크게 싸웠다’고 적혀 있다. 불화살이 날고, 각종 총통이 포효하고, 불붙은 장작더미가 왜선으로 던져졌다. 이순신의 기도처럼 단 한 척의 적선도 살아 돌아가지 못하게 하려는 조선수군의 분전이었다.
앞길이 막힌 왜적은 남해 섬 남쪽으로 진로를 틀어 활로를 찾으려는 모양이었다. 진 도독 함대가 추격하자 관음포로 달아나던 시마즈 요시히로 함대는 앞길이 막힌 것을 알고 되돌아서 결사적으로 저항했다. 연안에 닿은 배에서는 적병들이 뛰어내려 산으로 달아났다. 아직 닿지 않은 배들은 독 안에 든 쥐처럼 사납게 반격해왔다. 진린 함대를 뒤따라온 왜선들에게 기함이 협공을 당하게 되자, 너른 바다에서 왜적을 무찌르던 이순신이 급히 달려갔다.
“진린 도독을 구하라!” 이순신은 앞장서서 진 도독 기함으로 달려갔다. 날이 완전히 밝은 오전 7시 무렵이었다. 바다 위에는 부서지고 불타는 적선이 뒤엉키고, 바닷물은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순신 함대가 도독의 판옥선을 공격하는 왜선들에게 총통과 불화살을 퍼붓는 사이 왜선들이 겹겹이 몰려들었다. 삼도수군통제사 깃발을 보고 이순신을 노린 것이었다.
적선의 접근에도 아랑곳없이 한 손에 활을 들고 또 한 손으로 북을 울리며 독전하던 이순신이 한순간 가슴에 총탄을 맞고 쓰러졌다. 부장 송희립(宋希立)이 총을 맞았다는 보고에 그쪽을 돌아보다가 그렇게 되었다는 후일담이 전해져온다. 향년 54세였다.
옆에서 돕던 아들 회(薈)와 조카 완(莞)이 달려들어 부축하려 할 때 이순신이 남긴 마지막 말은 성인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다. “싸움이 한창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입 밖에 내지 말라[戰方急愼勿言我死].” 고통과 회한을 삭이면서 끝까지 걱정한 것은 싸움의 결말이었다. 얼마나 많은 적선을 당파하고 분멸할 것인가, 그리하여 얼마나 많은 왜적을 ‘나의 바다’에 수장시킬 수 있을 것인가!
오직 그것만이 성웅(聖雄) 이순신의 관심사였다. 단재 신채호, 춘원 이광수, 노산 이은상 같은 선각자들은 우리 역사에서 특정 인물에게 성(聖)자를 붙일 수 있는 사람은 세종대왕과 이순신뿐이라고 말했다. 일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나라 걱정만 했다는 점에서 이 말에 토를 달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영웅의 죽음을 숨긴 채 회와 완이 장군처럼 독전기를 휘두르고 북을 울려 사기를 진작시킨 결과는 찬란했다. 임진년 이래 7년 동안 뭍에서건 바다에서건 이보다 큰 전과를 올린 일은 없었다. 격전 중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요시히로는 남은 함선을 이끌고 남해를 돌아 부산으로 달아났다.
“통제공 수고 많았소. 어서 나오시오.” 싸움이 끝나고 이순신 기함을 찾아온 진 도독은 승리의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었다. “숙부님은 돌아가셨습니다.” 조카 완의 말에 도독은 배 위에서 세 번이나 넘어졌다 한다. “공은 죽어서도 나라를 구하셨구려!” 그는 가슴을 치며 통곡을 그치지 않았다. 그 소리 탓에 성웅의 별이 관음포 바다에 떨어진 것을 조명 양군이 알게 되었고, 수백 척 전선에서 터져 나오는 울음이 파도소리를 덮었다.
장군의 시신은 관음포 이락사 자리에 잠시 안치되었다가 노량 충렬사 자리로 옮겨져 초빈되었다. 며칠 후에는 고금도 통제영으로 모셔졌다. 전남 완도군 고금면 덕동리 해안 옛 통제영 터에는 장군의 유해가 안치되었던 월송대(月松臺)가 보존되어 있다.
고금도는 쉽게 가볼 수 없는 섬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육속이 되어 쉽게 찾을 수 있다. 강진군 마량항에서 고금도 북단으로 가로질러진 마량대교를 건너 10여 분 달리다 왼편으로 접어들면 이내 덕동리 해변이다. 잔잔한 바다가 섬 내륙으로 깊숙이 파고들어온 만(灣) 안쪽 아늑한 포구연안이 마지막 통제영 자리다.
사적 114호로 지정된 고금도 충무사는 이순신 영정을 모신 사당 앞에 아담한 사우가 몇 채 둘러섰다. 사당 왼편의 관왕묘 비가 눈길을 끌었다. 원래 도독 진린이 이 자리에 관왕묘(관우사당)를 건립했는데, 뒷날 충무사를 짓고 관왕묘는 묘비(廟碑)만 남겨두었다. 이곳이 명 수군 군영이었음을 증언하는 유적이다.
고금도 통제영을 굽어보는 덕동리 야트막한 언덕 위 솔밭(월송대)에 모셔졌던 성웅의 유해는 83일 만에 고향인 아산으로 모셔져 현재 아산시 음봉면 어라산 기슭에서 영면하고 있다.
고금도 통제영은 명량대첩 이후 적당한 진지를 찾던 이순신이 목포 앞바다 고하도(高下島)에서 정유년 겨울을 나고 옮겨온 마지막 진지였다. 이곳에서 장군은 전함을 건조하고 장정을 모집해 수군 재건에 힘쓰는 한편, 농지를 개간하고 군염(軍鹽) 제조사업으로 전력을 크게 회복시켰다. 자신을 믿고 따르는 주민들의 협력이 큰 힘이 되었다.
정부 지원 한 푼 없이 그렇게 힘을 기른 것이 진 도독의 마음을 산 밑천이 되었다. 1598년 7월 16일 진린이 수군 5000명을 거느리고 고금도 이순신 통제영에 당도했다. 이순신은 술과 안주를 성대하게 차려 배에 싣고 군대의 위의를 갖춰 군악을 울리며 멀리 나가 맞아들였다. 칠천도 패전 이후 중국 동해안 지방이 왜의 위협에 노출되자 명은 부랴부랴 조선에 수군을 파병했던 것이다.
통제영으로 맞아들여서도 성대한 환영연을 베풀었다. 여러 장수들은 잔뜩 취해 “이순신은 과연 훌륭한 장수로다” 하며 좋아했다. 사납고 오만하기로 소문난 진린도 융숭한 대접에 흡족해했다. 그러나 다음 날부터 뜻밖의 변이 일어났다. 명나라 수군의 약탈과 부녀자 희롱으로 동네마다 통곡과 탄식이 터졌다.
보다 못한 이순신은 어느 날 크고 작은 막사를 헐고 옷과 이부자리를 배에 옮겨 실었다. 도독이 그 모습을 보고 달려와 까닭을 물었다. “귀국 군사들 행패를 견딜 수 없어 백성들과 함께 다른 곳으로 옮겨가려 합니다.” 도독이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즉시 이순신에게 명나라 수군의 탈법 행위 단속권이 허락되었다. 그 후로 명군의 행패가 사라졌다.
이순신은 크고 작은 전과까지 진 도독에게 양보해 체면을 살려주었다. 그 인품에 감격한 도독은 이순신을 제갈량에 비유하며 명나라에 가 벼슬을 하도록 권유하기까지 했다. 명나라 조정과 선조 임금에게 올린 서장에서 그는 이순신을 “경천위지(經天緯地)의 재(才)가 있으며, 보천욕일(補天浴日)의 공(功)이 있는 인물”이라고 극찬했다. 천지를 주무른 재주요, 하늘과 해를 손본 공이라는 평가는 진정 감화를 받지 않고는 인사치레로 쓸 수 없는 말이다.
그 서장에 감복한 명나라 신종은 도독인 참도 독전기 등 여덟 가지 물건[八賜品]을 보내 이순신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 전에 이순신을 살리기 위해 면사첩(免死帖)을 보낸 것도 그였다. 한양의 명군 총사령부에서는 영내에 빈소를 설치하고 성웅의 전몰을 애도했다.
그러나 우리 임금은 그 반대였다. 예조에서 그 사실을 전하며 어떻게 해야 할지 하회를 구해도 선조는 대답이 없었다. 재차 하회를 요구하자 마지못해 “알아서 하라” 했다. 뒷날 논공행상 때도 그랬다. 선조는 굳이 원균을 이순신과 같은 정왜(征倭) 일등공신에 올리라 했다. 조정에서 부당하다는 여론이 일었지만 뜻을 굽히지 않았다. 너무 훌륭해 두렵고 질투 나는 이순신의 죽음을 반기지 않고서야 그럴 수가 있겠는가.
조선 500년 역사에서 이순신을 가장 위대한 영웅으로 만들고, 스스로 가장 용렬한 임금이기를 자청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