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시니어블로거 협회에서 주관하는 토요3시간 걷기 행사가 남양주에 있는 수종사에서 있었다. 경의중앙선 열차를 타고 운길산역에서 내려 도보로 수종사까지 한 바퀴 도는 것이다. 필자는 며칠 동안 감기 기운으로 망설이던 끝에 전 날 저녁에 참석하기로 최종 마음을 정했다. 상봉역에서 만난 회원들이 경의중앙선 운길산역에서 내렸다. 미리 도착한 회원들까지 11명의 회원들이 합류하여 수종사를 향해서 걷기 시작하였다.
해발 610m 운길산 중턱에 자리 잡은 수종사는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쳐지는 두물머리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천혜의 절경을 감상할 수 있는 사찰이다.
영하5도의 쌀쌀한 날씨에 살랑살랑 불어대는 산바람이 제법 매섭게 옷깃을 파고들었다. 운길산 역에서 수종사로 가는 길은 계곡의 등산로나 시멘트 포장길을 따라 가파른 경사로를 힘들게 걸어서 올라가야 한다. 필자 일행은 처음에는 계곡의 산길을 따라 오르다가 중간에 가파른 시멘트 포장길로 들어섰다. 등산로와 산비탈 여기저기에는 적지 않은 눈이 쌓여있어 여간 미끄럽지가 않았다. 헐벗은 겨울 산 나뭇가지 사이로 옹알옹알 들려오는 새소리를 들으며 언덕길을 오르다 보니 어느새 땀이 차오른다.
이 길은 필자에게는 지울 수 없는 추억이 깃들어 있었다. 단풍이 곱게 물들던 10여 년 전의 어느 가을날, 지인과 함께 자전거를 타고 이 곳을 찾았다가 수종사 입구에서 운명처럼 만난 여인과 불타는 사랑에 빠졌던 필자의 지인이 문득 생각났기 때문이다. 추억을 꺼내 두런두런 음미를 하다 보니 어느덧 수종사 일주문이 눈에 들어올 때 쯤엔 등까지 땀으로 흠뻑 젖었다.
운길산 수종사는 대한불교조계종 봉선사의 말사로 창건연대의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세조와 관련된 일화가 있다. 부스럼을 앓던 세조가 오대산 상원사에서 문수보살을 만나 깨끗이 낫고 한강을 따라 환궁하는 길이었다. 양수리까지 오니 밤이 이슥해 쉬어 가는데 운길산에서 종소리가 들려왔다. 신하가 알아보니 천년 고찰 터 암굴 속에 십팔 나한상이 앉아 있고 천장에서는 물방울이 떨어지면서 종소리를 내는 것이라 했다. 세조는 이곳에 절을 복원해 수종사라 부르고 이 은행나무(500년)를 하사했다고 한다.
500년 수령 느티나무 두 그루의 환영을 받으며 경내로 들어서자 겨울 속에 빠진 사찰의 고즈넉함이 불쑥 다가왔다. 경내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나니 마당 앞에 아담하게 지어진 전각 다실, 삼정헌(三鼎軒)이 눈에 들어왔다. 필자 일행은 툇마루에 배낭을 벗어놓고 다실 안으로 들어갔다. 무료다실 삼정헌에서는 약수를 끓여 이곳을 찾는 중생들에게 차를 제공하고 있었다.
투명하고 탁 트인 통유리 밖으로 두물머리의 풍경을 감상하며 녹차 한 잔을 여유롭게 마실 수 있는 삼정헌은 수종사만의 아주 특별한 공간이다. 은은한 녹차향이 후각을 자극하고 정오를 갓 지난 말간 겨울 햇살이 섬섬옥수처럼 다실 안을 비추고 있었다. 가파른 경사로를 따라 경내까지 당도하느라 이미 땀으로 촉촉해진 몸이 한기(寒氣)가 엄습하기 이전에 이곳에 들어올 수 있어 참으로 다행이었다. 이 곳 삼정헌에서 보살님의 녹차 공양은 덤으로 맛볼 수 있는 행복이다. 시원한 전망과 유리창을 통해 쏟아지는 햇살은 마음에 찌든 때까지 말끔히 거두어간다. 잔잔한 음악을 들으면서 도란도란 둘러앉아 우려낸 녹차 한잔을 나누면서 얘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뻑뻑했던 피로는 가시고 젖어있던 속옷도 대충 말라가고 있었다. 운길산 수종사를 한번쯤 찾았던 사람들은 이런 맛에 잊지 않고 다시 이 사찰을 찾아오곤 하나보다. 따뜻한 다실 분위기에 공짜로 차까지 얻어마셨으니 어찌 고맙지 않을 손가? 나오는 길에 시주함에 소박한 정성을 담았다.
삼정헌에서 감미로운 시간을 보낸 필자 일행은 하산 길에 올랐다. 낮에 잠깐 녹았던 길이 저녁이 되면서 다시 살얼음이 살짝 얼어 무척이나 미끄러웠다. 내리막길에서 우려하던 일이 기어코 일어나고야 말았다. 2명의 대원이 급경사로에서 미끄러져 넘어지고 말았는데, 부축을 해서 일으켜 놓고는 하늘을 향해 네 팔 벌린 나무 같다고… 유쾌한 농담을 주고받았다.
몸과 마음이 한없이 움츠러드는 겨울, 12월의 첫 주말에 시니어 회원님들과 더불어 운길산 수종사를 찾아 활기차고 좋은 시간을 보냈다. 엄동설한 맹추위에 대항하여 가슴을 활짝 펴고 씩씩하게 걸었던 회원님들의 얼굴에서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종묘는 종로 3가역과 5가역 근처에 있다. 초등학교 때 단체로 갔던 기억이 있고 그 후로는 가보지 못했다. 조선왕조의 혼백을 모신 곳이라 하여 조심스럽기도 해서 왠지 발길이 가지 않던 곳이다. 그러나 몇 해 전 종묘 앞 쪽에 광장과 공원을 마련하고 대로변에 위치하고 있어 가볼만 한 곳이 되었다.
입장료 1,000원인데 경로 우대는 무료이다. 안내서는 무료로 주지만, 자세한 설명이 잇는 소책자는 500원에 사야 한다. 아무 때나 들어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제로 입장시켜 시간이 안 맞으면 번거롭다. 대부분 한 시간 간격이다. 일단 들어가면 해설사가 붙고 50분 동안 경비들이 지킨다. 그래서 정문까지 갔다가 돌아선 적이 몇 번 있다.
종묘는 종로에 있는 묘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종로는 쇠북 종(鐘)이고, 종묘의 종(宗)은 마루 종이라 하여 산마루처럼 꼭대기를 뜻한다. 그러므로 왕과 왕비의 혼백을 모신 곳이다. 사람이 죽으면 육체는 썩어 없어지지만, 혼백은 남아 있다는 유교 사상에서 유래된 것이다. 나무로 만든 신주가 혼백이 머무는 곳이라는 것이다. ‘혼비백산’은 혼백에서 나온 말로 혼이 나갈 정도로 놀랐을 때 쓰는 말이다.
종묘는 정전이 가장 대표적인 건물이다. 길이가 101m에 달하는 가장 긴 한식 건물이기도 하다. 처음에는 5명의 왕을 모시려 했으나 조선 왕조가 500년간 이어지면서 왕과 왕비들도 늘어나자 옆으로 계속 이어 지었다고 한다. 모두 정전에 모시지 못해 비중이 좀 떨어지는 왕들은 옆 건물인 영녕전에 모셨다고 한다. 그래서 여기 오면 학창 시절에 배웠던 조선 왕들의 순서와 여기 모신 왕들의 순서가 다르다. 원래 조선 건국을 개성에서 하고 한양으로 옮겨 왔을 때 지어졌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다시 지은 것이다. 정전은 국보, 영녕전은 보물로 지정되어 있고 종묘 제례는 무형 문화재,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 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종묘는 분위기가 다른 왕릉과 다르다. 일단 잘 가꾼 나무가 많아 공원 같은 분위기인 것은 비슷하지만, 정전 앞에 이르면 단조로운 긴 건물과 넓은 공간에 분위기가 차분하다. 그래서 ‘멍 때리기 좋은 곳’이라는 것이다. 정전 앞에 서 있으면 생각이 차분해진다고 한다. 정말 묘한 차분함이 느껴진다.
조선 왕릉은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 되어 있으며 북한에 2기를 제외하고 40기가 대한민국에 온전히 보존되어 있다는 것이다. 종묘에 간 날 마침 서오릉에 갈 일이 있었다. 왕실도 신분에 따라 능, 원, 묘로 구분되어 있다는 것이다. 직계냐 아니냐의 차이이다. 종묘에서 조선왕릉에 대한 이해를 하고 가니 훨씬 도움이 되었다. 그러고 보니 강남에 있는 선정릉, 학창 시절 소풍 가던 동구릉, 양재꽃시장 쪽에서 성남 가는 길에 있는 헌인릉, 여주의 영릉과 명릉, 영월의 장릉, 군대 생활하던 곳과 가까웠던 파주의 공순영릉까지는 가 봤다. 서울에 가까이 있는데도 못 가본 정릉이나 태릉 등 아직 안 가본 곳이 꽤 있는 것이다. 그 외에도 남양주 사릉, 홍릉, 유릉, 광릉 등 이름도 생소하거나 어디 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해 못 갔다. 교통이 불편하기도 하고 가 봐야 비슷비슷하니 안 갔을 것이다.
“이제 제 라이벌은 나훈아씨예요. 한동안은 라이벌이 없었어요. 없는 동안에 저 혼자서 누나들을 많이 행복하게 해줬는데, 이번에 새 노래가 나온답니다(웃음).” 자신의 팬층이 가수 나훈아와 완벽하게 겹친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가수’ 이동준은 원래 운동선수였다. 그것도 1979년부터 태권도 국가대표였으며 1983년부터 1985년까지 3년 연속으로 세계선수권에서 미들급 금메달을 놓치지 않았던 톱클래스였다. 그러한 운동선수로서의 삶이 인생 1막이었다면 2막은 연기자였다. 30년의 2막을 내리고 이제 그가 선택한 인생 3막의 삶은 가수다. 지금이 가장 편하고 행복하다는 이동준(60)을 만나 그의 새로운 도전에 대해 들어봤다.
“이제는 배우 이동준보다는 가수 이동준으로 불러주는 게 좋아요. 늦깎이 가수지만(웃음). 큰 꿈을 꿔야 중간 정도라도 가지 않겠어요?”
나훈아를 라이벌로 삼은 ‘가수’ 이동준은 사실 2000년에 이미 자신의 이름을 건 음반을 하나 냈었다. 그러나 그때는 가수와 배우를 쉽게 넘나들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다. 방송국에서도 ‘이동준씨는 배우인데…’ 하는 반응이었다. 그래서 더 이상의 가수활동은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시대가 바뀌었고, 이제 이동준은 가수로서 본격적인 인생 3막의 무대에 올랐다.
“더 나이 먹기 전에 가수하길 잘했어요.”
노래 ‘누나야’가 워낙 잘나가고 있어서일까? ‘늦깎이 가수’의 얼굴은 밝았다. 차라리 후련하다는 심정마저 느껴진다 해도 좋을 것이다. 영화와 드라마에서 강인한 남성상의 대표적 이미지로 활약하던 그가 갑자기 가수를 선언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가수를 해야 하는 속깊은 이유들이 있었다.
노래는 나를 그 자리에서 행복하게 만든다
“우선 제 아들이 연기자니까 연기자 아버지로선 한발 물러나줘야겠다는 생각이 있었죠. 그리고 젊었을 때는 주인공을 했지만 나이를 먹었으니 이제 주인공을 못하는 것도 있고. 드라마 을 하면서 ‘이제는 내가 아버지 역할을 할 나이가 됐구나’ 싶었죠.”
그는 또한 워낙 노래를 잘 부른다고 소문난 연기자였다. 그 자신이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하고 부산, 미사리, 남양주 등 라이브 카페를 운영하며 직접 노래를 한 지 벌써 24년이 넘었다. ‘누나야’를 설운도가 곡을 써서 준 것도 그의 그러한 실력과 인맥을 반증하고 있다.
“그리고 연기는 불러줄 때까지 기다려야 하잖아요. 가수는 내가 일을 찾아서 할 수 있어요. 콘서트를 열어도 되고,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곳도 많고. 연기는 단체활동이라 개인활동을 하기에는 제한적인 데다 제작기간이 6개월이면 6개월 동안 한 팀이 되어 움직여야 하니 왠지 모를 심적 부담감이 있었죠. 그런데 노래를 하면 피드백이 빨리 와요. 관객과의 스킨십도 있고, 그 자리에서 즐거움과 행복을 느낄 수 있죠.”
가수 이동준으로 자리매김할 터
연기는 연기의 역할에 자신을 맞춰야 한다. 그 안에서 인간 이동준은 자신의 전부를 보여줄 수가 없다. 그러나 가수 이동준은 이동준의 원래 모습 그대로다.
“가수들이 저를 보고는 저러다가 말겠지 하더군요. 하지만 저는 그만둘 생각 안 했어요. 이제 연기는 접고 가수의 길만 가야겠다 생각할 정도예요. 내 인생인데 즐겁게 살아야 하잖아요? 노래를 하니 즐거워서 내 갈 길은 이거다 싶고, 연기할 때보다 가수로 전향해서 더 바빠요.”
그는 노래를 통해 자신을 자유롭게 만든다. 그의 노래에 대한 애정에 진정성이 느껴지는 것은 그래서일 것이다.
“성인 발라드 곡인 ‘미안해요’가 제 첫 번째 노래예요. ‘남행열차’를 만든 김진용씨가 작곡한 노래죠. 사실 제가 정말 좋아하는 노래예요. ‘미안해요’가 롱런을 위한 노래라면 설운도가 준 ‘누나야’는 ‘팍 뜰 수 있는 노래를 만들어줄게’ 해서 받은 것이죠. 또 김동찬 선생이 저에게 맞춰주신다고 해서 주신 곡이 ‘그날그날’이에요. 이 세 곡이 요즘 제가 공연장이나 행사장에서 주로 부르는 노래들이죠. 부지런히 공연을 하고 다니니까, 이렇게 좋은 노래들이 들어오네요.”
“이제는 베풀고 살아야지”
그는 요즘 가수로서의 삶뿐만 아니라 건축업자로서의 삶도 살고 있다. 경기도 남양주 수석동에 한강 조망권을 갖춘 고급 빌리지 ‘카스텔로 씨마’가 그것이다. 단지는 A, B, C 3개동으로 지하 3층~지상 4층 규모의 12가구다. 우아하고 세련된 외관과 차별화된 공간·구조로 설계해 입주민의 품격을 높이겠다고 한다.
“서울 압구정동에서 15분 걸리는 거리예요. 남한강 근교에 이런 풍광이 있는 곳은 없어요. 앞에 도로가 없어서 공기도 맑고. 모든 것을 최고급으로 제작 중입니다.”
가수 일을 하면서 혼자서 주택까지 짓는 중이라니, 힘들지 않느냐는 물음에 그는 자신이 밀어붙이는 타입이라고 설명했다.
“그래도 시행착오 없게 하려고 차근차근 진행 중입니다. 지난 세월 동안 나와 관계된 후배, 친구, 선배들이 많아요. 다들 고맙잖아요. 이제는 베풀고 살아야지. 이걸 지어서 자금이 모이면 베풀려고 해요. 지금까지는 내 장사를 하면서 베풀 시간이 없었으니까요.”
아들이 나보다 더 바빠졌으면
이동준의 아들 이일민은 아버지와 같은 연기자의 길을 걷고 있다. 한양대학교 연극영화과에 재학 중인 아들에게 그는 ‘서두를 필요 없다’고 말한다.
“나도 스물여덟 살이 돼서야 데뷔를 했으니까. 그에 비하면 아들은 이제 스물여섯 살이니까요. 기회를 보고 있는 중이죠.”
겉보기에는 화려하지만, 연예인은 기본적으로 자유계약직이기에 불안하고 힘들 수밖에 없는 직업이다. 잘되면 좋지만, 잘되기까지는 남모를 아픔과 시련이 많다.
“나는 그나마 순탄하게 연예인 삶을 살아온 케이스고 다른 사람들을 보면 진짜 생계형이 있어요. 종합예술인으로서 이 세계가 좋아서 일하는 게 아니라 가장으로서 먹고 살기 위해 일하는 걸 보면 안타깝죠. 그래서 아들에게 바라는 건 정말 정통 연기자로서 살아봤으면 하는 거예요.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미국에서 공부하고, 해병대 갔다 오고 해서 스펙이 훌륭하죠, 기다려줘야죠. 그런데 아들에게 미안한 게, 제가 더 바쁘잖아요. 아들은 나만큼 바쁘지 않으니까 그게 좀 미안하죠. 아들이 나보다 더 바빠졌으면 해요.”
대나무 매듭짓듯이 살다
어쩌면 인생의 세 번째 시기를 열어가고 있기에 갖게 된 여유일지도 모른다. 그에게도 여러 가지 삶의 굴곡이 있었다. 그의 삶을 소재로 한 영화 에 수십억 원의 제작비를 들였지만 흥행에서 실패한 일은 특히 큰 타격이었다. 그러나 그와 인터뷰하면서 마치 대나무 매듭을 짓듯이 살고 있는 것 같은 그의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남들이 생각할 때는 제가 영화에서 망했고, 인터넷에는 똥꼬쇼를 했네 뭐네 하지만 저는 돈이 있을 때나 없을 때나 변한 게 없어요. 망하기 전에는 돈이 끊임없이 들어왔어요. 그런데 힘들어졌을 때도 돈에 쫓겨본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일을 열심히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더군요. 영화에 실패하고 나서도 한 달 준비해서 부산에서 일하며 바로 수익 창출해서 나머지 빚을 갚았으니까, 어려움은 없었어요. 이제는 돈이야 뭐 많이 갖고 있으면 뭐해요. 노래 부르면 되는데(웃음).”
남자답게, 정의롭게 산다
“스케줄이 비면 주로 골프를 해요. 지방에 지인들이 워낙 많으니까 만나서 공 치고 노래하고. 운동은 계속하는 중이에요. 지금도 한 시간 반 정도 운동하고 왔어요.”
운동선수로서 자기관리도 철저하게 하는 그는 젊은 시절 11대 1로 상대했다는 무용담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2년 전에는 이종격투기 대회에 참가해서 자신보다 29세나 어린 선수와 상대해 이긴 적도 있다.
“감량은 음식과 운동으로 해야지 먹을 거 다 먹으면 안 빠져요. 건강은 자신하기보다 지켜야 해요. 소금은 줄이고 야채나 샐러드로 배를 채우고, 탄수화물은 차단하고 단백질을 먹어주며 물을 많이 먹어야죠. 그러면서 운동도 해야 하고요. ‘초기당뇨’ 징후를 발견했어요. 당화혈색소 수치가 6.0% 이상 나온 뒤부터 집사람이 음식에 신경을 많이 써주고 있죠.”
부산, 대구, 수원, 순천 등 전국 공연을 마치고 10월 청주에서 콘서트를 준비하고 있는 그는 요즘이 인생에서 가장 편하고 여유 있는 시기라고 말한다.
“전 이제 시작이에요. 3막이 시작됐으니까. 일단 내가 행복하고 상대가 행복해야죠.”
여백의 에너지가 넘치는 상남자
그에게 가수 이동준으로서의 미래를 물어봤다.
“토털 엔터테이너 이동준. 사실 제가 악기를 조금씩이지만 여러 가지를 다룰 줄 알아요. 그리고 ‘이동준’ 하면 라이브라고 각인이 됐어요. 라이브 카페를 운영하면서 거짓말 좀 보태자면 50만 명 정도는 제가 노래하는 모습을 봤을 거예요(웃음). 나중에는 어딘가에 들르고 싶은 장소를 만들어서 거기서 팬들과 함께 노래를 부르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인터뷰를 하는 동안 느낄 수 있었던 털털한 이미지처럼, 천생 남자인 그는 남자답게, 정의롭게 살자는 마음가짐만큼은 지금까지 지키면서 살아왔다고 자부했다.
“지금까지 살면서 주변에서 욕 안 하고 선배들이 인정해주니까 고맙죠. 그렇게 살았어요.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야죠.”
이동준의 인간미는 호쾌하다. 그의 인생 3막을 응원하게 되는 이유는 호쾌한 인간미가 전해주는 여백의 에너지 덕분일 것이다. 그것은 나이듦의 아름다움을 믿게 만드는 힘이기 때문이다.
또 달걀이 난리다. 얼마 전 AI로 산란 닭들이 떼로 매몰되는 바람에 달걀 품귀현상이 일어나 달걀값이 천정부지로 뛰었던 기억이 생생한데 이번엔 달걀에서 살충제 성분이 나왔단다. 먼저 유럽에서 살충제 성분이 검출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잠시 우리 달걀이 유럽보다 나은 것으로 여겼는데 아니나 다를까 우리 달걀에서도 여지없이 살충제가 검출되고야 말았다.
이런 파동이 일어나면 우리 사회는 매번 비슷한 패턴을 반복한다. 먼저 극심한 공포에 사로잡혀 사회적 공황상태에 빠진다. 소문은 걷잡을 수 없이 번져나가고 모든 제품이 대형마트 매대에서 사라진다. 시간이 지나고 생산 농가의 고통이 알려지면서 조금씩 소문의 진상을 알고자 한다. 그러나 한번 받은 심리적 타격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고 소문은 유령처럼 우리 주위를 맴돈다.
하긴 우리 같은 여성들 입장에서는 식품에 대한 의구심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가족과 자녀들의 건강과 직결되는 문제인 만큼 신경이 쓰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래서 이런 흉흉한 소문들은 대개 여성들을 숙주로 해서 퍼져나간다. 모임에 나가면 확인되지 않은 소문들이 공포와 함께 주변을 떠돌고 수다 속에 증폭된다. 드디어 그럴듯한 이론 체계로 포장된 하나의 음모이론이 완성된다.
무슨 독극물인 것처럼 과장된 소문의 진상을 알고 싶어 인터넷에서 기사를 검색해 보았다. 조선일보 환경 전문기자인 한삼희 논설위원의 글을 읽어보니 헛웃음이 나왔다. 과학적으로 접근해 보면 살충제 성분이 검출된 남양주 달걀을 기준으로 60kg 성인이 죽을 확률 50%가 되려면 달걀 323만 개를 먹어야 한단다. 실험동물의 실험 결과로 볼 때 성인이 하루에 670개씩 먹어도 문제가 없단다. 이 무슨 헛소동이란 말인가.
물론 우리가 먹는 식품은 안심하고 먹을 수 있도록 한 점 의혹이 없어야 한다. 그러나 사실이 이럴진대 지나친 과잉반응으로 수많은 달걀 농가가 피해를 보는 것도 공평한 일은 아니다. 지난번 AI 때도 익혀 먹으면 아무 상관이 없다고 그렇게 기사가 나왔건만, 수많은 닭이 산채로 땅속에 매몰되는 장면을 보면서 인간의 이기적인 잔인성에 소름 끼치던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좀 더 냉정하게 상황을 검토해 보면 인간의 자업자득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달걀 생산량을 늘리고 낮은 가격을 유지하려면 하늘도 볼 수 없는 좁은 케이지 속에 밀식으로 사육할 수밖에 없고, 그러다 보면 진드기 같은 기생충이 생길 수밖에 없고, 달걀 생산을 유지하기 위해 생산 농가는 살충제를 뿌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달걀 소비자가 살충제 없는 건강한 달걀을 먹으려면 달걀값을 세 배 정도 더 지불하면 해결되는 것이다.
우리는 너무 소문에 쉽게 휘둘리고 객관적인 진실이 밝혀져도 쉽사리 소문의 유령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광우병 사태가 그렇고 일본 방사능 물고기에 관한 소문도 매한가지다. 과학을 알면서도 이런 소문의 노예가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직 우리의 의식구조가 과학 이전의 전근대 상태에 머물러 있기 때문일까? 옛날 어린 시절 밤에 울면 어머니가 “저기 ‘에비’ 온다. 뚝 그쳐!” 하시던 말씀이 떠오른다.
매주 목요일 저녁. 기타 가방을 메고 드럼 스틱을 든 남자 다섯이 남양주의 한 대형 가구 상점에 출몰한다. 한두 번이 아니다. 이곳에 모여든 기간만 5년째, 이미 수십 년 전부터 같은 목적으로 수도 없이 만나왔다. 이들 중에는 40년이 더 된 사이도 있다. 으슥하고 인적 드문 곳에 자꾸 모여드는 이유는 철들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라고? 매주 같은 시간, 조건반사처럼 만나 연주하고 노래한다는 5인조 밴드 ‘철없는 아빠들’이다. 연습이 시작되면 철없는 아빠가 아닌 20대 꽃미남 밴드 시절로 돌아가는 것만 같다.
철없을 때 만난 친구들입니다! 하나, 둘 매장 셔터가 내려지고 어둠이 내려앉은 남양주 가구거리에서 기타 튜닝 소리가 울려 퍼진다. 철들 생각 없는(?) ‘철없는 아빠들’이 모인 곳은 베이스 기타 장시영씨가 운영하는 가구 매장. 이곳에 ‘철없는 아빠들’만의 전용 연습실이 있다. 머리가 하얗고 배가 나오고 손자까지 본 할아버지들이지만 연습실에 들어서는 순간, 나이는 숫자놀이에 불과하다. 드럼 치는 김영석(55)씨를 제외한 네 명은 58년 개띠로 김종민(리드기타), 한동호(보컬·기타), 이인섭(건반), 장시영(베이스)씨다. 초등학교, 고등학교, 군대 친구, 와이프의 대학 후배까지 제대로 얽히고설키다 밴드까지 만든 멤버다.
장시영 원래 어렸을 때부터 알고 있었던 사이예요. 기타 치고 음악 하는 거 좋아해서 갓 스 무 살 때부터 다들 밴드 경험이 있죠. 다시 음악을 하게 된 건 인생이 너무 지루한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어요.
김종민 술 먹고 밴드 불러서 노래를 부르다 보니 저희도 잘할 거 같더라고요. 차라리 우리가 모여서 밴드를 하자! 그때가 아마 서른세 살이나 서른네 살이었을 거예요. 아내들이 돈 안 벌고 맨날 음악만 하니 철없다고. 그래서 팀 이름이 ‘철없는 아빠들’이 된 겁니다.
김종민씨가 다시 기타를 잡게 된 건 장시영씨 때문이었다.
김종민 이 친구(장시영)가 원래 군대 선임이었어요. 제대하고 8년쯤 지났을 때 저에게 게리무어(Gary Moore)의 ‘스틸 갓 더 블루스(Still got the blues)’를 들려줬어요. 그걸 듣고 정말 나자빠진 느낌이었습니다. 없는 형편에 게리 무어가 쓰던 기타를 샀어요. 심취해서 계속 기타를 치고, 그전보다 더 잘하고 싶어졌어요. 그러다 그룹을 만들겠다 했을 때 인섭이가 합류했습니다.
지금은 건반, 관악기, 퍼커션에 코러스까지 담당하는 이인섭씨. 밴드에 들어올 당시 다룰 줄 아는 악기가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건반을 치더니, 플루트에 코러스까지 넣을 줄 아는 밴드 알짜배기로 성장했다.
이인섭 피아노 전공자처럼 할 수는 없어요. 주로 기타 코드를 보고 연주하고 전주곡 같은 것이 있으면 열심히 배우려고 하는 거죠.
어린 시절 만난 사이이다 보니 각자의 직업도 다양하다. 보컬 담당 한동호씨는 부동산임대업을, 기타 치는 김종민씨는 외국계 자동차 회사 이사다. 베이스 장시영씨는 얘기했다시피 가구업을 하고, 건반 이인섭씨는 성형외과 의사, 드럼 치는 김영석씨도 개인사업체 대표다. 매주 모여 연주 연습을 하다 보니 나이를 어디로 먹는지 다들 잘 모르겠다고 입을 모은다.
장시영 흔히 얘기하는, 고리타분하게 남의 일에 참견하는 꼰대 성향은 없어요. 음악 하는 친구들과 대화하고 항상 웃고, 즐거운 시간을 보냅니다. 그러고 싶어서 음악을 하는 거거든요.
생활이 힘들다거나 경제적인 부분에 대해서 서로 대화하지 않아요. 이들의 전용 연습실은 방음 시설과 장비 면에서 전문 밴드의 것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는 수준이다.
장시영 집사람은 제가 여기서 연주하는 걸 좋아해요. 아내는 음악에 둘러싸여 살아왔기 때문에 음악이라면 긍정적이죠. 연습실 만들 때 배려를 많이 해줬습니다.
한동호 그 전에는 돈을 주고 연습실을 빌려서 사용했어요. 그런데 왜 이곳으로 왔냐면 저희가 매번 전문 연습실을 사용했던 것이 아니거든요. 방음이 안 돼 있으면 시끄러우니까 장소 구하기가 어려웠어요. 여기는 방해가 안 되니까 좋죠.
김종민 에피소드가 있어요. 송파의 한 지하 연습실에서 연주를 하는데 교회에서 예배 보던 분들이 찾아와서 시끄럽다며 저희더러 마귀라고 하더라고요. 정말 그곳에 교회가 있는 줄 몰랐어요. 드나드는 길이 달랐어요. 그래서 더 열심히 연주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정말 웃겼어요(웃음).
남양주 연습실에 온 이후로는 누구 눈치 볼 일 없이 음악에 몰두할 수 있어서 좋다. 지금까지 철없는 아빠들이 연주했던 음악은 약 150여 곡. 공연을 통해 관객들에 연주 실력을 검증받은 바 있다. 올 가을쯤 장시영씨의 처제가 소속해 있는 밴드와 같이 공연할 계획이라고.
장시영팀은 자작곡도 있고 해서 10월이나 11월 초에 공연할 생각으로 공연장을 알아보고 있습니다.
언제까지 연주할 수 있을까? 장시영씨는 이 질문에 대한 고민을 해봤다고 한다. 그때 한 생각은 밴드 중 누군가가 흥을 잃을 때 연주가 멈출 것 같다고.
장시영 우리가 언제까지 이 흥을 유지할까. 우리 중 누군가가 흥을 잃을까 걱정입니다. 어떠한 계기가 됐건 흥을 잃을까봐요. 독려를 많이 해주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 당장은 그 ‘흥’이라는 것이 떨어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듯싶다. 지금 그들의 흥이라면 70이 돼도 80이 돼도 끄떡없을 것 같다.
명칭이 항상 헛갈리는 곳! 은평한옥역사박물관이 맞는지 아니면 은평역사한옥박물관이 제대로 된 이름인지? 여러분은 어떻게들 알고 계시는지요? 오늘은 작심하고 그를 만나러 왔다. 그러나 그를 만나려면 삼가야 할 순서가 있다는 생각이다. 먼저 싸리문을 열고나 보자.
조선의 3대로를 아시는가? 큰길을 따라 서발, 북발, 남발의 삼발로가 조직되었으니 그중 한양에서 의주까지의 서로(서발)는 기발(말을 타고 이동)에 해당되는데, 바로 이곳 박물관 인근을 경유했던 것이다(구파발, 지명의 유래). 때문에 입구에서 처음으로 만나는 조선의 역참제도에 대한 내용은 빼놓을 수 없을 터이다.
유리판 아래로 생생한 발굴 현장을 재현해놓은 김자근동 묘를 스릴 있게 체험하는 잔재미도 느껴보며(현재 유적 발굴 과정에 있는 서울 은평구 이말산에서 발굴됨), 세종의 6남 금성대군(단종 복위에 가담했다가 32세의 나이로 죽임을 당함)을 모신 사당인 금성당(실제는 은평뉴타운 우물골 소재) 코너에선 무속신앙, 즉 샤머니즘에 잠시 빠져보기도 한다. 2층의 한옥 상설전시관으로 오르다 보면 계단길 벽면으로 전국의 한옥촌을 사진으로 만나볼 수 있으며, 한복체험 코너에선 끼리끼리 방문 인증샷도 남길 수 있다. 멀리서 온 객을 위한 대접이 이만하면 융숭한 편이다. 자, 이제 헛기침 한번 해볼 차례다. 그가 버선발로 반겨줄지 모를 일이다.
노을빛 치마에 새긴 가족사랑
슬하에 자식 아홉을 두었던 그, 그러나 그중에 여섯이 그만 병사하고 마는데 자식을 먼저 보내는 어버이의 그 마음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을까? 어디 그뿐인가?
“누리령 산봉우리는 바위가 우뚝우뚝, 나그네 뿌린 눈물로 언제나 젖어 있네.
월남리로 고개 돌려 월출산을 보지 말게, 봉우리 봉우리마다 어쩌면 그리도 도봉산 같을까.” 유배길에 전남 영암의 월출산을 바라보며 두고 온 집과 가족을 그렸을 그의 마음이 그대로 묻어나 있는 시다. 그러나 그는 지금 가는 이 길이 무려 18년간이나 지속되리라고 짐작조차 했을까? 참으로 헛헛한 독백이 아닐 수 없다.
“주인 없는 초당엔 적막만이 가득하고, 처마 끝에 방울방울 낙수지어 반기는가?”
지금으로부터 약 20여 년 전, 친구와 함께 초당에 들린 적이 있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길을 더듬어 그를 만나러 갔던 그 길, 한적한 초당 대청에 걸터앉아 낙수에 손 비비며 그가 만들었다는 연못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던 기억이 오버랩된다.
부부간의 애틋함, 자식을 향한 아비의 마음은 옛사람이라고 다를 리 없고 오히려 더하면 더했지 뺄셈은 전혀 아니라는 생각이다. 유배생활을 하던 그는 부인이 보내온 치맛자락을 재단하여 두 아들과 그 후손들이 간직하도록 아비의 당부를 글로 표현한 서첩을 만드는데 그중 3첩이 남아 있다(국립민속박물관 소장). 또 남은 천으로는 시집가는 딸에게 매화나무 가지 위에 두 마리 새가 앉아 있는 '매화병제도'를 그려줌으로써 다복한 가정을 꾸미고 집안이 번창하기를 기원했다. 바로 아버지의 이름으로.
“내가 강진에서 수년간 유배 중일 때, 부인 홍씨가 해진 여섯 폭 비단 치마를 보내왔다. 세월이 오래 흘러 붉은색이 퇴색되었다. 네 첩의 글을 만들어 두 아들에게 보내고, 남은 천으로 작게 장정하여 딸아이에게 보낸다.”
짐작하셨겠지만 오늘 필자가 만나러 온 분은 다산 정약용 선생이다.
하피첩, 은평에 오다
은 노을 하, 치마 피, 엮을 첩의 의미로 부인이 시집올 때 입고 온 붉은 치마가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색이 바랬음을 은유한 것으로 지어미에 대한 지아비로서의 마음이 절절하게 느껴진다. 그리 넓지도 않고 그렇다고 비좁지도 않은 기획전시실, 그 공간의 범위로는 감히 재단할 수 없는 선생의 마음과 정신은 결국 오랜 유배생활을 이겨내고 고향(남양주시 능내리)의 품으로 돌아오게 되고, 만년에도 저술을 놓지 않았던 선생은 회혼일(결혼 60주년 기념일)에 그만 세상을 떠난다. 생의 마직막엔 곁을 지켜준 부인이 있었으니 선생의 임종은 외롭지 않았으리라. , , 등 다산 사상의 핵심은 사회 현실을 바탕으로 제도와 법을 맞도록 바꾸자는 것이 그 골자로 정치 및 행정체제, 형률제도, 경제제도, 생산기술, 군사제도 등 제반 영역을 포괄하는 것이다. 선생이 저술한 책은 모두 503권이라고 한다. 인고의 세월 동안, 그리고 말년에도 평생 붓을 놓지 않았던 선생!
나는 어떤 남편이고 어떤 아버지인가? 또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본 기획전은 6월 11일까지 이어지며 문의는 은평역사한옥박물관으로 하면 된다.
등대는 배가 가야 할 길을 잡아주는 길잡이다. 사람들의 삶에도 삶의 방향을 알려주는 곳, 사는 동안 길을 잃지 않고 안전한 길로 갈 수 있도록 안내를 해주는 특별한 공동체가 있었다.
사람을 잇다. 마을과 마을을 잇다. 그리고 아름다운 하나의 공동체가 되는 곳, 이것이 학습등대의 스토리이다. 시민과 함께 배우며 성장하는 학습의 장으로 특별한 곳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성숙해나가고 있었다.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평생을 자기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하며 배우고 가르치는 보람으로 살수가 있다.
경기도 남양주시에는 한여름의 열대야에도 더욱 뜨겁게 돌아가는 곳이 있었다. 평생교육 프로그램인 학습등대 프로젝트가 전국적으로 주목을 받고 있었다. 이것은 성공적으로 안착한 프로그램으로서 지역사회의 평생교육모델로 평가 받고 있다고 했다. 지난 2013년에는 교육부가 주관하는 제10회 대한민국 평생학습대상 시상식에서 대상인 국무총리 상의 영예를 차지하기도 했다.
필자는 시의 부속센터인 다산서당을 찾아갔다. 배움. 새로움. 즐거움. 어울림 그리고 뜨거움으로 가득한 다산서당내 학습등대에서는 한창 그 열기를 더하고 웃음이 가득했다. 평생 학습 원, 지역 주민이라면 누구나 언제 어디서나 원하는 학습을 할 수 있는 곳이었다.
남양주시의 학습등대가 교육부에서 주관하는 평생학습의 대상으로 선정이 되면서, 등대를 세우게 되는 데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한다. 그 하나는 주민들이 주도적으로 학습활동을 통해서 지역공동체를 세우는 활동이고, 다른 하나는 주민들의 자치적인 학습활동에 대한 최대한의 다양한 행정지원을 해주는 것이라고도 했다.
시에서는 우선 10분내 학습등대, 20분내 주민 자치센터, 30분내 도서관이라는 슬로건으로 평생학습 인프라를 구축하였다. 또한 남양주의 특화사업으로 시민들의 학습권리를 누릴 수 있는 권리로 그 체계를 갖추고 있다. 지역주민들을 위한 지식 정보 문화공간을 마련하고 그 가치를 창출하며 주민들의 학습과 문화 및 그 지역의 높은 기대치를 위한 진정한 자치실현 및 문화욕구 충족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더구나 이러한 일들에는 평생학습을 실행에 옮기도록 도와주는 시청 산하 주민 매니저들이 있다. 그 들은 담당지역을 총괄하며 시와 연결을 하는일에 대표로 한다. 또한 수업을 함께 가르치며 터득해가는 수많은 지역출신 시민강사들이 있으며, 이들의 다양한 노력과 참여하는 주민들의 협동심들은 훌륭한 공동체 학습등대를 성공적으로 이루어내고 있었다.
이들은 모두 '평생학습의 꽃'이라 말할 수 있으며 시 행정의 철저한 교육을 받은 사람들로 구성이 된다. 이 같은 평생교육의 장에서는 수많은 지역주민들의 고용창출도 수없이 일어나고 있으며,주민들에게도 각광을 받고 있다고 했다. 현재 전국 각 시도에서도 '1.2.3 학습등대'를 배우기 위한 벤치 마켓팅이 이루어지고 있다고도 한다.
필자부부는 남양주시 지역주민으로써 이러한 일들에 자부심을 느끼게 되었다. 공동체의 훌륭하고 멋진 사업에 의미를 새기며 함께 동참하기로 마음도 먹었다. 가장 먼저 가까운 아파트 내에 있는 10분내 학습등대에 수업을 참여하기로 했다. 또한 운영위원이 되어 함께 이끌어 갈 것도 약속을 했다. 앞으로도 재능기부를 하고 남양주 시청에 정식으로 강사신청을 하여 봉사를 하는 시간들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꾸준히 발전하며 노력하는 자기개발의 사람들이 있기에 건강한 공동체의 하루는 활기가 솟아났다
경기도 남양주시에는 다산 정약용의 유적지가 있다. 유적지 내에는 그의 생가인 여유당과 선생의 묘가 있고 다산 문화 관, 다산 기념관등이 있다. 참다운 지식인을 대표로 하는 남양주시가 교육의 도시로 거듭난다.
다산 정약용, 한국학의 바다라 일컫는 조선후기 최고 ‘실학의 집대성자’라고도 한다. 19세기초 실학파의 철학적인 입장을 확립한 다산은 ‘다산 학’이라는 거대한 실학의 봉우리인 자신만의 독창적인 학문을 완성한다. 또한 천연두 예방법에 대한 체계적인 글을 썼던 의사이기도 하지만 르네상스적인 인물 이었다고 한다. 그의 관심은 놀라울 정도로 다양한 영역과 주제들에 이르렀다.
민중의 편에 섰던 그는 선구적인 사상가이며 저술가였으며 법학 가였다. 시인이면서 음악학자 또한 조선의 차 문화에 활력을 일으킨 조선 차의 연구자로 풍류를 즐기기도 했다. 그러나 다산은 단지 꿈꾸는 자만이 아니고 구체적이고 실천 가능한 해결책을 모색했다. 결국 오랜 세월 속에서 각고의 노력과 탐색으로 독창적이고 새로운 사회에 대한 비전이 탄생할 수가 있었다고 한다.
남양주시의 다산 문화 관에는 그에 대한 많은 저서들로 간단한 소개가 있으며 직접 체험 가능한 체험학습도 있다. 다산 기념관에는 수원 성 축조 과정에 쓰였던 거중기, 녹로 그리고 유배생활을 했던 강진, 다산 초당의 축소 모형 등이 전시되어 그의 위대한 업적들을 한눈에 볼 수가 있다.
그는 출세가도를 달리던 명문가의 고위관료였지만 반대파의 모함으로 억울하게 남녘의 외진 곳에 유배를 간다. 그러나 신세한탄이나 절망을 하지 않으며 오히려 어떠한 굴욕과 탄압 속에서도 용모를 단정히 하고 의로움에 기 죽지 않으며 마음만은 자유를 만끽하며 당당하게 살아간다.
산수를 벗삼아 하염없이 시간을 보내거나, 때로는 핍박을 받는 백성들을 향한 한없는 사랑으로 펼쳐낸 국가의 총체적 개혁서인 ‘경세유표’와 ‘목민심서’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익숙하게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그러나 부패하고 썩어가는 국가의 현실을 새롭게 바꾸고, 허물어진 주춧돌을 단단히 하는데 평생을 바친 다산에게 돌아온 것은 18년동안의 혹독한 유배생활뿐이었다.
그는 고향에서는 죽기 전까지 ‘먼 미래를 기다린다’는 사암(俟菴)이라는 호를 좋아했다고 한다. 그가 끔찍이 사랑했던 두 아들에게 보냈던 편지의 내용을 기술해본다.
“지식인이 세상에 전하려고 책을 펴내는 일은 단 한 사람이라도 그 책의 값어치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으면 해서이다. 나머지 욕하는 사람들이야 신경 쓸 것 없다. 만약 내 책을 알아주는 이가 있다면 너희들은 그가 나이가 많은 사람이라면 아버지처럼 섬기고, 설령 적대시하던 사람이라도 그와 결의형제를 맺어야 한다.”
이러한 내용이 근간이 되어 남양주시가 교육의 도시, 문화의 도시로 거듭나기를 기대해본다.
상고대는 기온이 내려가면서 대기 중의 수증기가 미세한 물방울로 변한 뒤 나뭇가지에 얼어붙은 것을 말한다. 밤새 내린 서리가 하얗게 얼어붙어 마치 눈꽃처럼 피었다는 의미에서 ′수상′ 또는 ′나무서리′라고도 한다. 우연한 기회에 잠시 만났던 상고대의 장관을 감상하면서 올 여름 무더위를 이겨보자.
경기 남양주군에 있는 군립공원 천마산(812m)에는 상고대가 엄청 크게 자랐다. 전날 녹아내리다가 밤에는 고드름으로 변하여 솜사탕처럼 매달려 있다.
수많은 등산객의 발길로 반질거리던 북한산 백운대(836m)가 두툼한 솜이불을 덮었다. 백운산장까지 눈이 녹아서 전혀 기대를 하지 않았던 상고대다. 평소 줄을 서서 오르내리던 등산로는 사람의 발길이 멈추었다. 겨우 등산객 한분 만나서 사진 한 장 남기고 하산을 서둘렀다. 내려오다가 뒤돌아보니 정상을 감쌌던 서리 이불은 온데간데없었다.
건너편 인수봉(811m)은 지나가는 짙은 안개 위에 솟았다가 가라앉는 뱃놀이를 하고 있었다. 멋있는 유람선을 타고 대양을 가로지르는 환상에 젖어보았다. “기다리자. 복스럽게 내린 눈이 내년의 풍년을 부른다는데!”
봄, 여름, 가을 암벽 등반가들이 북적거렸던 인수봉! 사람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는 광경에 경외감이 들었다.
경기 연천군에 있는 고대산(832m)은 북 쪽으로 철원평야와 비무장지대를 관망하고 있다. 경원선 신탄리역까지 기차여행이 재미있는 곳이다. 뜨끈한 커피 한잔으로 추위를 달랬다. 태양이 머리 위로 오르자 온산에 있던 상고대가 이불이 걷히듯 잠깐 사이에 사라져가는 황홀한 광경을 보았다.
눈이 많이 내렸던 몇 년 전 겨울에 이 친구들을 만났던 것은 큰 행운이었다. 상고대! 올 여름 더위를 이겨낼 마음의 선물이다.
불화살이 쏟아지듯 뙤약볕이 내리쬐는 7월의 풀밭. 살아 있는 모든 것이 질식할 듯한 폭염 속에서 저 홀로 화사한 선홍색 꽃을 피우는 야생 난초가 있습니다. 자신을 집어삼킬 듯 이글거리는 태양과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맞서기에는 힘이 부친 듯, 온몸을 비틀어 마지막 한 방울의 색소까지 짜내어 보는 이를 한눈에 사로잡기에 충분히 매혹적인 꽃다발을 선사합니다. 그리고 소리쳐 외칩니다. ‘나는 이름 없는 잡초가 아니라 7월의 야생화, 타래난초’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산으로 들로 우리 꽃을 찾아다니는 이들 중에 야생화의 아름다움에 빠지게 된 계기로 타래난초와의 만남을 꼽는 이가 여럿 있을 만큼 첫인상이 강렬한 야생 난초입니다.
그런데 첫눈에 사람을 사로잡는 타래난초의 매력은 동서의 구분이 없나 봅니다. “나는 지중해를 굽어보는 넓고 기름진 평원에서 이 꽃을 찾았다. 털이 난 늘씬한 자태, 솜털이 보송보송한 줄기에는 꽃들이 나선형으로 줄기를 잡았다. 꽃부리가 하나하나 열리는 품이 마치 항성의 궤도에 키스를 하는 듯하다.” 프랑스의 식물학자 이브 파칼레(Yves Paccalet)는 란 책에서 타래난초류의 하나인 스피란테스 스피랄리스(Spiranthes spiralis)를 처음 만났을 때의 감동을 전하면서 ‘님프의 하얀 젖가슴보다 더 아름다운 난’이라고 극찬합니다.
타래난초의 또 다른 매력은 국내 100여 종의 야생 난초 가운데 보춘화·옥잠난초와 더불어 자생지나 개체 수가 가장 많은 3대 난초로 꼽힌다는 점입니다.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높고 깊은 오지의 자생지를 굳이 찾아가지 않더라도 누구나 조금만 관심을 쏟으면 주변에서 만나 그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다는 보편성이 참으로 마음에 듭니다.
6월에서 8월 사이 양지바른 풀밭이나 묘지 근처 잔디밭 등지에서 10~40cm의 꽃대가 올라와 길이 4~6mm의 꽃이 이삭 형태로 다닥다닥 달리는데, 이때 꽃이 배열된 형태가 꽈배기처럼 나선형이어서 타래난초란 이름이 붙었습니다. 수십 개의 꽃이 한쪽 방향으로 연이어 달릴 경우 길고 가는 꽃대가 한쪽으로 쏠려 쓰러질 위험이 크기 때문에 나선형 꽃차례를 택했다는 게 식물학자들의 설명입니다. 그 결과 ‘똬리를 틀 듯 비비 꼬이다’라는 뜻의 ‘타래’라는 우리말을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는 셈이지요. 때문에, 처음 보는 순간 ‘예쁘다. 근데 이름이 뭐지?’ 하고 묻고서 ‘타래난초’라는 대답을 들으면 ‘아! 그럴듯하네’라며 고개를 끄덕이는 꽃이 바로 타래난초입니다. 꽃 색은 대체로 붉은색이지만 옅은 분홍색 등으로 다소간의 변이가 있기도 하며, 흰색의 꽃은 아예 흰타래난초라고 따로 불립니다.
Where is it?
앞서 설명했듯 전국이 자생지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야생화가 그렇듯 한번 알아보기 시작하면 여기저기서 흔히 만날 수 있는데 첫 대면이 어렵다. 타래난초 또한 초보자에겐 굉장히 귀하게 여겨지는 야생화다. 때문에 비교적 쉽게 만날 수 있는 곳을 찾아가는 것도 방법이다. 수도권 인근에서 알려진 자생지 중 하나는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천주교 소화묘원의 잔디밭이다. 인천 무의도 등산로 주변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다. 충북 괴산의 이만봉 아래 ‘분지제’ 제방은 흰타래난초의 자생지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