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건 없이 사랑할 수 있을까?
그런 사랑을 만나면 숙연해진다. 익은 벼처럼 머리를 숙이게 된다.
잘 아는 부부가 있다. 서로 깊이 사랑하는 화목한 가정이지만 부부의 신체적 결함으로 아이를 낳지 못했다. 아내는 보육원에 가서 모자라는 일손을 돕는 봉사로 아이들을 먹이거나 씻기는 일을 했다. 그러다가 그곳에 있는 한 남자아이를 눈여겨보게 되었다. 집에 돌아와서도 보고 싶고 자꾸 아른거렸다. 봉사를 시작한 지 6개월이 지나 남편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입양해서 아들로 키우자는 얘기에 남편은 강하게 반대했다. 자기 자식도 키우기 힘들어하는데 남의 자식을 어떻게 키우냐는 얘기였다. 그러나 아내의 끈질긴 설득에 남편은 결국 아이를 입양했다. 아이는 새 부모 밑에서 무럭무럭 잘 자랐다.
하지만 얼마 후 남편이 사업에 실패해 경제적으로 어려워졌다.
남편은 매일 술을 마시고 언어폭력은 물론 신체적 폭행까지도 서슴지 않았다. 또 남의 자식 가르치느라 힘들다, 왜 남의 자식을 자신이 책임져야 하느냐며 화를 내곤 했다. 견디다 못한 아내와 아이는 함께 가출을 감행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남편이 지나친 음주로 쓰러져 병원에 입원했다. 모든 검사를 마친 뒤 결과가 나오자 의사가 진찰실로 모두를 불렀다. 아내와 아들, 남편은 나란히 앉아 의사가 내릴 선고를 초조하게 기다렸다.
“환자분은 간경변이 중증입니다. 그냥 치료만으로는 가망이 없고 간 이식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마땅한 간을 찾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아들인 제가 하겠습니다.”
남편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간 이식을 자처하는 아들을 차마 바라볼 수가 없었다. 입양된 아들이었지만 세포 거부 반응이 없었고 오히려 유전적으로 상당히 일치하는 부분이 많았다. 간 이식을 마친 두 사람은 같은 병실에 누워 서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내가 너를 미워했는데도 왜 나를 위해 간을 내주었니?”
“내 아버지라는 것을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어요.”
그는 아들을 통해 사랑이 무엇인지, 또 조건 없이 사랑한다는 게 어떤 일인지 깨닫게 되었다. 사랑하기 때문에 무엇이든 할 수 있고, 아무것도 할 수 없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에 대한 시선을 거두지 않는 것, 그것이 사랑이 아닐까.
누구나 자신을 조건 없이 사랑해주는 사람 하나쯤 있기를 바란다. 허물도 사랑스럽게 봐주며 웃어주기를 바란다. 필자는 바라기만 하고 줄 줄 모르는 이기적인 사랑을 하는 사람인 것 같아 씁쓸하다. 사랑할 준비가 되었다는 것은, 조건 없이 감성의 움직임대로 따라갈 준비가 되었다는 것이리라. 밀당 없이 일단 후하게 마음을 내어보는 것에서부터 출발해본다.
누구에게나 견디기 힘든 삶의 아픔은 있다. 그러나 그 순간 들을 잘 참아 낼 때 드디어 환한 한줄기의 행복이 살며시 찾아온다.
어느 날엔가 초췌해진 친구가 찾아왔다. 무슨 일인가 싶어 자초지종을 묻기 시작했다. 친구는 말도 안 되는 일이라며 기막힘을 털어놓는다. 어제 바로 교도소에서 나왔다고 했다. 필자는 눈을 크게 뜨고 어이가 없어 그냥 듣기만 했다. 갑작스레 나타나 교도소를 운운하니 어안이 벙벙했다.
언젠가 친구는 남편의 외도를 눈치 채기 시작했을 때, 어째야 하느냐고 눈물로 하소연을 털어놓은 적이 있었다. 그때 필자는 그저 더 이상 알려고 하지 말고 일단은 참고 기다리라고 충고 아닌 충고를 했었다. 그리고 몇 달 만에 친구가 다시 나타난 것이다. 오랫동안 연락이 없어 잘 돼가는 줄만 알았다.
결국 친구는 남편의 내연녀를 만나며 일은 벌어졌다고 했다. 손아래 시누이를 대동하고 혈압이 올라 참지 못하고 내연녀를 만났다고 했다. 이런저런 실랑이 끝에 싸움이 벌어졌다. 나이 어리고 철이 없던 시누이는 그녀와 함께 폭력을 휘둘렀고, 그녀가 끼고 있던 다이어 반지까지도 강제로 빼앗았다고 했다. 자기 오빠가 해준 것이 틀림이 없을 것이라며 내놓으라고 했단다.
끝내 남편의 내연녀는 경찰서에 신고를 했고, 그 자리에서 폭력 및 물건 갈취 이유로 유치장으로 향했다. 그길로 한 달 남짓 교도소 생활을 했고, 돈으로 겨우겨우 빠져나와 이제야 나왔다는 것이다. 정말 이해하기 힘든 말도 안 되는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더구나 재판에까지 휘말린 친구는 더욱 난감하게 되어 시집에서도 코너로 몰리게 되었다.
시누이가 앞장을 섰건만 끝내는 남편은 물론이고 시부모들까지 알게 되어 졸지에 가해자로 몰리며 죄인 취급을 받게 된 것이다. 시부모는 시도 때도 없이 친구를 불러들여 무릎을 꿇리고 반성하도록 시켰단다. 여자가 참지 못하고 집안 망신을 시켰다며 온종일을 괴롭혔다고 했다. 시부모는 친구가 타고 다니던 차도 팔아 치었다. 차가있어 쓸데없는 짖을 하고 다녔다는 이유였다.
도저히 더 이상은 못 살겠다며 친구는 이혼을 강행했다. 필자도 더 이상은 어떻게 위로해줄 수가 없었다. 그저 며칠간 필자의 집에서 마음을 안정시켜 주는 일 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 후, 필자가 한국에 돌아와 25년 만에 친구를 만났다. 친구는 다행히도 다른 남편을 만나서 서로 의지하며 잘 살고 있었다.
그러나 전 남편은 결국 지난해 어이없이 저세상으로 갔다고 말을 했다. 그것도 자신의 넓은 땅에서 자기가 직접 운전하던 포클레인 차가 뒤집어져 그 밑에 깔려서 운명을 다했다고 했다. 가족들은 고사하고 부모님도 모르게 그 즉시 사망을 했다고 했다.모든 이야기가 끝나고 난 뒤, 필자는 무어라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성남에서 손가락 안에 들던 어마어마한 땅 부자였는데 결국은 비참하게 생을 마감한 것이었다. 그것도 전 부인인 친구의 딸 이 둘, 새 여자와 살면서 입양한 자식인 딸도 하나, 그리고 새로운 부인에게서 뒤늦게 낳은 아들 하나를 남겨두고 순식간에 떠났다고 했다.장례식을 치르자마자, 자식들과 새엄마 그리고 친구까지 합세해 재산 전쟁이 진행 중이라고 했다. 필자는 친구의 덤덤한 이야기를 듣는 내내, 가슴이 답답해 왔다.
도대체 현실이 아닌 소설 속에 이야기처럼 황당한 이야기들 모두가 마치 꿈속에서 웅성거리며 들려오는 것 만 같았다. 사람들은 왜 그리도 무지 속에서 앞으로 다가올 운명을 눈감은 채 그렇게 마구 살아가는 것인지 참으로 모르겠다. 갑작스레 지난날 친구가 화려하게 결혼하던 장면이 눈앞을 스쳐갔다. 성남의 부잣집 장남에게 시집을 간다고 온 동네가 떠들썩했었다. 그때는 그 누구도 그들의 등 뒤로 다가오는 불행의 그림자가 그렇게 서서히 다가오고 있음을 몰랐을 것이다.
이 세상에 태어나 불과 60년도 못 살고 갈 것을, 사람은 돈과 욕정과 독선 속에서 한 가정이 갈기갈기 찢어져 엉망진창이 된 것이다. 물론 남은 가족들은 돈이 있으니 다 살기 마련일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그 큰 불행이 가져다줄 해결의 실마리는 좀처럼 쉽게 풀리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는 아무렇지 않은 듯 이야기를 술술 토해냈으나, 지난날 친구 남편의 부유에 넘친 웃음 띤 얼굴을 떠올려 보며 생각하니 가슴이 저며 왔다.
그렇게 매몰차게 친구를 내쫓고 새 여자 만나 한평생 잘 살 것 같더니만 결국은 그렇게 먼저 가고 말았다. 아무리 순서 없이 떠나는 것이 인생이라지만, 숱한 페이지를 진하게 장식한 친구의 삶이 못내 씁쓸하게 다가왔다. 필자도 가끔은 뒤돌아보며 오늘을 살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 수 없이 다가오는 내일에 후회가 없으려면 더욱 열심히 순간순간을 맞이해야 할 것이다.
친구와 헤어져 돌아오는 길에, 다가오는 인생의 뒤안길이 부끄러워 자꾸 뒤를 돌아보았다.
글 소설가 윤정모
‘여성’, 페미니즘이라는 단어가 다시금 출판계의 뜨거운 화두가 되고, 다양한 관련 도서들이 베스트셀러 순위에 오르내리고 있다.
는 레슬리 모건 스타이너, 그녀 자신이 겪은 가정폭력의 피해 보고이자 에세이다. 하버드대 졸업, 와튼스쿨 MBA 수료, 워싱턴 포스트 근무 등등 그녀는 미국에서도 소위 엘리트라고 불릴 경력을 가졌고 그럼에도 연인의 폭력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고통 받는다.
인류역사상 거의 모든 세월 동안 여성은 약자였다. 현대에 이르러 다소 나아졌다고는 해도, 사회적 지위, 신체적 조건에서도 여전히 약자일 수밖에 없다. 가정폭력이 일어나면 절대다수의 피해자는 항상 여성인 까닭도 여기에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정폭력은 피해자를 가리지 않으며 규칙적인 예외가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저자는 자신의 깨달음 하나를 증언한다. 사회적 원리 구성인 ‘타인’, 내가 위기에 처했을 때마다 나를 구해준 사람들이 타인이라는 것, 일상에서는 항상 먼 거리에 있는 그들이, 별일 없으면 만날 일조차 없었던 그들이 경찰, 법정 대변인, 동창, 이웃의 누구라는 실명으로 나타나서 나를 돕고 보호해주었다는 것이다. 이웃과 타인, 그들이 바로 내가 몸담고 있는 사회의 구성원이자 나의 공동체라는 것을 느끼게 하는 부분이다.
그리고 저자는 소중한 메시지를 던진다.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사랑은 진실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지금은 헤어진 남편이 다른 여자를 만나 처음 자기에게 했던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상대를 유혹하고 있음을 보면서 복잡한 마음에 휩싸인다. 이 책을 읽는 동안 그녀가 당한 폭력만큼이나 그녀의 진실하고 예쁜 사랑이 짓밟힌 것이 내내 가슴 아팠다.
책을 덮으면서 생각했다. 사랑법에 서툰 세상의 모든 사람을 위해 ‘올바른 사랑법에 대한 교과서’라도 있었으면 좋겠다고.
*저자 레슬리 모건 스타이너는 워싱턴에서 태어나 하버드 대학교와 와튼 경영대학원을 졸업했다. 첫 직장 생활을 10대를 위한 메이저 잡지인「세븐틴」에서 시작하였으며 이후 존슨앤존슨, 워싱턴 포스트 등을 거쳤다. 또한 가족과 자신의 인생 사이에서 갈등하는 여성들을 위한 앤솔로지 『Mommy Wars』의 편집자이자 대리모 현실에 관한 책 『The Baby Chase』의 저자이다. 현재 세 아이 들, 네 마리의 고양이, 한 마리의 개와 함께 워싱턴에서 살고 있다.
우리나라가 초 고령화 사회로 곧 진입한다고 '어쩌면 좋아!' 하는 식의 각종 포럼이나 세미나가 많이 열리고 있습니다. 어제는 사회복지학과 교수와 다년간 복지관에 근무한 관장님이 연사로 나오는 세미나에 참석했습니다. 주제발표를 들어보면 학술 발표장이고 노인들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고발장(場)이였습니다.
교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성공적 노화란 질병과 장애를 피하고 높은 수준의 인지적, 신체적 기능을 유지하며 활기찬 인간관계 및 생산적 활동을 통하여 삶에 대한 적극적 참여를 유지하는 것이라고 목청 높여 주제를 발표 합니다. 물론 그럴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말들이 노년을 살아가는 노인들에게는 들으나마나 뻔한 소리고 공허하게 들립니다. 나는 속으로 너 늙어 봤냐? 나 젊어 봤다. 라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노인복지관에 오시는 노인 분의 평균 연령이 79.3세라고 합니다. 복지관 관장님이 이 분들의 모습을 말하는데 나이든 내가 그 자리에 있기가 참으로 민망했습니다. 노인들이 경로식당 줄서는 문제로 서로 다투고 경찰을 부르고 행사기념품을 받고 다시 줄서서 또 받으시고 서로 싸우고 복지관 바둑알 가져가시고 없다고 새로 사 달라 하신답니다.
화장실 LED등을 빼가지고 집에 가져가시고 물통을 배낭에 담아 오셔서 복지관 정수기에서 물 받아 가시고 복지관 화장실용 휴지를 통째로 들고 가시는 분도 있다고 합니다. 초복 날 식당 대기 줄에서 새치기 막는 여직원 빰을 때리고 복지관 바자회 물품 모아놓은 것 가져가시기도 한답니다. 이를 듣는 대다수 40대의 중장년의 청중 표정에서 어쩜 노인들이 그럴 수가 있어 ! 나는 절대 그러지 않는다는 조소의 비웃음이 번져 갑니다. ‘창문을 넘어 도망친 백세 노인’이란 연극이 인기몰이 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청중으로써 나에게 발언권이 주어져서 내가 말했습니다. 노인문제를 다루는 세미나에 노인 발표자가 없는 것을 우선 시정 건의 했습니다. 노동문제를 다루는데 노동자 없이 사용자끼리 공청회 하는 형국입니다. 노인 문제를 다루는 세미나에는 노인을 한 사람 정도는 구색 맞추기 차원에서라도 꼭 끼워 달라고 했습니다.
사람 사는 곳에 갈등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다섯 살 유아원 아이도 싸우고 학교폭력도 있고 승려나 목사님들도 서로 싸웁니다. 노인이라 하여 전부 성인군자 같기를 바라서는 안 됩니다. 노인 복지관 평군 연령이 79세라면 절반은 80이 넘은 사람입니다. 이 분들은 6.25를 겪으며 산업현장에서 조국 근대화에 한평생을 바친 사람들 입니다. 가난해서 물자절약이 몸에 배인 분들입니다. 본능적으로 무엇을 챙기려하고 가벼운 치매증상도 있을 수가 있는 나이 입니다. 우리가 보듬어 주어야 할 노약자들이지 손가락질 하며 흉볼 대상이 아닙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노인이 되면 지하철 공짜에다 고궁이나 문화제 관람 공짜 극장 할인 등 살판났다고 비아냥거리는 젊은이들이 있습니다. 젊은 사람이 낸 세금으로 노인들이 복지라는 이름의 버스에 무임승차 한다고 세대 간 갈등 운운 합니다. 나는 좀 달리 생각합니다. 우리가 남의 집에 세 들어가면 매월 일정액의 월세를 내야 합니다. 지금의 근대화된 집을 만든 기성세대에 젊은 세대들이 세 들어 살고 집세를 낸다고 봐야 합니다. 지금도 아프리카 난민들을 보면 우리의 선배님들이 고생으로 이 만큼 만들어 진 집에 우리는 편안하게 세 들어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를 먹여주고 키워준 부모에게 자식이 봉양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개인이 다 못하니 개인은 세금을 내고 국가가 대신 하는 것이 사회보장 제도입니다.
OECD국가 중 노인 자살률1위 노인빈곤 1위가 우리나라입니다. 이제 갓 68세가 된 중학교 교감 출신 여성분이 있습니다. 남편의 병 치례로 전 재산을 다 날리고 가정형편상 계속 일 하기를 원합니다. 컴퓨터와 외국어를 잘 하여 보수는 적어도 취업할 곳이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번번이 서류 불합격, 면접 불합격을 당하고 있다고 하소연 합니다. 심지어 정부지원 교육을 받으려 해도 65세가 넘었다고 퇴자를 놓는다고 울상입니다. 나이 65세가 넘으면 갑자기 바보가 된 것 같은 기분이고 이방인 취급당하고 바보를 만드는 세상이라고 울먹입니다.
사실 나이가 75세가 넘으면 마땅히 갈 곳이 없습니다. 복지관이나 공원의 벤치로 몰려나오는 노인 분들을 우선 이해해야 합니다. 봉사활동도 75세가 넘으면 다칠까봐 도와주는 것도 고맙지 않다고 손 사레를 칩니다. 75세가 넘으면 눈과 귀는 노화되고 허리는 굽고 몸은 굼뜨고 판단은 흐려집니다. 생산대열에 참가하기가 어렵습니다. 이런 분들을 보고 놀고먹는다고 세대 간 갈등을 부추길 것이 아니라 우선 노년의 신체 변화를 이해하고 보듬어주어야 합니다. 너의 젊음이 네가 잘나 받은 훈장이 아니고 나의 늙음이 내가 지은 죄 때문에 받는 벌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심리치료의 세계적인 권위자 앨리스 밀러가 쓴 "사랑의 매는 없다"라는 책을 읽고 고개를 끄덕였다. 부모들은 "아이를 사랑하기 때문에" 매를 든다고 한다. 그런데 부모에게 두들겨 맞으면서도 그것을 "사랑"으로 받아들여야 할 때 아이가 억누를 수밖에 없던 흥분과 분노, 고통을 어른들은 모른다. 아이는 미움 받고 싶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감정을 속이고 그것을 받아드리는 복종의 길을 택한다.
시간이 지나 어렸을 때 왜 맞았냐고 물어보면 "제가 잘못 했을 거예요 어릴 때 제가 장난이 심했거든요" 왜? 이렇게 되는가? 저자는 그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애정 어린 관심 대신 학대와 무시를 받고 자란 아이는 자신의 고통을 당연히 자기 잘못의 결과라고 받아드리는 데만 익숙해지고 자신의 감정이입 능력을 잃어버린다. 즉 자기 자신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며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들이 겪는 비극의 본질은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이중적인 삶을 영위한다는 것이다." 알게 된지가 30년이 훌쩍 넘은 친하게 지내는 이웃이 있다. 이상한 것은 그 집의 남편이 고위 공무원을 지낸 사람이다. 그런데 8살 아래 아내한테는 우리가 옆에서 듣기에도 지나칠 정도로 욕을 얻어먹는다. 반말은 당연하고 아내가 기분이 나쁘면 남편에게 " 너, 임마" 이런 수준이다. 우리 앞에서도 공공연히 남편을 구박하여 듣기가 민망할 정도다. 별로 잘못 하는 것도 없는데 남편이 말만하면 우리 앞에서도 말꼬리 잡고 행패 수준의 말을 한다. 남편이 어떻게 참고 사는지 의아했지만 젊은 아내와 사니까 사랑스러워 저런 욕도 애교로 듣나 보다 했다.
이 책을 읽고 나니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남편은 어릴 때 아버지에게 지독히 매를 맞았다 했다. 스스로 죽으려고 목에 낫을 갖다 댄 적도 있었다. 강한 사람에게는 비굴하게 죽어지내는 것이 몸에 밴 습성이 된 것이다. 아내도 첨엔 시집 와서 박봉의 남편에 시동생 여럿 건사하느라 투정을 부렸단다. 점차 투정의 강도가 높아져도 욕설과 매에 길들어진 남편은 이걸 사랑으로 믿어 왔다. 이 책에서 "코란에 여성의 할례라는 잔인한 관습을 인정하는 구절이 한 군데도 없다는 사실을 밝혀냈지만 그 의식이 계속되는 것은 할례를 당한 어머니와 할머니들이 자신들이 과거에 경험했으나 인정받지 못했던 고통을 딸과 손녀들에게 물려주어야 한
다고 고집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오늘날에도 10살 무렵에 클리토리스를 제거당한 여성이 무수히 많으며 또 그들 중 다수는 이러한 관습을 옹호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래전 이야기지만 재혼한 남자가 의붓딸을 상습 성폭행했다. 아니 어머니가 왜 막아서지 못했는가? 어머니의 말에 맥이 빠졌다. "나도 그 남자가 무서웠어요. 말을 안 들으면 죽인다고 했어요." 어릴 때부터 폭력에 길들여지면 저항력을 상실해버린다. 이 책에서 히틀러, 스탈린도 어린 시절 폭력으로 자라 이중인격자가 되었다고 했다. 스탈린은 알콜 중독자인 아버지의 외동아들이었는데 매일 아버지에게 심하게 맞았다고 했다. 언제 어느 순간에 아버지 손에 죽을지 모르는 목숨이었다. 그가 억눌렸던 극단적인 공포는 어른이 된 후 편집증, 곧 모든 사람이 자기 목숨을 노린다고 생각하는 망상으로 나타나 1930년 수백 만 명이 강제 수용소로 추방되거나 처형을 하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아이들을 "꽃으로도 때리지 마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아프리카, 동남아 등 고통 받는 아이들을 보면 답답하다. 때리고 학대하는 것이 너무 상습화 되어 있어 때리는 자도 맞는 아이도 길들여져 있을 뿐이다. 우리나라도 아직 매 맞는 아이가 많다. 매 맞은 아이가 자라서 또 매를 든다. 아무런 죄책감을 못 느끼는 게 문제다. 어렸을 적 할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내가 자랄 때 우리 아버지가 너무 무서웠다. 술만 먹고 오면 우릴 때렸다. 난 자식을 절대 때리지 않겠다고 맹세를 했다." 정말 할아버지는 아버지를 때리지 않았다. 당대에 매의 뿌리를 끊은 것이다. 이 책을 읽고 다시 생각해보니 할아버지가 위대하다고 느꼈다.
어릴 때부터 우리 엄마는 영화관에 가실 때마다 필자를 데리고 다니셨다.
그래서일까? 필자는 영화 보는 걸 무척 좋아한다.
영화라면 장르에 상관없이 다 좋아하지만 요즘 많이 나오는 주제인 좀비라던가 와장창 때려 부스는 영화는 별로이다.
특별히 좋아하는 영화가 많지만, 영화를 생각하면 어릴 때 보았던 아름다운 한 장면이 먼저 떠오른다.
어떤 영화였는지는 기억에 없어도 한겨울 예쁜 아치 모양의 다리 밑에서 한껏 차려입은 남녀가 스케이트를 타는 모습이다.
남자들은 정장을 차려입었고 여자들은 허리가 잘록 들어간 긴 치마의 투피스 차림으로 모자에 깃털까지 아주 멋을 내었다.
꽁꽁 언 다리 밑 강에서 둥글게 원을 그리며 얼음을 지치는 선남선녀의 모습은 너무나 낭만적인 풍경이어서 어른이 되었을 때까지도 그 장면이 머릿속에 남아 잊히지 않았다.
요즘은 좀 바쁜 일이 있어 편안하게 영화나 드라마를 볼 시간이 없었지만, 언젠가는 시리즈물을 앉은 자리에서 네, 다섯 편이나 계속 본 적도 있을 정도로 필자는 영화 보기를 좋아한다.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재미있는 모임에 참석하는 기회가 있었다.
이번 모임에서는 영화에 대한 이야기와 강의하신 선생님이 선정해 오신 영화를 한 편 감상했다.
강사 선생님은 해리슨 포드가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와 스타워즈 등 수많은 영화에 출연했지만, 이 영화에서 가장 순수하고 매력적이었다고 평을 하셨다.
제목은 ‘위트니스’로 목격자라는 뜻이다.
첫 장면은 매우 목가적이고 아름다운, 자연의 풀이 바람에 일렁이는 서정적인 풍경으로 시작되었다.
미국에 청교도처럼 문명을 거부하고 자신들만의 삶을 고수하며 살아가는 집단으로 ‘아미쉬’ 라는 사람들이 있는데, 독특한 문화를 가지고 모여 살며 현대문명과는 동떨어지게 전기나 TV, 자동차, 냉장고 등 문명의 이기를 사용하지 않고 폭력과 성 등 욕망 적이며 선정적인 것에 거리를 두고 농사를 지으며 엄숙하고도 평화롭게 그들만의 자연적인 방식으로 살아가는 집단이다.
이들은 어떤 폭력도 원하지 않아 주거지를 벗어난 지역에서 그들을 모욕하거나 놀리는 사람들에게도 절대 대적하지 않고 묵묵히 당하고만 있으니 아무리 평화를 위해서라지만 부당하고 답답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느 날 남편이 죽어 미망인이 된 엄마 ‘레이첼’은 어린 아들 ‘새뮤얼’과 난생처음 ‘아미쉬’를 떠나 볼티모어에 사는 친척을 찾아보기 위해 기차를 타고 여행을 떠나게 된다.
열차를 갈아타기 위해 필라델피아 역에 잠시 머무르는 동안 어린 아들은 화장실에서 살인을 목격하게 된다.
살인사건을 신고했으니 아들 새뮤얼은 목격자로 경찰서에 오게 되고 형사 ‘존’이 담당하게 된다.
범죄자 목록을 보여주어도 어린 목격자는 지목하지 못하는데 경찰서 내의 장식장 안에 트로피를 들고 활짝 웃는 사진의 흑인 형사를 보고 가리킨다.
‘존’은 놀라며 얼른 그의 손가락을 감추어 준다. 소년이 가리킨 사람은 동료 형사였다.
엄마와 아들을 보호하기 위해 집으로 돌려보낸 후 조사를 하던 중 동료 형사가 마약을 빼돌리고 살인까지 한 걸 알게 되고 부장에게 보고하지만 실은 부장이 주범이었다.
사건을 조사하던 중 총을 맞고 부상당한 상태로 차를 몰아 찾아든 곳은 아미쉬 마을 레이첼 집 앞이었다.
우체통을 들이받고 기절한 그를 시아버지와 레이첼은 정성을 다해 간호하고 회복시킨다.
미망인이 된 그녀를 사모하는 아미쉬 남자가 있었지만, 어쩔 수 없는 운명으로 그들은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존은 그 마을이 답답하고 동화될 수 없음을 안다. 어느 날 건강을 회복한 존이 망가트린 우체통을 고치는 걸 보게 된 레이첼은 그게 무슨 뜻인지 느끼고 이별을 감지한다. 그녀는 평소 머리에 쓰고 있던 보닛을 벗고 그를 찾아간다.
아미쉬 마을 일을 도우며 지내던 어느 날 악질 부장과 형사가 찾아온다.
나쁜 형사를 물리쳤지만, 존은 부장에게 인질로 잡히고 만다. 어린 소년이 위험을 무릎 쓰고 종을 울려 아미쉬 남자들이 몰려오고 경찰도 출동해 부장형사는 체포된다.
이제 떠날 시간이 되었다. 필자는 존이 그 마을에 남아 레이첼과 영원한 행복을 찾든지, 레이첼이 존을 따라나서 도시생활을 하게 될 줄로 알았는데 결국 레이첼은 평생 살아온 대로 엄격한 아미쉬 마을에 남고 존은 도시로 돌아간다는 이야기이다.
서로 다른 세계를 살아온 그들이 동화될 수 없는 생활에 질척이지 않고 깔끔하게 헤어진다는 이야기가 가슴이 아프면서도 신선하게 다가왔다.
필자라면 사랑하는 남자를 따라 마을을 떠났을 것 같은데 역시 살아온 방식을 버릴 수 없었던 연인이 안타깝기만 하다.
선생님의 말씀대로 해리슨 포드의 매력이 한껏 돋보인 신선한 영화를 한 편 보았다.
필자는 1944년 2월 16일 태어났다. 당시는 각박한 삶의 시대이기도 하지만 여명이 바로 문밖인 시기이기도 하였다. 어머니는 “2차 세계대전 막바지로 일제가 최악의 모습을 보였던 시기라 민간의 식량이 부족할 대로 부족했기 때문에 산모가 영양을 충분히 공급받지 못했다. 애를 낳았는데 자라지 못하여 큰 쥐만 하더라”는 말을 곧잘 했다. 좋은 점이라면 출산이 무척 쉬웠다는 것이다.
돌 지나고 6개월이 되어 나라를 되찾았는데 우후죽순의 지도자들과 새로운 정치ㆍ사회 조류가 물밀듯 쏟아져 들어왔다. 급변하는 시대에 걸맞는 야망을 가진 사람들의 시대였다. 우선 산다는 것으로도 허덕이는 서민의 삶은 더 어렵고 고달팠다는 기억이 희미하지만 있다. 특히 대구의 10.1사건 때는 좌파의 폭력을 피하여 한적한 곳으로 피신하는 아버지를 따라 거처를 옮겨야 했었다. 아버지는 한국전쟁 전 해에 병사하고 말았다.
취학 전 여자 아이부터 고등학교 2학년인 아들, 두 딸 아이에 필자까지 네 명의 자녀들이 일터 없는 어머니에게 맡겨진 부양가족이었다. 대구 중심가에서도 더러더러 초가지붕이 보이는 시절 기와집이 필자 집이라 가난에 대한 물질적인 아픔은 없다. 필자의 가난은 끼니를 거르는 가난은 아니었고 문화 욕구에 대한 가난이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낀다, 절약한다, 쓰지 않는다는 방어소비에 집착했다. 세금, 교육비, 식비 외에는 돈을 쓰지 않았다. 삶을 지탱할 수 있는 지팡이는 자녀를 지켜내야 하는 모성본능과 체면과 자존심뿐이다.
그래서 어머니는 돈 안 드는 놀이로 우리와 시간을 보냈다. 작은 돌 주워 하는 공기놀이, 반들거리는 흙마당에 가느다란 선을 귿고 하는 땅뺏기, 선교사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은 탄력성 있는 공으로 삼박자 노래 부르며 다양한 모양으로 공차기 등이었다.
다만 책에는 아끼지 않아 집에 책이 풍부했다. 그래서 필자는 동화책은 물론 소설책도 읽을 수 있었다. 아마도 ‘소공자’, ‘소공녀 같은 외국의 책들도 그 무렵에 읽은 것 같다. 책 내용 가운데 무슨 소리인지는 모르는 게 태반이지만 독서는 지루한 시간을 즐거운 시간으로 바꿔주는 마법 상자이었다. 언니는 ‘태양계’란 이름의 동네 구멍가게 겸 책대여점에서 부지런히 신간잡지를 빌려왔다. 필자는 이것도 열심히 탐독했다. 10대를 위한 잡지 ‘학원’은 한 회도 빠지지 않고 읽었다. 연재된 조은파의 ‘얄개전’은 익살스런 행동이 얼마나 기발했던지 지금도 흥분이 느껴진다. 익살의 세상이 휴전 직후의 가난과 닫힌 사회에 답답해 하는 청소년에게 스트레스 분출구 역할을 했다. 이상스러운건 대구 시절 어떻게 넉넉한 책이 주어졌던가 하는 것이다. 한참 성장기의 아동이었을 때 세 끼니의 밥만으로 채울 수 없는 이채로운 먹거리에 대한 허기가 가끔 기억나지만 놀이와 독서에 대한 허기는 없었다는 기억이다. 특히 필자 집은 새 책 살 형편이 아니었는데 무슨 돈으로 책을 샀는지 궁금하다.
고등학교 시절은 격변의 시기다. 3.15부정선거를 고등학교 1학교, 4.19혁명을 고등학교 2학년, 5.16군사쿠데타를 고등학교 3학년에 맞은 것이다. 특 , 5.16군사쿠데타로 집권한 군사정권은 일사천리로 대학입시제도를 무 토막내듯 확 바꾸어버렸다. 국가고시 점수를 개별 대학 입시에 100% 반영하고 각 대학은 오로지 체력장과 면접만 시행했다. 그런데 필자는 제도 변경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체력장의 한 과목에서 완전히 빵점을 먹은 것이다. 할 수 없이 대구 한 대학의 약학과에 진학했다. 그러나 서울로 진학하고 싶어하는 열망은 잦아들지 않았다. 결국 다음 해에 서울 연세대학으로 튀었다. 약학과 팔촌쯤 되는 화학과였다.
필자는 18년 동안 내륙의 소도시 대구서 살았다. 어디 여행간 적도 없었다. 그러니 대처에 대한 선망이 강할 수밖에 없다.
필자는 원래 가족과 함께 대구의 교회를 다녔는데 서울로 옮기면서 교회도 다른 곳으로 옮겼다. 교회를 옮기자 가슴에 한 줄기 신선한 바람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필자는 YMCA에서 하는 ‘대학생을 위한 기독교 사상 강좌’를 들었고 일요일에는 연세대학 교회를 출석했다. 당시 필자는 서울에서 얻을 수 있는 것들에 가슴 벌렁거렸다. 기독교가 기성복이 아닌 시대별 노력과 아픔 및 정서를 담아 걸어왔다는 것, 큰 테두리에서 문화와 사회 및 역사를 배경에서 성장했다는 것이 이해되기 시작하였다. 이 이해는 인간, 고고학에 대한 호기심을 안겾줬다. 또 종교와 인간관계, 역사를 만들어 가는 인류 복합체로서의 인간, 생각하는 존재로의 인간 등 참으로 많은 분야의 인문학적인 호기심도 갖게 했다.
전공이 화학인데 인문학에 홀딱 반하였으니 이 노릇을 어쩌란 말이냐. 그렇다고 또 전공을 바꿀 수도 없다. 이미 약학과에서 화학과로 한 번 바꿔서다. 덕분에 대학의 전공 성적표는 엉망이다. 이 성적표 때문에 졸업 후 20년 동안 대학을 말하지 않는 결백증이 있었다.
71년 4월 5일 식목일 공휴일에 결혼했다. 그리고 80년엔 아프리카 수단에서 1년 간 살게 된다. 고온 건조한 나라 수단은 정부의 정체가 공산국가인지 자본주의 국가인지를 구별할 필요가 없는 산업의 불모지대다. 수단은 남북한 공관이 공존하는 나라다. 포장되지 않은 고속도로를 달리다보면 소나 양같은 동물들이 차에 치여 죽은 모습을 쉽게 보는데 단 시간에 건조되어 부패하지 않고 박제가 된 모양을 본다. 중동에서 제왕이라도 죽으면 그날로 매장하는 문화는 과학적인 이유가 있다.
그 척박한 땅, 공기 중에도 물기라고는 없는 갈증의 땅 바위틈에서 자라나는 초록의 생명체를 볼 수 있는데 생명력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실감하였다, 생명의 주인은 따로 있다는 생각을 해다. 사람은 태양열에 지치고, 영국의 지배 200년 동안 문명인의 안면무치 이기심에 착취당하면서 비옥한 땅이 물을 만나지 못하여 석녀처럼 생산이 불가능한 지독한 가난으로 기력이 없다 아이들의 손으로 밀쳐도 무너질 것 같다. 개를 싫어하는 무슬림의 나라에서 들개들은 늘씬하게 잘난 모양이고 기름기까지 돈다. 떼 지어 다니는데 들개 떼가 수단인보다 더 위풍당당해 보인다.
우습게도 한 대접의 물로 목욕하는 물이 귀한 나라, 상수도도 전기도 없는 그 곳에서 필자는 공짜로 미터기 없는 전기 물 풍족히 쓸 수 있었다. 핫(hut)이라는 원두막만한 집에서 살고 있는 원주민의 땅에서 필자의 사택은 큰 저택쯤으로 여겨진다. 지금도 필자 아이들은 수단에서 살았던 집이 가장 훌륭한 집이었다고 이야기한다. 이태리 가구를 갖추고, 에어컨이 방마다 있으며, 냉장고에 냉동기까지 구비한 그 사택은 원주민의 생활상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주거환경이었다. 필자가 근무한 곳은 나일의 지류인 백나일의 물을 인공수로로 끌어들여 사탕수수 농사를 짓고 설탕까지 생산하는 그 나라 기간산업체였다. 인공 수로에서 쉽게 낚시한 물고기로 회도 뜨고 매운탕도 만들어 먹었다. 한국인들이 낚시하는 것을 보고 수단인들도 낚시하기 시작하였는데 수단인들의 극성스런 낚시가 시작되고 두어 달 지나니 수로에는 거의 고기가 낚여지지를 않았다. 무계획 노획이 자연을 해칠 수 있다는 걸 확실하게 볼 수 있었다.
이어 미국에서 이민생활이 시작됐다. 우선 유학이 아니고 이민으로 미국 땅을 밟는다는 것부터 필자 속은 무척 상했다. 그리고 미국은 필자 꿈 실현의 땅이 아닌 생존의 땅으로 전락했다. 선배들이 버리라는 학력, 경력, 배경이 낯섦에서 버틸 수 있게 하는 유효한 수단인 것도 알게 됐다.
필자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육체노동의 미숙함이다. 해보지 않았던 일을 한다는 것이 가장 어려운 숙제였다. 바느질이 필수인 세탁소를 인수했을 때도 필자는 재봉틀에 실 꿰는 법도 모르는 상태였다 인계한 전 주인이 어쩌려고 무조건 가게를 사느냐고 더 걱정을 하였다. 기술을 쉽게 익히지 못하면 그 자리에서 가스실로 데려갔다는 유대인 집단수용소 체험기가 필자를 독려했다. 하지 못하면 죽으리로다란 명제 앞에 누군들 해내지 못하겠는가. 두 아이들의 똘망거리는 눈망울도 필자의 용기에 보탬이 되었다. 덕분에 필자는 주민의 95%가 백인인 부촌에 세탁소를 소유하게 되었다.
다는 아니지만 미국 사람들 중에 좋은 사람도 많았다. 특히 한 남자 단골손님은 하루 12시간 주 6일을 일하는 필자를 안타깝게 생각하여 우호적이었다. 필자 글씨체와 암산 실력이 학력을 증명해주었기 때문이다. 이 손님에게서 “네 나라에서는 화이트칼라 잡을 가졌을 거야”라는 말을 종종 들었다. 남편과 큰 소리로 다툼하는 현장을 본 이 손님은 남편에게 “ 내 아내는 일하지 않으면서 가사 도우미를 두는데 하드워킹 아내에게 무얼 불평하느냐” 하는 내정간섭에 가까운 일격을 날리기도 했다. 백인이건, 흑인이건, 교육 수준이 높든 아니든 미국 남자는 여자와의 다툼은 꺼렸다. 일종의 배려였다. 이런 작은 차이가 신사문화를 이루는 근본이 아닌가 생각하였다. 오랜 동안 일만 하자 피로가 누적되기 시작하였다. 그래도 아침 일어날 때의 피로는 첫 손님이 내미는 달러에 확 가셨다. 난산의 아이도 돈을 보이면 달려 나온다는 유머가 생각났다.
1994년 남편이 준비도 이별사도 없이 떠나버렸다. 시폰처럼 흰 눈이 투명한 3월의 어느 일요일, 늦은 기상을 하고 나와 대화를 나누는 중 목이 깔깔하다고 물 가지러 간 사이 심장마비의 공격을 받고 평화의 나라로 갔다. 필자는 남들의 두 배에 이르는 노동에 시달렸으니 10년 미리 은퇴하여 문화적인 욕구를 채우리란 약속을 자신과 가족과 하였다. 그러나 남편 떠나고 4 년 후에야 가게를 팔았다. 남편 보내고 금방 가게 처분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놈의 돈 때문이다.
가게 처분하고 파트타임 일했다. 여유 시간에 시립대학에서 강의도 들었다. 이런 학구적인 활동이 경직된 내면을 많이 부드럽게 만들어 주었다. 머리가 멈추고 손발만이 분주하였던 시간이 머리와 손발이 함께하는 시간으로 전환하였다. 그리고 필자가 공부와 일을 병행하는 바로 그 시기에 영원히 걸 프렌드를 못 만날 것 같던 두 아들이 차례로 결혼했다.
드디어 형식도 내용도 필자 혼자가 된 것이다. 미리 계획하고 준비한 대로 은퇴 후 제주도로 갔다. 역이민이라고 말하는데 필자는 그냥 이사한 기분이다. 여기서도 저기서도 마이너리티인 필자에게 어디고 완전한 행복의 파라다이스는 없다. 두 땅 서양과 동양의 지구촌 마을이 필자의 삶터다. 더 넓어 좋고, 더 다양하여 좋고, 더 배워야 하여 좋다.
Interveiw 의 저자 이금형 교수
고졸 순경 출신으로 겪은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35세에 방송통신대에 들어가 6년 만에 졸업하고, 40대에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석사 학위, 50대에는 박사 학위까지 받으며 만학의 열정을 불태운 저자 이금형. 특유의 긍정 에너지와 노력으로 여성 최초로 치안감 자리에 오른 그녀가 말하는 워킹맘을 위한 현실적인 지침과 따뜻한 응원의 메시지를 전한다. 마거릿 대처를 닮은 자신의 헤어스타일에는 경찰이라는 정체성이 숨어 있다고 말하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공부하는 엄마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라는 제목의 책을 낸 계기는?
38년 동안 경찰관으로 일하면서 배우고 느낀 점들이 경찰 후배들이나 나와 비슷한 환경에서 일하는 여성들에게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어요. 늘 ‘고졸, 순경, 여성’이라는 편견과 싸워야 했는데, 그런 나의 노력이 ‘공부’라는 단어로 표현될 수 있었죠. 실제로 경찰 일을 하면서 대학교, 대학원 석·박사를 했고 딸들에게 늘 열심히 공부하는 엄마의 모습을 보여줬어요. ‘시간이 거꾸로 간다’의 의미는 소신과 열정이 있다면 퇴보하지 않는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죠.
여성 경찰로서 임신했을 때나 아이를 키우면서 일을 병행하다 보니 힘든 점이 많았을 텐데요. 어떻게 극복해 나가셨나요?
특별히 무언가 관리를 했던 것 같지 않아요. 아이를 키우는 일도 그렇고 경찰 일도 그렇고 마음가짐과 정신자세가 중요하죠. 나는 단순한 사람이라 힘든 일이 있어도 금방 긍정적으로 생각을 전환하는 편이에요. 책에도 소개했듯 ‘긍정은 천하를 얻고 부정은 깡통을 찬다’는 말이 있잖아요?
반대로 엄마이기에 여자이기에 더 강점으로 작용한 부분이 있다면?
피해자들을 대할 때 ‘그들이 내 딸이라면 어떠했을까’라는 생각을 했어요. 도가니 재수사를 지휘했을 때도 마찬가지였죠.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피해자 아이들을 보며 범인을 꼭 잡아 그들에게 정의가 살아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경찰 조직은 남성 중심적인 조직이라 포용력이나 소통 능력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아왔죠. 이러한 부분을 여성들이 보완해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요.
책에서 ‘얼마 만에 공부를 마치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꾸준히 공부하느냐가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본인의 의지도 중요하겠지만 함께 해준 가족들의 도움도 컸으리라 생각합니다.
내 삶에 가족이 차지하는 역할은 무척 커요. 남편은 경찰 일을 적극적으로 지지해주며 조언해주었고, 시어머니는 아이들을 돌봐주셨죠. 딸들도 어렸을 때는 엄마가 일하는 것을 싫어했지만 청소년기부터는 엄마의 일을 존중해주었어요. 승진시험 때마다 열정적으로 공부하는 모습이나 대학교 대학원 수업을 열심히 따라가는 내 모습이 딸들의 학업과 인생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말을 들었을 때 가장 기뻐요.
부산지방경찰청장을 끝으로 공직을 마무리했는데요, 인생이모작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요?
현재 서원대에서 경찰행정학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동안 내가 경찰로서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후배들을 가르칠 수 있어 보람되고 재미있어요. 또, 한국양성평등진흥원 초빙교수와 청소년폭력예방재단의 이사로서 양성 평등 문제와 청소년 문제를 효과적으로 알리기 위해 공부하고 있습니다.
일과 공부에 도전하는 주부들을 위한 조언과 응원의 메시지.
인생을 살다 보면 누구에게나 바닥의 시기가 있기 마련인데, 주부들은 아이가 생기면 정말 시간이 모자라요. 직장인으로서, 엄마로서, 아내로서, 주부로서, 며느리로서, 딸로서 많은 일들을 감당하고 해내야 한다는 사실이 버거워 직장을 그만둘까 생각할 수도 있죠. 하지만 이때만 잘 견디면 올라가는 시기가 반드시 온다는 것을 기억했으면 좋겠어요. 또, 단순히 돈벌이가 아니라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엄마인 여성들이 해야 할 일이 있음을 기억하고 사명감을 가지고 자신의 일을 해나갔으면 해요.
△ 이금형
現 서원대 경찰행정학과 석좌교수, 한국양성 평등교육진흥원 초빙교수. 前 광주지방경찰청장, 경찰대학장, 부산지방경찰청장
홍역과 태풍으로 두 아들을 잃은 큰댁 최막이는 대를 잇기 위해 작은댁 김춘희를 집안에 들이게 된다. 본처와 후처, 이보다 더 얄궂은 인연이 또 있을까? 그러나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이제는 마지막을 함께할 유일한 동반자가 된 두 사람. 영화 는 모녀처럼 자매처럼 때론 친구처럼 지내온 두 할머니의 아름다운 동행을 그린 영화다.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가 영화로 탄생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또, 제작 과정의 어려움은 없었는지요.
영화를 연출한 박혁지 감독은 2009년에 모 방송사의 휴먼다큐멘터리를 제작하면서 만난 두 할머니가 가슴 속에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친해지려야 친해질 수 없는 두 여자가, 남편이 죽었는데도 왜 굳이 한 지붕 아래 같이 살고 있을까?” 그래서 2011년 겨울 두 할머니를 다시 찾아뵙고 촬영을 시작했습니다. 사실 외딴 시골에 사는 어르신들의 일상은 지극히 평범하고, 두 분 모두 연로하셔서 촬영 기간의 대부분은 ‘기다림’의 시간이었죠. 그날그날 두 할머니의 일정을 파악하고 머릿속으로 시나리오를 쓰고 직관적인 판단을 믿으면서 촬영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꼬박 2년 만에 촬영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이하 )와 두 작품의 프로듀서로서 두 영화를 비교한다면?
의 부부와 의 두 할머니는 사뭇 다른 관계입니다. 의 부부는 서로에 대한 사랑으로 76년을 함께 했지만, 의 두 여자는 한 남자의 두 아내로 46년을 함께 살았죠. 절대로 사랑할 수 없는 사이입니다. 하지만 두 작품 모두 ‘관계’에 대한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누구나 어떤 ‘관계’ 속에서 살고 있죠. ‘가족, 친구, 동료, 이웃 등, 나는 이들과 어떻게 살고 있는가?’라는 메시지를 던집니다.
김춘희, 최막이 할머니의 삶을 지켜보면서 깨달은 인생의 교훈이 있다면?
시대가 그러하여 맺어진 두 여자의 얄궂은 인연은 대단히 일방적이고 심지어 폭력적이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두 여자는 서로의 부족한 점을 채우며 서로를 오롯이 지켜냈죠.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에 대한 대답을 춘희, 막이 할머니는 두 분이 함께한 시간으로 대신 말하고 있습니다.
노년의 삶을 주제로 한 영화가 세대를 초월하는 사랑을 받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노인은 모두 ‘선생(先生)님’입니다. 우리보다 먼저 살아온 분들이죠. 험난한 질곡의 역사를 거쳐 온 이 땅의 ‘선생님’들의 삶에는 우리가 갖지 못한 인생에 대한 혜안이 있습니다. 하루하루 팍팍하기만 한 이 시대에는 찾아보기 힘든 순수함과 맑은 정신을 발견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었던 까닭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중년 관객들이 보면 더 감동하게 될까요?
본처와 후처에 대한 영화이지만, 등장인물의 대부분이 시골에 홀로 사는 평범한 할머니들입니다. 그래서 특히 시골에서 나서 자란 대부분의 중년 관객들은 고향과 부모님에 대한 진한 향수와 추억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실, 불과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춘희, 막이 할머니들처럼 본처와 후처가 함께 사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죠. 가족이나 이웃에 이런 기억을 가진 분들이라면, 오히려 이 영화가 불편하지 않고 훨씬 더 감동적으로 다가갈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 분들도 부부가 함께 또는 자녀들과 함께한다면 두 할머니의 인생을 통해서 큰 선물을 받을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 한경수 프로듀서
아거스필름 대표, 한국독립PD협회 글로벌전략위원장
다큐멘터리 영화 , , 프로듀서
사람은 자신의 피리어드(period) 대로 역사를 생각한다. 70의 인생을 아직 겪지 않은 사람에겐 한국영화의 지난 70년은 인식과 학습의 영역으로 구분된다. 1980년대 이전의 한국영화는 현재 대부분이 망자(亡者)의 것으로 남아 있다. 예를 들어 유현목 감독과 그의 영화 ‘오발탄’같은 것이 그렇다. 거목 유현목은 갔지만 아직 이 영화에 대한 명성과 그에 대한 기억은 계속된다. 은 언제 봐도 늘 놀랍도록 ‘현재적’이라는 데서 그 특징을 찾을 수 있다. 명화(名畵)란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으로 보이는 것.
글 오동진 영화평론가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영화 ‘오발탄’은 지난 70년 한국 영화의 역사에 있어 우리 시대의 크나 큰 정치사회적 문제가 해결의 수순으로 나아가는 데 있어 한 발자국도 제대로 떼지 못하고 있고, 또 그럴 것이라고 암시하고 있다. 유현목의 영화적 예감은, 마치 뛰어난 마법사의 그것처럼, 적중하고 말았다. 우리는 아직도 오발탄의 분단, 오발탄으로 인한 정치적 분쟁, 오발탄 때문에 생겨 버린 경제적 불평등에 허덕이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는 언제?
현대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은 한국영화의 르네상스가 1990년대 후반 임권택을 위시한 이창동, 홍상수, 김기덕, 박찬욱, 김지운, 허진호, 류승완 등이 일궈 낸 시기라고 생각한다. 이른바 ‘코리안 뉴 시네마’의 기수들이다. 그러나 한국영화계에 있어 진짜 르네상스는 신상옥 감독과 그의 키드(kid)들이 왕성하게 활동했던 1960년대이다. 당시 한국영화계는 그야말로 빅뱅(big bang)이었다.
신상옥의 1961년작 는 죽은 남편의 친구가 인근 학교의 선생이 되어 사랑방의 객으로 머무는 동안 안주인과 미묘한 감정이 생기게 된다는 이야기다. 특이한 것은 두 남녀의 은근한 ‘밀당’이 미망인의 딸 옥희의 시점으로 전개된다는 것이다. 욕정은 늘 이성의 벽을 넘어서려 하지만 그 담장 어귀에 서서 항상 머뭇대기 십상이다. 문지방을 사이에 두고 두근대는 가슴의 소리를 듣는 것만큼 에로틱한 것은 없다. 단 한 번의 입맞춤 혹은 부둥키고 얽히는 섹스 없이 이처럼 마음을 달아오르게 하는 영화는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없다. 그렇게 얘기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거장 신상옥 감독이 생전에 만든 등 주옥같은 80여 편의 작품들은 그가 얼마나 영화적으로 원대한 꿈을 지닌 인물이었는지를 가늠케 한다. 1960년대와 70년대에 위용을 떨쳤던 신상옥의 영화사 ‘신 필름’과 관련해서는 굳이 비교를 하자면 1980년대 미국의 스티븐 스필버그가 이뤄 낸 신화를 한국적으로 치환시키면 이해가 빨라진다. 현대화된 한국 장르영화의 시작은 신상옥이 이루어낸 것이었다는 말은 정확한 기술에 속한다.
그 이후에는 이른바 신상옥의 후예들이 나왔는데 예컨대 1990년 이후부터 현재까지 활동하고 있는 강우석 감독 등이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그들 역시 신상옥 감독처럼 연출과 제작, 투자, 배급을 동시에 진행하며 화제작, 흥행작을 양산해 냈다. 모두 ‘아버지’’ 신상옥에게서 배우고 물려받은 것이다.
한국영화의 제1 르네상스기에서 이만희를 빼놓을 수 없다. 젊은 영화 마니아들 사이에서 는 김태용의 작품으로 기억되기 십상이지만 원래 이 영화는 이만희의 소실된 명화 중 하나이다. 1967년에 만들었지만 지금 그 필름은 남아 있지 않다. 김수용 감독이 1981년에 리메이크한 것은 어쩌면 이만희에 대한 오마주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교도소에서 모범수로 복역하다 잠시 휴가를 나온 여인 문정숙은 기차 안에서 위조 지폐범으로 쫓기고 있는 남자 신성일을 만나 하루살이 나방 같은 연정을 불태운다. 그 사랑 참 쓸쓸하고 허무하며 가슴이 아프다. 1960년대라면 여전히 독재의 시대다.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이런 발칙한 상상력이 동원된 러브 스토리를 만들 수 있었을까. 작가의 상상력은 첨단기술로 포장된 지금보다 훨씬 더 자극적인 것이었다. 마치 예리한 칼날이 살갗을 파고드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건 짜릿하지만 위험한 일이다.
이만희의 수많은, 그리고 화려한 작품들, 곧 ‘돌아오지 않는 해병’과 ‘7인의 여포로’ ‘삼포 가는 길’ 등은 신상옥과 달리 그가 리얼리즘 계보의 작가였음을 확실하게 보여준다. 신상옥이 시류라는 서핑을 잘 탄 인물이었다면 이만희는 올곧은 지식인의 표정을 지닌 채 살아가려 했던 감독이었다 이만희는 한마디로 위험한 상상력의 소유자였다. ‘7인의 여포로’로 반공법 위반에 걸려 구속되기도 했던 그의 이력은 이를 잘 설명하는 사건이었던 셈이다. 천재는 불우한 법이다. 이만희는 1975년 44세의 비교적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 한국 영화의 리얼리즘 역사는 이만희의 죽음과 함께 한동안 사구(砂丘)에 묻히는 신세가 됐다. 2000년대 초반 이창동의 등장은 어쩌면 이만희의 부활과 같은 것으로 해석됐다.
너무나 많은 기억들, 작품들
70년사의 갈 길은 멀다. 중간중간 떠오르고 명멸하는 감독들, 제작자들, 배우들의 면면이 길고도 길다. 그중에서 이장호-배창호-이명세로 이어지는 혈맥 아닌 혈맥도 한국 영화사에 길이 남을 계보에 속한다. 1970년대와 1980년대는 바로 이들의 시대였다.
이장호 감독이 이루어 낸 70년 영화 역사의 빛은 아직 꺼지지 않았다. 그가 만든 ‘바람불어 좋은 날’ ‘어둠의 자식들’ ‘과부춤’ ‘바보선언’ 등 일련의 영화들은 천재적 영감을 지닌 감독이 시대의 어둠과 어떻게 조우하고 또 스러져 가는가를 보여준다. 그중 ‘바보선언’은 탈(脫)정치적인 척, 사실은 1980년대를 관통하며 살아가는 한 영화적 지식인의 깊은 정치적 좌절과 그 트라우마에 대해 얘기하는 작품이다. 소매치기와 넝마주이를 하며 살아가는 저지대형(低地帶型) 인간 동철이 가짜 여대생 혜영을 납치하는 과정에서 그녀가 사실은 콜걸이자 창녀라는 것을 알게 되고 좌충우돌 끝에 비극적 결말을 맞게 된다는 이야기다. 바보가 아니면 살 수가 없었던 시절, 당시 우리 사회의 룸펜 프롤레타리아들의 시선을 통해 삶의 가닥을 이어 가려는 몸부림을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바보선언’은 시퍼렇던 군부독재 시절을 견뎌 내려는 영악한 이야기 꾼이 의도적으로 꾸며냈던 자기 모멸적 작품이었던 셈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1980년대의 흉포함을 어떻게 이겨낼 수 있었겠는가.
이장호의 조감독 출신이었던 배창호는 어두운 멜로드라마로 시대의 골짜기를 거슬러 올라가려 했던 인물이다. 배창호는 이장호가 그랬던 것처럼 처음에는 ‘꼬방동네 사람들’ 처럼 사회파적 시선을 자신의 작품에 강하게 투영시켰다. 그러나 곧 ‘도의 꽃’과 ‘고래사냥’ ‘깊고 푸른 밤’ 등으로 1980년대의 젊은이들이 ‘앵그리 영 맨’ 혹은 ‘비트 제너레이션’의 세대임을 갈파한다. 배창호는 한국영화계에 ‘스타일’을 들여 놓았다. 영화는 결국 빛과 어둠의 예술이라는 점을 그는 명명백백하게 낙인찍어 놓았다. ‘적도의 꽃’이 대표적인 작품이다.
배창호가 이루려고 했던 영화적 스타일은 그의 조감독 출신인 이명세에서 빛을 발한다. 이명세는 영화보다 그림을 그리려는 쪽이다. 그가 만든 영화는 회화적이면서 키치(kitch)적이다. 영화라고 하기보다는 한 컷의 사진들을 이어 붙인 동영상의 예술에 가깝다. ‘첫사랑’과 ‘남자는 괴로워’ ‘지독한 사랑’에서 ‘인정사정 볼 것 없다’ ‘형사’로 이어지는 그의 작품 계보는 한국영화가 스타일에 있어 한 움큼의 큰 성과를 거둬 내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들이었다.
1999년 이명세가 로 새로운 좌표를 찍을 무렵 한국영화계의 한쪽에서는 목하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 바로 ‘뉴 코리안 시네마’의 바람이다. 여기에는 홍상수와 박찬욱, 김기덕 감독 등이 주축을 이뤘는데 이들은 2004년 제57회 칸 영화제에 대거 진출하면서 새로운 도약의 시대를 이뤄냈다. 당시 칸 영화제에 출품된 작품은 경쟁부문에 홍상수 감독의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와 박찬욱 감독의 ‘올드 보이’ 등 2편이, 또 다른 경쟁부문인 ‘주목할 만한 시선(Uncertain Regard)’에는 김의석 감독의 이 올랐다. 2002년 ‘취화선’으로 칸 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한 임권택 감독의 신작 역시 경쟁부문에는 진출하지 못했으나 막판까지 경합을 벌였다.
한국영화의 당시 칸 진출이 유독 눈길과 화제를 모았던 것은 해외 영화계, 특히 예술영화에 대한 전통이 여전히 강하게 남아 있는 유럽 영화 권에서 한국영화의 새로운 작가적 경향에 한 관심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물론 그 3~4년 전부터 한국영화가 해외 영화제에서 새롭게 부각되기 시작했지만 유럽 평단들의 시선은 여전히 한국영화 하면 신상옥, 김수용, 임권택, 박광수, 장선우 등 구세대급 감독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따라서 당시 칸 영화제 진출은 한국의 ‘새로운 감독’들이 유럽 영화계 내에서 공식적인 발판을 마련한다는 면에서 매우 중대한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새로운 감독들’로서는 흔히들 이창동, 홍상수, 김기덕, 박찬욱, 허진호, 김지운 등 당시 40대 감독들이 거론돼 왔으며 그 뒤를 이어 봉준호, 장준환, 류승완 등 30대 감독들까지 포함해 이들을 일컬어 충무로에서는 일명 ‘뉴 코리안 시네마 운동’의 기수들로 분류했다.
유럽 칸 영화제를 통해 한국의 새로운 영화작가들이 부상하게 된 것은 마치 1990년대에 중국 제5세대 감독들이 이를 통해 대거 해외무대에 진출함으로써 중국영화의 위상을 급격하게 올려 놓은 것과 같은 맥락으로 해석됐다. 당시 유럽영화계는 첸 카이거와 장 이모우 등 북경대학 출신의 일명 ‘5세대 감독들’의 영화를 집중 소개함으로써 중국영화의 세계화를 이루어 내는 데 큰 역할을 담당한 바 있다.
‘뉴 코리안 시네마’ 감독들의 특징은 모두가 ‘전후 세대’라는 점이었다. 따라서 이데올로기적으로 편향돼 있지 않으며 분단문제, 민족문제에 대해 진보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는 인물들이다. 특히 이들은 1970~1980년대의 군사독재 체제를 경험한 후 영화예술이 추구하는 인간 본성의 문제에 대해 다양하고 진지한 접근을 시도했던 것이 특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는 고도화된 산업화 시대의 영향과 혜택으로 인해 MTV 스타일의 감각적이고 트렌디한 영상을 만들어 냄으로써 20~30대 젊은 관객들에게 폭발적인 호응을 끌어 내는데 성공했다. 정치사회적인 문제에 대해 심층적인 주제의식을 갖고 있지만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에 있어서는 때론 유머러스하며, 때론 폭력적이고, 때론 공상과학적인 측면을 갖고 있는 것이 또 다른 특징이었다. 봉준호의 ‘살인의 추억’, 김지운 ‘달콤한 인생’, 허진호의 ‘봄날은 간다’ 등이 대표적이다. 2004년 제57회 칸 영화제는 박찬욱 감독의 ‘올드 보이’에게 심사위원 대상이라는 영예를 안겨줬다.
새로운 70년사를 위하여
새로움은 늘 오래된 것으로 대체된다. 1990년대 중·후반부터 2000년대 10년을 돌진하듯 활동해 왔던 박찬욱 홍상수 김기덕도 그렇다. 이들 모두 이제 ‘올드 보이’가 됐다. 50대를 훌쩍 넘긴 감독이 됐다. 한국 영화계는 새로운 피를, 새로운 ‘피의 혁명’을 요구하는 시점에 다다르고 있다. 그것에 호응하는 듯 2010년대에는 새로운 작가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한공주’의 이수진 감독, ‘도희야’의 정주리 감독, ‘가시꽃’의 이돈구 감독, ‘명왕성’의 신수원 감독 등등. 그러나 이들의 활동은 아직 지난 70년의 기나긴 역사의 시간에 눌려 완전히 개화한 상태까지는 아니다. 그러나 곧 이들의 시대가 도래하리라는 것은 모두가 감지하고 있는 사실이다. 인생이 그렇듯, 영화도 다 그런 것이다. 바뀌고, 잊히고, 새로 기억되며, 그래서 결국에는 역설적으로 영원히 살아 남는 것이다.
한국영화의 길을 70년이라는 시간을 두고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때론 영광스럽고, 때론 팍팍하며, 때론 너무나 흥미로운 일이면서도 또 때로는 한참이나 참담한 심정이 되는 일이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영화가 70년을 영화 혼자서 버텨낸 것이 아니라는 것이며 지금의 감독과 배우가 있기까지 그 전의 감독과 배우가 있었고, 또 다시 그전의 감독과 배우, 제작자,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그건 일직선의 끈 같은 것이기도 하지만 뫼비우스의 띠처럼 머리와 꼬리가 이어지는 것이기도 하다. 지금의 박찬욱과 김기덕은 결코 홀로 존재하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점을 역설하는 것이다.
70년 전사(全史)의 영화를 보라는 것은 가혹한 일이 될 것이다. 그래 봤자 일별에 불과한 일이 될 것이다. 단, 기억하는 자만이 미래를 점지해 나갈 것이다. 분명한 일 하나는 과거의 영화들이 지금의 영화세상을 만들어 나가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 운명이 계속해서 이어져 나간다면 세상은 언젠가 꼭, 영화처럼 될 것이다.
△ 오동진(吳東振) 영화평론가
문화일보,연합뉴스,YTN 기자를 거쳐 영화전문지 FILM2.0 편집위원과 동의대학교 초빙교수,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 제천국제음악영화제 집행위원장, EBS 시네마 천국 MC, YTN 시네24 MC를 역임했다. 현재 들꽃영화상 운영위원장과 마리끌레르 영화제 집행위원장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