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을 말하는 이상용(李尚龍·48) 작가.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그의 작품세계의 근간이기도 한 ‘운명’을 새삼 되새겼다. 평택에 있는 작업실에서 은둔하듯 기거하며 1만 점이 넘는 작품을 만들면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한 그는 드로잉, 판화, 벼루, 조약돌, 바큇살, 의자, 상여 등 독특한 오브제들을 사용하며 남들과 다른 고유의 영역을 개척해가는 중이다. 한국 미술, 서양 미술을 아우르기도 하고 무심히 스쳐 지나가기도 하는 듯한 그의 작품세계를 지탱하는 것은 맑게 정제되어 누구도 더럽힐 수 없는 자신의 기준들이었다. 이상용 작가가 만나고 만든 운명들에 대해 들어봤다.
충남 공주에서 8남매 중 일곱째로 태어난 이상용 작가의 작업실은 평택에 위치해 있다. 누나가 사는 곳을 지나다니다가 발견한 곳이다. 서울에서는 발견하기 힘든 공간, 한적한 이곳에서 그는 밭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 순박한 농부 같은 모습이 그를 잘 드러내주고 있다. 그러나 작품 생산에 있어서만큼은 금욕적이지 않다. 그의 작품은 온갖 장르를 넘나든다. 1만2000여 점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작품들은 그가 쉬지 않고 일하는 근면한 노동자의 삶을 살고 있다는 걸 증명한다. 그리고 그 작품들의 숫자는 그가 평택의 외진 곳 넓은 공간을 필요로 하는 이유기도 하다.
운명적으로 만난 작품 소재들
“예술은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 덮치는 파도를 막아내는 방파제 역할을 합니다. 예술인은 등대지기와 같죠. 바쁘게 새로운 상품들이 홍수처럼 쏟아져 발맞춰가는 시대에 느림 속 자연과 사람의 만남에서 소중하고 깊은 운명을 보았으면 하는 바람에서 작품을 시작했어요.”
이상용 작가의 작업실에서 평면회화 드로잉 작품 이외에 특별히 시선을 끈 것은 폐철제로 만든 페달 작품이었다. 왜 폐철제를 소재로 삼은 걸까?
“사용하다 버려진 물건들, 천천히 녹이 슬어가는 쇠. 쓰다 버린 물건이든 새로운 물건이든 저와 찰나의 운명적 만남에서 순간순간 만들어진 작품들이지요.”
쇠는 좀 무겁고 아파 보인다는 기자의 질문에 이 작가의 대답은 간단했다.
“철제의 묵직한 무게와 차가운 성질이 현대를 살아가는 고독한 인간을 상징하는 데 적합하다고 생각했어요. 버려진 물건들을 보며 날마다 달라지는 운명과 기억, 그 내밀함이 어떠한 운명으로 다가갈지 상상하며 만들고 싶었죠.”
이상용 작가는 소위 ‘예술가다운’ 이미지와는 다르다. 뭔가 흐트러지고 난삽하며 혼돈의 한가운데에서 일할 것 같은 도취된 작가의 이미지가 없다. 작품이 보관된 창고는 그가 직접 철저하게 관리하고 있다. 작품에 먼지가 앉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는 외면적인 것보다는 내면적인 것을 더 추구한다. 작업실이 곧 집인 이곳에 보관된 작품을 들여다보니 그의 고집스러움이 느껴진다. 예술은 하겠다는 의지가 중요한 것이지 작가의 모습이 겉으로 보여지는 것들에는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그와 인터뷰하며 그에게서 맑은 영혼을 느꼈다. 오롯이 꾸밈없는 것을 지향하는 면모 때문일지도 모른다.
‘벼루 작가’로 유명한 그의 작품에서는 인간에 대한 집착이 느껴진다. 사람을 주제로 집중적으로 파고든 작가는 흔치 않다. 그가 그토록 사람을 자신의 작품 속에 자주 드러내는 것은 세상이 너무 빠르다는 한탄에 기반하고 있다. 특히 ‘빨리빨리’가 입에 배고 생활에 밴 한국인은 세상의 속도를 더욱 몰아붙인다. 그리고 그렇게 속도에 매여 살다 보니 정작 인간의 문제를 생각할 시간이 없다. 그가 사람에 주목하게 된 것은 잊혀져가는 인간성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이리라.
물질적인 것은 빨라도, 마음은 천천히
이상용 작가는 소재를 억지로 끌어다 쓰지 않고 순리적으로 발견한다. 그가 벼루(inkstone)를 소재로 쓰고자 한 것도 그러한 마음의 일환이었다. 벼루는 단단한 물건이다. 백 년 전, 사백 년 전에 벼루들은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져서 쓰이고 시간 속에서 계속 연결되어 결국 한 작가의 손에 도착하게 된 것이다. 어쩌면 중간에서 혹은 그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손에 들어갔으면 버려졌을 수도 있는 벼루는 그의 손에서 다시 생명이 되살아났다. 그는 그저 그것을 보고 무언가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라고 말한다. 누군가 쓰다 만 것을 이용하는 게 아니라 운명으로서 자신에게 다가왔다는 것이다.
벼루뿐만이 아니다. 그의 작품은 마치 버려진 골동품 같은 한국 전통의 얼이 담긴 것들이지만 흔적 없이 사라질 수도 있는 소재들이 운명과도 같다. 그렇게 만난 작품중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은 무엇이냐’는 질문에 한참 곤란해했다. 그에게는 조그마한 부속품들조차도 운명이고 만남이므로 어떤 게 의미가 크다 작다 논할 수가 없단다. 이러한 일관된 그의 작품세계조차도, 실은 의도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작업을 하다 보니 통일감이 생겨 그만의 독자적인 생태계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러니 운명을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 그의 작업일지도 모른다. 제도권 내에서 학습된 예술적 역량보다는 타고난 자질을 발판 삼아 자유롭고 무한한 상상력을 펼치는 실험작가답다.
39세 나이에 떠난 뉴욕
이상용 작가는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 뉴욕에서 6년을 지냈다. 그가 자신의 작품세계를 관통할 ‘운명’을 발견하게 된 뉴욕. 그곳에 갔을 때 그의 나이는 서른아홉 살의 늦은 나이였다. 무엇을 새로 시작하기에는 쉽지 않은 나이였을 터. 그런데도 그가 뉴욕이라는 새로운 출발지를 선택하게 된 데에는 삶에 대한 환멸 때문이었다.
사람을 천편일률적으로 만드는 한국의 입시 교육을 매우 싫어했던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술 입시학원 원장으로 열심히 일했다.
미술학원 일은 제법 잘돼서 대전에서 큰 학원들 중 하나로 성장했다. 먹고사는 문제도 있었지만 어느 순간에서부턴가 맡은 아이들을 생각하면 팽개치고 자기 멋대로 가는 것이 죄처럼 느껴져서 계속해야 했던 학원이었다. 그러나 입시에 대한 혐오가 강했던 만큼, 아이들을 그 틀에 맞춰 가르친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 또한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물론 틀을 깨려고 많은 노력을 했다. 최대한 독특하게, 똑같이 하지 않고 개성 있게 아이들이 성장할 수 있게끔 가르쳤다. 그러나 “아무래도 한계가 있더라”라는 그의 자조 섞인 한마디에서 많은 좌절과 고민을 느낄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예술가로서, 작가로서의 삶을 추구하고 싶었다. 열두 시에 학원에 출근해서 여섯 시까지 작업하고 잠깐 자는 생활을 10년 넘도록 했다. 그의 방대한 작업량은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기도 했다. 결국 자신의 목표를 떨쳐버릴 수 없었던 그는 뉴욕으로 향한다. 누군가의 말마따나 가르칠 나이에 대학 3학년 학생으로 편입하게 된, 쉽지 않은 도전이었다.
틀어박혀 작업에만 몰두하다
이상용 작가는 뉴욕에 처음 갔을 때 3년 내내 매일매일 갤러리를 돌아다녔다. 보고 또 보는 일의 연속이었다. 뉴욕현대미술관은 일주일에 한 번씩 갔다. 그림을 보고 느끼려 하는 게 아니었다. 자신이 본 그림들과 자신의 작품을 접목하고자 하는 의도도 없었다. 그는 그저 흐름에 맡기다 보니 그렇게 됐다고 말한다. 그렇게 3년이 지나니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후 3년 동안 외부 출입 안 하고 작업만 계속했다.
옆에서 보면 무언가 홀린 듯한 삶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그러한 생활을 영위하게 된 데에는 그의 지론이 있다. 바로 어릴 때부터 남의 것을 보고 하는 것은 안 좋아했고, 남이 하지 않는 것을 추구하려 하는 그의 작업관이다. 그는 작업을 할 때 매번 자신이 ‘원시시대에 태어난 원시인’이라고 생각하고 접근한다고 말한다. 그림이 전혀 없는 세상에서 뭔가를 찾아보자는 마음가짐과 노력이야말로 그의 독특한 작품세계의 동력이었다. 하긴 그렇게 아무것도 없는 바탕에서 뭔가를 만들어낸다고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운명’과 같은 끌어당김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가 자신의 작품세계를 설명할 때 그토록 운명을 강조하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억지로 작품의 소재를 찾으러 다니지 않는다. 있는 소재에 맞춰 작품을 만들 뿐이다. 그 자연스러움과 필연성이야말로 운명의 다른 이름 아니던가.
회화, 조각, 설치, 그림, 시까지 아우르다
젊을 때는 유명한 화가가 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배우가 되고 싶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들은 이상용 작가의 운명이 아니었나보다. 이제 그는 조용히, 열심히 사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의 작품들은 뉴욕의 미술관들과 단원미술관, 관훈갤러리, 간송미술관 등에 걸렸고 코오롱그룹과 한국문화원, 펜실베이니아 대학병원 등지에서도 볼 수 있다. 그에게서 은둔 고수의 아우라를 발견하게 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사실 그의 작품은 양도 많지만 분야 또한 방대하다. 회화, 조각, 설치, 그림과 같은 미술 작품 외에 시와 사진까지 아우른다. 그는 자신의 작품에 대해 장르를 굳이 구분해서 설명하지 않는다. 모두가 얽혀서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 관계들이라고 말한다. 소위 ‘권위’를 위해 한쪽으로 장르를 정하라는 지인들의 충고도 있었지만 ‘사람이 맨날 한 가지만 먹으며 살 수는 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특히 시는 그의 미술 작업에도 큰 도움이 되고 있다. 현재 6000편 정도 썼고, 2000편 정도를 공개한 상태다.
8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누이들 밑에서 어려운 유년 시절을 보낸 그는 아홉 살부터 땅바닥에 그린 그림으로 가족들을 놀라게 했다. 소나무로는 목상을 만들고 빨래비누로는 조각상을 만들었다. 또 잡동사니로 척척 만들어낸 작품들이 쌓여 그의 집은 마치 전시장을 방불케 했다고 한다.
그러다 처음 시를 접하게 된 것은 열일곱 살 때였다. 그때 아버지가 갑자기 하반신 마비로 쓰러졌고 고등학교 1학년을 다니던 그는 학교를 그만두고 아버지를 간병해야 했다. 어린 나이에 혼자 있다 보니 많은 생각을 하게 됐고, 그 생각은 시적 감수성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그의 시는 어린 시절의 고독하고 상처 입은 감성들과 연결된다.
“시라는 것은 누군가 말했듯 말라가는 잎을 파랗게 유지시켜주는 것 같아요.”
예술 작품은 내면이 익어가는 과정에서 뭔가 많은 것들을 보게 되고, 그러면서 위로 올라가다 보면 흐트러지게 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것은 마치 나무처럼 시들어간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렇게 시들어가는 과정에서 시가 중심을 잡아준다. 흐려지거나 어렸을 때와 달라진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그는 시를 통해 다시 본질을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시를 계속 쓸 것이다. 누구에게 보여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는 영원할 작품들
그가 최근 열중하고 있는 작품 소재는 상여다. 그가 볼 때 우리나라의 상여는 어느 나라에도 없는 우리나라 고유의 문화다. 상여를 통해, 죽음에 이르면 왕과 못지않은 마지막 길을 서민들에게도 제공해줬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러면서 우리 조상이 세상에서 가장 평등한 사상을 갖고 있었다는 증거 아니겠냐며 반문했다. 샤머니즘 관점에서 상여를 소재로 한 작품을 꼭 만들고 싶었다는 그는 현대적으로 해석된 이상용 작가식의 상여를 만들기 위해 공을 들이고 있다.
“어렸을 때 상엿집을 들락날락했는데 무섭잖아요. 어른들은 가까이 가지 못하게 하고. 이게 아름다운 상여 문화와 매치가 안 되는 부분인데, 죽음에 대한 거부감이 있는 거죠. 그렇게 생각 안 했으면 좋겠고, 그래서 더 잊히기 전에 저보다 어린 세대에게 상여라는 게 이렇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다시 돌아간다는 의미로 편하게 봤음 싶었어요.”
여섯 살 때부터 그림을 그리고 싶었고 스튜디오를 가진 작가가 되고 싶었던 그는 그러한 꿈들은 이제 어느 정도 이룬 것으로 보인다. 이제 그는 누군가와 연결되는 작가로 남고 싶다고 말했다. 자신의 작품을 본 누군가가 같은 길을 걷고 싶어 할 때 그 길을 연결해주는 그런 작가. 자신이 죽는다고 해서 작품도 사라지는 게 아니다. 그렇다고 그의 작품을 사람들이 보고 베끼며 영향을 받길 바라는 것도 아니다. 그가 바라는 작가의 모습이란 인연과 이어지는 것이고, 그 인연은 다소 희미한 것처럼 보여도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어떤 운명의 길과도 같은 무언가다.
그의 마음을 읽는 사람은 그의 인연이 되면서, 비로소 그의 작품을 제대로 평가할 수 있지 않을까. 인터뷰 내내 작가의 맑게 정제된 사상과 순박한 마음이 간결하게 와 닿는 기분이었다. 어제까지 살게 해준 사람에게 감사하며 내일을 산다는 이상용 작가. 뭐라고 감히 말할 수 없는 기자의 심정을 그의 작품에 공감한 사람들은 알 것이다.
나는 누구이고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모르는 기자로서는 이상용 작가의 운명 같은 작품이 세상 밖에서 대중과 소통하길 바라는 마음뿐이다. 짐짓 이것이 예술이라는 것을.
2018년, 드디어 58년생 개띠들이 회갑을 맞이한다. 우리나라는 61세가 되면 회갑(回甲) 또는 환갑(還甲)이라 하여 특별히 생일잔치를 열었다. 요즘이야 식구들 모여 소박하게 밥 한 그릇 나누어 먹지만 말이다. 회(回)나 환(還)은 한 바퀴 돌아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는 뜻이라는데, ‘자리로 돌아왔다’는 그 말에서 알 수 없는 무게가 느껴진다. 어쨌든 회갑을 맞이하는 벗들에게 안부를 묻고 싶다.
땡볕 내리쬐는 공사장에서, 시끄럽고 위험한 공장에서, 갑갑한 사무실에서, 긴장이 넘치는 병원에서, 영혼 없는 학교에서, 쓸쓸한 들녘에서, 살려고 몸부림치는 모든 삶터에서 앞만 보고 달려온 벗들에게 인사를 전한다. “가난하고 어려운 시절 잘 견뎌주어 고마우이.” 그리고 안타깝게도 다시 못 올 길로 먼저 떠난 벗들에게도 머리 숙여 인사를 전한다. “그대들 몫까지 살다가 곧 따라갈 테니 기다려주시게나.” 벗들에게 인사를 건네는데 왜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걸까?
가난했지만 아름다웠던 어린 시절
나는 1958년 5월 5일 경남 마산시 월영동 산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말이 좋아서 ‘마산시’이지, 똥구멍 찢어지도록 가난한 마을이었다. 신발과 양말이 귀했던 때라 추운 겨울에도 고무신에 양말조차 신지 못하고 학교를 다니는 바람에, 내 발은 겨울철만 되면 동상에 걸려 붓고 가려워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보다 못한 어머니는 메주콩을 수건에 싸서 밤마다 내 발을 감싸주었다. 나는 지금도 그게 어떤 효과가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내가 초등학교 다닐 적에 우리 마을은 거의 초가집이었다. 그때만 해도 집집마다 꽃이 피고, 마당에는 온갖 푸성귀들이 자랐다. 그래서 반찬거리를 돈 주고 사 먹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우리 집은 아주 작은 초가집이었지만 마당과 들머리에는 아침마다 맨드라미, 봉숭아, 접시꽃과 같은 수십 가지 꽃이 피었다. 채송화만 해도 여름 내내 하루 천 송이가 넘게 피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옆집 친구랑 꽃송이를 헤아리다 학교에 지각한 적도 있었다.
사람들은 우리 집을 ‘석류나무 집’이라 불렀다. 마당가에 나보다 나이가 몇 배나 많은 석류나무가 있었기 때문이다. 석류가 빨갛게 익으면 어머니는 제일여고 정문 앞에서 석류를 팔았고, 석류 판 돈으로 한 해 쓸 공책과 연필을 사주었다. 가끔 서리꾼이 나타나 석류를 도둑질해가는 바람에 아버지는 석류나무 가지 사이에 탱자나무 가지를 꺾어서 걸쳐놓곤 했다. 가끔 그 석류나무를 생각하면 알 수 없는 그리움이 밀려온다.
가난은 전염병처럼 오래도록 우리 식구들을 못살게 굴었다. 형은 집을 나가 공장에서 돈을 벌어 스스로 고등학교를 다녔고, 누나 셋은 모두 초등학교만 겨우 졸업한 뒤 부산 가발공장으로, 대구 섬유공장으로 돈 벌러 갔다. 나는 가난이 싫어서 스스로 학교를 포기하고 공장에 다녔다. 그때는 부자가 되는 게 꿈이었다.
하루는 거나하게 술에 취한 아버지가 “사람은 배워야 사람이 된다”고 하셨다. 그 말씀을 듣고, 낮에는 공장에 다니면서 내가 번 돈으로 뒤늦게 야간 중학교(고등공민학교)에 입학해 공부를 시작했다. 야간 중학교 수업을 마치고 걸어서 집으로 가면 거의 밤 열한 시가 넘었다. 몇 시간 겨우 자고 나면 아침 일찍 공장에 가야 했기 때문에 늘 잠이 모자랐다. 그때 내 나이 열네 살이었다.
나뿐만 아니라 야간 중학교 학생들은 모두 집안이 가난했다, 더구나 같은 학년인데도 나이 차이가 많았다. 서너 살 많은(1954~1957년생) 형들도 뒤늦게 공부하고 싶어 야간 중학교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같은 또래들보다 ‘세상’을 일찍 배웠는지 모른다. 지금 돌이켜보면 가난하고 불편했지만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결코 내 삶을 불행하다고 생각한 적 없었으니까 말이다.
첫 시집 ‘58년 개띠’
나는 사람들이 ‘쉽게’ 말하는 58년생 개띠다. 쉽게 58년 개띠라 불러주어 고맙다. 왜냐하면 살아온 세월만큼이나 친근감이 드는 말이기 때문이다. 나는 1995년에 보리출판사에서 첫 시집 ‘58년 개띠’를 내고 세상에 이름이 조금 알려졌다. 시집을 내고 가톨릭여성회관 강당에서 출판기념회를 열었다. 100명이 넘는 손님들(거의 현장 노동자들이었다)이 찾아와 강당에 신문지를 깔고 여기저기 둘러앉아 막걸리에 파전을 먹으며 시를 읽거나 ‘민노래’를 불렀다. 예나 지금이나 어떤 행사를 하면 손님들이 방명록에 이름을 적는다. 그때 손님들이 방명록에 적은 내용은 대부분 ‘띠’에 관한 글이었다.
“70년생 개띠 왔다 갑니다. 저도 12년 뒤에 선배님처럼 꼭 시집을 내고 싶습니다.”, “58년 개띠 친구가 시집을 내다니, 내 시집처럼 기쁘네그려.”, “60년생 쥐띠인데요. 왜 58년생 개띠만 유명한가요?”
사람들은 ‘58년 개띠’에 실린 시들 중 ‘58년 개띠’라는 시를 좋아한다. 지면을 줄이기 위해 줄과 연을 조금 붙여서 옮긴다.
58년 개띠 해
오월 오일에 태어났다, 나는
양력으로는 어린이날 음력으로는 단옷날
마을 어르신들
너는 좋은 날 태어났으니
잘 살 거라고 출세할 거라고 했다.
말이 씨가 되어
나는 지금 ‘출세’하여 잘 살고 있다.
이 세상 황금을 다 준다 해도
맞바꿀 수 없는 노동자가 되어
땀 흘리며 살고 있다.
갑근세 주민세 한 푼 깎거나
날짜 하루 어긴 일 없고
공짜 술 얻어먹거나
돈 떼어먹은 일 한 번 없고
어느 누구한테서도
노동의 대가 훔친 일 없고
바가지 씌워 배부르게 살지 않았으니
나는 지금 ‘출세’하여 잘 살고 있다.
시집 ‘58년 개띠’는 20년 남짓 노동현장에서 노동자로 살아오면서 보고 듣고 느끼고 겪은 삶의 기록이다. 이 시집이 세상에 나오기 전에, 시집 제목과 표지를 의논하기 위해 서울에서 네 사람이 모였다. 보리출판사 차광주 대표, 편집부 강순옥 선생, 함께 편집 이야기를 나누었던 분과 나까지 모두 58년 개띠였다. 그래서 모두 시집 제목을 ‘58년 개띠’라 하자고 했다. 그때 그 자리에는 알 수 없는 기운이 펄펄 살아서 빈 공간을 가득 메웠다. 58년생 개띠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한평생 옆집에서 살았던 친구처럼 반갑고 정겨웠다.
58년생 개띠들이 모여 ‘58년 개띠’ 시집을 내고 4년 뒤, 글을 써서 밥 먹고 살아가는(대부분 글만 써서는 밥을 못 먹고 산다) 58년 개띠 작가들 모임을 가졌다. 1999년 6월 4일, 첫 모임을 가진 곳이 서울 종로경찰서 맞은쪽 ‘동루골’이라는 조그만 술집이었는데 전국에서 서른 명쯤 모였다. ‘서울’이라는 먼 길을 비행기 타고, 기차 타고, 버스 타고 올라온 58년생 개띠 작가들 모임은 말 그대로 ‘개판’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개판은 엉망이라는 말이 아니고 ‘개띠’다운 술판이 벌어졌다는 말이다. 그날 모인 58년생 개띠 중 창비 김이구 평론가와 박영근 시인은 몹시 안타깝게도 세상을 떠났지만….
회갑을 맞이하는 당신들에게
나는 13년 전에 복잡하고 어지러운 도시를 떠나 어릴 때 내가 살던 곳과 같은 작은 산골 마을에 뿌리를 내렸다. 이 나이에 13년째 마을 청년회장(?)을 맡고 있다. 도시에서 나를 돌아볼 새도 없이 바쁘게 살았으니, 이제 남은 삶은 작물을 가꾸듯 살고 싶다. 외로움을 벗 삼아 산골 이웃과 아이들과 함께 배우고 깨달으며 살아가는 맛이 아주 깊고 그윽하다.
아스팔트와 시멘트 숲을 떠나 자연의 소리를 들으며 산밭에서 땀 흘리며 일하다 보면 어느새 내 몸에서 ‘사람 냄새’가 난다. 농부가 되고서야 내 몸에서 ‘사람 냄새’가 난다는 것을 알았으니, 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물려받은 땅 한 뙈기 없어 남의 논밭을 빌려 농사지으며 살아왔지만, 같은 해에 태어나 같은 하늘 아래 숨 쉬고 살아가는 벗들이 있어 든든하고 더없이 행복하다.
벗들이여, 이제 우리 나이 예순한 살이다. 나이를 먹는다는 말은 받아들인다는 뜻이겠지. 몸을 쓴 만큼 섬겨야 한다는 것을. 머리 쓴 만큼 비워야 한다는 것을. 뱉은 말 만큼 들어야 한다는 것을. 느낀 만큼 나누어야 한다는 것을. 받은 만큼 베풀어야 한다는 것을. 떠나는 그날까지 살아볼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벗들이여,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든 허둥거리며 바쁘게 살지 마시기를! 사람으로 태어나 바쁘게 사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마음이 강물처럼 깊어져 미련도 원망도 욕심도 그냥 내려놓을 수 있기를! 살다 보면 어찌 눈물 마를 날이 있으랴마는, 그 눈물로 메마른 세상 흠뻑 적실 수 있기를.
이어령(李御寧·83) 전 문화부장관은 언제나 만나서 이야기를 듣고 싶어지는 분이다. 이 시대의 멘토, 아무도 따를 수 없는 기억장치, 외장하드다. 어제 만났더라도 오늘 다시 만나면 새롭고 신선한 이야기가 샘솟는다. 그사이 언제 이런 걸 새로 길어 올렸을까 싶을 정도로 그에게는 늘 말이 차고 넘친다. 스스로 ‘아직도 비어 있는 두레박’, ‘여전히 늘 목이 마른 두레박’이라고 말하고 있을 만큼 새로운 ‘샘’에 대한 열정과 욕구가 강하기 때문일 것이다.
모든 사회적 자리에서 은퇴를 선언한 뒤 지금은 한중일비교문화연구소 이사장직만 유지하고 있는 그를 만나 AI(인공지능)와 산업혁명으로 대변되는 새로운 문명과 시니어 세대의 삶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이 글은 10월 중순 서울 종로구 평창동 자택에서의 대면 대화와 그 뒤의 이메일 인터뷰를 종합한 것이다.
우선 시니어의 관심사인 건강문제부터 질문했다. 올해 83세인 이 이사장은 종전 그대로 활기차게 말했지만 4년 전 병을 만나 세 번이나 수술을 받은 상태다. 그런데 투병이나 치병(治病)이 아니라 병과 함께하는 친병(親病)을 말하고 있었다.
요즘 어떠신가요.
“글 쓰는 사람들이 병이 나면 글을 못 쓰게 됩니다. 자기가 겪은 불행한 일은 글로 쓸 수 있으니 불행까지도 재산이 됩니다. 그러나 병은 그렇지 않지요. 병이 나면 서양에서는 구술을 많이 하지만 우리말은 논리적 바탕이 약해 말한 걸 풀어놓으면 주술(主述)관계가 안 맞고 비논리적인 경우가 생깁니다. 그래서 구술하는 경우는 드물어요. 나는 컴퓨터를 일곱 대나 가지고 있는데 병이 나니 그게 다 소용이 없더군요. 우선 키보드를 치기 힘들고 모니터 보기도 힘들고. 그래서 전자펜으로 필기를 해 텍스트 파일로 바꾸고 있어요. 그런데 나는 조사(助詞) 하나 가지고 온종일 씨름할 정도로 까다로운 사람인데 불편할 수밖에 없지요. 병이 나자 글도 못 쓰고 구술도 못 하고 써야 할 글은 많은데 아무것도 못 쓰니까 병 자체가 글 쓰는 사람에게는 그대로 글을 쓰는 재산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부디 건강하세요. 나처럼 병으로 시달리지 마시고.”
병의 문학적·문화적 의미가 크군요.
“사람들은 병이 나면 피해요. 피병(避病)이야. 병은 자랑하라지만 실제로는 직장인이건 정치인이건 밝히면 손해니까 속이고 피하지요. 그런데 지병(持病)이라는 말이 있잖아? 휴대전화처럼 병을 갖고 다니는 거지요. 옛날 선비들의 글을 보면 ‘강호(江湖)에 병이 깊어’ 이렇게 읊거나 답장에 꼭 병 이야기를 하곤 했지요. 늙고 병든 몸이라는 걸 내세워 정치적 수난을 피하고 정쟁의 위험으로부터 피했어요. 병을 자기 재산으로 쓰는 사람들이 있더라는 거지. 그래서 한국에서는 병이 갖는 문화적 의미가 큽니다. 당쟁 사화(士禍)가 많았던 시절, 병이 오히려 목숨을 지켜준 일이 많았지요(웃음). 근데 병은 원수도 그런 원수가 없어요. 내가 건강했더라면 하고 땅을 쳐도 시원찮아. 그런데 병까지도 인간을 이길 수 없게 하는 방법은 친구로 삼는 거지요. 적으로 맞서 싸우면 병에 이길 수 없어요.”
그동안 그런 마음을 작품으로 쓰신 게 있으면 소개해주십시오.
“많이 썼지요. 그런데 다 메모 정도이고 알파고 때문에 쓴 시 하나가 생각나는 군요. 정보시대에는 숨을 곳이 없다는 내용입니다.”(‘이어령의 근작 시’ 참고)
이사장님은 은퇴를 선언했지만 정보시대는 그걸 허용하지 않는 거지요?
“은퇴 후 스마트폰을 없앴으면 신문사 전화를 안 받았을 것이고 그랬으면 알파고에 대해 전화 인터뷰를 하고 봇물 터지듯이 라디오 TV에 나가 말을 하지 않았겠지요. 올해 탄생 200주년을 맞은 의 저자 헨리 데이비드 소로(1817~1862)는 은퇴에 관한 책 한 권을 썼지만 정보시대에는 은퇴가 불가능합니다. 정보시대에는 숨을 곳이 없지요. 그래서 TV, 인터넷, 휴대전화 일체를 일정 기간 플러그 오프하는 것을 정보단식이라고 합니다. 요즘 아이들에게 영화배우 사진을 보여주고 그 표정에 나타난 감정을 물으면 제대로 읽고 대답할 줄 아는 아이가 반도 안 된다고 해요. 하지만 스마트폰을 빼앗고 1주일 동안 캠프생활을 하게 한 뒤 같은 테스트를 하면 훨씬 능숙하게 사진 속 인물의 감정을 읽어요. 스마트폰 대신 서로의 얼굴을 보고 감정을 나눈 결과죠. 사람의 안면을 보지 않고 화면을 보는 시대의 아이러니라 할 수 있습니다.”
혹시 자찬명(自撰銘) 같은 글을 써놓으신 게 있는지.
“그런 건 없습니다만 스스로 묘비명을 쓰라고 한다면 ‘평생 퍼내도 퍼내도 항상 갈증을 느껴 우물을 판 사람’이라고 말하겠어요. 영원히 두레박의 갈증을 가지고 평생 살아온 사람. 두레박은 늘 비어 있어야 물을 퍼낼 수가 있지요. 이 비어 있는 것이 갈증입니다. 영원한 갈증이지요.”
스스로 우물을 파는 사람이라고 말해오셨는데, 요즘 어떤 우물을 찾고 있습니까?
“지금 파고 있는 우물은 아주 특이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판 우물은 주로 글로, 펜으로 판 것입니다. 문학평론, 에세이, 소설, 희곡, 그리고 시나리오까지 많은 땅에서 우물을 파왔죠. 그런데 이번에는 글이 아니라 말입니다. 이야기꾼이 되는 것입니다. 이젠 문학평론가나 인문학자가 아니라 나무꾼처럼 이야기꾼이 되는 것이지요. 책을 읽기 전 어렸을 때 나는 할머니, 어머니로부터 옛날 얘기를 듣다가 잠들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건 꼬부랑 할머니가 꼬부랑 지팡이를 짚고 꼬부랑 고개를 넘어가는 이야기였지요. 꼬부랑 할머니가 한 고개도 미처 넘기 전에 잠이 들었지요. 꼬부랑꼬부랑, 꼬부랑길을 따라 고개를 넘다 보면 어느새 잠이 듭니다. 이제는 내가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줄 차례입니다. 팔십이 지난 이제야 그 꼬부랑 할머니가 한국인인 우리를 낳아주신 생명력이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힘없어 보이는 그 할머니가 바로 보릿고개를 넘고, 나운규와 같이 일제 압박시대에 아리랑고개를 넘고, 전쟁과 가난과 모든 수난의 고개를 넘어온 영웅이었던 것이죠. 노자가 ‘곡신불사(谷神不死) 현빈(玄牝), 즉 골짜기의 신은 죽지 않는다, 이를 현묘한 암컷이라고 한다’고 했듯 그것이 바로 할머니의 생명력의 원천이었던 거죠. 그리고 그 지팡이는 미사일이나 원폭이 아니라 생명력을 지탱해주는 자연의 힘이었던 겁니다. 마녀의 요술지팡이도 아니고 신선의 지팡이도, 개화기 때 개화장(開化杖)이라고 했던 서양의 단장도 아니었던 겁니다. 한마디로 폭력의 몽둥이가 아닙니다.”
‘한국인 이야기’를 쓰고 계신다는 거군요. 신문에도 연재하고 방송에서도 들려줬던 그 글을 마무리하시는 건가요?
“반은 맞고 반은 틀립니다. 시즌1밖에 쓰지 못한 ‘한국인 이야기’를 전부 정리하면 12권이 됩니다. 물론 그것을 정리 중이지요. 하지만 전혀 새로운 이야기의 우물 파기는 알파고에 관한 것입니다. 왜 하고많은 땅 다 두고 일본, 중국 제쳐놓고 구글이 개발한 인공지능 알파고가 서울 광화문에 와서 전 세계에 AI 시대를 선포했겠습니까. 바둑을 두기 위해 온 게 아니라 알파고는 바로 우리 호주머니 속 스마트폰의 혁명을 일으키고 자율자동차가 되어 세계 모든 도시의 길을 달리게 될 겁니다.
그뿐이 아니죠. 병실의 환자들 머리맡에, 소외된 장애인들 곁에, 전쟁과 테러의 현장이나 폭력의 골목 속에서 알파고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인류를 위협하는 것이 되느냐, 또는 꼬부랑 할머니의 지팡이처럼 인류를 도와주는 기능을 갖게 될 것이냐 그것이 한국인 손에 달렸다는 거죠. 할머니의 꼬부랑 지팡이는 곤봉이 아니기 때문이죠.”
왜 하필 알파고에 대한 이야기입니까?
“이유가 있어요.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대학을 떠날 때의 내 마지막 강의가 바로 인공지능에 관한 것이었지요. 당시 미국의 컴퓨터과학자 빌 조이의 ‘왜 미래는 우리를 필요로 하지 않는가(Why the future doesn't need us)’라는 글을 학생들에게 읽히고 리포트까지 받았어요. 그 글은 ABC(Atom, Bio, Chemical) 기술(그러니까 우리가 말하는 화생방 기술이죠)이 21세기에는 GNR(Genome, Nano, Robotics)로 변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어요. 인공지능, IT(정보기술)가 이 기술들과 결합되면 인류는 파멸할 것이라는 경고였죠. 그런데 레이 커즈와일이라는 미국 기업인은 그러한 시대를 싱귤래리티(Singularity)라 부르면서 2045년이면 천지개벽해서 인간이 불로장생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커즈와일이 바로 알파고를 만든 구글의 AI 분야에서 고문직을 맡고 있는 사람입니다. AI는 과학기술이 아니라 인류 문명의 문제이고 그 기술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특히 바둑권 문화인 아시아에 큰 영향을 줄 것입니다. 우리 자손들을 위한 한국인 이야기가 되는 것이지요.”
AI와 4차 산업혁명 등은 아주 중요한 화두이지만 시니어 세대는 낯설고 어려워합니다. 이런 시대에 어떤 생각과 자세로 살아야 할까요.
“4차 산업혁명은 생각 혁명으로 연결돼야 합니다. 그동안 전문 분야에서 인간처럼 생각하는 도구는 일부 있었어요. 컴퓨터가 인간을 대신해서 탄도탄 발사 거리를 계산하는 식으로 군사용으로 사용되고, 이어 기업에서 물자를 만들 때 컴퓨터를 썼어요. 군에서 IT나 컴퓨터를 사용하면 강병(强兵)이 되고, 기업이 사용하면 부국(富國)을 이루었던 거지요. 그런데 IT를 금융과 연결해 금융공학을 만들어 파생상품을 판 결과 리먼브러더스 파산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이제 산업사회와 부국강병의 패러다임은 끝났습니다. 4차 산업혁명에서 노동과 작업은 인공지능(AI)이 합니다. 사람은 생각을 해야 합니다. 검색에 매달리지 말고 사색을 해야 합니다.”
AI를 잘 활용해야겠군요. 시니어 세대일수록 백세건강, 수명연장을 위한 인공지능의 기여에 관심이 높습니다.
“알파고는 사람보다 글을 잘 쓰지 못합니다. AI가 효도를 하고, 사랑을 알겠습니까. 그러나 AI 시대의 의학은 치료 위주에서 병을 미리 가려내주고 발병의 위험을 알려주는 예방의학, 미리 수술해주는 선제의료, 나아가 개인별 건강을 설계해주는 맞춤의학으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부작용도 참 많지만 좋은 목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게 얼마나 많습니까? 결국 인공지능이 문제가 아니라 인간지능이 문제입니다. AI가 발달했다고 무서워할 게 없습니다. AI가 하지 못하는 심성이나 덕성, 아름다움, 봉사를 사람이 하면 됩니다. 이제 가치 패러다임을 바꿔야 합니다.”
지금까지 늘 즐겁게 일을 해오셨는데, 그런 자세야말로 은퇴 세대, 시니어 세대에게 절실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누가 시켜서 일을 한 적이 없어요. 다 좋아서 한 거지요. 장관도 안 한다고 고사하다가 초대 문화부장관이라고 해서 했습니다. 각종 이벤트를 많이 했는데, 먹고 놀면 안 됩니다. 놀면서 먹어야 합니다. 내가 돈벌이하자고 책 쓰고, 88서울올림픽을 하고, 교수를 했으면 다 실패했을 겁니다. “지지자불여호지자 호지자불여락지자(知之者不如好之者 好之者不如樂之者,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는 공자님 말씀대로입니다. 인터넷 시대의 지지자(知之者)는 인간이 아니라 AI입니다. 지지자 위가 호지자(好之者)이고, 또 그 위가 낙지자(樂之者)입니다. 바로 지호락(知好樂)이지요. 연애가 노동이라면 비 맞아가며 연인을 기다리겠어요? 골프가 땅을 파는 노동이라면 18홀을 돌 마음이 들겠습니까? 이 지호락을 추구하면서 임도 보고 뽕도 따는 마음과 자세로 사는 게 중요합니다.”
이어령의 근작 시
차멀미가 나면 내리시게.
그게 자동차라면 길 이름 묻지 말고
그게 기차라면 역 이름 알 것 없이
얼른 내리시게나.
그런데 그게 배멀미라면 어쩌시겠나.
그게 비행기멀미라면 어쩌시겠나.
그래도 눈 딱 감고 뛰어내리시게나.
바다 속이면 발광어(發光魚)가 되고
하늘이라면 별똥별이 되겠지.
그러나 묻지 마시게.
그게 TV, 인터넷, 정보멀미라면 어쩌시겠나.
옛날 사람들은 ‘사람’멀미가 나면
산림 속으로 숨었지만
정보시대에는 숨을 곳이 없으니
황진이의 시조 한 수라도 읊어보시게.
‘나도 몰라 하노라’
평범한 문학관을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충청북도 영동군 매곡면에 위치한 이 작은 문학관은 지자체나 정부의 지원을 받는 안정된 사람들에 의해 운영되는 문학관과는 완전히 다르다. 소설가 이동희에 의해 운영되고 있는 농민문학기념관은 그의 소장품들과 사유물 그리고 농민문학에 관한 자료들을 모아놓은 곳이다. 번듯한 입구나 잘 차려 입은 안내인은 없지만 농민문학이 표현하고자 하는 삶의 치열함이 느껴진다. 이곳을 어떻게 이용하는가에 따라 누구에게는 훌륭한 박물관이 되기도 하고, 누구에게는 학교 또는 도서관이 되기도 한다.
둘러보니 농민문학을 이야기할 장소로 여기만 한 곳이 있을까 싶다. 전형적인 농촌마을. 당연히 대중교통을 이용한 방문은 불편하다. 영동과 물한을 왕복하는 버스가 문학관 앞 노천리에 서지만 하루 다섯 번만 운행된다. 다행히 고속도로가 멀지 않아 경부고속도로 황간IC로 나오면 차로 20분 거리다.
과거의 흔적만 남은 마을 앞 가게 터를 지나 골목으로 좀 걸어 들어가자 마을회관이 보이고 그곳을 지나니 농민문학기념관 앞이다. 관장이자 창립자인 소설가 이동희의 사택을 겸한 곳이기 때문에 주의 깊게 들여다보지 않으면 가정집과 구분하기 힘들다. 마당에는 작은 텃밭까지 있다.
민초의 삶 다룬 농민문학
이곳을 방문하기 전에 알아야 할 것이 있다. 농민문학에 대해서다. 농민문학에 대한 정의는 시대에 따라 조금씩 변화되어왔다. 이데올로기의 갈등이 시작됐던 1930년대 초에는 일종의 노동자문학의 하위 개념으로 빈농을 계몽해 사회주의 사상을 따르도록 하는 수단으로도 활용됐다. 이후 농촌의 자연이나 지방색, 농민의 생활을 그린 문학으로 변화해왔다.
대표적인 농민문학으로 손꼽히는 작품은 이광수(李光洙)의 , 이기영(李箕永)의 을 필두로, 이무영(李無影)의 ·, 김동리(金東里)의 등이다. 이동희 관장은 농민문학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4차 산업시대에 접어든 농촌은 과거와 많이 바뀌었지만 땅과 흙은 변한 것이 없어요. 농민에게는 쌀이 떨어지고 보리도 나지 않는 절량기를 버텨온 정신이 있어요. 흙의 마음 말이에요. 농민문학은 그것을 표현하고 추구하는 문학입니다. 밭 갈고 논매는 이야기보다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직면해야 하는 삶의 이야기가 소재가 됩니다.”
소설가 이동희 일생의 자료 모아놔
농민문학기념관이 설립된 것은 2005년 2월 10일. 문학관 설립에는 이동희 관장의 스승인 소설가 이무영을 기념하기 위한 취지도 있다. 이동희 관장은 문학 지망생 시절 단국대학교 국문과에 진학하면서 이무영 교수와 인연을 맺었다. 이후 그의 가르침을 통해 소설가로 활동하게 되었고, 단국대학교에서 스승의 강의를 이어받아 1978년부터 2003년까지 국문과 교수로 강단에 섰다. 대표작으로는 소설 과 등이 있다.
문학관 설립을 위해 이 관장은 한국전쟁 때 소이탄을 맞아 불탄 옛집 터에 흙벽돌을 쌓기 시작했다. 너와로 지붕을 이어 복원한 생가에 모교 연구실에 있던 책과 자료를 5톤 트럭으로 네댓 번 날라야 했다.
현재 농민문학기념관에는 농민문학 작가인 이무영 선생의 작품을 비롯해 소설가 류승규, 오유권, 박경수, 김용호, 구상, 권웅 등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또한 영동 지역의 작가 박희선, 박운식, 장지성 등의 작품도 만날 수 있다.
이 문학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도서는 단행본과 잡지를 포함해 약 5000권 정도다. 여기에는 1930년대 농민문학의 영향을 받은 북한의 책들과 잡지 도 포함되어 있다. 연변문학예술연구소에서 편찬한 , 한글 소설을 출간하는 중국 출판사의 단행본도 전시되어 있다.
이 관장은 이 문학관을 기반으로 한 모임 ‘한국농민문학’을 바탕으로 계간지 도 출간 중이다. 한국농민문학 회원은 약 500명. 1990년에 창간호를 발간해 2017년 여름호까지 통권 102호를 출간했다.
지역 주민들의 사랑방 역할도 해
규모는 작지만 이 문학관을 통해 다양한 행사도 진행하고 있다. 지역 주민을 대상으로 창작교실 ‘농민문학 사랑’을 운영하고 있고, 전원문학 콘서트도 연다. 얼마 전에는 농민문학 4대 작가 이무영, 류승규, 오유권, 박경수의 활동전도 열었다.
때로는 인근에 위치한 매곡초등학교 학생들의 글짓기 사랑방이 되기도 한다. 전교생이 30여 명에 불과한데, 그중 절반가량이 문학관에서 글쓰기를 배운다. 이 관장은 “아이들의 삶의 수양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운영하고 있는데, 아이들 반응도 좋다”고 설명한다. 학생들이 관심 있는 책을 선정해 독서 후 토론도 하고 독후감 쓰기, 시·수필·소설에 대한 설명이 수업으로 진행된다. 이 관장의 희망은 문학관 자료들이 필요한 많은 사람에게 쉽게 쓰이도록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관련 협회와 다른 문학관, 박물관과의 교류를 통해 안목도 넓히고 공부도 많이 하고 있어요. 시골 농촌의 작은 시설이지만 세계적인 문화유산과 호흡하고 있는 셈이죠. 소장품 등록이나 데이터베이스 작업을 통해 궁벽한 지역의 자료가 중앙으로 연결되도록 하고 싶어요. 또 한 집 한 집 민족의 애환을 지니고 있는 지역 농가를 개발해 마을 전체가 박물관으로서의 기능을 갖게 하는 연구도 진행하고 있습니다.”
▲ 관람 정보
주소 충북 영동군 매곡면 노천리 622-3
전화 043-743-5186
관람시간 10:00~17:00
휴관일 매주 월요일, 명절
관람료 무료
올해 추석 연휴는 오래전부터 관심의 초점이었다. 몇십 년 만에 나타난 개기일식이라도 되는 양 소문은 무성했고 언론은 떠들썩했다. 온갖 이유를 붙여 중간에 낀 2일을 휴일로 지정해야 한다는 압력이 줄을 이었고 결국 그 소망은 실현되었다. 결혼을 앞둔 신부들은 무려 열흘이나 되는 기나긴 추석 명절을 시댁에서 보낼 수는 없다며 결혼을 연기했고, 예측대로 공항은 역대 최대의 여행객을 감당해야만 했다.
늘 틈만 나면 함께 여행할 것을 제안하던 딸애가 이번에는 아무 말이 없다. 그러면 그렇지! 드디어 연애가 시작된 것이다. 빨리 좋은 사람 만나 결혼하라고 압력을 가해왔지만, 막상 여행 제안이 없으니 왠지 섭섭하다. 그래서 이번엔 본의 아니게 역대급 긴 휴일에도 불구하고 오롯이 집에만 박혀 있게 되었다. 짧은 휴가에도 어딘가를 가야 직성이 풀리곤 했는데 이게 뭐람! 기나긴 날을 독수공방이라니.
원래 집에 있는 성격이 못되어 틈틈이 외출을 감행하며 모처럼 한가해진 도심을 쏘다녔다. 연일 북한의 핵무기 협박에도 기어이 100만을 넘긴 해외 여행객만 보면 이 나라의 경제가 매우 흥겨운 듯이 보였다. 그러나 많은 자영업자는 추석 당일에도 한 푼이나마 벌어보려고 문을 열고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고, 동네 시장 상인들은 추석 경기가 이럴 수는 없다며 우울한 얼굴들이었다.
일해야 그날그날 밥을 먹는 일용직 노동자들은 모처럼 휴가를 얻었지만, 돈이 없으니 남는 시간이 쓸모가 없다. 버스 기사와 지하철 기관사들은 연휴와 아무 상관이 없다. 평일이라면 무료급식으로 끼니를 해결하던 독거노인들도 긴 휴가가 오히려 난처하다. 그래서 그런지 도시를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다니는 것도 이내 싫증이 난다. 그렇지! 우리 삶의 실상이 잠시 해외여행으로 눈 감는다고 감춰지지 않는다.
남은 기간은 편하게 거실에 앉아 TV와 친구가 되기로 했다. 그러나 그곳도 돌아가는 상황이 썩 좋지는 않은 모양이다. KBS, MBC 노동조합의 파업으로 대부분 재방송으로 땜빵에 여념이 없었다. 예능은 거의 ‘먹방’으로 때우고 있었고 유명인들이 해외에 나가 하루종일 대여섯 끼를 먹는 엽기적인 프로까지 전파를 탄다. 뭔가 정상이 아니다. 어쩌면 모두 암울한 현실을 잊고자 도피하는 것은 아닐지.
결국, 역시 재탕이나마 영화라도 보는 수밖에 없다. 킬링타임용 영화가 대다수였지만 개중에 관심 가는 영화도 있다. 철 지난 지 한참 되는 낡은 영화인데 왠지 보고 싶은 영화가 눈에 띈다. 톨스토이 원작의 다. 지금 시국이 그래서인지 아니면 그나마 제일 품위가 넘쳐서인지 모르겠으나 무려 밤 두 시에 끝나는 긴 시간을 졸지 않고 연속 5일간 버티며 끝까지 보아냈다.
대학 때 책으로 읽다가 몹시 지루해했었고 그나마 영화로 본 기억이 선명한데 근 40년 만에 다시 보니 새롭게 읽힌다. 그동안 머릿속에는 영화의 주인공이 안드레이로 각인되어 있었는데 다시 보니 톨스토이가 사랑한 인물은 의외로 피에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때는 보이지 않던 미천한 농민으로 포로 생활 시 피에르에게 영향을 미친 플라톤이 바로 작가를 대변하고 있다는 깨달음이 왔다.
긴 추석 연휴의 포로 생활을 하는 동안 그동안 보지 못하던 여러 가지를 느낀 것은 뜻하지 않은 수확이었다. 나이 탓일까? 안드레이보다 피에르를 다시 보게 된 것도 기나긴 휴일에 얻은 작은 기쁨이었다.
오늘날 세계정세는 이른바 G2에 의해 좌우되는 시대다. 내우외환의 위기에 봉착한 나라의 현실이 너무 답답해 이 글을 쓴다.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다 함께 모색해보는 시간이 되면 좋겠다.
트럼프는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America First!”를 선언했다. 자국의 이익 창출을 위한 보호무역주의 등의 정책을 펼치겠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한미 간에 체결된 FTA 추가 협상 등 앞으로 예상되는 미국과의 많은 문제를 해결해나가기 위한 대책들을 차근차근 준비해야 할 시점이다. 현재 미국은 한국의 정세를 지켜보면서 대통령 선거 이전까지는 시간을 주고 있는 것 같다.
이에 맞선 중국의 시진핑은 사드 문제로 우리나라를 괴롭히고 있다. 한중 간 FTA가 체결되었지만 교묘하게 합의사항에 저촉되지 않는 방법을 찾아 경제적 불이익을 주면서 사드와 관련한 압박을 계속하고 있다. 사드 문제는 북핵 개발에 따른 국가안보 차원의 군사적 문제로 재고가 불가한 상황이다. 미국이든 중국이든 자국의 경제적 이익을 얻기 위한 행동은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우리 정부는 당연히 WTO에 제소해 1차적으로 대응해야 할 것이다. 나아가 중국의 시장경제지위(MES, Market Economy Status-교역 상대국의 경제활동이 정부가 아닌 시장원리에 따라 결정되고 있다고 인정할 때 부여하는 지위로 우리나라는 2015년 중국을 인정한 바 있으나 지금 중국이 취하는 행동을 보면 이를 취소해야 할 것 같다)도 취소해 중국 정부가 얼마 전 세계경제포럼에서 언급한 시 주석의 공언과 달리 무역자유화에 역행하는 나라임을 전 세계에 알림으로써 압력에 굴하지 말고 당당히 대처해나가야 할 것이다.
강대국끼리 서로 싸우면 서로 큰 상처를 입게 되니까 결국 중국은 만만한 나라를 괴롭히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싸움을 하고 있다. 우리나라가 고래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처지가 된 것이다. 그런데도 정치권은 무책임한 발언으로 일관하면서 국가안보를 위협하고 있으니 이것이 내우외환의 위기가 아니고 무엇일까.
대통령이 되고 싶은 사람들은 경제를 망치고 나라를 망하게 하는, 경제학 족보에도 없는 경제민주화로 어리석은 국민들의 표를 얻기 위한 행보를 계속하고 있다. 이런 나라의 정치인들을 보며 미국과 중국은 과연 어떤 생각을 할까? 각 정당의 대통령 후보자는 지금부터라도 엉터리 사탕발림의 복지정책으로 표를 얻으려 하지 말고 ‘위기의 대한민국을 어떻게 구할 것인가?’라는 이슈를 제시하면서 당당하게 도전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미국과 중국이 지금처럼 우리나라를 무시하는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이다. 남미의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을 보라. 사회주의 체제의 복지정책으로 대통령이 된 사람들이 나라를 망하기 일보 직전까지 몰아가고 있다. 모든 정치인들, 특히 대선 후보는 이를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위기는 기회라고 했다. 경제를 살리기 위해 국회는 법인세 인상 등 기업을 옥죄는 법안 만드는 것을 당장 중지하고, 검찰 당국은 기업인들에게 구속영장을 남발하는 행위를 즉각 중지하고 이들이 기업가 정신을 갖고 국가 경제를 살릴 수 있도록 기회를 줘야 할 것이다. 거국적으로 보면 대기업의 재산은 오랜 세월이 흐른 뒤 결과적으로 국가의 재산이 될 것이다. 따라서 국민들도 대국적으로 기업인들을 격려하고 지원해야 한다. 경제가 살아야 그 구성원들이 받는 분배의 몫도 커질 것이기 때문이다. 경제를 활성화해야 비로소 진정한 분배의 정의가 실현될 수 있다. 정치인들은 경제는 경제인들에게 맡기고 최소한의 법질서를 유지해나가야 할 것이다.
오늘날의 대기업들은 한강의 기적을 일궈온 국가적 기업들이 아닌가? 불확실성의 시대임에도 삼성전자는 중국 사드의 보복에도 불구하고 경제를 발전시켜나가고 있지 않은가? 한국은 이러한 저력이 있는 나라다. 정치인들이여, 제발 악법을 만들지 말고 규제를 철폐하고 노동혁신 등 4대 혁신을 일구어 비록 그 길이 힘들고 험난한 길이라 해도 국가가 발전해나갈 수 있는 틀을 만들어주기 바란다.
정치인들은 과도한 대통령 권한을 축소하고 입법, 행정, 사법이 서로 균형을 이루고 견제하도록 해서 국가가 제대로 운영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필요하면 헌법을 바꿔서라도 부정부패를 일소하고 국가가 발전할 수 있는 틀을 마련하는 데 전력을 다해야 할 것이다.
사법부는 좌파와 우파가 어떤 압력을 가하고 위협을 한다 하더라도 사법부의 판단과 결정을 믿고 준수할 수 있도록 정직하고 소신 있는 판결로 국가의 법 질서를 사명감을 갖고 세워주기 바란다. 국회는 입법부로서의 역할을 다해야 한다. 진정으로 국가 경제와 발전을 위한 법과 정책을 만들어야지 국민의 표를 얻기 위한 사탕발림의 경제민주화법을 만드는 것을 당장 중지해야 한다.
“악법도 법이다”라고 말한 뒤 독배를 마신 소크라테스처럼 국민들은 헌재의 판결 결과를 존중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노사는 서로 손을 잡고 함께 이 어려운 난국을 함께 돌파할 수 있도록 협력하는 시스템을 구축해나가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하면 아무리 초불확실성의 시대가 도래하고 중국과 미국이 압력을 하고 힘들게 해도 우리의 조상인 고구려인의 기상으로 이를 극복하고 나아가 언젠가는 G3의 대열에 합류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와 같은 무지한 사람이 이렇게 읍소를 하는데 지성인들이고 선량한 사람들이 가만히 있어서야 되겠는가? 알고 행하지 않으면 무지요, 아는 것을 행하면 지식인이라는 말이 있다. 우리 모두 사명감을 갖고 아는 것을 소신껏 행하는 용기 있는 국민이 되자. 그리고 함께 국난을 타개하자. 이런 힘과 자세를 보여줄 때 일본은 독도를 자기 땅이라고 우기는 것을 포기하고 중국은 지금과 같은 행태를 보일 수 없을 것이다. 미국도 이미 합의된 FTA를 재협상하자고 하지 않을 것이다. 마치 반미운동으로 전개될까 염려되어 한국에 대해 일체의 제재조치를 취하지 않고 지켜보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에게는 그럴 힘과 지혜가 축적되어 있는 반만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국민이 아닌가?
정유년인 올해는 정유재란(1597.1~1598.12) 발발 420주년이다. 임진왜란으로부터는 427주년. 임진왜란이 치욕의 역사였다면, 정유재란은 왜군이 충남 이북에 발도 못 붙인 구국승전의 역사다. 그 전적지는 진주, 남원, 직산 등 삼남지방 곳곳에 있지만 옛 자취는 찾기 어렵다. 뚜렷한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은 왜군이 남해안을 중심으로 농성하던 성터들이다. 주로 경남 중동부 해안에 밀집한 왜성 터들도 오랜 세월 허물어지고 지워져 갈수록 희미해져간다. 왜성이라는 이유로 사적지 지정이 해제된 탓이다. 근래 일부 지방자치단체는 그 중요성에 눈을 떠 옛 모습대로 복원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는 아직도 방치되어 있다. 치욕의 역사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다. 더 늦기 전에 지금 모습이라도 남겨둬야 한다. 더 사라지고 훼손되기 전에 역사의 현장 보전의 필요성을 일깨우고, 정유재란의 역사적 의미를 천착하기 위해서라도 그 흔적을 돌아볼 필요가 있어 에 게재하기로 한다.
문창재 언론인(前 한국일보 논설실장)
정유재란 때 울산왜성은 일본군 최전선 보루였다. 위도 상으로는 가장 북쪽이었고, 방위로는 일본과 가까운 동쪽 끝이었다. 일조유사시 언제라도 도망쳐 가기 쉬운 위치였다. 호랑이 같은 조선수군도 없고, 망망대해와 맞닿아 철수작전에 큰 장애가 없는 전략적 요지였다.
그런 지리적 요인에다 왜군 선봉대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본진이어서 울산성은 정유재란 전투 중 손꼽히는 현장이 되었다. 허물어진 성벽만 남은 학성공원에서는 전투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성이 무너진 것은 세월의 작용이지, 전투 때문이 아니다.
서울을 떠나 밤늦게 돌아온 울산 나들이에서 그 처참했다는 울산왜성 전투의 흔적은 찾아보지 못했다. 성터 꼭대기에서 내려다본 천지개벽 같은 변화에 세월의 두께만 느꼈을 따름이다. 먹을 것이 없어 적병의 시신을 뒤졌다거나, 기갈을 면하려고 제 오줌을 받아 마시고, 말을 잡아 피를 마셨다는 아수라장을 엿볼 단서는 찾아내지 못했다.
울산왜성은 3개 층으로 된 구조다. 해발 25m 지점에 산노마루(三之丸), 조금 위에 니노마루(二之丸), 맨 위에 혼마루(本丸)가 있었다는데 지금은 석축 일부만 희미하게 남아 있다.
큰 돌을 다듬어 경사면에 비스듬히 축대를 쌓은 것이 전형적인 왜성이다. 성문을 들어서면 급하게 방향을 꺾도록 돼 있는 호구(護口)도 그렇다. 기마병이나 보병에게 성이 뚫려도 바로 본성으로 달려갈 수 없도록 여러 굽이를 만들어 속도를 늦추려는 설계다. 호구에서 병력이 주춤거리는 사이 침입자에 대한 공격을 쉽게 하려는 의도였다.
그때 없었을 것은 너무 많았다. 우선 허허벌판이었을 격전지가 지금은 대도시 울산의 도심지가 되었다. 420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무너져 내린 성터에 수목과 초개가 우거져 울산성은 야산의 모습으로 변했다.
격전지가 공원으로 변해 울산 시민들이 가장 사랑하는 장소가 된 것이 제일 큰 변화일 것이다. 해발 50m 성 마루에 오르면 사방에 보이는 것은 온통 아파트와 빌딩 숲, 그리고 공장들이다. 상전벽해라는 말로는 표현이 한참 미흡하다. 그 모습을 내려다보면서 뜬금없이 대중가요 ‘울산 큰 애기’가 떠올랐다. 1960년대 초부터 방방곡곡에 울려퍼진 이 노래 가사가 너무 신기하고 이채롭게 느껴진다. 두 세상을 살고 있는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다.
내 이름은 경상도 울산 큰 애기 / 상냥하고 복스런 울산 큰 애기 / 서울 간 삼돌이가 편지를 보냈는데 / 서울에는 어여쁜 아가씨도 많지만 / 울산이라 큰 애기 제일 좋대나 / 나도야 삼돌이가 제일 좋더라.
반세기 남짓 전 울산은 큰 애기와 삼돌이의 연정이 아름답던 동해안 갯마을이었다는 증언이다. 눈 아래 펼쳐진 풍경과 비교하자니 격세지감이 느껴진다. 50년 세월의 간격이 이러할진대 420년 세월이야 어떠하랴.
이 노래 가사 2절에는 “성공할 날 손꼽아 기다려만 준다면 좋은 선물 한 아름 안고 온대나”란 소절이 있다. 답답한 시골에서는 꿈도 꿀 수 없는 ‘성공’을 향해 서울에 간 연인을 다소곳이 기다리면서 선물받을 날을 꿈꾸는 큰 애기의 모습이 너무 아름답지 않은가.
울산성은 차츰 지옥으로
울산왜성 전투가 왜병들에게 얼마나 비극적이었는지는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 성을 빼앗고 이 땅에서 왜를 몰아내지 못한 전투 결과로 보면 분명 조명연합군의 패전이지만, 왜군은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었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그 비극성이 잘 전해져온다.
영남 알프스라 불리는 서쪽 산악지대에서 발원한 태화강은 동쪽으로 곧게 흐르다가 급히 동해로 든다. 그 하구 언저리에 제법 널찍한 들판이 형성되어 까마득한 옛날부터 인간이 터를 잡는 살기 좋은 땅이었다. 들판 한가운데 외로이 솟은 야산에 가토 기요마사는 성을 쌓았다. 급히 자리를 잡았던 탓인지 성안에는 식수가 없었다. 남쪽으로 좀 더 가면 임진년에 쌓은 서생포성이 있는데, 태화강 너머에 진을 치라는 히데요시의 명령을 거역하지 못했던 걸까. 직산 싸움에서 패하고 도망쳐 내려가다가 잡은 입지라 했다.
조명연합군은 그 성을 둘러싸고 군량과 탄약 등의 보급품과 식수공급 루트를 차단했다. 벌판에 우뚝 고립된 성을 몇 겹으로 둘러싼 조명연합군 포위망에 갇혀 현지조달도 막힌 상황이었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와 가토 기요마사의 운명적 대결을 그린 엔도 슈사쿠(遠藤周作)의 소설 에는 당시의 참상이 이렇게 그려져 있다.
“기록에 의하면 일본군 병사들의 다리는 가느다란 막대처럼 되었고, 그 때문에 각반이 흘러내렸으며, 얼굴은 여위어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한다. 물을 찾아 야밤중 성 밖의 우물가에 가보면 우물 안에 시체가 던져져 있어서 물을 먹을 수 없도록 만들어놓았다고 한다. 성내의 소와 말은 모두 잡아먹었다. 그것이 동나자 적병의 시체에서 먹을 것을 구했다. 담벼락 흙을 빗물에 풀어 마실 때도 있었다. 두 달이 지나자 이젠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울산성은 차츰 지옥이 되어가고 있었다.”
여기서 말하는 기록이란 한 참전무사가 남긴 ‘조선이야기[朝鮮物語]’다. 아무리 목이 말라도 낮에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밤이면 우물을 찾아 성을 빠져나오지만 우물마다 돌로 메워졌거나 시체가 썩어가고 있었다. 위험을 무릅쓰고 태화강 강변을 찾아 나설 수밖에 없었다. 피로 물든 강물이라도 마시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지옥과도 같은 울산성에서 기아에 빠진 가토 기요마사의 농성군은 구원군의 손에 간신히 구조되어 한숨을 돌렸다. 4만의 조명연합군은 3만의 일본군을 보고 철수했다. 그들 역시 일본군의 총격으로 상당한 사상자를 냈기 때문이었다. 포위에서 해방된 농성군이지만 양식이 떨어진 그들은 종이를 씹고 담벼락의 흙을 파먹었다고 한다. 기요마사의 수염도 자랄 대로 자랐고, 뺨이 말라서 쑥 들어간 채 구원군 앞에 나섰다.”
4만 병력 조명연합군의 철수
울산성의 참상은 라는 기요마사 문서에도 나온다.
“성내의 사기 조상(阻喪)은 정점에 달했다. 식량과 식수가 없어 성병(城兵)은 벽토(壁土)와 종이를 먹었고, 자기 오줌과 군마의 피를 마시는 판이었다.”
이런 극한 상황을 겪은 가토는 훗날 구마모토 성을 지을 때 천수각 다다미에 고구마 잎줄기를 섞어 짜도록 했다. 식수난 경험으로 성내에 우물을 120개나 팠다. 지금도 당시의 우물이 20여 개 남아 있다.
일본 측 기록에 나오듯 4만 병력의 조명연합군은 완공도 되지 않은 평지성을 오래 포위하고도 왜군을 제압하지 못하고 물러났다. 먼 나라에 와 피를 흘리기 싫었던 명군 장수 양호(楊鎬)와 마귀(麻貴)가 내린 통한의 결정이었다. 35km 남쪽 서생포에서 달려온 왜군 1만3000명에게 배후를 공격당하자 싸워보지도 않고 철수한 것이다.
“중국 장수가 군대를 후퇴시키면서 먼저 보병을 내보내고, 스스로 기병을 거느리고 뒤를 막으면서 후퇴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 장수가 도망치는 것을 보고 산 위의 적들이 줄지어 내려와 한꺼번에 사살했는데, 보병 중에 살아 돌아온 자가 많지 않고, 기마병도 죽은 자가 얼마인지 모릅니다. 갑옷과 투구를 버리고 맨몸으로 탈출하기도 했는데, 아군의 사상자도 많았습니다. 당당했던 대세가 순식간에 꺾이고 다 죽어가던 적이 도리어 흉독한 기세를 멋대로 부렸으니 진실로 통곡할 일입니다.”
에 실린 이 한 줄의 보고서가 역전된 전투의 참상을 증언하고 있다. 용열한 원군 장수의 결정이 조선 민중을 고통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생생한 증거다.
울산왜성은 아직 완공도 안 된 상태였다. 포위작전을 조금만 더 끌었어도 승리는 저절로 굴러들어왔을 것이다. 조명연합군의 첫 공격이 12월 23일이었으니 착공 2개월여도 못 되었을 때였다.
맹렬하게 불화살을 쏘아
일본군의 출진기지였던 규슈 나고야(名護屋)성 임진왜란 박물관에 걸려 있다는 울산성전투도에는 전투 상황이 파노라마처럼 묘사되어 있다. 들판에 홀로 솟아 있는 울산왜성을 조명연합군이 개미떼처럼 둘러싸고 공격을 퍼붓는 장면이다. 전투 중에도 성안에서는 말을 잡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종군승려 케이넨(慶念)의 종군일기 에는 전투 상황이 이렇게 씌어 있다.
“아침에 연기가 솟아오르고 대포소리가 연달아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적군이 기습을 해왔다고 한다. 적군은 돌담 밑에서 맹렬하게 불화살을 쏘아댄다. 성안에는 물건들이 수없이 많은데 침구와 의복, 재물과 보석 등을 담은 상자에 불이 붙었다. 타오르는 연기 때문에 눈을 뜰 수가 없었다. 화재로 많은 무사와 인부들이 타죽었다.”
울산성 건축물 외곽에는 사방으로 삥 둘러 목조회랑이 설치되어 있었다. 바깥쪽으로 작은 창구를 설치해 거기에 총을 걸고 결사적으로 소총을 쏘았다. 수많은 창구에서 불을 뿜는 총격으로 조명연합군에 많은 사상자가 나왔다. 13일간의 전투에서 피아 1만2000명 가까이 죽었다는 기록이 전투의 참상을 말해준다. 연합군 포위망이 열흘 넘도록 이어지자 자포자기의 심정이 된 기요마사는 인근의 동료 장수에게 보낸 문서에서 자결의사를 비추기도 했다. 라는 일본 기록물에는 “나는 여기서 할복자살을 할 것이니 당신은 그 성에서 (할복) 하시오”라는 말이 나온다.
케이넨 일기에는 “드디어 물도 식량도 떨어졌다. 더 이상 성을 방어할 수 없게 되었다. 내일은 성이 적의 수중에 떨어질 것이다. 밤새 부처님의 자비에 감사드리고 그 마음을 읊는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기요마사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것은 인근에 주둔했던 일본군 지원 덕분이다. 왜성을 에워싼 조명연합군은 이런 상황에 대비해 태화강 하구를 봉쇄해 지원병력의 울산 접근을 차단했다. 바닷길로 울산에 온 병력이 격퇴당한 기록도 있고, 육로로 인근 양산에 온 적을 물리친 기록도 있다.
그러나 끝을 보지 못했다. 방심 아니면 포기였을 것이다. 기요마사 지원에는 숙적 유키나가 군대도 동원되었다. 둘은 불구대천지수 사이였지만 상대가 적군에게 함락되는 것만은 두고 볼 수 없었던 모양이다.
마지막 전투
울산왜성 전투는 정유재란의 마지막 전투였다. 너무 혼이 났는지 일본군은 그 뒤로 수성전에 전념했다. 그러다가 몇 달 뒤 히데요시 사망 소식이 날아들었다. 이를 계기로 임진·정유 7년 전쟁은 끝났다.
“성주님이 나에게 배를 타라고 하신다. 너무도 기쁘고 도무지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할 수가 없다. 성을 내려올 때 너무 기뻐서 눈물을 흘렸고, 마치 공중에 떠 있는 것 같았다.”
울산성을 떠나 일본으로 돌아간 병사가 남긴 이날의 감회 한마디가 전쟁의 비극을 잘 말해준다.
정유년에 다시 쳐들어온 왜군은 한양을 목표로 진군하다가 충청도 직산전투에서 조명연합군에게 패했다. 전열을 가다듬어 남쪽 해안으로 퇴각한 그들은 각 군별로 농성 준비에 들어갔다.
기요마사가 울산에 당도한 것은 그해 10월 말이었다. 기요마사 토벌을 목적으로 경주에 본진을 설영한 조명연합군에 맞서기 위해 기요마사는 태화강 북안에 성을 쌓기 시작했다. 임진왜란 때 쌓은 서생포성을 두고도 가까운 북쪽에 또 성을 쌓은 것은 히데요시의 명에 따른 것이었다. 한양을 다시 도모하려면 태화강 북안을 확보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축성에 동원된 병력은 가토의 부장(部將) 구키 히로다카(九鬼廣隆) 등 5개 부대 병력 1만6000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 밖에 일본에서 차출되어온 일반 농민 등이 강제노동에 동원됐다. 케이넨의 기록에 따르면, 그들은 새벽부터 산에 끌려가 건축자재 벌채에 동원되었는데, 조금이라도 게으름을 피우다 감독에게 들키면 목이 잘렸다 한다.
기요마사는 ‘일곱 자루의 창’이라 불린 히데요시 근습(近習) 가운데 주군의 총애를 한 몸에 받은 가신이었다. 입이 무겁고 충직한데다가 무술까지 뛰어났으니, 그만한 자격을 갖춘 사무라이가 없었다. 유키나가는 머리는 좋지만 무(武)가 부족하고, 이시다 산세이(石田三成)는 머리만 뛰어난 인물이었다. 게다가 그는 주군 히데요시 인척이었다. 기요마사의 어머니는 히데요시 부인과 시누이 올케 사이였다.
히데요시 문하에서 그는 단연코 으뜸가는 사무라이가 되었다. 타고난 체격 조건과 근면성, 주군과의 관계를 의식한 충직성이 그를 모범적인 무사로 만들었을 것이다. 무사로 인정할 수 없는 유키나가에게 조선출진 제1군 장수의 명예를 빼앗긴 그는 사사건건 유키나가와 대립했다. 그러나 우직한 그는 유키나가의 지략을 당하지 못했다.
기요마사는 조선의 왕자 임해군을 인질로 잡은 일과 한국의 호랑이를 다 잡아먹었다는 이야기로 유명하다. 임금이 몽진한 평안도 방면을 유키나가에게 빼앗기고 함경도 방면을 맡게 되었는데, 뜻하지 않게 조선의 왕자 둘을 인질로 잡았다는 것이다.
함경북도 회령에 피란해 있던 임해군과 순화군은 거기서도 횡포를 멈추지 않았다. 수령을 닦달하고 아랫사람들을 시켜 백성들을 노략질했다. 민심이 극도로 이반되어 있는 터에 국경인(鞠景仁)의 반란이 일어났다. 왕자들의 한심한 작태에 혀를 차던 그는 제일 먼저 두 왕자를 붙잡아 기요마사에게 넘겨버렸다.
그는 호랑이를 사냥해 호피를 히데요시에게 바쳐 신임을 사기도 했다. 일본은 호랑이가 없는 나라였다. 그러니 영물의 상징인 호랑이보다 귀한 선물이 있을 수 있겠는가. “호랑이 고기가 강정식으로 좋다”는 시의들 말을 들은 히데요시는 고기도 보내라고 지시했다. 기요마사는 내장까지 말려서 바쳤다. 59세에 아들을 얻은 후로 그는 더욱 호랑이고기를 찾았다 한다. 이런 이야기가 기요마사와 호랑이가 엉킨 전설의 연원이다. 지금도 구마모토 토산품에는 어김없이 호랑이 이미지가 들어간다. 축제 때가 아니어도 기요마사가 호랑이를 잡는 모형이 번화가에 장식된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한국에서는 이승만 대통령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 해서 유명해졌다. 한국과 일본의 국교수립을 중재한 미국의 요청으로 1954년 일본을 방문해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총리와 마주앉은 자리였다.
“한국에는 호랑이가 많다던데 아직도 많습니까?” 어색한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려는 듯 요시다 총리가 이 대통령에게 운을 떼었다. 이 말에 대통령은 “이젠 없습니다. 임진왜란 때 가등청정이 다 잡아먹었습니다” 하고 말을 받았다. 동석했던 김용식 주일공사에 의해 이 말이 전해지자, 재일동포 사회는 통쾌한 반격이라고 크게 반겼다. 물론 국내의 반응도 마찬가지였다.
기요마사 승자의 영화
히데요시 사후 기요마사는 주군을 배반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편에 섰다. 천하의 패권을 놓고 충돌한 세키가하라 전투 때 유키나가가 히데요시 아들 편에 섰던 것과 너무 대조적인 처신이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한 유키나가가 비참한 최후를 마친 것과 대조적으로 기요마사는 승자의 영화를 누렸다. 그러나 자신을 길러준 히데요시를 배반한 죄의식 때문이었는지 도쿠가와, 히데요시 양 가문의 화친을 위해 애쓰다가 50세에 세상을 떴다. 그 일을 못마땅해 한 도쿠가와 측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설도 전해진다.
울산 방문은 해군 상륙함(LST) 일출봉호 진수식 참석이 목적이었다. 막강한 기동력과 화력을 갖춘 그런 배가 당시에도 있었다면 울산전투가 그렇게 치욕적으로 끝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망상에 젖다가 귀경 KTX에서 부족한 잠을 청했다. LST는 없어도 압도적인 병력과 전세의 이점을 살리지 못한 것이 너무 아쉬워 쉬 잠을 이루지 못했다.
글 손성동 연금과 은퇴포럼 대표 ssdks@naver.com
어느 택시기사에게서 엿본 50대의 자화상
온 나라가 최순실 게이트로 들끓던 어느 날 택시를 탔다. 갑자기 불편해진 다리와 피곤한 몸에 잠깐이나마 휴식을 주기 위해서였다. 푹신한 의자에 등과 목을 기대고 편히 쉬고 있는데 기사분이 말을 걸어왔다. 눈을 감고 건성으로 대답해도 눈치 채지 못하고 계속 말을 걸어왔다. 피곤한데다 슬슬 짜증지수가 올라왔지만 어느 순간 호기심이 발동했다. 사연은 이렇다.
“제가 퇴직을 하고 마땅히 할 일이 없어 택시를 몰고 있는데, 하루 12시간 일해도 한 달에 100만원 벌기가 어려워요.”
“그래요?”
“3년 무사고면 개인택시를 신청할 수 있는데, 그걸 기다리며 참고 있습니다. 근데 그게 만만찮아요.”
동병상련인가. 기사에게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아무리 초보 택시기사라 해도 하루 12시간 일하고 한 달에 100만원 벌기가 힘들다니…. 일주일에 12시간 강의하고 한 달에 200만원 정도 버는 나는 그에 비하면 호사스런 퇴직자가 아닌가! 이번에는 내가 먼저 질문을 던졌다.
“하루에 몇 킬로미터 운전하세요?”
“대략 230킬로미터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교통지옥 같은 서울 시내에서 하루 230킬로미터씩 운전하는 것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정말 힘든 노동이다. 3년 무사고가 만만찮다는 것을 처음엔 수긍하지 못했지만 고개가 끄덕여졌다.
“한 달에 100만원 벌기도 힘든데 누구는 한 방에 10억, 20억, 100억을 해먹었다니 박탈감이 너무 커요.”
최순실 일당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마음의 상처가 큰 것 같았다. 3년 뒤 개인택시 신청할 날을 기다리며 힘든 나날을 참고 견뎌나가는 초보 택시기사에게 최순실 일당은 정말 못할 짓을 했구나. 저 마음의 상처는 누가 보듬어줘야 하나.
택시에서 내려 걷는 동안에도 초보 택시기사가 한 말이 내내 귓가를 맴돌았다. 무거운 발걸음 위로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고군분투하는 50대들의 자화상이 슬그머니 내려앉았다. 지금 50대는 지독한 몸살을 앓고 있다. 한창 공부할 자녀도 있는데, 구조조정의 칼바람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다. 자신들의 노후 준비도 불확실하고, 고령의 부모님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급한 마음에 자영업에 뛰어들어보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차라리 나을 것 같은 경우가 허다하다. 100세 시대에 50대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 연령대다. 50대 10년을 잘 견뎌내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노후는 크게 달라진다. 50대 10년을 잘 견뎌낸 사람은 국민연금을 기본으로 하고 부족분을 사적연금이나 다른 자산으로 보완하면서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는 반면에, 그렇지 못한 사람은 그동안 쌓아온 노후 자산에 손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진퇴양난의 길에 내몰린 50대!
연금해지의 경제학
요즘 연금의 중요성을 무시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최순실 일당에겐 연금이라는 말 자체가 낯설겠지만, 일반 서민들에게 연금은 금과옥조 그 자체다. 기나긴 노후를 안정적으로 보내느냐, 불안에 떨며 보내느냐는 연금에 달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금과옥조 같은 연금을 깨트려야 하는 상황으로 내몰린 50대들이 많다. 필자의 이야기부터 해본다.
어느덧 1년 전의 이야기다. 갑작스레 닥친 퇴직은 나름 평온했던 필자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어버렸다. 엄청난 대지진이었다. 이로 인해 지상의 평화로운 날들은 순식간에 극도의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고 필자의 일상도 완전히 망가져버리고 말았다. 정신은 혼미해졌고, 가슴은 불구덩이로 활활 타올랐고, 두 발은 갈 길을 잃고 방황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한줄기 빛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연금이었다. 연금을 어떻게 해야 하나? 계속 유지해야 하나, 해지해야 하나. 한 달 보름 정도의 고민 끝에 아내를 대동하고 해지의 길에 올랐다.
해지의 길에서 자괴감이 몰려왔다. “당신은 연금 전문가라면서 이렇게 해지를 해도 돼요?” 아내의 말에 뜨끔했다. “나만 믿어.” 그 당시 뭘 믿고 아내에게 그렇게 큰소리를 쳤을까? 당시 내게 남은 유일한 길은 ‘배수의 진’이었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은 없었으므로, 살기 위해서는 무조건 앞으로 나아가야만 했다. 우선 몸을 가볍게 만드는 게 중요했다. ‘배수의 진’을 친 장수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무거운 갑옷으로 몸을 감싼다면 행동이 굼떠 적의 포로가 되거나 몇 발짝 나가지 못하고 지쳐 쓰러지고 말 것이다. 몸을 보호하기 위해 입은 갑옷 때문에 오히려 위험에 빠지는 역설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당시 내 형편은 엄청난 무게의 갑옷을 입은 것처럼 무거웠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안게 된 수억의 빚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빚을 안고서는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내 몸을 꽉 쪼이며 발걸음을 무겁게 만드는 이 족쇄를 떼어내지 못하면 사즉생(死則生)의 ‘배수의 진’도 별무소용일 터! 그래서 선택한 길이 ‘연금을 죽임으로써 연금을 얻는 방법’이었다. 연금을 해지해 우선 몸을 가볍게 만든 후 난관을 돌파하고, 그 과정에서 획득한 수확물로 즉시연금을 구입한 셈이다. 나는 해지가 불가능한 국민연금을 제외한 모든 연금을 해지해버렸다.
그런데 필자와 같은 사람이 의외로 많다는 것이 문제다. 올 상반기에만 보험 해약 환급금이 사상 최대인 14.7조원을 넘어섰고, 작년 한 해의 연금저축 해지 금액은 2.5조원에 달한다. 대부분 손해를 감수하며 해지했을 것이다. 그러나 해지에도 기술이 필요하다. 필자처럼 어쩔 수 없이 모든 사적연금을 해지해야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일부만 해지하면 되는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흔히 개인연금과 퇴직연금을 합쳐 사적연금이라고 부른다. 개인연금에는 연말정산 때 세액공제 혜택을 받는 연금저축이 있고, 이런 혜택은 없지만 10년 이상 유지할 경우 발생한 이자소득에 대해 세금을 부과하지 않는 연금보험이 있다. 연금저축의 경우 5년 이상 유지하고 만 55세 이후에 연금으로 수령하면 3.3~5.5%의 연금소득세만 부담하면 되지만, 중도에 해지하면 16.5%의 기타소득세를 납부해야 한다. 따라서 연금저축을 중도에 해지하면 납입 원금도 건지지 못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
연금보험은 다소 복잡하다. 연금보험을 중도에 해지하면 세제상 불이익을 보는 일은 거의 없지만 해지 환급금이 납입 원금보다 적을 수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납입 원금 대비 해지 환급금의 비율을 의미하는 해지 환급률은 어느 보험사 상품이냐, 적용 이율이 무엇이냐에 따라 다르다. 공시이율형 연금보험의 해지 환급률이 납입 원금의 100%가 되는 데 걸리는 시간은 공시이율형 연금보험이 대략 7년, 최저이율보증형 연금보험이 10년 정도다.
퇴직연금은 근무기간과 최종 3개월간의 평균 임금에 의해 급여가 결정되는 확정급여형, 적립금의 운용 수익률에 따라 급여가 결정되는 확정기여형, 이직할 때 적립금을 계속 쌓아가는 계정인 개인형 퇴직연금(IRP)으로 나뉜다. 퇴직연금 적립금을 연금으로 인출할 경우에는 나이에 따라 3~5%의 연금소득세를 적용받지만, 일시금으로 인출할 경우에는 퇴직금에 해당하는 금액은 퇴직소득세를, 근로자 자신의 불입금이나 운용 수익에 해당하는 금액은 기타소득세(16.5%)를 적용받는다. 연분연승법이 적용되는 퇴직소득세는 계산이 복잡하지만 가입해 있는 퇴직연금사업자에게 문의하면 알 수 있다.
이처럼 각각의 연금은 세제가 다르고 세부 내용으로 들어가면 더욱 다르다. 따라서 개인 사정으로 연금 해지를 고려할 때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를 감안할 필요가 있다.
첫째, 충분한 시간을 두고 고민하자. 일분일초가 급한 경우가 아니라면 굳이 해지를 서두를 필요가 없다. 연금은 한 번 해지하면 해지 이전의 상태로 회복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린다.
둘째, 해지가 아닌 다른 방법은 없는지 살펴보자. 납입액이 부담스러워 해지를 결심한 경우라면 해지보다는 납입 중단을, 자금이 필요해 해지를 결심한 경우라면 중도인출 후 추가납입이나 담보대출 등의 방법을 먼저 생각해보자. 중도인출 후 추가납입은 연금보험 가입자가 자금 필요시 해약 환급금 범위 내에서 중도인출하고 나중에 추가납입으로 인출액을 보충할 수 있는 제도를, 담보대출은 퇴직연금 적립금을 담보로 대출을 받는 제도를 말한다.
셋째, 해지를 해야 할 경우에는 손해율을 따져보고 손해율이 적은 것부터 해지하자. 개인이 손해율을 계산하는 것은 쉽지 않기 때문에 각자 가입해 있는 금융회사에 문의하면 된다.
가교연금 만들기
지금까지 빚 때문에 고민이 많은 50대의 연금술에 대해 살펴봤다. 이른바 연금해지의 경제학이다. 인생 100세 시대의 50대는 매우 중요한 시기다. ‘50대 10년의 강’을 무사히 잘 건너는 사람은 안정적인 노후를 보낼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러나 50대에 연금을 무턱대고 해지해버리면 노후에 가택연금당하기 십상이다. 50대 연금술의 핵심은 죽을 때까지 연금에서 소득이 창출되도록 만드는 일이다. 어떻게 하면 될까?
빚 규모가 미미하거나 없는 50대 중에 퇴직으로 인해 생활비 조달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있다. 그동안 적지 않은 돈을 벌었지만 자녀교육과 내 집 마련, 부모님 봉양 등으로 수중에 남은 돈이 별로 없는 50대들이다.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기초연금과 국민연금이 나올 때까지 생계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일이다.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소득이 적더라도 제2의 일자리를 찾고 가교연금을 만드는 것이다. 여기서는 가교연금에 대해서만 살펴보겠다.
먼저 국민연금을 수령할 수 있는 나이를 확인하고, 지금부터 그 나이까지 안정적인 소득 흐름을 이어갈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한다. 가입해 있는 개인연금이 있다면 수령 방법으로 수급기간이 정해져 있는 확정연금형을 선택하면 된다. 이 방법으로도 생활비를 마련하기 힘들다면 퇴직할 때 받은 퇴직 급여를 활용해 부족한 생활비를 보충할 수 있도록 확정연금형 즉시연금이나 인출형 예금상품, 월지급식 펀드 등에 가입한다. 고정적인 수입을 보장하는 즉시연금과 인출형 예금상품과 달리 월지급식 펀드는 수입이 일정하지 못하거나 예상보다 일찍 수입이 중단되는 일이 생길수도 있지만 적극적인 운용을 통해 높은 수익을 추구할 수 있으므로 각자의 위험 성향이나 처한 상황에 따라 적합한 상품을 선택하면 된다.
가교연금을 구축하고도 남은 퇴직 급여가 있다면 국민연금 수급 연령에 도달했을 때 종신지급형 즉시연금에 가입해 부족한 국민연금 급여 수준을 보완하도록 해야 한다. 그동안에는 개인형 퇴직연금에 넣어두고 계속 운용할 필요가 있다. 이때는 안정적이라는 이유로 낮은 수준의 이율에 만족하지 말고 어느 정도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적극적인 운용을 통해 수익률을 높이는 것이 중요하다. 퇴직 급여를 가교연금 만들기에 다 써버린 50대라고 불안에 떨 필요는 없다. 집이 있다면 60세 이후에 주택연금을 신청할 수 있기 때문이다.
종신연금 만들기
50대 중에는 생활비가 전혀 문제가 안 되는 사람들도 있다. 50대 후반의 A씨는 국내 굴지의 대기업에서 임원까지 지내다 지금은 가교직업(bridge job) 형태로 경제활동을 하고 있다. A씨의 고민은 자녀의 결혼이다. 최근 직장에 다니는 아들이 A씨의 재산 상태에 관심을 가지며 눈치를 살피기에, 결국 A씨는 두 자녀에게 결혼자금으로 거액을 떼어주기로 결심했다. 그러고 나니 A씨 부부의 노후생활 자금이 빠듯해질 것 같더란다. 더 이상의 재산을 자식에게 빼앗길 수는 없다고 결심한 A씨는 비상자금을 제외한 금융자산은 모두 즉시연금으로, 집은 주택연금으로 활용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 손성동(孫盛東) 연금과 은퇴포럼 대표
삼성금융연구소 수석연구원, 미래에셋퇴직연금연구소 연구실장, 미래에셋은퇴연구소 연금연구실장 역임. 현재는 ‘연금과 은퇴포럼 대표’로 있으면서 1인기업가를 꿈꾸고 있다. 공식블로그 ‘꿈꾸는 은퇴와 연금’을 통해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으며, 부산 동아대와 동서대에 출강하고 있다.
글 박원식 소설가
대전에서 은행원으로 살았던 홍성규씨(75)가 명퇴 뒤 귀촌을 서둘렀던 건 도시생활에 멀미를 느껴서다. 그는 술과 향락이 있는 도회의 풍습에 착실히 부응하며 살았던 것 같다. 어지럽고 진부한 일상의 난리블루스, 그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돼 있는 게 삶이라는 행사이지 않던가. 그러나 문득 쇠망치로 얻어맞은 것처럼 정색을 하고 화드득 나를 돌아보는 순간이 찾아오는 법. 홍성규씨는 그렇게 소스라치듯 자신과 독대한 뒤 곧바로 산골로 들어가기로 했다. 대담하고 파격적인 선택이었다. 반백년 이상을 살았던 도시생활을 일거에 청산한다는 건 일종의 모험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금강이 굽이치는 산발치에 터를 잡은 홍씨는 아내 박명자씨(70)의 손을 슬며시 잡아 유혹처럼 이끌었다. 처음에 아내의 반응은 미미하다 못해 썰렁했다. 난 싫소, 당신 혼자 잘해보시구려! 강과 산이 얼싸안고 춤을 추는 경관이야 기차게 삼삼했지만, 스러져가는 폐가와 길길이 웃자란 잡초들만 무성한 묵정밭으로 이루어진 터전에 아내는 초장부터 정이 떨어졌던 모양이다. 당장이라도 뱀이 대가리를 쳐들고 튀어나올 것처럼 뒤숭숭한 쑥대밭 앞에서 단박에 우아한 감흥을 느낄 여자란 세상에 없다. 홍성규씨는 기함을 치고 앵돌아진 아내를 거듭 꼬드겨 답사를 반복했다. 마침내 부부는 귀촌에 합의를 보기에 이르렀다. 여러 차례 드나드는 사이, 아내 역시 외진 호젓함과 빼어난 풍치에 마음을 열었던 것. 20여 년 전, 귀촌의 시동은 그렇게 걸렸다.
풍경을 볼까. 산과 강이 긴박한 교제를 한다. 산은 제 늠름한 하체를 강에 들이밀었고, 강은 수줍은 듯 살포시 온몸으로 산을 받아들인다. 이 소리 없는 통정과 협연을 관람하는 건 능선마루에 늘어서서 관음증에 취한 수목들이다. 도대체 여기에서 무슨 후끈한 일이 벌어지는지를 염탐하겠다는 양, 수면 위 허공으로는 연신 물새들이 선회한다. 밤이면 별들이 모여 수군거리겠지. 달빛은 요요히 쏟아져 산을 흘러 강물로 스며들겠지. 홍성규씨는 시를 짓는 버릇이 있는 사람이니 신바람이 날 수밖에 없을 게다. 알아주는 이가 많은 수묵 화가인 아내에게도 역시 이하동문이렷다.
풍경이 수려하다지만 풍경만 뜯어먹고 살 수 없는 게 생활이라는 난적이다. 유유히 음풍농월을 즐기며 참하게 찻잔이나 기울이면 그만일 것 같지만, 철따라 피고 지는 꽃들의 마술에서 시를 건져 올리고 그림을 길어 올리면 그만일 성싶지만, 그러나 널리 알려졌듯이 삶이란 고달픈 나그네 길이라서 고난을 피할 길이 없다. 게다가 홍성규씨 내외는 거하게 손에 움켜쥔 것도 없는 채로 산골에 입장했다. 산골이 주는 고립감과 권태도 만만치 않은 난관이리라. 홍씨의 얘기를 들어볼까.
“가령, 홍매화가 흐드러지게 피어나는데도 무심히 지나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귀촌하면 안 됩니다. 정서가 맞질 않으니까. 그 무엇보다, 그저 편안하게 살 궁리만 하는 사람이라면 절대 시골에 들어와서는 안 됩니다. 마음을 싹 비우고 갖가지 고생을 할 각오를 해야만 하는 것이죠. 산골의 적막이나 고독을 견딜 수 있는 힘을 발휘한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에요. 우리 부부도 초기엔 생각이 마구 왔다 갔다 했어요. 마치 향수처럼 도시 생각을 하곤 했는데, 우리가 지금 독립운동을 하는 것도 아니고, 왜 이러고 사나? 하는 회의가 없지 않았어요. 3년쯤 지나고 나자 비로소 만족감이 찾아듭디다.”
강물에 자동차가 떠내려가기도
“강철 같은 기세로 올라오는 풀들을 해치우는 일은 거의 전쟁이라죠? 선생의 거처 면적은 자그마치 2000평이에요. 이 너른 터를 간수하는 일부터가 벅차겠어요. 노년에 적당히 살기로는 터를 작게 잡을수록 이상적이라는 충고들이 많던데, 이건 믿을 만한 정보일까요?”
“연로한 분들의 경우엔 무리해서 너른 터를 잡지 말아야겠죠. 하지만 300평 이상은 돼야 뭐든 마음먹은 대로 활개를 쳐볼 수 있지 않을까요? 여하튼 온갖 노동과 정성을 쏟아야 기반이 잡히는 게 산골 살림입니다. 사람들은 우리 집을 둘러보고 거참 근사하다고들 하지만, 구석구석 비지땀을 쏟은 현장이라는 걸 알진 못해요. 물론 시골에서의 건강한 노동은 커다란 성취감을 줍니다. 모든 주변 사물과 정들게 되고요. 마치 사람과 사람 사이에 정들듯이….”
“과도한 노동으로 골병이 들거나 우울증에 걸리기도 하더군요.”
“예를 하나 들어볼까요. 창밖으로 보이는 저 돌담장은 3년에 걸쳐 쌓았어요. 돌담을 쌓다 보니 재미가 생겨 봄가을로 열심히 돌을 주워다 쌓아올린 것인데 3년이나 걸렸어요. 그 와중에 병을 얻기도 했지만, 햐, 완성을 하고 나서는 얼마나 좋던지…. 마치 영화 한 편을 만든 감독처럼 신나더라고요. 골병은 피해야겠지만, 하나하나 나만의 작품을 만들어간다는 성취감과 만족감이 크기에 시골살이를 애호할 수밖에 없어요.”
강의 이름은 올목강이다. 강굽이 형세가 오리의 목을 닮아 ‘올목강’이라 부른다. 이 강엔 교각이 없는 채로 콘크리트를 부어 납작하게 가설한 잠수교가 걸려 있다. 이 옹색한 다리나마 없었던 시절엔 배로 강을 건넜다. 폭우가 쏟아지면 잠수교는 순식간에 물에 잠긴다. 그렇게 되면 꼼짝없이 갇힐 수밖에. 장마철이나 봄가을의 폭우 때는 여러 날씩 외부와 고립된다.
“별안간 고립될 가능성에 대비해 음식이나 가축 사료를 늘 충분히 비축해둡니다. 한번은 새벽에 잠이 깨어 나가보니 마당까지 물이 차올라 아예 싯누런 바다로 변했더라고요(웃음). 세상에 물 구경, 불 구경처럼 신나는 게 없다지만 기가 막힙디다. 우당탕탕 굽이치는 물살에 아름드리 통나무며, 컨테이너 박스며, 자동차며, 뭐든 막 떠내려가더라고요. 그 난리 통에 강 저편에 세워뒀던 우리 승용차도 떠내려갔어요. 졸지에 차를 잃어버렸지만, 차보다 정말 아까웠던 건 마당의 컨테이너 박스에 보관했던 집사람의 그림이었어요. 모조리 물에 잠겨버렸죠.”
아내 박명자씨는 그림 그리기를 밥 먹듯이 해온 인물이다. 무채색 먹의 농담(濃淡)으로 사물을 표현한다. 세필을 활용한 정교한 사생보다 일필휘지, 대담하고 호방한 작풍을 구사한다. 그림만 봐서는 여자의 작품이라 알아챌 수 없을 만큼 활달하고 후련하다. 남편의 눈에는 이런 아내의 작품이 세상에서 둘도 없는 명품이다. 그런 판국에 수해를 입어 그림들이 모두 물속 용궁 나들이를 했으니 상심이 컸을 게다. 수려한 강변에 사는 가혹한 대가를 치른 셈이다. 그런 변을 겪을 때면 귀촌이 후회될 성싶지만, 아서라, 홍씨는 수해이든 수난이든 자연의 형제로 살아가기로 작정을 한 자가 기꺼이 감당해야 할 수련이거나 단련의 계기로 받아넘기는 낌새다.
정든 오누이처럼
홍성규씨는 이라는 시집을 낸 바가 있다. 염염한 로맨틱이 비치는 제목이지만, 그의 적성은 자연과 사교하는 쪽으로 사뭇 발육했다. 이를테면 그는, 산골에서 꽃향기가 천지간에 가득하면 황홀해져 춤추고 싶어 하고, 비바람에 갈피없이 흔들리는 꽃들의 비통한 몸부림에도 섬세하게 가슴이 닿아 시적 충동을 느끼는 개성의 소유자로 보인다. 일찍이 세간에 횡행하는 욕망이나 허영은 대충 놔버렸기에 간소하게 먹고도 뿌듯하게 자족하는 생리가 몸에 익었다.
“시골에선 도시에 비할 때 생활비 지출을 절반 이하로 줄일 수 있습디다. 한 달에 150만원이면 뒤집어쓰고도 남을 지경이지만, 형편이 여의치 않을 때는 70만원 남짓으로도 까딱없어요.”
“텃밭에 키우는 작물들로 충분히 자급자족이 되겠죠? 닭들은 마구 알을 낳을 테고.”
“불필요한 외출을 즐거이 자제하며 살기 때문에, 거처 내부에서 사는 재미를 쏠쏠히 느끼기에, 지출을 줄일 수 있는 여지가 많죠. 승용차 대신 작은 트럭을 굴려 유지비를 절감하고, 가끔 먼 곳을 여행할 경우엔 대중교통을 이용해 검소한 살림을 운영합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인간이란 역시나 돈 문제로 충돌하게 마련인 동물입디다. 때론 아내와 토닥거리기도 하는데 그게 주로 금전 문제 때문이었어요. 끙.”
“금전의 여유가 있으면 덜 싸우게 될까요?”
“부자들은 돈 때문에 더 치열하게 싸우지 않습디까(웃음)?”
“도무지 싸우지 않고, 부처님 가운데 토막처럼 어엿하게 살 수 없는 게 원래 인간일까요?”
“저 고고한 하늘에도 가끔은 번개가 치지 않나요? 부부싸움을 하지 않고 산다는 건 맹물 마시고 술 취하려는 것처럼 가당치 않은 일입니다. 충돌과 마찰 속에서 부부 사이가 더 단단해지는 법이거든요. 우리 내외가 말이죠, 도시에 살 때는 불행하게도 부부싸움을 할 기회가 없었어요. 나는 툭하면 밖으로 나돌아 다녔고, 아내는 아내대로 스케치니 전시회니 하면서 며칠씩 나가 살고 그랬거든요. 모든 시간을 같이 붙어살게 된 귀촌 이후엔 싹 달라졌어요. 자못 건설적이고 생산적인 부부싸움을 전개해서 진정한 친선을 도모하게 되었으니까요. 이거 쾌거 아닌가요(웃음)?”
“앗! 부부싸움도 창의적 예술이라는 말씀?”
“집식구가 세상에서 가장 유능한 요리사입니다. 뭐 제 입맛에 딱 맞는 음식을 만들어주는 고마운 존재라는 뜻이죠. 대충대충 사는 저에 비해 합리적이고 현명하게 꼼꼼한 여자라는 점도 아주 매력이죠. 그러나 단점이라면 예민하다는 점이에요. 전엔 송곳이었다면 지금은 부지깽이처럼 좀 무뎌졌지만, 아무튼 이런 아내에게 제가 그림 비평을 인정사정없이 해대곤 했어요. 그러니 다툼이 없었을 리가. 오해는 마시라. 다툼의 날들은 이젠 추억의 잔영으로 남았을 뿐이니까(웃음).”
느티나무를 맨손으로 뽑을 천하장사가 있던가. 불화와 앙앙불락이 없는 부부가 있던가. 홍성규씨의 언설은 자주 아내와의 역사를 술회하는 쪽으로 번진다. 20년 세월을 산골에 살며 그는 자연과 교감하는 도락을 만끽해왔다. 일상의 근로로, 절간의 중들이 비운 발우와도 같은 허심(虛心)의 내공으로, 또는 우슬(牛膝, 일명 쇠물팍)이니 쇠비름 같은 산야초를 장복한 건강생활로, 그는 인생의 저물녘을 훈훈하게 통과하고 있다. 그러고서도 한결 자랑스럽고 사랑스러운 존재가 하나 있으니 그게 바로 아내라는 고백을 차마 참지 못하고 토설한다.
“아내에게 칭찬을 받고 인정을 받을 때면 대통령에게 표창장을 받은 것보다 기쁩디다. 그런 아내가 강변에 앉아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바라보는 순간은 또 얼마나 행복한지…. 노년의 부부란 말이죠, 가급적 산골 외딴집에 살아야 합니다.”
졸혼(卒婚)이라는 요상한 잠정적 결탁이 예찬되기도 하는 이 부박한 세상. 그러나 강변에 사는 내외는 정든 오누이처럼 단란하게 어깨를 겯고 산골의 나날을 동행한다. 이는 아마도, 귀촌이 아니었다면 도달하기 어려운 비경이렷다.
>>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 , 등의 저서가 있다.
정부 부처들이 세종으로 옮겨간 지 5년이 지났다. 행정 능률 저하, 시간과 국고 낭비 등의 비효율성은 예상한 대로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 최근에는 ‘세종섬’에 갇혀 있는 공무원들의 문제가 제기되더니 급기야는 정치권에서 행정수도를 이전하자는 주장이 회자되기에 이르렀다.
세종시, 정부를 반으로 쪼갠 기형적 도시
‘세종시의 저주’라는 말까지 만들어낸 세종특별자치시는 기형적으로 탄생했다. 정부의 최고 수뇌부와 일터는 서울에 남겨둔 채, 몸통만 허허벌판 세종으로 갔다. 공무원들은 국회의 잦은 호출에 볼멘소리를 내고 있다.
정부청사 세종시 이전 후 아직 어린 자녀들을 둔 젊은 공무원들은 가족들과 함께 내려가 거주하는 경우가 많지만 장년층 공무원들은 혼자 내려가 주말부부로 지내고 있다고 한다. 세종시로 내려간 후 이직을 고려하는 공무원들이 늘고 있다고 하니 탈(脫)관료 흐름까지 걱정해야 할 판이다. 목요일만 되면 주말을 서울에서 지내려는 공무원들로 세종청사 전체가 파장 분위기가 된다는 현지 소식도 전해진다. '육지의 섬'이 되어버린 세종시의 괴이한 풍경이다.
국무회의 주재와 장관 집무는 세종시에서
정부 부처의 업무 효율성을 위해 이제는 대통령이 세종시에서 국무회의를 주재하고, 장관의 직접보고를 받도록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 무릎을 맞대고 생생한 현장의 소리를 들으면 무엇보다 국민과의 소통에 도움이 될 것이다.
특히 장관의 집무는 원칙적으로 세종시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야 각 부처 공무원들을 제대로 지휘하고 사기를 북돋울 수 있다. 물론 청와대와 국회가 서울에 있는 상황에서 세종시에만 눌러앉아 있을 수 없는 입장도 이해는 되지만 공무원들의 기강해이를 탓하기 전에 장관부터 세종시에 상주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아야 한다.
최근 ‘성과급제’ 문제로 노동현장이 논쟁의 중심에 섰다. 공무원도 능력만 있으면 대기업보다 더 많은 연봉과 파격적인 승진 기회를 보장해 사기를 올려줘야 한다. 그러면 유능한 인재의 보신주의 행태가 사라질 것이다. 중·장기적으로는 공무원 숫자를 줄이면서 처우는 개선해 소수 정예화 방안도 적극 추진해야 한다.
누구나 살고 싶은 명품도시로
이제 와서 정부청사의 세종시 이전을 뒤집을 수는 없다. 세종시 이전에 따른 부작용을 줄이려면 주저앉아 있는 공무원들의 사기를 북돋울 수 있는 대안을 서둘러 마련해야 한다. 장·차관은 서울에, 간부들은 길 위에, 실무자는 세종청사에 떨어져 있는 비효율적인 행정 시스템부터 수정해야 한다.
정부 부처와 국회와의 업무도 상시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지금처럼 국회의 시도 때도 없는 호출에 공무원들이 서울을 오가느라 업무의 질을 떨어뜨리는 일은 없어져야 한다. 그러려면 1급 이상의 정무직 외에는 국회 호출을 엄격하게 금해야 한다. 업무 방식도 시대의 변화에 맞춰 뜯어고쳐야 한다. 우선 산더미 같은 서류를 없애고 전자문서 유통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세종시에는 도시 기반 인프라도 태부족하다. 장년층 공무원들이 주말부부로, 젊은 공무원들이 불안을 느끼면서 거주할 수밖에 없는 이유 중 하나다. 따라서 유수대학, 종합병원을 서둘러 유치하고 놀이공원, 극장 등 문화시설을 확충해서 살고 싶은 도시로 만들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