널리 알려졌다시피 도시는 대체로 각박하다. 매력도 편익도 많지만 경쟁과 계산이 불가피한, 일종의 정글이다. 그렇기에 흔히들 남모를 고독을 안고 도시를 살아가기 십상이다. 내가 아는 서울의 어떤 화가는 작업실에 쥐를 기른다. 외로워서 쥐를 기른다. 그는 아마 쥐하고 대화를 나누는 것 같다.
“너도 외롭니? 나만큼 외롭니?”
쥐를 바라보며, 슬픈 노래를 부르는 가수처럼 그가 처량하게 늘어놓는 대사는 대강 그렇다. 그는 이미 노년에 접어들었다. 무심한 세월을 관조한 끝에 그가 신중하게 내린 결론은 간명하다. 늙을수록 외롭다!
도시를 예찬하는 사람들에겐 매우 결례이겠지만, 내가 보기에 도시는 그리 성공한 작품이 아니다. 물질은 풍부할망정 인정이 메마른 탓이다. 물론 도시에도 인정스런 사람들이 왜 없으랴. 그러나 인정을 쓰기보다 인상을 쓰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 같다. 거리의 행인에게 왜 쳐다보냐고 시비를 걸어, 마침내 죄 없는 사람을 먼지 나도록 늘씬하게 두들겨 패는 변괴마저 벌어지는 게 도시이지 않던가. 남의 흉을 볼 것도 없다. 나 자신부터가 그렇다. 나도 때로 거리에서 마주친 애먼 눈길에 까닭 모를 적의(敵意)를 느끼는 경우가 있으니 말이다. 이 타락한 영혼을 무슨 약으로 고쳐야 하나.
내가 나의 몰인정한 치부를 들여다볼 때면 부끄러워진다. 인생의 가을에 접어들었지만 여차하면 옹색한 마음이 도드라진다. 운동장 사이즈의 넉넉한 마음그릇을 가진 사람 앞에서는 항복! 대번에 주눅이 든다. 이럴 땐 헛살았다는 회의가 밀려든다. 쥐를 기르는 화가처럼, 다독이기 난처한, 먹먹한 외로움에 사로잡힌다. 나이 들수록 따뜻한 생각을 위주로 하고 싶고, 너그러운 가슴으로 만고의 불한당마저 살포시 감싸며 살고 싶지만, 웬걸, 심사가 뒤틀리면 간장 종지처럼 비좁아진다.
그러고 보면 이미 엉터리 인생이 아니고 뭐란 말인가. 그렇다고 쥐를 기르거나 쥐약을 마실 수는 없는 일. 궁지에 몰린 기분일 때, 나는 가급적 햇살 쪽으로 마음을 옮겨둔다. 따뜻한 추억을, 따뜻한 사람을, 따뜻한 정경을 떠올려 시린 가슴에 온기를 부여한다. 남도의 어느 산골 마을에서 만난 노부부의 얘기를 해볼까.
전라도의 외진 산촌을 돌아다니던 때였다. 도시의 소음과 아귀다툼이 침범 못할 후미진 산골. 도토리 키 재기를 하는 야산들의 품에 안긴 마을은 하염없이 낙후했으나 포근했다. 돌담을 두르고 옹기종기 들어앉은 농가들은 하나같이 허름했으나 정겨운 풍색이었다.
나뭇가지로 엮은 사립이 곱살한 어느 집 텃밭. 할머니 한 분이 동그랗게 웅크려 앉아 호미질을 하고 있었다. 호미질에 몰입된 그 얌전하고 바지런한 모습은 아무런 결함이 없이 수려했다. 시골 노인들과 나누는 담소는 늘 즐겁다. 그들의 입에서 순후하게 흘러나오는 인생사와 세사란 범상해서 공감이 쉬우며, 혹간 의표를 찌르는 얘기가 튀어나와 슬며시 나를 돌아보게 하는 게 아닌가.
나는 할머니 앞에 앉아 이모저모 소식을 물었다. 언제부터 이 마을에 사셨느냐, 읍내 오일장엔 자주 나가시느냐, 건강은 괜찮으시냐, 면사무소 복지계에서 출장 나온 김 주사처럼 시시콜콜 캐물었다. 별안간 쓱 출현해 눈앞에 앉은 인간이 돌팔이 약장수이거나 남파된 간첩일지도 모른다는 야박한 의심 따위는 눈곱만치도 하질 않는 게 분명해 보이는 할머니는 오직 선선히 응답했다. 마치 무슨 횡재라도 한 사람처럼 상냥한 대꾸로 일관했다. 사람의 입이란 친절을 베푸는 데 오직 그 용도가 있다는 양 자상한 언사들이 흘러나왔다.
얼마 뒤, 부디 건강하시라, 덕담을 건네고 일어서 나오려던 때였다. 할머니가 호미를 놓고 일어서더니 나를 잡아 세우는 게 아닌가?
“워매, 그냥 가실라고라? 쪼께 기다려보쇼잉!”
그냥 보낼 수는 없다는 얘기였다. 밥상을 차려 내올 테니까 잠깐 기다렸다가 먹고 가라는 채근이었다. 읍내 식당에서 점심을 이미 먹었던 나는 사양할 수밖에 없었다. 자못 합리적인 고사(固辭)였다. 그러나 할머니는 막무가내였다. 찬은 변변치 않지만 한술이라도 뜨고 가야 한다며 거듭 성화였다. 나는 사양에 사양을 반복했다.
“아따! 그러지 말고 잡숫고 가시랑게!”
할머니는 포기하지 않고 거듭 식사를 권했다. 그러나 뱃속엔 이미 빈자리가 없으니 어쩌란 말인가. 나는 사정을 재차 주르룩 설명했다. 그때였다. 토방 빈지문이 열리더니 할머니의 서방님이 마루로 걸어 나왔다. 아마도 낮잠을 주무시다가 지상의 한낮에 벌어진 묘한 분쟁에 잠을 깬 모양이었다. 이 영감님은 단숨에 소란한 사태를 평정하겠다는 양 큰 소리로 탕탕 외쳤다.
“하이고, 한술 뜨고 가랑게 시방 어째 그러는 거시여? 엔간하면 자시고 가셔! 객지에 나오면 고생이잖여? 든든히 먹어둬야 한당게!”
이런! 남들이 이 희귀한 경치를 바라보았다면 셋이서 쌈박질을 하는 것으로 비쳤으렷다. 내가 노부부의 호의를 사양한 유일한 이유는 더 이상 밥 들어갈 자리가 없다는 것이었으나 노부부가 나를 붙잡은 이유에 비하면 실상 무가치한 것에 불과했다. 할머니는 다음처럼 나직이 중얼거려 마침내 나를 꺾어버렸다.
“이날 이때까장 때 돼서 내 집에 들어온 사람, 밥 안 멕여 보낸 적이 없었는디 워째 그런당가?”
결국 나는 밥상을 받았다. 산골 노부부의 삶에 감도는 인간애, 육화된 인정에 탄복하며 밥을 먹었다. 내 부모 외에 그 누가 나에게 밥 한술 먹이고자 그토록 안간힘을 다했던가.
그리워라, 할머니가 차려준 조촐한 밥상이여! 정갈한 인정이여! 아무런 계산이나 속셈이 없는 그 도타운 인정을 그들은 어디서 얻어왔을까. 평소 이렇다 할 선행을 한 적이 없는 채, 그저 쌀벌레의 일종으로 살아온 나는 뭔가 켕겨 괴로웠으며, 또 심히 행복했다. 오늘날까지 지구의 인간 생태계가 그나마 무사한 것은 오직 그 노부부 덕분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해가 어스름해지기 시작하자 연신 동네 어귀를 쳐다보는 노부부. 이제나저제나 읍내에 나간 아들이 오기를 기다리며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늦은 시간인데도 아들이 안 오면 부모는 슬슬 동구 밖으로 마중을 나간다. 멀리서 희끗희끗 보이는 물체가 아들인가 하고 좀 더 높은 곳이나 나무 등걸 위에 올라가 굽어보기도 한다. 수십 년 전 산골 혹은 시골에서 장이 서는 날이면 있음직한 장면으로 부모들의 애틋한 마음이 잘 느껴진다.
이 같은 자식에 대한 부모의 마음을 잘 나타내는 한자가 바로 부모 ‘친(親)’이다. 親이라는 한자를 살펴보면 설 입(立) 밑에 나무 목(木)이 있고 그 옆에 볼 견(見)이 붙어 있다. 위에서 언급한 장면이 그대로 연출되는 듯한 한자다. 요즘엔 설이나 추석 명절에 오는 자녀들을 기다리는 부모들이 그런 마음일 것이다. 명절을 쇠러 가는 차들이 한꺼번에 밀려 도로가 엄청 막히는데다 눈이나 비까지 오기라도 하면 자식들이 무사히 도착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욱 간절해진다.
장에서 돌아오는 아들의 마음도 급하다. 자신을 기다릴 부모님이 생각나 발걸음이 빨라진다. 아니나 다를까 동네 어귀에서 고개를 빼고 기다리는 늙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보인다. 아들은 “아이고, 왜 여기까지 나오셨어요?” 하며 지게를 내려 “다리도 아프실 텐데 이 지게 타고 가시지요” 한다. 지게가 없다면 업고라도 갈 태세다. 이런 장면을 보는 듯한 한자가 바로 ‘효(孝)’다. 아들[子]이 늙은[耂] 어머니(아버지)를 업은 듯한 글자다. 의미도 잘 갖다 붙인다고 하겠지만 필자가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니다. 한자 어원 풀이에 나오는 해석이다.
모든 도덕규범의 기초인 ‘효’
효도(孝道)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부모를 잘 섬기는 도리 또는 부모를 정성껏 잘 섬기는 뜻으로 표현돼 있다. 한마디로 ‘부모에 대한 자식으로서의 도리’라는 의미다. 효도를 대부분 유교적 도리라고 말하지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디에서나 존재하는 규범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면 가족을 넘어 사회(공동체)와 국가의 근본을 이루는 무언(無言)의 규범이자 사회적 합의라 할 수 있다. 효도를 근간으로 행복한 가족이 이뤄지고 그 가족의 구성원들이 사회에 나가 열심히 소득 및 소비활동을 함으로써 지역 공동체는 물론 국가 경제가 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삼국시대 이전부터 효가 모든 도덕규범의 기초를 형성해왔다. 이 대목에서 드는 의문 하나. 효도가 부모에 대한 자식의 도리를 의미하는 한자라면 자식에 대한 부모의 도리를 뜻하는 한자어는 없을까?
필자가 과문(寡聞)한 탓인지는 모르지만 그런 뜻을 가진 한자어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자식을 낳은 부모가 자식에 대해 도리를 지키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어서 한자어는 물론 순우리말에도 없을 거라는 게 주변의 해석이다. 그래서 필자가 한번 만들어봤다. ‘친도(親道)’. 글자 그대로 자식에 대한 부모로서의 도리를 뜻한다.
부모의 도리도 생각해야 할 시대
평균수명 100세 시대가 되면서 집집마다 걱정거리가 늘고 있다. 이렇게 말하면 돌팔매를 맞을지도 모르지만 연세 많은 조부모 또는 부모가 오래 사시기 때문이다. 물론 부모가 건강하게 오래 살면서 경제적으로도 자식들에게 큰 짐이 되지 않는다면 그 누구도 뭐랄 게 없다. 하지만 거동이 불편해지기 시작하면서 병도 하나둘 늘어나고 정신도 예전 같지 않은 상황이 수년간 지속되고 있다고 해보자.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이 남의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이런 사정을 잘 아는 연세 많은 노인들은 자식에게 부담을 주기 전에 죽어야 한다고 말한다. 또 치매라도 걸려 정신마저 없어지면 어떻게 하나 걱정이 태산이다. 최근 지방 중소도시는 물론 서울 강남의 대로변에 하루가 다르게 들어서는 것이 요양병원이고 요양원이다. 농경사회에서는 집이 일터이자 병원이었다. 가족 중에 누구 하나가 아프면 모두가 돌아가며 돌봤다. 하지만 산업화 사회가 되면서 집과 일터, 병원이 분리되고 조부모와 부모, 자녀들이 따로 살게 되면서 누가 아프면 보통 일이 아니다. 병이 길어지면 가족관계가 파탄나기도 하고 경제적으로도 파산에 이르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누구나 처음엔 내 부모인데 하면서 달려들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돈과 정(情)은 떨어지고 갈등이 커진다. 하지만 누굴 탓할 것인가. 불효하고 싶은 자식은 없을 것이다. 기왕이면 남부럽지 않게 효도하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내가 먼저 살아야 하고, 내 자식부터 챙기게 된다. 늙은 부모를 소홀히 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고 상황인 것이다.
그렇다면 결론은 뭘까. 나이가 들수록 각자 스스로 부모의 도리, 즉 친도(親道)를 생각하면서 살아야 한다. 건강하게 오래 살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가, 예상보다 오래 살 경우에 대비해 의료비를 포함한 생활비는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 회생 불가능한 병에 걸리거나 그러한 상태에 이르렀을 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 치매 등에 걸렸을 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 남는 재산이 있다면 어떻게 증여 또는 상속할 것인가 등등을 생각해봐야 한다는 말이다. 어떻게 되겠지 하는 어설픈 기대는 자식에게 짐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많다. 이것이 오늘날 100세 시대를 살아가는 시니어들의 가장 큰 고민이자 어려움이다.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 제나라의 경공이 정치에 관해 물었을 때 공자가 한 대답이다.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아들은 아들다워야 한다는 의미다. 아울러 각자 자신의 역할에 충실할 때 정치가 잘된다는 뜻이다. 여기서 군군신신(君君臣臣)은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의 핵심이고, 부부자자(父父子子)는 수신제가(修身齊家)의 핵심이다. 평균수명이 70세 정도일 때는 은퇴 후 10여 년 더 살다 가면 되니까 자식이나 다른 가족들한테 큰 짐을 지울 일이 없었다. 이제 평균수명이 80세, 90세를 넘은 100세 시대에는 수신제가로서의 ‘부부자자(父父子子)’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더 곱씹어봐야 할 것이다. 좋든 싫든 친도는 100세 시대에서 생겨난 시대적 요청이다. 부부자자(父父子子)는 곧 ‘친친효효(親親孝孝)’, 즉 부모가 부모로서의 도리를 다하고 자식이 자식으로서의 도리를 다하는 것이다. 오늘날은 자식에게만 효도를 바랄 것이 아니라 부모의 도리도 함께 생각해야 할 시대다.
>>최성환(崔聖煥) 한화생명 은퇴연구소장·고려대 국제대학원 겸임교수
한국은행 과장, 조선일보 경제전문기자, 고려대 국제전문대학원·경영대학원 겸임교수, 한화생명 경제연구원 상무, 은퇴연구소장 등 역임.
결혼을 하면 서로 사랑하고 관심을 갖기 때문에 건강에 이롭다는 것은 오랜 상식이다. 여러 조사 연구에서도 독신자보다 배우자가 있는 사람이 암, 치매, 폐렴 등과 같은 질병에 걸릴 확률이 낮고 평균수명도 길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러면 잔소리가 심한 배우자와 그렇지 않는 배우자 중 어느 편이 건강에 도움이 될까? 건강은 부부 금실과 비례할까? 미국은퇴자협회(AARP)는 10월호 회보에서 ‘배우자와 건강의 상관관계’라는 제목의 특집을 통해 이런 궁금증을 풀어줬다.
글 남진우 뉴욕주재기자 namjin@etoday.co.kr
1. 부부는 체질도 닮는다 오래 같이 산 부부는 외모만 닮는 것이 아니라 생물학적으로도 비슷해진다. 미시간대학 연구팀은 1500쌍의 노부부를 대상으로 한 혈액검사를 통해 신장 기능, 콜레스테롤 수치, 손의 악력, 우울증 등과 같은 건강 상태와 체질이 유사하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브리티시콜롬비아대학과 펜실베이니아주립대학 연구 팀도 결혼한 지 40년이 넘은 미국인 부부 1700쌍을 대상으로 한 공동 조사에서 오래 같이 산 부부는 정신적, 신체적으로 서로 거울을 보는 것처럼 닮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2. 배우자의 우울증은 만성질환 요인
에든버러대학이 10만 쌍이 넘는 영국인 부부의 상담 및 검진 자료를 분석한 결과, 만성질환은 유전적 요인뿐 아니라 배우자 정신건강상태의 영향을 많이 받는 것으로 나타났다. 예를 들면 배우자가 우울증이 있으면 만성질환이 발생할 위험이 높아지는 것으로 조사됐으며, 식사, 생활습관, 부부가 공유하는 환경도 만성질환과 연관성이 큰 것으로 나타났다.
3. 부인의 잔소리는 보약
미시간주립대학은 2016년 발간한 연구보고서에서 부인의 바가지는 남편 건강에 도움이 되지만 남편의 잔소리는 부인 건강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부인의 잔소리는 귀에 거슬리지만 남편에게 보약과 같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남편이 잔소리하지 않고 잘해주면 부인의 당뇨병 위험이 낮아지는 것으로 조사됐다.
4. 긍정적 배우자는 만성질환의 백신
미시간대학이 노부부 2000쌍을 대상으로 4년간 조사 연구한 결과, 부부 중 한 사람이라도 사고가 낙관적이고 긍정적이면 비관적인 성향의 부부에 비해 당뇨나 관절염 같은 만성질환의 발생률이 낮고 기동성과 운동능력도 더 나은 것으로 나타났다.
5. 부부싸움 스타일에 따라 발생하는 질환도 다르다
버클리 캘리포니아대학과 노스웨스턴대학의 최근 조사에 따르면, 부부싸움을 할 때 목청을 높이는 부부는 심장병과 혈압 관련 질병 위험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꾹 참는 스타일은 목과 척추질환 그리고 근육통으로 고생할 확률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6. 운동습관도 닮는다
존스홉킨스대학은 최근 연구 조사를 통해 부인이 운동량을 늘렸을 때 남편이 운동량을 늘릴 확률이 70%나 높아지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에 비해 남편이 운동량을 늘려 권장 운동량을 달성했을 때 부인이 이에 동참할 가능성은 40% 정도 높아지는 것으로 조사됐다.
7. 함께하는 다이어트는 역효과
다이어트는 부부가 함께하지 않는 것이 좋다. 콜로라도주립대학이 과체중 부부 50쌍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부부가 함께 다이어트를 할 경우 한 사람이 다이어트에 성공하면 다른 한 사람은 실패할 확률이 더 높아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8. 나쁜 습관은 전염된다
배우자의 나쁜 습관은 배우자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친다. 맥길대학이 7만5000쌍의 부부를 대상으로 연구 조사한 6건의 국제보고서를 분석한 결과, 배우자가 제2형 당뇨병을 앓는 경우 상대 배우자가 당뇨병에 걸리는 비율이 26% 더 높아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당뇨병전기의 위험성도 더 높은 것으로 조사됐다. 부부는 나쁜 식습관과 운동습관을 공유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배우자가 당뇨병 진단을 받았을 경우 상대 배우자도 당뇨병 검사를 받거나 식습관을 점검해보는 것이 좋다.
9. 배우자 간병은 건강 저해 요인
배우자가 만성질환이나 중병을 앓으면 상대 배우자도 신체적, 정신적으로 큰 영향을 받게 된다. 특히 뇌졸중의 경우 배우자의 건강에 장기간 악영향을 미치게 된다고 노스웨스턴대학의 셰릴 램피지 심리학 교수가 밝혔다. 뇌졸중을 앓는 배우자를 간병할 경우 첫해는 물론 이후 7년간 신체와 정신건강에 영향을 주는 것으로 조사됐다.
하얀 눈이 내리는 크리스마스가 되면 어린이들은 아름다운 꿈을 꾸고 산타할아버지 ‘선물’에 크게 감동한다. 할아버지ㆍ할머니는 손주와 함께 어울려 크리스마스를 즐겁게 지냈다.
할아버지ㆍ할머니를 초대한 유치원 크리스마스 행사
지난 목요일 오후, 자원봉사활동을 마치고 세종시로 가는 고속버스를 탔다. 다른 때는 가끔 가서 유치원에서 하교하는 외손자를 마중하였으나, 오늘은 내일 열리는 유치원 크리스마스 행사에 초대를 받고 즐거운 마음으로 갔다. 젊은 세대가 많이 사는 세종시에서는 아이들 등하교를 조부모님이 주로 돕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여 부모 대신 “할아버지ㆍ할머니를 초대하였다”는 고마운 이야기를 들었다.
금요일 아침, 기온이 떨어지고 가는 눈발이 내리기 시작하였다. 아이는 손을 잡고 유치원 가는 몇 분간의 거리를 매우 즐거워하였다. 할아버지ㆍ할머니가 강당에 가득 자리하였다. 연방 손주와 눈을 맞추느라고 정신이 없다.
외손자 유치원 재롱잔치
아이들은 매직 마술쇼에 흠뻑 젖어서 하늘을 날았다. 함성을 질렀다가 박수를 치고 깔깔대는 웃음소리가 천정을 뚫었다. 산타복장을 차려입은 아이들의 재롱잔치에 할아버지ㆍ할머니는 손뼉치고 사진 찍기에 바빴다. 누리 바른 반ㆍ알찬 반 등 아이들은 평소 연습을 열심히 한 캐롤송 합창, 러브송 율동 등으로 할아버지ㆍ할머니에게 감동을 주었다. “손주 돌보았던 일에 보람을 느낀다.”고 눈시울을 붉히면서 조용히 속삭이는 노부부도 있었다.
행사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산타할아버지였다. “산타할아버지 나오세요!” 아이들을 따라서 할아버지ㆍ할머니도 덩달아 소리쳤다. 꾸부정한 세 할아버지는 선물을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행사를 마치고 정성스럽게 준비한 점심식사를 하였다. 낮은 어린이 식탁에서의 떡국 한 그릇이 어린 시절을 생각하게 하였다. 아이들이 식사를 마치고 오후 1시가 되어 행사가 끝났다.
쌍둥이 손주와 서점 나들이
진눈개비가 내렸다. 사위와 딸, 외손자의 환송을 받으면서 조치원에서 열차를 타고 두어 시간 만에 서울에 도착하였다. 저녁에 쌍둥이 손주들과 서점에서 책을 사기로 약속했었다. 아이들이 책 일기를 좋아한다. 폭풍처럼 늘어나는 독서량에 따라 질문도 엄청 늘었다. 장난감 선물대신 올 초등학교 입학 후에는 부쩍 늘어난 독서량에 맞춰 책 선물을 하기로 하였다.
“크리스마스 때 무슨 선물할까?” 아이들은 쉽게 정하지 못하였다. 책 몇 가지를 이야기하면 이미 읽었거나 학교에서 볼 수 있는 것이었다. 결론은 아이들이 직접 고르도록 서점으로 데리고 가는 방법이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저녁식사를 맛있게 하고, 고개를 갸우뚱 거리면서 읽고 싶은 책 몇 권씩 찾았다. “할아버지 감사합니다.” 매우 기뻐하는 모습에 정말 큰 보람을 느꼈다. “아이들아, 항상 건강하고 행복하여라!”
여러 드라마에서 우리 시대 아버지 역할을 소화하며 ‘국민 아버지’로 불리는 배우 박인환. 이번에는 연극 무대에 올라 또 다른 아버지의 삶을 연기한다. 그가 이야기하는 작품과 아버지의 모습에 대해 들어봤다.
작품의 매력과 출연 계기
노부부의 정겨운 모습과 현실적인 부모 자식 관계를 잘 그려냈어요. 나도 세 자녀를 뒀는데 유독 막내가 눈에 밟히거든요. 연극 속 아버지도 아들이 셋인데 자나 깨나 막내 걱정뿐이죠. 아마 막내와 보내는 시간이 가장 적기 때문일 수도 있고, 뭔가 덜 해줬다는 생각에 관심을 주다 보니까 애틋함이 더 커져서인 것도 같아요. 어느 집이나 그럴 거라 생각해요. 부모세대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평범하지만 가슴 따뜻한 이야기라는 점이 마음에 들었어요.
중·장년 관객이 공감할 수 있는 점
시골집이 배경인데, 노부부는 틈만 나면 참기름 같은 것들을 싸서 서울에 사는 세 아들집으로 보내곤 해요. 자신들이 줄 수 있는 건 그게 전부니까 그렇게 마음을 표현하는 거죠. 아마 도심에 살고 있더라도 부모는 시골에 계시는 중·장년이 대부분일 거예요. 그런 이들에게 작품 속 노부부의 모습은 낯설지 않은 풍경이죠. 또, 극 중 막내아들이 부모 말을 잘 안 듣거든요. 그래도 엇나가지 않도록 끊임없이 타이르죠.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는 게 농사이지만, 자식 농사는 그게 아니잖아요. 아무리 부모가 헌신한다고 해도 자식 일은 뜻대로 잘 안 되는 것 같아요. 자식을 키우는 이들이라면 그런 부분에 공감할 수 있으리라 생각해요.
가장 심혈을 기울인 부분
아버지가 주인공이다 보니까 혼자서 1시간 반을 이끌어야 해요. 더욱 긴장하고 숨 가쁘게 연기하고 있어요. 부모와 자식 관계를 그렸지만 자식들은 무대에 등장하지 않거든요. 전화로 대화하는 장면이 많은데 그것도 목소리는 나오지 않고 아버지의 대사로만 채워지죠. 자식이 무대에 나와 대화를 주고받으면 이해가 쉽겠지만, 그렇지 않으니 관객은 상상할 수밖에 없잖아요. 전화 내용이 중요한데, 관객이 메시지를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야 하기 때문에 그 장면들을 가장 신경 쓰고 있어요.
작품 속 아버지와의 닮은 점
얼마 전에 막내아들이 연극을 보고 갔는데 뜨끔하지 않으냐고 하더라고요. 우리 때 아버지들은 사랑이라는 말을 참 안 쓰거든요. 대부분 어머니와 자식 관계는 더 다정한데 아버지하고는 거리가 멀어요. 표현이 무뚝뚝해서 그렇지 마음은 다 똑같은데 말이죠. 자식이 그런 마음을 이해한다고 하면 아버지로서는 다 이룬 건데, 참 쉬운 일은 아닌 것 같아요.
어떤 이들에게 추천하는지
물론 부모와 자식이 함께 보면 좋겠지만 현실적으로는 어렵지 않겠어요?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연극을 보는 경우가 극히 드물더라고요. 괜히 쑥스럽기도 하고. 그러니 꼭 같이 보지는 않더라도 각자 보고 감동을 느낀다면 좋겠어요. 자녀세대가 연극을 보고 부모에게 전화 한 통이라도 걸게 된다면 뿌듯할 것 같아요.
공연 소개 연극
일정 12월 31일까지
장소 대학로 공간아울
연출 노민수
출연 박인환, 임동진, 박혜진, 한기중, 전국향 등
에어비앤비의 잘나가는 시니어 호스트로 소문난 최형식(崔亨植·64), 박만옥(朴萬玉·56) 부부의 집으로 찾아가는 과정은 물음표의 연속이었다. 관광지와 거리가 먼 서울 강북의 전형적인 아파트 밀집지역. 휑한 지하주차장에 내려서도 그 물음은 계속됐다. 인터폰을 통해 잠긴 철문들을 통과하며 외국 관광객들은 여행 기분을 느낄 수 있었을까? 최씨는 “그게 바로 우리가 넘어야 할 불리한 조건이었다”고 설명한다.
“에어비앤비도 일반적인 숙박업과 다를 바 없어요. 지리적 위치가 중요하죠. 우리 집 주변은 관광지도 없고, 경치가 뛰어나지도 않아요. 그래서 자리 잡기 위해서는 나름의 노력이 필요했죠.”
이들 부부는 자신들이 가진 경쟁력 중 하나는 ‘아침밥’이라고 했다. 아내 박만옥씨는 다양한 경험 덕분이라고 설명했다.
“전 세계 건설현장을 돌며 현장 소장으로 근무했던 남편 덕분에 다양한 식문화 경험도 했고, 부하 직원들을 초대해 식사대접하는 일도 잦았거든요. 그래서 외국인 입맛도 어렵지 않게 맞출 수 있게 됐죠. 워낙 요리에 관심이 많아 한국에 돌아와서 일식, 양식, 한식 공부도 했어요.”
단지 맛있는 음식을 제공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이 집의 원칙은 아침식사를 오전 7시 시작, 최씨 부부도 함께 식사한다.
“음식을 따뜻하게 차려주고, 함께 식사해요. 함께 밥을 먹으면서 여행에 대한 정보도 나누고 소소한 일상에 대해 이야기해요. 마치 가족을 얻은 기분을 느끼죠.”
출가한 자녀의 빈방을 활용하는 대부분의 시니어들과 달리 최씨 부부의 두 아들은 아직 부부와 함께 살고 있다. 방이 모자랄 땐 두 아들이 한 방을 쓰기도 한다. 한국관광공사에서 사정할 땐 두 아들 모두 친구 집으로 보내 방을 확보한 적도 있다. 물론 가족의 평범한 생활 모습은 ‘객’들에게 그대로 노출된다.
“미국에서 온 노부부는 가족끼리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무척 좋아했어요. 아이들을 자기 자식처럼 대해주기도 하고요. 다른 나라 가족의 생활을 들여다볼 수 있는 것은 그들에겐 매우 흥미로운 일이라고 생각해요. 아이들도 불편해하지 않아요. 집으로 찾아온 외국인들과 스스럼없이 친해지기도 하고 함께 놀러 나가기도 해요.”
최씨는 에어비앤비를 통해 얻은 가장 큰 선물은 끊임없이 외국에서 함께 이야기를 나눌 누군가가 찾아와준다는 것이다. 1997년 이란 테헤란 현장에서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 노후가 우울해질 수도 있었지만, 많은 외국인 친구들과의 만남을 통해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되는 심리치료 효과까지 얻었다.
“일부에선 에어비앤비 호스트를 시작하면 당장 떼돈을 벌 수 있을 것처럼 호들갑을 떨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아요. 돈이 목적이라면 후회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노후에 보람 있는 일을 찾는다면, 에어비앤비도 좋은 후보 중 하나가 될 겁니다.”
서울 마포구 망원동. 감성적인 카페와 맛집, 편집숍 등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동네다. 그래서 요즘 젊은이들은 이곳을 ‘망리단길’(이태원의 경리단길 초창기 모습과 닮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부른다. 그 소문만 듣고 찾아가 인근 홍대거리나 가로수길의 비주얼을 기대했다면 조금 당황할지도 모르겠다. 망원동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망원시장’의 아우라가 무척 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금만 걷다 보면 느낄 수 있다. 그 이중적인 분위기가 바로 망원동의 매력이라는 것을.
‘망리단길’이라 불리고는 있지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라고 말하기는 모호하다. 그러나 어디서 시작해도 좋고, 어떻게 가도 망원시장을 만나게 된다. 특별히 어느 가게를 가려고 정한 것이 아니라면 망원역 2번 출구로 나와 망원시장을 중심으로 지그재그로 거닐어볼 것을 추천한다. 주택가와 시장 사이 골목마다 보석 같은 공간이 숨어 있다.
사실 망원동 마니아들은 자신들의 단골집이 알려지는 것을 꺼린다. 수수하고 한적했던 몇몇 가게가 입소문을 타는 바람에 관광지처럼 변해 버리는 경우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래전부터 자리 잡고 있던 상인들을 만나면 이곳이 ‘망리단길’로 유명해지는 것이 싫다고 이야기했다. 대부분 욕심 없이 장사하고 편안하게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가게를 낸 것인데, 뜨내기손님들이 몰려와 일상의 여유도 사라지고 단골들도 떠난다는 것이 안타까운 이들이다. 언론 매체에 소개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거나, 그 가게에 두세 번 방문해 충분히 어떤 곳이라는 것을 느껴야지만 취재를 허락한다는 곳도 있었다. 잠시 카메라를 끄고 만난 한 상인은 “처음 이곳에서 느꼈던 매력이 많이 사라진 것이 아쉽다”며, “월세도 많이 올라 조만간 다른 지역으로 가게를 옮길 계획”이라고 했다.
망원동 사람들의 바람처럼 그곳만의 소소하고 느릿한 매력을 해치지 않는 좋은 방법으로 ‘혼자, 또는 둘이서 방문하기’를 추천한다. 혼자 와서 밥 먹고, 차 마시고, 편집숍을 둘러보는 이들이 꽤 많은 편이다. 그곳이 주는 즐거움은 누구와 대화를 하거나 함께하지 않더라도 그 자체로 느낄 수 있는 요소가 많다는 점이다.
커피가게 동경 망원동 410-1 지하
드립커피를 주문하면 취향을 물어 그에 맞게 커피를 내려준다.
황인호의 원당수제고로케 망원동 486-39
망원시장 입구에 있는 고로케 맛집. 1000~1500원 선.
카페부부 망원동 376-15
노부부가 30년 동안 살던 주택을 젊은 디자이너 부부가 리모델링해 만든 공간. 커피, 디저트, 간단한 식사 주문이 가능하다.
디자이너 편집샵 RHOO 망원동 375-1
감각적인 디자이너들의 작품을 전시 및 판매하는 곳. 가게 한쪽에 있는 테이블 공간에서 잠시 쉬어가도 좋다.
장난감가게 마마미투 망원동 404-38
키덜트를 겨냥한 인형, 피규어, 캐릭터 문구 용품 등을 판매한다.인터넷 쇼핑몰(www.mamametoo.com)도 함께 운영.
만일 책방 망원동 399-46
대형 서점에서는 느끼기 어려운 아늑한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동네 책방이다. 가게는 작지만 커다란 테이블이 인상적이다.
에그머랭&쇼룸 더 팩토리 망원동 376-14
핸드메이드 모자, 가방, 신발, 매니큐어 등을 구경하면서 음료와 디저트를 즐길 수 있는 공간이다.
소쿠리 망원1동 414-16
‘작고 느린 상점’이라는 콘셉트로 운영하는 곳으로, ‘소쿠리’라는 이름처럼 투박하고 정겨운 물건들을 판매하고 있다. 옛날 시계나 접시, 물병 등 향수를 자극하는 소품들이 눈에 띈다.
77세 현역 극작가 윤대성의 신작 (이윤택 연출·연희단거리패)가 부산 초연에 이어 서울 공연도 성황리에 마쳤다. 이 연극은 치매요양병원에서 벌어지는 치매 노인들의 사랑이야기로, 독자들이 공감할 만한 연극이다. 이에 독자들을 대신해 동년기자단 11명이 서울 공연 첫날이던 지난달 7일 공연장을 찾았다. 연극 관람 뒤 이어진 관객과의 대화를 통해 치매 환자, 가족, 현실과 연극에서 느꼈던 치매에 대한 진솔한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왔다.
녹취정리 권지현 기자 9090ji@etoday.co.kr
사진 오병돈 프리랜서(Studio Pic) obdlife@gmail.com
동년기자단 김종억, 김진옥, 박혜경, 백외섭, 성경애, 양복희, 육미승, 이인숙, 장영희, 장원일, 조왕래
-연출가 이윤택이 말하는 연극
는 100% 하고 싶었던 작품은 아니었습니다. 이 극을 쓰신 윤대성 선생님은 지금 요양원에 계십니다. 공연 팸플릿에 쓴 ‘작가의 글’을 보면 ‘내가 지금 요양원에 있고 내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나이든 노부부가 스스로 요양원에 들어가 생활하면서 쓰신 글입니다. 그리고 아버님이 치매로 돌아가신 연극계 여성의 구술 증언과 윤대성 선생님이 보내주신 ‘제3병동’이라는 제목의 연극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연극입니다.
-고령화 사회, 시니어 세대에 접어들었지만 치매 소재 연극은 처음
저도 고령화 사회에 진입했다지만 부끄러운 게 이 소재를 가지고 공연해본 적이 없습니다. 막상 해보니까 이게 사실적으로 표현하면 정말 심각한 비극이 될 것 같더라고요. 사실적으로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나이 든 분들의 진실과 관련된 문제인데 또 가볍게 갈 수도 없었습니다. 굉장히 힘든 작품이었죠. 조심스럽게 사례조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대본 검증을 치매관련 기관에서 받았습니다.
“치매에 대한 예방책이 있을 거 아닙니까?”라고 했을 때 원래 대사는 “없다, 끝이다”였습니다. 사실 여러 가지 예방책을 얘기하지만 인간의 의지로서는 이겨낼 수 없는 것이 치매입니다. 그래서 “이제 남은 것은 투쟁이다. 투쟁!”으로 바꿨습니다. “없다”는 말을 “투쟁”으로요. 연극을 만드는 우리로서는 최선을 다해야 했습니다. 제일 중요한 건 치매에 걸린 당사자들이 이 작품을 봤을 때 불쾌하거나 나쁜 기억을 가지지 않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이것도 연극인데 너무 한 쪽만을 보여서 연극을 재미없게 하는 것도 힘들었어요. ‘현실과 연극, 양쪽을 생각하면서 작품을 만든다는 게 힘든 작업이겠구나!’ 생각했습니다.
이 작품을 공연하자마자 전국에서 난리가 났습니다. 한 백화점에서는 작품도 보지 않고 전국 순회공연을 제안했습니다. 내용이 고령화 사회이고, 백화점에 오시는 분들이 연세가 있는 분들이 많고 또 굉장히 심각한 문제라는 것이죠. 많은 지원은 하지 못하겠지만 전국 순회공연을 해달라고 했습니다. 동년기자단도 오늘 단체 관람을 오셨지만 시니어들의 단체 관람이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 이런 연극을 해야겠구나. 정말 시니어를 위한 연극이 없었구나! 문화가 없었구나! 시니어들에게 어떤 공연 문화가 필요할까’를 고민하게 됐습니다.
-해피앤딩 대신 따뜻한 이별
이 공연을 하면서 극단과 저의 전략은 ‘없는 희망을 가질 수는 없다. 해피앤드로 끝날 수는 없다’는 것이죠. 그래서 결국은 극 중에서 어르신이 치매로 죽습니다. 죽더라도 아름답게 죽자. 마지막에 여주인공이 “할 말 없지요? 그냥 가세요.”라고 말합니다. 나이 드신 분들에게 삶의 의욕에 ‘사랑’이라고 하는 묘약을 던져서 기분 좋게 돌아가시도록 하는 정도가 목적이었습니다. 공연을 하면서 제일 두려웠던 것이 실제 시니어들의 반응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연극은 나이 드신 분이 보아야 할 게 아니라 치매 노인을 모시는 며느리나 아들, 손자가 봐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이 연극은 창작극입니다. 그것도 77세 현역 극작가가 진짜 자신의 기억을 갉아 먹어가면서 쓰신 작품이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 우리는 막을 올려야 했습니다. 좀 거칠지만 우리 창작극의 역사가 100년밖에 안 되지만 창작극이 가지고 있는 감정적인 동기, 실제로 받아드릴 수 있는 것이 창작극의 매력이 아닌가 하는 심정으로 작품을 올렸습니다. 오늘 저는 보통 서성거리지 않는데 자신이 없어서 문 뒤에 서서 연극을 본 게 아니고 관객을 봤습니다. 관객을 봤는데 모르겠어요. 고등학생에서부터 시니어까지 다양하게 오셨는데 어떻게 재미있게 볼 만 했습니까?
김진옥 치매라는 주제를 가지고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게 다뤄주신 것 같아서 아주 좋았습니다.
이윤택 그렇게 보셨다면 정말 감사합니다.
장영희 이라는 단편영화가 있습니다. 그 영화가 최고상을 받았다고 해서 본 적이 있는데 이 작품과 비슷하게 사랑이 찾아오는 내용이었어요. 저는 연극이 전달하는 의미가 훨씬 가슴이 와 닿았고요, 굉장히 좋았습니다. 선생님께 묻고 싶은 것은 극중 여주인공이 전혀 기억이 전혀 안 나다가 기억이 돌아온 것인가요?
이윤택 마지막에 긴 독백을 하지 않습니까? 그건 본인의 기억이에요. 그런데 그게 여주인공의 기억이기는 하지만 재창조한 거죠. 기억의 재구성이라고 말씀 드렸는데. 사실 이 작품이 쉬운 작품이 아닙니다. 구조적으로요. 이게 의식과 무의식을 왔다 갔다 하죠.특히 이 할머니 역할이 굉장히 어려운 역할입니다. 쓰러졌다 울다, 웃다를 반복하죠.할머니의 고향에서 있었던 이야기가 기본이 되고 그 기억을 밑천으로 남자 주인공이 원하는 기억 속으로 재창조해서 들어간 것입니다. 상상력, 그러니까 창조죠. 그 장면이 이 연극의 압권입니다.
양복희 스토리가 사실은 아니잖아요. 치매 환자는 과거의 기억들을 영롱하게 기억할 수 없잖아요.
이윤택 보통 치매 환자들은 확인해 본 결과 현재 기억이나 현실적인 기억은 잊어버리는 대 신 기억 하는 패턴은 있어요. 그런데 너무나 명확하게 기억한다는 것이죠. 치매라는 것이 제 일 안타까운 것은 치매 환자들의 정신이 이중적으로 갈린다고 해요. 기억이 안 난다는 것을 자신이 안답니다. 기억이 안 나는구나 하는 것을 본인이 알고 있어요. 그런데 그 표정이 너무 힘들어서 연극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라고 하죠. 이성이 살아있지만 한편으로는 모르는 거죠. 이 이중적 거리 때문에 힘들다더라고요.
육미승 그 흥미를 위해서 현실적으로 기억을 되살린 것으로 보였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거 같아요. 치매 환자가 잠깐 알아볼 수는 있지만 그렇게 길게 알아보지는 못한다고 들었는데 극적인 흥미를 위해서 그렇게 표현하신 건가요?
이윤택 아까 잠깐 잠깐이라고 하셨는데 남자 주인공의 어머니가 지금 치매입니다. 어머님이 이 연극을 보셨어요. 쉽게 말해서 어머님이 이 연극을 이해를 못하세요. 그런데 또 어떤 부분은 이해하세요. 인간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연극이 아닙니다. 있어야 하는 현실, 우리가 좀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현실적인 모델을 만든 것이 연극입니다. 대부분의 치매 환자들이 기억을 망각하고 뭘 하지 못하더라도 그 사람들에게 이런 꿈이 있다, 상상할 수 있고 창조할 수 있다는 가설을 만들어내는 것이 연극이라는 거죠.
장영희 호스피스 병동 이야기를 다룬 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본적이 있습니다. 그 곳에 들어가면 평균 21일 안에 사람이 죽기 마련인데 어떤 사람이 살아서 나왔다더라고요. 그래서 영화 초반에 나오다 왜 그 사람 이야기를 후반에 쓰지 않았냐고 영화감독에게 물었더니 “쓸데없는 희망을 갖게 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그분을 배제했다”고 답했습니다. 선생님은 치매 환자를 몇 번씩 살리고 기억도 살리셨잖아요?
이윤택 두 가지 개입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않게 한다는 것도 하나의 판단 선택일 수 있죠. 우리 연극에서 기적이라는 말이 나오잖아요? 우리는 기 적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술의 기능이라는 게 어느 하나만 선택하는 것이 아니고 앞에서 말한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하겠다는 아주 현실적인 사고겠죠? 나는 그래도 기적을 만들어내겠다는 상당히 낭만적인 생각을 가지고 접근 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사고가 다른 것 같습니다.
정원일 질문 하나하고 소감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아까 뒤에서 보셨다고 했잖아요. 관객들의 반응에서 일치된 면과 가장 안 맞아 떨어진 것이 무엇인지 물어보고 싶습니다.
이윤택 안 맞아 떨어진 것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관객들에게 원했던 것은 딴 것은 없고 집중력이었습니다. 관객들이 하품하거나 졸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집중이란 면에서 확실했습니다. 그리고 더 알맞았던 점은 조금 웃어줘야 할 때 다 웃어주셨고 조 금 긴장해야할 때 다 긴장했고요. 저는 오늘 관객에 대해서 상당히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정원일 소감을 말씀드리자면 남녀 주인공이 대화를 가지고 이야기를 이끌어갈 때 가장 재밌었습니다. 다른 배우들에게는 죄송하지만 그렇게 가볍게 장치를 안 해 놓으셔도 두 분이 치고받는 대사들이 집중력 있고 재밌었다.
조왕래 치매관련 연극이라기에 전철로 2시간 거리인 파주 월롱에서 왔습니다. 치매 전문 봉사자 활동을 5년째 하고 있는데 수많은 치매 환자들을 만나고 있어요. 주로 치매 환 자들 중에는 외로운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연극을 통해 일반인들이 치매라는 병을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앞으로 혼자 사는 독거노인이 늘어나게 되면 치 매 환자도 폭발적으로 늘어날 텐데 건강한 노인이 덜 건강한 노인을 돌보는 노노케 어(老老Care)가 될 수 있도록 사회 분위기도 바뀌어야 합니다. 다음에 그런 내용을 연극에 넣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이윤택 치매의 원인은 외로움입니다. 외로움은 가족에서 온다는 게 있습니다. 연극에서 가족 이 재구성되잖아요. “이 사람이 네 아버지다”라고 하는데 실제 아버지는 아니지만 실질적인 가족보다도 진짜 진실이 통할 수 있는 가족인 것이죠. ‘외로움이 치매의 원인이다, 치매를 사랑으로 극복해야 한다’가 애초의 주제였습니다.
성경애 많이 울었어요. 엄마가 생각나서요. 엄마가 그렇게 돌아가셨거든요. 너무 생각이 많이 나고 웃다가 울다가 배우 여러분 너무 감사하고요. 오늘 여기 오기를 너무 잘한 거 같아요. 그냥 저도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나이거든요. 너무 애쓰셨습니다. 다 하 나하나 소중하게 다 잘해주셨습니다. 너무 많이 울었습니다.
이윤택 오늘 주연 배우 두 명이 다 울었어요. 아까 김철영씨도 울었고 김미숙씨도 통곡을 하는데 연습할 때 평소 보지 못했는데 막 울더라고요. 오히려 울어야 해소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김진옥 그런데 실제 치매 환자는 이렇게 고요하고 아름답지만은 않아요. 이중인격처럼 극과 극을 치달아요. 편안하게 살았던 사람도 치매가 되면 폭발을 하고 완전히 다른 사람 이 되는 것을 많이 봤어요. 정말 인품 좋던 분이 정말 저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바뀌는 것도 봤습니다. 너무 잔잔한 것 같은 느낌?
이윤택 그 부분에 대해서 예술적인 동기를 말씀드리면 치매에 대해 불편하게 갈 것인가 하 는 개념에서 고민이 많았습니다. 그 개념에서 프랑스 철학자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1915~1980)의 결핍에 대한 결핍을 채우는 쪽으로 갈 것이냐 프로이트(Sigmund Freud·18561939·오스트리아)로 갈 것이냐 하는 문제였습니다. 프로이트적인 것은 ‘치매의 원인’을 밝혀야 한다. 파헤쳐서 환자가 그 원인을 알아야 낫는다’는 게 프로이트적인 심리치료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오히려 아니라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원래 넌 원래 이런 사람이야’라고 알아버리면 안 된다는 거죠. 오히려 프로이트적인 심리치료가 문제가 있다는 게 드러 났어요. 롤랑 바르트의 방법은 환자들에게 아름다운 것, 환자들에게 결핍된 부분을 계속 이야기하는 거죠. 환자들이 가지고 있는 나쁜 점, 추악한 점은 모르게 해라, 계속 좋은 것만 이야기함으로써 상대적으로 결핍되고 나쁜 것들이 순화된다고 하는 게 롤랑 바르트의 이론이에요. 많은 분들이 치매 환자가 연극에서처럼 곱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정말 리얼하게 보여준다면 치매 환자들은 더 나빠진다는 것이죠. 저 희가 치매병원에 가서 이 공연을 해야 하는데 가서 우리가 이런 공연을 할 때 치매 환자들이 실제로는 막 이러는 사람들도 본인들도 얌전하게 볼 겁니다. 아까 말한 대 로 연극은 현실 그대로가 아닙니다. 연극을 어떻게 만드는가 하는 것은 연극 만드는 사람들의 장마다 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뭐 저나 우리극단이의 입장은 너무 현실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약간 조금은 버전 업 시키는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박혜경 저는요 사실 크게 잘 모르고 왔어요. 굉장히 무거우면서도 슬프면서도 자신을 성찰 하는 시간이었어요. 저도 시니어 초년생인데 앞길에 대한 생각 자식 생각도 했어요. 어린아이들이 와보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고,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공연할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도 느꼈습니다. 의사선생님도 치매에 걸린 건가요?
이윤택 치매 사례 중에 ’오동추 목사’라는 것을 봤습니다. 의사가 치매 많이 걸립니다. 의사 가 치매 환자라는 설정, 정신과 의사들이 많이 정신병에 걸립니다. 현실을 정신병자 시각에서 보는 경우가 많다. 아버님부터 치매로 죽었고, 실제로 ’오 주여’하다가 오동추가 튀어나고는 것이고. 실제 사례였습니다. 결국 치매는 하나님도 도울 수 없는 문 제라는 뜻이었습니다. 극 중에서 의사는 치매요양병원을 자가 운영하던 사람이고 60 대였고 또 딸은 50대였잖아요. 유전이 된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관 객 마지막 장면에 의사나 딸 또한 치매에 걸리면서 끝나는데 젊은 사람들도 안전할 수 없다, 남의 일이 아니란 뜻을 보여준 건가요?
이윤택 작가 선생님이 마지막 장면을 중요하게 해달라고 하셨습니다. 치매가 우리 모두의 문제라는 인식을 주고 싶었다 하더군요. 서로를 이해하는 세대 간 소통 연극이 돼야 하지 않나. 고령화 사회와 아들 세대, 손자 세대 3세대가 봐야하지 않는가 생각합니다. 치매협회 전문가들이 하는 얘기를 들으면서 고쳐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치매에 대한 두려움과 불쾌감 혐오를 가지시는 분들에게 이 연극을 통해서 ‘너무 그러지 마라. 불쾌하게 꺼리지 마라. 인간이 거쳐야 하는 과정이다’라고 인식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런 효과를 노리는 것이죠.
장영희 저는 웰 다잉 차원에서 아름다운 마무리, 마침표에 접근하고 싶습니다. 마지막에 “아 무 걱정 말고 가세요”하는 부분이 너무 마음에 들었어요. 좋은 말로 보내는 것도 좋은 것 같아요.
이윤택 이왕 죽는 데 “편하게 갑시다”라는 뜻이었습니다.
이 외 동년 기단 의견
김종억 동년기자
대개의 사람들은 치매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인지는 하고 있다. 연극 는 무거운 주제를 약간은 극적으로 구성해 무겁지 않게 했다. 실상 치매 환자가 극처럼 전개되지는 않는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고서는 있을 수가 없다. 실생활에서 한두 번쯤은 치매환자를 겪어보았거나, 현재진행형일 수 있기에 더욱 마음이 무겁게 내려앉는 소재이기도 하다. 하지만, 연출자의 말대로 너무 무겁게 전개한다면, 현실적일 수 있으나 보는 이에게 ‘희망적인 메시지보다는 너무 가혹한 현실을 인지시키는 일’ 일 수 있다. 는 조금은 밝게 터치해 나가면서 잔잔한 마음의 울림을 가져오기에 괜찮았다. 치매와 관련된 당사자나 가족들이 드러내 놓고 편하게 얘기할 수 있는 소재는 아니기에 그 상황을 직면하고 있으면서도 그저 안으로 삭이면서 자신의 현상을 괴로워하고 속상해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누구든지 나이가 들면, 올 수 있는 현상으로 자각하고 사회적으로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면서 예방하고 관리하는 분위기가 확산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백외섭 동년기자
좋은 주제로 열정적인 연기를 한 출연진과 공연준비를 한 제작진에 뜨거운 박수를 보낸다. 남달리 관심이 많은 것은 치매 10년차 노모가 노인요양원에 계시기 때문이다. 한 달에 2번 이상 문안드리면서 어머님을 비롯한 다른 환자의 발병 원인과 병증세가 각기 다르다는 사실을 알았다. 발병 원인은 연극에서처럼 유전도 있지만, 사고가 의외로 많다. 필자의 모친께서는 낙상에 따른 고관절 수술 후 치매가 천천히 진행되었다. 고령자는 자기가 의식하지 못하는 조그만 사고가 치매의 원인이 되는 경우가 많다. 주위에서도 모르고 있기 때문에 고령이나 유전으로 치부하고 있다. 다양한 발병 원인을 연극에 가미하면 어떨까 생각해 보았다. 증상도 기억력 상실만이 아니다. 이상발작을 동반하는 경우도 많다. 어떤 때는 정상인보다 더 힘이 넘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치매를 불치병으로 여기는 현재의 의료 환경에 가슴이 미어진다. 시니어는 부지불식간에 닥치는 낙상이나 상처를 특히 조심하는 등 치매예방 노력이 필요함을 절실히 깨달았다.
1, 지리산 청학동서 세상을 만나다
필자는 촌놈이다. 지리산 삼신봉 아래 청학동 계곡에서 세상을 만나서다. 청학동은 경남 하동군 청암면 묵계리 일원을 이른다. 삼신봉에서 발원한 맑은 물이 기암괴석으로 둘러쳐진 계곡을 돌고 돌아 섬진강으로 이어진다. 하동읍까지 40리(약 15.7㎞), 진주시까지 100리(약 39.3㎞)다. 지금은 관광지로 많은 사람이 찾지만, 앞산 토끼와 뒷산 토끼가 서로 발맞출 수 있는 두메산골이었다. ‘정감록’을 비롯한 몇몇 옛 문헌에 신선들이 사는 이상향으로 등장한다. 청학이 노닐고 흉년, 질병, 난리가 없는 지상 낙원으로 신라 말기부터 전해오는 마을이다. 할아버지도 거창군 가조면 율리에서 그 이상향을 찾아 이곳에 삶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유불선합일경정유도교"의 신자들도 1960년대 초반부터 이곳에 보금자리를 틀었다. 한복을 입고 결혼 전에는 댕기 머리를 땋고 결혼 후에는 남자는 상투를 틀고 여성은 쪽 지은 머리에 비녀를 꽂는 풍습의 도인촌이다.
이곳으로 이주한 조부모와 부모는 화전을 일구어 밭농사를 지었다. 계곡 주위의 다소 반반한 터를 잡아 다랑논을 만들었다. 어느 가을날 그 밭에서 일하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빨치산에게 붙잡혔다. 부역을 시키거나 총살을 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소나무 둥치에 포박하여 둔 채로 그들은 떠나갔다. 어둠이 깔리자 두 분은 묶인 손의 밧줄을 간신히 풀고 일궈놓았던 논밭과 익어가던 곡식을 팽개친 채 빈 몸으로 10리(약 3.9㎞) 떨어진 대밭 몰이라는 아랫마을로 소개하여 삶의 터전을 새로 마련했다.
필자는 청학동서 배태하여 이곳에서 삼 형제 중 늦둥이 막내로 태어났다. 음력으로 1950년 2월 초나흘 새벽닭이 울 무렵이었다. 배냇저고리에 쌓여 한국전쟁을 겪었고 그곳에서 유소년시절을 보냈다. 끼니를 챙기는 어머니 곁에서 딸처럼 아궁이에 불을 지피어 드리기도 하고 들녘에서 나물을 캐기도 하였다. 닳고 닳은 놋쇠 숟갈로 감자 껍질을 벗겨드리기도 하였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하동읍에 있는 하동중앙중학교에 입학했을 때도 등잔불을 켜고 살았다. 밤에 공부하고 나면 콧구멍이 까맣게 그을렸다. 등잔불에 넣을 기름도 40~ 50분 걸어가야 하는 면사무소 근처의 가게에서 기름때 진득하게 낀 됫병에 짚으로 꼰 새끼줄을 묶어 조심스레 들고 와야 했다.
어머니 나이 33세에 필자를 낳았다. 큰 형님과는 10세, 둘째 형님과도 6세 터울이다. 할아버지의 만류로 9세에 초등학교에 입학(1958)했다. 징검다리가 있는 개울을 건너 신작로 고갯길을 돌고 도는 1시간 거리에 있는 청암초등학교였다. 공부 잘하고 달리기, 웅변, 그림 그리기 등 모든 부분에서 두각을 보였고 전교 학생회장도 했다. 중학교 역시 수석으로 입학하였고 3년 동안 1등을 놓친 적이 없는 수재로 지역주민의 기대를 받고 자랐다. 중학교 때는 같은 학년의 친구 집에 입주하여 공부를 도와주고 숙식을 해결한 적도 있다. 중학생이 가정교사로 일한 것이다. 중학교를 졸업한 후 초등학교 모교 졸업식에서 축사한 특별한 경험이 있다. 동네 결혼식의 축사도 도맡아 했다.
2. “당신은 중책을 맡게 될 거야!”
거창대성고등학교를 졸업(71)한 후 72년 곧바로 국민대학교 행정학과에 입학하여 1학년을 마치고 공군에 자원입대하여 관제병으로 3년 만기 전역했다. 이후 77년 10월, 대학 졸업 직전에 쌍용그룹 고려화재해상보험㈜에 공채로 입사했다. 특종보험 언더라이팅 업무를 하다 기획조사부로 발령되어 신상품 개발 업무를 하여 국내 최초 골프보험, 낚시보험 등의 레저보험을 개발하였다. 79년 4월 15일, 다섯 살 아래인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결혼하였다.
보험감독원 등 외부기관 연수에서 늘 우수한 성적을 거두고, 재무부 장관 표창도 받았다. 83에는 스위스 취리히에 있는 스위스보험연수소(SITC)를 수료(사진)했다. 중견 사원이 되었을 때는 운영상 문제가 있었던 제주지점, 대전지점, 동대문지점장으로 부임하여 업적을 크게 올렸다. 그런 덕으로 96년 초 직장의 별인 임원으로 승진해 부산, 경남, 제주를 관장하는 본부장(부산 주재)을 지냈다.
3, 47세에 용도폐기
호사다마라 했던가? 임원으로 승진한 지 2년이 채 되지 않았던 1997년 12월 말 갑작스럽게 해임되었다. 충격이었다. 나이 47세 때다. 유능한 직원으로 인정받으며 회사 일에 매달려온 지난 날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한창 일할 나이였고 두 아들도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다닐 때였다. 아버지로서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이 필자에게 거는 기대를 생각하면 더 얼굴을 들 수 없었다. 넥타이를 매고 정상 출근하듯 집을 나서 공원에서 배회하다가 퇴근 시간에 맞춰 귀가하는 사람들의 얘기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필자가 바로 그 처지가 되었다.
4. “당신 제 명에 살게 하려고”
해임된 그 날 집으로 돌아가면서 어떻게 아내에게 알려야 하나를 고민했다. 믿고 있는 아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망설여지기도 하였으나 그날로 아내에게 사실을 알렸다. 가족의 의미가 무엇인가? 서로를 알고 서로를 도울 수 있어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지만, 용기를 내어 알렸다.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던 일이어서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잠시 시간을 보낸 아내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참 잘 됐어요. 당신 제 명에 가게 하려고 하늘이 도왔나 봐요! 그동안 애 많이 쓰셨어요. 어디 산 입에 거미줄 치겠어요.” 우리 세대들이 다 그러했듯 나 역시 목표달성을 위하여 몸을 사리지 않고 밤낮으로 일했다. 거래처 접대와 직원 격려를 위한 회식 자리로 자정 무렵에야 겨우 혼자 살던 사택으로 돌아가기 일쑤였다. 이렇게 살다가는 필자가 제 명에 갈 수 없겠다 싶은 생각을 수차례 하였을 것이다.
5. “설상가상”, 이런 때 쓰는 말이구나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퇴직한 다음 해 IMF 위기가 닥쳤다. 먹고 사는 일이 걱정거리로 등장했다. 재취업하려 발버둥 쳐봤지만, 필자가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다단계 모집 광고에 빠져들기도 하였다. 그런 현실은 분노를 부추겼고 속이 더 상했다. 분노를 일간신문 독자 투고란에 토로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행동은 필자에게 도움이 되지 않음을 깨닫고 마음을 비워가기 시작했다. 체면이나 자존심을 조금씩 버렸다. 그런 과정에서 마음을 가장 잘 가라앉혔던 생각은 “나의 직장 운이 거기까진 데 어이하겠어”라고 현실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마음이 한결 안정되었다. 주어진 현실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를 찾기 시작했다.
6, 마당쇠가 되다
생계유지를 위한 일을 찾아야 했다. 퇴직 6개월이 지나서야 고용노동부 고양시고용센터에 들러 실업급여를 청구했다. 처음엔 쑥스럽고 창피하여 신청을 미루고 있었다. 국민연금을 해지하여 생활비로 사용했다. 다른 보험도 모두 해지하였다. 그 후 별별 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아는 사람의 도움으로 만화방을 창업했다. 누워서도, 엎드려서도 만화책을 볼 수 있는 새로운 시스템 도입으로 좋은 호응을 얻어 사업이 잘됐다. 수입을 조금이라도 늘리기 위하여 라면을 직접 끓여 팔기도 하였다. 하지만 시대조류였던 PC방이 성업하면서 이 업종도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그래서 이 사업을 접고 경기 부천시 상동에서 부대찌개 음식점을 창업해 운영했다. 90% 이상이 성공하지 못한다는 통계를 누누이 들으면서도 많은 퇴직자가 덤벼드는 것이 요식업이다. 필자도 그런 사람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처음엔 고전을 면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회사 다닐 때 몸에 익힌 고객서비스 정신이 도움되어 친절한 음식점으로 소문이 나기 시작하면서 수익이 괜찮아졌다. ‘이런 맛에 음식점을 하나보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몸이었다. 계속 아팠다. 특히 나이도 환갑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진정한 삶이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계기를 맞았다. 때마침 가게를 욕심내는 사람이 나타나 적정한 가격 협상 끝에 가게를 넘겼다. 그 후에도 먹고 살기 위해서 다양한 일을 이어갔다. 월 40만 원을 받으며 작은 회사의 조경관리사로 취업하여 매일 아침 긴 대나무 빗자루로 마당을 쓸고 쓰레기봉투를 치우는 일도 하였다. 마당쇠가 된 셈이다. 대형 고깃집 일산한우마을 점장도 하였고 일당을 받기 위하여 MBC 드라마 ‘주몽’ 엑스트라 출연도 해보았다. 마음을 내려놓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좋은 경험이 되었다. 강의 콘텐츠가 생산되었기 때문이다.
7, 친구의 비명횡사, 인생의 전환점 되다
57세 때 가까운 친구를 비명횡사로 잃었다. 두 살 아래의 직장 친구였다. 평소 술은 하지 않았고 담배도 수년 전에 끊어 건강한 사람이었다. 그는 추석 전날 다른 친구들과 남한산성에 올랐다. 산행 중 가슴에 통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구급 차량을 불렀으나 고향 가는 차량 행렬에 막혀 늦게 도착한 119차량에 실려 가까운 성남시의 한 병원으로 가는 도중에 숨을 거두었다. 정말 황당했다. 친구의 죽음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퇴직 후 보낸 10년의 세월을 되돌아보았다. 열심히 산다고는 했지만, 내로라할만한 일은 이루지 못하였다. 이렇게 살다가는 필자도 친구와 같이 무의미한 생을 마감하겠구나 싶었다. ‘100세 장수시대를 맞아 보람 있고 즐거운 생활을 하기 위해선 무엇을 해야 할까’하는 고민을 시작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이제부터는 필자를 위한 삶을 살아야겠다는 것이었다.
8, 60살에 사진 배우다
직장생활과 생업으로 잊고 있었지만, 은퇴하면 햇살 좋은 언덕에 캔버스를 세우고 수채화를 그리는 꿈을 꾸곤 했었다. 그런데 우연한 기회에 필자가 사는 고양시에서 무료로 하는 사진강좌를 알게 되었다. 당시에 필자는 블로그 ‘촌놈의 세상보기’를 운영하면서 사진을 곁들인 글을 쓰고 있었다. 좀 더 좋은 사진을 생각하고 있던 때여서 강좌에 참여했다. 화필 대신에 카메라를 잡은 셈이다. 2010년 7월부터 한 달에 3회 6개월 강좌를 들었다. 필자 나이 60대 중반이었다. 사진에 특별한 재능이나 솜씨를 갖고 있지 않은 초보자였다. 카메라도 소형 디지털카메라 한 대가 전부였다. 하지만 지리산 청학동 계곡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감성과 초등학교 때 수채화를 그렸던 경험, 전 직장에서 맡았던 홍보 관련 일과 사보편찬 업무가 도움돼 일취월장했다.
사진 취미활동은 여가를 무료하지 않게 보내면서 건강도 챙기고 여러 사람이나 자연과 함께함으로써 외롭지 않게 보낼 수 있게 했다. 때로는 작품으로 부가적 소득과 재능기부도 하면서 평생을 현역처럼 살 수 있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 했다. 사진을 배우기 시작한 3개월 뒤인 2010년 10월부터 공인 사진작가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일반인이 사진작가가 되는 길은 한국사진작가협회가 인정하는 전국사진공모전에서 입선 이상을 하여 획득한 점수가 50점을 넘겨야 했다. 입선하면 2점을 받는다. 일 년 동안에 28회 출품해 절반 이상 낙선하였으나 어쨌든 15회의 수상으로 사진작가 명함을 달았다. 첫 번째로 출품했던 제1회 너브내전국감성사진공모전에 ‘형상II’이 동상의 영예를 안겨주어 출발이 순조로웠으나 다른 공모전에선 잘 뽑히지 않아 포기할 생각도 수차례 하였다. 그러나 사진 자체가 재미있었다. 꾸준하게 찍으며 관련 서적을 사서 공부하고 기회가 되면 망설이지 않고 재능기부도 마다하지 않았다. 사진을 배우기 시작한 3년 만인 2013년 7월 국전인 대한민국사진대전에 ‘무한 질주’라는 작품이 입선했다. 2013년 10월에는 보건복지부와 국민연금공단에서 주관한 ‘8만 시간 디자인공모전’의 사진 부문에 ‘몰입’이라는 작품이 우수상을 받았다. 11월에는 부산일보 주최 제21회 ‘부일 전국사진대전’에 출품한 ‘닭장’이 1,166점 중에서 좋은 심사평으로 2위인 우수상 영예를 안았다. 부산일보는 2013년 12월 26일 자 기사에서 이렇게 전했다. "변용도 씨의 우수상 '닭장'은 울타리 안에서 바깥세상을 바라보는 닭의 붉은 머리 부분을 어두운 배경에서 강렬하게 보여 주어, 닭의 모습에서 감옥에 갇힌 사회의 한 단면을 풍자하는 듯한 표현이 출중했다는 평을 받으며 수상작으로 선정됐다."
9. 사진취미, 인생이막의 텃밭이 되다
필자는 사진을 ‘카메라로 쓰는 이야기’로 정의하고 ‘포토스토리텔러’라 자칭한다. 사진은 찍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다.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하여 끊임없는 노력을 한다. 지금까지 찍은 사진의 숫자가 37만 장이다. 카메라는 가장 아끼는 친구다. 늘 함께한다. 사진은 취미가 아닌 일상이 됐다.
사진 활동이 바탕이 되어 다양한 분야로 활동영역이 확대되어 다용도(多用途)로 후반생을 바쁘고도 보람 있게 산다. 사진이 인생이막의 텃밭이 되었다. 필자는 그 텃밭에 글솜씨, 강의 솜씨를 추가로 뿌렸다. 그런 씨앗에서 싹이 돋고, 잎이 무성해지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기 시작했다. 2008년에는 ‘미역국’ 외 다수의 작품으로 ‘순수문학지’ 신인상에 당선되어 수필가 명함을 달았다. 2012년에는 필자의 블로그 ‘촌놈의 세상보기’가 대한민국 100대 우수블로그로 선정됐다. 사진작가, 사진 칼럼니스트, 수필가, 저자, 강사(은퇴준비, 생애 재설계, 변화관리, 사진), 방송인(KBS 1TV ‘아침마당’, SBS라디오 ‘유영미 마음은 언제나 청춘’ 시니어리포터, 머니투데이 행복특강, 토마토TV 강연, 아리랑TV, CBS라디오, 한국직업방송), 기자(시니어조선 사진명예기자, 사회연대은행 KDB시니어브리지센터 두드림기자), 유어스테이지 시니어리더 겸 시니어리포터, ‘디카와 놀자’와 세화포토클럽 운영자다. 최근엔 경제신문 이투데이 자매지 브라보 마이라이프의 동년기자로 활동을 시작했다.
2013년 11월 ‘아름답게 보니 아름다워’, 2016년 1월 ‘카메라로 쓴 아름다운 이야기’를 출간하여 인터넷 교보문고에서 판매 중이다. 대우조선해양㈜와 미래창조과학부 산하 국가과학기술인력개발원, 고려대 평생교육원 액티브시니어전문가과정 전임강사다. 서울시 서초구 우면동에 있는 우면청춘대학의 사진강좌를 2년째 맡아오고 있다. 사진이 근간이 되어 활동 영역이 확대되었다.
10. 도랑 치고 가재 잡다
대학을 입학하면서 서울 생활이 시작되었고 지금은 경기 고양시 외곽의 한적한 전원 마을에서 자그마한 주택을 지어서 살고 있다. 경제적으로 넉넉하지는 아니하여도 현실을 인정하고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하고 싶은 일 하며 일상을 즐긴다. 즐겁지 않으면 인생이 아니라고 한 어느 노부부 여행가의 생활 철학을 닮아가려 한다. 젊은 시절에 느끼지 못하였던 보람을 느끼며 산다. 전반생보다 후반생을 더 바쁘고 활기차게 보낸다. 그 바탕에 사진이 있다. 많지는 않아도 용돈도 번다. 그야말로 도랑 치고 가재 잡는 형국의 삶을 산다. 2차 성장을 한 셈이다. 하버드대 성인발달연구소 윌리엄 새들러 교수가 “내 생애 최고의 순간을 재창조하는 것이 인생의 2차 성장이라고 말하고 있듯이 제2의 절정기를 만들기 위해 성장을 멈추지 않는다. 변함없는 도전이다. 필자의 이름을 ‘변함없는 용기로 도전하는 남자’로 풀이해본다. 그런 덕분에 누구나 한 번쯤 출연해보고 싶은 KBS 1TV의 ‘아침마당’(2014, 11, 24)에 섭외를 받아 출연했다. ‘다시 시작하는 인생- 나의 두 번째 직업을 소개합니다’란 주제였다. 사진작가로, 은퇴준비강사로 안사람과 함께 출연해 삶의 정점을 새로 찍었다.
11, 생애 최고의 순간을 찾아
세계적 사진작가 프랑스의 마크 리부가 있다. ‘에펠탑의 페인트공’, ‘꽃을 든 여인’ 등 유명한 작품을 만든 현존하는 사진작가다. 기자가 물었다. “선생님의 작품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은 어느 것입니까?” 리부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일 찍을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를 감동하게 한다. 세계 최고의 경지에 이른 작가이지만, 더 나은 작품을 얻기 위하여 계속 노력하겠다는 꿈을 꾼다. 희망으로 산다. 진정한 대 작가의 마음이란 생각이 든다. 그런 마음과 자세가 새로운 경지로의 작품세계를 창조한다고 볼 수 있다. 오늘에 머무르지 않고 발전을 거듭하려는 삶의 철학이, 남이 넘볼 수 없고 흉낼 수 없는 작품 세계를 만드는 것이라 여겨진다. 미래를 향해 또 다른 꿈을 꾼다. 필자 또한 늘 이제 시작이라는 마음으로 아직 오지 않은 생애 최고의 순간을 찾아 도전의 발길을 멈추지 않으련다. 또한 하늘이 인생의 구석구석에 베풀어주신 은혜에 보답하고 경험과 지혜를 이웃과 사회를 위하여 아낌없이 다 쓰고 가리라.
이창식 번역가( 저자)
나이를 먹긴 먹었는지, 요즘 들어 내 인생을 자주 되돌아보게 됩니다. 어떻게 살아야 잘 살았다 할 수 있을까? 만년에 이르러서야 내 나름대로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너무 소박해서 성공적인 삶이라 주장하긴 낯간지러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1) 나보다 나은 삶을 사는 자식을 지켜보는 것
2)손주들과 즐겁게 노는 것
3) 조강지처가 곁을 지켜주는 것.
이 세 가지를 위해 오늘도 나는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나의 일상을 한 번 살펴보면 쉽게 수긍할 수 있을 거예요.
아침 6시 정각에 내 휴대폰 알람은 울립니다.
“오 해피데이~”
노래 가사와는 달리 내 허리와 다리는 묵직합니다. 그래도 일어나야 해요. 꾸물대다간 딸과 사위의 출근에 지장이 있습니다. 우리 부부가 딸네 집으로 먼저 출근해야 그들도 출근할 수 있거든요. 여섯 살 외손자와 세 살배기 외손녀를 인수인계해야 하니까.
늙은 몸을 일으켜 거실로 나갑니다. 냉장고에서 계란 두 개를 꺼내 냄비에 담고 물을 부어 가스레인지 위에 올립니다. 10분쯤 끓여야 익죠.
베란다 광에서 고구마를 꺼내 깨끗이 씻은 뒤 그릇에 담아 전자레인지에 넣고 돌립니다. 6분쯤 돌리면 익습니다.
계란과 고구마가 익는 동안 파프리카, 비트, 사과, 토마토를 꺼내어 깨끗이 씻은 뒤 칼로 잘라 커다란 접시에 담아냅니다. 한 입에 쏙쏙 들어갈 크기로 말이죠. 아침마다 하는 일이라 손길이 제비처럼 날렵합니다.
커다란 컵 두 개에 우유를 반쯤 따르고 미숫가루를 탑니다. 아내가 특별 제조한 종합 영양식이죠. 현미, 검정콩, 수수, 귀리, 보리, 율무, 약콩 등으로 만들었습니다. 티스푼으로 다섯 술씩 넣고 잘 저은 뒤 식탁에 올려놓고 익은 계란과 고구마를 접시에 담아내면 아침식사 준비 끝입니다.
샤워하고 화장을 끝낸 아내가 때 맞춰 부엌으로 나옵니다. 여자는 젊으나 늙으나 준비하는 시간이 오래 걸려요. 남자는 젊으나 늙으나 그런 여자를 기다리고 달래야 할 운명을 타고난 것 같습니다. 아침 식사 준비는 자연히 내 차지가 될 수밖에요.
즐거워야 할 아침 식사지만 새벽같이 일어나 무슨 입맛이 나겠어요? 그래도 먹어야 또 하루를 버틸 수 있다는 생각에 아내와 나는 그냥 욱여넣다시피 합니다. 식사하면서 행복한 표정을 지었던 적이 언제였던가 싶습니다.
느긋하게 커피 한 잔 마실 겨를도 없이 집을 나섭니다. 평생 운전할 일이 없을 줄 알았던 나는 요즘 마누라 잔소리를 보슬비처럼 맞으며 운전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잔소리가 심할 땐 더러 저항도 해보지만, 대개는 지당한 말씀인지라 내 목소리엔 힘이 실리지 않습니다.
분당 딸 집에 도착하면 7시 반. 손자 손녀는 이미 깨어나 뛰놀고 있습니다. 재영이는 유치원 2년생, 희영이는 어린이집 1년생이에요.
8시쯤 딸과 사위가 출근하고 나면 아이들은 우리 책임입니다. 나는 부엌에서 거실로, 안방으로 도망다니는 손자 녀석 쫓아다니며 아침밥을 먹이고, 아내도 똑같이 손녀를 따라다니며 먹입니다. 식사 끝나면 손자 세수시키고 유치원복 입혀 셔틀버스에 태우는 일은 내 책임이고, 손녀를 어린이집에 데려다 주는 일은 아내 몫이죠.
아내는 오후 4시에 어린이집에서 손녀를 데려오고, 나는 오후 5시쯤 유치원에서 손자를 데려옵니다. 그때까지가 우리들의 자유시간인 셈이죠. 나는 CGV에서 영화를 감상하거나 거실 소파에 앉아 미국 메이저리그 야구를 보며 휴식을 취합니다. 아내는 근처 수영장에서 수영을 하며 쉽니다.
유치원에서 외손자 녀석을 데리고 돌아오는 시간은 항상 즐겁습니다. 아파트 단지 안으로 이어진 산책로를 따라 걸으며 녀석은 쉴새없이 지껄입니다. ‘하찌’는 무슨 얘기든 잘 들어준다고 생각하거든요. 우리는 동요를 합창하기도 하고, 보도블록을 따라 깡총깡총 뛰며 가위 바위 보 놀이도 합니다. 미리 챙겨 간 과자와 우유를 녀석에게 먹이는 것도 잊어선 안 되죠.
녀석이 지껄이는 얘기는 대체로 두서가 없습니다. 줄거리도 없고 내용도 없을 때가 더 많죠. 그래도 나는 열심히 들어주며 맞장구를 치고 가끔 추임새를 넣기도 합니다. 어쩌다 기막힌 얘기를 할 때도 있거든요. 같은 반에 있는 시아란 여자아이와 사랑에 빠진 얘기 같은 것 말이죠.
언젠가부터 녀석은 “재영이는 시아를 사랑해!”를 입에 달고 살았어요. 유치원에서 시아랑 결혼까지 했다는 겁니다. 아마 ‘웨딩게임’ 같은 걸 했나봐요. 시아와 결혼한 아이가 저 말고도 둘이나 더 있었다니까요. 또래 중에는 여자보다 남자가 월등 더 많거든요.
“결혼하려면 프로포즈를 해야 하는데?”라고 내가 말했더니,
“프로포즈가 뭐야?” 하고 되묻습니다.
내가 보도블록에 한 쪽 무릎을 탁 꿇고 두 손을 앞으로 내밀며,
“나와 결혼해 주세요라며 여자한테 꽃다발을 바치는 거야”라고 했더니 녀석은 대뜸,
“그렇게 했어”라고 대답했습니다.
“정말 그랬단 말이야?”
하도 어이가 없어 다시 물었더니 녀석은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며 말했어요.
“응, 그렇게 하고 결혼했어.”
껄껄 웃을 수밖에 없었죠.
“엄마하고 시아하고, 누굴 더 사랑해?” 하고 물었더니, 녀석의 표정이 갑자기 심각해졌습니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엄마.” 라고 조그맣게 대답했어요. 아직 어린애거든요. 그런데 그 다음 말이 기가 막혔습니다.
“근데 시아한텐 그 말 하면 안 돼, 알았지?” 하는 겁니다.
“알았어.”
나는 고개까지 끄덕이며 대답할 수밖에 없었어요. 녀석을 안심시켜야 했으니까요.
유치원에서 돌아오면 아내는 이미 어린이집에서 손녀를 데려와 목욕시키고 있습니다. 손자 녀석 샤워는 내 책임이죠. 바로 이 임무를 수행하다가 내 허릿병이 도졌는데, 녀석 몸무게가 어느새 부쩍 는 걸 간과하고 덥석 안았던 탓이었죠. 허리에서 우지끈 소리가 나는 것 같았습니다. 벌써 열흘째 한방치료를 받고 있는데도 아직 허리가 묵직하고 왼쪽 다리가 저리답니다.
사위와 딸이 귀가하는 8시까지는 하루 중 가장 힘들고 길게 느껴지는 시간입니다.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는 손자 손녀 따라다니며 저녁밥 챙겨 먹이고, 우리도 대충 한술 떠야 합니다. 집에 가면 밤 9시가 넘어 따로 차려 먹을 시간이 없거든요. 엄마 아빠 기다리는 아이들도 지쳐 짜증을 부리거나 칭얼대기 일쑤죠. 녀석들을 달래야 하는 우리 노부부도 진이 빠질 대로 빠지고요. 그래도 살살 달래며 같이 놀아줄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손녀가 울음을 터트리면 늙고 지친 아내가 둘러업어야 하고, 그러면 힘이 몇 배로 더 드니까요.
아이들과 즐겁게 노는 일은 그래서 매우 중요합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날마다 즐겁게 놀아야 한다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죠. 고도의 내공이 필요합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나 자신이 바로 ‘아주 재미있는 아이’가 되어야 합니다. 손자 손녀의 친구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죠. 아이들의 머리에 ‘하찌=재미있는 친구’로 새겨져야만 합니다. 눈높이뿐만 아니라, 마음 폭도 같아져야만 해요.
그러려면 실력을 쌓아야 하겠죠? 웬만한 동요는 다 부를 줄 알아야 하고, 무용도 곁들일 수 있으면 금상첨화입니다. 동요와 무용에는 우는 아이도 금방 달랠 수 있는 힘이 있거든요. 심하게 울던 아이도 하찌가 신나게 동요를 부르며 무용을 하면 뚝 그치고 빠져들 때가 많아요.
상황 연출력도 필요합니다. 울거나 투정부리는 녀석을 한순간에 다른 세계로 끌고 들어가는 기술 말이죠. 말로 설명하기 어려우니 한두 가지 사례를 들어보죠.
세 살배기 희영이가 악을 쓰며 웁니다. 아직 말을 할 줄 모르니 이유를 알 수 없어요. 할매가 아무리 달래도 소용없습니다. 또 둘러업어야 할 판이에요. 이럴 때 분위기를 바꾸어 버리는 게 상황 연출입니다. 옆에 앉은 재영이한테 대뜸 이러는 거죠.
“재영아, 코끼리 어디 갔지? 방금 여기 있었는데. 소파 밑으로 들어갔나? 돼지는 어디 있지?”
그리곤 소파 아래를 들여다보며 계속 떠들어댑니다. 코끼리나 돼지나 염소 등은 희영이가 갖고 놀던 장난감이거든요. 이쯤 되면 희영이도 울음을 그치고 함께 소파 밑을 들여다보기 시작합니다. 나는 한참 찾는 척하다가 장난감들을 슬쩍 꺼내며 다음 상황을 연출하기 시작하죠. 동요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오리는 꽥꽥, 오리는 꽥꽥, 염소는 음메에, 염소는 음메에, 돼지는 꿀꿀, 돼지는 꿀꿀, 소는 음무, 소는 음무.”
상황 연출은 자기가 울고 있었다는 사실을 아이가 완전히 잊어버릴 때까지 충분히 오래 끌어야 합니다. 다른 세계로 완전히 밀어 넣어야 하니까요.
여섯 살배기 손자 녀석이 울 때는 그보다 정교하고 급박한 연출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소도구도 달라야 합니다. 녀석이 즐겨 갖고 노는 장남감들을 총동원하는 거죠.
“재영아, 덤프트럭이 버스와 충돌했어! 트럭이 넘어지고, 버스도 뒤집히고, 굴삭기와 경운기도 쓰러졌네! 어쩜 좋아? 사람들이 많이 다쳤을 거야! 그러니까 운전할 땐 조심해야 한다고 그랬잖아. 하찌가 그랬어, 안 그랬어? 빨리 구급차를 불러. 삐뽀! 삐뽀! 경찰차도 불러야지. 애앵! 애앵!”
상황은 새로운 내용을 보태며 계속 발전시켜 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최대한 진지하고 박진감 넘치게 끌고 나가야죠. 아이가 울고 있던 사실마저 까맣게 잊고 “알았어. 지금 전화할게” 하고 끼어들 때까지. 그래서 마침내 하찌와 함께 즐거운 게임을 벌일 때까지.
귀가한 사위와 딸에게 아이들을 인계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9시 뉴스가 방영되고 있습니다. TV를 보며 대걸레로 방바닥 먼지만 대충 훔치고 곧바로 잠자리에 들죠. 6시에 울릴 휴대폰을 머리맡에 놓아두고요. 후유,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나? 주말 휴식이 월요일부터 기다려집니다. 그래도 잠자리에 누우면 재영이와 희영이의 웃는 얼굴이 맨먼저 떠오릅니다. “고것들 참!”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옵니다. 녀석들 아니면 도대체 웃을 일이 없을 것 같습니다. 할매·하찌 기운을 쏙 빼놓지만 동시에 수많은 웃음을 선사하니 참으로 신비한 존재들입니다. 내년이면 희영이도 네 살이 되니 좀 수월해지겠지, 생각하며 안 오는 잠을 억지로 청합니다.
당신의 삶은 어떠했나요? 지금은 어떤가요? 그만하면 성공한 인생이라 생각하나요? 사람마다 판단 기준이 다르겠죠.
신입사원 시절 저는 가전회사 판촉부에서 근무했습니다. 10년을 채우고 사직한 뒤엔 영미 추리소설을 번역하며 먹고살았죠. 칠순을 코앞에 둔 지금 되돌아보니, 냉장고 세탁기 팔려고 뛰던 그 시절이나 남들이 쓴 책 번역하느라 골머리 앓던 그 시절이 다 부질없게 느껴집니다. 내게 남은 건 뭔가 곰곰이 생각해보니 저절로 이런 결론에 도달하게 되더군요.
1. 나보다 나은 삶을 사는 자식을 지켜보고 있다.
2. 손주들과 날마다 즐겁게 놀고 있다.
3. 조강지처가 내 곁을 지켜주고 있다.
자, 이래도 내가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