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이 아이폰을 출시한 지 10여 년이 됐다. 이제 스마트폰은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이 됐다. 시니어 역시 스마트폰 보유율과 SNS 이용률이 지속적으로 늘고 있다.
정보통신정책연구원이 발표한 최근 보고서에 따르면, 2016년 50대의 스마트폰 보유율은 약 90%에 달한다. 또 50대의 SNS 이용률도 2014년 21.5%에서 2016년 33.4%로 10% 이상 큰 폭으로 증가했다. 60대도 두 배 이상 늘어났다. 이런 추세는 시니어가 디지털 세상의 변화를 적극적으로 즐기기 시작했다는 것을 방증한다.
현대인의 일상, ‘SNS’에 있다
최근 시니어도 빠르게 디지털 세상에 적응하고 있다. 친구들과 카카오톡으로 사진이나 건강 정보를 공유하고, 스마트폰으로 은행 일을 처리하는 모습이 낯설지 않다. 가족 간에도 단톡방을 만들어 대화를 나눈다. 또 카카오스토리나 페이스북에서 취미와 일상을 공유하는 사람도 많다. SNS의 가장 큰 순기능은 바로 ‘소통’이다. 온라인은 연령과 성별을 초월한다. 그래서 시니어가 많이 이용하는 SNS도 중요하지만 다른 연령층에서 이용하고 있는 SNS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한국인터넷진흥원의 ‘2017 인터넷이용실태조사’에 따르면, 소위 ‘인스턴트메신저’를 이용하는 사람의 99.4%가 카카오톡을 사용하고 있다. 또한 SNS 이용자 10명 중 6명이 페이스북을 이용하고 있다. 그 뒤를 카카오스토리(47.6%), 인스타그램(30.5%), 네이버밴드(29.7%)가 잇고 있다. 이들이 SNS를 하는 이유는 ‘친교(76.5%)’가 가장 큰 목적이었다. 또 다른 사람이 올린 콘텐츠를 보거나(55.3%), 취미나 여가 등 관심사를 공유하기 위해(43%) 이용하는 사람도 다수였다. 이들은 SNS를 이용하면 사람들과의 관계가 좋아지고(68%), 최신 정보를 빠르게 얻을 수 있다고(66.4%)도 생각했다. 또 직접 만나지 않아도 SNS를 통해 얼마든지 소통이 가능하다고 믿고 있다.
맞벌이 부부의 증가로 일하는 자녀를 대신해 손주를 돌봐주는 조부모가 늘고 있다. 특히 저출산으로 ‘식스포켓(six pocket)’, ‘에잇포켓(eight pocket)’이라는 신조어도 생겨났다. 부모, 조부모, 외조부모에 더해 이모, 고모, 삼촌까지 모두 아이 한 명을 위해 지갑을 연다는 의미다. 손주 세대는 태어날 때부터 인터넷을 접하는 모태 디지털 세대다. 이들은 인터넷이나 스마트폰 없는 세상을 겪어본 적이 없다. 그래서 이들과 소통하려면 인터넷과 SNS 활용은 필수다.
SNS가 주는 3가지 장점
SNS는 생각보다 장점이 많다. 첫째, 돈을 벌 수 있다. 요즘은 1인 미디어 전성시대다. 유튜브 같은 플랫폼에 올린 영상이 인기를 얻으면 수익으로 연결된다. 일상생활, 반려동물 이야기, 먹방(먹는 방송) 등 다양한 내용을 동영상으로 담을 수 있다. 조회수에 따라 광고 수익도 들어오며, 유명한 크리에이터는 제품 협찬 등으로 수익원이 다양하다. 또 창업을 하거나 소규모 자영업을 할 경우 SNS를 통한 홍보가 가능하다. 입소문은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리지만, SNS는 실시간 소통이 가능하다.
SNS의 또 다른 장점은 가족을 비롯해 다른 세대와도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최근 36년 만에 브라질에서 귀국한 이찬재(76) 씨는 인스타그램에서 ‘내 손주들을 위한 그림들’이라는 SNS 계정을 운영한다. 브라질에 있을 때 한국과 뉴욕에 사는 손주들이 그리워 2015년부터 SNS에 매일 그림을 올렸다. 이러한 사연이 영국 BBC에 소개되며 그는 유명인사가 됐다. 사실 그는 인터넷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돌보던 손주들이 한국으로 귀국한 후 그림으로 손주들에게 추억을 남겨주기로 결심했다. 한국의 옛 모습에서 최근의 평창동계올림픽까지 그가 그린 그림은 700여 점을 넘어섰다. 그에게는 33만여 명의 팔로워도 있다. 전시회도 개최하고 그림도 판매한다. 그는 늦은 나이에 SNS를 시작해도 충분히 배울 수 있고 즐길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마지막 장점은 자신만의 개성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셀카를 이용해 사람들에게 웃음을 안겨주는 일본인 니시모토 키미코(90). 72세에 사진을 배운 그녀는 빗자루를 타고 하늘을 날거나 개구리 분장 사진 등을 인스타그램에 올린다. 현재 약 8만 명의 팬들과 소통하고 있는 그녀의 유쾌한 사진을 보면 구순의 할머니라는 상상이 전혀 안 된다. 사진들이 큰 인기를 끌면서 책도 출간했다. 이외에 노부부의 커플룩, 먹방 등을 SNS를 통해 공유하며 노후를 즐겁게 보내는 시니어도 많다.
SNS를 시작할 때 꼭 알아야 할 것들
SNS는 더 이상 젊은이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그렇다면 SNS는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먼저 어떤 SNS를 이용할지 결정하기 위해 각각의 특징부터 알아야 한다. 예를 들어 페이스북과 카카오스토리는 프로필을 기반으로 지인들과 연결된다. 반면 인스타그램은 사진이나 동영상 등 특정 관심사를 올릴 수 있는 이미지 기반의 서비스다. 만약 그림이나 패션 사진을 주로 올리고 싶다면 인스타그램이 적합하다. 각 SNS 앱은 스마트폰에서 다운로드할 수 있다. 다음은 계정 만들기다. 사용할 SNS를 결정했다면 가입을 해야 한다. 예를 들어 페이스북은 이름과 휴대폰 번호 또는 이메일, 생일, 성별을 입력한다. 또 시니어가 많이 이용하는 카카오스토리는 카카오톡을 사용하면 바로 시작할 수 있다.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시니어를 대상으로 SNS 활용 교육을 무료로 하는 시도별 지자체도 많다. 가까운 지자체의 교육 프로그램을 찾아보고 등록하면 된다. 교육 참가가 어렵다면 혼자서도 시작할 수 있다. 유튜브나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서 이용할 수 있는 SNS 사용법을 검색하면 많은 자료를 볼 수 있다. 처음에는 새로운 용어와 사용법을 익혀야 하기 때문에 쉽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인내심을 갖고 꾸준히 하다 보면 신비한 SNS 세상을 경험하게 된다. 시니어는 다양한 삶의 경험이 있기 때문에 창업에서 취미까지 활용 범위가 넓다.
외로움은 시니어의 4대 고통 중 하나라고 한다. SNS에서는 멀리 사는 자녀, 친구와 언제든 만날 수 있다. 아직 SNS를 사용하지 않고 있다면, 디지털 세상이 주는 즐거움을 이번에 시도해보면 어떨까.
이나영 시니어 전문 칼럼니스트
한국외국어대학교 졸업. 차의과학대학교에서 고령친화산업학을 전공했다. 한화그룹과 신한은행에서 근무했다. 현재 경향신문에서 고령사회 담당 객원기자로 활동 중이며, ‘이나영의 고령사회 리포트’를 연재하고 있다.
혼자 살다 보니 아침에 집에서 나오면 우리 집은 늘 부재중이다. 우편배달부나 택배 기사가 가장 싫어하는 유형의 집이다. 현관문에 등기 우편이나 택배는 인근 세탁소에 맡겨두라는 쪽지를 써 붙여 놓기는 했지만, 일단 전화가 온다.
한 번은 등기 우편이 왔다며 택배기사가 전화를 했다. “301호 맞느냐?”는 것이었다. “!”맞다고 했더니 “어디다 두고 가면 좋겠느냐?”고 묻는다. “우편함에 놓아두고 가라”고 했더니 등기라서 규정 상 그렇게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다시 가져 갈 테니 사흘 이내로 우체국에 와서 찾아가라는 것이었다. 사흘 이내에 안 오면 반송한다는 것이었다. 전철로 두 정거장을 가야 하는 우체국에 가는 것도 번거로운 일이다. 현관 앞에 소화전 함이 있다. 거기 넣어두라고 하면 그나마 말을 듣는다. 저녁에 귀가해서 소화전 함을 열어 보니 전에 살던 사람 앞으로 온 등기우편이었다. 지금 어디 사는지 당연히 모른다. 그래서 갖고 다니다가 다른 동네에 갔는데 마침 우체국이 보여 반송하려고 했다. 그랬더니 거주지 우체국에 가서 반송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우편배달부가 집주소로만 맞느냐고 물어서 맞다고 한 것이 잘못이었다. 반드시 수신인 성명도 맞는지 확인해 볼 일이다
또 한 번은 지방의 어느 농산물 협동조합에서 보낸 택배였다. 사과상자만한 크기였다. 필자가 요청해서 온 것이 아니었다. 열어 보니 건강보조식품인데 샘플을 시식하면 상품을 인수할 의사가 있는 것이므로 현금 25만원을 보내라는 안내서가 들어 있었다. 전화번호를 찾아 항의했더니 반송하라고 했다. 다시 우체국까지 그 무거운 것을 들고 가서 반송하는 것도 귀찮은 일이었다.
원래는 택배나 등기 우편이 오면 옆집 할머니가 대신 받아 주었다. 노부부가 살고 있었는데 먹을 것이 생기면 서로 나눠먹던 사이이다. 그런데 그 노부부가 이사 가고 젊은 부부가 이사 왔다. 새로 이사 온 그 집 새댁이 우리 집 현관 앞에 붙여 놓은 ‘옆집에 놓고 가라’는 메모지를 뜯어 버렸다. 어린 아이를 키우고 있는데 우리 집 일로 누르는 초인종 소리에 놀라는 것이 싫었던 모양이다.
한 번은 택배 기사가 “동네 세탁소에 맡겨두겠다”는 것이었다. 필자가 “별로 이용하지도 않는 세탁소인데 괜찮겠느냐?”고 물었더니 부재중인 집 동네 택배는 거기 두고 간다는 것이었다. 과연 세탁소에 가니 택배 등기 우편들을 입구에 모아두고 있었다. 다만 본인 여부 학인을 안 하니 불안하기는 했다. 그 뒤로 세탁소에 일부러 세탁물을 맡기게 되었다.
사실은 더 가까운 곳은 길 건너 부동산 중개소이다. 집 문제로 알게 된 사람이다. 그런데 택배 기사들은 길을 건너면 동네지명이 달라 규정상 그렇게는 못한다는 것이다.
명절 때마다 쌀 20kg을 택배로 보내오는 회사가 있다. 너무 무거워서 세탁소까지 갖다 두라면 화를 낸다. 세탁소에서 찾아오는 일도 힘든 일이다. 그냥 집 앞에 두고 가라고 하면 분실로 책임 문제가 생기면 곤란하다며 고집을 피운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 방화문이 있다. 평소 열어두기 때문에 그 뒤가 눈에 잘 안 띈다. 거기 두고 가는 것이 절충안이다.
어떤 사람은 택배가 오면 기대도 되고 기다려진다고 하지만, 필자는 그리 반갑지 않다. 연락도 없이 택배가 왔다고 연락 오면, 누가 보냈는지, 수신인 이름이 맞는지, 두고 갈 장소 등으로 또 한참 시비를 해야 한다. “누가 보냈느냐?”고 물으면 발신자 택이 취급 과정에서 닳아서 글자가 잘 안 보이는 경우도 있고 영어이름으로 되어 있으면 안 보인다며 짜증을 낸다. 이래저래 신경 쓰인다.
# '살아있는 동안에 한 번은 꼭 해야 할 것들' (박창수 저·새론북스)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계획하고 그 흔적을 남기는 것에 대한 의미와 방법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기자 겸 작가 출신으로 최근에는 ‘시니어와 인생 2막’에 관한 방송을 하고 있는 저자는 “자기 시간을 주도적으로 기획하고 이끌어간다면 우리는 나름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방법 중 하나로 ‘버킷리스트’를 제시한다.
책 서두에는 30대부터 70대까지 다양한 사람들의 버킷리스트가 나온다. ‘버킷리스트’라고 하면 대부분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들’로 인식하지만, 저자는 ‘살아가는 동안 반드시 하지 않으면 훗날 후회하게 될 만큼 정말 하고 싶은 일, 가치 있는 일’이라 표현한다. 아울러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처럼, 중요한 것은 하루라도 더 먼저 도전하면 그만큼 얻게 될 만족과 보람도 크다고 강조한다.
‘우선순위를 정하라’, ‘매년 리스트를 갱신하라’ 등 저자는 버킷리스트를 작성하는 데 있어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있다. 특히 시니어의 경우 여행, 공부, 취미, 봉사활동 등의 항목이 버킷리스트에 많은데, 그보다는 개성 넘치는 나만의 여행 계획이나 때론 욕망을 분출할 수 있는 것을 몇 가지 넣어보라 권한다.
단순히 버킷리스트라는 주제에만 국한되지 않고, ‘나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 ‘가치 있는 것을 위한 포기는 아름답다’, ‘다음 세대를 생각하는 어른이 되자’ 등 삶과 인생의 가치에 대해 고찰해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 리더의 언어병법(김성회 저·㈜북스톤)
리더가 현장에서 부딪히는 문제 상황에 따른 ‘조언 요청의 법칙’, ‘옆구리 설득의 법칙’ 등 36가지 언어병법을 소개한다. 1부 ‘말발’은 일상 업무에 필요한 소통 리더십, 2부 ‘끗발’은 정서적 소통 리더십, 3부 ‘운발’은 인생의 운을 불러일으키는 창조적 소통에 대해 다룬다.
# 젊은이가 돌아오는 마을(후지나미 다쿠미 저·황소자리)
지방 재생 연구자인 저자가 저출산 고령화 시대에 오래도록 지속 가능한 마을 생존법에 대해 다각도로 모색했다. 인구 유인책의 모순과 맹점, 젊은 이주자로부터 환영받는 전국 마을 생존모델 등을 제시하며 인구감소시대 마을이 나아갈 길과 현실적인 대책을 담았다.
# 늙어감의 기술(마크 E. 윌리엄스 저·현암사)
우리 몸이 나이 드는 과정을 과학적으로 설명함으로써 자신의 노화를 이해하고 건강하게 늙어갈 수 있도록 돕는다. ‘늙으면 창의력이 떨어진다’, ‘살을 빼면 장수한다’ 등 노화에 대한 편견 8가지를 언급하며 구체적인 노화 관리 방법과 현실적인 조언을 제시한다.
# 게르트너 부부의 여행(지뷜레 펜트 저·클)
치매에 걸린 부인, 그런 아내를 혼자 남겨둘 수 없는 남편, 한 노부부의 마지막 여행기를 담은 사진집이다. 사진작가 지뷜레 펜트는 발트해를 배경으로 여느 때처럼 옷을 입혀주고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등 평범하고도 애틋한 부부의 일상을 아름답게 포착했다.
노래하는 시인 김광석! 마침내 그를 만났다. 지난 해 11월 25일 대구 김광석 거리에서였다. 그는 시인이다. 노랫말이 아름다우면서도 곡은 애잔하다.
점점 더 멀어져 간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
비어가는 내 가슴속엔
더 아무것도 찾을 수 없네
(…)
5년 전이었다.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를 듣던 필자가 우니까 아들이 필자를 안고서 등을 토닥토닥 다독여줬다. 아직도 감성적인 60대 엄마가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라는 대목에서 울음이 터지니 30대 아들이 달래줬던 것이다.
그의 노래를 알게 된 것은 20여 년 전 동료 국어선생님들 덕분이었다. 평택여고 국어선생님들은 '일어나', '60대 노부부의 이야기' 등 그의 노래를 즐겨 불렀다. 필자는 잠자고 있던 감성을 마구 휘저어놓는 그들이 참 좋았다.
그의 노래는 한 편의 아름다운 시였고 가슴을 저미게 하는 슬픔이 있었다. 이슬처럼 맑은 그의 영혼은 삶에 지친 사람들에게 자신의 노래로 위로가 되기를 바랐다. 소탈한 모습의 그는 노래 부를 때는 열정적인 사나이가 되어서 떠나간 여인이 다시 돌아오기를 간절히 호소하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에 힘없이 체념해버리는 모습이 무척이나 외롭고 쓸쓸해 보였다.
그는 왜 그렇게 세상을 일찍 떠난 것일까? 여린 그의 영혼이 견디기에 지구의 삶이 너무 버거웠던 것일까? 아쉽고 또 아쉽다 우리 곁에 오래 머물러서 더 많은, 주옥같은 노래들을 만들어서 불러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청라 언덕에서’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 언덕 위에 백합 필적에
(…)
청명한 가을 하늘을 배경으로 한 고색창연한 고딕양식의 교회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청라언덕에 갔을 때의 일이다. 청라언덕은 담쟁이가 무성했던 언덕이기에 붙여진 이름이라 했다. '청라'에서 '청'은 '푸를 청' 자이고 '라'는 '담쟁이 라' 자라고 문화해설사가 설명해주었다. 새로운 지식은 늘 흥미롭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가을날이었는데 감성적인 해설사의 해설 또한 아주 맛깔스러웠다. 그녀의 지도로 우리들은 청라언덕에선 '동무생각'을 노래하고 만세운동이 일어났던 곳에서는 '대한독립 만세' 삼창을 했다. 우리들은 '날씨와 사람' 두 가지 행운을 다 누렸다.
가곡 '동무생각'에 얽힌 스토리에 눈물이 났다. 3년 전에도 이 노래비에 얽힌 스토리에 눈물이 났었는데 또 눈물이 났다. 작곡가 박태준 선생님의 러브 스토리 때문이다. 대구 계성고등학교를 다니던 그는 경북여고 여학생을 연모했단다. 하지만 내성적인 성격에 끝내 말 한 마디 못하고 가슴에 그 사랑을 묻어버렸다. 몇 년 후 그는 같은 학교에 근무하던 이은상 시인께 자신의 애달픈 사연을 들려줬다.
"잊지 못할 그 소녀를 예술작품으로 승화시켜 곡 안에 담아두면 박 선생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게 아니냐.”
"가사를 써줄 테니 곡을 붙여보겠나?”
이은상 시인은 즉석에서 시를 써서 건넸다고 한다. 박태준 선생님의 첫사랑은 '동무생각'에서 영원히 숨 쉬고 있는 것이다.
나는 왜 그리도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에 마음이 쓰이고 가슴이 아픈 걸까? 사랑! 여느 사람들에게는 일반적인 아름다움이겠지만 나는 아니다. 아프고도 슬프다.
사랑하는 스승을 하늘로 떠나보낸 제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여느 해 같았으면 활기찬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을 것이다. 분위기는 엄숙했고, 숙연했다. 간간이 웃음소리가 들리지만 길지 않다. 한국 연극계 큰 별이고 원로였던 故 윤조병(1939~2017) 극작가가 살아생전 죽을힘을 다해 정성을 쏟았던 희곡교실의 마지막 수업 현장. 제자들은 조명 켜진 무대에 올라 객석을 주시한다. 아이 볼에 입꼬리 닿는 것처럼 해맑게 웃던 윤조병 선생이 저만치 객석에 앉아 있지는 않을까 하는 심정으로 다시 한 번… 또… 바라본다.
배우 입김을 불어넣은 희곡, 무대에 오르다
과천시설관리공단의 ‘극장에서 쓰는 희곡’ 프로그램은 2006년부터 매년 진행하고 있는 글쓰기 교실이다. 말 그대로 연극의 주재료이면서도 기초인 희곡을 극장에서 배우며 써보는 특별한 수업. 과천시민극장의 상주 단체인 극단 모시는사람들(대표 김정숙)과 함께 기획해 지금까지 이어져왔다. 작년 12월 5일 과천시민극장 소극장에서 가진 낭독회를 끝으로 2017년 전 과정을 마무리했다. 23명의 수강생 중 총 10명의 희곡이 낭독회 무대에 올랐다. 극단 모시는사람들의 배우 3명(문상희, 신문성, 이재훤)과 수강생이 무대에 나와 앉아 배역을 나눠 실제 연기하듯 희곡을 읽었다. 세월호를 주제로 한 ‘갈매기가 전해준 편지(현재경 작)’를 시작으로 그로테스크한 반전이 돋보이는 ‘어디만치 왔어요(박수자 작)’, 노부부의 허망한 이별을 다룬 ‘늦은 오후에 병을 만나니(김영희 작)’, 연천 GOP 총기난사 사건을 생각하게 만드는 ‘나는 GOP 병장입니다(정진영 작)’ 등 작가 10명의 작품이 무대 조명 아래 빛을 발했다. 다양한 주제와 각기 다른 연령에서 담아낸 작품은 전문가 못지않았다. 글을 꾸준히 써야 하는 프로그램의 특성상 재수강이 가능해 오랜 시간 희곡을 쓰고 배우면서 나날이 성장한 결과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희곡을 알게 되고 또 작가로도 활약하는 수강생도 꽤 되는 내공 깊은 글쓰기 모임이다.
극작가 윤조병의 후학(後學)이 꽃피다
이날은 수강생의 희곡 발표와 함께 그리움을 나누는 시간으로 이루어졌다. ‘극장에서 쓰는 희곡’ 교실에서 후학을 양성하던 극작가 겸 연출가 윤조병 선생이 마지막 수업 한 달여를 남기고 타계했다. 윤조병 선생은 수업이 하고 싶은 마음에 진통제를 먹어가며 최선을 다한 진정한 스승이었다. 돌아가시기 전까지 극작가의 꿈을 꾸는 제자들에게 용기 북돋워주는 말은 물론이고 거침없는 독설까지 뱉어내면서 애정과 열정으로 가르쳤다. 제자들은 스승이 위독하다는 소식에 부랴부랴 희곡을 써내기도 했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가르침을 받고 싶어서였다. 희곡교실 전체가 슬픔에 빠지고 말았다. 제자들은 침통해했고 상황을 버거워했다. 이날 낭독에 앞서 추모글을 읽은 현재경 씨는 “선생님이 돌아가신 이후 글 한 줄을 적을 수 없었다”며 애끊는 마음을 전했다.
2011년부터 돌아가시기 전까지 열두 번의 강의를 한 윤조병 선생. 이를 통해 제자 240명을 만나 희곡을 가르쳤고 함께 성장했던 노장이자 현역 극작가였다. 윤조병 선생 사후 그가 각색한 연극 ‘위대한 놀이’가 한국연극평론가협회가 선정한 올해의 연극 베스트3에 올라 죽어서도 이름을 남긴다는 말을 새삼 느끼게 해주었다. 윤조병 선생은 드라마센터연극아카데미 1기 출신으로 극작가 노경식과 함께 유치진, 차범석의 계보를 잇는 한국 사실주의극의 계승자였다. 윤조병 선생을 대신해 남은 수업을 진행해온 극단 모시는사람들의 김정숙 대표는 이날 인사말을 통해 “윤조병 선생님이 틀림없이 이곳 어딘가에서 앉아 여러분이 갈고닦은 보석 같은 작품을 함께 들어주실 것”이라면서 “밑거름이 돼주신 선생님이 더욱더 생각나는 밤”이라고 눈시울을 적셨다.
조용한 가운데 낭독회를 마친 수강생들은 시원섭섭한 마음과 함께 윤조병 선생을 회상하는 시간을 가졌다. 수강생 강수정 씨는 “살아오면서 글 쓰는 사람을 많이 만났는데 작가라고 부르고 싶은 한 사람이 윤조병 선생님이고, 글쓰기를 즐길 수 있게 가르쳐주신 그분이 오늘 많이 생각이 난다”고 말했다. 현역 극작가인 정승진 씨는 “2015년부터 희곡교실을 다닌 덕에 희곡을 쓰며 살고 있는 것에 감사드리며 거짓 없는 글을 쓰겠다고 마음속으로 선생님과 약속했다”고 밝혔다.
살아생전 마지막 수업 날 몸이 너무 아파 목에 뭐가 넘어가지 않는다며 힘들어하던 윤조병 선생. 앉아 있기도 힘든 상황에도 끝까지 수업을 이어가던 모습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 라이프@이 독자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소개하고 싶은 동창회, 동호회 등이 있다면 bravo@etoday.co.kr로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1983년 5월 5일은 어린이날이면서 공휴일이었다. 그날 필자가 다니던 직장 내 처녀·총각들은 근교 유원지로 야유회를 갔다. 이름하여 ‘총처회’. 준비한 몇 가지 프로그램으로 게임을 즐기고, 예약해서 맞춰놓은 점심도 둘러앉아 맛나게 먹었다.
‘총처회’ 발기인이면서 주동자 격인 필자는 그들보다 한두 살 위이다 보니 모든 행사와 모임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중 58년생 개띠 남녀 동갑내기들이 몇 명 있었다. 그들은 그들대로 ‘개판’이라는 소모임을 만들어 따로 어울렸다.
직장 건물 3층엔 기술직 남자 직원들이 근무했다.
2층엔 사무직 여자 직원들이 있었다. 당시에는 구내식당이 없어 점심때가 되면 삼삼오오 시내 음식점을 드나들었다. 점심시간 5분 전에 단골 중식집에 짜장면을 시켜놓고, 땡 하면 달려가 후륵후륵 비벼 먹고 남은 50분은 당구를 치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때 어울리던 당구 멤버들이 두 살 아래인 58년 개띠 아우뻘 되는 동료들이었다.
퇴근하면 또 닭갈비 골목으로 몰려갔다. 닭갈비 맛이야 거기서 거기인지라 얼굴 예쁜 여 사장님이 운영하는 집에 외상장부를 만들어놓고 이틀이 멀다 하고 닭갈비를 불판에 구웠다. 그 시절 닭갈비는 뼈가 있는 상태로 불판 위에서 볶아 살을 발라 먹었다. 지금이야 뼈 없이 살만 있는 닭갈비를 즐기지만 말이다. 매월 25일 월급날이 되면 중식집과 닭갈비집 주인은 외상장부를 들고 와 수금을 해가곤 했다. 지금처럼 월급이 통장으로 바로 입금되지 않았던 시절이다.
총처회는 봄가을로 1년에 두 번씩 모임을 가졌고, 직장 내 등산모임도 제법 활발했다. 그러던 중 자연스레 개띠들만의 ‘개판’ 모임이 점점 끈끈해져갔다. 직장 건물 1층엔 조그만 구멍가게가 있었다. 연세가 칠십 가까이 되시는 노부부가 운영하는 가게였는데 뒤편에 조그만 테이블이 하나 있었다. 그 자리는 언제나 ‘개판’들의 아지트였다. 아침을 못 먹고 나온 처녀·총각들이 그곳에서 라면을 끓여 먹기도 했고, 오후 시간 출출할 땐 빵이나 과자를 먹으며 잠깐씩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그렇게 자주 만나다 보니 자연스레 눈이 맞는 커플이 생겼고 은연중에 자신이 점찍어놓은 상대를 드러내기도 했다.
그중 두 쌍의 연애가 무르익어갔다. 남자 직원들이야 타지에서 온 직원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여자 직원들은 그 지역에서 채용한 사람들이라서 같은 학교 선후배 사이이기도 했다. 자연스레 입소문이 났다. 그들만의 소모임인 ‘개판’이라는 별칭이 그리 예쁘게 들리지는 않았지만 주위 사람들 모두 ‘개판’의 따끈따끈한 소문을 반겨주고 축하해주는 분위기였다.
기술직 부서의 임 부장님과 사무직 부서의 김 부장님의 귀에 이들의 연애담이 전해지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처음엔 그러려니 하다가 시간이 지나 정식 결혼 얘기가 오가니까 두 부장님도 재미난 얘깃거리 소재가 되었다. 직원들이 두 부장 사이를 ‘사돈’으로 호칭한 것이다. 회식자리나 체육행사 등 야외 모임 때 ‘개판’ 멤버들이 가까이 있으면 두 부장님은 직원 이름 대신 “사위야, 우리 며느리야” 하며 장난스럽게 불렀다.
30여 년 전 청춘 남녀들이었던 ‘개판 부부’들은 지금도 가끔 만난다. 서로의 애경사에 몰려가는 건 말할 것도 없고 맛집, 식도락 여행도 같이한다. 2018년 무술년 새해는 개띠들이 환갑이 되는 해다. 이젠 머리에 무서리도 제법 내려앉았고 이마도 훤히 빛나는 나이가 되었다. 부모님 봉양과 자식들 교육에 힘들고, 바쁘고, 정신없기만 했던 ‘베이비부머’들이다. 앞으로 이들이 큰 걱정 없이 자식, 손주들과 무탈하게 살아가길 기원한다.
미주 한인 사회에서 지식인의 멘토로 불렸던 노부부가 있었다. 정신과 전문의로 UC데이비스 의과대학에서 35년간 교수로 근무했던 故 김익창 박사와, 데이비스 고등학교에서 25년간 교사로 일했던 그레이스 김(한국명 전경자·86)씨다.
부부는 평생 소외받는 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데 힘썼고 그들의 권익을 위해 싸웠다. 53년을 함께하는 동안 그들은 최고의 동지이자 친구였으며 연인이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지 2년. 아내는 여전히 열심히, 행복하게 살고 있다. “You should keep going.” 당신은 계속 그렇게 살아 달라는 것이 남편의 바람이었다.
사랑스러운 사회운동가
“동호회에서 주최하는 클래식 음악회 준비로 정신이 없어요. 오후에는 신문사에 음악회 기사를 전달하러 가야 해요. 오늘도 너무 바쁘네요!”
그녀는 여전히 에너지가 넘친다.
3년 전, 애너하임의 한 노인병원에서 김익창 박사와 그레이스 김씨를 인터뷰한 적이 있다. 그때 김익창 박사는 파킨슨병으로 상당히 힘들어하면서도 아내와의 인터뷰를 무척이나 즐거워했다. 당시 인터뷰 주제는 ‘부부’였는데 김 박사는 “부부란 같은 생각을 가지고 같은 방향으로 노를 젓는 사람들”이라고 정의했다.
“남편은 나를 커뮤니티 액티비스트(사회운동가)라고 별명처럼 불렀어요. 조용하고 신중했던 그와 달리 나는 말도 많았고 생각하면 바로 행동으로 옮기곤 했는데 남편은 그런 내 모습을 사랑해줬지요. 우리는 6·25전쟁을 눈앞에서 겪은 세대입니다. 모두가 못 배우고 가난한 시절에 그래도 배울 수 있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이었는지…. 우리는 그것을 갚아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에 소외받는 곳,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늘 관심을 두게 되었어요.”
1931년 중국 상해에서 나고 자란 김씨는 해방이 되던 해 부친의 고향이었던 평안북도로 돌아왔고, 남북으로 갈리게 되자 다시 38선을 넘어 왔다. 이 과정에서 막내 동생을 잃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을 때 거침없이 행동하는 것은 그의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다. 상해에서 사업을 했던 부친은 임시정부에 돈을 보내며 독립운동을 도왔고, 주위에 고학을 하는 한국 유학생이 있으면 장학금을 내놓기도 했다. 어머니 역시 그 시대에 평양신학교를 나온 신여성으로서 이웃과 나누는 것을 평생 몸으로 실천한 사람이었다고.
“여고 시절 내 꿈은 의사가 되어 아프리카로 가서 슈바이처 박사와 함께 일하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이화여대 의대로 진학했지요. 그런데 입학한 그해 6·25전쟁이 터졌어요. 산속으로 피난을 갔다가 와 보니 집이며 모든 것이 폭격으로 사라져버렸더라고요. 너무 화가 나서 당장 군에 입대해 총 들고 싸우겠다고 고집을 부렸죠. 어린 아가씨가 얼마나 맹랑했겠어요. 그때 영락교회를 다녔는데 목사님이 하루는 보여줄 곳이 있다면서 저를 데리고 가신 곳이 있어요. 바로 고아원이었죠.”
폭격을 맞고 부서진 학교 건물에 임시로 마련된 고아원은 그야말로 비참했다. 부모를 잃은 아이들은 밤낮으로 울부짖었고 아프고 굶주린 아이들을 돌봐줄 손길은 없었다. 그렇게 김씨는 여군 대신 고아원 선생님이 되었다. 전쟁이 끝나고, 김씨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에 재입학한다.
“등록금을 댈 형편이 아니었어요. 서울대 사범대가 등록금도 싸기도 하고 모자라는 교사를 길러내기 위해 장학금도 많이 준다고 하니 좋았지요. 또 고아원 선생을 하면서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 것도 알게 되었고요. 무엇보다 그곳에서 남편을 만났으니 운명이라고 해야 하나요?”
서울대학교 캠퍼스에서 그녀는 남학생들이 데이트 신청이 쇄도할 만큼 인기가 있었지만 모두 퇴짜를 놓아 별명이 ‘NO’였을 정도로 콧대가 높았다고 한다. 그중 유일하게 ‘YES’를 한 것이 남편 김익창 박사의 오페라 데이트 신청이었다고. 생전 김익창 박사는 인터뷰 때마다 첫눈에 반할 정도로 ‘탁월한 미모의 소유자’였다고 아내를 향한 무한 애정을 드러내곤 했다.
1956년, 김익창 박사가 미국 유학을 떠난 이후 6년 동안, 두 사람은 장거리 연애를 시작한다. 그 사이 김씨는 숭의여학교에서 교편을 잡았고 이후 거리를 배회하는 청소년들을 위해 용산직업학교를 세워 불우한 형편의 아이들을 지도했다.
“6년 동안 우리는 떨어져 있으면서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어요. 그때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편지로 주고받았는지 몰라요. 삶에 대한 가치관, 철학, 문학, 음악, 예술, 종교에 대한 생각을 나누면서 우리가 서로 얼마나 닮아 있는지 알게 되었죠. 그 시간 동안 다져진 신뢰는 남녀의 사랑 그 이상이었어요.”
‘Dear, Grace’
1962년, 마침내 두 사람은 미국 뉴욕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김익창 박사가 샌프란시스코 마운트 자이언(Mt. Zion) 병원에서 인턴십을 하는 동안 두 아들 데이비드와 다니엘이 태어났고, 남편은 가족의 생계를 위해 낮에는 공부하고 밤에는 병원 응급실에서 일해야 했다. 잠을 잊고 살아야 했던 고된 시절이었다.
“대단한 정신력이 아니면 견딜 수 없는 일이었어요. 그렇게 살인적인 스케줄을 소화하면서도 3년 만에 박사과정을 끝내더라고요. 레지던트를 마칠 무렵 남편이 내게 공부를 해보라고 제안했어요. 너무 기뻤죠. 내가 너무나 원하던 거였으니까요.” 김씨는 그 길로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원에 진학, 1969년 상담학과 아동발달학으로 교육 석사학위를 받는다.
캘리포니아의 진취적인 교육 도시 데이비스에 정착하면서 부부는 본격적으로 소수민족을 위한 다양한 활동들을 펼치게 된다. 김익창 박사는 임상정신과 의사로서 평생 소수민족의 정신의학에 관심을 두었다. UC데이비스 의과대학 정신과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문화가 다른 환자들에 대한 의료진들의 이해’를 강조하며 대학에 강좌를 만들고 끊임없이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다문화 정신의학 분야의 권위자로 자리 잡았고 그의 노력으로 현재 미국 정신의학협회에는 ‘화병’이 정식 병명으로 등록되어 있다.
김씨는 데이비스 고등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면서 언어와 문화 차이로 어려움을 겪는 소수인종 학부모들과 학교를 잇는 가교 역할을 자청했다. 특히 인종차별 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소수민족이라는 이유로 어떤 차별도 받지 않도록 앞장섰다.
특히 1980년부터 시작했던 미주 한국일보의 질문과 응답 형식의 칼럼 ‘Dear, Grace (그레이스에게)’는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어느 날 신문사에서 연락이 왔어요. 부모들이 미국에서 아이들을 키우면서 어려움이 많다고요. 흔쾌히 하겠다고 했죠. 궁금한 것을 편지로 보내면 답을 주겠다고 했는데… 세상에, 편지가 어마어마하게 와서 너무 놀랐어요. 궁금한 것은 많은데 어디에 물을 곳이 없었던 거예요. 한국말을 하는 선생님이 없었던 시절이었으니까.”
부모와 자녀 간의 갈등, 학교와의 마찰, 인종문제를 비롯해 마약, 섹스, 가출 문제까지. 그레이스 김은 한인 학부모와 청소년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었고 칼럼은 1990년까지 계속됐다.
나눔, 그 위대한 유산
이들 부부에 관해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기부’에 대한 것이다. 젊은 시절부터 입양아 단체, 아시안 청소년 장학재단 등에 적지 않은 기부를 하고, 무료 진료와 상담 등의 봉사활동을 해왔던 부부가 은퇴하면서 제대로 일을 치른 것이다.
2006년 김익창 박사가 35년간 몸담았던 UC데이비스 대학에서 나왔을 때, 이들은 캘리포니아 실비치의 한 은퇴촌에 작은 집을 마련한 뒤 나머지 재산은 모두 사회에 환원했다. 20여 개 단체에 전달한 기부금은 적게는 5만 달러, 많게는 25만 달러에 이르렀다. 모두 익명으로 한 기부였다. 이 놀라운 기부는 당시 UC데이비스대학에서 이들이 내놓은 기부금 25만 달러로 ‘다문화정신의학센터’를 만들면서 세간에 알려졌다.
“사실 그만한 목돈이 생긴 데는 숨은 사연이 있어요(웃음). 젊은 시절 내가 하도 많이 기부를 하고 다니니까 남편이 매달 월급의 반만 받고 나머지는 은퇴연금으로 저축을 하자고 한 거예요. 은퇴할 때 그렇게 돈이 쌓인 줄 몰랐어요. 평소 돕고 싶었던 단체 리스트를 적어 내려가는데 얼마나 신이 나던지. 남편과 아주 펑펑 잘 썼어요!”
고마운 것은 부모의 결정을 기쁘게 받아들여준 두 아들이었다.
“그때 아이들이 한 말이 잊히지 않아요. 돈이 필요하면 지금 이야기하라고 했죠. 두 아이 모두 자신들을 키워준 것만으로 충분히 감사하다며 원하는 곳에 다 쓰라고 하더라고요. 아, 우리가 아이들을 잘 키웠구나. 갑절로 행복해지더라고요. 두 아들 내외 역시 어려운 곳에 관심을 가지고 많은 기부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아요. 기쁘고 자랑스럽습니다.”
2009년 데이비드 김씨가 지난 오바마 정부의 교통부 차관보에 임명됐을 때, 그가 남긴 말이 있다.
부모님은 늘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마음만 있다면 언제나 남을 도울 힘이 있다고요. 돈이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또 다른 방식으로 도울 수 있다는 거죠. 바로 그 나눔의 정신이 우리 가족을 이 사회에서 당당하게 고개 들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아시아인은 돈을 많이 벌어도 미국 주류 사회에 들어가기 쉽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부모님의 삶은 제 미래를 위한 최고의 투자였습니다. 부모님의 기부가 저를 성공적으로 키운 셈입니다.
상해에서 독립운동가와 유학생을 돕던 부모에게서 김씨에게로, 이것이 다시 김씨의 아들들에게로 이어진, 참으로 위대한 유산이다.
To my forever love…
‘김 여사의 해피 에너지’는 은퇴촌에서도 빛을 발했다. 김씨는 입주한 은퇴촌 실비치 레저월드의 한인회 회장이 되어 커뮤니티 간 화합에 앞장섰다. 한인 노인들을 위해 각종 세미나와 교양 프로그램을 속속 만들어내는가 하면 지역구 선거에 한인 후보자가 나오면 발벗고 나서서 선거운동을 도왔다. 물론 그 뒤에서 묵묵히 김씨를 돕는 사람은 남편 김익창 박사였다.
이 무렵 김익창 박사가 파킨슨병 진단을 받으면서 부부에게는 예상치 못한 슬픔이 찾아왔지만 이 또한 차분히 받아들였다.
“한동안 멍했지요. 왜 이런 병에 걸리게 됐을까. 젊었을 때 잠을 너무 못 자고 힘들어서였을까…. 하지만 남편은 곧 받아들이고 오히려 나를 안심시켰어요. 파킨슨병은 관리만 잘하면 당장 어떻게 되는 병이 아니라면서요. 그렇게 8년을 투병했지요. 그 사이 자신의 인생을 덤덤히 돌아보며 두 권의 자서전도 집필했고요.”
병세가 악화되어 노인병원에 입원하고 2년 동안, 부부는 다시 연애를 시작하는 기분이었다고. 아내는 매일 아침 예쁘게 화장을 하고 직접 구운 쿠키를 만들어 남편을 만나러 갔고, 남편도 눈을 뜨면 아내를 기다렸다. 전립선암이 발병했을 때는 상당히 고통스러웠을 텐데도 김 박사는 항상 웃는 얼굴로 아내를 맞아주었다. 병원 스태프에게 ‘She is my forever love’라고 소개해 사람들을 웃게 만들기도 했다.
“돌아가시기 한 달 전쯤, 편지 한 장을 건네더라고요. ‘결혼해줘서 고맙고 행복했다. 아파서 미안했고 먼저 가서 또 미안하다. 하지만 당신은 지금까지처럼 계속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다.’ 내가 남편의 죽음으로 인해 슬픈 삶을 살까봐 그것을 걱정하고 있었어요. 끝에는 늘 하던 말, ‘my forever love’라고 적어놓았더군요. 마지막 러브레터였어요(웃음).”
김익창 박사가 떠난 후, 그녀는 깊은 우울증에 빠졌다. 며칠을 먹지도 못하고 울기만 했다. 문득 자신이 이렇게 될까봐 걱정하며 병실에서 간신히 손을 움직여 편지를 썼을 남편이 떠올랐다.
“아니다. 남편이 가장 좋아했던 내 모습으로 끝까지 열심히, 즐겁게 살자. 그렇게 결심했어요. 나는 지금 아주 건강하고 행복합니다. 은퇴촌에서 음악회도 열고 노래도 부르고 세미나도 하면서 열심히 살고 있어요. 그러다 남편이 너무 그리울 때는 조용히 말합니다. ‘하나님 나는 준비되었으니 이제 데려가셔도 됩니다. 루크를 만나게 해주세요…’ 라고요(웃음).”
오랜 대화에도 피곤한 기색 없이 열심히 포즈를 취해주는 그녀의 미소가 캘리포니아 햇살만큼이나 화사하다. 누구에게나 무엇을 하든, 최선을 다하는 이런 모습을 남편은 사랑했으리라.
“Good to see you!”
쿨하게 인사를 남기며 보무당당히 사라지는 ‘유쾌한 그레이스씨’. 그녀와의 다음 만남이 기다려진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 높이 치솟은 팜트리, 그리고 역동적인 태평양 바다까지. 캘리포니아만큼 여름과 어울리는 도시가 있을까? 비키니 차림으로 롤러브레이드를 타는 미녀들과 파도를 가르는 서퍼들, 이 모든 것을 시니어가 함께 즐겨도 조금도 어색하지 않은 곳. 그래서 캘리포니아는 액티비티 시니어들의 천국이다. 꼭 비키니에 서핑이 아니라도 좋다. 패들보드 위에서 우아한 요가는 어떤가? 흐르는 강물을 따라가는 플라이 피싱은? 와인과 치즈가 담긴 피크닉 바구니와 담요 한 장이면 되는 로맨틱한 음악회도 있다. 그들은 말한다. 색다른 것에 대한 도전은 늘 그렇듯 삶의 행복지수를 높여준다고. 캘리포니아 시니어들의 이색 여름나기를 소개한다.
◇ 플라이 피싱
브래드 피트의 리즈 시절이 담긴 영화 을 본 사람이라면 플라이 피싱의 아름다움을 알고 있을 것이다. 플라이 피싱은 곤충처럼 보이는 미끼(플라이 훅)를 날려 보내 물고기를 낚는 방법이다. 진짜 벌레인 것처럼 얼마나 자연스럽게 날리느냐가 중요한데 그래서 필요한 기술이 바로 캐스팅이다.
캐스팅은 플라이 피싱의 백미다. 허공을 가르며 부드럽게 S자 형태의 루프를 그리는 모습은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힐링과 감동을 주기에 충분하다. 미주에서 몇 안 되는 한인 플라이 피싱 전문가인 캐시 김(55)씨는 플라이 피싱이야말로 시니어들이 즐길 수 있는 최상의 취미생활이라고 말한다.
플라이 피싱은 과격한 몸놀림이 필요하지 않다. 하지만 하이킹이 동반되는 만큼 등산을 즐기는 시니어라면 금상첨화다. 또 물속을 걸어 다녀야 하는데 이것 자체가 몸의 밸런스를 길러주며 하체와 허리 근력을 강화시킨다. 무엇보다 집중력을 길러주고 심신을 안정시킨다. 플라이 피싱은 단순한 레저 스포츠를 넘어선, 자연과 예술의 만남이라는 것이 캐시 김씨의 설명이다.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고, 한 번 배우면 평생 즐길 수 있다는 점, 인조 미끼인 아티피셜 플라이(artificial fly)를 사용하는 친환경 스포츠라는 점도 매력적이다.
캘리포니아에서 플라이 피싱은 1년 내내 가능하다. 강, 계곡, 호수, 바다 등 다양한 장소에서 즐길 수 있지만 바다는 캐스팅 거리가 좀 더 길기 때문에 초보자들에게는 적합하지 않다. 골프에 입문하듯 플라이 피싱을 처음 배울 때는 전문 강사에게 받는 것이 좋다. 두세 시간 기본 매듭과 캐스팅만 익히면 바로 출조(出釣)가 가능하다. 입문 한 달이면 캐스팅을 통한 짜릿한 재미를 경험할 수 있다고.
필요한 장비로는 낚싯대인 플라이 로드(fly rod)와 손잡이의 감는 틀인 릴(reel), 낚싯줄 라인(line) 등이며, 물속에서 입는 옷과 신발 등도 구입해야 한다. 총비용은 1000달러 안팎. 부담 없는 가격은 아니지만 한 번 장비를 구입하고 나면 더 이상의 장비 구입 없이 평생 즐길 수 있다. 플라이 로드는 잡으려는 어종과 장소(호수, 바닷가, 강, 계곡, 시냇물 등)에 따라 다양하게 선택할 수 있으며 로드와 릴, 라인과 훅 등이 서로 밸런스가 맞아야 한다.
대부분 지역의 플라이 피싱 전문 매장에서 1회 기본 강좌를 운영하고 있다. 강좌와 출조가 포함된 패키지도 선보이고 있다. 1회 레슨은 보통 50~100달러(약 5만~10만원)인데 장비 대여비가 포함된 가격이다. 또 미국에서 낚시를 하려면 면허가 필요한데 캘리포니아의 경우 1일 면허는 13달러, 1년간 사용할 수 있는 면허는 55달러다.
한국에서 미국으로 플라이 피싱 출조를 오고 싶다면 캐시 김씨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 플라이 피싱 전문 자격증인 FFF(Federation of Fly Fishers Certified Casting Instructor)와 캘리포니아 가이드 자격증(California Guide license)를 소유하고 있다.
◇ 한여름 밤의 야외 콘서트
오렌지카운티 풀러턴에 거주하는 한인 리처드 김(65)과 줄리 김(62) 부부는 여름이면 야외 콘서트를 즐겨 찾는다.
몇 해 전 LA 대표 야외 공연장인 ‘할리우드 볼(Hollywood Bowl)’ 음악회에 갔다가 여름밤을 즐기는 낭만적이고 자유로운 분위기에 매료되었고 이때부터 부부의 특별한 취미생활이 시작되었다. 알고 보니 멀리 LA까지 가지 않아도, 큰돈 들이지 않고 얼마든지 음악회를 즐길 수 있었다. 덕분에 30년 넘게 살면서도 모르고 있었던 동네 공원의 야외 음악회도 찾아냈다. 인근 시티홀 잔디밭에서 매년 여름 주민들을 위한 ‘섬머 콘서트’가 토요일마다 열리고 있다.
이제 부부는 자동차 트렁크에 캠핑 의자와 담요를 늘 넣고 다닌다. 어떤 날은 커피 한 잔 들고, 또 어떤 날은 시원한 캔맥주를 사들고 간다. 그동안 몰랐던, 마음만 있으면 얼마든지 즐길 수 있는 여유다. 김씨는 30년간 운영하던 자동차 정비소를 정리하고 은퇴하면 몇몇 친구들과 함께 정식으로 야외 음악회 동호회를 만들어볼 생각이라고.
소란스럽게 몸을 움직이는 활동이 부담스럽다면, 여름 한철 이보다 더 좋은 여가생활이 있을까? 소박한 바구니 안에 샌드위치와 치즈, 와인 한 병만 가져가면 된다. 단 분위기가 생명인 만큼 와인잔은 잊지 않는다(깨질 걱정은 없다. 미국에서는 유리잔처럼 생긴 야외 와인잔을 어디서든 손쉽게 구할 수 있다). 피크닉 바구니를 든 남편과 담요 한 장을 품에 안은 아내, 노부부가 손을 잡고 근처 공원으로 가는 모습은 미국에서 무척이나 자연스럽다.
여름이 시작되는 5월부터 9월까지 캘리포니아에서는 낭만 가득한 야외 콘서트가 곳곳에서 열린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관광명소에서부터 동네의 작은 공원까지, 클래식 공연에서 무명의 밴드까지, 규모도 내용도 출연진도 다양하다.
LA의 대표적인 야외 공연장인 ‘할리우드 볼’을 비롯해 ‘샌타바버라 볼(Santa Barbara Bowl)’, 인랜드 ‘레드랜즈 볼(Redlands Bowl)’ 등은 캘리포니아에서 아름답기로 손꼽히는 야외 공연장이다. 이들 모두 공연을 감상하면서 음식과 음료를 함께 즐길 수 있다. 또한 피크닉 장소가 따로 마련되어 있어 공연 전에 미리 찾으면 여유 있는 피크닉을 즐길 수 있다.
공연에 따라 티켓 가격은 천차만별이다. 할리우드 볼의 경우 출연진에 따라 1000달러(약 100만원)를 호가하기도 하지만 종종 5달러짜리 티켓이 나오기도 한다. 운이 좋으면 무료 관람의 기회도 제공된다. 뒤편 언덕이든 잔디밭이든 음악이 들리는 곳에 자리를 잡고 즐기면 된다. 담요 한 장과 치즈 한쪽, 와인이 곁들여진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다.
이밖에 또 다른 캘리포니아 관광명소인 데스칸소 가든(Descanso Gardens), 게티센터(The Getty Center), LA카운티 박물관(Los Angeles County Museum of Art, LACMA)은 여름철 무료 공연으로 유명하다. 평소 콘서트 일정을 살펴두면 수준 높은 뮤지션들의 음악을 무료로 즐길 수 있다. 샌디에이고 발보아 공원(Balboa Park), 오렌지카운티 부에나파크 시티홀의 섬머 콘서트, 롱비치 엘도라도 공원 등도 매년 여름 무료 콘서트가 열리는 곳으로 이름나 있다.
◇ 패들보드
하와이 원주민들이 섬을 건널 때 통나무에 올라서서 노를 젓던 것에서 유래했다는 패들보드. 공식 명칭은 SUP(Stand up Paddle)다. 미국에서는 대중적인 여름 레포츠로 자리 잡은 지 이미 오래인 패들보딩이 최근 다시 주목받는 이유는 바로 액티브 시니어들 때문이다. 패들보딩이 주는 놀라운 운동 효과와 적당한 스릴이 시니어들을 열광하게 만드는 것이다.
뉴포트 비치의 시니어 패들보드 클럽은 보딩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는 운동이라고 소개한다. 기본자세가 관절염 예방과 척추교정에 큰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보딩을 하기 위해서는 팔과 다리, 어깨와 허리 등 전신이 밸런스를 유지해야 하는데 자연스럽게 관절과 근육이 튼튼해진다.
배우기도 어렵지 않다. 보드 위에 균형을 잡고 서는 것이 관건인데 보통 한두 시간 정도면 가능하다. 일어선 후에는 패들을 이용해 방향을 바꾸는 스킬만 익히면 된다. 패들링에 익숙해지면 이때부터는 이리저리 물살을 가르는 스릴을 만끽할 수 있다. 구명조끼를 착용할 수 있어 수영이 익숙하지 않아도 문제될 것이 없다.
패들보드는 바다뿐만 아니라 강, 호수, 연못 등 다양한 장소에서 즐길 수 있다. 사실 보드가 익숙해지면 타는 방법도 ‘내 맘’이다. 앉거나 무릎을 꿇고도 가능하다. 아예 자리를 잡고 앉아 낚시를 하는 사람도 있다.
최근에는 패들보드와 요가, 헬스트레이닝을 접목시킨 신종 레포츠도 등장했다. 특히 패들보드 위에서 요가를 하는 ‘SUP 요가’는 할리우드 여배우들이 하는 운동으로 알려지면서 상류층 여성들 사이에서 ‘핫’한 레포츠로 떠오르고 있다.
패들보드도 진화하고 있다. 하드보드가 아닌 공기주입식 보드를 개발해 부피를 줄여 휴대가 가능해졌고 밑바닥에 LED 조명을 장착한 나이트서프도 등장했다. 밤바다를 훤히 들여다보며 보딩을 즐기는 색다른 경험을 할 수 있다고.
캘리포니아에서 패들보드는 바닷가 어디서나 쉽게 즐길 수 있다. 해변마다 패들보드 대여소가 있어 시간당 10달러(약 1만원) 선에서 대여할 수 있고, 패들보드 요가나 헬스트레이닝은 클래스당 30~40달러 (약 3만~4만원) 선에서 즐길 수 있다.
◇ 펫시터
취미생활을 하면서 돈도 벌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있을까? 미국의 직업 안내 포털사이트 트레이드 스쿨(Trade School)에서는 애완견과 시간을 보내는 것이 즐거운 시니어들에게 ‘펫시터’에 도전해보라고 권한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돈도 벌고 동물과의 교감으로 정신건강에도 큰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미국은 여자와 개의 천국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그 정도로 개 사랑이 유별나고, 관련된 이색 직업도 많다. 뷰티밴(출장미용트럭), 도그위스퍼러(심리치료사), 펫시터(Pet Sitter), 도그 워커(Dog Walker) 등이 있는데 뷰티밴, 도그위스퍼러, 도그워커 등은 전문지식과 기술을 요하지만 펫시터는 누구나 부담 없이 시작할 수 있다. 특히 여름철 휴가기간 중 반려동물을 돌봐줄 펫시터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기 때문에 시장도 넓다.
미국에서는 로버닷컴(Rover.com)이나 도그베케이(DogVacay) 같은 펫시터 중개 사이트가 활성화되어 있다. 도그베케이에는 3만 명에 달하는 펫시터가 활동하고 있다고. 실제로 이들 사이트에서는 은퇴 후 무료했던 삶이 펫시터를 시작하면서 즐거워졌다는 시니어들의 경험담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펫시터가 되는 방법은 간단하다. 자기소개서와 사진, 기르고 있는 반려동물 사진을 넣어 프로필을 작성한 뒤 운영진에게 보내 승인이 나면 펫시터로 등록된다. 이용자들은 등록된 펫시터들의 프로필을 보고 마음에 드는 사람을 선택할 수 있다. 최고 시설의 도그 호텔보다 자신의 반려견을 손주처럼 돌봐줄 펫시터를 찾는 반려인이라면, 시니어 펫시터는 선택 1순위가 될 것이다.
펫시팅 가격은 경력자에 따라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시간당 10~20달러(약 1만~2만원), 1일 맡길 경우는 50~100달러(약 5만~10만원) 선이다.
‘인구절벽’이 우리 경제를 조여오고 있다. 1980년대부터 시작된 저출산으로 한국전쟁 후 한국 경제를 이끌어온 베이비붐 세대를 이어 경제를 주도할 ‘생산인구’가 부족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2015년 출산율은 1.25명에서 1.17명으로 크게 줄었다고 한다. 이처럼 생산가능 인구가 줄어듦으로써 정부의 세금 자원도 줄어 세금으로 이뤄지는 복지정책이 어렵게 되었다. 통계가 아니어도 저출산 현상은 우리 주변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장가, 시집갈 나이가 훨씬 지났음에도 결혼할 생각조차 않는 총각, 처녀들이 많다. 결혼 적령기가 지난 딸을 둔 친구가 있다.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시집을 늦게 가겠다는 것이 아니라 가지 않겠다고 해서 그렇다. 딸의 논리 정연한 이유를 듣고 설득할 말을 잃었다고 실토한다. 혼자 살아도 행복하고 앞으로도 큰 문제 없을 것 같은데 왜 시집가서 남편을 섬기고 아이 낳는 고통까지 짊어져야 하느냐고 물었다는 것이다. 30대 중반이 지난 필자의 아들 녀석도 같은 부류에 속한다. 혼자 살기도 힘든데 벌어서 여자까지 먹여 살려야 하느냐고 묻는다. 또 지금의 이 고통을 후세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다는 고차원적 변명도 한다. 이해가 전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어떻게 설득을 해야 할까? 자식들 인생이니 알아서 살도록 나둬야 할까? 생각이 복잡해진다. 부모는 자식들이 새 가정을 만들어 오순도순 살아가기를 바란다. 세상을 살다 보면 분명 힘든 일도 생기고 일심동체라 일컫는 부부도 격한 싸움을 할 때가 있다. 부부싸움이 잦은 사람에게 “그렇게 싸울 바에야 아예 헤어지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살려고 하니 싸우지 헤어지려면 뭐하러 싸워요!” 이해가 가는 말이다. 어떤 경우에도 서로를 믿고 의지하는 사람이 있을 때는 난관도 견디어내기 마련이다. 그게 가족의 힘이고 그 힘은 결혼을 해야 생겨난다.
어느 철학자는 “결혼은 해도 후회하고 안 해도 후회한다”라고 하면서 하지 않고 후회하는 것보다 해보고 후회하는 편이 낫다고 덧붙였다. 자신의 결혼을 후회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런 통계를 아직 보지 못하였지만, 그리 많지 않을 것 같다. 주변이나 친구들을 봐도 결혼을 후회한다고 말하는 경우는 없기 때문이다. 물론 필자와 같은 세대는 독신으로 사는 사람이 적었다. 다만, 형편이 어려워 결혼이 늦은 사람들은 있었다. 결혼을 후회하는 경우는 결혼 자체가 아니라 상대방에 대한 불만 때문이지 않을까? 그래서 이혼을 해도 또 재혼을 하는 것 아닐까? 결혼 자체를 싫어한다면 재혼 생각은 하지 않을 것이기에 말이다. 배우자가 문제될 뿐인 것이다. 부부 사이가 좋지 않은 부모를 둔 자녀들은 결혼을 꺼리는 경우를 종종 본다. 부모의 결혼생활을 통해 미리 경험하고 상상하기 때문이다. 부모가 지지고 볶으며 싸우는 모습만 봐왔기 때문에 선뜻 결혼을 결정하지 못하는 것이다. 부모의 책임도 크다.
우주의 법칙은 무엇인가? 한 마리의 작은 잠자리도 종족을 이어가기 위하여 가을 하늘을 날며 암수가 사랑을 나눈다. 한 그루의 꽃도 씨를 남긴다. 모든 동물도 새끼를 낳아 기른다. 만물의 영장인 인간들이야 더 말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 고귀한 새 생명의 탄생은 우리가 해야 할 대자연의 기본 법칙이 아닐까? 또한 자신을 세상에 있게 한 부모에 대한 보답이다. 왜 자기를 낳아 이렇게 고생하게 만들었냐고 반문하면 딱히 할 말을 찾기 힘들다. 그러나 결혼해서 참기름이 쏟아지도록 행복하게 사는 부부가 얼마나 많은가?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되도록 서로를 의지하며 행복하게 사는 노부부들을 보면 부럽다. 그들은 분명 결혼은 안 하면 후회한다고 말할 것 같다. 70대까지 독신으로 살아온 한 시니어가 KBS 1TV ‘내 말 좀 들어봐!’라는 코너에 출연해 혼자 사는 외로움을 실토하며 꼭 결혼하라고 몇 번이나 강조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혼자’라는 용어가 트렌드로 떠오르고 있는 오늘날 혼자 살겠다는 처녀, 총각들을 어찌하오리? 저출산율에서 벗어나는 고민을 함께해야 할 때다.
100세 장수시대에 다 자란 자식을 부양하는 부모는 늘어나고, 어버이를 모시는 자식은 줄어들고 있다. 부모 품을 못 떠나는 이른바 ‘난 캥거루족’은 그 이유로 경제적으로나 인지적으로 모두 독립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반면에 노부부만 사는 경우는 50%가 넘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오늘의 시니어는 사회의 주역으로 열심히 살아 왔으나 노후생활 준비가 부족한 실정이며, 후세대나 국가의 ‘복지지원’은 기대하기 어려운 상태이다. 시니어가 30년을 살아가기 위하여 자기 스스로 설계하고 실천해야 하는 엄숙한 과제가 우리 앞에 놓여있다. 실패하면 만회할 기회도 오지 않는다.
시니어는 현금흐름 수지균형을 실현하는 데 재무 설계 목표를 두어야 한다. 오늘의 시니어는 고도성장 속에서 눈뜨고 나면 재산이 불어나는 경험도 하였으나 이제는 수입과 지출이 거의 축소되거나 국민연금 등으로 고정되어 있다. 재산이 남는 경우에는 상속, 증여, 사회기부 등 지출을 늘려 규모를 줄이고, 부족한 때에는 수입을 창출하고 소비지출을 줄여서 ‘재산제로’를 달성해야 한다. 앞으로 살길 30년 장기계획을 세워야 하는 이유다.
월 100만 원의 가치를 30년 가치로 계산해 보자. 원금으로 3억 6천만 원이다. 100만 원이라면 관심이 적게 보일 수 있지만 3억6천만 원이라면 눈이 번쩍 뜨이는 금액이다. 세금, 물가상승률 등을 감안한 연 순수익률을 2%로 가정하고 매월 100만 원씩 30년 동안 수입창출하거나 소비 절약하여 운용하면 4억 8천9백만 원이 되고, 반대로 매달 100만 원씩 소비한다면 2억 7천만 원이 당장 필요하다. 월 100만 원은 앞으로 살아야 할 30년을 좌우할 귀중한 자원이다.
젊은 시절 추구했던 수입창출도 좋고, 고통이 덜 하는 방법으로 낭비요인을 줄이는 방법도 좋다. 월 10만 원이라도 목표를 세우고 꾸준히 실천하는 것이 시니어가 살길이다. 시니어의 수입은 대체로 연금, 자산운용 수익, 수동산 임대소득, 근로소득, 기타소득 등으로 이루어진다. 직업에 따라 50세 이전부터 은퇴가 진행되는 경우도 많은 것이 현실이다.
이제는 성공한 사업가도 은퇴할 때가 되었다. 나이 절벽에 막혀 창업이나 재취업으로 수입을 창출하기가 매우 어려운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새롭게 수입창출하기가 매우 어려운 형편이니, 우선 소비지출을 검토하여 낭비를 억제하는 방법부터 찾는 것이 더 좋을 수 있다. 설령 재산을 많이 남겨봐야 자신과는 아무 상관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어차피 빈손으로 갈 것이다.
지출은 주거관리비, 식생활비, 세금과 공과, 일상활동비, 건강관리비, 경조사비, 의료비, 품위유지비, 금융비용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자세히 검토해 보면 조정할 수 있는 낭비요인이 많음을 발견할 수 있다. 실천 가능한 것부터 차근차근 챙기라는 뜻이다.
지난날의 귀중한 경험은 깊이 간직하고 화려했던 과거는 내려놓으라. 그러면 앞길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