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의 나이기준이 65세다. 유엔이 정했다고 하지만 왜 하필 65세인가? 독일의 재상 비스마르크(1815~1898)가 독일의 경제를 살리기 위해 국민들을 노동현장으로 내몰면서 지금 열심히 일하면 65세 이후부터는 국가가 연금으로 놀고먹도록 해주겠다고 설득한 나이가 노년의 기준이 되었다. 비스마르크는 강력한 부국강병정책을 써서 1871년 독일 통일을 완성한 사람이다. 노인이 되면 국가가 책임진다면 구미가 당기는 말이지만 그 당시 독일의 평균수명이 40대라고 하니 비스마르크 입장에서는 책임지지 못할 거짓말을 했다고 믿기도 어렵다. 아니 지킬 수 있는 약속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수명100세 시대에 아무리 젊어 열심히 노력했다고 해도 35년을 국가가 국민 전부를 책임져주기는 어렵다.
법이 정하는 노인의 나이가 되면 노인복지 차원에서 혜택이 있다. 대표적인 것이 '지공도사'라는 별명이 있는 지하철 무임승차다. 어르신 교통카드를 발급받아 전국의 지하철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고 특별히 마련된 경로석에 앉을 권리가 있다. 서울처럼 지하철 노선이 잘 발달된 지역에서는 교통비 걱정에서 거의 해방된다. 이 카드를 활용하여 노인들의 지하철 택배 직업이 생겨나기도 하고 전철을 타고 춘천에서 막국수도 먹고 온양에서 온천욕도 즐기는데 들어가는 교통비가 없다.
다음으로 국공립의 능원, 고궁박물관이 무료입장이 가능하고 영화관에서도 활인요금이 적용 된다. 항공요금도 20%나 활인이 되고 이발소나 목욕탕에서 자율적으로 활인해 주는 곳이 있다. 추석이나 설날 등 특별한 날에 경로행사의 음식을 대접 받기도 하고 효행 음식점에서 할인된 가격의 음식을 먹을 수도 있다.
좋은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나쁜 점도 많다. 대표적으로 취업에서 대부분 배제되어 강제로 정년퇴직을 당해야 한다. 심지어 아파트 경비나 청소부도 개인면접이라는 좁은 구멍을 통과하면서 건강하다는 것이 보증되어야 취업이 가능하다. 더욱 슬프게 하는 것은 국가나 지방단체에서 지원하는 무료 교육이나 재취업, 창업 교육에 대부분 참가자격이 박탈된다. 공공 근로에 있어서도 체력이나 인지능력이 아무리 좋아도 나이라는 관문을 통과하기가 어렵다. 듣기 좋은 말로 ‘시간부자’라고 하지만 지루한 날의 연속이다.
노인은 늙은 사람이다. 65세의 노인의 나이가 되면 신체적으로 어떤 변화가 오는가? 실제로 직접 겪어보니 65세가 되었다고 하여 하루아침에 몸의 변화가 확 일어나는 것은 없다. 사람의 노화가 완만하게 하향곡선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수평을 유지하다가 계단식으로 주춤주춤 진행된다. 즉 어제와 오늘은 같지만 3년 전과 오늘은 다르다는 느낌은 분명하다. 스스로 건강관리를 잘 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과의 건강차이는 늙어갈수록 갭이 점점 더 벌어지는데 최고의 건강관리는 하는 일이 있는 것이다.
친구들이나 주위의 노인들을 보면 일이 있는 사람은 노화의 속도가 느리지만 모든 역할에서 배제되어 할 일 없이 공원을 산책하듯 배회하는 노인의 노화의 속도는 급속도로 빨라진다. 노인에게도 감당할 일거리를 주는 것이 직접적으로 건강보험공단의 재정을 튼튼히 한다. 건강해서 일을 하고 싶어 하고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노인에게도 65세 노인이라는 딱지를 붙여 경로석으로 모시려고만 해서는 안 된다. 노인의 일감을 개발하여 개인으로는 소득을 창출토록 하여 소비대열에 서게 하고 국가적으로는 놀고먹는 사람을 줄여서 생산성을 높이는 대열에 건강한 노인을 편입시켜야 한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처럼 노년의 기준 65세 그냥 기준에 불과하다.
은퇴 이후 인생 2막을 삶의 황금기로 만들 것인가, 황혼기로 만들 것인가. 황혼기와 황금기를 가르는 것은 무엇인가. ‘충분히 쓸 만큼 모아놓고 쟁여놓은’ 돈일까? 그보다 중요하고도 필요한 것은 인생을 재설계할 수 있는 은퇴 멘탈 갑, 즉 새로운 은퇴 마인드다. 과거 경력, 직장, 직책의 아우라를 들어내고, 자기의 진짜 정체성을 떳떳하게 드러낼 수 있는 사람이 진정으로 ‘브라보 마이 라이프’를 외칠 수 있다.
100세 시대를 앞둔 요즘, 은퇴 이후의 시기는 막다른 골목이 아니라 인생의 3분의 1을 살아내야 하는 인생의 터닝포인트다. 그래서 우리는 은퇴를 충격이 아닌 감격으로 맞고 싶다. 끌끌 혀를 차며 밸이 배배 꼬인 채 훈수나 푼수를 떠는 뒷방 노인이 아닌 적극 참여하는 현장의 선수로 사는 롤모델 인생 선배를 만나고 싶다.
퇴직 5년 차가 아니라 진짜 좋아하는 일을 선택한 ‘취업 5년 차’라는 박시호(63) 행복경영연구소 이사장을 만났다. 인디언 핑크색 니트 상의에 옅은 브라운색 패딩 점퍼, 흰 바지 그리고 빨간색 운동화에 무스로 바짝 세운 밤톨머리 헤어스타일을 하고 나타난 그는 과거 CEO의 물이 쏙 빠진 사람처럼 보였다. 그에게선 인터뷰 약속 장소인 ‘신촌’의 청춘물결에서 한 치도 뒤처지지 않는 것을 넘어 자유인의 바람마저 느껴졌다. 2003년부터 행복과 관련한 앤솔러지를 사진에 담아 매일 아침 이메일로 배달하던 일은 이제 취미와 봉사에서 ‘주업’으로 승격됐다. 그 외 강연과 원고 쓰기, 사진 찍기 등등 요즘엔 여행기획가로서 행복을 오프(0ff)에서 실현하는 일에까지 관심사를 확장하고 있다. 그의 하루 24시간은 풍요롭다.
은퇴 괴담은 현실적으로 ‘밥’ 이야기로 시작하곤 합니다. 제대로 대우받지 못하는 퇴직 가장의 현실을 표현한 단어 중에 ‘삼식이(집에서 삼시세끼를 먹는 가장)’란 호칭이 있는데요. 많은 퇴직 가장들이 “이러려고 지금까지 뼛골 빠지게 일했나”라며 피눈물을 흘린다고 합니다.
“감정계좌를 깡통계좌로 만들어놓고 만기일 됐다고 복리로 쳐서 가장 높게 대우해달라고 하면 되겠습니까? 집밥만 우기지 말고 칼국수집이든 냉면집이든 같이 맛집 순례라도 해보세요. 찜질방 같이 가서 놀자고 해보세요. 절로 삼식님이 될 겁니다(웃음). 가장이 건강해야 집안을 끌고 간다고 하는데 마찬가지로 부인이 건강하고 행복해야 집안이 유지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남편 혼자 행복하고 즐거우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퇴직 이후 집에서 대우받는 것은 남편 하기 나름이지요.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게 부부입니다.”
그는 “체력관리한다며 주중, 주말 가리지 않고 매일 등산 가던 친구가 있었다”며 부인이 뇌졸중으로 쓰러져 병석에 누운 후 그 친구가 “부인이 건강할 때 산에 같이 갈걸, 왜 나 혼자 갔을까” 하며 땅을 치고 후회하더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행복은 거창하고 멀리 있는 게 아니라 작은 데, 평범한 일상에, 함께 나누는 데 있다”고 말하는 그는 여러 일정 중에서 부인과 맛집 순례 후 하는 공원산책이 그날의 하이라이트라고 덧붙였다. 신혼 때처럼 전기가 찌르르 통하지는 않지만 40년 이상 살아온 인생 동지와 함께하는 ‘침묵의 공유’야말로 가장 든든한 의지가 된다는 이야기였다.
현직에 계실 때보다 더 활기차고 멋져 보이십니다. 부부 금실에서 비롯된 에너지 말고 비결이 있습니까.
“현직에 있을 때보다 몸무게를 10kg 정도 뺐어요. 회식이나 약속을 줄이고 운동을 하니 절로 빠지더군요. 제가 BMW족입니다. 버스(Bus)-지하철(Metro)-워킹(Walking),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많이 걷습니다. AMP 동기 부부동반 모임에 갔는데 집사람이 아무 정보 없이도 동기들 중 현직, 퇴직파를 족집게처럼 맞히더군요. 은퇴하면 현직 때의 아우라가 사라져 갈기털 빠진 사자처럼 되기 쉽습니다. 퇴직할수록 용모에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합니다. 퇴직하니 공식적 일 없다고 후줄근하게 입고 다니거나 등산복을 평상복으로 입고 다니면 안 됩니다. 오히려 더 산뜻하게, 몸에 꼭 맞는 옷을 입어야 해요. 뚝배기보다 장맛이 아니라 겉볼안이 더 맞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볼 때 이미지 판단이 6초 만에 끝난다고 하지 않습니까. 예전엔 아우라가 우러났다면 이제는 만들어야 한다고나 할까요. 퇴직할수록 의관이 생명이란 게 제 지론입니다 남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탓하지 말고, 먼저 남이 알아주도록 갖춰 입을 필요가 있습니다.”
은퇴 준비에도 선행학습이 필요할까요?
“일관된 인생 계획을 세워서 현직 시절부터 준비하지 않으면 의미 있는 은퇴의 삶을 살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선 공부를 해야 합니다. 죽을 때까지 배워야 합니다. 생존하기 위해서라도, 즐기기 위해서라도. 은퇴 이후의 공부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쫓기는 공부가 아닙니다. 자신이 즐길 수 있는 것, 좋아하는 것 뭐든 좋습니다. 사람들은 그동안 자신이 뛰어오던 트랙을 벗어나는 걸 두려워합니다. 그 두려움을 없애야 합니다. 등산도 높은 산을 오르려면 동네 산부터 오르며 준비하지 않습니까. 직장생활을 하면서 은퇴 후 뭘 하면 좋을까 늘 염두에 두고 그 일을 조금씩 준비해둬야 합니다.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될 수준을 향해 공부하십시오. ‘지금 이 나이에…’ 또는 ‘시간이 없다’ 말하지만 그것은 모두 새로운 것을 배우기 싫어해서 하는 핑계일 뿐입니다. 취미든 기술이든 뭐든 배움은 운명까지도 바꿉니다. 공부를 하고 도전하다 보면 전문가 반열에 오르고, 그것이 새로운 세상의 지평을 열게 해줍니다.”
실제로 미국의 한 설문조사 결과에 의하면, 은퇴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적응하기 힘들었다고 대답한 은퇴자가 41%나 되고, 대부분 단조롭고 지겨운 일상과 목적 상실 및 지적 자극의 결여로 고통스러워하고 있다고 응답했다. 은퇴에서 재정 설계 못지않게 필요한 것이 시간 설계, 즉 은퇴 후 동기 설계임을 보여주는 통계다.
행복이란 것이 요즘에야 흔한 담론입니다만. 행복편지를 시작한 2003년에는 요즘처럼 유행하는 화두가 아니었을 듯한데요.
“저도 욕심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정치도 해보고 싶었고, 돈도 많이 벌어보고 싶었지요. 그런데 특별조사부장을 하며 정치인, 재벌 총수들의 영고성쇠한 모습을 가까이서 볼 수 있었습니다. 자기가 지은 고충 건물에서 피고인으로 수사를 받아야 하는 기업 총수를 보며 권력, 금력의 무상함을 보았습니다. 또 부도가 나 자살을 한 금융인,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표변하는 인심의 허망함을 한꺼번에 압축해봤어요. 권력도 금력도 아닌 세상에서 진정으로 변치 않고 행복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봤지요.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행복이라는 생각에 미쳤습니다. 저의 어렸을 때부터의 꿈인 그림그리기를 시작했지요. 그러다 점차 재능의 한계를 느껴 사진으로 바꾸게 된 것이고요.”
그는 사진을 공부하면서 행복에 대한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고 덧붙였다. 쳇바퀴 같은 삶을 바쁘게 살던 그가 ‘저녁이 있는 삶, 주말이 있는 삶’을 애써 찾으며 여유를 갖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이번 주엔 이 꽃을 이런저런 각도에서 찍어봐야지” 하는 생각을 하면 기분이 좋아진단다. 또 사진을 찍으면서부터는 ‘집에 꿀단지를 묻어놓은 것처럼’ 퇴근을 기다렸고, 주말 새벽마다 강남고속터미널에 가서 꽃을 사는 행복한 마음은 뭐라고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행복하단다. 지인들에게 꽃 사진 선물을 하고, 그들이 감사인사를 전해오고, 급기야 행복편지까지 쓰게 된 계기가 되었다. 지인 700명 정도를 엄선해 보내는 행복편지는 감동적인 내용으로 ‘작지만 강한’ 행복 공유의 플랫폼이 됐다.
직장 후배들에겐 멘토로 여전히 환영받는 ‘퇴직 상사’라는 말씀 들었습니다. 그 비결이 있습니까? 어떤 분은 퇴직하니 알던 사람들 중 절반은 모른 척하며 떨어져 나간다고 ‘동선하로(冬扇夏爐, 여름 난로와 겨울 부채라는 뜻으로 철에 맞지 않는 물건을 이르는 말)’의 신세를 한탄하기도 하시던데요.
“하하. 저는 연락 안 해도, 거절당해도 고까워하지 않습니다. 또 조금도 불편하게 하지 않고요. 그러니 오히려 환영받네요. 잘해주면 고맙지만, 못 해주는 것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면 고까운 마음이 전혀 안 생깁니다. 상대도 부담스러워하지 않으니 오히려 더 찾더라고요. 부하직원들이 초대하면 병권을 맡깁니다. 예컨대 동석할 사람을 상대에게 정하라고 선택권을 주는 겁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만 정해 만나자고 하면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또 그 밥에 그 나물인 예전 사람들만 만나면 재미없는데 후배들이 새로운 사람 소개해주니 저도 좋지요. 폐쇄성을 나부터 없애야 합니다. 자기를 열고 세상에 맞추면 세상살이 편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려면 자기를 낮추고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또 상대가 누구든 불편하지 않도록 마음을 더 내어 배려해주는 것이 존중받는 비결입니다.”
박 이사장께서는 퇴직 후 제일 먼저 할 일로 명함 만들기부터 권하신다면서요.
“은퇴한 사람들이 모임에 나가면 제일 먼저 당황하는 게 명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명함이 없으면 몸을 꼬며 온갖 군말을 갖다 붙여요. ‘제가 회사를 그만둔 지 얼마 안 돼서요’ 등등. 스스로도 초라하고 서로 당황하기 쉬워요. 명함을 만들려고 구차한 자리 부탁하기도 하거든요. 당당한 명함은 당당한 자기정체성과 통합니다. 이제 과거의 후광은 벗어던지고 자기정체성을 드러내는 명함을 만드는 게 필요합니다. 하다못해 ○○를 연구하는 사람 ○○○라는 명함이면 어떻습니까. 말로 구구하게 설명하기보다는 자기정체성을 잘 드러내줄 수 있는 한 줄짜리 문장을 만들어보는 것입니다, 스스로 초라해질 필요 없습니다. 명함 주고받는 게 부담스럽고 부끄러워지면 대외활동은 끝나는 겁니다. 그만큼 중요해요. 아날로그 구세대에겐 직책과 직장이 필수이지만 젊은 디지털 세대는 그보다는 업, 좋아하는 일, 하고 있는 일이 더 중요합니다. 사진이면 사진, 서예이면 서예, ‘이것에 대해선 나한테 물어봐. 내가 설명해줄 수 있어’라고 말할 수 있는 전문 분야가 있다면 더 좋고요.”
박시호 이사장의 명함엔 사진가, 행복경영연구소 이사장이라는 직함과 함께 연락처(전화번호와 이메일)가 간결하게 들어가 있다.
퇴직 후 부딪히게 되는 어려운 점 중엔 경조비 부담도 빠지지 않더군요. 국민연금 100만원 이상을 받는 사람들의 가계부에서 경조비 비중이 16%나 됩니다. 의료비보다 높은 비중입니다.
“퇴직 상태에서 대소사가 한꺼번에 밀려들면 아무래도 부담감이 커질 수밖에 없는데요. 은퇴한 사람들의 고민이 ‘경조사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이지요. 체면과 얽히고설킨 과거의 인연 때문이지요. 저는 기분, 체면보다 기준을 분명히 합니다. 과거의 주고받은 인연보다 1년간의 교류를 기준으로 삼습니다. 아이들 결혼 때의 방명록도 그 자리에서 없애버렸습니다. 1년 동안 만나지 않은 사람은 교류가 없는 사람이고 그런 사람은 연락이 와도 경조사에 가지 않습니다. 정말 필요한 사람만 부르고, 성의만큼 성의를 표하자. 허례허식은 없애자는 게 제 주의랍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돈을 벌었지만 이제는 다르지 않습니까? 동창회 단체 공지에 올랐다고, 안 하면 욕먹는다고 찜찜해하면서 자주 보지도 않는 사람의 경조사까지 챙겨야 하는 것은 시간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비합리적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다 보니 주위에서 욕을 먹기도 해요. 그러나 욕을 먹더라도 자신의 기준을 지켜나가는 맷집과 용기도 은퇴 멘탈 갑의 마인드 중 하나입니다.”
박시호 이사장은 은퇴지능개발의 핵심 키워드로 배움을 꼽았다. 기술이든 지식이든 뭐든 배우고, 남의 눈 때문에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거나 그 반대의 경우가 없도록 하는 것. 그는 “좋은 사람과 맛있는 것을 나눠 먹을 때 행복을 느낀다”며 이 모든 것을 합친 것이 여행이라고 했다. 앞으로 여행 프로그램도 꾸준히 운영할 계획이라고. 지난 경험보다 앞으로의 계획을 말할 때 그는 더 설레면서 반짝였다.
은퇴 이후 새로운 삶의 설계와 도전도 마찬가지다. 용기 있는 사람만이 구태의연함에서 벗어나 신세계에 도전할 수 있다. 마음속에서 불을 뿜는 두려움의 용을 처단하고…. 박시호 이사장이 말한 ‘배움’은 구태의연함을 처단하고, 마음속에서 불을 뿜는 용을 무찌르는 날카로운 무기가 될 것이다.
>>김성회 CEO리더십연구소 소장
연세대학교 졸업. 경영학 박사. 서울과학종합대학원 겸임교수. 리더십 스토리텔러. 세계일보에서 CEO 인터뷰 전문기자로 활약했다. 세계경영연구원(IGM)과 삼성경제연구소 등에서 강의했다. 저서로는 , , 등이 있다.
최근 방송된 건강 프로그램에서 동갑내기 여성 탤런트 L과 전직 스타 농구선수 H의 ‘뼈 나이’를 비교한 적이 있다. 골밀도를 주로 비교한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한창 뼈가 건강한 나이에 운동을 많이 한 H는 40대 초반의 나이임에도 20대의 뼈 나이를 가진 것으로 나타난 반면, 같은 나이의 L은 뼈 나이가 60대로 측정되면서 무려 40년 정도의 차이를 보여줬다. L은 거의 골다공증 위험 수준이었다. L은 왜 이렇게 뼈가 급격히 노화된 것일까? 그것은 생각만 해도 마음 아픈 그녀의 병력 때문이다. 한창 나이에 뇌종양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질환을 앓았던 그녀는 후유증 때문에 몸의 절반에 마비가 왔고, 이를 회복시키기 위해 스테로이드 호르몬제를 과다 투여할 수밖에 없었다. 의사는 이 무리한 요법을 쓸 수밖에 없었고 결국 부작용 때문에 문제가 생길 것이라고 했다. 그녀는 끝내 고관절이 괴사되는 아픔까지 겪어야 했다. 인공관절 수술까지 해야 할 정도로 심각한 상태였다. 당시 스테로이드제를 사용하지 않았다면 그녀는 방송활동을 다시 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녀처럼 스테로이드제를 쓰는 것은 불가피한 선택인데, 왜 스테로이드제는 그렇게 심각한 부작용을 필연적으로 가져오는 것일까?
스테로이드 호르몬제가 신약으로 처음 선보였을 때 인류는 ‘신이 주신 선물’이라며 그 효과를 극찬했다. 기존의 소염제로는 염증성 질환이나 알레르기 질환에 효과가 신통치 않았기 때문에 단시일 내에 염증과 알레르기를 가라앉히는 스테로이드 효과는 분명 축복이었다. 스테로이드 호르몬제는 항염증, 면역억제, 혈관수축 등의 효과를 가져오는데, 광범위한 질환에 사용된다. 접촉성 피부염, 아토피성 피부염, 지루성 피부염, 건선, 수포성 질환, 자가면역질환 등 다양한 피부질환 치료에 사용된다. 염증이 생길 경우, 혈관을 통해 염증의 원인 물질이 유입되는 것을 차단하는 것이 급선무이기 때문에 혈관을 급격하게 수축시키면서 염증을 가라앉히는 스테로이드의 효과가 필수적인 질병들이 그 대상이다. 심지어 난임을 해결하기 위해 시도하는 시험관 시술에서도 많은 의사가 스테로이드제를 사용한다. 착상 전에 산모의 몸 안에 있을 수 있는 염증을 가라앉히고 면역력을 약간 저하시켜 과도한 면역반응 때문에 착상에 실패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그러다 보니 스테로이드가 불법적인 목적으로 악용되는 일도 빈번하다. 즉 식품에 스테로이드를 섞어 팔면서 효과를 과장하는 것이다. 주로 노인들에게 많이 사용되는 수법인데, 이런 수법으로 연간 10억여 원의 판매 실적을 올리는 떴다방도 많다. 식품이라 부작용도 없고, 먹기만 하면 관절염이고 통증이 싹 낫는다고 광고하면서 심지어 만병통치약처럼 과장하는 일도 많다. 노인들이 많이 모이는 탑골공원 등지에서 관절에 특효약이라면서 지네가루를 담은 캡슐을 팔기도 하는데, 스테로이드가 무차별적으로 함유된 내용물도 많다. 현혹된 구매자들이 주변에 참 좋은 식품이라며 소개하는 일도 많은데, 그 결과는 참혹하다. 면역력이 억제되면서 고혈압, 당뇨병, 백내장, 골다공증 등의 발생이 거꾸로 급습하는 것이다.
사실 스테로이드의 부작용은 이뿐만이 아니다. 외용제로 스테로이드를 자꾸 쓰다 보면 피부가 얇아지고 혈관이 확장되는 것은 다반사다. 근골격계가 현저히 약해지면서 시험관 아기 시술을 여러 번 시도한 주부가 척추 압박골절을 겪은 사례도 있다. 스테로이드 연고를 눈꺼풀이나 눈 주위에 잘못 바를 경우 백내장이나 녹내장을 유발할 수도 있다. 실제로 스테로이드 호르몬이 함유된 안약을 오랫동안 사용하던 청년이 녹내장 발생으로 실명 위험에 처한 사례도 있다.
스테로이드도 금단증상을 일으킨다. 금단증상은 주로 중독성 약물을 복용하다 강제로 끊었을 경우 발생하기 때문에 마약과 관련이 높은 현상이라고 알려져 있다. 영국의 30세 여성은 3세 때부터 아토피성 습진에 걸린 피부치료를 위해 스테로이드제를 사용해왔다. 하지만 2년 전부터 스테로이드제가 더 이상 효과가 없다는 것을 알고 사용을 중단했다. 그러자 피부가 빨갛게 변하면서 생으로 벗겨지는 증상이 나타나 그녀는 커다란 고통에 시달렸다. 이것이 바로 일명 레드스킨 신드롬(Red Skin Syndrome, RSS)으로 알려진 스테로이드 금단증상(Topical Steroid Withdrawal, TSW)이다. 그녀는 벗겨진 피부에 이물질이 침투하는 것을 막기 위해 하루에도 여러 번 피부 드레싱을 해야 했고, 하루에 거의 20시간 이상을 욕조의 물에 몸을 담그고 피부를 진정시켜야 했다. 결국 그녀는 우울증까지 겪었다. 국부성 스테로이드 중독증이라고도 불리는 이 증세는 오랫동안 스테로이드제를 사용한 사람들에게 나타나는데, 사용을 중단할 경우 심한 가려움증과 피부가 타는 듯한 통증을 느낀다. 또한 불면증에 시달리는 등 증상도 다양하게 나타난다. 심할 경우 직장과 학교에서의 정상적인 생활도 힘들다.
따라서 장기간의 스테로이드 사용은 결국 심각한 부작용이라는 굴레를 피해갈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스테로이드의 효과와 부작용 사이에서 균형을 찾아야 할까? 환자의 입장에서는 의외로 답이 간단하다. 스테로이드 연고를 바를 때는 가능한 한 얇고 정확하게 바르고, 자신이 스테로이드를 얼마나 오랫동안 사용해왔는지에 대해 처방의사에게 알려줘야 한다. 또 스테로이드 복용을 장기화하지 않도록 하고, 효과가 기대에 못 미쳐도 양을 늘리지 않는 등 기본적인 사항을 지키면 된다. 많은 환자가 스테로이드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없어 부작용 피해에 노출되는 일은 이제 없어져야 한다.
>> 최혁재(崔爀在) 경희의료원 한약물연구소 부소장
경희대 약학대학 객원교수, 한국병원약사회 법제이사, 서울시 약사회 병원약사이사, 대한약물역학위해관리학회 총무이사.
파워 블로거이자 미국의 미술 잡지 기자인 조이스 리(Joyce Lee·70)는 우리나라에서 세 번의 개인 전시회를 가졌다. 그녀는 블로그(‘커피 좋아하세요’)를 시작하면서 사진에 입문하여 미국 곳곳의 자연을 찾아다니며 찍은 사진들과 재미있는 이야기로 블로거들에게 인기를 얻었고, 60세에 본격적인 기자로 데뷔했다. 그런데 그녀의 전직은 패션 디자이너. 대체 그녀의 인생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강한 제스처와 자그마한 몸, 진한 눈 화장, 쭈뼛쭈뼛 서 있는 머리, 영혼을 빨아들이는 목소리에서는 쉬이 범접할 수 없는 인디언 추장 같으면서 천진스런 어린왕자를 보는 듯했다.
“내가 좀 말이 많아요. 내 안에 있는 것들을 쏟아내야 하는 강박관념 때문에 이렇게 돼버렸어요. 나를 이해하려 하지 마세요(웃음). 그냥 그렇게, 보이지 않는 것도 있어요.”
조이스 리와의 인터뷰는 꼭 숨바꼭질 같았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여전사의 옷자락을 잡고 마냥 헤맸다고 생각했는데, 또다시 멈추고 싶은 말들이 오갔다.
Art&Culture 매거진 기자로 세 번의 사진 전시회를 가진 조이스 리는 오래전 명동에서 ‘이동희 부틱’을 운영했던 디자이너였다. 나름대로 자리 잡은 전문 디자이너였던 그녀가 미국으로 떠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서른두 살에 낳은 딸이 하나 있어요. 그 아이가 중학교 1학년이었을 때 막 조기유학 붐이 불었죠. 그때 남편의 형님이 미국에서 살았고, 딸이 유학을 가고 싶다고 해서 보내기로 했어요. 아이를 먼저 보냈는데, 처음에는 나는 갈 생각이 전혀 없었어요.”
하지만 운명이라는 것은 어떻게든 작용을 하기 마련인가보다. 딸의 친구 어머니가 딸에게 충고를 했단다.
“그분이 ‘네 엄마가 오든지, 네가 들어가는 게 좋겠다’라고 말씀하시더라는 거예요. 바른말을 한 거지. 사춘기를 겪고 있는 자식 문제인데, 가게 문 닫고 달려갔어요. 저는 재단사 자격증이 있었던 덕분에 영주권을 얻는 것은 쉬웠죠. 그래서 미국에서도 패션 디자인 일을 할 수 있었어요.”
미국에서 뿌리내리기 위해 조이스 리 부부와 딸은 비장한 각오로 견디며 버텼다.
60세에 시작한 기자로서의 삶
그녀는 2008년 기자로 입사했다. 그때 나이가 미국 나이로 60세였으니 좀 놀랍다.
“어느 날 남편의 신장이 멈췄어요. 신장 투석을 일주일에 세 번씩 하면서 남편은 직장을 관두게 됐죠. 그런데 미국에서는 둘이 벌어도 융자를 감당하는 게 어려웠어요. 그래서 작은 아파트로 옮겨서 살았죠. 그리고 힘든 시간으로부터 도망가지 않으려고 시작한 것이 블로그를 통한 세상과의 소통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컴퓨터를 배우고 사진을 시작했습니다. 블로그를 하기 위해서.”
그녀는 다음 블로그의 우수 블로거가 400명이었던 시절에 그 중 한 명으로 뽑힐 만큼 성공적인 블로그 운영을 했다. 하루에 2000명 정도가 다녀갈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 와중에 그녀의 글을 눈여겨보던 사장이 그녀를 사진기자로 캐스팅했다.
“경향신문에 연재되던 안의섭의 라는 만화가 있었어요. 그 네 컷짜리 만화가 정치, 경제, 사회를 다 다뤘잖아요? 그런 느낌으로 이 여자의 글도 실어보자는 게 잡지사 사장의 의도였다는군요. 그런데 그 의도보다 내가 좀 더 잘했다고 해요(웃음). 하긴 정말 사명감을 가지고 다녔어요. 기자생활을 위해 손톱도 안 기를 정도였거든요.”
그녀는 컴퓨터를 배우고 기자가 된 게 참 잘한 일이라고 거듭 말했다. 무엇보다 자신을 써주는 데가 있다는 사실이 너무 감사했다는 것이다.
“제 첫 번째 라는 책이 나온 게 2012년이었어요. 어느 날 지나가던 사람이 제 책을 들고 와서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어요. ‘50이 되고 갱년기가 와서 인생이 너무 슬픈데 선생은 60부터 이걸 하셨다니 놀라워요. 제가 60이 되려면 앞으로 10년이 남았는데, 10년을 더 노력하면 무엇인들 안 되겠습니까’라고요. 많은 사람들에게 그런 희망을 줄 수 있으면 좋겠다 생각했어요.”
정신심리학 박사인 김효숙 교수는 조이스 리의 사진을 수천 장 넘게 갖고 있다고 한다. 그녀가 찍은 사진이 심리치료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기자의 시선으로 왜곡되지 않은 자연의 모습을 보여주는 조이스 리 사진의 힘일지도 모른다.
일주일에 5일은 일하고 주말에 홀로 미국 대륙의 수천 마일을 오가며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자연인이 된다. 작은 체구이지만 그녀의 눈빛과 몸짓에서 뜨거운 용트림이 느껴진다. 그 에너지가 견딤의 실체라는 걸 알아채는 데는 얼마 안 걸린다.
20만 번의 셔터 누름, 결국 고장 난 카메라
“닷새 동안 3000마일이 넘는 먼 거리를 혼자 돌아다니다 집에 돌아와 네 시간 정도 잔 후 새벽 3시에 일어나 다시 작업을 시작해 정오까지 마치고 시장을 다녀왔어요. 남편은 그런 나를 보고 철인 3종 경기에 나가도 챔피언이 될 거라며 혀를 찼습니다.”
그녀는 다시 태어나면 꼭 누군가의 남편이 되어 아내가 마음 놓고 여가를 즐기며 쉬엄쉬엄 여행도 할 수 있도록 배려하겠다고 수없이 다짐한다. 그녀가 사진을 배운 것은 철저히 필요에 의해서였다.
“기자는 본격적으로 사진을 다룰 줄 알아야 하니까요. 50대 후반의 나이에 컴퓨터를 배우는데 어찌나 어려운지. 봄여름 학기와 가을겨울 학기 중 네 명의 장학생을 선발해 포토샵을 무료로 가르친다더라고요. 그게 욕심이 나서 열심히 공부했죠. 대상포진이 두 번이나 올 정도로 무리를 했어요.”
카메라 셔터 수명은 대략 15만 번 누르면 고장이 난다고 한다. 그러나 조이스 리의 카메라는 5년 정도 사용하면서 20만 번을 찍었고 결국 셔터는 고장이 나고 말았다. 셔터의 감각을 익히고자 했던 그녀의 집중력을 알 수 있게 해주는 대목이다.
“제가 싫어하는 게 왜곡이에요. 그래서 어안렌즈는 아예 구매를 안 했어요. 줌도 잘 안 써요. 그런데 작가라는 이름을 안 쓰는 이유는 아직 카메라를 못 다루기 때문이에요. 저는 그냥 지나가다가 좋으면 찍거든요. 그러니 작가라고 말하지 못하죠.”
그녀는 글쓰기에도 욕심을 부린다.
“현재 집필중인데, 2년 후에 소설을 발표할 거예요. 제가 미국 서부의 내셔널 공원을 다 가봤는데 가장 아름다운 곳이 그랜드 티톤이었어요. 그곳에 가면 엘크 떼 수백 마리를 아침에 만날 수 있어요. 저는 엘크에서 느껴지는 거대한 남성성을 좋아해요. 그리고 버펄로, 울창한 숲, 거대한 연못과 그리즐리, 스네이크 리버도 있죠. 그곳에 가면 대자연을 만날 수 있어요. 소설은 그곳에서 일어나는 서정적인 이야기들이에요. 세계에서 최초로 한국어와 영어로 쓰인 인터넷 소설이 될 거예요.”
나의 전생은 ‘인디언’
역마살을 타고난 여자, 조이스 리는 어느덧 9년차 기자가 됐다. 인터뷰 후 얼마 있다가 잡지가 나오는데 이번에 그녀가 심혈을 기울인 것은 인디언 문화다.
“요즘 미국 사람들이 자기들 역사는 아니지만 본래 그 땅의 주인공들인 인디언들에 대해 관심이 많아졌어요. 저는 이전부터 인디언에 대해 관심이 굉장히 많았는데, 3~4년 후에는 기자의 눈으로 만난 인디언들 얘기를 책으로 쓸 거예요.”
원래 미국의 인디언들은 거의 서부에 있었다고 한다. 동부에는 체로키족이 있었는데 이들이 유럽인을 가장 먼저 만나 백인 중심 인텔리 사회로 편입할 수 있었다. 그에 반해 서부에는 아직 야생의 문화가 남아 있다고 한다.
그녀의 인디언에 대한 관심과 집착은 남다르다. 심지어 과거에 열렸던 조이스 리의 사진전 이름도 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전생에 인디언이었다고 주장한다.
“난 믿어 의심치 않아요. 그들에 대한 알 수 없는 연민이 있거든요. 그리고 언덕에서 붉은 계곡을 내려다볼 때 느끼는 감동 같은, 마음으로 통하는 데자뷔를 느껴요. 그것은 굉장한 희열이에요.”
지금 당장은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일이 결국에는 인생을 아름답게 채색해준다면 누구라도 그 험한 세상을 향해 달려갈 것이라고 그녀는 말한다.
손주 시후의 일기를 쓰는 여전사 할머니
영어와 한국어에 능통한 조이스 리의 딸은 지니프러덕션 L.A. 전산실에서 근무하고 있다.
“손주는 이제 막 학교에 들어갔는데 공부를 진짜 못해요. ‘0점’만 받아와요. 그래도 자연에 대한 감수성은 굉장히 좋아요. 이 아이에 대한 이야기, 를 요즘 페이스북에 올리고 있어요.”
는 할머니의 시선으로 손주의 마음을 그려내는 글이다. 독특한 관점이다.
“네가 이렇게 자랐다, 할머니는 네가 이렇게 생각할 것이라고 여겼지만 정말 이렇게 생각할 줄은 몰랐다…. 현실을 바라보는 하나의 상상인 거죠. 제 딸이 사춘기에 방황을 했어요. 저는 딸이 형제가 없어서 그렇게 방황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손주만큼은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라요. 손주가 엄마랑 비밀이 있겠지만 저랑도 비밀이 있으면 좋겠어요. 자기편이 있다고 생각하면 힘들지 않잖아요.”
손주를 바라보는 그녀의 시각은 항상 밝다. ‘빵점 맞으면 어때. 그리고 설마 영어를 못하겠어? 긍정적 시각으로 미래를 보라 이거야.’ 손주 시후에게 항상 희망을 심어주는 그녀만의 특별 도구다.
“손주의 자랑이라면 유머가 풍부한 편이에요. 지금 시대는 먹고사는 걱정이 크지 않기 때문에 즐겁게 사는 게 중요해졌잖아요. 이 아이는 그렇게 살 수 있을 거예요. 그래서 저는 손자의 개구쟁이 짓을 절대로 야단 안 쳐요. 어른을 놀려먹으려고 하는 게 아닌 이상은.”
손주가 어렸을 때 밥을 먹다가 먹던 것들을 컵에다 붓고 손가락으로 주무르는 행위를 자주 했다고 한다. 다른 식구들은 “저걸 왜 내버려둬” 하면서 경악했지만 그녀는 “지금 재미있는 놀이를 하는 거다, 2년만 지나면 안 한다”라고 말했단다. 그녀는 손주가 촉감을 익히는 중이니 내버려두는 게 맞다고 생각한 것이다. 손주 시후에게는 언제라도 미소를 지어주는 할머니다.
틀에 갇히지만 않는다면 시니어와 젊은이의 삶은 다르지 않다
이미 제2의 인생을 성공적으로 펼쳐나가고 있는 조이스 리는 멋진 인생을 살고자 하는 시니어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했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것 중 하나가 ‘야 이놈아 네 나이가 몇이냐?’ 하는 말이에요. 그 말을 해서 얻는 건 경멸밖에 없어요. 안 그래도 요즘 젊은이들은 노인네를 인류의 한 부족으로 생각하잖아요. 그러지 말고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어렵지만 앞으로 함께 나아가면 좋겠어요. 대화를 통해 지혜를 나눠주되 절대 잘난 척하지 말아야 하고, 나이 같은 건 의식하지 않으면 좋겠어요.”
본능처럼 여겨온 삶의 철학, 느낌과 경험을 축적해 체득한 깊은 진심이 묻어났다. 조이스 리는 틀에 갇히는 것을 거부한다. 간절함을 미끼로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사람이다. 한숨 쉬어갈 수 있는 삶의 여유를 찾았으면 하는 프레임, 그리고 그 안에는 세상 그 무엇보다 다정하고 따뜻한 마음이 담겨 있다. 그녀의 사진처럼 말이다. 그녀가 세상 사람들에게 간절히 전하고 싶은 메시지다.
◇ by 조이스 리
몬순기에 장대 같은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하면 대지가 거의 바위로 이어져 있는 계곡 때문에 물이 그대로 강물이 되어 내달린다. 이 물의 힘이 수수만년 이어지면서 협곡이 생기고 겹겹의 층 사이를 깎아내어 아름다운 속살을 드러낸 골짜기가 형성되었다.
산타페의 대표적인 건물은 어도비(Adobe)식 흙집으로, 해발 2200미터가 넘는 고지대인 이 지역의 혹독한 겨울과 뜨거운 여름을 잘 견뎌내도록 지어졌다. 두께가 50센티미터가 넘는 두꺼운 벽이 외부의 온도를 차단해주기 때문이다.
모래언덕 데스밸리. 여름 5월부터 9월까지는 날씨가 섭씨 50-60도를 웃돌므로 피하고 가을 한철 또는 이른 봄에 방문하는 것이 좋다. 이와 같은 척박한 사막의 땅에도 봄이면 야생화가 만발하고 동물들이 삶을 이어가고 있어 경이로움을 느끼게 한다.
오랜만에 ‘용산가족공원’에서 사진 모임이 있었다. 이 모임은 작업의 특성상 약속시간에 만나 서로 인사를 나눈 후 하나둘씩 흩어져 사진을 찍다가 정해진 시간에 다시 만나는 모임이다. 피사체를 찾아다니던 중 가족공원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벤치에 혼자 쓸쓸히 앉아 있는 노인을 보았다. 오후 네댓 시쯤 되는 시간이었다. 계절과 시간까지 어우러져 그 뒷모습에서 외로움이 잔뜩 묻어났다. 부자나 빈자나 나이가 들면 똑같이 맞이하는 모습이다. 젊을 때는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감정들이 차츰 생기기 시작할 때부터 소외감과 함께 외로움도 점점 깊어진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여름이 지나면 가을이 오고 가을이 지나면 겨울이 오는 것은 자연의 이치다. 비 안 올 때 미리 우산을 준비하듯 인생의 가을 초입에 겨울 준비를 해놓는다면 조금 덜 힘들지 않을까.
사랑 없인 못 살아요
이 글을 쓰면서 위의 사진에 어울리는, 조영남이 부른 ‘사랑없인 못살아요’라는 노래 가사가 생각났다. 밤 깊으면 너무 조용해/ 책 덮으면 너무 쓸쓸해/ 불을 끄면 너무 외로워/ 누가 내 곁에 있으면 좋겠네/ 이 세상 사랑 없이/ 어이 살 수 있나요/ 다른 사람 몰라도/ 사랑 없인 난 못 살아요/ 한낮에도 너무 허전해/ 사람 틈에 너무 막막해/ 오가는 말 너무 덧없어/ 누가 내 곁에 있으면 좋겠네. 이런 가사가 어느새 마음에 다가오는 것을 보니 필자도 이 가을엔 어쩔 수 없이 쓸쓸해지려나 보다.
외로움은 삶을 성찰하게 한다
사람들은 외로움을 느끼지 않으려고 결혼도 하고 자식도 낳고 인간관계도 맺으면서 살아가지만 관계에는 기쁨도 있지만, 책임감도 따른다. 부모 자식 사이에도 행복이 있다면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어려움도 있다. 그런데 우리는 늘 행복하기만 바라며 그 외의 어려움은 외면하려고 한다. 반대로 생각해보면 신이 인간에게 고통을 주는 것은 성숙한 인간이 되기를 바라서가 아닐까 생각된다.
우리나라가 초 고령화 사회로 곧 진입한다고 '어쩌면 좋아!' 하는 식의 각종 포럼이나 세미나가 많이 열리고 있습니다. 어제는 사회복지학과 교수와 다년간 복지관에 근무한 관장님이 연사로 나오는 세미나에 참석했습니다. 주제발표를 들어보면 학술 발표장이고 노인들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고발장(場)이였습니다.
교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성공적 노화란 질병과 장애를 피하고 높은 수준의 인지적, 신체적 기능을 유지하며 활기찬 인간관계 및 생산적 활동을 통하여 삶에 대한 적극적 참여를 유지하는 것이라고 목청 높여 주제를 발표 합니다. 물론 그럴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말들이 노년을 살아가는 노인들에게는 들으나마나 뻔한 소리고 공허하게 들립니다. 나는 속으로 너 늙어 봤냐? 나 젊어 봤다. 라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노인복지관에 오시는 노인 분의 평균 연령이 79.3세라고 합니다. 복지관 관장님이 이 분들의 모습을 말하는데 나이든 내가 그 자리에 있기가 참으로 민망했습니다. 노인들이 경로식당 줄서는 문제로 서로 다투고 경찰을 부르고 행사기념품을 받고 다시 줄서서 또 받으시고 서로 싸우고 복지관 바둑알 가져가시고 없다고 새로 사 달라 하신답니다.
화장실 LED등을 빼가지고 집에 가져가시고 물통을 배낭에 담아 오셔서 복지관 정수기에서 물 받아 가시고 복지관 화장실용 휴지를 통째로 들고 가시는 분도 있다고 합니다. 초복 날 식당 대기 줄에서 새치기 막는 여직원 빰을 때리고 복지관 바자회 물품 모아놓은 것 가져가시기도 한답니다. 이를 듣는 대다수 40대의 중장년의 청중 표정에서 어쩜 노인들이 그럴 수가 있어 ! 나는 절대 그러지 않는다는 조소의 비웃음이 번져 갑니다. ‘창문을 넘어 도망친 백세 노인’이란 연극이 인기몰이 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청중으로써 나에게 발언권이 주어져서 내가 말했습니다. 노인문제를 다루는 세미나에 노인 발표자가 없는 것을 우선 시정 건의 했습니다. 노동문제를 다루는데 노동자 없이 사용자끼리 공청회 하는 형국입니다. 노인 문제를 다루는 세미나에는 노인을 한 사람 정도는 구색 맞추기 차원에서라도 꼭 끼워 달라고 했습니다.
사람 사는 곳에 갈등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다섯 살 유아원 아이도 싸우고 학교폭력도 있고 승려나 목사님들도 서로 싸웁니다. 노인이라 하여 전부 성인군자 같기를 바라서는 안 됩니다. 노인 복지관 평군 연령이 79세라면 절반은 80이 넘은 사람입니다. 이 분들은 6.25를 겪으며 산업현장에서 조국 근대화에 한평생을 바친 사람들 입니다. 가난해서 물자절약이 몸에 배인 분들입니다. 본능적으로 무엇을 챙기려하고 가벼운 치매증상도 있을 수가 있는 나이 입니다. 우리가 보듬어 주어야 할 노약자들이지 손가락질 하며 흉볼 대상이 아닙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노인이 되면 지하철 공짜에다 고궁이나 문화제 관람 공짜 극장 할인 등 살판났다고 비아냥거리는 젊은이들이 있습니다. 젊은 사람이 낸 세금으로 노인들이 복지라는 이름의 버스에 무임승차 한다고 세대 간 갈등 운운 합니다. 나는 좀 달리 생각합니다. 우리가 남의 집에 세 들어가면 매월 일정액의 월세를 내야 합니다. 지금의 근대화된 집을 만든 기성세대에 젊은 세대들이 세 들어 살고 집세를 낸다고 봐야 합니다. 지금도 아프리카 난민들을 보면 우리의 선배님들이 고생으로 이 만큼 만들어 진 집에 우리는 편안하게 세 들어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를 먹여주고 키워준 부모에게 자식이 봉양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개인이 다 못하니 개인은 세금을 내고 국가가 대신 하는 것이 사회보장 제도입니다.
OECD국가 중 노인 자살률1위 노인빈곤 1위가 우리나라입니다. 이제 갓 68세가 된 중학교 교감 출신 여성분이 있습니다. 남편의 병 치례로 전 재산을 다 날리고 가정형편상 계속 일 하기를 원합니다. 컴퓨터와 외국어를 잘 하여 보수는 적어도 취업할 곳이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번번이 서류 불합격, 면접 불합격을 당하고 있다고 하소연 합니다. 심지어 정부지원 교육을 받으려 해도 65세가 넘었다고 퇴자를 놓는다고 울상입니다. 나이 65세가 넘으면 갑자기 바보가 된 것 같은 기분이고 이방인 취급당하고 바보를 만드는 세상이라고 울먹입니다.
사실 나이가 75세가 넘으면 마땅히 갈 곳이 없습니다. 복지관이나 공원의 벤치로 몰려나오는 노인 분들을 우선 이해해야 합니다. 봉사활동도 75세가 넘으면 다칠까봐 도와주는 것도 고맙지 않다고 손 사레를 칩니다. 75세가 넘으면 눈과 귀는 노화되고 허리는 굽고 몸은 굼뜨고 판단은 흐려집니다. 생산대열에 참가하기가 어렵습니다. 이런 분들을 보고 놀고먹는다고 세대 간 갈등을 부추길 것이 아니라 우선 노년의 신체 변화를 이해하고 보듬어주어야 합니다. 너의 젊음이 네가 잘나 받은 훈장이 아니고 나의 늙음이 내가 지은 죄 때문에 받는 벌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동네 공원에서 할 일없이 벤치에 앉아있는 노인 분들을 보면 마음이 짠합니다. 나도 저 나이되면 저렇게 될까? 스스로에게 반문도 해 봅니다. 어제의 조국근대화이 역군들이 나날이 변하는 새로운 IT신기술에 적응하지 못하고 나이라는 덫에 걸려 젖은 낙엽처럼 공원 벤치에 조각상처럼 붙어 있습니다. 날지 못하는 날개 부러진 새와 같습니다. 이런 분들을 일으켜 세워 노동현장으로 또는 산업 역군이란 새로운 명찰을 다시 달아줄 일은 진정 없는 것인가? 안타깝기만 합니다.
풍부한 영양공급과 보건위생환경의 개선으로 노인의 건강도 좋아졌습니다. 지금의 70대는 과거의 40대와 맞먹는 체력과 지남력을 갖고 있습니다. 이제 평균수명 100세 시대가 바로코앞에 다가 왔다고 해도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 고령화 시대입니다. 지금까지 겪어보지 못한 고령 사회에 노인을 위한 사회복지도 문제지만 집안에서도 갈 곳 없는 노인의 문제가 새롭게 부상합니다.
농경사회에서는 고령자의 일손도 필요했지만 산업사회에서는 고령자의 역할이 거의 필요 없습니다. 달나라에 가보지 않은 사람이 달나라에 가서 살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지를 모릅니다. 할아버지 아버지가 노후를 보내던 방식으로 노후를 준비해서는 막상 우리가 노인이 되면 준비 부족으로 당황할 것은 분명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지금의 8~90대의 노인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나는 관심을 갖고 지켜봅니다. 노년을 살아보지 않은 젊은 노인문제 전문가 보다 지금의 노년을 살고 있는 분들의 체험이 더욱 값지다고 생각합니다. 60세 정년퇴직하고 건강한 육체와 건전한 정신 건강을 가진 사람이 무었을 어떻게 하면 팔팔하게 100세 까지 행복하고 즐겁게 살다가 웃으며 저세상으로 갈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오늘 나랑 산책로에서 만난 분은 37년생으로 올해 79세라고 합니다. 스스로 건강관리를 잘 해서인지 젊게 보이고 건강해 보입니다. 엎드려 팔굽혀 펴기를 30개나 너끈히 해냅니다. 조심스럽게 하루의 일과를 물어봤습니다. 아침은 할머니가 더 주무시도록 6시에 집을 나와 3천 원짜리 해장국을 사 먹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전거를 친구삼아 자전거 전용도로를 2시간 정도 느리게 달리고 공원에 설치된 운동기구룰 이용하여 운동을 하다가 10쯤 도서관에 가서 신문이나 잡지 또는 책들을 두시간정도 뒤적이다 보면 점심때가 된다고 합니다.
집에 가서 점심을 먹고 오후 시간은 어린이 대공원이나 잠실 올림픽 공원에 가서 산책도 하고 과천 경마장에 가서 마권은 사지 않고 달리는 말들을 구경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내게 내미는 수첩에는 매일 어디 갈 곳이 적혀있습니다. 오라는 곳은 없지만 체력에 맞춰 갈 곳을 미리 알아서 준비한다고 합니다. 친구들하고 같이 어울리면 좋지 않으냐고 내가 물어봤습니다. ‘친구 그거 나이 들면 아무 소용없어 태반은 죽고 요양원에 있기도 하지만 비교적 건강한 친구하고 만나지 않아, 나이가 드니 서로 말 하려해도 발음이 어눌하고 귀도 어두워 서로 잘 알아듣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말하다가 단어가 생각이 않나 서로 거시기, 거시기 하다가 말아, 이제는 만나지 않아.’ 하십니다.
노후 준비로 혼자 지내는 법을 미리 알아두고 연습하라고 충고 합니다. 식사도 혼자 챙겨 먹어야 하고 운동도 스스로 알아서 해야 하고 친구도 필요 없으니 혼자 놀러 다닐 곳도 미리 알아 두라고 말씀하십니다. 두뇌 훈련으로 영어알파벳 ABCD를 외우고 한글 가나다라를 소리 내어 외우면 아주 좋다고 강조하십니다. 그랬더니 귀에 소리가 들리는 이명현상도 줄어들고 눈도 많이 좋아졌다고 합니다. 알파벳 차례를 잊지 않으려고 정신 바짝 차린 덕분이랍니다. 나이든 분들의 오늘은 우리의 내일의 모습입니다. 오늘을 어떻게 지내는지 잘 살펴보면 선행학습의 효과가 있습니다.
중독(中毒)이라 하면 술이나 마약 따위를 계속적으로 지나치게 복용하여 그것이 없이는 생활이나 활동을 하지 못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요즘은 인터넷 게임에 빠져 가상의 세계와 정상의 세계를 혼동하고 일상적인 생활에도 지장을 초래하는 사람들을 인터넷 중독자라고 말합니다. 유사한 중독자들이 더 있습니다. 스포츠에 몰입하는 운동광도 있고 지나치게 섹스에 탐닉하는 병적인 섹스중독자도 있어 사회문제를 야기합니다. 의식적으로는 참아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몸이 쾌락에 이미 중독이 되어 본인의 의지로는 제어하지 못하는 큰 병입니다. .
중독보다는 한 단계 아래의 비교적 좋은 의미인 몰입(沒入)이 있습니다. 어떤 대상에 깊이 파고들거나 빠지는 현상을 말하는데 연구나 공부를 할 때 몰입하여야 성과를 올릴 수 있습니다. 건성건성 대충 해서는 무슨 일을 하던 두각을 나타낼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할 때는 누구나 몰입합니다. 그림그리기에 몰입하여 화가가 되거나 에디슨처럼 연구에 몰입하여 위대한 발명품을 만들어 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 회사 연구주임은 실험실에서 연구에 몰두하면 밥을 먹는 것조차도 잊어버려 직원들이 늘 신경을 써야했습니다. 집에서도 연구를 하는데 아내가 시간을 맞춰 밥을 갖다 주고 먹으라고 챙기지 않으면 몇 끼니를 굶어도 굶은 것조차 모른다고 합니다. 그가 특허를 얻은 제품은 몇 가지 있지만 세상을 깜작 놀라게 할 발명은 아직은 못했습니다. 곧 좋은 소식을 듣기를 기대 합니다.
몰입한다고 다 성공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몰입하는 사람이 성공을 쟁취할 확률은 높습니다. 내가 좋아해서 쉽게 몰입에 빠지는 것이 뭐가 있을까 생각해보니 첫 번째 떠오르는 것이 바둑입니다. 공원에 놀러가서도 노인 분들의 바둑을 옆에서 지켜보다가 나도 모르게 움찔 움찔 손이나가거나 꼭 두어야 할 곳을 지나치고 다른 곳에 착수하는 것을 보고 ‘앗’하고 외마다 소리를 지를 때도 있습니다. 훈수하는 것 같아 민망하여 슬그머니 그 자리를 피합니다.
자기가 몰입할 정도로 좋아하는 취미가 하나 정도가 있으면 우울증이나 헛된 망상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내 경우 기분 나쁜 일이 있으면 인터넷으로 바둑프로그램에 접속합니다. 요즘은 인터넷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나 비슷한 상대를 만나 바둑을 둘 수 있습니다. 서울서 부산사람하고도 두고 멀리 중국 사람하고도 두기도 합니다. 바둑에 몰입하면 사람은 보이지 않고 바둑판과 바둑돌만 보입니다.
세상 살아보니 실체 없는 불길한 걱정거리가 떠오르기도 합니다. 어딘가 멀리 훌쩍 떠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몰입하면 몸은 여기에 있어도 정심세계는 못가는 곳이 없습니다. 나이 들면 소외되어 외롭고 찾아오는 사람 없어 쓸쓸하고 여기저기 아파서 우울합니다. 이때를 대비해서 자기만의 몰입할 수 있는 취미를 미리미리 갖고 있어야 합니다.
필자는 출·퇴근을 주로 대중교통 수단을 이용한다. 2시간가량 차를 갖고 운전한다는 것은 피곤한 일이기 때문이다. 몇 번 지하철을 갈아 타긴 하지만 익숙해진 탓에 힘든 줄 모른다. 5호선 개롱역에서 출발하여 1호선 덕정역까지 가는 데는 군자역과 도봉산역에서 환승을 해야 한다. 거의 끝과 끝인 관계로 아침 출발할 때는 자리에 앉아서 신문이나 책을 보기도 한다. 아침 일찍 출근하는 탓에 출근길은 앉아서 가는 편이다.
그런데 문제는 오후에 있다. 야간 강의가 있어 덕정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시내로 오게 된다. 오후 4시 전후로 타게 되는 데 전철 안 좌석은 빈 틈이 없다. 소요산 종점부터 이미 지하철 여덟 량이 초만원이다. 탑승자 90% 이상이 실버세대인 5~60대 이상의 노인들뿐이다. 낮에 소요산으로 등산 갔다 돌아가는 것이다. 중간에 몇 개 대학을 거치면서 젊은 학생들이 타지만 자리에 앉을 기회는 없다.
어느 칸을 가 보더라도 마찬가지다. 앉을 자리도 없을 뿐 아니라 젊은 사람들은 거의 찾아보기도 어렵다. 더구나 이 시간에 어린이들을 본다는 것은 행운(?)에 가깝다. 우리나라가 고령화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현실감 있게 느끼게 된다. 일부분은 여유 있는 노후생활이겠지만 이미 잘 알려진 사실대로 준비되지 않은 노인들이 대부분이다. 수입도 있어야 하고 아직 일을 더 할 수 있지만, 일자리가 없어 파고다 공원이나 무료로 전철을 타고 갈 수 있는 지역으로 이동하여 하루를 소일하는 노인들이 많다.
오늘도 전철을 타게 되었는데 칸마다 어느 때와 마찬가지로 어른들로 가득했다. 그런데 언제 탔는지 눈을 의심케 하는 장면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것은 좀처럼 보기 어려운 모습이었다. 젊은 여인이 아이를 ‘포대기’에 업고 탑승를 하였다. 너무 오랜만에 보는 모습이었다. 나이 든 어른들만 늘 보았던 전철 안이 갑자기 새 생명의 서광이 비친 듯 했다. 엄마 등에 업힌 어린아이가 희망처럼 다가왔다. 엄마는 아기를 업은 채 자리가 없어 한참을 서 있었다.
태어나는 어린이는 줄고 고령화로 점점 노인인구가 늘어난다. 전체 인구 중 65세 이상 노인 인구 비율이 7% 이상일 때는 고령화 사회, 14% 이상일 때는 고령사회, 20% 이상일 때는 초고령 사회로 분류 한다. 우리나라는 2000년대 7%를 넘어서며 고령화 사회에 진입을 했고 2018년에는 고령 사회에 진입할 예정이라 한다. 2026년 현재의 노인인구가 거의 2배인 초고령 사회로 진입할 것이라 예상을 하는 데 지금 전철안에서 보는 노인인구의 약 2배 노인이 늘어난다는 셈이다. 얼마지 않아서 지금 한 쪽 구석에 놓여있는 경로석은 아동석으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 전철안에 아이를 업은 엄마의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는 획기적인 변화를 꾀해야 할 시점이다.
건강한 가정이 모여 크고 작은 공동체를 이루고 이런 공동체가 모여 국가의 초석이 된다. 하지만 가정 해체가 심심찮게 일어나면서 아동학대, 노인 소외 등 심각한 사회문제로 이어지고 있는 게 현실이다. 허물어지는 가정 해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우리 사회의 대안으로는 어떤 것이 있을까. 전문가들은 바로 효(孝)라고 말한다. 이번 호에서는 효를 실천하는 3인이 한자리에 모여 이 시대의 효의 진정성에 대해 진솔한 대화를 나눴다.
△ 무크지 을 창간하는 권혁승 백교문학회장(이하 권혁승 회장)
△ 효경영의 리더 상훈유통 이현옥 회장(이하 이현옥 회장)
△ 교육을 통해 효 문화를 정착시키는 최종수 한국효문화센터 이사장(이하 최종수 이사장)
장소 이투데이 6층 회의실
Q.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전통적 가치 ‘효.’ 요즘 효를 얘기하려면 저마다 답답하다고 한탄합니다. 무엇 때문에 시니어들이 분노하는 걸까요?
△ 이현옥 회장: ‘효는 백행지본(百行之本)’이에요.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 모든 행동의 근본이죠. 부모가 없었다면 자식들은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자신이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위치에 섰더라도 이는 모두 부모의 은덕이죠. 부모 모시는 일을 우선으로 해야 하는데 바쁘다, 먹고 살기 힘들다는 핑계로 찾아뵙는 것은 소홀히 하고 전화 한 번 하는 정도로 생색내는 자식들이 늘어나고 있어요. 죽는 날까지 자식 잘 되기를 바라고 좋은 소식 있기를 고대하며 밤낮으로 자식 걱정을 하는 게 부모의 마음이죠.
△ 최종수 이사장: 자식들의 마음가짐을 바로 세우기 위해선 교육이 우선돼야 해요. 옛 서당에서는 과 을 기본으로 어려서부터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기본예절을 가르쳤어요.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아비는 아비답게, 자식은 자식답게 각자 직분에 충실하게 하는 밑바탕에는 효가 자리 잡고 있었지요.
이런 이유로 초·중·고교에서 효와 예절, 질서교육을 강화할 필요가 있어요. 학식을 갖추는 것보다 사람이 되는 게 우선이지요.
이러한 일들을 시작하게 된 게 주위에 있는 문화예술인들이 ‘우리 매일 같은 것만 할 게 아니고, 인성과 효에 대한 공감을 통해 새로운 일을 한번 해보자’고 한 것이 계기가 됐어요.
△ 권혁승 회장: 우리나라 효 사상이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가고 있고, 한국의 가족주의도 전부 없어져 가고 있어요. 이러한 현상을 두고 ‘가정 파괴’라는 말들을 씁니다. 이는 곧 가정의 예절이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가정의 예절이란 자식이 부모를 공경할 줄 알아야 하는데, 요즘은 어버이날이나 부모 생신날이라 해서 선물하나 사서 주는데 그건 효가 아니죠. 효 사상이라는 것은 한국인의 정신문화라는 것이고, 물질의 교류나 거래는 아니죠. 부모자식 간에 아파트 사주고 비싼 선물 사주고, 물론 그것도 효도의 한 방법 일수 있지만, 한국의 기본 사상이자 문화 사상은 아니라고 봅니다.효의 출발점을 가정의 예절에 두고, 어른을 공경하는 것부터 아이들을 교육해야 해요. 요즘은 어린이 교육이 잘못돼 개인주의나 황금만능주의가 팽배해졌지만, 한국 효 사상이 무너져가는 위기 상황이라고 느끼니 씁쓸하죠. 그러한 문제로 우리(3인)가 모인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웃음).
Q. 지금 효는 현실적으로 어떻게 실천되고 있나요?
△ 권혁승 회장: 요즘 대다수 부모는 자식에게 의지하려고 하지 않아요. 그리고 자식들은 부모에게 효도하려는 생각을 안 하고 있죠. 효를 바라지도, 하지도 않는 게 현 상황인거죠. 그래도 지금 우리가 하는 효 운동을 계속 꾸준히 전개해야 하는데, 도움이 필요합니다. 각 시·구 문화원에서 부모에 대한 시 낭송회를 1년에 한 번씩 한다든지, 강의를 한다든지 말입니다. 이렇게 효에 대한 교류를 해야 효심이 생기는 것이죠. 젊은이들에겐 부모의 은혜에 보답하고 날마다 반성을 해나가는 것이 효예요. 아이들이 “학교 다녀 오겠습니다”, “다녀 왔습니다” 인사를 하는 것이 기본인데 휙 갔다가 말없이 돌아오죠. 젊은 엄마들도 다 어릴 적 해본 것으로 신경을 못 써서 그렇지 아이들도 실천할 수 있는 것들이에요. ‘효심’. 그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봤어요. 대한민국 국어사전에 이렇게 나옵니다. 첫 번째, ‘효성스러운 마음’. 두 번째, ‘효심은 엄하게 키운 자식일수록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한 법이다’ 그러니 부모가 애를 잘 키워야 하죠. 적당히 키우면 효도가 안 돼요. 불효라는 것은 아이에게만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니고 상대적인 것, 부모자식 간 주고받는 것이거든요.
△ 이현옥 회장: 효를 실천하는 방법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해 왔어요. 이기주의와 황금만능의 물신주의는 가정의 안녕과 질서의 근원인 효를 경시하므로 해체되는 가정들이 늘어나고 어린이나 젊은이 할 것 없이 절대가치와 기준이 상실되어가고 있는 현실이죠.
자식을 물질적으로 키우면 그게 효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권 회장 말씀대로 엄하게 키우고 가정에 모범을 보여야 하죠.
Q. 지난해 12월 ‘효도계약’을 지키지 않은 아들에게 증여한 부동산을 돌려받을 수 있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습니다. 이 판결을 놓고 가족모임에서 효도계약서를 쓰는 시니어들이 늘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립니다.
△ 권혁승 회장: (부모자식 간 효도계약서 등의 문제에 대해서) 나도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 있어요. 한국인은 효에 대해 우리 전통문화, 민족문화로 자부심을 가져야 하는데 개중에는 부모자식 간 효도 계약서를 쓴다든지 하는 문제가 있다고 하는데, 사실상 그런 경우는 거의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그런 몇몇 사건을 미디어에서 너무 부풀리는데, 그런 것을 줄여야 해요. 부모자식 간 화합하고 소통해야 하는데 불화가 있다면 잘못되는 것이죠. 아이들이 자랄 때 가정 예절이나 인성 교육을 해야 하는데 그런 것이 없으니 그렇게 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자식이 잘못했든 부모가 잘못 가르쳤든 소통이라는 것은 쌍방이에요.
△ 최종수 이사장: 효도계약서를 쓰고 하는 효는 결코 효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계약을 하는 것도 문제, 그것을 퍼뜨리는 언론도 문제이지만, 어쨌든 그것은 효가 아니고 효가 될 수도 없어요. 중요한 것은 두 분(권혁승, 이현옥)도 그렇지만 자신의 모든 열정과 재산을 털어 효 문화를 전파하는 훌륭한 분들이 계시는데 국가는 대체 무엇을 하는가 생각이 들어요.
지방자치단체 강령에도 효에 대한 지침 등이 있지만, 지나친 복지로 효가 묻히고 퇴색하고 있어요. 노인, 장애인 복지 등을 위한 비용이 당연히 들겠지만, 그중 일부를 효를 위한 예산으로 책정해 정책을 세워야 합니다. 사람들이 효를 통해 그런 노인과 장애인 등을 돌볼 수 있도록 말이죠.
Q. 효에 관한 교육과 정책 지원이 줄어들고 있다는데요.
△ 권혁승 회장: 예를 들어 우리 어린이나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아버지, 어머니에 대한 시 낭송회를 한다고 하면 그들도 그 며칠 동안은 아버지 어머니 생각을 하지 않을까요?
효가 뭔가 선물만 주는 게 아니라 기본을 익히는 교육을 해야 해요. 이런 말이 적절할지는 모르지만 각 지역마다 문화원이 있어요. 대개 문화 강좌를 한다든가 음악, 미술, 무용 등을 가르치는데 효 문화에 대해서도 강의하면 안 될까 싶어요. 문화원마다 책정된 예산들을 다 그런 예술 강좌에만 써야 할까요?
△ 최종수 이사장: 의 독자들의 나이대를 보면 나라 망하고, 6·25사변 나고 배고프고 살기 어려워서 그런 걸 찾을 수 없는 시대였다 할지 몰라도, 그 와중에도 뜻있는 사람들은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어요. 좋은 효자·효부 정말 많습니다. 지금이라도 늦었다는 생각 말고 기본적인 교육부터 해야 하지 않을까요?
△ 이현옥 회장: ‘효’를 바탕으로 회사를 경영하다 보니 직원들도 만족해하고, 사고도 발생하지 않아요. 부모님을 모시고 여행을 가는 직원들에게 홍천 대명콘도와 양양 솔비치콘도 숙박을 지원해 줍니다. 1년에 상·하반기 2번 가능하고, 시댁이나 처갓집 식구들도 함께 갈 수 있게 하는데 주로 직원들이 장인·장모를 모시고 가는 편입니다.
‘너희들이 부모에게 잘함으로써 우리 직장도 건전하게 발전이 되는 거다’라고 자주 말합니다. 매년 5월에는 효 문화 확산을 위해 전 직원이 가족을 데리고 세종시에 있는 효림원(효 마을)을 방문해 효심을 나누고 효 문화행사를 진행하죠.
Q. 효 문화 확산을 위해서는 무엇을 바꾸어야할까요?
△ 최종수 이사장: 효 문화예술 교류 차원에서 학교에 전문 강사가 방문해 효 강의 등을 하는데, 어느 정도 한계가 있지만 꾸준히 진행하고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어머니들의 생각이 좀 바뀌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효에 대해 토론회를 한다고 하면 관심도 없고, 다른 학원에 가라고 하는 등 꽁무니를 빼기 때문이죠. 학생들을 모집하면 3분의 1 정도만 자발적으로 오고, 3분의 1은 학교에서 하라니까 억지로 온 것이고, 또 3분의 1은 참여는 하지만 구실만 있으면 학원에 가거나 빠지려고 해요. 그런 경우에 학생도 학생이지만 어머니들이 적극적으로 인성이나 효, 예절에 관심을 가져야 해요. 인성이 기본이 된 다음에 학력을 쌓아야지 기본도 안 되고 학력만 쌓으니 아이들이 머리만 커지는 것이죠.
효라는 것은 평생 죽을 때까지 해야 하는 것인데, 유가(儒家)에서 배울 때는 부모가 살아 계실 때 모시기를 잘 해야 한다고 하는데, 종교가 달라 많은 부분에 갈등이 생겨나고 있어요. 그런 효가 필요 없다고 하는 단체도 생기고, 내가 효를 안 해도 살 수 있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을지는 몰라도, 효는 우리나라 정서나 젊은이들을 위해서는 꼭 필요한 덕목입니다. 지난해부터 인성교육진흥법을 시행하여 인성교육을 강화하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많은 단체가 갈팡질팡하고 있어요. 인성과 예절 교육은 효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권혁승 회장: 효 문화, 이런 운동은 돈이 많다고 할 수 있는 운동도 아니고 시간이 많다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죠. 어떠한 소명감에 의해서 하는 것이지 이해타산으로 하는 게 아니에요. ‘기브 앤 테이크’가 아니라 ‘기브’만 하는 거죠.
요즘 부모는 자식의 효도를 바라지도 않고, 자식도 안 하는 상황이지만 결코 포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에요. 효는 어디 내다 팔래야 팔 수 없는 한국인의 아주 기본적인 사상이자 문화 사상으로 한국인만이 가지고 있는 정서니까요. 2018년에 동계 올림픽을 하는데 외국인들이 많이 왔을 때 ‘한국은 효의 나라다’라는 게 선전되면 얼마나 좋겠어요(모두 웃음).
△ 이현옥 회장: 생전이나 사후에도 예에 벗어남이 없어야 합니다. 즉, 살아 계실 때도 예를 지켜야 하나 돌아가신 후에도 예를 지켜야 합니다. 어머니의 자식 사랑은 자(慈)라면 자식의 부모 사랑은 효(孝)라고 합니다. 부모는 진 땅을 걸어가도 자식은 마른 땅을 걸어가기 바라는 게 부모입니다. 그래서 전체를 바쳐 희생하는 것이 부모입니다.
Q. 효 문화 확산을 위해 인프라 구축이 우선시되려면.
△ 최종수 이사장: 정부의 지원도 중요하지만, 그럴 수 있는 분위기가 먼저 조성돼야 합니다. 내가 과천문화원장을 8년 정도 하고, 전국문화원 회장을 4년 동안 했어요. 그러면서 체계적으로 구축하여 효 문화를 선도하려는 효 문화센터를 만들려고도 했죠. 그러나 주변에서 ‘왜 저렇게 판을 벌이나’하고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기도 했어요. 그러니 그런 것을 하려고 해도 먼저 주변의 인식과 분위기를 바꾸지 않으면 안 돼요.
△ 권혁승 회장: 국내 효 문화를 바로잡고 육성, 창달해야 하지만 아울러서 교양을 갖출 수 있어야 해요. 효는 한국 고유의 문화예요. 이 문화가 옛날 중국이나 일본에서 온 게 아니죠. 물론 서양에서도 방식이 다를 뿐 효도를 잘 하죠. 영국의 역사 철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그의 책에 ‘인류문화 발전을 위해 한국이 크게 기여한 게 있다. 그것이 한국인의 가족제도와 효 사상이다’라고 썼어요. 그는 이러한 효 사상을 전 세계에 번지도록 해 모든 세계인이 가족을 사랑하는 정신이 퍼졌으면 좋겠다는 뜻을 설파했고요. 소설가 톨스토이도 “불효하는 사람은 벗으로 삼지 말라”고 했어요. 미국연방준비제도 의장을 지낸 버냉키(Bernanke)도 미국 프리스턴대학교 졸업식 축사에서 “이제 여러분은 졸업을 하니 매주 한 번씩 부모님에게 전화해라”라고 말했습니다. 생일에 선물을 사주고 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1주일에 몇 번씩 전화 걸어 안부를 여쭙는 것이 한국 효의 기본입니다. 이러한 점이 전 세계에 한국인이 어깨 펴고 이야기할 수 있는 자랑거리가 될 수 있고, 자부심이라 할 수 있어요.
한국의 효 사상을 세계에 널리 알려서 모든 세계인들이 한국의 효 사상을 본받고 한국하면 ‘아! 효의 나라’라고 생각하도록 만들어야 해요. 더 나아가서는 효 문화를 유네스코 문화재로 등록한다든가, 널리 번지도록 힘써야 해요.
△ 이현옥 회장: 이런 분위기를 조성해서 좋은 일들이 십시일반으로 모여 정부와 언론이 주목하고, 효에 대한 인식이 관철됐으면 합니다.
△ 권혁승 회장: 효에 대한 좌담회는 한국 언론사, 매체 사상 처음 있는 일 아닐까요? 아마 단군 이래 최초일 것 같아요. 오늘로 끝내지 말고 계속 이어갔으면 좋겠어요. (웃음)
Q. 효 문화 확산을 위해 어떤 일을 하고 계시나요?
△ 최종수 이사장: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의 타고난 소질과 능력을 개발해 나의 길을 찾고 이웃과 사회를 위한 사랑과 봉사가 바로 ‘효’라는 것이죠. 이를 위해 시대에 맞는 효 문화의 창출이 바로 인성 교육의 출발점이라고 보고 한국효문화센터를 2011년 시작했어요.
한국효문화센터는 효에 관련된 교육과 행사로 우리가 실천해야 할 진정한 효가 무엇인지 되돌아보며 자신에 대한 사랑의 첫걸음을 시작으로 하는 인성 교육과 밝고 건강한 사회 구현이 목표예요.
예술단체장들이 효 문화사업을 하면서 학술회의도 하고, 학생들을 모아 토론한 내용들을 토대로 효 문화를 어디서부터 시작을 해야 하는지 단초를 발견했어요. 요즘 고등학생들은 입시에 시달리지만, 그중에서도 고전 등을 훤히 꿰뚫는 학생들이 꽤 있어요. ‘신체발부수지부모(身體髮膚受之父母)’라 하지만, 마냥 그럴 것이 아니라 헌혈도 하고 기증도 해서 사회에 돌려주는 것이 낫지 않느냐는 의견도 나왔죠. 그러한 아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우리 시대에 효 문화사업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게 해줬어요. 아이들의 이야기를 토대로 그들의 수준에 맞는 효 문화사업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지요. 그렇게 글짓기, 그림 그리기 대회도 하고, 매년 토론회도 열면서 새로운 것을 찾아가고 있어요. 국내 최대 규모의 ‘효’를 주제로 한 문화축제로 1회성 행사로 할 수밖에 없는 여건이지만 그만큼이라도 확실히 효과가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상을 받는 아이들과 부모님들을 만나보면 그때만이라도 가족끼리 효에 대해 이야기하고, 부모를 생각한다고 하거든요.
△ 이현옥 회장: 효 문화라는 건 다들 잘 알고 있지만 실천하는 게 어려워요. 어머니가 살아 계실 적에 특히 5형제 중 셋째인 나를 많이 아끼셨고 사랑을 주셨죠. 공직생활 중에도, 사업을 할 때도 어머니가 편찮으시면 달려가 돌봐드리는 등 장남 역할을 했어요. 고향 마을에 1981년 대덕연구단지가 들어서면서 선산을 세종시 조치원으로 이전해 효림원을 조성했어요. 어머니는 그 안에 있는 농가주택에서 4개월 동안 고생하시다 90세에 돌아가셨고, 5일장을 치렀어요. 매년 시묘살이를 하기 위해 내려갔고 거기 가서도 돌아가신 어머니와 대화도 나누고 3년 탈상을 했는데 마을 회장이나 이장이 그 모습을 눈여겨봤나 봐요. 그러다 매년 추모식을 하면서 마을 사람 100명을 초대해 아이들에게 선물도 주고, 면장 추천을 받은 어려운 학생들에게는 500만원씩 장학금도 수여하는 행사를 진행했죠. 사실 3년만 하고 그만두려 했는데, 막상 해마다 해온 것을 그만두기는 어려웠어요. 나로서는 자식의 도리로 하면 되는 일이었지만, 소문이 나자 군에서 우리 마을을 성균관장에게 추천해 각지에서 몰려와 선전을 해주고, 포상도 받았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마을 사람들이 1만원, 5000원씩 자발적으로 980만원을 모아서 선산 공원 입구에 효비를 들여놓았어요. 마을이 효의 고장이니까 “마을 입구에 ‘효림원’이라고 세워 놨어요. 그때 어머니가 옥색 한복을 입고 꿈에 선명히 나타나시더니 ‘마을에서 이렇게 효비도 세워주고 행사도 열어줬는데, 너도 고마운 뜻을 표시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셨어요. 작은 유통업을 하던 나는 영농조합 농장을 하나 인수했어요. 그곳에서 생산하는 오이, 토마토, 배 등 농산물을 국가유공자 요양원이나 보훈병원, 군부대 등 10여 기관에 기증하고 있어요.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지역의 소득 증대도 되고, 고용창출도 되니 농민들이 굉장히 좋아합니다.
△ 권혁승 회장: 7년째 백교문학상 효친문학상 작품을 전국적으로 공모하는데, 글과 시 속에 효 사상, 효심 또는 모정이 깃들어져 있는 작품을 심사 기준으로 삼아 상을 주고 있습니다. 아무리 잘 쓴 글이라도 사친과 관계없는 글은 입선이 안 되죠. 자식들은 부모가 그렇게 사랑을 줘도 사랑인 줄 몰라요. 일상에서 공기를 마시듯 깨닫지 못하는 것이죠.
강릉 시골 마을에다가 사모정 정자를 지었어요. 마을의 쉼터가 되라고. ‘사모정’ 어머니를 생각하는 마음이라 해서, 한쪽에는 도예 조각 하는 교수님의 작품도 세워 놨죠. 정자를 강릉시에 기증했는데 하고 나니까 주변에서 그 정자만 가지고 효 사상이 함양되겠느냐 해서 ‘사친문학상’을 만들라 하더라고요. 그걸 만들어 전국적으로 등단한 문인을 대상으로 작품공모를 하고 있어요. 거기다 이 사상을 전 세계에 알려야 되겠다는 의미를 담아 이라는 책을 만들었어요. 국내 200여 도서관에 비치했고, 영어판을 제작해 65개국 130개 도서관에도 전달했어요. 유엔, 세계은행에도 책이 있어요. 대통령, 교육부장관, 문화부장관 등에게도 돌리고, 오바마 대통령에게도 보냈는데 잘 전달이 됐는지는 모르겠어요(웃음).
작년에 사모정이 있는 공원이 너무 좁다고 해서 확장공사를 1년간 했어요. 높이가 3m인 고석에 ‘효 사상 세계화의 발원지 효향 강릉’이라 쓰고 밑에 영어로도 써놓았어요. 그 옆의 돌에도 효에 대한 글을 영어와 중국어, 일본어로 새겼어요. 오는 9월에 도 창간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