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의 마지막 주말에 친구와 월미공원을 가자고 약속을 했는데, 막상 동인천역에서 만난 후에 생각이 바뀌었다. 이왕지사 발걸음을 하였으니 동인천에서 시작하여 자유공원, 차이나타운, 그리고 월미공원으로 이어지는 추억의 오솔길을 함께 걸어보자고 의기투합하고 도보순례를 시작하였다.
동인천역전은 50여 년 전의 모습에서 크게 달라진 게 없어보인다. 50여년이라고 하면 강산이 다섯 번이나 바뀌고도 남을 세월인데 막상 그곳은 세월의 무게가 살짝 비켜간 것처럼 올드한 모습에 왠지 모를 정겨움과 친근감이 느껴졌다.
역에서 출발하여 자유공원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다 보니 이면도로에는 철물점, 전기 및 전자제품 상점 등이 다닥다닥 접해 있었고 그 옆으로 인현동 호프집 화재사건 희생자 추모탑이 나타났다. 참으로 끔찍했던 그 사건도 이미 우리들의 머릿속에서는 지워버린지 오래되었으니 인간의 뇌의 저장능력에 한계가 있어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1999년 10월의 마지막 날에 인현동 5층 건물 2층에 있던 40여평 규모의 호프집에서 불이나 순식간에 3층 당구장까지 솟아오르면서 52여명의 희생자가 났는데, 그 중에서도 학교 가을축제후에 뒤풀이 하던 학생들이 많이 희생되었던 안타까운 사고였다. 잠시 희생자 추모탑에서 머물다가 발길을 옮겼다. 제물포 고등학교를 끼고 자유공원으로 올라가는 길가의 주택 담장에는 무르익어가는 장미가 탐스럽게 피어있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잠시 인천에 머물렀던 필자는 옛 생각에 젖어 친구와 두런두런 담소를 나누면서 오르는데 추억의 홍예문이 불쑥 나타났다. 청소년 시절에 잠시 이 곳을 지나다니면서 신문배달을 하든 고단했던 추억이 떠올랐다.
인천 홍예문(虹霓門)은 윗부분을 무지개 모양으로 반쯤 둥글게 만든 문으로 높이 약 13m, 폭 약 7m의 화강암 석축을 쌓고 터널처럼 만든 석문(石門)이다. 일제강점 초기인 1908년도에 일본공병대가 만들어 혈문(穴門)이라고 불렸다.
당시 인천중앙동과 관동 등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의 수가 급격히 늘자 만석동 방면으로 자신들의 영역을 확장하기 위해 이 홍예문을 뚫었다고 한다. 광복 70년이 지난 아직도 일제의 흔적들이 이렇듯 곳곳에 남아있다. 우리에겐 아픈 기억이지만 절대 잊지는 말아야겠다.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목에는 울창한 나무들이 그늘을 만들어 뜨거운 햇살을 피할 수 있어 쾌적했다. 특히 곳곳의 나무그늘 정자에는 노인들이 삼삼오오 모여앉아 장기나 바둑을 두기도 하였고 그들 옆에서는 할머니들이 그룹을 지어 음식을 드시면서 이야기장단에 빠졌다. 참으로 평화로워 보인다. 인천학도의용대 호국기념탑이 눈에 들어왔다. 1950년 9월 15일,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자 인천지역의 학도들은 의용대를 조직, 강화하여 치안유지에 힘쓰던 중 승전을 눈앞에 두고 중공군의 개입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남녀대원 3,000여명은 각각 현역으로 자원입대하여 조국에 젊음을 바쳤다.
드디어 자유공원 정상에 오르니 거대한 동상 하나가 불쑥 눈에 들어온다. 한 손에는 쌍안경을 들고 인천상륙작전 지역이었던 월미도를 지그시 내려다보고 있는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동상이었다. 자유공원의 상징이다. 초등학교 시절에 단체로 가끔 한번씩 와 보았던 추억의 그 장소에는 옅은 분홍색 장미와 노란색의 탐스러운 장미꽃이 활짝 피어 잘 가꾸어져 있었다. 훌쩍 지나가버린 50여년의 세월이 무상하다.
태평양전쟁 미군 최고사령관이었던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장군은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진주만을 기습한 일본을 공격하였으며 결국 1945년 8월 일본을 항복시키고 일본점령군 최고사령관이 되었다. 6·25전쟁 때는 UN군 최고사령관으로 부임하여 한국전쟁에 참전하여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하였다. 우리나라와는 역사적으로 뗄레야 뗄 수 없는 인연으로 엮여 있다. 하지만 중공군과 전면전을 두고 트루먼 대통령과 갈등을 빚어 해임되었고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 라는 말을 남기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갔다. 혹, 그 때 내친김에 만주를 폭격했다면? 지금의 우리 나라는 어떻게 되었을까? 통일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아쉬운 마음이 든다.
2005년 9월11일에는 인천상륙작전(1950년 9월 15일) 55주년을 나흘 앞둔 11일 인천 자유공원 일대에서 맥아더 장군 동상의 철거를 주장하는 단체와 동상 사수를 주장하는 단체의 대규모 동시 집회가 동시에 개최되었는데, 이때 동상 철거를 주장하는 단체 회원들이 폭력시위를 벌이며 경찰과 격렬하게 충돌했다. 이로 인해 시위대와 경찰 모두 부상자가 속출하고 공원 일대는 난장판이 됐다.
결국 동상은 존치되었고 지금은 평화롭게 월미도를 응시하고 있는 예의 그 모습으로 역사의 현장에 남아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아직은 뿌연 황사가 시야를 가려 월미도가 흐릿한 안개 속에 떠있는 듯한 모습을 바라보며, 차이나 타운 으로 발길을 옳겼다.
“은퇴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의 휘슬이다. 그래서 노후 준비는 바로 지금 시작해야 한다”라고 강조하는 가재산 2060클럽 회장은 노후를 위한 건강한 삶의 중요성을 적극적으로 설파하고 있다. 자신의 말을 실천하는 것처럼, 그가 이끄는 2060클럽은 트레킹 모임이다. 1년여 만에 350명이라는 회원을 모으면서 성공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2060클럽의 의미와 트레킹의 끝없는 즐거움이란 무엇인지 들어본다.
성공적인 노후를 누리는 많은 시니어들은 흔히 나이가 들어서 건강을 유지하는 최고의 비결을 ‘가능한 한 오랫동안 일을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인사 토털 솔루션을 제공하는 HR전문가 기업 피플스그룹의 대표이며 2060클럽의 회장이기도 한 가재산 회장은 ‘2060’이라는 말을 즐겨 쓴다. 그는 2060은 ‘경제수명(經濟壽命) 2060시대’라며 20세부터 80세까지 60년 동안 일해야 하는 삶의 가치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제는 우리나라도 100세 시대 고령화 국가가 되었습니다. 불행하게도 우리나라는 노후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한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최고의 ‘노테크(老TECH)’는 오랫동안 일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말하는 2060은 경제수명을 60년 가져가기 위해서 ‘20대부터 60년 일할 준비를 시작하고, 60대도 20년 더 늘려 80까지 일하자’는 의미입니다.”
노후 준비는 바로 지금
가 회장은 노후 준비는 퇴직 직전에 하는 게 절대 아니라고 강조한다. 노후 준비의 골든타임이 언제냐고 묻는다면 그 답은 ‘나이와 관계없이 바로 지금’이라고 말하는 그가 참고 사례로 주목하고 있는 나라는 장수국가로 유명한 일본이다. 일본은 65세 이상 노인들이 이미 국민의 23%를 넘었고, 100세 이상의 고령자가 6만 명을 넘는 세계 최고령국가다. 그래서 일본에는 100세 이상 일하는 현역들도 많다.
“시바타 도요 할머니가 100세에 낸 라는 시집은 100만 부가 넘게 팔린 베스트셀러가 됐습니다. ‘나이를 거꾸로 먹는 건강법’의 저자 히노하라 시게아키(日野原重明) 박사는 올해 105세(1911생)지만 현역 병원장입니다. 그는 100세가 되던 해에 강의를 하러 우리나라 대학교를 다녀갔는데, ‘어떤 일이든생각하기 나름이며 늙는다는 것은 쇠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성숙해지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진정한 늙음과 젊음은 마음에 있다’는 의미인 겁니다.”
트레킹 모임 2060클럽이 추구하는 3무(無)
그가 회장으로서 운영하고 있는 이색 모임 ‘2060클럽’에도 그대로 붙여져 있다. 2060클럽은 80까지 건강하게 일하며 100세 시대를 살아가자는 트레킹 모임이다.
“3년 전 우연히 네 명이서 여행사 광고를 보고 전남 여수에 있는 금오도 비렁길 트레킹을 가게 되었지요. 동백꽃이 멋들어지게 어우러진 섬이었는데 정말 아름다운 절벽과 비경이 펼쳐지는 바닷길을 걸었습니다. 그렇게 처음 트레킹이라는 걸 하면서 시쳇말로 ‘뿅’가버렸습니다. 이후 트레킹에 매료되어 서울 둘레길 157km를 완주하고 태안 국립공원 등을 다니면서 무척 좋아 그 멤버들이 나이가 들더라도 승합차 한 대 정도의 인원으로 계속 다녀보자는 제안을 한 것이 이렇게 커졌습니다.”
우연히 그리고 취미로 시작한 2060클럽은 올해 5월을 기점으로 회원 수 350명을 넘어서며 성공적으로 순항 중이다. 2060클럽의 성공 비결은 무엇일까?
“누구든 자기가 좋아하는 일은 열심히 하게 되어 있습니다. 2060클럽은 남을 위해서라기보다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자기 건강을 위해서 걷는 매력이 가장 크다고 봅니다. 오는 사람들이 다양하기 때문에 이런 분들과 걸으며 대화하는 사이에 자신을 되돌아보게 되고, 배우면서 삶의 에너지를 얻게 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일주일 동안 열심히 일하다 주말에 트레킹을 통해 충전도 하니 주말을 기다리게 되지요.”
모임의 자유분방한 성격을 드러내듯, 2060클럽은 회비도 나이도 직업도 따지지 않는 3무(無)를 추구한다. 부담을 갖지 않고 즐기길 바라는 의도에서다. 누구나 가입이 가능하다.
“단지 조건이라면 2060에서는 세 가지를 위해 노력하자고 합니다. 첫째는 일, 건강, 그리고 사랑 즉 3유(有)입니다. 여기서 당장은 일이 없더라도 좋지만 80까지 일하겠다는 생각을 갖는의지와 열정은 꼭 필요합니다. 그리고 일하기 위해 건강해야합니다. 문제는 자신과 주위사람들과 잘 어울리고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이 꼭 필요합니다.”
다양한 사람들과 걸으며 새로운 에너지 얻어
가 회장은 자신이 젊었을 때는 20여 년간 계단 오르기, 테니스, 등산 등 무릎에 안 좋은 운동만 했다고 회고했다. 그러다 보니 40대 후반부터는 운전도 제대로 못할 정도로 관절이 망가져 수술을 계획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트레킹을 만나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멀쩡해졌다고 한다.
“더구나 우리 집안에는 당뇨가 유전적으로 있어서 저한테도 경고장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트레킹을 시작하고 지난 연말에 체크해보니 당뇨 수치가 90대로 떨어졌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았습니다. 눈에 보이는 건강을 얻은 것도 좋지만 무엇보다도 자연과 함께 다양한 사람들과 걸으며 자신을 되돌아보고 새로운 에너지를 얻는다는 게 제일 즐거운 일이지요.”
2060클럽이 주로 걷는 길은 전국에 대략 1600여 개가 형성되어 있는 트레킹 코스다. 또한 트레킹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각 지자체에서도 훌륭한 코스들을 개발해 놓고 있다.
“2060클럽에서는 매주 트레킹 가는 것을 원칙으로 하여 서울 둘레길이나 북한산 같은 근교에서 걷고 있는데, 한 달에 한 번은 여행사들이 전국에 개척한 코스를 버스를 타고 다녀옵니다. 특히 분기에 한 번은 1박 2일 코스로 멀리까지 다녀오는데 그 활동이 회원들에게는 또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건강한 대한민국을 만든다는 기쁨
최근 은퇴 인구가 급격하게 늘어나면서 만들어지는 모종의 공백 현상이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다. 지금껏 일만 알고 살아온 사람들이 막상 은퇴를 하자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혼란스러워 하면서 우울해 하거나 부질없는 곳에 돈을 쓰는 일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이들을 위한 대안의 솔루션으로서 최근 다양한 시니어 모임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고 있다. 그러나 그중에서 제대로 운영을 하는 곳은 그리 많지 않다.
가 회장에게 클럽을 성공적으로 운영하면서 무엇이 중요했는지에 대해 물어보니 ‘열심히 일하며 트레킹으로 건강을 지키자’며 차별화를 추구했다고 밝혔다. 2060클럽이 일하는 시니어에게 필요한 건강 조건으로서의 트레킹을 추구한다는 것은 자연스럽게 구성원의 성격도 정의해주고 있다. 일하는 일상을 지탱하기 위한 모임이라면, 구성원들 또한 의욕적인 성향을 가진 이들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가 회장은 앞으로는 국내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유명한 해외의 멋진 트레킹코스를 가보려고 계획하고 있다.
“이러한 작은 커뮤니티들이 많아진다면 건강한 대한민국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고령화로 인해 국가 전체적으로 일하는 사람이 줄어들면 세수도 줄고 노인 환자들은 늘어나 건강보험까지도 부족해지는 어려움을 극복하는 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신광철 시인
“2060클럽은 ‘주고 또 주는(Give And Give)’ 관계”
걷는다는 것은 인생의 은유 같기도 하고, 직유 같기도 하다. 사람 안에는 길이 하나 들어 있어 거미가 거미줄을 뽑아내듯 사람은 걷는 일로 인생길을 만들어 낸다. 마음에서 뽑아낸 길이 인생길이 된다.
2060클럽 가입을 권유받고 망설였다. 할 일은 없지만 늘 머릿속에는 글이 왔다 갔다 해서 하루 일상이 생각으로 일출이 오고, 생각으로 일몰이 오는 나 같은 사람에게 함께 걷는다는 것은 번거로운 일이었다. 평생을 여행, 취재, 일로 돌아다니며 살아 걷기 모임이란 말에 별로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깔끔하고 안정된 사고의 소유자인 가재산 회장의 권유이기도 하고, 직접 만든 모임이라는 말에 귀가 번쩍 띄었다.
걷는 것은 평생의 내 일이기도 했다. 인생의 절반을 길에다 깔고 살았다고 할 수 있었다. 더구나 혼자 하는 여행에 익숙해져 있었다. 산길을 택해 걸으면 하루 종일 걸어도 사람 하나 만나지 못할 때도 있었다. 명산에는 사람이 넘쳐도 이름 없는 야산을 걸으면 사람의 흔적을 찾을 수 없을 만큼 한적하고 조용하다.
나는 산과 들을 걷고, 쉬고, 숲이나 간이역이나 나무 그늘 아래 누워 자기를 많이 했다. 풀 위에 누워 자면 세상은 내 것 같았다. 더구나 비가 오는 날에 숲이나 들판에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면 세상은 울림을 주었다. 비는 결이 있었다. 눈도 결이 있었다. 마찬가지로 바람도 결이 있었다. 자연은 거대한 흐름이 있었다. 비나 눈이 올 때 물이 흐르는 바닥에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면 비와 눈의 흐름이 보였다. 가슴 벅차게 하는 광경이었다. 새들의 군무 같고, 보리밭의 바람에 흔들리는 보리의 군무 같은 걸 느꼈다. 감동이 온다. 더구나 태풍이 오는 날 숲으로 들어가 나무와 나무가 부딪히며 부러지고 폭우와 바람이 거칠게 지나가는 현장에서 흠뻑 젖어서 하늘을 보고 누워보라. 젖고 나서는 더 젖지 않는다. 두려움과 공포가 사라졌다. 묘한 쾌감을 느꼈다.
하지만 2060클럽은 다른 세상이었다. 내가 평소에 느끼지 못했던 세상을 선물했다. 아름다움과 상쾌한 궤적을 만들어내는 곳을 찾아내 따뜻한 사람들과 함께 이야기하며 구릉을 오르내리고, 산허리와 강을 휘어 돌며 대화를 나누는 기쁨은 또 다른 세계였다. 혼자 걸을 때의 쓸쓸함과는 다른 인간애를 느낄 수 있었다. 몰라보게 달라진 것은 사람이 좋아서 걷는 날이 기다려진다는 점이다. 사람이 사람을 그리워하는 만큼 아름다운 일이 있을까. 나는 감히 이야기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그리움이란 별이 떠야 하는 거라고. 그리움이 없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관계가 존재할까 싶다.
걷기를 하면서 등산이나 혼자 걷는 것과는 다른 인간의 온기를 느낄 수 있어 좋았다. 선하면 선한 사람이 찾아오고, 거칠면 거친 사람이 찾아오는 것이 세상의 이치다. 2060클럽의 매력은 가재산 회장의 성격처럼 ‘주고받는’ 관계가 아니라 ‘주고 또 주는(Give And Give)’ 관계의 설정에 있다. 가벼운 마음으로 함께 걷고, 함께 즐거움을 나누는 것으로 족한 모임이어서 부담 없는 모임이다. 그래서 더욱 마음이 끌린다. 바람이 스치고 지나면서 꽃을 피우지만 소리치지 않고 지나가듯이 2060클럽이 그렇다. 무엇보다 같이 걷는 분들의 건강이 좋아졌다는 한결같은 말에 덩달아 즐겁고 나 또한 걷는 것의 즐거움과 더불어 얻은 건강이 고맙다.
법으로 정년을 보장한 60세까지 근무한 뒤 박수받고 정년퇴직해도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앞으로 10여 년은 너끈히 더 현업에 종사할 수 있다고 다들 생각한다. 그냥 해보는 큰소리가 아니고 건강관리를 원만히 한 사람은 실제도 그렇다. 정부나 지자체에서도 다 알고 있는 진실이다. 그래서 막대한 국가 예산을 들여서 인생이모작에 대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액티브 시니어가 되라고 권장하고 있다.
국가나 지자체에서 집안에만 있지 말고 밖에 나가서 활동하라는 말을 안 해도 ‘100세 시대’에 60세에 퇴직하고 남은 사십 년을 ‘구둘 장군’으로 지내기는 누구나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는다. 도둑질 말고는 무슨 일이든 찾아보려고 한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거창한 수식어를 갖다 부치지 않아도 집안 식구들 등쌀에 집안에만 있기는 어렵다.
퇴직자가 왜 계속 일을 하려고 하는가? 우선은 먹고 사는 경제력이다. 퇴직금 1억 원을 은행에 넣어봤자 월 20만 원을 손에 쥐기가 힘든 데 세금은 15.4%나 뗀다. 허드렛일로 월 100만 원을 번다면 은행에 6억~7억 원을 예금한 것과 맞먹는다. 퇴직했다고 해서 안 먹고 안 입고 살 수가 없다. 퇴직해서 근로수입은 없어져도 소비지출은 그만둘 수가 없다. 금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났거나 극소수의 재테크에 성공한 재력 있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자연히 퇴직하는 순간부터 돈 걱정하는 것이 일반 서민의 자화상이다. 부모님도 살아계시고 자녀들 결혼마저 늦어져 함께 살고 있다면 퇴직했다 해서 보따리 싸 시골로 내려가기도 어렵다. 자연히 이런저런 돈 벌 궁리를 하느라 불면의 밤은 깊어간다.
집안에서도 가장이 놀고 있으면 분위기가 저기압이다. 공원 벤치에서 만난 김철수(가명ㆍ67) 씨는 “갈 곳이 없어도 이렇게 집을 나와야 아내도 숨을 좀 쉰다”고 한다. 매일 출근하던 남편이 어느 날부터 거실에 턱 버티고 있으면 아내가 얼마나 답답해할 것이냐는 말이다. ‘아빠 내일부터 출근한다.’ 라는 말이 어떤 꽃 노래보다 하고 싶은 말이고 가족들은 듣고 싶은 속삭임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반 토막의 급여를 주는 일자리도 마다치 않고 노인들이 줄을 선다,
문제는 적은 돈을 버는 일자리에 퇴직자들이 인생이모작으로 재취업에 성공했다고 해서 모든 국민이 박수 보내고 축하해주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퇴직했으면 그만 집에서 쉬시지 새로운 일자리 찾기에 혈안이 돼 반 토막의 급여도 고맙다고 감지덕지 일하는 노인의 모습을 사시의 눈으로 째려보는 젊은이들도 있다. 자식의 일자리를 뺏는 비윤리적 아버지로 매도하는 것이다.
젊은이들이 고령자 취업을 반대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로 젊은이들이 해야 할 일자리를 시니어들이 뺏어간다는 시각이다. 일자리는 한정되어 있는데 누가 차지하는가에 대한 갈등구조다. 두 번째로 동남아, 중국 등 출신 외국근로자 때문에 몇 년간 인건비가 제자리걸음 하는 상황에서 시니어까지 저임금 경쟁에 가세해 인건비 인상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지적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시니어들은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도 젊은이들의 눈칫밥 먹는 신세로 전락해 길게 다니지 못한다. 뭔가 100세 시대에 걸맞은 정부 정책이 있어야 한다. 우선 노동시장에 모든 것을 맡기고 방치하지 말고 노년의 경험이 필요한 특화한 일자리를 특화해야 한다. 요일별 근무제나 바쁜 시간대의 파트타임 등 가변성 있는 노인 일자리가 필요하다. 어린이 놀이터의 안전점검, 불량식품 단속요원도 좋다. 공원이나 우범지대의 순찰이나 청소도 노인의 특화된 일자리로 손질해서 만들어야 한다. 9시 출근해서 6시에 퇴근하는 고정된 근무 개념을 깨뜨려야 노인의 일자리가 많아진다.
여전히 청춘의 시간을 통과하는 이화여고 정동길을 안혜초(安惠初·75세) 시인과 걸었다. 인터뷰를 하는 내내 그 나이를 전혀 느낄 수 없는 젊음을 보여줬다. 민족지도자인 민세(民世) 안재홍(安在鴻·1891~1965)의 손녀이기도 한 그녀는 이화여대 영문과를 졸업한 후 1967년 의 추천으로 등단했으니 작가로서의 경력도 내년이면 50주년이 되는 원로시인이다. 그러나 그러한 나이와 경력에 안주하지 않고 여전히 꾸준한 시 활동과 더불어 소설, 콩트, 동화 등 다양한 작품 활동을 준비하고 있는 안 시인의 젊음의 힘은 어디에서 비롯되고 있는 것일까?
우리 사랑 지금은
잠들어 가도
조금씩 알게 모르게
잠들어 가도
그대와 나
어느 한쪽이라도
깨어 있으면
오뉴월의 싱그러운 햇바람으로
깨어 있으면
우리 사랑 이대로
스러지지 않아요
그대 사랑 나 먼저
하품을 하면
내 사랑이 자꾸
자꾸 흔들어 주고
내 사랑이 그대 먼저
눈을 비비면
그대 사랑 자꾸
자꾸 흔들어줘서
- 중
안혜초 시인의 시 은 2006년 봄, 시비(詩碑)로 만들어져 전남 화순군 남면 운산리 평화문화휴양 시비공원에 세워졌다. 또한 2004년 가을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단행본으로 출간된 중국어역시집의 제목으로 선정, 타이틀 포엠이 되기도 했다. 1941년에 태어난 안 시인의 나이를 잊게 만드는 풋풋함이 담겨 있는 시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러한 감수성은 저 시를 쓴 지 10년이 넘은 지금도 여전한 듯해 보였다.
시는 기도, 일기, 편지, 세상에 내보내는 뜨거운 메시지
안 시인이 기억하는 자신이 처음 쓴 글은 중학교 2학년 때다. 에서 내는 문예지에 투고했던 산문이었는데 제목은 였다. 그 글이 입선된 것을 계기로 문예란에 계속적으로 글을 투고했다. 이화여고 재학 중 교지 의 기자로 활동하면서 본격적으로 글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는 사람이 된 것이다.
안 시인 스스로 말하길 자신에게 시란 ‘기도, 일기, 편지, 세상에 내보내는 뜨거운 메시지’이다. 그녀는 어떤 길을 갔더라도 시만큼은 계속 썼을 거라고 말하는 투철한 시인이기도 하다.
“무얼 바라서가 아니라 시를 쓰지 않곤 못 배겼을 겁니다. 오죽하면 내가 ‘시는 내게 있어 평생 결혼만큼은 하고 싶지 않은 숙적 같은 연인’이라고 시로도 썼을까요?(웃음) 평범한 시민인 나는 사회로부터 소외되지 않는 시인이 되고 싶어요. 그래서 제 시는 관념적이지 않고 쉽죠. 조금이라도 살아가는 데 힘이 되어 줄 수 있는 시를 쓰고자 앓고 또 앓았습니다. 시는 삶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그 시는 쓰는 시인이 아프면 시도 아프고 시인이 비틀어지면 시도 비틀어집니다. 그리고 원래는 언론인으로 크게 성공하고 싶었는데 건강 문제도 좀 생기고 결혼 생활과 병행도 힘들고 해서 집에서도 쓸 수 있는 문학 쪽으로 기울어졌지요.”
윤동주 시인과 안혜초 시인
안 시인은 최근 베스트셀러가 된 시집 와 영화 의 흥행으로 다시 주목받게 된 윤동주 시인과 특별한 인연이 있다. 바로 2001년 제17회 윤동주문학상의 수상자이기 때문이다.
바보야, 이 바보야
차 한 잔
사과 한쪽에도 맘에 걸리고
잎새에 이는 잔바람에도
잠 못 이루는 …
- 중
“자작시에서도 말한 적이 있지만 윤동주 시인하고 나하고는 기질적으로 비슷한 데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그동안 50년 가까이 시를 써 오면서 꽤 여러 번 문학상을 받았는데 윤동주문학상은 그중 가장 먼저 내세우고 싶은 상이기도 합니다. 이 상이 내게 더의미가 있는 것은 한국문인협회 사상 처음으로 수상자를 한국문인협회 이사진 및 문협지회장 투표로 결정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그동안은 심사위원에 의해 결정했는데 당일 회의석상에서 ‘수상자 선정을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열띤 토론 끝에 투표로 하자고 결정되었다고 합니다. 난 그 당시 임원이 아니어서 나중에야 알았지만.”
안 시인은 자신의 시집들 중 가장 아끼는 시집은 따로 없고, 시집마다 각별히 아끼는 시들이 있다고 밝혔다.
“이제 시선집을 내게 되면 시선집이 되겠지요. 지난 2012년 9월 세계한글작가대회(국제펜한국본부 주최) 한영대역 자선 소시집을 만들어냈는데, 현재로선 그게 가장 아끼는 시집이에요. 시집 제목은 이구요.”
그녀가 시를 쓰면서 미처 기대하지 않았던 보너스 같은 일들이 있다. 와 등 두 편은 시비가 세워졌다. 그리고 , , , 등 여러 편은 작곡되어 노래로 발표되기도 했다. 그녀는 시가 노래가 될 수 있다는 건 굉장히 보람 있고 행복한 일이라고 재차 말했다.
오랜 경륜에서 다져진 삶의 철학과 포스
관념적인 시가 아닌 생활 속에서 살아 있는 시를 쓰고 싶었고 주로 우리 누구나의 보편적인 진실을 추구했다는 안 시인은 그렇게 살아있는 것에 대한 몰두를 통해 자신의 생명력을 지켜왔던 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에게도 피할 수 없는, 나이듦에 대한 깨달음이 찾아올 수밖에 없었다.
“늘 하고 싶은 일, 해야 할 일 들이 쌓여 있어서 나이를 의식하지 않고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주민센터에서 ‘지하철 어르신 우대용 교통카드’를 신청하라는 공문이 날아들었을 때, 어느 날 갑자기 ‘원로시인’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아, 정말 이제부턴 내가 노인세대로 분류되는구나’ 하여 내심 당혹스러웠습니다. 정신 바짝 차려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최근 유엔에서 재정립한 평생 연령 기준을 보면요 0~17세 미성년자, 18~65세 청년, 66~79세 중년, 80~99세 노년,100세이후 장수노인이라네요. 하하.” 활달하게 웃어젖히는 안 시인의 몸짓과 말투에서 오랜 경륜으로 다져진 삶의 철학, 아우라가 느껴진다. ‘20세의 청춘에도 노년으로 사는 사람이 있고 80세 노년에도 청춘으로 사는 사람이 있다’는 새뮈얼 울만의 저 유명한 말과 함께.
인간으로선 ‘부끄러움’, 여자로선 ‘수줍음’을 잃고 싶지 않아
나이가 들면서도 잃고 싶지 않은 것들이 무엇이 있을까? 거기에 그녀가 유지하고 있는 젊음의 비밀이 있는 게 아닐까?
“인간으로선 ‘부끄러움’이고 여자로선 ‘수줍음’을 잃고 싶지 않습니다. ‘수줍음’은 ‘약한 것’과 다릅니다. 요즘 강하고 유능하게 보이고 싶어 ‘수줍음’을 벗어 던져 버린 듯한 여자들이 많아져 가는 게 안타깝습니다. 요즘 여자들은 ‘예쁘다’보다 ‘섹시하다’는 말을 듣기 원하는데, 수줍음이야말로 여자를 가장 여자답다고 느끼게 합니다. 개인적으로 난 남자도 약간 수줍어하는 남자가 매력이 있어요(웃음).”
그러고보니 활달한 듯 보이면서도 언뜻언뜻 수줍어하는 기색이 만년 소녀와도 같다.
안 시인이 요즘 들어 가장 쓰고 싶은 글 중의 하나가 ‘여자는 여자로 강하라’라는 주제다.
“강하게 보이기 위해 남자처럼 구는 여자들은 한심하잖아요? 보이시한 여자가 일면 매력 있긴 하지만, 그건 남자 흉내하곤 다르지요. 여자로 태어나 여자만이 할 수 있는 걸 하는 것, 무엇보다 어머니가 된다는 건 숭고한 거예요. 자녀를 낳아 한 사람의 몫을 훌륭하게 해 낼 수 있도록 양육함은 개인과 나라와 인류를 위한 실로 위대한 공헌이 아닐 수 없죠.”
할아버지 민세 안재홍이라는 거대한 산
최근 가장 행복한 일로 지난해 가을 첫 손자를 본 게 가장 큰 경사이고 기쁨이라고 꼽는다.
“너무 늦게 본 손주라서요. 기도를 정말 열심히 했어요. (손주를 본 지금이)아마 내 인생에서 가장 맘 편한거 같아.”
안 시인은 독립유공자인 민세 안재홍의 손녀이기도 하다. 민세(民世)는 ‘민족과 세계’라는 뜻이다. 안재홍은 일제 강점기 조선일보 주필, 사장 등 언론인으로 종횡무진 활약, 일제에 의해 9번이나 투옥되었으며 사학자로서의 업적도 크게 남겼다. 해방 이후엔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 국민당 당수 등 중도우파 성향의 정치인으로 활약, 초대 대통령 선거에선 이승만·김구에 이어 3위를 하였고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한국전쟁 때 불행히도 납북되었다.
“혜초(惠初)는 첫 은혜, 첫 손녀라는 뜻으로 할아버지께서 지어주신 이름입니다. 그분은 아랫사람에게도 존칭을 쓰셨고, 모진 고문에도 신음조차 크게 내지 않아 심문하던 왜경들도 경탄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성실하고 검소해 미 군정시절 한국인 행정수반인 민정장관 시절에도 도시락을 꼭 지참하셨고, 고매한 품성의 민족지도자였습니다. 할아버지께 물질적 혜택을 받은 적은 없지만 나라를 구하시는 데 평생을 헌신한 분의 손녀라는 자긍심과 함께 그 분께 누를 끼칠까봐 조심 조심하며 살아왔어요.”
등단 50주년, 이젠 나를 위해 살아야 할 시점
안 시인에게는 지금 하지 않으면 후회할 것들이 있다. 무엇보다도 그 자신의 개인적인 역사를 정리하는 일이다.
“내년 1월이면 문단 등단 50주년이에요. 시집 7권을 정리해서 시선집을 꼭 내려구요, 그리고 더 늦기 전에 신앙 간증집도 내야겠구요. 또한 한불대역 시집, 한일대역 시집도 준비 중입니다. 지난 20년 가까이 할아버지 민세 안재홍 선집에 이어 전집을 내느라고 내 것은 자꾸 보류해왔는데 이제 더 이상 미룰 수가 없게 됐어요. 수필집, 칼럼집도 내야 할 것들도 있고 단편소설, 콩트, 동화 들도 써서 발표할 것들이 각각 여러 편씩 쌓여 있는데….”
안 시인에게는 평생을 살면서 꼭 지키면서 살아온 것이 있다.
“40세 전후에 몇 차례 걸쳐 성령은사체험을 경험한 이후로 지금까지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라는 말을 하루도 잊지 않고 살아왔습니다.”
‘넋두리를 하는 인생을 살고 싶지 않았다’는 그녀의 말은 자신의 삶을 바라보는 안 시인의 의지를 잘 드러내고 있었다. 그 의지 또한 안 시인의 나이를 믿기지 않게 만드는 젊음의 원천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사람에게선 특유의 에너지가 느껴지곤 한다. 세상의 잣대에 흔들리지 않고 신념을 따라 걸어온 길은 고스란히 그녀의 자부심이 됐다. 그녀의 시가 투명한 건 삶에 대한 특유의 낙관 때문일 것이다. 정갈하고 깔끔하게 바라보는 안 시인의 예쁜 감정을 담아왔다. 봄이 오는 덕수궁 길목에서 안 시인과의 짧은 시간을 보내고 돌아오는 길, 벌써부터 그녀와의 두 번째 만남이 기다려진다.
△ 안혜초 시인
이화여고·이화여대 졸업. 세계여기자 작가협회 한국지부 부회장 역임. 국제펜한국본부 이사, 평화위원회 위원장. 한국현대시인협회 부회장, 현 지도위원. 한국문인협회 대외 협력위원. 한국여성문인회 이사. 이화여대 동창문인회 회장, 현 고문.
작년이었다.
본격적으로 가을이 시작될 무렵 나는 오랜만에 이탈리아 여행에 나섰다.
볼로냐에서 조금 더 남쪽으로 내려가 이탈리아 중부 지방의 소도시들을 기웃거렸다.
정년퇴직을 하고 연금으로 이냥저냥 살아가는 칠십 노인에게 여행은 더 이상 관광이 되지 않는다. 언젠가 피렌체에서 샀던 낡은 가죽으로 된 보스턴백 하나를 어깨에 걸치면 그것으로 여행 준비는 끝이 난다.
추억.
이제 나의 여행은 미래가 아니라 과거이다. 미지의 세계를 만나는 새로운 경험이 아니라, 스쳐간 세계를 복기하는 애달픈 확인이다. 사람들은 이런 걸 흔히 추억이라고 말한다. 그렇다고 내가 이 나이에 궁상맞게 혼자서 추억 여행이나 하는 따분함을 즐기는 건 아니다. 과거는 언제나 현재 속에서 다시 살아나기 때문에 여행은 내게 가장 창조적인 순간들을 제공한다.
피렌체 아르노 강가를 어슬렁거리는데 여행 중 가방 끈이 낡아서 자꾸만 벨트가 늘어나곤 했다. 가죽 공방을 찾아 두리번거리며 두오모를 지나치는 순간, 누군가 내게 말했다.
“너무나 멋져요, 슈테판!”
독일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영어도 독일어도 능숙하지 못한 그녀가 목을 있는 대로 뒤로 젖히고 두오모를 바라보며 내뱉은 감탄이었다. 40년이 지난 지금, 그녀도 다시 이곳에 온 것일까. 나는 주변을 빠르게 둘러보았지만 어디에도 그녀는 없었다.
“내가 그렇게 멋져요?”
주어를 생략한 그녀의 감탄에 나는 짓궂게 농담을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여전히 관광객들로 붐비는 그곳에서 나는 한국에서 온 간호사였던 그녀, 김영희를 찾아 미친 듯이 헤맸다. 늘어진 가방끈을 손으로 움켜쥔 채, 땀을 뻘뻘 흘리며, 두오모 근처를 샅샅이 뒤졌지만 김영희는 보이지 않았다. 환청이었을까. 그럴 리가.
그날부터 이탈리아를 여행하는 내내 나는 김영희를 떠올렸다.
이런 걸 기적이라고 하는 걸까. 우연히도 열차 안에서 나는 김영희를 만나고야 말았다.
3주 동안의 이탈리아 여행을 마치고 볼로냐에서 뮌헨으로 가는 열차를 탔을 때였다.
에세이집을 읽던 나는 살짝 잠이 들었다가, 열차가 멈추는 느낌에 눈을 떴다. 어느새 베로나 역이었다. 몇몇 사람들이 열차에서 내리고 또 몇몇 사람들이 열차에 올랐다. 내가 앉아 있던 열차 칸의 문이 열리더니 단발머리를 한 젊은 여자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들어와 내 옆자리에 앉았다. 나는 그녀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물론 그녀는 김영희가 아니었다.
그녀는 여행을 하고 있는 중이었는데, 마침 인스브루크에 친구가 있어서 만나러 가는 길이라고 했다. 가벼운 대화를 나누던 중 나는 그녀의 이름을 물었다. 김영희. 놀랍게도 그녀의 이름이 김영희였다. 한국에서는 흔한 이름이라고 했다. 나는 그녀의 이름을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게 자세를 고쳐 앉고 정중하게 한국어로 말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녀는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그녀가 놀라거나 말거나 연거푸 한마디를 덧붙였다.
“나는 신사입니다.”
이번에도 역시 한국어였다.
그녀는 내가 아는 한국어로 농담을 하는 거라고 생각했는지 커다란 소리로 유쾌하게 웃었다. 한국어를 잘한다고 칭찬했다. 나는 그녀에게 설명했다. 이번에는 영어였다. 내가 할 수 있는 한국어는 이 두 마디가 전부였으니까.
“40년 전이었어요. 한국에서 독일로 온 간호사가 있었어요. 나는 그녀를 무척 좋아했어요. 어느 날 공원 벤치에 앉았을 때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 싶었어요. 그러나 그녀는 노터치, 노터치를 외치며 완강하게 나를 거부했어요. 나는 바로 포기했지요. 나는 신사였으니까요. 그런데 10분쯤 지났을 때 그녀는 내 어깨며 팔을 톡톡 건드리며, 때로는 내 허벅지를 좀 더 세게 두드리며 웃기도 하고 말하기도 했어요. 노터치를 외치던 그녀가 말이죠. 나는 그녀의 터치가 싫지 않았지만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했어요. 그러나 얼마 후 그녀는 더 이상 나를 만나주지 않았고, 그녀는 나를 음흉하고 나쁜 사람이라고 오해하고 있다는 걸 알았어요. 그녀의 이름이 김영희입니다. 40년이 지났지만 그녀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단 두 문장이에요.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나는 신사입니다.”
인스브루크 역에서 내리기 전 김영희는 활짝 웃으며 내게 말했다.
“그 터치와 그 터치는 전혀 다른 거예요. 40년 전 독일에 갔던 김영희씨를 만난다면 당신의 한국어 두 문장을 꼭 전해줄게요. 만나서 반가웠어요.”
뮌헨에 도착할 때까지 나는 늘어진 가방끈을 땀이 흥건하도록 꼭 쥐고 있었다.
나른한 봄볕 아래 어머니를 생각하는 조창화(趙昌化·78) 대한언론인회 고문을 만나 담소를 나눴다. 그는 세상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어머니의 값진 추억을 생생하게 그렸다. 흡사 계절마다 살아 돌아오는 장미꽃의 슬픈 아름다움처럼, 어머니의 모습은 그렇게 조 고문의 마음속에 남아 있었다. 글 김영순 기자 kys0701@etoday.co.kr 사진 이태인기자 teinny@etoday.co.kr
“ 어머니는 자신의 인생을 오직 1남 2녀 세 자식을 위해 헌신하셨죠. 그중에서도 아들인 제게 몰두하셨어요. 그래서 저에게 어머니는 늘 애틋하고 각별한 존재죠. 이렇게 다시 회고하니 늘 혼자였던 어머니 모습에 목이 멥니다.”
조창화 대한언론인회 고문은 어머니 박신행(朴信行) 씨와 함께 찍은 사진 한 장이 없다며 가슴 아파했다. 어머니와 가족의 삶을 풀어내는 그의 목소리에는 그리움과 아쉬움이 보태졌다.
그는 자신이 일곱살이었을 때의 어머니를 떠올렸다. 어머니 나이 마흔을 훌쩍 넘어 낳은 아들이었던 그는 1945년 초, 어머니의 손에 끌려 서른 시간이 넘는 기차 여행 끝에 평안남도 평원군 한천이라는 작은 포구에 닿았다. 그곳은 어머니의 고향이었다. “그 좋은 재산 다 놔두고 몸만 나왔으니 어떻게 하나”라는 어머니의 푸념이 그칠 날이 없었다. 그는 그곳에서 한천소학교(지금의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일제 치하였던지라 다마고(계란) 잇고(1개), 니고(2개)를 먼저 배워야 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오면 일본 학교를 다니다 온 두 누이로부터 개인 교습을 받곤 했다.
해방이 된 그 해 8월 하순의 어느 날, 그는 아버지 조이선(趙利善) 씨와 함께 100여 리 떨어진 평양에 간 적이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광장으로 갔는데 연단에서 키 큰 남자 한 명이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고 있었다. 아버지가 “저 사람이 바로 김일성이다”라고 했다. 마치 불길한 전조 같은 기억이었다.
함경도로, 서울로, 그리고 부산으로
소학교 1학년이 끝날 무렵 그의 가족은 트럭에 이삿짐을 싣고 함경남도 신고산이란 곳으로 이사를 했다. 그곳에 땅과 과수원, 광산 등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신고산 인민학교 2학년에 편입했다. 아침마다 소년단 행진곡을 부르며 대열을 갖추어 등교할 때는 신바람이 났다. 그러나 역사의 비극이 그에게 드리우기 시작했다.
어느 날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상한 사람들에게 끌려 나가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며칠 후 아버지와 어머니가 안변 감옥에 갇혀 있다는 전갈이 왔다. 죄목은 ‘유산 계급’. 공산당의 ‘숙청’ 작업이 시작된 것이었다. 이 사건이 있고 나서 소년 조창화는 학급 위원 자리에서 내쫓기고 친구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게 됐다. 부당한 처사들 속에서 학교에 나가는 둥 마는 둥 집에서 지내야 했던 그에게 아버지 소식을 갖고 왔다는 한 남자가 “어머니, 아버지는 안변 감옥을 탈출해 이미 월남을 했고, 나는 너희 3남매를 남쪽으로 데려가기 위해 왔다”면서 아버지의 편지를 내밀었다.
3남매는 1948년 8월의 어느 날, 부모님을 만나기 위한 2박 3일 동안의 월남 행군을 시작했다. 행군은 주로 밤에 이루어졌다. 고생 끝에 도착한 동두천에서 오랜만에 부모님을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서울에서 아버지의 권유로 공옥소학교라는 사립학교 4학년에 편입했다. 남대문시장 근처, 지금의 상동교회 뒤에 자리 잡은 이 학교는 1학년부터 6학년까지 한 반씩밖에 없는,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소학교였다. 고된 경험 끝에 부모님과 함께하게 됐다는 것에서 그는 겨우 안도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가혹한 운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한국전쟁이 시작된 지 2주 남짓 지났을 시점인 1950년 7월 13일, 그의 나이 12세 때 갑작스럽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서울이 온통 인민군으로 뒤덮인 날, 그는 아버지를 모신 영구차에 탄 채 무악재를 넘어 꾸역꾸역 밀려오는 인민군을 헤치고 홍제동으로 향했다. 묘지였던 그곳에서 5일장으로 장사를 치렀다. 그리고 그 후 석 달 동안 방공호에서 살아야 했다.
얼마나 지난 다음일까? 어느 날 국군이 서울로 들어왔고, 그해 12월 하순에 그의 가족들은 다시 짐을 꾸려 부산으로 가는 피난 열차를 탔다. 무려 6일 동안의 거북걸음 끝에 부산역에 도착한 것이 12월 26일 즈음, 어머니와 2녀 1남의 3남매는 사고무친(四顧無親)한 부산역 한 귀퉁이에서 고달픈 피난살이를 시작했다.
홀어머니 슬픔 헤아리지 못한 불효자
“그때 어머니는 겨울 털모자를 팔고, 그 돈으로 쌀을 사고…. 그런데 뭔가를 팔려고 해도 살 사람은 별로 없고…. 그 와중에 아버지를 잃은 어머니의 슬픔이나 아버지의 빈자리를 제가 헤아려 본 적이 있는가 하면…. 그런 기억들 때문에 영화를 보면서 엄청 울 수밖에 없었죠.”
부산에서 학교를 다닌다는 건 상상조차 못했다. 학교가 어디에 붙어 있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동네 아이들과 사귀던 그는 미군 부대에 들어가 미군의 구두를 닦아주는 ‘슈샤인 보이’를 하면 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요즘의 우리들은 꽁트에서나 볼 수 있는 ‘기브 미 쪼꼬렛’이라는 어설픈 영어 뒤에 숨어 있는 건 시대가 만들어낸 고통이고 절박한 생존의 기술이었다. 조 고문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가 ‘슈샤인 보이’를 하고 다닌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어머니는 “이대로 뒀다가는 애가 큰일나겠다” 싶었다. 더군다나 애지중지 키운 집안의 단 하나뿐인 아들이었다. 어머니가 그를 미군 부대 대신 데려간 곳은 문래동 대선소주공장의 한 귀퉁이였다. 그곳은 미국인들에게 학교를 빼앗긴 성남초등학교 6학년 학생들이 노천 수업을 받는 곳이었다. 이리하여 그의 인생에서 네 번째 초등학교가 시작된다. 졸업이 예정된 6학년 말까지는 한 달 정도 남았을 뿐이었고 다른 아이들은 연합고사를 준비한다고 야단법석인 가운데 그는 친구들의 노트와 책을 빌려 보기에 바빴다. 비록 졸업식에는 참석하지 못했으나 달포 뒤에 성남초등학교 졸업증명서를 받을 수 있었다. 이로써 초등학교 4개를 거친 그의 남행만리(南行萬里)는 부산을 마지막으로 종지부를 찍었다.
“의대에 안 가 죄송합니다”
1953년, 이제 여드름꽃이 피는 나이가 되는 조 고문은 전쟁이 끝나고 서울로 돌아가는 대열에 끼여 서울에 올라왔다. 서울고등학교 3학년으로 입학한 그는 당장 다가온 대학 입시 준비로 24시간이 모자랐다.
“제가 있던 3학년 4반 담임인 육인수(故육영수 여사의 오라버니) 선생님을 만난 어머니는 ‘창화는 무조건 서울대학교 의대에 가야 하니까 그리 지도해 달라’고 신신당부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의과가 싫어 정치학과에 서류를 제출했고 어머니와 육 선생은 제가 당연히 의대에 넣은 것으로 알고 있었죠.”
서울대 정치학과에 합격한 그는 마치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강원도, 서울 등지의 대표 준재들이 모인 형세를 이루는 정치학과 내에 함경도 대표로 자리 잡았다. 1961년에 대학교를 졸업한 뒤에 대한일보 기자로 들어가 국회, 청와대 출입을 시작했다. 1973년, KBS 정치부 차장으로 이직하면서 언론인으로서의 그의 삶은 보다 탄탄해진다.
“제가 KBS 부산방송 총국장이었던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 나이 53세일 때 아버지와 사별하고, 이후 35년이란 세월을 우리 남매 세 명을 위해 개가하지 않고 홀로 살다가 88세에 세상을 떠나셨죠. 어머니는 아버지와 삶을 같이한 시간보다 홀로 산 시간이 더 길었습니다.”
그는 어머니를 카리스마 있는 여장부로 기억했다. 그의 기억 속의 어머니는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라면 막일도 거르지 않았고 늘 당당했다. 나이 들어 출석하는 노인회관에서는 화투도 잘 치고 보스 노릇도 곧잘 했다. 그는 어머니를 인정이 많고 시대를 앞서 갔다고 평했다. 지고는 못사는 성격에 일본어와 중국어도 유창했던 것도 어머니다운 점이었다.
어머니 묘지에 대동강 모래를 뿌리다
어머니가 그리울 때는 언제일까.
“다들 비슷하겠지만, 어머니가 보고 싶을 때는 어려울 때, 힘들 때죠. 어머니는 언제나 제 편이셨으니까요. 어떤 일이 있어도, 영원한 제 편이니까요.”
어머니가 그를 바라보는 시선이 어땠을지는 미뤄 짐작이 간다. 어머니는 그에게 무한한 사랑을 아낌없이 베풀었다. 하지만 그 사랑에 그는 변변하게 보답 못한 것 같아 가슴이 아프다.
“저는 어머니의 임종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날 집에서 전화가 왔는데, 태풍 때문에 비행기가 못 뜨더군요. 그래서 비행기로 못 움직이고, 새마을호를 겨우 타서 6시간 걸려서 집에 도착했죠. 그날 아침에 어머니가 ‘애비는 어디 있냐’고 물으시며 ‘화장실에 좀 가자, 씻고 싶다’고 하셨답니다. 가시면서 저를 찾았던 것 같습니다.”
어머니는 당신의 삶을 묵묵히 보여준 것뿐이지만, 그 모습 자체가 그에게는 80세가 다 된 지금까지 ‘정신적 울림’으로 남아 있었다.
“청와대 출입 시절 잊지 못할 일이 한 가지 있지요. 1972년 평양에서 열린 남북적십자회담 취재단으로 들어가 대동강을 산보하고 그 강변에서 모래를 채취할 수 있는 큰 행운을 얻었어요. 그래서 1985년에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어머니의 고향 대동강의 모래를 뿌려드릴 수 있었죠.”
여기까지 말한 그는 갑자기 목이 메어왔다. 아버지 묘가 없어진 기억이 나서다.
“사실 아버지 묘지를 잃어버렸어요. 부산 피난살이에서 돌아와보니까 홍제동의 묘지 자리를 불도저로 확 밀어버렸더군요. 그래서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 아버지 영정만 가지고 합장을 했습니다. 그런데 안 되겠다 싶어서 다시 어머니 유골을 파서 화장을 했어요. 그리고 용인공원묘지에 가로 60cm, 세로 40cm 사이즈의 와합, 즉 눕히는 비석으로 바꿨어요.”
비석에는 배천(白川) 조 씨 가족묘라고 쓰여 있고 뒤에는 사용 수칙을 적었다. ‘여기는 배천 조씨 묘지다, 화장을 해서 묻는다, 직계비속들은 만약 꽉 차면 맨 위부터 그대로 파서 거기에 다시 사용해라.’ 용인공원묘지가 상당히 큰데 그렇게 한 건 그가 처음이다.
“한 40구는 들어갈 것 같아요. 내가 죽고, 한 5대까지는 걱정하지 않을 것 같네요.(웃음)”
그는 어렵게 묘지개혁을 했다며 어머니 같은 여장부라면 좋아하실 일이라고 평했다.
그가 요즘 즐겨 말하는 ‘첫째는 남한테 피해 주지 말자이고, 둘째는 정리정돈’이란 말 또한 어머니에게서 배운 습관이다.
“요즘 이제 일곱살인 우리 손녀에게 할아버지가 뭐라 말했냐고 집적대면 ‘남 폐 끼치지 마라, 정리정돈이요’하고 냉큼 대답하죠. 그 재미에 삽니다.”
조 고문은 인터뷰 내내 진중하고 묵직하게 어머니 이야기를 하다 손녀 얘기가 나오자 금방 함박 미소를 지었다. 어머니를 향한 추모의 정은 이제 유일한 손녀에 대한 짝사랑이 되어 삶을 비춰주고 있었다. 그에게 손녀는 그의 어머니가 주신 축복의 선물이 아니었을까.
소한(小寒)인 1월 6일 한국투자증권 광명 지점 객장에서 만난 임용목(林容睦) 할아버지는 이미 객장 유명인사였다.
광명 지점장은 “처음 봤을 때 70세쯤 되신 줄 알았다. 늘 욕심이 없으신 편이고 잘 웃고 즐기신다”라고 말했다. 잠깐,70세쯤으로 보였다는 말이 이상하다. 임용목 할아버지에게 태어난 해를 물어보니 1909년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굴곡진 현대사를 몸소 겪으며 한 세기를 살아온 것이다. 그렇다면 2015년인 올해로 106세!직접 객장까지 와서 주식 투자를 즐기는 106세 할아버지라니, 믿기는가? 그러나 그저 100세가 넘은 나이를 지탱하느라 애쓰는 수준이 아닌, 누구보다 즐겁게 사는 모습을 실제로 확인하니 의심은 경탄으로 바뀌지 않을 수 없었다.
100세 시대를 맞이하는 우리가 배워야 할 임용목 할아버지의 특별한 장생(長生) 라이프 .
글 김영순 기자 kys0701@etoday.co.kr 사진 이태인기자 teinny@etoday.co.kr
임용목 할아버지는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았다. 여느 때처럼 일기예보가 빗나가서 따뜻하리라는 예상을 깨고 유난히 매서운 한파가 계속되는 올해 겨울 추위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뚜벅뚜벅 계단으로 걸어 내려와 식당으로 들어섰다. 여전히 믿기 힘들었다. 이분이 한 세기를 자신의 나이로 채우고 올해로 106세를 맞이했다니. 굳이 비유하자면 한 사람이 태어나 나이가 들어 직장에서 은퇴를 하고, 다시 태어나서 또 한 번 은퇴를 맞이하는 걸 준비하고 있어야 맞먹을 수 있는 나이다. 세계 최고령 남성으로 기네스북에 오른 이가 올해 112세. 임 할아버지와는 불과 6세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한 세기를 넘기고도 앞으로의 삶이 더욱 기대된다는 임 할아버지는 85세의 친구와 얘기하느라 객장에서도 활기가 넘친다.
“26년 전 45만 원으로 시작한 주식 놀이야. 아직도 꾸준히 즐기면서 하고 있는 중이지. 욕심을 부렸으면 예전에 사단 났을 거여, 내가 죽든가 돈이 떨어져 우울하게 살고 있겄지.”
임 할아버지가 놀라운 점은 나이뿐만이 아니라 그 나이에도 여전히 펄펄하게 일상을 즐기며 살고 있다는 점이다. 귀가 다소 안 들리는 듯했지만 그래서인지 더욱 더 목소리에 깃든 힘이 뜨거웠고, 그런 기질은 30년은 어린 70대로 보이는 외모로 이어지는 듯했다.
“한 세기를 넘겼지만 앞으로의 삶이 더욱 기대돼요.”
어렸을 때부터 남달랐던 배움의 욕구
경기도 이천 장호원에 자리한 유난히 가난했던 집에서 태어난 임 할아버지는 돈이 없어서 초등학교 6년을 교장 선생님을 도와 학교 정비를 하는 대신 학비를 면제 받으며 다녀야 했다. 첫 직장은 일제가 운영하던 한국산업은행이었다. 그곳에서 말단 직원으로 일을 시작한 그는 15년 근속했지만 결국 해고된다. 일하던 15년 동안 월급으로 사서 읽은 6000권의 책으로 인해 민족의식이 강해진 그가 조선의 열등함을 비난하던 은행장과 부딪친 결과였다. 일자리는 잃었지만 배우고 싶다는 욕구는 더 커져 있었다. 그는 일본으로 가서 공부를 계속하고 싶었지만 직장에서 안 좋게 끝나는 바람에 일본 입국이 가능할지가 불확실했다. 그러나 천운이 따른 덕분에 그는 일본에서 당시 유일한 종합대학교였던 일본대학교의 상과에 입학할 수 있었다.
하지만 행운이 계속되지는 않았다. 임 할아버지는 도저히 피할 수 없었던 학도병 모집에 붙들려서 결국 중국으로 끌려가게 된다. 중국에서 갖은 고생을 겪다가 마침내 해방을 맞이하게 됐고 1946년 6월에 귀국하게 됐을 때 그의 나이는 37세, 어느새 30대 후반에 접어들고 있었다. 이 시기에 그는 평생 베필을 만나게 됐다. 아내와는 결혼 이후 63년을 함께 했다. 결혼할 때 임 할아버지보다 17살 연하였던 20살의 아내는 어느새 그와 비슷한 모습을 가진 나이가 됐다. 그러나 그녀는 그의 극진한 간호에도 불구하고 7년 전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현재 임 할아버지가 다니는 밀알교회는 아내가 생전에 권사로서 설립한 교회다.
불혹의 나이에 고려대 1회 졸업생
“귀국하여 보성전문학교가 민족학교의 기치를 걸고 고려대학교가 되어 2학년 학생을 모집한다는 걸 보게 됐어요. 그래서 시험을 치르고 입학하게 됐죠. 1949년에 졸업하게 됐지. 1회 졸업생이었어요.”
청량리에서 영등포까지 걸어서 왕복 두 번 씩 의류배달을 해야 하기에 학교도 갈 수 없었다. 졸업하기까지 동기들이 출석을 해주고 해서 간신히 졸업할 수 있었다. 졸업했을 때가 이미 불혹의 나이인 40세였다. 결혼도 하고 학업도 이루고 나이도 찼으니 안정적인 중년을 맞이할 때였다. 그러나 시대 자체가 안정과는 거리가 멀었다. 졸업 후 이듬해 한국전쟁이 터져, 그는 피란을 떠나야 했다.
현재 동대문디자인플라자가 있는 자리는 동대문운동장이 있었던 자리였고, 동대문운동장은 임 할아버지가 가게를 운영할 때는 서울운동장이라고 불렸었다. 임 할아버지는 피난에서 돌아와 서울운동장 밑에 제일체육사라는 가게를 차려 이후 30년을 운영했다. 그러나 70세가 되던 해에 건물에 불이 나서 물건이 모두 불탔고 그걸 갚기 위해 가게를 정리해야 했다. 그는 서울에서 밀려나서 광명시에 정착해야 했다.
“광명시에 와서는 약간의 돈으로 장사를 좀 하다가, 지금은 5남매인 자식들이 생활비랑 이것, 저것하면 한 달에 한 90만 원 정도 받네. 생활하고 남는 돈은 객장 손님들에게 커피를 주거나 공원에 가서 노인들이나 아이들에게 사탕을 주고 있어요. 내가 광명의 사탕할아버지로도 유명해요(웃음).”
욕심이 없기에 건강하다
임 할아버지의 집안은 장수 집안이기도 했다. 어머니는 비록 아편을 하고 자다가 요절했지만 아버지는 그 시절에 85세까지 살았다. 하지만 장수와는 별개로 임 할아버지의 건강은 나이에 비해 이상적이다. 그는 아침에 혈압약, 저녁에 전립선약을 먹고 감기약을 타기 위해 병원을 가는 정도로 자신을 관리하고 있었다. 임플란트, 틀니 치료 안 하고도 치아가 여전히 튼튼했다. 음식도 가리는 것 없이 잘 드셨으며 함께 식사를 하면서 밥알 한 톨도 남김없이 한 그릇이 사라지는 걸 볼 수 있었다. 그의 건강함을 증명하는 지표는 인터뷰 내내 볼 수 있었다. 그런 활기는 삶에 대한 긍정적 인식이 바탕하고 있어서 가능한 부분처럼 보였다.
“욕심이 없다.” 임 할아버지는 자신이 겪은 여러 가지 고난 속에서도 지금까지 긍정적으로 살 수 있는 이유를 욕심이 없다는 것에서 찾았다. 살펴보면 그의 삶에는 욕심보다는 배움이 더 크게 작용하는 것 같다. 독학으로 배우고 익혀 일본으로 갔던 일, 불혹의 나이에 대학교를 졸업한 일, 새벽 3시에 일어나 10시에 객장에 나와 주식 투자를 하는 모습 등등은 배움에 대한 본능적인 욕심이 없으면 설명하기가 불가능하다. 심지어 젊은 시절의 그는 시를 쓴 적도 있었다. 당시 임성산이라는 필명을 썼던 그는 아직 무명이던 박목월, 서정주 시인들과 함께 문예지에 글이 실린 적도 있다고 했다. 대표로 뽑혀 학도병 수기를 쓰기도 했다. 그리고 교우회가 교우들에게 제공하는 월례강좌에서도 꾸준히 30년동안 개근했다. 물론 지하철에서도 다른 노인들을 위해 자리를 양보하는 임 할아버지는 거기서도 많은 사람들이 나이가 70대가 아니냐고 물었었다고.
100여 년의 인생, 잃지 않고 살았다
“살아오면서 못 해서 아쉬운 건 하나도 없어요. 난 그리 가진 게 많지 않은데도 내가 부자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는 주식 투자를 시작한 이후로 돈을 잃어본 적이 없다고 했다. 물론 처음 투자한 45만 원이라는 돈이 확 불어나지도 않았지만, 잃지도 않고 투자를 즐길 수 있는 수준. 임 할아버지는 그걸 하나님 덕분으로 돌렸다. 자신의 마음이 평화롭다 보니 하나님이 그 돈을 그대로 쓰라고 놔두고 있다는 것이다. 106세가 되었음에도 꾸준하게 가지고 있는 긍정의 정신은 천성이기도, 그동안의 삶을 통해 단련된 것이기도 했다.
“희망을 갖고 인생은 영원히 빛나게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았기에 이렇게 살 수 있었다고 봐요. 그래서 마음을 바르게 가지고 올바르게 사는 것, 그리고 목표를 가지고 사는 게 중요해요.”
임 할아버지는 “진실로 열정을 다해 미련없이 살아왔다”며 “미련없이 살아야만 버리는 것도, 내려 놓는 것도 순수해질 수 있다”고 마무리 지었다.
1955년생이 모두 1300여 명, 체육대회를 열면 500~600여 명의 인원이 모이는 매머드급
모임이 있다. 그것도 지역 모임이 그렇다고 하면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바로 고양시에 자리한 고양 을미회가 그 주인공. 고양시 1955년생들의 추억과 즐거움을 위해 만들어진 고양 을미회는 올해로 22년째를 맞으며 단순한 친목 모임을 넘어선 아름다운 동행의 길을 모색하고 있었다. 고양 을미회가 말하는 모습, 그리고 미래를 위한 준비를 들어본다.
1992년에 결성된 고양 을미회는 올해로 22년째 운영되고 있는 고양시 토박이들의 탄탄한 지역 모임이다. 아니, 이미 단순한 지역 모임의 의미를 넘어서 어떤 롤모델이 되어가고 있는 모양새다. 고양 을미회의 시작은 고양시 안의 네 개 초등학교 동창생들이 모여서 출발했지만 현재는 열 개 초등학교의 동창생들이 모인 커다란 커뮤니티로 진화했다. 열 개의 초등학교는 능곡(37회)·대화(16회)·백마(16회)·벽제(20회)·삼송(8회)·성석(20회)·송포(31회)·신도(38회)·일산(41회)·행주(19회)로, 회원들은 모두 1955년생이다.
초등학교 그 시절 체육대회를 맛보다
가장 큰 행사는 연 1회 열리는 체육대회다. 500~600여 명에 달하는 을미회 소속 인원이 한자리에 모여서 이뤄지는 이 체육대회는 매년 꾸준히 열리면서 을미회 사람들을 모으고 서로의 친목을 다지는 대규모 연례 행사다. 인원이 인원인 만큼 공원 축구장 등의 넉넉한 공간을 빌려 진행되는 체육축전은 군악대의 지원을 받기도 하고 다른 큰 규모의 모임들과 친선 축구대회도 갖는 등 소박한 수준을 넘어서 지역 축제의 성격까지 갖게 됐다. 이 자리에서 1955년생 동갑들은 서로의 이름을 편하게 부르며 즐거운 장난을 치기도 한다. 마치 초등학교 그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어려운 시절, 끈끈한 인연이 삶의 즐거움이었다
고양 을미회 사람들이 기억하는 어렸을 때의 고양시는 아직 신도시와 콘트리트가 없었던 논
밭의 농촌 풍경이다. 전방이라는 척박한 땅에 만들어진 논과 밭의 마을. 물가에서 고기를 잡아 먹으며 지내던 시절이었기에 그들이 갖고 있는 추억에는 생활의 어려움과 어려움을 극복 하기 위해 서로를 도우면서 생겨난 끈끈한 친분에 관한 기억들이 담겨 있었다.
“1968년 졸업한 우리들은 중학교에 진학하려면 시험을 치러야 하는 마지막 세대죠. 그때 우리가 갈 수 있는 고양시 안의 중학교는 세 개밖에 없었어. 학교가 적다 보니 입학 시험도 치열할 수밖에 없었고 서로 부대낄 수밖에 없었지.”
고양 을미회 이강식 회장은 을미회 회원들의 우정은 결코 하루아침에 이뤄진 것이 아니라 해를 거듭하면서 차곡차곡 쌓아진 것이라고 자부했다. 고양을미회는 슬픈 일에 같이 슬퍼하고, 기쁜 일에 같이 기뻐하자는 게 그들의 ‘교훈(校訓)’이었다. 마치 ‘다정다감(多情多感)’이 병인양했다. 대한민국에서 이런 지역모임 있으면 나와보라는 듯이, 을미회를 위한 행사라면 ‘열성 그 자체’였다.
사람노릇 잘하자는 것이 모임의 큰 이유
이렇게 잘 뭉친 데는 무엇보다 을미초등학교(?) 출신 덕이 크다. 그만큼 모교 초등학교 제쳐두고 을미회를 위한 일이라면 이해타산을 할 게 없이 열성이다. 한국 사람들은 50만 넘으면 그동안 쳐다보지도 않던 족보를 찾는다고 한다. 연어가 어머니의 강(母川)을 찾아 회귀하는 것처럼 고향에 대한 향수를 조금씩 느낄 나이가 된 것이다. 38세에 만나 이들은 이제껏 대처생활을 하면서 표준말을 쓰려고 노력했지만, 이들이 만난 자리에는 수 십년 만에 들어보는, 잊고 있던 사투리와 방언(탯말)이 춤을 춘다. 담방구, 공기, 공치기, 장정놀이, 대장놀이, 자치기…. 기억나는 어린 시절의 몇 안 되는 놀이들은 1955년생들의 추억을 되새기게 만드는 열쇠들이다. 그리고 털내기. 고양시의 명물 음식인 털내기는 미꾸라지와 국수를 넣고 끓여낸 매운탕이다. 가난한 시대가 만든 음식이기도 한 털내기는 고양 을미회 사람들의 기억 속에는 미꾸라지 말고도 온갖 잡어들을 다 넣어서 끓이고 국수로 양을 불린 음식이었다. 옆 집에서 가꾸는 밭에서 몰래 가져온 깻잎을 털내기에 넣어 먹던 맛은 그들의 어린 시절에만 누릴 수 있었던 특권이기도 했다.
이명옥 봉사분과장은 “초창기 을미회 모임 때는 몇 가지 소싯적 추억이 전부라 할 만큼 화제도 궁해 만나면 그저 술잔만 주고받다 자칫하면 말싸움이 나고 감정을 사기도 했다“고 말했다. 옆에 있던 김복순 산행분과장이 “하지만 우리들은 돈 있고 없고 떠나, 고만고만한 친구들끼리 고만고만한 곳에서 모여 고만고만한 삶을 나누며 예의 좀 알아서 사람노릇 잘하자는 것이 모임의 큰 이유”라 자신했다.
“누가 손가락질하는 사람 없고 추억 쌓기 호사를 누리는 이 을미회원들은 속칭 ‘겡우(표준말은 경우나 경위)’를 잘 안다는 것이죠.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 지나치면 모자람만 못하다는 것, 자기 분수를 잘 알고 지킨다는 것이죠. 우정(友情)이라는 이름으로 친구들의 트라우마를 잘 감싸줍니다.”
이강식 회장은 이렇게 자부심이 깔린 고양 을미회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고, 서로서로 존중해준다는 그자체가 뿌듯하고 감사할 뿐이라고 했다.
‘겡우’를 잘 아는 1955년생들이 모였다
이처럼 고양 을미회 정도로 많은 동갑 친구들이 단합되는 단체는 드물다. ‘이정도 규모는 ’처음’이란 말도 어렵지 않게 듣는 고양 을미회 회원들에게 자연스러운 자부심이 되고 있었다. 고양 을미회의 성공에 힘입어 파주에서도 을미회를 벤치마킹한 단체를 만들었다, 고양시 내에선 고양 을미회의 후배들이 같은 기수들끼리 단체를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조직력
면에선 아직 어느 단체도 고양 을미회를 못 따라오고 있다. 고양 을미회는 체육대회뿐만 아니라 여름에는 단체 야유회를 가며 매월 봉사활동을 갖고 있다. 봉사활동은 노인요양 시설, 장애인 시설 등에서 수행하고 있으며 장학 사업도 시작한 상태다. 이미 단순 친목 모임을 넘어선 자리로 나아가고 있는 중인 것이다.
이강식 회장은 “60세가 된 우리들끼리 만나면 손자들 얘기를 많이 합니다. 그리고 개인 사업에 대한 얘기도요. 일하는 사람들이 아직 많거든요. 그래서 우리 친구들이 노후에 모여서 가족과 일에 대해 얘기할 수 있는 공간, 우리들만의 보금자리를 만드는 일에 요즘 관심이 커요”라고 말했다.
또한 내년에 고양을미회 단체로 회원들의 환갑을 근사하게 치를 계획도 세우고 있다.
모두가 모일 수 있는 ‘공간’ 필요
거대해진 고양 을미회에서 고민하고 있는 건 미래를 위해서 ‘공간’의 확보가 중요하다고 성연배 사무국장이 덧붙였다.
“회원들이 모일 수 있는 고정된 공간이 생긴다면 종합적인 정책이 가능할 겁니다. 이익 창출뿐만 아니라 공동구매 같은 수단을 통해 저렴한 생필품을 제공할 수도 있겠구요. 회원들의 건강을 관리하는 것도 보다 용이해질 것으로 보입니다. 봉사활동을 봐도 기존 봉사활동들이 외부의 기관이나 이슈에 참가하는 식이었다면 앞으로의 봉사활동은 을미회 내부에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위해 이뤄져야 할 테니까요. 우리 나이가 나이인 만큼.”
고양 을미회는 이미 고양시 내에 있는 종합병원 다수와 협약을 맺고 회원들에게 의료 편의를 제공해주고자 논의 중에 있었다. 이제 고양 을미회는 미래를 위한 계획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유형렬 기획분과장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돌볼 수 있는 방법을 궁리하고 있습니다. 인원이 많으니까 그 인원 안에 서로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이 많을 거예요. 중요한 건 구슬이 서말이어도 꿰어야 보배란 겁니다. 지금 시점이 중요해요. 우리 내부에서 우리의 미래를 위한 각자의 역할 분배가 필요할 거라고 봅니다”고 당차게 말했다.
우리 같은 모임은 또 없을 것
“그런데 사실 초창기에는 우리가 미래에 대해 할 얘기 자체도 별로 없었어요. 어, 우리 술 마시러 모였습니다! 아니면 장어 먹고 싶어서요! 그런 식이었지(웃음).”
이 회장의 말대로 정말로 재미있고 즐기기 위해서 모였기 때문에, 고양 을미회 초창기 멤버들은 을미회가 오래 가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후로 20여 년이 지났고, 이제는 모임의 비전을 얘기할 수 있는 수준까지 고양 을미회는 진화했다. 그 모습은 보는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뿌듯함을 안겨준다. 우리네 삶이 그리 척박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그리고 세월이 흘러도 멈추지 않고 발전하려는 긍정적 의지를 새삼 확인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고양 을미회원들은 우정의 금자탑을 앞으로도 30∼40년 차곡차곡 쌓아갈 생각에 부풀어 있었다. 더불어 1955년의 신념과 가치가 말갛게 무르익어가리라는 바람을 가져보자.
7월 1일에 전국적으로 시행된 기초연금제도 피해자 사연을 모 신문에서 사진과 함께 보고 읽었다.
정책을 시행 할 때 온갖 홍보를 다하여 모든 노인들에게 고루 혜택이 돌아가 지금 보다 더 나은 노후의 삶을 보낼 수 있다고 했는데 막상 시행되고 보니 오히려 복지 혜택이 줄어들어 더 고생하시는 노인들이 우리 주변에 적지 않는 실상 보면서 우리 시대의 가장 슬픈 자화상을 보고 있다.
그 당시 이런 문제 발생 가능성이 자주 언급되었지만 실제로 이런 사례가 발생되고 있는 현실인가 보다.
기초생활수급액 보다 무려 일십만원 적게 지급되는 복지 기초연금을 어떻게 보고 해석을 해야 할까?
기초연금의 그늘이 없는 복지 제도를 촉구한다. 지금의 경제 번영의 주인공들께서 경제 성장에 기여 한 만큼 혜택을 받지 못하는 우리 시대의 아픔을 더 이상 보지 않게 해 주었으면 좋겠다.
언론보도와 같이 서울시내 자치구들에 이어, 전국 226개 시군구등이 불어난 복지 예산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 특단의 대책이 마련되지 않으면, '디폴트', 지급불능 선언을 할 수 밖에 없다는 현실을 반증하고 있다.
그렇다면 지방의 재정부담은 얼마나 늘어났고 무거워진 세수입에 따른 현실은 어떤가?
지자체 전체로는 23.1%를 부담하는데 올해 당장 1조 천억 원의 부담이 커졌고, 2017년까지 5조
7천억 원의 부담을 더 안게됨과 동시에 지자체의 기초연금 재정 부담은 재정자립도에 따라 최소 10%에서 최대 60%까지 충당해야 한다.
더우기 무상보육 때문에 가뜩이나 무거워진 부담에 불어난 연금까지 감당할 수 없다는 볼멘소리도 나오는 것도 틀린 얘기는 아니다.
지방재정 역시 수입은 줄고 지출은 2조 가까이 늘어났기 때문에 현재 상황으로는 자치구가 더 이상 버틸 수가 없는 상황이며 그렇다고 해서 마구마구 주차위반 등 스티커를 남발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지자체 예산부족으로 과거 기초노령연금을 주지 못한 적은 없다.
하지만 늘어난 복지예산의 책임을 놓고 나라와 지자체가 핑퐁게임을 하다, 기초연금 지급이 차질을 빚는 초유의 일이 생길 수도 있다는 우려가 점점 커지고 있다.
정부의 부자 감세 정책으로 기업 국내 투자가 활성화되고 부자들이 국내에서 과감한 소비를 해 주어야 하는데 현실은 정반대로 가고 있다. 정부의 정책 전환으로 부자 감세를 줄여 복지에 투자를 해야 한다. 복지에 투자 하면 일자리 창출이 잘 되고 국민들의 삶의 질이 향상되어 질 것이다.
올해 정부는 폐지 수집업자들에게 매기는 세금을 올려 폐지를 줍는 어르신들의 수입이 감소되고 있고 공원의 박카스 어르신들의 삶은 외면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중앙정부의 무관심으로 고통을 다하는 삶을 지방정부에서 세세하게 살피는 노력들이 절실히 요구된다.
지역 주민들을 위해서 머슴을 자처하고 당선된 지자체 장의 관심이 확대되었으면 한다.
△OCJP 국제공인자격 △RABQSA ISO9001 △27001 국제 심사원 △KBS n 리포터△정부3.0 맞춤형서비스 △생활공감정책모니터 용인시 대표 △서울시 인터넷시민감시단 △한국소비자포험 화이트슈머 △금융감독원소비자리포터('금소리') △한국가스안전공사 경영공시모니터 △분수네신문사 칼럼리스트 △직업 특강 & 컨설턴트 △IT 및 보안전문가
‘국가나 지자체의 정책 입안자들이나 사회복지 연구자들은 노인을 인구통계학적 인식 대상으로 본다. 성별로 나누고 소득수준으로 가르며 돌보미 유무를 파악해, 어떤 대상을 어느 정도의 복지 수준으로 대할 것인지를 결정한다. 그래서 노인은 언제나 보이는 대상으로 물성화될 뿐, 주체성을 지닌 인간으로 대접을 받아 본 적이 없다.’ 오근재 전 홍익대 교수(현 연세대 특별초빙교수)의 저서 ‘퇴적공간’의 일부다. 그는 우리 사회 노인들을 ‘시대의 강물에 떠밀려 잉여의 존재로 퇴적공간에 쌓여 있다’고 표현했다. 한때는 사회의 주역으로, 자랑스러운 아버지였던 그들이 이제는 ‘잉여’로 전락해 버린 이유는 무엇일까. 계속 ‘잉여’로 남아있을 수 밖에는 없는 것인가. 전문가들의 견해와 조언을 들어봤다.
글 한국노인상담연구소 김은주 소장
어느 시군이나 노인들이 모여드는 대표적인 공원이 있다. 종로 탑골공원, 청주 중앙공원, 인천 자유공원, 안산 화랑유원지, 수원 장안공원 등엔 특히 건강한 남자 노인들이 모여든다.
우리나라 노인복지법 제36조에 의해, 노인여가복지시설로 노인복지관, 경로당, 노인교실 등이 운영되고 있다. 저소득이거나 건강문제를 가지고 있는 노인들을 위한 서비스 외에 건강한 노인을 위한 여가시설인 노인복지관이 없는 일본이나 동네마다 하나씩 있는 경로당에 대해서 경외롭다고 외치는 다른 선진국과 비교해 놀라울 만큼 건강한 노인들을 위한 많은 여가시설을 설치․운영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여전히 소외되고 있는 노인들이 공원에 모여든다는 것은 아이러니할 수밖에 없다.
우선, 아무리 많은 여가시설을 설치해도 현재 노인들의 다양한 욕구를 다 수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나라 사회에서 노인들이 갈 곳이 없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 사회에서 노인들은 철저하게 소외된다. 젊은이들과 섞이는 것 자체를 노인들도 또 젊은이들도 원치 않는다. 마치 장애인들과 섞이는 것을 장애인들도 비장애인들도 서로 원치 않는 것처럼. 우리는 현재 우리와 다르다고 생각하는 계층을 배척하는 경향이 있다. 작은 지역사회 중심으로 마을 공동체 안에서 다른 이들이 서로를 인정하며 서로에게 배우고 도우며 함께 살아가는 법을 순식간에 잊어가고 있는 듯하다.
만 65세 이상으로 구분하여 서비스 제공의 자격을 구분하는 법과 제도가 많을수록 우리는 노인을 우리와는 다른 계층으로 분리시키게 된다. 노인복지법이 노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공경과 특별대우를 제도화 할수록 더욱 그렇다. 아무리 지원제도가 좋아져도, 사회에서 소외되는 사람들은 행복할 수가 없다. 외국에서는 ‘노인’이라는 기준과 용어를 없애고 ‘senior citizen(선임시민)’으로 시민으로서의 공통성을 강조하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구분된 노인이 아닌 통합된 시민으로서 자연스럽게 마을주민들, 젊은이들, 아이들과 어울려 살 수 있도록 배려하고 이를 활성화 할 제도가 필요하다. 마을 단위에서 노인들의 긍정적인 역할을 지원하고, 지역사회 안에서 노인이 자연스럽게 어울려 다함께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법과 정책이 필요한 시점이다.
노인은 다른 계층이 아니라, 미래에 다가올 우리자신의 모습이다. 노인이 행복해야 우리의 내일이 행복하다. 행복한 미래를 꿈꾸는 사람이라면, 지금 노인이 행복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덧붙여, 현재 운영되고 있는 여가복지시설들이 지나치게 일원화된 서비스를 일방적으로 제공하는 것도 문제일 수 있다. 사회복지사를 중심으로 일방적으로 프로그램이 제공되는 노인복지관은 여가생활을 적극적으로 즐기길 원하는 다수의 여성노인들이 중심이 된다. 소극적이고 대인관계에 서툰 남성노인들에게 적극적이고 활발한 복지관 분위기는 부담스러울 뿐 아니라, 사회복지사의 서비스를 받는 것도 여러 사람들과 어울려야 하는 것도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꺼려진다. 누구에 의해 제공되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조용히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거나 소수의 사람들과 어울리며 자신의 특화된 욕구를 만족시킬 수 있는 자발적인 커뮤니티센터 등 노인복지법의 노인여가시설이 다양화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