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는 누릴 수 있으면 축복이고 누릴 수 없으면 재앙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장수하라는 말이 달갑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 나이가 들수록 건강은 나빠지고 삶의 질은 하락한다고 생각하기에, 차라리 병들기 전에 깔끔하게 죽는 게 좋다고 솔직하게 고백하는 사람들도 있다. 국내 장수학계의 전문가인 박상철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 뉴바이올로지 전공 석좌교수는 그런 생각이 틀렸다고 지적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백세를 만나봤을 그가 밝히는 얘기는 충격적인 사고의 전환을 요구했다. 고령화시대 백세청풍(百世淸風)의 기운으로 장수하는 사람들의 패러다임을 박 교수의 시각으로 들여다봤다.
박상철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 뉴바이올로지 전공 석좌교수는 2000년에서 2009년 사이에 국내 최초로 백세인구를 조사한 결과를 발표해 장수에 대한 인식을 획기적으로 바꾼 인물이다. 그가 백세인구를 조사하게 된 이유는 매우 현실적이고 당연한 인식으로부터 시작됐다.
“사람이 늙으면 신체기능이 점점 떨어지는데 아주 늙었을 때는 어떤 모습일까, 그때가 되어도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고 독립적으로 사는 게 가능할까? 저는 그것이 가장 큰 의문이었습니다.”
‘100세 정도 되면 생활이 형편없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박 교수는 막상 조사를 하면서 강렬한 충격을 받았다.
만나자마자 힘자랑하던 백세인
“전남 곡성에서 만난 홍순갑 어르신은 당시 102세였는데 만나자마자 힘자랑을 했습니다. 마당에서 팔굽혀펴기 100개를 하고 계시더군요. 구례 산동면에 사는 101세 임종철 어르신은 뵈러 갔는데 지게를 메고 오시더군요. 그리고 손자가 100세 어르신을 모시는 게 아니라, 100세인이 쉰 살 손자를 데리고 살고 있었습니다. 더 기가 막힌 분은 쇼지 사부라 박사입니다. 102세 때, 저녁에 식사를 하다가 이 양반이 갑자기 한국말로 ‘한국에서 왔습니까?’ 하고 묻더군요. ‘예’라고 대답하니 ‘그럼 우리 한국어로 이야기합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65세 정년에 딱 퇴직하여 ‘한글을 배워야 한다’ 싶어 한글을 배웠고 80세에는 중국어를 배웠습니다, 100세 때 러시아어를 배웠고 104세 때 브라질에서 이분을 초청했는데 그때부터 포루투칼어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90대가 인터넷을 하는 마을
박 교수가 조사를 시작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만난 국내 장수인들은 대략 250여 명에 이른다. 백세인들의 사례를 보니 나이를 무색하게 만드는 새로운 깨달음이자 분명한 성공 좌표들이었다. 나이가 들어도 젊었을 때와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은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새로운 공동체마저 만들고 있었다.
“도쿠시마에 가미가쓰라는 마을이 있습니다. 이 마을에,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에 농업학교를 막 졸업한 젊은 사람이 농협의 직원으로 들어갑니다. 가서 보니 마을 주민이 2000명인데 65세 이상이 1000명이 넘었던 겁니다. 50% 이상의 인구가 노인인 초고령 마을이었습니다. 그런데 노인들은 자주 티격태격 싸웠고 일을 하지 않으면서 손쉽게 얻으려고만 했습니다. 모습이 보기 좋지 않아 ‘우리 일을 합시다’라고 말하며 사람들을 설득했습니다. ‘도쿠시마 산속 마을에 있는 재료들로 일본 요리 장식용 패키지를 만들자’는 게 그의 생각이었습니다.”
물론 동네 어른들이 단번에 그런 일을 하겠다고 했을 리가 없다. 겨우 3명이 시작했는데 이게 팔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물건이 팔리자 할머니들이 서로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주문을 뺏어가려고 했던 거죠. 젊은 사람이 70~80세 사람들의 싸움을 어떻게 감당하겠습니까. 그래서 이 사람이 꾀를 냈죠. ‘주문은 인터넷으로 받아가시오’라고. 그러자 처음에는 어르신들이 무슨 인터넷이냐며 난리를 쳤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딱 버텼고, 2년이 지나니 70~90대 마을 주민들이 컴퓨터를 하게 됐어요. 세계 최고령 인터넷 마을이 돼버린 거죠. 그렇게 해서 마을이 발전한 지 30년 이상이 됐습니다. 다른 지역에서 흉내를 내려고 해도 게임이 되지 않습니다.”
‘고령화 사회가 되면 돈이 많이 든다.’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하며 걱정하고 있다. 박 교수는 반대로 생각한다. 저비용 장수사회를 만들면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이다. 장수인이 건강하게 일하며 생산 인력으로 생활할 수 있으면 되는 일이다. 앞서 소개된 고령화 마을의 기업화가 그 좋은 모델이란다. 그는 확신에 차서 말했다.
슈퍼 노인의 시대가 오고 있다
“‘나이가 들어도 잘 살 수 있는가?’ 있습니다. ‘나이가 들어도 당당할 수 있는가?’ 있습니다. 우리가 나이가 들면 생기는 많은 문제점들만을 생각했었는데 위에서 소개한 분들을 보면 안 그렇습니다. 그러니 패러다임을 바꿀 때가 온 거예요. ‘패러다임 시프트(어떤 한 시대 사람들의 견해나 사고를 근본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테두리로서의 이론적인 틀이나 체계)’가 일어나야 합니다.”
박 교수는 ‘지금 놀라운 시대가 오고 있다’고 강조했다. ‘슈퍼 노인의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는 게 그의 진단이다.
“일본이나 유럽에는 100세인의 육상대회가 생겼습니다. 영국의 파우자 싱은 102세의 나이에 마라톤 풀코스를 8시간에 걸쳐 완주했습니다. 그는 단축 마라톤인 10km를 1시간 30분 만에 완주하기도 했습니다. 나가오카 미에코라는 100세 할머니는 수영 마라톤 1500m를 완주했습니다. 미국 돌푸드 사의 데이비드 머독 회장은 94세 때, 캘리포니아의 자기 목장에서 아침마다 한 시간씩 말을 타고 다녔습니다. 지금은 99세인데 아직 회사를 경영하고 있습니다.”
100세 장수가 보편화되고 있는 현실은 여러 통계 지표로도 증명되고 있다.
제대로 장수하며 일하는 사람들
빠른 속도로 인간의 평균수명이 늘어나고 있다. 평균 수명이란 것은 어디까지 갈 것이냐. 실제 사람들이 많이 죽는 나이인 최빈사망연령은 0세부터 100세까지 중에서 사람이 가장 많이 사망하는 연령의 개념으로 평균수명보다 더 길다. 최빈사망연령은 1950년부터 계속 늘어나고 있다. 우리나라 평균수명은 82세, 최빈사망연령은 90세가 넘었다. 이제 고령사회에서는 실제 사람들이 제일 많이 죽는 나이가 중요하다.
“최빈사망연령 표준편차를 보면 옛날에는 10년 정도였는데 지금은 6년입니다. 죽어가는 사람들 나이의 표준편차가 작아진다는 것은 죽는 사람들 나이의 차이가 없어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장수의 보편화’가 이뤄지고 있는 겁니다. 옛날에는 특별한 사람들이 장수했는데 지금은 ‘somebody’가 아닌 ‘everybody’입니다.”
100세가 넘는 인구는 일본이 6만 명이지만 우리나라는 3000여 명이다. 미국은 7만 명, 중국은 5만 명 정도다.
단순히 나이를 먹는 게 아니라 건강한 노인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도 주목할 지표다.
“옛날에는 70이라는 나이는 죽어야 할 나이였죠, 지금 70이란 나이는 일을 못해서 안달 난 나이입니다, 저도 70입니다. 기가 막힌 이야기죠. 건강한 노인의 숫자가 압도적으로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죠.”
그는 건강한 노인에게 ‘dependent Life(의존적인 삶)’를 가지게 하지 말고 ‘Independent(독립된)’할 수 있게끔 제도적인 문제를 바꾸어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제대로 장수시켜버리자.’ 그러면 병원비가 안 듭니다. ‘장수인은 일을 시켜버리자.’ 그러면 복지비용도 안 듭니다. 이게 제 주장입니다.”
무조건 부지런하라
박 교수는 사람이 아무리 늙어도 변하지 않는 두 가지가 있다고 말한다.
“첫째는 그 사람의 목소리입니다. 20대 때 헤어진 애인이라도 딱 들으면 ‘아, 그녀’라고 생각이 납니다. 그다음에 변하지 않는 것은 ‘성격’, 즉 마음 씀씀이입니다.”
박 교수가 제시한 사례들 덕분에 백세가 되어도 인생은 젊을 때와 다를 바 없이 살 수 있다는 것은 잘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제는 구체적인 방법을 들어봐야 할 때다. 건강하게 장수하기 위한 기본적인 방법론을 묻자, 박 교수는 다산 정약용의 이야기를 꺼냈다.
“다산 선생이 18년간 유배생활을 하면서 동네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그때 만난 사람이 황상(黃裳, 1788~1870)이란 사람입니다. 이분이 글을 잘 쓰셨는데, 라는 문집에 다산 선생과의 일화가 나옵니다. 다산 선생이 이분에게 ‘공부하라’고 말해서, ‘내가 공부를 어떻게 해야 할 수 있습니까?’ 물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다산 선생이 한 말씀이 세 글자였습니다. ‘부지런해라, 부지런해라, 부지런해라.’ 사실 장수라는 것도 이 3근계(勤戒)가 그대로 적용됩니다. 장수도 그냥 이뤄지지 않습니다. 건강장수라는 것은 다 부지런해야 일어날 수 있습니다. 많은 장수인들에 대해 연구할 때, 무엇을 먹느냐, 어떻게 생활하느냐가 주로 거론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전 세계 공통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장수는 성실한 사람, 부지런한 사람의 것이었습니다.”
백세라도 사랑할 수 있는 세상을 꿈꿔라
부지런하라는 것은 무언가를 실행하라는 말과도 같다. 박 교수는 그 실행 부분을 간단하게 세 가지로 나눠서 설명했다.
“‘무엇이든 해버려라.’ 나이가 들었다고 핑계대지 마라. 못할 이유가 뭐 있냐. 그리고 나이가 들면 ‘받으려고 하지 마라, 줘라.’ 마지막으로 나이가 들면 ‘배워야 한다.’ 배워야 줄 것도 생기고 할 것도 생긴다.”
‘하자, 주자, 배우자. Do it, Give it, Prepare it. 行之 與之 習之.’ 그가 던지는 장수시대의 실천강령이다.
백세인들에게서 ‘움직이고(動), 적응하고(應), 머리를 쓰며(判), 느끼고(感), 절제(適)’라는 공통점이 발견됐다고 한다. 그는 “장수를 위해서는 유전자, 성격, 환경 등의 자연적 요인도 중요하지만 운동, 영양, 관계, 배움, 참여 등의 생활습관이 특히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 중 ‘관계’가 가장 중요한 비결인 것 같다며 여기에는 부지런함이 포함된다고 했다. 결국 나이가 들수록 의존적인 사람이 되지 말고 스스로 독립하고 사회에 기여하는 존재가 되는 게 중요하다.
“백세인들 중 고혈압, 관절염, 위장병이 있는 분들이 많아요. 그런데 당뇨는 거의 없어요. 당뇨는 생활습관 질환인데, 결국 장수와 생활습관도 연관이 있다는 거죠.”
“98세에 시집을 내서 100만 권이 팔렸다는 시바타 도요 할머니가 쓰신 시 중 ‘비밀’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99살이라도 사랑도 하는 거야, 꿈도 꿔, 구름도 타는 거야’라고 말합니다. 100세가 돼도 연애하면 안 되겠습니까? 김형석 교수가 올해 한국 나이로 98세이신데, ‘뭐가 가장 하고 싶으냐?’ 물었더니 ‘연애하고 싶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런 마음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박상철 (朴相哲) 교수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생화학 전공으로 의학박사학위를 받았고 1980년부터 2011년까지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생화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과학기술부 우수 연구센터인 노화세포사멸연구센터와 서울대학교 노화고령사회연구소 소장을 역임했다. 가천의대, 이길여 암·당뇨연구원장을 거쳐 현재 대구경북과학기술원 석좌교수, 서울대학교 노화고령사회연구소 고문으로 있다. 주요 저서로 등이 있다.
◇ exhibition
픽사 애니메이션 30주년 특별전
일정 8월 8일까지 장소 DDP(동대문디자인플라자)
, , 등 독창적인 애니메이션 영화로 사랑받아온 픽사(Pixar, 미국 애니메이션 영화 스튜디오)의 30주년 기념 특별 전시다. 제작 과정에 쓰인 스케치, 스토리보드, 컬러 스크립트, 캐릭터 모형 조각 등 약 500여 점을 각 영화별로 전시했다. 정지된 이미지들이 빠르게 회전하면서 움직이는 듯한 착시 효과를 일으키는 ‘토이 스토리 조이트로프(zoetrope)’와 애니메이션 제작 과정을 담은 ‘아트 스케이프(artscape)’ 등을 통해 애니메이션 탄생 과정을 살펴볼 수 있도록 마련했다.
예술이 자유가 될 때: 이집트 초현실주의자들
일정 7월 30일까지 장소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국립현대미술관이 주최하고 이집트 문화부, 샤르자 미술재단의 협력으로 기획된 이번 전시는 이집트 초현실주의자들의 작품세계를 조명한다. 1930년대 말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의 작품 166점을 초현실주의가 걸어온 흐름에 따라 다섯 파트로 나누어 구성했다. 출품작 중 상당수가 해외 최초로 한국에서 공개된다는 점에서 의미를 지닌다. 그동안 ‘미라’, ‘피라미드’로만 인식되어온 이집트의 새로운 문화와 마주하는 기회를 선사한다.
◇ book
남자 혼자 죽다(성유진 외 공저·생각의힘)
고독사 중에서도 시신을 인수할 사람이 없는 상태, 이른바 무연사(無緣死)로 생의 마지막을 보낸 209명의 모습을 그렸다. 특히 남자가 절대적으로 많은 한국의 무연사 현상을 현대 사회 남성의 어려움과 연관해 밝히고자 했다.
치매박사 박주홍의 뇌 건강법(박주홍 저·성안북스)
20여 년 동안 치매 전문가로 살아온 저자가 치매를 비롯한 우울증, 공황장애 등 정신질환에 대해 환자와 가족들이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을 조언한다. 질병에 대한 기본 정보와 더불어 식생활, 운동, 명상치료 등 구체적인 실천 방안을 담았다.
◇ movie
심야식당2
누적판매 240만 부를 기록한 베스트셀러 만화 을 원작으로, 2015년 국내 개봉했던 영화 의 두 번째 시리즈다. 1편에서 함께한 마츠오카 조지 감독과 배우 코바야시 카오루, 오다기리 조가 다시 만났다. ‘오늘도 수고한 당신을 위로하기 위해 늦은 밤 불을 밝히는 특별한 식당’이라는 콘셉트로 밤 12시부터 아침 7시까지 운영하는 심야식당에서 벌어지는 각양각색 인물들의 에피소드가 펼쳐진다.
개봉 6월 8일 장르 드라마 감독 마츠오카 조지 출연 코바야시 카오루, 오기다리 조 등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한국의 길고양이가 대만과 일본으로 여행을 떠난다는 설정의 로드무비다. 고양이 마을로 알려진 대만의 관광지 ‘허우통’과 사람보다 고양이가 더 많이 산다는 ‘고양이 섬’ 일본 ‘아이노시마’ 등을 돌아다니며 길 위에서의 공생의 의미를 탐구한다. 영화계 대표 애묘인(愛猫人) 조은성 감독이 기획과 연출을 맡아 고양이의 시점에서 벌어지는 현상과 발자취를 담았다. 고양이의 마음을 내레이션을 통해 들려준다.
개봉 6월 8일 장르 로드무비 감독 조은성 내레이션 강민혁
◇ stage
로미오와 줄리엣
올해로 데뷔 50주년을 맞이한 원로 연극인 오태석이 번안과 연출을 맡았다. 청사초롱 불빛 아래 한국무용과 풍물이 어우러져 한국판 이 탄생했다. 원작과는 또 다른 비극적 결말로 극의 긴장감을 더한다.
일정 6월 18일까지 장소 명동예술극장 연출 오태석 출연 이신호, 정지영, 정진각 등
천덕구씨가 사는 법
극본을 맡은 김태수 작가는 삶은 끝나지 않은 여행이며, 먼 길을 돌고 돌아 다시 긴 여행을 준비하는 시니어 세대에게 삶이란 견딜만하다고, 또 웃을 수 있다고 격려한다. 그런 그의 시선을 담아 누구나 겪는 노년의 삶을 감동적으로 그려냈다.
일정 6월 8~18일 장소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 연출 김순영 출연 오영수, 차유경 등
복순이할배
‘사랑을 모른다’라는 이유로 짝사랑에게 거절당한 태수는 돈 많고 건강한 독거노인 ‘복순이할배’에게 연애 상담을 하게 된다. 산전수전 다 겪은 괴짜 노인과 연애 풋내기 청년이 이야기하는 진정한 사랑의 의미에 대해 다뤘다.
일정 12월 31일까지 장소 대학로 두레홀 4관 연출 박정우 출연 김시권, 정동진, 이재욱 등
시카고
미국 브로드웨이 대표 뮤지컬 의 오리지널 팀이 2년 만에 내한한다. 1920년대 미국 시카고 클럽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재즈 음악을 14인조 밴드의 연주로 즐길 수 있다. 강렬한 조명 아래 관능적인 안무가 돋보인다.
일정 5월 27일~7월 23일 장소 블루스퀘어 삼성전자홀 출연 딜리스 크로만, 로즈 라이언 등
미래 학자 한 분이 2045년쯤이면 사람은 죽지 않는다는 예측을 하였으나,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체는 늙기 마련이고 궁극에는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젊음을 유지하면서 건강하고 즐거운 인생이 되기를 갈망함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불로장생을 추구해왔으며 근래에도 그러한 노력은 계속되고 미래에도 이어질 것이다. 인간의 로망이기 때문이다. 구글 창시자 한 분은 거대 자금을 투자하여 죽음을 극복하겠다는 공언까지 했다. 역사적으로는 진시황이 그 대표 격이라 할 수 있는바, 먹으면 늙지 않는 불로초를 찾는데 온갖 힘을 쏟았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신하들을 조선 땅에 보내 불로초를 찾았던 흔적이 남아 있다. 그런데도 진시황은 4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늙지 않을 수야 없지만, 더디게 늙는 방법은 있지 않을까?
필자의 유소년 시절엔 나이가 환갑에 가까우면 남자는 사랑채에 나앉아 노인 행세를 하였다. 오늘날은 노인으로 불리는 자체도 싫어하지만, 예전엔 그 반대였다. 늙은이 행세가 수명을 단축하였는지 모른다. 장수의 기준점이 60살이었기에 회갑잔치를 성대히 치렀다. 지리산 산골 마을이었던 고향에서는 논밭 농사를 지으며 살았고 부모의 나이가 환갑에 가까워져 오면 일을 그만 두게 하여 편히 쉬게 했다. 그것을 효도로 여겼고 필자의 삼 형제도 환갑 잔치를 치른 아버지가 더는 일을 하지 않도록 하였다. 옆집에는 아버지와 동년배였던 두 아들을 둔 어른 한 분이 살았다. 부지런한 둘째는 결혼과 함께 신접살림을 차려 따로 살게 되었고 게으른 큰아들과 함께 농사일하며 지냈다. 그 어른은 큰아들이 게으른 탓에 환갑이 지난 나이에도 집안 일을 도맡아 했다. 뒷산에서 무거운 땔감을 하여 지게에 지고 오기도 하고 논밭 농사를 직접 지었다. 그분은 동갑내기였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10년을 더 사셨다. 타고난 운명도 있겠지만, 계속하여 몸을 움직였기 때문에 오래도록 건강을 유지하였지 싶다. 부모님을 편하게 모시려 일을 그만 두게 한 일이 효도가 아니라 더 빨리 늙게 한 불효를 저지른 결과를 초래하였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농사일에 손을 놓은 아버지는 집안 일이나 농사일 외에는 한가한 시간을 즐길 수 있는 소일거리가 없었던 시절이라 나날이 무료(無聊)했음이 틀림없다. 하던 일을 그만두고 무료한 날을 보내게 되어 마음과 몸이 함께 쉬이 늙어 간 것이 아닌가 여겨졌다.
필자의 경험을 예로 주변의 아는 사람들에게 부모님이 집안일을 거들려 할 때는 말리지 말라고 일러 준다. 오히려 간단한 일거리를 만들어 주고 뒷방 늙은이 취급을 하지 않기를 권유한다. 이제는 부모 세대를 이어 우리 스스로가 같은 위치에 서게 되었다. 인생 2막을 활기차게 살려는 시니어들이 늘고 있으나 전체에 차지하는 비율은 낮은 편이다. 뒷방 늙은이가 되어 자식에게 짐이 되는 삶이 아니라 당당하게 살아가려는 자세가 절실하다. 취미가 없다면 더 늦기 전에 새로운 취미를 만들 필요가 있다. 거창하지 않아도 된다. 좋아하는 소일거리나 취미활동으로 몸과 마음에 활력을 불어넣는 것이 더디게 늙는 비결이다.
정유년인 올해는 정유재란(1597.1~1598.12) 발발 420주년이다. 임진왜란으로부터는 427주년. 임진왜란이 치욕의 역사였다면, 정유재란은 왜군이 충남 이북에 발도 못 붙인 구국승전의 역사다. 그 전적지는 진주, 남원, 직산 등 삼남지방 곳곳에 있지만 옛 자취는 찾기 어렵다. 뚜렷한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은 왜군이 남해안을 중심으로 농성하던 성터들이다. 주로 경남 중동부 해안에 밀집한 왜성 터들도 오랜 세월 허물어지고 지워져 갈수록 희미해져간다. 왜성이라는 이유로 사적지 지정이 해제된 탓이다. 근래 일부 지방자치단체는 그 중요성에 눈을 떠 옛 모습대로 복원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는 아직도 방치되어 있다. 치욕의 역사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다. 더 늦기 전에 지금 모습이라도 남겨둬야 한다. 더 사라지고 훼손되기 전에 역사 현장 보전의 필요성을 일깨우고, 정유재란의 역사적 의미를 천착하기 위해서라도 그 흔적을 돌아볼 필요가 있어 에 게재하기로 한다.
글 문창재 언론인(前 한국일보 논설실장) mcj4627@naver.com
정유재란 첫 전투 칠천량 해전의 치욕은 예고되어 있었다. 수하 장졸과 백성들이 하늘같이 떠받드는 장수를 내치고, 무능하고 용렬한 장수를 앉히고 어찌 이기기를 바라겠는가.
선조는 정유년(1597년) 1월 28일 이순신을 충청·전라 양도수군통제사로, 원균을 경상수군통제사로 발령했다.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한 계급 강등되고, 육군으로 전출되었던 원균이 수군에 복귀하여 최전방 수역을 맡게 된 것이다. 한산도 통제영을 거제도로 전진 배치하라는 명령을 수행하지 않은 데 대한 문책이었다.
이 인사에는 조정을 장악한 서인세력의 비호를 받은 원균의 모략이 있었다는 게 정설이다. 통제영을 왜군 본진(부산포)을 견제할 수 있도록 한산도에서 거제도 동쪽으로 이동시켜야 한다는 조정의 논의가 이순신의 입지를 더욱 압박하기도 했다.
이순신은 그 논의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왜군은 임진년 이래 경남 동부 해역 요소마다 견고한 성을 쌓고 2만 정도의 병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적진을 코앞에 둔 곳으로 수군총사령부를 옮기는 것은 섶을 지고 불길로 뛰어드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게 이순신의 생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꼼짝달싹하지 못할 죄를 뒤집어쓴다.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군이 다시 쳐들어오는 길목을 지켜 출동하라는 조정의 명령을 수행하지 않았던 것이다. 진노한 선조의 명으로 이순신은 함거에 실려 한양으로 압송되고,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 자리에 앉았다.
옥에 갇혀 국문을 당하다가 가까스로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나온 백의종군 길에서, 그는 칠천량 패전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전멸한 수군을 재건하기 위해 경상도와 전라도 포구와 고을을 순회하면서 흩어진 수군병력을 불러 모으고 병기와 군량을 찾아냈다. 그 사이 다급한 불부터 끄려는 듯, 조정은 그를 다시 삼도수군통제사 자리에 앉혔다.
불운의 장수가 걸었던 통한의 길
이순신이 한양으로 잡혀간 것은 정유년 2월 26일이었다. 시류에 편승한 조정 중신이 모두 침을 튀기며 이순신을 죽이라고 했지만, 노 재상 정탁의 신구차(伸救箚, 목숨을 걸고 구명하는 상소문)라는 상소 덕에 그는 가까스로 목숨을 보전했다. 이순신이 옥에서 풀려난 것은 잡혀간 지 한 달이 조금 지난 4월 1일이었다. 그날부터 백의종군 길에 나선 그가 복직되어 다시 통제사가 된 8월의 회령포 취임식까지, 불운의 장수가 걸었던 통한의 길을 자동차로 둘러보았다. 이순신이 5개월 넘게 걷고 말달렸던 길을 주마간산처럼 달린 1박 2일 여행이었다.
“합천 초계에 주둔한 도원수 권율 막하에서 백의종군하라”는 명을 받은 이순신은 남대문 밖 관노 집에서 아들과 조카의 마중을 받았다. 고문에 시달린 육신을 치유할 여유도 없이 하루를 쉬어 길을 떠난 그는 아산 선영에 들러 눈물의 참배를 한다. 전라 좌수영(여수) 마을에 머물던 어머니의 귀향 소식 덕분에 고향 집에 며칠 유해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졌다.
그에게 먼저 당도한 소식은 어머니 부음이었다. 아들의 하옥 소식에 허겁지겁 서해안을 따라 배편으로 올라오다 풍랑으로 와병, 끝내 주검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호송관의 독촉에 못 이겨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그는 ‘찢어지는 듯 아픈 마음’을 안고 남행길에 오른다. 공주-여산-전주-남원-하동을 거쳐 초계에 당도한 것이 6월 4일이었다.
초계는 도원수의 진을 둘 만한 곳이 아니라는 생각부터 들었다. 영호남 여러 곳으로 통하는 길목을 통제하면서 육군과 수군 작전을 지휘할 적지로 보기 어려운 곳이었다. 왜적의 내륙 진출을 막으려면 교통의 요지를 차지하는 게 상식인데, 어찌하여 굽이굽이 험한 산길로 이어진 궁벽한 곳에 도원수의 진을 친 것인가.
도원수가 주둔했던 곳이 어딘지는 아직 특정되지 않았다. 한때 초계면사무소 자리가 그곳이었다 해서 표지판까지 있었다지만, 향토사학계가 들고 일어나 한동안 시끄러웠다. 그 뒤 경남도와 합천군은 마을 앞 농경지를 사들여 역사공원을 꾸미면서, 고증도 없이 호화로운 원수부 건물과 객사까지 세웠다. 많은 예산을 들인 보여주기 식 사적지로 보였다.
백의종군 당시 이순신의 숙소 모여곡이라는 마을에도 이설이 있지만, 합천군 율곡면 낙민마을 설이 유력하다. 그가 묵었던 집 주인 이어해(李漁海)의 13대손이 지금도 살고 있고, 당시의 일화도 전설처럼 전해져 온다. 마을 앞 정자나무 아래에는 백의종군 길 표지석이 섰고, 그 뒤편 야산 기슭에는 마을이 정겹게 들어앉았다.
칠천량 패전 소식에 낙담한 도원수의 한탄을 듣고 이순신은 “제가 한 번 나가보고 계책을 세움이 어떻겠느냐”고 제안한다. 그렇게 길을 나선 것이 7월 18일이었다. 곧바로 남행하여 사천 노량의 해안마을을 둘러보고 진양 수곡면 원계리 손경례(孫景禮) 집에 머물 때인 8월 3일,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 직첩을 다시 받는다.
에는 이때의 일이 매우 덤덤하게 적혀 있다. “맑음. 이른 아침 뜻밖에 선전관 양호가 교서와 유서를 가져왔다. 분부 내용인즉 삼도수군통제사를 겸하라는 명령이었다. 숙배(肅拜)한 뒤에 받자온 서장을 써서 봉해 올렸다.” 며칠을 두고 큰비가 내려 근심과 우울증이 심해진 탓이겠으나, 복직인사에 대한 감상치고는 지나치게 무덤덤한 이 점이 바로 그의 진면목이다.
이순신에게 미안했는지, 선조는 유서에서 “지난번 그대의 직첩을 바꾸고 죄인의 이름으로 백의종군케 한 것은 과인의 지모가 밝지 못하여 생긴 일”이라고 사과했다. 그러고는 “이토록 패전의 욕을 당하게 되니 무슨 할 말이 있으리오(尙何言哉)!” 하면서 ‘상하언재(尙何言哉)’를 반복했다.
사적지 손경례 집은 지금도 그 자리에 있다. 목화 시배지로 유명한 산청군 단성에서 남으로 뻗은 지방도를 한참 달려가니 길가에 백의종군 길 표지석이 서 있고, 그 옆 전주에는 ‘손경례 가(家)’라는 표지판이 붙어 있었다. 급히 차를 세우고 찾아들어갔으나 동네에는 인적이 없었다. 한참 찾아 헤맨 끝에 12대손이라는 손도근(孫道根·80) 옹을 만날 수 있었다.
직계자손이냐는 물음에 손 옹은 손사래를 치면서 “직계는 서울에 살고 관리인이 집을 지키고 있는데 꼴이 이렇소” 했다. 그러면서 자기 조상 이름을 함부로 부른 데 대한 불쾌감을 내비추었다. 얼른 사과하고 당시의 일화를 물으니, 이은상의 에 다 나와 있는 이야기라면서도 “비가 많이 와서 충무공께서 우리 조상 집에 닷새를 묵어가셨다”고 자랑했다.
비에 갇혔던 길을 벌충이라도 하려는 듯, 이순신은 발길을 재촉하여 하동-구례-곡성-옥과-순천-낙안 땅을 지나 보성에 당도했다. 가는 곳마다 백성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어 “이제 사또께서 오셨으니 우리는 살게 되었다”고 좋아했다. 그들은 모두 난리를 피해 산속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이었다. 이순신은 말에서 내려 피란민들 손을 부여잡고 부디 몸조심하라고 당부하면서, 안쓰러움을 표했다. 젊은 장정들은 처자에게 “나는 대감을 따라갈 터이니 너희는 천천히 찾아 오거라” 하고 따라나서기도 했다. 노인들은 길가에 늘어서서 술병을 바쳤다. 통제사가 받지 않으니까 울면서 사정했다. 더 이상은 사양할 수 없었다.
아직 12척의 배가 남았다
보성 땅에서 제일 먼저 찾아든 곳은 조양창(兆陽倉)이었다. 다행히 이 국창(國倉)에는 곡식이 봉인된 채로 남아 있었다. 순천 부유창 등 고을마다 창고가 잿더미가 되었는데, 군량으로 쓸 곡식을 구했으니 얼마나 요긴했겠는가. 창고들이 잿더미가 되고 사람 그림자가 끊긴 것은 전라병사 이복남(李福男)이 청야작전을 재촉한 탓이었다. 왜적은 그렇게 바짝 다가와 있었다. 칠천량 패전으로 남녘 바다와 뭍을 안마당처럼 누비게 된 왜적이 본격적으로 호남 침공에 나선 것이었다.
조양창 자리는 지금 흔적도 없다. 그 사이 간척공사로 바다가 뭍으로 변한 것이다. 통제사가 묵었다는 김안도의 집도 마찬가지다. 400년 넘는 세월의 무게가 짓누른, 보이지 않는 흔적일 것이다.
보성에서 이순신은 흩어진 장수와 병졸을 모으고 군량을 보충하기 위해 아흐레를 머물렀다. 보성읍성 열선루(列仙樓)에 머물던 8월 15일 선전관 박천봉이 임금의 유지(有旨·편지)를 가져왔다. “약세인 조선수군을 폐하고 육군에 의탁하여 싸우라”는 명령이었다. 통제사는 “공문 작성 때 영의정 유성룡이 있었느냐”고 물었다. 영의정은 경기지방 순행 중이었다는 선전관 말로 보아 조정 대신들이 유성룡 부재를 틈타 다시 자신을 나락으로 몰아넣으려는 계략이라고 생각했다.
이날 밤 통제사는 대취했다. 임금의 명을 받들지 않으면 다시 함거에 실려 올라가게 될 것이고, 명을 받들면 조선수군 재건은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 괴로움을 잊고 싶어 그는 군관들을 불러 통음을 하고도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이순신은 결심한 듯 열선루 누각에 앉아 유명한 ‘금신전선 상유십이(今臣戰船 尙有十二)’ 장계를 썼다.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전선이 있사옵니다. 죽을힘을 다해 막아 싸운다면 아직도 할 수 있사옵니다. 전선은 적지만 신이 죽지 않았으니 적이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이옵니다.” 왜적이 바다와 뭍에서 온갖 패악을 부리는 와중에 그런 용기를 가진 인물은 이순신 한 사람뿐이었다.
유감스럽게도 열선루는 지금 없다. 이순신의 뒤를 밟아온 왜적이 보성 땅을 분탕질할 때 불타 없어졌다. 전란이 끝난 뒤 복원되었지만 일제 때 다시 철거되었다. 불공대천지수의 사적이라는 이유였을 것이다. 그 자리에 지금은 보성초등학교와 보성군청이 들어서 있다. 몇 해 전 청사 신축공사와 도로공사 때 발굴된 주춧돌 넷과 댓돌들은 지금 군청 마당에 전시되어 있다. 보성군에 따르면 곧 있을 열선루 복원공사에 그대로 쓸 계획이라 한다.
보성을 떠난 이순신은 18일 회령포(會寧浦·장흥군 회진면 회진리)에 닿아 삼도수군통제사 취임식을 갖고 그 유명한 ‘회령포 결의’를 다진다. 에는 그날 “수사 배설(裵楔)이 뱃멀미를 핑계로 보이지 않았다. 포구 관청에서 잤다”고 씌어 있다. 17일자 일기에 “군영구미(軍營仇未·강진군 대구면)에 당도하니 경내에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수사 배설이 우리가 타고 갈 배를 보내지 않았다”고 쓴 것으로 보아 이순신이 두려워 피한 것이 분명하다.
20일 일기에는 배설이 임금의 삼도수군통제사 임명교서에 숙배하기를 거부했다면서 “건방진 태도가 말할 수 없기에 그 영리에게 곤장을 쳤다”고 썼다. 수사의 체면을 봐서 권율처럼 고위 군관을 직접 벌하지 않고 수하에게 벌을 주어 경고한 것이다.
삼도수군통제사 취임식은 19일이었다. 배설이 가져온 12척의 전선과 120명의 장졸이 참석한 초라한 행사였다. 그러나 구국의 결의만은 드높았다. “우리는 다 같이 임금의 명을 받들었으니 의리상 같이 죽어야 마땅하다. 한 번 죽음으로써 나라에 보답하는 것이 무엇이 아까우랴!” 에 적힌 통제사 취임사는 이토록 뜨거웠다. 임금과 조정을 속이고 명을 받들지 않은 죄인의 신분에서 다시 수군 총수로 돌아왔으나, 그에게 주어진 것은 달랑 직첩 하나였다.
회령포는 오늘날의 정남진 바닷가다. 서울에서 정남쪽 끝이라 해서 붙은 이름인데, 해남 땅끝 마을 가기만큼 멀다. 오전에 초계를 떠나 해 안에 당도하기 어려워 장흥에서 하룻밤을 유했다. 다음 날 눈 뜨자마자 달려간 오월의 아침, 회진포 바다는 쪽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백성이 모두 피란 가고 빈 포구였을 그때와는 너무 다른 분위기였다. 선창에는 산뜻하고 날렵한 어선들이 줄지어 정박해 있고, 그 안쪽으로는 번듯한 주민복지 시설과 상가가 조성되어 있다. 취임식 행사를 치렀을 회령포 성터는 아름다운 역사공원으로 바뀌었다. 내륙 깊숙이 파고들었던 바다는 1960년대의 개간사업으로 비옥한 들판으로 변했다. 면 소재지가 되었으니 인구도 몇 곱절 늘었으리라.
칠천량 참패의 씨앗
글머리를 되돌려 이순신 삭탈관직과 나국(拿鞠, 잡아다 심문함) 상황으로 돌아가보자. 직접 죄목은 왜군 장수 가토 기요마사 군을 영격하라는 임금과 조정의 명을 어긴 일이었다. 그 까닭에는 아직 정설이 없다. 기록이 서로 달라 연구자마다 추론에 그칠 뿐이다.
정유년 초 경상도우병사 김경서(金景瑞·일명 김응서)의 진에 드나들던 왜인 가나메 도키스라(要時羅)가 김 병사에게 달콤한 정보를 흘렸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수하였던 그는 강화회담 결렬이 기요마사 탓이라고 헐뜯으며 “이번에 기요마사가 다시 건너오게 되었으니 통제사를 시켜 길목을 지켰다가 일제히 공격케 하면 그의 목을 벨 수 있을 것”이라 했다. 기요마사가 건너온다는 날짜까지 말해줬다. 김경서의 보고를 받은 임금과 조정은 그 말을 사실로 믿고 이순신에게 영격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이순신은 그 명을 따르지 않았다. 초계에서 한산도까지 와 출동 명령을 전한 도원수에게 이순신은 “반드시 왜의 간계가 있을 것이오. 배를 많이 끌고 나갔다가는 도리어 역습을 당하게 될 것이 불을 보듯 뻔한데 어찌 간첩의 말을 믿고 따를 수 있겠습니까?” 했다.
이순신이 움직이지 않는 틈을 타 대한해협을 건너온 기요마사는 울산 서생포에 진을 쳤다. 이순신의 판단이 어떠했든 가나메의 정보는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 진노한 선조는 “우리나라 장수가 유키나가보다 못하다”고 펄펄 뛰었다. 당장 이순신을 묶어 올리라는 명이 떨어졌다. 이순신을 그 자리에 천거하고 뒤를 보아준 영의정 유성룡도 어쩔 수 없었다.
이순신을 잡으러 온 의금부 도사 일행 가운데는 얼마 전 경상우수사로 부임한 원균도 있었다. “내가 통제사라면 당장 부산포로 달려가 왜적을 무찌르겠다”던 그였다. 그 시간 왜적의 동태를 파악하려고 가덕도 앞바다에 나갔던 통제사는 왕명 소식을 듣고 급거 귀항했다. 갖가지 병기와 화약류, 병력과 군량미의 끝 단위까지 세세히 인계하고 함거에 올랐다.
“사또, 우리를 버리고 어디로 가십니까. 이제 우리는 다 죽게 되는 겁니까!” 백성들은 함거를 가로막고 울부짖었다. 원균은 회심의 미소를 머금었을 것이다. 씻을 수 없는 치욕 칠천량 참패의 씨앗은 그렇게 잉태되었다.
최근 한밤중에 우리 아파트 뒤편 동네에 화재가 났다. 드라마를 보던 중이었는데 베란다 밖으로 시끄러운 사이렌 소리가 울리고 확성기가 요란해서 무슨 일인가 내다보았더니 바로 우리 집 건너편 숲 너머로 시뻘건 불길이 치솟고 연기가 퍼지고 있었다. 그 동네로 들어가는 길은 구불거리고 좁아서 평소에도 차 두 대가 만나면 한쪽이 비켜줘야 하는 곳이었다.
드라마에 심취해 있어서 몰랐는데 그 좁은 길에 어느새 출동한 대여섯 대의 소방차와 경찰차가 요란한 사이렌과 함께 경광등을 번쩍이고 있다. 새까만 밤길에 빨갛고 파란 경광등이 선명했다. 우리 집까지 번져오지는 않겠지만 바로 코앞에서 시뻘건 불길이 타오르니 섬뜩하기도 했고 무서웠다. 그래도 필자는 그 와중에도 기자 정신을 발휘해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이 동네는 예전엔 무허가 집이 즐비했던 산동네였다. 이제는 무허가 집이라 해도 말끔하게 단장하고 옆 텃밭을 가꾸는 등 목가적이고 아늑한 풍경이어서 가끔은 일부러 산책하러 가기도 했다. 아직 옛 정취가 남아 있어 담장마다 넝쿨 꽃을 늘어뜨리고 집 앞을 꽃 화분으로 장식한 소박한 집들이 보기에 정겨운 곳이다.
이렇게 깨끗하고 소박한 마을이지만, TV 드라마나 영화에서 주인공의 못살던 시절을 표현할 때 이곳을 찾는다고 한다. 언젠가 인기 드라마를 보다가 어디서 많이 본 듯한 풍경이 나왔는데 바로 이 동네였다. 덩달아 우리 아파트도 한 컷 찍히기도 해서 반가운 마음이 들었지만, 알고 보니 주인공의 가난한 시절을 찍기 위해 이 동네에서 촬영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직도 못사는 동네를 촬영할 때 이곳을 찾는다니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다.
그런데 유난히 이 동네는 불이 자주 난다. 웽웽 사이렌 소리가 울려 내다보면 연기와 함께 시뻘건 불길이 심심치 않게 보인다. 이번 불은 재빠른 소방차의 대응으로 금세 불길이 잡혔다. 인명피해가 있었다는 말은 없어서 다행이지만 몇십 년 보아오던 무성한 숲의 나무들이 불타는 광경은 참으로 안타까웠다.
불조심은 몇 번을 강조해도 부족하지 않다. 오늘의 화재도 누군가의 실수로 일어났을 것이다. 불이란 사소한 데서도 일어날 수 있으니 각자가 평소에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우리나라른 최근 고령사회로 접어들어 시니어들이 늘어나고 있다. 시니어는 젊은 사람보다 기억력과 행동에서 문제가 있을 수 있으니 불은 정말 조심해야 할 것 같다. 깜빡 잊는 바람에 큰일로 번질 수 있는 일이 많아 불안하고 걱정스럽다.
며칠 전에는 우리 아파트에서 작은 소동이 있었다. 8층에 사시는 할머니 한 분이 가스 불에 올려놓은 냄비를 잊고 마당에 나와 친구분과 한가로운 시간을 보냈다는 것이다. 아랫집에서 연기가 올라와 위층에 사는 사람이 관리실과 소방서에 연락해 출동했는데 정작 마당에서 놀고 계시던 할머니는 까맣게 몰랐단다. 다행히 불이 나지는 않았지만 실내엔 연기가 가득했고 타는 냄새가 심각했다고 한다. 이런 일이 생기면 자신뿐 아니라 이웃에게도 큰 피해를 주게 된다. 많은 분이 할머니에게 조심하시라는 이야기를 했고 할머니도 미안한 마음에 무척 놀라셨다고 한다. 생각해 보면 생판 남의 일만은 아니다. 필자도 가끔 가스레인지에 음식을 올려놓고 다른 일을 하다가 타는 냄새가 날 때쯤 겨우 알아차렸던 일이 있기도 했으니 말이다.
우리 아파트는 각 집마다 외출 시 가스와 전열기구 점검하라는 빨간색 경고 스티커를 배부했다. 필자는 스티커를 현관문 안쪽에 붙여놓고 나갈 때마다 한 번씩 더 점검을 한다. 나만 조심해서 될 일이 아닌 이런 사고가 노인이 늘어가는 세상에서는 더 자주 일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참으로 걱정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럴수록 서로가 더 조심해야 할 것이다. 백번을 말해도 부족하지 않을 불조심!!이다.
도시에서 농사를 짓는다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은 “제대로 되겠어?” 하는 의심부터 한다. 그것도 콘크리트로 둘러싸여 흙 한 번 밟기 힘든 서울 한복판에서 농사 얘기를 꺼내니 그럴 만도 하다. 그런데 실제로 해내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밥상에서 곁들일 채소 몇 가지 정도 심는 그런 텃밭이 아니다. 제대로 수익도 올리고 양봉까지 한다. 행촌마을 사람들 이야기다. 서울시 종로구 행촌권 성곽마을 도시농업 마을공동체 김동수(金東秀·66) 주민 대표를 만나 도시농사꾼들 얘기를 들어봤다.
아차 싶었다. 날짜를 잘못 잡았다. 하필 과음한 다음 날 성곽마을에 올 약속을 하다니. ‘산성’ 주변의 마을이라는 것을 잊었던 모양이다. 완연한 봄의 기운이 가득한 날, 땀인지 술인지 모를 것이 등줄기를 타고 흐른다. 다리가 풀릴까 걱정될 지경이다.
등산에 가까운 성곽마을까지의 여정은 다소 기묘했다. 산성이 위치한 인왕산 자락은 높은 아파트에 가려져 보이질 않았다. 높은 층수를 자랑하는 대단지의 경계를 따라 난 굽은 길을 거슬러 올라가자 성곽마을이 나타난다. 화려한 장식에 가려진 무대 뒤 같은 모습이다. 마을 어귀에 올라 시내를 바라보니 다시 아파트가 벽이 되어 시선을 가로막는다. 낭만적인 전망은 사치이겠구나 싶다. 예전엔 같은 동네였을 텐데, 과거에 머물러 있는 집에서 높아져가는 아파트를 어떤 기분으로 바라봤을까?
도시화와 재개발 사업에서 비껴간 마을
“불만이 왜 없었겠어요.”
김동수 대표의 말에는 억울함이나 분노보다는 일종의 초연함이 묻어 있었다. 행촌동 성곽마을 일대는 도시화와 재개발의 열풍 속에서 그 위치 때문에 빠르게 일어나는 변화를 바라만 봐야 했다. 서울시의 재개발 구역에서도 돈의문 뉴타운 계획에서도 성곽마을은 빠져 있었다.
“군사보호시설구역과 같은 이런저런 이유들로 개발 제한을 받아왔죠. 주변에 높은 아파트들이 들어서고 비싼 값에 거래되는 것을 바라만 봐야 했어요. 재산상의 불이익을 감수했던 것이죠. 그래도 주거환경개선사업이 진행되면서 집수리 비용의 절반을 되돌려주는 등 예산지원이 조금씩 이루어지면서 불편하지 않게 고쳐가며 살고 있죠. 상대적인 박탈감이나 스트레스가 많지만 워낙에 행촌동 사람들이 양반들이라 과격한 의사표현 같은 것은 하지 않아요. 대부분 오래 사신 어른들이라 동네에 대한 애정도 많고. 실제로 종로구 내 17개 동 중에서 어르신이 제일 많이 살고 계셔요. 그래서 그대로 살고 싶어 하는 마음도 있으신 것 같아요.”
김동수 대표 역시 행촌동 토박이 중 한 명이다. 여덟 살에 수원에서 이사와 58년을 행촌동에서 살았다. 김 대표는 1960년대의 동네 모습도 상세하게 기억했다.
“당시 이 동네는 판자촌뿐이었어요. 한국전쟁 이후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피난민들이 몰려와 살았던 동네 중 한 곳이에요. 작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달동네였죠.”
김 대표는 의약품, 식품, 음료 유통 회사에 다니다 맥주 대리점을 내면서 독립했고, 이 경험을 바탕으로 슈퍼마켓을 차려 30년을 ‘슈퍼 아저씨’로 살았다. 지금은 세월의 변화에 맞춰 슈퍼마켓이 있던 자리를 편의점에게 내줬다.
“이 집 저 집 배달을 다녔으니 동네에 모르는 사람이 없었죠. 언덕길을 수만 번은 왕복했을 거예요. 그러다 판잣집에 살던 사람들은 성남 등 시 외곽으로 단체로 이주하면서 동네가 많이 달라졌어요.”
2014년 서울시에서 발간한 자료 를 살펴보면 1971년 서울인구의 10%에 가까운 규모의 신도시인 ‘광주대단지’ 계획이 수립돼 실제로 10만 명이 넘는 인구가 이주했다. 이외에도 토지구획정리사업이나 도시정화사업 등의 이름으로 판자촌 철거민들은 계속 외곽으로 밀려났다.
참여 주민 대부분이 ‘초보농부’
난개발됐던 지역이 정비되면서 아파트에 둘러싸이게 된 과정이 대충 이해가 된다. 그런데 그런 동네에서 도시농업이라니 의아한 일이다. 왜 농업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을까.
사실 이 지역의 도시농업 도입은 지역 주민의 아이디어는 아니었다. 거대 재개발 과정에서 소외된 이 지역의 주민 공동체에 활기를 불어넣기 위해 서울시에서 내놓은 기획에서 출발했다. 서울시는 2014년 7월, 어떤 관리 계획에도 속해 있지 않던 이 지역을 ‘성곽마을 재생계획’ 수립 과정에 포함시키고 주민 의견을 수렴하기 시작했다. 행촌동뿐만 아니라 한양도성 9개 권역 22개 성곽마을을 대상으로 계획이 수립됐다.
행촌권 사업은 크게 지역 주민을 위한 마을회관 격인 ‘행촌共터’ 세 곳을 조성하고, 옥상경작소와 텃밭 등 도시농업을 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이후 육묘장이나 양봉장 설립을 통해 수익성을 높일 수 있는 도시농업 사업을 발굴한 뒤, 지속적인 교육을 통해 도시농업 공동체의 전문성을 강화해나간다는 것이 이 사업의 요지다.
“통장연합회장을 맡고 있었는데 그 때문인지 자의 반 타의 반 성곽마을 추진위원장 자리를 맡게 됐죠. 무작정 농사부터 지은 건 아니에요. 서울시 도시재생센터에서 하는 도시재생대학을 통해 도시농업에 대한 지식을 익혔죠. 이 동네에서 오래 사신 직능단체장을 중심으로 15명이 참여했어요. 그리고 지난해 2월 도시농업공동체를 발족하고 이어 육묘장을 만들면서 본격적인 ‘농사’를 시작했어요.”
지역 주민들의 성과는 조금씩 나타났다. 육묘장을 통해 성장한 모종 중 2만 봉이 종로구청에 납품됐고 옥상과 노지, 텃밭용으로 4만 봉이 공급됐다. 작지만 의미 있는 성과였다. 6kg이 넘는 커다란 수박도 초보농부에게는 값진 수확이었다. 가지와 토마토, 참외도 얻었다. 양봉도 시작했다. 전문가를 초청해 별도의 양봉 강의를 받았고, 전문 멘토 네 명이 달라붙어 이들을 도왔다. 그 결과 첫해 수확으로는 큰 꿀 800L를 얻었다.
“그래도 계속 시행착오를 겪는 중이에요. 지난겨울에는 관리를 잘못해 일부 벌들이 죽어버렸어요. 벌에 쏘여 응급실로 달려간 적도 여러 번이고요. 꿀이 한창 채집되던 무렵에는 여왕벌 하나가 분봉해 인근 아파트 벽에 난 구멍에 벌집을 차려 난리가 났었죠. 어쩔 수 없이 양봉 위치를 옮겨야 했어요. 올해에는 더 많은 수익을 얻을 수 있을 거예요. 농사의 ‘ㄴ자’도 모르던 사람들이 많이 달라졌어요.”
“나 행촌 살아” 자부심 높아진 주민들
이런 변화를 지역 주민들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되레 일말의 재개발 가능성마저 없애는 일이라 생각하지 않을까?
“주민들 입장에선 확 바뀌는 것이 아니니까 몇몇은 마뜩찮아 했던 것이 사실일 거예요. 괜히 세금만 들이는 것 아니냐는 생각도 할 수 있고. 큰 시설을 세우는 것처럼 눈에 보이는 것이 많지 않은 사업이니까요. 하지만 장기적으로 도시농업 사업은 주민들의 삶을 많이 바꿔놓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농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는 일종의 시간제 일자리를 제공할 수도 있고, 만들어진 농산물을 좋은 일에 쓸 수도 있고 말이죠.”
실제로 이들은 지난해 텃밭에서 수확한 배추 700포기로 김장을 담가 지역 저소득층 노인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그래도 마을의 달라지는 모습이 언론을 통해 주목받으면서 주민들의 자부심이 높아졌다는 것을 느껴요. 전국에 도시재생, 도시농업의 성공사례로 알려지면서 방방곡곡에서 저희에게 배우기 위해 찾아와요.”
이들의 노력 덕분에 종로구는 도시농업 우수자치구로 선정됐고, 서울농업기술센터에서 주관하는 ‘도시농업 최고 텃밭상’도 탔다. 2016 전국 공동체 한마당에선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김 대표는 향후에 각종 도시농업사업이 자리를 잡아가면 협동조합을 설립해 부가가치를 높이는 방법을 찾을 계획이라고 했다. 단순히 작물을 재배하는 것이 아니라 수확한 농산물을 가공해 2차, 3차 산업 형태로 확대해나간다는 것이다. 채취된 꿀은 차나 가공식품 형태로 부가가치를 높이고, 허브나 약초도 음료 형태의 제품을 개발할 계획이다. 이를 위해 마을 주민 중 일부는 바리스타 교육을 정식으로 받았고, 1호 행촌共터에는 커피추출기도 갖춰졌다. 또 푸드뱅크를 설립해 지역 저소득 노인들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찾겠다는 계획도 갖고 있다.
올해는 스마트폰을 활용해 하우스의 습도와 온도, 수분 공급 등을 자동으로 조절할 수 있는 ‘스마트 팜’도 도입할 계획에 있다. 도시농업의 특성상 작은 면적에서 높은 효율의 수확을 얻어내기 위해서다. 부가가치가 높은 더덕, 감초, 어성초 등을 심은 약초밭도 만들었다.
주민 행복에 보탬이 된 도시 농사
물론 지역의 변화만큼이나 김 대표 개인에게도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그는 이런 변화가 싫지 않다고 했다.
“제가 살아온 인생에서 최근 2년의 삶이 가장 행복해요. 이제 2년 된 초보농부이지만 길가의 작목만 봐도 다듬고 만져줄 정도로 달라졌어요. 산성을 따라 듬성듬성 자리 잡고 있는 텃밭들을 가꾸느라 체중은 5kg 넘게 줄었죠. 새벽같이 일어나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밭으로 달려가는 거예요. 지금은 안 쓰던 일기까지 쓰고 있어요. 매일매일 농사에 대한 기록을 하는 것이죠. 파종과 같은 육묘장 운용이나 농사일에 관한 일정을 기록해서 다음 해에 늦어 고생하는 일이 없도록 하고 있어요.”
그의 아내는 김 대표의 이런 모습을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다. 큰돈을 만질 수 있는 일도 아닌데 집에서 도통 남편을 볼 수 없을 정도였다. 비가 좀 온다 싶으면 작물 걱정으로 뒤척이는 통에 덩달아 잠을 청하기 어려웠다. 걱정되면 나가보라며 새벽에 남편을 내보낸 일도 적지 않았다.
김 대표의 아내가 남편을 이해하기 시작한 것은 더운 어느 여름날이었다. 산책 삼아 텃밭에 함께 나왔던 아내는 땀을 뻘뻘 흘리며 작물을 다듬는 남편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한참 지켜보던 아내는 생각이 바뀌었는지 그날부터 잔소리를 줄였다.
서울시가 성곽마을 재생을 위한 마중물로 행촌동에 투자한 것처럼, 그는 자신의 노력이 행촌동 지역 주민을 위한 도시농업이 자리 잡는 마중물로 쓰이길 희망했다.
“개인적인 욕심이 있을 리 없죠. 자식 셋도 모두 결혼했고 바랄 것이 더 있겠어요. 척박한 이 마을에서 주민들이 조금이라도 잘살고, 행복해지길 바랄 뿐이에요. 지역 주민들이 도시농업으로 좀 더 즐거움과 여유를 찾았으면 해요. 저는 건강이 허락하는 한 오래 이 일을 하고 싶습니다.”
널리 알려졌다시피 도시는 대체로 각박하다. 매력도 편익도 많지만 경쟁과 계산이 불가피한, 일종의 정글이다. 그렇기에 흔히들 남모를 고독을 안고 도시를 살아가기 십상이다. 내가 아는 서울의 어떤 화가는 작업실에 쥐를 기른다. 외로워서 쥐를 기른다. 그는 아마 쥐하고 대화를 나누는 것 같다.
“너도 외롭니? 나만큼 외롭니?”
쥐를 바라보며, 슬픈 노래를 부르는 가수처럼 그가 처량하게 늘어놓는 대사는 대강 그렇다. 그는 이미 노년에 접어들었다. 무심한 세월을 관조한 끝에 그가 신중하게 내린 결론은 간명하다. 늙을수록 외롭다!
도시를 예찬하는 사람들에겐 매우 결례이겠지만, 내가 보기에 도시는 그리 성공한 작품이 아니다. 물질은 풍부할망정 인정이 메마른 탓이다. 물론 도시에도 인정스런 사람들이 왜 없으랴. 그러나 인정을 쓰기보다 인상을 쓰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 같다. 거리의 행인에게 왜 쳐다보냐고 시비를 걸어, 마침내 죄 없는 사람을 먼지 나도록 늘씬하게 두들겨 패는 변괴마저 벌어지는 게 도시이지 않던가. 남의 흉을 볼 것도 없다. 나 자신부터가 그렇다. 나도 때로 거리에서 마주친 애먼 눈길에 까닭 모를 적의(敵意)를 느끼는 경우가 있으니 말이다. 이 타락한 영혼을 무슨 약으로 고쳐야 하나.
내가 나의 몰인정한 치부를 들여다볼 때면 부끄러워진다. 인생의 가을에 접어들었지만 여차하면 옹색한 마음이 도드라진다. 운동장 사이즈의 넉넉한 마음그릇을 가진 사람 앞에서는 항복! 대번에 주눅이 든다. 이럴 땐 헛살았다는 회의가 밀려든다. 쥐를 기르는 화가처럼, 다독이기 난처한, 먹먹한 외로움에 사로잡힌다. 나이 들수록 따뜻한 생각을 위주로 하고 싶고, 너그러운 가슴으로 만고의 불한당마저 살포시 감싸며 살고 싶지만, 웬걸, 심사가 뒤틀리면 간장 종지처럼 비좁아진다.
그러고 보면 이미 엉터리 인생이 아니고 뭐란 말인가. 그렇다고 쥐를 기르거나 쥐약을 마실 수는 없는 일. 궁지에 몰린 기분일 때, 나는 가급적 햇살 쪽으로 마음을 옮겨둔다. 따뜻한 추억을, 따뜻한 사람을, 따뜻한 정경을 떠올려 시린 가슴에 온기를 부여한다. 남도의 어느 산골 마을에서 만난 노부부의 얘기를 해볼까.
전라도의 외진 산촌을 돌아다니던 때였다. 도시의 소음과 아귀다툼이 침범 못할 후미진 산골. 도토리 키 재기를 하는 야산들의 품에 안긴 마을은 하염없이 낙후했으나 포근했다. 돌담을 두르고 옹기종기 들어앉은 농가들은 하나같이 허름했으나 정겨운 풍색이었다.
나뭇가지로 엮은 사립이 곱살한 어느 집 텃밭. 할머니 한 분이 동그랗게 웅크려 앉아 호미질을 하고 있었다. 호미질에 몰입된 그 얌전하고 바지런한 모습은 아무런 결함이 없이 수려했다. 시골 노인들과 나누는 담소는 늘 즐겁다. 그들의 입에서 순후하게 흘러나오는 인생사와 세사란 범상해서 공감이 쉬우며, 혹간 의표를 찌르는 얘기가 튀어나와 슬며시 나를 돌아보게 하는 게 아닌가.
나는 할머니 앞에 앉아 이모저모 소식을 물었다. 언제부터 이 마을에 사셨느냐, 읍내 오일장엔 자주 나가시느냐, 건강은 괜찮으시냐, 면사무소 복지계에서 출장 나온 김 주사처럼 시시콜콜 캐물었다. 별안간 쓱 출현해 눈앞에 앉은 인간이 돌팔이 약장수이거나 남파된 간첩일지도 모른다는 야박한 의심 따위는 눈곱만치도 하질 않는 게 분명해 보이는 할머니는 오직 선선히 응답했다. 마치 무슨 횡재라도 한 사람처럼 상냥한 대꾸로 일관했다. 사람의 입이란 친절을 베푸는 데 오직 그 용도가 있다는 양 자상한 언사들이 흘러나왔다.
얼마 뒤, 부디 건강하시라, 덕담을 건네고 일어서 나오려던 때였다. 할머니가 호미를 놓고 일어서더니 나를 잡아 세우는 게 아닌가?
“워매, 그냥 가실라고라? 쪼께 기다려보쇼잉!”
그냥 보낼 수는 없다는 얘기였다. 밥상을 차려 내올 테니까 잠깐 기다렸다가 먹고 가라는 채근이었다. 읍내 식당에서 점심을 이미 먹었던 나는 사양할 수밖에 없었다. 자못 합리적인 고사(固辭)였다. 그러나 할머니는 막무가내였다. 찬은 변변치 않지만 한술이라도 뜨고 가야 한다며 거듭 성화였다. 나는 사양에 사양을 반복했다.
“아따! 그러지 말고 잡숫고 가시랑게!”
할머니는 포기하지 않고 거듭 식사를 권했다. 그러나 뱃속엔 이미 빈자리가 없으니 어쩌란 말인가. 나는 사정을 재차 주르룩 설명했다. 그때였다. 토방 빈지문이 열리더니 할머니의 서방님이 마루로 걸어 나왔다. 아마도 낮잠을 주무시다가 지상의 한낮에 벌어진 묘한 분쟁에 잠을 깬 모양이었다. 이 영감님은 단숨에 소란한 사태를 평정하겠다는 양 큰 소리로 탕탕 외쳤다.
“하이고, 한술 뜨고 가랑게 시방 어째 그러는 거시여? 엔간하면 자시고 가셔! 객지에 나오면 고생이잖여? 든든히 먹어둬야 한당게!”
이런! 남들이 이 희귀한 경치를 바라보았다면 셋이서 쌈박질을 하는 것으로 비쳤으렷다. 내가 노부부의 호의를 사양한 유일한 이유는 더 이상 밥 들어갈 자리가 없다는 것이었으나 노부부가 나를 붙잡은 이유에 비하면 실상 무가치한 것에 불과했다. 할머니는 다음처럼 나직이 중얼거려 마침내 나를 꺾어버렸다.
“이날 이때까장 때 돼서 내 집에 들어온 사람, 밥 안 멕여 보낸 적이 없었는디 워째 그런당가?”
결국 나는 밥상을 받았다. 산골 노부부의 삶에 감도는 인간애, 육화된 인정에 탄복하며 밥을 먹었다. 내 부모 외에 그 누가 나에게 밥 한술 먹이고자 그토록 안간힘을 다했던가.
그리워라, 할머니가 차려준 조촐한 밥상이여! 정갈한 인정이여! 아무런 계산이나 속셈이 없는 그 도타운 인정을 그들은 어디서 얻어왔을까. 평소 이렇다 할 선행을 한 적이 없는 채, 그저 쌀벌레의 일종으로 살아온 나는 뭔가 켕겨 괴로웠으며, 또 심히 행복했다. 오늘날까지 지구의 인간 생태계가 그나마 무사한 것은 오직 그 노부부 덕분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이상우 감독의 다큐멘터리 전쟁영화다. 한국전쟁 때 미군에 의해 수백 명이 죽은 영동군 노근리 사건을 영화한 것이다. 문성근 등 알려진 배우들도 몇 명 출연했으나 딱히 주연 배우라고 꼽을 만한 사람도 없고 줄거리도 단순한 영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을 떼지 못하고 봤는데 그것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필자의 고향이 영동이라 출연 배우들의 말투가 정겨웠다.
1950년 7월, 평화로운 충청북도 황간의 한 작은 마을은 한국전쟁이 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태평했다. 노인들은 나무 그늘에서 한가로이 장기를 두고 있었고 젊은이들은 논밭에 나가 일을 했을 정도로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일상이었다. 초등학교에서는 합창대회 연습이 한창이었다.
그런데 이 평화로운 마을에도 전쟁의 여파가 밀려온다. 미군들이 간간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하늘에는 전투기들도 보였다. 전쟁 초기 북한군에 밀린 미군들이 저지선으로 이 마을을 선정한 것이다. 미군들은 곧 전투가 치열하게 벌어질 것을 예상하고 주민들에게 피난을 권한다. 남쪽이 아닌 동네의 깊은 산속으로 피난을 가면 산에 숨어 있는 빨치산들에게 습격을 당할 수 있으니 남쪽으로 피난을 가라고 몰아쳤다. 실제로 필자의 조부모와 동네 어르신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대부분의 주민들은 남쪽으로 피난을 가지 않고 깊은 산속으로 몸을 피했다고 한다. 이 지역은 백두대간이 지나가는 줄기로 깊은 산이 많기도 했다.
남쪽으로 피난길에 나선 수백 명의 주민들은 미군 트럭을 보면 길을 비켜주었다. 그런데 하늘을 몇 차례 선회하던 미군 비행기에서 갑자기 긴 피난민들의 행렬로 폭탄과 총알을 쏟아 부었고 주민들을 대량으로 학살했다. 피난민 속에 위장한 적군이 섞여 있다는 정보에 의해 사살 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노근리 쌍굴 터널로 몸을 피한 피난민들마저 저지선에 있던 보병부대의 사격으로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무참하게 살해을 당했다. 기록에 의하면 단 25명만이 살아남았다고 한다.
이 사건은 그간 묻혀 있다가 1999년 AP통신의 최상훈, 찰스 J. 핸리, 마사 멘도자 기자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이들읁 노근리 사건에 대한 취재 보도로 2000년 퓰리처상까지 수상했으며 이어서 ‘The Bridge at No Gun Ri’라는 제목의 책을 내기도 했다. 언론의 힘이다.
아쉬운 부분은 당시 피난민이 500여 명이었고 실제 희생자가 300여 명이 넘었다는데 피난민으로 나온 엑스트라 출연은 몇십 명에 불과해서 사실감을 감소시켰다. 그만한 인원 동원이 어려웠다면 컴퓨터 그래픽으로라도 커버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고 본다.
‘작은 연못’이라는 제목도 내용과 동떨어져 영화를 보는 내내 연못을 찾느라고 관심을 가져봤으나 못 찾았다. 굳이 연못이라면 노근리 쌍굴 앞의 웅덩이일지 모른다. 이 영화에 기꺼이 자신의 음악을 쓰게 해준 김민기에게 보답하기 위함이었는지 모른다. ‘작은 연못’은 1993년 김민기의 4집 앨범의 타이틀이다.
어느 날 나이가 들고 보니 살아온 삶에 대해 쓰고 싶어졌다. 책상 앞에 앉았다. 펜을 들었다.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종이에 적어볼까? 하지만 손에 들려진 펜은 곡선을 그리다 갈 길 몰라 방황한다. ‘그것참, 글 쓰는 거 생각보다 쉽지 않네!’ 하던 사람들이 모여 글쓰기에 도전했다. 생활의 활력이 생기더니 내가 변하고 함께하는 동료들이 성장하는 감동 스토리도 하루하루 글로 쌓여갔다. 이웃들의 정이 잔잔하게 이어지는 ‘부천 글쓰기 모임’에 다녀왔다.
지하철에서 내려 버스를 타고 원미동으로 향했다. 마치 유니버설스튜디오나 방송사 드라마 세트장 방문만큼이나 기대됐다. 양귀자의 소설 의 배경이 된 이곳에서 글 쓰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부천시 원미 2동 주민자치센터에서는 매주 목요일 오전 11시 반. ‘글쓰기 모임’ 강좌가 열린다. 강좌가 이어져온 지도 어언 6년. 수필집도 5권이나 출간했다. 등단한 회원, 부천 지역신문 시민기자가 된 회원, 이 강좌에서 공부한 것이 바탕이 돼 뒤늦게 대학 공부를 하는 회원도 생겨났다. 글쓰기를 통해 다양한 길을 찾고 발전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보다 빛나는 모임으로 성장했다.
부천시 글쓰기 모임은 부천시 평생학습센터 특화 프로그램으로 선정돼 지원을 받는 강좌 중 하나다. 원미동 글쓰기 모임 외 시(市)의 지원을 받는 대부분의 강좌는 몸을 움직이고, 발산하는 활동 프로그램. 글쓰기 모임을 6년간 이끌고 있는 박창수(52) 작가는 이 모임이 꽤나 희귀하다고 설명한다. 글쓰기가 어렵다는 생각 때문에 일반인이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데 6년 동안 모임이 이어져오는 것은 전국에서도 보기 드문 일이라고 덧붙였다. 올해는 19명의 회원이 글쓰기 모임의 문을 활짝 열었다.
노년의 글쓰기는 힐링이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등단보다는 자신이 뭘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의 답으로 글쓰기를 선택했다. 고민 끝에 문학에 도전하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한 문장 한 문장 써내는 데 의미를 둔다. 박창수 작가는 글쓰기 모임의 기본 바탕은 ‘힐링’이라며 방점을 찍는다.
“글쓰기는 힐링 단계라고 생각해요. 자기 자신이 경험했던 것을 글로 쓰는 연습을 하면서 풀어나가요. 그다음이 문학으로 넘어가는 과정이죠. 우리 수강생들 중에는 사실 상처받으신 분들도 많아요. 다 큰 자녀가 죽었다든가, 시어머니와의 갈등 등 정말 다양해요. 그런데 이곳에서 치유하고 가슴을 여는 것이죠.”
글쓰기를 하고 50세가 넘어서야 대학 공부에 도전한 회원도 여섯 명이나 된다. 박창수 작가는 글쓰기 모임 회원 개개인의 수필집 발간을 염두에 두고 있다. 등단보다 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박창수 작가는 “열심히 글을 쓰고 또 부쩍 글쓰기 능력이 늘고 있기에 가능하다고 본다”며 “제대로 된 방법으로 회원들이 자신의 이름으로 된 책을 낼 수 있도록 도와드릴 것”이라고 말했다.
☞mini interview
류인록(부천글쓰기모임회장·71) 글쓰기로 새로운 삶을 선물받다
이제 글 쓴 지 5년 됐습니다. 살면서 타자기 한번 못 만져봤습니다. 62세가 돼서야 노인복지관에서 컴퓨터를 처음 접했습니다. 독수리 타법 면한 지는 오래됐어요. 그리고 포토샵(사진편집 프로그램)과 파워포인트도 배웠어요. 여행지에서 사진을 찍어오면 포토샵 스위시로 사진들을 꾸밉니다. 사별하고 저 혼자 산 지 꽤 됐지만 이렇게 살다 보니까 세상 지루한 줄 몰라요. 지금은 우리 원미마을신문 기자로 활동해요. 글쓰기 교실도 다니고, 주병률 시인에게 시를 배우러 다닙니다. 취미생활이 또 하나 있어요. 여행을 다니는 겁니다. 작년에 홍도에 다녀왔고, 제주도, 안동 이육사 문학관, 영월에도 다녀왔어요. 여행을 다녀오고 나면 글감이 나오더라고요. 기행문 쓰는 게 좋아요. 제 입장에서 쓰기가 좀 쉽더라고요. 그것도 갔다 와서 일주일 안에 써야지 지나가면 금세 잊어버려요. 글을 쓰게 된 이유는 제가 원래 운동신경이 안 좋아서 다른 건 별 흥미가 없었어요. 글쓰기를 선택했고 버틸 만했어요. 첫 글을 쓰고는 정말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6년 전 먼저 간 마누라에 대한 글이었거든요. 그 글이 실린 책은 우리 마누라 납골당에 넣어두었어요. 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몇 편이라도 더 써서 수필집도 내고 싶고, 시집도 내고 싶어요. 시도 쓰는데 현재 68편을 썼어요. 시집도 하나 내고 싶습니다.
이양순(요양보호사·61) 올 가을에 제 이름으로 된 수필집이 나옵니다
글은 나랑 상관없다고 생각했어요. 워낙 기록하는 것 자체를 싫어했거든요. 그런데 2005년도에 요양보호사가 된 뒤 만나게 된 위안부 피해 할머니를 보면서 글을 쓰게 됐습니다. 너무 가슴이 아픈 거예요. 한 요양병원에 입원한 분이셨는데, 치매임에도 불구하고 아픈 기억은 고스란히 안고 계셨어요. 제가 그 일에 대해 당시 글을 써놓았어요. 그리고 몇 년이 지나 위안부 피해자들을 위한 수요집회를 TV로 접하다 제가 쓴 글이 생각나서 라디오 방송에 냈어요. 그런데 그게 방송으로 나오더라고요. 2013년도였어요. 방송에 채택된 뒤 글을 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글 쓰는 거 행복합니다. 제 재능에도 놀라고 기억력은 한계가 있는데 글로 기록해놓으면 안 잃어버리니까 좋고요. 요즘 요양원에서 일하고 있기 때문에 글감이 좀 많거든요. 아직 미흡해서 걱정입니다. 가을쯤 제 이름으로 된 수필집이 나온다고 하는데 고민됩니다. 물론 글 쓰는 사람 입장에서는 영광이지요. 부끄럽기도 하지만 기대도 됩니다.
글박원식 소설가 사진 오병돈 프리랜서(Studio Pic) obdlife@gmail.com
귀촌을 하자고, 시골의 자연 속에서 노후의 안락을 삼삼하게 구가하자고, 흔히 남편 쪽에서 그런 제안을 먼저 내놓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는 발칙한 발상이라 규탄당하기 십상이다. 아내에 의해서 말이다. 무릇 여자란 명민하게 머리를 쓰는 버릇이 있는 종족이다. 감관이 발달한 이 고등한 생물체는 도시의 아파트라는 쾌적한 온실과 결별하고 시골이라는 야생으로 이주하는 ‘거사’에 따라붙을 온갖 불편과 고생을 미리 훤히 내다본다. 일테면, 시골엔 손쉽게 쇼핑을 즐길 마트나 백화점이 없으며, 우아한 사교를 즐길 문화공간도 열악하고, 자칫 고독을 벗 삼아야 할 신세로 전락할 우려가 있으며, 그 무엇보다 풀이나 해충에게 시달릴 일이 정말이지 몸서리치게 싫다고 판단한다. 그래서 대뜸 반기를 들 공산이 크다.
그럴 경우, 귀촌을 선창한 남편은 머리칼을 득득 쥐어뜯으며 부르짖는다. “아아, 괴롭고 괴롭도다. 마누라는 어쩌면 그토록 나와 취향과 이상이 다르단 말인가? 이는 무슨 잔인한 운명의 농간이란 말이냐!” 소나기처럼 쏟아지려는 눈물을 간신히 참으며, 비감에 젖어 속으로 악을 쓰는 것이다. 이쯤에서 어떤 남편들은 자신의 불운을 타박하며 귀촌의 꿈을 허공으로 날려 보낸다. 귀촌생활에의 도도한 로망과 세찬 영감에 사로잡힌 어떤 남편들의 경우엔, 불굴의 의지를 발동해 아내를 기차게 구워삶을 정교한 방책을 새삼 모색한다. 당나귀처럼 드센 고집으로 한사코 도리질을 하는 아내를 설득할 만한, 자못 그럴싸한 유인책을 진지하게 숙고하는 단계에 들어간다. 이 단계에서 충분히 합리적이고 매력적인 청사진을 개발할 경우, 그는 비로소 성공을 거둔다.
나는 지금 경북 예천 풍양면의 시골마을에 있는, 정진성(69)씨 내외가 사는 집 거실에 앉아 있다. 정씨의 귀촌은 순탄한 과정을 밟았다. 상당수의 귀촌 부부들이 난해하고도 예리한 충돌과 협상을 거쳐 어렵사리 귀촌에 이르지만, 그는 아내의 갈채와 자비에 힘입어 쾌조의 시발을 했다는 게 아닌가.
부부가 의기투합한 귀촌
서울에서 살았던 정씨는 침상에서 벌떡 일어난 어느 날 아침, 평소에 하지 않았던 이색적인 생각이 퍼뜩 머릿속에 떠오른 걸 알아차렸다. 서울을 냅다 걷어차고 시골로 내려가고 싶다는 충동이 초저녁별처럼 영롱하게 들솟았던 것이다. 인파와 차량이 들끓고, 소음과 미세먼지가 난무하고, 계산과 꿍꿍이가 창궐하는 대도시, 그 머리 아픈 정글을 탈출하고 싶다는 기분을 느꼈던 거다. 이 심상치 않은 기분은 점점 자라 확고한 신념으로 비약했다. 이후 그는 드디어 아내에게 귀촌을 제안했다. 아내 전용숙(64)씨의 반응은 뜻밖에도 매우 우호적이었다. 선선히 동의했으니까 말이다. 결과적으로 정진성씨는 귀촌을 둘러싼 아내와의 논쟁이나 힘겨루기를 일거에 면제받은 셈이다. 그렇게 단숨에 의기투합해서 부부가 시골에 내려온 게 지금으로부터 3년 전의 일. 아내 전용숙씨의 얘기를 들어볼까.
“보통은 여자들이 귀촌을 반대한다고 하지만, 저는 그러지 않았어요. 시골로 가자는 남편의 제안이 차라리 고마웠어요. 남편이나 저나 서울생활에 흥미를 잃어가던 시절이었으니까요. 서울을 떠나 조용한 시골에서 노후를 보내는 게 이상적이라는 생각을 했던 거예요. 게다가 제가 자연을, 그중에서도 꽃을 매우 좋아하는 취향이라서 반대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지요. 귀촌을 하면 실컷 꽃을 가꾸며 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가슴이 설어요.”
“꽃의 그 무엇을 매우 좋아하죠?”
“음. 꽃은 그 아름다운 모습이나 향기 자체로 감동을 주기도 하지만, 비바람 같은 심한 고통을 겪으며 피어난다는 게 참 좋아요. 크거나 작거나, 소박하거나 화려하거나, 모든 초목마다 제 나름의 역경을 이겨내고서야 꽃을 피우니까. 그런 점에서 저는 꽃을 통해 위로와 용기를 얻습니다.”
“남편께서 귀촌을 발상한 배경은 무엇이었을까요?”
“서울생활이 주는 피로감이 한계에 이르렀던 것 같아요. 남편은 토목 기술자로 평생 공사 현장에서 뛰었어요. 대림산업 부장으로 재직했던 1996년엔 석탑산업훈장을 받기도 했습니다. 유능한 엔지니어로 토목 현장을 누빈 사람이었죠. IMF 직후엔 심각한 시련을 겪기도 했지만, 자부심을 갖고 직분에 최선을 다했다고 봐요. 엔지니어에겐 정년이 없습니다. 일흔 살이 넘어서도 직장생활이 가능하죠. 그러나 60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심신에 공히 무리가 오기 시작했어요. 특히나 비즈니스상의 술자리가 잦아 더 이상 일을 계속하다간 몸부터 무너질 거라 판단했던 것 같아요. 그즈음 귀촌을 착상했는데, 다행히 남편의 고향에 시부모님께서 돌아가신 뒤로 10년째 비어 있는 집이 있어 결정과 실행이 빨랐어요. 그러고 보면 저희는 귀촌이자 귀향을 한 경우라 봐야겠죠.”
“예수조차 고향에선 배척당했다고 해요. 노년에 고향으로 돌아온 부부에게 쏠렸을 이웃들의 각별한 관심이 불편하진 않았나요?”
“텃세랄까, 그런 거 말이죠? 처음 그런 문제에 염려가 없지는 않았지만, 실제로는 아무런 불편이 없었어요. 워낙 인심 좋고, 반듯한 풍속이 정착된 시골이라서 오히려 과분한 환대를 받았습니다. 게다가 남편이 술을 좋아하는 사람답게 매우 사교적인 성격이라 융화가 쉬었던 것 같아요. 남편은 현재 우리 마을의 노인회장이에요.”
전용숙씨 내외가 사는 집의 풍색은 소탈하다. 시부모님들이 살았던 당시의 구색을 가급적 그대로 놓아두거나 살려냈다. 꼭 필요한 부분에만 약간의 손질과 약간의 단장을 했을 뿐이다. 인간이 마침내 한 줌 흙으로 돌아가듯이, 집이라는 사물 역시 결국은 자연으로 귀환하는 법이니 굳이 거창한 인위를 가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에서다. 햇볕이 물살처럼 찰랑이며 들이쳐 화단의 풀꽃들을 어루만지는 광경을 바라볼 수 있는 마당이 있으니 이미 만족스럽고, 대기의 입자를 흔들며 불어오는 솔바람, 강바람이 무시로 드나들 수 있는 유리창이 있기에 더욱 흡족하다는 게 전씨의 생각인 것 같다. 그녀가 시골살이 3년을 통해 배우거나 얻은 것 중에 최상의 것은 무욕(無慾)이 주는 마음의 평안이라지.
시골생활이 부여하는 절호의 기회들
집 뒤편으로는 제법 너른 텃밭이 딸려 있다. 12월의 텃밭은 철 지난 해변처럼 썰렁하지만 온기라 할 만한 기운이 여전히 감돈다. 서울에서 아파트 베란다에 꽃을 키워 자연과 땅에 대한 갈증을 간신히 채웠던 전씨에게 시골 텃밭은 숫제 낙원이다. 봄부터 가을까지 그녀는 갖가지 작물을 심어 기른다. 풀을 뽑아내는 일이 고역스럽다기보다는 미안스러워 내심에서 우러나는 애도를 보낸다. 텃밭이니 가혹할 정도의 노동은 필요치 않다. 시장에 내다 팔 물건이 아니기에 소출에 욕심을 낼 까닭도 없다. 그럼에도 비지땀을 흘려 공을 들이는 건 작물들이 갓 태어난 손주나 노랑 병아리와 다를 바 없는 애틋한 생명체라는 생각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녀는 텃밭 농사를 서정적으로 즐긴다. 도시의 여자들이 찜질방에서 즐기듯이, 찻집에 둘러앉아 애먼 남편들의 흉을 푸짐하게 늘어놓으며 수다를 즐기듯이, 그녀는 텃밭에서 유유하게 노닌다.
텃밭보다 더 오래, 더 오붓하게 즐길 수 있는 오락은 꽃밭에서 구현한다. 그녀는 해마다 30여 종의 화초를 가꾼다. 꽃철이면 울안에도 울밖에도 온통 꽃이다. 경북대 농대에서 원예학을 전공한 그녀에게 꽃은 만고에 친애할 만한 동무다. 유심한 눈길로 꽃을 바라봐 꽃과 바람이, 꽃잎과 햇살이 어떻게 속삭이는지를 재빨리 간파한다. 폭풍에 찢긴 꽃대의 고통을 마치 자신의 고통처럼 느낀다. 만개한 꽃들의 환희를 자신의 것으로 삼아 마음에 기쁨을 담뿍 담는다. 그렇기에 시골의 나날은 태반이 꽃날이렷다. 이런 자각을 할 때면, 그녀는 서둘러 일찌감치 귀촌을 하지 않은 것을 살짝 아쉬워한다.
“서울에 살 때 실내원예연구회라는 단체에서 활동했어요. 실내조경협회 부회장을 맡기도 했고요. 문화센터 원예 강좌에 강사로 나가기도 했어요. 꽃을 즐기며 다양한 경험을 했던 거예요. 원예치료사 자격증도 있어 장애인들을 대상으로 한 원예치료 봉사활동도 했습니다. 일상 안에 꽃 사랑이 들어와 있을 경우, 한결 안정되고 조화로운 생활이 가능한 것 같아요.”
“꽃을 너무 편애하는 건 아네요? 사람도 꽃 아닌가(웃음)?”
“맞아요. 사람과 꽃이 다를 게 없다는 걸 시골에 살며 더 실감해요. 일부 도시 사람들은 요즘의 시골 인심도 도시와 다를 게 없다고 보지만 그건 사실과 달라요. 적어도 우리 마을에선 그래요. 뭐든 나누고 돕는 풍속이 여전하거든요. 귀촌한 뒤 원주민들에게 배척당하는 사람들이 있다죠? 그건 시골의 바탕에 깔린 나눔의 정서에 부응하지 못한 탓이라 봐요. 무조건 나누고 베풀어야 해요. 그런 처신이 손해를 가져오는 게 아니라 결국은 이득을 얻는 현명함이라는 걸 아셔야 해요.”
“시골생활이란 이웃들과 나눌 줄 아는 실력을 기를 수 있는 기회라는 얘기로 들립니다.”
“절호의 기회라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요? 제가 저 자신에게 바라는 인간상은 이웃에게 쓸모가 있는 인간, 바로 그런 것이에요. 나만을 중심에 놓는 이기심에 매몰되지 않고, 남들의 어려움이나 외로움에까지 손을 뻗을 수 있는 사람으로 산다면, 그건 참 잘 사는 인생이지 않겠어요?”
남을 진심으로 배려할 수 있다는 건 그 사람의 마음이 이미 평온한 상태에 놓여 있음을 뜻할 게다. 그러나 마음이라는 망둥이는 자주 길길이 날뛰어 소란 속으로 들어간다. 이와 같은 마음의 동향을 주시해서 단속할 수 있는 기회를 시시때때로 부여받을 수 있는 게 귀촌생활이라는 게 전씨의 생각인 것 같다. 사실 시골생활을 무난하게 누리기 위해서는 생각과 마음의 스케일을 확대해야 한다. 마을 전체를 나의 집으로, 마을 사람 전부를 내 가족으로 바라보는 광폭의 마음, 그리고 소소한 풀꽃에까지 연민을 느낄 줄 아는 감성까지 가세한다면 귀촌의 나날들은 안전하게 흘러갈 수밖에 없다.
“시골에 살며 저는 많은 걸 얻었어요. 서울에 살 때엔 부부간에 대화가 거의 없었지만 여기 내려온 뒤부터는 많은 대화를 나누게 되었어요. 그렇다 해도 남편이라는 존재는 영원한 미스터리이지만, 남편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포기할 건 딱 포기해버릴 수 있는 능력을 키울 수 있었어요. 서울에서 지출했던 생활비의 절반쯤이면 너끈히 살아갈 수 있는 경제적 이점도 매력적이죠. 천성이 게으른 사람들에겐 오직 스트레스로 다가올 수 있을 갖가지 노동도 운동이나 춤처럼 즐길 줄 아는 힘이 생겼고요, 덕분에 건강도 좋아졌어요. 남모를 애환? 숨기고 싶은 고민? 그런 게 전혀 없을 수 있겠어요? 인간이란 사실 굉장히 불안하고 모순적인 존재잖아요? 마음에 소용돌이가 칠 때면 강변을 산책해 속을 비워냅니다. 우리 마을의 멋진 강변 풍경을 보여드리고 싶어요. 함께 걸어보실래요(웃음)?”
전씨 내외가 앞장서 강변으로 향한다. 첼로의 저음처럼 깊어가는 12월의 강변 오솔길. 강가에 늘어선, 잎 떨군 나무들엔 실존의 깊이가 있다. 군더더기를 다 털어버리고 본질만 남은 모습으로 비쳐서. 사람이 어떻게 저 겨울 나목의 허심(虛心)을 온전히 닮을 수 있을까마는, 가급적 비우고 또 비우라는 소식은 비처럼 쏟아진다. 전용숙씨가 누리는 소박한 시골생활의 즐거운 지향도 비우기에 있다는 것이고.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 , 등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