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탁번의 시는 쉽고 통쾌하고 재미있다. 술술 읽혀 가슴을 탕 치니 시 안에 삶의 타성을 뒤흔드는 우레가 있다. 능청스러우나 깐깐하게 세사의 치부를 찍어 올리는 갈고리도 들어 있다. 은근슬쩍 염염한 성적 이미지들은 골계미를 뿜어 독자를 빨아들인다. 시와 시인의 삶은 정작 딴판으로 다를 수 있다. 오탁번은 여기에서 예외다. 그의 시와 삶은 별 편차 없이 닮았다.
올해로 77세. 어느덧 으슥한 노경에 접어들었지만 오탁번의 시작(詩作) 활동엔 휴업이 없다. 작년에는 시집 ‘알요강’으로 ‘목월문학상’을 받았다. 나는 ‘알요강’을 펼쳐드는 순간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길이 없었다. 앞 페이지에 나오는 ‘서문’부터가 ‘오탁번표’ 해학의 폭죽이지 않은가. 그지없이 짤막한 서문의 내용을 보시라.
“오탁번 새 시집 ‘알요강’이 나온대/아직 안 죽었나?/죽긴, 요즘도 매일 소주 한 병 깐대/정말?”
오탁번과 마주앉은 곳은 충북 제천시 백운면 산촌에 있는 원서문학관 작업실. 그는 고려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로 재직하다가 은퇴했다. 폐교를 손질해 꾸민 원서문학관은 퇴직 이후의 삶이 실린 창작공간이다. 용인시에 있는 시니어타운의 자택과 이곳을 오가며 지낸다. 날마다 소주 한 병을 눕힌다고 서문에 드러냈지만, 이곳에서 그가 하는 일은 아마도 주로 창작일 게다. 여차하면 흥겨워 한잔 마시듯이, 여차하면 설레어 작품에 손을 대는 사람. 그게 오탁번이니까. 이즈음엔 손에 쥔 물처럼 새나가는 세월에 눈이 가고 마음이 닿아서일까? 그가 나이 얘기부터 꺼낸다.
“이 나이 먹도록 내가 살아 있을 줄 몰랐다. 다행히 남들에게 욕을 먹지는 않고 살았다. 밥값은 하고 살았거든. 그렇더라도 이건 너무 오래 산 거 아닌가?”
“장수시대다. 오래 살고 싶지 않으신가?”
“얼마 전, 투병 중인 이어령 선생을 만났는데 이런 얘기를 하시더라. 김유정이나 이상이나 다들 30세가 못 돼 죽었다고. 선생 자신도 30세를 넘겨 살 것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고. 뭔가 공감되는 기분이더라. 오래 산다는 거, 그거 좋은 것만은 아니다. 불편한 게 많거든. 요즘 이빨이 흔들린다.”
“동양의 정신 중에는 노경을 삶의 절정으로 보는 관점이 있다.”
“육체적 노쇠를 빼고 따지자면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 꽃으로 말하면 가장 활짝 핀 상태가 노경이지 않겠는가. 핀 꽃이 마침내 지는 게 죽음이고. 내가 바라는 건, 통째 톡 떨어지는 동백꽃처럼 순간의 미학 속에 지고 싶다는 것이다.”
“나이 들며 찾아오는 태도의 변화에는 어떤 게 있을까?”
“난 담낭절제수술을 받아 쓸개 빠진 인간이 됐다. 이제 줏대 없이 그냥저냥 살면 된다. 그동안 줏대 있는 척 사느라고 무지무지 애먹었다고. 어휴! 속 시원한 거라. 늘그막에 내 인생의 표리부동을 청산했거든.”
특유의 화통한 언설이 흘러나온다. 언설만이 아니라 오탁번의 시는 흔히 자신의 밑바닥을 샅샅이 훑어 허울과 가면을 잡아내는 자가심문의 시어들로 직조된다. 그는 일찍이 시라는 차가운 수사관 하나를 고용, 자신을 미행하게 하고 불쑥불쑥 불심검문을 하도록 하명해둔 것 같다. 시로써 자신을 치고 때리니 말이다. 공자가 설한 뉴스 제목을 가져오자면 ‘신독’(愼獨, 남이 보지 않더라도 엄히 자신의 행세를 점검하라는 뜻)이다.
어머니라는 이름의 종교
문학은 재능과 열정의 폭발이 있고서야 가능하다. 오탁번의 문예적 발화(發火)는 이르고 화려했다. 20대 때 중앙지 신춘문예에 동화를 필두로 시와 소설까지 연달아 당선, 문단에 화제를 뿌렸다. 이후 소설에 주력하다 중년 즈음부터 시 쓰기에 몰두해왔다. ‘제명대로 못살 것 같은 소설 창작의 어려움 때문’이었다지. 시란 그에게 무엇일까.
“에헴! 하고 목에 힘주어서는 가능할 수 없는 장르가 시다. 자기 부끄러움에 관한 고백! 내겐 시의 의미가 그렇다. 내 안에 숨어 있는 악마적인 걸 다 까발리는 행위가 시이고 문학이다.”
“선생은 지난날 글 쓰는 사람의 처절함과 맹렬함을 자살폭탄조에 빗대었다. 지금도 그런 생각 하시나? 쉽게 읽히는 시로 보자면 한칼에 내려치듯 단번에 가볍게 써내려갈 것만 같은데.”
“한칼에? 어림없는 얘기다. 난 순우리말의 아름다움을 벼려 시를 쓰는 사람이지 않은가. 늘 사전을 찾아가며 시를 짓다 보면 하염없이 긴 시간이 소요된다. 진통을 자심하게 겪으면서 말이다. 과거나 지금이나 창작이란 어려워 코피를 쏟으며 쓴다. 문학뿐이겠는가? 삶 자체도 마찬가지. 난 실로 코피를 흘려가며 살아왔다. 아이고, 이런 나를 두고 남들은 누릴 것 다 누리며 살았다고 오해를 하네.”
“조지 오웰은 작가의 창작 동기 네 가지를 꼽았는데 순전한 이기심, 즉 명예욕을 첫째로 꼽았다. 어떻게 생각하시나?”
“명예는 멍에의 다른 이름 아닌가? 난 명예를 얻기 위해 문단의 패거리 놀음에 끼거나 눈웃음을 판 적이 없다. 내가 최고라는 자부심은 가지고 산다. 그런 게 없다면 어떻게 쓰며, 어떻게 견디겠는가. 그러나 오탁번의 시에 숨겨진 보석을 보지 못하는 사람도 많다. 뭐 어쩌겠나? 보석을 몰라보는 사람만 손해볼 뿐이다.”
“좋아하는 시인은?”
“시라는 건 거미줄에 맺힌 아침이슬 같은 것이다. 거기에 돌을 얹어 거미줄을 끊어버리는 식의 시를 쓰는 시인이 흔하다. 그런 점에서 정지용은 단연 빼어난 시인이지. 그의 시 ‘백록담’을 보라. 기막힌 수작이지 않은가. 고어와 토속어를 빈번히 사용해 시어의 영역을 넓히고 모국어를 확장한 백석도 내가 좋아하는 시인이다.”
작업실 밖 뜰엔 겨울나무들. 거머쥔 것 하나 없는 나목들이 수도승처럼 허심한 표정을 짓고 있다. 오탁번은 이곳에서 지내며 많은 나무를 심었고, 텃밭을 일구기도 했다. 이젠 심고 가꾼 게 너무 많아 관리가 버거울 지경이다. 저만치 사방에서 성벽처럼 에워싸고 범람하는 산경(山景)마저 일쑤 허허로운 건, 한 번 가면 다시 못 오는 사람과 달리 자연은 순환과 회춘을 일삼아서일 테지. 그러나 자연이 주는 도저한 감흥은 노시인의 정신적 체력으로 작용할 것이다. 별에 닿을 시, 산야에 맞먹을 시를 쓰고 싶게 하는 열망의 원천일지도.
그런데 오탁번의 삶과 문학의 진정한 원천은 작고한 어머니다. 우리는 흔히 신성한 신전에서 읍소하거나 백두산이 드높아 자세를 낮추지만, 오탁번은 어머니를 생각할 때면 고개를 숙인다. 뜰 한쪽, 햇살이 들이치는 자리엔 어머니의 흉상을 모신 기념비가 고이 세워져 있다.
“어머니는 나의 종교다. 단순히 나를 낳아 길러주신 모성을 향한 고마움 때문이 아니다. 나의 상상력과 몽상의 원천이기도 했거든. 우리 집은 너무도 가난해 소나무 속껍질로 허기를 달랬다. 그 극도의 가난 속에서도 어머니는 밤이면 필사본 심청전 같은 걸 읽으시더라고. 그런 어머니를 바라보며 자란 과정 자체가 나의 문학공부였던 셈이지.”
“고향에 문학관을 꾸린 건 결국 어머니가 못내 그리워서?”
“그렇지. 나에겐 스승 이상의 길이자 현재진행형의 신앙이니까. 문학청년 시절의 어느 날, 술 마시고 미쳐 한강에 빠져 죽으려 했다. 그런데 어머니 생각이 나서 죽을 수가 없던걸. 요즘도 힘든 일이 있을 때면 어머니를 찾는다. ‘어머니! 이거 어떡해요?’ 그러면 어머니가 응답하시더라. 텔레파시로.”
“어떤 응답을?”
“‘너는 큰 인물인데 무얼 망설이느냐, 네 뜻대로 밀어붙여라!’ 매번 그런 답이 돌아온다. 일찍이 어머니는 어린 나에게 항상 말씀하셨다. ‘너는 큰 인물이 될 거야!’라고. 이런 어머니 밑에서 자란 자식이라면 누구나 범죄 없이 잘 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는 글로 자기 어머니를 비난하거나 이상하게 그리는 작가를 증오한다.”
“물적 간난(艱難)의 체험 역시 창작의 자산일 수 있다. 그러나 가난은 괴롭다. 가혹한 가난에 시달린 성장기에 느낀 감정의 기류는 어떤 것이었을까.”
“분노의 감정이 컸다. 그래서 대학생 때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서너 번 징병 거부를 했지. 나라를 지키기 위한 신성한 의무라 하지만, 내겐 지킬 게 하나도 없었다. 집도 땅도 없다, 국가가 나를 위해 해준 게 무엇이냐, 그런 원망으로 죽을 셈 치고 입대를 거부했지. 나중에 뒤늦게 병역을 마치긴 했지만 울분이 들끓더군.”
히말라야 설산에서 글 쓰고 싶다
오탁번이 냉장고에서 꺼내온 술병을 탁자에 올리더니 잔을 채운다. 이슬처럼 투명해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는 소주다. 큰 공 들이지 않고도 판타지의 회랑을 산책할 수 있게 하는 게 소주 한 병이다. 오탁번은 주량보다는 음주가 주는 감각의 광량(光量)에 심취하는 술꾼이다.
“내가 좋아하는 글귀가 있다. 일독 이호색 삼음주(一讀 二好色 三飮酒)라! 이건 제주 유배에서 풀려난 시절에 추사가 쓴 현판 글이다. 이것의 원전은 청나라 ‘소대총서’(昭代叢書)이지만, 독서와 색과 술을 즐길 만한 것들 중에서 으뜸으로 쳤으니 인생의 정곡을 찌른 게 아니겠는가. 음주를 세 번째에 둔 건 술로 자칫 망가질 수도 있어서일 거라 본다.”
“반면에 독서를 첫손에 꼽은 건, 놀 때 놀더라도 독서를 먼저 해 정신부터 채우라는 뜻일 것 같다.”
“호색의 색을 반드시 섹스로 읽을 일도 아니겠지. 색즉시공의 그 ‘색’과도 무관하다곤 할 수 없을 테니까.”
“술이 아니더라도 삼라만상에 취하기 쉬운 게 시인이다. 선생 역시 자연에 취해 지내고 있는 게 아니겠는가?”
“자연과 더불어 늙다 보니 내가 이젠 어린애 다 됐다. 순진성, 천진성이 내 안으로 들어오는 걸 느끼는 것이지. 내가 사물을 찾아 바라보는 게 아니고, 어린아이처럼 그저 사물이 보여주는 그대로 보게 되더라고. 일부러 찾을 때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더라는 얘기다. 이거 아는가. 갓난아이는 촛불을 보면 예쁘니까 만지고 싶어 하고 먹고 싶어 한다. 촛불의 아름다움을 눈에 보이는 그대로 느끼는 갓난아이의 마음. 이게 바로 시인의 마음이다.”
노구에 서린 세월의 흔적이 좀은 쓸쓸하지만 카랑카랑한 결기와 시퍼런 촉은 여전하다. 안경 너머 핼쑥한 두 눈은 간간이 빛을 뿜는다. 언젠가 그는 말했다. 시인의 시선은 나무를 밑에서 보는 게 아니라 독수리처럼 위에서 내려다본다고.
“감히 물아일체(物我一體)를 느낀다고 하면 건방진 소리이겠지만 이젠 일체의 것들에 감정이입이 자연스럽게 된다. 그 무슨 힘으로 나리꽃 새싹은 굳은 땅을 뚫고 거침없이 솟아올라오는가? 경이로워 새싹의 마음이 되곤 한다. 이젠 마음대로 별짓을 다해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을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그러나 단 하나, 건강 문제엔 불편을 느낀다. 자다가 꼴깍 숨넘어가야 제일 좋을 텐데, 중풍이나 치매에 걸려 허우적거리다 떠나게 되면 이는 치욕이지 않겠는가.”
훗날의 일을 미리 앞당겨 걱정할 필요가 있을까? 당장 문밖에 나가 무슨 변을 당할지 알 수 없는 게 사람의 일이다. 그러나 그 진상을 알 길이 없는 인생의 폐막에 그는 불안한 것이다. 그럼에도 끝내 해야 할 일이 한 가지 있으니 바로 글쓰기라는 숙업. 그러고 보면 그의 불안은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는 종막에 관한 것일 수밖에 없겠다.
“요즘 내가 구상하는 게 있다. 히말라야에 가서 여생을 보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살아남는 날까지 설산을 바라보며, 일기 형식의 글을 쓰고 싶은 거다. 당신 생각엔 어떤가? 괜찮아 보이는가? 내가 떠난 뒤엔 책이 나오겠지.”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여자는 결혼을 하면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는 경우가 많았다. 출산을 하고 남편과 자식 뒷바라지하면서 살다 보면 젊은 시절의 경력은 온데간데없어진다. ‘이렇게 사는 것이 여자의 일생이지’ 하면서 단념하려던 순간, 집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잘해보겠다고 다짐하며 빛을 따라 즐겁게 걷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됐다고 말했다. 취업과 생애 설계 분야 전문 강사이자 컨설턴트인 일·생애연구소 임순열 대표는 “나는 너무 행복한 사람이에요”라며 활짝 웃었다.
지난 10월 10일 경기도 파주시 고용복지플러스센터에서 일·생애연구소 임순열(55) 대표와 만나기로 했다. 이곳은 임순열 대표에게 친정과도 같은 곳. 작년 말까지 센터 내에 있는 파주상공회의소 중장년일자리희망센터에서 직업상담 팀장으로 일해왔다. 이날은 일·생애연구소 대표로서 강단에 서는 날이었다.
“10월 1일에 일·생애연구소 사업자등록증을 받았어요. 직업상담사로 일하면서 취업 역량 강화, 이력서 및 자기소개서 작성법, 면접 교육 관련 일을 해왔는데 좀 더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싶었어요. 취업과 생애 설계에 대한 공부를 꾸준히 할 계획입니다. 오늘은 ‘중장년의 셀프 마케팅’이라는 주제로 강의를 합니다. 일자리를 찾을 때 공개되지 않은 정보를 얻는 방법을 전달해드릴 계획입니다.”
목적이 있는 삶을 살다
임 대표는 직업상담사로 사는 게 재미있었다고 말한다. 누군가를 도와서 일자리를 찾아주는 것도, 취업이 된 사람들이 잘 적응하는 모습을 보는 것도 좋았단다.
“거의 직업상담 일에 미쳐서 살았어요. 구직자들이 처음에 센터를 찾아올 때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오십니다. 경력이 단절된 여성분들도 그렇고요. 어떤 경력이 있는지 자격증은 있는지 등등 초기 상담을 하면서 맞춤 일자리를 지원해드렸습니다. 이력서 쓰는 방법도 알려드리고 동행 면접 서비스를 원하시면 같이 갔습니다. 별종 소리를 들을 정도로 7년 동안 정말 열심히 일했어요.”
그때를 회상하면 어떻게 그 많은 일을 해냈을까 싶을 정도로 제대로 빠져 있었다. 막내아들의 군 입대가 계기였다고 했다.
“2010년에 아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친구랑 동반 입대를 했어요. ‘그래, 넌 나라 지켜라. 엄마는 엄마 일 할게’ 이런 마음으로 가족상담사 공부를 시작했어요. 그런데 저랑은 성향이 맞지 않았어요. 그 무렵 누군가 직업상담사도 있다고 소개해줘서 2011년 5월부터 공부를 시작했어요.”
상담에 필요한 자격증은 부지런히 공부해 하나씩 따냈다. 가족상담사 2급을 시작으로 직업상담사 2급, 평생교육사 2급 등을 취득한 후 2017년에는 직업상담사 1급 자격증까지 섭렵했다. 상담사 자격증을 따면서 동시에 교육자로서의 꿈도 함께 키우기 시작했다.
“고양시에서 직업 관련 교육을 받을 당시에 강사님이 인상에 남았어요. 나도 저런 강사가 되고 싶다고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강의를 너무 잘하셨어요. 상담사 공부를 할 때부터 강사가 되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지금까지 걸어온 것입니다.”
특히 임순열 대표가 취득한 직업상담사 1급 자격증은 전국적으로 500명이 조금 넘는 정도. 직업상담사 2급 자격증 보유자가 5만여 명인 것을 감안하면 직업상담사 1급 자격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1%밖에는 안 된다. 그중 한 명이 바로 임순열 대표다.
“2012년 파주시교육문화회관에서 계약직 직업상담사로 일을 시작했는데 2년 후에 정년이 보장되는 무기계약직으로 전환됐습니다. 그런데 이 좋은 자리를 마다하고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려버렸어요.”
파주상공회의소가 고용노동부 사업인 중장년일자리 프로그램 사업을 따오자 임순열 대표의 마음이 흔들리고 말았다.
“2015년 9월부터 12월까지 4개월 짜리 채용공고가 났습니다. 물론 제 판단으로는 더 오래 일할 수 있는 자리였고 상담보다는 교육 관련 일을 주로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무기계약직 체결을 해줄지는 알 수 없었어요. 그래도 해보고 싶어서 지원했는데 채용됐어요. 파주상공회의소 중장년일자리희망센터 팀장으로요. 무기계약직도 좋았지만 저는 상담보다는 교육에 더 관심이 있었습니다. 정확한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고 도전하는 것에 큰 두려움도 없었어요.”
비서교육 제대로 받은 커리어우먼
직업상담사의 길을 걷기 전까지 임순열 대표도 몇 번의 경력단절을 겪어야 했다. 그 당시에는 결혼을 하면 으레 회사를 나가야 하는 사회 분위기가 팽배했다.
“대학교에서 경영학을 공부하고 한국과학기술대학(현 카이스트)에서 학장 비서로 근무했어요. 그때는 비서 하면 커피나 타고 전화만 받던 시절이었는데 저희 학장님은 달랐어요. 외국에서 오랫동안 공부하고 오셔서 비서를 제대로 쓸 줄 아는 분이셨죠. 스케줄 관리에서부터 서류작업, 각종 스크랩 업무 등을 보면서 VIP 응대도 자주 했습니다. 대통령은 물론이고 그룹 회장님도 만났어요. 비서로서 제대로 일을 배웠습니다. 제가 결혼할 무렵 학장님이 한국과학재단으로 자리를 옮기셨습니다. 저도 함께 갔는데 그만둬야 했어요. 재단 쪽 분위기가 결혼한 여자가 일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고, 저도 학장님께 폐 끼치고 싶지 않았어요. 그 후 아이 낳고 가정주부로만 살다 보니 좀 답답하더라고요.(웃음)”
임 대표가 집 밖으로 뛰쳐나온 계기가 된 건 2001년 친정부모님이 다 암으로 세상을 떠났을 때였다. 갑작스러운 부모님과의 이별에 우울증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마음이 좋지 않았다. 밖에 나가 뭐라도 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았다.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었고 결국 주부가 쉽게 도전 할 수 있는 학습지 선생 일을 4년간 했다. 그리고 5년여를 다시 쉬다가 2010년부터 직업 상담 분야에 눈을 떠 지금에 이르렀다.
“2018년 12월에 사표를 내고 프리랜스 강사로 독립했습니다. 오랜 시간 참 많이도 다니면서 교육을 받아왔습니다. 좋은 인맥들이 생겼어요. 올해까지는 준비하는 상황이라서 홍보도 못했는데 강의해 달라고 연락을 주십니다. 한 달에 네다섯 번 정도는 하고 있습니다.”
서울 강의 입성기
임 대표가 주로 강의활동을 하는 곳은 고양, 파주, 청주 등 수도권이다. 그런데 지난 9월 처음으로 서울에서 강의할 기회가 찾아왔다.
“노사발전재단에도 중장년일자리지원센터가 있어요. 노사발전재단에서 퇴직 교원들을 위한 전문강사 양성과정을 진행했는데, 퇴직 교원이 아니더라도 구직자라면 그 과정을 들을 수 있었어요. 양성과정이 끝날 때 강의 시연을 할 기회가 있었어요. 원하는 사람만요. 시연을 잘하면 노사발전재단에서 전문 강사로 쓰겠다는 문구가 떠올라서 저도 한다고 했습니다. 생애설계 관련 주제였는데 퇴직 교사들에게 맞춘 강의을 했어요. 전문 강사 한 분과 노사발전재단 소장님이 심사위원이셨는데 좋은 평가를 주셨어요. 이후 강의제안서를 냈고 제가 된 거죠. 노사발전재단은 공공기관이잖아요. 강의자리 따기가 쉽지 않아요. 서울에서 강의를 마친 다음 날 청주에서 강의가 있어 새벽차를 타고 가는 도중에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서울 입성기를 올렸어요. 라디오 DJ가 첫 사연으로 읽어줬습니다.”
생각해보면 살아오면서 겪은 어려움이 지금의 자신을 만들기 위한 과정이었던 것 같다고 임순열 대표는 말했다.
“의미 없는 시간은 없어요. 비서 시절에는 높은 분을 많이 상대하면서 예절을 잘 배웠고요. 학습지 선생으로 활동할 때는 교육 일과 영업 일을 경험했습니다. 성당에서 봉사도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지금 제가 하는 일에 도움이 됐습니다.”
60세 전에 퇴직하는 사람이 꽤 많다. 그 뒤에도 20~30년은 더 살게 될 텐데 아무 일도 안 하고 지내기엔 너무 고약한 현실이다. 그래서 나이 들어서도 일할 수 있다는 건 축복이라고 임 대표는 말한다.
“노년의 삶에 대해 공부를 더 해서 봉사도 하고 강사로도 활동하면 좋겠어요. 역량이 되는 한 사람들한테 도움을 주며 살고 싶습니다.”
‘따듯한 남쪽 나라’라고 하지만 겨울은 그 어느 곳에서나 역시 겨울입니다. 찬바람이 옷깃을 파고들고 몸은 자연스레 움츠러듭니다. 거센 바닷바람이 오른편에서 왼편으로 불더니, 어느 순간 다시 앞에서 뒤로, 뒤에서 앞으로 종잡을 수 없게 춤을 춥니다. 돌과 바람과 여자가 많아 삼다도(三多島)라 불렸다던 말이 생각납니다. 검푸른 바다와 거무튀튀한 현무암 갯바위, 모래밭 뒤로 펼쳐진 풀밭이 깡마른 갈색으로 바뀐 지 오래. 모래밭에 촘촘히 뿌리를 내린 채 가늘고 긴 이파리를 무성하게 올렸던 통보리사초 더미도, 좌로 우로 비스듬히 줄기를 뻗은 순비기나무도 푸른빛을 잃었습니다. 푸르던 하늘에도 어느새 시커먼 구름이 들어와 반쯤 자리를 차지하니, 겨울 제주의 바닷가 풍경이 일순 을씨년스럽습니다.
황량한 바닷가 풍경에 모처럼 제주를 찾은 길손이 여수(旅愁)에 빠져들려는 순간 달덩이처럼 둥근 꽃송이가 방긋 웃으며 인사를 합니다. 미국에 ‘상하(常夏)의 낙원’ 하와이가 있듯 한국에는 사시사철 꽃이 피는 제주도가 있으니 힘을 내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제주도 바닷가에는 12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한겨울에도 많지는 않지만 찾아보면 누구나 어렵지 않게 여전히 꽃잎을 활짝 열고 있는 야생화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황금색 국화인 갯국을 비롯해 철 지난 해국과 감국, 수선화, 그리고 오늘 소개하는 갯쑥부쟁이 등등. 물론 각종 도감은 갯국 등의 개화 시기를 11월까지로 소개하고 있어, 실제와 차이가 있습니다.
누군가 말했듯 “돌아가기엔 이미 너무 많이 와버렸고, 버리기엔 차마 아까운” 12월. 산방산이 한눈에 바라다보이는 탁 트인 바닷가에서 갯쑥부쟁이의 환한 꽃 무더기를 만난 것은 각별했습니다. 모든 것이 사위어가는 한겨울 세찬 바닷바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꿋꿋하게 꽃 피운 모습이 ‘이 땅의 장한 여인’들을 똑 닮아 보였기 때문입니다. 모진 시집살이와 가난, 굴곡진 근현대사의 풍파를 이겨낸 며느리와 아내, 어머니의 모습이 갯쑥부쟁이 둥근 꽃다발에 투영된 걸 보았습니다. 그 어떤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고, 꽃을 피우고 훗날을 기약하는 모습이 정말 비슷합니다. 흔히 들국화라 부르는 가을꽃 가운데 하나인 갯쑥부쟁이. 쑥부쟁이와 개쑥부쟁이, 단양쑥부쟁이, 까실쑥부쟁이, 눈개쑥부쟁이, 가는쑥부쟁이 등과 마찬가지로 국화과 식물의 하나인데, 주로 바닷가에서 자라는 쑥부쟁이라는 뜻에서 갯쑥부쟁이란 이름을 얻었습니다. 높이는 30~100㎝로 자라며, 8월부터 11월 사이 원줄기와 가지 끝에 지름 3~5㎝의 동그란 꽃이 하나씩 달립니다. 꽃은 가운데 노란색의 대롱꽃과 대롱꽃을 둘러싼 혀 모양의 자주색 꽃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Where is it?
제주도는 물론 남해안과 동해안 등 전국 바닷가에서 자란다. 일본·대만·만주·중국 등에도 널리 분포한다. 제주도에서는 동서남북 가릴 것 없이 빙 둘러 바닷가에 자생하는데, 일부 도감은 키가 다소 작고 바닥에 기듯이 자라는 것을 섬갯쑥부쟁이로 구분한다. 또 국가생물종지식정보시스템은 제주도 남부에서 자라며 붉은색을 띤, 줄기가 가지를 많이 치고 억세고 나무처럼 딱딱해지는 것을 왕갯쑥부쟁이로 분류한다. 여러해살이풀로 꽃도 지름 5~7㎝로 다소 크다. 제주도 바닷가에 자생하는 쑥부쟁이의 경우 갯쑥부쟁이로 부르고 있다. 야생화 동호인들이 제주도에서 많이 찾는 갯쑥부쟁이 자생지는 성산일출봉이 바라다보이는 섭지코지와 광치기 해변, 산방산 앞 사계포구 해변, 그리고 마라도 등지다.
건강과 행복은 삶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이자 서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실제로 행복한 사람이 더 건강하고 오래 산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을까? 또 그 행복을 통해 얼마나 더 건강해질 수 있을까? 행복함은 몸이 아닌 마음으로 느끼는 감정이다. 마음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많은 뇌과학자는 마음으로 느끼는 행복도 모두 뇌가 만들어내는 화학적 변화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 중심에 있는 것이 바로 우리가 행복을 느낄 수 있도록 해주는 행복호르몬이다. 지금부터 우리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는 행복호르몬 4종 세트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첫째,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는 호르몬이 있다. 바로 엔도르핀이다. 엔도르핀은 기분을 들뜨게 만들고 신나고 즐겁게 해준다. 엔도르핀의 어원은 ‘endo+morphin’이다. 즉 스스로 만들어내는 모르핀 같은 물질을 의미한다. 모르핀은 통증을 줄여주고 기분을 좋게 해주는 화학물질로서 주로 약물 원료로 사용되고 있다. 그래서 엔도르핀이 많이 나오는 상태가 되면 통증이 줄어든다. 또 암세포를 죽이는 면역세포인 NK세포를 활성화한다. 실제로 우리 몸에서는 하루에도 수천 개의 암세포가 발생한다. 그러나 정상적으로 NK세포가 활성화한 상황에서는 암세포가 사멸된다. 엔도르핀이 많이 생성되면 건강해지는 이유다.
엔도르핀이 많이 나오게 하는 방법은 활짝 웃는 것이다. 웃음이 건강에 좋다는 말은 사실이다. 그런데 그런 말을 해주면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웃을 일이 있어야 웃지….” 하지만 뇌과학자들은 웃을 일이 없어도 억지로라도 웃으라고 권유한다. 그러면 엔도르핀이 많이 나오고, 그로 인해서 즐거워지고, 건강해지므로 웃을 일이 더 생긴다는 말이다. 실제 미국의 여러 암치료센터에서는 암 환자 치료 과정에 웃음치료를 도입했다. 실컷 웃게 하면 몸의 면역세포가 더 좋아진다는 게 입증됐기 때문이다.
둘째, 즐겁고 재미있는 감정이 있다. 바로 행복함을 느끼는 마음이다. 그런데 이 감정만큼이나 행복한 또 다른 느낌이 있다. 인간이라면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감정, 즉 ‘평안함’이다. 즐거움 못지않게 우리에게 중요한 감정이다. 평화로움은 삶을 윤택하게 해준다. 이러한 감정을 자주 갖는 사람은 심리적으로 안정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대인관계도 좋다. 그렇다면 평안한 느낌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그것은 ‘세로토닌’이라는 호르몬에서 비롯된다. 세로토닌은 밤이 되면 멜라토닌으로 바뀐다. 멜라토닌은 숙면을 취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호르몬이다. 즉 평안함을 많이 느끼는 사람들이 잠도 잘 자는 것이다. 숙면은 치매 예방뿐 아니라 면역 증진, 비만 예방 등 신체 건강에 매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세로토닌이 부족하면 우울해진다. 실제 우울증 약 중에는 세로토닌을 증대시켜주는 약이 있다.
세로토닌은 어떻게 하면 많이 만들어낼 수 있을까? 두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 하나는 햇빛, 다른 하나는 리듬운동이다. 햇빛이 없는 어두운 곳에서 오래 지내면 세로토닌이 감소되고 우울해진다. 리듬운동의 기본은 걷는 것이다. 밝은 낮에 산책을 하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공원이나 숲 등 자연 속에서 이러한 활동을 하면 건강에 좋다. 햇살을 즐기면서 산책을 하면 많은 세로토닌을 만들어낼 수 있다.
셋째, 성취감이나 만족감은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고차원적인 감정이다. 그래서 인간은 도전을 하며 성취감과 만족감을 얻는다. 이러한 고차원적 행복감을 갖게 해주는 호르몬이 바로 도파민이다. 도파민은 중독과 관련한 나쁜 호르몬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렇다. 도파민은 양날의 칼이다. 잘못 사용하면 중독자를 만들지만, 잘 사용하면 자신감과 만족감을 키워 행복한 삶을 살아가게 해준다. 평소에 도파민이 많이 나오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의욕적이고 부지런하다.
도파민은 ‘새로움’, ‘호기심’과도 깊은 관련이 있는 호르몬이다. 누구든 새로운 것을 보면 호기심을 갖는다. 이 감정이 도파민을 불러일으킨다. 반대로 늘 똑같은 생활을 하며 매너리즘에 빠져 있는 사람은 의욕도 없고 게으르다. 성취감이나 만족감을 얻고 싶다면 그동안 미뤄왔던 것들에 하나씩 도전해보자.
마지막으로 인간이 살아가면서 꼭 필요한 것이 바로 관계다. 좋은 관계는 행복감을 준다. 이러한 관계 속에서 느끼는 행복감과 연결되는 것이 옥시토신이다. 옥시토신은 자궁수축호르몬으로서 임산부가 분만할 때 분비되는 호르몬이다. 출산을 하면서 옥시토신이 흠뻑 분비된 엄마는 아기를 보면서 모성애를 느끼기 시작한다. 옥시토신은 관계에서 친밀감을 갖게 해줄 뿐만 아니라 신뢰감도 키워준다. 서로 믿고 의지하면서 함께 살아가는 사람끼리 느낄 수 있는 중요한 행복감 중 하나다.
그렇다면 어떤 상황에서 옥시토신이 잘 분비될까? 사랑하는 사람과의 대화, 그리고 스킨십을 통해 분비된다. 서로 교감하고 바라만 봐도 옥시토신은 증가한다. 일부 학자들은 옥시토신이 미래 사회에서 가장 주목받게 될 호르몬이라고 말한다. 옥시토신이 많이 분비되는 사람은 친화력, 사회성이 좋으며,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도 더 크다고 한다. 이러한 연구결과를 토대로 미국에서는 ‘쑥스러움 방지제’라는 이름으로 코에 뿌리는 옥시토신 스프레이 상품을 판매하고 있다. 그만큼 옥시토신이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지금까지 살펴본 4가지 행복호르몬은 좋은 부분도 있고 나쁜 점도 있다. 이들 호르몬은 홀로 작용하는 게 아니다. 서로 복잡하게 영향을 주고받는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우리의 감정이 결정된다. 이제 앞에서 말한 방법들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 많이 웃고, 자연을 벗 삼아 햇빛 아래서 산책을 하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과감한 도전도 해보자. 또 사랑하는 사람들과 자주 교감하고 대화하자. 행복호르몬을 잘 가꾸고 키워 슬기로운 피로 컨트롤러가 되면 우리 삶에 피곤함이 끼어들 틈은 없어질 것이다.
인천 무의도에 딸린 섬, 소무의도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2012년에 소무의도 둘레길인 무의바다누리길이 완공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소무의도는 해안선 길이가 2.5km에 불과한 작은 섬이지만 섬 여행의 매력을 다 갖췄으니 가성비 좋은 섬이라고나 할까. 섬 둘레를 걸으며 고깃배가 들락거리는 아담한 포구와 정겨운 섬마을 풍경, 74m 높이의 아담한 산과 푸른 바다를 두루 즐길 수 있다.
추천 코스
용유역에서 무의도행 1번 버스 탑승▶광명항 하차▶소무의인도교길▶마주보는길▶떼무리길▶부처깨미길▶몽여해변길▶명사의해변길▶해녀섬길▶키작은소나무길▶광명항에서 1번 버스 탑승/하나개해수욕장 하차▶하나개해수욕장 촬영세트장▶해상관광 탐방로▶1번 버스 타고 용유역 하차
미니버스 타고 무의도로 가는 길
올해 4월 무의도에 연륙교인 무의대교가 놓였다. 배 출항 여부와 상관없이 언제든 맘 편히 섬 여행을 떠날 수 있게 됐다. 무의도로 가는 길은 대중교통 환승 시스템이 잘 돼 있어 뚜벅이 여행자도 쉽게 찾아갈 수 있다. 인천공항 자기부상 철도를 타고 용유역에 내린 뒤, 길 건너에서 무의도행 1번 미니버스로 갈아탄다. 거잠포와 잠진도를 지날 때 차창 밖으로 반짝이는 갯벌 위에서 낮잠 자는 작은 고깃배와 조개를 캐는 주민들이 보인다. 무의대교가 생기기 전, 잠진도 선착장과 무의도를 무시로 오갔던 배 두 척은 먼바다에 한가로이 떠 있다. 승선 시간이 고작 5분이었지만, 뱃머리에 서서 섬 여행의 설렘을 만끽했던 일이 영영 추억으로 남게 됐다.
미니버스가 바다 위를 가로지르는 무의대교에 올라타자 차창으로 바닷바람이 훅 밀고 들어온다. 무의도 큰무리선착장에 도착한 미니버스는 고개 넘어 섬 끝 광명항으로 달린다. 미니버스가 비탈길을 오르락내리락하며 요리조리 잘도 달린다. 고갯마루에 오르자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옆자리 앉은 중년여성이 “아, 너무 좋네. 자주 와야겠다”라며 혼잣말로 감탄사를 연발한다. 어디가 그렇게 좋은지 물으니 반문한다. “안 좋으세요? 무의도에 사세요? 전 서울에서 여기 처음 왔는데 너무 좋네요. 다음에 남편이랑 같이 와야겠어요.” 무의도의 매력을 오래전에 깨달은 터라 그저 미소로 답한다.
무의도의 진주, 소무의도 무의바다누리길
미니버스의 회차 지점인 광명항(소무의도 입구)에 하차한 뒤 무의인도교를 향해 걷는다. 이 다리가 광명항과 소무의도를 잇는다. 다리를 건너기 전에 무의바다누리길 안내판을 훑어본다. 무의바다누리길은 소무의도 해안을 한 바퀴 도는 둘레길이다. ‘마주보는길’, ‘몽여해변길’, ‘부처깨미길’ 등 구간이 8개나 되지만 총 거리는 2.4km밖에 되지 않는다. 천천히 걸어도 한 시간이면 충분한 거리다. 무의바다누리길의 1구간인 ‘소무의인도교길’를 건너며 소무의도를 굽어본다.
갯벌이 드러난 떼무리포구에서 고깃배 대여섯 척이 물 들어오길 기다린다. 포구 앞 서쪽 마을에는 원색 지붕을 얹은 단층집이 옹기종기 모여 섬마을 정취를 뽐낸다. 다리를 건너자마자 처음 만난 구멍가게에 들러 시원한 미숫가루 한 잔을 사 마시고 더위를 식힌다. 인상 좋은 주인에게 듣는 마을의 이모저모는 덤이다. 떼무리포구와 서쪽 마을 앞을 지나는 방파제길이 2구간 ‘마주보는길’이다. 방파제 끝까지 걸으면 관광안내소가 나오는데 안내소 옆 계단으로 오른다. 계단 끝에서부터 그윽한 숲길이 이어진다. 당산이 있는 이 숲길이 3구간 ‘떼무리길’이다.
흙길과 데크길을 번갈아 걷다보면 4구간 ‘부처깨미(꾸미)길’ 안내판이 나온다. 전망데크와 망원경이 설치돼 있다. 옛날에 소무의도 주민들이 만선과 안전을 기원하기 위해 소를 제물로 바치고 풍어제를 지냈던 곳이라고 한다. 부처깨미에서 다시 1분 정도 오르면 전망대가 또 나오는데 이곳은 포토존이라 할만하다. 초승달 같은 몽여해변과 동쪽 마을이 발아래 시원하게 펼쳐진다. 멀리 대부도, 영흥도, 선재도 등이 어렴풋이 보인다. 서해는 누렇다는 편견을 반박하듯 오늘따라 바다 빛이 푸르디푸르다. 전망대와 연결된 계단을 내려와 5구간 ‘몽여해변길’을 거닌다. 부모와 놀러 온 아이들은 갯바위 사이에 바닷물이 들락거리는 모습을 보며 즐거워 어쩔 줄 모른다.
산과 바다를 여유롭게 즐기는 산책길
바다 풍광 좋은 몽여해변에 카페들이 하나둘 생긴다. 한 카페에 들어가니 카페 주인이 바다 쪽 폴딩도어를 활짝 열어준다. 손님들이 “와 오늘 바다 예쁘다!” 환호한다. 빨간 파라솔 아래 앉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지나가는 고깃배들을 구경하는 여유를 부려본다. 카페 가까이에 있는 바다이야기박물관을 지나면 곧 언두꾸미에 닿는다. 이곳은 갯벌에 참나무를 세우고 언둘 그물을 쳐서 물고기를 잡는 주목망 어업을 하는 곳이다. 언둘꾸미가 변해 언두꾸미가 되었다고 한다. 방파제에 둘둘 말아놓은 그늘이 잔뜩 쌓여 있다.
언두꾸미를 지나 울퉁불퉁한 갯바위를 타고 넘어 6구간 ‘명사의해변길’에 도착한다. 박정희 전 대통령 가족이 휴양 왔던 곳이라 하여 이름 붙은 몽돌 해변이다. 바닷가에 하얀 굴 껍데기가 가득 쌓여있다. 우뚝 선 절벽이 해변을 감싸고 있어 아늑한 느낌이 든다. 명사의해변을 지나면 안산 꼭대기로 오르는 숲길이 시작된다. 가파른 나무 계단도 기다린다. 숨을 조절하며 중간쯤 오르니 바다 한가운데에 떠 있는 해녀도가 훤히 보인다. 옛날에 해녀가 물질하다가 쉬었던 곳이라고 한다. 해녀도 뒤로 섬들과 풍력발전기 대여섯 기가 아슴아슴 보인다. 바다와 섬 사이에 해무가 껴 섬들이 공중에 뜬 것처럼 보인다. 계단을 내려가던 사람들이 이 환상적인 풍경을 배경 삼아 기념사진을 찍느라 분주하다. 이 길이 7구간 ‘해녀섬길’이며 무의바다누리길에서 풍광이 가장 좋다.
계단을 조금 더 오르면 안산 정상에서 하도정이라는 정자를 만난다. 하도정 주변에 해풍 맞고 자란 소나무가 많다고 하여 8구간을 ‘키작은 소나무길’이란 이름 붙였다. 하도정 이후로는 내리막길이다. 계단을 내려오면 소무의인도교가 코앞에 있다. 다리를 건너며 아래를 굽어보니 어느덧 바닷물이 차올라 갯벌에 박혀 있던 배들이 둥둥 떠올랐다. 광명항에서 다시 버스를 타고 하나개해수욕장으로 향한다.
바다 위를 걷는 하나개해수욕장 해상관광 탐방로
하나개해수욕장은 ‘섬에서 가장 큰 개펄’이라는 뜻을 지녔다. 해변은 모래밭이고, 썰물 때는 진득한 갯벌이 드러난다. 보드라운 갯벌 흙이 발가락 사이로 파고드는 감촉을 즐기며 일몰을 감상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하나개해수욕장은 일몰 명소로 유명하다.
해변에 오래전에 방영됐던 드라마 ‘천국의 계단’과 영화 ‘칼잡이 오수정’의 주택 세트장이 있다. 실내 관람은 할 수 없다. 세트장 뒤로 해안관광 탐방로로 가는 길이 이어진다. 이정표를 따라 데크를 걷다 보면 호룡곡산 등산로와 해안관광 탐방로의 갈림길이 나온다. 등산로를 뒤로 하고 해안 쪽으로 내려선다. 해안관광 탐방로는 작년에 무의도 해안절벽 옆에 조성한 해상산책로다. 만조 때는 파도 때문인지 약간 흔들거린다. 바다 위를 걷는 느낌이 꽤 스릴 있다. 해안절벽에 있는 진기한 모양의 바위에 이름을 짓고, 탐방로 난간에 안내판을 세워두었다. 억지스러운 이름도 있지만, 자꾸 안내판 사진과 비슷한 바위를 찾으려 애쓰게 된다. 밀물 때는 갯바위가 잠겨 일부만 찾을 수 있다. 가장 그럴싸한 바위는 어미 원숭이가 새끼를 안고 있는 형상의 원숭이 바위다. 탐방로 끝 해안가에 있다.
이 탐방로는 한낮보다는 해질녘 바닷바람 맞으며 걸어야 제맛이다. 매일 물때가 변하므로 이곳에 갔을 때 바닷물이 싹 빠져 갯벌이 드러나 있을 수도 있다. 바다 위를 걷는 스릴을 느끼지는 못하더라도 안내판 속 바위들은 다 찾을 수 있으니 밀물이어도, 썰물이어도 좋으리라. 탐방로 개방 시간은 일출 때부터 일몰 때까지이다.
주변 명소&맛집
무의도의 휴양지 실미도
실미도는 무의도의 부속 섬이다. 1971년 8월에 발생한 실미도 사건의 현장이기도 하다. 실미도에서 북파공작원 훈련을 받던 부대원들이 정부의 사살 명령을 받고 온 기간병들을 살해하고 실미도를 탈출해 청와대로 가던 중 자폭한 사건이었다. 2003년에 이 사건을 영화화한 ‘실미도’가 개봉해 큰 관심을 얻었다. 하루에 두 번 썰물 때마다 무의도와 연결된 징검다리가 드러난다. 이 다리를 건너 실미도를 관통하는 숲길을 지나면 섬 반대편 해변이 나온다. 실미도 영화 세트장은 오래전에 사라졌고 갯바위와 고요한 해변만 남았다. 실미도와 마주 보고 있는 실미유원지에는 100여 년 된 아름드리 노송 군락이 울창하게 우거졌다. 숲에서 야영을 즐기는 여행객들이 많다. 하나개해수욕장보다 한적한 해변을 산책하거나 바닷가 식당에서 해산물 요리를 즐기기에 좋다.
맛집과 카페
무의도는 바지락 칼국수와 영양굴밥, 조개찜이 유명하다. 하나개해수욕장과 실미유원지, 광명항에 횟집과 식당이 많다. 실미유원지에서는 ‘해송회식당’이 입소문 났다. 진한 바지락 국물에 감자와 각종 채소로 맛을 낸 바지락칼국수가 일품이다. 칼칼한 국물이 입맛을 당긴다. 용유역 앞 ‘은행나무집’은 영양굴밥을 잘한다. 소무의도 몽여해변에 있는 ‘섬카페좋은날’은 루프톱 카페다. 옥상에 폭신한 소파를 준비해두었다. 길가에 있어 걷는 중에 잠시 들리기 좋다.
여행 tip
1. 대중교통
-인천국제공항 제1터미널 3층 7번 탑승장에서 2-1, 222번 버스 탑승, 용유역에서 하차한다. 용유역에서 무의도행 1번 버스를 타면 된다.
-인천국제공항 제1터미널역에서 모노레일로 갈아타 종착역인 용유역에 하차, 무의도행 1번 버스를 탄다. 모노레일은 무료이며 오전 7시 30분부터 오후 8시 15분까지 15분 간격으로 운행한다. 인천국제공항역에서 용유역까지 약 12분 걸린다.
-용유역 앞에서 1번 버스가 매시 정각과 30분에 출발한다. 주말에는 10여분 늦어 질 수 있다. 배차 간격이 넓으므로 하차할 때 버스 시간을 알아두는 게 좋다.
2. 실미도는 썰물 때만 들어갈 수 있다. 하나개해상관광탐방로는 물때 상관없이 출입할 수 있으나 바다 위를 걷고 싶다면 물때를 확인해야 한다.
따사로운 봄날, 일본에서 활짝 피는 건 벚꽃만이 아니다. 기나긴 겨울이 끝나고 봄이 한창일 무렵, 1년에 단 70일 동안만 열리는 다테야마 구로베 알펜루트. 이곳은 일본을 수차례 다녀본 사람들도 모르는 경우가 많을 정도로 꼭꼭 숨겨진 비경 중의 비경이다. 거대한 대자연을 만나고 싶은데 시간이 없거나 장시간의 비행이 부담스럽다면 자연과 전통, 휴식과 탐험을 동시에 즐길 수 있는 다테야마 구로베 알펜루트로 떠나보자. 여행은 어느 시기에 하느냐에 따라 그 느낌이 천양지차이지만 다테야마 구로베 알펜루트는 꽃들이 피어나는 4~5월에 기적의 설벽을 만날 수 있기에 더욱 특별한 여행지다. 한적한 로컬 기차여행의 진수를 맛볼 수도 있고 조용한 바닷가에서 여유롭게 온천을 즐길 수도 있으니 이만큼 다 갖춘 곳도 드물 듯하다.
가까운 일본에서 만나는 동양의 알프스
메이지 시대, 영국인들이 일본에서 산행을 하다 그 풍경이 유럽의 알프스와 닮아 ‘일본의 알프스’라는 별명을 붙여줬다는 다테야마 구로베 알펜루트는 도야마와 나가노를 잇는 90km의 산악관광도로다. 굳이 이 길에 ‘루트(route)’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는 전체 구간이 트롤리버스, 케이블카, 로프웨이, 도보로 이동하며 즐길 수 있도록 체계적으로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다. 힘들이지 않고도 다테야마(立山) 산의 신비로움을 만끽할 수 있어 시니어들을 위한 여행지로 더없이 좋은 곳이다. 장엄한 산세와 협곡은 물론 도롯코 열차여행과 온천까지 즐길 수 있는 이곳은 닿는 순간 유럽의 알프스 못지않은 풍경이 지척에 있었다는 사실을 왜 지금껏 몰랐을까 무릎을 치게 되는 그런 곳이다.
일본의 3대 영산으로 불리는 다테야마
나고야 북쪽에 위치한 다테야마 구로베 알펜루트를 여행하기 위해서는 도야마 공항과 가까운 다테야마 역 또는 나고야 공항과 가까운 오기사와 역을 선택할 수 있다. 소도시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도야마 여행을 추천한다. 도야마 역에서 지테스 본선이라는 지방열차를 타고 50여 분을 달리면 다테야마 역에 도착한다. 다테야마 구로베 알펜루트와 구로베 협곡을 보려면 이른 아침부터 밤까지 꼬박 하루를 움직여야 한다. 정상에서 보는 다테야마 산도 아름답지만 눈 계곡의 모습을 상상하며 한 걸음 한 걸음 올라가는 과정도 더없이 경이롭다. 우나즈키 온천마을에서 따사로운 봄을 한껏 즐기다 산악열차와 케이블카를 번갈아 타고 산 정상에 오르니 봄이 한창인데도 스키를 타는 사람들이 보이고, 설산을 깎아 길을 낸 최고 22m에 이르는 기적의 눈 계곡이 나타난다. 내려오는 길에 만나게 되는 해발고도 1500m에 위치한 구로베 댐은 일본 최고 높이에 위치한 댐으로 연간 무려 10억 kW의 발전량을 내는 수력발전소를 갖고 있다. 오른편으로 가로질러 걸어가며 바라보는 호수의 물빛은 캐나다의 레이크루이스를 연상시킬 만큼 아름다운 에메랄드빛이다.
5월에 만나는 무로도 설벽
기차와 케이블카, 고원버스를 번갈아 타고 무려 3시간여 만에 무로도(室堂) 설벽 앞에 섰다. 해발 3000m 고지에 있는 다테야마 구로베 알펜루트의 상징인 무로도 설벽 사이를 걸어서 지나노라니 자연도 위대하지만 자연보다 더 경이로운 존재는 바로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만든 인간이라는 존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모세의 기적은 바다뿐 아니라 산에도 있었다.
일본의 옛 정취 가득한 ‘도야마 근교’
도야마 근교에는 구로베 협곡 외에도 한적함을 마음껏 즐길 수 있는 곳이 많다. 일본 전통가옥을 감상하며 조용한 거리를 산책할 수 있는 이와세 마을은 고즈넉한 풍경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반하게 되는 곳이다. 에도 시대 초기에 바다를 오가던 배들이 머무르던 이 항구 마을은 과거에는 큰 번영을 누렸던 곳으로 여전히 옛 정취가 물씬하다. 강가를 등지고 점포들이 가득 들어서 있던 곳엔 메이지 시대에 지어진 가옥들이 그대로 남아 있어 당시의 풍경을 느껴볼 수 있게 해준다. 도야마 항구 전망대와 운하 사이의 골목골목을 느리게 걷다 보면 진짜 일본의 모습을 만나게 된다.
해안열차 타고 가는 천연 온천마을 ‘히미’
구로베 협곡도 봤고 근교 마을도 다녀왔으니 마지막 날엔 달팽이처럼 느린 로컬 기차를 타고 바닷가 마을 히미(氷見)에 가보기로 했다. 시내를 벗어나니 나지막한 집들과 드넓은 논이 그림처럼 펼쳐졌다. 졸다 깨다를 반복하며 바라보는 창밖 풍경은 평화롭기 그지없다. 미세먼지 하나 없는 푸른 하늘과 초록 빛깔 논의 조화, 모내기 철의 물이 꽉 찬 논에 비친 다테야마 설산의 풍경에 시력마저 좋아지는 듯하다. 히미에 도착하자마자 바닷가로 달려갔다. 산도 좋지만 내겐 역시 바다였다. 햇살 가득한 계단에 비스듬히 누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멍때리기에 빠져본다. 꼼꼼한 손길로 그물을 손질하는 어부, 햇살 아래에서 뛰어노는 유치원생들의 모습이 마치 동화 속 한 장면처럼 아련하다. 슬슬 시장기가 와서 어시장 히미반야가이로 갔다. 바다 내음 물씬 풍기는 수산물과 우동, 소고기 등 히미에서만 먹을 수 있는 것들을 맛본후 천천히 걸어 마을 끝자락에 있다는 천연온천장으로 갔다. 족욕만 하는 곳도 있고 동네 목욕탕 같은 온천도 있다. 마치 오랫동안 이곳에 살았던 사람인 양 온천을 즐기고 돌아오는 길, 엉킨 실타래 같았던 몸과 마음이 풀리면서 나른함이 몰려왔다. 다시 도야마로 돌아가는 길. 히미의 바다 너머로 우뚝 솟은 다테야마 설봉은 한적함이 그리울 때면 언제든 찾아오라고 말하는 듯했다.
3월 초, 이제 막 새 학기를 시작한 동아대학교 캠퍼스는 꽃다운 청춘들의 기운으로 가득했다. 학생들 못지않게 바쁜 사람이 또 있었으니, 바로 하형주(河亨柱·58) 동아대학교 예술체육대학 학장이다. 35년 전 국민들 손에 땀을 쥐게 했던 LA올림픽 유도 금메달의 주인공. 그를 만나 당시의 뒷이야기를 들어봤다.
“어무이~ 내 보이나? 이제 고생 끝났심더.”
하형주가 1984년 LA올림픽 유도 종목에서 금메달을 딴 뒤 가족과 통화하는 모습은 의외였다. 경상도 남자는 무뚝뚝하다는 선입견을 깨트리기라도 하듯 방글방글 웃는 표정과 구수한 사투리가 방송을 탔다.
“그때 제 통화가 전국으로 중계되는지도 몰랐어요. 그래서 말도 함부로 했죠. 어머니한테 ‘어무이~’ 이러고 형님한텐 ‘행아~’라 하고. 경상도에선 말을 좀 편하게 하는 문화가 있는데 이런 모습이 몇몇 사람한텐 안 좋게 보였나봐요. 버릇없다고, 호래자식이라고 욕 좀 먹었죠.(웃음)”
LA올림픽은 유난히 국민들의 관심을 많이 받았다. 그 이유엔 1988년에 개최되는 다음 회 올림픽이 서울에서 열린다는 점이 한몫했다. 국민들이 주목하고 있는 와중에 호쾌한 메치기로 우승을 거둔 그는 대한민국의 스포츠 스타로 급부상했다. 그는 인기의 원인(?) 중 하나로 ‘잘생겼음’을 꼽기도 했다.
“우승 후 한국에 돌아오니까 갤로퍼 지프차, 박카스, 화끈함과 시원함을 강조한 약품 등 각종 CF 섭외가 물밀듯 들어왔어요. 근데 돈이 많아지면 내 마음대로 살까봐, 엉뚱한 길로 빠질까봐 차라리 없이 살자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다 안 했죠. 그때로 돌아간다면… 찍어야지요.(웃음)”
그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세월은 지났지만, 그의 호쾌함은 여전했다.
모두의 예상을 깬 일본전에서의 승리
1984년 LA올림픽 8강전 (vs 미하라 마사토)
대진표를 본 언론은 하형주의 대진운이 좋지 않다고 보도했다. 8강에서 유도 종주국 일본의 미하라 마사토와 맞붙게 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자신의 승리를 어느 정도 예상했다고 말했다.
“속으로 ‘아, 얘는 내 밥인데’ 하며 쓱 웃었죠.(웃음) 사실 8강전 전까진 한 번도 겨뤄본 적 없는 선수였는데 언젠가는 만날 것 같아서 분석을 많이 해뒀어요. 아니나 다를까 시합 때 자기 주특기인 허벅다리걸기 기술을 쓰더라고요. 이미 제 머릿속엔 어떻게 받아칠지 다 구상을 해둔 상태였어요. 그 기술에 넘어가주는 척하다가 방심하는 틈을 타 들배지기 기술을 응용해 바닥에 꽂아버렸죠.”
한 선수가 상대를 확실하게 제압해 등 전체가 바닥에 닿도록 메쳤을 때 주심은 한판을 선언할 수 있다. 하형주가 성공한 공격은 한판처럼 보였지만, 심판은 절반으로 판정했다.
“당시 심판위원장, 국제유도연맹 회장이 일본인이었거든요. 심지어 마사토가 국제유도연맹 회장이 총장으로 있는 도카이(東海)대학교 졸업생이었어요. 그러니 심판들이 일본의 눈치도 봐야 하지, 또 처음 보는 기술이지, 그래서 절반을 준 것 같아요.”
이어진 경기에서 하형주는 보란 듯이 똑같은 기술을 이용해 다시 한번 그를 매트에 내리꽂았다.
“넘어간 방향만 반대였지 똑같은 방법이었어요. 동일한 기술에 두 번이나 당하고 마사토는 완전 스타일 다 구겼죠.(웃음) 그때 국제유도연맹 회장이 지켜보고 있다가 자기네 학교 졸업생이 내팽개쳐지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장면이 찍혔더라고요.”
한일전은 가위바위보도 져서는 안 된다는 게 우리나라 국민감정이다. 그가 일본 선수를 상대로 거둔 승리는 TV로 경기를 보며 응원하던 국민들을 열광의 도가니로 빠뜨렸다.
“1970년대에는 북한 선수한테 지면 그야말로 ‘작살’이 났죠. 그 당시에 지고 나서 입국하면 공항에서부터 짐 검사를 하는데 옷밖에 없는 캐리어를 그 자리에서 탈탈 털었어요. 그러고 나선 가져가라고 하는데, 다시 옷을 개서 넣으려고 하면 문은 왜 또 잘 안 닫히는지….(웃음) 그런 식으로 망신을 줬죠. 북한은 당연히 이겨야 하고 일본에 지면 매국노인 거라. 근데 제가 질 줄 알았던 경기에서 일본 선수를 두 번이나 메쳤으니 사람들이 얼마나 좋아했겠어요.”
38초 남기고 거둔 역전승
1984년 LA올림픽 준결승 (vs 군터 노이로이터)
야구의 9회 말과 2~3분의 추가 시간이 주어진 축구 중계를 중간에 끄지 못하고 끝까지 보는 데엔 이유가 있다. 스포츠는 각본 없는 드라마라고도 하지 않던가. 1984년 하형주의 ‘결승을 향한 역전승’은 가장 극적인 반전 드라마였다. 1984년 LA올림픽 8강전에서 미하라 마사토를 꺾고 준결승에 오른 하형주는 당시 세계 랭킹 1위인 독일의 군터 노이로이터와 맞붙게 됐다. 상대에게 먼저 효과를 내준 그는 경기 종료 38초를 남기고 유효를 얻어내 역전승을 거뒀다.
“시간이 계속 흐르니까 초조하긴 했죠. 근데 계산해보니 두 번 정도는 기술을 걸 수 있겠더라고요. 그중에 한 번만 걸려라 하고 딱 잡았는데, 낚시해보셨어요? 낚시할 때의 손맛처럼 유도도 도복을 잡아챘을 때 느낌이 딱 옵니다. ‘아, 이건 넘겼다’ 하고요.”
그가 노이로이터를 상대로 승리를 거둔 건 이때가 처음은 아니다. 그와의 첫 만남은 1981년 네덜란드 마스트리히트에서 열린 세계유도선수권대회에서였다. 하 교수는 당시를 회상하면서 그가 어떤 선수인지 알았으면 이기지 못했을지도 모른다고 털어놨다.
“당시 노이로이터의 지도감독이 우리나라 분이셨어요. 그분을 직접 찾아가서 ‘선생님, 제가 독일 선수랑 붙는데 어떻게 하면 이길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물었죠. 그랬더니 씩 웃으시면서 ‘지금처럼만 하면 된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당연히 제가 이길 거라는 자신감을 가지고 들어갔죠. 만약 그가 1976년 몬트리올올림픽 은메달리스트였다고 알려주셨으면 겁나서 함부로 달려들지 못했을 거예요.”
그는 노이로이터와 겨뤘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지금까지도 궁금한 점이 있다고 말했다.
“전 세계 유도 선수들이 모여서 일주일간 하는 합동 훈련이 있어요. 근데 이상하게 노이로이터랑 연습게임을 하면 항상 제가 졌어요. 그가 저를 던지면 이리저리 처박히기 바빴는데… 이런 선수를 어떻게 이겼는지 정말 모르겠어요.”
결승전에서 브라질의 더글라스 비에라를 꺾은 그는 마침내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우승 후보를 거듭 제치고 올라온 긴 여정이었다. 시상대에 오르며 그동안의 부상이며 고생했던 생각에 감정이 복받쳐 오를 만도 했지만, 그는 해맑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금메달을 딴 기쁨보다 힘든 훈련을 이겨내고 잘 극복했던 제 자신이 너무 자랑스러웠어요. 금메달은 그다음에 따라오는 결과였죠. 그러니 울 이유가 있나요? 행복해서 그냥 활짝 웃었어요.”
웃으면 복이 온다고 했던가. 그는 올림픽 이후에도 세계선수권대회 은메달, 아시안게임 금메달, 유니버시아드 금메달 등을 따며 메달 행진을 이어나갔다.
“선수 시절엔 어딜 가나 사람들이 알아봐서 정말 힘들었어요. 지금은 잘 몰라보죠. 근데 행복해요. 평범하게 산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몰라요.(웃음)”
하루의 시작은 아침에서부터 시작된다. 어떻게 하면 안녕한 아침을 맞이할 수 있을까. 서울아산병원의 도움을 받아 건강한 수면법과 아침에 하면 좋은 스트레칭 동작을 알아봤다.
상쾌한 아침을 위한 건강한 수면법
도움말 정석훈 서울아산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잠자리에 누워도 바로 잠들지 못하고 한참을 뒤척인 경험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숙면을 못했을 때는 아침에 일어나도 몸이 무겁고 찌뿌둥하면서 컨디션이 좋지 않다. 이런 아침이 반복된다면 수면 습관에 문제가 없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정 교수는 건강한 수면을 위해선 무엇보다 기상시간을 일정하게 설정하는 게 중요하다고 조언한다.
“인간의 평균 수면시간을 7시간으로 가정할 때, 나머지 17시간은 활동해야 24시간이 완성됩니다. 예를 들어 오전 7시에 일어났다면 17시간 후인 자정이 돼서야 잠이 오고, 오전 9시에 일어났다면 새벽 2시가 돼야 잠이 오게 되는 거죠. 즉 일어나는 시간에 따라서 17시간 후의 취침 시간이 다시 결정되기 때문에 동일한 기상시간에 규칙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기상시간을 정했다면 그 시간을 기준으로 7시간 전쯤으로 취침시간을 정하면 된다. 문제는 나이가 들면 멜라토닌이라는 수면호르몬이 감소하면서 수면시간이 줄어들게 되는데 시니어들은 오히려 더 오래 자고 싶어 한다는 점이다.
“9시 뉴스가 끝나면 그때부터 잠자리에 들어 7시에 일어나길 바라십니다. 그럼 총 10시간을 주무시겠다는 거죠. 근데 대부분은 12시까지 뒤척이다가 잠이 드십니다. 그러고 나선 잠들기까지
3시간이 걸렸다고 말씀하시는데 그건 3시간 동안 못 주무신 게 아니라 그냥 3시간 일찍 누우신 거예요.”
그렇다면 적절한 취침시간에 누웠는데도 잠이 오지 않을 경우엔 어떻게 해야 할까. 정 교수는 눕고 나서 15분 이내에 잠이 들지 않으면 일어나라고 조언한다. 억지로 누워 있지 말고 잠이 올 때 잠자리에 들라는 것이다. 이러한 생활습관 개선으로도 효과가 없을 때는 수면제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수면제도 기상시간을 기준으로 한 7시간 정도 전에 드셔야 약효를 볼 수 있습니다. 그보다 일찍 먹게 되면 효과가 떨어지는데 환자분들은 약을 먹어도 잠이 안 온다면서 복용량을 늘리곤 하죠. 그렇게 되면 졸음운전, 낙상 등의 문제가 발생할 우려가 있습니다. 그래서 수면제를 드실 때는 반드시 전문의와 상의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시니어의 안 좋은 수면 습관 중 하나는 바로 수면시간이 아닌데도 자주 누워 있다는 점이다. 정 교수는 기상시간이 되면 무조건 일어나고 취침시간 전까진 가급적 누워 있지 말고 활동을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하루 종일 누워 있는 분이 의외로 많은데, 그러면서 밤에 잠이 안 온다고 힘들어하십니다. 그런데 그 상황은 불면이 아니라 잘 이유가 안 생겨서 잠이 안 오는 거예요. 잠은 하루 동안 쓴 에너지를 다시 보충하기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누워만 있으면 수면 리듬이 흐트러지게 돼요. 비유하자면 충전된 휴대폰을 또 충전할 필요가 없는 거랑 똑같은 거죠.”
정 교수는 숙면을 위한 운동은 자기 전에 하는 것보다 낮에 하는 게 더 좋다고 조언한다. 격렬한 운동은 오히려 근육을 수축시켜 잠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잠이 안 올 때는 억지로 자려고 애쓰지 말라고 했다.
“잠을 꼭 자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불면증을 더 악화시킬 수 있어요. 잠이 안 오면 안 자도 돼요. 그럼 뭐 하느냐? 놀면 돼요. 밤에도 노세요. 그 대신 그다음 날에는 활동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밤에 저절로 잠이 오게 되어 있어요. 잠이라는 게 어디 가는 게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잠에 너무 집착하지 않으면 좋겠어요.”
밤 동안 뭉친 근육 풀어주는 스트레칭
도움말 김원 서울아산병원 재활의학과 교수, 모델 김수빈 서울아산병원 물리치료사
아침에 일어나서 하는 가벼운 스트레칭은 혈류를 개선해 신체의 각 기관에 산소를 원활히 공급할 뿐만 아니라 밤 동안 굳은 근육을 풀어줘 갑자기 움직였을 때 발생할 수 있는 부상을 방지해준다. 특히 시니어의 경우 부상 위험이 크기 때문에 가급적 활동하기 전엔 몸을 가볍게 풀어주는 것이 좋다. 이때 주의해야 할 점은 모든 동작을 통증이 없는 범위 내에서 해야 한다.
목 가볍게 돌리기
갑자기 움직였을 때 발생할 수 있는 부상을 방지한다. 발을 어깨너비로 벌리고 허리에 양손을 얹어 준비자세를 취한다. 머리를 조금 젖힌 뒤 작은 원을 그리듯 목을 가볍게 돌려준다. 이때 허리가 휘지 않도록 주의한다.
옆으로 기지개 펴기
팔이나 어깨 등 잘 사용하지 않는 근육들을 이완해주는 동작이다. 손을 위로 쭉 뻗은 뒤 팔꿈치를 잡아 양손을 교차시킨다. 옆으로 30° 정도 기울여준 뒤 5~10초간 머무른다. 손 위치를 바꿔 반대 방향으로 똑같이 실시한다.
팔꿈치 붙이고 어깨·목 활짝 펴기
팔이 직각이 될 수 있도록 팔꿈치를 몸통과 가깝게 위치한 상태에서 시작한다. 머리를 뒤로 젖혀주는 동시에 팔은 몸통 바깥쪽으로 천천히 돌려준다. 이때 허리가 휘지 않도록 한다. 이 동작은 어깨와 목 근육을 이완해준다.
기해년(己亥年) 새날이 밝았습니다. 오행(五行)에서 ‘기(己)’ 자는 흙의 기운을 표현하며 색으로는 노란색이기에, 기해년은 곧 60년 만에 돌아온 ‘황금돼지해’라고 합니다. 각별하고 신명 나는 일만 벌어질 것 같은 황금돼지해를 맞아, 노란색 야생화가 황금색 술잔을 높이 들고 원숙미(圓熟美)를 더해가는 ‘브라보 마이 라이프’ 애독자들에게 경배하며 새해 인사를 건넵니다.
“만복을 받으시고,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세요.”
달이 바뀌고 해가 바뀌었지만 엄동설한의 추위는 여전한데 무슨 꽃 타령이냐고 타박하실 애독자들께는 선조들의 옛 말씀을 전합니다.
“동짓날 밤 자시부터 새봄, 새해가 시작된다.”
즉 매년 12월 22일이나 23일, 가장 짧았던 낮의 길이가 다시 길어지기 시작하는 동지(冬至) 밤 자시(밤 11시~새벽 1시)에 이미 새봄이 시작된다고 했으니, ‘봄의 전령사’ 한두 송이쯤은 새해와 함께 핌 직하다고 말입니다. 북풍한설 중에 잉태되어 겨울의 한복판에서 꽃망울을 터뜨리는 야생화가 알고 보면 하나둘이 아닙니다. 동백꽃이 그중 하나이고, 매화가 또 다른 한 자리를 차지합니다. 그런가 하면 수선화·갯국도 뒤질세라 어깨를 나란히 합니다. 그리고 오늘의 주인공 복수초도 노란색 꽃술을 반짝이며 귀티 가득한 금잔을 하얀 눈밭 위에 살짝 올려놓습니다.
복(福)과 장수[壽]를 기원하는 복수초란 이름 외에 원단화(元旦花)나 원일초(元日草)라고도 불리는데, 원단·원일이란 곧 새해 첫날을 의미하니 새해 가장 먼저 피는 꽃으로 인식되어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 강원도 동해시 냉천공원 산비탈에는 제주도보다도 이른 1월 초부터 복수초가 피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석회암 동굴지대의 따뜻한 지형이 그 원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제주와 냉천공원을 빼고 가장 먼저 꽃소식을 전하는 곳은 완도수목원. 1월 중순이면 복수초가 황금색 꽃망울을 터뜨렸다는 1보가 전해집니다. 여기서 북쪽으로 500여 km 떨어진 경기도 연천 지장산에서는 일러야 2월 말에나 복수초가 피니, 결국 봄은 하루 15~20km의 속도로 아장아장 북상한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이른 곳에선 1월 초 피기 시작하는 복수초가 경기·강원의 깊은 산에선 5월 초까지도 피니, 개화 기간이 5개월 가까이 됩니다. 참으로 긴 기간 피고 지는 봄 야생화의 대명사라 할 수 있습니다.
얼음과 눈 속에서 핀다는 뜻의 얼음새꽃이나 눈색이꽃이란 예쁜 우리말로도 불리는 복수초는 마치 형광 물질을 뿜어내는 듯 강렬합니다. 눈 속에 피는 연꽃 같다 해서 설련(雪蓮)이라고도 부릅니다. 실제 활짝 핀 복수초 꽃 속의 온도는 바로 옆 50cm 떨어진 곳보다 7℃ 이상 높다는 조사 결과도 있습니다.
Where is it?
학명 중 종명 아무렌시스(amurensis)는 헤이룽강(黑龍江)이라 부르는 러시아 아무르 강변에서 처음 채집되었다는 뜻이다. 당연히 시베리아와 중국 등지에 널리 분포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최남단 제주도에서 함경도까지 폭넓게 자생한다. 다만 꽃과 잎, 가지 등의 미세한 차이로 인해 서너 종으로 나뉘는데, 제주도에 자생하는 꽃은 잎이 가늘게 갈라진다고 해서 세(細)복수초로 불린다. 남부와 서해 도서지역의 복수초는 가지복수초라 부르는데, 경기·강원 등지에서 만나는 복수초에 비해 꽃의 크기가 갑절 이상 크고 화려하다. 꽃이 필 때 잎도 무성하게 자란다. 꽃 크기가 아주 작은 애기복수초도 있다. 중·북부지역의 높고 깊은 산에서 난다. 복수초, 애기복수초는 잎이 나기 전 꽃이 먼저 핀다.
레트로는 단순히 오래된, 옛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가령 50년째 장사를 이어온 노포와 1970년대 인테리어로 새로 문을 연 식당. 전자는 전통이라 말하고, 후자가 ‘레트로’라 하겠다. 이러한 레트로 콘셉트의 가게들은 중장년 세대뿐만 아니라 젊은이들의 핫 플레이스로 자리 잡고 있다. 자녀와 함께 데이트 즐기기 좋은 레트로 핫 플레이스를 소개한다.
◇ 익선동 한옥섬을 한눈에 ‘낙원장’
옹기종기 기와지붕 아래 레트로풍 맛집과 아틀리에가 즐비한 익선동 거리. 부티크호텔 ‘낙원장’에서는 골목을 가득 메운 한옥 150채의 전경을 한눈에 담아볼 수 있다. 1980년대 지어졌던 ‘그린필드’라는 낡은 여관을 크라우드펀딩으로 매입, 지역 아티스트와 협업해 탄생시킨 공간이다. 클래식한 건물 외관과 달리 세련되고 모던한 실내 인테리어가 레트로 플레이스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끌어올린다. 객실은 일반뷰와 한옥뷰, 프리미엄 한옥뷰 총 3단계로 나뉜다. 그중 LP플레이어가 있는 한옥뷰 룸을 선택하면 커다란 창문 너머로 보이는 익선동 풍경과 함께 LP음악까지 만끽할 수 있다.
위치 서울특별시 종로구 수표로28길 25 숙박비 평일(일~목) 7만~9만 원, 주말(금~토) 9만~11만 원
◇ 아날로그 선율에 빠지다 ‘바이닐 앤 플라스틱’
현대카드가 운영하는 ‘바이닐 앤 플라스틱(VINYL&PLASTIC)’은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경계에서 사라져가는 음반의 가치를 재조명하는 음악체험형 공간이다. 노출콘크리트와 나무 소재 인테리어가 조화를 이루는 인테리어가 돋보인다. 입구 왼편으로는 턴테이블이 놓인 긴 탁자가 눈에 띈다. 이곳에서 바이닐 앤 플라스틱이 선정한 200장의 LP명반을 감상할 수 있다. 1층에서는 클래식, 재즈&소울, 힙합 등 다양한 장르의 LP음반 9000여 장과 다양한 음향장비를 전시, 판매한다. 2층은 1만6000장에 달하는 CD와 더불어 음악감상 서비스를 제공하는 카페 공간으로 꾸며져 여유를 즐기기 좋다.
위치 서울특별시 용산구 이태원로 248 이용시간 화~토요일 12:00~21:00, 일요일 12:00~18:00 (현대카드 미소지자도 입장 가능)
◇ 한국·태국의 퓨전 레트로 맛집 ‘동남아’
태국요리전문점 ‘동남아’의 입구. 세월이 켜켜이 쌓여 낡은 검푸른색 철문을 활짝 열면 레드벨벳 커튼과 이국적인 샹들리에가 맞이한다. 겉과 속이 완전히 다른 이 오묘한 식당은 안쪽으로 들어설수록 이색적인 풍경이 펼쳐진다. 한옥을 개조한 실내는 태국 연회장을 모티브로 한 인테리어로, 동남아 여행에서의 아쉬운 마지막 밤을 표현했단다. 메인 홀 외에 공간을 다양하게 나누었는데, 룸마다 강렬한 색감의 독특한 벽지가 눈길을 끈다. 특히 대중탕 욕조(?)를 연상케 하는 앞마당의 테이블은 겨울철 식사를 즐기기엔 다소 불편하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흥미로운 공간이다. 인기 메뉴인 꽃게와 커리로 맛을 낸 ‘뿌빳 퐁 커리’와 태국식 볶음 쌀국수 ‘팟타이’ 등 현지 셰프가 요리한 다양한 오리지널 로컬 푸드를 맛볼 수 있다.
위치 서울특별시 종로구 수표로28길 23-6 이용시간 매일 12:00~22:00, 브레이크타임 15:30~17:00(주말 제외)
◇ 도도한 모던걸의 화려한 외출 ‘경성의복’
익선동 골목을 걸어가다 보면 개화기풍의 원피스와 정장을 입은 이들을 발견할 수 있다. 고궁 일대에서 한복 체험을 하듯, 이곳에서는 개화기 의상을 대여해 레트로 감성을 한껏 즐기는 것이 트렌드. ‘경성의복’에는 다양한 디자인의 복고 의상과 셀프 촬영을 위한 포토존이 구비돼 있다. 고풍스러운 원피스와 장신구로 치장하고 모던걸이 되어 거리를 누벼보는 것 어떨까?
위치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일대로30길 56 2층 이용시간 매일 10:00~20:00
가격 의상대여(의상·장신구·모자·기타소품) 3시간 3만 원/6시간 4만 원/하루 4만5000원/1박2일 5만 원
◇ 딸과 데이트하는 날엔 ‘경양식 1920’
1980년대 전후, 가족외식 하면 떠오르는 경양식집을 테마로 한 레스토랑 ‘경양식 1920’. 레트로 거리로 유명해진 인선동 골목에 젊은이들이 부모 세대와 함께 올 수 있는 외식 공간을 만들기 위해 인테리어를 꾸미고 추억의 메뉴들을 불러왔다. 24시간 숙성한 돈가스와 함박스테이크는 남녀노소 모두 즐기기에 부담이 없다. 실제 방문한 고객들을 살펴봐도 젊은 연인부터 엄마와 딸, 노부부까지 다양한 세대를 아우른다. 사이드 메뉴로는 1980년대 경양식집에서 맛보던 수프와 멕시칸 사라다(샐러드)를 선보인다. 특별한 날에는 하우스 와인 한 잔 곁들여보는 것도 좋겠다.
위치 서울특별시 종로구 수표로28길 17-30 이용시간 평일 12:00~22:00, 주말 11:00~22:00, 브레이크타임 15:00~17:00(주말 제외)
◇ 뒹굴뒹굴 잠시 쉬어가는 ‘만홧가게’
과거 만화잡지 ‘챔프(CHAMP)’를 비롯해 ‘우주소년 아톰’, ‘스타워즈’ 등 다양한 장르의 만화책과 그래픽노블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이다. 평일에 방문한다면 런치스페셜(라면·즉석밥·계란·김치/단무지+만화 1시간, 6000원)로 이용해보자.
위치 서울특별시 종로구 수표로28길 33-7 영업시간 11:00~23:00 가격 1인 기준 10분당 500원, 좌석(주말 및 공휴일) 2000원
동년기자가 직접 다녀온 레트로 핫 플레이스
◇ 최원국 동년기자/ 돌고 도는 레트로 액티비티 ‘자이언트 롤러장’
부천의 레트로 명소 ‘자이언트 롤러장’. 방문한 날은 휴일이라 인파가 붐벼 그 인기를 실감할 수 있었다. 30여 년 전 부천의 ‘자이언트 롤러장’이 유명했는데, 장소는 다르지만 복고풍에 맞춰 추억의 이름을 다시 불러왔다고 한다. 지하철 1호선 부천역 3번 출구에서 도보로 10분 이내에 있어 접근성이 좋다. 30년 전 롤러를 타던 학생들이 어른이 되어 옛 추억을 회상하기 위해 아이들과 많이 찾는 듯하다. 롤러장의 경쾌한 분위기를 담당하는 DJ가 있어 음악에 맞춰 롤러를 타다 보면 스트레스가 확 풀린다. 곳곳에 간식을 판매하는 매점을 이용하면 시장기를 해결할 수 있다. 과거 롤러스케이트를 타던 시절의 낭만을 다시 느끼고 싶은 시니어라면 친구 또는 아이들과 꼭 방문해보길 추천한다.
위치 경기도 부천시 장말로 376 지하 1층 1일 입장료 성인 1만1000원, 유아~고등학생 9000원 영업시간 평일 12:00~22:00(무제한 이용), 주말 10:00~22:00(3시간 이용)
◇ 윤영애 동년기자/ 시간이 머무는 곳, 우유 카페 ‘희다’
논현동 주택가 골목에 하얀 3층집, 카페 희다. 낮은 계단을 테라스 삼아 나무 소반에 왕골방석이 놓인 테이블이 눈에 들어온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언젠가 분명 와본 듯 너무나 친숙한 느낌! 어릴 적 시골 할머니 집 냄새도 나는 듯하다. 높다란 1인용 앤티크 의자, 사각밥상 테이블, 양은 개다리소반, 자개문양 화장대와 거울, 낡은 찬장과 괘종시계까지. 곳곳을 돌아보며 낡은 물건들에게 속말로 인사를 건넨다. ‘어디 있다가 여기로 왔니?’ 메뉴를 보니 우유가 주다. 기본 우유에 커피, 홍차, 말차, 페퍼민트, 미숫가루까지 6가지다. 사이드 메뉴로 옥춘당 때때사탕과 큼직한 레몬 마들렌도 있다.
프런트의 젊은이에게 주문을 하고 대표님이 누구시냐 물으니 본인이란다. 긴 생머리가 멋진 나두리 대표 역시 작년 7월 오픈 이래 가장 연로한 리포터가 왔다며 빙긋 웃는다. 주고객은 복고에 관심 있는 젊은이들이고, 우연히 동반한 부모님이 친구들과 다시 와서 단골이 된단다. 대부분의 물건은 나 대표 할머니가 집에서 실제로 사용했던 것들이다. 때문에 “외할머니 집에 온 것 같다”는 고객의 평이 가장 맘에 든단다.
느슨한 공간에서 익숙한 것을 자연스럽게 누리는 것이 콘셉트였다는 나 대표의 의도는 조용한 음악과 소품에서도 잘 드러난다. 갓 씌운 백열등, 도자기, 왕골바구니, 낡은 찬장 속 오래된 커피 잔과 유리컵까지 모든 것이 눈에 익어 정겹다.
‘희다’는 기쁘다[喜]와 많다[多], 즉 기쁨이 넘치는 곳 혹은 우유의 하얀 빛깔을 뜻한다. 오래됨과 잘 어울리는 가게 이름이다. 카페 한편에 ‘검다’라는 글자가 쓰인 화분을 가리키니, 개업 후 “희다인지, 검다인지 카페는 잘돼가냐?” 했다던 아버님의 조크 에피소드를 들려준다. 창밖 현관 옆에는 ‘웃다’라는 이름의 화분도 있다. 잠시 후 혼자 들어온 고객은 동네 주민이라며 아이를 기다리다 들렀는데 편안하고 조용하다면서 레트로풍의 독특한 인테리어에 흡족해한다.
바람 불고 서늘한 가을의 어느 날, 논현동 도심 한복판에서 어릴 적 시골집을 본 듯하다. 500㎖의 대용량 미숫가루우유는 인심만큼 넉넉하다. 남겨온 때때사탕을 구순 노모에게 드리니 어디서 이런 사탕을 사왔냐며 좋아라 하신다. 시간이 멈춘 나만의 비밀 아지트에 다녀온 것처럼 왠지 마음이 따시다.
위치 서울시 서초구 주흥15길 16-4층 영업시간 매일 11:00~2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