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열세 번째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한국의 산사 일곱 번째는 해남 대흥사로 ‘한국의 산사 7곳’을 마무리하는 순서이다.
대흥사는 백제시대에 창건된 유서 깊은 도량으로 옛날에는 두륜산을 대둔산(大芚山), 혹은 한듬산 등으로 불렀기 때문에 대둔사 또는 한듬절이라고도 했다. 근대에 대흥사로 명칭을 바꾸었다. 대흥사 창건은 426년에 정관존자, 혹은 514년에 아도화상, 혹은 신라 말 도선국사가 창건했다는 세 가지 설이 있다.
일찍이 서산대사가 “전쟁을 비롯한 삼재가 미치지 못할 곳(三災不入之處)으로 만년 동안 훼손되지 않는 땅(萬年不毁之地)”이라 하여 묘향산 보현사에서 입적하면서도 그의 의발(衣鉢)을 이곳에 보관한 도량이다.
이후 대흥사는 한국불교의 종통이 이어지는 곳(宗統所歸之處)으로 한국불교사에서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게 되면서 풍담(風潭) 스님으로부터 초의(草衣) 스님에 이르기까지 열세 분의 대종사(大宗師)와 만화(萬化) 스님으로부터 범해(梵海) 스님에 이르기까지 열세 분의 대강사(大講師)가 이곳에서 배출되었다.
열세 대종사 가운데 한 분, 초의 선사로 인해 대흥사는 우리나라 차(茶) 문화의 성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서산대사가 모셔짐과 더불어 ‘호국과 차(茶)의 성지’로 불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22교구 본사이자 대흥사 도량 전체가 사적 제508호, 명승 제66호로 지정된 명찰(名刹)이다.
넓은 산간 분지에 위치한 대흥사는 크게 남원과 북원 그리고 별원의 3구역으로 나뉘다. 북원에는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명부전, 응진전, 산신각, 침계루, 백설당 등이 위치하고, 남원에는 천불전을 비롯해 용화당, 봉향각, 가허루 등이 있으며, 남원 뒤쪽으로 조금 떨어진 별원에는 서산대사의 사당인 표충사와 대광명전, 성보박물관 등이 있다.
대흥사는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국보 제308호)을 포함하여 탑산사 동종(보물 제88호), 북미륵암 삼층석탑(보물 제301호), 응진전 삼층석탑(보물 제320호), 서산대사 부도(보물 제1347호), 서산대사 유물(보물 제1357호), 천불전(보물 제1807호) 등의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두륜산(頭輪山) 대흥사(大興寺)
나름대로 구획정리를 잘한 것으로 보이는 사하촌 식당가를 지나면 대흥사가 자랑하는 십리 숲길, 또는 아홉 번 굽었다 하여 구림구곡(九林九曲)이라 부르는 멋진 숲길을 지난다. 걷거나 차를 타고 갈 수 있는 길인데, 시간이 되면 걸어 들어가기를 권한다.
대찰(大刹)의 면모를 갖추려는지 숲길의 초입에는 거대한 산문(山門)이 세워져 있고 절 입구에는 통상의 일주문이 서 있는데 사명(寺名)의 변화를 보여주듯 산문에는 두륜산(頭輪山) 대둔사(大芚寺)라고 씌어있고, 일주문에는 두륜산(頭輪山) 대흥사(大興寺) 현판이 걸려있다.
또한 일주문의 뒷면에는 ‘선림교해만화도량(禪林敎海滿華道場)’ 즉, 선과 교가 활짝 꽃을 피운 도량이라는 의미의 커다란 현판을 달았는데, 선(禪)과 교(敎)의 종원(宗院)으로 동국(東國) 최고의 선원이라는 자부심을 나타내고 있다.
이어 나무로 만든 사찰 정승과 최근 새롭게 깎아 세운 돌 정승이 나란히 서있는 가운데, 13명의 대강사(大講師)를 배출한 자부심이 있는 도량(道場)이라는 석주(石柱)를 지나면 수 십 기의 승탑과 탑비가 보인다. 사명대사와 초의선사 등의 승탑이 모여 있어 발길을 멈추게 된다.
일주문을 지나 승탑들을 둘러본 후 두륜산(頭輪山) 대흥사(大興寺) 현판이 달린 해탈문(解脫門)을 들어서면 비로소 경내로 진입한 것이다. 해탈문에는 좌우로 사자를 탄 문수동자와 코끼리를 탄 보현보살이 모셔져 있다.
대흥사 뒷산이 누워계신 와불(臥佛), 청정법신 비로자나 부처님 모습이라는 설명과 함께 정면의 건물군이 남원, 왼쪽 개울 건너가 북원이며, 오른쪽으로 더 올라가면 표충사 등 별원 지역이다.
우선 대웅보전을 보기 위하여 왼쪽 북원으로 향한다. 작은 개울을 건너야 하는데 홍교 다리 심진교를 건너 침계루로 들어서면 일직선상에 대웅보전이 마주한다. 좌측으로는 대향각, 우측은 백설당이 가운데 중정(中庭)을 중심으로 ‘ㅁ’ 자형으로 모여 있다.
대웅보전의 정면 계단 소맷돌에는 구한말 일본 석공이 조각했다는 사자머리 한 쌍이 눈을 부릅뜨고 있는데, 축대 위 고정 쇠고리를 물고 있는 용두(龍頭)가 눈길을 끈다. 또한 대웅보전의 오른쪽 응진전 옆 보물 제320호 삼층석탑은 자장율사가 중국에서 가져온 진신사리를 모신 탑이라고 한다.
남원 구역은 천불전을 중심으로 용화당, 봉향각 등이 돌담으로 둘러져 있다. 그 입구는 5칸 건물 가허루(駕虛褸)의 중앙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정면에 천불전(보물 제1807호)이 있고 좌우로 용화당과 봉향각 등이 가운데 중정(中庭)을 중심으로 역시 ‘ㅁ’ 자형으로 모여 있다.
가허루(駕虛褸) 현판 글씨는 비운의 명필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 1770~1845)이 썼는데 유배길에 오른 추사 김정희를 모셔 자신의 글씨를 내보이자 ‘시골에서 밥은 먹고 살겠다’는 말로 비꼬았다고 한다. 제주도 유배에서 서예에 새로운 눈을 뜬 추사가 나중에 창암을 찾아 사과하려 했으나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원교 이광사나 창암 이삼만의 글씨를 한껏 푸대접했던 추사는 제주도에서 돌아와 자신의 무례함을 깨닫고 원교가 쓴 대웅보전 현판은 다시 달도록 하였으며, 창암은 이미 죽고 없자 애통함과 송구함으로 창암의 묘비문을 손수 써주었다고 한다.
남원의 중심건물 천불전(千佛殿)에는 석가모니불과 문수, 보현 보살상과 함께 옥석(玉石)으로 만든 천불을 모셨다. 1813년(순조 13년)에 완호 윤우 선사(玩湖尹佑禪師)가 천불전을 중건하고, 화순 쌍봉사 화승(畵僧) 풍계 대사(楓溪大師)의 총지휘 하에 경주 불석산에서 나오는 옥(玉)으로 10명의 대흥사 스님들이 직접 6년에 걸쳐 정성스럽게 완성하였다.
각기 다른 형태로 조각한 천불은 두 척의 배에 실려 경주를 떠났는데 그중 한 척의 배가 풍랑에 표류하다가 일본까지 흘러갔다. 기쁜 마음에 일본인들이 불상을 봉안하려 하자 현감의 꿈에 현몽하여 대흥사로 가던 길이라고 알려주어 다시 돌려보냈다는데, 그렇게 일본에 갔던 불상들 밑면에는 ‘日’자가 새겨져 있다고 한다.
남원의 오른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성보박물관을 지나 초의선사 동상이 있고 그 위로 표충사가 있다. 이곳은 서산대사와 사명당 유정, 뇌묵당 처영 스님의 화상을 봉안한 유교 형식의 사당으로 절집에서는 흔하지 않은 일이다.
유물전시관에는 서산대사의 가사와 발우, 친필 선시, 신발, 선조가 내린 교지 등 유물과 정조가 내린 금 병풍 등이 보관되어 있다. 초의선사 동상 옆에는 장군 샘이라 부르는 샘이 있고 호국문을 지나 내삼문 격인 예제문(禮齊門)을 들어서면 표충사와 비각이 있다.
표충사 오른쪽으로는 표충비각이, 왼쪽으로는 조사당이 있는데, 유가(儒家) 형식의 사당을 꾸며 매년 서산대사의 가르침을 받드는 제례와 추모행사를 거행하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설명을 접하고 나니 대흥사를 호국의 성지라고 하는 까닭이 이해되었다.
별원 지역의 표충사를 보고 나서 내친김에 발걸음을 계속 위로 향하니 호젓하게 절에서 멀어지면서 대광명전 지역이 나왔다. 동국선원이 있어 지금은 선원(禪院)으로 쓰고 있는데, 일반인의 출입을 금하는 곳이다.
부득이 추사의 친필이 있다는 동국선원을 지나쳐 산으로 오른다. 험한 산길을 40분 넘게 숨이 턱에 닿도록 오르니 북미륵암이다. 북암이라고도 부르는 이곳의 창건에 관한 기록이 없어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1754년에 중수했다는 기록이 전해온다.
북미륵암에는 국보 제308호 마애여래좌상을 모신 용화전(龍華殿)과 보물 제301호 삼층석탑이 있고 맞은편에는 지방문화재 삼층석탑(전남 문화재자료 제245호)이 하나 더 있다. 힘들게 올라가 볼 만한 곳이다.
열성 답사꾼이거나 불심이 깊은 신도가 아니면 찾기 힘든 북미륵암에 올라 국보 마애불상을 친견하고 나니 대흥사가 과연 명불허전임을 알겠다. 그 옛날 이토록 힘든 곳에 불상을 새긴 것은 과연 누구의 손길이며, 부처의 가피로 무엇을 이루고자 열망하였을까.
산사 일곱 곳 답사를 마치며
111년 만의 폭염이었다는 금년 여름 8월 한 달 동안 열세 번째 세계유산에 등재된 일곱 곳 산사에 대한 연속 답사를 모두 마쳤다. 마곡사를 시작으로 법주사, 봉정사, 선암사, 부석사, 통도사에 이어 대흥사까지 돌아보고 나니 성취감과 함께 뿌듯한 자부심이 가득하다.
다시 한 번 열세 번째 세계유산 등재를 축하하며, 이제 우리의 보물이 아닌 세계의 보물, 세계인의 문화유산이 되었으니, 답사를 마친 후 느낀 소감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세계유산 등재를 자축하거나 자화자찬에 열중할 게 아니라 세계에 내놓아 부끄럽거나 부족한 건 없는지부터 살펴볼 일이다. 필요하다면 문화재청과 소속 지방자치단체, 유관 시민사회단체, 그리고 해당 사찰 관계자들이나 조계종과 태고종 실무자가 연합하여 시정, 보완해주기 바란다.
먼저 일곱 곳 산사를 돌아보니 충실하게 준비한 소개자료, 즉 브로슈어(brochure)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그나마 통도사가 영어, 일어, 중국어 등 주요 외국어를 포함해 잘 준비하였으며 법주사 정도가 인쇄물 형태로 건네주었다. 선암사는 자체 제작한 듯 성의껏 자료를 준비하였으나 다소 미흡했고, 사찰을 소개하는 안내 자료 한 장 없는 곳이 많았다.
또한 일곱 곳 사찰 입장료도 최소 1200원부터 최대 4000원까지 몇 배의 차이가 났다. 여전히 카드결재는 안 되고 현금만 가능하다는 곳도 있었다. 그리고 대부분 사찰 매표소 직원들이 절집과는 무관한 듯 세련되지 못하거나 불친절한 것이 거슬렸다.
이뿐만 아니라 대부분이 촬영 금지가 지나치다. 예불이 진행 중이거나 행사 등에 방해가 되면 안 되겠지만 이유 막론하고 촬영을 하지 말라는 것은 세계유산에 등재하고, 세계에 알린다는 취지에 맞지 않는 일이다. 오히려 친절하게 설명해주고 안내해주는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할 것이다.
또한 안내와 설명에 필요한 인원, 표지판 등이 많이 부족하다. 세계유산이 된 이상 외국어 능력도 구비한 안내요원이 상주해며, 적재적소에 다양한 언어로 설명을 비치하여 방문객의 이해를 도와야 할 것이다.
그밖에 화장실과 세면장, 음료수 급수대, 휴게시설 등을 수준 높게 구비하길 바란다. 과거에 비해 많이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부족한 게 현실이다. 비록 종교시설이고 보호해야 할 문화재도 많지만 방문객을 배려하는 마음도 넓어지기를 기대한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무쇠도 녹일 듯 찌는 삼복더위를 아랑곳하지 않고 활짝 피어나는 ‘여름 야생화’를 보면서, 미국의 한 심장 전문의가 스트레스 해소 방안의 하나로 처음 썼다는 명언을 새삼 떠올립니다. 7월호에 소개한 해오라비난초를 비롯해 남덕유산 능선의 분홍색 솔나리, 가야산 정상의 백리향, 선자령 숲속에서 피는 붉은색의 제비동자꽃, 그리고 전국 각지의 오래된 연못에서 드물게 만나는 가시연꽃 등등.
그런데 ‘피할 수 없어 즐기는’ 정도가 아니라, 염천(炎天)의 뙤약볕을 천혜의 선물인 양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야생화가 있습니다. 햇살이 가장 강렬하게 내리쬐는 바로 그 시간대에만 꽃잎을 활짝 열고 더없이 맑고 환한 얼굴을 세상에 내비치는 꽃이 있습니다. 바로 꽃은 물론 이파리 등 전초(全草)가 깜찍하다고 할 만큼 작고 예쁜 각시수련입니다.
식물명에 수련(睡蓮)이란 한자가 들어 있는 데서 알 수 있듯 ‘잠자는 연꽃’의 일종인데, 그냥 잠을 자는 게 아니라 잠자는 모습을 행여 남들이 볼세라 수면시간에는 어여쁜 얼굴을 닫고 아예 자취를 감춰, 먼 길 마다치 않고 찾아온 객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곤 합니다. 필자 또한 처음 각시수련을 만나던 날 크게 당황했습니다. 남한 내 유일한 자생지로 알려진 강원도의 오래된 못을 물어물어 찾아갔는데, 분명히 피어 있을 것이라고 전해 들은 각시수련이 단 한 송이도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꽃의 지름이 2~3cm에 불과할 만큼 작아, 못 한가운데 필 경우 멀리서 보면 잘 분간이 안 될 수 있다지만, 그 어떤 피부미인 못지않게 도드라진 순백의 꽃을 ‘천하의 꽃쟁이’가 못 알아보겠느냐 장담했건만 아무리 샅샅이 살펴봐도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습니다. 영문을 몰라 답답해하던 중 자생지를 일러준 꽃 친구의 말이 생각나 무릎을 쳤습니다.
“대개 점심을 먹고 찾아가서 봤다. 아침나절에 가면 물속에 잠겨 있기 때문에 아예 볼 수 없다. 보통 낮 1시는 넘어야 얼굴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미인은 잠꾸러기’란 말이 있듯 오전엔 어김없이 물속에서 잠들어 있다가, 수온이 오르고 수은주가 치솟는 대낮이 돼야 잠에서 부스스 깨어나 청초한 꽃송이를 하나둘 물 위에 펼치고 유유자적 여름 뙤약볕을 즐기는 것이지요. 정확하게 낮 1시 15분부터 각시수련의 깜짝 등장을 지켜보면서, 학명 중 속명 님파이아(nymphaea)가 그리스 신화 속 ‘요정(妖精)’ 님프(nymph)에서 따왔다더니 과연 ‘물의 요정’이라 할 만하다고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애기수련이라고도 불리는 각시수련은 말발굽 모양의 타원형 잎을 물 위에 띄우고 사는 부엽식물(浮葉植物)의 일종입니다. 보통 6월에서 8월까지 한여름에 꽃을 피운다고 알려져 있는데, 실제로는 9월 하순에도 싱싱한 꽃을 만날 수 있으니 개화 기간이 알려진 것보다 더 길다 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 설명했듯 낮이면 꽃잎을 열고 저녁이면 다시 닫는데, 단순히 꽃잎을 여닫는 게 아니라 수면 아래로 내려갔다 올라왔다 하기를 3~4일 반복한 뒤 열매를 맺고 아예 수면 아래로 잠기면 다시 새로운 꽃이 피는 식으로 서너 달을 지속한다고 합니다.
Where is it?
각시수련은 세계적으로 우리나라에만 자생하는 희귀한 특산식물이다. 처음 발견된 곳은 왕래가 끊긴 지 하도 오래돼서 이름도 생소한 황해도 장산곶 몽금포라는 곳인데, 이 때문에 지금도 많은 도감은 황해도 장산곶 또는 황해도 몽금포를 대표적인 자생지로 표기하고 있다. 갈 수 없는 몽금포 이외에 알려진 자생지로는 강원도 고성의 오래된 작은 연못인 천진호가 거의 유일하다. 백두산 주변 습지에도 비슷한 종이 자생하는데, 만주수련이란 이름으로 불린다. 환경부는 고성 이외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전형적인 북방계 수생식물인 각시수련이 지구온난화가 가속화할수록 멸종 위기에 내몰릴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2012년부터 멸종위기야생식물 2급으로 지정, 관리하고 있다.
김인철 야생화 칼럼니스트
서울신문 기자로 29년 일했다. '김인철의 야생화산책(ickim.blog.seoul.co.kr)' 블로그를 운영 중이다. '야생화 화첩기행' 저자.
“꿈속에서라도 보고 싶다.”
열애에 빠진 젊은이들이 막 헤어진 연인을 돌아서자마자 보고 싶다고 할 때, 또는 반백의 불효자가 이미 저세상으로 가신 부모를 뒤늦은 후회와 함께 애타게 그리워할 때, 또는 어느새 망백(望百)의 나이가 된 이산가족이 고향에 두고 온 부모 형제를 죽기 전 단 한 번만이라도 만나고 싶다며 눈물을 쏟을 때나 쓸 법한 간절한 염원을 꽃말로 가진 야생화가 있습니다.
일 년 중 가장 더운 7월 불볕더위에 그늘 한 점 없는 습지에서 불화살처럼 뜨겁고 강렬한 여름 햇살을 온몸으로 받으며 순백의 꽃을 피우는 해오라비난초가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키는 15~40cm로 그렇게 작지는 않지만 녹색의 줄기마다 3~6장씩 달리는, 너비 3~6mm 길이 5~6cm의 잎 등 전초가 그렇게 풍성한 편은 아니어서 눈길을 끌지 못하는 데 반해, 줄기 끝에 1~3개씩 달리는 흰색 꽃만큼은 누구나 보는 순간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독창적인 관상미를 뽐냅니다.
“하~ 알 수 없는 조화로다.” 몇 해 전 처음 해오라비난초를 만나고 집에 돌아와, 몇 시간 전에 담은 사진을 컴퓨터 모니터에 올리니 흰 새들이 날아다닙니다. 분명 카메라에 꽃을 담아왔는데, 꽃은 온데간데없고 명품 고려청자에 새겨진 학을 닮은 새들이 흰색 날개를 활짝 펴고 우아하게 춤을 추니 ‘알 수 없는 조화’라고 혼잣말을 했던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길이 3cm의 꽃은 2개의 곁 꽃잎과 하나의 입술 꽃잎으로 이뤄졌는데, 특히 세 갈래로 갈라지는 입술 꽃잎이 좌우 날개를 퍼덕이며 비상하는 백로(白鷺)를 연상케 하며 꿈속에서라도 다시 보고 싶은 강한 열망을 낳습니다. 그리고 새를 닮은 꽃의 형태에서, 다소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기는 하지만, 바로 해오라비난초라는 이름이 유래한다고 식물학자들은 말합니다. 즉 ‘해오라비’는 백로와 같은 왜가릿과의 새인 해오라기의 경상도 사투리로, 해오라비난초란 해오라기난초의 오기로 봐야 한다는 것. 그런데 해오라비를 해오라기의 지방 사투리로 인정한다 해도, 해오라기는 머리와 등이 검고 통통한 게 순백의 해오라비난초 꽃과는 다소 거리가 있어, 온몸이 희고 날렵한 ‘백로난초’라는 이름이 더 적확했겠다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아무튼, 중·남부 지역의 양지바른 습지에서 한여름 꽃을 피우는 해오라비난초는 우리 땅에서 자라는 야생 난초 중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 관상미가 뛰어납니다. 다만 자생지가 불과 몇몇 곳에 불과한 희귀종인 데다, 꽃이 피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숱한 이들이 찾아 순식간에 자생지가 파괴되기 일쑤여서, 각별한 보호 대책이 요구됩니다. 실제 몇 해 전 수십 송이가 한꺼번에 피어 전국의 야생화 동호인들이 줄지어 찾았던 자생지를 그다음 해 찾아갔다가 단 한 송이의 꽃도 보지 못했습니다.
발길을 돌리면서, 자칫 잘못하다가는 꽃말처럼 꿈속에서나 만나게 되는 것 아닐까 걱정을 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세계적으로도 우리나라와 일본, 중국에만 분포하는데, 중국에는 자생지가 단 한 곳밖에 없고, 비교적 개체 수가 많은 일본에서도 무분별한 채취로 멸종위기를 맞는 등 국제자연보전연맹(IUCN) 국가 단위 멸종위기종 A급으로 분류되어 있습니다.
Where is it?
멸종위기식물 2급으로 지정, 관리 중인 해오라비난초는 경기도·강원도·경상남북도에 최대 200개 개체가 자생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몇 해 전 수원 칠보산의 한 습지에서 꽤 여러 개체가 꽃을 피웠으나, 이후 크게 줄어들자 애호가들이 자발적으로 보호 철망(사진)을 두르기도 했다. 인근의 또 다른 자생지에선 수년째 발견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야생에서 보기 어렵다고 실망하긴 이르다. 광릉 국립수목원 등 여러 식물원에 가면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경남 합천군에선 몇 해 전 해오라비난초에 비해 개체가 크고 꽃이 많이 달리는 큰해오라비난초가 자생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김인철 야생화 칼럼니스트
서울신문 기자로 29년 일했다. '김인철의 야생화산책(ickim.blog.seoul.co.kr)' 블로그를 운영 중이다. '야생화 화첩기행' 저자.
왜 여행하느냐에 대해서는 사람 수만큼 다양한 정의와 이유가 있지만 아마도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일상에 묻혀버린 꿈과 환상을 충전하기 위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일본 애니메이션 감독 미야자키 하야오가 “어른이 된다는 건 시시해지는 것”이라고 일갈했듯이, 인생은 예술작품이 아니고 영원히 계속될 수도 없다. 나이가 들면서 어쩔 수 없이 꿈이 있어야 할 자리에 후회가 조금씩 자리 잡기 시작하고, 이럴 땐 다시 한 번 꿈을 충전하기 위해 무언가라도 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어떤 여행도 열정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여행이야말로 진정 젊음을 충전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아닐까?
세계에서 네 번째로 큰 섬
아프리카와 인도 대륙 사이의 바다, 인도양에 유유히 떠 있는 섬 마다가스카르는 실제로 가본 사람이 많지 않지만 그 이름만은 의외로 많은 사람에게 알려져 있다. 그 이유는 이곳이 바로 ‘어린 왕자’에 나오는 바오바브나무와 보아뱀의 고장이며, 월트디즈니 애니메이션 영화의 제목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실 모든 여행은 비행기에 오르면서부터 시작된다. 특히 목적한 나라의 비행기를 타는 경우 여행 기분은 배가된다. 마다가스카르항공은 프랑스 것이라더니 모든 안내방송이 프랑스어가 먼저 나온다. 그다음이 영어, 그다음이 말라가시어(마다가스카르 공용어) 순이다.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여행의 인상은 바로 승무원이다. 아프리카와 아시아 사이에 위치해 있는 마다가스카르에는 18개에 이르는 다양한 부족이 살고 있고, 외모 또한 아시아인에서 아프리카인까지 다양하다. 그 이유는 역사적 배경에서 찾을 수 있는데, 2000년 전 인도네시아인들이 배를 타고 건너와 살기 시작한 뒤 아랍의 상인들과 아프리카의 노예, 유럽의 제국주의가 밀려온 곳이 바로 이곳이기 때문이다. 마다가스카르는 80%의 국민이 농사를 짓는 농업 국가로, 국토의 많은 부분이 논이며, 우리처럼 하루 세끼 쌀밥을 먹는다. 아프리카 사람들이 하루 세끼 흰쌀밥을 먹는다는 사실이 참으로 신기하게 다가오면서 왠지 마음이 푸근해졌다.
바오바브나무의 고향, 모론다바!
바오바브나무를 보기 위해서는 수도 안타나나리보에서 비행기를 타고 서쪽 끝에 있는 모론다바라는 도시로 가야 한다. 모론다바로 가는 비행기는 19인승 프로펠러 비행기로, 손님의 숫자에 따라 제멋대로 항공시간을 변경해버리기도 해서 고객을 당황시키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탑승수속 땐 짐의 무게뿐만 아니라 승객의 몸무게도 잰다. 비행기가 워낙 작아 무게를 초과하면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세계 어느 오지를 가든 가장 먼저 배우게 되는 단어가 있는데, 바로 “천천히, 천천히”와 “문제없다”는 말이다. 마다가스카르어(말라가시어)로는 “모라모라”, “짜마니노나”라 한다. 황당한 상황에 처할 때마다 이들은 “모라모라”, “짜마니노나” 하며 활짝 웃는다. 오지 여행에서는 아무리 서둘러봤자 소용없다. 어차피 될 일은 되고 안 될 일은 안 되니 느긋한 마음을 먹는 편이 낫다고 스스로를 다독인다. 마다가스카르의 최대 볼거리로 꼽히는 바오바브나무 군락지와 칭기국립공원의 입구 역할을 하는 모론다바는 ‘긴 해안’이라는 뜻으로 바닷가에 면해 있다. 수도 안타나나리보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살갗을 태울 듯 작열하는 태양 아래 사람도 개도 늘어져 있는 이곳에서는 휴양 모드의 유럽 여행자를 쉽게 만날 수 있다. 동네 소녀들은 그늘에 앉아 머리를 땋으며 놀기도 하고, 소년들은 타는 듯한 태양 볕에도 아랑곳없이 자전거 타기를 즐긴다.
천 년의 지혜가 들려주는 말들
해안가를 벗어나 바오바브 애비뉴로 들어서자 마치 영화의 예고편처럼 드문드문 바오바브나무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마침내 눈앞에 짠하고 나타난 바오바브나무 군락지! 그것은 목이 꺾어질 듯 올려다봐도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높고도 장대했다. 1년에 고작 3mm씩 자라는 나무가 저만큼의 크기가 되기까지 얼마나 오랜 세월을 살아온 걸까. 정말이지 바오바브나무 하나만 보고 간다 해도 마다가스카르 여행은 충분할 것 같다.
바오바브나무는 세계적으로 8종이 있다고 알려져 있는데, 마다가스카르와 아프리카에 7종이 흩어져 있으며 나머지 1종은 호주에 있다. 마다가스카르의 바오바브나무는 다른 바오바브나무와의 비교를 불허한다. 속이 뻥 뚫릴 만큼 하늘을 향해 길쭉길쭉 늘씬늘씬 시원하게 뻗어 있다.
감탄사가 터지는 순간을 많이 만나는 일, 그것이 바로 행복
생텍쥐페리는 ‘어린 왕자’에서 “소혹성 B612를 온통 엉망으로 만드는 무서운 식물이 있다”며 바오바브나무를 안 좋게(?) 묘사하고 있지만, 난 천 년이나 되었다는 신비한 바오바브나무를 보면서 식물이야말로 신의 안장을 충실하게 드러내는 생명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거대한 바오바브나무를 바라보며 한없이 걷고 또 걷는데 저 멀리 보이는 바오바브나무에 뭔가 자그마한 것이 붙어 있는 게 보였다. 벌레라기엔 좀 크다 싶은 그것을 가까이 가서 보니 한 아이였다. 아이는 바오바브나무와 인간을 대조해서 보여주려는 듯 나무에 딱 붙어 서 있었다. 그 장면은 내게 영원히 잊지 못할 어떤 메시지를 던져주었다. 천 년이나 된 바오바브나무와 대조되는 작은 인간의 모습. 마치 “문명국가에서 온 너희들이 좀 산다고 오만해봤자 천 년 된 바오바브나무 앞에선 모두 다 ‘고작 요만한 것’일 뿐”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또 내게 나무처럼 살라고 말하는 듯했다. 현실이라는 대지에 굳건히 발을 딛고서도, 끝없이 천상을 향해 뻗어 나가라고….
러브 바오바브와 성스러운 바오바브
두 번째 날엔 바오바브 애버뉴를 조금 벗어나 독특한 바오바브나무들을 찾아갔다.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 ‘러브 바오바브(love baobab)’와 ‘성스러운 바오바브(holy baobab)’다. ‘러브 바오바브’는 다른 바오바브나무와 달리 두 개의 줄기가 엉켜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신혼여행객이나 연인이 많이 찾아와 사랑을 맹세한다고.
‘신성한 바오바브’는 성황당처럼 마을 입구에 떡하니 자리 잡고 있는데, 주변에 울타리가 쳐져 있고 마을 주민에 의해 보호를 받고 있다. 동네 주민들은 이 나무를 몹시 영험하게 여겨 아침저녁으로 이곳에 가 소원을 빈다.
그렇게 러브 바오바브와 성스런 바오바브를 거쳐 이윽고 다시 돌아온 ‘바오바브 애비뉴’. 역시 마다가스카르는 바오바브나무 하나만 실컷 봐도 그만인 곳이었다.
마다가스카르에 온 지 며칠 안 되었지만 그래도 묘사할 게 몇 개 있었던 것 같다. 온종일 먹어도 좋을 것 같은 끝내주는 바게트 맛이라든지 수도 안타나나리보 재래시장의 생동감 넘치는 삶의 모습, 칭기국립공원의 찌를 듯한 암석들까지.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숙소를 향해 달리는 길. 군락에서 떨어져 혼자임을 즐기는 바오바브나무들이 양손을 펼쳐 바이바이를 한다. 하나하나 작별을 고하며 바오바브나무들에 이름을 붙여본다.
발레리나 바오바브나무, 고독한 바오바브나무, 체조하는 바오바브나무….
천 개의 느낌표가 가슴에 와 박힌다.
travel tip
★찾아가기인천에서 방콕까지 타이항공(5시간소요), 방콕- 마다가스카르까지는 마다가스카르 항공(9시간 소요).
★기본여행정보한달간 무비자국가로 오랫동안 프랑스식민지였던 관계로 현재까지도 불어가 널리 통용되며 마다가스카르어(말라가시어)가 공용어다. 화폐단위는 아리아리(Ariary)로, 1000원=2000아리아리 정도. 커피와 사탕수수, 쌀이 주농작물이다.
★지도 & 추천여행루트 수도 안타나나리보에서 시내관광, 재래시장, 유적지를 본후 국내선으로 모른다바로 이동해서 바오밥 군락지, 그랑칭기국립공원을 보는 것이 핵심코스.
★준비물오프로드에 가까운 비포장도로를 장시간 달리므로 앉아있기 편안한 차림을 하는게 좋으며, 오지마을을 지나게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연필이나 공책, 천으로 된 가방, 의류, 풍선, 사탕 등 준비해가면 현지인들을 위한 소중한 나눔이 될 수 있다.
★여행경비350만원 내외
몇 년 전이었더라. 베란다 창밖 난간에 매달린 선반에 기다란 화분이 두 개 있었다. 봄이면 베고니아처럼 자잘한 꽃들을 몇 포기씩 사다가 나란히 심었다. 아주 예쁘게 잘 자라 봄에서 가을까지 꽃을 보는 재미가 여간 쏠쏠한 게 아니었다. 가끔 고추나 체리토마토 모종도 몇 포기 심어봤는데 역시 잘 자랐다. 빨간 토마토가 앙증맞게 방울방울 달리고 크진 않았지만 고추도 몇 개씩 달려 푸른색에서 빨간색으로 변해가는 모습을 지켜보곤 했다. 물과 햇살만으로도 잘 자라는 모습은 경이로웠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심지도 않은 채송화 싹이 나오더니 얼마 안 돼 꽃들이 정신없이 피어났다. 우리 가족은 환호했고 그 신기한 모습을 다투어 보며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 어떤 인연으로 우리 집까지 날아온 씨앗일까. 여름부터 가을까지 꽃은 피고 지면서 눈을 호강시켜줬다. 그리고 해마다 포기가 점점 늘어나 화분에 가득 찼다. 채송화가 그렇게 강한 번식력과 질긴 생명력을 지녔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초등학교 때였다.
정은수. 내 짝꿍 은수네 집은 채송화가 아주 많이 피어 있었다. 마당 한쪽 꽃밭이 흙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채송화로 덮여 있었다. 봄이었는지 여름이었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진 않지만 비가 내린 다음 날이면 은수 엄마는 채송화 캔 것을 양동이에 한가득 담아 학교에 가져오셨다. 그리고 교실 앞 화단에 조용히 앉아 촉촉해진 땅을 호미로 파 채송화를 심으셨다. 당연히 교장실 앞 화단에도 정성껏 심곤 하셨다. 선생님을 향한 감사의 마음이 채송화보다도 더 예뻤던 은수 엄마의 마음을 필자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은수네 집에 놀러갔을 때 필자에게도 뿌리째 캐어 한 소쿠리 담아주셔서 아침에 세수하려고 우물가에 앉으면 활짝 핀 채송화랑 눈이 마주쳤다. 우리 집 꽃밭 채송화도 어느새 꽃밭 둘레를 가득 채웠다.
그로부터 얼마 후 은수와 소식이 끊겼다.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면서 이사를 가버렸는데 그 뒤 만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몇 년이 더 지나 필자는 어느덧 여고생이 되었다. 문득문득 은수 생각이 났다. 그러다가 어느 날 은수를 보게 됐다. 고등학교 2학년, 3학년을 보내면서 어쭙잖게 규율부 활동을 했는데 등굣길 아이들을 지도한다는 명분하에 교문 앞을 지키고 서 있을 때 놀랍게도 교문 안으로 들어서는 은수를 보게 된 것이다. 시간이 흘렀는데도 예전의 모습이 많이 남아 있었다.
다시 봐도 분명 은수였다. 너무 반가워서 “은수? 은수지?” 했더니 나를 알아보고 조금 웃었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필자만큼 반가워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이후로도 그렇게 몇 번 더 마주쳤는데도 역시 반기는 모습은 아니었다. 필자는 슬펐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은수는 형편이 여의치 않아 1년을 쉬었다가 다시 진학을 해서 필자보다 학년이 하나 아래였다. 선후배를 유난히 따지던 시절이라 그랬을까. 은수는 필자를 보면 오히려 슬그머니 피하는 것 같아 너무 서운했다. 그래도 필자가 씩씩하게 다가갔다면 좋았을 텐데 바보처럼 씩 웃거나 멀리서 바라보는 게 고작이었다. 게다가 필자가 먼저 학교를 졸업하면서 단짝 은수와는 그렇게 또 헤어지고 말았다.
“채송화가 무척 많이 피었어” 하면서 손을 잡아끌던 은수의 모습을 떠올리면 바보 같았던 필자 모습이 오버랩된다. 우리는 왜 더 이상 만나지 못하는 걸까. 꽃이 필 때마다 서로를 추억하기 위해서일까. 아니면 알 수 없는 그 무엇을 위한 통과의례일까.
오늘은 필자의 마음속으로 싸아~ 하니 박하향 같은 바람이 분다.
한국 시니어블로거 협회에서 주관하는 토요3시간 걷기 행사가 남양주에 있는 수종사에서 있었다. 경의중앙선 열차를 타고 운길산역에서 내려 도보로 수종사까지 한 바퀴 도는 것이다. 필자는 며칠 동안 감기 기운으로 망설이던 끝에 전 날 저녁에 참석하기로 최종 마음을 정했다. 상봉역에서 만난 회원들이 경의중앙선 운길산역에서 내렸다. 미리 도착한 회원들까지 11명의 회원들이 합류하여 수종사를 향해서 걷기 시작하였다.
해발 610m 운길산 중턱에 자리 잡은 수종사는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쳐지는 두물머리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천혜의 절경을 감상할 수 있는 사찰이다.
영하5도의 쌀쌀한 날씨에 살랑살랑 불어대는 산바람이 제법 매섭게 옷깃을 파고들었다. 운길산 역에서 수종사로 가는 길은 계곡의 등산로나 시멘트 포장길을 따라 가파른 경사로를 힘들게 걸어서 올라가야 한다. 필자 일행은 처음에는 계곡의 산길을 따라 오르다가 중간에 가파른 시멘트 포장길로 들어섰다. 등산로와 산비탈 여기저기에는 적지 않은 눈이 쌓여있어 여간 미끄럽지가 않았다. 헐벗은 겨울 산 나뭇가지 사이로 옹알옹알 들려오는 새소리를 들으며 언덕길을 오르다 보니 어느새 땀이 차오른다.
이 길은 필자에게는 지울 수 없는 추억이 깃들어 있었다. 단풍이 곱게 물들던 10여 년 전의 어느 가을날, 지인과 함께 자전거를 타고 이 곳을 찾았다가 수종사 입구에서 운명처럼 만난 여인과 불타는 사랑에 빠졌던 필자의 지인이 문득 생각났기 때문이다. 추억을 꺼내 두런두런 음미를 하다 보니 어느덧 수종사 일주문이 눈에 들어올 때 쯤엔 등까지 땀으로 흠뻑 젖었다.
운길산 수종사는 대한불교조계종 봉선사의 말사로 창건연대의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세조와 관련된 일화가 있다. 부스럼을 앓던 세조가 오대산 상원사에서 문수보살을 만나 깨끗이 낫고 한강을 따라 환궁하는 길이었다. 양수리까지 오니 밤이 이슥해 쉬어 가는데 운길산에서 종소리가 들려왔다. 신하가 알아보니 천년 고찰 터 암굴 속에 십팔 나한상이 앉아 있고 천장에서는 물방울이 떨어지면서 종소리를 내는 것이라 했다. 세조는 이곳에 절을 복원해 수종사라 부르고 이 은행나무(500년)를 하사했다고 한다.
500년 수령 느티나무 두 그루의 환영을 받으며 경내로 들어서자 겨울 속에 빠진 사찰의 고즈넉함이 불쑥 다가왔다. 경내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나니 마당 앞에 아담하게 지어진 전각 다실, 삼정헌(三鼎軒)이 눈에 들어왔다. 필자 일행은 툇마루에 배낭을 벗어놓고 다실 안으로 들어갔다. 무료다실 삼정헌에서는 약수를 끓여 이곳을 찾는 중생들에게 차를 제공하고 있었다.
투명하고 탁 트인 통유리 밖으로 두물머리의 풍경을 감상하며 녹차 한 잔을 여유롭게 마실 수 있는 삼정헌은 수종사만의 아주 특별한 공간이다. 은은한 녹차향이 후각을 자극하고 정오를 갓 지난 말간 겨울 햇살이 섬섬옥수처럼 다실 안을 비추고 있었다. 가파른 경사로를 따라 경내까지 당도하느라 이미 땀으로 촉촉해진 몸이 한기(寒氣)가 엄습하기 이전에 이곳에 들어올 수 있어 참으로 다행이었다. 이 곳 삼정헌에서 보살님의 녹차 공양은 덤으로 맛볼 수 있는 행복이다. 시원한 전망과 유리창을 통해 쏟아지는 햇살은 마음에 찌든 때까지 말끔히 거두어간다. 잔잔한 음악을 들으면서 도란도란 둘러앉아 우려낸 녹차 한잔을 나누면서 얘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뻑뻑했던 피로는 가시고 젖어있던 속옷도 대충 말라가고 있었다. 운길산 수종사를 한번쯤 찾았던 사람들은 이런 맛에 잊지 않고 다시 이 사찰을 찾아오곤 하나보다. 따뜻한 다실 분위기에 공짜로 차까지 얻어마셨으니 어찌 고맙지 않을 손가? 나오는 길에 시주함에 소박한 정성을 담았다.
삼정헌에서 감미로운 시간을 보낸 필자 일행은 하산 길에 올랐다. 낮에 잠깐 녹았던 길이 저녁이 되면서 다시 살얼음이 살짝 얼어 무척이나 미끄러웠다. 내리막길에서 우려하던 일이 기어코 일어나고야 말았다. 2명의 대원이 급경사로에서 미끄러져 넘어지고 말았는데, 부축을 해서 일으켜 놓고는 하늘을 향해 네 팔 벌린 나무 같다고… 유쾌한 농담을 주고받았다.
몸과 마음이 한없이 움츠러드는 겨울, 12월의 첫 주말에 시니어 회원님들과 더불어 운길산 수종사를 찾아 활기차고 좋은 시간을 보냈다. 엄동설한 맹추위에 대항하여 가슴을 활짝 펴고 씩씩하게 걸었던 회원님들의 얼굴에서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졸업 이후 처음이다. 성당도 군부대도 있었지 아마? 큰길 맞은편엔 한때 어머니가 다니셨던 신발공장도 있었고. 지하철 역세권으로 탈바꿈한 지 이미 오래전이라니 제대로 찾을 수 있을까? 이젠 사라졌을 옛날 우리 집 흔적이 아직 남아 있다면 대문 앞에서 찻길까지 그 좁다란 골목길을 따라서 아주 오랜만의 등교를 해보리라.
부산 지하철 2호선 문현역 2번 출구를 나오면서 필자의 발걸음이 미세하게 떨렸다. 헛기침 두어 번으로 호흡을 가다듬어본다. 마치 두 계절을 머금은 듯 선선하면서 차가운 바람은 얼굴을 어루만진다. 3분 정도 걸었을까? 믿기지 않는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그래 바로 여기야.”
오랜 기억 속의 동네 골목길이 여태 저리 버티고 있었다니. ‘딱지치기’와 ‘다망구’ 그리고 ‘오징어달구지’를 하던, 또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 유행가를 따라 부르느라 항상 시끌벅적했던 바로 그곳. 그 시절의 주인공들은 지금 무얼 하며 하루를 보내고 있을까? 한구석 기억의 방에 쌓아두었던 옛이야기들이 여름날 분수대 물줄기처럼 솟구쳐 오른다. 필자가 살던 옛집은 자취를 감추었지만.
아마 일요일이었을 듯싶다.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나서 문을 열고 나가보니 친구 녀석이 교회를 가자며 손짓했다. 귓속말로 비밀스러운 약속까지 했다. “오늘 교회 같이 가면 저애 소개시켜줄게.” 녀석이 가리키는 곳을 보니 긴 머리의 여자아이가 나무 뒤에서 우릴 훔쳐보며 서 있는 게 아닌가.
세월 따라 빛바랜 골목 담벼락엔 여기저기 상처투성이, 그 흔적들 사이로 혹시나 남겨두었을지도 모를 깨알 낙서들을 찾아 이쪽저쪽 두리번거린다. 빠져나오기 싫은 어둠속 터널 같은 골목길을 나서자 바로 큰길에 이른다. 이젠 좌회전을 해야 한다. 대로변 K은행에서 학교까지 죽 이어진 신작로를 따라 제대로 등굣길에 오르는 순간이다. 기억보다는 가깝게 느껴진다. 여긴가? 좌측으로 키다리 소나무가 있었을 자리엔 브랜드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새로이 오픈한 듯싶은 삼거리 국수집 앞에서 잠시 서성거린다. “그래 맞아, 이 부근에 제법 큰 공터가 있었지.” ‘소차’ 자전거 빌려 타는 맛에 해가는 줄 모르던, 뭉쳐서 야구시합하느라 밥도 거르던 그를 기어코 만나고야 만다. 지금은 흑백사진 속에나 있는 유년의 필자를….
퀴즈 하나 내련다. 1970년대 대표 주전부리 중 하나는? 호주머니에 쏙 집어넣고 한 움큼씩 꺼내먹기에 그만이었던 것. 바로 배고픈 하굣길의 파란 봉지 ‘뽀빠이’, 빨간 봉지 ‘자야’다. 오물오물거리며 걸어가던 오르막을 지나자 학교 건물이 성큼 다가선다. 뒷산 황령산과 그 자락을 따라 조밀하게 들어선 집들을 배경으로 드디어 모교가 보인다. 높고 선명한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너무나 깔끔한 외관의 부산 문현초등학교.
정문으로 바로 들어서지 않고 담장 따라 한 바퀴 천천히 돌아본다. 그 시절엔 없었던 색깔 예쁜 유치원과 두 팔 벌려 활짝 반갑게 맞이하는 후문. 때마침 지나가던 어린 후배가 찍어준 인증샷은 오래도록 남을 기념작이다.
그런데 시절이 하수상한 탓이라서 6학년 1반 교실을 둘러볼 수가 없어 두고두고 아쉽다. 책·걸상도 어루만져보고 싶고 게시판 그림들도 들춰보고 싶고 또 손가락으로 분필가루도 찍어보고 싶은데 말이다. 아쉽게 돌아나가던 필자의 눈길을 사로잡은 건 본관 우측 앞에 있는 ‘책 읽는 소녀상’이다. ‘독서는 마음의 양식’이라고 씌어 있는 기단석 위로 다소곳하게 앉아 무려 40여 년 동안이나 책을 읽고 있다. 요즘 말로 ‘심쿵’하게 하는 모습이다.
은근한 매력의 향나무 교정 아래로 내려서니 눈부신 햇살도 도리 없이 비켜가는 얽히고설킨 등나무 벤치. 휘감아 도는 바람결에 기꺼이 온몸을 맡기고선 살며시 눈을 감아본다.
6학년 체육시간, 한판 제대로 붙던 날. 운동장 모래판 씨름장엔 팽팽한 긴장감이 샅바 위를 감돌았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우리 모두는 ‘빵’ 터지고 말았다. 한 친구의 엉덩이, 그것도 하필 그곳에 그만 ‘빵꾸’가 나버렸기 때문이다. 평소 까무잡잡했던 얼굴이 홍당무가 되었던 녀석.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을까? 혹여 이 글을 보게 된다면 함께 웃어나 보고 좋을 텐데. “야, 원래 구멍 난 바지를 입었던 거냐? 아니면 정말 용쓰려다 그리 된 거냐? 설마 기억조차 못하는 건 아닐 테지?”
잘 그려진 눈금 위로 색깔 선명한 인조 잔디 운동장. 모래먼지 흩날리던 지난날은 찾아볼 수 없는 트랙 주변을 어슬렁거려본다. 소꿉놀이하던 옛날의 모래밭은 오간데 없고 누가 저리 시퍼런 융단을 깔아놓았단 말인가.
그런데 정말 이상하고 말이 안 되는 게 있다. 이리도 무심한 사람이었나? 아니면 기억력이 떨어진 건가? 좀처럼 생각나질 않는다. 겨우 서너 명 정도의 이름만 생각날 뿐이다. 그나마 세월이 흘러 그들과도 연결이 끊겼다. 참 어처구니없는 노릇이다. 헛헛한 걸음으로 정문을 나서면서 다시 사진을 찍어본다. 언제라도 꺼내볼 수 있게 폰 속에 제대로 간직해놓고 싶다. 또 다녀갈 날을 쉽사리 기약하기 어려운 게 우리네 현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나오는데 문득 생각난 곳이 있다. 바로 학교 앞 문방구점. 단 몇 걸음 만에 마주한 그곳은 거의 옛날 그대로의 모습이다. 열린 듯 닫힌 창문을 혹시나 하며 두들겨보는데 잠시 후 인기척이 들려온다. 그분일까? 사실 얼굴도 생각이 나질 않는다. 드르륵 창문이 열리며 맞아주신 분. 그 시절의 주인장이 분명했다. 졸업연도를 밝히니 이내 기억을 더듬으신다. 악수도 청하고 ‘무극노트’도 몇 권 기념으로 산다. 환하게 웃으시며 사진촬영에도 응해주시고 동기들 만나면 안부 전해달라며 사인펜 두 자루를 덤으로 넣어주신다. 마치 고향의 이웃 아저씨를 조우한 기분이다.
어느덧 기울어가는 해. 왠지 자꾸 뒤돌아보게 된다. 누군가 부르는 소리도 없는데 발걸음이 떼어지지 않는다. 어디 근처에서 커피 한잔 할 수 있는 카페 없나? 어쩌면 그 긴 머리 소녀가 거기서 커피를 마시고 있을지 모를 일이고.
9월 26일 화요일 8시에 강남 시니어 플라자 해피 미디어단은 오대산 월정사를 향하여 출발했다. '노인 영화제'에 출품할 영화 촬영을 하기 위해서였다. 우리 미디어단은 메인 기자와 두 세 명이 보조하여 영화를 찍고 나머지 단원은 엑스트라 역할을 했다.
뒤늦게 서양화가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우배순 선배님은 영화 시나리오까지 써서 우리를 놀라게 했다. 얼마 전 공개 오디션으로 선정된 남 주인공과 여 주인공도 우리와 함께 탑승했다. 해피미디어단 서포터팀장인 임은정과장님도 함께 했다.
단원 중의 한분인 최기자님이 병환 중이라 같이 참석을 못하게 되었다. 덩달아서 낭군님도 편찮은 부인 곁을 지켜야 해서 부부가 다 못 가게 되니 정말 서운했다. 시니어들은 친구들을 위해서도 아프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차! 어떡하지! 화장품이 들어있는 파우치를 깜박 했네'
어제 아침 집에서 50m쯤 나왔는데 생각났으나 집에 다시 들렸다 나오면 늦을 것 같아서 포기했다. 남에게 흐트러진 모습 보이는 것을 용납 못하는 내 성격에 여간 신경 쓰이는 것이 아니었다. 고맙게도 친절한 육 선배님이 립스틱 셋트를 몇 번이고 빌려주어서 무사히 해결 되었다. 피부에 직접 닿는 화장품을 빌려주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육 선배님은 어제 나를 여러 번 감동시켰다. 낭군님과 통화 하는 걸 보니 여간 깍듯하고 공손한 모습이 아니었다. 지난 금요일 바자회 때 구입한 무농약 사과를 한 상자 통 채로 들고 왔다. 20여명 되는 미디어단원들이 마음껏 먹을 수 있도록 수시로 잘라서 나눠주었다. 꽤 번거로울 그 작업을 환한 미소를 머금은 채 기꺼이 하고 있었다.
"그 무거운 걸 어떻게 가져오셨어요?"
걱정되어 묻는 내게 낭군님께서 차로 가져다 주셨다 했다. 서로 배려하고 존중하며 살아가는 모범적인 부부의 예쁜 모습이었다.
월정사 가는 버스 안에서는 앞자리부터 돌아가며 노래를 했다.
사회를 맡은 총무님의 재치있는 말솜씨로 버스 안은 웃음꽃이 가득 피어났다.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외로움도 사람만이 느끼는 감정일까?
나는 노래 대신 원초적인 외로움의 존재. 사람의 마음을 다독여주고 위로해 주는 정호승시인의 를 낭송했다.
"아까 울컥 했어요"
소감을 밝히는 단원의 말에 '내가 시의 분위기를 제대로 살렸나' 싶어서 흐믓했다.
물 맑고 공기 맑은 월정사 주변의 전나무 숲길은 힐링코스이다. 오랜만에 수많은 사람들의 욕망이 뒤섞인, 탁한 공기의 서울을 떠났다. 청량하고 신선한 숲속의 공기를 마음껏 마실 수 있었다. 커다란 바위 사이로 흐르는 계곡물이 나를 유혹했다. 애써서 발을 담그고 싶은 마음을 떨쳐내야만 했다. '놀러 온 거 아니거든. 취재활동 왔걸랑.' 아마추어 연기자로 최단장님과 호흡을 맞춰보았다. 서로 사랑하는 연인의 애틋한 감정을 연기해야 하는데 그게 만만한 게 아니었다. 반복해서 코치를 해도 그럴듯한 분위기가 나오지 않으니 메인 촬영기자인 이정임님이 속 터져했다. 여러 번 엔지를 내고도 영 어색한 우리를 보고 단원들이 어이가 없어서 웃음을 터트렸다. 코메디가 따로 있나? 이런 게 바로 리얼 코메디다. 나에겐 없는 끼를 한탄해야만 했다. 주문진 횟집에서의 점심은 맛있고 푸짐했다. 갑각류의 천적인 나를 빠알간 대게가 기다리고 있었다. 달착지근하고 고소한 대게는 너무 매력적이다. 요즘 트렌드. 선찍후식을 해야만 하는데 깜박 잊어버렸다. 그건 순전히 대게 탓이다 걔한테 온통 마음을 빼앗겨서 생긴 일이다.
점심 메뉴인 회 정식 사진을 올려주신 분이 많이 고맙다.
그 다음 코스는 주문진 바닷가 씬이다. 바다! 그 바다에 왔다. 이성을 잃을 정도로 좋아하는 바다가 날 너무 강력하게 유혹해서 파도와 숨바꼭질을 했다. 밀려갔던 파도가 다시 밀려와서 내발에 닿을 것 같으면 신발이 젖을까봐 뒤로 도망갔다가 파도 눈치를 보며 살며시 다시 앞으로 나갔다. 심심한 파도는 처얼썩! 쏴아! 쉼 없이 노래하며 춤을 추고 있었다.
'감성이 살아있어야 살아있는 것이다.'
나의 강력한 주장이다.
감성은 그대로인데 세월만 간듯하다. 단원들 모두 바다에서 즐거운 한 때를 보냈다. 모래로 두꺼비집을 짓는다거나, 나 잡아봐라 놀이도 하며 화알짝 웃는 모습이 푸른 하늘을 닮았다.
다음 코스는 때마침 백일홍 축제가 열리고 있는 평창이다. 상당히 넓은 밭에 색색의 백일홍이 활짝 피어서 우리를 반가이 맞아주었다. 백일홍꽃 사이에 있는 의자에 앉아서 한 컷, 꽃길 사이를 걸으며 한 컷. 사진을 찍으며 우리의 소중한 추억을 만들어갔다. 우리 미디어단은 매주 목요일 강남 시니어 플라자 3층에 있는 미디어실에서 만나서 회의를 했다. 모처럼 영화 촬영 취재를 위해 산과 바다로 나오니 힐링도 이런 힐링이 없다. 완전 재밌고 행복했다.
엔돌핀이 무한대로 나온듯 싶다.
야호! 해피 미디어단 만세!
가산 이효석(可山 李孝石)의 단편소설 의 주 무대로 알려진 강원도 평창군 봉평. 이효석의 고향이기도 한 봉평은 매년 가을이 찾아오면 메밀꽃이 활짝 펴 수만 평의 메밀밭을 하얗게 물들인다. 한때 수입산 메밀에 밀려 사라질 위기도 있었지만 2002년 ‘이효석 문학관’이 개관되면서 다시 한 번 더 흐드러지게 그 꽃을 피우게 됐다.
소설가 이효석은 1907년 출생해 1942년 결핵성 뇌막염으로 36세의 나이로 단명했다. 서울대학교의 전신인 경성제국대학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한 뒤 경성농업학교에서 교육자로서의 삶을 살았던 그는 30세가 되던 해 숭실전문학교 교수로 부임하면서 거취를 평양으로 옮겼다. 이때 이 탄생했다. 이후 , , 등을 발표하며 ‘우리 문단에서 가장 참신한 언어 감각과 기교를 겸비한 작가’라는 평을 받았다.
이효석의 발자취를 보여주는 문학관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평창IC에서 빠져나와 약 10분간 달리다 보면 양옆으로 봉평에서 가장 맛있는 집이라며 현수막을 내건 음식점이 줄지어 있다. 맛집의 유혹을 뿌리치고 이효석을 기념하는 가산공원과 이효석 생가가 위치한 남안동을 이어주는 남안교를 건너자 오른쪽 언덕 위에 자리 잡은 이효석 문학관이 어느 새 모습을 드러낸다. 그의 대표적 문학작품 제목이 새겨진 책 모양의 문학관 입구가 인상적이다.
들어서자마자 이효석의 연보가 펼쳐진다. 출생부터 사망까지의 간략한 설명과 함께 놓인 사진 자료는 그의 생애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깔끔하게 교복을 차려입은 이효석의 학창 시절 사진과 단란한 가족사진이 인상적이다. 좀 더 안으로 들어가자, 1930년대 이효석의 집필 공간을 재현한 코너가 눈길을 끈다. 피아노와 축음기도 놓여 있고 그 뒤로 보이는 크리스마스트리와 장식이 이국적이다. 그 시절에 커피를 즐겨 마시고 빵에 버터를 발라 먹었다고 하니 이효석이 서양문물에 얼마나 개방적이었는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그의 생전 활약에 대한 정보는 물론이고 육필 원고, 영화 의 대본 등 유족과 연구자들이 기증한 흥미로운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문학관 밖으로 나가면 산책길과 더불어 이효석의 좌상을 볼 수 있다. 비록 조각상이긴 하지만 함께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여분의 의자도 마련되어 있다. 자세한 안내를 원하는 방문객을 위해 문화해설사가 들려주는 ‘이효석 문학관 해설’ 서비스도 제공한다. 문학관 홈페이지에 있는 이메일 주소로 신청서를 보내거나 전화로 예약 가능하다.
의 주인공이 되다
문학관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봉평 읍내는 그야말로 의 배경 그 자체다. 봉평장터 주위로 큰 마트가 3개나 생겼지만, 아직도 2·7일이면 봉평장이 열린다. 문학관에서 장터까지는 걸어서 약 15분. 소설 속 주인공 허생원이 되어 메밀밭과 복원한 물레방앗간을 구경하며 장터까지 걸어가볼 것을 추천한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붓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 中)
소금을 뿌린 듯한 메밀밭을 직접 느껴보고 싶다면 9월에 방문하기를 권한다. 7월 초에 심은 메밀은 무더운 여름을 보내고 8월 하순쯤 꽃을 피우기 시작, 9월 중순까지 봉평 일대를 하얗게 수놓는다.
관람 정보
주소 강원 평창군 봉평면 효석문학길 73-25
전화 033-330-2700
관람 시간 09:00~17:30 (비수기)
휴관일 매주 월요일, 명절
입장료 성인 2000원
한 극장이 오랜 세월 명맥을 유지하기란 쉽지 않다. 지금까지 힘없는 연극인들은 도시 개발, 상권 확장에 쉽게 자리를 내줘야 했다. 기억 속으로 사라진 극장만도 헤아릴 수 없는 요즘, 부산의 가마골소극장이 다시 문을 열었다. 소극장의 옛 추억을 간직한 시니어 세대와 무대를 지키고 싶은 젊은 연극인의 꿈이 담겨 있는 공간 가마골 소극장에 다녀왔다.
오늘도 내일도 극장문은 활짝 열린다
지난 7월 7일, 부산시 기장군 일광면. 조용했던 마을에 풍악이 울리고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낯익은 배우가 박자에 맞춰 덩실덩실 춤추고 모두의 얼굴은 상기돼 기쁜 모습이었다. 한산했던 시골 동네에 부산 연극의 중심이던 가마골소극장이 들어섰다. 6층짜리 화려한 건물 안에는 공연장을 비롯해 주점, 카페 등 연극인과 시민이 어울릴 수 있는 공간으로 채워졌다. 1986년 부산 광장동에서 처음으로 문을 연 가마골소극장은 극단 연희단거리패의 산실을 담당하던 곳이다. 연희단거리패의 활동 무대가 부산에서 서울로 옮겨졌을 때도 꾸준히 실험연극을 비롯해 새로운 시도를 거듭하면서 시민의 사랑을 받았다. 중앙동과 광안리, 다시 광복동을 거쳐서 거제리로 무대를 옮겨 다니면서도 다수 공연의 매진 행렬과 최대 유료객석 점유율을 기록한 내실 있는 극장이었다. 그러나 시대 기류에 못 이겨 폐관이 기로에 서기도 했다. 결국 길고 길었던 셋방살이 30년에 종지부를 찍고 100년 길이 남을 극장으로 기장군에 세워졌다.
역사와 추억을 품다
“현재 부산 기장군에 신축 중인 6층짜리 가마골소극장의 건물 1층은 포장마차로, 2층은 카페 오아시스로 꾸밀 생각이라고 한다. 위층은 극장과 극단 사람들을 위한 공간이 될 것….”(2017년 7월호 브라보가 만난 사람, 연극연출가 이윤택 인터뷰 中)
가마골소극장에 관한 계획은 작년 7월 연희단거리패의 꼭두쇠 이윤택 인터뷰를 통해 본지에 소개된 바 있다. 막연한 계획이 아니었다는 것을 극장 건립을 통해 보여준 것. 1층에는 목로주점 양산박이 있다. 이윤택이 신문기자이던 시절 한 시인을 돕기 위해 부산일보 기자 네 명과 함께 출자해 부산시 광복동 입구에 차렸다던 ‘양산박’의 이름을 그대로 따왔다. 2층은 부산 국제시장 근처에 있던 클래식 음악 카페 오아시스의 향수가 묻어나는 곳으로 꾸몄다. 이윤택이 20대이던 시절 당시 돈 80원이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음악 듣고 시 쓰고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문학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곳이 바로 카페 오아시스였다고. 그때처럼 LP판은 아니지만 지금의 카페 오아시스도 클래식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이곳 천장에는 지금까지 연희단거리패가 공연했던 작품의 포스터가 촘촘하게 붙어 있다. 극단과 극장의 세월을 가늠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각종 문화 콘서트, 세미나, 북콘서트를 통해 시민과 교류하는 만남의 장소로 이용할 계획이다.
2층에는 가마골소극장과 연희단거리패를 대표하는 여배우이자 연출가였던 故 이윤주의 기념관과 북카페 ‘책굽는 가마’가 함께 자리했다. 2015년 투병생활에 마침표를 찍고 꽃같이 사라진 배우이자 연출가 이윤주를 기리는 이윤주기념관에서는 그녀 연극생활의 시작과 끝을 만날 수 있다. 가마골소극장의 대표로서 서울보다는 부산 연극무대를 지켜왔던 이윤주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신비한 몸짓과 목소리를 가졌던 배우이자 연극쟁이였다. 아동극 연출과 연극 에서 배우를 마지막으로 영영 사라진 그녀를 잠시나마 느낄 수 있는 공간이다. 북카페 ‘책굽는 가마’에는 연희단거리패가 지금까지 출판했던 도서와 연희단거리패 연극 200선을 구비해놓고 판매도 한다. 조용히 책을 읽고 차를 마시기에 좋다.
3층과 4층이 바로 가마골소극장이다. 120석 규모의 극장은 작은 무대이지만 높이와 경사각이 깊어 무대가 답답해 보이지 않는 장점이 있다. 5층과 6층은 배우들의 숙소와 연희단거리패의 전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아카이브도 마련돼 있다.
배우와 스태프가 직접 만들고 운영까지 하는 곳
가마골소극장에는 남다른 시스템이 있다. 바로 극단의 모든 구성원이 운영 주체다. 1층과 2층의 주점과 카페에서 일하는 종업원들도 배우들과 스태프다. 분장을 하고 커피를 만들거나 서빙을 하고, 셔틀버스를 운행한 배우가 곧바로 무대에 올라가기도 한다. 극장의 무대, 조명, 음향, 객석 등 사람들이 오가는 곳곳에도 극단 사람들의 수고와 노력이 서려 있다.
연희단거리패 조명감독 겸 가마골소극장 대표인 조인곤씨는 “가마골소극장은 연희단거리패와 극단가마골, 가마골소극장의 역사 저장창고라고 생각한다”며 “시간이 지나도 계속 이어나갈 수 있는 역사적 유물이 됐으면 한다”고 밝혔다. 기장에는 미역도 있고 멸치도 있고 해수욕장도 있다. 그리고 가마골소극장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