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떠나 긴 세월에 내 청춘 어디로 가고 삶에 매달려 걸어온 발자취 그 누가 알아주랴 두 주먹 불끈 쥐고 살아온 날들 소설 같은 내 드라마…’ -케니 김 1집 ‘내 청춘 드라마’ 케니 김(70). 그는 LA의 트로트 가수다. 한국에서 온 연예인도, 주체할 수 없는 끼의 소유자도 아니었다. 오히려 소심한 성격에 낯가림도 심하던 그가 무대 위에서 그것도 뽕짝을 부르는 가수가 됐다. 연매출 200만 달러의 식품회사 경영권도 아내에게 넘기고 말이다. 올해로 데뷔 7년 차. 1집 ‘노신사의 노래’에서 따끈따끈한 신곡 ‘무명가수’까지. 그의 노래 속에는 43년간의 인생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25개의 직업, 불도저 케니 김
1946년 경북 대구에서 나고 자란 그의 집안은 지독히 가난했다. 하고 싶은 것이 많아서 가슴이 터질 것 같았던 20대.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다. “돈 없고 빽 없고 가방끈까지 짧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별로 없었습니다. 서울에 있는 작은아버지 공장에서 허드렛일을 하다가 군대에 지원해 월남에 갔어요. 월남전 막바지라 참 위험했는데 나에게는 막막한 세상으로부터의 탈출구 같았습니다.” 베트남에서 처음 만난 미국은 풍요로움 그 자체였다. 꿈을 꾸는 누구에게나 평등한 나라, 가난하고 힘없고 배운 것 없어도 열심히 일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때마침 미국의 이민법이 개정되면서 한국에도 미국 이민 문호가 활짝 열렸다. 머나먼 그곳에 친척 고모 한 분이 산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일단 그곳으로 가기로 했다. 기술 하나는 있어야 할 것 같아서 고압용접 자격증을 땄다. 1973년, 스물다섯의 청년 김종길은 그렇게 고국 대한민국을 떠나왔다. 그리고 미국 땅에서 케니 김이 되어 살아온 지 어느덧 43년이다. “먼 친척 고모뻘 되는 분이 살고 있는 오하이오 주 데이톤으로 무조건 갔죠. 물론 얼굴 한 번 본 적 없었고요. 300달러 손에 쥐고 공항에 내렸는데… 이상하게 겁이 하나도 안 나더라고요. 오히려 정말 원했던 것을 이뤘다는 희열을 느꼈어요. 걸리는 것은 딱 하나, 한국에 두고 온 약혼자 순이였죠(웃음).” 용접기술을 배워간 덕분에 취업도 쉬웠다. 하루 종일 말 한마디 없이 작업에만 열중하는 그를 사장들은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영어를 알아듣지 못해 말을 하지 못했던 것인데도 말이다. 6개월 만에 비행기 티켓을 마련해 약혼자에게 보냈고 꿈에 그리던 순이는 미국으로 와서 케니 김과 결혼했다. 지금의 아내, 우순이(68)씨다. 이듬해 두 사람은 뉴올리언스로 이주한다. 당시 뉴올리언스는 석유 시추의 선봉에 서 있었다. 시추선에서 작업하는 고압용접 기술자는 흔하지 않았기 때문에 최고의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 그만큼 위험하고 고된 일이었다. “망망대해에 떠 있는 석유 시추선에 한 번 오르면 2주일은 그곳에 머물러야 했어요. 물론 동양인은 나 하나였죠. 그래도 일만 하면 되니까 괜찮았는데 문제는 아내였죠. 당시 첫아이를 임신하고 있었거든요. 나 없을 때 아기가 나오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설마설마하던 일이 진짜 생기더라고요.” 말도 통하지 않는 낯선 병원에서 아내는 홀로 아기를 낳았다. 첫딸 제인이었다. 어쩔 줄 몰라 울기만 하던 아내와 시추선 위에서 발만 동동 구르던 남편. 이제는 웃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지만 참 고단하던 시절이었다. “둘째 지나가 태어난 이후로는 정말 손이 무르도록 일만 했어요. 아내가 일했던 세탁소와 가발가게가 두 딸의 놀이터였죠. 겨우 돈을 좀 모아 자동차 바디숍을 인수했는데… 불이 나서 잿더미가 됐어요. 후에 미시시피 강에서 모래를 파 올리면 돈이 된다고 해서 시작했는데 그해 여름 허리케인으로 모든 것이 다 떠내려갔고요. 주저앉아 울 틈이 어디 있어요? 새끼들 데리고 살아야 하는데. 그야말로 산전수전 공중전을 다 겪었지요.” 시푸드 레스토랑의 성공으로 기반을 다진 부부는 1994년 지금 살고 있는 샌디에이고로 이주한다. 이곳에서는 농사꾼이 되어 오이, 참외 등을 기르기 시작했다. 농사의 ‘농’ 자도 모르던 케니 김씨는 한국농촌진흥청까지 날아가 오이농사 비법을 배워왔고 결국은 농장 사업도 크게 성공시킨다. 하지만 또다시 시련이 찾아온다. 지인으로부터 멕시코 농장 투자 사기를 당한 것. 김씨는 수십만 달러의 빚더미에 올라앉게 된다. 돈도 돈이었지만 믿었던 사람의 배신은 오랫동안 김씨를 괴롭혔다. “화재로 잿더미에도 앉아보고 홍수로 다 떠내려가기도 했고 사업도 수차례 망해봤지만 한 번도 좌절한 적은 없었어요. 다시 시작하면 됐으니까요. 그런데 믿었던 사람한테 속은 것은 정말이지… 힘들더라고요. 홀로 멕시코 시골에 틀어박혀서 1년을 지냈는데 그때 인생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어요.”
가수 선언! “나도 가수다”
가발가게, 세탁소, 피자가게, 시푸드 전문점, 패스트푸드점, 야채농장, 광산개발, 부동산, 콩나물 공장… 어느 날은 부부가 작정하고 미국에서 했던 일들을 하나하나 헤아려봤다고 한다. 종사했던 비즈니스가 25가지나 되었다. 이들 부부가 남다른 이력을 가지고 있는 데에는 케니 김씨의 역할이 크다. 우순이씨는 남편에게 ‘불도저’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뭐 하나에 꽂히면’ 기필코 끝을 봐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한마디했다. “추진력 하나는 끝내주는 양반이에요!” 김씨는 1998년 해조류 가공업체 ‘켈프누들’을 설립, 재기에 성공한다. 다시마를 가공해 만든 국수 ‘씨탱글’이 주력 상품이었다. 그는 에스콘디도 산자락 불모지에 공장을 지었다. 버려진 컨테이너로 공장 건물을 올리고 국수를 뽑아내는 기계는 직접 설계해 만들어냈다. 대부분 고물상에서 구입한 고철들을 용접으로 붙여가며 이루어낸 작업이었다. 이어 영어에 능통한 딸들을 불러들여 시장을 공략했는데 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때마침 불어닥친 웰빙바람으로 ‘씨탱글’은 무섭게 팔려나갔다. 현재 켈프누들 제품은 홀푸드, 마더스 마켓 같은 미국 최대의 유기농 마켓에 납품되며 유럽 등 10개국에도 수출되고 있다. 연매출 200만 달러에 이르는 알짜배기 기업이다. 전쟁 같던 이민생활에 조금씩 평화가 찾아오고 어느덧 두 딸도 짝을 만나 슬하를 떠났다. 이제 겨우 숨 좀 돌리려고 보니 어느덧 환갑을 훌쩍 넘긴 나이. 젊은 시절 함께 고생하던 친구가 병을 얻어 덧없이 가는 것을 보고는 가슴이 헛헛했다. 장례식을 다녀온 날 김씨는 큰 결심을 하고 가슴에 꼭꼭 숨겨놓았던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그래, 나 하고 싶은 것 한번 해보자 했죠! 중학교 때 학원비 떼어먹으며 배운 기타가 내 음악 인생의 전부이지만 한 번도 가수에 대한 꿈을 저버린 적은 없었어요. 남들이 들으면 웃을 이야기겠지만 진심으로 가수가 되고 싶었습니다. 하하하.” 가장 놀란 사람은 아내 우순이씨였다. 남편의 트로트 사랑이 유별난 것은 알고 있었지만 가수라니. 그것도 자기 노래를 만들어 앨범을 내는 진짜 가수가 되겠다는 것이었다. 허투루 말하는 법이 없고 한 번 결심하면 무슨 일이든 해내는 사람인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아내는 기분 좋게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자기를 위해서는 평생 1달러도 안 쓰던 사람이에요. 야채 농사를 지어 LA로 배달을 나갈 때 왕복 4시간 운전을 하면서 노래를 부르던 모습이 떠올랐어요. 아, 이 사람이 정말 하고 싶은 것이었구나… 마음이 찡하더라고요. 그래 그렇게 열심히 살았으니까 선물을 하자. 그래서 하고 싶은 거 하라고 했죠. 그런데 앨범 하나로 끝날 줄 알았는데 벌써 4집까지 나왔네요. 하하하.” 아내의 허락(?)이 떨어지자 과연 불도저답게 밀어붙였다. 한국에 나가 고시텔에 묵으며 직접 가사를 쓰기 시작했고 곡을 붙여줄 작곡가를 수소문했다. 작곡가 김준규씨와의 만남은 그야말로 운명이었다. 김준규씨는 1980년대 가수 주현미를 스타로 만들었던 트로트 메들리 앨범 ‘쌍쌍파티’의 제작자다. 2010년 케니 김 1집 ‘노신사의 노래’가 나오기까지는 꼬박 1년이 걸렸다. 매일 4시간씩 노래 지도를 받았고 모든 노래 가사를 직접 썼다. 케니는 따근따끈한 자신의 앨범을 훈장처럼 품에 안고 돌아왔다. 그렇게 케니 김은 63세에 늦깎이 가수가 되었다.
당신께 바치는 노래
이때부터 아내 우순이씨는 가수 케니 김의 매니저이자 팬클럽 회장이 됐다. 한인 라디오 방송국 ‘라디오코리아’에 남편의 앨범을 보냈고 이들의 흥미로운 이야기는 곧 방송을 탔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가수 케니 김의 사연과 노래가 미 전역의 이민 1세들의 심금을 울린 것이다. 그들 모두가 척박한 미국 땅에서 눈물과 땀을 쏟아냈던 또 다른 케니 김이고 우순이였다. 방송이 나간 후 팬이 되고 싶다는 전화와 편지들이 쏟아졌고 부부는 이들에게 하나하나 앨범을 선물했다. 밑지는 장사였지만 케니 김은 행복했다. “애당초 음반을 팔아 돈 벌 생각은 추호도 없었어요. 그저 힘들게 위로가 되었던 노래가 하고 싶었을 뿐이에요. 그렇게 부른 노래가 또 누군가에게 위로가 된다면 그보다 귀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데뷔 7년. 어느덧 케니 김은 4집 앨범까지 낸 어엿한 중견가수가 됐다. 크고 작은 한인 행사에 초대가수로 불려가고 종종 한국에서 오는 가수의 공연에 오프닝 무대를 장식하기도 한다. 하지만 돈벌이는 여전히 안 된다. 초대받은 행사에 가서 출연료는커녕 기부금까지 내고 오기 일쑤다. 몇 해 전부터는 5월 어버이 날이 되면 100여 명의 노인들을 집으로 초청해 효도잔치를 하고 있다. 그 역시 효도를 받을 나이이지만 누군가를 섬길 수 있다는 것을 큰 기쁨이자 보람으로 생각한다. “어느 해 집 주위에 매실이며 살구가 너무 실하게 열렸더라고요. 우리 둘이 먹기에는 너무 많아 주위의 노인분들에게 오셔서 따가시라 했죠. 너무들 좋아하시더라고요. 미국에 살면서 나들이도 제대로 못하며 살았다는 말을 듣고 마음이 아팠어요. 잔치 한번 열어드리려 한 것이 연중 행사가 되어버렸어요. 맛있는 것 실컷 먹고 노래 실컷 부르면서 즐기시는 거 보면 덩달아 기분 좋습니다. 친구 생각, 돌아가신 부모님 생각도 나고요. 뭐 이게 사는 재미 아니겠습니까.”
아메리칸 드림이 별거 있더냐
케니 김씨는 자신만을 위해 시작한 노래를 이제 다른 이를 위해 부르고 있다. ‘수많은 날들 비바람에도 쉬지 않고 걸어온 우리, 여보 정말 고생 많았소~’ 덤덤한 노랫말이 인상적인 ‘무지개’는 사랑하는 아내를 위한 노래이고, 귀에 착 감기는 미디움 템포의 ‘아메리칸 드림’은 먼 이국땅에서 꿈을 향해 달리고 있는 모든 이민자들에게 바치는 노래다. 성공을 위해 별의별 일을 다 해본 이민자 케니 김은 아메리칸 드림은 별게 아니라고 노래하고 있다. 그의 진솔한 고백이다. “아메리칸 드림이요? 이루었죠! 돈을 많이 벌어서가 아니에요. 돈은 믿을 게 못 됩니다.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생기죠. 많은데도 늘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가 하면, 없어도 많은 것처럼 살 수도 있어요. 중요한 것은 나에게 꿈과 희망이 있냐는 것입니다. 한국을 떠나오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나는 단 한 번도 꿈을 꾸지 않은 적이 없었어요. 실패해도 두렵지 않았던 것은 또다시 꿈꿀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꿈을 향한 그의 열정과 집념은 삶의 원동력이다. 열심히 바쁘게 살면 늙을 시간도 없다는 것이 그의 철학이다. 불도저 케니 김이 요즘 푹 빠져 있는 것이 있다. 바로 뮤직비디오 제작이다. 아마추어 친구들이 힘을 모아 ‘아메리칸 드림’ 뮤직비디오를 만들어 유튜브에 올렸는데 무척 재미있는 작업이었다. 무엇보다 사람들이 훨씬 쉽게 노래를 가까이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노래를 부르고 듣기에도 참 좋아진 세상이에요. 저는 좋아하는 가요 카세트테이프를 겨우 구해서 늘어질까봐 아끼고 아껴서 듣던 시절에 살았어요. 캘리포니아에 이사 오면 한국어로 라디오가 나오고 트로트를 실컷 들을 수 있겠다 싶었는데 당시엔 샌디에이고까지는 잘 안 나오더라고요. 얼마나 속상하던지… 아무튼 노래듣기에도 가수하기에도 참 편하고 재미있는 세상입니다.” 지난 4월, 따끈따끈한 새 음반이 두 장이나 나왔다. 하나는 ‘쌍쌍파티’의 리메이크 앨범 ‘케니 김 주연하의 쌍쌍파티’, 또 하나는 케니 김의 4집 앨범이다. ‘쌍쌍파티’는 현재 한국의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절찬 판매중이다. 지난달 음반 판매 수익금 88만원도 받았다. 데뷔 7년 만에 처음으로 번 돈이다. 4집 앨범의 타이틀 곡은 ‘무명가수’, 흥겨운 댄스곡이다. 물론 이번에도 직접 가사를 썼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노래 불러요
스트레스 날리고 장단에 맞춰
박수치며 노래 불러요
행복의 바이러스 드리겠어요
나는나는 무명가수야
우리들에게 행복의 바이러스를 주겠다는 LA의 무명가수 케니 김. 그의 마음속에는 새로운 꿈이 자리 잡고 있다. 장인의 노래가 18번이라는 든든한 첫째 사위와 CCM가수인 둘째 딸 지나와 함께 가족 콘서트를 여는 것이다. 딸과 함께 부르는 트로트 메들리도 멋지지 않겠나. 매니저이자 팬클럽 회장에서 이제는 의상 코디며 메이크업까지 담당하고 있는 아내는 가만히 미소짓는다. 아내의 미소는 늘 케니 김에게 든든한 힘이 되어주곤 했다. 머지않아, 그의 새로운 도전이 또다시 시작될 것이다.
불[火]의 계절 여름입니다. 붉은 태양이 땅 위의 모든 것을 태울 듯 이글거리는, 사계절 중 불의 기운이 가장 성한 시기입니다. 그런 화기(火氣)를 달래려는 듯 사람들은 너나없이 물가를 찾습니다. 계곡으로, 강으로, 바다로 갑니다. 장맛비는 물론 소낙비라도 내리면 금세 사위를 삼킬 듯 사납게 질주하는 계곡물과 흰 이빨을 드러내며 달려오는 성난 파도….
여름이면 만나곤 하는 성난 물의 모습은 여름이 곧 불과 물이 정면으로 맞서는 계절임을 일깨워줍니다. 그런 7~8월 불과 물이 상극(相剋)하는 틈새에서 피는 각별한 꽃이 있습니다. 태양의 열기를 온몸으로 받아 식히려는 듯 그늘 한 점 없는 연못, 흐르지 않는 저수지에 커다란 이파리를 잔뜩 깔고 보랏빛 영롱한 꽃을 피우는 물풀이 있습니다. 바로 100년 만에 꽃을 피운다는 가시연꽃입니다.
2m에 이르는 거대한 이파리로 1년 중 가장 강한 여름 불의 기운을 받고, 뿌리로는 강 대 강(强 對 强)으로 맞서는 물의 기운을 흡입해서인지, 생김새는 물론 꽃이 피는 과정 등 모든 것이 예사롭게 않습니다. 먼저 그 이름은 온몸에 가득 가시가 박혀 있어 함부로 다가가 멋대로 휘저을 수 없는 존재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이파리(앞면뿐 아니라 물에 잠기는 뒷면까지)는 물론 줄기와 뿌리, 꽃받침까지 식물체 전체에 길게는 1cm쯤 되는 가시가 촘촘히 나 있습니다. 전초에서 가시가 없는 부분은 꽃잎과, 가시가 송송 돋은 열매 안에 든 완두콩 모양의 씨앗뿐입니다.
가시만큼 위압적인 것은 커다란 이파리입니다. 보통 가시연꽃이 자라는 수면은 그 잎으로 뒤덮일 정도로 개체마다 여러 개가 달릴 뿐 아니라, 타원형의 잎 하나가 어른 한 사람을 휘감을 만한 크기까지 자라납니다. 한해살이 물풀이 한두 달 만에, 줄기는 어른 엄지손가락보다 굵고 잎은 2m까지 크려면 하루에 무려 20cm씩 자라야 하기에 그 과정이 눈에 보인단 말이 나올 법합니다.
이렇듯 까칠한 가시연꽃이지만, 그 꽃은 모두를 단숨에 사로잡을 만큼 매력적입니다. 물론 꽃이 피는 과정도 촘촘한 가시나 넓은 잎에 못지않게 기이합니다. 생살을 찢는 고통 속에 새 생명을 낳듯, 가시연꽃도 가시가 촘촘히 박힌 봉오리로 역시 가시투성이의 두꺼운 잎을 뚫고 올라와 지름 4cm 안팎의 꽃을 피웁니다. 꽃은 오전에 열었다가 저녁이면 오므리기를 사나흘 되풀이하다 물속으로 들어가 씨앗을 생성하는데, 꽃봉오리가 맺혔다고 해도 수온과 수심, 기후와 일조량 등이 맞아야 열리기 때문에 활짝 핀 모습을 보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까다롭기로 치면 개화(開花)보다 씨앗의 발아(發芽)가 훨씬 정도가 심합니다. 계명대 김종원 교수에 따르면 ‘자연 상태에서 가시연꽃의 종자 발아율은 4% 이하’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낮은 발아율이 역설적으로 가시연꽃의 기적을 만들어냅니다. 즉 발아가 안 된 씨앗이 수년이든 수십 년이든 발아력을 유지하다가 수온과 기후 등이 최적의 조건이 되면 발아해서 뿌리를 내리고 커다란 잎을 펼치고 마침내 꽃을 피우는 것이지요. 휴면 상태의 씨앗 속에 내재된 생명이 되살아나며 ‘백 년 만에 피는 꽃’이라는 신화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실제 2010년 강원도 경포호에서 가시연꽃이 나타나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는데, 연원을 추적한즉 1960년대 농경지 개간 이후 휴면 상태에 있던 가시연꽃의 종자가 습지 복원 사업으로 생육 조건이 맞자 반세기 만에 다시 발아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Where is it?
가시연꽃은 발아도, 개화도 까다롭지만 그렇다고 1급수 청정지역에서 자라는 것은 아니다. 큰 잎에서 알 수 있듯 영양분이 풍부한 수질, 즉 적당히 부영양화(富營養化)된 연못에서 잘 자란다. 최대 자생지로는 경남 창원의 우포늪이 꼽힌다. 우포늪을 둘러싸고 있는 마을 이름이 아예 가시연꽃마을인데, 가시연꽃 등 우포늪의 수생식물을 그대로 재현해놓은 생태체험장도 있다. 수도권에선 경기도 시흥의 관곡지가 유명하다, 충남 홍성의 역재방죽공원과 부여의 궁남지, 강원도 강릉의 경포호 등 전국적으로 20여 곳에서 자란다. 진못(사진) 등 오래된 연못이 많은 경북 경산과 영천에도 자생지가 여럿 있다.
“안전벨트 꼭 매세요. 출발합니다.”
2017년 총동문회 상반기 안보 탐방을 진해로 떠난다는 말에 얼마나 들떴는지 잠을 제대로 못 이루고 뒤척이다 일어나 탐방 준비를 했다. 일 년에 두 번 탐방이 있지만 매번 함께하지 못해 아쉬웠는데 어린 시절 수학여행 떠나는 기분으로 버스에 몸을 실었다.
들떴던 마음과는 달리 긴 여행이어서 슬슬 허리가 아파오고 몸 여기저기가 결려올 때쯤 협력국장이 팔을 걷고 앞으로 나가 마이크를 잡았다. 앉아서 할 수 있는 풍선게임과 각종 레크리에이션이 시작되자 우리는 친구들과의 수학여행을 떠올리며 깔깔거리며 맘껏 즐거움을 발산했고, 버스 안은 금세 흥분의 도가니가 되었다.
그러는 동안 어느 새 진해에 도착했고 모두들 바닷가를 배경으로 맛난 점심을 먹은 뒤 대형 수송함과 다목적 군함인 독도함을 찾았다. 광복 및 해군 창설 70주년을 기념하는 해군 관함식이 거행되었던 독도함은 뉴스로 보고 듣던 위대함 그 자체였다. 우리나라를 책임지는 위엄이 느껴졌다.
독도함은 상륙작전을 위한 병력과 장비수송을 하는 기본 임무와 해상 작전을 지휘 통제하는 지휘함의 기능을 수행하는 기동함대다. 1만4,500톤급 대형 함정의 위상에 대한 설명을 듣고 나서 독도함에 탑재된 항공기나 화물을 운발할 수 있는 거대한 항공기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배 위로 올라서는 순간, 해군들의 나라를 향한 충성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이승만 대통령 별장에서는 이 대통령의 애국의 숨결을 하나하나 느낄 수 있었고, 잠수함 역사관에서는 잠수함의 위엄에 탄성을 지르며 감탄했고 우리나라 안보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각인할 수 있었다. 정원에서 활짝 핀 장미가 우리를 반겨줬다.
마지막으로 해군사관학교에 들러 그 위상에 놀라고 또 바다 위에 떠 있는 거북선을 바라보며 우리나라를 위해 인고의 시간을 보냈을 우리의 선조 충신들의 애국심에 저절로 머리가 숙여졌다. 영화 의 대사도 떠올랐다.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요, 죽고자 하면 살 것이다.”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
죽음 앞에서도 용기를 줬던 이순신 장군의 목소리가 마치 귓가를 스쳐지나가는 듯했다.
오랜만에 만난 동문들과의 서먹함이 애국이라는 단어 앞에서 한마음 한뜻이 되었던 시간이었다. 각자 최선을 다하며 살자는 각오를 다진 뒤 많은 아쉬움을 뒤로 하고 우리는 다시 달리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출발할 때의 들떴던 마음들과는 달리 애국이라는 단어 앞에서 숙연해져 있었던 탓일까? 동문들은 한참을 말없이 사색에 묻혀 있었다. 그러는 사이 구름을 붉게 물들이는 일몰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때 누군가 일몰의 아름다움에 대해 한마디 던졌고 그 순간 다 함께 합창을 했다.
“와~ 너무 멋있다~~”
희망의 메시지를 안고 돌아오는 버스는 어찌나 빨리 달리는지 아쉬움이 가득한 채 다음 탐방을 약속하며 각자의 인생 속으로 돌아갔다. 우리의 인생도 노을처럼 그렇게 아름답게 물들기를 바라면서….
봄의 끝, 여름이 시작되는 즈음이다
그 들판엔 뜨거운 한여름의 태양을 방불케 하는 더위가 쏟아지고 있었다.
언덕으로 오르는 길 옆 냇가에는 여름꽃들이 활짝 피어 있었고 몸부림치듯 엉킨 덩굴들이 옥천의 들길에서는 자유로워 보인다.
나무 그늘에는 더위를 피해 동네 사람들이 쉬고 있었고, 언덕 아래엔 초여름의 강태공들이 텐트를 치고 하세월 유유자적한 모습이다.
옥천의 보정천, 그리고 그곳에 섬처럼 떠 있는 정자 상춘정이 보인다.
시인 정지용의 고향 옥천 땅.
그의 시처럼 아름다운 땅에서 우리가 살고 있다.
어릴 적 여름방학 때 고모네 집에 놀러가던 길, 그 들판에서 사촌들과 뛰어 놀았지. 순진무구했던 어린 시절의 필자가 거기 아직 있는 듯하다. 그리움에 가슴에 뭉클해져 온다. 온몸으로 땀이 흐르던 날이었다. 그럼에도 그 들판을 걸으면서 마냥 행복했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그리고 저 넓은 냇가에 안개가 휘감겨 있을 새벽에 올 수 있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
실개천이 휘도는 그 넓은 벌을 떠나오며 문득 돌아보니 상춘정이 내게 인사를 하는 듯하다. “안녕, 잘 가요.”
“안녕, 다시 오고 싶을 거예요.”
100세 장수시대가 우리 앞에 활짝 열렸다. 지난 삶길 70년보다 더 귀한, 앞으로 살길 30년이 내 앞에 다가왔다. 시니어가 아름답게 살아갈 길을 찾아야 할 대목이다. 석양에 휘파람을 부는 시니어가 되어야 한다.
시니어가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필요한 건강ㆍ고독ㆍ경제ㆍ일자리ㆍ가정 문제가 녹록치 않다. 노인의 빈곤, 복지의 사각지대, 고독사 등 어느 것이나 우리 스스로 해결하여야 하는 사회문제다. 시니어에게 30년은 긴 세월처럼 보이지만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기에 충분한 시간이 아니다. 한 번 무너지면 다시 일어서기 어려운 때다.
수 년 전 사회은퇴 후부터 사회평생교육에 참여하였다. 50~60세대를 대상으로 인문교양을 주제 교육에는 70대도 많이 참가하여 노후의 보람을 찾곤 하였다. 그러다가 몇 년 전부터는 수강자의 나이제한을 두기 시작하였고, 40세부터 취ㆍ창업 교육이 확대되면서 65세 이상은 교육대상에서 배제되는 경우가 많다. 취업절벽 시대라고 하지만 시니어가 발붙일 곳은 점차 사라지고, 모든 것을 자기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시니어 절벽’ 앞에 섰다.
봄비가 이슬처럼 내리는 휴일, 경춘선을 타고 산행을 다녀오던 중 일행과 헤어져 지하철로 환승했다. 동년배로 보이는 등산객과 경로석에 나란히 앉았다. “비가 오는 듯 마는 듯 이제는 완연한 봄이네요.” 상대방이 자연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그렇지요. 세월은 틀림없습니다.” 시큰둥하게 대답이 갔다. “아직 다리는 안 아프지만, 올해부터는 숨이 좀 찹니다.”
동안의 얼굴에 건강하게 보이는 상대에게 “하기야 우리 나이면 그런 현상이 당연하지요.” 하였더니, “60, 70대 때와는 다릅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 자세부터 고쳤다. 동년배 산행 친구가 없어 가끔 한참 후배들과 산행을 한다는 80대 중반의 대 선배이셨다. 스틱을 왜 사용하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가능하면 기구나 타인에게 의존하지 말고 자기 자신을 믿으라.”고 하였다.
‘시니어’는 어르신, 노인, 고령자 등 여러 명칭으로 불리는 것처럼 나이로 구분하기도 일치된 견해가 없다. 55세 이전부터 보통 은퇴가 시작되며, 60세가 되면 법정 정년, 소득세 부양가족공제 대상이 된다. 65세는 고령사회 구분기준이 되며 전철 무임승차, 국민연금 수급자격이 생겨 손에 잡히는 시니어 대우를 받는다.
70세가 되면 소득세 추가공제 대상이 되며 75세까지는 시니어가 일하고 싶은 나이다. 나이에 상관없이 정년ㆍ사업정리ㆍ폐업으로 은퇴준비ㆍ은퇴진행ㆍ은퇴자 등 수입이 감소되고 활동이 축소된 실제 은퇴자가 시니어다.
왕성한 현역생활 때는 수입극대화가 실현가능한 목표였다. 이제는 재산증식만이 능사가 아니다. 언젠가 빈손으로 갈 것 아닌가! ‘현금흐름 수지균형 유지’가 시니어의 진정한 재무 설계목표가 되어야 한다. 수지균형이 플러스인 경우에는 상속ㆍ증여ㆍ사회기부 등 지출을 늘려 재산을 서서히 줄이고, 마이너스인 경우에는 수입을 창출하고 지출을 억제하여 재산을 늘려서 수지균형을 맞추는 노력을 하여야 한다.
시니어가 부는 석양의 휘파람, 많은 사랑 부탁합니다.
마음자리 넓히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남편은 여전히 불교 쪽, 아내는 기독교 쪽으로 기웃거린지 이제 몇 개월 남짓 되었다. 어떤 이 들은 한 집안에 종교가 난립한다고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오히려 공평하고 종교의 자유가 동등하게 있으니 차라리 평화가 깃들었다.
몇 달 전부터 필자는 전혀 상상치 못하던 일을 책임지게 되어 그 역할이 매우 무거웠다. 아무것도 모르고 둥둥 떠밀려 그 자리에 올랐지만, 후회스러울 만큼 감당키 힘든 일들은 마구 펑펑 터져 나왔다.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새로운 삶의 황무지에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 부는 시간들이었다.
도저히 홀로선 마음 만으로는 인내하기 힘들었고 몰아치는 감정의 앙금들은 풀리지가 않았다. 필자는 평안을 위한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또한 사치에 불과했다. 마음은 더욱 뜨겁게 불타올라 상대에 대한 미움만으로 하루, 아니 몇 달이 몸과 마음을 만신창이로 만들고 훌쩍 지나가 버렸다.
교만한 자신만으로는 견디기가 힘들어 두 손 모아 기도로, 엎드려 절을 해댐으로써, 마음을 위로하기 시작했다. 한주는 교회에서, 한주는 절에서, 끝없이 중얼거리는 입술의 부딪침으로 요동쳐 대는 육신과 정신을 잡아달라고 매달렸다. 수없는 번뇌의 증후군 속에서 마음만이라도 평안하게 해달라고 빌어댔다.
그리고, 매서운 고통도 끝내는 시간과 함께 사그라들기 마련이었다. 또 살아 버티기 위해서는 마음먹기 습관이 우선이었고, 그것들이 차곡차곡 쌓여지면서 자신도 모르는 어느 날, 마음에는 넓은 바다가 넘실대고 있었다. 드디어 아무리 큰 고통도 겪고 보니 또 별것 아닌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결국 마음의 평안은 끝내 마음이 하늘과 바다처럼 넓어지는 것이었다.'
세상 속에서 이런저런 색깔로 저마다 살다 보면, 오르고 또 내리고 헤쳐나가야 할 앞길이 수없이 펼쳐진다. 삶이란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가 높은 산처럼 넘어야 할 장애물들의 연속이다. 그러나 올라와 내려다보고, 넘어와 돌아보면 결국은 고통도 행복도 지나온 삶의 아마득한 일부일 뿐이었다.
다시 시작했다. 마음자리 넓게 만들어, 수많은 사람들을 내 품 안에 품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고개 숙여 두 손 합장으로 기도하고, 무릎 꿇어 몸 낮이며 몇 번이고 수없이 반복해보았다. 화를 내지 않는 법이란 책을 늘 끼고 다니기도 했다. 드디어 어느 날, 수없는 습관 속에 삶의 맷집이 더 커져있음을 느끼게 된다.
그날 이후로 작고 사소한 일에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수시로 참지 못해 화가 치솟아 고함치는 일도 줄어들었다. 그렇게 힘들어 죽을 것만 같았지만 지금 멀쩡히 살아있음이 그 증거가 되었다. 단지 지나온 과거의 한 페이지로 발을 딛고 또 새로운 날의 희망 속으로 앞을 향해 여전히 달리고 있다.
모든 것들은 마음먹기가 힘들 뿐이다. 아니 그 마음공부의 실행이 무거울 뿐이다. 이제 당당하게 견디며 강건하게 앞으로 나아가면 끝내는 얻어질 것이라는 신념이 또 찾아올 것이다. 사람이 태어나 못할게 무엇이랴. 또다시 우직하게 움츠린 마음 활짝 펴고 넉넉한 마음자리 길로 성큼 나아가기를 희망해본다.
찾아올 내일을 위하여, 무소의 뿔처럼...
화란춘성(花爛春盛)이라고 했던가요. 꽃이 만발(滿發)하고 봄이 무르익는 4월, 따듯한 남쪽 나라 제주도는 더할 나위 없습니다. 발 닿고 닿는 곳마다 연분홍 벚꽃잎이 휘날리고, 노란색 유채꽃이 휘황찬란하게 빛을 발합니다. 아니 ‘춘사월(春四月)’ 제주도에선 벚나무와 유채가 아니라도, 풀이든 나무이든 생명이 있는 것들은 모두가 꽃을 피우는 듯 섬 전체가 꽃으로 흐드러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한데 그런 제주의 봄에 화룡점정(畵龍點睛)을 하는 야생화가 따로 있습니다. 뭍에서는 만날 수 없는 꽃, 제주의 특산 야생화라 일컬을 수 있는 꽃, 하지만 너무 귀하지는 않아 누구나 보고 즐길 수 있는 꽃, 바로 뚜껑별꽃입니다.
해안이나 높지 않은 오름의 양지바른 풀밭에 자생한다고 하는데, 처음엔 뜬금없이 ‘저지곶자왈’ 주차장 길섶에서 뜻밖의 조우를 했습니다. 그리고 처음 보는 순간 강렬한 보라색 꽃 색에 넋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앙증맞은 생김새에 다시 또 기함했습니다.
개별꽃이니 쇠별꽃, 큰개별꽃 등 다른 ‘별꽃’들과 마찬가지로 뚜껑별꽃도 키가 10~30cm 정도로 작습니다. 하지만 뚜껑별꽃은 꽃 색이나 생김새가 유별난데, 석죽과에 속하는 다른 별꽃들과 달리 앵초과로 족보를 달리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가지런히 돌아 나는 다섯 장의 꽃잎은 지름이 1cm 안팎에 불과할 정도로 아주 작지만, 독특한 보라색 꽃 색만은 단번에 보는 이의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꽃잎 중앙의 수술과 암술 둘레에는 흰색과 자주색, 진보라색의 띠가 2, 3중으로 둘러쳐지면서 노란색 꽃밥과 어우러져 멋진 색의 조화를 보여줍니다. 게다가 5개의 수술대엔 붉은색 잔털이 수북하게 나 있어, 보면 볼수록 신비감이 들 정도입니다.
동그란 열매가 영글면 종자를 퍼뜨리기 위해 가운데가 갈라지면서 뚜껑이 떨어져 나가듯 벌어지고 별 모양의 꽃받침이 도드라지게 드러납니다. 꽃 피는 모습이 아니라, 바로 열매 맺은 뒤의 이런 모습에서 뚜껑별꽃이란 이름이 유래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독특한 꽃 색을 따서 보라별꽃으로, 또는 밤하늘에 빛나는 별만큼이나 총총하게 핀다고 해서 별봄맞이꽃으로도 불립니다. 뚜껑별꽃이 활짝 핀 모습을 보려면 게으름을 피운다 싶을 만큼 시간적 여유를 갖고 다가가야 합니다.
학명 중 속명인 ‘Anagallis’는 ‘해가 뜨면 다시 핀다’는 뜻이라고 하는데, 날이 저물면 꽃잎을 닫고 해가 중천에 올라올 즈음에야 다시 활짝 열리는 뚜껑별꽃의 속성이 그대로 담긴 용어라 생각됩니다.
Where is it?
뚜껑별꽃은 전 세계적으로 24개 종이 온대와 열대에 분포한다. 국내에서는 제주도와 추자도, 그리고 전남의 일부 섬에만 1개 종이 자생한다. 아직은 대륙성 기후에는 적응하지 못하는 전형적인 남방식물, 남부 도서지방이 분포의 북방한계선인 아열대 식물인 셈이다. 제주도에서는 남쪽 바닷가의 현무암 틈새나 올레길 길섶 등지에서 비교적 흔하게 만날 수 있다. 특히 4월 서귀포의 명승지인 외돌개에 가면 현무암 바위틈 곳곳에서 풍성하게 꽃 핀 것을 만날 수 있다. 석양 무렵 외돌개에서 맞는 일몰(사진)도 일품이다.
고향에 둥지를 틀고 주말부부로 생활한 지도 어느덧 6개월로 접어든다. 아직도 마음은 반반이다. 사실 고향이라고는 하지만 초등학교 시절만 달랑 보낸 시간은 불과 14년이지만 나머지의 대부분을 서울에서 보냈으니 어찌보면 내고향은 서울이라고 해도 잘못된 것은 없으련만 아직도 고향은 영종도라는 고정관념은 지워지지 않는다. 아마도 영원히 고향은 영종도일지도 모르겠다. 조상대대로 터잡아 살아왔고 나 또한 이곳에 탯줄을 묻었으니 이곳이 고향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몇십년을 살아온 서울은 자연스럽게 타향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고향에서 홀로서기를 하는데는 나름 인내심이 필요했다. 달랑 거실 딸린 방하나 얻어서 숙식을 하고 회사에 출,퇴근을 하다보니 평소 겪어보지 못했던 불편한 일상의 많은 것들 앞에서 당황해 하기도 했다. 밥짓고 국이나 찌개 끓이고, 물론 기본 밑반찬은 서울에 있는 아내가 챙겨주지만 나머지 모든 것을 나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그나마 고교시절에 자취생활을 했던 경험을 되살려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열심히 살다보니 이제는 나름 살림의 지혜도 새록새록 늘어가고 있다.
외로운 고향생활(?) 중에서도 그나마 위안을 삼는 것은 어린 시절 소꿉친구들이다. 초등학교 졸업이후 각자의 처한 삶의 자리에서 열심히 살던 친구들이 은퇴시기를 맞이하여 고향에서 다시 뭉쳤으니 그 반가움이야 오죽하랴. 육십 중반을 넘어가고 있는 나이에 소꿉친구들은 고향에서 의기투합했다.
매주 토요일이면 당연스레 아지트가 되어버린 당구장으로 모인다. 다섯명의 소꿉친구들이 모여 신나게 당구를 치고 저녁을 함께 먹으면서 반주도 겯들인다. 아느새 어린 시절로 돌아간 친구들은 잊혀져 가던 어린시절의 별명을 불러가며 걸죽한 입담을 자랑한다. 참으로 정겹다. 늦은 저녁을 먹고는 우르르 몰려가는 곳이 바로 나의 보금자리 원룸이다. 그곳에서 다시 바둑을 둔다. 고만고만한 실력에 서로 훈수 두지 말라고 손사래를 치면서 으름장을 놓지만 구경하는 입장에서는 입이 근질근질하여 훈수를 안하고는 못배긴다.
그렇게 밤 11시가 넘은 시간까지 왁자지껄 떠들면서 놀다보니 이제는 재미가 붙어 다음 약속까지 챙기고서야 헤어진다. 오늘은 주말도 아닌데 호출이 왔다. 퇴근하는 즉시 당구장으로 오란다. 퇴근시간이 은근히 기다려지는 이유다. 꽃피는 봄이 오면 주말에 모여서 이곳 저곳 고향 근처의 섬탐방을 계획하고 있다. 여름에는 텐트하나 싣고 무인도에라도 가서 낙시줄을 드리우다가 운수 사납게 걸려나온 물고기로 매운탕을 끓여 소주 한 잔으로 우정을 다져볼 생각이다.
붉게 물들어가는 석양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수평선 아래로 꼴까닥 넘어가며 마지막으로 활활 타오르는 용광로처럼 가라앉는 일몰을 바라보면서 기울어져 가는 소꿉친구들의 삶을 관조해 보는 시간도 가져볼 요량이다.
어둠이 장막을 치면 모닥불을 피워놓고 하룻밤 야영을 하면서 조개도 줍고 낙지도 잡아 영양보충도 하면서 뒤늦은 우정을 활짝 피워볼 생각이다. 생각만 해도 설레이는 소꿉친구들, 이래저래 소꿉친구들과의 우정이 깊어가는 삶을 구상하고 있다.
유명인들의 작은 생활습관이 그 사람의 업적보다 더 잘 알려지기도 한다. 철학자 칸트의 산책 습관도 그렇다. 칸트의 산책 시간으로 주변 사람들이 시간을 맞췄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칸트의 철학 이론이 거론되는 곳에서는 늘 함께 입에 올리는 이야기다.
필자가 앞뒤 가리지 않고 일만 했었던 시절이다.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을 만큼 피로해져야 강제적인 휴식을 하곤 했는데 그 휴식시간이 거의 정확했다. 일탈이라도 없으면 모든 정서가 석고화되겠다 싶어 어느 날 바람 따라 나들이를 한 곳이 맨해튼이다. 맨해튼 기차의 종착역인 펜실베이니아 역에서 내렸다. 기차역에서부터 무리를 지은 사람들을 보며 숨이 막혔다. 사람과 차들이 하도 많아 정물로 서 있는 높은 빌딩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단순히 쉬고 싶어 한국 식당으로 들어갔다. 식당 안은 정장 차림의 한국 젊은이들로 가득했다. 시끌벅적한 것도 서울 도심의 직장인들이 가득한 식당 풍경 그대로였다. 사람들이 바글대고 시끄러운데 피로감은 싹 가시고 편안함이 느껴졌다.
그랬지 한국에서도 이런 풍경 속에서 점심을 먹으면서 떠들곤 했지. 바로 그때 필자처럼 혼자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는 초로의 여인이 눈에 들어왔다. 합석은 우리들의 의사가 아니고 주인의 부탁에서 이루어졌다. 6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여인의 의미는 시간과 세속이 풍화시킨 성숙으로 다가왔다. 교육도 없이 수련이나 수양도 없이 지친 삶과 야박한 인심이 만들어낸 풍류객이었다.
“나는 1년에 한 번 이상 맨해튼에 온답니다. 여기 오면 꼭 이 식당에서 밥을 먹지요 칼국수와 김치를 먹고 싶어서가 아녜요. 사람들을 보고 싶어서예요. 한국 음식은 집에서 여기보다 더 훌륭하게 만들 수 있거든요.”
1950년대 후반, 미군과 결혼해서 루이지애나로 왔다는 그녀는 시골이라 사람이 적고 거리도 깔끔하고 움직임이 느린 공간에서 살아왔단다. 변함없이, 수십 년간 보아온 자연은 아름답기는 하지만 이제는 지루하단다. 어느 날은 평화로움마저 슬프고 안정적인 날들도 시큰둥하고 특별한 문제가 없는 빤한 하루하루가 숨 막혀 맨해튼에 온단다. 맨해튼은 서울 같아서 가슴이 활짝 열려진단다. 지저분하고 홈리스가 있는 거리는 육이오사변 직후의 서울을 언 듯 생각나게 하고, 복작거림과 사람들의 지친 모습도 정감이 가고 메뚜기 뛰듯하는 경쟁은 동대문시장을 닮은 듯해 마치 고향에 온 기분이란다. 이제는 부모도 다 떠나버린 서울, 동생들이 어쩌다 미국에 오면 선물로 가져갈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한단다.
“그렇게 발전해버린 그 땅이 내 고향이겠어요?”
자신의 희생으로 교육도 받았겠다, 부까지 이룬 동생들이 자신을 그리 달갑게 여기지도 않는 눈치란다. 맨해튼이 자본주의의 꽃이라지만 그녀에게는 살려고 바둥거리는 가난한 사람들만 보인단다. 좀 더 나은 삶을 살아보겠다고 불나방처럼 모여든 사람들, 이루었다 싶으면 또다시 물거품이 될 그들의 꿈이 보인단다.
그녀가 고향을 찾듯 맨해튼을 찾아오는 마음은 아마도 치유되지 않은 한 때문이리라.
‘이루어지지 않아서 첫사랑’이라는 말처럼 첫사랑은 어쩐지 애틋하고 비극적이어야만 할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첫사랑은 대부분 이루어지지 않은, 아름답고 슬픈 사연으로 각자의 가슴에 묻혀 간직되어 있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가끔 그날의 추억을 꺼내 그리워하면서 은근히 비밀을 즐기기도 하는 것 같다. 어렸을 때 필자 마음을 설레게 하던 까까머리 중학생은 첫사랑이라기보다는 풋사랑이다. 언제 생각해봐도 웃음이 나고 장난스러운 추억이다. 그러니 첫사랑은 아닐 것이다.
마음을 아프게 한 남자, 그가 바로 필자의 첫사랑이었다. 필자는 좀 괜찮은 용모였음에도 대학을 졸업하고 몇 해가 지나도록 결혼을 못했다. 딸만 셋인 집안의 장녀로 27세가 되어도 사귀는 사람조차 없었으니 엄마의 걱정이 대단했다. 당연히 수없이 많은 선 자리에 끌려 나갔다.
지금은 없어진 광화문 국제극장 옆 골목 안에 ‘라라’라는 작은 레스토랑이 있었다. 어느 날 그곳에서 선을 봤는데 그가 특별하게 다가왔다. 첫눈에 반한다는 말은 그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모처럼 마음이 활짝 열려 세상을 다 얻은 듯 기뻤다. 하지만 인생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부모님은 같은 시기에 선을 본 다른 남자를 마음에 들어 하셨다. 특히 엄마의 성화가 심했다. 필자가 마음을 굽히지 않자 그 사람을 집으로 불러 결혼해서 살 집은 있는지, 돈은 얼마나 있는지 속물 같은 질문을 해대며 모욕을 줬다. 묵묵히 듣고만 있던 그가 집을 나설 때 같이 따라 나가 서부역에서 일영 가는 기차를 타고 가면서 한없이 울었던 기억이 잊히지 않는다.
그 사람이 아니면 세상 그만 살아도 좋다는 결심까지 했지만, 부모님의 큰 반대 속에 결국 엄마가 좋다는 남자와 결혼하게 됐다(이 글은 남편이 알면 곤란한 특급 비밀이다). 그렇게 첫사랑은 가슴에 묻고 평탄한 삶을 살았다.
그런데 몇 해 전 ‘싸이월드’라는 미니홈피가 유행처럼 퍼졌을 때 필자도 ‘싸이월드’에 사진과 글을 올리며 대학 동창들과 소통하며 지냈다. 그때 이름과 나이 정도를 입력하면 친구를 찾을 수 있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어느 날 반신반의하며 첫사랑 이름을 입력해보았다. 순간 너무 놀라 필자의 눈을 의심할 뻔했다. 나이 들어 중년 아저씨가 된 그 사람의 사진을 보게 된 것이다. 비슬산이라는 설명이 달려 있는 사진 속 남자는 웃고 있었는데 필자가 기억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필자 모습이 변한 것도 잊은 채 충격을 받고 말았다. 그렇게 샤프하고 매력적이었던 사람이, 헤어지면 죽겠다는 결심까지 하게 만들었던 사람이 이제 저런 아저씨가 되어버렸다니 믿을 수 없었다. 괜히 찾아봤다는 후회도 살짝 들었다.
서로 각자 살아온 세월이 있으니 그냥 그 사람도 살아 있었구나 하며 마무리를 했다면 좋았으련만 필자는 사진 밑에 “비슬산이 어딘가요? 멋지네요”라고 다소 의미심장한 댓글을 남겼다.
다음 날 다시 홈피를 찾아가 보니 필자가 단 댓글 밑에 “과거보다는 현재의 삶이 중요합니다”라는 답글이 달려 있었다. 순간 얼굴이 확 달아오르며 아는 척을 왜 했을까 민망하고 후회스러웠다. 그냥 추억이 떠올라 한마디 써본 건데 그렇게까지 냉정한 반응을 보이다니…. 그 후 다시는 그 사람의 홈피를 찾지 않았다.
보고 싶었다는 반응을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좀 실망스럽긴 했다. 지난 일은 그저 가슴에 묻어두고 아름다웠다고 추억만 하는 게 나았겠다는 생각을 절실하게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현재의 삶이 중요하다는 첫사랑의 한마디는 참 멋대가리 없는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