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아호 송유재)
스위스 태생의 조각가 알베르토 자코메티(Alberto Giacometti ·1901~1966)의 작품은 세계 많은 예술가들에게 반향을 일으켰다. 인물상을 조형하면서 군더더기를 깎아내어 본질에 접근하려는 극도의 절제됨이 충격을 주었기 때문이다. 가늘고 긴 팔다리와 얼굴의 과장된 모습은, 인간 내면의 고독과 우수 같은 정신세계를 표출하려는 그의 시각에 실존주의적이라는 평가가 내려지게 했다.
본인은 “인간 본연의 적나라한 모습을 관찰했을 뿐 현대인의 소외와 고독을 나타내려 한 것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차가운 금속을 녹이고 붙이는 고단한 작업 속에서 무형의 내면의식을 드러내려는 지난한 탐구가 우리 마음을 동화시킨다.
인간이 흙을 주무르고 반죽하여 어떤 형상을 만드는 행위는 본능인지라 그 역사는 인류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한다. 토기를 빚어 굽는 일이야 생활의 필요에 따라 자연스레 발전해 왔으나, 어떤 특정한 형상을 만드는 행위는 그렇지 않다. 비록 신상(神像)일지라도 만드는 이의 의지가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고대 조각가들은 인간의 등신상(等身像)을 돌이나 청동에 극사실적으로 만들기는 했으나 인간의 정신세계까지 도출해 내지는 못했다. 로댕(Auquste Rodin ·1840~1917)이나 부르델(Antoine Bourdelle·1861~1929) 같은 조각가들은 사실적이면서 인간 심연의 본능과 오묘한 감성의 변화까지를 조각에 나타내고자 노력하였다.
여성조각가 한애규(1953~ )는 서울대학교 응용미술과와 대학원에서 도예를 전공하고 프랑스 앙굴렘 미술학교를 수학하였으나, 1980년대 이후에는 조각의 길로 정진하였다. 테라코타(Terra cotta) 영역에 도전하여 흔치 않게 일관된 작업을 이 십년 넘게 견지하고 있다. ‘테라코타’는 이탈리아 말로 ‘구운 흙’이란 뜻인데, 점토를 800도 정도에서 구워 도자기의 초벌구이나 벽돌 기와 등에 사용한 인류의 오랜 문화의 흔적이 곳곳에 산재한다.
그러나 한애규의 테라코타는 1200~1350도까지 굽는 온도를 높여, 도기(陶器)나 자기(瓷器)의 수준에 버금가는 강도 높은 작품을 만들고 있다. 그의 전시장을 꽉 채우는 등신(等身)에 준하는 인물상을 테라코타로 완성하기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간 테라코타만으로 십여 회의 개인전을 열어 큰 호평을 받아왔다. 그의 인물상은 거개가 여인상들로, 넉넉한 품새와 투박하고 푼더분한 마음씨 좋은 이웃 아줌마를 연상시킨다.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의 모습도 꼭 그러해 “자소상(自塑像) 같다”고 했더니 빙그레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이 작품 ‘어깨동무’는 아내와 평창동 산책 중에 들른 화랑에서 구입한 것으로 한애규 작품 중에서 중간 크기에 해당된다. 투박한 손발이며 얼굴의 미소까지 테라코타의 맛이 그대로 느껴진다. 만약 같은 형상을 돌에 새기거나 브론즈로 다듬었다면 거칠고 구수한 멋이 사라졌을 것이다. 작가의 질료(質料)를 다루는 손길이 오롯이 보는 이에게 전이되어 마치 나도 흙 반죽 위에 손가락으로 선을 그리는 듯한 동화감을 주고 있다. 군더더기를 깎아내기보다 오히려 더 보태어 강조함으로써, 내면에 흐르는 의식을 절묘하게 표출해 내는 작가의 원숙함이 우리를 따스하게 한다.
조각을 수집하려는 사람들은 테라코타나 브론즈 형태의 작품을 복제성 때문에 망설이는 게 사실이다. 돌에 깎으면 유일한 작품인 것을 석고로 본을 뜨고 거기에 점토나 청동 재료를 부어서 만들면 수십 점의 동일한 복제품이 탄생하는데, 수집가들은 희귀성에서 벗어난 예술품을 선호하지 않는 경향이 있기에 그러하다. 그러나 한애규는 거의 복제품을 만들지 않기 때문에 테라코타 작품도 유일한 작품으로 인정받는다.
조의현(1959~) 조각가는 조선대학교와 대학원에서 조소를 전공하고 모교의 교수로 있다. 그의 작품들은 여러 미술제 등의 전시를 통해 간간이 접하곤 하였다. 대부분 브론즈의 형태로 우리 주변의 소년, 소녀, 아저씨, 아주머니 형상을 조형해 내는데 그 모습이 가히 파격적이다. 날씬하고 예쁜 얼굴은 찾을 수가 없다. 넓적한 얼굴 바탕에 샐쭉한 눈, 낮은 코, 광대뼈가 불거진 뺨과 짧은 목, 땅딸한 키에 굵고 투박한 다리가 우리의 시선을 잡는다.
인물을 과장 한다기보다는 우리의 1960~70년대 원초적 모습이 고스란히 투영된 것만 같아서 반갑다. 다듬고 꾸밀 줄 모르던 우리 이웃의 아낙과 어머니, 누나들의 수수함을 체감한다.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 히말라야나 몽골 오지의 인물들을 보면 연민보다 반가운 동질감을 느끼는 심경과 같다고나 할까. 간간이 테라코타 작품도 보여, 주저없이 수집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화랑미술제 기간에 한 화랑에서 ‘주머니에 손을 넣은 소년’이 눈에 들어와 즉시 구입하였다. 이 작품은 검은 화강석에 깎고 새긴 특이한 소재의 작지 않은 작품이다. 화강석을 다듬고 연마하여 얼굴, 목, 발목 등을 조성하고 그러나 두발이나 옷 등은 정으로 쪼아서 거친 질감과 색의 대비를 맞춘 작가의 의도가 잘 표현된 작품이다. 소년은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넣고 무심히 수평 아래를 바라보고 있다. 유년기의 한때를 떠올리게 하는 질박함이 좋다. 어쩌면 어머니에게 꾸중을 듣고 집을 나와 들길을 걷거나, 뜰에 서서 동무를 기다리거나, 논둑으로 스쳐가는 저녁놀을 하염없이 바라보거나 그 어떤 연상으로도 마음의 순수가 되살아난다.
평면 회화작업과 달리 조각은 입체를 조성하는 장르이기 때문에 공간지각능력이 뛰어나야 하고 세심한 마무리 작업이 필수적일 뿐 아니라 흙, 돌, 쇠붙이, 나무 등 질료에 따라 물리적인 노고가 있어야 한다.
우리나라 건축법에 일정 규모 이상의 건축물에는 반드시 환경조형물을 설치하도록 하였다. 다수의 조각가들이 참여하므로 열악한 예술가들의 경제에도 도움이 된다. 거리에 격이 높은 예술적 공간도 늘어나고는 있다. 수백 년 뒤에도 도시와 거리의 상징물이 될 조형물로, 푼더분하고 질박한 정감이 흐르게 하면 어떨까.
△이재준(李載俊)
1950년 경기 화성 출생. 아호 송유재(松由齋). 미술품 수집가, 클래식 음반 리뷰어.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가수 이애란(예명·53)씨를 두고 하는 말이다. 작년 말, 전국을 ‘전해라’
열풍에 빠트린 죄(?)를 물어 방송사와 광고계가 그에게 잇단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 ‘떴다’하는 순간 방송사 특집 프로그램, 휴먼다큐멘터리, 심지어 대한민국 최고의 예능 프로그램까지 접수했다. 25년 무명생활을 한방에 날려버린 ‘백세인생’ 이애란의 2016년 소망을 브라보가 만난 사람이 들어봤다.
“요즘 들어서 인기를 조금씩 실감하고 있어요.”
‘백세인생’ 가수 이애란씨의 하루는 바쁘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무명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았다. 이제는 어딜 가나 말 그대로 스타급 대우다. SBS 아침방송 고정 리포터는 물론 인기 아이돌만 모신다는 MBC 설날 특집 ‘2016 아이돌스타 육상·풋살·양궁 선수권대회’에 초대돼 노래도 불렀다. 길거리, 식당 어디에서도 ‘어머, 이애란이야!’라는 소리를 수도 없이 듣는다. 인기를 얻기 전부터 존재했던 인터넷 팬카페는 매일 꾸준히 회원이 늘고 있다. 회원 수는 1월 현재 1428명이다. 그전에는 이에 훨씬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많이 늘었어요. 한 분, 한 분 저와 노래를 알게 되고 좋아하시는 분들이 가입하세요. 요즘은 자주 들어가 보지 못해서 팬들에게 미안하죠.”
오로지 노래만 생각한 25년 세월
어렸을 때부터 가수의 꿈을 키워왔던 이애란. 20대가 되면서 뜻밖의 기회가 찾아왔다. 그러나 오래가지는 않았다.
“1990년, KBS 일일드라마 주제가 공개 오디션이 있었어요. 거기서 저 포함해서 3명이 마지막 오디션을 봤는데 제가 낙점된 거죠. 그런데 어떤 상황인지 가수가 부른 노래는 나가지 않고 곡만 드라마에 사용하더군요. 정작 제 목소리는 전파를 타지 못했습니다.”
어린 나이에 실망할 법도 한데 지금까지 노래를 부르는 것 외에 다른 일은 생각해본 적이 없다. 소소한 아르바이트도 노래가 아니면 안 했다.
“그래도 노래할 곳은 꽤 있었어요. 풍물 장터 야시장이라고 겨울만 빼놓고 동네마다 많았어요. 서울에도 있었고요. 야시장에서 초대해주시면 가서 노래를 불렀죠.”
당시 야시장마다 기본적으로 노래 반주를 해주는 사람들이 있어서 가수를 초대하면 그 사람 음정에 맞춰 연주해줬다. 뭐든지 생음악으로 불렀던 때다.
길고 긴 ‘백세인생’과의 인연
이애란이 노래 ‘백세인생’ 가락을 처음 접한 것은 1995년 한 국악학원에서다. 그때 녹음을 했지만 상업적인 목적은 아니었고 장구를 치면서 노래를 부르는 정도였다.
“장구가 배우고 싶어서 국악학원에 갔었어요. 그때 선생님이 장구랑 민요도 같이 가르치던 분이신데 선생님이 그 노래(지금의 백세인생)를 민요로 부르는 것을 귀동냥했어요. 저도 장구 치면서 흥얼거리곤 했어요. 한 달 넘도록 장구채 잡는 방법만 가르쳐서 그만뒀는데 노랫가락 하나는 익히고 나온 거죠.”
이애란은 이렇게 알게 된 노래를 1998년 경주세계문화엑스포 무대에서 관객들의 박수에 맞춰 불렀다. 반응이 상당히 좋았다. 그 모습을 보고 부산 시장거리에서 활동하던 품바 가수 명월이 알려달라기에 노래를 가르쳐줬다고.
“그런데 품바라 그런지 왜곡이 많이 되더라고요. 시장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상황에 맞게 다 개사를 해버리잖아요. 2012년에 김종완 작곡가님을 만나 악보를 보고 알았죠. 우리가 왜곡해서 부르고 있었구나. 그 이후 가사 수정도 많이 하고 다시 처음부터 배운 거죠.”
힘든 시절 장구를 치면서 익혔던 노래가 인생을 바꿔주는 열쇠가 될 줄 누가 알았을까. 2012년 사촌 오빠의 소개로 첫인사를 나눴던 작곡가 김종완씨와의 인연도 기막히다. 알고 보니 그가 흥얼거렸던 ‘백세인생’의 원작자이자 데뷔곡이 될 뻔한 드라마 주제가 작사가였다. 현실은 영화만큼이나 극적이었다.
작곡가와 새롭게 노래 녹음을 하기 위해 5, 6개월여 피나는 연습을 했다. 새벽 2시건, 3시건 될 때까지 말이다.
“2013년 드디어 노래 녹음을 했어요. 1995년 장구를 배울 때만 해도 ‘백세인생’의 원제목이 ‘저세상이 부르면 이렇게 답하리’ 였는데 2013년에는 ‘저세상이 부르면’으로 바꿨죠. 작년 2월 말 발표 때는 원래 100세까지만 있던 가사를 150세까지 늘려 다시 썼어요.”
제목도 ‘백세인생’으로 완전히 갈아 끼웠다. 고령화 사회, 장수사회로 접어들면서 생겨난 ‘백세인생’이란 말이 저승에서 오라는데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말하는 노래 가사와 잘 어울렸다. “제목 안에 가사 내용이 다 담겨 있는 거 같아요. ‘백세인생’에는 한 가지가 아니고 여러 가지가 감정이 있습니다. 나 대신 네가 좀 내 마음을 좀 전해줄래? 하는 것도 있고, 또 덩실덩실 리듬도 있고, 우리가 노래 가사처럼 정말로 150세까지 살 수 있다면 하는 욕심도 담긴 노래입니다.”
가장 많이 생각나는 사람은 아버지
인기몰이가 시작되고 하루하루가 바빠질수록 먼저 떠나신 부모님 생각이 부쩍 많이 난다. 다른 매체에도 소개됐지만, 작년에 이애란씨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이애란의 영원한 팬이자 버팀목이었던 아버지를 생각하니 목소리가 애잔하게 깔린다.
“아버지는 이 노래를 처음부터 좋아하셨어요. 작년 2월에 음반이 ‘백세인생’으로 나왔다고 하니 제목이 좋다고도 하셨어요. 좋아하시기만 했지 제가 방송 활동하는 모습을 보여드리지 못해 늘 가슴이 아파요. 그리고 빨리 못 보여드린 게 가슴에 한이 남았다고 할까요? 맺혔다고 할까요?”
아버지 살아계실 때는 가끔 아버지 팔을 베고 누워서 ‘백세인생’의 한 구절을 불러드리기도 했다.
“90세에 저 세상에서 또 데리러 오거든……. 재촉말라 전해라.”
달리 아픈 곳이 없어서 100세까지는 사실 거라 생각했는데 갑작스럽게 운명하셨다. 지방행사 때문에 아버지 임종을 지키지 못한 게 못내 죄스럽다.
노래하는 이애란에게 아버지는 가장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도전이 아름다운 거지 후퇴는 하지 마라. 그리고 네가 후회할 일은 절대로 하지 마라” 라며 항상 응원을 해주던 한 사람이다.
젊은이들의 유희 ‘전해라~ 짤방’, 인생역전 견인차
이애란의 인기는 젊은이의 기발함이 빚어낸 결과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짤방이란 ‘잘림방지’의 준말로 내용에 상관없이 사진이나 동영상을 인터넷에 올리는 것을 말한다.
“2014년 11월 말에 ‘백세인생’ 노래 영상을 만들어서 인터넷 동영상 사이트에 올렸습니다. 조회 수가 빠르게 올라가더라고요. 그런데 그걸 눈여겨봤던 최준원씨가 소속사에 얘기한 거죠. 제 영상으로 짤방이라는 걸 만들고 싶은데 만들어도 되느냐고요.”
최씨는 한국방송예술진흥원 학생이면서 이애란과 같은 소속사의 트로트 음악 작·편곡을 겸하고 있는 전문 작곡가다. 지금은 이애란씨와 이모, 조카 하는 사이라지만 짤방을 만들 당시에는 안면만 있는 정도였다고. 소속사에서도 최씨의 얘기를 들으니 꽤 괜찮은 아이디어라 생각해 흔쾌히 승낙했다.
작년 7월, 인터넷에 첫 번째로 유포된 짤방은 ‘간다고 전해라, 못 간다고 전해라’였다. 이애란의 감정 실린 표정과 ‘전해라’라는 궁서체 자막은 묘하게 어울리면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특이하고 재미있는 것에 관심 두는 젊은이들, 신선한 것을 찾아다니는 방송 작가, 기자들의 눈에 띄면서 마침내 세상 남녀노소에게 사랑받는 전해라~ ‘백세인생’이 됐다.
이애란의 인생은 이제부터 시작
결혼에 관해서 물어보려 하자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이애란씨. 살아생전 아버지도 묻지 않던 질문이다. 노래하다 보니까 결혼을 해야겠단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단다. 노래를 벗 삼아 버텨온 삶이다. 그래도 이상형은 있다. 자상하고 정말 착한 사람 만났으면 좋겠다. 사람은 다 착하지만, 자신을 아껴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다고 한다.
2016년을 맞이하는 각오도 함께 물어봤다.
“제 욕심이겠지만 트로트를 발판으로 한류 스타가 되고 싶어요. 바람이고 욕심이죠. 작년은 여러분들 사랑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2016년도에는 보답을 하는 한 해를 만들어야죠. 드라마에 출연하고 싶을 때도 있어요. 드라마에 노래교실이 나올 때도 있는데 초대해주시면 좋겠어요(웃음).”
한류스타를 예약해두고 있는 인기가수답게 이애란씨와의 인터뷰는 사실 쉽지 않았다. 그녀의 일정대로라면 아직도 만날 수 없는 상황. 이동하는 차 안에서, 식당에서, 걸어가면서 틈틈이 이애란씨와 인터뷰했다. 방송 촬영 모습도 지켜봤다. 힘들만도 한데 사진을 찍겠다고 길게 줄을 선 팬들 하나하나 웃으면서 사진을 찍어주고 악수를 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마지막으로 독자에게도 한 말씀 부탁했다.
“무조건 힘내시고 파이팅하라 전해라~!”
100세 인생은 60세부터 시작이기 때문에 꽃중년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고 60세는 너무 어리다는 것. 이애란의 인생도 이제부터 시작이니 모두 젊은 마음으로 100세 인생 살아가기 바란다고 전했다.
일본 통신원 이태문 gounsege@gmail.com
시는 울림이어야 하고, 잠언 혹은 금언은 공감을 얻어야만 시대를 뛰어넘어 빛나는 법이다. 수많은 위인과 명인들이 저마다 자신의 삶에 대한 철학을 담은 명언을 남겼지만, 시바타 도요(柴田トヨ) 할머니의 이 한마디 ‘나도 괴로운 일 많았지만 살아 있어 좋았다’는 참으로 깊은 울림이며 시대와 국경을 초월해 영원히 빛날 것이다.
1911년 6월 26일 일본 도치기현 도치기시에서 쌀가게를 하는 부유한 가정의 외동딸로 태어난 할머니는 시와는 전혀 무관한 삶을 살았다. 10세 무렵 아버지의 가산 탕진으로 집안 형편이 안 좋아져 학교를 갑자기 그만두었고, 이후 전통 여관과 요리점에서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면서 더부살이를 했다. 그런 와중에 20대에는 결혼과 이혼의 아픔까지 겪었다. 그리고 33세에 평생을 함께할 요리사 시바타 에이키치를 만나 재혼해 외아들을 낳았다. 그 후 재봉일 등 부업을 해가며 알뜰살뜰 그리고 정직하게 생계를 꾸렸고, 1992년 남편과 사별한 후에는 우쓰노미야(宇都宮)시에서 20년 가까이 홀로 생활했다.
이처럼 글 쓰는 일과는 아무런 인연도 없이 살아오던 할머니는 허리가 아파 취미였던 일본 전통무용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돼 크게 낙담했고, 그런 모습을 본 60세를 넘긴 외아들의 권유로 92세 때 처음 시를 쓰기 시작했다. 할머니는 ‘산케이신문’ 1면 최상단에 위치한 ‘아침의 시’ 코너의 단골 투고자였으며, 일본의 대표적인 시인 신가와 가즈에(新川和江)는 그녀의 시를 높이 평가했다. 그러던 가운데 2009년 10월, 99세의 나이에 자신의 장례비용으로 모아둔 100만 엔을 털어 첫 시집 를 자비 출판했다. 그 후 아스카신샤(飛鳥新社)가 내용을 추가하고 양장판으로 재출판해 2012년 8월 시점에 160만 부를 돌파하는 초베스트셀러가 됐다.
할머니는 일본의 유명 샹송 가수 구보 도아코(久保東亞子)가 대표 시 ‘약해지지 마’에 곡을 붙여 노래한 것이 계기가 되어 NHK 라디오 제1방송 에 출연해 “많은 사람들의 애정을 받아 지금의 내가 있다”고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2010년 12월 31일에는 NHK TV의 휴먼 다큐멘터리 이 특별 방영됐으며, 2011년 9월엔 만 100세를 맞이한 기념으로 두 번째 시집 (아스카신샤)가 출판됐다. 그해 10월 10일 NHK TV에서 가 방송돼 많은 시청자들의 공감을 얻었다. 특히 그해 3월 11일에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나 일본 열도가 큰 충격과 상처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여서 온갖 풍상을 다 이겨내고 삶에 대한 긍정적 생명력이 녹아들어 있는 할머니의 시는 든든한 정신적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시바타 할머니는 2013년 1월 20일 0시 50분께 우쓰노미야시 자택 부근에 있는 사설 요양원에서 향년 101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외아들은 “어머니께서 정말 평화롭게 고통 없이 가셨다”며 “100세 때까지 계속 시를 쓰셨고 원기는 있으셨지만, 지난 반년간은 걸을 때 부축을 받아야 했다”고 전했다. 할머니가 숨진 그해 늦깎이 시인의 인생을 그린 영화 가 제작돼 개봉됐다. 국내에서는 세상을 등지기 직전 가 번역 출판됐으며, 대만과 미국 등 해외에서도 속속 번역본이 소개돼 한 시대 국경과 이념을 초월한 인류의 희망 전도사로 자리 잡았다.
92세에 시작해 100세까지 시와 함께하며, 지난 100년간의 삶을 잔잔하게 들려준 할머니는 초고령사회를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당당하게 맞서 스스로의 길을 새롭게 일구어나갔다는 의미에서 더욱 가치가 있다. 향기로운 결실을 맺은 인생의 황금기가 100세이며, 뒤늦게 발견한 자신의 재능을 활짝 꽃피운 것도 바로 100세였다.
독자들은 세계 최고령 시인이자 인생의 선배인 시바타 할머니를 통해 삶의 지혜를 배우고, 용기의 메시지를 통해 저마다의 삶을 추스르는 힘을 얻는다. 그것은 할머니 시인의 오래 묵어 우러난 인생철학이자 삶의 구수한 맛일 것이다.
비록 할머니는 이 세상을 떠나 저 하늘 위에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지만, 아직도 이렇게 우리들에게 속삭이고 있다.
바쁠수록 시간이 빨리 간다고 한다. 바쁘답시고 1분 1초를 다투다 보면 몇 시간, 며칠이 어느새 지나가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질문 하나. 바쁜 것 말고 우리의 시간을 빠르게 가도록 만드는 것이 하나 더 있다. 무엇일까? 재미가 아닐까? 재미있을 때도 바쁠 때 못지않게 시간이 후딱 가기 때문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좋은 게 네 가지 있답니다. 첫째는 오래되어 잘 마른 장작이고요, 두 번째는 마시기 좋은 오래된 와인이지요. 세 번째는 서로 믿고 따르는 오래된 친구, 마지막 네 번째는 내가 읽기 좋은 책을 쓰는 나이 든 작가랍니다.”
16세기의 철학자 프란시스 베이컨이 한 말이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가까이에 친구가 많아야 한다. 배우자와 가족 등 친구뿐 아니라 추운 날 나를 따뜻하게 덥혀줄 장작, 함께 나눌 술 한 병, 혼자서 심심할 때 들춰볼 책도 가까이에 있어야 할 친구들이다.
두 번째 질문. 장작과 와인, 친구, 책 등으로부터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냥 남는 시간을 때우는 게 아니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시간을 보내는 재미가 아닐까? 불타는 장작에다 고구마와 밤을 구우면서 가족이나 친구와 술잔을 나누는 장면은 생각만 해도 정겨운 그림이다. 지난 이야기를 해도, 다가올 이야기를 해도 다들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아니, 조금 전에 했던 말을 또 해도 처음 듣는 양 들어줄 것이다. 했던 말을 또 할 정도가 되면 어느새 와인은 새로운 병일 터이고 장작 또한 새로운 장작일 터이다.
이제 세 번째 질문. 영국의 한 신문이 영국 끝에서 런던까지 가장 빨리 가는 방법을 현상공모한 적이 있다. 이 사람 저 사람이 어디어디까지 비행기를 타고, 기차를 타고, 차를 타고 가면 된다고 응모했다. 그런데 1등으로 뽑힌 답은 ‘좋은 친구와 함께 간다’였다. 좋은 친구와 함께 재미있게 이야기하면서 가다 보면 금세 도착할 것이므로 긴 여행도 짧게 여겨지기 때문이다.
영국계 글로벌 은행 HSBC가 전 세계 17개국 30~60세의 1만7000여 명을 대상으로 은퇴와 관련한 설문조사(2011년)를 실시했다. “은퇴라는 단어로부터 무엇을 떠올리느냐?”고 물었더니 대다수 선진국에서는 ‘자유, 만족, 행복’이라는 긍정적인 대답이 나왔다. 반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경제적 어려움’이 가장 많은 대답을 차지했고 이어서 나온 것이 ‘두려움, 외로움, 지루함’이었다.
왜 우리나라 사람들은 은퇴하면 경제적 어려움을 먼저 떠올릴까? 은퇴 후 노후의 삶에 대한 준비가 부족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은퇴 후가 두려울 뿐 아니라 외롭고 지루할 것 같은 부정적 생각만 드는 것이다. 경제적으로 어렵고 그래서 두렵고 외롭고 지루한 삶이 과연 재미있을까? 반대로 자유, 만족, 행복이 떠올려지는 삶이라면 그 삶은 설레고 기다려지지 않을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일에 쫓기고 있지만 일을 벗어나 자유롭고 만족스럽고 행복한 시간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면 지금 하는 일까지도 재미있지 않을까?
근엄하기만 할 것 같은 공자님도 재미없는 인생을 멀리했다. 에 ‘지지자불여호지자 호지자불여낙지자(知之者不如好之者 好之者不如樂之者)’라는 말이 나온다. 아는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만 못하다는 것이다. 아는 것과 좋아하는 것을 넘어 즐기는 재미가 있어야 그 인생이 행복하다는 것이다.
“자식들이 죽어 슬픔으로 얼룩진 영화이지만 지루하지 않고 ‘재미있게’ 만들어 주십시오.” 김학순 감독이 영화 을 만들면서 유가족들로부터 받은 당부는 딱 이 한 가지였다고 한다. 유가족들은 어떠한 픽션도 상관없다면서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게 하는 것이 연평해전을 알리고 아들들의 명예를 높이는 일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사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다큐멘터리를 넘어 관객들이 보고 즐길 수 있는 영화다운 영화, 재미있는 영화를 만들어달라는 부탁이었다. 참으로 대단한 유가족들이다.
공짜 영화라도 재미가 없으면 보고 싶지 않은 게 인지상정 아닌가? 작품성 시비와 정치적 논란 속에서도 흥행에 성공한 것은 재미와 감동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자칫 밋밋하기 쉬운 전쟁영화지만 여기저기 숨어 있는 재미들이 감동을 더해준다는 입소문이 관객들을 극장으로 이끈 것이다.
재미있는 영화의 특징은 나도 모르게 빨려들어 시간 가는 줄 모른다는 것이다. 보다 보면 어느새 엔딩 타이틀이 올라오는 것이다. 재미에 더해 감동적인 영화라면 다 끝날 때까지도 자리를 뜨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반면 재미없는 영화는 처음부터 지루하기 짝이 없어서 엉덩이가 아프기 시작할 뿐 아니라 시계가 야광이 아닌 것에 짜증이 날 정도일 것이다. 특히 영화가 끝날 때까지 자다가 좌우에서 웅성거려서야 깰 정도라면 돈과 시간이 아까운 것을 넘어 그 허무함이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것이다.
재미없는 인생은 재미없는 영화 이상으로 지루하기만 할 것이다. 무엇이 그리 바쁘답시고 재미있는 영화 한 편 못 보는 인생을 재미있는 인생이라고 할 수 있을까? 노자, 장자와 함께 대표적인 도가(道家) 사상가로 알려진 열자(列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십 년 만에 죽어도 죽음이요, 백 년 만에 죽어도 역시 죽음이다. 어진 이와 성인도 역시 죽고 흉악한 자와 어리석은 자도 역시 죽는다. 썩은 뼈는 한가지인데 누가 그 다른 점을 알겠는가? 그러니 현재의 삶을 즐겨야지 어찌 죽은 뒤를 걱정할 겨를이 있겠는가?” 무려 2400년 전에 한 말이지만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도 딱 들어맞는 말이다.
90세, 100세까지 살아야 하는 인생을 재미있는 인생으로 만드는 것은 누구인가? 재미있는 인생도 재미있는 영화처럼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은퇴 후 또는 다음으로 미루지 말고 지금 바로 즐거움을 찾는 재미, 재미를 찾는 재미를 찾아나서야 한다. 바쁜 중에도 한가함을 찾는다는 ‘망중한(忙中閑)’을 넘어 바쁜 중에도 재미를 찾는 ‘망중락(忙中樂)’이 필요하다. 내 인생, 내 영화의 감독은 바로 나 자신이다.
최성환 한화생명 은퇴연구소장·고려대 국제대학원 겸임교수
왕년의 챔피언 친구 강칠과 종구가 과거의 오해를 풀어나가는 데 필요한 한 마디 ‘미안해’. 까칠한 여배우 서정을 10년째 짝사랑해온 매니저 태영의 용기 있는 한 마디 ‘사랑해’. 자신의 딸을 죽인 범인의 딸 은유와 마주해야 했던 형사 명환이 서로의 상처를 감싸 안으며 건넨 한 마디 ‘고마워’. 평범하지만 값진 세 마디를 통해 얻게 된 가슴 따뜻한 이야기를 담아낸 영화 의 전윤수 감독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Interview. 의 전윤수 감독
이번 작품의 연출을 맡게 된 계기와 메시지가 궁금합니다.
인생을 산다는 것은 갈등의 연속이고 그것이 인생의 본질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 여정 속에서 행복과 좌절을 느끼며 살지요. 저에게 지난 몇 해는 즐거운 일보다는 힘든 일이 많았습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우리는 누군가에게 기대 위로받고 치유하기를 원합니다. 영화 가 지친 사람들에게 위로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따뜻하게 안아주고 포근하게 안겨 ‘미안해 사랑해 고마워’라는 말을 주고받을 때 느껴지는 행복감과 충만감을 우리 영화를 통해 느꼈으면 좋겠습니다.
왕년의 챔피언 친구 에피소드를 그려내는 데 모티브로 삼은 이야기가 있다면.
몇 해 전 왕년의 복싱스타 박종팔과 친구 이효필의 다큐멘터리를 본 적 있습니다. 서로 친한 친구 사이지만 승부에 있어서는 한 치의 양보도 없는, 그것 때문에 갈등이 생기고 화해하지 못한 채 헤어진 두 사람의 이야기를 보고 착안해 만든 에피소드입니다. 승부욕으로 인해 멀어진 두 사람이 말년에 병원의 같은 병실에서 만나게 된다면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 상상해 보다가 떠올랐고, 두 사람이 못다 이룬 승부를 위해 시합을 벌인다면 어떤 상황과 감정들이 유발될까 궁금했습니다. 갈등과 용서와 화해를 통해 우정의 회복을 영화에 담으면서 인생은 아름답다라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두 중년배우 김영철과 이계인의 호흡은 어땠나요?
두 분은 청년시절부터 탤런트 공채로 방송활동을 한 베테랑 연기자이지만, 막상 지금껏 서로 맞붙는 배역은 한 번도 없었다고 합니다. 이계인 선생님의 눈 속에 숨겨진 순박함과 김영철 선생님의 눈 속에 담긴 정서가 묘한 앙상블을 이루어 저와 스태프들은 정말 즐거운 경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두 분이 웃옷을 벗은 채 글러브로 서로를 강타할 때 혹시 모를 부상에 대한 걱정도 했지만 두 분 모두 인생 최고의 희열을 느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관객들도 두 분의 연기를 통해 현장에서 느꼈던 가슴 뭉클한 감정을 느끼셨으면 좋겠습니다. 영화를 통해 배우 이계인의 재발견이 회자되길 바라고 연출자에게 깊은 감동과 아직은 도달하기 힘든 디테일한 인생의 단면들을 발견하게 해주신 김영철 선생님께 존경의 뜻을 표하고 싶습니다.
다른 배우들과 관련된 에피소드도 궁금한데요.
다른 배우들의 호흡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지진희씨는 영화 속에서 혼자 연기하거나 아역배우들과 연기하는 장면이 많았습니다. 가장 비극적인 순간에 희망을 만나게 되는 형사 역할로 범인의 딸로 등장하는 아역배우 곽지혜와의 호흡은 매우 중요했습니다. 배우들은 서로간의 감정과 호흡으로 배역을 교감하며 연기를 하는데 사실, 주요 상대 배역이 아역 배우일 때 현장에서 캐릭터의 감정을 꾸준히 유지하기는 어렵습니다. 스텝들도 조마조마하게 아역 연기자의 연기를 지켜봐야 하구요. 아이들은 집중력을 오랫동안 유지하기가 힘들기 때문이죠. 촬영 중반쯤 곽지혜 양의 눈물 고백 연기가 있던 날은 가장 중요한 장면이라 모두 긴장하고 있었고 지진희씨의 감정을 유지시키기 위해 스텝들 역시 매우 예민하게 움직였습니다. 그런데 카메라가 돌아가는 순간 세트장은 마치 마법에 빠진 듯 했습니다. 곽지혜양의 연기가 세트장의 모든 스텝들을 울게 한 겁니다. 모니터를 보는 감독 역시 마치 뭔가에 홀린 듯 곽지혜의 연기에 빠져들었고 등 뒤에서는 조용히 흐느끼는 스텝들의 훌쩍임도 들리더군요. 마치 마법을 경험한 것처럼 모든 스텝들이 영화 속 배우들의 감정에 빠져 쉽게 나오지 못한 겁니다. 지진희씨는 촬영 후 곽지혜양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했습니다. 그저 네 눈빛에 리액션만 해도 온 몸이 짜릿짜릿했다면서 진심으로 고마워하더군요. 핑클이 한창 활동 중일 때 김성균씨는 성유리씨의 팬이었다고 합니다. 세월이 흘러 에서 로맨스 연기를 펼치게 된 것이죠. 그래서인지 두 사람의 장면에 진심이 담겨있었어요. 관객들에게도 그 마음이 전달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평소 ‘미안해 사랑해 고마워’ 이 세 마디를 잘 표현하시는 편인가요?
저는 표현을 하지 않고 그 감정을 안에 담아두는 데 익숙해 때로는 차갑다는 평가를 받기도 합니다. 부끄럼이 많아서입니다. 표현하는 용기가 절실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감정을 세련되고 솔직하게 드러내는 게 아직 서툽니다. 영화가 주는 메시지처럼 소중한 사람들을 끝까지 지켜나가려면 ‘미안해, 사랑해, 고마워’를 실천해야겠다고 느꼈고 이 영화가 나를 조금 더 성장시키는 데 도움을 줄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어떤 분들에게 추천하시나요?
마음을 고백하고 싶은 순간이 있지만, 막상 가까운 사람일수록 말을 꺼내기란 쉽지 않죠. 고백하고 위로받고 소통하고 치유 받고 싶은 모든 사람에게 영화 를 보여주고 싶습니다. 고백의 순간 생각지도 못한 마법의 순간과 기적이 찾아온다는 것을 우리 영화를 통해 같이 경험했으면 합니다.
△ 전윤수 감독
, 의 조연출. 제25회 황금촬영상 신인감독상 수상.
, , 등 연출.
홍역과 태풍으로 두 아들을 잃은 큰댁 최막이는 대를 잇기 위해 작은댁 김춘희를 집안에 들이게 된다. 본처와 후처, 이보다 더 얄궂은 인연이 또 있을까? 그러나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이제는 마지막을 함께할 유일한 동반자가 된 두 사람. 영화 는 모녀처럼 자매처럼 때론 친구처럼 지내온 두 할머니의 아름다운 동행을 그린 영화다.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가 영화로 탄생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또, 제작 과정의 어려움은 없었는지요.
영화를 연출한 박혁지 감독은 2009년에 모 방송사의 휴먼다큐멘터리를 제작하면서 만난 두 할머니가 가슴 속에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친해지려야 친해질 수 없는 두 여자가, 남편이 죽었는데도 왜 굳이 한 지붕 아래 같이 살고 있을까?” 그래서 2011년 겨울 두 할머니를 다시 찾아뵙고 촬영을 시작했습니다. 사실 외딴 시골에 사는 어르신들의 일상은 지극히 평범하고, 두 분 모두 연로하셔서 촬영 기간의 대부분은 ‘기다림’의 시간이었죠. 그날그날 두 할머니의 일정을 파악하고 머릿속으로 시나리오를 쓰고 직관적인 판단을 믿으면서 촬영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꼬박 2년 만에 촬영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이하 )와 두 작품의 프로듀서로서 두 영화를 비교한다면?
의 부부와 의 두 할머니는 사뭇 다른 관계입니다. 의 부부는 서로에 대한 사랑으로 76년을 함께 했지만, 의 두 여자는 한 남자의 두 아내로 46년을 함께 살았죠. 절대로 사랑할 수 없는 사이입니다. 하지만 두 작품 모두 ‘관계’에 대한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누구나 어떤 ‘관계’ 속에서 살고 있죠. ‘가족, 친구, 동료, 이웃 등, 나는 이들과 어떻게 살고 있는가?’라는 메시지를 던집니다.
김춘희, 최막이 할머니의 삶을 지켜보면서 깨달은 인생의 교훈이 있다면?
시대가 그러하여 맺어진 두 여자의 얄궂은 인연은 대단히 일방적이고 심지어 폭력적이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두 여자는 서로의 부족한 점을 채우며 서로를 오롯이 지켜냈죠.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에 대한 대답을 춘희, 막이 할머니는 두 분이 함께한 시간으로 대신 말하고 있습니다.
노년의 삶을 주제로 한 영화가 세대를 초월하는 사랑을 받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노인은 모두 ‘선생(先生)님’입니다. 우리보다 먼저 살아온 분들이죠. 험난한 질곡의 역사를 거쳐 온 이 땅의 ‘선생님’들의 삶에는 우리가 갖지 못한 인생에 대한 혜안이 있습니다. 하루하루 팍팍하기만 한 이 시대에는 찾아보기 힘든 순수함과 맑은 정신을 발견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었던 까닭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중년 관객들이 보면 더 감동하게 될까요?
본처와 후처에 대한 영화이지만, 등장인물의 대부분이 시골에 홀로 사는 평범한 할머니들입니다. 그래서 특히 시골에서 나서 자란 대부분의 중년 관객들은 고향과 부모님에 대한 진한 향수와 추억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실, 불과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춘희, 막이 할머니들처럼 본처와 후처가 함께 사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죠. 가족이나 이웃에 이런 기억을 가진 분들이라면, 오히려 이 영화가 불편하지 않고 훨씬 더 감동적으로 다가갈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 분들도 부부가 함께 또는 자녀들과 함께한다면 두 할머니의 인생을 통해서 큰 선물을 받을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 한경수 프로듀서
아거스필름 대표, 한국독립PD협회 글로벌전략위원장
다큐멘터리 영화 , , 프로듀서
광복 70년을 맞아 우리의 근세사를 회고하면서 교훈을 찾으려는 시도들이 방송사 등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KBS는 7월 말 1894~1895년 청일전쟁에 관한 1시간짜리 다큐멘터리를 방영했다. 이 전쟁은 조선에서 중국과 일본이 패권을 다툰 전쟁이다. 아산만에서 시작된 전쟁이 황해해전으로, 일본군이 평양전투에서 승리한 후 만주, 요동반도, 그리고 중국본토로 들어가는 산해관(山海關)까지 확대됐다. 일본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시모노세키조약에서 조선의 독립이 보장됐다. 모두 잘 아는 사실이다.
전쟁이 시작됐을 때 서양 국가들은 대부분이 중국의 승리를 예견했다. 중국은 아편전쟁 후 50여 년간 서양 열강을 상대로 한 전쟁에서는 연전연패했지만 동양의 작은 나라 일본에는 이길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로 나타났다. 흔히들 명치유신으로 개화에 성공한 일본이 보수-반동정권이 지배한 중국에 이긴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중국의 패배를 설명하는 편린일 뿐이다.
당시 중국은 근대 이전 유럽의 상황과 유사했다. 유럽의 전제군주들은 엄청난 개인 비용으로 (사실은 국민 세금이지만) 양성한 ‘국왕 개인의 군대’가 전쟁으로 약화되면 국내정치에서 자신의 입지가 좁아진다고 보았다. 전쟁이 장기화돼 병력이 소진되면 승리한다 해도 국내의 반대세력들이 이 틈을 이용해 반기를 들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 단기전으로 끝났다. 상대방과 한번 부딪쳐 서로의 힘을 시험해 본 뒤 곧 협상으로 들어가 주고받기를 하면서 병력 손실은 최소화하려 했다. 전쟁이 정치·외교의 연장이었던 것이다.
청일전쟁 시기 중국은 이보다 더 심했다. 명목상으로는 모두 조정의 지휘 아래 있으나 워낙 땅덩이가 커서 통합된 단일 명령체계를 갖춘 ‘국군’이란 개념의 군대가 존재하지 않았다. 청 제국 군대의 모태인 8기군 외에 몽골, 회(무슬림), 한족 부대가 있었으며 이들은 다시 지역 단위로 나누어져 분리·통치됐다. 그러나 8기군은 나태해져 과거의 용맹성을 잃었고 태평천국의 난/운동(1851~1964)은 임진왜란 때 ‘의병’과 같은 집단들이 진압한다.
당시 중국의 대외관계를 총괄하던 인물은 이홍장(李鴻章)이었다. 그는 태평군을 평정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증국번(曾國藩)의 회군((淮軍-안휘성 일대에서 조직한 의용군) 출신이었다. 이홍장은 증국번의 후계자로 회군을 배경으로 수도 북경이 아닌 천진(天津)에 거주하면서 중국 북부의 해군과 군사업무를 담당하는 북양대신이라는 직함으로 중국의 외교, 군사, 경제의 실권을 장악했다. 한반도에 대해서는 ‘조선 문제에 관한 한 내가 조선왕’이라고 호언할 정도였다. 그러나 눈길을 국내정치로 돌려보면 북경의 만주조정과 이를 둘러싼 보수-반동 집단들의 끊임없는 견제는 물론, 다른 지역 군부의 질시와 경쟁에 싸여 있었다고 할 것이다. 정통 왕조에서 황제가 거주하는 ‘경성·수도’에서 떨어져 있는 관리의 지위는 항상 불안했다.
중국 해군은 겉보기에는 당당했다. 서양식으로 북양, 남양, 복건, 광동함대 등 4개 함대 편제를 갖추고 있었다. 이중 북중국(황해) 일대를 담당한 북양함대는 ‘극동’ 최강의 함대, 세계 8위의 함대이며 함선 78척, 총 배수량 8만3900톤으로 일본해군 전체를 능가하는 최강의 전력을 자랑했다. 북양함대 기함(旗艦) 정원(定遠)과 동급인 진원(?遠)은 독일에서 건조돼 배수량이 7670톤으로 일본의 기함 마쓰시마(松島, 4217톤 영국에서 건조)의 두 배에 가까운 덩치였다.
그러나 이홍장은 일본과 싸우기 싫었다. 20년 넘게 키운 북양함대와 육군이 여전히 문제점이 많았으며 전쟁에서 타격을 입으면 북경에는 그를 탄핵하는 상소로 넘칠 것이고 간신히 버텨오던 권력을 잃을지 모른다. 다른 함대의 지원도 기대할 수 없다. 전쟁에 전력투구해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한 눈은 국내정치에 둔 채 떠오르는 일본을 상대로 한 전쟁에서 승리하고 또 피해를 줄여 군사력을 최대한 보존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동서고금을 통해 전쟁의 승패가 무기와 병력의 수로 결정되던가? 총지휘관은 정치적 이유로 전쟁을 망설이고, 병사들은 훈련과 정신무장이 안 되어 있고, 부대 간 유기적인 상호지원을 기대할 수 없는 군대가 전쟁에서 이길 수 있겠는가? 북양함대 예산은 위에서는 서태후가 공공연히 빼돌려 별장 이화원(?和園)에 연못을 만들고 그 흙으로 산을 쌓는데, 전선들은 전력 유지를 위해 필요한 개조를 못하고 정비 불량으로 규정 속력을 내지 못하고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탄약의 비축도 불충분해 해전 중 부족에 시달렸다고 한다. 주포에 장전한 포탄이 부족할 뿐 아니라 구경이 다르며 오랫동안 내부 부식으로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다고 한다.
중국의 실화소설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이홍장은 정원과 진원을 점검하자 사용 가능한 주포 포탄이 세 발뿐이라는 소리를 듣는다.
‘그렇다면 합쳐 단지 여섯 발뿐이라는 말인가….’
‘아닙니다. 정원에 한 발, 진원에 두 발, 모두 합쳐서 세 발입니다.’
정원과 진원에는 주포가 각각 4문씩 있었다. 또 포의 구경 15인치에 쓸 수 없는, 예를 들어 10인치짜리 포탄이 준비됐다면 어떻게 포를 발사할 수 있겠는가. 육전의 승패를 가른 평양전투(1894) 직후 일어난 황해해전에서 중국은 10척의 군함 중 5척이 침몰, 3척이 파손되고 일본은 제해권을 장악한다. 다음 해 일본군이 위해위(威海?)를 공격하자 중국 해군은 정원의 배 밑에 구멍을 뚫어 침몰시켰다. 진원은 전리품으로 빼앗긴다. 이후 진원은 러일전쟁 때 고물 취급을 받지만 발트함대를 섬멸한 대한해협 전투에서 러시아 수송선을 공격하는 등 ‘적국’을 위해 봉사했다. 중국을 대표하며 위용을 과시하던 전함의 기이한 운명이었다고 하겠다.
이 전쟁은 중국과 일본의 전쟁이 아니라 이홍장과 일본의 전쟁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왜 청일전쟁의 역사를 읽으면 통영함 비리사건이 떠오를까?
△ 구대열 이화여대 명예교수
서울대 영문과 졸, 한국일보사 기자, 런던정경대 석ㆍ박사(외교사 전공). 외교안보연구원 교수, 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통일학연구원장 등 역임. 저서 등.
여자는 등 뒤에서 두 손을 나의 양 어깨에 얹었다. 뭉친 어깨를 풀어주는 안마 포즈. 어깨를 몇 번 주무르더니… 어럽쇼, 흐느끼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게 우는 소리인 줄 몰랐다. 어떤 여자가 안마를 하려다 말고 흐느끼겠는가. 그것도 처음 만난 여자가 등 뒤에서 말이다. 기분이 좀 ‘야시꾸리’해지는 사이에 흐느낌은 굵은 눈물방울이 되어 (뒤늦게 동석했던 사람에게서 들은 이야긴데) 그녀는 눈물범벅이 되었다고 한다. 나는 (언제나처럼) 이미 꽐라(술에 만취한 상태를 이르는 말) 상태였으므로 사태를 파악할 힘이 없었지만 기분은 한껏 ‘야시꾸리’해졌다.
글·사진 윤동혁 PD
인사동 골목 중에서도 가장 으슥한 곳에 자리 잡은 한정식 술집에서 그 여자는 우리 방에 들어왔다. 마담 언니의 친구라고 했다. 그녀의 안마로 지병을 고친 사람도 있다고 마담이 말했다. 혈관에 피를 잘 통하게 해주고 있노라면 안마 받고 있는 사람의 전 생애가 보인다고 했다.
지금도 길 가다가 빨간 깃발, 흰 깃발이 기다란 대나무에 매달려 있는 걸 보면 똥개나 참새처럼 조급해지는 내가 아닌가. 아니 나의 추억이 엑스레이에 비친 내장처럼 훤히 보인다는데, 그냥 고맙고 송구스러운 마음으로 그녀에게 어깨를 맡겼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매우 서럽게, 격렬하게 울었다는 이야기다.
“이런 불쌍한 인간이 다 있느냐. 어떻게 이런 슬픔의 덩어리들을 가슴 가득 품고 살아가느냐.” 그녀는 대충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불쌍하다고? 슬픔의 덩어리? 다른 사람의 엑스레이하고 바뀌었나. 혹시 슬픈 일들이 많았는데 워낙 인생의 깊이에 관해서는 멍청한지라 슬렁슬렁 흘리며 살아왔던 것일까.
나는 애써서 나의 지난날들 중에 정말 슬픈 요소들이 있었는지 치약 짜듯 과거를 저 밑에서부터 짜내기 시작했다. 음... 그러고 보니 그 여자가 울 만큼은 아니더라도 가슴 아린 일들이 줄줄이 엮이는 것이었다.
목포 유달산 기슭에서 나는 정자, 난자의 도킹에 성공했으나 엄마 뱃속에 들어 있는 상태로 주거지가 이동되었다. 절반은 목포에서, 나머지 절반은 제주에서 기다리다가 세상에 나왔다. 이른바 나의 사주에 낙인으로 찍혀 있는 ‘천고역마(天孤驛馬)’의 시작이다. 형을 형이라,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그 누구처럼 나는 제주도를 나의 고향이라고 말하지 못 한다. 다섯 살 때 제주도를 떠났다. 아무것도 모르고 (산 게 아니라) 살아졌지만 나의 몸에는 제주 4·3사건의 피비린내와 언제 징집될지 모르는 아버지의 불안, 그리고 고부(시어머니-며느리) 전쟁의 파편들이 무수히 박혀 버린 모양이다.
단지 다섯 해를 살고 태어난 곳을 떠났는데 당시에는 대양이나 다름없는 두 바다를 건넜다. 제주에서 부산까지 하루 종일 흔들리고 가서 하루인가 이틀 쉬고 또 배를 탔다. 포항까지 가서 바다가 잔잔하기를 기다려 세 번째 배를 타고 총 닷새 만에 도착한 곳이 울릉도.
그때도, 그 후로도 한참 동안 울릉도엔 ‘바퀴’가 없었다. 자동차는 물론이고 리어카나 자전거도 존재하지 않았다. 오징어는 많았다. 그러나 모두 팔 물건이어서 감시가 심했다. 집집마다 오징어를 쌓아둔 채 군대 천막 같은 것으로 덮어놓고 육지에서 값이 오르기를 기다렸다. 학교 앞 구멍가게에는 커다란 유리병 속에 ‘눈깔사탕’이 가득 들어 있었지만 우리들이 먹을 수 있는 간식은 오직 오징어, 그중에서도 다리밖에 없었다. 스무 마리를 한 축으로 정확히 묶어놓았기 때문에 간이 배 밖으로 나오지 않는 한 한 마리를 통째로 훔친다는 것은 거의 자살행위였다.
다리를 한 개씩 뽑아 먹었는데 영민한 부모들은 산만큼 쌓아놓은 오징어 다발들 속에서 단 한 개의 다리가 사라진 오징어를 귀신처럼 찾아냈다. 그 아이는 그날 죽는 날이었다. “육지에 나가서 제값 못 받는다”고, “이 오징어 잘 팔려야 느이 형 포항으로 학교 보낼 수 있다”고 욕을 바가지로 먹거나 매를 맞거나 했다.
그런데 오징어 다리는 우리 몸에 흔적을 남겼다. 그러면 부모들은 오징어 다발을 낱낱이 조사하지 않고도 ‘흠, 이 녀석이 또 훔쳐 먹었구나’ 하고 금방 알아차렸다. 바로 부스럼인데 오징어만 먹으면 팔뚝에 둥근 원이 몇 개씩 그려지는 부스럼병을 우리 모두 갖고 있었다. 울릉도에 살면서 오징어를 다리 말고 몸통까지 먹는 게 우리들의 꿈이었다.
우산국민학교에 들어가 2학년에 올라갔을 때, 무선전신국에서 근무하던 아버지는 강릉으로 발령 받았다. 두 번째로 포항 땅을 밟았는데 이때부터 컬처 쇼크(문화충격)가 생기기 시작했다. 수많은 ‘바퀴’들을 만났고 바퀴 수만큼 나는 어지러웠다. 게다가 합승이라고 쓴 차를 ‘합승’이라고 읽어야 할지 ‘승합’이라고 읽어야 할지 난감했다. 그러나 ‘바퀴’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강릉국민학교 2학년 몇 반에 전입한 나는 첫날부터 스스로 맴을 돌아야 하는 바퀴가 되어야 했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들이 그때 이미 있었다. 전쟁고아들이 반마다 몇 명씩 있었고 그들은 나로 인하여 색다른 기쁨을 얻었다.
“야, 너 일어나서 책 읽어!”
쉬는 시간에 그들은 나에게 책을 읽으라고 했다. 잘 아시다시피 제주도에서나 울릉도에서나 일어나서 책을 읽을 때는 표준어를 사용한다. 그런데 표준어로 읽으면 나를 괴롭혔다. 머리를 쥐어박고 발로 정강이를 걷어찼다.
“울릉도 말로 읽으란 말이다. 갱상도 말로.”
나는 맞는 것이 무섭고 싫었지만 그 보다는 억울했다. 그러나 억울함은 가슴 깊은 곳으로 쑤셔 넣고서 이 불합리하고도 불편한 상황을 어떻게 타개하면 좋을까 궁리했다.
당시 강릉은 전 지역에서 사람들이 공을 찬다고 할 만큼 축구 붐이었다. 어린아이들도 골목에서 공을 찼고 학생들은 학교에서 쉬는 시간, 점심시간 할 것 없이 열정적으로 축구를 했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들도 점심을 굶어가면서 (고아원에서 도시락을 안 싸주니까) 공놀이를 했는데 밥도 굶는 녀석들이 변변한 축구공을 가졌을 리 만무했다.
아버지 주머니에서 돈을 꽤 훔쳤다. ‘정식’ 축구공을 사서 영웅들에게 주었다. 그날 그리고 며칠간은 내가 감히 센터포워드를 맡아서 영웅들과 함께 그라운드를 누볐다. 단 며칠에 불과했지만 나는 이런 행복을 위해서라면 또 돈을 훔쳐야겠다고 생각했다.
고부 전쟁은 이제 파편이 튀는 단계를 지나 집이 불타는 수준에 이르렀다. 할머니와 어머니 사이에 낀 아버지는 어느 편도 들지 않고서 매일 술을 마시고 통금 사이렌과 함께 집에 들어오셨다. 그러던 와중에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여자(나는 그 여자가 우리 엄마보다 더 좋았다)까지 나타나자 어머니는 짐을 싸서 친정 식구들이 많이 사는 전라남도 송정리로 이사해 버렸고, 그 짐 보따리 속에는 나도 끼어 있었다.
바다가 보이지 않는 첫 번째 땅 송정리. 그곳에서 나는 토끼를 키웠다. 열심히 전라도 말을 익혀서 금방 네이티브 발음이 되었기 때문에 매를 맞거나 하지는 않았다. 토끼는 새끼를 자주, 많이 나아서 금방 시장에 내다팔았다. 그 돈으로 필통이며 연필을 샀다. 여름엔 토끼풀을 뜯다가 괜스레 지나가는 뱀을 낫으로 찍어 죽이고, 보리가 한창 영글 땐 보리밭 속을 파고들어가 보리피리도 불었다. 가장 좋았던, 평화로웠던 그 세월은 단 1년 만에 끝나고 인천 송도로 이사 갔다. 아버지가 그리로 발령받았기 때문이었는데 어머니는 아버지가 ‘바보천치’여서 ‘와이로(뇌물)’를 먹이면 될 것을 이리저리 떠다니며 돈을 모으기는커녕 생고생을 시킨다고 눈에 날을 세웠다.
1962년께 송도는 그냥 황무지 갯벌뿐이었다. 국민교육헌장인가 뭔가를 열심히 외우며 갯벌에 나가 조개를 주웠다. 뒷동산엔 야생 부추(그땐 전부 야생이었지 뭐)가 풀처럼 자라고 있어서 부추조갯국을 끓여먹을 수 있었다. 우리 마을엔 낡은 권투 장갑이 두 짝 있었고 어른들이 심심하면 우리들을 풀밭 링에 올려서 ‘싸움질’을 시켰는데 그때 눈에서 불이 번쩍 튀는 경험을 많이 했다.
6학년은 인천 시내 학교(인천에서는 변두리)로 옮겨 공부를 좀 하다가 일류 중학교라고 하는 데에 들어갔고, 그때부터 학교와 학교를 떠돌아다니는 긴 여정은 끝이 났다. 같은 운동장을 사용하는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6년이나 다녔으니 인천이 내 고향이 되고 말았다. 그 중학교를 졸업하고 역시 명문이라고 하는 고등학교에 합격했다. 나는 외갓집에 가서 놀고 오겠다고 말하고 호남선 완행열차를 탔다. 느린 뱀처럼 밤새 꿈틀꿈틀 기어간 기차가 송정리역에다 나를 내려놓았다. 역에서 외삼촌 집까지 걸어갈 때 여명이 서서히 걷히기 시작했다.
사단은 이때 났다. 어른들에게 인사하고 앉아 있는데 둘째 외사촌 누나가 감은 머리를 수건으로 닦아내며 방으로 들어섰다. 나는 화살을 이마에 맞았다. 그 화살은 나를 사랑의 지옥으로 떨어뜨렸다. 이제껏 방황하던 나의 영혼이 전심전력하여 한 여인(?)을 사랑하게 만들었으니 슬프도다, 어찌하여 외사촌 누나를… 누가 듣기만 해도 해괴하고 망측스러운 일이 아닌가.
그냥 마셨다. 막걸리, 소주 안 가리고 마셨다. “이런 미친놈이 있나.” 엄마가 도마 위에 내 손을 올려놓고 식칼로 내리치려 할 때도 얼른 손을 빼서 달아났고 또 마셨다. 예비고사 1기생인 나는 시험 보기 1주일 전에 ‘생누룩’ 막걸리 석 되를 마시고 한겨울 논바닥에서 잤다. 그리고 (오로지 막걸리 원 없이 마시려는 욕망 하나로) 고려대에 들어가서 마시고 또 마셨다.
‘마셔도 사내답게 막걸리만 마신다’라고 막걸리 찬가를 불렀지만 나는 마셔도 빚을 내서 마셨고, 전날 실수로 얼굴이 화끈거리면 그 창피를 덮기 위해 또 마셨다.
대충 여기까지 추억의 치약을 짜고 나니까 또 술발이 당기는구나. 그런데 그 여자는 나의 이런 생의 이력을 보고서도 눈물이 솟구쳤다는 말인가. 나는 단 한 번도 이념을 위해서 또는 노동자, 빈민을 위해서 나의 시간을 내거나 술잔을 든 적이 없다. 그냥 소소한 개인사, 남자들의 자잘한 일상사에 온몸 바쳐 술을 마셨을 뿐이다.
그러니 나의 어깨를 만지며 등 뒤에서 흐느꼈던 여인이여. 그대가 맥을 잘못 짚었던 게 틀림없소. 아니면 내가 꽐라 상태에서 헛것을 보았거나.
△ 윤동혁(尹東赫) PD
다큐멘터리 프로듀서로 한국일보 MBC, SBS 등을 거쳐 강원도와 경기도 땅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집도 절도 없으므로) 프리랜서PD로 일하고 있다. 로 방송대상 최우수 작품상을 받는 등 한국방송대상을 3회 수상했다. 라는 책을 펴내는 등 집필 활동도 활발하게 하고 있다. ‘경로우대증’을 받는 내년 1월을 계기로 ‘나홀로 방송국’을 열 계획이다.
20대 아들과 50대 아버지가 나란히 앉는다. 어느 사이 두 사람의 눈에 눈물이 흐른다. 영화 중간에 40대 딸에게 “저 때는 다 그랬어”라는 말을 하던 70대 어머니가 조용히 흐느끼자 딸도 덩달아 눈물을 쏟는다. 깔깔대며 손잡고 극장 안에 들어왔던 20대 젊은 연인들이 눈물 훔치는 데 여념이 없다. 부부와 연인, 자식과 부모, 10대와 80대가 동시에 눈물을 흘리는 진풍경이 펼쳐진다. 이 모습이 연출된 곳은 바로 요즘 관객과 만나고 있는 영화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와 ‘국제시장’상영관이다.
‘님아…’가 400만 관객을 돌파하며 한국 다큐멘터리 영화 부문 흥행 1위에 올라서고 ‘국제시장’이 화제와 논란 속에서도 600만(1월 19일 현재 누적 관객수 1120만 명)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 고공비행을 하던 지난 1월 2일 서울 용산 CGV를 찾아 둘러본 극장 안 모습이다. ‘님아…’와 ‘국제시장’관객 모습은 다른 한국 영화와 큰 차이가 있다. 대다수 한국 영화 관객은 20~30대 젊은 관객이 주류를 이룬다. 하지만 두 영화의 관객은 10대부터 80대까지 관객층의 스펙트럼이 매우 넓다. 그리고 부부, 자녀와 부모 등 가족 관객들이 유난히 많다.
KBS‘인간극장’에 소개됐던 강원 횡성의 강계열(89) 할머니와 76년간 사랑하며 살다가 숨진 조병만 할아버지 부부의 이야기를 담은 ‘님아…’와 1950년 6·25전쟁 때 흥남에서 부산으로 내려와 어머니와 동생, 그리고 자식들의 생계를 책임지며 서독 광부, 월남전 기술자로 일하는 등 가족을 위한 헌신과 희생을 한 아버지의 삶을 다룬 ‘국제시장’은 10대부터 80대 관객까지 공감대를 형성하며 관심을 증폭시키고 있다.
‘님아…’와 ‘국제시장’, 이 두 영화는 어떻게 해서 다양한 관객의 눈물샘을 자극한 것일까. 무엇이 청소년부터 장노년층 관객에 이르기까지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일까.
스크린 안과 너무 다른 2015년 대한민국 현실이 세대를 가로지르는 공감을 유발한 원인이라는 게 전문가의 분석이다. 부부, 연인 간의 진정한 사랑과 가족을 위한 희생 등이 상실돼가고 있는 현실의 반작용으로 솟구치는 진정한 부부 사랑과 가족애에 대한 갈망이 연령대와 상관없이 영화에 몰입하게 하고 공감을 하게 한다는 것이다. 일회용 인스턴트 남녀사랑이 일상화되고 사랑은 물적 토대를 바탕으로 한 외형적 조건 앞에 무기력해진다. 외모, 재산, 학벌, 직업, 연봉 등 스펙으로 대변되는 조건들이 남녀 간의 만남에 우선시된다.
‘결혼’의 저자 남정욱의 지적처럼 이제 결혼 당사자들이 자신을 상품으로 내걸고 가격을 매기면서 서로 상대방의 상품과 품질 및 가격과 비교 흥정을 벌이며 재화나 지위를 목적으로 한 정략혼을 하는 것이 외면할 수 없는 오늘의 현실이다.
그뿐만 아니다. 나보다는 가족이 우선이고 내 삶보다 가족의 생활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인생을 담보 잡혔던 이 땅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모습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
또한, 하고 싶은 것, 되고 싶은 것도 많았지만, 평생 단 한 번도 자신을 위해 살아본 적 없으면서도 ‘괜찮다’웃어 보이며 오직 가족을 위해 굳세게 살아온 형, 누이의 모습 역시 점점 자취를 감추고 있다. 대신 유산문제 때문에 형제가 남남이 되고 돈 때문에 부모가 자식을, 자식이 부모를 버리는 냉혹한 현실이 우리 눈앞에 펼쳐지고 있다. 이러한 차가운 현실 속에서 만난 ‘님아…’속 노부부의 조건 없는 진실한 사랑이, ‘국제시장’의 가족을 위한 조건 없는 아버지의 희생이 세대를 불문하고 수많은 관객의 눈물샘을 자극하고 세대를 아우르는 공감을 일으키는 것이다.
“촬영하면서 느낀 점은 할머니에 대한 할아버지의 사랑과 할아버지에 대한 할머니의 사랑은 조건도 없고, 목적도 없는 사랑 그 자체였다. 관객들이 특히 10대~20대 젊은 관객들이 영화를 보면서 영원한 사랑에 대한 힘을 새삼스럽게 느낀 것 같다. 일종의 롤 모델로서 ‘나도 저렇게 사랑해야지’라는 희망을 발견한 것 같다”는 ‘님아…’의 진모영 감독의 말 역시 세대를 가로지르는 공감의 원천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또한, 존재에 대한 가치보다 소유에 올인하는 왜곡된 세태에 대해 성찰을 하게 한 것도 공감의 원천이다.
빠르게 진행된 자본주의와 근대화를 근간으로 한 압축 성장은 우리 사회에 많은 문제를 낳았다. 그중에서 가장 큰 문제는 존재를 아름답고 올바르게 만드는 의미나 인간을 튼실하고 값지게 만들어주는 휴머니즘, 사랑, 가족애 등 소중한 가치가 팽배해가는 물신주의 앞에 실종된 것이다.
‘님아…’와 ‘국제시장’은 물신주의 앞에 실종된 소중한 가치들의 힘을 보여주고 있다. 영화를 보면서 물신주의 홍수 속에 자라난 젊은 세대는 가족을 위한 희생이나 무한한 사랑의 가치를 절감하게 됐고 부모세대는 “나 역시 영화의 주인공처럼 정말 어렵고 힘들 때도 가족을 지켰지”라며 지나온 인생을 되돌아보며 부부애와 가족애에 대한 의미의 되새김질을 한다. 이러한 감정들이 세대를 뛰어넘은 이해와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부모님께 효도 열심히 해야겠다. 감사한 마음이 든다”는 ‘국제시장’주연 김윤진의 말과 “아버지가 대학교 2학년 때 돌아가셨는데 이 영화를 만들게 된 계기가 그때부터 시작됐다. 돌아가셨을 때 고맙다는 말을 못했다. 영화로나마 고맙고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는 윤제균 감독의 언급, 그리고 “나도 70 여 년간 조건 없이 서로를 아껴주며 사랑한 강계열 할머니와 조병만 할아버지 부부처럼 살고 싶다”는 진모영 감독의 소망을 두 영화를 보고 극장 문을 나서는 다양한 세대의 관객들 역시 약속이라도 한 듯 똑같이 말한다.
세대를 아우르는 공감의 문양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드라마 '황진이' 의상 제작과 KBS 다큐멘터리 ‘의궤, 8일간의 축제’에서 의상 재현 등으로.국내외에서 활발하게 한복을 연구해온 한복 명장 김혜순씨가 미국 필라델피아 미술 박물관에서 80여 점의 한복을 선보여 주목을 받았다.
한국문화재단(Kcul Foundation)은 지난 2일 "김혜순의 한복 패션쇼가 미국 필라델피아 미술관에서 지난 2일부터 오는 5월 26일까지 조선의 국보와 보물을 전시하는 `조선미술대전`의 오프닝 행사로 열린다"고 밝혔다.
이날 행사에는 필라델피아를 비롯한 미국 동부지역에서 약 500여명의 인사들이 참여해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이날 패션쇼는 필라델피아 미술관 관장인 티모시 러브(Timothy F. Rub)를 비롯해 미술관 여성위원회 위원, 우현수 큐레이터 등 15명의 유명인사를 비롯해 미국 뉴욕, 뉴저지, 필라델피아에서 선발된 펜실베이니어대 와튼스쿨 학생, 더 락스쿨(The Rock School)발레단원 등 65명의 아마추어 모델 등 모두 80명이 직접 한복을 입고 나서 주목을 끌었다.
한국에서 입양한 딸이 모델로 참가한 영국 투자회사 대표이면서 예술협회 대표인 잉그리디 울버맨은 "다양한 나라의 수많은 예술품과 공연 등을 봐 왔지만 동방의 작은 나라 한국의 왕실과 옷이 이렇게 아름다운 문화를 갖고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고, 보는 순간 내내 온몸에 전율을 느꼈다"며 "딸에게 단 한번도 한국 문화를 알려줄 기회가 없었는데 딸이 이 쇼에 모델로 참여 한 것에 대해 매우 놀랐으며 영광으로 생각하고, 김혜순 디자이너에게 꼭 의상을 구입하여 딸에게 주고 싶다"고 밝혔다.
패션쇼는 1부 조선의 왕의 향연, 2부 사계, 3부 샐리라는 주제로 펼쳐졌으며, 국립극장 무용단 조현주 단원의 화려한 전통 춤을 시작으로 많은 관객들의 시선을 압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