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쁠수록 시간이 빨리 간다고 한다. 바쁘답시고 1분 1초를 다투다 보면 몇 시간, 며칠이 어느새 지나가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질문 하나. 바쁜 것 말고 우리의 시간을 빠르게 가도록 만드는 것이 하나 더 있다. 무엇일까? 재미가 아닐까? 재미있을 때도 바쁠 때 못지않게 시간이 후딱 가기 때문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좋은 게 네 가지 있답니다. 첫째는 오래되어 잘 마른 장작이고요, 두 번째는 마시기 좋은 오래된 와인이지요. 세 번째는 서로 믿고 따르는 오래된 친구, 마지막 네 번째는 내가 읽기 좋은 책을 쓰는 나이 든 작가랍니다.”
16세기의 철학자 프란시스 베이컨이 한 말이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가까이에 친구가 많아야 한다. 배우자와 가족 등 친구뿐 아니라 추운 날 나를 따뜻하게 덥혀줄 장작, 함께 나눌 술 한 병, 혼자서 심심할 때 들춰볼 책도 가까이에 있어야 할 친구들이다.
두 번째 질문. 장작과 와인, 친구, 책 등으로부터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냥 남는 시간을 때우는 게 아니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시간을 보내는 재미가 아닐까? 불타는 장작에다 고구마와 밤을 구우면서 가족이나 친구와 술잔을 나누는 장면은 생각만 해도 정겨운 그림이다. 지난 이야기를 해도, 다가올 이야기를 해도 다들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아니, 조금 전에 했던 말을 또 해도 처음 듣는 양 들어줄 것이다. 했던 말을 또 할 정도가 되면 어느새 와인은 새로운 병일 터이고 장작 또한 새로운 장작일 터이다.
이제 세 번째 질문. 영국의 한 신문이 영국 끝에서 런던까지 가장 빨리 가는 방법을 현상공모한 적이 있다. 이 사람 저 사람이 어디어디까지 비행기를 타고, 기차를 타고, 차를 타고 가면 된다고 응모했다. 그런데 1등으로 뽑힌 답은 ‘좋은 친구와 함께 간다’였다. 좋은 친구와 함께 재미있게 이야기하면서 가다 보면 금세 도착할 것이므로 긴 여행도 짧게 여겨지기 때문이다.
영국계 글로벌 은행 HSBC가 전 세계 17개국 30~60세의 1만7000여 명을 대상으로 은퇴와 관련한 설문조사(2011년)를 실시했다. “은퇴라는 단어로부터 무엇을 떠올리느냐?”고 물었더니 대다수 선진국에서는 ‘자유, 만족, 행복’이라는 긍정적인 대답이 나왔다. 반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경제적 어려움’이 가장 많은 대답을 차지했고 이어서 나온 것이 ‘두려움, 외로움, 지루함’이었다.
왜 우리나라 사람들은 은퇴하면 경제적 어려움을 먼저 떠올릴까? 은퇴 후 노후의 삶에 대한 준비가 부족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은퇴 후가 두려울 뿐 아니라 외롭고 지루할 것 같은 부정적 생각만 드는 것이다. 경제적으로 어렵고 그래서 두렵고 외롭고 지루한 삶이 과연 재미있을까? 반대로 자유, 만족, 행복이 떠올려지는 삶이라면 그 삶은 설레고 기다려지지 않을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일에 쫓기고 있지만 일을 벗어나 자유롭고 만족스럽고 행복한 시간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면 지금 하는 일까지도 재미있지 않을까?
근엄하기만 할 것 같은 공자님도 재미없는 인생을 멀리했다. <논어(論語)>에 ‘지지자불여호지자 호지자불여낙지자(知之者不如好之者 好之者不如樂之者)’라는 말이 나온다. 아는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만 못하다는 것이다. 아는 것과 좋아하는 것을 넘어 즐기는 재미가 있어야 그 인생이 행복하다는 것이다.
“자식들이 죽어 슬픔으로 얼룩진 영화이지만 지루하지 않고 ‘재미있게’ 만들어 주십시오.” 김학순 감독이 영화 <연평해전>을 만들면서 유가족들로부터 받은 당부는 딱 이 한 가지였다고 한다. 유가족들은 어떠한 픽션도 상관없다면서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게 하는 것이 연평해전을 알리고 아들들의 명예를 높이는 일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사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다큐멘터리를 넘어 관객들이 보고 즐길 수 있는 영화다운 영화, 재미있는 영화를 만들어달라는 부탁이었다. 참으로 대단한 유가족들이다.
공짜 영화라도 재미가 없으면 보고 싶지 않은 게 인지상정 아닌가? 작품성 시비와 정치적 논란 속에서도 흥행에 성공한 것은 재미와 감동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자칫 밋밋하기 쉬운 전쟁영화지만 여기저기 숨어 있는 재미들이 감동을 더해준다는 입소문이 관객들을 극장으로 이끈 것이다.
재미있는 영화의 특징은 나도 모르게 빨려들어 시간 가는 줄 모른다는 것이다. 보다 보면 어느새 엔딩 타이틀이 올라오는 것이다. 재미에 더해 감동적인 영화라면 다 끝날 때까지도 자리를 뜨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반면 재미없는 영화는 처음부터 지루하기 짝이 없어서 엉덩이가 아프기 시작할 뿐 아니라 시계가 야광이 아닌 것에 짜증이 날 정도일 것이다. 특히 영화가 끝날 때까지 자다가 좌우에서 웅성거려서야 깰 정도라면 돈과 시간이 아까운 것을 넘어 그 허무함이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것이다.
재미없는 인생은 재미없는 영화 이상으로 지루하기만 할 것이다. 무엇이 그리 바쁘답시고 재미있는 영화 한 편 못 보는 인생을 재미있는 인생이라고 할 수 있을까? 노자, 장자와 함께 대표적인 도가(道家) 사상가로 알려진 열자(列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십 년 만에 죽어도 죽음이요, 백 년 만에 죽어도 역시 죽음이다. 어진 이와 성인도 역시 죽고 흉악한 자와 어리석은 자도 역시 죽는다. 썩은 뼈는 한가지인데 누가 그 다른 점을 알겠는가? 그러니 현재의 삶을 즐겨야지 어찌 죽은 뒤를 걱정할 겨를이 있겠는가?” 무려 2400년 전에 한 말이지만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도 딱 들어맞는 말이다.
90세, 100세까지 살아야 하는 인생을 재미있는 인생으로 만드는 것은 누구인가? 재미있는 인생도 재미있는 영화처럼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은퇴 후 또는 다음으로 미루지 말고 지금 바로 즐거움을 찾는 재미, 재미를 찾는 재미를 찾아나서야 한다. 바쁜 중에도 한가함을 찾는다는 ‘망중한(忙中閑)’을 넘어 바쁜 중에도 재미를 찾는 ‘망중락(忙中樂)’이 필요하다. 내 인생, 내 영화의 감독은 바로 나 자신이다.
<글> 최성환 한화생명 은퇴연구소장·고려대 국제대학원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