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노래방에 가서 “가을이니까, 가을 노래를 하나 부르겠다”라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다. 가을이니까 가을 노래를 하면 분위기 상 어울릴 것 같은데 노래방이 워낙 확산되다보니 계절을 가리지 않는다. 한 여름에 이루의 ‘흰 눈’을 부른다고 해서 이상하게 보지 않는 것이다. 계절을 따지지 않고 그냥 여러 노래 중 하나라고 보는 것이다. 방송에서는 선곡을 계절에 맞춰 하는 편이다.
10월이면 꼭 듣게 되는 노래가 있다. 이용의 잊혀진 계절인데 노래 제목을 ‘10월의 마지막 밤’이라고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가사 첫 줄에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시월의 마지막 밤을”로 되어 있어서 사람들이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노래방에서 제목을 ‘10월의 마지막 밤‘으로 찾으면 못 찾을 수밖에 없다. 어쨌든 이 노래는 슬로 고고 풍으로 10월 마지막 주 쯤 잘 어울리는 노래이다. 달맞이꽃이 마지막 꽃을 피울 무렵이다. 밤에 야외에 나가면 기승을 부리던 모기도 어느 덧 사라지고 덥지도 춥지도 않으면서 달빛이 좋은 계절이다. 이 노래는 박건호 작사, 이범희 작곡인데 원래 조영남 씨에게 건네졌다가 이용씨에게 넘어갔다고 한다. 이용씨를 매년 10월이면 이 노래로 각종 행사에 초청되게 하는 노래이다. 원래 가사는 10월이 아니라 9월이었다는 설도 있다. 조영남씨도 노래를 잘 부르지만, 이용씨가 불러 다른 분위기를 만들었다. 오리지널 키는 C 키인데 이용씨 조차도 나이 들면서 고음이 힘들어 보인다. 일반인 남자들은 A 키 정도면 무난하다. ‘어머나’가 주현미씨에게 먼저 건네진 노래였는데 장윤정 씨에게 넘어가 장윤정씨를 트로트의 여왕으로 만들었듯이 노래와 가수의 운명이란 묘하다.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도 10월이면 많이 들리는 노래이다. 바리톤 김동규씨 노래로 유명하다. 가사 맨 끝에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가 들어 있다. 이 곡은 원래 노르웨이 음악 그룹 ‘시크릿 가든’의 앨범에 수록된 곡으로 원곡은 ‘봄의 세레나데’라는 것이다. 김동규씨가 워낙 저음으로 불러 오리지널 Ab 키 그대로 따라 불러도 무난하다. 외국 곡이고 왈츠 곡이라 약간 생소한 박자에 주의해야 한다. 김동규씨의 바리톤이 워낙 강하게 박혀 있어 어지간한 소리통이 아니면 김동규씨 맛이 안 나는 게 흠이다.
‘가을 타는 여자’도 좋은 노래이다. 박현진 작곡, 온누리 작사, 이영희 노래이다. 봄은 여자의 계절이고 가을은 남자의 계절로 알고 있는데 요즘은 남자 여자를 가리지 않는 모양이다. 빨간 단풍잎, 노란 은행잎을 보며 누구나 옛 추억을 떠올리게 되는 모양이다. 성별에 따라 남자가 부르면 ‘가을타는 남자’로 개사해서 부르기도 한다. 이 노래를 부른 이영희씨는 여자이므로 노래방 음정 세팅이 Bb 여자 키로 되어 있다. 남자가 부를 때는 남자 음정으로 필히 바꿔 놓고 불러야 한다. 남자들은 F 키가 대부분 맞는다.
노래방에 어떤 사람들과 같이 가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워낙 트로트가 대세이다. 노래가 대부분 비슷하고 박자도 맞추기 쉽기 때문이다. 귀에 익숙하며 분위기를 돋우는데 그만이다. 그래서 ‘잊혀진 계절’,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 ‘가을 타는 여자’ 등 발라드풍의 노래들은 조심해서 불러야 한다. 분위기를 가라앉게 한다는 비난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시작 때쯤이면 주목을 받아 좋고, 트로트 노래를 계속하다 보니 지쳐 있을 때 마지막 시간 쯤 부르는 것이 요령이다.
찬 서리가 내리고 산과 들이 붉게 노랗게 익어가는 가을이다. 누구라도 덥석 손을 붙잡고 싶다. 덕수궁부터 경복궁·경회루·창덕궁을 거쳐 창경궁에 이르는 고궁에서 가을을 만나려고 두툼한 점퍼를 입고 집을 나섰다. 하루에 다 걷기 어려운 일정이다. 자세한 공부는 다른 방법으로 하고, 오늘은 다가오는 가을에 묻히려고 한다.
시청역에서 내렸다. 덕수궁 정문 대한문이 바로 앞이다. 덕수궁은 원래의 명칭은 경운궁이지만 1907년 고종이 순종에게 양위한 뒤 이곳에 살면서 명칭을 덕수궁으로 바꾸었다. 서양식 건물이 들어서 있어서 고유한 궁궐의 양식과는 다른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지금의 덕수궁은 원래의 3분의1 규모로 축소되었다. 서대문 별관시청사에 올랐다. 울긋불긋 파스텔화로 물들어가는 덕수궁이 한 눈에 들어왔다. 덕수궁 돌담장 밖 정동에는 이국적인 역사물이 가득하다.
경복궁은 광화문으로 들어선다. 이 궁은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다섯 개의 궁궐 중 첫 번째로 만들어진 곳으로, 조선 왕조의 법궁이다. 1395년에 완성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불이 나 무너졌는데 조선 말 흥선대원군의 지휘 아래 새로 지어졌다. 경복궁의 중심인 근정전은 2층 월대 위에 장엄하게 서 있는 건물로 임금의 권위를 상징하는 건물이자 공식 행사나 조회 등에 사용하였다. 근정전 뒤로는 임금의 사무실이라 할 수 있는 사정전과 침실인 강녕전, 왕비가 거처하였던 교태전이 이어진다.
경회루는 태종이 개성에서 한양으로 재천도 후, 경복궁 서쪽의 땅이 습한 것을 염려하여 못을 파고 건설하였다. 태종 때 본격적으로 조성되어 조선시대 사신의 접대와 궁중 연회가 베풀어졌던 공간이었다. 경복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간이면서도, 단종의 전위와 연산군대의 흥청망청 고사가 유래한 곳이기도 하다. 경회루의 아름다운 경치들을 감상하면서 이곳을 거쳐 갔던 역사적 인물들의 모습을 떠올려 보는 묘미도 있다.
창경궁 정문은 돈화문이다. 조선 사람들은 경복궁만 중국식을 따르고 두 번째 궁인 창덕궁부터는 조선식대로 지었다. 창덕궁은 한국적인 가치가 인정되어 한국의 궁궐 가운데 유일하게 1997년에 세계유산이 되었다. 이 궁은 경복궁 다음에 위치하는 궁이기 때문에 이궁 혹은 별궁이라고 불렀다. 경복궁은 정도전을 위시한 신하들이 설계했다면, 창덕궁은 왕의 의도에 따라 설계되었다.
경복궁과 다르게 창덕궁은 왕이 쉴 수 있는 정원 영역을 많이 만들었다. 임진왜란 때 다 탄 뒤 선조가 다시 지어 1610년부터 창덕궁은 정궁이 되었다. 창덕궁은 경복궁의 주산인 백악산 자락에 있는 매봉을 주산으로 건설되었다. 창덕궁의 자랑은 후원이다. 이곳은 아무나 들어갈 수 없다는 의미에서 금원 혹은 비원 등으로 불렸다.
창경궁은 1484년에 완공되었으나 창건 당시의 전각은 임진왜란 때 모두 소실되고, 대체로 임진왜란 후에 재건하였다. 강제로 한일합병조약이 이루어진 이후인 1911년에는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격하시켰다. 1983년 원래의 명칭인 창경궁으로 환원하였다. 동물원과 식물원 시설 및 일본식 건물을 철거하고 문정전 등을 복원하였으며, 벚꽃나무도 소나무·느티나무·단풍나무 등으로 교체하고 한국 전통의 원림을 조성하는 등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창경궁 정문 홍화문으로 나왔다.
필자는 스트레스가 별로 없는 편이다. 스트레스가 생길 것 같으면 의도적으로 미리 피하기 때문이다. 만나서 스트레스를 줄 사람은 아예 피한다. 그래서 비교적 편안한 마음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스트레스는 만병의 근원이라고 한다. 금방 알 수 있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받으면 소화도 안 되고 머리도 무겁다고 느낀다. 그러니 신진대사가 제대로 될 리 없다.
자다가도 꿈자리가 좀 뒤숭숭하면 바로 깬다. 그대로 비몽사몽간에 누워있다가는 잠이 깨고 그 다음날 하루 종일 가슴이 답답하고 불안해진다. 그러나 바로 깨서 꿈이라고 정의하고 잊어버리고자 하면 금방 잊게 된다.
필자는 여기저기 사회 활동이 많은 편이다. 그러다 보니 사람 만나는 스케줄이 겹칠 때가 많다. 그러나 이런 스케줄은 다음에 또 보면 되기 때문에 하나만 집중한다. 그전에는 스케줄이 겹치면 앞 스케줄 사람들에게는 양해를 구하고 먼저 일어나서 뒷 스케줄 후반부에 참석하는 부지런을 떨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방식은 몸에 무리가 온다. 앞 스케줄 사람도 먼저 간다고 섭섭해 하고 뒷 스케줄 사람들은 자기네들끼리 이미 분위기가 무르익어 분위기 적응이 어렵다. 그래서 요즘은 선약 위주로 스케줄 우선순위를 정한다. 이런 스트레스를 안 받기 위해서 사회 활동을 많이 줄였다.
그런데 사회 활동을 줄인 대신 문화 활동이 늘었다. 음악회, 오페라 등 공연 초대를 자주 받는다. 이런 공연은 한번 지나가면 다음에 언제 다시 보게 될지 모른다. 사람들과의 만남 스케줄과 다르다. 그런데, 선약이 사람 만나는 스케줄이었을 경우 공연 관람 기회를 포기해야 하는 것이다. 이럴 때 스트레스가 온다. 두고두고 공연 관람 기회를 놓친 것을 후회한다.
이럴 때 사람들과 만나는 선약을 깨고 공연을 가는 방법도 있다. 그러나 모처럼 만날 약속을 했는데 공연 관람 때문에 선약을 깬다고 하는 것도 말이 안 된다. 다른 핑계를 대더라도 거짓말을 하는 것이므로 찜찜한 것이다.
묘하게 스케줄은 한꺼번에 몰린다. 요즘 같으면 미국에 이민 갔던 친구들이 줄줄이 들어온다. 이맘 때 쯤이면 치과 치료도 받으러 오고 건강검진도 받으러 온다. 의료보험 혜택을 받아 미국에 비해 치료비나 검진비가 훨씬 싸기 때문이다.
가을철이라 음악회, 오페라 등 공연도 많다. 공식적으로 무료 공연도 많고 유료지만, 초대권을 보내주는 경우도 많다. 하나 같이 놓치기 아까운 것들이다. 여행 가자는 사람도 많다. 날씨 좋고 단풍까지 들어 행락 철이기 때문이다. 자기네들 스케줄 다 소화하고 나니 남는 스케줄은 주말에 몰리기 십상이다.
사회 활동을 줄이고 나니 아무 스케줄이 없는 날도 있다. 워낙 스케줄이 많을 때는 이런 날이 쉴 수 있어 좋았다. 밤늦게까지 영화도 보고 아침에 느긋하게 일어날 수 있어서였다. 그런데 아무 스케줄이 없는 날이 며칠 계속되면 그것도 스트레스가 된다. 그래서 우울증이 오는 모양이다. 너무 쉬어도 곤란하고 너무 바빠도 문제이니 어느 정도 리듬을 유지하는 것이 정신 건강에 좋을 것 같다.
열흘간의 황금 추석 연휴가 시작되는 10월입니다. 연휴와 함께 계절도 본격적인 가을로 접어들면서, 산과 들을 울긋불긋 물들이는 단풍을 찾아 강원도로, 설악산으로, 높은 산으로 너나없이 줄지어 떠나는 광경이 안 봐도 눈에 선합니다. 그 와중에 비할 데 없이 붉게 타오르는 가을을 만나려면 남도로 가야 한다고 길을 잡는 이들이 있습니다. 단풍보다 붉게 타오르는 진홍의 축제를 보려면 남으로, 남으로 가야 한다고 속삭이는 이들이 따로 있습니다. 꽃무릇을 만나려는 이들입니다. 고창 선운사 등 남도의 절집 마당에 펼쳐진 수천, 수만 평의 꽃무릇 군락이 선홍으로 붉게 물드는 그 장관을 놓칠 수 없다며, 강원도 단풍을 제쳐놓고 남도행을 고집합니다.
비늘줄기가 돌 틈에서 자라는 마늘을 닮았다고 해서 석산(石蒜)이란 국명을 얻은 꽃무릇은 상사화나 진노랑상사화, 붉노랑상사화, 위도상사화, 제주상사화, 백양꽃과 마찬가지로 화엽불상견(花葉不相見), 즉 잎과 꽃이 나는 시기가 달라 서로를 애타게 그린다는 국내 상사화속 7개 식물의 하나입니다. 다만 다른 상사화들이 대개 6월에서 8월 사이 노란색 또는 연분홍색의 꽃을 피우고 일찍 지는 데 반해, 꽃무릇은 9월 초순쯤 꽃대가 올라오기 시작해 중순부터 진홍색 꽃을 피우다가 추석 즈음에 절정을 이룹니다. 그리고 꽃이 시들면 그때부터 잎이 새로 돋기 시작해 겨울을 나고 이듬해 초여름이 되면 사그라듭니다.
털썩, 주저앉아버리고 만/이 무렵//
그래선 안 된다고/그러면 안 된다고//
안간힘으로 제 몸 활활 태워/세상,
끝내 살게 하는//
무릇, 꽃은 이래야 한다는/무릇,
시는 이래야 한다는//
―오인태 시인의 ‘꽃무릇’
석산보다 꽃무릇이란 우리말 별칭이 더 친숙한 꽃. 그 또한 본래는 야생화였겠지만, 지금 우리가 흔히 만나는 것은 선운사 등 유서 깊은 사찰에서 일부러 가꾼 조경용, 원예종입니다. 불교와 함께 중국에서 도입된 것으로 추정되는 꽃무릇이 남도 지역의 사찰에 널리 번진 것은 알뿌리에 방부제 효능이 있어 경전을 묶거나 단청이나 탱화를 그릴 때 즙을 내 풀에 섞어 바르면 좀이 슬지 않고 벌레가 먹지 않는다고 해서 예로부터 일부러 심어 활용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비늘줄기로 풀을 쑤면 경전을 단단하게 엮을 수 있다고 해서 사찰에서 상사화를 많이 심어온 것과 같은 이치로 보입니다.
Where is it?
고창 선운사와 함평 용천사, 영광 불갑사가 예로부터 대규모로 꽃이 피는 3대 꽃무릇 군락지로 유명하다.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 숲’으로 천연기념물 154호로 지정된 경남 함양의 상림공원도 길이 1.6km 물길을 따라 꽃무릇이 자연스러우면서도 운치 있게 피어 이름을 알렸다. 최근에는 서울 시내 사찰들도 경내에 꽃무릇을 대거 심고 있는데, 강남의 봉은사와 강북의 길상사가 볼 만하다. 충남 보령의 성주산 자연휴양림도 꽃무릇 수십만 송이가 진홍색 꽃을 피워 많은 이들이 찾는다.
소 쟁기로 갈아엎을 수도 없는 경사진 자투리 땅. 아부지의 호미 날이 구석구석 파헤쳐 엎었다. 허기를 채워줄 양식거리는 아니지만 들기름 뽑아낼 들깨 포기 모종을 심기 위해서였다.
줄 맞출 것도 없이 대충 사방 두 치 간격, 한 뼘 넘게 웃자란 들깨 모종을 길게 뉘어가며 흙 속에 묻었다. 대엿새쯤 지나 하얀 뿌리 자리 잡고 진녹색 초액 빨아올리면 시들해 늘어져 있던 이파리가 서서히 펴지면서 일어선다. 한 달이 지나면 밭이 거의 가려질 정도로 마디도 키워 올리고 잎도 제법 너풀너풀거린다.
한여름 장맛비 맞고 개구리 소리, 매미 소리 들으며 줄기 살찌우고 선선한 바람 내려오면 깻잎 점점 넓게 펴 햇살 담고 두서너 달 후면 깻송이 올려 세우고 새하얀 깨꽃이 피어난다. 그 사이 꿀벌들은 분주하게 깨꽃을 넘나든다. 깻잎을 스치면 비릿하면서도 고소한 향이 퍼진다.
엄니는 틈나는 대로 깻잎을 따서 가지런히 편 다음 실로 정갈하게 묶어 장아찌를 담그신다. 남은 깻잎들은 한여름 뙤약볕에 넓적하게 몸을 펼쳐 알뜰히 새벽이슬 쓸어 담고 가을 햇살 듬뿍 받아 노릇노릇 여물어 간다. 단풍 들 듯 노랗게 깻잎 색깔 물들면 낫으로 포기를 베어 깨알 쏟아질까 조심조심 고이고이 누인다.
일주일 후쯤 깻잎이 까맣게 마르면 도리깨와 부지깽이로 두들기고 털어 잿빛 토실토실한 알갱이를 알뜰히 모아 담는다. 바깥마당 우물가에서 깨끗하게 물에 헹구어 멍석에 펴 말린 알갱이를 깨끗한 자루에 담아 읍내 방앗간으로 간다. 큰 가마솥에 달달 볶은 뒤 무겁게 눌러 짜내는 들기름.
그렇도록!
아부지가 해오셨던 들깨 모종을 아직까지 대를 이어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매년 심어왔다. 아부지 돌아가신 후 34년 동안의 설움까지 안고 여물어온 깨알들. 그리움 때문일까 아부지의 호미 날을 기억하는 밭에서 키운 들깨는 늘 진한 맛이다. 자식들 위로하는 아부지의 향기처럼 입 안 구석구석 고소함으로 가득 채워준다. 분명 아부지의 너그럽고 푸근한 영혼이 담겨져 있는 향기다.
올해도 그렇게 아부지를 생각하며 들깨 모종을 한다.
골목길은 어쩐지 큰길보다는 뭔가 비밀스럽고 은밀한 느낌이 있다. 어린 시절 숨바꼭질이나
술래잡기하던 정다움도 느껴지고 꽃다운 젊은 날 좋아하는 사람과 거닐며 가슴 떨렸던 수줍
은 기억도 떠오른다.
어린 시절 필자는 10살까지 대전의 대흥동 주택가에서 살았다.
골목 안쪽에 우리 집이 있었는데 그 골목은 다른 곳보다 무척이나 좁았다.
어릴 땐 몰랐지만, 어른이 되어 그리움에 한 번 찾아가 보니 뚱뚱한 사람은 통과하기 좀 힘
들 정도로 좁은 길이었다.
그래도 그 골목은 좁아서인지 더욱 골목 안 우리 친구들의 천국과 같은 놀이터였다.
지금과는 달리 어릴 때의 필자는 매우 개구쟁이였던 모양이다.
노래도 잘했다는데 아이들의 동요가 아닌 당시 유행하던 강화도령이나 제목도 모르지만 ‘반
짝이는 불빛 아래 소곤소곤 소곤대던 그으 나알밤~’이란 가요를 구성지게 잘도 불러 재껴
서 동네 어른들은 필자만 보면 “노래 한 자락 해봐라.”고 하셨다.
그 골목에서 즐거웠던 일은 동네 아이들과 연극을 해보자고 작당했던 일이다.
무대는 좁은 골목 안 용호네 대문 위쪽과 반대편 전봇대에 줄을 매달고 담요를 걸쳐 만들었다.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큰 무대를 만든 것처럼 즐거웠고 춘향전을 한다며 담요를 들치고 나와
연기를 펼치며 깔깔대었다.
정말 그땐 어른들도 볼거리가 없었던지 철부지 동네 꼬마들이 하는 연극에 신문지나 가마니
를 깔고 앉아 귀엽다며 칭찬하고 웃어주셨다.
그렇게 골목길은 필자의 어린 시절 잊지못할 추억을 만들어 주기도 한 곳이다.
작년에 우리 동네 뒤쪽으로 산책로가 새로 조성되었다.
2km의 길이로 펼쳐진 산책길은 중간 한 부분 100여 미터 정도 골목길을 통하게 되어있다.
처음 그 골목을 지나며 필자는 깜짝 놀랐고 낯설지 않은 느낌에 내심 반갑기도 했다.
좁다란 골목이 어린 날 개구쟁이 모여 놀던 그 골목과 매우 닮았기 때문이었다.
약간은 후줄그레한 지저분한 회색 담벼락이 이어졌는데 어느 날 지나다 보니 담장 치장이
한창이었다.
아마 개인이 하는 건 아니고 지자체에서 골목단장사업을 하는 것 같다.
연말이 가까워져 오면 할당받은 예산을 없애기 위해 잘 깔려있는 멀쩡한 보도블록도 교체하
는 등 무리하게 예산 집행을 한다는 말을 들은 적 있다.
그러나 이렇게 골목을 깔끔하게 단장하는 데 쓰인다면 칭찬해 줘도 괜찮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산책 때문이든 그저 통과하는 것이든 골목을 지나는 사람들에게 산뜻하고 기분 좋은 느낌을 줄 수 있어서이다.
각 집마다 색상을 달리해서 칠하는 페인트의 색이 너무 고와 어느 집 담장이 더 예쁜지 감상해 보는 것도 즐거운 눈요깃거리가 되었다.
파스텔 톤으로 인디언핑크, 연하늘색, 연보라 연노랑 등 은은한 색의 담장이 뽐내듯 이어졌
고 골목 끝 부분의 좀 큰 담장에는 사계절을 표현한 벽화가 그려졌다.
이제는 골목을 지나며 우중충한 모습을 보지 않게 되어 기분이 좋다.
봄을 상징하는 꽃잎 담장도 있고 가을 단풍을 그려놓은 담장도 있다.
동심의 세계로 이끌 것만 같은 겨울 눈 내리는 공간에 다정히 서 있는 눈사람 한 쌍도 정겨
운 풍경이다.
누구의 발상으로 수십 년간 우중충했던 골목을 이렇게 예쁘게 바꾸게 되었을까?
골목 안 주민들도 좋겠지만 화사한 골목길을 지나는 나그네들도 산뜻한 기분일 것 같다.
오늘도 골목을 지나며 어떤 담장이 더 예쁜지 기분 좋은 감상을 했다.
사회에서 은퇴하고 재미있는 제2 인생설계를 위하여 많은 평생교육에 참여하였다. 한두 달 동안의 단기 교육동기들은 학창시절 동창과 전혀 다르게 20년 나이 차이가 나는 경우도 많다. 새 친구 사귀기도 전에 교육을 마치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교육 중 수업이 끝나면 막걸리 잔을 나누면서 지속가능한 모임이 되도록 노력한다.
몇 년 전, KDB 시니어브리지센터 제8기 사회공헌 아카데미 과정을 수료하면서 교육동기 친목모임 ‘두레월회’를 결성하였다. 매달 둘째 월요일에 정기적으로 모여서 친목을 도모한다. 봄과 가을에는 둘레길 도보여행ㆍ문화유적 탐방 등 야외활동을 주로하고, 여름과 겨울에는 영화감상ㆍ소양강좌ㆍ독서토론 등 실내모임을 한다.
지난 몇 년 동안 도보여행을 많이 하였다. 첫 행사는 젊은 시절 즐겨 걸었던 단풍이 곱게 물든 남산에서 시작하였다. 영화 속 주인공처럼 즐거웠던 그때가 그리워졌다. 둘레길을 돌아 장충동 족발골목에서 걷기를 마무리하였다. 막걸리잔 높이 들고 메아리를 남산으로 날렸다. 고양시 한북누리길, 사당역에서 양재역에 이르는 우면산 둘레길 새해맞이 도보여행을 하였고, 원당역에서 왕복 행주누리길 산책을 하였다.
회원 간의 교양강좌도 보람이 있었다. 사진전문가 조영대 회원의 강의와 SNS 전문가 오경순 회원의 지도로 스마트폰 동영상 촬영기법 강좌를 진행하였다. 동영상의 기능부터 촬영, 저장, 편집과 보내기까지 전반에 걸쳐 강의가 진행되었다. 전문지식과 체험을 갖춘 강사의 열강으로 동영상을 직접 만들어서 회원끼리 공유하는 실습까지 완료하였다.
문화해설이 곁들인 창덕궁, 덕수궁 고궁산책은 소양을 기르는데 큰 힘이 되었다. 한 바퀴 휙 돌아보는 구경이 아닌 살아있는 보물이었다. 추운 겨울에는 영화 ‘히말라야’를 감상을 하였다. 저명한 산악인의 실화를 배경으로 인간의 숭고한 도전을 그리고 있었다. 그동안 알려졌던 히말라야 이야기를 정리할 수 있었고, 산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사랑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올해는 양평 물소리길, 삼남길 걷기로 친목을 도모하고 체력을 증진하는 활동을 많이 하였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6월 둘째 월요일에 전철을 타고 양수역에 갔다. 나지막한 부용산은 걷기 좋은 호젓한 산길이다. 한강변 신원역으로 내려가면 서울로 가는 길이다. 복잡한 전철은 오후 4시가 넘으면 썰물 빠지듯 매우 여유가 있다.
친구모임은 재미가 있어야 활성화 된다. 수십 년 학교동창 모임도 주제가 있어야 한다. 막걸리 사발 돌리는 음식점 회동은 이미 사라지고 있다. 사회에서 늦게 만난 친구일수록 재미있게 사귀는 방법을 더 생각하여야 한다.
언제부턴가 경복궁에는 한복을 입은 내․외국인이 넘쳐난다. 한복을 입으면 입장료가 무료라는 이유도 있지만 경복궁 관람객 문화의 하나로 자리 잡은 듯하다. 특히 학생들의 비율이 높다는 것은 고무적이다. 물론 한복의 정통성이나 무국적성 디자인에 대한 시비는 다른 문제로 치자. 경복궁은 근대사에서 광화문이 차지하는 상징성과 맞물리면서 외국인 단체 관광객도 많다.
경복궁은 근정전, 경회루의 건축적인 스케일과 멋도 일품이지만 무엇보다도 향원정의 아름다움이 최고다. 향원정을 둘러싸고 있는 연못 주위로 단풍나무와 고목 느티나무, 소나무는 계절마다 향원정의 분위기를 환상적으로 바꾸어간다. 연못에 가득한 수련은 초록 융단을 깐 듯 곱다. 노랑어리연이 필 때면 그 작은 꽃이 향원정을 더 돋보이게 한다. 비단잉어가 무리지어 수련 아래로 지나가고 언뜻언뜻 수련이 비어 있는 연못 조각에 하늘과 향원정이 살짝 잠겨 있다. 단풍이 절정일 때도 좋지만 눈이 연못을 덮고 있을 때는 그 적막과 고요가 마음을 비워준다. 어느 계절이든 향원정 주위를 한 바퀴 돌다 보면 마음이 고요해진다.
필자는 향원정과 관련한 특별한 추억이 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이곳 향원정 주변에서 그림을 그렸다. 이젤을 세우고 수채화로 향원정을 그리고 있는 필자 주위로 사람들이 빙 둘러서 구경을 하곤 했다. 아버지의 반대로 미대에 진학하지 못해서 그런지 향원정에 오면 그 시절 자주 그림을 그리던 장소를 찾곤 한다. 세월은 거의 40년이 흘렀지만 아직도 그 자리에서 교복을 입은 채 그림을 그리고 있는 필자를 발견하곤 한다.
향원정이 요즘 공사를 하는 모양이다. 연못 주위로 둘러친 가설 담장에 난 작은 창을 들여다보니 연못에 수련이 가득하다. 갑자기 화가 난다. 향원정을 다 부수고 새로 짓는 것도 아니고 일부를 보수하는 공사인 모양인데 굳이 연못 전체를 칸막이로 둘러칠 이유가 뭔가. 더구나 가설 담장이 성인 키보다 높아 연못 주위를 돌며 안을 들여다볼 수가 없다. 가설 담장 재료인 판넬 모양도 그렇다. 고궁 분위기와는 전혀 맞지 않는 색상이 완전히 경관을 망치고 있다.
요즘은 공사를 해도 볼거리를 제공하면서 한다. 특히 리모델링이나 인테리어 공사는 그 자체가 하나의 볼거리다. 향원정도 보수공사하는 모습을 관람객들에게 공개하면 어떨까. 비밀공사도 아닌데 굳이 비공개로 할 이유가 없다. 주위에 연못이 있어 향원정 공사로 인해 관람객이 불편하거나 위험하지도 않다. 그런데도 볼썽사나운 자재로 막아놓은 이유를 모르겠다. 그렇다고 완전히 막은 것도 아니다. 중간중간 창문이 있어 들여다볼 수 있게 되어 있다. 가설 담장이 도대체 왜 필요한지 이해가 안 간다.
지금은 향원정 주위로 수련이 가득하다. 좀 더 있으면 노랑어리연이 고개를 내밀 것이다. 이 아름다운 향원정을 작은 창문으로 들여다보는 외국인들도 아쉬운 발걸음을 돌리고 있다. 이제 막고, 금지하고, 억제하는 과거의 유산들은 버려야 한다.
유채꽃은 제주도에서만 유명한 줄 알았더니 부안의 유채꽃밭도 아주 볼 만했다.
샛노란 유채꽃이 끝없이 펼쳐져 눈부신 풍경을 이루었다.
몇 년 전 제주도 유채꽃밭에서 사진을 찍으려 했더니 돈을 내야 한다는 팻말이 있어 기분이 안 좋았는데 이곳 부안 유채꽃밭은 포근하게 우리를 맞아주었다.
그 속에서 필자도 꽃이 된 양 마음껏 셔터를 눌러 멋진 유채꽃밭 사진을 얻었다.
유채꽃 만발한 부안 마실길인 수성당은 재미있는 전설이 깃든 곳이다.
수성당은 딸 여덟 명을 낳아 일곱 명 딸을 팔도에 한 명씩 나누어주고 막내딸만 데리고 살면서 서해바다를 다스렸다는 개양 할머니의 전설이 있어 매년 음력 정월 초사흘에 제사를 올리고 풍어와 무사고를 빌었다고 한다. 또 수성당 주변에서 선사시대 이래 바다에 제사를 지낸 유물이 발견돼 죽막동 제사 유적지임이 확인된 곳이라 한다.
유채꽃밭 속에서 손자, 손녀와 그네도 타고 사진도 찍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여행 첫날을 보내고 다음 날은 부안에서 유명한 누에박물관에 가보기로 했다.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장소라며 고른 방문지다.
온종일 피곤했을 텐데 아이들은 잠을 안 자고 뛰어다닌다.
억지로 끌어안고 누웠더니 필자가 먼저 꿈나라로 갔던 모양이다.
아침에 손녀가 가만히 귀에 대고 “할머니~” 하고 불러 잠이 깼다.
콘도였으면 아침 정도는 간단히 해먹었겠는데 호텔이라 아래층 식당으로 갔다.
넓고 깨끗한 한식 식당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누에 박물관으로 출발했다. 누에 형상을 한 귀여운 캐릭터가 아이들이 좋아할 만해서 손자 손녀는 신이 났다.
누에로 비단 실을 만들므로 실크로드와 부안의 선잠 농가에 관한 설명이 있었는데 실크로드(비단길) 라는 이름의 어원은 1877년 독일의 지리학자 ‘리히트 호팬’이 중국에서 중앙아시아, 인도로 이어지는 교역로에서 주요 교역품이 비단인 것에 착안 그의 저서 ‘차이나’에 ‘자이덴 슈트라쎄’ 라고 명명한 것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연구가 계속되면서 1910년 독일의 동양학자 ‘알버트 헤르만’이 교역로가 중국에서 시리아까지 간다고 주장했으며 오늘날에는 동서의 교역로를 비단길과 초원길, 바닷길, 3가지로 나눈다고 한다.
부안은 참뽕 프로젝트로 세계제일의 누에 메카를 꿈꾸며 입는 실크에서 먹는 기능성 실크로 녹색성장의 힘찬 도약을 하고 있다.
부안 참뽕 오디를 이용하여 뽕 아이스크림, 뽕 오디 과자, 오디 케이크, 뽕 술, 뽕 바지락죽 등 많은 음식을 만들고 있다.
‘잠령제’ 라는 행사도 있는데 해마다 봄누에 치기를 앞두고 순조로운 누에치기를 빌며 인간이 기능성 식품생산을 위해 큰누에를 급랭 건조하는 죄를 천지신명께 고하고 잠령들의 안녕과 양잠 농가의 풍년 농사를 기원하는 의식이라 한다.
누에에 속죄하는 사람의 마음이 선하게 느껴졌다.
체험관에서는 실제 누에를 만져 볼 수 있었다. 하얗고 보드라운 누에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보니 캐릭터처럼 귀여운 모습이다.
5살 손녀는 징그럽다고 싫다지만 두 살짜리 손자는 단풍잎 같은 손으로 누에를 살짝 만져보며 관심을 보였다.
이런 작은 누에에서 멋진 비단 실이 나온다는 게 정말 신비스럽다.
농약을 하지 않고 키운다는 참뽕나무 터널도 지나보고 참뽕 잎도 하나 따서 입에 넣어 보았다.
부안의 참뽕 프로젝트가 큰 성공을 해서 세계적으로 유명해지면 좋겠다는 바람을 해 보았다.
새벽 댓바람에 그곳에 닿으려면 밤새도록 달려야 한다. 자정 무렵 서울을 출발한 버스가 그곳에 도착해 우리를 어둠 속에 내려놓았을 때는 새벽 5시가 조금 넘었을 때였다. 버스에서 내려 세량지까지 걸어갈 때 코끝에 스치는 새벽 공기는 마치 박하 향기 같았다. 두런두런 이야기하며 산길을 걷다 보니 어둠이 서서히 풀렸다. 멀리 저수지가 보이자 일행은 “와~” 하며 탄성을 질렀다. 그 탄성은 산하의 아름다움에서 나온 감탄사가 아니었다. 멀리 보이는 저수지 언덕 위에 수백 명의 사진 애호가들이 이미 진을 치고 있었던 것이다. 가히 인파라고 해도 과장이 아닐 정도였다. 좋은 포인트를 선점하기 위해 그들은 텐트를 치고 밤을 새우거나 자동차 안에서 이슬 내리는 새벽을 맞았으리라.
사진 인구가 천만이 넘고 바빠진 카메라 시장 이야기가 필자의 귀에까지 들리고 이렇게 직접 눈으로도 확인된다. 필자도 이전엔 사진을 찍기 위해 먼 곳으로 달려가기도 했지만 지금은 가까운 곳으로 잠깐씩 나가는 정도다. 이번엔 우리 지역 사진가들과 함께 하는 출사여서 한동안 못 보았던 분들도 볼 겸 오랜만에 참여했다.
먼저 와 있는 사람들에 비하면 우린 늦게 도착한 사람들이었다. 삼각대 세울 자리조차 없어 이리저리 틈새를 찾아 잠깐씩 카메라를 들이밀고 셔터를 누른 뒤 얼른 빠져나오곤 했다. 어떤 사람은 이날 모인 인원이 천 명 가까이는 될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세량지의 모습은 수천 점의 사진에 담겼을 것이다. 실소가 나왔지만 어차피 필자도 그들 중 한 사람이었다.
필자는 그럼에도 사진의 대중화를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현대 사회의 기록물로 사진은 빠질 수 없는 장르다. 예술작품으로 남지 않아도 개개인들의 감성과 여가활용 측면에서 사진은 순기능이 많다.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는 건강도 좋아지고 감성도 자극된다. 또 이런 열정들이 차츰 프로페셔널한 개성을 만들고 사진 예술의 경지를 이루는 과정으로 이어질 것이다.
아무튼 수많은 군중 속에서 세량지의 새벽을 보았다는 것만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산벚꽃과 복사꽃이 물안개와 함께 이루어내는 반영이 신비로웠던 날이었다.
세량지(細良池)
전라남도 화순군 화순읍 세량리에 있는 저수지이다. 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하여 1969년 준공되었다. 봄이면 연분홍빛으로 피어나는 산벚꽃과 초록의 나무들이 수면 위에 그대로 투영되는데, 햇살이 비칠 무렵 피어오르는 물안개와 어우러져 이국적 풍광을 빚어낸다. 또 가을이면 단풍으로 물든 산과 어울려 경관이 아름답다. 이 때문에 사진 찍기를 즐기는 사람들의 출사지(出寫地)로 알려져 있다. - 네이버 지식 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