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는 오묘하다. 차의 맛과 향을 살리는 것은 찻잎과 물, 그릇, 그리고 사람이다. 최고의 맛을 찾아가는 여정이 즐거워 차를 마시게 된다. 특히 차는 담아내는 찻그릇이 있어야 하고, 찻그릇 또한 차가 담겨야 존재의 이유를 드러내게 된다. 찻그릇의 고마움을 아는 차인과 차의 맛을 보다 깊게 담아내고자 하는 도예가가 넉넉한 마음으로 만나 차를 나누게 됐다. 차를 마시는 도예가들 모임 ‘다유(茶裕)’다.
‘다유’는 경기도 여주시에서 활동하는 도예가 모임이다. 찻그릇을 빚는 이들의 모임은 선향다례원 구자완 원장의 권유로 시작해 10년 넘게 차와 함께하고 있다. 현재는 유만 이청욱, 유담 문찬석, 유장 최민록, 아얼 이성현 작가가 다유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들을 만나기 위해 찾아간 곳은 최민록 작가의 도자기 작업장 겸 전시장인 민토. 흙이 켜켜이 쌓인 작업장을 통과해 밖으로 난 철 계단을 올라가니 다양한 찻그릇이 진열돼 있는 전시장이 모습을 보였다. 차인답게 전시장 안은 차를 마실 수 있는 공간으로도 활용하고 있었다.
문찬석 구자완 원장님을 만나 뵙기 4~5년 전부터 여주의 ‘도자기를 사랑하는 모임’ 도예가 20명 정도가 이미 모여서 차를 마셨습니다. 도자기 관련 연구를 하는 모임이었는데 차에 대해서도 많은 얘기를 해보자고 해서 시작했죠. 구 원장님은 2005년 여주도자기축제 행사장에서 만났습니다. 그 인연이 모임 다유로 이어진 것이죠. 2007년 9월부터 정식으로 차를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구자완 원장은 차생활을 오래하다 보니 찻그릇이 필요했고 차를 좀 아는 사람들이 찻그릇을 만들어보면 어떨까 생각하고 있었다. 이후 다유 회원들은 구 원장으로부터 우리나라 차를 기본으로 중국 차, 일본 차 등 각 나라 차의 역사를 배워나갔다. 행다(行茶) 실습도 꾸준히 했다. 제다(製茶)하는 곳에도 찾아갔다. 녹차잎을 하나하나 직접 따고 무쇠솥에 덖어 1년 치 녹차도 만들고, 발효차인 황차를 만드는 과정도 체험했다. 여주 출신인 구 원장은 고향 도예 작가들에게 본인이 쌓아온 차에 대한 전문적 지식을 나누어주면 한층 더 높은 예술 세계에 다가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매주 서울과 여주를 오가며 차 공부를 이어갔다.
구자완 원장 다유를 통해 여주의 도자기를 알리고 싶어서 제안했습니다. 도예가들이 차를 알아야 찻그릇을 더 잘 만들 테니까요. 그리고 다유 회원들과 서울에서 만나 함께 전시회에 가서 감상도 하고요. 10여 년 함께 공부를 하면서 알게 모르게 차원이 높아진 것이 사실입니다.
다유의 도예가들은 구 원장에게서 다호(茶號)를 받았다. 차를 3년쯤 공부하면 선생으로부터 받게 된다고. 이들이 다호를 받던 해, 구 원장 산하 차회의 돌림자가 넉넉할 유(裕)자였기 때문에 유장(裕匠), 유만(裕滿), 유담(裕潭) 등의 호가 내려졌다. 차생활을 하는 사람으로 정식 인정을 받았다는 의미다.
이청욱 배우고 익혔으니 이제 차인이 된 것이죠. 저희는 차를 마시는 도예가입니다. 다유의 근원은 차를 통해 도자기를 보다 더 깊이 있게 알아가자는 의미에서 출발합니다. 술보다는 차를 마시면서 만나는 것이 훨씬 좋잖아요. 정식으로 배우면서 그 깊이를 알아가는 중입니다.
차 맛을 알기 전에는 찻그릇에 대한 차인들의 평가에 중심이 흐트러지기도 했다. 예술가로서 어떤 것이 옳고 그른 것인지 갈피를 잡기 위해 애쓰기를 반복했다. 차생활을 하면서 찻그릇을 빚고 대하는 마음이 많이 변했다.
최민록 차를 배우기 전에는 찻그릇을 주문하는 사람들의 의견에 좌우되는 일이 많았습니다. 도예가도 결국은 도자기를 만드는 제조자잖아요. 이용자의 요구에 귀 기울여야만 했습니다. 차를 배우게 된 이유는 찻그릇을 보러 오시는 분마다 선생이시더라고요. 지역마다, 사람마다 의견이 참 많이 달랐습니다. 차를 모르던 제 입장에서 기준을 정하는 게 어려우니 수긍하며 작업해왔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차나 그릇에 대해 의견을 나눌 수 있어서 좋습니다. 차 도구에도 유행이 있어요. 예를 들어 예전에는 크고 투박한 문경 쪽 다기가 유행했다면 요즘은 중국 차를 많이 마시게 되면서 다기도 작아지고 잔도 좀 더 얇아졌어요. 그런 변화들을 가늠하는 것도 쉽고요. 차 공부 이후 다양한 찻그릇을 만들고 있습니다.
다유 활동을 하면서 가장 의미 있는 행사는 ‘장작가마 문화제’다. 원래는 다유 회원들의 작품을 감상하는 ‘다유 브랜드 데이’ 행사로 5년여 이어오다 좀 더 전통적인 방법으로 도자기 굽는 모습을 재연해보자는 의미로 확장했다. 여주 신륵사의 전통가마에서 구워낸 찻그릇을 꺼내고 감상하고 저렴하게 판매도 한다. 특히 이때 헌다례(獻茶禮,제례의 한 순서라는 의미 외에도 종교적 대상에게 예배의 한 행위로서 차를 올리는 것) 시연을 다유 회원들이 직접 한다는 점. 차 공부를 하는 인구 대부분이 여성이기 때문에 남성 차인이 시연하는 모습은 ‘장작가마 페스티벌’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올해 행사는 아프리카 돼지열병 파장으로 전면 취소됐다고.
이청욱 다유 회원의 기본은 차를 배운 사람으로서 차 도구를 만드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저희만큼 시간도 낼 수 있어야 해요. 차도 마셔야 하고 행다 연습도 해야 하기 때문이에요. 또 새로운 작품에 대한 의견도 나누고 다례 행사가 있으면 동작도 맞춰봐야 합니다. 이런 작업들 외에도 할애해야 할 시간이 많습니다. 가끔 저희가 행사에서 행다 혹은 헌다례 시연을 할 때도 있거든요. 차가 어려운 게 아니라 시간을 내는 것이 어렵습니다.
이성현 다유 회원으로 활동하고 싶어 하는 분들이 더 계시지만 전문적으로 차 도구를 빚는 분이 드뭅니다. 회원 기본 조건에 안 맞는 분들의 가입을 허락해드리지 못할 때는 저희도 많이 아쉽습니다. 다유 회원이 되기를 원한다면 차생활도 해야 합니다. 다유는 이런 기본적인 요건들이 충족 안 될 때는 신입회원으로 가입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여주가 도자기로 유명한 도시이기는 하나 찻그릇을 만드는 작가들보다 생활자기를 만드는 이가 훨씬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수요가 있어야 공급이 활발해지는데 여주는 문경이나 이천 같은 곳에 비해 차 마시는 인구가 적고, 전문 차인 단체가 미미한 수준이라고 다유 회원은 입을 모았다.
최민록 여주에는 차 마시는 사람이 많지 않은 것 같아요. 차 모임이 아주 드물죠. 그래도 차과 관련해서 명성왕후 탄신제와 여주문화원에서 차 봉사를 하고 있습니다. 지금 여주에서 차를 중심으로 모이는 사람들은 다유밖에 없다고 보시면 됩니다. 저변이 확대되는 것도 참 중요합니다. 아무리 좋은 행위를 해도 홍보도 안 되고 즐기는 사람이 없으면 이 일이 재미없어질 수도 있겠죠.
찻그릇을 제대로 만들기 위해 수년간 차를 배운 사람들의 모임인 다유 작가들과의 만남. 한참을 앉아 차를 마시는 도예가가 엄선한 차를 나눠 마셨다. 차를 이해하는 작가가 우리의 흙으로 빚고 장작 가마에서 구운 찻그릇이 상에 올라왔다. 그리고 이 찻그릇에 우려먹는 차 맛이란? 말로 표현이 가능하겠는가! 감동 그 자체다.
자격증에 관심을 두는 중장년이 늘어났다. 젊은이들이 취업을 위한 스펙 쌓기의 도구로 자격증을 취득하듯, 시니어 역시 재취업을 위한 발판으로 여기곤 한다. 그러나 노소를 떠나 무분별한 자격증 취득은 시간, 돈 낭비에 그치기도 한다. 2019년 등록된 자격증 수는 3만2000여 개. 관심 있는 자격증 정보를 선별하기도 쉽지 않다. 이에 고민인 중장년을 위해 자격증을 분야별로 나눠 알아보려 한다. 이번 호에는 ‘이번 호에는 ‘문화·예술’ 분야를 소개한다.
자료 제공 및 도움말 서울시어르신취업지원센터, 한국산업인력공단, 한국관광공사
은퇴 후 국내외 여행을 다니며 지역 대표 미술관, 박물관 등에 방문하는 등 문화생활을 즐기는 중장년이 많아졌다. 큐레이터나 도슨트, 문화해설사 등 문화·예술 계통의 직업군에도 관심이 모아지며, 관련 자격증이나 교육을 희망하는 이도 늘어나는 추세다.
PART1. 국가기술자격
문화·예술 분야 국가전문자격으로는 ‘박물관및미술관준학예사’(이하 준학예사)가 있다. 소위 ‘큐레이터’라 일컫는 ‘학예사’가 되기 위한 초입 관문 중 하나로 보면 된다. 학예사는 준학예사와 1·2·3급 정학예사로 나뉜다. 석·박사 학위(전공무관)가 없다면 준학예사 자격 취득과 경력인증을 통해 정학예사에 도전할 수 있다. 상위 급수로 올라갈 때마다 경력이 추가로 요구되는데, 누적경력이 아닌 하위 급수 취득 후 경력으로 인정되기 때문에 3급에서 1급까지 최소 12년의 경력이 필요하다. 준학예사의 경우 학력에 따라 준학예사 자격시험 합격 후 실무경력을 1년(학사 이상)에서 5년(학사, 전문학사 미취득자)까지 쌓아야 한다. 즉, 목표하는 급수에 따라 짧게는 몇 년, 길게는 수십 년을 투자해야 하는 셈이다.
정학예사부터는 경력인증(재직경력, 실습경력 등)을 통해 급수가 올라가기 때문에, 관련 시험은 준학예사 필기만 치르면 된다. 그야말로 한 우물을 파는 전문 분야라 응시자와 합격자 수가 타 자격증에 비해 많은 편은 아니다. 지난해 기준 50대 이상 필기 합격자는 15명으로 20대 이하 합격자(158명)의 10%에 못 미쳤다. 그러나 50대의 합격률은 44%로 전 연령대에서 가장 높았다. 물론 관련 전문가들이 응시했을 가능성도 적지 않다.
PART2. 국가기술자격
손재주가 좋은 이들이라면 기술을 익혀 개인 공방을 여는 꿈을 가져봤을 것이다. 몇몇 기관이나 아카데미 등에서 공예수업을 진행하기도 하지만, 자격증을 위한 프로그램은 찾아보기 어렵다. 공예기능사는 응시자격에 제한은 없고 실기시험 시 주어진 도면에 따라 6시간 정도 작업을 수행하면 된다. 지난해 공예기능사 실기 합격자 수는 목공예 59명, 석공예 2명, 도자기공예 283명으로 많지 않은 편이다. 목공예기능사의 경우 최근 3년간(2016~2018) 응시자 수는 2배 이상씩 증가했으나(46명→131명→274명) 평균합격률은 38%→73%→48%로 변화폭이 크게 나타났다.
PART3. 민간자격
준학예사나 공예기능사 등은 자격 취득 후에도 전문가로 활동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필요해 중장년에겐 다소 부담스럽게 느껴진다. 이 때문에 은퇴 후 문화·예술 분야 활동을 원하는 이들은 민간자격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고, 자격시험보다는 훈련이나 교육이수 등을 통해 수료증을 취득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활동할 수 있는 주요 직업으로는 문화관광해설사, 역사문화체험지도사, 전통놀이강사, 도슨트 등이 있다.
문화관광해설사의 경우, 광역지자체에서 연간 선발 계획 수립 및 선발 공고를 하는데 지자체별 선발 시기, 규모, 자격요건 등이 달라, 주기적으로 관련 정보를 살펴봐야 한다. 지자체에서 신규 교육생으로 먼저 선발된 후 한국관광공사 또는 지자체에서 선정한 위탁교육기관을 통해 신규양성과정(100시간) 수강 신청이 가능하다. 이후 지자체에서 정한 현장수습(105시간)을 이수해야 문화관광해설사로서 활동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받는다. 주로 지방자치단체나 지역 내 문화재시설 등에서 자원봉사자로 활동할 수 있다.
문화관광해설사는 2019년 8월 기준 전체 인원 대비 50대 이상의 비율이 약 90%에 달한다. 교사(역사, 과학, 미술 등) 출신이거나 영어, 일본어, 중국어 등 외국어 가능자가 활동에 유리한 편이다. 많은 돈을 벌기엔 적합하지 않고, 거의 자원봉사 형태로 문화재 탐구를 즐기면서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자 하는 이들이 도전하기에 좋다. 지속적으로 문화, 역사에 대한 공부를 해야 하며, 관광객들에게 자신의 지식과 정보를 흥미롭게 전달할 수 있는 능력과 청중 장악력 등이 요구된다.
그의 달항아리를 보고 있으면 묻혀 있던 기억들이 클로즈업된다. 빙렬을 따라온 과거의 시간들은 오늘의 사연과 물들며 포개진다. 누군가의 서사를 복원해내듯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며 끝없이 이어지는 선들은 우리 삶의 무늬를 빼어 닮았다. 최영욱(崔永旭·55) 작가가 미국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우연히 만난 달항아리도 그랬다. 부정형의 자태는 과묵하고 겸손했지만 할 말은 다 했다. 지쳐 있던 그에게 한마디 건네는 것 같았다. 위로받듯 주저앉아 한참을 바라봤다. 집에 돌아와서도 당당한 그 모습이 잊히지 않았다.
그는 마치 수행하듯 달항아리를 그린다. 빙렬(氷裂, 도자기를 가마 속에서 굽는 과정에 생기는 균열)을 미세한 선으로 표현할 때는 누가 불러도 듣지 못할 만큼 집중한다. 무아지경의 시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달항아리의 입체감을 살리기 위해 백색 돌가루와 젯소(gesso, 석고와 아교를 혼합한 회화 재료)를 섞어서 올린 후 사포로 살짝 문지르기를 100여 번 반복하며 정성을 들이는 과정은 도공의 예술혼 못지않다. 최 작가가 달항아리와 인연을 맺은 것은 2006년 무렵. 친구와 함께 운영하던 입시미술 학원을 접고 다시 붓을 잡았을 때다. 홍익대학교 미대 합격생의 20~30%가 그의 학원 출신일 만큼 명성이 높았지만 다시 캔버스 앞으로 돌아가자 결심하고 과감히 내린 결정이었다. 그러나 막상 그 시간이 오자 뭘 그려야 할지 막막했다.
“작가들은 소재에 대한 고민이 많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였지요. 저만의 표현 기법을 찾아내는 게 쉽지 않았어요. 게다가 전업 작가를 선언했는데도 입시상담 문의가 계속 들어오더라고요. 모른 척할 수도 없고 난감했습니다. 안 되겠다 싶어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떠났습니다. 3년 정도 지낼 계획을 세우고 캔버스를 150개 챙겨 갔습니다. 뭐를 그리든 다 채우고 돌아올 작정이었죠. 그런데 어느 날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들렀다가 한국관에서 우연히 달항아리를 보게 된 거예요. 품에 안기듯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신기했던 것은 한없이 수수해 보이고 심지어 제 신세처럼 처량해 보이기까지 했던 그 백자가 어느 순간 당당하게 보이는 거예요. 한참을 들여다봤습니다. 그날 집으로 돌아와 종이에 달항아리를 그려봤어요. 백자의 빙렬은 청자보다 많지 않지만 상상으로 표현해봤죠.”
달항아리는 조선시대 후기에 만들어진 백자대호(白磁大壺)의 또 다른 이름. 그 시대의 물레로는 한 번에 만들지 못했다. 윗부분과 아랫부분을 따로 만들어 붙여야 했기에 부정형(不定形)의 형태로 제작될 수밖에 없었는데, 어딘가 부족해 보이는 비대칭의 곡선이 오히려 감식가와 애호가들의 마음을 빼앗았다. 최 작가도 뉴욕 한복판에서 만난 달항아리의 매력에 푹 빠져버렸다. 특히 소박하면서도 당당한 기품이 자신이 추구하는 인생철학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때부터 마음속에 품은 달항아리의 이미지를 본격적으로 화폭에 담기 시작했다.
‘빌앤멀린다 게이츠 재단’이 구매
2010년,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빌 게이츠는 미국 마이애미에서 열린 ‘Scope Art Fair Miami’에서 최영욱 작가의 달항아리 작품을 세 점이나 사갔다. 최 작가가 달항아리를 그리기 시작한 지 몇 년 지나지 않아서였다.
“행사 때 제 그림은 아트페어 구석에 걸려 있었죠. 어느 날 ‘빌앤멀린다 게이츠’ 재단 홍보 담당 수석이 오더니 구매하고 싶다고 했어요. 순간 ‘빌 게이츠가 평소 백자에 관심이 있었나?’ 궁금했습니다. 다음 해에 재단에서 시애틀에 지은 건물 완공 기념식에 건축가와 작가들을 초대해 저희 가족도 한복을 입고 참여했죠. 아내가 보자기에 정성스럽게 싼 백자랑 놋수저를 빌 게이츠에게 선물했어요. 너무 좋아하더라고요. 나중에 들은 얘긴데, 그의 아버지가 40여 년 전 한국으로 여행 왔다가 경복궁 근처에서 달항아리를 사갔다는 거예요. 어렸을 때부터 우리나라 백자를 곁에 두고 지낸 거지요. 보는 게 정말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빌 게이츠는 집에서 봤던 달항아리의 이미지를 기억하고 있었던 겁니다.”
이후 그에게는 ‘빌 게이츠 작가’라는 별칭이 따라다녔다. 더불어 달항아리의 의미를 재해석하고 현대적 표현 기법을 부여한 작업들이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가 달항아리를 처음 그릴 때만 해도 “세계적인 소재도 많을 텐데 하필이면 달항아리냐, 참신하지 않다, 메시지도 좀 더 찾아봐라” 하며 염려하는 지인들이 있었다.
그의 생각은 달랐다.
“저는 아무 생각 없이 보고 있으면 그냥 좋은 작품을 그리고 싶었어요. 사회적 역할을 고심하며 메시지를 담는 작가는 이미 많습니다. 제 그림은 있는 듯 없는 듯 마치 벽지를 바라보듯 편안한, 문득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하나의 무늬 같은 작품이길 바랐어요. 길가의 나무처럼 점점 정이 드는 풍경이 있잖아요. 어느 날은 시들어버린 것들에 시선이 갈 때도 있고요. 그런 그림을 그리는 화가로 살면 좋겠습니다.”
‘빙렬’에 담긴 의미
그는 “달항아리의 꾸밈없이 단순한 모습과 색감은 우리 마음 밑바닥의 측은지심 같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의 시선은 인간의 비밀한 내면에 자주 머무르며, 삶의 들숨과 날숨에 귀 기울인다. 세상을 바라보는 이러한 자세는 그의 몸속 깊이 내재된 성향으로 보인다.
“저는 달항아리처럼 살고 싶어요. 속세의 잡다한 것들에 쉽게 흔들리지 않고 둥글둥글 이해하며 포용하는 삶. 사실은 그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달항아리를 소재로 선택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이 제 그림을 보며 자기 인생을 뒤돌아보고 다른 사람들의 삶도 따뜻하게 안아주면 좋겠어요. 그림도 훌륭한 소통의 매개체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예술에 대한 정신적 지향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2010년부터 최근까지 그는 ‘카르마’라는 제목의 전시회를 열어 달항아리 연작을 발표해왔다. 그에게 카르마란 어떤 의미일까.
“처음부터 ‘카르마’를 생각하며 작업을 하진 않았어요. 달항아리의 빙렬을 표현하려면 며칠 꼬박 앉아 그려야 합니다. 이상하게 저는 그 시간이 좋더라고요. 실선을 따라가다 보면 어린 시절도 떠오르고, 다퉜던 친구들도 그립고, 어느 날은 내가 왜 여기 앉아 도자기를 그리고 있나 하는 생각에까지 이릅니다. 마치 제 인생길을 되돌아보는 느낌이 든다고 할까요. 백자와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1995년 무렵이었을 거예요. 결혼기념일에 아내와 함께 인사동에 나갔다가 자그마한 게 예뻐서 하나 샀어요. 그러고는 세월이 흘렀죠. 그런데 어느 날 달항아리를 그리다가 문득 그날이 떠오르면서 ‘그때 왜 백자를 샀지?’ 하는 질문을 하게 되더라고요. 인사동을 자주 드나들던 젊은 시절에는 눈에 띄지도 않았는데 지금 저는 달항아리를 그리고 있잖아요. 이렇게 계산되지 않은 우연성, 그것들이 모여 인연으로 이어지는 것 아닐까요. 그때부터 카르마를 생각하게 됐습니다.”
들여다보면 우리네 삶도 어쩔 수 없이 균열투성이다. 최영욱 작가는 바로 그 지점에서 구상과 추상의 경계를 넘나들며 빙렬을 그려낸다. 그리고 카르마로 이어지는 무수한 균열들은 해독할 수 없었던 존재의 운명을 비로소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길이 된다.
삶을 위로하는 그림을 그리고 싶다
최영욱 작가의 작업을 오랫동안 지켜본 지인들은 그의 달항아리 그림이 갑자기 나온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초기 작품인 풍경화, 추상화를 그릴 때도 즐겨 쓴 색채는 흰색 회색이 주조를 이뤘다는 것. 보일 듯 보이지 않게 그리는 화풍도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했다.
“대학교 때 흰색에 빠졌던 적이 있어요. 흰색이 너무 좋아 노트에다가 ‘나는 하얀 테이블보가 좋다, 국화 중에서는 흰 국화가 좋다’고 끄적이기도 했지요. 아쉽게도 백자가 좋다는 말은 없었네요.(웃음) 지금 생각하니 달항아리 그림을 위해 하나하나의 우연들이 저도 모르게 연결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기교와 허식이 없는 백자만의 소박함 때문일까, 아니면 무채색으로 경계를 허물어버린 듯한 표현 기법 때문일까. 그의 달항아리에 대한 사람들의 감상은 좀 남다른 데가 있다.
“제 그림은 큰 메시지가 있는 것도 아니고 화려한 색채를 보여주는 작품도 아니어서 어떤 분들이 관심을 가질까 궁금했는데, 한참 들여다보고 있으면 시끄러웠던 마음이 차분해지면서 정화가 된다고 하네요. 제 작품 전시장에 오신 한 할머니는 달항아리 앞에서 눈물을 훔치시더래요. 왜 우시냐고 물어보니 ‘들여다보고 있는데 왜 그렇게 엄마 생각이 나는지…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네요’라고 말씀하셨다더군요. 그런 말을 들으면 감사한 마음이 먼저 듭니다. 달항아리가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고 화해의 시간을 마련해준다는 거잖아요. 어떤 분은 제 그림을 걸어놓고 차 마시고 명상하는 방을 꾸몄다더군요. 저도 작업실을 찾아오는 분들을 위해 그런 공간을 하나 만들어볼 생각입니다.(웃음)”
나이 들면서 그는 알게 됐다. 인생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불편한 결론이지만 그래서 자꾸 내려놓게 된다. 작업에 대한 강박도 버렸으니 이제 그의 달항아리가 어디로 튈지는 아무도 모른다.
검단농협 오왕지점에 머물러 있으면 은행을 찾는 손님들 외에 기분 좋은 웃음을 머금은 채 2층으로 올라가는 사람들을 목격할 수 있다. 그들의 발길을 따라가면 빼어날 수(秀)에 많을 다(多), 집 원(院) 자가 새겨진 한자 팻말이 눈에 띈다. 여긴 대체 뭐하는 곳이지? 궁금증을 안은 채 철문을 여니 햇살에 부서지듯 와르르 환한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어서 오세요, 수다원입니다.” 정체불명의 공간을 책임지는 나영자(66) 수다원 원장의 목소리가 낯선 이를 반긴다.
“이름을 짓는 데 신중했어요. 이 동네가 자연부락이 재개발되며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 곳이라 원래 거주하던 사람들과 새로 유입된 사람들 사이 괴리감이 있거든요. 원래 거주하던 분들을 ‘토백이’, 새로 유입된 분들을 ‘아파트 사람들’이라 구분지어 부를 정도로 거리감이 확연했는데, 전 그게 참 안타깝더라고요. 다 한동네 사람들인데 서로 즐겁게 지낼 수 없을까 고민하던 차에 수다원이란 공간을 마련하게 된 거죠. 함께 모여 수다떨면서 융합하고, 정보도 교환하고, 감정을 나누면서 살아가는 공간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 이런 이름을 지었어요.”
나영자 원장이 수다원을 만들게 된 계기는 담백하고도 의미가 깊다. 이웃에 살면서도 어떤 사람들이 사는지 알려고 하지 않는 각박한 현대사회에서 함께 살아가는 ‘동네’의 가치를 실현하고 싶었던 것. 그렇기에 수다원의 활동은 거창하진 않아도 따스하고 잔정이 깊다. 바쁘게 살다 보면 잊고 지나치기 일쑤인 생일을 챙겨주고, 봄가을이면 그 옛날처럼 설렘을 안은 채 근교로 소풍을 떠나고, 때로는 곱디고운 꽃도 그려보고 사군자도 친다. 영화감상이나 네일아트, 도자기와 승마체험 등 한 달에 한 번씩 열리는 특강은 문화시설이 부족한 이 동네에서 큰 호응을 받는 프로그램. 새해를 맞으면 동네별로 재료를 준비해 큰 양푼 두어 개에 넣고 쓱쓱 비빈 비빔밥을 먹는 특별한 시무식을 열고, 연말이면 재능기부한 봉사자들에게 작은 선물을 증정하는 송년회를 열기도 한다.
단절된 동네의 융화를 위한 사랑방
한마디로 동네 사람들이 함께 모여 행복하게 융화할 수 있는 일이라면 어떤 활동이든 제약이 없다. 재미난 건 나 원장이 ‘토백이’와 ‘아파트 사람들’ 중간에 위치한다는 것. 1980년대에 수다원 인근에 위치한 단봉초등학교에 재직한 적은 있지만 이 동네 아파트로 이사 온 것은 퇴직 직전이다. ‘토백이’ 중에는 재직 당시의 학부모들이 남아 있어 친근하고, 나 원장은 ‘아파트 사람들’에 속하기도 하니 중간자적 입장에서 이런 공간의 필요성을 가장 먼저 캐치할 수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가장 큰 목표는 남녀노소 다 같이 어울릴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드는 거예요. 가을부터는 지역 주민을 대상으로 꽃꽂이 강의를 열고, 젊은 엄마들의 기존 독서모임이 있는데 동화구연도 더할 생각이에요. 퇴직하신 어른들을 초빙해 초등학생들에게 천자문과 바둑, 장기 등을 가르칠 계획도 있고요. 중요한 건 실용성을 뛰어넘는 감정의 확산에 있어요. 시골 할머니들이 꽃꽂이 배운다고 플로리스트가 될 건 아니잖아요? 다만 꽃꽂이를 하고 그걸 집에서도 응용함으로써 평생 안 해본 경험을 하고, 그 경험과 감정을 가정에서도 공유한다는 게 중요한 거죠. 마찬가지로 아이들에게 천자문을 가르쳐 한자 몇 자 알게 하고, 바둑과 장기의 스킬을 늘려주는 게 아니라 그걸 매개체 삼아 인성 지도를 받게 해 사람 됨됨이가 되도록 하는 게 목적이에요.”
여성 회원이 많다 보니 남성들은 궁금해서 슬쩍 들렀다가도 쑥스러움에 발길을 돌리곤 한다. 수다원은 남성 회원 역시 두 팔 벌려 환영한다고.
수다원에 흔쾌히 공간을 빌려준 농협의 운영시간에 맞추다 보니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밖에 문을 열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초등학생들은 물론 더 많은 사람이 이곳을 이용할 수 있도록 다양한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이 나영자 원장의 계획이다.
도서관도, 문화센터도 없는 문화 불모지에서 누구에게나 열린 공간으로 다가가는 수다원은 2017년 5월 10일 개원 직후부터 빠르게 성장해왔다. 개원 당월에 봄소풍을 다녀온 이래 꾸준히 배우고 경험하는 프로그램이 많아졌고 최근에는 비영리단체로 등록까지 마쳤다. 그간 무료로 재능기부한 봉사자들이 단체 등록을 계기로 1365 자원봉사포털의 혜택을 받을 수 있게 되어 기쁘다는 나 원장의 표정에서 뿌듯함이 여실히 묻어난다.
함께하며 행복을 추구하는 삶
공간을 만들고, 그 공간 안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잇는 프로그램을 꾸준히 기획하는 능력은 사실 쉽지 않다. 수다원을 이끄는 나영자 원장의 리더십은 그녀가 평생 쌓아온 시간에서 기인한다.
나 원장은 초등학교 교사가 되어 2015년 교감으로 퇴직할 때까지 오랜 시간 봉사활동을 하며 보냈다. 남편과는 주말마다 양로원에 가고, 세 자녀 또한 고아원으로 봉사를 보낸다. 모범공무원 선정, 신일스승상 선정, 녹조근정훈장 수여 같은 명예로운 수상은 봉사의 삶을 살면서 따라온 부상들. 퇴직하고 난 뒤에도 자신의 역량을 활용해 남을 돕는 삶을 살아왔다.
“정년 10년 전부터 퇴직 이후의 삶을 준비했던 것 같아요. 제가 아동미술을 전공한 데다 미술교사 동아리 활동도 했고 개인 작업을 거쳐 전시회도 몇 차례 하며 국전에도 입선한 경험이 있어서 그림을 가르치며 봉사하지 않을까 생각했죠. 그러다 이 동네 특유의 분위기에 안타까움을 느껴서 이런 공간을 만들게 된 거고요. 여기서도 다양한 미술활동 프로그램을 펼치고 있으니 더 외연이 넓어진 셈이네요.”
사람과 사람을 잇는 공간을 만드는 과정은 자연스럽게 행복 추구로 귀결된다. 그래서 의도치 않게 수다원은 치유의 공간이 되기도 한다. 수다원 회원 중에는 수십일 동안 집 안에 칩거해 있을 만큼 감정적으로 고립됐던 사람도 있고, 아픈 손자 때문에 홀로 마음앓이를 했던 사람도 있다. 전문가의 치료로도 꽤 긴 시간을 필요로 할 만큼 우울 증상이 깊었는데 수다원이 큰 도움이 되었다고.
“사실 제가 상담사와 미술심리치료사 자격증도 있어요. 그런데 그분들에게 필요했던 사람은 자격증을 지닌 전문가보다는 눈을 맞추고 꾸준히 이야기를 들어주는 존재였다고 봐요. 요즘은 오전 9시 땡 하면 수다원 문을 열고 오실 만큼 열성적인 회원이 되셨죠. 그런데 그거 아세요? 사람들과의 교류 때문에 행복해지는 건 저도 마찬가지예요. 퇴직하고 나서도 아침에 눈 뜨면 바로 이곳으로 오거든요. 사람들과 함께하니 외로울 일도 없고 하루하루가 행복해요.”
사비를 털어 수다원을 개원할 당시 ‘과연 사람들이 모일까?’ 했던 기우는 점점 사라졌다. 사람들이 행복해질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필요한 지원금을 확보하려 동분서주할 때도 초반에는 수다원의 존재를 몰라 애를 먹었지만 이제는 인근에서 모두 아는 단단한 존재가 되었다. 수다원이 위치한 인천 오류왕길동은 물론 검암지구, 멀리 김포에서도 수다원을 찾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다.
“진작 이런 곳을 알았으면 여기로 이사 올걸” 하며 아쉬워하는 사람이 많다는데, 그만큼 사람들 간 교류가 이뤄지는 공간이 적다는 방증이리라.
“이 공간의 장점 중 하나는 동네 사람들끼리 정보 교환이 활발하게 이루어진다는 거예요. 경험하고 배우는 것도 좋지만 한동네 사람들이 애들 데리고 가볼 만한 곳은 어디인지, 어느 곳에서 질 좋고 저렴한 물건을 살 수 있는지 실용적인 정보교환이 이뤄지니 건설적이죠. 이런 공간이 없었다고 생각해보세요. 마을회관에서 고스톱 치며 시간을 보내거나 몇몇이 몰려다니며 쇼핑이나 가십에 열중하게 되지 않겠어요?”
은퇴를 준비하는 이들에게 고하는 말
나영자 원장의 말에 따르면, 교직생활을 마치고 은퇴자의 삶을 사는 이들도 다른 은퇴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유형으로 나뉜다. 여러 명이 모여 등산이나 나들이 갔다가 술 한잔 걸치고 집에 들어가는, 흔히 남성들에게서 보이는 삶. 손자손녀들을 맡아 돌보거나 자식들 살림을 도와주는 삶. 이것저것 배우러 다니는 삶 등등. 그녀는 친정엄마가 아이를 맡아준 적도 있고, 자신이 직접 육아를 해보기도 했지만 길러보니 자식은 부모가 키울 때 더 보람차고 행복했다며, 자식들을 위해서라도 손자손녀를 돌보는 은퇴 후의 삶은 마다했다. 퇴직 후 남을 돕고 사는 삶을 살기로 했지만 수다원을 만들기 이전에도 서구역사문화연구회를 꾸려 회장을 맡는 등 봉사에 임하는 모습이 수동적이지 않다. 아니, 마치 개척자의 용기를 보는 것 같다.
“은퇴 후의 삶을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건 ‘내 것을 먼저 내어준다’는 마음가짐이에요. 봉사를 한다 해도, 퇴직 후 나만을 위해 준비된 자리가 기다리고 있지는 않아요. 돈이든, 시간이든, 열정이든 내 것을 먼저 내어놓는 것에 익숙해져야 해요. 저도 수다원을 만들었지만 수익이 난다거나 경제적인 이득을 보는 건 없어요. 감자철이면 감자를 한두 박스씩 사다가 쪄서 나누는 등 오히려 퍼다 나르는 게 많지요.(웃음)”
4년 전 퇴직해 성실히 은퇴자의 삶을 살아가는 만큼 나영자 원장의 조언은 디테일하다. 과거의 영화를 잊어야 하는 건 물론 앞으로 소속되어 살아갈 커뮤니티에 맞춰 말투와 행동거지, 옷차림도 조절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가장 최악은 ‘내가 왕년에 이랬는데’ 하는 생각입니다. 학교에서 교장선생님이었다고 은퇴하고 나서도 교장선생님 대접받길 바라면 곤란하죠. 특히 전문직에 종사했던 분들이 은퇴 후 이사하거나 귀농귀촌한 동네에서 은연중 우월의식을 보이는 경우가 있어요. 거기다 초점을 맞춰, 편하게 말해도 될 이야기를 영어까지 섞어 말하면 고만고만한 동네에서 튀어 보일 수밖에 없죠. 손주들도 할머니가 자기들 수준에 맞춰 놀아줘야 좋아합니다. 은퇴 후에는 왕년의 허물을 벗어버리고 함께 살아갈 동지를 만들어야 해요. 누가 만들어주지 않는답니다.”
100세 시대인 만큼 예순여섯 살 나영자 원장은 아직 살아갈 날이 한참 남았다. 그녀가 꿈꾸는 성공한 삶, 더 많은 사람과 지혜와 사랑을 나누는 삶을 위해 내일도 나 원장은 더 많은 사람과 신명나게 수다를 떨고 웃을 예정이다. 나눌수록 행복하다는 믿음을 안고서.
그에게 정원은 놀이터다. 아침마다 커피 한 잔 들고 문을 나서면 그만의 소우주가 펼쳐진다. 오감이 천천히 깨어나면서 확장된 시간을 체험하는 시간이다. 마음속 풍경은 매일매일 꽃사태다. 이 놀이를 제대로 한번 즐겨보고 싶어 도시 탈출을 감행한 건 40대 중반 무렵. 김형극(金炯克·66) 씨는 마치 특별 초대장을 받아든 사람처럼 성큼성큼 자연 속으로 입장했다. 정원에 빠져 산 지 어느새 23년째. 그 사이 서른두 평 아파트와 맞바꾼 폐가는 ‘들꽃의 향기가 머무는 뜰’로 다시 태어났다.
소확행(小確幸)이 메가트렌드가 된 세상. 그러나 실행은 쉽지 않다. 시계추 같은 일상을 탓하며 시간을 어이없이 흘려버리거나 또 다른 욕망으로 허둥대다 기회를 놓쳐버리곤 한다. 저지르듯 행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김형극 씨는 잘 알고 있었다. 은퇴가 아직 먼 나이였지만 그의 결단은 신속했다. 다 쓰러져가기는 해도 감나무 다섯 그루가 우뚝 서 있는 안성의 한옥도 다행히 마음에 들었다.
“도시에서 살 때 주말마다 아내와 함께 산으로 강으로 떠났어요. 그러던 어느 날 ‘이렇게 지낼 바엔 아예 시골로 내려가 사는 건 어떨까?’ 하고 생각했어요. 당시 중학생이었던 딸아이는 학원을 네 군데나 다니느라 밤 12시가 다 돼서 집에 들어오더라고요. 공부는 해야 하지만 어린 딸에게 너무 가혹한 건 아닐까? 안쓰러웠어요. 자식들 출세를 위해 모두 서울로 가던 시절 저는 과감히 시골로 내려왔죠.”
40대 중반에 감행한 도시 탈출
가족과의 의견 충돌은 없었다. 어쩌면 무모해 보이기도 했을 제안이었지만 아내와 딸은 잘 따라줬다. 그러나 치러야 할 대가가 만만치 않았다. 텃밭은 오랫동안 가꾸지 않아 잡초가 무성했고 기와집은 비가 샐 정도로 엉망이었다. 마당은 여기저기서 갖다 버린 쓰레기들로 넘쳐났다. 더구나 서초구청 공무원이었던 그는 매일 왕복 200km나 되는 거리를 오가야 했다.
“도시를 떠나기로 결정했을 때 일산, 양평, 용인 등 안 가본 데가 없어요. 사람하고 집은 연분이 닿아야 한다잖아요. 여러 집을 봤는데 포도 산지인 안성이 고즈넉하고 마을 사람들 인심도 좋아 보였어요. 특히 이곳에서 본 한옥이 자꾸 눈에 밟히더군요. 100년도 더 된 집이었는데 폐가와 다름없었어요. 그 집을 산 뒤 뜯어 고치고 어른 키만 하게 자란 풀 뽑아내고 정리하느라 몇 년 동안 고생했습니다. 출퇴근도 난제였죠. 지금이야 도로가 뻥뻥 잘 뚫려 있지만 그 시절은 안성에서 서울 가려면 네댓 시간은 족히 걸렸어요. 눈 내리는 겨울에는 서울에 오피스텔을 얻어놓고 회사를 다녔어요. 빙판길 운전이 엄두가 안 났거든요. 혹여나 시골 좋다고 내려가더니 출근시간도 제대로 못 지킨다는 소리 들을까봐 도시에서 살 때보다 더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했어요. 그렇게 몸은 고됐어도 꽃 심고 나무 심을 때는 마냥 좋더라고요.(웃음)”
어떤 이에게는 돈으로 꾸며댄 정원을 감상하는 것처럼 따분하고 심드렁한 일이 없다. 뜬금없이 웅장함을 자랑한다거나 아무렇게나 불쑥불쑥 화려한 색을 들이미는 곳에서는 감흥이 작동하지 않는다. 정원은 주인을 닮는다고 했다.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한 정원을 지향한다는 김형극 씨는 2015년 경기농림진흥재단(현 경기농식품유통진흥원)에서 주관하는 ‘경기정원문화대상’ 동상을 수상했다. 당시 심사위원은 그의 정원에 대해 “소박하고 순수하다. 구석구석 주인의 손길이 안 간 데가 없다. 이 사람은 정말 식물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걸 느꼈다”고 평가했다. 화이불치는 아니어도 검이불루의 뜻은 펼친 셈이다.
“지인이 ‘경기정원문화대상’ 공모를 알려주면서 ‘당신 정원은 틀림없이 상 받을 거다’ 하더군요. 가벼운 마음으로 응모를 해봤죠. 그때 정원 이름을 ‘들꽃의 향기가 머무는 뜰’이라고 지었어요. 실제로 들꽃을 많이 심었거든요. 그런데 심사가 꽤 까다롭더라고요. 1차 심사는 일반인으로 구성된 심사위원이 했고, 2차는 전문가, 3차는 전문가와 일반인이 같이 와서 꼼꼼히 둘러봤어요. 주로 제가 좋아하는 꽃들을 심고 소박하게 가꿨는데 운 좋게 상까지 받았습니다.”
정원을 가꾸는 사람들이 좋다
이 공모전을 계기로 재단에서 지원하는 일본 정원 견학 기회도 얻어 수상자들과 함께 다녀왔다. 3박 4일 머무는 동안 공통 주제 하나로 친구가 된 일행은 한국에 돌아와서도 다시 만났다. 그리고 이번에는 자신들의 정원에서 한 발짝씩 걸어 나와 함께 멍석을 깔았다. 민간정원문화 활성화에 기여하기로 뜻을 모아 ‘정원문화대상수상자모임(정수모)’을 결성한 것. 그는 회장으로 추대됐다.
“기왕 이렇게 만났으니 우리 역할을 찾아보고 전국적으로 정원 문화를 전파하는 데 힘을 보태자는 제안을 하자 다들 좋다고 하더군요. 각자의 정원을 좀 더 많은 사람과 함께하는 ‘공유 정원’으로 확대하자는 의견도 나왔습니다. 최근 우리 모임이 다양한 활동을 하면서 사람들에게 꽤 알려진 모양입니다. 수상자들의 정원을 보고 싶다는 단체 견학 문의가 종종 옵니다. 혼자였다면 하지 못했을 일들이라고 생각해요. 함께한다는 게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지 또 한 번 느끼고 있습니다.”
현재 ‘정수모’ 회원은 14명. 두 달에 한 번씩 부부동반으로 만나 친목도 다지고 정원 관련 정보도 나눈다. 가을이 되면 각자의 정원에서 돌아가며 음악회도 여는데, 이 근사한 계획은 김 회장 머리에서 나왔다. 사실 그는 서초구청이 개장한 충남 태안 서초휴양소 소장으로 근무하면서 지역민들과의 교류를 위해 음악회 등 다양한 행사를 기획한 이력이 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늘 사람들을 모아 정을 나누는 자리를 마련하곤 했다. 그게 시너지를 만들고 주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정수모’ 음악회도 회원들을 기쁘게 해줄 방법을 고민하다가 아이디어를 얻었고 지금은 정기적인 행사로 이어지고 있다.
58세에 퇴직을 했으니 올해로 벌써 8년이 됐다. 하지만 지루할 틈이 없다. 사진 찍기, 도자기 빚기, 수석 수집, 통기타 연주 등 취미와 재주가 많아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르게 간다. 그래도 매일 그를 설레게 하는 건 역시 정원이다.
“저는 모과가 달려도 첫눈 올 때까지 절대로 따지 않아요. 노랗게 익은 모과 위에 흰 눈이 소복이 내려앉은 모습을 꼭 봐야 하거든요. 정원은 영원한 풍경이 없어 더 아름답다고 하잖아요. 정말 그래요. 계절마다 얼굴을 바꾸고 매년 새로운 모습을 보여줘요. 정원에서는 눈도 꽃으로 보여요. 봄에는 꽃들의 안부가 궁금해서 새싹들을 자주 들여다봅니다. 보슬비가 내리는 날에는 빗방울을 머금고 있는 꽃잎에 반할 수밖에 없고요. 혼자 보기 아까운 풍경들이에요.”
그의 정원에는 200여 종의 꽃과 나무들이 있다. 아침에 일어나 그들에게 물 주는 시간이 제일 행복하다는 그는 요즘 겨울 정원을 구상하느라 잔뜩 들떠 있다. 텃밭에 가식(假植)해놓은 몇몇 주인공들이 데뷔를 기다리고 있다며 함박웃음을 짓는다.
꽃과 나무들에게 배우는 것들
은퇴한 사람들에게 일과를 물어보면 아침에 일어나 김밥과 물 싸들고 산에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게 전부라는 사람이 많다. 딱히 갈 데가 없어 지하철을 타고 돌아다니며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그의 지인들도 크게 다를 바 없다. 퇴직을 같이한 한 친구는 평생 취미활동이라곤 해본 적이 없어 어쩌다 동창들 만나 약주 한잔씩 하는 게 전부라고 한다. 은퇴 후의 단조로운 일상에 대해 들려오는 얘기들을 듣다 보면 일찍 시골로 내려오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점점 더 든다.
“제가 지금도 도시에서 살고 있었다면 여전히 정원에 관한 로망에 젖어 있을 겁니다. 주말마다 자연을 찾아 떠났을 테고요. 안성에 내려온 지 얼마 안 됐을 때 ‘하루 종일 풀이나 뽑으면서 왜 그 고생을 하냐?’고 물었던 사람들도 이제는 은근히 저를 부러워합니다. 그런데 부러워하면서도 여전히 실행에 옮기지는 못해요. 다른 삶을 펼치기에는 너무 늦은 나이이기 때문이죠. 돈이 무서운 이도 있어요. 물론 자식들 뒷바라지 하느라 경제활동을 그만두지 못하는 경우도 있지요. 하지만 모을 줄만 알지 한번 손에 넣으면 도무지 꺼낼 줄 모르는 사람도 많아요. 결국에는 다 놓고 갈 것들입니다. 그동안 열심히 일했으니 이제 좀 쓰고 살아도 됩니다.”
그는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볼 때 노후 준비는 50대부터 준비하는 게 맞다고 조언한다. 중요한 건 반드시 자신이 좋아하는 취미활동이나 일을 먼저 찾는 것. 은퇴 후에 어떤 사람은 이런 삶을 살더라, 저런 삶이 멋져 보이더라 하면서 흉내를 내면 얼마 못 가 한계가 오고 그 삶을 즐길 수 없게 된다는 의미다.
“어느 날 친구 따라 밤낚시를 갔어요. 밤새 깜깜한 곳에서 낚싯바늘에 지렁이를 끼웠죠. 새벽에 보니 손톱 사이로 지렁이 살이 잔뜩 끼어 있고 말이 아니었어요. 그런데 친구는 그 손을 대충 닦고 밥을 먹더라고요. 낚시하는 동안은 수염도 못 깎고 행색이 엉망이 됩니다. 그래도 좋아서 하는 일이니 그게 다 극복이 되고 본인은 행복한 거 아닐까요?”
올해도 그의 정원에는 감이 주렁주렁 열릴 것이다. 그러면 또 감 따는 핑계를 대고 지인들이 와서 맛있는 음식을 함께 먹으며 대화를 나누고 축제 같은 열기 속에 흠뻑 빠졌다 갈 것이다.
그는 날마다 정원에서 배운다. 아름다움을 이해할 때 인간의 삶이 제대로 보이고 행복을 두드려 깨운다는 사실을.
조금 일찍 찾아온 여름 때문에 봄이 짧아졌다.
맑게 갠 파란 하늘 아래서는 아카시아 향기가 희미해져 가고 장미는 못 참겠다는 듯 붉은 아름다움을 터트린다. 연녹색 나뭇잎을 타고 구르는 물방울이 싱그럽다. 이토록 푸르른 날 자연을 담지 않는다면 내 카메라에 미안한 일이다. 가방을 메고 나섰다.
신록의 기운을 하나 가득 받기 위해 찾아간 곳은 강화도다. 강화도에는 아름다운 풍경과 이야기가 있는 걷기 여행길이 있다. 총 20개 코스가 강화도, 교동도, 석모도, 볼음도, 주문도의 5개 섬에 ‘강화 나들길’이라는 이름으로 조성돼있다. ‘강화 나들길’은 코스마다 해당 코스를 상징하는 이름이 있다. 그 중 ‘호국돈대길’이라는 이름의 제2코스를 걸었다. ‘돈대’란 성벽 위에 석재 또는 벽돌을 쌓아서 망루와 포루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높은 누를 말한다. 강화도가 근대사에서 가지고 있는 역사적 의미를 잘 반영한 이름이다.
길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김포와 마주 보는 해협을 따라 있다. 초지진에서 시작해 덕진진, 용두돈대, 광성보, 오두돈대, 화도돈대, 용당돈대, 용진진을 거쳐 갑곶돈대까지 가는 17km의 거리다.
김포에서 초지대교를 건너 강화도에 들어서자마자 오른편에 초지진이 있다. 초지진은 병인ㆍ신미양요, 운요호 사건 등 근대에 가장 줄기차게 싸운 격전지다. 해상으로 침투하는 적을 막기 위해 조선 효종 7년(1656년)에 구축한 요새다. 민족 시련의 역사적 현장이었던 이곳을 호국정신의 교육장이 되도록 성곽도 보수하고, 조선군이 쓰던 대포도 전시해 놓았다.
‘강화 나들길 2코스’라고 쓰여 있는 이정표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걸었다. 자전거 여행자들도 안전하게 여행할 수 있도록 전용 도로가 길옆으로 잘 만들어져있다.
걷다가 바라본 파란 하늘 아래 길가에 은행나무 연두색 잎이 너무나 싱그러웠다. 왜 이즈음을 계절의 여왕이라고 하는지 알 것 같았다. 논에서는 모내기를 끝낸 후 뿌리가 자리를 잘 잡으라고 물을 대주고 있다. 갓 심은 모의 푸르름도 이즈음에 맞는 연녹색의 향연이다. 그 잔칫상으로 하얀 백로들이 날아왔다.
덕진진은 강화도 12개 진․ 보의 하나로 강화 해협을 지키는 요충지다. 덕진돈대 앞에는 흥선대원군이 ‘어떠한 외국 선박도 이 해협을 통과할 수 없다.’는 당시 쇄국 의지를 나타낸 경고비가 있다.
광성보는 고려가 몽골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강화도로 천도한 후에 돌과 흙을 섞어서 해협을 따라 길게 쌓았던 성이다. 이를 1679년에 완전한 석성으로 축조하였다. 1871년 신미양요 때 가장 치열했던 격전지다. 이곳에 당시 전사한 무명 용사들과 어재연 장군의 전적비가 있다. 그들을 추모하는 행사가 일 년에 한 번 ‘광성제’라는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다.
◇ 주변에 가볼 만 한 곳
ㆍRose Bay: 초지진에서 덕진진 가는 길에 있는 아름다운 커피 숍이다. 커피와 갓 구운 빵은 물론이고 도자기와 다육식물을 전시, 판매하는 온실도 있다. 예쁜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가든은 덤이다.
ㆍ대명항 포구: 초지대교 김포 방면. 5~6월은 병어, 밴댕이 회 철이다. 현대식 시설로 깨끗한 환경을 갖춘 젓갈 시장도 있다. 5~6월은 황석어, 밴댕이 젓갈 철이다.
4월의 찬란한 신록을 만나기 위해 하동으로 간다. 악양행 버스를 타고, 화개천 옆을 지난다. 간밤에 흩날렸을 벚꽃 잎을 상상하며 아름드리 벚나무 가로수 길을 달린다. 오른쪽 차창 밖으로 은빛 섬진강과 푸른 보리밭이 봄볕에 반짝거린다. 섬진강가 산비탈에는 야생차밭이 연둣빛 생기를 뽐낸다.
걷기 코스
화개시외버스터미널▶시내버스 타고 악양면으로 이동▶매암제다원(매암차박물관)▶하덕마을 담장 갤러리▶드라마 ‘토지’ 촬영지▶박경리문학관▶최참판댁▶시내버스 타고 화개장터 또는 화개시외버스터미널로 이동
산자락 아래 볕 좋은 동네 악양
화개시외버스터미널에 악양행 시내버스가 들어온다. 버스에서 내린 행복버스 안내 도우미가 연로한 승객들을 부축해 승하차를 돕는다. 기사도 승객이 승하차할 때마다 반갑게 인사한다. 안내 도우미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악양(개치)정류장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도보 1분 거리에 매암제다원이 있다. 매암제다원은 3대에 걸쳐 40년 동안 친환경 자연농법으로 차밭을 가꾸고, 악양에 전해오는 전통 제다법으로 차를 만드는 곳이다. 다원 안으로 들어서 매암차박물관 옆을 지나자, 초록빛 야생차밭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다원에 따사로운 봄볕이 가득하다. 높을 岳(악), 볕 陽(양) 자를 쓰는 악양다운 풍광이다.
마침 매암차박물관의 장효은 학예실장과 이윤경 기획실장이 야외에서 차담을 나누고 있다. 매암제다원에서 파는 차가 녹차가 아닌 홍차인 이유를 묻자 장 실장이 “많은 사람이 녹차나무와 홍차나무가 다른 나무라고 생각하는데, 같은 나무예요. 찻잎을 발효하면 홍차 잎이 돼요. 악양 사람들은 옛날부터 홍차로 만들어 먹었어요. 서양 홍차는 우리나라 찻잎보다 크고, 맛과 향이 진하죠”라고 대답한다. 이 실장도 거든다. “이곳 할머니들은 찻잎을 잭살이라 불러요. 4월에 처음 딴 찻잎을 참새 雀(작), 혀 舌(설) 자를 써서 작설이라고 부르는데, 거기에서 유래한 것 같아요. 식구들이 감기나 배앓이를 하면 잭살을 한 움큼 넣고 푹푹 우려 약차로 만들어 먹였대요.”
1300여 년 전, 우리나라에 차가 처음 전래된 곳이 하동이다. 임금에게 차를 진상했던 곳도 하동이다. 악양과 화개 산비탈에 자리 잡은 대규모 야생차밭은 한없이 경이롭다. 하동 사람들의 차 사랑과 자부심이 대단할 만하다.
은은한 차 한 잔의 위로
2만여 평의 차밭이 굽어 보이는 매암제다원 마당에 매암다방이 있다. 나무꾼이 살 것 같은 아담한 오두막이다. 실내에 차밭이 보이는 벽마다 큰 창을 내어 자연을 담은 액자처럼 꾸몄다. 실내에 있기에는 아까운 계절. 찻그릇을 담은 차 쟁반을 들고 나가 차밭이 잘 보이는 감나무 아래에 자리를 잡는다. 간지러운 봄볕을 즐기며 찻잎을 우린다. 찻잎에 뜨거운 물을 붓고 모래시계의 모래가 다 떨어지기를 기다린다. 발효된 홍차는 녹차보다 맛이 순하고 구수하다. 찻잔이 작으므로 마주앉은 이의 잔을 수시로 살펴야 한다. 서로 잔을 채워주며 따스한 차담을 나누라고 찻잔이 작은 것일까 생각해본다.
찻잔 위로 스치는 봄바람에 참새 혓바닥 같은 찻잎들이 쫑긋거린다. 연둣빛 여린 찻잎에서 천 년을 이어온 생명력을 느낀다. 다원 입구에 있는 매암차박물관은 일제강점기에 수목원 관사로 사용했던 적산가옥이다. 흰 목조 건물과 푸른 차밭이 어우러져 이국적인 풍경을 그려낸다. 차와 관련한 다양한 유물 130여 점을 전시한다. 차 문화사 강좌, 차 만들기 체험, 차 따기 체험, 하동 차문화 기행 등 문화 교육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매암제다원(매암차문화박물관) 여름철 10:00~19:00, 겨울철 10:00~18:00, 월요일 휴무, 관람 무료, 매암다방(셀프) 찻값 3000원.
사계절 차꽃 피는 하덕마을
매암제다원을 나와, 시골길을 타박타박 20분쯤 걸어 하덕마을에 도착한다. 27명의 작가가 마을 주민의 이야기를 담은 그림, 사진, 조형물을 만들어 골목을 아름답게 꾸며놓았다. 벽화뿐만 아니라 나무, 철, 도자기를 활용한 다양한 작품이 담장에 전시돼 있다.
마을 입구 ‘팥이야기’ 카페에서 출발해, 발소리를 죽이고 고요한 돌담길을 스며들듯 거닌다. 골목에 들어서자마자 하얀 차꽃이 흩날리는 그림 ‘차꽃’과 매화가 핀 찻잔과 보름달을 그린 ‘달 아래에서’, 장식장에 찻잔이 가득한 ‘찻잔’ 벽화가 눈길을 끈다. 기와지붕 처마에 거꾸로 매달린 차꽃 조형물은 이름도 어여쁜 ‘꽃비내림’이다. 담장 위에는 농악대를 형상화한 철 조형물이 곡예를 한다. 가만 보고 있으면 절로 웃음이 난다. 작품들에서 느껴지는 공통된 정서는 ‘푸근함’이다. 시골 정취가 가득한 하덕마을과 정감 있는 예술작품이 어우러져 시너지 효과를 낸다. 오랜만에 맘에 드는 골목길을 만나 가슴이 설렌다. 마을 중앙에 있는 ‘차꽃오미’ 한옥 민박집에도 잠시 들른다. 위엄 있는 솟을대문과 잔디가 깔린 앞마당과 100년 된 고택의 조화가 멋스럽다. 하동군 악양면 악양서로 227.
최참판댁에서 평사리 들판을 굽어보며
하덕마을을 뒤로하고, 박경리 소설 ‘토지’를 드라마화한 토지 촬영장으로 향한다. 찻길 옆 인도를 따라 걷는다. 구재봉 자락에 40만여 평에 달하는 악양면 평사리 들판이 펼쳐진다. 들판 한가운데에 깃대처럼 서 있는 부부송(夫婦松)이 옛 친구 만난 듯 반갑다. 하덕마을에서 약 15분 걸으면 오른쪽에 ‘토지’ 촬영장으로 이어지는 오르막길이 나온다. 이곳이 평사리 상평마을 입구다. 여기서 ‘토지’ 촬영장까지 10분 정도 다시 오르막길을 오른다. ‘토지’ 촬영장에 용이네, 판술네, 두만네, 월선네, 김훈장댁, 송관수네가 살았던 초가와 읍내 장터가 옹기종기 모여 있다. 마당에는 황소와 토끼가 살고, 곳간에는 장작이 그득하다. 사립문 옆에는 샛노란 산수유와 개나리, 목련이 탐스럽게 피었다. 텃밭에는 상추가 싱싱하게 자란다. 실제 사람이 사는 마을처럼 관리한다. 일부 한옥은 민박집으로도 사용한다.
촬영장 바로 위에 2016년에 개관한 박경리문학관이 있다. 박경리의 유품과 작품, 각 출판사가 발행한 소설 ‘토지’ 전질, 초상화 등이 전시돼 있다. 문학관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최참판댁 솟을대문에 이른다. 서희가 자란 별채와 최치수가 머물렀던 사랑채가 그 모습 그대로다. 최치수인 양 사랑채 마루에 올라서서 평사리 들판을 굽어본다. 아득한 섬진강에 봄 아지랑이가 아롱거린다.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 09:00~18:00, 연중무휴.
주변 명소 & 맛집
경상도와 전라도를 가로지르는 ‘화개장터’
화개시외버스터미널 앞에서 다리 하나만 건너면 화개장터다. 화개장터는 하동군과 전남 구례군과 광양시의 경계 지점에 있다. 한국전쟁 전만 해도 경상도와 전라도 사람들이 한데 모여 각 지방의 토산물들을 사고팔았던 곳이다. 원래 위치는 화개천의 화개교 아래였는데 현재의 위치로 옮기면서 상설시장이 됐다. 시골 오일장의 구수한 정취는 사라졌어도 파는 물건과 음식은 예나 지금이나 비슷하다. 지리산에서 채취한 산나물과 약초를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하동 향토음식 전문점 ‘은성식당’
섬진강가에 자리한 은성식당은 하동 특산물인 재첩, 은어, 참게를 이용한 요리를 판다. 재첩국, 은어튀김, 참게탕이 인기가 많다. 섬진강에서 채취한 재첩을 넣고 맑게 끓인 재첩국은 하동에서 먹어야 제맛이다. 송송 썰어넣은 부추가 향긋함을 더한다. 집게다리에 털이 북슬북슬한 참게에 된장과 고추장을 풀어 푹 끓인 참게탕은 구수한 맛이 별미다. 밑반찬도 모두 맛깔나다. 창밖으로 보이는 섬진강과 차밭 풍광은 덤이다.
팥 전문 카페 ‘팥이야기’
하덕마을 입구에 있다. 도시에서나 볼 법한 이층 양옥이어서 눈에 금세 띈다. 내부는 밖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고풍스럽다. 빈티지한 가구와 소품을 활용한 감각이 돋보인다. 대표 메뉴는 단팥죽과 팥빙수다. 작은 놋그릇에 담겨 나온다. 단팥죽의 당도가 적당하고, 팥의 풍미가 한껏 느껴진다. 식사 대용으로는 양이 부족하지만, 커피 한 잔 값에 맛있는 단팥죽을 맛볼 수 있으니 만족스럽다. 팥이야기에서 1분 정도 걸어가면 토속적인 분위기의 ‘타박네’ 카페(055-883-251)가 나온다. 팥소가 듬뿍 든 우리 밀 찐빵을 판다.
여행 정보 걷기 Tip
-위에 소개한 코스는 수도권 기준, 당일 여행이 가능하다. 대중교통으로도 가능.
-하동을 구석구석 여행하고 싶다면 주민공정여행 프로그램인 ‘놀루와’를 이용하면 된다. 하동 토박이가 여행 상담, 개별 맞춤 여행을 추천·진행한다.
500년 전을 되돌아보게 하는 조선시대의 분청편병(粉靑扁甁)을 감상한다. 귀한 자기(瓷器)에 그려진 새[鳥] 한 쌍이 거리낌 없이 애무(愛撫)를 하고 있다. 그런데 이는 우리 생활 공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보통 새’가 아니다.
찬찬히 살펴보니 몸체와 날개에서 육중함이 느껴지고 꼬리 부위도 단순하다. 범상치 않은 새인 것이다. 바로 상상의 세계에 존재한다는 봉황(鳳凰)이다. 신화에서 전해져 오는 봉황이라면 권위를 앞세워 ‘점잔’을 떨어야 할 터인데 ‘대낮에 애무’를 하고 있다. 그런데도 외설스럽지 않다.
문화는 그 시대의 산물이라고 한다. 앞서 말한 분청자기를 만들어낸 15세기의 시대상을 돌아보면, 도덕 윤리를 강조하던 시기였다. 그런 15세기 조선시대의 분청자기에서 ‘스스럼없는’, ‘자유분방한’ 그림을 발견한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1961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한국 보물 5000년 전’에서 우리 분청자기를 처음 본 파리지앵들이 “한국에는 500년 전에 피카소(Pablo Picasso)가 있었다”며 놀라움과 찬사를 아끼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맥락에서 ‘애무하는 봉황새’를 보는 것은 그다지 놀랄 일은 아니다. 그러나 신비롭고 신성시하는 봉황을 ‘애무’의 오브제로 도자기에서 본다는 것은 예사롭지 않다.
만약 숨 막히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유머, 즉 해학 넘치는 작품이 탄생했다면 얘기가 아주 다르다. 해학은 문화의 소금이며 후춧가루이기 때문이다. 특히 자기는 옹기(甕器)와 달리 당대 선비 사회에서 유통되던 고가의 예작(藝作)이다. 문화 소비자의 눈높이를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다. 아울러 선비들의 살아 있는 예혼(藝魂)이 번뜩이는 걸 볼 수 있다.
이성낙(李成洛) 현대미술관회 前 회장
독일 뮌헨의대 졸업(1966), 연세대학교 의대 피부과 교수, 아주대학교 의무부총장, 가천의과대학교 총장, 가천의과학대학교 명예총장(현), 한국의약평론가회 前 회장, 간송미술재단 이사.
우리에게 익숙한 학(鶴)은 두루미목(目), 두루밋과(科)에 속하는 대형 조류다. 겨울이면 북녘 시베리아, 중국 동북부, 몽골에서 날아와 한반도나 일본 홋카이도 등에서 겨울을 나는 전형적인 철새다. 몸무게는 6500~9500g, 몸길이는 135~145cm로 몸집이 비교적 크며, 다리는 회색이다(‘한반도 조류도감’, 송순창·송순광, 김영사, 2005).
그런데 학은 우리에게 가깝게 다가오는 새가 아니다. 독수리처럼 무섭지는 않은데 어딘지 접근하기가 녹록지 않다. 자태가 조금은 ‘거만’하면서도 우아한 것을 높이 여겨서인지 오래전 우리 선조는 학을 우리가 사는 지상과 하늘 사이를 오가며 메신저 역할을 하는 영(靈)적인 새로 생각했다. 이를 아주 선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고려시대 청자다. 구름 사이를 오르내리는 학 무늬를 상감으로 매병에 새겨 넣은 ‘청자상감운학문매병(靑瓷象嵌雲鶴文梅甁)’이 바로 그것이다(사진 1).
이와 관련해 필자는 구름 사이를 평화롭게 오르내리는 학을 보면서 머리에 붉은 모자(cap)가 없어 늘 아쉬웠다. 왜냐하면 학을 영문으로 표현하면 ‘Red Crowned Crane’이기 때문이다. 그러던 차에 이번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고려 1100년을 기념하기 위해 연 전시회 ‘대고려, 그 찬란한 도전’에서 지금까지 국내에서는 보지 못했던 ‘붉은 모자’를 쓴 학을 보았다(사진 2).
물론 조선시대 그림에서는, 특히 병풍(屛風) 화폭에서 ‘붉은 모자’를 쓴 학을 흔히 볼 수 있다. 그런데 왜 도자기에서는 ‘붉은 모자’를 쓴 학을 보기 어려운 걸까? 이는 도자미술사 연구자들이 풀어야 할 과제가 아닌가 싶다. 여하튼 ‘진짜 학’을 만나 기쁜 전시였다.
레트로는 단순히 오래된, 옛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가령 50년째 장사를 이어온 노포와 1970년대 인테리어로 새로 문을 연 식당. 전자는 전통이라 말하고, 후자가 ‘레트로’라 하겠다. 이러한 레트로 콘셉트의 가게들은 중장년 세대뿐만 아니라 젊은이들의 핫 플레이스로 자리 잡고 있다. 자녀와 함께 데이트 즐기기 좋은 레트로 핫 플레이스를 소개한다.
◇ 익선동 한옥섬을 한눈에 ‘낙원장’
옹기종기 기와지붕 아래 레트로풍 맛집과 아틀리에가 즐비한 익선동 거리. 부티크호텔 ‘낙원장’에서는 골목을 가득 메운 한옥 150채의 전경을 한눈에 담아볼 수 있다. 1980년대 지어졌던 ‘그린필드’라는 낡은 여관을 크라우드펀딩으로 매입, 지역 아티스트와 협업해 탄생시킨 공간이다. 클래식한 건물 외관과 달리 세련되고 모던한 실내 인테리어가 레트로 플레이스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끌어올린다. 객실은 일반뷰와 한옥뷰, 프리미엄 한옥뷰 총 3단계로 나뉜다. 그중 LP플레이어가 있는 한옥뷰 룸을 선택하면 커다란 창문 너머로 보이는 익선동 풍경과 함께 LP음악까지 만끽할 수 있다.
위치 서울특별시 종로구 수표로28길 25 숙박비 평일(일~목) 7만~9만 원, 주말(금~토) 9만~11만 원
◇ 아날로그 선율에 빠지다 ‘바이닐 앤 플라스틱’
현대카드가 운영하는 ‘바이닐 앤 플라스틱(VINYL&PLASTIC)’은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경계에서 사라져가는 음반의 가치를 재조명하는 음악체험형 공간이다. 노출콘크리트와 나무 소재 인테리어가 조화를 이루는 인테리어가 돋보인다. 입구 왼편으로는 턴테이블이 놓인 긴 탁자가 눈에 띈다. 이곳에서 바이닐 앤 플라스틱이 선정한 200장의 LP명반을 감상할 수 있다. 1층에서는 클래식, 재즈&소울, 힙합 등 다양한 장르의 LP음반 9000여 장과 다양한 음향장비를 전시, 판매한다. 2층은 1만6000장에 달하는 CD와 더불어 음악감상 서비스를 제공하는 카페 공간으로 꾸며져 여유를 즐기기 좋다.
위치 서울특별시 용산구 이태원로 248 이용시간 화~토요일 12:00~21:00, 일요일 12:00~18:00 (현대카드 미소지자도 입장 가능)
◇ 한국·태국의 퓨전 레트로 맛집 ‘동남아’
태국요리전문점 ‘동남아’의 입구. 세월이 켜켜이 쌓여 낡은 검푸른색 철문을 활짝 열면 레드벨벳 커튼과 이국적인 샹들리에가 맞이한다. 겉과 속이 완전히 다른 이 오묘한 식당은 안쪽으로 들어설수록 이색적인 풍경이 펼쳐진다. 한옥을 개조한 실내는 태국 연회장을 모티브로 한 인테리어로, 동남아 여행에서의 아쉬운 마지막 밤을 표현했단다. 메인 홀 외에 공간을 다양하게 나누었는데, 룸마다 강렬한 색감의 독특한 벽지가 눈길을 끈다. 특히 대중탕 욕조(?)를 연상케 하는 앞마당의 테이블은 겨울철 식사를 즐기기엔 다소 불편하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흥미로운 공간이다. 인기 메뉴인 꽃게와 커리로 맛을 낸 ‘뿌빳 퐁 커리’와 태국식 볶음 쌀국수 ‘팟타이’ 등 현지 셰프가 요리한 다양한 오리지널 로컬 푸드를 맛볼 수 있다.
위치 서울특별시 종로구 수표로28길 23-6 이용시간 매일 12:00~22:00, 브레이크타임 15:30~17:00(주말 제외)
◇ 도도한 모던걸의 화려한 외출 ‘경성의복’
익선동 골목을 걸어가다 보면 개화기풍의 원피스와 정장을 입은 이들을 발견할 수 있다. 고궁 일대에서 한복 체험을 하듯, 이곳에서는 개화기 의상을 대여해 레트로 감성을 한껏 즐기는 것이 트렌드. ‘경성의복’에는 다양한 디자인의 복고 의상과 셀프 촬영을 위한 포토존이 구비돼 있다. 고풍스러운 원피스와 장신구로 치장하고 모던걸이 되어 거리를 누벼보는 것 어떨까?
위치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일대로30길 56 2층 이용시간 매일 10:00~20:00
가격 의상대여(의상·장신구·모자·기타소품) 3시간 3만 원/6시간 4만 원/하루 4만5000원/1박2일 5만 원
◇ 딸과 데이트하는 날엔 ‘경양식 1920’
1980년대 전후, 가족외식 하면 떠오르는 경양식집을 테마로 한 레스토랑 ‘경양식 1920’. 레트로 거리로 유명해진 인선동 골목에 젊은이들이 부모 세대와 함께 올 수 있는 외식 공간을 만들기 위해 인테리어를 꾸미고 추억의 메뉴들을 불러왔다. 24시간 숙성한 돈가스와 함박스테이크는 남녀노소 모두 즐기기에 부담이 없다. 실제 방문한 고객들을 살펴봐도 젊은 연인부터 엄마와 딸, 노부부까지 다양한 세대를 아우른다. 사이드 메뉴로는 1980년대 경양식집에서 맛보던 수프와 멕시칸 사라다(샐러드)를 선보인다. 특별한 날에는 하우스 와인 한 잔 곁들여보는 것도 좋겠다.
위치 서울특별시 종로구 수표로28길 17-30 이용시간 평일 12:00~22:00, 주말 11:00~22:00, 브레이크타임 15:00~17:00(주말 제외)
◇ 뒹굴뒹굴 잠시 쉬어가는 ‘만홧가게’
과거 만화잡지 ‘챔프(CHAMP)’를 비롯해 ‘우주소년 아톰’, ‘스타워즈’ 등 다양한 장르의 만화책과 그래픽노블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이다. 평일에 방문한다면 런치스페셜(라면·즉석밥·계란·김치/단무지+만화 1시간, 6000원)로 이용해보자.
위치 서울특별시 종로구 수표로28길 33-7 영업시간 11:00~23:00 가격 1인 기준 10분당 500원, 좌석(주말 및 공휴일) 2000원
동년기자가 직접 다녀온 레트로 핫 플레이스
◇ 최원국 동년기자/ 돌고 도는 레트로 액티비티 ‘자이언트 롤러장’
부천의 레트로 명소 ‘자이언트 롤러장’. 방문한 날은 휴일이라 인파가 붐벼 그 인기를 실감할 수 있었다. 30여 년 전 부천의 ‘자이언트 롤러장’이 유명했는데, 장소는 다르지만 복고풍에 맞춰 추억의 이름을 다시 불러왔다고 한다. 지하철 1호선 부천역 3번 출구에서 도보로 10분 이내에 있어 접근성이 좋다. 30년 전 롤러를 타던 학생들이 어른이 되어 옛 추억을 회상하기 위해 아이들과 많이 찾는 듯하다. 롤러장의 경쾌한 분위기를 담당하는 DJ가 있어 음악에 맞춰 롤러를 타다 보면 스트레스가 확 풀린다. 곳곳에 간식을 판매하는 매점을 이용하면 시장기를 해결할 수 있다. 과거 롤러스케이트를 타던 시절의 낭만을 다시 느끼고 싶은 시니어라면 친구 또는 아이들과 꼭 방문해보길 추천한다.
위치 경기도 부천시 장말로 376 지하 1층 1일 입장료 성인 1만1000원, 유아~고등학생 9000원 영업시간 평일 12:00~22:00(무제한 이용), 주말 10:00~22:00(3시간 이용)
◇ 윤영애 동년기자/ 시간이 머무는 곳, 우유 카페 ‘희다’
논현동 주택가 골목에 하얀 3층집, 카페 희다. 낮은 계단을 테라스 삼아 나무 소반에 왕골방석이 놓인 테이블이 눈에 들어온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언젠가 분명 와본 듯 너무나 친숙한 느낌! 어릴 적 시골 할머니 집 냄새도 나는 듯하다. 높다란 1인용 앤티크 의자, 사각밥상 테이블, 양은 개다리소반, 자개문양 화장대와 거울, 낡은 찬장과 괘종시계까지. 곳곳을 돌아보며 낡은 물건들에게 속말로 인사를 건넨다. ‘어디 있다가 여기로 왔니?’ 메뉴를 보니 우유가 주다. 기본 우유에 커피, 홍차, 말차, 페퍼민트, 미숫가루까지 6가지다. 사이드 메뉴로 옥춘당 때때사탕과 큼직한 레몬 마들렌도 있다.
프런트의 젊은이에게 주문을 하고 대표님이 누구시냐 물으니 본인이란다. 긴 생머리가 멋진 나두리 대표 역시 작년 7월 오픈 이래 가장 연로한 리포터가 왔다며 빙긋 웃는다. 주고객은 복고에 관심 있는 젊은이들이고, 우연히 동반한 부모님이 친구들과 다시 와서 단골이 된단다. 대부분의 물건은 나 대표 할머니가 집에서 실제로 사용했던 것들이다. 때문에 “외할머니 집에 온 것 같다”는 고객의 평이 가장 맘에 든단다.
느슨한 공간에서 익숙한 것을 자연스럽게 누리는 것이 콘셉트였다는 나 대표의 의도는 조용한 음악과 소품에서도 잘 드러난다. 갓 씌운 백열등, 도자기, 왕골바구니, 낡은 찬장 속 오래된 커피 잔과 유리컵까지 모든 것이 눈에 익어 정겹다.
‘희다’는 기쁘다[喜]와 많다[多], 즉 기쁨이 넘치는 곳 혹은 우유의 하얀 빛깔을 뜻한다. 오래됨과 잘 어울리는 가게 이름이다. 카페 한편에 ‘검다’라는 글자가 쓰인 화분을 가리키니, 개업 후 “희다인지, 검다인지 카페는 잘돼가냐?” 했다던 아버님의 조크 에피소드를 들려준다. 창밖 현관 옆에는 ‘웃다’라는 이름의 화분도 있다. 잠시 후 혼자 들어온 고객은 동네 주민이라며 아이를 기다리다 들렀는데 편안하고 조용하다면서 레트로풍의 독특한 인테리어에 흡족해한다.
바람 불고 서늘한 가을의 어느 날, 논현동 도심 한복판에서 어릴 적 시골집을 본 듯하다. 500㎖의 대용량 미숫가루우유는 인심만큼 넉넉하다. 남겨온 때때사탕을 구순 노모에게 드리니 어디서 이런 사탕을 사왔냐며 좋아라 하신다. 시간이 멈춘 나만의 비밀 아지트에 다녀온 것처럼 왠지 마음이 따시다.
위치 서울시 서초구 주흥15길 16-4층 영업시간 매일 11:00~2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