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깥에서 유리문 가까이 고개를 낮춰 눈을 들이밀었을 때 그녀의 얼굴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깜짝 놀라 몸이 뒤로 밀렸다. 점심시간.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손맛 좋기로 소문난 동네 맛집으로 고민 없이 향했다. 가을볕 맞으며 맛난 된장찌개 삭삭 긁어 나눠 먹고는 그녀의 별로 들어가 향 깊은 커피를 마주하고 앉았다. 음악소리가 나뭇결을 타고 전해지는 문화살롱 ‘아리랑’ 안. 그곳에서 노래하는 예술가 최은진(崔銀眞·58)의 지나온 인생과 살아갈 날의 이야기 실타래를 조금이나마 풀어봤다.
“문화쟁이들은 나 모르면 간첩이지!”
서울시 종로구 북촌로 헌법재판소 옆에 예술인 최은진의 문화공간 ‘아리랑’이 있다. 사람들이 익히 알 만한 설명이라면 말 많고 탈 많은 홍상수 감독의 영화 ‘우리 선희’의 주요 무대가 바로 아리랑이다. 낮에는 손님 받을 생각 없는 듯 늘어지고 한산한 모습이다. 밤이 되면 그녀의 별 ‘아리랑’에서는 따뜻한 불빛 아래 술잔이 오간다. 기분이 좀 오른다 싶으면 최은진의 노랫가락에 흠뻑 젖을 수도 있다. 화가, 글 쓰는 작가, 건축가, 교수 등 예술에 조예가 깊다는 이들은 성지마냥 이곳을 찾는다.
“예술가들 많이 오죠. ‘평범’이라는 것이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예인들이 많이 와요.”
최은진의 인생 스토리를 다룬 한 프로그램에서 그녀를 만요 가수로만 소개한 것이 아까울 정도로 재능이 많다. 타고난 음색은 노래 분위기에 따라 아이 목소리도 됐다가 농염한 재즈가수도 된다. 옛 가요에 세련미와 특별함을 더해 사랑받고 있다.
인천 출신인 최은진은 초등학교때 인생 최초로 듣게 된 ‘흑자청춘(1966년·정원 노래)’ 한 곡으로 노래에 빠져들었다. 동춘 서커스단 공연 모습을 보고는 교내 체조부에 입단해 활동했다. 20대에는 영혼에 대한 갈증으로 신학교에 들어가 목회자의 길도 꿈꿨다. 지금은 동서양 모든 종교와 철학적 경계를 뛰어넘어 정신세계에 관한 공부와 수행, 묵상하는 삶을 산다. 젊은 시절연극배우로서도 두각을 보여 각종 무대에 올랐다. 그 후 결혼과 출산으로 잠시 활동을 멈췄다가 1999년 현대방송 슈퍼보이스 탤런트 선발대회에서 우수상을 타면서 매스컴 앞에 섰다. 그때 최은진 나이 마흔. 예인의 길을 걷고자 신중하게 진로를 고민하면서 우리의 음악 아리랑과 인연을 맺었다.
아리랑에 정착하다
“젊지도 않은 나이에 방송사에서 시키는 거 하는 게 싫었어요. 대신 재즈를 제대로 공부해보고 싶어서 뉴욕으로 유학을 가려고 마음을 굳혔어요. 그때 우리 아들이 어리니 한 5년만 다녀올까 생각했는데 제 앞에 아리랑이 다가왔어요. 오케스트라 협주로 된 아리랑을 듣고 눈물을 잔뜩 쏟아냈습니다. 이게 내 운명인가보다. 아리랑도 결국 재즈잖아요. 우리만의 소울이 깃든 재즈요. 2003년에 나운규 탄생 100주년 음반 ‘다시 찾은 아리랑’을 낸 것이 새로운 삶의 시초가 됐습니다.”
진정한 음악을 찾아 뉴욕에 가고자 했다. 알고 보니 영혼이 깃든 음악의 본질은 최은진 자신이 서 있는 토양에도 있었다.
“이생에서 정체성을 찾은 것이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도 정말 감사해요. 아리랑을 하러 세상에 왔구나. 아리랑 음반을 내고 나서 이곳에 터를 잡았어요. 마이크랑 스피커도 가져다 놓고요. 여기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더니… 희한해요. 사람 구경 못하던 거리에 사람들이 오기 시작했어요. 저기 가면 옛날 목소리 나는 여자가 있다면서요.”
아리랑에 무슨 애환이 있기에 최은진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펑펑 쏟는 일들이 많았다고 말했다.
“언젠가 우즈베키스탄에서 열린 국제교류 아리랑 축제에 초청돼 갔어요. 그때가 추석쯤이었는데 아리랑 요양원이라는 곳에서 위문공연을 했어요. 우즈베키스탄으로 강제 이주된 고려인들이 목화밭에서 그렇게나 많이 고생하셨답니다. 차를 타고 가는데 나도 모르게 입구에서부터 눈물이 쏟아지는 거예요. 공연을 못할 뻔했어요. 너무 울어가지고요. 일주일 전쯤 소록도에 갔을 때도 화장장 근처에서 비슷한 경험을 또 했죠. 교감이 되는 거죠. 그 당시 힘들었던 사람들의 삶이 저에게 그대로 오는 거예요. 나도 조금은 특별한 별인 셈이죠.”
다가오는 영혼들의 울림이 있기에 곡마다 정성과 마음을 담아낸다. 2010년에는 지극정성의 보답처럼 2집 음반 ‘풍각쟁이 은진’이 1만 장 이상 팔려나가며 인기를 얻었다.
“‘오빠는 풍각쟁이(1938)’를 리메이크한 앨범을 냈어요. 처음에 음반이 나왔을 때 사람들이 줄 서서 구입했다더군요. 서점에 가서 모르는 척하고 물어봤죠.(웃음) 인터넷도 안 하고 매일 이곳에 있으니 알 수 있겠어요? 마니아들 사이에서 난리가 났었대요. 이 여자가 누구냐고요.”
노래 잘하기로 소문난 강산에도, ‘브라보 마이 라이프’를 부른 봄·여름·가을·겨울의 김종진도 그녀의 왕팬을 자처했다. 그렇게 최은진의 목소리는 바람을 타고 소문을 타고 흘러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음악가들에게도 알려졌다. 한국에서 활동 중인 일본인 기타리스트 하치가 세션과 프로듀싱을 담당하면서 그녀의 두 번째 음악 작업에 힘을 보탰다.
진정한 레트로 음반 ‘헌법재판소’
최근 최은진은 엄청난 시도를 감행했다. 아리랑 소리꾼 혹은 조금 현대적인 느낌으로 편곡된 옛 곡을 부르던 것과 차원이 다른 음악 장르에 도전한 것. 바로 옛 가요를 1980~90년 대 인기를 끌었던 일렉트로닉 스타일로 재해석한 세 번째 앨범 ‘헌법재판소’다.
아들 또래인 젊은 음악가와 작업을 하고 음악의 이해를 돕기 위해 책으로 앨범을 제작했다. 그녀의 이전 음반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같은 사람이 불렀다는 것을 믿기 힘들 정도로 파격 그 자체다. 시니어가 노래방에 가서 18번으로 잘 부르는 남인수의 ‘무너진 사랑탑(1960)’과 백년설의 ‘아주까리 수첩(1942)’은 젊은 세대의 숨을 불어넣어 모든 세대가 공감할 수 있는 음악으로 거듭났다. 원곡을 즐겨듣던 시니어에게는 신선함을, 곡을 전혀 모르는 세대에게는 새로운 음악으로 느껴질 만하다. 지난 호 ‘브라보 마이 라이프’ 커버스토리로 다뤘던, 진화하는 레트로 열풍의 기류에 최은진의 새 앨범도 합류했다.
“정말 현대적으로 만든 거예요. 나이어린 음악인들과 같이 작업하면서 새로운 걸 배우는 거죠. 젊은 세대도 저하고 음악을 만들면서 배우는 게 있었을 겁니다. 옛날 정서를 무시하고 과정 없는 음악을 하면 안 된다고 말해줘요. 그리고 가사가 얼마나 중요한데요.”
요즘은 ‘아리랑’ 문을 여는 일 외에는 새 앨범 홍보 쇼케이스 무대에 선다. 12월 1일에는 홍대 더스텀프에서 새 앨범을 소개하고 알리는 쇼케이스를 열어 성황을 이뤘다.
“처음에는 ‘아우! 전자악기 반주에 맞춰 어떻게 노래하지?’ 그랬는데 들을수록 좋아요. 이게 정서에 맞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무엇보다 제가 작사, 작곡한 음악도 수록했고요.”
군대 간 아들을 생각하며 썼다는 ‘양구’는 최은진이 작사와 작곡을 맡았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깊이 배어 있는 노래인데 여성들은 무덤덤하게 듣는 반면 남성들은 곡을 듣자마자 “엄마 보고 싶다”를 연발한단다.
삶의 씻김, 문화살롱 ‘아리랑’
3집 타이틀곡인 ‘헌법재판소’는 이노경이 쓴 곡에 최은진이 가사를 붙였다. ‘아리랑’에서 만나온 사람들을 생각하며 써내려간, 모든 세대를 위로하고 싶어 만든 곡이다.
“사람들이 술 한잔 마시면 그렇게들 울어요. 속에 있던 이야기를 꺼낸단 말이죠. 대부분 다 울어. 그러면 나도 울고. 저마다의 인생에는 어마어마한 일이 많잖아요. 위로가 필요한 모두를 위해 썼어요. 해우소라는 말 있잖아요. 내가 볼 때 이 집은 울다가 웃다가 위로받는 집이야.(웃음)”
어떤 것을 하고 싶냐는 질문에 “뭘 하든 이렇게 가는 거지 뭐”라고 답한다. 그냥 매일을 사는 것. 시상이 떠오르면 적고 악상이 떠오르면 함께 작업하는 음악인들과 얘기하면 된단다.
“그 젊은 친구들 밴드 이름도 만들었어요. 대열차강도밴드래요.(웃음)”
무엇보다 공연에 힘을 좀 기울이고 싶다고 했다. 무대가 늘 그리운 천생 무대 체질 그녀다. 세상을 위한 조언이 마지막으로 이어졌다.
“머리 말고 가슴을 써야 해요. 그래야 바로 연결될 수 있죠. 소통 말입니다. 그러려면 시간 낭비하지 말고 혼자만의 시간을 많이 가져야 해요. 후배들에게 고독한 시간이 중요하다고 조언해요. 오늘 인터뷰 때문에 산책을 못했는데 조금이라도 할 수 있으려나….”
시간을 너무 많이 뺏은 걸까. 헌법재판소 옆. 땅거미가 지면 작은 별 하나가 떠오른다. 위로받고 싶은 이들이 호주머니에 손 넣고 한 명, 두 명 들어와 착석. 위로가 필요한 당신들을 위해 오늘밤도 아리랑의 문은 열린다.
“오늘 하루도 수고하셨습니다. 너무 많이 수고하셨습니다. 브라보!”
2018년 1월 1일. 짝지의 60세 생일이다. 이제는 헤아리기도 버거운 시간을 지내왔다는 사실이 낯설다. 그 많은 시간 무엇을 하며 지냈을까? 어쩌다 보니 같이한 세월도 34년이다. ‘인생 금방’이라는 선배들의 푸념이 실감나는 요즘이다.
그 시절 데이트는 대부분 ‘두 발로 뚜벅뚜벅’이었다. 좋아서 걷고, 작업하려고 걷고, 돈이 없어서 걷고, 사색하느라 걷고. 애꿎은 다리만 중노동하듯 시달렸다. 남자 친구가 학교에서 여자 친구를 만나 집까지 데려다 주다가 통금에 걸려 파출소에서 잤다는 이야기도 심심치 않게 들려왔다.
남산, 능동 어린이대공원, 경복궁, 덕수궁, 동숭동, 인사동, 명동, 북한산, 수락산, 소요산 등등 참 많이도 걸었다. 그중 최고는 조국순례대행진! 8월 1일 전국 각지에서 출발한 대학생들이 한곳에 집결해 광복절 기념식을 하는 국가적 행사였다. 학교당 4인 1조로 참여하는 이 걷기순례에서 많은 추억과 인연이 만들어졌다.
필자 팀은 김천에서 출발해 청주까지 꼬박 14박 15일을 걸었다.
8월 한여름 태양을 머리에 이고 걷던 수많은 청춘의 진한 땀 냄새가 가득했다. 필자 인생에서 더 이상 가보지 못한 길들이다. 50대에 시작한 등산에는 그 시절에 대한 로망이 묻어 있음을 본다. 특히 지리산 종주 산행은 그때의 용기를 떠올리게 하는 자조의 시간이기도 했다.
조국순례대행진 때 추억을 만들어준 몇몇 인연이 58년 개띠였다. 아삼삼한 기억을 돌려보면 온통 개판이다. 참가자들의 학번이 대부분 77, 78이었으니 말이다. 두 발 데이트에 딱 어울리는 것은 영화와 연극 관람이다. 국도극장, 대한극장, 명보극장, 단성사, 피카디리극장, 동숭동 소극장, 덕수궁 옆 창고극장, 명동 소극장, 장충동 국립극장. 그 이름만으로도 추억과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DJ의 에코 멘트와 리퀘스트가 있던 음악다방. 어둠침침했던 레스토랑! 서양 필이 나던 커피 맛! 공강시간이면 내 아지트처럼 달려갔던 구석진 그곳! 학교 주변 호프집과 시장통 선술집 기억은 거의 없다. 그 주님(?)과 친하지 못한 관계로 특별한 에피소드도 없다.
그 시절 인기 있는 장소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또 있다. 바로 동네마다 들어서 있던 작은 서점과 만화방이다. 서점도 데이트 장소로 인기였다. 필자의 취미이자 특기인 독서는 만화책 읽기와 연애시집 사기에서 시작됐다. 가끔씩 집 정리를 하다가 발견되는, 자식 나이보다 더 오래된 누런 책을 아이에게 권해본다.
레코드판도 서점에서 구입했던 것 같다. 용돈 아껴 한 장씩 사 모았던 LP판. 이제는 골동품이 되었다. 서점 한쪽에 LP판을 매입한다는 문구가 눈에 들어온다. 추억을 팔 수는 없다! 하고 간직하고 있지만 보관이 어려워 애물단지다. 최근 턴테이블을 찾아 모양을 갖춰봤다. 어느 날 한 번은 꼭 틀어볼 셈이다. 옷과 가방을 구입할 때는 명동이나 이대 앞, 동대문시장이 최고였다. 전자제품은 세운상가나 용산전자상가로 갔다. 그러고 보니 당시 핫 아이템이었던 소니 워크맨을 사러 신촌 미제시장까지 갔던 기억이 난다.
우연히 들어갔던 당구장은 남자들과 담배연기로 가득 차 있었다. 금녀의 공간이라기에 분위기가 어떨지 조금 궁금했는데 딱히 충격적이거나 기억에 남는 장면은 없었다. 40대 초반에 배운 포켓볼. 담배 냄새 없는 집 근처 당구장을 찾아 열공했던 시절도 있다. 주인장은 온종일 당구장에서 큐대를 들고 낑낑대는 필자를 보고 “아줌마! 밥하러 안 가세요?” 했다. 그러면 “밥 미리 해놓고 왔어요~” 했다. 그것도 벌써 20년 전 일이다.
그 시절은 포크송이 대세였다. 송승환과 왕영은이 사회를 보던 1980년대 인기 음악 프로그램 ‘젊음의 행진’에서 이어진 대학가요제, 강변가요제, 해변가요제의 등장으로 누구나 한 번쯤은 통기타 메고 가요제 참가를 꿈꾸던 시절이 있었다. 필자도 길거리에서 밴드 보컬 제안을 받은 쑥스러운 기억이 있다. 교내 축제 공연이 있던 날, 술자리에서 급조된 짝지네 팀 밴드는 딕패밀리의 곡 중에서 신중하게 ‘나는 못난이’를 간택(?)해 참가했다. 공연하는데 전기가 나가 비록 앰프와 마이크는 꺼졌지만 젊은 혈기는 청춘의 생목으로 끝까지 완창하는 투지를 발휘했다. 과 동기의 의리로 베이스 담당 짝지에게 꽃다발 들고 응원을 갔건만 노래 제목처럼 되어버린 기억은 지금 떠올려도 재미나다. 결과와 무관하게 지난 시간들은 모두 그리운 추억이 된다.
이제 그 청년은 한쪽 어깨에 통기타를 메고 ‘동해 하조대해수욕장’이라는 간판을 배경으로 빛바랜 사진 속에 서 있다. 나팔바지에 청재킷을 걸치고 긴 머리를 쓸어 올리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고혈압을 조심하는 육순의 장년이 되어 있다.
필자는 견공(犬公) 세 분과 산다. 12세 레드 닥스훈트와 2세 믹스 유기견, 그리고 58개띠 짝지 그분이다. 34년을 동고동락한 그분과의 세월보다 선한 눈빛과 따스한 체온, 변함없는 신뢰의 견공 두 마리에게 더 맘이 간다.
‘호모 사피엔스 짝지 vs 거의 호모 멍멍이우스’
필자와 동종이신 그분은 두 마리 견공에게 질투와 부러움을 대놓고 내비친다. 무엇을 해도 ‘개판’이 된다며 툴툴대는 58개띠 짝지님의 씩씩 건재함에 감사를 보낸다.
“저기요~ 앞으로 남은 시간 사이좋게 지내봅시다!”
언제부턴가 TV를 틀면 춤을 추면서 노래를 부르는 젊은 댄스 보컬 그룹들이 자주 보였다. 바로 10대 스타 ‘아이돌’이다. 이제 단순한 인기를 넘어 우상화되고 있는 아이돌의 팬들은 10대와 20대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다. 그리고 이들의 문화는 시대에 따라 변화하고 있다. 아이돌의 시초라 할 수 있는 ‘H.O.T.’부터 최근 방송을 통해 국민투표로 뽑힌 ‘Wanna One(워너원)’까지 아이돌 팬덤 문화 변천사를 들여다보자.
아이돌 1세대, 은행 앞에 줄서던 여고생들
지금은 은행 업무도 모바일로 간편하게 처리하는 시대. 그런데 콘서트 티켓을 사기 위해 은행 앞에서 줄을 섰다고? 그렇다. 1996년 현재 1세대 아이돌로 분류되는 H.O.T.가 데뷔했을 당시는 지금처럼 인터넷 보급이 보편화되지 않았던 PC통신 시절이었다. 콘서트 티켓도 각 지역의 특정 은행에서만 판매를 했기 때문에 H.O.T.의 콘서트 소식이 들리면 여고생들은 티켓을 구하기 위해 학교도 빠진 채 새벽부터 은행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그중 금수저들은 은행 거래가 많은 부모님을 통해 은밀하게 콘서트 티켓을 미리 확보하기도 했다. 이처럼 ‘오빠’들을 보기 위해선 끈기와 노력은 필수였다.
앨범 발매일이면 지금은 거의 사라지고 없는 동네 음반점도 함께 바빠졌다. 오빠들의 얼굴이 크게 인쇄된 한정 브로마이드를 준비해서 가게 문 앞에 ‘-월 –일 H.O.T. 2집 발매(브로마이드 선착순)’라는 홍보 글을 써 붙였다. 여고생들은 그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며 선착순에 들기 위해 조퇴도 불사했다. 오죽하면 H.O.T.의 음반 발매일이 되면 교육청에서 조퇴 금지라는 공문을 학교마다 보낼 정도였다.
2012년에 크게 인기를 끌었던 tvN의 드라마 을 보면 여주인공 은시원(정은지 분)이 좋아하는 가수의 방송이 녹화된 비디오테이프를 마치 신주단지 모시듯 소중하게 보관하는 장면이 나온다. 지금처럼 TV 다시보기가 없던 시절엔 좋아하는 가수의 모습을 다시 보기 위해선 비디오 녹화가 유일한 수단이었다. 학원 때문에 방송을 놓치는 날이면 방송을 온전히 녹화하기 위해 부모님께 부탁을 해야만 했다. 어디 그뿐이랴. 1년에 한 번 모든 가수들이 총출동하는 대규모 드림 콘서트나 연말 시상식 때는 혹여 우리 오빠들 기죽을까봐 오빠들을 상징하는 색깔의 우비와 풍선을 들고 현장지원 사격도 불사했다. 콘서트장에서 제일 많이 보이는 풍선의 색깔이 그해 가장 인기 많은 아이돌이기 때문이다.
‘빠순이’라는 말이 나온 것도 이 즈음이다. ‘빠순이’는 1990년 중·후반 혜성같이 등장한 1세대 아이돌을 “오빠, 오빠” 하고 부르며 맹목적으로 쫓아다니는 여고생들을 낮잡아 부르는 용어였다. 어른들이나 또래 남자들이 “쯧쯧, 저 빠순이들” 하며 비난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생겨 팬클럽 문화가 후퇴했냐고? 그럴 리가! 그들은 마치 잔 다르크처럼 꿋꿋하게 오빠들을 응원하고, 나라에 어려운 일이 생기면 팬클럽 차원에서 십시일반 돈을 모아 좋아하는 가수의 이름으로 통 크게 기부도 하는 등 편견에 정면대응하며 건전한 문화 정착에 힘썼다.
아이돌 2세대, 아이돌 굿즈로 무장하라
1990년대를 풍미했던 H.O.T.와 젝스키스, 신화 등 굵직굵직한 그룹들의 잇따른 해체와 개인 활동으로 1세대 아이돌들이 주춤하던 시기가 지나고 2004년 드디어 2세대 아이돌의 대표 그룹이라고 할 수 있는 동방신기(東方神起)가 데뷔한다. 출중한 외모와 노래 실력을 갖춘 동방신기를 필두로 빅뱅(2006), 소녀시대(2007), 카라(2007)의 데뷔로 비로소 2세대 아이돌의 춘추전국시대가 열렸다. 1세대 아이돌과 2세대 아이돌 팬 문화의 가장 큰 차이를 꼽으라면, 그 사이 인터넷 강국으로 변모한 대한민국의 위상 덕분에 팬클럽 활동에 최적화한 환경이 아닐까!
2세대 아이돌 팬들은 주로 인터넷 쇼핑을 통해 앨범을 구매한다. 인터넷으로 음악을 듣는 것이 보편화되긴 했지만 앨범을 구매하는 사람만 받을 수 있는 초도 한정 스티커나 비공개 사진이 있기 때문에 앨범 구매를 포기할 수 없다. 간혹 1990년대처럼 줄을 서서 앨범을 구매할 때도 있지만 그것은 악수회 티켓이 포함된 앨범이 큰 서점에서 판매될 경우에만 해당한다.
만약 좋아하는 그룹의 멤버와 악수를 하고 싶다면 소속사에서 공지한 앨범 판매처에 3시간 전에 도착해서 멤버들 수만큼 앨범을 구입하고 악수회 티켓을 받으면 된다. 철저히 자본주의 논리에 입각한 팬서비스다. 콘서트의 경우 소속사에서 콘서트 티켓을 예매할 수 있는 주소와 예매일을 알려주면 그날부터 팬클럽 홈페이지 게시판은 북적거리기 시작한다. 인터넷 속도가 빠른 지역별 PC방 목록이 공유되고, 구인 사이트에는 본인 대신 좋은 좌석을 예매해줄 대리인을 구하는 글이 하루에도 수십 개씩 업데이트된다. 이외에도 ‘S대 도서관 컴퓨터가 제일 빠르다더라’, ‘통신사 근처 PC방이 제일 빠르다더라’ 등등 수많은 추측과 가설이 난무한다.
콘서트 티켓을 성공적으로 예매했다고 해도 그게 끝이 아니다. 콘서트 티켓을 얻은 사람들은 콘서트장에서 자신을 빛내줄 굿즈 구입까지 마쳐야 비로소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다. 멤버의 개인 홈페이지에서 만든 티셔츠, 야광 머리띠, 응원봉은 물론이고 콘서트장에서 땀을 닦아줄 수건까지 그 종류도 다양하다. 간혹 콘서트장 앞좌석에서 관람하다가 멤버들이 손을 내밀 때 자신의 수건을 받아주기라도 하면 그날은 팬질 인생 최대의 계를 탄 셈이다. ‘쌀 화환’은 또 어떻고? 자신이 좋아하는 아이돌이 드라마나 뮤지컬 등에 진출하면 제작 발표회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가수의 기를 살려주기 위해 으리으리한 쌀 화한을 보낸다. 꽃은 시들면 버려지기 때문에 10kg의 쌀 포대를 모아 화환을 만드는 것인데 그 쌀들은 전국 각지의 불우이웃 성금으로 기부된다. 이 얼마나 누이 좋고 매부 좋은 문화란 말인가!
2세대 아이돌들은 본격적인 한류 바람을 타고 중국, 일본, 인도네시아, 태국 등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2008년에 데뷔한 2pm의 경우 ‘왜 한국에서 안 보이지?’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들은 현재 일본에서 엄청난 인기를 누리며 활동 중이다. 일본의 가장 큰 공연장인 도쿄돔을 마비시킬 정도로 뜨거운 아이돌의 한류 열풍은 아직까지 식을 줄 모른다.
내가 좋아하는 가수는 내가 뽑는다
그리고 바야흐로 2017년, 2세대 아이돌들의 해체와 각종 개인활동들로 주춤했던 가요시장이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 엑소(EXO), 트와이스(TWICE), 에이핑크(APINK) 등 이른바 슈퍼 아이돌들의 등장으로 팬들은 벌써부터 그들을 지원사격해줄 준비를 모두 마쳤다. 각종 시상식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가수가 1등을 하기 위해 모바일과 인터넷으로 매일 투표를 하는 정성은 기본이다. 얼마 전 인기리에 종방한 Mnet의 〈프로듀스 101 시즌2〉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후보를 데뷔시키기 위해 팬클럽들은 다양한 방법을 총동원했다. 휴대용 휴지에 자신이 좋아하는 후보의 얼굴을 인쇄해 나눠주거나 커피차를 빌려 커피를 나눠주며 투표를 독려하기도 했다.
아이돌 굿즈는 더욱 다양해졌다. 소속사에서 멤버들의 얼굴을 본떠 인형을 만들어 1차 판매하고 2차로 인형 옷, 인형 소품(침대, 베개, 가방 등)들을 판매한다. ‘그런 걸 누가 사!’ 분명 그런 생각이 들것이다. 하지만 품절되는걸 보면 ‘나만 안 사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잘 팔린다.
MINI INTERVIEW
허윤정(26)씨는 워너원 멤버 라이관린의 팬이다. 우연히 빠지게 된 아이돌 덕분에(?) 굿즈 제작까지 취미로 하고 있다.
“예쁜 쓰레기는 예쁨으로서 그 효용가치를 다했다는 말처럼, 저는 라이관린의 예쁨을 담아낸 무언가를 소장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함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그래서 무작정 굿즈를 만들기 시작했죠. SNS에 판매 글을 올렸는데 싱가포르에 사는 팬이 연락을 줘서 120장을 사갔어요. 아이돌에 너무 빠지면 회의감이 올 것 같아서 요즘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중이에요. 이런 활동이 삶의 원동력으로 작용하는 시너지가 되는 것 같아서 그냥 좋아하는 마음이 중요하다는 걸 알아가는 요즘이에요(웃음).”
‘출판장인’으로 불리며 40년 넘게 ‘책’의 내실을 다지고 외연을 확대해온 한길사 김언호(金彦鎬·72) 대표. 지난해 자신의 이름으로 낸 에는 그가 세계 곳곳을 탐방하며 체감한 서점의 역량과 책의 존귀함이 담겨 있다. “서점은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의 숲이며, 정신의 유토피아”라고 이야기하는 그를 한길사의 복합문화공간 ‘순화동천’에서 만났다.
지난 4월 서울 중구 순화동에 문을 연 ‘순화동천(巡和洞天)’. 1970년대 한길사가 잠시 머물렀던 순화동의 인연과, 노장사상의 이상향을 뜻하는 ‘동천’의 의미가 담긴 공간이다. 김 대표는 서점, 카페, 박물관, 갤러리 등을 함께 즐길 수 있는 이곳 역시 새로운 독서운동을 펼치는 문화의 장이라고 표현했다. 한편으로는 서점이 사라져가는 우리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희망으로 자리 잡길 바라는 마음이 서려 있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그는 시민들이 순화동천을 많이 찾고, 을 꼭 읽어보길 권했다.
한 사회의 정신을 담은 풍경 ‘서점’
그의 이야기를 듣고 을 처음 마주했을 때 사뭇 놀랐다. 먼저 백과사전을 능가하는 크기와 두께부터가 예사롭지 않았다. 그리고 책을 스르륵 넘겨보았을 때 세계 서점의 모습을 담은 아름다운 사진에 매료됐다. ‘어느 작가가 찍었나?’ 하고 다시 책의 표지를 확인하니, ‘글·사진 김언호’라는 글자가 또렷했다. 단순히 기행을 위해 찍은 사진이라기엔 꽤 수준이 높아 그의 능력에 재차 감탄했다.
“사진을 찍은 지 오래됐어요. 처음에 시작한 계기는 내가 가는 곳, 즉 책이 존재하는 풍경을 기록해두기 위해서였죠. 도서관, 서점, 누군가의 서재 이런 게 다 책이 있는 풍경이자, 우리 사회와 개인의 정신이 담긴 풍경이니까요.”
순화동천에는 한길사에서 출판한 도서 3만여 권이 있다. 한 권 한 권마다 그의 땀방울과 열정이 스민 듯했다. “책은 머리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만드는 것”이라는 김 대표의 말처럼, 그는 예나 지금이나 혼신의 힘을 다해 책을 만든다. 그러나 세상은 조금 달라졌다. 지혜의 샘 역할을 했던 동네 책방은 하나둘씩 사라졌고, 책을 쥐던 사람들의 손에는 스마트폰이 껌딱지처럼 붙게 됐다.
“중장년의 젊은 시절, 1980년대는 책의 시대였어요. 모든 젊은이가 책을 들고 다녔죠. 크고 두꺼운 책도 마다하지 않았어요. 책을 읽으면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어떤 방법으로 민주적인 사회를 만들 것인가 등을 고민하고 토론했죠. 그 당시 책의 정신은 위대했고, 그게 한국 민주주의의 토대가 됐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요즘은 패스트푸드 같은 스마트폰에 빠져 쓸데없는 정보에 생각을 뺏기죠. 사람이 지식만 가지고는 안 돼요. 책을 통해 깊은 지혜를 얻어야 지혜로운 사회가 되고, 창조적인 발상이 가능해지죠.”
독서는 삶의 필요충분조건
은 600페이지가 넘지만, 사진과 글자가 크기 때문에 읽는 데 부담이 없었다. 종이책을 한 장 한 장 넘기는 손끝에서 감칠맛이 느껴지는 신선한 경험이랄까. 전자책으로는 느낄 수 없는 매력이다. 그러나 스마트 기기의 발달로 전자책이 대중화되며, 현대인은 종이책과 점점 멀어지고 있다. 김 대표는 이러한 현상이 독서력과 사유의 시간을 줄게 만들었다며 우려했다.
“과거 종이책을 많이 읽던 시절에는 깊은 사유가 가능했어요. 현재 우리 사회가 경계해야 할 문제는 사유의 천박성이에요. 스마트폰에 의존해 쓸데없는 정보를 과하게 섭취하고 있어요. 지식이라는 건 축적이 돼야 지혜가 되는데, 스마트폰이 주는 지식은 휘발적이거든요. 자꾸 짧은 글만 읽으려 하죠. 물론 스마트폰이 유용하지만, 필요조건에 불과하지 충분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해요. 종이책을 통한 독서는 삶의 필요충분조건이죠. 책을 읽지 않는다고 당장 무슨 일이 생기는 건 아녜요. 그러나 장기적으로 볼 때 언젠가 심각한 문제가 생길 수 있죠.”
그는 아이의 손을 잡고 서점에서 책을 고르는 어른의 모습이 바람직하다고 말한다. 또 그런 이들이 찾을 수 있는 크고 작은 서점이 많아지길 소망한다. 김 대표는 최근 지인들에게 그동안 읽었던 책들로 ‘사랑방서점’을 열어보자고 권유에 나섰다.
“을 읽으면 서점에 가고 싶고, 또 자기 책방을 하나 차리고 싶어져요. 책을 보고 서점을 내겠다고 결심한 사람들이 생겼어요. 한 가지 염두에 둘 건, 들여놓는 책들이 특정한 주제의 신간이어야 한다는 점이에요. 학습지나 참고서 같은 걸 팔면 그건 가게죠. 서점 한 편을 카페 공간으로 만들면 토론이나 문화의 장으로 훌륭하게 활용할 수 있어요. 그런 작은 서점들이 늘어나면 새로운 차원의 문화운동이 될 수 있다고 봐요.”
김 대표는 서점을 내려는 이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기 위해 순화동천을 기획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또, 그렇기에 순화동천이 성공적으로 자리 잡아야 한다고 굳은 의지를 보였다.
“순화동천 같은 지적 사랑방은 하나만으론 부족해요. 동네마다 곳곳에 생겨나야죠. 번쩍거리는 네온사인만 있다고 해서 도시가 아닙니다. 밤늦게까지 불을 켜놓는 책방, 그 옆에 자그마한 찻집 등 다양한 문화예술 시설이 공존해야죠. 그중에서도 서점은 한 사회의 정신을 유지해주는 실핏줄 같은 존재이자 지적 정신의 오아시스 같은 공간입니다.”
서점에서 사는 한 권의 아름다움
그는 책을 쓰고, 만드는 일만큼 책을 구입해서 읽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애써 서점을 열더라도 책을 사가지 않는다면 운영에 어려움을 겪기 때문이다. 또, 책과 서점을 대하는 배려가 뒤따라야 한다고 조언했다.
“충북 괴산에 있는 한 서점은 들어가면 책 한 권을 꼭 사도록 의무화했대요. 그게 옳은 일 아닌가요? 서점의 책은 공공재입니다. 아무렇게나 만지고 훼손하면 팔 수 없는 헌책이 돼버려요. 내 물건이 아니잖아요. 그럼 소중하게 다뤄야 하는데, 우리에겐 그런 문화가 안 돼 있죠. 서점에서 책 보고 화장실 간다고 따로 돈 받지 않잖아요. 그럼 그건 주인 부담인데, 책이며 물이며 휴지며 너무 함부로 쓰고 있어요. 책방을 하는 분들이 참 많이 속상해해요.”
김 대표는 줄곧 책을 ‘아름답다’고 표현했다. ‘책의 미학’을 중요시하는 그에게 책은 더없이 귀한 존재다. 그런 자신의 마음처럼 우리 시민이 책을 아끼고 소중하게 대하길 바라는 것이다. 물론, 아름다운 한 권의 책을 만들기 위한 그의 노력은 끊임없다.
“책은 내용도 중요하지만 형식도 중요해요. 형식이라는 건 결국 미학적인 거잖아요. 우리뿐만 아니라 누구든 책을 만드는 사람이라면 책을 더 아름답게 만들려고 해야 해요. 책이 아름다워야 그 내용도 돋보이지만, 그래야 더 마음에 담을 수 있기 때문이죠. 한 권의 책을 독자의 가슴에 품게 하는 것, 그게 바로 출판장인의 일이라 생각합니다.”
서점에서 책을 산다는 건 달콤쌉싸름한 일이다. 그걸 처음 안 건 중학교 3학년 때였다. 단짝 친구와 함께 서점엘 갔다. 놀 것이나 즐길 것이 거의 없었던 시절, 친구와 나는 예배를 마치고 적당히 시간을 보내며 놀 곳으로 서점을 택했던 것 같다. 서점이 집으로 가는 길목에 있어서 동선이 자연스레 이어졌다.
사춘기의 절정을 지나고 있던 우리는 만나기만 하면 교회 오빠나 남학생에 대해 이야기 했다. 누가 누구를 좋아하는지가 최대 관심사였다. 우리는 설익은 얘기로 온 시간을 보내며 로맨스 소설로 허전함을 채웠다. 그리고 서점에 가서 각각 책을 골랐다. 나는 ‘첫사랑’을 골랐고 친구는 ‘짝사랑’을 꺼내들었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키득거렸다.
달콤하고 아름다운 첫사랑을 기대하며 골라들었던 투르게네프의 ‘첫사랑’. 16살 소년이 자신의 집 별채에 이사 온 공작부인의 딸, 지나이다를 보고 사랑에 빠진 후 지독한 사랑의 열병을 앓게 되는 이야기였다. 아버지는 투르게네프가 러시아의 대문호라고 알려주었지만 혹시라도 가족들 눈에 띄어 놀림을 당할까봐, 밤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몰래 책을 읽었다. 지나이다가 여러 남자들을 다루며 군림하는 장면이 참으로 이상했지만 그보다도 그 여자가 아버지의 연인이었다는 사실이, 소년만큼 당황스러웠고 이해하기 힘들었다. 이 책을 읽은 후 불에 데인 것처럼 화끈하고 찝찝한 감정이 여러 날 동안 맴돌았다.
책을 읽는다는 건 뭔가 내밀하고 말로 다하지 못할 비밀을 갖게 되는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첫사랑’ 때문이었다. 16살 소년이 겪은 사랑은 불가해 했지만, 그 사랑에 대해 이해하고 싶었고 더 깊이 알고 싶었다. 그 때부터 서점을 드나들며 삼중당 문고를 사모으기 시작했다. 노량진역을 지날 때면 삼거리 모퉁이에 있던 내 첫사랑, 삼우서적이 문득 떠오르기도 한다. 남편과 연애 시절에 드나들었던 명동 충무서적, 가끔 들러 지적 허영심을 채우던 고시촌의 녹두서점까지, 내가 사랑하던 서점들이 다 없어졌다. 이제는 서점에 가려면 지하철을 타고 가야 한다.
얼마 전에 서울국제도서전에 다녀왔다. 도서정가제 이후 출판사들도, 관람객들도 관심이 시들해졌던 도서전시회가 몰라보게 달라졌다. ‘변신’을 주제로 새롭게 바뀐 도서전시회 중심에 동네책방이 있었다. 전국의 인기있는 동네책방 20 곳이 참여한 덕에 평소에 가보고 싶었던 책방이나 미처 알지 못했던 독특한 책방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었다. 고양이서점, 시전문서점, 음악전문서점, 한 사람 만을 위해 책을 골라 주는 서점 등 주인의 취향이 제대로 드러난 서점들을 둘러보는 일은 참 즐거웠다. 예전에 비해 젊은 사람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음악전문서점 ‘라이너노트’에서 앙드레지드가 쓴 ‘쇼팽의 노트’라는 책을 골랐다. 대형서점에 갔더라면 사지 않았을 책이다. 통영의 한 출판사가 펴낸 ‘통영예술기행’이라는 책은 통영여행 할 때 참고하면 좋겠다는 생각에 집어들었다.
책을 사지도 읽지도 않는 시대라고 한탄하지만 동네 골목 구석구석에 동네책방들이 많이 생겨나고 있다. 여기서는 책을 파는 일 이외도 독서모임이나 전시회, 세미나, 음악회 등 다양한 문화행사도 열며 동네 사랑방으로, 복합문화공간으로서의 역할을 하고있다. 어느샌가 하나 둘 사라진 동네책방들의 화려한 부활을 기대해도 좋을 것 같아 보였다.
우리나라 집값이 가장 비싼 곳 중 하나인 서울 강남 도곡동의 타워팰리스 아래 편의점에는 경제서적과 재테크 책이 가장 많이 팔린다고 한다. 재테크법도 산수나 국어처럼 배워야 하는데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기 때문이다. ( 에서 인용)
못생긴 사람보다 예쁜 사람이 화장을 더 많이 한다. 성형외과가 밀집해 있는 곳도 땅값 비싸고 부자들이 많이 사는 서울의 강남이다. 학교 시험도 자신 있는 과목에서 틀리면 더욱 안타까워한다. 이러한 현상을 미루어볼 때 부자가 책을 더 많이 보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부자들 중에는 ‘독서’가 첫 번째 취미인 사람이 많다. 투자의 귀재로 불리는 워렌 버핏도 보통 사람의 5배나 책을 읽는다고 한다. 빌게이츠도 자신을 독서 중독자라고 얘기했다. 독서를 가난한 사람의 돈 안 드는 취미로 얕잡아보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가을은 천고마비의 계절이자 독서의 계절이라고 예전부터 일컬어왔다. 공부는 학교 다닐 때나 하는 것이지 직장에 들어가면 피곤하다는 핑계로 책과는 담을 쌓는 사람이 많다. 책을 보지 않는 사람의 미래는 없다. 독서는 마음의 양식이다. 양식을 먹지 않고 쓰는 글은 영양실조의 글이다.
성공한 사람의 서재에는 많은 책들이 꽂혀 있다. 새로운 지식을 끊임없이 보충하기 때문이다. 필자는 성공한 사람은 아니지만 서점에 한 달에 한 번은 가서 전공 분야의 새로운 책이 나왔나 점검한다. 변화되는 흐름을 알기 위함이다.
책읽기도 습관이다. 습관은 반복된 오랜 행동이다. 독서 습관을 위해 6개월 동안 4만 2,195페이지의 책을 읽기로 하고 동네 도서관과 약정을 한 뒤 독서마라톤에 출전했다. 한 달이 지난 지금 1만 5,600페이지의 책을 읽었다. 출퇴근 전철 이용시간 두 시간을 게으름 피우지 않고 열심히 읽은 결과다. 외출할 때면 작은 가방 속에 읽을 책 두 권을 꼭 넣고 다닌다. 책의 장르는 서로 달라야 지루하지 않다.
인생은 연습이고 훈련이라는 생각을 언제나 진실처럼 믿고 있다. 독서 또한 반복 훈련을 통해 글 읽는 속도가 빨라짐을 느낀다. 책 읽는 재미도 솔솔 느낀다. 저자는 혼신의 노력으로 책을 쓴다. 저자의 직접 경험 또는 지식을 간접으로 얻는 데 들어가는 비용은 책이 가장 저렴하다.
필자는 일정 속도로 책을 읽지 않는다. 어느 부분은 세 번 네 번 반복해서 읽는다. 저자의 서문과 목차는 적어도 두 번은 읽는다. 저자소개도 눈여겨본다. 대략의 내용을 미리 파악하는 데 중요하기 때문이다.
요즘에는 독서의 계절이 따로 있다는 말이 맞지 않는 것 같지만 이 가을 어느 풀밭에 앉아 책 읽는 사람들을 보면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다. 고개를 들어 창밖을 보니 완연한 가을이다. 하늘도 높고 맑다.
동네 서점이 사라졌습니다. 그 자리에는 스마트폰 가게나 음식점이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습니다. 서점이 문 닫는 원인은 삼척동자도 다 압니다. 책이 잘 안 팔리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가 OECD 국가 중 스마트폰 보급률은 1위이지만 독서율은 꼴찌라고 합니다. 다른 자료에는 우리나라 국민들이 일 년에 아홉 권 정도 책을 읽는다고 합니다. 이 정도면 많이 읽는 것 같은데 꼴찌라니 고개가 갸웃해집니다. 하지만 일 년에 개인적으로 책을 사는 사람의 평균 구입 권수는 한 권이 넘지 않으리라 봅니다. 그러니 서점이 문을 닫을 수밖에 없습니다.
책을 사지는 않지만 보는 사람은 있습니다. 소규모 서점들은 문을 닫고 있지만 대형 서점은 성업 중이고 각 공공기관에서 관리하는 도서관도 놀랄 만큼 늘었습니다. 여러 단체에서도 방문객이 기다리는 시간에 책을 보도록 하거나 대여도 해주는 소규모 서고를 많이 비치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이 사서 여러 사람이 돌려가면서 보는 시스템이 도서관이나 책 대여점입니다. 따라서 책은 덜 팔려도 독서율은 높아져야 정상인데 독서율도 그다지 높지 않다고 하니 실망입니다.
동네 도서관에 몇몇 베스트셀러 작가들의 책은 독자 수요가 많아 서너 권씩 비치해두고 있지만 이름 없는 무명작가의 책은 어지간해서는 도서관에 발을 붙이지도 못합니다. 어렵게 책을 출판해도 사주는 사람이 드문 현실에 3류(?) 작가들은 힘이 빠집니다. 그리 잘 팔리지 않는 책을 출간한 저자들은 가능하면 책을 사서 보라고 권합니다. 책을 사서 읽고 다른 사람에게 주지 말고 버리고 또 다른 책을 사라고 합니다.
책을 사보기로 했습니다. 매월 두 세권씩의 책을 산다고 해서 우리 가정이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처하지는 않습니다. 필자가 책을 사주는 작은 노력으로 작가들이 힘을 얻어 계속 정진하여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가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책을 살 때 작은 갈등이 있습니다. 서점에서는 정가대로 다 줘야 하지만 인터넷으로 구입해서 집까지 배달되는 시스템을 이용하면 적어도 정가 대비 10퍼센트 정도는 저렴합니다. 원하는 책들이 동네 서점에 다 있는 것도 아니라서 인터넷으로 검색해 구입하면 편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필자 편의에 의해 인터넷 서점만 고집하면 결국 동네 서점은 망할 것입니다. 이런 생각까지 하면 필자도 자신이 없어지고 우울해집니다.
이익이 많이 나지 않아도 종업원의 고용 창출을 위해 회사를 운영하는 착한 기업이 있습니다. 경영수지 적자로 회사 문을 닫으려 해도 종업원 사정이 눈에 밟혀 문을 닫지 못하는 기업과 가게도 있다고 합니다. 기업의 목적은 이익 창출이라고 배웠지만 그렇게만 생각하면 너무 각박한 세상이 됩니다. 유명 작가의 글만 아니라 완성도는 다소 떨어져도 혼신의 노력으로 저술한 책을 누군가는 사주고 읽어줘야 합니다.
젊은이들은 돈을 쓰려고 해도 없어서 못 쓴다고 합니다. 경제력이 있는 나이든 시니어들은 돈을 써보지 못해서 못 쓴다고 합니다. 고기도 먹던 사람이 먹는다고 평생을 절약으로 살아 온 사람은 돈이 있어도 쓰지 못합니다. 요즘 세상에 소비는 미덕입니다. 시니어도 돈이 있으면 소비를 해야 합니다. 글을 쓴다면 남이 쓴 책도 한 권씩 사주고 아침저녁으로 만나는 거지에게도 적선하면서 나만 아니라 우리라는 세상 전체를 보는 눈이 내 자신부터 생겨나길 희망합니다.
지난해 말 온라인 서점 예스24는 2015년 독자를 분석한 결과를 발표했다. 분석 결과 온라인 서점을 이용해 책을 구매한 50대 이상은 전체 독자 중 8.4%에 불과했다. 60대 이상은 1.1%였다. 그나마 60대 이상은 2014년과 같은 비율이었지만, 50대는 2014년에 비해 되레 0.3% 포인트 줄었다. 수입이 없다고 볼 수 있는 10대가 3% 정도라는 것을 감안하면 부끄러울 정도다. 이렇게 시니어와 친숙하지 않지만, 온라인 서점은 분명한 장점이 있다. 잘만 꿰어 보면 보배가 될 만한 구슬이 가득하다.
글·사진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제프 베조스가 1994년 시애틀에 설립한 세계 최초의 온라인 서점 아마존(Amazon.com)이 처음 세상에 선을 보였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비웃었다. 한두 페이지 정도 손으로 들춰보지 않고 누가 책을 살까 하는 의문이 지배적이었다. 당시 신간을 접하는 방법은 직접 서점에 가 목차부터 읽어 보는 것이었으니까. 지금은 어떨까? 아마존의 2015년 매출은 약119조원이었다. 얼마 전 기획재정부가 발표한 추가경정예산이 11조원이었으니 이 회사의 규모가 짐작이 된다. 이렇게 아마존이 계속해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온라인 서점이 장점을 갖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 준다.
우리나라의 온라인 서점은 크게 3가지 형태로 나눌 수 있다. 교보문고나 영풍문고와 같은 기존의 오프라인 서점을 기반으로 한 형태와 예스24, 알라딘, 리디북스와 같은 온라인을 기반으로 한 서점이다. 여기에 최근에는 인터파크나 11번가 등 온라인 쇼핑몰도 도서 유통에 뛰어들었다.
시중 대형서점 규모 점점 줄고 온라인화
최근 서점가 경향을 살펴보면 교보문고, 영풍문고, 반디앤루니스의 변신이 눈에 띈다. 최근 오프라인 서점들은 온라인 서점과의 결합을 통해 ‘다이어트’에 열중하고 있다. 교보문고의 ‘바로드림센터’가 대표적. 매장을 기존 서점의 절반 수준인 1653㎡(500평)대 이하의 규모로 줄이는 대신, 전국에 매장을 늘려 접근성을 높인다는 것이 이들의 전략이다. 온라인 서점에서 주문한 책을 오프라인 매장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게 하고, 도서관이나 카페 같은 분위기로 마음껏 책을 볼 수 있게 한 것도 특징이다.
오프라인 서점들이 이런 변신을 꾀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고정비용에 대한 부담 때문이다. .
가격 할인, 당일 배송, 포인트 등 쏠쏠
온라인 서점의 가장 큰 장점은 절판되지 않은 이상 찾지 못하는 책이 없다는 데 있다. 만약 절판된 책이라 하더라도, 일부 온라인 서점에서는 중고 서점까지 운영하고 있어 대안을 제시해 준다.
저렴한 가격도 장점 중 하나다. 2014년 도서정가제가 시행되면서 모든 책의 할인율은 10%로 제한되어 있지만, 거의 모든 책을 10% 할인된 가격에 살 수 있는 것은 오프라인 서점에 비해 장점이라 할 수 있다.
빠른 배송은 며칠이나 기다려야 하는 번거로움을 줄여준다. 일부 온라인 서점의 경우 오전에 주문하면, 산간벽지가 아닌 이상 오후에 받을 수 있는 당일 배송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다. 직접 수령이 어려워 누군가가 대신 받아 주길 원하는 고객을 위해 편의점 배송서비스를 운영하는 곳도 있다. 동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GS25나 CU와 같은 편의점에서 책을 받아 볼 수 있다. 과거에 비해 배송료 부담도 줄었다. 몇몇 온라인 서점은 1만원 이상 구매 고객에 대해 무료배송 서비스를 운영하고 있다.
핀테크 기술 확대로 이용 더 편리
사실 시니어들의 온라인 서점 이용에 가장 큰 진입 장벽으로 지목되는 것은 바로 책값을 지불하는 방법이다. 시니어들은 PC사용이나 전자결제 자체를 어려워하기 때문에 온라인 서점을 활용하고 싶어도 구경만 했지, 직접 구매까지 진행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그러나 최근 핀테크(‘금융(finance)’과 ‘기술(technology)’이 결합한 서비스) 기술의 급속한 도입이 이뤄지면서 이런 장벽이 점차 낮아지고 있다. 삼성페이나 네이버페이, 페이코, SSG페이와 같은 서비스가 대표적이다.
이런 서비스들은 신용카드를 한 번만 등록해 놓으면 간단하게 결제가 이뤄지기 때문에 복잡한 과정을 거칠 필요가 없다. PC보다 스마트폰을 활용한 모바일 기반은 훨씬 간단하다. 지문인식 스마트폰을 사용 중이고, 삼성페이로 결제하는 것을 예로 든다면, 온라인 서점 사이트에서 책 한 권을 구매하는 데 드는 품은 지문인식 2번, 터치 2번 정도다. 일일이 결제정보를 입력할 필요가 없다.
이런 핀테크 기술들은 처음 등록은 어렵지만, 한 번 등록해 놓으면 이용이 쉽고, 보안수준도 꽤 높다. 주변의 자녀나 손주들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한번 시도해 보는 것은 어떨까? 서점이 훨씬 가까워질 것이다.
이 나이에 이렇게 책에 치어 살게 될지는 몰랐었다. 뒷방에는 책이 공간의 절반을 차지하고 나머지는 옷장이라 방의 활용이 안 된다. 거실에도 한 쪽 구석에 쌓아두기 시작하면 금방 그 옆에 다른 줄이 생기고 책에 치여 산다.
어린 시절에는 책이 그리 흔치 않았다. 단편소설이나 세계 문학전집 중 몇 권이 있기는 했으나 밖에서 노는 걸 좋아해서 책을 좋아한 것은 아니었다. 일부는 미성년자가 보기에 적당하지 않았는지 못 보게 했었다.
학창시절에는 술 마시고 어울리기 바빠서 책을 별로 본 적이 없다. 대학시절 한번은 여학생과 미팅을 했는데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나오는 두 여인 중 어느 타입의 여자를 더 좋아하느냐는 질문에 답을 못했다. 그 책을 읽어 본적이 없기 때문이다. 얼마나 얼굴이 화끈거리는지 그 길로 세계 명작 모음집을 사다가 한 번에 다 읽었다. 적어도 스토리는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았다.
직장 생활 때는 해외 출장 때나 비행기 안에서 책을 읽었다. 흥미 위주로 대충 보고 여행지에서 한국 사람이 있으면 주고 오거나 버리고 왔다. 요즘은 영화 보느라고 그나마 책은 읽을 시간도 없다.
내 방에 책이 쌓이기 시작한 것은 1993년 자비로 출판한 독자투고 모음집 ‘시시비비’를 내고부터였다. 첫 출판이었으니 기대가 컸던 모양이다. 적어도 보관 분으로 500권은 놔둬야 평생 지인들에게도 나눠주고 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2~3년 마다 책을 냈다. 독자투고 모음집이 3권이니 보관분이 1,500권인 셈이다.
이쯤 되면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다. 책을 책장에 꽂아 놓는 것이 아니라 20권내지 30권 단위로 된 포장도 뜯지 않은 채 벽 쪽으로 쌓아 놓아야 한다. 살다보니 내 책에 관심 있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독자 투고집은 세월이 흐르면 시의성이 떨어져 가치도 떨어진다. 어느 날 과감하게 각권 20권만 남기고 쓰레기장에 버렸다. 공간이 생기고 나니 속이 다 후련했다.
2003년 영국에 유학 가서 국제 댄스스포츠 지도자 자격증을 따고 댄스스포츠 책을 냈다. 다시 500권을 보관 분으로 빼 넣고 나머지는 주문이 오는 대로 배송했다. 보관분이 2천권인 셈이다. 2005년 댄스 책 3권을 동시에 냈다. 다시 500권씩 빼 놓으니 1,500권이다. 역시 벽 쪽에 포장도 안 뜯은 채 쌓아 두고 다른 책들도 그 앞에 그런 식으로 눕혀 쌓았다. 책이 무너져 내리는 일이 자주 있었다. 그나마 댄스 책은 세월이 흘러도 반품이 없고 주문도 꾸준했다. 댄스 강의가 있는 날은 무료로 나눠주기도 했다.
2014년에 새로 낸 책 ‘캉캉의 댄스 이야기’는 딱 한권만 보관하고 있다. 책이 3,400페이지라 부피가 크고 나도 사야 하기 때문이다. POD 시스템으로 낸 책이라 필요할 때 주문만 넣으면 된다.
블로그 활동을 하면서 책을 많이 사 보게 되었다. 주로 전철로 이동하는 시간에 읽는다. 여기저기 원고를 보내면 책으로 보내주기도 했다. 문단에 등단하고 나니 문인협회와 관련 단체에서 오는 잡지도 많다. 이럭저럭 책이 감당하지 못할 수준으로 불어났다. 북클럽 모임 때면 가지고 나가지만, 다른 사람이 가져온 책을 사거나 받다 보면 가져간 것보다 더 많이 가져온 적도 있다.
한번은 친구가 시골에 있는데 다 읽은 책이 있으면 보내 달라 하여 웬 떡인가 싶었다. 한 번에 몇 십 권 씩 택배로 부쳤다. 그렇게 많이 없앴다. 동네 자주 가는 음식점 주인이 책을 좋아한다 하여 갈 때마다 책을 들고 나가 놓고 왔다. 모임이 있을 때면 다 읽은 책을 배낭에 넣고 나가 온 사람들에게 나눠준다. 책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문학지 등 월간잡지 종류는 우리 건물 일층에 내다 놓으면 누군가 가져간다.
그렇게 처분하는데도 책이 넘쳐 난다. 뒷방에 둬야 하는데 이미 넘치니 거실 한 구석에도 쌓이기 시작한다. 누굴 주거나 쓰레기장에 버리면 되는데 그게 어렵다. 더 볼 일이 있을 것 같기도 하고 버리기는 아깝기 때문이다. 욕심에 일단 서점에 갔을 때 샀는데 아직 못 읽은 책도 점점 늘어간다. 잠실에 중고 서적 매매하는 곳이 생겼다. 상태가 좋으면 700원 정도 준다. 그걸 바라고 무거운 책을 지고 나갈 생각은 없다. 시골에 있는 친구에게 다시 안부를 물으며 택배로 보낼 궁리를 해본다. 모임이 있을 때면 볓 권씩 들고 나가 나눠줄 생각도 한다. 그리고 또 남는 책들은 과감하게 쓰레기장에 버리려고 한다.
서울 마포구 망원동. 감성적인 카페와 맛집, 편집숍 등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동네다. 그래서 요즘 젊은이들은 이곳을 ‘망리단길’(이태원의 경리단길 초창기 모습과 닮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부른다. 그 소문만 듣고 찾아가 인근 홍대거리나 가로수길의 비주얼을 기대했다면 조금 당황할지도 모르겠다. 망원동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망원시장’의 아우라가 무척 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금만 걷다 보면 느낄 수 있다. 그 이중적인 분위기가 바로 망원동의 매력이라는 것을.
‘망리단길’이라 불리고는 있지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라고 말하기는 모호하다. 그러나 어디서 시작해도 좋고, 어떻게 가도 망원시장을 만나게 된다. 특별히 어느 가게를 가려고 정한 것이 아니라면 망원역 2번 출구로 나와 망원시장을 중심으로 지그재그로 거닐어볼 것을 추천한다. 주택가와 시장 사이 골목마다 보석 같은 공간이 숨어 있다.
사실 망원동 마니아들은 자신들의 단골집이 알려지는 것을 꺼린다. 수수하고 한적했던 몇몇 가게가 입소문을 타는 바람에 관광지처럼 변해 버리는 경우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래전부터 자리 잡고 있던 상인들을 만나면 이곳이 ‘망리단길’로 유명해지는 것이 싫다고 이야기했다. 대부분 욕심 없이 장사하고 편안하게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가게를 낸 것인데, 뜨내기손님들이 몰려와 일상의 여유도 사라지고 단골들도 떠난다는 것이 안타까운 이들이다. 언론 매체에 소개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거나, 그 가게에 두세 번 방문해 충분히 어떤 곳이라는 것을 느껴야지만 취재를 허락한다는 곳도 있었다. 잠시 카메라를 끄고 만난 한 상인은 “처음 이곳에서 느꼈던 매력이 많이 사라진 것이 아쉽다”며, “월세도 많이 올라 조만간 다른 지역으로 가게를 옮길 계획”이라고 했다.
망원동 사람들의 바람처럼 그곳만의 소소하고 느릿한 매력을 해치지 않는 좋은 방법으로 ‘혼자, 또는 둘이서 방문하기’를 추천한다. 혼자 와서 밥 먹고, 차 마시고, 편집숍을 둘러보는 이들이 꽤 많은 편이다. 그곳이 주는 즐거움은 누구와 대화를 하거나 함께하지 않더라도 그 자체로 느낄 수 있는 요소가 많다는 점이다.
커피가게 동경 망원동 410-1 지하
드립커피를 주문하면 취향을 물어 그에 맞게 커피를 내려준다.
황인호의 원당수제고로케 망원동 486-39
망원시장 입구에 있는 고로케 맛집. 1000~1500원 선.
카페부부 망원동 376-15
노부부가 30년 동안 살던 주택을 젊은 디자이너 부부가 리모델링해 만든 공간. 커피, 디저트, 간단한 식사 주문이 가능하다.
디자이너 편집샵 RHOO 망원동 375-1
감각적인 디자이너들의 작품을 전시 및 판매하는 곳. 가게 한쪽에 있는 테이블 공간에서 잠시 쉬어가도 좋다.
장난감가게 마마미투 망원동 404-38
키덜트를 겨냥한 인형, 피규어, 캐릭터 문구 용품 등을 판매한다.인터넷 쇼핑몰(www.mamametoo.com)도 함께 운영.
만일 책방 망원동 399-46
대형 서점에서는 느끼기 어려운 아늑한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동네 책방이다. 가게는 작지만 커다란 테이블이 인상적이다.
에그머랭&쇼룸 더 팩토리 망원동 376-14
핸드메이드 모자, 가방, 신발, 매니큐어 등을 구경하면서 음료와 디저트를 즐길 수 있는 공간이다.
소쿠리 망원1동 414-16
‘작고 느린 상점’이라는 콘셉트로 운영하는 곳으로, ‘소쿠리’라는 이름처럼 투박하고 정겨운 물건들을 판매하고 있다. 옛날 시계나 접시, 물병 등 향수를 자극하는 소품들이 눈에 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