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에게 기차여행은 생각처럼 쉽지 않은 여행이라 늘 마음만 먹다가 말곤 했다. 특히 국내에서는 자동차로 갈 수 있는 곳이 많아 더욱 그랬다. 그러다 보니 특이하게도 국내에서는 거의 해보지 못하는 기차여행을 해외여행 중에 하곤 했다. 뮌헨에서 잘츠부르크로, 프랑크부르크에서 로맨틱가도로, 또 파리에서도 그랬고, 비엔나에서 부다페스트로, 일본에서는 북해도나 하코다테에서도 그랬고, 교토나 고베 등 숱한 기차여행을 해외에서 많이 한 셈이다.
시드니 여행에서도 두 번 정도의 기차여행을 했다. 그중 동화 속 작은 마을 같은 울릉공(Wollongong)을 가려면 기차를 타야 해서 시드니 센트럴 역으로 갔다. 아침 찬바람에 한기가 온몸으로 엄습했다. 그곳은 8월 중순이어도 아직 겨울이었기 때문이다.
울릉공 역으로 향하는 시티레일은 남쪽으로 80Km 정도 달려서 약 두 시간쯤 걸리는데 차창 밖의 겨울 풍경이 우리나라의 늦가을의 풍경이었다. 차분하고 맑았다. 차츰 울릉공이라는 안내 글자와 그림들이 보이기 시작했고, 기차가 역에 멈추자 많은 사람들이 우르르 내리기에 당연히 울릉공이라고 생각하고 무심히 따라 내렸다. 사람들이 몰려가는 방향으로 따라가다 보니 젊은 아이들이 모두 버스에 올랐다. 그제야 우리 부부는 그 버스가 울릉공대학 스쿨버스였음을 알게 됐다. 한 정거장 먼저 내린 것이다.
“어쩌지?” 하며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자, 후덕해 보이는 아줌마 운전기사가 내려오더니 우리에게 자기네 스쿨버스에 타라고 한다. 그리고 다음 정류장에서 하차해 그린색 셔틀버스를 이용하라고 친절하게 안내한다. 젊은 대학생들로 가득 찬 울릉공대학 스쿨버스 덕분에 우리는 목적지인 울릉공에 무사히 도착했다. 지금도 가끔씩 떠오르는 여행 장면이다.
그날 울릉공으로 들어섰을 때 멀리 있는 등대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넓고 화려하진 않지만 정겨움이 느껴지는 해변이었다. 휴식을 위해서, 사색의 시간이 필요해서, 행복한 대화를 위해서 우리는 그곳에 있었다. 갈매기가 사람과 같이 놀아주는 곳, 낮은 파도가 마음을 위로하는 곳, 바람이 좋아서 맑은 날에는 행글라이딩을 즐기려는 사람들이 찾아오는 곳, 시드니의 명물인 오페라하우스의 화려함이나 거대한 하버브리지만큼 대단하지는 않아도 여행자를 편안하게 해주는 정감 있는 곳이 바로 울릉공이다. 요즘엔 우리나라 사람들이 신혼여행지로도 찾기 시작했다 한다.
해안가를 거닐다 보니 바닷가의 그들과 동지의식이 절로 생겼다. 여유롭게 벤치에 앉아 겨울 햇살에 반짝이는 바다를 바라보면서 그 시간을 온전하게 누렸다. 그런 시간들을 다시 누리기는 어렵겠지만, 가끔삶이 고단하거나 숨이 차오를 때 가끔씩 그 시간들을 떠올리며 호흡을 가다듬을 수 있다면 울릉공에서의 하루는 값진 날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 문득 호주 여행의 잔잔했던 그날이 떠오른 것은 가라앉은 계절 탓일 수도 있다. 그 바닷가의 반짝거리던 햇살만큼 따뜻했던 울릉공역 카페의 커피 한 잔이 그리워지는 초가을 아침이다.
스위스 출신의 유엔인권위원회 자문위원인 장 지글러의 를 읽고 충격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땅 위의 모든 사람이 잘 먹고 잘 사는 것으로만 생각해, 상대적 빈곤과 불행에 빠져 있던 사람들에게 장 지글러의 글은 깨달음 이상으로 다가오는 분노에 다름 아닐 것입니다.
문명이 발달하고 경제가 발전할수록 지구별에는 이상한 증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세계 도처에서 매일 3만5000여 명의 아이들이 굶주린 채 죽어가고 있으며 10억 명 이상이 하루 1달러 이하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구촌에는 120억 명의 인구가 먹고도 남을 식량을 생산할 수 있지만 한쪽에선 굶어 죽고 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지구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요?
식량 생산이 부족해서도 아니고 인도적 지원과 도움이 부족해서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굶주린 아이들의 부모나 민족성이 게으르기 때문도 아닙니다. 그러면 도대체 왜 이 지구촌 한쪽에서는 남아도는 식량을 버리고 있고 한쪽에서는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인간의 탐욕 때문입니다. 당장 굶주리고 있는 목숨보다 강대국과 다국적 기업의 이익이 앞서고 있습니다. 빈민가의 어린이들을 도와주는 일도 강대국의 정치적, 경제적 이익에 따라 좌지우지되고 있습니다. 강대국의 이익이 앞서지 않는 곳에서는 또 다른 문제들이 즐비합니다. 족벌과 군벌로 무장된 분열이 정의를 비웃고 있는 것입니다. 인도적인 식량 지원은 아이들의 손에 들어가기 전에 총칼로 무장한 군벌의 손에 들어가 또 다른 전쟁의 물자로 사용되었습니다.
인간을 기아로 몰아넣는 이 증상을 우리는 학살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습니다. 이 대량학살을 종식시키기 위한 인간의 노력은 그다지 아름다워 보이지 않습니다. 속수무책으로 인간이 굶주리고 있는 동안 엄청난 양의 옥수수가 소의 먹이로 사라지고 있습니다. 제3세계의 주식인 곡물은 투기 대상이 되었으며, 남쪽의 농경지는 헤지펀드의 약탈에 남아나지 않을 지경입니다. 또 자국의 탄소연료를 줄이기 위해 농업연료를 생산한다는 미명 아래 태워 없애는 옥수수는 셀 수조차 없습니다. 세계의 식량 자본가들이 시장에서 자행하는 농업 덤핑은 제3세계의 농업을 뿌리째 흔들어놓고 있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밤잠도 안 자고 농사를 지어도 덤핑가로 들어오는 수입산에 밀려 제값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환경도 빈민의 편이 아닙니다. 매년 약 600만 헥타르의 땅이 사막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아프리카 대륙의 73%가, 아시아 대륙의 71%가 사막화의 영향 아래 놓여 있습니다. 수많은 인구가 식수가 부족해 환경난민이 되어 고향을 등진 채 떠돌 수밖에 없습니다. 사막화뿐이 아닙니다. 말레이시아, 콩고, 가봉 그리고 아마존 일대에 남아 있는 원시림이 매년 수백만 헤타르씩 자취를 감추고 있습니다. 거대한 플랜테이션 농장이 들어서고 목재 판매회사들이 불법으로 벌채해서 숲을 마구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지구의 허파인 이 원시림의 파괴가 지구에 미치는 영향은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유엔환경계획(UNEP)은 세계적으로 환경난민이 2억5000만 명 이상이 될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10년 사이에 그 숫자는 10억 명까지 불어날 것이라고 합니다. 환경난민은 도시로 몰려들어 정착하고 있습니다. 세계 인구의 60% 이상의 인구가 도시에 거주하게 됩니다. 문제는 도시인구의 증가가 삶의 질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인구가 판자나 비닐, 녹슨 함석으로 지은 초라한 빈민촌에서 살게 됩니다. 환경난민의 희망은 도시에서 삶의 질이 향상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정해진 일자리도 거주지도 사회보장 자격도 없이 살게 됩니다. 그러니 정기적인 수입도 없고 의료 혜택은 물론 교육조차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강대국의 음모도 지속적이고 끊임없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아프리카의 최빈국 부르키나파소의 개혁자 토마스 상카라(Thomas Sankara)는 사회 정의가 이뤄지지 않으면 충분한 식량을 생산해도 아무 소용이 없음을 알고 개혁에 착수했습니다. 거대한 행정조직을 축소해 부정부패를 줄이고 자치구역을 설정해 탈중앙집권화를 실시, 도로건설과 수도사업 그리고 보건의료사업 등을 자치적으로 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또 철도를 건설하고 인두세를 폐지하였습니다. 토지를 국유화하여 경자유전을 실시했습니다. 부르키나파소는 4년 만에 농업 생산량이 크게 늘었으며 민주적이고 정의로운 나라로 탈바꿈했습니다. 그러나 부르키나파소의 성공은 정치 부패에 시달리던 이웃 국가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들은 프랑스 정권의 꼭두각시 정권이었습니다. 프랑스 정부는 상카라의 개혁을 별로 반기지 않았습니다. 이들의 음모에 상카라는 결국 동지였던 참모에게 살해당했고 부르키나파소는 과거로 회귀하고 말았습니다. 부패는 만연했고 농민은 절망해야 했습니다.
이처럼 제3세계에서 일어나는 자연재해, 기근, 종족 분쟁 등에 대해 선진국이나 국제원조기구들은 지속적인 관심을 촉구하고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잊혀져가고 있습니다. 저자인 장 지글러는 이 책에서 토지 개량도, 사막화 대책도, 농업 지원도 결국은 응급조치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기아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을 제시하고자 했습니다. 장 지글러는 무엇보다 인간을 인간으로 대하지 않는 살인적인 사회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인간의 얼굴을 버린 채 사회윤리를 벗어난 시장원리주의 경제인 신자유주의, 세계를 불평등하고 비참하게 만들고 있는 폭력적인 금융자본 등을 바로잡지 않고는 기아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은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나라를 바로 세우고 자립적인 경제를 가꾸려는 노력만이 진정한 해결책이라는 것이죠. 그런데 이 시장원리주의(신자유주의)는 선진국에서 만든 경제원리이자 제도입니다. 그렇다면 기아는 선진국의 경제논리에 의해 탄생한 것일까요? 참 아이러니합니다.
“배낭여행 가려는데 어디가 좋을까?” 딸아이의 물음에 “인도가 좋다던데!”라고 무심코 대답하는 아빠. 그러자 옆에 있던 엄마가 한마디 거든다. “인도는 위험하지 않을까? 당신도 함께 다녀오는 건 어때?” 그렇게 보호자 신분(?)으로 아빠는 딸과 여행을 떠났다. 딸의 꿈으로 시작된 배낭여행은 이제 함께하는 꿈으로 성장했고, 아빠는 딸의 보호자가 아닌 꿈의 동반자가 됐다. 어느덧 8년 차, 환상의 배낭여행 콤비 이규선(62)·이슬기(32) 부녀의 여행기를 들어봤다.
◇ 아빠 이규선
30년간 다닌 은행에서 은퇴 후, 시골로 내려가 자연인으로 살고 있다. 딸 덕분에 여행에 눈을 뜬 뒤, ‘어디로 떠나지?’라는 즐거운 고민에 빠져 지낸다. 자타공인 ‘딸바보’라 불리길 좋아하는 푼수 아빠다.
◇ 딸 이슬기
삼성맨을 그만두고 놀이·공연·강연을 기획하는 액션건축가로 활동하고 있다. 추억부자가 되길 바라는, 또 무엇보다 부모님의 ‘베스트프렌드’가 되길 바라는 철부지 딸이다.
◇ 이규선·이슬기, 우리 부녀의 여행은?
여행 이력 8년 차. 인도,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 15개국 111개 도시 여행
여행 콘셉트 청춘여행! 나이와 무관하게 자기가 꿈꾸는 걸 실현할 수 있으면 그게 바로 청춘!
여행 시기 목표로 했던 꿈을 이루고, 그다음 꿈을 향해 갈 때
역할 분담 아빠) 그날그날 일과 짜기&요리담당, 딸) 예약 및 정보수집
여행 경비 현재까지는 아버지와 자신을 위한 선물로 딸이. but, 돈 관리는 아빠가!
사실 말은 쉽지만 가족여행은 친구들과 떠나는 여행보다 훨씬 더 어렵다. 어쩌면 ‘가족여행’이라 쓰고 이렇게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싸운다. 고로 가족이다.’ 에 딸 슬기씨가 쓴 글귀다. 낯선 이국땅에서 아빠는 딸에게 맞추느라, 딸은 아빠에 맞추느라 서로 마음고생도 적지 않았을 터. 그러나 아빠와 딸이라서 다시 애틋한 가슴으로 서로를 껴안을 수 있었던 그들이다.
첫 배낭여행, 싸우며 싹 틔운 부녀의 동지애
아빠: 인도에 도착하고 처음 며칠은 거의 공포 수준이었죠. 여행 초보자가 감당하기엔 버거웠거든요. 그런 데다가 딸이 이거는 이렇게 해라, 저거는 하지 마라는 둥 잔소리를 하니 서럽더라고요. 그때만큼은 한국에 있는 아내가 무척 보고 싶었어요. 그래도 그런 과정을 거치다 보니 아빠와 딸이라는 수직적 관계에서 벗어나 어느새 동지애를 느끼는 친구가 되어 있더라고요. 이전보다 대화거리도 풍부해졌고, 딸에 대한 믿음도 더 확실해졌죠.
딸: 처음 배낭여행을 떠나는 아빠인데, 친구와 함께 간다고 착각하고는 티케팅 30분, 배낭 싸기 한 시간, 그리고 여행 관련 책 한 권 달랑 가방에 넣고는 여행 준비를 끝내버렸죠. 여행 초반에는 아빠와 하루에 열 번, 아니 그 이상 싸웠어요. 그래도 그 넓고 낯선 곳에서 믿을 사람은 아빠와 나뿐 아니겠어요. 긴급한 상황에 서로 의지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똘똘 뭉치게 되더라고요.
서로의 낯선 얼굴과 마주하다
아빠: 살면서 자식과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될까요? 우린 자식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슬기에 대해 누구보다 많이 알고 있다고 자신했는데, 집 밖에서 본 딸애의 모습은 문화적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얘가 언제 이렇게 컸나? 이런 모습도 있네? 신기하고 대견하기도 하면서 이제 더 이상 품안의 자식이 아니라는 생각에 조금 슬프기도 했습니다.
딸: 내게 익숙한 아빠의 모습은 ‘가장’이라는 책임의 가방을 메고 있는 남자였어요. 히말라야에서의 밤, 어두컴컴한 방 안에서 촛불을 켜고 카드게임을 하며 이런저런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눴죠. 아빠는 어떤 학생이었는지, 첫사랑은 누구였는지…. 이야기 속에는 나보다 어린 나의 아빠가, 그리고 내 나이의 아빠가 있었습니다. 아빠라는 책임감을 어깨에 메기 전, 그도 한 소년, 한 남자였다는 것을 알게 됐죠. 여행을 하면서 아빠는 내게 ‘이규선’이라는 한 사람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는 꿈과 희망, 열정으로 가득한 멋진 남자였습니다.
“또 같이 갈까?” 여행 유발자는 누구? 아빠? 딸? 둘 다!
아빠: 첫 여행 때 호되게 (딸아이에게) 시집살이를 하고 다시는 슬기와 여행 가지 않겠다고 입에 거품을 물었습니다. 하지만 나의 60대 버킷리스트, 유럽여행을 위해 다시 딸의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어요. 그동안 여행을 다닌다고 다녔지만 여행 일정, 이동 경로와 수단, 숙박까지 스스로 해결하기엔 어려울 것 같더라고요. 혼자 끙끙거리는데 때마침 슬기가 전화를 해 여행을 가자는 거예요. 첫 여행에서 당한 것이 떠올라 잠시 망설이기도 했지만, 결국 함께 떠나기로 했죠.
딸: 여행은 내가 나에게 주는 선물이면서, 또 다른 꿈을 키울 수 있는 소중한 휴식시간과 같아요. 그럴 땐 어느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아야 하고, 그러면서도 무엇을 하든 응원해줄 수 있는 동반자가 필요하죠. 내겐 아빠가, 아빠에겐 내가 그런 존재입니다. 그래서 자주 함께 떠나는 것 같아요. 여행을 다녀오면 그때의 추억을 이야기하고, 자연스럽게 ‘이번엔 어디 갈까?’라는 말을 꺼내게 되죠.
‘부모·자식’ 여행을 꿈꾸는 이들에게
아빠: 은퇴 후, 공허함이 밀려왔습니다. 갑자기 주어진 자유를 이겨내기 어렵다고 느꼈을 때, 사랑스러운 딸 슬기가 배낭여행이라는 요술로 그 굴레를 벗어나게 해주었습니다. 시간은 흐르고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무조건 떠나세요. 나의 분신, 자식과의 여행은 여러분을 행복한 추억부자로 만들어줄 것이라 확신합니다.
딸: 온 가족 여행도 좋지만, 장기 여행이라면 모녀, 부자 등 두 사람이 떠날 것을 권합니다. 여행은 보러 가는 것보다 느끼러 가는 게 더 크다고 생각해요. 여럿보다 단둘일 때, 서로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죠. 이왕이면 상대의 이야기를 충분히 들을 수 있도록 여유 넘치는 곳으로 가면 좋겠어요. 그런 점에서 ‘산티아고 순례길’도 추천할 만합니다. 걷고 싶은 데서 걷고, 쉬고 싶을 때 쉴 수 있어 생각만큼 부담스럽지 않아요. 함께 걸으며 건강도 챙기고 무수히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답니다.
◇ 자녀와 함께 떠나는 해외여행 Tip 10가지
1. 망설이지 말자. 때는 바로 지금!
2. 잘만 먹어도 성공한 여행이다. 필수품으로 팩소주와 라면, 그리고 고추장.
3. 많이 걷자. 여행 책자와 지도를 들고 발이 가는 대로 무작정 걸어보자.
4. 대중교통을 이용하자. 다양한 사람을 구경하는 것이 유명 관광지보다 볼거리가 더 풍성할 때가 많다. 대중교통 표를 직접 구입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5. 긴장을 풀고 (자식보다) 앞장서 가보자.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다고 느끼는 순간 마음은 편해지고 여행도 한결 즐거워질 것이다.
6. 사진을 많이 찍자. 셀카봉은 필수! 자연스러운 사진을 찍고 싶다면 몰래 찍는 파파라치 컷을 추천한다.
7. 내가 가고 싶은 곳으로 여행을 떠나자. 자녀가 골라주는 곳도 좋지만, 직접 여행지를 찾아 떠나면 즐거움과 더불어 성취감까지 얻을 수 있다.
8. 다양한 숙소를 경험하자. 호텔, 게스트하우스, 호스텔, 현지인의 집 등이 있다. 이 중에서 서로의 삶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현지인의 집을 추천한다.
9. 그 나라 언어를 알지 못해도 여행을 ‘잘’ 할 수 있다. 물건을 사고, 음식을 주문할 때 직접 도전해보자. 손가락 몇 개와 간단한 영어로도 대화할 수 있다는 것을 직접 경험하면 자신감이 붙는다.
10. 배낭여행이지만 한 벌쯤은 휴양지에서 갖춰 입을 복장을 챙기자. 차려입었다는 기분 덕분에 해변에서 마시는 맥주가 더 맛있게 느껴질 것이다.
윤문상(59) 전 교육방송공사(EBS) 부사장은 대한민국의 숨 가쁜 교육현장을 유아교육에서부터 초·중·고 교육에 이르기까지 생생하게 담아온 현장 PD 출신이다. 그는 2016년 2월 교육방송 부사장을 퇴직하고 새로운 인생 2막을 준비하고 있다. 그의 인생 2막 계획은 6개월씩 타국에서 생활인으로 살아보기다. 이를 통해 “인생 리타이어가 아닌 리셋을 해보겠다”는 계획이다. 2016년 하반기는 대만에서 생활했고(4~10월), 2017년 상반기는 베트남에서 한국어와 언론학을 강의하며 거주할 예정이다. 마침 방학을 틈타 잠깐 한국에 머물고 있는 그에게 인터뷰를 청했다.
김성회 CEO리더십연구소장
퇴직 후 여행은 많은 사람들이 세우는 계획이지요. 관광이 아닌 6개월씩 다른 나라에서 살아보기식 ‘생활 거주’는 흔치 않습니다.
“6개월씩 타국에서 살아보기 프로젝트는 나를 객관적으로 파악하기 위한 강제적 공간 이동을 해보자는 의미에서 시작됐어요. 단지 타이어를 바꿔 끼는 리타이어가 아니라 처음부터 새롭게 리셋하고 싶었어요. 의식을 바꾸기 위해선 본인의 자발적 노력뿐 아니라 공간을 바꾸는 것도 필요하다는 생각에서요. 타국 거주의 강제적(?) 환경 설정으로 리셋한 것이지요. 버스를 타는 사람은 버스 안에선 자세히 볼 수 있지만 바깥 풍경은 자세히 보지 못합니다. 달리는 버스 밖에서 보면 안은 들여다보지 못하지만 객관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객관적 보기가 절실히 필요했던 이유가 있었습니까?
“퇴직 후 인생 2막 하면 기존에 하던 것의 연장선으로 강도-속도만 늦추는 것을 말하는 경우가 많은데요. 저는 과거의 경험과 지식을 연장하는 수준이 아니라 완전히 새롭게 시작하고 싶었습니다. 앞으로도 30, 40년 이상 일을 하고 살아가야 할 것이기에 ‘새로운 시작은 새 무대’에서 시작하고 싶었습니다. 익숙한 서울의 아파트 방에 앉아서 머리로만 생각을 하는 것과 말 설고 사람 설고 풍경 낯선 외국에서 생각하는 것은 다르잖아요. 한국에선 아무래도 한계가 있어요. 반면 외국에 갔을 때는 친한 사람도 없고, 언어와 문화 등 많이 불편하지만 원점에서 시작해 나를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보게 되지요. 외국에서 생활인으로서 살아보니 단지 출장이나 관광으로 접하던 것과는 달리 새로운 것을 느끼고 생각할 뿐만 아니라 본질적으로 나에 대해서도 깊이 성찰해보게 되더군요.”
리타이어와 리셋은 어떻게 다른가요?
“리셋은 한마디로 원점에서부터 새롭게 하는 적극적, 원초적 환골탈태라고나 할까요. 리타이어가 같은 트랙에서 속도만 늦추는 소극적 의미라면 리셋은 속도와 방향, 관점 이것들을 총체적으로 합쳐 객관적으로 보자는 의미예요. 그러기 위해 내가 나를 객관적으로 보는 것이 필요하지요. 한국이라는 익숙한 환경에선 내가 잘 아는 사람, 나를 잘 아는 사람만 만나게 돼 나를 있는 그대로 파악하기 힘들어요. 객관적으로 본다는 것은 조직 브랜드, 계급장을 떼고 자연인으로서 자신만의 정체성, 주제 파악을 하는 것입니다.”
리셋은 의식과 환경을 함께 바꾸는 것이군요. 월화수목금금 열정적으로 일한 분들일수록 ‘관성의 법칙’에서 벗어나기 힘들어하시던데요.
“하하. 군대 속담에 ‘졸병보다 제대병이 더 마른다’는 말이 있는데요. 퇴직자들에게 갑자기 시간이 주어지면 자율적 관리를 하지 못해요. 제 경우엔 마인드 세팅을 이렇게 했어요. ‘브랜드 없는 사무실에서 봉급 받지 않고 일할 뿐이다. 초조해하지도 말고, 시간에 끌려가지도 말고 시간을 자유자재로 끌었다 놓았다 하는 여유’를 갖자고요. 현직에 있을 때는 시간에 나를 맞췄지만, 이제 나에게 시간을 맞추자고요. 여기에 환경 리셋 작업으로 ‘6개월 낯선 국가에서 살아보기ʼ를 더한 것이고요.”
‘살아보기’ 리셋 경험 국가로 베트남과 대만 등을 선택한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기본적으로는 한국어, 언론학을 강의하며 생활인으로서 거주 환경이 마련될 수 있는 곳을 골랐지요. 엄밀히 말해선 자기성찰뿐 아니라 세상 관찰에도 목적이 있습니다. 인생 2막 프로젝트를 위한 사전 심층답사라고나 할까요. 4차 산업혁명 시대가 도래하는데 한 템포, 아니 반 템포라도 빨리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하지 않으면 힘은 두 배가 들면서 성과는 반 토막이기 쉽습니다. 아시아에서 사업을 할 경우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미리 준비하는 것이지요. 예를 들면 ‘호치민이라는 도시가 이런 발전 단계에 있는데 미래에는 어떻게 바뀔까, 무슨 씨앗을 뿌리고 어떻게 활용해야 할까’에 안테나를 세우고 관찰하고 통찰해보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노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미리 생각하고 준비하는 것이지요. 앞으로 기회와 잠재력의 나라인 탄자니아나 가나 등 아프리카 대륙으로도 가보고 싶습니다.
‘집 떠나면 고생’이란 말도 있지 않습니까. 막상 타국에서 사실 때 생각과 생활이 많이 달랐을 것도 같습니다만…
“외국에 살아보니 일단 퇴직했다는 사실을 저절로 잊어버리게 되더군요. 낯설고 어색한 환경에서 하나부터 열까지 스스로 해결해야 하니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었어요. 대만에선 대학에서 언론학과 특강을 하는 한편 6개월간 랭귀지센터에서 중국어 공부를 했습니다. 말하자면 선생님과 학생 역할을 동시에 한 셈이지요. 큰 사무실, 비서와 기사 딸린 임원생활을 하다가 작은 책상에서 중국어 기초부터 배우고, 북적거리는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하나부터 열까지 다 아내와 함께 해내야 했지요. 불편하기도 했지만 신선하다는 느낌이 더 컸어요. 특히 젊은이들과 함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이제는 대만을 가이드 없이 자유자재로 돌아다닐 수 있으니 그것만 해도 큰 소득 아닙니까. 성장과 발전이라는 불편함을 통해 익숙함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큰 소득은 아내와 동지애로 끈끈하게 뭉치게 된 것입니다. 이역만리에서 한 지붕 아래 같이 사는 네이티브 한국인은 우리 둘밖에 없으니 무슨 일을 하더라도 의논하고 의지할 수밖에 없더군요(웃음).”
윤 부사장의 지인들은 그의 성공력을 넘어 성장력의 원천으로 독서를 꼽는다. 동기들 중 차장, 부장 승진은 가장 늦었지만, 임원 승진은 제일 빨랐던 역전의 힘은 바로 독서력에서 나왔다. 낯선 것을 이질감보다는 호기심으로 수용했고 그 기저에는 책이 자리한다.
신입사원 시절부터 월급의 10%는 무조건 책 사는 데 쓰셨다면서요.
“네. 솔직히 말하면 직장생활 초년병 시절 10년간은 불평쟁이였어요. 늘 사표 던질 타이밍만 재며 불만이 가득한 채로 보냈어요. 그러다가 ‘이래선 안 되겠다’ 변화해야겠다고 결심을 하게 됐는데 책이 계기가 됐어요. 당시 월급이 40만원 정도였는데 4만~5만원은 꼭 책 사는 데 썼지요. 독서에 빠지다 보니 현재의 불만을 한 걸음 뒤에서 보고, 또 한 치 더 깊이 보게 되더군요. 사고력, 판단력을 넘어 힐링의 치유력을 줬다고나 할까요. 상계동 집에서 서초동 직장까지 두 시간 이상 지하철을 타고 다녔는데, 매일매일 정거장 숫자나 세면서 가는 것이 참 지루했습니다. 어느 날 문득 지하철을 도서관으로 만들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후 독서삼매에 빠져 지하철역을 몇 정거장 후딱 넘길 때의 기쁨은 뭐라고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제 인생에 영향을 끼친 , , 등 수백 권은 20년 동안 모두 지하철에서 읽은 책들이랍니다. 나중엔 누군가 집에 와서 다양한 책들을 보더니 ‘교수 같긴 한데 전공을 모르겠다’고 말하더군요(웃음).”
독서삼매에 빠졌던 이유가 궁금합니다.
“PD란 직업의 숙명 같아요. 여러 분야의 사람을 만나야 하는 직업상 필요에 의해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누구를 만나러 갈 때 그 사람과 관련한 책을 미리 읽는 것이 기본 예의란 생각을 한 게 독서의 직접적 동기였습니다. 라는 책은 과학 관련 내용이라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어려운 용어나 이론이 나올 때마다 그 부분을 쉽게 풀어쓴 책들을 다시 사서 읽으면서 진도를 나갔지요. 1년 뒤에 보니 관련 서적 50권 정도를 읽었더라고요. 극구 언론을 기피해 30분 내에 인터뷰를 끝내는 조건으로 겨우 인터뷰를 했던 어느 교육 전문가와 서로 좋아하는 책 관련 대화를 하다가 친해져 6시간 정도 대화를 했던 일도 있습니다. 책은 사교력뿐 아니라 판단력, 자신감도 키워주지요. 위로 올라갈수록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예측력과 큰 그림에 대한 파악력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윤 부사장은 ‘독서력은 퇴직 이후에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퇴직자들의 공통 트라우마는 ‘할 일이 사라졌다’는 목표 상실이다. 거기서 스트레스가 생긴다. 이럴 때 관심 주제를 정하고 2주 내에 관련 책 몇 권 읽기 등으로 목표 설정을 해놓으면 성취감뿐 아니라 정신건강과 목표관리에도 좋다”며 책은 시간 관리, 스트레스 관리의 해결책이자 좋은 친구라고 덧붙였다.
최근 1년 새 부모상을 잇달아 치렀다는 그는 삶과 죽음에 대해 깊이 사유하며 ‘어떻게 죽을 것인가’는 곧 ‘어떻게 살 것인가’와 통한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삶의 마지막을 미리 생각해봄으로써 남아 있는 현실을 좀 더 소중하게 느끼는 계기가 됐다고 한다.
죽음에 대한 준비란 어떤 의미인가요?
“‘죽음’ 하면 먼 일이라 생각하기 쉬워요. 그리고 ‘임종의 사전 준비’ 하면 상조회사, 묘자리 예약 등을 퍼뜩 떠올리는데요. 진정한 죽음의 준비는 세대 간 대화라는 생각을 했어요. ‘아버지(할아버지)는 누구이고, 어떤 고민을 해왔으며, 이렇게 살아왔다’를 책이든 뭐든 다양한 형식을 통해 들려주고 공유하는 것이지요. 어느 학교, 어느 직장 어느 직급까지 올라갔다는 이력서 상의 궤적을 넘어 한 인간 고유의 고민, 즉 삶의 흔적을 나눠주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본인에 대한 파악부터가 필요해요. 후손이든 누구든 대화를 나누려면 스스로를 알아야 하지 않겠어요. 기억을 되살리고 기록을 남기는 것, 생을 마무리하는 인간의 의무이자 권리라는 생각을 부쩍 하고 있습니다.”
존경받는 어른이란 무엇일까요?
“‘노인 하나가 사라지면 도서관 하나가 사라지는 것과 같다’는 말이 생긴 것은 그만큼 지혜의 기록화가 필요하다는 의미의 반증이라고 봅니다. 주관적 기억이 아니라 객관적 기록으로 남길 필요가 있다는 거지요. 우리나라가 현재의 부강한 국가가 된 것은 그냥 저절로 된 것이 아닙니다. 이 과정을 경험하지 못한 다른 세대, 다른 국가에게 이 무형의 자산을 무형의 기억이 아니라 유형의 기억으로 알려야 합니다.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든 기성세대는 충분히 자신감과 자부심을 가질 근거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조선 후기 실학자 다산 정약용이 유배생활 18년 동안 500여 권의 저서를 남긴 것은 사헌부 기록만으로 세상에 알려지는 것보다, 자신을 정확히 알리고 싶다는 강한 욕구 때문이었다”며 “일부 젊은 세대들이 기성세대를 꼰대라고 무시하고 폄하하는 것은 ‘잔소리만 많고 구체적이고 객관적인 기록’은 남기지 않은 원인일 수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
마지막 질문인데요. 인생 2막의 기준을 속도보다는 방향에 두고 말씀하시는 것이 인상적입니다.
“하하. 네, 맞습니다. ‘거리두기’를 통해 보다 객관적으로 보고,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을 깊이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진짜 의미가 있고 재미있었던 것이 무엇이었나, 어떻게 살아야 하나 돌아보고 있습니다. 생각해보니 중요한 것은 시설이 잘된 회의실에서 하는 대규모 회의도, 큰 예산이 들어가는 사업도 아니더군요. 의견이 맞는 사람들과 가치 있는 성과를 하나하나 이뤄간 것이었습니다. 인생 2막은 일의 규모나 외형보다는 삶의 질에 무게중심을 두고 싶습니다. 진정한 삶의 성과는 ‘어디까지 올라갔나’보다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을 했는가’에 있지 않겠습니까.”
점심에 만나 시작된 인터뷰가 끝났을 때는 어느덧 땅거미가 지는 저녁시간이었다. 귀갓길, 저 멀리 있는 입간판 글씨가 선명하게 보이고, 코앞의 버스정류장 노선안내 글씨가 희미하게 보이면서 읽히지 않았다. 요즘 부쩍 심해진 원시(遠視)의 증상이었다. 예전이라면 ‘노안(老眼)’의 시그널로 심란했을 텐데 문득 마음이 편안해졌다. 나이듦이란 가까이 보기보다 멀리 보기의 장점, 이점이 있는 것 아니겠는가. 무엇이 정말 중요한지는 한 발짝 떨어져 거리두기, 멀리 보기를 할 때 보다 더 잘 보일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김성회 CEO리더십연구소 소장
연세대학교 졸업. 경영학 박사. 서울과학종합대학원 겸임교수. 리더십 스토리텔러. 세계일보에서 CEO 인터뷰 전문기자로 활약했다. 세계경영연구원(IGM)과 삼성경제연구소 등에서 강의했다. 저서로는 , , 등이 있다.
은퇴 이후 인생 2막을 삶의 황금기로 만들 것인가, 황혼기로 만들 것인가. 황혼기와 황금기를 가르는 것은 무엇인가. ‘충분히 쓸 만큼 모아놓고 쟁여놓은’ 돈일까? 그보다 중요하고도 필요한 것은 인생을 재설계할 수 있는 은퇴 멘탈 갑, 즉 새로운 은퇴 마인드다. 과거 경력, 직장, 직책의 아우라를 들어내고, 자기의 진짜 정체성을 떳떳하게 드러낼 수 있는 사람이 진정으로 ‘브라보 마이 라이프’를 외칠 수 있다.
100세 시대를 앞둔 요즘, 은퇴 이후의 시기는 막다른 골목이 아니라 인생의 3분의 1을 살아내야 하는 인생의 터닝포인트다. 그래서 우리는 은퇴를 충격이 아닌 감격으로 맞고 싶다. 끌끌 혀를 차며 밸이 배배 꼬인 채 훈수나 푼수를 떠는 뒷방 노인이 아닌 적극 참여하는 현장의 선수로 사는 롤모델 인생 선배를 만나고 싶다.
퇴직 5년 차가 아니라 진짜 좋아하는 일을 선택한 ‘취업 5년 차’라는 박시호(63) 행복경영연구소 이사장을 만났다. 인디언 핑크색 니트 상의에 옅은 브라운색 패딩 점퍼, 흰 바지 그리고 빨간색 운동화에 무스로 바짝 세운 밤톨머리 헤어스타일을 하고 나타난 그는 과거 CEO의 물이 쏙 빠진 사람처럼 보였다. 그에게선 인터뷰 약속 장소인 ‘신촌’의 청춘물결에서 한 치도 뒤처지지 않는 것을 넘어 자유인의 바람마저 느껴졌다. 2003년부터 행복과 관련한 앤솔러지를 사진에 담아 매일 아침 이메일로 배달하던 일은 이제 취미와 봉사에서 ‘주업’으로 승격됐다. 그 외 강연과 원고 쓰기, 사진 찍기 등등 요즘엔 여행기획가로서 행복을 오프(0ff)에서 실현하는 일에까지 관심사를 확장하고 있다. 그의 하루 24시간은 풍요롭다.
은퇴 괴담은 현실적으로 ‘밥’ 이야기로 시작하곤 합니다. 제대로 대우받지 못하는 퇴직 가장의 현실을 표현한 단어 중에 ‘삼식이(집에서 삼시세끼를 먹는 가장)’란 호칭이 있는데요. 많은 퇴직 가장들이 “이러려고 지금까지 뼛골 빠지게 일했나”라며 피눈물을 흘린다고 합니다.
“감정계좌를 깡통계좌로 만들어놓고 만기일 됐다고 복리로 쳐서 가장 높게 대우해달라고 하면 되겠습니까? 집밥만 우기지 말고 칼국수집이든 냉면집이든 같이 맛집 순례라도 해보세요. 찜질방 같이 가서 놀자고 해보세요. 절로 삼식님이 될 겁니다(웃음). 가장이 건강해야 집안을 끌고 간다고 하는데 마찬가지로 부인이 건강하고 행복해야 집안이 유지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남편 혼자 행복하고 즐거우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퇴직 이후 집에서 대우받는 것은 남편 하기 나름이지요.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게 부부입니다.”
그는 “체력관리한다며 주중, 주말 가리지 않고 매일 등산 가던 친구가 있었다”며 부인이 뇌졸중으로 쓰러져 병석에 누운 후 그 친구가 “부인이 건강할 때 산에 같이 갈걸, 왜 나 혼자 갔을까” 하며 땅을 치고 후회하더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행복은 거창하고 멀리 있는 게 아니라 작은 데, 평범한 일상에, 함께 나누는 데 있다”고 말하는 그는 여러 일정 중에서 부인과 맛집 순례 후 하는 공원산책이 그날의 하이라이트라고 덧붙였다. 신혼 때처럼 전기가 찌르르 통하지는 않지만 40년 이상 살아온 인생 동지와 함께하는 ‘침묵의 공유’야말로 가장 든든한 의지가 된다는 이야기였다.
현직에 계실 때보다 더 활기차고 멋져 보이십니다. 부부 금실에서 비롯된 에너지 말고 비결이 있습니까.
“현직에 있을 때보다 몸무게를 10kg 정도 뺐어요. 회식이나 약속을 줄이고 운동을 하니 절로 빠지더군요. 제가 BMW족입니다. 버스(Bus)-지하철(Metro)-워킹(Walking),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많이 걷습니다. AMP 동기 부부동반 모임에 갔는데 집사람이 아무 정보 없이도 동기들 중 현직, 퇴직파를 족집게처럼 맞히더군요. 은퇴하면 현직 때의 아우라가 사라져 갈기털 빠진 사자처럼 되기 쉽습니다. 퇴직할수록 용모에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합니다. 퇴직하니 공식적 일 없다고 후줄근하게 입고 다니거나 등산복을 평상복으로 입고 다니면 안 됩니다. 오히려 더 산뜻하게, 몸에 꼭 맞는 옷을 입어야 해요. 뚝배기보다 장맛이 아니라 겉볼안이 더 맞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볼 때 이미지 판단이 6초 만에 끝난다고 하지 않습니까. 예전엔 아우라가 우러났다면 이제는 만들어야 한다고나 할까요. 퇴직할수록 의관이 생명이란 게 제 지론입니다 남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탓하지 말고, 먼저 남이 알아주도록 갖춰 입을 필요가 있습니다.”
은퇴 준비에도 선행학습이 필요할까요?
“일관된 인생 계획을 세워서 현직 시절부터 준비하지 않으면 의미 있는 은퇴의 삶을 살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선 공부를 해야 합니다. 죽을 때까지 배워야 합니다. 생존하기 위해서라도, 즐기기 위해서라도. 은퇴 이후의 공부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쫓기는 공부가 아닙니다. 자신이 즐길 수 있는 것, 좋아하는 것 뭐든 좋습니다. 사람들은 그동안 자신이 뛰어오던 트랙을 벗어나는 걸 두려워합니다. 그 두려움을 없애야 합니다. 등산도 높은 산을 오르려면 동네 산부터 오르며 준비하지 않습니까. 직장생활을 하면서 은퇴 후 뭘 하면 좋을까 늘 염두에 두고 그 일을 조금씩 준비해둬야 합니다.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될 수준을 향해 공부하십시오. ‘지금 이 나이에…’ 또는 ‘시간이 없다’ 말하지만 그것은 모두 새로운 것을 배우기 싫어해서 하는 핑계일 뿐입니다. 취미든 기술이든 뭐든 배움은 운명까지도 바꿉니다. 공부를 하고 도전하다 보면 전문가 반열에 오르고, 그것이 새로운 세상의 지평을 열게 해줍니다.”
실제로 미국의 한 설문조사 결과에 의하면, 은퇴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적응하기 힘들었다고 대답한 은퇴자가 41%나 되고, 대부분 단조롭고 지겨운 일상과 목적 상실 및 지적 자극의 결여로 고통스러워하고 있다고 응답했다. 은퇴에서 재정 설계 못지않게 필요한 것이 시간 설계, 즉 은퇴 후 동기 설계임을 보여주는 통계다.
행복이란 것이 요즘에야 흔한 담론입니다만. 행복편지를 시작한 2003년에는 요즘처럼 유행하는 화두가 아니었을 듯한데요.
“저도 욕심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정치도 해보고 싶었고, 돈도 많이 벌어보고 싶었지요. 그런데 특별조사부장을 하며 정치인, 재벌 총수들의 영고성쇠한 모습을 가까이서 볼 수 있었습니다. 자기가 지은 고충 건물에서 피고인으로 수사를 받아야 하는 기업 총수를 보며 권력, 금력의 무상함을 보았습니다. 또 부도가 나 자살을 한 금융인,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표변하는 인심의 허망함을 한꺼번에 압축해봤어요. 권력도 금력도 아닌 세상에서 진정으로 변치 않고 행복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봤지요.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행복이라는 생각에 미쳤습니다. 저의 어렸을 때부터의 꿈인 그림그리기를 시작했지요. 그러다 점차 재능의 한계를 느껴 사진으로 바꾸게 된 것이고요.”
그는 사진을 공부하면서 행복에 대한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고 덧붙였다. 쳇바퀴 같은 삶을 바쁘게 살던 그가 ‘저녁이 있는 삶, 주말이 있는 삶’을 애써 찾으며 여유를 갖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이번 주엔 이 꽃을 이런저런 각도에서 찍어봐야지” 하는 생각을 하면 기분이 좋아진단다. 또 사진을 찍으면서부터는 ‘집에 꿀단지를 묻어놓은 것처럼’ 퇴근을 기다렸고, 주말 새벽마다 강남고속터미널에 가서 꽃을 사는 행복한 마음은 뭐라고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행복하단다. 지인들에게 꽃 사진 선물을 하고, 그들이 감사인사를 전해오고, 급기야 행복편지까지 쓰게 된 계기가 되었다. 지인 700명 정도를 엄선해 보내는 행복편지는 감동적인 내용으로 ‘작지만 강한’ 행복 공유의 플랫폼이 됐다.
직장 후배들에겐 멘토로 여전히 환영받는 ‘퇴직 상사’라는 말씀 들었습니다. 그 비결이 있습니까? 어떤 분은 퇴직하니 알던 사람들 중 절반은 모른 척하며 떨어져 나간다고 ‘동선하로(冬扇夏爐, 여름 난로와 겨울 부채라는 뜻으로 철에 맞지 않는 물건을 이르는 말)’의 신세를 한탄하기도 하시던데요.
“하하. 저는 연락 안 해도, 거절당해도 고까워하지 않습니다. 또 조금도 불편하게 하지 않고요. 그러니 오히려 환영받네요. 잘해주면 고맙지만, 못 해주는 것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면 고까운 마음이 전혀 안 생깁니다. 상대도 부담스러워하지 않으니 오히려 더 찾더라고요. 부하직원들이 초대하면 병권을 맡깁니다. 예컨대 동석할 사람을 상대에게 정하라고 선택권을 주는 겁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만 정해 만나자고 하면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또 그 밥에 그 나물인 예전 사람들만 만나면 재미없는데 후배들이 새로운 사람 소개해주니 저도 좋지요. 폐쇄성을 나부터 없애야 합니다. 자기를 열고 세상에 맞추면 세상살이 편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려면 자기를 낮추고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또 상대가 누구든 불편하지 않도록 마음을 더 내어 배려해주는 것이 존중받는 비결입니다.”
박 이사장께서는 퇴직 후 제일 먼저 할 일로 명함 만들기부터 권하신다면서요.
“은퇴한 사람들이 모임에 나가면 제일 먼저 당황하는 게 명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명함이 없으면 몸을 꼬며 온갖 군말을 갖다 붙여요. ‘제가 회사를 그만둔 지 얼마 안 돼서요’ 등등. 스스로도 초라하고 서로 당황하기 쉬워요. 명함을 만들려고 구차한 자리 부탁하기도 하거든요. 당당한 명함은 당당한 자기정체성과 통합니다. 이제 과거의 후광은 벗어던지고 자기정체성을 드러내는 명함을 만드는 게 필요합니다. 하다못해 ○○를 연구하는 사람 ○○○라는 명함이면 어떻습니까. 말로 구구하게 설명하기보다는 자기정체성을 잘 드러내줄 수 있는 한 줄짜리 문장을 만들어보는 것입니다, 스스로 초라해질 필요 없습니다. 명함 주고받는 게 부담스럽고 부끄러워지면 대외활동은 끝나는 겁니다. 그만큼 중요해요. 아날로그 구세대에겐 직책과 직장이 필수이지만 젊은 디지털 세대는 그보다는 업, 좋아하는 일, 하고 있는 일이 더 중요합니다. 사진이면 사진, 서예이면 서예, ‘이것에 대해선 나한테 물어봐. 내가 설명해줄 수 있어’라고 말할 수 있는 전문 분야가 있다면 더 좋고요.”
박시호 이사장의 명함엔 사진가, 행복경영연구소 이사장이라는 직함과 함께 연락처(전화번호와 이메일)가 간결하게 들어가 있다.
퇴직 후 부딪히게 되는 어려운 점 중엔 경조비 부담도 빠지지 않더군요. 국민연금 100만원 이상을 받는 사람들의 가계부에서 경조비 비중이 16%나 됩니다. 의료비보다 높은 비중입니다.
“퇴직 상태에서 대소사가 한꺼번에 밀려들면 아무래도 부담감이 커질 수밖에 없는데요. 은퇴한 사람들의 고민이 ‘경조사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이지요. 체면과 얽히고설킨 과거의 인연 때문이지요. 저는 기분, 체면보다 기준을 분명히 합니다. 과거의 주고받은 인연보다 1년간의 교류를 기준으로 삼습니다. 아이들 결혼 때의 방명록도 그 자리에서 없애버렸습니다. 1년 동안 만나지 않은 사람은 교류가 없는 사람이고 그런 사람은 연락이 와도 경조사에 가지 않습니다. 정말 필요한 사람만 부르고, 성의만큼 성의를 표하자. 허례허식은 없애자는 게 제 주의랍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돈을 벌었지만 이제는 다르지 않습니까? 동창회 단체 공지에 올랐다고, 안 하면 욕먹는다고 찜찜해하면서 자주 보지도 않는 사람의 경조사까지 챙겨야 하는 것은 시간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비합리적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다 보니 주위에서 욕을 먹기도 해요. 그러나 욕을 먹더라도 자신의 기준을 지켜나가는 맷집과 용기도 은퇴 멘탈 갑의 마인드 중 하나입니다.”
박시호 이사장은 은퇴지능개발의 핵심 키워드로 배움을 꼽았다. 기술이든 지식이든 뭐든 배우고, 남의 눈 때문에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거나 그 반대의 경우가 없도록 하는 것. 그는 “좋은 사람과 맛있는 것을 나눠 먹을 때 행복을 느낀다”며 이 모든 것을 합친 것이 여행이라고 했다. 앞으로 여행 프로그램도 꾸준히 운영할 계획이라고. 지난 경험보다 앞으로의 계획을 말할 때 그는 더 설레면서 반짝였다.
은퇴 이후 새로운 삶의 설계와 도전도 마찬가지다. 용기 있는 사람만이 구태의연함에서 벗어나 신세계에 도전할 수 있다. 마음속에서 불을 뿜는 두려움의 용을 처단하고…. 박시호 이사장이 말한 ‘배움’은 구태의연함을 처단하고, 마음속에서 불을 뿜는 용을 무찌르는 날카로운 무기가 될 것이다.
>>김성회 CEO리더십연구소 소장
연세대학교 졸업. 경영학 박사. 서울과학종합대학원 겸임교수. 리더십 스토리텔러. 세계일보에서 CEO 인터뷰 전문기자로 활약했다. 세계경영연구원(IGM)과 삼성경제연구소 등에서 강의했다. 저서로는 , , 등이 있다.
어제는 동지였다. 동지 하면 바로 팥죽이다.
예로부터 동지에는 팥죽을 쑤어먹지 않으면 쉬이 늙고 잔병이 생기며 잡귀가 성행한다는 속신이 있어, 동지팥죽을 먹는 풍습이 있었다. 팥의 붉은색이 양색이므로 음귀를 쫓는 데 효과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팥죽을 먹는 것이 악귀를 쫓는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고향에 정착을 한지도 어느덧 4개월째로 접어들고 있다. 고향의 중심에는 백운산이 있고 그 산 중턱에 천년고찰 용궁사가 자리하고 있다.
용궁사에 대한 추억은 어린 시절 봄이 되면 어김없이 이곳으로 봄소풍을 갔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올라가는 길 따라 벚꽃이 지천으로 피어 있었으며, 용궁사 경내가 가까워지면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벚꽃냄새가 매캐한 향냄새와 어우러져 황홀지경에 빠질 정도였다. 특히 소풍날이나 운동회 날이나 되어야 맛볼 수 있었던 사이다의 톡 쏘는 맛에 취해 마냥 행복했던 그 시절이 생각난다.
그런데, 용궁사에서 동짓날 팥죽을 무료로 제공한다는 현수막이 눈에 띄어 기회가 되면 꼭 한번 가보겠다는 결심을 했다. 드디어 동짓날이 되어 어린 시절 친구에게 같이 갈 것을 권고하니 흔쾌히 동행해 주었다.
점심시간을 이용하여 12시에 산 아래에서 만나 쉬엄쉬엄 백운산을 오르기 시작한지 불과 20여분 만에 용궁사가 눈에 들어왔다. 멀리서 보아도 경내 주차장에 여러 대의 차가 주차되어 있었고 절간 마당에 많은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팥죽을 먹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마침, 아는 사람들 몇이 그 곳에서 팥죽 봉사를 하고 있다가 필자를 보고는 반색을 하며 자리를 안내해 준다. 김이 설설 오르는 팥죽 한 그릇에 동치미까지 곁들여서 차려 내왔다. 시장하던 차에 게눈 감추듯이 한 그릇을 뚝딱 해치우고 나니 떡에 커피까지 대접을 받게 되었다. 뒤꼍으로 가니 커다란 솥에 불을 지피고 대형 주걱으로 팥물을 휘휘 저으면서 팥죽을 쑤고 있었다. 어찌 그냥 지나칠쏘냐. 대형 주걱을 받아들고 노력봉사를 자청하고 나섰다. 팥죽이 끓으면서 솥바닥에 눌어붙지 않도록 부지런히 주걱을 저어야 한다고 귀띔을 해주니 참으로 열심히 노력봉사를 했다. 덕분에 내려올 때에는 포장용기에 팥죽을 여섯 개나 선물로 받아 휘파람을 불면서 내려왔다.
동지 날에 먹는 팥죽은 잡귀를 쫓고 풍년을 기원하는 의미도 있지만 팥죽은 몸에도 좋다고 한다. 여러 가지 의미로 일석이조라고 할까?
동지에는 팥죽을 사람이 드나드는 대문이나 문 근처 벽에 뿌리기도 한다. 또한 팥죽을 먹는 풍습에는 풍작을 기원하는 의미도 있다고 전해지고 있다.
동짓날 우연히 천년사찰 용궁사에서 팥죽을 얻어먹었으니 이제 잡귀는 모두 물러가고 내년에는 좋은 일들만 있으리라는 생각을 하면서 산새가 지저귀는 오솔길을 따라 내려왔다. 포근한 고향의 정이 듬뿍 느껴지는 동짓날이었다.
어릴 때부터 늘 궁금했다. 정월 대보름에는 왜 단단한 부럼을 먹는 것일까? 동지에는 왜 팥죽을 먹을까? “메밀묵 사려~ 찹쌀떡!”은 왜 겨울에만 들리고 여름에는 안 들리는 걸까?
겨울은 만물이 얼어붙는 시기다. 식물의 지상부는 시들고, 곰은 동면에 들어간다. 한의학에서는 겨울 3개월을 폐장(閉藏)이라고 한다. 겉으로는 피부를 닫고[閉], 속으로는 열과 에너지를 저장[藏]하는 시기라는 의미다. 사람 역시 웅크리고, 살찌며, 피부는 두터워지고, 따뜻한 집 안으로 숨는다. 겉으로는 찬 공기와 많이 접하기 때문에 수족 냉증이 잘 생기고, 찬 바람에 감기, 폐렴, 중이염, 비염이 많이 생기며 피부가 많이 건조해진다. 속으로는 열이 몰리면서 중풍, 심장마비, 심근경색, 협심증 등 심혈관계 질환이 많이 발생한다.
겨울철에 적합한 음식은 찰진 음식, 따뜻한 음식, 견과류
첫째로 추운 북쪽에서 자라는 곡식(찹쌀, 찰기장, 밀, 메밀 등)은 찰기가 있다. 이런 찰기를 이용해서 면, 빵, 묵, 떡을 만들어 먹는다. 이러한 찰기는 뭉치게 하는 효과가 있다. 그래서 면, 빵, 묵, 떡을 먹고 속이 뭉쳐 체하는 부작용도 있지만, 피부를 뭉치고 두텁게 해서 추위에 대비하는 효과도 있다. 그래서 “메밀묵 사려~ 찹쌀떡!”이라는 외침은 겨울철에만 들리는 것이다. 동지 팥죽에 새알이 들어가는 것도 같은 이유다.
메밀의 원산지는 바이칼 호, 히말라야, 동북아 등 아주 추운 지역이다. 메밀을 원료로 해서 만드는 메밀국수(소바), 냉면, 막국수는 원래 추운 지역의 겨울 음식이다. 이 음식들이 피부를 틀어막아 추위를 견디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냉면도 함흥냉면, 평양냉면 등 북쪽 겨울 음식이 유명하다. 일본의 소바도 북알프스, 중앙알프스, 동계올림픽으로 유명한 나가노 현의 추운 고산에서 처음 만들어졌다.
겨울철에 피부가 두꺼워진 상태에서 옷을 두껍게 입고 뜨거운 음식만 계속 먹다 보면, 내부에 열이 몰려 심혈관계 질환이 발생하기 쉽다. 겨울철에 중풍이 가장 많이 발병하는 이유다. 메밀은 성질이 차가워서 겨울철에 뜨거워진 속의 열을 식혀준다. 겨울철에 가끔 메밀국수와 냉면, 막국수를 먹어주면, 밖으로는 피부를 틀어막아 추위를 이기게 해주면서, 속으로는 열을 식혀주고 기름진 음식으로 탁해진 피를 맑게 해준다. 메밀이야말로 겨울철에 꼭 필요한 음식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설날에 떡국을 먹듯 일본에서는 한 해의 마지막 날인 섣달그믐에 소바를 먹는 풍습이 있는데, 떡국처럼 장수를 기원하는 의미가 있다. 계절과 관련된 식문화가 비슷한 데에는 반드시 그 이유가 있다. 뭉친 음식을 먹으면 잘 체한다. 체할 때는 떡 한 조각, 빵 한 조각에도 체한다. 이런 음식을 먹을 때 체하는 것을 막으려면 팥이나 매운 식재료(생마늘, 생파, 생무, 고추, 차조기 등)를 같이 먹는 것이 좋다. 붕어빵, 동지팥죽, 찐빵, 타이야끼에 모두 팥이 들어가는 것도 밀가루의 독이 뭉쳐 체하게 하는 것을 풀기 위해서다. 팥은 강한 신맛이 있어 뭉친 것을 잘 풀어주고 녹인다. 팥의 붉은 색이 나쁜 기운을 물리치고 전염병을 예방해준다는 속설이 있어 동짓날 팥죽을 먹기도 한다.
둘째로 체온 보존을 위해 염소고기, 양고기, 보신탕 등 따뜻한 음식들을 많이 먹는다. 중국 북부와 몽골 사람들은 추위에 버티기 위해 양고기를 많이 먹는다. 부추도 속을 따뜻하게 해서 추위를 이기게 해주므로 자주 먹는 것이 좋다. 그래서 겨울에 많이 먹는 만두에는 항상 부추가 들어간다. 부추만두는 콘셉트가 참 좋다. 만두피로 피부를 두텁게 해서 추위를 막아주고, 부추로 속을 데워 추위를 이기게 하는 음식이다.
으슬으슬 추울 때는 생강차나 고추, 마늘 등 매운 음식이 도움이 되지만, 장복하는 것은 좋지 않다. 에는 겨울에 생강, 마늘, 파를 많이 먹으면 봄에 간과 눈이 나빠지고 흰머리가 나며 수명이 짧아진다고 기록되어 있다. 동면해야 할 겨울에 매운 음식을 많이 먹어서 땀구멍을 열게 하고 정액, 피를 땀으로 내보내면 봄에 문제가 생긴다는 말이다. 보약 먹을 때 파, 마늘, 무를 먹지 말라는 말은 같은 의미다.
셋째로 견과류의 딱딱한 껍질은 내부의 엑기스는 꽁꽁 응집시켜놓고 외부의 세균, 바이러스 등 이물질은 완전히 몰아내는 역할을 한다. 정월 대보름에 견과류를 먹는 것은 다음과 같은 효과가 있다. ① 딱딱한 견과류는 정액, 진액을 갈무리하고 기침을 멎게 한다. ② 피를 맑게 해 겨울철에 자주 발병하는 중풍, 심장마비, 심근경색, 협심증 등 심혈관계 질환을 예방한다. 피가 맑아지면 부스럼 등 피부 질환도 예방할 수 있다. ③ 이빨은 뼈의 일종인데, 뼈 중에서 유일하게 밖으로 드러난 부분이다. 뼈에 자극을 주면 뼈가 더 단단해지고, 뼈가 단단해지면 기력과 면역력이 높아지고 장수에 도움이 된다. 그래서 기공법에서는 이빨을 서로 부딪치게 하는 고치법(叩齒法)을 자주 실천한다. 딱딱한 부럼을 직접 이빨로 깨서 먹는 것은 이런 효과를 얻기 위함이다. 따라서 겨울에는 연자육, 밤, 호두, 은행, 잣, 아몬드, 피스타치오를 먹어주면 좋다. 그런데 너무 많이 먹으면 오히려 내열이 생길 수 있으므로 적당히 먹어야 한다. 하루에 한 주먹 정도의 분량이면 적당하다.
겨울철은 꽁꽁 얼어붙는 계절이므로, 갈무리를 잘해야 한다. 땀을 많이 흘리는 것도 좋지 않으며, 멀리 나다니는 것도 좋지 않다. 태양의 운행에 맞춰 일찍 자고 늦게 일어나는 것이 좋다. 새벽에 찬 공기를 맞으며 운동하는 것도 피해야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를 외면하고 늦게 자고 무리하게 일하곤 한다. 이렇게 겨울을 보내면 봄에 춘곤증이 심해진다. 겨울에 건강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봄에 ‘spring’처럼 튀어 오르지 못한다.
겨울에 너무 따뜻하게만 지내는 것도 여름철 냉방병만큼 좋지 않다. 몸이 추웠다 더웠다 하면서 면역력, 적응력이 높아지는 것인데, 겨울에 춥다고 더운 방에서만 생활하면 면역력, 적응력이 떨어진다. 이런 상태에서 밖에 나가 찬 바람을 맞으면 금방 감기에 걸린다.
>> 최철한(崔哲漢) 본디올대치한의원 원장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졸업.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본초학교실 박사. 생태약초학교 ‘풀과나무’ 교장. 본디올한의원네트워크 약무이사. 저서:
'가온'은 '가운데'를 뜻하는 우리말인데, 새문안로 3길이 한글 이야기의 중심거리이기 때문에, 이 길을 ‘한글 가온길’이라고 이름 붙였다. 한글 가온 길에 가면, 한글학회와 주시경선생의 집터, 그리고 주시경선생과 헐버트선생의 부조가 새겨진 조형물이 설치되어있다. 또, 이야기꾼 전기수 할아버지와 각종 한글 조형물, 윤동주 시인의 ‘서시’가 있다. 그리고, 이런 한글 가온길을 해설하는 한글학자 김슬옹 박사가 있다.
◇ 한글학회
한글학회는 주시경선생이 운영하던 국어강습소의 졸업생과 동지들하고 뜻을 같이하여, 우리말과 글을 연구하고, 대중에게 한글이 바르게 보급되는 것을 목적으로, 1908년에 ‘국문연구회’를 설립한 것인데 그 후, 1911년에는 ‘조선 언문회’로, 1921년에는 ‘조선어 연구회’로, 1931년에는 ‘조선어학회’로 그 이름이 바뀌어 오다가 1949년에 오늘날의 ‘한글학회’가 된 것이다.
그런데, 한글학회가 지금의 새문안로 3길에 자리 잡기까지에는 사연이 있다. 1908년, 창립한 한글학회는 여기저기로 10여 차례 전전하며 떠돌이 생활을 해야 했다. 많은 자료와 서적 등을 가지고 이사를 다니느라 고생 하는 것을 보다 못한, 초대 법무장관이었던 이인선생이 평생에 걸쳐 마련한 돈과 집을 기증하였고, 이를 계기로 모금운동을 벌여 1977년에야 비로소 지금의 서울 종로구 새문안로 3길에 한글회관을 마련하여, 한글학회가 들어서게 된 것이다.
◇ 주시경선생과 그의 집터
한글 가온길에는 주시경선생의 집터가 있는데, 선생의 살림살이가 항상 궁핍해서, 조그만 집은 5남매와 책들로 비좁아, 발 들여 놓을 공간도 없을 정도였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한 독지가가 집을 마련해 주었고, 이후 주시경선생의 집은 ‘한글발전연구소’ 역할을 하게 되었다. 평생, 한글 연구에 몸 바쳐 오던 선생은 1914년, 39세의 젊은 나이에 이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곳은 지금은 '용비어천가'란 이름의 주상복합건물이 들어서 있다.
그리고, 도렴2동 녹지공원 ‘주시경 마당’에는 한글 발전에 초석이 된 주시경선생과 헐버트선생의 동상, 그리고 부조가 조형물로 설치되어있다.
◇ 헐버트선생
헐버트선생은 2013년, 7월의 독립운동가로도 선정된 미국인으로, 한글이 가장 과학적이고 훌륭한 글자라고 주장하며 세계에 한글을 알리는 데 공헌한 인물이다. 선생은 우리나라 한글로 된 라는 책을 만들었다. '조선 글자가 중국 글자에 비해 크게 요긴하건만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업신여기니 어찌 안타깝지 아니하리오.' 하면서 한국인보다 더 한글을 사랑했던 사람이다. 양화진 절두산에 있는 그의 묘지 비석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다. ‘나는 웨스트민스턴 사원에 묻히는 것보다 한국 땅에 묻히길 원하노라.’
◇ 김슬옹 박사
한글 가온길과 떼어서 생각 할 수 없는 사람이 있는데, 그가 바로 한글학자 김슬옹 박사다.
그는 젊은 시절에 철도공무원의 꿈을 안고 철도 대학교에 다니던 사람이다.
어느 날, 외솔 최현배선생의 영향을 받아 그분의 뜻을 이어 받고자 철도공무원의 꿈을 접고. 최현배선생이 강의를 맡고 있던 연세대 국문과에 입학 하였다. 그 이후로부터 지금까지 한글 사랑과 바른 한글사용의 보급에 힘쓰고 있으며, 현재 ‘한글학회 연구위원’으로도 일하고 있다.
그가 대학시절, 당시에 널리 사용하던 ‘서클’이란 모임이름을 ‘동아리’라는 이름으로 바꾸는 일과, 음식점에서 사용하는 ‘메뉴판’이라는 이름도 ‘차림표’라는 이름으로 바꾸는데 앞장서서, 지금은 그런 한글이 널리 사용되어지고 있는 것이다.
‘김슬옹’이란 그의 이름은 부모님이 지어준 이름이 아니다. 그는 ‘슬’기롭고 ‘옹’골찬 마음으로 한글을 사랑하는 옹달샘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김슬옹’으로 개명하였다.
김슬옹박사의 한글사랑이 온 국민에게 널리 퍼져서, 국민 모두가 한글을 사랑하는 ‘김슬옹박사’와 같이 되기를 손꼽아 기다린다.
우리나라에서 조망권이라는 개념이 처음 생긴 것은 1970년대 후반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에 현대아파트가 들어서고부터이다. 하지만 당시엔 한강 조망권은 아파트 값을 좌우하는 요인은 되지 못했다. 살아보니 한강이 보여 좋다는 정도였다. 2000년대에 들어서서 서울과 신도시를 중심으로 조망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이후 새롭게 등장한 것이 경기도 용인시 인근 택지개발과 함께 나온 골프장 조망권이다. 또한 서울에서 청계천 복원공사가 끝난 후에는 하천 조망권에도 관심이 더 높아지고 있다. 이처럼 조망 대상이 되는 것은 강, 하천, 호수, 바다, 공원 등이다. 그러나 조망 대상이 깨끗하지 못하면 조망권이 아니라 혐오시설 취급을 받는다.
도시민의 소득수준이 증가되고 삶의 질이 향상되면서 조망은 아파트 가격에 민감하게 반영된다. 그 원리를 알아둘 필요가 있다. 조망권 프리미엄이 적게는 수천 만원에서 많게는 수억 원까지 형성되는 등 이미 부동산 시세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 최근에는 조망과 소음 모두 아파트 개별 분양가격 산정 시 적극적으로 반영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조망을 가격으로 환산하는 방법은 보통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활용한다. 먼저 조망 대상을 정한다. 조망 대상 중 가장 멋진 풍경을 정한다. 그다음에 등급을 정한다. 보통 10등급 정도로 구분한다. 아파트라면 거실 등 아파트별 기준 지점을 정하고 눈높이를 정한다. 보통 1m 70㎝가 기준이다. 보이는 풍경에 따라 주관적으로 등급을 정한다. 이 등급이 아파트 조망 가격을 결정하는 지수가 된다.
예를 들어 앞이 막혀 한강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면 10등급, 가장 멋진 풍경이 담긴다면 1등급을 매기는 식이다. 1등급 조망에 해당되는 아파트는 1000세대라면 5세대가 나오기 힘들 정도라고 보면 된다. 보통 아파트 신규 분양 시 개별 호실별 가격을 책정하는 것이라면 최종 아파트 가격은 조망, 일조권, 소음, 프라이버시, 구조, 층, 향과 함께 계산한다.
보통 대로변 아파트라면 조망이 좋기 마련이다. 그러나 조망이 좋은 곳은 좋은 만큼 소음이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 한강변 등 아주 전망이 좋은 곳이 아니라면 도로변보다는 단지 중간에 있는 아파트가 더 인기가 있는 경우도 있다. 서울 암사동의 어느 아파트는 도로변에 있는 아파트보다 단지 중간에 있는 아파트가 2% 더 비쌌다. 소음이 아파트 값에 영향을 준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고가의 주택이 밀집한 지역일수록 조망 가치의 주택 가치에 대해 차지하는 비중이 크고, 상대적으로 저가의 주택이 밀집한 지역일수록 조망 가치의 주택 가치에 대해 차지하는 비중이 작다. 또 소득이 높아질수록 경제가 발전할수록 조망이나 소음 등 환경가치에 민감해지고 있다.
천공 조망과 경관 조망의 차이는 무엇일까?
천공 조망이란 주택에서 거실 창을 통해 보이는 하늘의 차폐 정도를 의미하고 경관 조망이란 거실 창을 통해 보이는 주변경관 정도를 말한다. 해당 호수의 거실 내에서 건물의 건축 전후의 경관을 비교하여 조망에 대한 차폐면적을 계산한다. 건물을 신축해서 기존 건물의 조망을 침해하였을 경우 조망권과 관련한 손해액을 산정할 때 쓰는 방식이다.
환경권의 가치는?
일조 및 조망과 같은 환경권의 가치가 주택 가치의 20%에 달한다는 법원의 판결이 나와 있다. 이 중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무엇보다도 조망권이다. 일조권은 이미 법적으로 그 권리를 인정받은 것임에 반해 조망권은 아직 그 법적 권리를 인정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조망 가치에 관련된 판례들은 2004년 이후 급증하고 있는 추세이다.
일조권은 어떻게 계산할까?
일조권과 조망은 당연히 차이가 있다. 일조권이란 햇볕을 확보할 수 있도록 법률상 보호되어 있는 권리로서, 인접 건물 등에 의해 태양 광선이 충분히 닿지 못하여 생기는 재산적 정신적 피해에 대하여 보상을 청구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통해 동지를 기준으로 오전 8시부터 오후 4시까지의 시간대별 그림자를 분석하여 호별로 일조 확보 여부를 분석한다.
>> 김정렬(金淨烈) 한국일반행정사협회 전임 교수
국내 최초로 부동산 전문가들로 네트워크를 구성, RE멤버스를 설립하고 부동산써브 대표를 역임했다. 한국자산관리공사, 한국자산신탁, 기업체, 금융기관 등에 부동산 자문을 꾸준히 하고 있다. 저서로는 등이 있다.
“현경 교수를 인터뷰하시겠습니까?”
지인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순간 멍해졌다. 그녀는 유명인사다. 세계인을 상대로 여성과 환경, 평화를 말한다. 이념의 장벽을 쌓지 않는 종교학자로 180년 역사의 미국 유니언신학대학(Union Theological Seminary in the City of New York, UTS) 아시아계 최초의 여성 종신교수이기도 하다. 고로 1년의 반 이상은 미국 뉴욕에 있으니 지금이 아니면 인터뷰가 어렵다는 뜻이었다. 현경(玄鏡·60). 인생을 두고 영광스러운 자리가 전화 한 통화로 시작됐다. 당황스럽긴 했지만 대답은 예스! 그렇게 세기의 지성을 만났다. 운명처럼 말이다.
서울 종로구 부암동에 무슨 일이…
현경 교수를 처음 만난 장소는 서울 종로구 부암동 주민센터였다. 부암동은 서울 중심에 있지만 고즈넉할 뿐만 아니라 70년대 모습이 남아 있는 곳이다. 그런데 그녀를 만난 지난 6월 30일은 고즈넉한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풍악대가 동네를 돌아다니며 풍악을 울리고, 화선지에 먹으로 그림을 그리는 퍼포먼스가 주민센터 앞에서 행해지고 있었다. 이날은 부암동 신축 건물과 관련해 건설업체 예지학과 주민 사이에 경관 훼손 및 조망권 침해와 관련한 공청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무엇보다 신축 건물이 세워진 곳은 현경 교수 집 바로 옆이었다.
“우리 집 위치가 부암동의 자궁이고 바람골이에요. 이렇게 모든 기운을 막는 건물을 지을 거라고는 상상 못했습니다. 이 집의 기운이 매우 좋아서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여성학자나 예술가에게 유산으로 이곳을 작업 공간을 남기고 싶었어요. 부암동의 흐름을 완전히 끊는 명백한 ‘건축 테러’라고 생각해요.”
미국에서 주로 생활하는 현경 교수는 공사 진행상황에 대해 잘 몰랐다고 한다. 여름방학에 집에 돌아왔다가 사태에 직면하게 된 것. 방학 동안에도 강연활동에, 신학자로서 설교, 설법하는 시간도 모자란데 이날만큼은 부암동 주민으로서 분주하게 뛰어야만 했다.
일반인은 이해 못 할 ‘기독교불자’
그녀의 이력을 보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기독교불자’라는 말이다. 평범한 지식으로 유일신을 믿는 기독교는 다른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다. 물과 기름 같은 종교를 합친 말이 특이했다. 일반적인 사고로 이해할 수 없는 경지라 조심스럽기까지 했다.
“난 기독교불자예요. 기독교신학자이고 목사 안수과정을 다 끝냈어요. 불교 법사도 받았죠. 이제 나는 종교의 틀과 이름을 벗어난 거 같아요. 교회에서 설교 할 때는 기독교신학자로, 불교 수양회를 할 때는 불교 법사로서 얘기하죠.”
기독교에서 바라보는 시각이 편하지 않을 것 같다며 우려 섞인 얘기를 건넸더니 그건 그들의 문제일 뿐이라고 답했다.
“사실 진보적인 교회도 내 입장을 받아드리기 어렵죠. 내가 불교 법사가 됐으니까요. 그런데 종교 간의 대화는 열린 기독교에서 얼마든지 받아드릴 수 있어요. 21세기는 종교의 틀을 벗어나야한다고 생각해요. 종교가 아니고 영성입니다. 여성운동 관점에서 보면 현대의 모든 고등 종교는 가부장적입니다. 종교에서 지혜와 전통은 배우고 가부장적인 고루한 전통은 이제 버려야 해요. 그래야 종교도 진화가 되죠. 종교가 강물이라면 강 밑에 도도히 흐르는 지하수가 영성이라고 생각해요.”
현경 교수는 현재 종신교수로 있는 미국 뉴욕 유니언신학대학에서 '아시아여성 해방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세계교회협의회 총회에서 아시아 여성의 영성문제를 제기하고 여성을 억압하는 남성위주 신학을 비판해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여성의 시선에서 종교와 사회를 바라보고 활동하며 자신 있는 여성의 삶을 말하고자 한다. 그래서 그녀의 종교 철학에는 ‘여신’이라는 표현이 쓰인다.
“나는 ‘여신’이라는 존재 혹은 기호를 만들어서 여성의 내적 지혜 혹은 신성에 관해 설명합니다. 여성이 너무 낮게 살지 말고 스스로 여신으로 살자는 의미죠, 여자들이 자기를 찾고 싶은데 뭔가 좀 당당하면 “나쁜 여자다”, “마녀가 좋다” 혹은 “공주다”, “아줌마다”라 말하면서 세상이 단정 지어 버리잖아요. 그런데 우린 다 여신이에요. 가장 깊은 신성과 우주가 우리 안에 들어와 있어요. 뭐 유치하게 남자와 동등함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 아니잖아요, 30대는 조금 힘들어요. 그런데 40대가 되면 조금 바라보는 시선이며 생각이 나아지죠. 그런 면에서 나는 여자가 40, 50대가 굉장히 예쁜 거 같아요. 60대도 예쁘잖아요?“
여성으로서 환경과 평화를 이야기하다
현경 교수는 종교학자, 교수라는 직업 이외에 여성으로서 환경과 평화에 대한 문제에 대해 실천하고 움직이는 사람이다. 우선 그녀가 말하는 에코페미니즘, 환경 여성해방운동은 무엇인가.
“환경과 자연해방, 환경의 문제와 여성문제가 근본적으로 철학적으로 연결돼 있다고 보는 거죠. 자연해방과 여성해방이 같이 가야 한다는 거죠. 에코페미니즘은 1974년 프랑스의 여성 철학자 프랑스와즈 드본느(Francoise d’Eaubonne·1920~2005)가 만들어낸 말이에요. 환경운동과 여성운동을 합쳐서 만든 말이에요. 나는 ‘살림이스트’란 말을 만들었어요. ‘살림살이’라는 뜻도 있고 자신과 타인, 지구를 살리는 일도 ‘살림’입니다. 내 안의 신성을 돌보고 내 이웃, 사회, 지구 전체 등 주변의 생명체들을 돌보는 게 바로 ‘살림’이죠. 공격과 충돌이 아니라, 상생과 대화를 믿는 게 바로 ‘살림이스트’, 한살림운동이나 여성 환경운동연대가 다 에코페미니스트고 살림이스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름과 겨울방학 때 현경 교수는 주로 여성· 환경· 평화운동을 하는 사람들과 많은 일을 한다. “2015년에는 전 세계 노벨평화상 받은 여성평화운동가 30명과 함께 평양에서 경의선 육로를 통해 한국으로 걸어왔던 ‘위민크로스 DMZ(Women Cross DMZ)’ 걷기행사를 했어요. 그 전에는 달라이 라마(達賴喇嘛), 아크비숍 데스몬드 투투(Archbishop Desmond Tutu) 등 노벨 평화상 수상자들과 20년 동안 전 세계 분쟁지역을 다니면서 평화의 다리를 놓는 일을 했어요. 멕시코의 치아파스, 북아일랜드, 캄보디아, 남한과 북한, 팔레스타인. 이스라엘 등 여러 분쟁지역을 다니면서 어떻게 하면 서로 평화를 만들 수 있을까 같이 나누는 일을 주로 했어요.”
편견을 이겨내는 삶
이렇게 활달하고 시원하고 생각을 표출하는데 스스럼없는 현경 교수지만 많은 편견을 이겨내고 살았다. 1989년부터 7년간 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학과 교수로 재직할 당시 그녀의 교수실에는 전 세계를 돌면서 수집한 여신상이 방 한가득 꾸미고 있었다. 그 방에서 학생들과 쌓은 추억을 되살리며 황홀했다고 회상했다. 그러면서도 종교적 입장이나 반제도적 성향으로 비춰졌던 자신의 행동 때문에 학교와 마찰은 피할 수는 없었다고 했다. 하지만 현경 교수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버텼다.
“세 가지 방법이 있어요. 첫째, 완전히 깎으면서 도가 트는 방법. 두 번째, 아예 안 깎고 내 멋대로 사는 방법, 그리고 세 번째는 그냥 욕먹어가면서 적당히 사는 거예요. 대신 욕먹을 때 상처받지 말아야죠. 그냥 저들은 나를 오해할 권리가 있고 나는 해명할 의무가 없다고 말이에요. 그냥 그들의 생각이고 나는 내 생각이고 이렇게 생각하면 편해요.”
모든 게 좋아 보이는 뉴욕 생활도 사실은 만만치는 않다고 했다.
“아무래도 뉴욕의 백인 학교에서 교수를 한다는 건 인종차별주의라든가 백인들의 문화적인 제국주의와 부딪히지 않을 수 없어요. 그런데 어떤 방식으로든지 잘 싸워가면서 살아가는 거죠. 자기 삶을 사랑한다는 것은 맷집이 키우는 거라고 생각해요. 맞게 되면 내가 이렇게 했으니까 맞는 거구나. 단 상처 받지는 말아야죠, 그렇다고 매를 맞지 않기 위해서 내 말을 안 할 수 없잖아요? 내 목소리를 내면서 매를 안 맞으면 제일 좋겠지만, 매를 맞게 되면 기꺼이 맞고 또 확 풀고 살아요.”
현경 교수가 처음으로 사람처럼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영성과 종교적 관념을 얘기하는 그녀와는 또 다른 이미지였다. 이에 현경 교수는 “당연히! 안 그러면 어떻게 살아남았겠냐”며 교수가 되고 박사가 되는데 수석으로 들어가 수석으로 나왔기에 맷집도 필요했고 패기도 필요했다고 말했다.
한국애서 현경은 ‘빡’세게 살아야 했다
그녀의 경력을 보면 그 누가 봐도 ‘나쁘지 않은 삶을 살았네’라고 생각할 것이다. 수학의 전 과정을 수석으로 들어가 마쳤다는 그녀가 좀 얄밉게도 느껴졌다.
“난 공부 잘하는 사람이 아니었어요. 원래의 꿈은 예술가였다. 미술이건 무용이건 연극이건. 그런데 아버지의 사업이 망했어요. 매번 꼴찌만 했는데 생존 때문에 공부 열심히 했죠. 학교도 못 가게 생겼더라고요. 그래서 하루에 4시간만 자고 공부했어요. 전액장학금 받으려고. 그래서 내가 중학교 때부터 박사학위 받을 때까지 학비를 한 번도 내 본 적이 없게 된 거예요. 대학을 들어가선 학생운동을 만났고 그땐 그럴 수밖에 없던 시절이니까. 인문계열로 들어가서 하고 싶은 공부 다 하고 3학년 때 신학전공하고, 철학를 부전공했으니 철학적 신학을 공부한 거죠.”
뉴욕에서의 삶, 교수, 학자 그리고 탱고
그래도 종신교수로서의 삶은 행복하다. 죽을 때까지 가르칠 수 있고 세계에서 모인 학생들과 함께 공부하는 자체만으로도 좋다.
“제가 가르치는 것이 불교와 기독교의 대화, 아침의 불교 명상, 신비주의와 현명의 영성, 에코 페미니즘과 지구 영성, 종교와 평화 등입니다. 내 과목이 재미있는 것은 내가 그냥 교수가 아니더라도 일생동안 그 분야에 관련한 책을 보면서 살고 싶어요. 근데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하면서 가르치면서 그걸로 돈을 버니까 너무 괜찮은 거죠. 그리고 뉴욕에서 저는 끊임없이 공부해요. 미술사를 공부하고, 문학 클럽에 들어가서 한 달에 한 번씩 세계고전을 계속 읽고 아르헨티나의 탱고를 배워요. 너무 예뻐요, 정기적으로 배우러 다녀요. 내가 즐겁자고 하는 거죠. 부에노스아이레스에 갔을 때 완전히 반해서 배워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늙은 여자가 추기에 딱 예쁜 춤이 탱고인 거 같아요. 젊은 여자들은 잘 이해 못할 거 같아요.”
뉴욕의 삶이 너무 빡빡해 보였다. 쉼 없이 가르치고 공부하고 또 뭔가를 배우는 바쁜 삶의 연속 같았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정말 열심히 일하죠. 새벽에 일어나서 명상하고 학생들 가르치고요 그런데 금요일 오후부터는 모든 걸 닫아요. 인터넷도 안 해요. 그리고 주로 자연에서 시간을 보내요. 등산을 한다든지, 운동은 한다든지, 바다에 간다든지 일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자연 속에서 많이 쉬려고 해요.”
‘졸혼’ 그녀, 몇 살이 됐건 연애하고 살아야지
현경 교수의 결혼 생활에 대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무척이나 사랑했던 사람과 결혼해 10년을 살았고 이혼이 아닌 ‘졸혼(卒婚)을 했다.
“서울대 학생이었는데 노동운동, 농민운동을 하던 사람이었어요. 그 사람에 대해 표현하라면 그 당시에는 예수와, 체 게바라, 안드레아 보첼리를 섞어 흔든 사람이었다고 말해요. 7년 동안 연애를 하고 결혼했고 10년을 살았어요. 학생운동을 하다가 둘 다 납치되고 고문당했는데 저와 남편은 심리적으로 굉장한 트라우마를 받았고, 나는 그 경험으로 완전히 전사가 돼 나왔어요. 고문 없는 세상, 독재 없는 세상을 만들고 싶었어요. 그런데 남편은 그러지 못 했어요 그러면서 남편은 강성인 사회운동가에서 말도 못하게 보수적인 기독교 목사가 됐어요. 많이 사랑하지만 도저히 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 결혼한 지 10년 만에 정리를 했죠. 아이도 낳을 수 없었어요. 서로 조율이 안 되는 상황에서 아이를 낳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어요, 나는 이렇게 기도를 해요. 내가 그 사람을 열여덟 살에 만났는데 어린 시절 내 영혼과 내 모든 것을 다 바쳤던 애인이자, 친구이자 동지였던 그런 사람이랑 젊은 여성이 할 수 있는 가장 열렬한 연애를 했던 거 같아요. 첫사랑이었어요. 그래서 결혼할 수 있게 해줬던 하나님께 감사드린다고. 이후 결혼을 졸업했어요. ‘졸혼’을 했어요. 결혼은 인생에 있어서 한 번으로 족한 거 같아요. 세계는 넓고 남자는 많다. 그래서 세계의 아름다운 남자들과 연애를 하면서 살았죠.”
문득 30대 때 현경 교수가 궁금해졌다. 여전사로 느껴지고 혼자 인생을 짊어진 것 같은 느낌이지만 쉽지 않은 삶은 아니었을까?
“그 나이 때 이 세상 욕은 다 먹고 살았어요. 마녀다, 이단이다 온갖 얘기 다 듣고 살았죠. 이혼했기 때문에 이혼녀 주홍글씨도 달고, 이혼했으면 불행해야 하고 어디 구석에 숨어서 죄인처럼 살아야 하는데 불행하지도 않고 더 예뻐지고 연애하고 결혼도 안하고 말이죠. 많은 사람들이 칼을 던졌어요. 그런데 자기가 행복한 사람은 ‘칼’을 안 던지고 잘하고 있다고 말해 줬고, 무척 부러워했어요, 자기가 불행한 사람은 나를 너무 미워했죠. 온갖 욕을 하면서. 결국은 맷집을 기르는 수밖에 없죠(웃음).
저는 이제 0살입니다. 120까지 살 거예요
아직도 현경 교수에 대해 어렵게 느낄지 모를 독자에게 한 말씀 부탁했다. 그녀가 아무리 괴짜 같아도 우리 독자들과 동시대를 살아 온 친구이자 연인이지 않은가.
“나는 지난 60년을 나한테 가장 진실한 것이 무엇인가, 그 목소리를 따라서 파란만장하게 살아왔어요. 산전수전, 공중전, 핵전쟁까지 겪었어요. 한국에서 60이 돼서 환갑이 된다는 것은 육십갑자가 끝나는 거잖아요? 근데 나는 전생이 끝난 사람입니다. 이제부터 살아야 하는 60년은 제 삶이 컴퓨터 프로그램이라면 완전히 새롭게 리셋 했어요. ‘0세’이라고 생각해요. 새로운 삶은 치유자, 치유적 예술가 그리고 영적 안내자로 살아가고 싶어요. 여태까지 그걸 준비하는 과정이었죠. 지난 3~4년 동안 독일에서 자아초월심리학을 배웠고 행할 수 있는 자격도 얻었어요. 이제 더 많은 시간을 종교, 영성, 예술, 사회운동, 치유, 이런 걸 다 종합해서 내 내면의 문제와 사회변혁이 분리되지 않는 예술 그리고 영성이 분리되지 않는 개인적인 치유와 사회적인 치유가 분지되지 않는 그런 에너지를 만들어 내고 싶습니다. 그 에너지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일을 하면서 앞으로 60년을 살고 싶어요. 하늘이 허락하는 한 120세까지 살고 싶어요.”
그녀와의 시간은 어려우면서도 낭만적이었다. 사실 ‘어디서부터 어떻게’라는 생각에 조급했고 이 방대한 얘기를 어떻게 풀 수 있을까 고민했다. 사실 그녀와 한 이야기는 인터뷰에 써놓은 것보다 더 오묘하고 깊다. 인터뷰라기보다 돈 주고도 못 사는 가르침의 시간이었다. 가을로 접어든 뉴욕의 어딘가에서 멋진 남자와 탱고를 추고 있는 그녀를 생각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