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보니 남들과의 경쟁이 삶이었다. 학교에서는 성적을 놓고 학우들과 경쟁했다. 명문학교에 가려고 치르는 입학시험도 경쟁의 확대판이었다. 군대에서 선착순을 시키면 기합을 면하려고 기를 쓰고 달려 탈락자 대열에서 빠져야 했다. 취업도 승진도 경쟁이었다. 예쁘고 착하고 스펙 좋은 배우자를 얻는 것도 마찬가지다.
알게 모르게 경쟁하는 일도 많다. 학교에서 성적을 위한 경쟁은 의미가 약하다. 그 나이 때는 전력투구를 잘 모른다. 경쟁은 전력을 다했을 때 비로소 경쟁의 의미를 안다. 필자는 권투를 배울 때 만만한 사람이 없다는 것을 배웠다. 사각의 링에 올라가 둘이 시합을 할 때는 전력을 다해야 한다. 전문 선수가 아니면 한 라운드 3분이라는 시간은 굉장히 길다. 전력을 다해야 하기 때문이다. 숨도 쉬어야 하고 체력도 받쳐줘야 하고 기술도 상대보다 나아야 한다. 그러나 맞지 않기 위해 초긴장을 하고 공격하다 보니 숨도 잘 쉬어지지 않고 양손을 다 쓰다 보면 어느새 숨이 가빠진다. 그러니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남과 겨뤄 이긴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그렇게 치열하게 치고받고 난 뒤 서로 포옹해주며 경기를 끝내는 것이다.
골프나 당구를 즐기면서도 내기를 하면 초긴장 상태로 플레이하는 사람들이 많다. 상대방을 이겨야 한다는 승부욕과 돈을 잃지 않으려는 마음에 몸이 경직되기 때문에 끝나고 나면 탈진해서 뻗는다. 이기고 지는 것은 병가지상사로 여겨야 한다. 승부에 너무 연연해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내기에 지면 돈으로 메우면 된다. 어떤 경우라도 마음의 상처를 받지 않아야 한다.
마라톤 경기에서 일반인들이 무리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물론 빨리 뛰어야 남보다 나은 기록이 나오겠지만 목표보다는 목적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상위권 성적이나 기록보다는 건강이라는 목적 때문에 참가한 것이라면 말이다. 댄스 경기 같은 단체전에서도 다른 선수들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선수들이 있다. 경쟁 선수가 엔트리에 있으면 출전을 포기하거나 그 종목을 피해서 다른 종목으로 출전하는 것이다. 댄스가 직업인 프로선수가 아니라면 순위보다는 그냥 즐기면 된다. 댄스 경기에서 성적보다 더 중요한 것은 파트너와의 친분과 교감이다.
사회적 관계도 마찬가지다. 남을 이겨야 내 존재가 부각되고 자존심을 살린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모두가 그럴 때 져주는 것이 오히려 이긴 것보다 나을 때가 많다. 이긴 사람은 우쭐해지고 기분이 좋겠지만, 경쟁에서 진 사람들이 좋은 감정을 갖지 않으니 적이 생긴다. 갈등이 생길 때 경쟁심을 풀고 상대를 동정적인 마음으로 대하니 얻는 것이 많다. 나이가 들면 정신건강을 위해서라도 더더욱 경쟁을 멀리해야 한다.
신명철 스포티비뉴스 편집국장 전 스포츠서울 편집국장
서울 강남의 한 복싱 체육관이 건장한 중년 신사의 감격적인 포옹으로 뜨겁게 달아올랐다. 복싱 올드 팬들이 추억의 일기장에서 꺼내들 만한, 그러나 얼굴은 많이 변한 두 복서가 또다시 만남의 기쁨을 함께했다. 주인공은 ‘4전 5기’ 신화 홍수환(66) 한국권투위원회 회장과 엑토르 카라스키야(56) 파나마 국회의원이다. 딱 10세 차이인 두 사람은 39년 전 링에서 맺은 인연을 여전히 이어오고 있다.
한국인 첫 프로 복싱 세계 챔피언의 영광은 김기수가 차지했지만 그의 경기 장면을 TV로 본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당시 대부분의 스포츠 팬들은 김기수가 챔피언 벨트를 허리에 감는 장면을 ‘대한뉴스’ 화면으로만 봐야 했다. 1960년대에는 TV 보급률이 매우 낮았기 때문이다. 1970년대의 흑백 TV 시절, 최고의 프로 복싱 스타는 단연 홍수환이다. 그의 복싱은 한마디로 스마트하면서 호쾌했다. 복싱 팬을 끌어들이는 마력도 있었다.
먼저 홍수환과 카라스키야의 인연부터 살펴보자. 두 사람은 1977년 11월 27일 WBA(세계복싱협회) 슈퍼 밴텀급 초대 챔피언 결정전에서 맞붙었다. 경기 장소가 파나마여서 홍수환으로서는 절대적으로 불리한 경기였다. 당시 홍수환은 27세의 베테랑 복서였고 카라스키야는 17세의 어린 나이에 11전 11KO승을 자랑하는 샛별 복서였다. 별명이 ‘지옥에서 온 악마’였으니 파나마 복싱 팬들이 그에게 건 기대는 미뤄 짐작할 만하다.
홍수환은 2라운드에서 네 번이나 다운되면서도 오뚝이처럼 일어섰고 마침내 3라운드에서 카라스키야를 KO로 눕히고 챔피언 벨트를 차지했다. 마침 이 무렵에는 1라운드 3회 다운이면 자동 KO가 되는 규칙이 아니고, 무제한 다운제가 시행되었다. ‘4전 5기’의 신화가 이뤄질 수 있었던 배경이다. 이후 카라스키야는 1978년 황복수와의 경기를 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한 뒤 38년 만에 다시 한국을 찾았다. 당시에는 현역 복서였지만 이번에는 국회의원으로 한국에 왔다. 파나마 국회의 교통·통신위원장을 맡고 있는 그는 한국국제교류재단의 초청으로 방한했다. 그 사이 두 사람은 1999년 한 방송사의 프로그램 출연을 계기로 파나마에서 만났고 17년 만에 한국에서 재회했다.
“어머니, 나 챔피언 먹었어”라는 일화와 관련된 내용도 재미있다.
홍수환은 1950년 서울 종로구 내수동에서 태어났다. 당시 스포츠인으로서는 만나기 쉽지 않은 서울 토박이다. 어렸을 때부터 골목대장 노릇을 도맡아 했지만 주먹이 세서 그랬던 건 아니다. 복싱에는 큰 관심도 없었다. 복싱은 아버지가 좋아했는데 홍수환이 중학교 2학년 때 갑자기 타계했다. 아버지의 손을 잡고 복싱경기장을 다녔던 홍수환은 그때부터 복싱 경기 포스터만 봐도 아버지 생각이 났다고 한다. 특별한 홍보 수단이 없던 시절, 서울 시내 동네 담벼락에는 영화, 프로 레슬링, 프로 복싱 광고 포스터들이 여기저기 붙어 있었다.
어머니의 반대가 있었지만 홍수환은 어렵게 글러브를 끼게 된다. 그러나 아마추어 대회에서도 이렇다 할 성적을 올리지 못한 그는 곧바로 프로로 전향했고 이 결정은 그의 복싱 인생에서 ‘신의 한 수’가 됐다. 그리고 홍수환이라는 이름 석 자를 복싱 팬은 물론 거의 모든 국민이 알게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1974년 7월 3일, 당시에는 멀고 먼 나라였던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라디오로 중계방송된 홍수환의 승전보는 많은 복싱 팬의 귀를 의심하게 했다. 홍수환이 그곳에서 타이틀매치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골수 복싱 팬을 빼고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홍수환은 그날 더반에서 열린 WBA 밴텀급 타이틀매치에서 챔피언 아놀드 테일러를 전원 일치 판정으로 누르고 한국인 복서로는 김기수에 이어 두 번째로 프로 복싱 챔피언이 됐다.
프로 복싱에서 원정 온 도전자가 판정승을 한다는 건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홍수환은 그럴 만한 경기력을 보여줬다. 경기 초반 아놀드 테일러를 3차례나 링에 쓰러뜨렸고 14회에서 승리에 쐐기를 박는 네 번째 다운을 빼앗았다. 세계 프로 복싱 관계자들은 아놀드 테일러가 마치 다른 복서처럼 경기를 했다고 평가했다. 거꾸로 보면 그만큼 홍수환이 뛰어난 복싱을 했다는 얘기다.
그런데 당시 홍수환은 현역 사병이었다. 그 무렵 서울 주변의 주요 부대에는 프로 복서 몇 명이 군 복무를 하면서 기량을 연마하고 있었다. 특별한 신분이 아니면 여권은 꿈도 못 꿨고 여권을 받아도 단수였던 시절 현역 군인이 외국에 가서 타이틀매치를 한다는 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김기수의 타이틀매치가 열린 장충체육관으로 직접 갔을 정도로 복싱을 좋아했다. 챔피언에게 줄 개런티(달러) 문제까지 해결한 박정희 대통령은 그 시절 프로 복서들에게는 최고의 후원자였다.
1974년 청년 홍수환이 ‘약속의 땅’인 더반까지 가는 길은 멀고도 멀었다. 서울 김포국제공항을 출발해 도쿄, 홍콩, 스리랑카, 요하네스버그 등을 거치는 험난한 여정이었다. 비행기를 여섯 번이나 갈아타야 했다. 그러나 홍수환은 이기겠다는 일념뿐이었고 결국 승리했다.
어떻게 경기를 치렀는지 제대로 되돌아볼 겨를도 없이 중계팀이 홍수환의 귀에 이어폰을 꽂았다. 방송국 스튜디오에 나와 있던 어머니가 “수환아!”라고 부르는 소리가 이어폰 너머로 들려왔다. 이때 홍수환의 한마디가 오랜 기간 회자됐다.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 그런데 홍수환 말보다 더 유명해진 말이 있다. “그래 수환아, 대한 국민 만세다!” 홍수환의 어머니는 ‘대한민국’이 아닌 ‘대한 국민’이라고 외쳤던 것이다.
초등학교 시절, 이탈리아는 우리나라와 비슷한 점이 많은 나라라고 담임선생님에게서 배운 기억이 난다. 같은 반도국가이고 두 나라 국민들이 노래를 즐겨 부른다는 등. 그래서 이탈리아는 왠지 가깝게 느껴지는 나라였다. 그런데 1960년대에 이탈리아 사람들은 ‘코리아’라고 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로 깜짝 놀랄 일을 연달아 경험하게 된다.
한국의 김기수는 1966년 6월 25일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WBA(세계복싱협회) 주니어 미들급 챔피언인 이탈리아의 지오반니 벤베누티(국내 스포츠 팬들에게는 애칭인 니노로 알려져 있다)에게 도전했다. 벤베누티는 1960년 로마 올림픽 웰터급 금메달리스트로, 복싱 실력은 두말 할 필요도 없는, 당시 세계 동급 최강이었고 외모 또한 준수해 지금으로 치면 ‘꽃미남’이었다. 이탈리아 스포츠 팬, 특히 여성 팬의 우상이었다. 그런 벤베누티가 동양 여행 삼아 나선 타이틀전에서 무명의 복서에게 챔피언벨트를 내줬다. 이탈리아는 경악했다. 벤베누티의 아마추어 전적은 120승 1패이고 김기수에게 진 뒤에는 미들급으로 체급을 올려 세계 프로 복싱 양대 기구인 WBA와 WBC(세계복싱평의회) 챔피언을 지내는 등 이탈리아인들의 사랑을 계속 받기는 했다.
얼마 뒤인 그해 7월 19일 북한은 영국 미들스보로에서 1만8727명의 유료 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열린 잉글랜드 월드컵 4조 마지막 경기에서 1934년, 1938년 대회 우승국이자 세계적인 축구 강국 이탈리아를 1-0으로 꺾고 월드컵 역사에 길이 남을 이변을 일으켰다. 월드컵 역사는 이 경기와 1950년 브라질 대회에서 미국이 잉글랜드를 1-0으로 제친 경기를 깜짝 놀랄 경기 가운데 첫 손가락으로 꼽고 있다. 1라운드 탈락의 수모를 당한 이탈리아 선수들은 귀국길에 자국 팬들로부터 토마토 케첩과 잼 세례를 받았다.
한국인 이상으로 스포츠에 열광하는 이탈리아인들에게 충격을 안긴 김기수를 ‘스포츠 인물 열전’ 첫 번째로 꼽은 까닭은 한국전쟁의 혼란기를 이겨 내고 세계 속의 한국으로 나아가려고 몸부림치던 1960년대 중반, 아마추어와 프로를 막론하고 스포츠 팬들은 물론 국민들에게 ‘한국도 세계 최고(챔피언)’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선물했기 때문이다. 한국의 첫 올림픽 챔피언(1976년 몬트리올 대회 레슬링 금메달리스트 양정모)은 이때로부터 10년 뒤에 나온다. 1960년대 후반, 김기수가 뻗는 주먹은 모든 이들에게 고단한 삶을 잠시나마 잊게 했다.
김기수는 1939년 함경남도 북청에서 태어났다. 12세 때인 1·4 후퇴 때 남녘으로 와 전라남도 여수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스포츠를 좋아하는 형에게 자극을 받아 복싱에 입문해 1957년 전국아마추어복싱선수권대회 주니어 웰터급에서 우승했고 곧 이어 서울 성북고로 전학해 을지로 3가에 있는 한국체육관에서 복싱에 전념했다.
그 무렵 성북고는 복싱과 레슬링 등 격투기 종목을 집중적으로 육성해 우수한 선수들을 많이 배출했다.
김기수는 아마추어 시절에도 뛰어난 복서였다. 1957년부터 1960년까지 열린 각종 국내 대회에서 연전연승했다. 그 사이 1958년 도쿄 아시아경기대회 웰터급에서 금메달을 차지했고 1962년 프로로 전향하기 전까지 88전 87승 1패의 놀라운 기록을 남겼다. 유일한 1패가 1960년 로마 올림픽 웰터급 2회전(16강)에서 벤베누티에게 당한 판정패였다. 비록 올림픽 챔피언이 되지는 못했지만 김기수는 아마추어에서도 세계적인 수준의 경기력을 발휘했고 1964년 도쿄 올림픽 은메달리스트 정신조, 1968년 멕시코시티 대회 은메달리스트 지용주 등으로 이어지는 올림픽 복싱 메달리스트들의 징검다리 구실을 했다.
프로에서도 연승 행진을 이어간 김기수는 1962년 12월 일본 원정 두 경기를 포함해 프로 데뷔 네 번째 경기에서 강세철을 판정으로 물리치고 국내 미들급 챔피언이 됐다. 1965년 1월 일본의 가이즈 후미오(海津文雄)를 6회 KO로 누르고 동양 미들급 챔피언 타이틀을 획득한 김기수는 여세를 몰아 이듬해 벤베누티와 6년 만에 다시 만나 2-1 판정승을 거두고 한국 선수로는 처음으로 프로 복싱 세계 챔피언이 됐다. 이 경기는 박정희 대통령이 관중석에서 지켜볼 정도로 전 국민적인 관심사였다. 박 대통령의 결단으로 5만 달러가 넘는 벤베누티의 개런티를 줄 수 있었기에 한국인 첫 세계 챔피언이 나올 수 있었다. 1950년대에는 외환 사정이 더 나빠 축구 대표 선수들이 외상으로 비행기를 타고 국제 대회에 출전해야 하는,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
김기수가 세계 챔피언의 자리에 오르던 날 사진을 보면 챔피언벨트를 허리에 감은 김기수 옆에 있는 이방인이 눈에 띈다. 미국인 트레이너 보비 리처드다. 리처드는 김기수의 세계 타이틀 도전이 확정되자 트레이너로 영입된 인물이다. 일본 프로 복싱계에서 활동하던 리처드는 뒷날의 거스 히딩크 같은 족집게 과외 선생이었다.
김기수는 리처드의 지도를 받으며 타이틀 매치를 준비했고 15라운드 내내 왼손잡이 이점을 살리면서 포인트 위주의 작전을 펼쳐 챔피언이 됐다. 당시 언론에서는 이를 ‘히트 앤드 클린치(Hit and Clinch)’라고 표현했다. 짧은 기간이라도 외국인 지도자가 쓸모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첫 번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1966년 12월 스탠리 해링턴(미국), 1967년 10월 프레디 리틀(미국)을 상대로 타이틀을 방어한 김기수는 1968년 5월 3차 방어전에서 산드라 마징기(이탈리아)에게 판정으로 져 타이틀을 빼앗긴 뒤 그해 11월에는 미나미 히사오(南久雄)에게 판정으로 져 동양 미들급 타이틀도 내놓았다. 1969년 3월 리턴매치에서 미나미에게 판정승을 거두고 타이틀을 되찾았으나 그해 9월 27일 장충체육관에서 은퇴식을 갖고 글러브를 벗었다. 프로 복싱 전적은 49전 45승 2무승부 2패다.
김기수는 은퇴한 뒤 사업가로 활동했다. 그가 서울 충무로에 개업한 챔피언다방은 복싱 올드 팬들에게 잊을 수 없는 명소다. 행복한 은퇴 생활을 하던 김기수는 안타깝게도 한창 나이 58세 때인 1997년 세상을 떠났다. 김기수는 프로 데뷔 초기 일본에서 활동하며 귀화 제의를 받았지만 일언지하에 거절한 일화가 있다.
한국은 김기수의 세계 타이틀 획득이 기폭제가 돼 1970년대 홍수환과 유제두, 1980년대 유명우와 장정구 등 수많은 챔피언을 배출했고 WBA와 WBC에 동시에 세 명의 챔피언을 보유하기도 하는 등 세계적인 프로 복싱 강국으로 성장했다.
세계 챔피언 김기수가 태어나기 훨씬 전, 일제 강점기에 한국인 프로 복싱 세계 랭커가 있었다면 쉽게 믿기 어려울 터. 프로 복싱 한국 최초의 세계 랭커 서정권은 전남 순천 갑부 집안의 4남 3녀 가운데 셋째로 1912년 태어났다. 플라이급과 밴텀급 선수로 일본 무대에서 활약하다 1932년 미국으로 건너가 WBC 밴텀급 6위까지 오르는 등 활약했으나 더 이상의 발전을 하지 못하고 1936년 귀국해 세계 랭커였다는 긍지로 평생을 살다 1984년 타계했다.
서정권은 16세 때 동향의 마라톤 선수 남승룡(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동메달리스트)과 함께 도쿄로 건너가 한국 최초의 올림픽 출전(1932년 로스앤젤레스 대회) 복서인 황을수의 지도를 받았다. 그때 도쿄에 유학하고 있던 서정권의 큰형은 두 소년이 복싱 선수가 되겠다는 것을 우려해 자신이 후원하던 황을수에게 “복싱에 대한 의욕을 단념하도록 혼내 주라”고 부탁했다. 황을수의 강펀치에 이가 흔들거리자 남승룡은 글러브를 놓았으나 서정권은 오기로 버티면서 형과 황을수가 놀랄 만한 투지와 기량을 보였다. 재능이 뛰어나다고 여긴 황을수의 지도를 받으며 복싱에 매진한 서정권은 일본을 석권하고 미국으로 진출하게 된다.
글 신명철 전 스포츠서울 편집국장 smc6404@naver.com
시니어에 접어들면 골퍼들 누구나 겪게 되는 갈등이 있다. 드라이브 거리다. 티샷 거리뿐만 아니라 아이언 샷 거리도 줄어든다. 예전과는 다른 플레이하는 자신을 보며 느끼는 낭패감은 엄청난 심리적 충격이다. 예전 거리를 되찾아보려 노력하지만 쉽지 않다. 스윙도 점검하고, 클럽 샤프트도 바꿔보고, 체력 강화운동도 해보지만 여의치 않다.
노화는 삶의 피할 수 없는 현실이고 우리는 하루하루 늙어 간다. 누구도 노화를 막지는 못한다. 노화의 원인을 규명하려고 많은 연구와 노력을 기울여왔지만 아직도 뚜렷한 원인으로 밝혀진 것은 없다. 선천적 유전인자, 생활 스타일, 사회 경제적 요인들이 혼합된 상호 작용이 영향을 미친다는 점은 분명하다.
노화를 늦추는 방법은 없을까? 스포츠로서의 골프의 가치를 살펴보면 해답을 얻을 수도 있다. 세계적으로 골프가 대중화하기 시작한 1960년대 이후 골프와 관련된 건강과 웰빙에 관한 연구결과들은 건강하고 우아하게 늙어 가는 과정에서 골프를 즐기는 것은 매우 긍정적 효과가 있다고 보고한다. 골프로 인한 상해 등 부정적 결과도 보고되고 있지만 골프를 통해 건강 유지와 웰빙 효과를 얻으려면 적극적으로 걸으며 플레이해야 한다.
걸으면서 플레이할 때 얻을 수 있는 장점들을 살펴보자.
첫째, 에너지 소비량이 많다. 우리 현실에서는 쉽지 않지만 골프 백을 어깨에 짊어지고 플레이하는 것이다. 18홀 라운드를 기준으로 약 2000 칼로리가 소비된다. 백을 메지 않고 걸으면서 플레이한다면 25%가 적은 약 1500 칼로리, 카트를 타고 플레이한다면 35%가 적은 1300 칼로리가 소비된다. 혈당치도 함께 감소하는데 청년인 경우 약 20%, 중년은 10%, 노년은 특히 30% 정도 감소되며 체중 또한 0.7% 감소한다. 칼로리는 분당 4~6kcal 소모된다고 보았을 때 18홀 라운드의 총 에너지 소비량은 960kcal 정도로 추산된다.
둘째, 체력 강화 효과다. 심혈관계 기능면에서 보면 18홀 라운드를 걸으며 플레이하면 약 1만보를 걷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 1주일에 두 번씩 18홀 라운드할 경우 콜레스테롤 중에서 고밀도 지질단백질(HDL: High Density Lipoprotein)이 놀랄 만큼 증가하며 에어로빅 능력도 개선된다. 단백질과 지방으로 이루어진 지질단백질은 ‘나쁜’ 콜레스테롤인 저밀도 지질단백질(LDL), 트리글레시리드, 유해 지방을 운반하고 간으로 되돌려 보내 처리하게 만드는 좋은 콜레스테롤로 알려져 있다.
HDL이 간에 도달하면 간은 LDL을 분해, 담즙으로 변화시켜 몸에서 제거한다. 건강한 HDL 콜레스테롤 농도를 가진 사람들은 관상동맥질환 위험이 낮다는 사실이 연구를 통해 밝혀졌다. 규칙적인 플레이를 통해서 18홀을 마치면 약 1.4kg의 체중 감소, 복부 지방 연소를 통해 허리둘레도 2.2cm 줄어든다.
셋째, 개인에게 맞도록 운동강도를 조절할 수 있다. 18홀 라운드의 경우 약 8~9km를 걷는데, 바이오메카닉에서는 시니어들은 걷는 것이 뛰는 것보다 운동으로서 더 효과가 크다고 강조한다. 18홀을 걷는 데 소비되는 에너지량은 5~6km를 달리는 것과 같으며 2시간 정도 테니스 싱글 매치하는 운동량과도 같은 정도다.
넷째, 폐 기능이 개선된다. 나이가 들면 흉벽과 폐 조직의 탄성이 위축되어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기능도 약해진다. 규칙적이고 적당한 운동량은 우리 몸의 조직이 필요로 하는 산소를 공급하는 데 꼭 필요하다. 골프를 통해 호흡 속도와 호흡량을 조절할 수 있어 추가적인 산소 공급으로 폐 기능을 높일 수 있다.
다섯째. 치매 예방 효과가 크다. 노화에 따른 인지기능의 저하는 기억력, 추론과 문제해결 능력 약화와 치매 증상을 부른다. 장기간 골프와 같은 운동에 참여하여 인지적 도전활동을 하면 두뇌의 구조와 기능 유지에 긍정적 효과를 보인다. 특히 핸디캡이 낮은 골퍼가 그렇지 않은 골퍼보다 인지적 사고 능력이 높은 것으로 보고되었다.
여섯째, 신경계 기능이 강화된다. 노화가 시작되면 신경계의 기능도 약화되는데, 특히 근육 말단부에서 느끼는 감각을 뇌에 보고하는 고유감각기(proprioceptor)의 기능이 약화되어 axon(신경세포의 한 부분으로 신경의 전기적 신호를 다른 신경이나 기관에 전해주는 긴 구조)의 반응이 느려진다. 하지만 적당하고 규칙적인 운동은 신경계 기능을 유지시켜 반응시간, 균형감각, 안정성과 자세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일곱째, 심장 기능도 강화된다. 최대 유산소 섭취량은 20세가 지나면서 매 10년간 약 7%씩 감소한다. 산소 섭취량이 줄어들면 최대 심장 박동률(maximal heart rate)도 4% 감소되고 순환기 약화를 초래하게 된다. 하지만 규칙적으로 걸으며 플레이를 하면 산소섭취 능력이 향상된다.
여덟째, 근력을 강화하며 골밀도도 높여 준다. 근육강화 훈련기간과 타고 난 체력에 따라 다르지만 60세가 지나면 해마다 1.5%씩 최대 근 발현 능력이 저하되기 시작한다. 특히 근육의 양은 50세가 지나면서 10년마다 약 10% 감소한다. 또한 노화가 시작되면 신체에 축적된 미네랄의 함유량이 감소되면서 전반적인 골밀도뿐만 아니라 연골 함수량, 관절 내의 윤활기능이 약화되어 부상의 위험과 운동 능력의 저하를 불러온다. 걸으면서 플레이할 때 발생하는 체중의 중력 작용은 근육 수축을 촉진해 칼슘의 농도를 높여 주고 뼈의 두께와 강도를 유지시킨다.
아홉째, 축적된 지방 제거에도 도움이 된다. 의자에 앉아 생활하면 복부 비만을 불러 체지방 비율이 높아진다. 체지방률이 높으면 신체의 기동성이 떨어져 요추 부위의 통증과 운동감소증(hypokinetic disease)을 유발한다. 걷는 골프를 규칙적으로 한다면 척추부상을 예방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결합 조직을 강화하는 데 효과가 크다. 체내에 널리 분포하는 결합조직은 장기, 조직 사이를 메우고 그것을 기계적으로 지지하고 유지하는 조직이다. 그밖에 혈관, 림프관, 신경을 인도하며 영양, 대사산물의 수송 또는 저류, 나아가 손상, 감염에 대한 방어 또는 수복 등에도 작용한다. 노화가 시작되면 결합 조직은 굳어지고, 부서지기 쉬워져 약화되면서 부상 위험에 노출된다. 적당하게 걷는 골프는 결합 조직 내에 있는 단백질의 일종인 콜라겐을 증가시켜 운동 능력을 높여 준다.
다시 강조하지만 진정한 골프의 묘미는 타는 것이 아니라 걷는 점이라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 박영민 전 고려대 교수
국내 골프칼럼니스트 1세대. 고려대와 한국체육대에서 교수로 재직했으며 1980년대 초부터 방송 해설은 물론 일간지, 스포츠지 등에 많은 칼럼을 연재했다. ‘골프의 이론과 실제’, ‘골프’(체육고등학교 교재) 등 저서도 다수.
“언니, 어떻게 칠까?”
알면서 물어보는 장난기(氣) 많은 김농담 씨의 말이다. 캐디가 걸작이다. “아~네, 티 꽂고 치세요.”
캐디의 농담에 골퍼가 질 리가 없다. 한 두 번 장사한 것도 아니고.
바로 나가는 질문. “어디보고 치지?” 착한 캐디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그냥 볼보고 치세요”한다.
동반자들이 난리다. “언니가 이해해 줘라. ‘100돌이’라서 그래.”
김 씨는 훤칠한 키에 힘이 장사다. 티샷을 했는데 ㅎㅎ 쪼로. 뒤땅을 쳐서 파인 잔디가 더 날아갔다.
동반자들은 웃음바다. 캐디가 더 신바람이 났다. 그런데 걱정이 태산이다. “오늘은 이 손님을 어떻게 모시나?”하고.
두 번째 등장한 최장타 씨의 멘트가 신사다.
"언니, 나는 캐디를 위해 골프를 하는 거야. 결코 나를 위해 골프를 하지 않지. 절대로”
어떤 의미일까. 캐디가 이 말을 들으면 그날 캐디는 하루 종일 기분이 좋을 것이다. 특히 첫 홀에서 티샷을 하기 전에 ‘이런 주문(呪文) 같은’ 말을 건네 보라. 아마도 그날 캐디는 기분이 짱이고 아군이 될 터.
이 친구는 ‘립싱크’를 제대로 했다. 아니나 다를까. 드라이버를 맛깔나게 갈겼다. “허걱~”. 300야드는 날아간 것 같다. 그것도 똑바로. 캐디가 ‘좋아라’ 하고 박수를 치며 환호성을 지른다.
세 번째 등장한 이단타 씨는 말이 없다. 그런데 티샷 전에 ‘루틴’이 길다. 티를 꽂고 연습스윙을 다섯 번. 뒤로 가서 방향을 보고 나서 다시 연습스윙. 그리고 어드레스. 클럽 헤드를 볼 뒤의 잔디에 놓은 뒤 3분간 기도를 한다.
캐디는 “헐~”소리가 저절로 난다. 티샷은 그런대로 잘 갔다.
마지막 골퍼는 안조커 씨다. 동반자들에게 “언니 앞에서는 ‘질러’라는 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캐디는 어리둥절할 수밖에. 질러는 노래방 기기 같은데. 다행이다. 캐디는 속뜻을 모르고 있는 듯하다. 남자는 없고 여자만 있는 것을.
그리고는 캐디에게 따귀를 맞은 이야기를 한다. 클럽마다 번호가 있다. 이 때문에 캐디는 골퍼에게 “몇 번 드릴까요?”하고 물어본다.
귀에 대고 “한번만 주지”했다가 캐디에게 혼났다. 자기를 뭘로 보냐며. 어라, 돌아온 답이 신기하다. “여러 번 달라면 몰라도.” 그냥 더위에 지친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고자 한 조크니 혹시 이글을 캐디가 본다면 오해가 없기를.
이렇게 해서 티샷을 마치고 4명의 전사들과 캐디는 라운드를 시작했다.
즐거운 일은 코스에서 늘 일어나게 마련. 결론부터 짓고 가자. 4명은 스코어가 고만 고만하다. 100타 안팎이다. 그래서 내기가 붙으면 재미가 있다.
티샷만 보면 최장타 씨가 유리하다. 그래서 티샷을 하고 나서 나머지 3명은 같은 생각을 한다. ‘핸디캡’을 받을 걸 그랬나. 여기서 핸디캡이란 조그만 내기를 할 때 타수 차이만큼 쩐(錢)을 줬다는 의미다.
하지만 세컨드 샷에 들어가면 핸디캡을 받지 않은 것 대해 전혀 후회가 없다. 속으로 “얼레, 핸디캡을 더 줄 걸 그랬나?” 하고 각자 속으로 낄낄 거리고 웃는다.
최장타 씨는 그린에 가까이 갈수록 결코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이 친구는 그린을 앞두고 100미터쯤에서 아이언을 여러 번 끊어 친다. KTX 타고 가다가 도착지 부근에 도달하면 완행열차처렴.
이 친구뿐 아니다. 3명도 비슷하다.
깃대를 앞에 두고 마치 볼이 깃대를 거부하듯 피해 다닌다. 뒤땅을 쳐서 볼을 1야드 정도 보낸다. 그리고 핀과 거리를 20야드 남겨두고 홀로 들어갈 볼이 벙커에 처박힌다. 어느 때는 이것도 부담스러운지(?) 토핑으로 그린을 훌쩍 넘겨 버린다. 스탠스하기가 불편한 곳으로. 그것도 아니면 나무 뒤에 볼이 숨어 버린다.
캐디가 최장타 씨에게 궁금해서 물어봤다.
“그린을 싫어하십니까?”“ㅠㅠ. 절대로 싫어할 이유가 없지. 마음대로 안 되서 그렇지.”
장타를 날려 페어웨이 한가운데 보내 놓고 그 다음 샷을 퍽퍽 거려 보라. 아마도 뚜껑이 열리리라. 그런데 이 4명의 골퍼는 한 번도 화를 낸 적이 없다. 그래서 캐디들이 좋아한다. 속은 시커멓게 타들어 가겠지만. 이것이 골프의 재미다. 돈 좀 잃었다고, 샷이 좀 망가졌다고, 퍼트가 좀 안된다고, 뒤땅 좀 쳤다고 지구가 멸망하겠는가.
5시간 이상을 걸어야 하는 골프, 웃으면서 플레이해야 장수한다. 골프가 ‘브라보 마이 라이프’인 이유다.
글 안성찬 골프대기자/ 골프문화칼럼니스트
‘비 오는 날의 수채화’ 이것은 운치 있는 노래 제목이고, ‘비가 오면 생각나는 그 사람’은 심수봉의 노래 가사 중 한 소절이고. 그런데 이런 분위기 있는 노래가 골퍼들에게는 별로 달갑지가 않다.
특히 어르신 골퍼에게는 비는 그냥 귀찮은 존재일 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물론 여름철 폭염아래서 라운드할 때 이따금 뿌려주는 이슬비 정도는 반가운 일이지만.
장마철에 접어들었다. 이전과 달리 비소식이 오면 대부분의 골퍼는 취소를 한다. 하지만 어렵게 잡아 놓은 예약을 최소하기도 아깝고, 해서 라운드를 결심하지만 정상적인 컨디션에 비해 불편하고 제 기량을 발휘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플레이에 들어가면서 …빗속라운드를 할 거면 즐기면서 하라
빗속에서도 플레이를 시작했다면 “이것도 또 다른 핸디캡이겠지”하면서 “즐겁게 라운드하자”고 마음을 다진다. 그러면 오히려 색다른 경험을 할 수 있다. 이미 골퍼들은 경험을 했겠지만 똑같은 상황에서 짜증을 내기보다는 즐기는 것이 정신건강에도 좋다.
사실 골프는 평소에도 그렇지만 마음가짐이 중요하다. 소위 ‘멘탈’을 어떻게 자신이 조절하느냐에 따라 그날의 골프가 달라진다. 친구들끼리 작은 내기라도 할 때면 무조건 편안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이것이 쉽지 않음을 우리는 안다. 이럴 때는 주문을 외우자. 좋아하는 연인을 생각하거나, 가장 즐거웠을 때를 상상하면서 티잉 그라운드에 들어선다.
플레이전에 준비는… 무조건 수건으로 닦는다
비올 때 우산과 수건 등 필요한 것은 골프장에서 준다. 하지만 자신의 것으로 준비한다. 장갑은 3켤레 이상으로 한다. 약간만 젖어도 새것으로 바꾼다. 땀에 어도 그리 건강에 좋지 않으니까.
특히 장갑이 젖으면 그립이 미끄러진다. 수건을 우산 속에 걸어 샷을 하기전에 반드시 닦는다. 그린에서 퍼팅 때도 마찬가지다. 비가 많이 올 때는 목장갑이 그만이다. 양말도 2~3켤레 준비한다. 발이 축축하면 찜찜해서 어드레스가 잘 안 된다. 참지 말고 중간에 바꿔 신는다. 우산이야 기본이겠
지만 반드시 비옷을 챙긴다. ‘그냥 맞고 치지’라고 생각했다면 하수다. 가볍고 얇은 비옷을 입으면 플레이가 달라진다.
플레이는 어떻게… 스윙은 박인비처럼 4분의 3만 하라
그립이 비에 젖으면 그립을 강하게 잡는 습관이 있다. 그러면 어깨 근육이 긴장돼 미스 샷으로 이어진다. 그럴수록 그립을 살살 잡아야 한다. 마치 사랑스러운 연인의 손을 잡듯.
문제는 비가 오면 심리적으로 급해진다는 사실이다. 빨리 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면서 대충치려 한다. 라운드를 게속 할 것이라면 평소의 리듬을 갖고 프리샷 루틴대로 한다. 비가 오고 바람이 불수록 이런 습관을 반드시 필요하다.
페어웨이가 젖어 있어 볼이 구르지 않는다. 거리가 20% 이상 손해를 본다. 티샷은 티를 높게 꽂아 캐리를 늘린다. 페어웨이나 그린주변에서는 자신의 거리보다 조금 길게 친다는 느낌으로 한다. 그린도 마찬가지다. 스피드가 느리므로 홀 뒤의 2~3컵을 더보고 약간 강하게 스트로크를 한다.
모든 샷은 한 클럽 크게 잡고 4분의 3정도의 크기 스윙으로 부드럽게 볼을 때린다. 하다마는 스윙 같은 박인비(26·KB금융그룹)를 떠 올리며 샷을 하면 딱이다. 습도가 높은 날에는 허리와 무릎
등에 무리가 오기 때문에 강하게 치려다가는 낭패를 본다.
페어웨이나 벙커에서 박아치는 아이언 샷은 금물이다. 이미 페어웨이가 축축한 상태에서는 뒤땅을 치게 되거나 박히기 십상이다. 어프로치도 굴려 치기 보다는 핀을 보고 볼을 조금 띄워 붙이는
것이 현명하다. 비가 오는 날의 미스 샷은 대개 그립이 미끄러지는 것이 원인이다. 마른 수간은 필수적이다. 우산에 수건을 걸어 놓고 스윙을 하기 전에 반드시 그립과 헤드를 닦아준다. 대부분의 골퍼는 귀찮아서 그냥 치기 일쑤다. 실수를 한 뒤 후회한다.
라운드가 끝나면 모든 장비는 잘 닦고 말려야 한다. 젖은 골프화는 라커룸에 있는 건조기를 이용해 잘 말린다. 그냥두면 곰팡이가 생긴다. 클럽은 그립부분을 종이로 잘 싸둔다. 헤드는 녹 방지제를 발라준다.
글 안성찬 골프대기자/ 골프문화칼럼니스트
여자프로들의 인기비결은?
“나는 남자골프대회는 안 봐. 여자대회만 보지.”
골프마니아 어르신의 이야기다.이유가 궁금하다.
혹시 미니스커트? 필드에 갤러리로 나서거나 TV를 통해보는 대회는 역시 재미를 주는 것은 여자대회다. 눈을 즐겁게 한다.
골프는 남자대회가 더 긴박감 넘치고 흥미를 더한 것이 사실이다. 타이거 우즈(미국)의 플레이와 공인 장타자 버바 왓슨(미국)의 대포알을 쏘는 듯한 400야드 이상 볼을 때리는 것을 보면 환상적이다.
그런데 유독 국내 대회는 여자대회가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한국여자오픈에는 갤러리가 무려 3만8000여명이나 몰렸다.
이는 늘씬한 미모와 함께 필드 여신들의 옷맵시도 한 몫 한다. 이전에는 복장에 대한 규제가 심했지만, 이제는 라운드 티셔츠에 민소매까지 규제가 풀리면서 여자선수들은 자신의 미모를 마음껏 과시하고 있다. 특히 요즘은 미니스커트가 대세다.
미니스커트는 무릎 위에 10~20cm까지 올라간 극히 짧은 치마. 1966년 영국의 디자이너 매리 퀀트가 발표해 전 세계에서 선풍적인 인기와 유행을 몰고 온 의상이다.
미니스커트는 선수들이 플레이하는데 지장이 없을까. 한동안 속바지와 치마를 결합한 큐롯팬츠가 유행한 적이 있다. 하지만 이제는 아예 미니스커트를 입고 경기를 하는 선수들이 많아 졌다.
최근 출시된 초미니스커트 길이는 33cm. 이 정도면 말 그대로 ‘한뼘 치마’인 셈이다. 보는 이로 하여금 아슬아슬하게 한다.
그런데 재미난 사실은 미니스커트를 입은 선수들이 대부분 늘씬한 몸매에다 기량도 뛰어나 우승도 자주하는 스타플레이어들이다.
초미니스커트로 한껏 멋을 부리며 유행을 선도한 선수는 안신애(24·해운드비치골프앤리조트)다. 섹시함을 강조한 그의 옷차림은 ‘만인의 연인’처럼 골프팬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에서 2승을 거둔 안신애는 165cm의 키에 미모도 뛰어나 매 대회 때마다 우승자보다도 인기를 끌고 있을 정도다.
‘섹시아이콘’ 양수진(23·파리게이츠)도 팬들을 몰고 다닌다. 통산 5승의 양수진은 귀여움과 섹시함을 동시에 갖추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핫팬츠도 즐겨 입는다.
169cm의 미녀골퍼 김하늘(26·BC카드), 171cm의 윤채영(27·한화), 올 시즌 E1채리티오픈 챔피언 허윤경(24·SBI저축은행)도 뛰어난 기량만큼이나 옷 잘 입는 선수로 알려져 있다. 탄탄한 근육질 몸매의 장하나(22·BC카드)는 164cm로 언제나 미니스커트를 선호한다.
선수들이 미니스커트를 즐겨 입는 것은 아름다운 몸매를 자랑할 수 있는데다 다리가 길고 늘씬해 보이기 때문이다.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에서는 패션모델 산드라 갈(독일)과 ‘핑크공주’ 폴라 크리머(미국)가 미니스커트 마니아로 섹시아이콘의 대명사로 불리고 있다.
미니스커트와 볼륨감 있는 티셔츠 외에도 국내 여자프로들의 경기가 신다는 이유는 더 있을까.
대회마다 새로운 스타가 탄생하면서 ‘신데렐라’가 출현하는가 하면 선두권 선수들의 기량이 비슷해 지면서 치열한 우승경쟁을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대회 코스가 길어지면서 단타자 중심에서 장타를 날리는 선수들이 많이 등장해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특히 어르신들은 여자대회를 보면서 실전에서 따라 할 수 있을 것 같은 동질감을 느껴 더욱 집중하게 된다고 말한다. 남자선수들의 스윙은 파워풀 해 따라 하기가 쉽지 않지만 여자선수들의 코스 매니지먼트를 통한 그린 공략법 등을 보면서 동일하게 플레이하는 느낌을 갖는다는 것이다.
글 안성찬 골프대기자/ 골프문화칼럼니스트
일간스포츠, 문화일보, 스포츠투데이 체육부 골프전문기자
이투데이 부국장겸 스포츠문화부장
뉴스웨이 골프대기자,
골프문화칼럼니스트
엥, 이게 무슨 말이지? 시니어 여성골퍼가 ‘영닭’들하고 골프를 한 뒤 헤어지면서 하는 말이다. 열심히 노동하고 있을 남편이 들으면 뚜껑이 열릴 일이지만 어쨌든 이날 팔순을 바라보는 골프 시니어 어르신은 날아갈 듯 기분이 좋았을 터. 평생 남편 수발했으니, 이제는 파랑새는 아니더라도 하고 싶은 골프를 말릴 수야 있나.
중독성이 강한 골프 특성상 하루 종일 걸리는 스포츠라서 뒤따라 다닐 수도 없고, 믿는 수밖에. 사실 부부는 문지방 넘어서면 남이다. 그러니 촌수도 없지.
여성골프가 많이 늘어 전국 골프장 입장객의 30%나 된다고 한다. 골프의 즐거움은 양면성이다. 남자만 애인을 데리고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여자도 마찬가지다. 일단, 부부가 아니면 친구이거나, 애인이거나 둘 중에 하나 일테니까. 서로 남남이면 남자나 여자 입장에서 보면 마찬가지다.
그런데 재미난 사실은 부부인지 아닌지가 한 홀만 지나면 캐디에게 금방 들킨다. 아니, 그늘
집에서 만나는 앞팀 이나 뒤 팀에게도 꼬리를 잡힌다.
아마도 이글을 읽는 어르신들도 한번쯤은 애인과 라운드를 해보았으리라. 때문에 아내와
연인, 혹은 남편과 연인과 볼을 칠 때 분위기가 확 다르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안다.
골프뿐만 아니다. 아내와 연인 차이는 무엇을 해도 표시가 난다. 다만, 세월이 흘러도 여전
히 잉꼬부부, 닭살부부는 예외로 하자. 한눈을 팔지 않고 오직 ‘이 남자야’, ‘이 여자야’하고 살
아온 금슬(琴瑟) 좋은 부부도 논외다.
그러나 대부분의 부부골프는 남편이 아내에게 운전교습을 해줄 때 잔소리를 하는 것처럼 하루 종일 바람 잘 날이 없다. 이 때문에 어느 정도 골프를 치면 아내는 절대로 남편과 필드를 나가지 않는다. 재미가 있어야 할 골프가 짜증만 나기 때문이다. 골프장에 갈 때는 기분 좋게 출발했다가 남편의 잔소리에 아내는 즐겁기는 커녕 스트레스만 왕창 받고 집으로 돌아온다.
티잉 그라운드부터 다르다. 아내가 조금 늑장을 부리면 바로 튀어나오는 말, “장갑도 안 챙기고 뭐해. 미리 미리 끼고 있어야지. 순서가 돼서 장갑 찾고 있으니...”하고 짜증을 낸다.
그런데 애인에게는 다르다. 앞 팀이 비어있는데도 애인이 캐디백에서 티를 찾고 있으면 웃으면
서 티를 꽂아준다. 부부는 대개 말이 없다. 하더라도 정겹지가 않다. 퉁명스러운 것이 기본이다. 가급적 말도 섞지 않는다. 해봐야 싸움 나니까. 애인에게는 다정다감하다. 웃음소리부터 다르다.
아내가 뒤땅을 쳐보라. 티샷도 제대로 못하느냐고 핀잔을 준다. 애인에게는 “멀리건~”하면
서 “하나 더 쳐도 돼~. 내가 티를 잘못 꽂아 줬나?”하고 아부의 왕이 된다. ‘으이그 쓸개 빠진
넘.’ 이 말은 동반자들이 속으로 내뱉은 말이다.
부부는 각자 클럽을 꺼낸다. 하지만 남자는 애인에게 샷을 할 때마다 손수 클럽을 꺼내 준다. 캐디가 있는데도. 아내가 친 볼이 벙커나 워터해저드에 빠지면 “어이, 그렇게 밖에 못 치나”하고 면박을 준다. 애인에게는 “왜, 하필이면 그쪽에 장애물을 만들었을까? 코스 설계를 제대로 할 수 없나”하
고 디자이너를 탓한다.
그늘집에서는 더 가관이다. 아내에겐 “냉수나마셔”라고 하지만 애인에게는 직접 커피나 생
과일주스 등을 갖다 준다. 아내가 OB(아웃 오브 바운스)를 내면 나가서 “벌타 먹고 OB티에서 쳐”하고, 애인에게는 “멀~리~건”을 서너 번씩 외친다. ‘으이그 속없는넘.’ 이것은 캐디 생각이다.
애인이 10m짜리 버디 퍼팅을 성공시켜보라. 난리 블루스를 친다. “나이스 버디!”를 산이 떠나가도록 외친다. 홀인원을 하면 어떻게 할지 궁금하다. 아마도 깊은 포옹을 할 걸. 아내가 버디를 하면 “집안일은 안하고 매일 연습장에서 살지, 살어~”하고 못마땅해 한다.
아내가 남겨 놓은 1m짜리 퍼팅은 “들어갈 때까지 쳐야지”하면서, 3m가 넘는 애인의 퍼팅은 “OK!”를 외친다.
아내의 샷은 잘못 친 것만 말하면서 애인에게는 “뭘 믿고 그렇게 볼을 잘 치느냐”고 입에 침
이 마르도록 립 서비스를 날린다. 홀마다 더블보기나 트리플보기를 하는 아내에게는 “지금 골프를 치는 거야, 작대기를 휘두르는 거야”하고 화를 낸다. 애인의 스코어카드에 그렇게 적히면 “같은 그린피 내고 많이 치는 것이 경제적이지”하고 위로를 한다.
아내가 “여보, 경치가 참 아름답지”하면 “골프도 못 치면서 무슨 놈의 경치야”하고 볼멘소리를 한다.
애인이 이렇게 말하면 “그대가 장미꽃인데 무슨 경치를 보나”하고 닭살을 돋게 한다. ‘으이그
비잉신. 저걸 칵~.’ 이것은 캐디와 동반자가 동시에 느낀 감정을 표현한 것이다.
사랑을 하면 눈이 먼다고 했던가. 애인이 하는 짓은 다 예뻐 보이고, 아내가 하는 것은 다 미
워 보이나. 사랑해서, 눈멀어서 결혼한 사람은 아내인데 어찌 코스에만 나가면 아내는 보이지
않고, 애인만 눈에 보이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이는 남자의 경우다. 시니어 여성이 젊은 놈하고 골프장에 가보라. 남자가 애인에게 하는 서
비스와 친절은 조족지혈이다. 더하면 더했지 절대로 밀리지 않는다.
70을 바라보는 골드시니어 여자가 ‘영계’하고 골프하는 것을 보면 이것은 난리도 아니다. 꼴
사나워서 차마 눈 뜨고 못 본다.
그래도 골프가 좋은 것은 인생을 한 살이라도 젊게 만들어 준다는 것이다. 애인이건, 연인이
건, 남자건, 여자건, 시니어건, 영닭이건 모두 에게 희열을 느끼게 한다.
하루에 코스를 돌아보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오늘도 필드에 나가 클럽을 휘두르는 사람
은 행복한 ‘브라보 마이 라이프’라는 얘기다.
글 안성찬 골프대기자/ 골프문화칼럼니스트
일간스포츠, 문화일보, 스포츠투데이 체육부 골프전문기자
이투데이 부국장겸 스포츠문화부장
뉴스웨이 골프대기자,
골프문화칼럼니스트
기구한 삶을 살았다. 부당한 인종차별의 상징인 루빈 ‘허리케인’ 카터가 향년 7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1966년 여름, 미국 뉴저지의 한 술집에서 세 사람이 쓰러졌다. 몇 발의 총성이 울린 뒤였다. 웨이트리스 패티 발렌타인, 좀도둑 벨로와 브래들리가 현장을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한다. 경찰은 한명의 숨이 아직 끊어지지 않은 것을 알고 병원으로 후송했다. 벨로와 브래들리는 두 명의 사내가 흰 자동차를 타고 달아났다는 목격담을 이야기한다.
같은 시간 루빈 카터라는 미들급 권투선수는 친구들과 드라이브를 하다가 불심검문에 걸린다. 경찰은 그를 의심해 부상자가 입원해있는 병원으로 데려간다. 의식을 회복한 부상자는 루빈 카터를 보고 범인이 아닌데 왜 데려왔냐고 한다.
범인을 잡지 못한 채 네달이 지났다. 조급한 경찰은 비열한 음모를 꾸민다. 사건 당일 검거했던 루빈 카터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기로 한 것. 빈민가 출신의 흑인 권투선수, 평소에 거친 언행으로 밉보였던 카터를 희생양으로 삼으려 했다.
목격자 브래들리에게 거짓 증언을 하게하고 증거를 조작해 카터를 수세로 몰아넣는다. 판결도 공정하게 진행되지 않았다. 백인으로만 이루어진 열 두명의 배심원은 카터에게 일급살인의 유죄 판결을 내린다. 카터는 종신형을 언도받고 감옥에 투옥된다.
이 후 카터는 감옥에서 진실을 위한 싸움을 시작한다. 자신의 주장을 글로 써서 '16라운드'라는 제목을 붙여 출판하기도 한다.
‘정의가 게임에 불과에 나라에 살기가 참을 수 없을 만큼 부끄럽다’
반전과 평화, 인권에 대한 노래를 부르던 가수 밥 딜런이 ‘16라운드’를 읽고 했던 생각이다. 밥 딜런은 책에서 받은 영감으로 ‘허리케인’이라는 제목을 붙인 노래를 카터에게 헌사 한다.
1985년, 카터는 마침내 자유를 쟁취한다. 연방법원의 재심 결과 무죄를 판결 받았기 때문이다. 19년이라는 긴 세월을 억울한 옥살이로 보낸 카터의 이야기는 1999년 ‘더 허리케인’라는 제목의 영화로도 제작된다.
카터는 전립선암 투병 중이었다. 오랜 친구인 존 아티스는 카터가 20일(현지시간) 잠자던 중 숨졌다고 말했다.
태풍이 몰아치듯 권투를 한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 ‘허리케인’. 한때는 프로복싱 미들급 세계 1위까지 오르며 고공 행진한 바 있다.
흑인이라는 이유로 인기 권투선수에서 하루아침에 살인범으로 몰려 19년의 옥살이를 한 카터. 그는 부당한 인종차별의 상징됐다.
히든싱어2 고(故) 김광석 편이 시청자들에게 폭풍감동을 선사했다.
지난 28일 방송된 JTBC ‘히든싱어2’는 1996년 세상을 떠난 영원한 가객 김광석과 모창 능력자들의 대결로 꾸며졌다.
이날 방송에는 김광석의 친구 한동준, 김창기를 비롯하여 주영훈, 유리상자 이세준, 방은희, 김성경, 박건형, 김슬기, 김예원, 홍대광, 정은지, FT아일랜드 이홍기 등 역대 최다 패널이 참여했다.
이들은 방송에서 김광석과의 인연을 공개하며 감동을 더했다. 또한 후배 가수들이 부르는 김광석의 노래 메들리와 김광석의 과거 영상, 육성 등으로 이목을 집중시켰다.
첨단 기술로 복원돼 모창 능력자들과 함께 부른 각 라운드 역시 치열한 대결이 펼쳐졌다. ‘먼지가 되어’를 부른 1라운드(김광석 3표)를 시작으로, 2라운드 ‘나의 노래’(김광석 10표), 3라운드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김광석 26표), 4라운드 ‘서른 즈음에’(김광석 45표)까지 매 라운드마다 패널들의 의견이 나눠지며 긴장감이 더해갔다.
김광석은 최종 라운드에서 유력한 우승 후보였던 모창 능력자 최승열보다 10표를 더 받으며 최종 우승했다.
이날 방송에서 주영훈은 “우리 나이대도 젊은 사람들에게 답을 확인해야 하는 초유의 사태에 빠졌다”고 말했으며, 정은지는 “아무래도 선배님들은 라이브 음성에 익숙하지만 저희는 녹음된 음성으로 듣는 게 익숙해져 있다”고 전했다.
모든 라운드가 끝나고 박건형은 “기적을 본 것 같다. 모두가 한 사람을 그리워하면 보이지 않는 것도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전했으며, 한동준은 "김광석 씨를 다시 생각할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하다" 고 말했다
해당 방송을 본 네티즌들은 "김광석씨가 아직도 살아 있는 것 같다", "아직까지 노래가 나오면 가슴이 먹먹하다"등의 반응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