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고 한다. 인생이 그렇듯이 사랑에도 정답이 없다. 인생이 각양각색이듯이 사랑도 천차만별이다. 인생이 어렵듯이 사랑도 참 어렵다. 그럼에도 달콤 쌉싸름한 그 유혹을 포기할 수 없으니….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고, 한 번도 사랑하지 않은 것처럼 헤어질 수 있다면 당신은 사랑에 준비된 사람이다. ‘브라보 마이 러브’는 미숙했던 지난날을 위로하고 남은 날의 성숙한 촉매제가 될 당신의 중년 사랑을 보듬는다.
퇴근해 돌아와 보니 아내가 짐을 싸서 집을 나갔다. 장식장과 콘솔 등 소품 자리가 빈 휑뎅그렁한 거실 한가운데에 찌무룩이 섰다가 주방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들이켰다. 찬 기운이 정수리를 타고 올라가는가 싶더니 가슴께로 싸하게 번졌다. 나도 모르게 숨을 크게 뱉었다가 크게 들이마셨다. 정신을 가다듬어야 한다. 하긴 출근길에 아내의 딸이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 차를 세우는 것을 보았으니 오늘 짐을 빼겠구나 짐작은 했다. 그리 놀랄 일이나 새삼스러운 충격은 아니란 뜻이다.
이렇게 해서 다시 혼자가 되었다. 재혼한 지 1년 반 만에. 말이 1년 반이지 한 공간에서 지낸 것은 6개월도 채 되지 않는다. 다툴 때마다 아내는 버릇처럼 집을 나갔으니까. 친정도 없는 사람이 변변히 갈 데가 있을 리 없건만 마치 가출 자체로 위로를 삼는 것처럼 수틀리면 훌쩍 집을 나갔고, 그렇게 한번 나갔다 하면 몇 달씩 들어오질 않았다. 그럴 때마다 거의 내 쪽에서 화해를 청했고, 아내가 마음을 풀고 돌아오면 이번에는 내가 불안해졌다. 다시 나가지 않을까 하고. 하지만 이제 다시 돌아올 일은 없으리라. 불안할 일도 없으리라. 서로가 재혼이라 혼수를 따로 장만한 것도 없고 아내가 아끼던 자잘한 것들만 가지고 내 아파트에서 합쳤던 터라, 이번 가출은 전과 달리 물건을 모두 실어서 나간 걸 보면 이로써 우리의 인연도 끝난 것일 터. 그렇게 자꾸 나갈 거면 아주 나가버리라고 했던 건 나니까.
다시 혼자가 되어
이렇게 둘이서 서둘러 결정할 게 아니라 그 흔한 부부 상담이라도 받아봤어야 했던 거 아닐까. 갈등의 뿌리는 건드려보지도 못하고 서로 자존심만 세우다 아내도 나도 얼결에 이런 선택을 하게 된 건 아닐까. 나는 아내를 사랑했을까. 아내는 나를 사랑했을까. 함께 연주를 하기도 전에 조율 중인 악기를 내팽개쳐버린 것처럼 이런저런 생각이 마구 뒤엉키며 혼란스레 오갔다.
아내와 나는 혼인신고를 하지 않았으니 법적으로는 부부가 아니다. 그저 잠깐 동거한 관계일 뿐. 그렇게 생각하면 홀가분하다가도 성대히 치른 결혼식이 마음에 걸린다. 그랬다. 우리는 결혼식을 꽤나 성대히 치렀다. 남들 눈에 그럴 듯해 보이고 싶었던 허영심, 과시욕에서만큼은 아내와 내가 의기투합했던 것이다. 돌이켜보니 허탈감과 자괴감이 든다. 재혼의 형식만 그럴 듯했지 부부의 내실은 너무나 허약했고, 그나마 이제는 관계를 쌓아갈 토대가 사라졌다. 그렇다고 내가 재산을 지키자고 아내와 혼인신고를 하지 않았던 건 아니다. 아내도 그건 인정할 것이다. 내 재산 못지않게 아내도 자기 몫이 알찬 사람이니까. 그러니 혼인신고를 미룬 이유는 서로 속 깊이 사랑하지 않아서라 할밖에. 말이 부부지 결속의 끈은 느슨했던 것이다.
동병상련의 사랑
나는 20년 전에 상처(喪妻)를 했다. 대학 선배의 소개로 만난 두 살 아래 전처와의 10년 결혼 생활은 만족스럽고 행복했다. 서른 살에 결혼하여 이듬해와 또 그 이듬해에 연년생 남매를 낳았다. 아이들은 건강하고 영리했다. 안정된 나의 직장과 가정을 소중히 보살피는 아내, 무엇을 더 바란다면 죄를 짓는 느낌이 들 만큼 평범하지만 안온한 생활이었다. 아내가 간암 판정을 받을 때까지는. 그랬던 우리가 무엇을 더 바라는 죄라도 지었던 것일까. 서른여덟 살 젊디젊은 아내는 그렇게 우리 세 식구를 남겨두고 1년 투병 끝에 훌쩍 세상을 떠났다. 그렇게 사랑하고 아끼던 아이들을 남겨두고. 아홉 살, 여덟 살 남매는 엄마를 잃었고 나는 나이 마흔에 아내를 잃고 홀아비가 되었다. 이후 직장과 가정을 병행하여 돌봐야 했던 지난 20년, 고달프고 서글프고 버거워 견딜 수 없을 때면 아내의 묘를 찾아가 “나는 이렇게 힘든데 당신은 어쩌면 이렇게 태연히 누워 있을 수 있냐”고 원망과 푸념을 쏟아내곤 했다.
아내가 떠난 후 남은 우리 세 식구는 함께 외식을 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아내가 없는, 엄마의 자리가 빈 가족 외식은 그 존재의 부재를 더욱 각인시키며 누가 뭐라는 것도 아니건만 식당에 앉아 있는 내내 위축감을 느끼게 했다. 부부와 자녀들이 함께 식사하는 모습을 볼 때는 더욱 그랬다. 저 평범한 일상이 우리에게는 더 이상 주어질 수 없다는 쓰라림과 함께.
아내를 따라 나도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도 여러 번 있었다. 하지만 내 책임을 다한 후 이담에 저세상에서 아내를 만나 단단히 생색을 내자며 오기 아닌 오기로 버텨온 것이 어느덧 20년. 30세가 가까운 남매는 아직 미혼이긴 해도 둘 다 직장이 있으니 내 역할은 끝났다고 생각할 즈음, 지금 막 헤어진 두 번째 아내를 만났다. 그간 주변에서 재혼 권유나 소개가 전혀 없지는 않았지만 아이들을 생각해서 마다해왔던 것을 이제는 마음을 좀 열어도 괜찮지 않을까 싶을 때였다.
막 헤어진 지금의 아내도 나와 비슷한 시기인 38세 때, 세 살 많은 남편을 교통사고로 잃고 딸 하나를 데리고 혼자 살아왔다. 설 명절을 지방 시댁에서 보내고 귀경하던 눈길 고속도로에서 타고 오던 차가 미끄러지면서 중앙 분리대를 박으며 순식간에 일어난 사고였다. 피로를 덜고자 부부가 교대 운전을 하고 있었고, 사고 당시 운전대는 아내가 잡고 있었다. 옆자리의 남편은 중상을 입은 후 병원에서 사망했고, 뒷자리에 앉아 있던 다섯 살 딸과 자신은 큰 부상을 입지 않았다.
허울뿐인 결혼
딸을 키우며 20년 가까이 혼자 살아온 아내. 야무지게 자신을 지키며 강한 생활력과 다져진 실력, 철저한 자기 관리로 직장의 잔뼈가 제법 굵어져 나를 만날 무렵에는 꽤 높은 위치에 올라 있었다. 나는 지금 대표 자리에 있는 회사에서 당시는 중역이었기에, 어느 경제인 조찬 모임에서 회사를 대표하여 참석한 그녀를 만날 수 있었다. 열 개 남짓 마련된 원탁 가운데 마침 한 테이블에 앉게 되어 서로 명함을 주고받으며 인사를 나눈 것이 인연의 시작이었다.
우리는 사별의 아픔을 겪은 공통점으로 인해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같은 모임에서 다시 한번 우연히 같은 테이블에 앉게 되자 우연을 인연으로, 인연을 필연으로 연결시키고자 하는 갈망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마음을 열었다. 서로가 서로를 알아봤다고 할까. 느낌이란 게 있다고 할까. 우리는 연민과 연정으로 그렇게 한 마음, 한 몸이 되었다.
우리의 성대한 결혼식은 조찬 모임 참석자들을 의식한 점도 작용했다. 경제인 단체 회원 중에 커플이 탄생한 것도 이례적이거니와 그들의 사회적 신분을 고려할 때 아예 가족끼리 조촐히 치르면 모를까, 식을 올린다면 하객들의 신분에 걸맞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지금은 모두 부질없는 짓일 뿐 아니라 크게 벌인 만큼 창피한 일이 되어버렸지만. 실상 말이 가족끼리지 그녀에게는 부모님도, 가까운 친척도 안 계셨고, 나도 다른 형제 없이 홀로 자라 연로하신 어머니 한 분뿐이니 조촐하다 못해 초라한 모양새가 될 게 뻔했다. 결국 사회에서 연결된 지인들을 모시다 보니 나와 그녀의 직장 관계자까지 초대하여 그만 식이 커져버린 것이다.
기가 막히게도 아내는 대학 3학년 때 양친을 한날한시에 교통사고로 잃었다. 그때도 어느 해 설에 부모님과 함께 지방의 조부모님을 뵙고 올라오던 때였다고 한다. 뒷좌석에 앉아 음악을 들으며 졸고 있었던 그녀는 사고 후 혼자 살아남았다. 운명이란 게 있다면 그녀에게는 같은 운명이 반복되었던 것이다. 학생 때는 교통사고로 부모를 잃고, 결혼 후에는 역시 교통사고로 남편을 잃었으니. 또한 부모를 잃은 자신의 운명을 딸에게 그대로 넘겨줬다.
굶주린 애정
아내와 그녀의 딸은 처음에는 나와 한집에 살았다. 아내를 위한 나의 배려였다. 또한 두 사람이 불편하지 않도록 나의 두 아이는 따로 거처를 마련해서 내보냈다. 한평생 의지하고 살아온 아내와 아직 미혼인 아내의 딸을 떼어놓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게 화근이었을까. 모녀는 한 몸처럼 결합되어 도무지 내가 끼어들 여지를 주지 않았다. 다툼의 원인이 아내의 딸 때문일 때도 종종 있었다. 가령 무질서한 생활 습관이나 늦은 귀가 시간에 대해 몇 번 주의를 줬더니 그게 서운했던지 내게는 한마디 상의도 없이 제 엄마랑만 속닥거린 후 독립을 해버렸다. 그때 나는 내심 잘됐다는 생각도 들었고, 제 발로 나가준 것이 고맙기도 했다. 내 아이들을 생각할 때 공평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아내와 나 본격적인 둘만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집을 나가는 아내의 버릇도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딸의 아지트가 있었으니까. 채 정이 들지 않은 나와 사는 것보다 딸과 지내는 것이 더 익숙하고 편했던 거겠지. 관계가 본격적으로 엇나가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부부로 정이 들기도 전에 균열이 깊어가고 있었다. 그러고는 오늘의 결별을 맞은 것이다.
나도 아내도 첫 결혼에서 배우자를 일찍 여의고 혼자 모든 것을 감당해야 했다. 외롭고 팍팍한 길을 걸으며 사랑에 굶주려 있었다. 상대의 빈 가슴을 채워주기보다 나의 허기가 먼저였다. 그만큼 새로 만난 사람에 대한 기대가 컸던 것이다. 남자로서 내가 좀 더 아량이 넓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해보지만 그 또한 생각일 뿐, 그게 말처럼 쉽다면 지금의 이 상황을 마주하지는 않았을 터. 누구를 탓하랴. 탓할 것은 내 팔자요, 그녀의 팔자일 뿐. 여하튼 지금은 쉬고 싶을 뿐이다.
✽브라보 마이 러브는 실제 사례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내용입니다.
흔히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고 한다. 인생이 그렇듯이 사랑에도 정답이 없다. 인생이 각양각색이듯이 사랑도 천차만별이다. 인생이 어렵듯이 사랑도 참 어렵다. 그럼에도 달콤 쌉싸름한 그 유혹을 포기할 수 없으니….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고, 한 번도 사랑하지 않은 것처럼 헤어질 수 있다면 당신은 사랑에 준비된 사람이다. ‘브라보 마이 러브’는 미숙했던 지난날을 위로하고 남은 날의 성숙한 촉매제가 될 당신의 중년 사랑을 보듬는다.
“나이 든 사람의 사랑이 젊은이들의 사랑보다 편한 게 있다면 뭘까?”
“음… 내 생각엔 서로 밀당(밀고 당기기)을 하지 않는 게 아닐까 싶어.”
“뭐라고? 밀당을 하지 않는다고? 밀당은 사랑의 온도를 유지하기 위한 필수 요건 아닌가? 난 그렇게 생각해. 밀당이 빠진 사랑은 김빠진 맥주 정도가 아니라 아예 맥주를 포기해야 할 수도 있거든.”
“너 말 잘했다. 그거야말로 맥주의 거품 같은 거라고 생각해. 밀당은 거품이라고. 사랑의 본질과는 아무 관계없는.”
카페 옆자리의 중년 여자 둘이서 아침나절부터 사랑 타령이다. 이달 원고를 마감하고 브런치로 모처럼 느긋한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나와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여자들의 대화가 호기심을 동하게 한다. ‘밀당할 필요가 없는 게 아니라 밀당할 에너지가 딸리는 거겠지.’ 속엣말로 슬그머니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밀당이 뭔가? 새삼스레 스마트폰으로 검색해보니 ‘연인이나 부부, 또는 경쟁 관계에 있는 두 사람 사이에 벌어지는 미묘한 심리 싸움을 밀고 당기는 줄다리기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라고 네이버 사전이 알려준다.
밀당이 사랑 잡네
‘미묘한 심리 싸움’, 이게 얼마나 에너지를 축나게 하는 일인가. 그러니 중년의 나이에 사랑을 하려거든 밀당을 포기할 수밖에. 문제는 연인 둘 다, 양쪽 모두 안 하면 별 상관이 없는데 한쪽이 기어코 밀당을 하려고 든다면 다른 한쪽이 말려들 수밖에 없고, 그 결과 사랑의 주도권을 잃고 을로 떨어지게 된다는 점이다. 즉 밀당으로 인해 예상치 않은 심각한 상황을 초래할 수도 있다. “까짓것 을이 되면 어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갑이 되고 나는 영원히 을이 된다면 차라리 그게 더 좋겠어”라고 맘 넓은 척 굴다간 밀당의 희생자가 되기 쉽다. 밀당의 속성이 원래 그런 거니까. 무슨 소리냐고? 정말 몰라서 물어? 차이게 된다는 거지.
대저 연애 심리, 남녀 사랑의 공식은 나이 불문하고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걸 누구나 한두 번은 경험해보지 않았나. 거기에는 이른바 서툰 밀당이 이별의 원인으로 작용한 경우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밀당에서 이기는 방법은 간단하다. 그 사람을 덜 좋아하면 된다. 상대가 나를 더 좋아하고 내가 상대를 덜 좋아하면 저절로 되는 게 밀당이다. 아니면 좋아하는 마음을 자제할 줄 알거나. 그런데 말이야 쉽지. 그게 된다면 ‘밀당의 기술’이란 말이 왜 있을까. 기술이란 배워서 연마해야 할 기량이며, 성공할 때도 있지만 실패할 여지가 항상 깔려 있는 난이도 높은 그 무엇이 아닌가. 단적으로 말해 밀당에 성공하는 사람은 연애의 고수이자 동시에 사랑의 쟁취자이니, 밀당은 하면 좋고 안 해도 그만인 계륵 같은 게 아니라 성공적인 연애의 핵심이다. 이러니 밀당에는 나이가 없을 수밖에.
밀당의 요령
그렇다고 밀당을 난공불락 요새처럼 두려워하거나 지레 포기할 필요는 없다. 현실에서 적용하는 것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가령 카톡을 받았을 때 바로 답하지 않기, 상대가 보낸 메시지 분량보다 짧게 회신하기, 전화도 한 번쯤은 안 받기, 그러다 상대에게서 다시 전화가 오면 바빠서 나중에 하려다가 그만 잊어버렸다며 별로 미안해하지 않으면서 시큰둥하게 답하기. 세 번 요청에 한 번꼴로 데이트에 응하기, 데이트할 때는 평소에 함께 보내는 시간보다 별 이유 없이 빨리 헤어져서 상대를 이따금 실망시키기, 스킨십 때도 안으려고 하거나 손을 잡으려고 할 때 슬쩍 몸을 뺀다거나 딴청 하기, 잠자리 횟수 조절하기 등등, 그때그때 상황 따라 상대를 안달나게 하면 된다. 좋게 말해 상대의 욕망을 내 쪽에서 조절하고 절제시켜주는 거라 할까. 역시 쉽지 않다고?
“과연 그럴까? 사랑을 왜 하는데? 사랑을 하면 젊어지는 느낌이 드는 게 왜 그런데? 나이 든 사람일수록 사랑을 할 때 여자는 더 여자로 대접받고 싶고, 남자는 더 남자다워지려고 하잖아. 사랑은 나이를 먹지 않는다는 뜻이지. 나이 든 사람일수록 연애할 땐 더 유치해지는 법이야. 젊은 애들이 하는 건 다 해보고 싶은 욕망인 거지. 그런 기분, 그런 감정을 즐기고 싶어서 연애하고 사랑하는 거 아냐? 그런데도 밀당이 필요없다고?”
다시 들리는 옆자리의 대화. 약간 불편해지기 시작하는 나. 밀당은 상대에게 불안을 주어 자신 옆에 붙들어두려는 전략이다. 두려우면 더 매달리는 사람 심리를 이용한. 하지만 잘못 사용했다간 진정한 사랑을 잃게 되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위험하다 못해 치명적인.
밀당하다 망한 여자들
밀당 하면 떠오르는 문학 작품이 있다. 스탕달이 1830년에 쓴 ‘적과 흑’에서 줄리앙을 대하는 마틸드의 태도는 밀당의 전형이자 원조다. 결론부터 말하면 밀당 좋아하다 망한 여자가 마틸드다. 밀당에 중독된 이런 부류들은 남자가 사랑한다고 말하면 멀리 달아나버린다. 아니 달아나는 정도가 아니라 좋아하는 마음이 싹 없어져버린다는 게 문제다. 제 꾀에 제가 빠진다고 할까. 목적은 상대가 자신을 더 좋아하게 하고 더 끌리게 하려는 것인데 결론은 그 사랑을 잃게 만든다는 점에서. 그런 마틸드를 줄리앙이 사랑스럽게 느낀 순간이 있는데, 마틸드가 솔직하고 꾸밈없는 마음을 언뜻 비쳐 보였을 때다. 결국 그 사랑은 누가 차지하는가. 레날 부인이 아닌가. 자신보다 열두 살이나 더 많은 유부녀였지만 순수한 사랑에는 밀당 따위 끼어들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내 주변에 이런 경우가 있었다. 튕기고 안달나게 하는 애인에게 지쳐 다른 연인을 만든 것까진 있을 수 있는 일인데, 그의 새 연인이 옛 연인의 절친이라면? 밀당하는 애인 때문에 속이 타들어간 나머지 도대체 어떻게 하면 비위를 맞출 수 있는지 가장 친한 친구에게 물어보고 의논하다 그만 둘이 정이 들어버렸으니.
결론적으로 말하면 밀당은 사랑의 촉매제, 조미료는 될 수 있지만 사랑의 몸통, 원재료는 될 수 없다. 요리에 자신 없는 사람일수록 조미료로 맛을 내려고 하는 것처럼 밀당은 자기 자신에 대해 자신 없는 사람이 집착하는 치사하고 졸렬한 전략이다. 재료의 품질이 높고 신선하다면 조미료 따위에 의지해 맛을 낼 필요가 없다. 재료 본연의 맛을 살려 깊고 그윽한 풍미를 내는 것, 이것이 진정한 요리의 달인이 아닌가. 조야한 음식은 한두 번만 먹어도 물리는 법.
중년의 사랑, 사람이 먼저다
그럼 중년에는 어떤 사랑을 해야 할까. 밀당하지 않고도 사랑하고 그 사랑을 오래 유지하는 방법은 정녕 없을까. 내가 아는 올해 69세 된 어떤 남자가 이런 말을 했다.
“남자는 나이가 들어 성적 능력이 거의 사라져야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지 않나 싶어요. 성욕과 성 능력이 왕성할 땐 여자가 성적 대상으로만 보이고, 게다가 한 여자에게 만족할 수 없어서 끊임없이 또 다른 성적 대상에게 눈을 돌리게 되더라고요.”
모든 남자를 대변한 말은 아니겠지만 솔직하고 정직한 고백으로 들린다. 성적 욕망 충족이 곧 사랑은 아니라는 ‘철든 생각’처럼도 들리고. 그토록 오랜 세월, 남녀는 사랑을 놓고 동상이몽에 있었다는 뜻이니 허탈하기도 하다. 물론 여자라고 해서 성과 사랑을 전혀 별개의 자리에 놓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우선순위의 문제라고 할까. 사랑을 쌓고 키워가는 토대의 문제라고 할까.
사랑을 통해서, 내 앞의 그와 그녀를 통해서 홍안의 소년 소녀가 되고 싶은 거지, 실제로 소년 소녀는 아니다. 밀당을 하고 싶어도 할 에너지가 없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지만 밀당은 일종의 치밀한 기술이자 계략적 전술 전략이다. 사랑을 얻고 그 사랑을 오래 유지하기 위한. 그렇다면 전략 없이, 계략 없이도 사랑이 지속될 수 있으면 될 터이니, 그것은 곧 인간애가 아닐까. 여자가, 남자가 더 이상 여자가, 남자가 아닐 때 참사랑을 시작하고 유지할 수 있다고 할까. 말하자면 ‘사람이 먼저’라는 뜻이다.
너무 재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기에
중년의 사랑, ‘뭣이 중헌디?’라고 물으신다면 먼저 사람 되는 것이 중하다, 사람 냄새가 먼저라고 답하리라. 사랑이라는 이미지를 사랑하지 말고 실제 그 사람을 사랑하라는 말이다. 우리는 일평생 사랑이라는 이미지에 속은 것으로도 모자라, 여전히 속고 있다. 이제는 그런 사랑이라면 아예 하지 않는 것이 낫다. 밀당은 그런 사랑의 망상이 빚는 헛그물질이다. 거기에 걸려드는 물고기 역시 인조 물고기일 것이다.
너무 아픈 사랑도 사랑이 아니지만 너무 재는 사랑도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과만 해야 한다. 그 사이에 잔꾀나 사랑의 이미지를 삽입하지 마시라. 그러기 위해서는 나 자신에 당당해야 한다. 나를 먼저 사랑해야 한다. 그러고는 사랑의 바다에 풍덩 뛰어들어야 한다. 좋은 사람이 좋은 사랑을 한다. 좋은 사람은 밀당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어떤 식으로든 상대를 속이는 것은 나쁜 것이기에. 밀당은 상대를 중독에 빠지게 한다. 사랑중독자가 되게 만든다. 중독은 나쁜 것 아닌가. 더구나 사랑중독자라니. 사랑 중 밀당은 유죄다. 특히 중년의 사랑에서 밀당은 중죄다. 사랑을 제대로 해볼 시간도 기회도 제한적이기 때문에. 사랑하기도 아까운데 밀당할 시간이 어디 있나.
✽브라보 마이 러브는 실제 사례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내용입니다.
이주호는 느리고 부드럽다. 맑고 고요하다. 푸근하고 꾸밈없다. 그의 진솔함과 진득함에는 포크계 거장의 이미지보다 웅숭깊은 우물에서 노래를 길어 올리는 구도자의 모습이 어려 있다. 이성보다 직관으로, 분석보다 느낌으로, 머리보다 가슴으로 우리의 영원한 테마이자 구원인 사랑과 행복을 노래한다. 인생 전체를 사랑바라기, 행복바라기로 영위해온 해바라기 이주호, 그의 참 좋은 시절은 그때고, 지금이고, 앞으로다.
영혼으로
그에게 언어는 마지못해 빌려온 연장 같다. 한 가지를 가지고 이것저것 때우듯 쓰는 것 같은데도 충만한 감성 덕에 자연스럽고 멋스럽다. 가령 그가 말하는 ‘동반자’는 아내를 의미하기도 하고 기타를 뜻하기도 한다.
“내 인생의 소중한 동반자인 기타라는 친구는 처음 만남에서부터 그렇게 소리가 좋을 수 없는 거라.” 이런 식이다. 그런가 하면 코로나를 ‘그 친구’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 친구가 지난 몇 년간 우리와 함께하면서 모두를 힘들게 했지. 이제는 그 친구도 떠날 때가 된 것 같은데….” 이렇게 말이다.
언어는 이분법의 도구다. 너와 내가 다르고, 다름이 틀림이 되고, 그로 인해 상처 주고 상처받는 데는 언어만 한 비수가 없다. 말로, 글로 받은 생채기를 싸안고 보듬는 것, 그것은 ‘사랑’이다. 사랑만이 이분법의 경계를 지울 수 있다. 내 안에 너를, 네 안의 나를 볼 수 있게 하는 영혼과 마음의 대화인 셈이다. 그 사랑을 선율에 앉히면 그야말로 금상첨화. 슬픔 속에서 아름다움을 읽어내고, 나약함을 강함으로 바꾸는 그의 노래는 언어적 이분법을 해체한 자리에 사랑을 흘려보낸다. 어언 50주년을 맞는 이주호 노래 인생의 주 테마는 그렇게 사랑인 것이다.
그는 1956년, 10남매의 일곱째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사업가 아버지와 성악가 어머니 사이에서 다복한 유년 시절을 보내며 평탄하게 성장했다. 너나없이 궁핍한 시절이었지만 경제적 어려움도 심적 고생도 이주호만큼은 빗겨갔다. 노래처럼 인생이 술술 풀려나갔다고 할까. 그에게 노래는 인생과 같은 말이니 노래하는 인생 그 자체로 행복했다.
“아버지는 명보당이라고 보석 다루는 일을 하시면서 삼성물산 초기에 이병철 아저씨한테 돈을 대주던 전주였어요. 운수업도 하셨고요. 어머니와 이모들은 성악을 전공하셨지만 십대 때의 저는 음악적 재능이 표출되지 않은 평범한 학생이었지요. 그냥 취미로 한 게 전부였죠. 형제들도 음악 하는 사람은 없고요. 그랬는데 어느 날 음악이 제게 왔어요. 온몸과 온 마음에 세례를 받았다고 할까요? 저절로 곡이 떠오르고 가사가 써졌어요. 왜 그런지는 저도 몰라요. 영혼이 노래로 채워지는 느낌이었던 거죠.” 이 또한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그저 천부적 재능이 주어졌다고 할 수밖에.
그는 곡을 만들 때 감성의 원형인 자연에서 가장 많은 영감을 얻는다. 자연의 곡선을 따라 선율이 흐른다. 해바라기가 해바라기인 것도 의도함 없이, 인연 따라 무위로 다가온 결과다. “당시 명동가톨릭회관에서 젊은이들이 음악 모임을 하곤 했는데, 그때 방 이름이 들국화, 코스모스, 장미, 해바라기 등이었어요. 제가 주로 이용한 곳이 해바라기룸이라 수녀님이 그룹 이름을 그렇게 부르는 게 좋겠다고 하셔서 그대로 따른 거죠.”
인연으로
아는 사람은 알지만 해바라기는 원래 혼성 4인조 그룹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이주호, 이정선, 한영애, 김영미 이렇게. 1977년의 일이고, 첫 앨범이 그때 나왔다. 그러다 이정선이 입대하고, 이광조가 그 자리를 메웠다. 같은 해 두 번째 앨범이 나왔다. 이후 김영미의 해외 유학으로 4인조 해바라기는 해체를 맞게 된다. 이주호는 군 입대로, 이광조, 한영애는 솔로로 나섰다. 제대 후 이주호 또한 ‘내게 행복을 주는 사람’으로 솔로 데뷔를 한다.
1982년 유익종과 듀엣 해바라기를 만들었는데,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해바라기가 이때 탄생한다. 그러다 유익종이 떠나가고 이광준이 옆지기가 되었다. ‘모두가 사랑이에요’가 부상하기 시작하던 때였고, 이어 ‘이젠 사랑할 수 있어요’, ‘어서 말을 해’ 등이 주목받았다. 3집에서는 다시 유익종과 함께하며 ‘사랑은 언제나 그 자리에’, ‘내 마음의 보석상자’가 히트했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심명기, ‘자전거 탄 풍경’의 송봉주가 그의 옆을 지켰고, 강성운과는 1999년 이래 10년간 호흡을 맞췄다.
왜 그렇게 자주 파트너를 바꾸냐는 의아한 시선도 있었지만 그는 바람이 오고 가는 것처럼 인연 따라 일어난 일이라 여긴다. 의도적으로 누구를 지목하여 함께하자거나 계획한 게 아니었기 때문에 오가는 인연에 대해 담담할 수 있었던 것. 함께 노래하고 싶어 만났고 떠날 때가 되어 떠나갔다. 그러다 바람처럼 또 휘감겨올 때 그 인연을 받아들였을 뿐이다.
그와 함께 가장 오래 노래한 강성운은 해바라기의 ‘찐팬’으로 고등학교 때 ‘해보라지’라는 팀을 만들어 고교 축제 무대에 섰다. 애오라지 해바라기 노래만 부르던 그가 해바라기의 정식 일원이 되어 언감생심 이주호 옆자리를 꿰찼을 땐 꿈인지 생시인지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고.
최근에는 건반을 맡는 아들 이상 씨가 합류하면서 밴드 해바라기가 탄생했다. 이상은 2000년 그룹 유.피.에스(U.P.S)로 데뷔했다. 래퍼 도끼 등과 그룹 레이원으로도 활동했고, 2005년부터 솔로로 전향해 1집 앨범 ‘올 어바웃 다 러브’(All About Da Love)를 냈다. 미국인 외할아버지를 둔 혼혈 3세로 두드러지게 출중한 외모와 타고난 재능 덕에 모델로도 활동했다. 아버지 이주호와는 위례신도시 아파트 아래 위층에 살면서 음악인 이전에 자연인으로 부자의 정 또한 돈독하다.
“아버지는 조용한 분이세요. 항상 뒤에서 묵묵히 후원해주시죠. 음악이 아닌 다른 삶을 생각해보신 적이 없었듯이 저 또한 음악 외의 길을 간다는 마음을 가져본 적이 없습니다. 제 음악을 하면서 해바라기 밴드로도 활동하는 ‘따로 또 같이’의 시간이 행복합니다.”
사랑으로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만든 곡은 약 1000곡, 그 가운데 이주호가 가장 마음에 품고 싶은 노래는 1989년에 만든 ‘사랑으로’다.
군더더기 설명이 필요 없는 국민 애창곡 ‘사랑으로’의 배경에는 사연이 있다. 노래를 만들 때는 곡과 가사가 동시에 떠오를 때가 있는가 하면, 곡이 먼저 진행될 때도 있고 노랫말부터 완성될 때도 있다. ‘사랑으로’는 곡을 만들어놓고 2년이나 흘렀지만 어찌된 게 가사를 붙이지 못하고 있었다. 86 아시안게임과 88 서울올림픽이 열리던 때라 국민의 정서적 화합을 이룰 수 있는 노래를 만들고 싶었다. 풍요 속의 빈곤이란 말처럼 당시 대한민국은 국제적 주목과 물질적 풍요를 구가하며 한껏 들떠 있었지만 과연 그것이 전부일까, 잃어버린 그 무엇이 있지 않을까 하는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그는 기다렸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우연히 신문 기사를 접한다. 김포공항 부근 환경미화원 가정의 네 자매가 끼니조차 잇기 어려운 궁핍한 생활을 비관하여 농약 자살을 기도했는데, 그중 세 살 막내가 생명을 잃었다는 내용이었다. 여섯 식구를 먹여 살려야 하는 가장의 수입은 고작 월 25만 원, 올림픽을 치를 정도의 경제력을 지닌 나라에서 라면값도 여의치 않았다는 것이니. 이루 말할 수 없이 마음이 아팠던 이주호는 눈물을 글썽인 채 그 자리에서 바로 가사를 써 내려갔다. 받아 적는 손이 따라오지 못할 정도로 울림 가득한 노랫말이 쏟아졌고, 두 볼과 가슴에는 눈물이 타고 내렸다.
내가 살아가는 동안에
할 일이 또 하나 있지 /
바람 부는 벌판에 서 있어도
나는 외롭지 않아 /
그러나 솔잎 하나 떨어지면
눈물 따라 흐르고 /
우리 타는 가슴 가슴마다
햇살이 다시 떠오르네 /
아~ 영원히 변치 않을
우리들의 사랑으로 /
어두운 곳에 손을 내밀어 밝혀주리라
‘사랑으로’가 알려지면서 막내딸을 잃은 환경미화원 가족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었고, ‘사랑으로’ 사랑을 실천할 수 있어서 무엇보다 기뻤다. 힘든 사람들을 위해 낮고 어두운 곳에서 노래로 위로와 행복을 나누고자 했던 그의 소망이 결실을 맺은 것이다. ‘사랑으로’는 중고등학교 음악 교과서에도 실렸다. 공감대의 동심원은 국내의 문턱을 넘어 세계로 번져나가, 2001년 키예프 국립오케스트라와 ‘For the Peace’ 음반을 녹음하고, 세계 3대 테너 중 한 명인 호세 카레라스는 세계 명곡 음반 ‘Around the world’에 자신이 직접 부른 ‘사랑으로’를 수록했다. 만국어인 사랑이 ‘사랑으로’ 노래가 되어 국제가요의 반열에 오른 것이다.
행복으로
내 인생은 행복했다고 주저 없이 말하는 그에게도 원초적 아픔은 있다.
”살아 있는 것들은 언젠가는 끝을 만나야 하잖아요. 생명을 부여받았기 때문에 겪어야 하는 고난과 시련이 우리 모두를 슬프고 아프게 하지요. 아무리 찬란했던 인생도 늦가을 나뭇잎처럼 어느 순간에는 다 놓고 떠나야 하니까요. 바람 같고 낙엽 같은 인생, 그런 것들로 인해 가슴 아파하고 혼자 슬피 울기도 하고. 나만 이런가, 다른 사람은 어떤 방식으로 원초적 막다름을 마주하나 살펴보려고 시장을 한 바퀴 휙 돌기도 하고. 일부러 이것저것, 여기저기 부딪혀보면서 답을 찾으려고 하지요. 그렇게 얻은 내 사유와 정서를 타인들과 공유하고, 내가 하는 고민과 번민을 딴사람도 할 거라고 믿기에 그런 것들을 노랫말에 녹이는 거지요.”
그는 1993년 유럽 순회공연 때 스위스 바젤에서 만든 곡 ‘해지는 강변’(11집에 수록)을 떠올렸다. 각자 아름다운 추억이 되살아날 거라고 하면서. 지난 8월, 스위스 바젤의 한 비영리단체를 통해 안락사로 생을 마감한 64세 한국인 폐암 말기 환자를 배웅하고 온 필자에게 위로차 들려준 곡이기도 하다.
해지는 강변에 홀로이 찾아와 물빛에 비치는 금빛 햇살은 / 조약돌 세는 내게 지나간 시간에 아름다웠던 얼굴들을 보이네/ 언젠가 때가 되면 이 강변에서 오랜 시간 지나간 후라도 서로가 서로를 찾아보자 했지/아름다웠던 기억들이 보이네/ 그 후론 우리는 나름대로 길을 갔었지/ 물살이 지우는 그 사람들의 얼굴은 어느덧 세월의 골이 새겨있어 아무도 모를 우리의 시간들
“저의 온 존재가 노래를 통해 사랑했고 사랑받았습니다. 저는 지난달 가수 인생 처음으로 제가 만든 노래가 아닌 남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후배의 곡이죠. 원래는 제게 편곡을 부탁하러 온 건데 나중에 제가 꼭 좀 불러줬으면 좋겠다고 간청하는 거예요. 받아들였습니다. 이 또한 해보지 않았던 경험이자 새로운 행복일 수 있으니까요. 무엇보다 가사가 마음에 들었어요.”
버티고 버텨온 내 삶의 끝에서 당신 만나 너무나도 행복했어요/ 그리움을 참고 밤하늘을 보면 당신 얼굴이 보여요/ 이렇게 사랑한 내 마음, 당신을 잊어야만 하는데/ 때로는 우는 얼굴, 우는 버릇, 눈물 버릇 언제나 받아주던 당신이기에/ 가라고 가라고 하진 마세요/ 지금은 갈 곳이 없어요, 조금만 있으면 떠날 테니까/ 서둘지 말아요, 이미 끝난 사랑 서둘지 마세요
”올 한 해도 그리움과 함께, 코로나와 함께 지냈네요. 어렵고 힘든 시기를 소망 꺾지 않고 헤쳐나가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고생하신 모든 분들, 제가 만든 노래로 위로를 받으셨으면 좋겠고, 나보다 못한 누군가를 위해서 살아갈 수 있고 그들에게 행복을 줄 수 있는 우리이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언제나 사랑으로 우리 마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서로 기도하고 붙잡아주고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올해 끝자락에 신곡을 발표했습니다. 그중 ‘가을이면 오시려나’의 노랫말 중에 ‘겨우내 얼었던 가슴들은 서로를 위로하는데’라는 구절이 있어요. 서로 보듬고 위로하고 내 아픔이 네 아픔이고, 네 고통이 내 고통이라는 걸 서로 알아주는 것, 그런 게 공감이자 행복이 아닐까요? 이만큼 살아보니 행복이 따로 있는 게 아니더라고요.”
[브라보 마이 러브]
흔히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고 한다. 인생이 그렇듯이 사랑에도 정답이 없다. 인생이 각양각색이듯이 사랑도 천차만별이다. 인생이 어렵듯이 사랑도 참 어렵다. 그럼에도 달콤 쌉싸름한 그 유혹을 포기할 수 없으니….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고, 한 번도 사랑하지 않은 것처럼 헤어질 수 있다면 당신은 사랑에 준비된 사람이다. ‘브라보 마이 러브’는 미숙했던 지난날을 위로하고 남은 날의 성숙한 촉매제가 될 당신의 중년 사랑을 보듬는다.
30년 만에 그를 만났다. 나는 새내기, 그는 대학 3학년이었으니. 이렇다 할 로맨스는 없었다. 손 정도는 잡았을 테지만 입맞춤을 해본 기억은 없다. 하기야 데이트다운 데이트를 해본 적도 없고, 헤어지기 전 어느 가을 춘천에 한 번 같이 간 게 전부다. 이 말도 우습다. 만난 적이 있어야 헤어질 거 아닌가. 끌어모아 봤댔자 주머니 속 동전 몇 푼처럼 그와 함께한 기억도 추억도 궁색하기만 할 뿐.
그럼에도 나는 그를 대상으로 ‘만약에’ 게임을 해볼 때가 있다. 만약에 그와 사귐을 이어갔더라면, 그래서 만약에 둘이 맺어졌더라면, 만약에 그와 함께 황혼을 맞았더라면…. 밋밋하나마 평범한 결혼생활을 했을 것이며, 그랬다면 지금 나는 이혼녀가 되지 않았을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근거 없이 그런 생각이 든다. 그는 섬세한 꽃봉오리를 터치할 때처럼 여린 여심을 건드릴 줄 아는 남자는 아니었기에 한창 감수성 예민한 시기엔 매력적인 상대가 아니었다. 그는 소위 ‘나쁜 남자’와 대칭점에 서 있는 전형적인 ‘착한 남자’였다. 착한 여자, 착한 남자의 치명적인 결함은 조미료가 전혀 가미되지 않은 영양식처럼 매력이 없다는 것이니. 더구나 그는 대화거리 없는 공대생이었으니.
2013년, 이른바 황혼이혼과 함께 호주 생활을 접고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내 나이는 딱 50세. 그는 52세가 되었을 테지. 그해 11월 말경, 대학 후배로부터 크리스마스와 송구영신 모임에 참석해달라는 연락이 왔다. 전공이 달라 잘 아는 후배는 아니었지만, 어느 모임이든 활달하고 적극적인 사람이 소위 총대를 메게 마련인지라 그 후배의 역할도 그랬던 것이다. 게다가 본인 소유의 장소까지 있다니 날짜만 정해지면 되는 일이라 모두들 ‘알았다, 가겠다’란 응답을 했으리라.
우리 모임은 서울의 같은 지역, 같은 이름의 Y고교와 Y여고를 나온 사람 중에서 남자는 S대, 여자는 E여대 출신으로 구성된 모임이다. 그래서 이름도 ‘Y써클’이었다. 듣기에 따라 자발적이며 노골적인 짝짓기 모임으로 인식될 수도 있지만(아닌 게 아니라 몇 쌍이 부부의 연으로 맺어졌고 지금까지 아들, 딸 낳고 잘살고 있다), 그건 지금 시각이고 시국 논쟁과 독서 토론 등 설익으면 설익은 대로 우리는 나름 진지했고 또한 그 나이 그대로 풋풋했다. 그러던 것이 세월 따라, 인연 따라 만남은 지지부진해졌고, 그날 연말 모임에 나온 멤버들이 가장 활발히 활동하던 기수라 할 수 있겠다.
오랜만의 해후라 서먹하기는 다들 마찬가지였겠지만 나는 이혼을 한 데다 외국 생활의 이물감까지 겹쳐 어색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그를 만나게 되리라는 기대와 호기심에 마음이 들떴다. 먼저 도착한 나는 어둑한 실내에 적응이 되어 잠시 후 입구로 들어서는 그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중키에 마르지도 뚱뚱하지도 않은 몸피, 머리도 벗어지지 않았고, 배도 나오지 않은 그, 젊었을 때 그대로 웃는 인상의 그는 30년이 아닌, 3년도 아닌, 3개월 만에, 아니 고작 3일 만에 만난 것처럼 느껴졌다. 마치 한두 번밖에 입지 않고 옷장에 걸어둔 옷처럼 시간의 고운 먼지만 앉은 사람 같아 보였다. 순한 성품대로, 좋은 머리대로, 얽힘 없는 폭신한 실뭉치처럼 인생이 순탄하게 풀려나가면 저런 모습일까.
그럼 나는? 대학 졸업 후 미팅으로 만난 남편과 1년을 사귀는 동안 고양이 발톱처럼 얌전히 감추고 있던 폭력성이 결혼 일주일 만에 정체를 드러냈다. 당황스럽고 혼란스러웠다. 사태 판단을 내리기도 전에 아이가 들어섰고, 결혼 전부터 계획되어 있던 이민길에 올랐다. 홍수에 떠밀리듯 주변 상황이 급박히 돌아가는 와중에 남편의 폭력은 일상이 되어갔다. 그렇게 내가 롤러코스터에 올라 비명을 지르고 있는 동안 그는 유유자적 회전목마를 타고 있었던가 싶었다.
우리는 어색하게 웃으며 서로 의례적인 안부를 물었다. 모임의 남녀 선후배들도 우리 관계를 알고 있었다. 요즘 말로 하면 썸 정도를 탄 것인데, 둘이 뜨거운 사이였고 그와 헤어진 후 내가 자살 시도를 했다는 해괴한 소문까지 났었다. 그 소문이 내 귀에까지 들렸을 때 나는 그저 웃고 말았다. 사실이 아닐 땐 따따부따 따지기보다 그저 웃어넘기는 버릇 그대로.
물론 그런 입방아에 오를 만한 ‘혐의’가 전혀 없었다고 할 수는 없다. 당시 나는 20대 특유의 실존적 번민에 휩싸여 나는 누구이며 왜 사는지 등 근원적 물음의 답을 찾아 열병을 앓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그가 간이역처럼 나타났고, 지독한 정체성 상실의 시절을 통과하며 그와의 만남이 그렇게 와전되었던 것이다.
돌아가며 간단히 각자의 근황을 말한 뒤엔 얕은 물웅덩이처럼 이리 움푹, 저리 움푹 대화의 웅덩이를 만들며 20여 명이 앉은 자리의 연을 따라 시간을 보냈고, 분위기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아 자정 무렵까지 이어졌다. 귀갓길에 나섰을 땐 얼음 박힌 것 같진 않았지만 12월 중순의 찬 공기가 오싹 끼쳐오며 와인 한잔의 취기마저 몰아냈다. 집 방향에 따라 그 자리에서, 혹은 길을 건너서, 아예 한두 블록 멀찍이 떨어져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택시를 잡아 타고 꼬리등을 인사처럼 깜박이며 제각기 사라져갔다.
공교롭게도 그와 나의 방향은 같았기에 그가 함께 택시를 타자고 했고, 어쩌다 보니 그와 나, 둘만 끝까지 택시를 잡지 못한 채 덩그러니 길 한가운데 남게 되었다. 묘한 느낌이 든 것은 아마 그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영화의 한 장면처럼 흘러가는 시추에이션이라니!
마침내 빈 택시 한 대가 우리 앞에 섰고, 그가 안으로 먼저 들어가고 내가 나중에 탔다. 크리스마스를 열흘 남짓 남겨두고 연인인 듯, 연인 아닌 연인 같은 남녀가 30년 만에 해후를 한 후, 조붓한 공간에서 그것도 몸이 닿을락 말락 서로가 서로를 옆에 두고 앉아 있다. 지나친 상투성만 뺀다면 로맨틱한 설정이 아닌가. 더구나 택시 운전사는 오늘 만남의 의미를 알고 있기라도 한 듯 우리 시대의 발라드로 분위기를 잡아주고 있으니.
그런데 정작 그와 나는 어쩌다 우연히 합석한 사람들처럼, “그간 잘 지냈니?” “네… 잘 지내셨어요?” “응, 나야 뭐. 고생 많았겠구나. 잘 살아야 한다. 내가 도울 일이나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고. 그럼 잘 가라.” 우리 동네 큰길가에 나를 내려놓기 전 20여 분간 이런 의례적인 말만 나누었을 뿐이다. 그게 다였다. 그게 다가 아니면? 가정을 가진 그와 이제 와서 무슨 일이 일어나야 한단 말인가?
그와 나는 두 번 더 만났다. 역시 같은 모임을 통해서였다. 이후 모임의 발동이 꺼져 버렸고 더는 그를 볼 수 없었다. 그럼에도 크리스마스가 다가올 때면 8년 전 그날의 모임이 떠오른다. 롤러코스터에 오르지 않고 그와 회전목마를 탔더라면 스릴과 재미는 없었겠지만 이따금 마주 웃으며 생의 무난한 동반이 되지 않았을까. 그가 내 사람이 될 이유가 딱히 없었듯이 되지 못할 이유도 딱히 없었다. 그러나 내가 과연 그 따분하고 ‘안전빵’인 회전목마에 기꺼이 올랐을까. 그때의 나는 회전목마 따위에는 아무 관심도 없지 않았나. 평생을 함께 돌고 있을 그의 ‘회전목마 아내’는 어떤 사람인지 문득 궁금해진다.
곳곳에 크리스마스트리가 놓이고 캐롤 음악이 들려오더니 결국 성탄절이 돌아왔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떠들썩한 크리스마스를 만끽하기는 어려워졌지만, 집에서 맛있는 음식과 함께 가족들과 보내는 오붓한 성탄절도 충분히 따뜻하고 즐겁다. 이번 브라보 안방극장에서는 ‘집콕’ 크리스마스를 풍성하게 채워줄 영화 세 편을 소개한다. 소개하는 작품들은 모두 넷플릭스에서 만나볼 수 있다.
러브 액츄얼리 (Love Actually, 2003)
크리스마스에 로맨스를 빼기는 아쉽다. 매해 크리스마스부터 연말연시까지 많은 이들에게 사랑 받는 영화 ‘러브 액츄얼리’는 정통 크리스마스 로맨틱 코미디 영화로 통한다. 2003년 처음으로 개봉한 후 2013년과 2015년, 2017년, 2019년, 2020년에 이어 올해도 12월 23일에 재개봉했다. ‘러브 액츄얼리’는 크리스마스를 앞둔 영국 런던을 배경으로,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사랑이야기를 다룬다. 부부간의 사랑부터 남매간의 사랑, 영국수상과 직원의 사랑, 소설가와 가정부의 사랑, 피가 섞이지 않은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 등 저마다의 사랑을 옴니버스 형식으로 따뜻하게 그려낸다. 휴 그랜트, 리암 니슨, 콜린 퍼스, 키이라 나이틀리 등 할리우드 최고의 스타들이 전하는 여덟 커플의 사랑이야기는 다양한 사연을 담은 만큼 모든 관객들이 공감할 수 있는 영화로 꼽힌다.
영화에 삽입된 OST는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킨다. ‘Christmas is all around’를 시작으로 비틀스의 ‘All you need is love’, 노라 존스의 ‘Turn me on’, 머라이어 캐리의 ‘All I want for Christmas is you’에 이르기까지 음악과 사랑 이야기가 어우러진다.
8월의 크리스마스 (Christmas In August, 1998)
1998년 개봉한 한석규, 심은하 주연의 ‘8월의 크리스마스’는 한국 멜로영화 중 손꼽히는 걸작이다. 크리스마스가 있는 겨울에 죽음을 앞두고 있는 주인공 ‘정원’은 변두리 사진관에서 아버지를 모시고 살고 있다. 시한부 인생을 받아들이고 가족, 친구들과 담담한 이별을 준비하던 여름의 어느 날, 주차단속요원 ‘다림’을 만나게 되고, 잔잔했던 그의 일상에 햇살처럼 불쑥 찾아온 그녀는 정원의 마지막 여름을 함께한다. 뜨거운 태양의 한여름에서부터 낙엽이 떨어지는 가을을 지나 함박눈이 내리는 겨울에 이르기까지 영화는 시한부 주인공의 사랑이야기를 담담하고 잔잔하게 그려낸다.
‘8월의 크리스마스’는 영화를 제작한 허진호 감독이 가수 김광석의 활짝 웃고 있는 영정사진에서 모티브를 얻어 제작됐다고 알려져 있다. 허 감독은 “생활에서 나오는 이야기, 그리고 그 속에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 일상생활을 더 빛나게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다”라고 밝혔다. 영화가 그려내는 90년대의 아담하고 소박한 아날로그적인 배경은 중장년층의 추억과 향수를 자극하기도 한다.
빽 투 더 퓨쳐 (Back To The Future, 1985)
크리스마스에 로맨스 영화가 지겹다면, SF 장르의 ‘빽 투 더 퓨쳐’를 추천한다. 시간여행과 그에 따른 타임 패러독스를 다룬 이 영화는 아이부터 어른까지 온가족이 함께 즐길 수 있는 영화다. 1985년부터 1990년에 걸쳐 총 3편의 시리즈로 제작됐는데, 개봉 당시 전 세계 무려 9억 달러 이상을 벌어들인 흥행작으로 알려졌다.
영화는 별 볼 일 없는 가족사를 가진 소년이 기상천외한 시간 여행을 하면서 개인의 역사를 바꾸고 뒤틀린 미래를 바로잡으려는 모험극으로, ‘시간 여행’이라는 모든 세대가 흥미로워 할 주제 안에 역사, 연애, 가족 등의 요소를 유려한 상상력으로 버무렸다. 중장년층에게는 지금은 없어진 유년의 놀이동산에 지금의 자녀와 노니는 기분을 선사한다. 당시 상상하던 미래의 패션과 지금의 패션을 비교해보는 것도 이 영화의 묘미다.
흔히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고 한다. 인생이 그렇듯이 사랑에도 정답이 없다. 인생이 각양각색이듯이 사랑도 천차만별이다. 인생이 어렵듯이 사랑도 참 어렵다. 그럼에도 달콤 쌉싸름한 그 유혹을 포기할 수 없으니….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고, 한 번도 사랑하지 않은 것처럼 헤어질 수 있다면 당신은 사랑에 준비된 사람이다. ‘브라보 마이 러브’는 미숙했던 지난날을 위로하고 남은 날의 성숙한 촉매제가 될 당신의 중년 사랑을 보듬는다.
오늘은 남편의 1주기, 그와 함께 남편에게 왔다. 그와 함께 찾아온 내가 남편한테 어떻게 비칠까. 옆에 선 그에게는 어떤 마음일까. 서운하고 괘씸할까? 분노하고 절망할까? 체념하며 인정할까? 거짓 없는 마음을 듣고 싶지만 유골함 옆 사진 속 남편은 여전히 속없는 웃음을 보일 뿐 아무런 말이 없다.
그도 말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죽은 자의 방 앞에 목례한 후 조용히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그러고는 내 뒷모습을 응시하고 섰을 것이다. 내가 추모를 마칠 때까지. 나도 역시 말이 없다. 그를 의식해서도 그렇지만 남편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올 때마다 매번 말을 잃게 된다. 미안함, 사실 그것으론 미진하다. 뭐라 꼭 집어 말할 수 없는 복잡한 심사가 정체 모를 안개처럼 피어오른다. 차라리 혼자 올걸. 그와의 동행이 남편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뒤미처 든다. 그를 의식하지 않고 남편과만 있고 싶다. 남편 곁에 좀 더 머물고 싶다. 그러나 불편한 감정이 휘저어지기 전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곳을 벗어났다.
봉안당 마당을 걸어 나오는 동안 우리는 여전히 말이 없다. 늦가을 바람에 날리는 빛바랜 낙엽만이 둘 사이에서 수런댔다. 나도 그도 세상 떠난 남편에게 면목이 없어서일까. 그에게 죽은 남편은 어떤 마음, 어떤 존재인지, 나는 죽은 남편과 관련하여 그를 어떤 마음, 어떤 존재로 여기고 있는지 지금껏 한 번도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눈 적이 없다. 회피하고 있었던 것이다.
남편은 환갑이 되던 지난해 11월,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암 판정 3개월 만에. 남편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그와 나를 더 가깝게 끌어당긴 건 아니다. 남편을 잃은 나를 그는 세심하게 위로하며 다정한 의지처가 되어주었지만 내 마음은 되레 그에게서 멀어졌다. 남편과 함께 만날 때의 그와 남편이 없는 상태에서 보는 그가 내게는 달리 비쳤기 때문이다. 처절히 슬프고 공허했지만 왠지 그에게 기대고 싶진 않았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을 것 같아 오히려 그를 멀리하고 싶어졌다.
남편은 세상 뜨기 3일 전, 그에게 나를 부탁한다고 유언을 남겼다. 자신의 빈자리를 채워주고 보살펴달라며. 그렇게 해준다면 편안히 눈을 감겠다면서. 죽어가는 사람의 말에는 거짓이 없다고 했던가. 그럼에도 여전히 나는 남편의 진의, 속내가 궁금하다. ‘나 죽으면 너희 두 사람 어차피 함께 살 거니까 차라리 내가 선수를 치마. 그래야 두 사람도 맘 편히 살 거 아니냐’는 식의 자포자기적 선의였을까. 아니면 그렇게 말함으로써 정말 함께 살게 되었을 때 흐릿하나마 그와 나의 가슴에 죄책감의 주홍글씨를 새기고 싶었던 걸까.
그와 나는 잘 지내고 있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나는 마님, 그는 돌쇠로. 그에게 나는 얼마간의 환상적 존재라는 걸 모르지 않지만, 남편이 가고 나니 둘 사이의 관계가 점점 더 그렇게 굳어지고 있다. 그는 이혼남이다. 5년 전 아내의 외도로 갈라섰다. 그가 이혼하기 전 우리는 부부가 함께 만났다. 그런데 지금은 그와 나만 남았다. 내 남편은 죽고, 그의 아내는 떠나고.
우리는 대학 선후배 사이로 그는 남편의 후배고, 그의 아내는 내 후배다. 지인의 결혼식 피로연에서 우연히 합석한 후 서로 마음이 맞아 자주 만났다. 관계가 어색해진 것은 그가 나를 좋아하면서부터였다. 선배의 아내를 연모하는 후배,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그가 나에 대한 마음을 통제하지 못하는 바람에 그의 아내와 내 남편을 불쾌하게 했다.
물론 그와 나 사이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 어느 날 과음한 그가 술잔의 술을 흘리듯 나에 대한 마음을 흘렸을 뿐이다. 나를 좋아한다고. “저도 좋아해요”라고 농담조로 대꾸하며 어색해진 자리를 수습하려고 했지만 그는 거기서 멈추지 못했다. “ΟΟ 씨를 사랑한다고요. 왜 제 마음을 몰라주시는 거예요. 저 정말 슬퍼요”라며 이번에는 내 이름까지 넣어가며 속내를 드러냈다. 아무리 술기운이라 해도 취중진담이라는 말이 있지 않나. 그가 늘어놓는 고백 아닌 고백에 남편은 나를 흘기며 마뜩잖은 눈길을 보냈고, 그의 아내는 나와 그를 번갈아 보며 붉으락푸르락 얼굴을 붉혔다.
나중에 들었는데 당시 그의 아내에게 따로 만나는 남자가 있었다고 한다. 아내의 외도로 인해 괴롭고 외롭던 그가 시나브로 내게 끌린 것이리라. 그걸 빌미로 그의 아내가 상황을 제대로 이용했다. 그 일을 꼬투리 삼아 적반하장으로 자기 연애를 합리화하며 냉큼 이혼을 요구한 것이다. 가눌 수 없이 무너진 그는 아내가 하자는 대로 했고, 그렇게 혼자가 된 그를 우리 부부는 보듬을 수밖에 없어 셋이 만남을 이어갔던 것이다.
이후 우리 부부와 그, 이렇게 세 사람이 만나는 동안 전과 같은 민망한 일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깍듯했고 과묵했다. 남편은 별다른 내색 없이 선배로서 혼자 된 후배를 묵묵히 챙겼고, 나는 나대로 어떤 틈도 보이지 않고 남편 옆에서 깔끔히 처신했다. 남편이 원하지 않았다면 그 만남은 진즉 깨졌을 테지만, 그렇게 갑자기 훌쩍 떠날 예감이 있었던 걸까. 결과적으로 나를 그의 곁에 둔 것이다.
게다가 그 무렵 남편이 하던 일이 잘되지 않았던 것도 그를 떨쳐내지 못한 현실적 이유였을 거라 짐작한다. 남편은 자그마한 개인 사업을 하고 있었고, 워낙 성실한 사람이라 빠듯하나마 자력으로 꾸려가고 있으려니 했다. 그에게 빌린 자금이 윤활유가 되고 있었던 것을 나만 몰랐다. 물론 그가 돈으로 남편을 조종하거나 심리적 압박을 가할 사람은 아니었지만 남편의 입장은 또 달랐을 것이다. 자기 아내를 마음에 품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다시는 얼씬도 못 하게 단속하지 못했던 것은 그래서였을까. 나는 내심 불쾌했다. 남편이 나보다 사업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를 좋아하는 그의 마음을 이용해 나를 볼모로 모종의 거래를 한 것 같아 원망 어린 마음이 배어 나왔다.
어쩌면 그가 희생을 하고 있었을지도. 나에 대한 호감 하나로 본인 또한 그리 넉넉지 않은 형편임에도 선배에게 돈을 빌려줘야 했으니. 그게 사실이라면 그렇게라도 해서 내 언저리에 있고 싶었을 그가 안쓰럽기도 했다. 남편이 ‘시퍼렇게’ 살아 있고, 더구나 속속들이 사정을 아는 상황에서 내가 그에게 뭘 해줄 수 있단 말인가. 그렇게 우리는 한 가족으로 지냈다. 그는 정서적으로, 우리는 그에게 재정적 도움을 받으며.
그랬는데 남편이 갑자기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에게 나를 돌봐달라는 부탁까지 남긴 채. 처음엔 네 사람이 세 사람으로, 세 사람이 두 사람으로 만남을 달리하는 동안 마음 또한 상황 따라 변했을 것이다. 한 가지 공통점은 멤버가 하나둘 떠나도 만남은 이어져왔다는 것이니, 이제 우리 두 사람은 언제까지 이 만남을 이어가게 될까. 그리하여 그와 나 둘 중 하나가 하늘의 부름을 받을 때까지 함께하게 될까. 그는 여전히 내 마음 문 밖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문고리가 안으로만 있어서 자신은 감히 당겨볼 엄두도 내지 못하는 듯이….
인륜의 중대사로 여겨지는 결혼. 결혼하게 되면 새로운 가족이 생기는데, 동종 업계 선배가 가족이 될 가능성도 있다. 연예인도 흔하지는 않지만 이러한 경우가 성립될 때가 있다. 특히 최근 결혼으로 맺어진 스타 가족들이 눈에 띈다.
이처럼 스타 가족이 대대로 이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무래도 스타의 자녀는 부모를 보면서 자랐기 때문에 연예계라는 곳이 친근하고, 직업 특성에 대한 이해도 또한 높을 것이라고 예상된다. 그렇다 보니 연인 간의 대화가 잘 통하고 결혼까지 이어지는 것이 아닐까. 어떠한 경우들이 있는지 더 자세한 이야기들을 담아봤다.
김수미 - 며느리 서효림
배우 김수미와 서효림은 연예계를 대표하는 고부 사이로 통하고 있다. 두 사람은 지난 2017년 MBC 드라마 '밥상 차리는 남자'에서 모녀 연기 호흡을 맞추며 인연을 맺었다. 이후 김수미와 서효림은 나이 차이를 뛰어넘어 친구처럼 특별한 사이로 지내왔다고 한다.
그러한 가운데, 2019년 서효림은 김수미의 아들 정명호 나팔꽃 F&B 대표와의 연애 사실을 밝혀 세간을 놀라게 했다. 당시 서효림은 정명호 대표와 이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로, 김수미가 소개해준 것은 아니라고 밝혔다.
이후 결혼과 출산 소식도 빠르게 전해졌다. 서효림은 정 대표와 2019년 12월 결혼했고, 이듬해 6월 딸 조이를 출산했다. 그 과정에서 서효림과 김수미는 KBS2 '슈퍼맨이 돌아왔다' 등을 비롯해 다수의 방송에 함께 출연하면서 훈훈한 가족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와 함께 서효림의 배우로서의 복귀 또한 빠르게 이어졌다. 그는 오는 11월 방송 예정인 MBC '옷소매 붉은 끝동'에 출연하는데, 이는 남편과 시어머니의 배려와 지원 덕분인 것으로 풀이된다.
이상해 김영임 - 며느리 김윤지
가수 겸 배우 김윤지(NS윤지)가 결혼 소식으로 뜨거운 화제를 모으고 있다. 김윤지는 지난 9월 26일 5살 연상의 사업가 남편과 결혼했다. 특히 화제가 된 이유는 김윤지의 남편이 개그맨 이상해와 국악인 김영임 부부의 아들이라는 사실 때문.
김윤지와 남편의 러브스토리는 독특했다. 김윤지는 SBS '동상이몽2-너는 내 운명'에서 "아버지와 시아버지 이상해가 의형제 사이다. 초등학생 시절부터 30년이 훌쩍 넘은 인연이 있다"면서 가족끼리 친한 사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현재의 남편을 알게 됐다는 김윤지는 그를 15년간 짝사랑했던 사연도 털어놓아 눈길을 끌었다.
이영하 선우은숙 - 며느리 최선정
지난 2018년 이영하와 선우은숙이 아들 이상원의 결혼식에 나란히 참석해 화제를 모았다. 연예계를 대표하는 스타 부부였던 이영하와 선우은숙은 지난 2007년 이혼했기 때문. 그런 두 사람이 공식 석상에 같이 나왔기에 관심을 이끈 것. (TV조선 '우리 이혼했어요' 출연은 2020년이다.)
더욱이 며느리 또한 연예계 종사자로 더욱 화제가 됐다. 이상원도 현재는 사업가이지만, 과거에는 배우로 활동했고 이름도 꽤 알렸다. 이상원의 아내 최선정은 '전국춘향선발대회' 출신으로 배우로 활동한 바 있다. 스타 가족이 된 최선정은 2019년 스타 3세 출산과 함께, 럭셔리 라이프를 SNS를 통해 공개해 많은 관심을 받았다.
흔히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고 한다. 인생이 그렇듯이 사랑에도 정답이 없다. 인생이 각양각색이듯이 사랑도 천차만별이다. 인생이 어렵듯이 사랑도 참 어렵다. 그럼에도 달콤 쌉싸름한 그 유혹을 포기할 수 없으니….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고, 한 번도 사랑하지 않은 것처럼 헤어질 수 있다면 당신은 사랑에 준비된 사람이다. ‘브라보 마이 러브’는 미숙했던 지난날을 위로하고 남은 날의 성숙한 촉매제가 될 당신의 중년 사랑을 보듬는다.
지난달 나는 아내와 재결합했다. 20년 만이다. 지금 내 나이는 70, 긴 외도 끝에 이른바 조강지처의 치마폭으로 ‘기어들었다’. 나는 서울의 명문 치대를 나와 강남에 치과를 개업하고 큰 기복 없이 순탄하게 운영하고 있다. 당시 강남은 지금 같은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선견지명으로 일찌감치 터를 잘 잡았다. 병원에 간호사도 여럿 두었는데 그중 하나와 사랑에 빠졌다. 그녀는 우리 병원의 수간호사 격이라 나이도 제법 있어, 나와는 고작 열 살 남짓 차이 났다. 집이 가난해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어린 나이에 간호조무사로 사회생활을 시작해 이 바닥에서는 베테랑에 속했다.
그녀는 40 즈음에, 그러니까 내가 쉰 살 되던 해 우리 병원에 들어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소위 말하는 나의 오피스와이프가 되어주었다. 치과 업무를 속속들이 안다는 것은 나의 일과 나의 삶을 동시에 이해한다는 의미였다. 나의 꿈과 나의 좌절을 공감하며 위로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아내한테서 얻을 수 없는 그 무엇이 그녀에게는 있었다. 더구나 어린 나이에 사회와 부딪히며 나름 내공을 쌓은 덕에 타인에 대한 이해심도 깊었다. 무엇보다 영리하고 야무졌다. 급기야 나는 그녀와 딴살림을 차렸다. 이혼은 하지 않았다. 아내가 원하지 않기도 했지만 그까짓 절차는 내게 중요하지 않았다. 사랑하는 여자와 살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당시 내겐 더 바랄 것이 없었으니까. 그럼 아내는? 아내는 사랑하지 않았냐고? 아내는 아내고 그녀는 그녀였다.
뻔뻔하다고 나를 욕해도 하는 수 없다. 나도 안다. 나는 욕을 먹어도 싸다. 단순한 바람으로 그쳤다면 차라리 덜 욕을 먹었으려나. 하지만 나는 그녀를 사랑했다. 함께 살수록 뒤늦게 참사랑이 찾아온 거란 믿음이 솟았고, 그녀와 모든 것을 함께하고 싶었다. 그랬던 그녀와 헤어진 후 돌이켜보면 아내와 정식으로 이혼신고를 하고, 그녀와 정식으로 혼인신고를 했더라면 하는 후회가 남는다. 그러면 적어도 쪽박은 차지 않았을 테니까. 정식 부부였다면 뭐라도 공동 명의로 남은 게 있었을 테니.
무슨 소리냐고? 그녀는 함께 살던 아파트와 내 전 재산을 독차지한 후 나를 내쫓았다. 함께 살기 시작하면서 그녀 명의로 아파트를 사줬고, 집을 나온 나는 자연스럽게 그 아파트에 들어가서 살았다. 그녀의 아파트였지만 사는 동안은 ‘우리의’ 아파트였던 셈인데, 헤어진 마당에는 엄연히 ‘그녀의’ 아파트란 사실에 나는 치를 떨었다. 그건 그렇다 치고 치과 수입을 그녀가 관리하는 일도 나로서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한 살림을 하는데 여자가, 더구나 야무진 그녀가 돈 관리를 하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 그녀는 재테크에도 제법 소질이 있어서 적절한 투자로 돈을 불려나가는 재주도 있었으니까. 20년간 아내에게 보내는 생활비를 빼놓고는 내 돈도 그녀 돈이요, 그녀 돈도 그녀 돈인 줄 진정 난 몰랐다. 그렇게 나는 그녀와의 20년 생활을 청산하면서 몸뚱이만 남게 된 것이다.
헤어진 후 내 수중에는 생활비를 넣고 빼고 하던 허드레 통장 하나뿐. 잔고라곤 겨우 이삼백만 원. 그 통장과 옷가지만 들려서 나더러 나가라고 했다. 법에 호소하여 찾아올 돈이라곤 전혀 없었다. 실상 나는 돈보다 그녀와 헤어지게 된 것이 더 충격이었기 때문에 재산에 대해서는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왜 쫓겨났냐고? 나도 그걸 모르겠다. 20년을 함께 살았으면 부부와 다를 바 없건만, 지난 20년 동안 그녀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나와 살았던 것일까.
그 길로 아내를 찾아갔고, 아내는 나를 흔쾌히 받아주었다. 나는 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병원과 아내의 집, 아니 이젠 내 집을 오가며 지내고 있다. 아내와 나는 별다른 대화를 하지 않는다. 아내가 지난 이야기를 꺼내며 바가지를 긁지도 않는다. 언제 폭탄이 터질지 조마조마하지만 겉으로는 평온이 유지되고 있다. 여기까지가 내가 20년 만에 아내와 재결합한 사연이다.
한 달 전 나는 남편과 재결합했다. 내 나이 68세, 남편이 집을 나간 지 20년 만에 돌아온 것이다. 나갈 때처럼 올 때도 빈 몸, 빈 손으로. 남편을 선뜻 받아준 나를 주위에서는 등신이라고 했다. 등신 중에서도 상등신이라고 했다. 지난 세월 그 고생을 한 것이 억울하지도 않냐면서. 도대체 무슨 마음으로 그 인간을 받아줬냐는 거다. 안 할 말로 멀쩡하게 함께 살던 남편도 나이 드니 귀찮아서 떼놓을 궁리를 하는 판에. 혹시 데려다놓고 복수하려는 거냐고까지 했다. 혹자는 남편이 그렇게 좋냐며, 그렇게 사랑했는데 지금까지 어떻게 참고 살았냐고 진심으로 물었다. 사랑? 솔직히 그건 모르겠다. 남편을 사랑해서 받아준 거냐고 묻는다면 ‘내 마음 나도 몰라’라고 할 수밖에.
소설가 이외수의 아내 전영자 씨가 몇 년 전 졸혼했다가 뇌출혈로 투병 중인 남편을 돌보기 위해 최근에 다시 합쳤다지만, 내 남편은 몸이 아픈 것도 아니고 졸혼으로 따진다면 우리 부부는 이미 20년 전에 남남이 되었지 않나. 그런 사이에 무슨 새삼스럽게 사랑 타령…. 그럼 돈 때문이냐고? 나이 70에 손 떨려서 앞으로 얼마나 진료를 더 할 수 있을 것이며, 게다가 이미 소문이 자자하게 났을 테니 환자인들 제대로 올까.
이쯤 되면 내 행동에 대한 명분이 필요하다. 아비투스라는 게 있다. 사회문화적 환경에 의해 결정되는 제2의 천성을 일컫는 말이다. 한마디로 내가 속한 계층, 내가 만나는 사람, 내가 즐겨 하는 일 등 타인과 나를 구별 짓는 취향, 습관, 아우라를 일컫는다. 즉 남편을 받아들인 것은 나의 내면화된 천성에 기인한 품위의 문제라는 것이다. 나아가 20년을 함께 살아온 두 사람이 결국 헤어진 것 또한 아비투스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의 천성과 그 여자의 바탕이 다름에서 온. 걸레를 아무리 깨끗이 빨아도 행주가 될 수 없는 것처럼, 결국 자신의 본색을 드러낸 것이리라.
즉 내가 남편을 받아들인 건 그를 끔찍이 사랑해서도, 나의 현실에 부족함이 있어서도 아니다. 눈물도 말라버린 그 수많은 날들이 곰삭아 이제 독립과 자유로 보상을 얻게 된 마당에 새삼스럽게 그를 위해 밥상을 차리고 속옷을 빨아주는 게 난들 즐거우랴. 아니 그런 것 따위는 대수롭지 않다. 무엇보다 나의 내면화된 선비 기질과 인격이 질척함이나 천박함과 함께 뒹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번 재결합은 나의 높은 자존감의 선택이다.
중년에 떠난 남편이 초로의 노인이 되어 내 곁으로 돌아왔다. 모든 것이 낯설지만 코 고는 소리만큼은 그대로다. 부부로 이 남자와 남은 시간을 잘 살아내느냐 마느냐는 나 하기에 달렸다. 나의 아비투스를 신뢰하며!
※브라보 마이 러브는 실제 사례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내용입니다.
'늦게 핀 꽃이 더 아름답다.' 현재 화제의 중심에 있는 주인공, 배우 오영수(77)를 보면 떠오르는 말이다. 전 세계 80여 개국에서 1위를 차지하며 대박을 터뜨린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 드라마의 인기와 함께 오영수의 인지도와 인기도 또한 수직 상승했다. 사실 오영수는 낯이 익기는 하지만, 이름이 알려진 배우는 아니었다. 덕분에 '오징어 게임'에서 비밀병기 역할로 주효했지만 말이다.
그는 벌써 연기 경력 58년 차의 배우다. 1963년부터 극단에서 활동했으며, 200여 편이 넘는 작품에 출연했다. 1979년 동아연극상 남자연기상, 1994년 백상예술대상 남자연기상, 2000년 한국연극협회 연기상을 받기도. 또한 영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을 포함한 다수의 작품에 스님으로 출연해 '스님 전문 배우'로 통해왔다.
오영수가 '오징어 게임'이라는 작품을 만나 이처럼 뒤늦게 주목을 받은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동안의 연기 내공이 켜켜이 쌓여 빛을 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오영수와 같이 뒤늦게 아름다움을 발현한 배우들은 또 누가 있는지 짚어봤다.
'기생충' 이정은
오영수와 비슷한 사례의 여배우를 생각하면, 단번에 떠오르는 이름은 배우 이정은이 아닐까. '신스틸러'로 조금씩 이름을 알리고 있던 그는 지난 2019년 영화 '기생충'으로 인기를 한 몸에 받았다.
이정은은 '기생충'에서 박 사장(이선균)네의 가사 도우미 문광 역을 맡아 열연했다. 세상 좋은 사람 같이 보이지만 알고 보면 반전의 캐릭터로 극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이정은은 캐릭터를 입체적으로 표현하며, 미친 존재감을 과시했다.
이정은 역시 실력을 갖췄기에 빛나는 순간이 온 것일 터. 그는 지난 1991년 연극 '한여름밤의 꿈'으로 데뷔해 다수의 연극과 뮤지컬로 실력을 인정받았다.
영화와 드라마 활동은 늦게 시작했지만, 작은 역할이라도 출연하면 깊은 인상을 남겼다. 특히 '기생충' 이후로 주연 배우에 등극한 이정은은 KBS2 '동백꽃 필 무렵'을 통해 '국민엄마'로 또 한 번 큰 사랑을 받았다.
'골든타임' 이성민
현재 '믿보배(믿고 보는 배우)'로 통하는 배우 이성민. 그러나 그의 연기 인생은 꽃길 만은 아니었다. 이성민은 오랜 무명 시절을 겪고 중년의 나이에 뒤늦게 이름을 알렸다.
지난 1985년 연극으로 데뷔한 그는 연극계에서는 잘나가는 배우였다. 2001년에는 전국 연극제 최우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드라마와 영화에서는 감초 역할을 맡았고, MBC 드라마 '파스타', '내 마음이 들리니' 등을 통해 '꽃중년' 이미지를 구축했다.
그러던 가운데, 이성민은 데뷔 25년 만인 2012년 MBC '골든타임'으로 첫 주연을 맡았다. 권석장 PD가 그를 캐스팅한 것이지만, 대중에게는 조연 배우의 이미지가 강했던 터라 '이선균이 꽂아줬냐'는 말도 안 되는 얘기가 나오기도 했다. 극중 최인혁 교수 역을 맡은 이성민은 우려를 불식시키며 드라마 인기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이후 이성민은 연기 잘하는 배우로 인정받았고, tvN '미생', 영화 '보안관', '남산의 부장들' 등으로 인기 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도깨비' 김병철
김은숙 작가 최고의 드라마로 꼽히는 tvN '도깨비'.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파국이다"라는 명대사와 악귀 박중헌(김병철)의 모습은 아직까지도 머릿 속에 생생하게 떠오른다. 박중헌 캐릭터에 대한 관심은 배우에게로 이어졌다. 강렬한 인상을 남긴 김병철은 '도깨비'가 낳은 스타가 됐다. 그는 2001년 연극배우로 데뷔했고, '도깨비'를 만나기까지 15년의 무명 시절을 보냈다.
'태양의 후예', '구르미 그린 달빛', '쇼핑왕 루이' 등에 출연한 김병철은 '도깨비'로 마침내 자신의 이름을 알렸고, 이후 JTBC 'SKY캐슬', KBS2 '닥터 프리즈너'에서도 열연을 펼쳤다.
'SKY캐슬' 오나라
'도깨비'에 "파국이다"가 있다면, 'SKY캐슬'에는 "어마마"가 있다. 'SKY캐슬'에서 오나라는 주연 중 한 명이었다. 다른 주연 배우들에 비해 인지도는 낮았지만, 존재감은 뒤지지 않았다. 극중 진진희 역을 맡은 오나라는 아들을 금지옥엽 키우는 부자 엄마의 모습을 리얼하게 그려내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오나라는 원래 뮤지컬 배우로 유명했다. 그는 지난 1997년 뮤지컬 '심청'으로 데뷔했고, '김종욱 찾기', '아이 러브 유', '싱글즈' 등에 출연했다. 2006년 한국 뮤지컬대상에서 여우주연상을 받기도 한 그는 드라마와 영화로 발을 넓힌 것. 특히 오나라는 지난해에는 KBS2 '99억의 여자'로 'SKY캐슬'에 이어 인생캐릭터를 경신했다는 호평을 받았다.
흔히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고 한다. 인생이 그렇듯이 사랑에도 정답이 없다. 인생이 각양각색이듯이 사랑도 천차만별이다. 인생이 어렵듯이 사랑도 참 어렵다. 그럼에도 달콤 쌉싸름한 그 유혹을 포기할 수 없으니….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고, 한 번도 사랑하지 않은 것처럼 헤어질 수 있다면 당신은 사랑에 준비된 사람이다. ‘브라보 마이 러브’는 미숙했던 지난날을 위로하고 남은 날의 성숙한 촉매제가 될 당신의 중년 사랑을 보듬는다.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내게 이렇게 자학 증상이 깊은 줄 몰랐다. 니체는 사랑이란 정과 망치로 하는 거라고 했다. 돌 안의 형상을 망치와 정으로 쪼고 깨서 오롯이 드러낸다는 의미에서. 그러나 나의 사랑은 그녀의 날카롭고 거친 정과 망치에 맞아 아예 형체도 없이 부서질 지경이다.
내가 옛 연인을 통해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아니, ‘옛 연인’이란 말은 정정하자. 쓰라리고 아프지만 그 말은 쓰지 않기로 하자. 나의 이런 표현이 그녀를 더 질색팔색하게 하니까. 건강한 사랑은 자존감이 우선이어야 한다지만 그녀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지는 나의 꼬락서니라니.
나는 안정된 직업과 안온한 가정을 가진 중년의 ‘멀쩡한’ 남자다. 지난 사랑의 감정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허우적대는 것만 빼고는 관계 맺는 데에도 상식적인 사람이다. 전문직을 갖고 있지만 이게 그녀의 더 큰 밉상을 사게 될 줄이야. “나이 들어서도 먹고사는 걱정이 없으니 재미 삼아 날 쫓아다니는 거냐, 내가 그렇게 만만해 보이냐? 나는 살아가느라 하루하루 허덕이는 사람이다. 당신처럼 한가하게 사랑 타령이나 할 여유가 없다”며 내게 쏘아붙였던 것이다. 벌침 정도가 아니라 말벌에 쏘인 듯 몸을 가눌 수 없는 충격이었지만 반응을 끌어냈다는 것만으로도 한동안은 살 것 같았다. 그렇게 따라다닌 결과가 결국 그런 통박이냐고? 당신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사람이냐고?
전문직 종사자라는 소개는 방금 했고, 객관적으로 봐서 나는 외모도 괜찮은 편이다. 곱상한 얼굴도 얼굴이지만, 60대 중반의 남자로 배 안 나오고 머리 벗겨지지 않은 것만으로도 기본 이상이 아닌가. 성격은 내성적이며 소극적인 편이다. 그녀를 쫓아다니는 적극성만 빼고는.
소위 ‘꽃미남’이었던 나는 사춘기 때부터 여학생들의 관심을 끌었고, 때로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예민한 자의식의 시기, 이성에게 인기 있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하늘 높은 줄 몰랐던 시절, 내 매력에 내가 ‘쩔어’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나는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매번 거절당했고 단 한 번도 데이트다운 데이트를 한 적 없이 무심히 세월만 흘렀다. 그렇게 좌절된 내 사랑은 지금도 꽃을 피우지 못하고 있다. 남들은 집착이라고 했고, 그녀는 스토킹이라고 했다.
고등학교 2학년 봄 교회 수련회에서 그녀를 처음 만났다. 나도 그녀도 새 신자에 속했으니 그룹 내에서 동질감을 느낄 법도 하건만, 고3이 되어서도 2년 내내 그녀는 시종일관 내게 무관심했다. 그녀 말마따나 우리에겐 어떤 추억 한 자락도 없다. 그러기에 지금 와서 만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솔직히 나이 들고 세파에 치인 모습도 보이기 싫다며. 인정한다. 그녀와 내가 공유할 추억이 없다는 것을. 우리는 항상 무리 속에 있었으니까. 단 한 번 핑곗거리를 만들어 빵집에서 크림빵과 우유를 시켜놓고 마주 앉았지만 그녀는 멀뚱했고 나는 애만 탔다.
지금으로부터 50년 전 이야기다. 그러니까 나는 무려 50년 동안 첫사랑 그녀를 잊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투르게네프는 그의 자전적 소설 ‘첫사랑’에서 40대 주인공 블라지미르를 내세워 ‘겨우’ 30년밖에 안 된 사랑에 괴로워했지만 나한테 비하면 약과인 셈이다.
아, 여기서 잠깐, 어쨌거나 당신은 유부남 아니냐고 비난하지는 마시라. 내가 뭘 어떻게 해보겠다는 생각은 없으니까. 난 그냥 말을 붙여보고 싶고 만나 차 한잔 하고 싶을 뿐이니까. 그렇다고 호시탐탐 기회를 엿봐온 것은 더욱 아니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지난 50년 동안 그녀는 늘 내 가슴속에서 살았으니까. 참한 여자와 결혼을 하고 아이를 셋이나 낳았지만 내 가슴 한편은 늘 시렸고 구멍이 나 있었다. 결코 메워질 수 없는 구멍이. 그 구멍을 내 맘속 그녀의 존재로 채우고 있었지만, 동시에 나는 모범 가장이자 자상한 남편, 애정 많은 아빠였다. 그 사실은 그 공허함을 애써 외면하며 살아왔단 뜻도 된다. 바람결에 들려오는 소식을 들으며 이렇다 할 추억거리 하나 없는 우리의 사랑, 아니 나의 사랑을 한심해하며.
10년 전쯤 그녀가 남편과 사별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기분이 묘하고 정신이 멍했다. 지금까지 1년에 한두 번 정도 나를 잊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문자를 보내오다 그녀가 혼자가 되었다는 말에 용기를 낸 것은 사실이다. 그것도 10년이나 지나서. 혼자가 되었다는 사실이 그녀의 마음에 균열을 가져온 것일까. 나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단지 그 오랜 세월 동안 한 번도 응답이 없다가 50년 만에 반응이 왔으니, 그 자체만으로도 내게는 기적 같은 일이었다.
문자 메시지로 목소리 한 번 들을 수 있겠냐고 했다가 예상대로 된통 구박을 받았다.
아까 말했듯이 ‘나는 삶에 지치고, 해결해야 할 현실의 문제만으로도 골치 아픈 사람이다. 당신처럼 추억에 잠길 새가 없다. 그리고 우리가 언제 사귄 적이라도 있냐. 왜 일방적으로 이러냐. 다시는 이런 것 보내지 마라. 또다시 이러면 당신 아내한테 알릴 수도 있다’는 답이 온 것이다. 불쾌감과 노기가 서린 글자 하나하나마다 굳은 표정으로 정과 망치를 들고 내 가슴을 찍고 쪼개는 그녀의 모습이 겹쳐졌다.
머리로는 충분히 이해된다. 입장이 바뀌었다면 나도 저럴지 모른다. 나라는 존재가 언제 한 번이라도 그녀 마음 한 귀퉁이나마 차지한 적이 있었던가. 도대체 나는 왜 자존심도 없는 찌질한 인간이 되었을까.
그럴 듯한 사회적 위치의 나를 망각한 채 그녀를 향한 마음의 고삐를 어찌하여 50년 동안이나 다잡지 못하는 것일까. 이렇게 수모를 겪고도, 그녀의 매몰찬 말을 가슴에 비수로 꽂고도 여전히 포기할 수 없는 내 마음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일까.
남자들은 여자들과 달리 이별 후 애도 과정을 제대로 밟지 못한다고 어느 책에서 읽은 적이 있다. 그래서 헤어진 연인을 잊지 못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녀와 나는 이렇다 할 연인 사이가 아니었지만 나로서는 차이가 없다. 정신의학자이자 죽음 연구자인 퀴블러로스는 죽음에 버금가는 상실의 단계를 이렇게 말한다.
뜻하지 않게 연인과 헤어지거나 버림을 받았을 경우 처음에는 그 사실을 인정하지 못한다. 하지만 이별은 기정사실이 되면서 받아들일 수밖에 없고 분노하게 된다.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라는 유명한 영화 대사가 이 단계에서 나온 것이라나. 그러다 분노는 슬픔으로 변하고 그(그녀)가 나를 떠났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된다. 이때부터 한없이 우울하고 깊은 슬픔에 빠지지만, 동시에 떠나보냄의 애도 과정이 완성되면서 삶은 다시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잃어버린 내 사랑에 대한 애도는 어느 단계에서 멈춘 것일까. 부정일까, 분노일까, 슬픔일까, 아니면 아직 한 스텝도 내딛지 못한 것일까.
※브라보 마이 러브는 실제 사례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