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이른 아침. 새벽 공기 헤치며 곳곳에서 달려온 이들이 ‘책’을 들고 하나둘 모여 앉는다. ‘나로부터 비롯되는 변화’를 기대하며 기분 좋은 에너지를 나누는 ‘독서포럼 양재나비’에 오는 사람들은 저마다 크고 작은 꿈을 마음속에 품고 있다. 새로운 자신을 발견하고 인생의 모자람을 채우는 소중한 시간. 그들에게 아침은 멋진 삶을 향해 나아가는 희망의 열쇠다.
서울시 송파구 문정동의 3P자기경영연구소. 전국 각지로 퍼져 있는 ‘독서포럼 나비’의 본부 격인 ‘양재나비’가 매주 토요일 이곳에서 모임을 갖는다. 일상생활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인 오전 6시 40분부터 오전 9시까지가 정해진 독서 토론시간. 전국의 ‘독서포럼 나비’가 모두 ‘양재나비’의 토론시간을 따르는 것은 아니지만 같은 시간에 토론을 하는 곳도 있다.
‘독서포럼 나비’는 자기계발과 성장을 연구하고 강연도 하는 3P자기경영연구소 강규형(56) 대표가 만든 작은 독서 모임이다. ‘나로부터 비롯되는 변화’라는 화두를 가지고 두 명으로 시작한 것이 지금은 전국적으로 400여 개 모임으로 늘었다. 이외에 나비의 독서법을 따라서 독서모임을 하는 모임도 상당수다. 미국, 브라질, 몽골에서도 ‘독서포럼 나비’라는 이름으로 독서모임이 생겨났다. 현재는 사단법인을 설립해 따로 운영하고 있다.
그렇다면 평일에 받은 피로를 풀어도 모자란 천금 같은 주말 아침에 굳이 일어나 책을 읽고 왜 토론하는 것인가. 그리고 독서모임 중에서도 사람들이 ‘독서포럼 나비’를 찾는 이유가 있을까? 첫 번째 이유는 분위기가 활기차고 서로를 존중하는 사람들이 모이기 때문이다. 아침에 오면 간식 준비나 테이블, 의자 정리 등을 회원들이 자발적으로 한다. 흥미로운 건 이곳에 오는 사람들의 호칭은 다 ‘선배님’이다. 나이가 많고 적음을 떠나서 배움을 나눌 수 있는 존재로 인식하고 서로를 존중한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부른다. 초·중등생이 참여하는 ‘주니어 나비’의 학생들에게도 예외 없이 선배님이라고 칭한다. 10대에서 시니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연령과 지역, 직업군의 사람들이 모여들지만 이 모든 편견의 갈래를 넘어서 따뜻하고 기운찬 아침을 함께 맞이한다.
두 번째 이유는 토론장 테이블 위에 책과 함께 올려진 ‘바인더’가 독서뿐만 아니라 자리관리를 도와주기 때문이다. 시간을 알뜰하게 활용하게 해주는 일종의 시스템 다이어리다. 강규형 대표가 젊은 시절부터 자신의 시간관리를 위해 사용해온 방법이 바인더였다고 말하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그는 바인더가 자신에게 스포츠업체 대표, 수억 원 연봉의 보험설계사 등의 이력을 만들어줬다고 수많은 강의를 통해 설명해왔다. 성공한 인생을 살아온 사람의 시스템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의 마음도 모임에 녹아 있는 것이다. 책을 읽고 토론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기성장에도 도움이 된다니 사람들이 모일 수밖에. 그렇게 ‘양재나비’는 10년 세월 동안 삶의 의지를 불태우는 사람들과 함께 꾸준히 성장하는 독서모임이 됐다.
오전 6시 40분에 만나는 사람들
20년째 사업을 하고 있다는 오용운 씨는 자신의 회사에서 일했던 직원의 소개로 ‘양재나비’를 알게 됐다. 노는 것도 좋지만 진지한 토론이 그리울 때가 있다고. 그때마다 찾는 곳이 양재나비다. 밝은 에너지를 받을 수 있기 때문에 가끔이라도 족적을 남기려고 한다. 사실 이날은 책도 읽지 않았는데 꼭 참석해야 할 것 같아서 나왔다고. 역시나 좋은 시간이었다고 했다. 법무사인 박희봉 씨의 경우 혼자 하는 독서에 회의를 느꼈다. 책을 많이 읽어도 기억에 남는 것이 없었다. 게다가 “독서를 그렇게 많이 하시면서 왜 달라지는 것이 없냐”는 아들의 말에 충격을 받았다. 그 후 사람들과 함께하는 독서모임을 찾다가 이곳까지 왔다. 책을 읽어야 하니 자연스레 술 약속도 안 하게 됐고 다이어트 효과까지 봤다. 독서 정리를 위해 쓰기 시작한 바인더도 삶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자세 교정 트레이너로 활동 중인 최준섭 씨는 평생 봤던 책보다 ‘양재나비’에서 읽은 책이 훨씬 더 많다고 했다. 책을 통해 얻는 지혜에 대한 감사의 마음과 이곳에서 받아가는 긍정적인 에너지가 자연스레 몸에 배어 삶의 큰 방향을 찾은 느낌이다. 이날 가장 멀리에서 왔다는 강주광 씨가 사는 곳은 경상북도 안동시. 지난 겨울방학을 제외하고 작년 3월부터 1년여 동안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아이와 함께 독서토론을 위해 달려왔다. 시간 맞춰 오려면 새벽 3시 반에는 출발해야 하는 강행군이다. 서울까지 오는 이유에 대해 물었더니 “안동 지역에서 독서모임을 만들 수 있는 상황이 아니고, 무엇보다 이곳에서 받아가는 기운이 남다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송병훈 씨는 5학년 아들의 독서토론을 위해 따라왔다가 자신도 참여하게 됐다면서, 예전에는 소극적인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적극적으로 바뀌었다고 자평했다. 안동에서 온 강주광 씨처럼 먼 곳은 아니지만 꽤 거리가 있는 지역에서 첫차를 타고 혹은 자가용을 이용해 이 모임에 참여하는 사람이 많다.
‘양재나비’에서 책을 읽기 시작했고 최근에 책까지 냈다는 남윤희 씨, 잘나가는 유튜버를 꿈꾸는 부동산 중개업자 박병오 씨, 초등학교 선생님, 탈모 전문가, 금융전문가, 편입을 준비하는 청년 등 정말 많은 사람이 아침 독서토론을 통해 자신감은 물론 행복한 에너지를 받고 있다고 말했다. 혹시 신나고 행복한 사람들의 기를 받고 싶다면? 새벽바람 마시면서 ‘독서포럼 양재나비’에 가보시라!
“Bravo, Your Life! 당신의 인생을 한 편의 연극으로 만들어보세요! 연극이 처음이어도 상관없습니다. 열린 마음과 도전의식만 있으면 됩니다.”
평소에 연기, 연극에 관심이 있던 시니어라면 주목해보자. 예술의전당은 주한영국문화원과 공동으로 시니어를 위한 연극 워크숍 ‘드라마 같은 내 인생’을 3월 27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개최한다.
이번 워크숍은 주한영국문화원이 추진 중인 ‘창의적 나이 듦(Creative Aging)’ 프로젝트의 하나로 영국 맨체스터의 로열 익스체인지 극장 시니어 극단의 책임자이자 연출가인 앤드류 베리(Andrew Barry)의 지도로 진행된다.
'드라마 같은 내 인생'은 60세 이상의 시니어를 대상으로 하며, 참가자는 개인의 인생 여정을 돌아보고 경험을 활용하여 자신만의 이야기와 캐릭터를 창조하여 연극적 요소로 표현하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참가비는 3만 원이며 20명 소수 인원으로 진행된다. 예술의전당 홈페이지를 통해 신청할 수 있다.
시니어 사이에서 당구의 인기를 논하는 것은 철 지난 유행 얘기를 꺼내는 것만큼이나 진부하다. 영화 속 폭력배들의 격투신 단골 장소였던 당구장도 옛 추억거리가 됐다. 맑은 공기 흐르고 신선 노니는 듯한 당구장 문화를 이끈 시니어들. 그래서 만나봤다. 다음(Daum) 카페 아름다운 60대의 ‘당구 동호회’. 큐대 끝에 파란 초크 삭삭 비비고 예리하게 공을 응시하는 동호회원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서울 동대문구의 한 패션 쇼핑몰에 있는 너른 당구장 안. 이곳에서 정기모임을 하는 동호회들의 현수막이 천장 가까운 벽면마다 촘촘하게 붙어 있다. 동호회 이름만 살펴봐도 50대 이상 세대들의 당구 사랑이 짐작된다. 인터넷 포털 사이트 다음의 우수 카페인 ‘아름다운 60대’에 속해 있는 ‘당구 동호회’도 매주 목요일마다 이곳에서 정기 모임을 갖는다. ‘아름다운 60대’는 말 그대로 60대 이상 연령대가 가입하는 인터넷 카페로 올해 18년째 운영되고 있다. 2만6000명에 가까운 회원이 띠별, 지역별, 취미별로 다시 뭉쳐 활동한다.
당구? 우리 세대에게 딱이다!
당구 동호회 등록 회원은 50명. 매주 25명에서 30명은 정기모임에 참여한다. 당구 동호회가 생겨난 지 올해로 10년째. 취미 모임 중에 가장 먼저 만들어졌다. 창단 멤버이자 ‘가을국화’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박은희(70) 씨도 이날 모습을 보였다. 사진 모임의 전시회 준비로 바빠서 최근 당구 모임 참석이 뜸했다.
“10년 전에 은평구 불광동에서 시작했어요. 그곳에서 1년 정도 모임을 가졌다가 교통 좋은 종로3가로 장소를 옮겼고, 지금은 동대문구에서 활동하고 있어요.”
아름다운 60대 당구 동호회는 특별하게도 여성들이 더 적극적으로 활동한다.
“초창기에 여자는 저랑 두세 명 정도밖에 없었어요. 지금은 남자들만큼 당구 실력이 좋은 분들이 꽤 있어요. 여자가 많으니까 좋습니다. 당구 모임을 만든 이유는 이게 쉬워 보이지만 운동량이 꽤 되더라고요. 몸도 쓰고 머리도 쓰고요. 치매 예방에도 좋겠더라고요.”
가만 보고 있자니 포켓볼(공을 큐대로 쳐서 당구대 사방에 뚫린 구멍에 집어넣는 경기)을 치는 여자 회원이 없다. 다들 4구 당구를 치며 어울린다. 구력이 쌓이다 보면 단순히 공을 구멍에 넣는 재미보다 공이 지나왔던 길을 기억해내고 각도를 연구하는 4구 당구의 매력에 깊이 빠진단다.
숨은 고수들의 마스터클래스
소싯적 당구 천재부터 입문자들까지 누구든 당구에 관심이 있으면 들어올 수 있다 보니 실력 차이도 천차만별이다. 경기를 할 때는 상급, 중급, 초급자들의 실력을 감안한다. 입문자는 무조건 당구지수 30으로 시작하고 중간 정도가 120~150 사이다. 여자 회원의 경우 80~100 정도면 좋은 실력이라고 김봉훈 방장은 말한다.
“가끔 당구지수가 500인 분이 오면 그보다 아래 지수 사람들에게 한마디씩 훈수를 해주죠. 당구를 하다가 제일 안 되는 것이 무엇인지 묻기도 하고요. 힘을 어떻게 줘야 하고 각도 잡는 것까지 상세하게 설명해줍니다. 한 가지 수를 알면 거기서 파생되는 수가 굉장히 많거든요. 그걸 응용해서 쳐라 이거죠. 공 좀 칠 줄 안다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나보다 더 잘 치는 사람과 당구 대결을 하고 싶은 욕구가 있습니다. 제가 200을 치는데 그런 분이 오시면 3, 4수는 따라붙을 수 있거든요.”
이날 모임 참여자 중 높은 수준의 실력을 갖춘 회원 두 명을 만났다. 첫 번째로 만난 사람은 홍수경(70) 씨. 당구지수 150으로 여성들 중 상위 등급이다.
“150까지 올리는 데 정말 많은 시간이 걸렸어요. 그런데 그 이후로 실력이 안 느는 거 같아요. 62세에 여기 들어왔는데 그땐 여자 회원들이 별로 없어서 다들 잘해주셨어요. 잘 가르쳐주시기도 하고요. 그런데 당구는 절대적으로 관심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스포츠예요. 처음에는 왜 이렇게 안 되나 스트레스도 받았어요. 쫓아다니면서 그냥 어깨 너머로 배웠습니다. 한 2년, 3년 사이에 많이 늘었어요. 제가 지수가 100일 때 사위랑 처음 당구를 쳤어요. 그때 사위가 훈수도 두고 그랬는데 요즘은 치자고 하면 피해요. 아들은 저랑 당구는 안 치지만 우리 엄마 실력 좋다고 자랑한대요. 150 정도면 길도 알고 누구든지 상대할 수 있어요.(웃음)”
그다음으로는 당구지수 250인 홍창표(72) 씨를 만났다. 다른 남자 회원들이 젊을 때 좀 쳐봤다면 홍창표 씨는 정년퇴임 후 당구에 발을 들였다.
“젊었다면 3년 정도 배워도 잘 쳤을 텐데 나이 먹어서 시작했더니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퇴직하고 친구들과 모임을 가지면 식사하고 당구 치러 가더라고요. 가만히 하는 거 보면서 저도 할 수 있겠다 생각했죠. 당구 잘 치는 친구한테 나도 좀 배우겠다고 했더니 아름다운 60대 당구 동호회를 추천해줬습니다.”
주로 동갑내기 친구들과 팀을 이뤄 당구를 치는 홍창표 씨는 현역 시절 국내 최초 전동차량 개발에 일조했다고. 1974년 지하철 1호선을 개통하고 3년 뒤 우리 기술로 전동차량 개발에 성공했는데 그 당시 주역이라고 했다. 영광스런 현역 시절 모습을 내려놓고 이곳에 나와 재밌게 어울릴 수 있어서 좋다고 했다.
“첫째는 내 시간 즐겁게 보내려고 나와요. 헤어졌다 다시 만나면 반갑고요. 대단히 깊은 관계도 없고 거래도 없으니까 부딪히지도 않아요. 그런 면에서 굉장히 편해요. 이렇게 또 정이 쌓이는 거겠죠.”
당구로 시니어 대동단결
오전 10시부터 오후 2시까지 다들 자기 방식대로 당구를 치는 동호회원들. 안절부절못하며 몸서리를 치는 이가 있는가 하면 대화 없이 공에만 집중하는 팀도 있다. 밖에 나가면 전직 경찰공무원, 군장성급, 사회 저명인사 등 이력들이 빵빵하지만 적어도 당구장에 나올 때만큼은 집에 완장을 놓고(?) 나온다고 김봉훈 방장은 말한다.
“들어와서 잘난 척하면 스스로가 못 이겨서 나가요. 왕년에 못나간 사람 어디 있어요. 다 잘 나갔지요.(웃음)”
이곳에서 만난 모든 사람이 하는 말이 있다. “당구는 시니어를 위한 완벽한 운동”이라는 데 의견이 일치한다.
“나이가 들어 운동하기 힘든 사람한테 당구만큼 좋은 것이 없어요. 젊었을 때 저거 칠십 넘어서 하면 좋겠는데 했는데 실감이 납니다. 지금 우리 나이에 서너 시간 집중하고 서 있고 걷는 게 적은 운동이 아니에요. 움직여야 하고 머리도 써야 하고 공 겨냥하려면 허리도 숙여야죠. 큐대를 지속적으로 들고 있으려면 팔에 힘도 있어야죠. 계절에도 관계없고요. 비가 오든 눈이 오든, 춥든 덥든 할 수 있는 게 당구라 시니어에게 정말 적합한 운동이죠.”
이유 있는 당구 홀릭! 시니어가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는 해방창구로 뜨는 곳 당구장이 아닐까?
mini interview
베이비붐 세대는 당구로 젊은 시절을 추억한다
아름다운 60대 모임의 ‘당구 동호회’ 김봉훈 방장
‘돌곶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김봉훈 방장은 다음카페 ‘아름다운 60대 모임’에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걷기 모임과 소띠모임에서 오랜 시간 방장을 하다가 작년 말 자리에서 물러났는데 올해 또 당구 동호회 방장 자리를 수락해야 했다.
“당구 동호회 방장을 4년 동안 하셨던 분이 저보다 네 살 위 선배님입니다. 작년 가을부터 몸이 안 좋다고 했는데 같은 해 12월에 심장수술을 하셨어요. 어쩔 도리가 없었어요.”
회원들의 편의를 책임지는 사람이다 보니 작은 것 하나부터 열까지 챙겨야 한다.
“별거 없어요.(웃음) 회원들이 오면 노란색 명찰에 이름을 써주고 간식 좀 챙기고 그런 거죠.”
워낙 사람들을 만나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라 이런저런 일들을 많이 도맡아왔다.
“다들 뭘 좀 하자고 공지하면 일단 잘 뭉쳐요. 물론 행동이 좀 느리고 말이 많기도 하지만요. 그게 우리 시니어 모습이잖아요.”
당구지수 200이라는 김봉훈 방장도 어린 시절의 당구장 분위기를 기억한다고 했다.
“그때는 당구장 가면 불량배 취급했습니다. 정학 또는 퇴학도 당할 정도였죠. 근데 대학교 들어갔더니 선배들이 당구장부터 데리고 가는 거예요. 거기서 담배 배우고 술 배우고. 뭔가 젊은 혈기로 한판 노는 장소였어요. 그때까지도 당구장 하면 좀 안 좋게 생각했어요. 요즘처럼 정식 스포츠로 받아들여질지 정말 몰랐죠. 그 뒤 직업전선에 뛰어들고 먹고살기 바빠지면서 당구와 멀어졌죠.”
가족을 위해 평생 일하고 자기 취미 한번 제대로 가져보지 못하고 사회에서 은퇴한 시니어들. 각종 모임을 통해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다 보니 당구를 치던 기억들이 각자 하나둘 씩 남아 있었다.
“모여서 경기를 해보니 재미있거든요. 나이가 들어도 또래들이 어울리니까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가는 기분도 있어요. 당구는 그렇게 기억력도 살려주는 것 같아요. 마음과 세월 나이는 다르다고 하잖아요. 우리 세대에게 당구가 나이를 잊고 즐길 수 있는 레크리에이션이 된 겁니다. 어릴 때 당구를 접해보지 않았던 사람들도 배우는 이유입니다. 어울리려고요. 베이비부머들이 은퇴하면서 당구에 입문하는 건 향수 때문입니다.”
김봉훈 방장도 1970년대의 산업 현장을 누비며 살아왔다. 당구 치고 난 다음의 뒤풀이 자리는 젊은 시절 이야기로 떠들썩하고 흥겹기 그지없다. 모두들 현역 시절 사연 많은 사람들이지만 다 잊고 그저 젊은 시절로 돌아가는 느낌이 참으로 따뜻하다.
“인간 사이에도 구도가 있어요. 거기서 우러나오는 냄새와 스토리도 있고요.
나이 드는 재미를 당구 모임에서 찾는 것 같습니다.”
장소협찬 헬로APM당구클럽
외계인(?)을 만났다. 신기하여 조심조심 다가가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LCD 화면에 담긴 형상이 영화 ‘E.T’ 속의 외계인 모습을 닮았다. 아침 산책길에서 만난 일상의 작은 소재에서 한 컷의 사진을 만들어냈다.
사실은 마을 주변을 흐르는 농수로 얼음 위에 쓰러진 갈대 줄기가 얼음에 갇혀 만들어진 모습이다. 으스러진 갈대의 줄기 한둘이 흐르는 물결에 흔들리다 간밤 추위에 꽁꽁 얼어붙어 새로운 형상을 만들었다. 신기한 모습 부분만을 집중하여 화면에 담았다. 자세를 낮추어도 보고 위치를 좌우로 옮기면서 구도를 잡았다. 뒤집어 촬영도 해보았다. "우와~ 이것 봐라! 멋진 형상이잖아. 그래 이렇게 하면 두 눈을 가진 영락없는 외계인 모습이네!" 마음속에 기쁨이 솟아오른다. 발견의 즐거움이다.
노출과 구도를 다시 잡고 셔터를 누르고 또 눌렀다. 재미있는 사진 하나를 만들었다. 카메라로 이야기를 쓰는 나는 상상의 나래를 폈다. 외계인이 간밤에 지상에 내려와 놀이하다가 농수로에 빠져 얼어붙었나 보다. 카메라로 이야기를 쓰는 나는 상상의 나래를 폈다. “외계인의 초상화”라 이름 붙였다. 누구 한 사람 눈여겨보지 않는 일상의 작은 물체에서 새로운 형상 발견하기를 좋아한다. A를 B로 바꾸어보는 생각이다. 세상사 보기 나름이라고 했듯이 사진 소재도 보는 각도에 따라 새로운 작품을 만들 수 있다. 많은 사진작가나 취미로 하는 사람이 사진 촬영의 명소를 찾아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로도 나가기 일쑤다. 그런 곳에서 좋은 작품을 얻을 수 있으나 우리의 일상에서도 나름의 좋은 사진을 얻을 수 있다. 어떻게 사물을 보느냐가 중요하다. 꾸준한 훈련으로 그 분야에 우뚝 설 수 있다. 생각하는 마음과 보는 시각에 따라 똑같은 피사체에서 남다른 사진을 만들고 이야기를 카메라로 쓸 수 있다. 사진의 묘미다.
한국 포크 블루스의 살아 있는 전설, 이정선의 음악 인생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그에게 오랜 활동의 원동력을 물으니 “다른 걸 할 줄 모르니까”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그렇게 그는 거의 모든 질문에 무심하고도 간단하게 답한다. 자신의 음악적 삶에 대해서조차도 “그냥 오래한 것뿐”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1974년에 데뷔한 이후 그가 대중음악사에서 이룬 것들은 그저 오래해서 쌓을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그의 간결한 소리가 만드는 묵직한 삶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졌다.
“억지로 갖다 붙이지 마요. 살면서 여러 길로 가다가 중간중간 우연히 상황을 맞닥뜨리게 되는 거지, 내가 어떻게 살아야겠다 해서 그렇게 사는 사람 아무도 없어요.”
이정선은 꾸며서 말하는 법을 모르는 사람이다. 그 모습은 마치 그의 노래 가사와도 같다. 그의 노래 가사들은 짤막한 단어들로 감성을 톡톡 건드려준다.
흘러가는 대로 구르는 대로
부딪히는 대로 밀리는 대로
흘러가는 대로 구르는 대로
부딪히는 대로 밀리는 대로
우리네 인생살이 그렇게 가는 게지
그러다가 가끔 욕심이 나면
하고 싶은 일도 너무 많지만
그러다가 가끔 욕심이 나면
하고 싶은 일도 너무 많지만
산마루 구름처럼 쉬면서 가는 게지
그가 김현식에게 준 노래 ‘우리네 인생’의 가사다. 이 노래는 ‘인생은 그저 흘러가는 것’임을 반복하여 강조한다. 그 마음과 기타만 있으면 그 외에는 필요 없다는 듯이.
블루스 거장의 도피(?) 시절
“원래 꿈은 많았죠. 노래를 해야지 했던 건 한 1972년쯤에 생각했나. 제대 후에 돈을 잠깐 벌어야겠다 싶었죠. 왜냐하면 기타는 그 전부터 치고 있었으니까. 그때 막 기타 붐이 일었을 때였거든. 학비 정도는 벌지 않을까 했어요.”
이정선답다고나 할까, 찬란하고 눈부신 시작은 아니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국산 기타로 기타를 접한 그에게 음악인으로서의 삶은 그저 생활의 연장으로서 부여됐을 뿐이다. 그 후 12장의 솔로 앨범과 신촌블루스 1, 2집, 해바라기 3집 등 가요사에 남는 명반들을 만들면서 그는 자연스럽게 우리나라 포크 블루스의 거장으로 불리게 됐다.
“예전에는 곡을 만들고 여러 사람 주면, 그중에 그들이 안 부르는 노래가 생기잖아요. 그걸 제가 불렀어요. 그러다 보니 안 팔리는 노래만 불렀죠. 그런데 그 자체를 제가 즐기고 있는지도 몰라요. 저는 운이 좋게도 군대 제대 후 세상을 볼 수 있는 나이에 음악을 시작했어요. 친구가 음악을 하면서 스타가 되자 변질되거나 달라지는 것도 봤고…. 그런 여러 가지 과정들을 보며 저렇게는 안 사는 게 내 성격에 맞겠다 해서 의도적으로 피하는 것도 있었죠.”
음악을 하다 보면 알려져야 하는 순간이 필연적으로 발생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정선은 “알려지기 싫어서” 그걸 피했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도망갔다.
소극장 공연의 내밀한 즐거움
“위로 올라가기가 너무 싫었어요. 내가 가진 것 이상으로 평가받는 게 싫었던 거죠. 요즘은 그게 더 심해지는 게, 그것이 원하지 않더라도 사람의 이미지가 자꾸 확대가 되잖아요.”
스마트폰으로 모두가 미디어를 갖게 된 시대, 별것도 아닌 일이 인터넷을 수천 수만 번 떠돌면서 비대해지는 광경을 우리는 자주 접하고 있다. 되려 그렇게 되고 싶어서 부추기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이정선은 체질적으로 그런 것들에 거부감을 갖는 사람이다. 큰 공연은 안 하면서 소극장 공연만 3년째 꾸준히 하는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밴드가 7명인데, 처음 시작할 때 관객은 10명이었다고 한다. 그런 식으로 관객 40~50명, 많아야 100명을 넘지 않는 공연을 계속하고 있다.
“큰 공연장을 가면 저도 과장을 해요. 오버하는 거죠. 필요 이상으로 잘하려 하고. 그런데 작은 데에선 관객과 얘기하듯 공연을 하죠. 음정이 틀려도 되고. 그대로 보여줄 수 있어서 편안합니다.”
소극장 공연의 즐거움은 아는 사람만 안다. 다분히 인간적인 감성으로 노래하는 가수와 공유하는, 그 작은 세계가 만들어지는 분위기는 다른 사람이 알 수 없기에 더 소중하다. 그가 고수하는 내밀한 세계는 확실히 대형 공연장의 요란함보다는 소극장에 더 어울릴 수밖에 없다. 쉽고 간결한 연주와 가사를 통해 삶의 냄새가 폴폴 느껴지는 편안한 소리가 이정선 노래다.
“밴드 멤버들에게 미안하죠. 제일 오래한 친구가 20년 됐고, 그 외에 지금 있는 친구들은 수입이 별로 없어도 음악이 좋아서 활동하는 친구들이에요. 멤버들을 더 챙겨주고 싶은 마음이 큽니다.”
못 치는 음악은 기타를 안 잡는다
장인 같은 음악인 이정선. 그의 다른 모습으로는 교육인 이정선이 있다. 많은 사람이 그가 만든 기타 바이블 ‘이정선 기타교실’을 기억할 것이다. 처음 기타를 배우는 사람들은 반드시 거쳐 가는, 말 그대로 교본이었던 책이다. 그는 1989년부터 대학 강의를 시작해 동덕여대에서 실용음악과 교수로 16년 재직하고 2016년 정년퇴임했다. 과묵하다 못해 하도 리액션이 없어 방송 PD들에게 기피 대상이었다던 그는 학교에 가서 자신이 좀 변했다고 했다.
“말이 많아졌죠. 짜식들이 말을 못 알아들어서.(웃음)”
그렇게 입게 된 옷이 꽤 맞았는지, 공연예술대학 학장까지 지냈다.
“두세 가지 일을 동시에 하며 살았어요. 책 쓰고 가르치면서 음악을 했죠. 순간순간 해야 할 일은 그 자리에서 했죠. 그리고 이 일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전혀 다른 일에서 푸는 법을 알게 됐죠. 덕분에 두세 가지 일을 동시에 하면서도 참 편하게 지냈어요.”
그러고 보면 그에게 있어 음악은 생활의 연장으로서 자연스럽게 이어져 온 것 같다. 덤덤하고 까다로워 보이지만 삶과 생활에 자연스러운 흐름이 생기면 그것을 유연하게 받아들이는 것 또한 이정선다운 것 아닐까.
“창작하는 사람들은 가슴속에 샘이 있는 거예요. 물방울이 하나씩 모이다가 넘치면 작품이 돼. 한결같이 물방울이 모이진 않으니까요. 하룻밤에 모일 때도 있고 몇 년 걸릴 때도 있고. 샘이 고갈되다가도 하룻밤에 넘쳐서 1시간 만에 뚝딱 하고 작품이 터질 때가 있지.”
음악에는 큰 힘이 있다
얘기를 하다 보니 이정선은 치열한 경쟁이나 승부와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엊그제 공연을 갔는데, ‘아이고, 외계인들 아냐?’ 싶더라고요. 너무 잘하니까. 옛날 같으면 다른 사람이 그렇게 잘하는 걸 보면 밤새 기타를 치기도 했어요. 그런데 요즘은 잘하는 놈은 잘하는 거고, 나는 내 음악 하면 되는 거다 합니다. 사실 젊었을 때도 좀 따로 놀았어요. 잘들 한다 그러면서.(웃음)”
요즘은 전 세계가 케이팝 열풍이라고 한다. 아무리 노래에 관심이 없는 사람도 9시 뉴스를 틀면 방탄소년단 소식을 듣게 된다. 한국 가요가 빌보드 차트
1위에 오르는 장면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그래서인지 가요계에는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가수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 수많은 가수, 특히 아이돌은 치열한 경쟁과 자본의 논리 속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처지들이다. 그들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궁금했다.
“시대가 바뀌었다고밖에는 설명이 안 돼요. 음악에 대한 사람들의 가치관이 달라진 거죠. 요즘 아이들이 음악을 하는 건 돈이 목적인 경우가 대부분이에요. 더 크게 지르고 더 크게 벌고. 예전에는 안 그랬던 사람이 더 많았죠. 노래를 좋아하다 보니 어느 날 먹고살게 되더라, 그런 분위기였어요. 지금은 노래를 돈 버는 수단으로만 생각하니…. 처음에는 안타깝다가 지금은 시대가 바뀌었으니 어쩔 수 없다, 기준이 달라졌다고 봐요. 그래서 아이돌 그룹을 보고 있으면 여러 가지 생각이 들죠. 그 친구들이 10년 후에는 어떻게 되어 있을까…. 노파심이죠.(웃음)”
그는 음악에는 돈벌이 수단보다 더 큰 힘이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지금 나오는 가수들이 그걸 좀 느끼고 알면 음악에 대한 자세가 달라지지 않을까 싶은 게 그의 희망이다.
“아직 모르는 거예요. 인간다움이 있어야 하는데… 아유, 이러면 말이 너무 많아져.(웃음)”
존중과 인내로 만들어가는 부부관계
인터뷰 중 이정선이 유독 말이 많아지는 순간이 두 번 있었다. 하나는 음악에 대한 얘기, 다른 하나는 아내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였다. 인터뷰 전 그가 ‘사랑꾼’으로 불릴 정도로 아내에 대한 애정이 깊다는 얘기를 들었기에 이해가 갔다.
“제가 머슴이죠.(웃음) 아이는 없어요. 우리 때는 애 안 낳는 게 애국하는 일이라고 해서. 덕분에 아이에게 들어갈 돈과 시간으로 두 사람이 하는 일이 많죠.”
두 사람은 여행을 참 많이 다녔다 한다. 그리고 취미생활은 서로에게 맞추려고 노력한다. 그러면서도 그 일이 정 싫으면 서로의 영역을 존중해준다. 부부관계가 오래, 다정하게 유지되려면 서로에 대한 믿음과 존중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재확인하는 순간이었다.
“나이 들어서도 아내와 잘 지내는 방법이요? 하고 싶은 걸 참으면 돼요. 강요하지 말고 참아야죠.”
그도 어느새 내년이면 칠순이 된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하고 싶은 게 많다고 한다.
“뭘 하려고 하면 이게 가능한가 가능하지 않은가 생각하게 되죠. 가능하지 않은 일은 가능하지 않아서 욕심도 나는데… 아, 돈이 없어서 안 돼.(웃음)”
그는 여전히 기타리스트이며, 그 무엇보다 기타에 대한 애정이 충만하다. 집에 이미 50개쯤 있다고 한다. 아마도 세상을 관조하며 사는 그가 가장 욕심을 내는 몇 가지가 있다면 그건 바로 기타와 소리에 대한 애정일 것이다.
“악기들은 계속 개량되고 있으니까요. 내가 구체적으로 찾고 있는 소리가 있다기보다는, 내가 내는 소리에 노래를 맞추죠. 옛날에는 기타도 직접 만들고 싶었는데 거기에 빠지면 다른 걸 못하니….”
나이 들면서 더 간결해졌다
“나이 들면서 달라지는 점이라면, 심플해지는 거죠. 감정도 단순해지고. 요즘은 가사를 쓰는데 자꾸 짧아져요.(웃음) ‘배고프다’ 하면 그걸로 얘기가 다 되는데, 왜 배고픈지에 대해 구구절절 말할 필요 없죠. 그러다 보니 가사도 짧아지고 곡도 줄어지고.”
군더더기 없는 간결함을 더 추구하며 미니멀리즘으로 들어가고 있다는 이정선은 인생에 대해서도 ‘말 그대로 인생인데’라고 말한다. 인생 앞에 ‘인생’이라는 두 글자 외의 무엇을 더 붙일 필요가 있겠느냐는 말이다. 그래서일까. 그의 인생 전반을 차지하는 노래에 대한 생각도 단순했다.
“가끔 그런 질문을 받는데, 어떻게 대답하면 멋있을까 고민해봤어요. 그런데 노래는 그냥 제가 살아가는 만큼을 보여주는 정직한 사이즈예요. 더 크지도 작지도 않은 그대로의 크기 말이죠.”
어떤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 좋아하는 것. 그에게 노래는 그런 것이었다. ‘대가’에게 ‘대가’라는 말 외의 수식어가 필요 없는 것처럼.
키높이 구두를 얼마 전부터 즐겨 신는다. 키가 크지 않은 편이어서 키가 좀 더 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으나 그런 이유는 아니다. 나이가 들면서 줄어드는 키 때문에 입던 바지 하단이 지면에 끌려 더 노인티가 나는 현상을 줄이기 위해서다. 늙어가면 키가 작게는 1~2cm, 크게는 3~4cm 정도 준다고 한다. 나의 경우는 현재 1cm 정도 준 듯하다. 건강검진을 할 때 잰 키 높이가 그랬지만, 일상에서 그 현상을 쉽사리 발견할 수 있다. 이전에 입던 바지를 입어보면 확실히 나타난다. 종전에는 구두를 바지가 완전히 덮지 않았는데 지금은 바지 하단이 구두를 덮고 지면에 끌릴 정도다. 평소에는 그 생각을 하지 않았으나 내 강의를 들으며 나의 패션을 살펴본 한 수강생이 바지 하단 길이에 대해 조언을 해준 데서부터 관심을 가졌다. 바지를 좀 더 짧게 하고 바지통도 좁은 것을 입으면 한결 단정하고 젊어 보이게 된다는 의견이었고 관련 자료를 뒷날 보내주기도 했다. 사실이지 최근엔 젊은이들이 입는 바지는 짧고 통이 좁아졌다. 바지 끝부분이 구두 상단에 머물고 양말이 드러나 보일 정도로 짧아 단정하고 깔끔해 보인다.
이러한 옷의 유행 속에서 다른 패션, 즉 하단이 길고 통이 넓은 바지를 입은 세대들을 보면 더 늙어 보이고 기력이 없어 보임은 나만의 생각일까? 강단에 자주 서는 나는 그 수강생의 조언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새로 사게 되는 양복이나 일상의 옷도 통이 좁고 길이도 짧은 종류를 선호한다. 강의할 때는 양복을 주로 입으나 새로운 양복을 사기는 돈이 많이 들어 가능한 가지고 있는 옷을 이용해서 바지 하단이 길다. 나이가 들어 줄어든 키로 바지 끝은 더 아래로 내려가기 마련이다. 바지통이 넓은 것은 예외로 하더라도 바지 하단이 지면에 끌릴 정도여서 노인티가 물씬 난다. 키높이 구두를 신게 된 연유다. 일반 구두보다 2cm 정도 굽이 높아서 신게 되면 키가 커 보이면서 한결 단정해 보였다. 요즘은 강의나 단상에 설 일이 있을 땐 키높이 구두를 신는다. 남이 보아주는 시선이 중요하지는 않지만, 이런 일을 통하여 내 마음이 젊어지고 활력을 찾게 되니 바람직한 삶의 한 단면이다. 구두 굽이 높아 걷기에 불편할 것 같았으나 전혀 그렇지 않다.
생각을 달리해보면 일상을 즐겁고 활기차게 보낼 수 있는 대안들을 발견할 수 있다. 나이가 드는 현상은 어찌할 도리가 없으나 마음마저 늙어간다면 노인(老人)이 될 수밖에 없을 터이다. 사무엘 울만이 그의 시 “청춘”에서 ‘(중략)비탄의 얼음에 갇혀질 때 20세라도 인간은 늙는다. 머리를 높이 치켜들고 희망의 물결을 붙잡는 한 80세라도 인간은 청춘으로 남는다’고 읊었다. 늘 젊게 살려는 마음과 행동은 인생 2막을 무한한 활력과 희망으로 채워지지 않을까? “이 나이에 무슨~”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 보면 브라보 마이라이프를 외치지 싶다.
“박술녀 한복을 입지 않으면 한국에서 가장 핫한 셀럽이 아니다.”
이 말을 들었을 때 아무리 수긍을 못하는 사람이라도 어느 정도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만큼 현재 한복을 대표하는 이미지로서, 대체하기 어려운 박술녀가 있다. 지난 30여 년 동안 일궈온 박술녀 한복의 성공담은 끊임없는 노력과 끈기, 불굴의 의지로 요약할 수 있다.
비에 젖은 사람은 비가 두렵지 않은 법, 피하지 않고 정면돌파하는 사람. 한복 너머로 보이는 그녀만의 삶을 바라보는 시간을 가졌다.
박술녀는 한복이다. 박술녀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그리고 지나간 그녀 삶의 궤적을 돌아봤을 때, 박술녀가 한복 그 자체와 동의어가 된다는 사실을 부정하기가 어렵다. 그만큼 매체에서 접하는 박술녀는 한복을 대표하는 아이콘으로서 강인하고 다부지게 다듬어진 인상을 갖고 있다.
카리스마 뒤에 자리한 소담함
그러나 박술녀를 직접 만났을 때, 그녀에게서 받은 인상은 소담스럽고 여성스럽다는 것이었다. 의외였다. 카리스마적인 이미지와 달리 그녀의 목소리와 대화를 이끌어가는 흐름에는 푸근한 여인네 같은 따뜻함이 담겨 있었다. 생각해보면 우리네 한복이라는 것도 그렇게 포근하고 따스한 것 아니던가. 그녀의 옷들이 보여주는 화려함에 그녀의 인간적인 모습은 가려져 있었던 것 아닐까. 그녀가 가진 장인으로서의 프로페셔널함도 그런 ‘비단’에 휘감겨 있는 것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떤 사람에게 이 한복이 참 잘 어울리겠다 싶었는데 막상 입어보니 안 어울릴 때가 있죠. 그럼 다시 만들어요. 나는 한복 만드는 일이 직업이지만 그 사람에게 한복 입는 일은 평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거니까요. 양심 팔아 돈을 벌 수는 없죠.”
소신 없이 일하는 것은 싫다
박술녀의 한복이 인기 있는 이유는 뭘까? 그녀가 만든 한복은 입기 전보다 입었을 때 사람을 더 빛나게 한다는 평이 있다. 그리고 박술녀라는 이름이 사람들에게 좋은 운을 주는 게 있다고 한다.
“박술녀라는 이름에 술자가 들어가 있어 술술 풀린다는 거예요.(웃음) 요즘 젊은 아이돌들이 그러더라고요.”
그리고 무엇보다 많이 노력했다.
“지난 30여 년간 정말 쉬지 않고 일했어요. 요즘도 마찬가지고.”
박술녀에게서 한복을 받은 사람은 셀 수 없을 정도. 그녀의 한복을 입고 찍은 유명인 사진만 해도 모아놓은 게 몇 박스나 된다. 오죽하면 대한민국 셀러브리티들은 박술녀 갤러리에 자신의 사진이 꽂혀 있지 않으면 인정 못 받는다는 생각을 할 정도다.
그녀가 그렇게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한복을 만든 것은 어떤 홀림 때문이 아니었을까. 다소 늦은 나이인 20대 후반에 한복을 만들기로 결심하고 이리자 선생의 제자로 들어간 후 꾸준하게 달려온 수십 년의 시간들이 한복에 대한 그녀의 애착을 자연스레 설명해준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가슴 없이, 소신 없이 일하는 게 가장 싫다고 말한다. 확실히 그녀가 일하는 것을 보면 자신이 한 말을 잘 지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완벽주의 성격이 더러는 그녀를 고단하게 했던 걸까. 그녀는 한탄하듯 말했다.
“가슴이 동하지 않는 일은 못하니까 병이죠.”
갑상선암 투병 중에도 비단 생각만 했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하지 않는다는 박술녀는 그 노력과 결실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일에는 여전히 쑥맥이다. 그녀의 삶이 오로지 한복의 가치에만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어디를 갔더니 누군가 어떤 사람을 가리키면서 ‘저기 저 유명한 사람이 곧 결혼한대. 말 좀 붙여봐. 잘해봐’ 하더라고요. 그런데 못하겠어요. 그 사람이 내 한복을 좋아해야 그런 말도 할 수 있는 거죠. 그래서 부자도 노력이구나 싶어요.”
그녀는 몇 해 전 갑상선암 진단을 받고 큰 고초를 겪었다. 그런 고통 속에서도 그녀는 한복에 들어갈 비단 생각만 했다고 한다. 그 와중에도 어깨에 짊어진 짐의 무게를 끊임없이 자각했다는 의미다. 그래서 자신의 업에 대한 목소리에는 자연스럽게 자부심이 서려 있었다.
“그 일을 내가 하기 싫으면 안 합니다. 그리고 내 한복을 구색으로 입으려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가시밭길을 거쳐야 도달할 수 있는 꽃길
박술녀는 좋은 게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녀가 지켜온 기준과 법도가 있기 때문이다. 다부진 장인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자부심과 그 기준을 충족시키고자 노력했던 시간이 그것들이다. 그런데 박술녀라는 이름이 유명세를 타면서 그녀의 기준을 무시하고 무례하게 접근하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한복에 대한 그녀의 철학에는 관심조차 없으면서 그저 말로만 치고 들어오는 사람들이다. 그녀는 기자에게 그런 밑도 끝도 없는 사람들에 대한 고충을 살짝 얘기하며 한숨을 쉬었다. 유명인이 되면서 으레 겪어야 하는 일이라 여겼지만, 예의가 너무 아니다 싶은 사람들도 여럿 있었다. “사람에 대한 신뢰감이 있어야지”라고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그간의 맘고생이 느껴졌다. 문득 그녀가 외롭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함께 나눈 대화 중 “군중 속의 고독이죠”라는 그녀의 말이 한동안 머릿속을 떠돌았다.
요즘 즐거움 중 하나는 라디오 듣기다. 운동을 마친 후 집으로 돌아오면서 김재원 아나운서가 진행하는 KBS라디오 ‘문화공감’을 듣는 게 하루의 마무리라고 할 정도다. 그 방송을 들어보니 영화, 음악, 문학 등 문화 전반의 이슈부터 최신 트렌드까지 깊이 있게 다루는 프로그램이었다. 그러고 보니 인터뷰 중 들려왔던 그녀의 핸드폰 벨소리가 요즘 한창 젊은이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카밀라 카베요의 ‘Havana’였다. 전통을 올곧이 추구하면서도 현재의 문화 동향을 놓치지 않는 그녀의 예민함이 느껴졌다.
직접 만든 어머니 수의
“나이 먹으니 매사가 감사뿐입니다. 문자하는 것조차도 감사하고 사업이 잘되는 것도 고맙고 건강을 되찾아서 감사하고 모든 게 감사하죠.”
그동안 한복 하나로 세상을 건너는 옹골찬 비법으로 살아왔고 모든 것에 감사하며 살아가는 박술녀이지만 요즘은 약간 심경의 변화가 있는 모양이다. 한복만을 위해 살아온 그녀가 여행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가까운 나라로 여행을 가볼까 해요. 제 삶에 대한 후회는 없는데 다른 데도 눈 좀 돌려볼 걸 하는 생각이 드네요.(웃음)”
그렇게 마음의 변화가 일어난 것은 아마 그녀의 삶에 크고 작은 일들이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무엇보다도 사랑했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일도 그중 하나이리라.
“어머니가 좋아하던 음식이 젓갈, 깡치젓이었어요. 그게 너무 그리웠는데 아는 분께서 갖다 줘서 먹을 수 있었어요. 그걸 먹으면서 사흘을 울었네요.”
어머니를 향한 그녀의 사랑은 유별나다. 우리 옷을 알려온 외길 인생 30여 년, 한복 디자이너 박술녀라는 사람을 만들어주고 지금까지 버티게 해준 사람이 바로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그녀에게 항상 “하고 싶은 일도 한 우물을 깊게 파야 물이 나온다”고 말했고, 그 말은 이제 그녀의 입버릇이 되었다. 그래서 그녀가 평생 한복을 만들어 입히면서 가장 보람을 느낀 사람은 어머니였다.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것처럼 즐거운 게 또 있을까요. 우리 어머니는 무슨 일이건 억지로는 하지 말고 하고 싶은 일은 기어이 해내면서 살라고 하셨어요. 어머니께 뭘 해줄까 고민하다 어머니 팔순 잔치 때 가족 모두가 모여 가족사진을 찍었어요. 그때 식구 모두 제가 만든 한복을 입고 사진을 찍었죠. 그리고 어머니가 관에 들어갈 때 입었던 수의도 제가 만들었어요.”
이룰 수 있는 꿈을 꿨다
박술녀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어떻게 기억되길 원할까?
“한복이 잊히지 않도록 혼신을 다한 사람? 그런데 큰 욕심은 없어요. 한복을 제대로 입고자 하는 이들에게 잘 알렸다 정도면 되겠죠. 미련 없이 죽을 건데 뭘. 내일 죽어도 여한이 없을 만큼 열심히 했으니까요.”
그녀는 가끔 ‘삶이 뭐지? 아무것도 아닌데 왜 집착을 할까?’ 하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한단다. 그런 감상이 들 나이가 됐기도 하고, 그렇게 질문할 수 있을 정도로 치열한 삶을 살기도 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을 보고 겪었다.
“내가 이루지 못할 꿈을 꿨다면 한복으로 성공하지 못했을 거예요. 죽을 때도 혼자 죽는 거니까 혼자 삶을 이끌어가자는 생각이었죠.(웃음)”
그러나 그녀가 그런 생각에 생활을 포기할 사람 같지는 않다. 박술녀는 ‘내일 세상이 망하더라도 한 그루 사과나무를 심을 사람’에 가깝다. 그러한 법칙을 지키는 의지에서 비롯된 후회 없는 마음이야말로 그녀가 삶과 죽음을 직시할 수 있는 힘일 것이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에게 한복 입히고파
박술녀의 삶은 한복과 동의어로서 여전히 생동하고 있다. 곧 추석 특집으로 방영될 KBS ‘퀴즈 온 코리아’에 출연하는 21개국 출연자들에게 한복을 선물하기로 했다. 외국에 한국의 미를 알린다는 목적에서다. 그리고 그녀에게는 유독 한복을 입히고 싶은 사람이 있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에요. 전 세계 남자들을 통틀어서 오바마가 한복을 입으면 가장 멋있을 것 같아요. 그 고매한 인격과 반듯함, 대통령직에서 내려와서도 마음을 비우고 휩쓸리지 않는 모습이 마음에 들어요. 한복도 그렇게 변함없이 한결같은 뭉툭함이 있어요.”
영어만 할 줄 안다면 오바마 대통령에게 한복을 지어주고 싶다는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역시 박술녀답다 싶었다. 처음 한복 일을 시작했을 때부터 변함없는 마음과 열정을 보니 박술녀 한복 시대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 같다.
현재 한국 농업·농촌에 대해, 이동필(李桐弼·63) 전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은 간단하게 ‘전환기’라고 명명했다. 자신의 고향이자 농업 현장인 경상북도 의성군에서 농부로 일하면서 느낀 솔직한 속내였다. 그러나 그는 전환기 속에서 맡은 바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고 결과에 책임을 지고자 한다. 장관 자리에서 물러난 후 스스로 돌아보는 ‘마음공부’ 뜨락에 씨앗을 뿌리고 일구는 데 모든 것을 바치고 있는 게 그 증거다. 농촌경제연구원에서 장관을 거쳐 귀향한 후 농부의 삶을 살아가는 그에게서 한국 농업과 농촌이 직면하게 된 현재와 미래의 활로에 대해 물어봤다.
경상북도 의성군은 우리에게 무엇보다도 마늘로 친숙한 도시다. 그리고 지난 2018 평창동계올림픽에서 특별하게 유명해진 지역이기도 하다. 전 국민의 관심을 모았던 컬링 종목의 스타들이 모두 의성 출신이라는 점 때문이다. 의성은 컬링 종목의 스타들을 꾸준히 배출하고 있다. 이제 대한민국 컬링의 수도라고 봐도 좋을 정도로 아낌없는 지원도 이루어지고 있다.
30년 뒤면 사라질 수도 있는 도시
그러나 이처럼 사람들에게 알려진 의성의 대외 이미지와는 달리, 이동필 전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은 걱정이 많았다. 그는 인터뷰를 하던 중 서산대사의 시를 읊었다. ‘환향’이라는 제목의 시다.
삼십 년 만에 고향에 돌아오니
사람은 죽고 집은 부서지고
마을은 황폐화됐는데
청산은 말이 없고 봄 하늘은 지는데
어디서 두견새 우는 소리만
들리는구나
그야말로 막막하다.
“이게 내 심정이에요.”
그의 먹먹한 기분은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들 때문이었다. 그가 장관 퇴임 후 한 명의 농부가 되어 귀향한 의성군은 2016년 ‘중앙 이코노미스트’의 분석에 따르면, 30년 뒤 사라질 가능성이 가장 높은 지역이었다. 그리고 그 자신도 그러한 현실을 체감하고 있었다.
“고령화, 양극화, 그리고 예전 같은 공동체가 스러지고 있다는 점이 문제죠. 연구소나 중앙부처에 있을 때는 망원경으로 세상을 봤지만 현장에서는 현미경 보듯 보이지요.”
장관, 농부가 되다
이 전 장관은 뼛속까지 농업인이다. 그의 경력을 보면 바로 드러나는 사실이다. 농촌지도자였던 아버지를 둔 그는 영남대학교 축산경영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와 미국 미주리주립대학교에서 농업경제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한국농촌경제연구원에서 30여 년 넘게 근무하면서 농촌의 현실과 문제를 연구하고 대안을 내놓는 일을 했으며 2013년에는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으로 입각해 역대 최장수인 3년 6개월의 시간을 지냈다. 그리고 2016년 9월 5일 퇴임한 다음 날 고향으로 돌아와 2500평(8264㎡)의 땅을 관리하는 농부가 되었다.
“요즘은 아침 다섯 시에 일어나 동물들 밥 먹이는 일로 하루를 시작해요. 온몸이 타박상과 상처투성이예요.(웃음) 며칠 전에는 경운기 사고가 나서 갈비뼈가 부러졌어요. 도처에 해야 할 일이죠. 옛날 방식으로 농사를 하면 힘만 들고 돈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실감했어요.”
귀향할 때 나름 세운 ‘일이삼사 원칙’이 있었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 하루 두어 차례 텃밭을 돌보고, 삼시 세끼 어머니와 밥을 먹고, 사람들이 찾아오면 말동무가 된다’는 것이었다. 3년간 보리·콩·팥·참깨·마늘·양파·옥수수 등 온갖 농사를 다 지어봤다.
그 과정에서 사모님은 반대 안 했느냐고 묻자 퇴직한 그날 밤에 어찌 내려가느냐며 딱 하루 반대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후로는 함께 고생하면서 도와주고 있다 한다.
“가끔 외롭고 답답할 때가 있는데 아내가 그걸 풀어줘요. 신세를 많이 지고 있죠.”
남는 농산물을 판매하는 수고로움은 모두 아내 이정숙 여사가 맡아서 하고 있다. 노모를 돌보고 남편 수발하고 농사일까지 거들며 집안 곳곳을 돌보는 1인 다역을 하고 있는 만큼 이 전 장관은 이런 아내를 인생 최고의 반려자라고 손꼽았다.
고향에 돌아온 그는 먼저 오래된 집을 손보면서 마당에 5평(16.5㎡)짜리 사랑채를 지어 사원재(思源齋)라 이름 붙였다. 농사일하며 이곳에서 책을 읽고 손님을 맞는다. 사원재라는 말은 조상과 부모, 그간 살아오며 도움을 줬던 수많은 사람들에 대한 의리를 잊지 않겠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는 또 40년이 다 된 부친의 생가 마당 한가운데에 작은 정자를 세우고 애일당(愛日堂)이라 이름 지었다. 노모가 황반변성 때문에 눈이 불편하신데 남은 날 하루하루 즐겁게 사셨으면 좋겠다는 뜻을 새겨 넣었다. 이 또한 안빈낙도(安貧樂道)가 아니겠는지.
‘故鄕創生’에 몰두하다
하지만 눈앞의 일을 두고 보고만 있을 수는 없어 종일 흙에 파묻혀 있다 들어오면 너무나 피곤해 바로 쓰러져 자는 현실. 그는 자신의 현재를 춘추전국시대 제자백가 중 농가에 비유했다.
“이 사람들은 농사를 짓는 게 세상 근본 이치란 주장을 했어요. 그런 주장을 갖고 등나라를 갔죠. 그 나라 임금이 너희들의 주장은 뭐냐 물어보니 첫째는 근면 검소해야 한다, 둘째로는 왕과 왕비도 직접 농사를 지어야 한다고 대답했어요. 왕이 그 말을 듣고는 첫 번째는 공감할 수 있는데 두 번째는 못하겠다며 거절했죠.(웃음) 이 사람들은 농업인들과 함께 일만 열심히 하다 보니 자기 사상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지 못했어요. 당시 유가들은, 실천보다 말로 사는 사람들이니까 자신들의 주장을 다 책으로 만들었죠. 나도 이렇게 농사일만 하다가는 정작 농촌의 살길에 대해 글을 써보겠다는 생각은 시작도 하지 못하고 마는 게 아닌가 걱정돼요.(웃음) 이제 좀 바꿔야겠어요.”
그렇다고 그가 다시 정치의 세계로 돌아올 것이라는 얘기인가 하면, 전혀 아니다. 이번 지방선거 때도 얘기들이 있었지만 그는 손사래를 쳤다.
“밖에 나가면 말이 많아 거의 두문불출하고 있어요. 무슨 운동을 하거나 당을 같이 해보자며 찾아오는 이도 있지만, 차나 한잔 먹고 가라며 돌려보내요. 한 눈 팔지 않고 텃밭 일구며 스스로를 돌아보고 평생의 과업인 희망찬 농업, 활기찬 농촌을 만드는 생각을 하기에도 바쁩니다.”
그러고 보니 그의 집에는 신문도 TV도 없었고 라디오 하나만 틀어놓고 있었다. 외부 활동이라면 가끔씩 강의를 나가는 정도다. 요즘 그의 주된 관심사는 ‘지방소멸과 고향창생’, ‘청년창업과 귀농귀촌’ 그리고 ‘농협의 역할’ 등이다. ‘늙고 지친 고향을 어떻게 활성화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화두와 관련한 고민거리인 것이다.
극장 하나 없는 곳, 젊은이들에게 와서 살라 말할 수 있나
“지역발전이라 하면 흔히 돈 버는 얘기만 하는데, 그에 못지 않게 이웃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너그러운 마음과 역량을 갖춘 인재양성, 그리고 생활환경 및 복지 서비스의 질적 개선도 중요하다고 봐요. 의성만 해도 극장 하나 없어요. 그런데 말로만 여기 와서 살라고 권유할 순 없죠.”
사실 농업·농촌 발전을 위해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는 많은 예산과 인력을 동원해 노력을 하고 있으나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 전 장관은 지역활성화를 위해 일하는 방식을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중앙정부는 지방 분권과 지원체제 정비를 하고 지방에 도전할 기회를 준 후에 결과에 책임지도록 해야 해요. 지역의 특성과 농가를 유형별로 구분하여 맞춤형 정책을 추진하는 것이 자원의 효율성을 높이는 길이거든요. 또한 조건불리지역 직불제도를 개선하여 개발 여건이 불리한 지역에 대해 지원을 차등화할 필요가 있어요.”
그는 농어촌상생협력기금의 조속한 시행과 함께 고향기부금제를 도입할 것을 적극 주문했다.
“무역이득공유제의 대안으로 매년 1000억 원씩 10년간 모으는 농어촌상생협력기금을 조성하기로 했는데 제대로 시행되지 않고 있어요. 당시 한중 FTA 협약 비준을 전제로 여야가 합의한 약속입니다.”
아울러 지방의 역할을 강화하고 주민과 민간 부문의 참여를 촉진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특히 농촌에 젊은 사람들을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스마트팜이나 공동경영체 등을 통해 고부가가치 있는 농산물을 생산하고 가공, 유통, 체험관광 등과 결합한 6차산업으로 매력적인 일자리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도농교류를 하고 귀농·귀촌을 통해 외부 사람들을 불러들이는 것도 대안이 될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이런 일들을 책임있게 추진하기 위해서는 지역 스스로 자기들의 문제와 가능성, 부존자원을 기초로 구체적인 목표를 세우고 전략적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농가 유형별 육성정책 완성해야
이는 그가 장관 시절에 핵심적으로 추진한 과제 중에서 못 다 이룬 숙원과도 관계가 깊다.
“농정의 새 틀을 짜고 싶었어요. 농업·농촌을 둘러 싼 대내외 여건이 다 바뀌어버린 지금은 그 변화에 걸맞게 정책 프레임도 달라져야 한다고 봤죠. 그중 하나가 농업경영체를 등록하고 이에 기초하여 농가 유형별 육성정책을 추진하는 일이었어요.”
그는 경영주가 65세 미만이면서 소득이 연 5000만 원 이상인 농가는 규모 있는 농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장기저리 융자와 컨설팅, 경영안정대책 등 맞춤형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후계자가 없는 영세고령농가는 농업 경영에서 은퇴를 유도하여 사회안전망으로 커버하고, 나머지 중간 규모 농가는 가공, 유통, 관광 등을 결합한 6차산업화를 통해 추가적인 소득원을 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농가를 한데 묶어놓고 획일적인 정책을 추진하니 돈은 돈대로 쓰고 손에 잡히는 효과를 못 볼 수밖에요. 이웃인 성주는 참외 하나만 갖고도 잘살아요. 참외 주산지로서 품목이 특화되어 전후방 관련 산업이 발달하고 6차산업으로 수급까지 안정되니 가능한 거죠. 이처럼 지역 및 농가 유형별 육성정책을 완성해야 했는데, 끝장을 못 보고 나온 게 아쉬워요.”
지역의 농업·농촌 관련 사업이 중앙정부에 지나치게 의존하다 보니 천편일률적으로 획일화해 특성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도 같은 문제다. 농촌 중심 활성화 사업을 보면 지역 여건이나 부존자원에 대한 고려없이 주민 의사나 참여도 이뤄지지 않는 상태에서 건물이나 지어놓고 활용을 못해 심지어 전기세도 안 나온다는 얘기를 듣는다는 것이다.
“지역이라는 공간 정책 위에 산업 정책을, 그 위에 사람을 대상으로 한 복지정책이 이루어져야 시너지 효과를 얻을 수 있는데 제각기 따로 놀고 있어요. 그러다 보니 사후관리는 안 되고 지자체는 책임 안 지려 하고…. 지역이 정책을 좀 더 주도하고 책임지도록 추진체계를 보강해야 해요.”
어쩌면 농협이 대안이 될 수도
그는 1·2·3차산업을 융복합해 농가에 높은 부가가치를 제공하고 일자리를 창출하는 6차산업을 주창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가 이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아시아 몬순기후대의 영세소농이란 구조적 특징 때문이다. 여름에 고온다습한 기후 때문에 논농사에 특화하다 보니 계절별 유휴인력이 발생하게 되고, 유휴노동력을 생산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농외소득원을 개발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가 된 것이다. 농업생산이란 1차산업과 가공이란 2차산업, 그리고 유통 및 관광서비스 등의 3차산업을 결합한 6차산업에서 그 해답을 찾았다.
그렇지만 현실은 생각처럼 간단치 않았다. 그는 지난해 수확한 팥 서 말과 양파 100kg을 팔 곳이 없었던 것이다. “콩 750kg은 다행히 인근 농협에 판매하였으나 시중보다 낮은 가격으로 넘겼어요. 오죽하면 농민들이 농협에 바라는 소망이 수확한 농산물을 제값 받고 팔아달라는 것이겠어요. 농사짓는 것도 힘들지만 판매하는 것은 더 어렵습디다.”
정부는 농협 개혁을 통해 경제사업을 활성화하려고 애쓰고 있으나 아직도 체감하는 성과는 얻지 못하고, 대부분의 사업장들도 적자 신세를 면치 못하는 실정이다. 더구나 농업인의 고령화로 준조합원 수가 늘어나면서 신용사업에 매진하고 있는 상황이다.
“일본은 농협 회원 중 농사를 짓지 않는 준조합원이 정조합원보다 30% 정도 많고, 농협 계통 매장의 농산물 책임판매율이 50%밖에 안 된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농협이 역할을 못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2014년부터 개혁을 시작했어요. 그런데 우리나라 농협은 정조합원이 준조합원보다 훨씬 더 많은데도 농산물 책임판매율은 25%에 불과해 농민들로부터 돈장사만 한다고 비판받는 거예요.”
그는 오랜 연구생활과 장관으로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가감 없이 농협 유통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아울러 고령화로 인한 지방소멸 시대에 있어서 주민들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한 농협의 새로운 역할을 제시했다.
“농협이 지역 단위의 6차산업을 주도해야 한다고 봐요. 경제사업의 수지개선을 위해서는 경영 능력을 향상하고 규모화, 전문화해야 합니다. 인근 지역과 품목을 생산하는 농협과의 통합 또는 사업을 연계하거나 연합사업단을 운영할 수도 있겠지요.”
어째서 농협일까? 그는 지금처럼 개별 농가가 따로따로 로컬푸드니 직거래니 하는 식으로 장사를 하면 비용절감을 고사하고 소비자 신뢰를 얻기 어렵다고 보고 있다. 표준화, 규격화가 곤란하기 때문이다. 개별 농가가 하기 힘든 그 작업을 농협이 해줬으면 하는 의견이다.
“고령화 사회에서 농협은 농기계를 구비하고 영세농들의 영농을 대행할 수도 있습니다. 농촌지역의 교육, 의료, 복지 등 서비스 전달 체계로서 농협의 새로운 역할도 생각해볼 수 있겠죠. 그것이 농협이 살길이에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결국 농협이 대체 뭐하는 곳이냐는 정체성 논란이 심화될 겁니다. 농협이 당면한 현안을 극복하고 지속적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주민들의 걱정을 덜어줄 수 있도록 스스로 혁신하고 노력해야 해요.”
귀농·귀촌, 국가 정책으로 시행해야
이 전 장관은 요즘 세상이 시끄럽다는데 다 잊고 산다고 했다. 해야 할 일이 많아서 그렇기도 하지만 깨끗한 자연환경 속에서 씨 뿌리고 가꾸는 즐거움이 여간 아니라고 한다. 농업과 농촌에서 미래의 꿈을 키우는 젊은이들은 물론 은퇴 후 여생을 편안하게 보내려는 사람들에게도 보람을 느끼는 새로운 삶이 가능함을 농촌이 가르쳐준다고 말했다. 지역의 균형발전은 물론 개개인의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는 귀농·귀촌 정책은 어느 한 부처가 아니라 여러 부처가 협력해 국가 차원에서 종합적으로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금의 농촌은 흡사 요양병원과 비슷해요. 우리 집 왼쪽으로 있는 집 세 채는 빈집이고, 오른쪽의 두 채는 독거노인이 살고 있어요. 소멸위험 지역에서 벗어나는 길은 외지 인구를 유입하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그러려면 이사비 몇 푼 보태주는 게 자랑이 아니라 이주자들이 필요한 것을 도와줘야죠. 여기서 태어나 20여 년 살았고, 지금 어머니를 모시고 있는 저도 적응이 쉽지 않은데 낯설고 물선 객지로 이사와서 얼마나 답답한 게 많겠어요? 지역을 찾아 온 외지인을 축복으로 여기고 따스하게 배려하는 너그러운 이웃이 있어야 이곳에 눌러 살고싶은 마음을 불러일으킨답니다.”
그는 귀농·귀촌 통계확립과 관련 정책의 정비, 농촌지역에 대해 1가구 2주택에 추가적인 감세를 포함한 제도정비등과 함께 주민들의 귀농·귀촌자들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제는 청복(淸福)을 위해 노력할 때
오로지 고향의 발전과 활기찬 농촌을 위한 생각에 둘러싸인 그에게서 못다한 책임감과 꺼지지 않은 열정이 보였다. 해야 할 일과 책임이 없다면 그렇게 힘들게 생활할 리가 없다. 그에게 견딤의 비법을 물었더니 정약용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다산 정약용은 복을 열복(熱福)과 청복(淸福)으로 나눴어요. 열복은 출세해 권세를 누리는 것이고, 청복은 청빈한 삶을 통해 욕심과 번뇌를 지움으로써 얻는 복이죠. 다산은 열복보다는 청복을 얻기가 훨씬 힘들다고 말했습니다. 제 인생을 돌아보면, 이미 열복은 과분하게 누린 셈이죠. 이제 마음을 내려놓고 이웃과 더불어 즐겁게 사는 복이 남았습니다.”
청복을 누려보겠다고 다짐했다는 말에서 그가 유독 마음가짐을 강조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더구나 그에게는 아직 풀어야 할 평생의 숙제, 희망찬 농업과 활기찬 농촌을 통해 국민이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보자는 도전이 있다. 도전은 사람에게 살아가야 할 이유를 만들어준다. 그래서 마음의 가치를 알게 된 그는 사람들에게 마음이 만들어내는 위대한 변화에 대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고향창생은 우리들 마음의 재생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내가 살아갈 지역의 미래를 위해, 무언가 하고 싶다는 주민들의 염원이 행동으로 나타날 때 활력은 다시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초간정(草澗亭) 원림(園林)을 찾아 길을 나선다. 경북 예천군 용문면 죽림리에 있다. 햇살이 따갑다. 매서운 폭염이다. 그러나 땡볕을 먹고 여름 꽃이 피고 과일이 실팍하게 여무니 해를 향해 눈총만 쏠 일 아니다. 접때엔 물 폭탄처럼 장대비 내렸다. 장자 말하길, 자연은 자애롭지 않아 만물을 하찮게 여긴다 했던가. 폭우도 폭염도 무심한 자연의 순행(順行)이다.
초간정 원림에 들어서자 솔숲이 펼쳐진다. 뙤약볕 아래 솔은 푸르다. 대낮 천지가 밝아 초록 솔잎들 한결 환하다. 실바람조차 없어 미동 없이 고요한 소나무들. 외양은 그러하나, 쏟아지는 햇볕에서 양분을 취하는 솔의 내장기관엔 1초의 정지도 없을 것이다. 겉으로 푸르디푸르게 양양하고, 안으로 마당쇠처럼 분주한 저 여름 소나무들. 저마다 꼿꼿한 지체로 개결하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무서리를 뒤집어쓰거나 불볕이 내려치거나, 언제 어디서나 늘 푸르른 소나무. 해서, 선비정신의 표상이다. 푸른 갓에 푸른 도포를 걸친 소나무의 의연한 모습에서 옛사람들은 선비의 풍모를 읽었다. 그래서 소나무를 학자수(學子樹)라 일컬었다. 공자는 문필수(文筆樹)라 불렀다. 대나무, 매화나무와 더불어 ‘세한삼우(歲寒三友)’로 통했다.
선비란 어떤 사람인가. 수기(修己)를 일삼은 존재였다. 마음과 학문을 갈고닦아 세상에 이롭게 쓰이기를 갈구한 사람이었다. 목에 칼이 들어올지언정, 권력의 농간을 가만히 두고 보지 않고 살기를 미션으로 삼은 사람이었다. 지식을 채우고, 기개를 돋우기 위해, 참된 선비는 쉼 없이 공부를 했으며, 지독하게도 노년마저 공부에 바쳤다.
보라, 여기 초간정에도 조선 선비가 살았다. 곧은 선비정신이 깃들어 숨 쉬는 정자다. ‘대동운부군옥(大同韻府群玉, 보물 제878호)’, 이는 조선조의 저작 중 매우 독특한 명저다. 이 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인 이 책은 단군 시대부터 조선 중기까지의 지리, 역사, 인물, 문학, 식물, 동물 등을 망라, 운별(韻別)로 분류 수록했다. 전거(典據)의 충실성과, 민중 중심적 시각으로 일찍부터 그 학문적 가치를 인정받았다.
편찬자는 초간 권문해(權文海, 1534~1591). 초간 선생은 벼슬에서 물러난 뒤 초간정을 짓고 칩거, ‘대동운부군옥’을 완성했다. 책을 집필하며 조선 지식인들을 통절히 질타했다. 중국의 역사엔 밝으면서 조선의 일엔 아둔하다고.
원림엔 소나무 외 느티나무, 팽나무, 단풍나무, 참나무 등속이 함께 어울려 숲을 이룬다. 숲의 안통으로는 계류가 여울져 흐른다. 물소리 찰랑이는 계곡 바위 벼랑 위에 초간정이 있다. 조촐한 규모와 단아한 태로 질박하고 곱살한 운치를 자아내는 정자다. 온돌방 하나를 중앙에 조성해둔 건 애초 정사(精舍)로 쓰여서겠지. 초간 선생은 이곳에서 드시고 마시고 주무시며 집필에 임했다. 정사였다지만 계자난간(鷄子欄干)을 두른 대청이 누마루처럼 후련하다.
차경(差境)이라 하지. 마루의 열린 공간으로 정자 바깥의 자연 풍광이 렌즈로 당긴 듯 끌려 들어온다. 솔숲이 정자 내부로 들이치고, 숲 너머 산이 들어오고, 산 걸린 하늘 자락까지 스며든다. 마루 아래로 눈을 던지면 솰솰 굽이치는 계류가 청신하다. 공부면 공부, 집필이면 집필, 쉼이면 쉼, 풍류면 풍류, 초간 선생은 이곳에서 누릴 것 다 누렸을 게다. 그러나 여한 없이 누릴 걸 다 누리는 삶이 있던가? 눈시울 적실 일이 한둘이던가? 선생의 비통한 글 한 귀가 가슴에 아리다.
‘그대, 상여에 실려 그림자도 없이 저승으로 떠나니, 나 이제 어찌 살란 말이오. 상여소리 한 가락에 구곡간장(九曲肝腸) 미어져, 차마 슬퍼할 말을 찾지 못하겠네.’
상처(喪妻) 뒤 선생이 ‘초간일기(草澗日記)’에 남긴 글이다. 사별이란 아파 세상의 모든 별들이 저문 듯 암담해진다. 정녕 보내지 않았음에도 훌쩍 떠난 사람의 그림자라도 잡으려고 발버둥 쳐보지만, 이미 부질없다. 제아무리 의연한 선생이라지만, 슬픔에 사무쳐 갈피없이 흔들렸을 테지.
탐방 Tip
예천 초간정 원림은 담양 소쇄원과 함께 가장 아름다운 조선의 원림으로 불린다. 초간정 옆 별채에선 한옥 체험 민박을 운영한다. 초간 종택(보물 제457호)이 초간정에서 2km 거리에 있으니 함께 답사한다.
요즘은 친구들과 1박 2일 모임을 한다. 잠깐 얼굴 보고 밥 먹고 헤어지는 만남이 아쉬워 언제부터인가 만나면 1박을 한다. 그날도 오후 느지막이 만나 여유 있는 저녁식사를 마치고 호텔로 가는 길에 노래방을 들러 가기로 했다. 그렇잖아도 ‘브라보마이라이프 콘서트’에서 들었던 가수 양수경의 노래를 흥얼거리던 차에 냉큼 맘이 땅겼다.
“노래방은 한 시간만 하고 가자. 호텔 들어가면서 맥주랑 안주도 사야지?”
택시 안에서 나누는 대화에 기사님의 눈빛이 곱지 않다. 그도 그럴 것이 평일 오후에 여편네(?)들의 행태로는 의심받아 마땅할 법하다. 멀어지는 기사님에게 참하게 놀다 가겠노라고 속말을 전하고 주변을 둘러보니 온통 노래방 간판이다. 지하보다는 깨끗하고 쾌적한 지상으로 가자며 간택을 고민하던 차에 한 건물에 5층부터 8층까지가 노래방이 떼로 몰려 있는 곳으로 들어갔다. 엘리베이터에서 가만히 들여다보니 선택이 쉽지 않다.
“노래빵, 노래룸, 노래클럽, 노래터, 노래스튜디오….”
엇비슷한 상호가 한 가득이다. 우리가 찾는 노래방이 어디에 있는지 몰라 헤매자 동승한 사람이, 여기는 노래주점이라고 넌지시 알려준다. 화들짝 놀라 다시 찾아보니 길 건너 저만치에 노래방이 보인다.
반가운 마음에 문을 밀고 들어섰는데 인기척이 없다. 작은 방이 쭉 이어져 있고 데스크 옆에 지폐교환기가 있을 뿐이다. 벽면에 시설 이용법이 붙어 있는, 말로만 들었던 코인 노래방이다. ‘코인 노래방’은 상호명이 아니고 ‘코인을 사용하는 노래방’이라는 설명이다. 한 곡에 500원! 5000원을 동전으로 바꿔 방에 들어서니 노래 반주기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일렬로 화면을 보고 앉아 동전을 넣고 노래를 선택하니 반주가 나왔다.
‘이건 쫌 아니다’ 싶은 마음과 함께 밀려오던 비루하고 애잔한 느낌. 다시 나와 주변 일대를 뒤지다 보니 졸음이 밀려왔다. 결국 노래방 로망은 날아가고 호텔로 급 귀가했다. 그날도 집에서의 일상처럼 잠옷을 갈아입고 얼굴에 팩을 붙인 후 폭풍 수다로 하루를 마감했다.
우리 세대에게 노래방은 건전한 문화 공간이다. 개인적으로는 술집이나 카페보다 더 편하게 속내를 풀 수 있는 고마운 곳으로 기억한다. 언젠가는 두 시간을 나 홀로 논 적도 있다. 마이크 두 개를 부여잡고 소리 지르며 놀던 시절도 있었는데….
‘이젠 노래방도 못 찾는 나이가 되었나 확! 이참에 노래방 마이크를 장만해?’
자려고 누우면서 든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