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우연히 우리 아파트 북 카페에서 책 한 권을 집어 들었다. 한눈에 크게 공감하는 이유는 내 손으로 직접 집을 짓는 일이었다. 에서 비록 일주일이라는 단어는 의아한 마음이 들었지만, 조용한 시골에서 흙집을 짓고 노년을 맞이하고 싶은 것은 많은 사람들의 바람이기 때문이었다.
필자도 지난 시절, 시계만 들여다보며 정신없이 살아왔다. 앞만 보며 쉴 새 없이 달려왔기에 이제쯤은 쉬엄쉬엄 자연 속에서 호흡하며 살아가고 싶었다. 그야말로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아 번뇌로 가득하고, 고고한 척하며 창백한 지식인만으로 살아가는 것은 풍요 속 빈곤 생활이었다.
저자는 오스트리아에서 어렵사리 철학박사 학위를 따고, 대학에서 강의를 하며 안정되게 살아가던 중 자신의 삶에 대한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다. 지루하게 반복되는 생활 속에서 자기모순, 자기 분열이라는 삶의 위기를 느끼게 되었다고도 한다. 결국 자신에 대한 박사학위를 단호하게 거부하고 자신의 호칭을 바꾸며 홀로 다시 서기에 도전을 한다.
종이 한 장만으로 입증하는 박사 타이틀은 진정한 의미의 박사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저자는 교수라는 직분으로 사는 내내, 이론과 실천, 이상과 현실이 분리되는 허탈한 삶만을 살고 있었다는 것이다. 결국 행복을 꿈꾸며 사는 진정한 의미의 살아있는 행복한 삶은 시골로 내려가 자아를 실현하며 이론을 실천에 옮기는 길이었다.
그는 강력하게 말하고 있다. ‘행복한 삶이란? 삶의 세 가지 영역, 몸과 마음이 편안하고 영혼이 기뻐하는 평화로운 상태를 말한다.’ 진실로 기쁨이 넘치는 삶이란 내면에서 울리는 목소리로 사는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몸이 움직이고, 마음이 움직이고, 영혼이 그에 따라 조화롭게 움직이는 것이다. 행복을 꿈꾸는 지은이의 내면 소리가 필자에게도 감동으로 다가왔다.
사람은 살다 보면 자기 분열의 고통으로 괴로울 때가 많이 찾아온다. 정신이 꿈틀대며 살아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자는 흙집을 지을 때면 더 이상 괴로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단호하고 자신 있게 강조한다.
오로지 흙집을 지을 때만이 몸과 마음이 하나 되어 영혼이 기뻐하며 춤을 춘다고 흥미롭게 서술해간다. 더구나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창조적 성취감으로, 손수 집을 짓고 나면 그 대견스러움으로 자신에 대한 신뢰감도 용솟음을 친다고 했다.
또한, 흙집을 한 채 짓는 것은 자연의 훌륭한 의사를 주치의로 모시는 것과 같으니, 그 집에 사는 것만으로도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 몸에 병도 사라진다는 것이다. 이 어찌 신비로운 일이 아닐까 싶다. 마침내 그는 흙집을 짓는 것이 마치 머리와 손발이 따로 노는 먹물의 세계를 벗어날 수 있는 구원의 방주와도 같다고 대단한 극찬을 했다.
결국 ‘흙집 짓기는 일종의 자기 수행의 도량’이라는 것이다. 참으로 대단한 명언들이다.
저자는 육체노동을 거의 하지 않았고 영혼이 작동하지 않았던 지난날을 과감하게 접었다. 머리로만 살아왔던 기형적인 삶에서 기초를 튼튼히 다시 세우고 삶의 방향을 완전히 전환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오랫동안 살아온 길을 정리하고 하루아침에 생각을 바꾼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마음속에 요동치는 갈등이 사라지고 평화가 깃들 수만 있다면 그리 못할 것도 없다. 진정한 행복을 꿈꾸며 그 관점에 따른 행동이라는 실천이 있을 때, 드디어 영혼이 함께하는 충만한 기쁨을 맛볼 수가 있다고 하는 것은 충분히 도전해볼 만한 가치가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저자의 대단한 용기와 집념이 참으로 부럽기도 했다.
이 세상은 모든 사람들이 꿈을 꾸며 살아간다. 사람에 따라 꿈도 달라지겠지만 몸과 마음과 영혼이 하나 되어 조화로운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철학적 사고를 넘어 꼭 실천에 옮겨야만 하는 필수과목 행동학 같다는 묘한 생각도 들었다. 저자의 명쾌한 삶에 깊은 공감을 하며, 그것은 필자의 내면에서도 꿈틀대고 있는 분명 살아있는 삶이었다.
언젠가 그날이 오기를 손꼽아 꿈꾸며 두꺼운 책 한 권을 단숨에 읽어 내렸다. 어느 흙집 짓는 철학자 교수가 쏟아내는 명언들은 오랫동안 진한 여운을 남겨왔다. 그것들은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필자의 일상적 생활 속에 깊이 새겨져와, 바쁜 삶 속에 잊고 살았던 꿈들을 모락모락 피어나게 만들었다.
남편과 함께 또닥또닥 흙벽을 발라대고, 훨훨 타오르는 장작불을 지필 수 있는 벽난로를 떠올리며 그날이 오기를 꿈꾸어 본다.
며칠 전 세 명의 60대 남자들과 함께 저녁을 먹었다. 막걸리를 곁들이며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100세 시대로 화제가 넘어갔다.
“지겨운 배우자와 100세를 함께 사는 것은 고통이야.”
“100세까지 살려면 세 번은 배우자를 바꿔야 살 만하지.”
“그것도 모자란다.”
“난 먹을 것 충분히 주고 혼자 떠나고 싶어. 나를 찾아서.”
“그래서 졸혼(卒婚)이 유행이야.”
첫사랑, 첫 키스, 첫 남자. 처음처럼 신선하고 설레는 말이 또 있을까. 그런데 그 첫이 낡아서 헌것이 되어도 쓸모없어진 물건처럼 버릴 수 없는 게 문제다. 사람들은 싫증을 빨리도 낸다. 그래서 유행이 생기고 그 유행은 떠돌다 제자리로 다시 돌아오기도 한다. 유행이 유행을 싫증내는 것이다. 사랑도 싫어졌다가 핑계 대며 탕아처럼 다시 돌아오기도 한다.
부부가 의견이 안 맞고 화가 나도 선뜻 헤어질 수 없는 이유는 그 순수했던 첫사랑의 감정을 아직도 가슴이 기억하기 때문이다. *절절히 그리며 보고 싶어 했던 마음과 그 황홀했던 순간의 두근거림이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남녀는 처음 만났던 시기의 모습을 호호백발이 되어서도 연상시키며 현재의 모습과 같이 *오버랩시키는 습성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구십 먹은 할아버지에게 팔십 먹은 할머니는 처음 만났던 20세 처녀의 모습으로 보이기도 한단다.
남자들은 대부분 결혼 3년 차가 되면 신선함이 사라지면서 여성이 싫증이 나기 시작한다고 한다. 이 무렵은 출산과 육아로 여자가 자신을 가꾸는 것을 놓아버리기 쉬운 시기다. 김태희 같은 아내를 두고도 3년이 지나면 전원주 같은 여성과 바람을 피운다는 항간의 농담 같은 얘기도 있다. 신선함 뒤엔 편안함도 있고, 세련됨도 있고 느긋함도 따라오는데 그건 고려 대상이 아니고 성적 신선도에만 무게를 두는 것 같다.
남자도 여자도 자유를 꿈꾸기는 마찬가지다. 따스한 사랑을 꿈꾸기도 마찬가지다. “나는 사랑을 받기만 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평생을 외롭게 살 가능성이 많다. 사랑받고 싶으면 먼저 가슴을 열고 상대에게 사랑을 줘야 한다. 경험자의 충고다.
요즘 졸혼이라는 말이 유행처럼 퍼지고 있다. 졸혼이란 서류상의 결혼은 유지한 채 실제의 결혼생활은 졸업한다는 의미라고 한다. 졸혼을 꿈꾸는 남자의 심리가 궁금했다.
자유로워지고 싶다.
잔소리 듣고 싶지 않다.
남자로서 인정받고 싶다.
가부장제에 익숙한 남자들의 반란일 수도 있다. 집안의 기둥이며 중심이었고 최고 경배의 대상에서 제외된 소외감일 수도 있다. 책임은 고스란히 남아 있으나 대접에서는 배제된 가장은 서열이 강아지 다음이라는 서글픈 풍자도 있다. 그래서 허무감과 급속한 추락을 견디지 못하고 탈출을 꿈꾸는 것이다.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러 피터팬처럼 자유롭고 싶은 것이다. 자신이 누구인가를 질문하고 찾아가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졸혼이 유행처럼 번지는 것은 서글픈 것 같다. 그러니 일탈을 계획하는 남자들에게는 미리 줘버리자.
먹고 싶어 할 때 먹인다.
재운다.
자유를 준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일정한 거리 이상의 접근을 삼가자. 왜 나와 틀리냐고 잔소리하고 묻지 말자. 다른 색깔도 함께 어울리면 훌륭한 조화를 이루지 않는가.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전할 수 없는 상황이 돼서 마음만 동동 구르는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브라보 마이 라이프의 문을 두드려주셔요. 이루어질 수 없는 첫사랑 그 쓸쓸함에 대한 이야기를 이근후 이화여대 명예교수가 보내주셨습니다.
글 이근후 이화여대 명예교수
누님. 이렇게 불러야 내 마음이 편할 것 같습니다. 이젠 누니~임 하고 소리 높여 불러도 대답 없을 당신에게 띄웁니다.
생각해보면 내가 참 바보 같았습니다. 왜 그랬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지금도 누님 앞에 서라면 아마도 그때 그 시절처럼 한없이 작아질 것입니다.
누님 결혼식 날, 축시를 읽어주기로 약속해놓고선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축시를 읽어드리지 못했습니다. 기억나세요? 내가 막 예식장에 도착했을 때 누님은 차를 타고 신혼여행을 떠났습니다. 차 안에서 내게 손을 흔들어줬습니다. 그날 내가 왜 늦은 줄 아세요? 오래도록 잊고 있었던 기억인데 이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날은 정말 누님이 미웠습니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가 고등학교 시절입니다. 내 여동생의 S 언니가 되면서입니다(그 시절엔 S 언니 동생이 유행이었습니다). 동생의 언니이니 당연히 나한테는 누님이 된 것입니다. 누님과 내 나이 차이는 딱 한 살입니다. 누님이 생겼으니 공연히 즐겁고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습니다. 동생을 통해 말로만 듣던 누님을 만난 것은 훨씬 나중 일입니다. 마침 나와 가장 친한 친구가 누님과 친척이었는데 조카뻘이었습니다. 그러니 동생으로 인해 누님을 얻고 누님으로 인해 조카를 하나 얻은 셈입니다.
어느 날 친구를 앞세워 누님 집으로 찾아갔습니다. 보고 싶은 간절한 마음으로 찾아갔으나 부끄러움이 많았던 나는 하고 싶은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돌아와선 다음에 만나면 이런저런 말을 해야지 하면서도 그 말들을 지금까지 하지 못했습니다. 대학시험에 낙방하고 실의에 빠져 외가 근처에 있던 직지사에 들어가 한 학기 동안 머문 적이 있습니다. 그때 누님 꿈을 생전 처음으로 꾸었습니다. 글쎄요. 나 혼자 간직하고 싶었던 꿈이었지만 지금은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누님이 나한테 키스를 해주었습니다. 내가 한 것이 아닙니다. 누님이 나한테 해주셨습니다. 그 황홀한 느낌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깨어보니 허망하게도 꿈이었습니다. 계속 그런 꿈을 꾸고 싶었습니다. 그날의 꿈이 아쉬워 그 꿈을 꾸었을 때의 환경에 맞춰 여러 번 잠을 자보기도 했습니다만 그 후로는 한 번도 그런 꿈을 꾸지 못했습니다.
대학에 입학했을 때 누님은 영문과를, 나는 의예과를 다니던 시절이라 만나는 일이 잦았습니다. 함께 있는 시간이 많을수록 참 즐거웠습니다. 그렇게 가깝게 지내면서도 정작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입 밖에 내지도 못했습니다. 누님을 만나고 나면 즐거움만큼 아쉬움도 컸습니다. 꿈같은 대학 시절을 보내고 내가 모교 병원에서 인턴을 하고 있을 때입니다. 누님은 결혼을 한다며 내게 축시를 부탁했습니다. 나는 기꺼이 승낙했고 당일 낭송하기 위해 축시를 하나 지었습니다. 안타깝게도 뭐라고 썼는지 지금은 기억에 없습니다. 시를 쓰고 그림도 그려 시화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림에 눈물이 떨어져 번져버렸습니다. 축시를 쓰면서 왜 눈물이 났을까요? 그때는 잘 몰랐지만 지금은 너무나 명쾌히 그 이유를 압니다.
내가 사랑한 누나를 다른 사람이 채갔기 때문입니다. 누나를 채간 사람에 대한 분함과 그 사람을 따라간 누님에 대한 서운함이 범벅이 되어 눈물로 떨어졌습니다(나이답지 않게 참 바보 같았네요). 예식시간에 맞춰 예식장에 충분히 갈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병원에서 우물쭈물하다 시간이 늦어버렸습니다. 핑곗거리는 충분했습니다. “환자가 많아서 그랬습니다”라는 핑계입니다. 그러나 기실 환자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분노와 서운함이 밀려와 무의식적으로 시간을 맞추지 못한 것입니다. 그 분노와 서운함을 직면하기 어려웠습니다. 생각하면 그 뿌리는 깁니다.
내가 대학시험에 낙방해 직지사에서 한 학기 동안 칩거하면서 제일 많이 생각한 사람은 누님입니다. 공부하는 시간보다 누님을 상상하는 시간이 더 많았습니다. 그냥 보고 싶다는 수준이 아니라 결혼까지 하고 싶을 만큼 많은 시간을 누님과 함께하는 상상 속에서 보냈습니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항상 얼굴을 붉혔습니다. 속마음을 누군가에게 들킨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면 언제나 얼굴을 붉혔습니다. 결혼을 할 수도 있지, 못할 이유는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항상 나를 통제하는 나만의 도덕적 기준이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기준이지만 그땐 정말 바보스러웠습니다. 그 기준은 누님하고 어떻게 결혼할 생각을 하느냐는 자문이었습니다. 죄의식이었습니다. 참 바보스러웠지요. 누님은 내 혈연적 누님이 아니잖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님과의 결혼을 상상하는 것 자체가 부적절하다는 생각에 얽매였습니다. 누님하고의 결혼이라니…. 그런 불순한 생각을 하는 나 자신을 스스로 용납하지 못했습니다. 말하자면 사랑하는 마음과 사랑해선 안 된다는 마음이 서로 상충하는 양가감정에 시달렸던 것입니다.
한 학기 동안 가슴앓이만 하다 내려왔습니다. 이런 깊은 사연이 있습니다. 결혼식 날 예식장에 늦게 도착한 것이 꼭 환자 때문만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인턴 과정을 마친 뒤 정신과 레지던트 과정 수련을 받기 위해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내가 갓 결혼해 신혼생활을 시작했을 때입니다. 그 뒤 20여 년 동안 나는 누님을 잊고 살았습니다. 첫아들이 개혼할 때 누님에게 청첩장을 보냈습니다. 아들 결혼식을 준비하다 불현듯 누님 생각이 났던 것입니다.
예식장에서 누님을 20여 년 만에 만났습니다. 반가워서 잡은 손을 한참 놓지 않았습니다. 그날 나는 누님 손을 처음 잡아봤습니다. 결혼식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옛날 생각이 나서 혼자 웃었습니다. 이젠 누님을 채간 분에 대한 분노도 누님에 대한 서운함도 내려놓은 지 오래돼서 그런지 그날은 그냥 미소를 짓게 하는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날은 정말 반가웠습니다. 바보스러웠던 내 모습을 생각하면서 누님 손을 오래 잡고 있었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누군가가 그리운 사람이 있다면 참 행복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고 또 세월이 많이 흘렀지요. 인편에 누님이 아프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다시 옛날 생각이 밀려오면서 누님이 너무 보고 싶었습니다. 수소문 끝에 전화를 드렸지요.
“누님 나 대구 갈 일이 있는데 누님 집에 들려도 돼요?”
“오지 마.”
내 기대와는 다른 답변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누님은 아파서 누운 모습을 보여주기 싫다고 했습니다. 체중이 35kg밖에 안 나간다니 그 모습을 상상하기 싫었습니다.
“대신 전화 자주 해.”
나는 그래서 매일 전화를 했고 옛날이야기를 하며 즐거워했습니다. 그러다가 네팔로 봉사를 떠났습니다. 네팔에 가 있는 동안 나는 누님이 돌아가시지나 않을까 내내 불안감을 떨치지 못했습니다. 네팔 봉사를 마치고 귀국하면서 곧바로 누님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전화벨이 한참을 울리는데도 누님은 받질 않았습니다. 불길한 예감에 전화를 끊었습니다. 그러곤 전화를 걸 용기가 나지 않아 한동안 걸지 않았습니다. 누님의 부음을 들은 것은 그 후 한참 지나서였습니다. 나는 또 바보짓을 했구나 싶었습니다. 두려워도 참고 전화를 걸어볼걸. 자책하고 또 자책했습니다. 전화를 통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 지금도 내가 그런 바보입니다.
이제 사진은 대중화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사진 찍기를 좋아한다. 스마트폰이 그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고 할 수 있다. 아름답게 보이는 장면이 있으면 스마트폰을 바로 꺼내 촬영을 망설이지 않는다. 반면에 사진을 취미로 막 시작했거나, 조금 배운 사람들은 무엇을 찍어야 할지 망설인다. 사진 소재를 제대로 찾지 못하는 것이다. 또 사진을 시작한 지 꽤 됐고 사진 찍기가 취미인 사람들도 촬영지에 가면 주변을 휙 둘러본 후 “찍을 것이 하나도 없다!”고 말하며 다른 곳으로 옮겨가기 일쑤다. 하지만 피사체를 보는 마음과 시선을 달리하면 주변에 사진 소재가 널려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보기 나름’이란 말과 같이 피사체를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우리는 늘 자기가 서 있는 위치에서 그대로 사물을 바라보는 습관이 있다. 눈높이나 사물을 바라보는 위치를 달리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런 습관의 이면에는 변화를 싫어하는 인간의 속성이 있다. 그래서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가고 뭘 계획해도 작심삼일이 된다. 현재 상황에서 더 나은 방향으로 성장하고 더 괜찮은 사진 작품을 만들고 싶다면 변화를 위한 행동을 해야 한다. 자기 편한 대로 한다면 그 자리에 머물게 된다. 성장은 없다. 사진에도 마찬가지다. 사진 찍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의 변화다. 새로운 시선이나 마음으로 접근하면 주변에 찍을 거리, 즉 사진 소재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일상생활 중에 사진 소재를 발견해 촬영한다면 사진 작품을 위해 별도의 시간을 낼 필요가 없게 되어 귀중한 시간을 아낄 수 있다. 필자는 그런 방법으로 작품을 만든다. 사진작가나 사진을 취미로 하는 분들이 사진 촬영을 위해 서너 번은 다녀왔을, 해외도 간 적이 거의 없다. 해외 사진 촬영에는 비용이 많이 들어 부담할 여력이 없는 이유도 있지만, 일상에서 소재 찾기를 좋아하고 그것을 생활화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침 산책길에서 만나는 풍광이나 물체가 곧 사진 소재다. 매일 다니는 같은 곳이어도 사계절에 따라, 아침저녁 시간대에 따라 다르다. 해가 맑게 뜨는 날과 흐린 날, 눈이 쌓인 모습과 꽃이 흐드러지게 핀 풍경은 같은 길이어도 차이가 나기 마련이다. 비가 내린 다음 날도 아침 풍경이 다르다. 줄곧 다니는 길도 시간마다 다르게 다가온다. 소재는 많다는 의미다. 주변의 소소한 것들이 모두 사진 소재다.
이뿐만이 아니다. 자신의 모습도 찍어보자. 눈이나 눈썹, 발가락이나 불거진 힘줄, 발등도 찍어보자. 앞의 사진은 이른 아침 창틀 사이로 비친 한 줄기 햇살이 너무 좋아 냉장고에서 사과 한 알을 꺼내 필자의 발 옆에 놓고 찍은 사진이다. 늘 함께 생활하는 가족과 자주 만나는 친구의 환하게 웃는 모습도 훌륭한 소재다. 일부러 사진을 찍기 위해 포즈를 취하지 않은 자연스러운 모습을 담아도 좋다. 강아지나 고양이 등 애완동물도 훌륭한 사진 소재가 된다. 그리고 집집마다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을 한두 개의 오래된 인형도 있다. 자기가 좋아하는 물건을 찍어도 된다. 오토바이를 좋아하는 사람은 오토바이를, 기타를 좋아하면 기타를 사진 소재로 활용할 수 있다. 집 안에서 가꾸는 화분과 장식품도 소재가 된다. 바깥에서도 직장 주변의 오가는 길목에서 수없이 만나는 자연과 사람들, 바람에 흔들리는 민들레 홀씨, 서산에 걸려 있는 초승달과 하현달, 보름이 되면 창문 사이로 찾아드는 둥그런 보름달도 창틀을 액자로 해서 찍을 수 있는 좋은 소재다.
이러한 시선으로 다가가면 언제 어디에 있든 찍을 거리는 수없이 많다. 더불어 피사체를 바라보는 눈높이(사진 전문용어로 앵글)를 다양하게 해서 보면 피사체는 더 늘어난다.
설날 음식을 위해 며느리와 시어머니가 명절 며칠 전부터 만나서 준비하는 것은 이젠 그만 해야 하지 않나 싶다. 며느리를 맞이하고 첫 설날, 시어머니의 위상을 세우기 위해 어려운 음식을 해내고 싶은 마음과 그냥 편하게 보내자 하는 두 마음의 갈등이 있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즈음 외부에서 할 일들이 이어졌다. 그래서 명절 음식은 대부분 백화점에서 사고 몇 가지의 요리만 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동태전, 버섯전, 동그랑땡 등을 구색 맞춰 구입한다. 나물도 고사리, 시금치, 도라지 등 삶은 것으로 구입한다. 필자가 직접 만든 것은 갈비찜을 비롯해 몇 가지뿐이다. 아들과 며느리에게 명절날 오라고 하니 매우 좋아하는 눈치다. 드디어 명절날 서로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식사를 한다. 아들과 며느리가 도착하기 전에 필자는 음식을 모두 데우고 볶고 플레이팅한다. 이 일도 결코 쉽지 않다.
새삼스럽게 친정어머니와 올케들에게 고개가 숙여진다. 친정어머니는 며느리가 사용할 깨끗한 그릇과 이불과 요를 준비하고 집 안의 청결함까지 보여주고 싶었는지 그릇을 다 꺼내어 닦고, 이불과 요 커버도 시침질하고 대청소까지 하셨다. 왜 그렇게까지 하실까 했는데 며느리를 맞이하고 보니 알겠다. 필자도 신경이 쓰인다. 며느리만 신경 쓰이는 명절이 아니다. 시어머니도 예민해지는 명절이다.
냄비를 닦다가 힘들어서 같은 브랜드로 아예 새로 구입했다. 명절날 온 가족이 음식을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며 보람을 느낀다. 심지어 며느리가 “어머니 맛있어요~” 한다. 양만 많으면 포장해서 보내고 싶다. 이 대목에서 필자는 아들과 며느리에게 솔직히 고백한다. “엄마가 한 요리는 세 가지뿐이야. 그 외에는 모두 백화점 식품 코너에서 구입한 것이니 오늘 맛있게 먹고 가면 대만족이야. 포장을 해달라거나 어떻게 만든 거냐고 자세히 묻지 마.” 유머 있게 한마디 했더니 웃으며 이미 눈치 챘다고 한다.
며느리도 누구네 집 딸이다. 결혼했다고 해서 시댁에만 충실할 필요 없다. 시누이나 친척이 오면 꼼짝 못하고 수발 들다 친정도 못 가 뒤늦게 형제자매들이 다 가버린 썰렁한 친정집에 잠깐 들러 친정어머니 얼굴만 겨우 보고 온다는 불평을 이미 동네 분들에게 들었기에 필자는 명절 음식 만드는 데 드는 시간과 수고를 덜고 싶다.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다. 필자도 아들 내외 보내고 친정에 계신 오빠들 내외와 함께 놀기 위해 달려가고 싶기 때문이다.
“그래도 엄마가 직접 만들어준 맞춤 커피는 한 잔 마셔야지~~.”
아들의 말에 행복해져서 바리스타 엄마의 커피 제대로 만들어서 과일과 함께 내어준다.
친구들과 맘껏 즐길 시간이 없었던 학창 시절
학창 시절 필자는 또래 아이들과 다른 인생을 살았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 개인 집 과외 선생을 했다. 교사였던 아버지가 퇴직하면서 출판사 사업을 하다가 몇 차례 실패하면서 퇴직금은 물론 집까지 없어져 단칸방에서 살았던 적이 있다. 집주인의 아이들은 네 명이었는데 숙제만 봐줘도 감사하게도 성적이 올라가니 아예 자신의 집에서 지내면서 아이들의 성적관리, 생활관리를 해달라 부탁했다. 그렇게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입주 과외를 시작했다.
공부는 물론 잘 때는 입던 옷을 개어 머리맡에 놓고 자는 바른생활 습관도 함께 가르쳤다. 둘째였던 큰아들이 필자가 잘 가르쳐줘서 공부에 재미가 생겼고 그 덕에 최고의 대학에 들어갔다고 길에서 아버지와 마주한 주인댁 아저씨가 한 말씀 하시더란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절 용돈도 받아가면서, 가정 형편이 좋은 댁에서 과일도 먹고 나이가 어려도 선생님 대접을 해준 게 필자는 고맙다.
그 시절 친구들은 함께 독서실에서 공부하고 여기저기 몰려다녔다. 그러나 필자는 학교 수업만 끝나면 합창반 연습시간 외에는 맡은 바 책임을 다하려고 집으로 달려왔던 기억이 난다. 주인댁 아저씨가 아이들 데리고 신림동에 새로 생긴 신림극장에서 영화를 보라며 종종 돈을 줘서 아이들과 재미있게 영화를 관람했던 기억도 난다. 새로 오픈한 극장이라 들어오는 손님을 무조건 받았는지 잘 모르겠지만 당시에는 몇 세 이하 입장 불가도 없었다. 그때 국내외 고전영화를 참 많이도 봤다.
필자는 네이버 고전영화카페에 가입해 10년 이상 활동 중이다. 중요한 모임이 있어도 웬만하면 정기 상영회는 빠지지 않는다. 지금도 보고 싶은 영화는 개봉일을 기다렸다가 개봉하자마자 가장 먼저 달려가서 본다. 학창 시절부터 영화를 자주 보던 습관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주인집에서 이사한 뒤로는 집 근처에서 다른 집 남매에게 또 과외를 했다. 그 집 남편은 이란으로 돈 벌러 갔다 했다. 남매의 어머니는 일단 아이들이 고등학교에 합격하는 게 최고의 소원이었다. 고등학교 합격이 걱정일 정도로 공부를 못했던 터라 필자는 맘이 급했고 급기야 스스로 짐을 싸서 그 집으로 입주했다. 아예 지키고 앉아서 아이들을 공부시키고 필자도 공부하며 밤을 새울 정도로 열정적이었다. 어디선가 함께 나이 들어가고 있겠지만 순수하고 착했던 그 아이들이 오늘따라 기억이 많이 난다. 고등학교 합격 소식이 있던 날, 아이들 어머니는 필자에게 고맙다며 겨울 외투를 사주었다. 그 댁 아이들과 아주머니의 안부가 가끔씩 궁금하다.
그 뒤로 필자는 대학 두 곳을 모두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잘 마쳤다. 어린 시절부터 해온 개인과외, 그룹과외, 입주과외는 필자에게도 많은 공부가 되었다.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공부하면서 필자 자신도 많은 실력을 쌓을 수 있었던 것이다. 대학교 4학년 때오빠들은 혼자서 잘 살아가는 필자가 기특하고 안쓰러워 보였는지 등록금을 마련해줬다. 대학 졸업식 때는 여러 가지 생각에 눈물이 앞을 가렸다. 그날 오빠들과 찍은 사진 속에서 필자는 울고 있었다. 다시 학창 시절이 돌아오면 남들 공부 봐주는 일은 하고 싶지 않다. 그 나이에 맞게 친구들과 발랄하게 웃고 떠들면서 시간도 보내고 내 공부를 더 충실히 하고 싶다.
대한민국에서 여자로 살면서 결혼 후 일과 가정생활을 병행하게 되면 그 둘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며 힘겹게 이어나가게 된다. 특히 육아 문제는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거의 불가능 하다. 우리 세대 역시 일을 병행하려면 육아는 누군가가 대신해야 주어야만 했고 그 대역은 대부분 조부모였다. 세대가 바뀌었어도 어려운 환경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맡기던 사람이 맡아주는 사람으로 역할만 바뀌었을 뿐 이다,
필자의 친구들도 손자를 봐주느라 꼼짝 못하는 친구들이 한두 명 씩 늘어나고 있다. 황혼 육아가 현실로 닥치기 전 대부분의 친구들은 ‘난 절대로 손자 봐주지 않을 거야.’ 라고 선언했었다. ‘이제야 겨우 온전히 내 시간을 가질 수 있는데 아무리 울고불고 사정해도 절대사절이야’ 라고 다짐하곤 했다. 그런 친구를 매정하다 나무라는 친구도 없었다. 그러나 황혼육아가 현실이 되었을 때 평소 소신대로 자식의 어려움을 단호히 외면 한 친구는 한 명도 없다.
육아를 대신해주기로 결정하고 가장 껄끄러운 사항이 대가를 받을 것인가의 문제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받아야 한다. 이다. 자식의 경제상황을 고려하여 합리적인 선에서 금액을 정하고 정확하게 대가를 받아야 한다.
그 힘든 육아를 맡겨 놓고 아무런 보상도 안 할 자식은 없다. 그러나 모호하게 대충 생각해서 용돈 주듯 한다면 서로 말 못하는 사이 켜켜이 섭섭함이 쌓여 갈 수도 있다.
모든 오해와 섭섭함은 주는 사람 마음과 받는 사람 마음이 서로 다른데서 생겨난다. 자칫 주는 사람은 줄 거 다 주고 눈치 보며 할 말 못한 거 같고, 받은 사람 받은 건 별로 없고 골병만 들었다는 피해의식에 빠질 수 있다.
정당한 대가를 받고 아이를 봐주기로 한 이상 보육 전문가 못지않은 보육 지식을 갖추어야 한다. 사랑으로만 키워주는 것이 아니라 준 프로 보육 자는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조부모가 육아를 대신하는 집은 육아방식에도 갈등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육아 지식으로 무장한 아이부모와 다양한 경험을 장착한 조부모의 주장이 부딪히기 때문이다. 과학적이고 정확한 매뉴얼에 따르고 싶어 하는 아이 엄마 와 ‘니들도 다 그렇게 키웠고 아무 문제없었다’ 는 할머니의 주장이 팽팽하게 맞선다. 황혼육아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하는 순간부터 보육 관련 서적과 여러 기관에서 실시하는 조부모 손자 보육 프로그램을 통하여 보육의 전문성을 키운다면 이런 갈등은 줄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 자식 사이에 냉정한 계산이 걸린다면 그 돈의 일부를 자식과 손자를 위한 기금으로 적립해도 좋을 것이다. 그 매정한 정리가 훗날 자식과 손자들이 도움이 필요할 때, 절묘하게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기금이 된다면 이 또한 얼마나 보람 있는 일이겠는가.
부모. 자식 간이라 해도 정확한 대가 정의를 통해 아이의 맡기는 사람도 맡은 사람도 서로 당당하게 자신의 교육철학 및 보육방침을 소통하고 거기에 손자 사랑 더하기를 한다면 그 안에서 아이가 사랑받고 따뜻하게 자라서 삼대가 모두 윈. 윈. 윈 할 수 있는 최상의 육아 시스템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날 고등학생 아들이 자퇴를 하고 싶다고 했다. 필자는 다른 엄마들에 비해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를 주지도 않고 아들과 대화도 많이 한다고 생각했는데 아들이 담임선생님에게 털어놓은 고민을 듣고는 깜짝 놀랐다. 엄마가 자신에 대한 기대치가 너무 높고 참견도 심하게 해서 스트레스가 많다는 내용이었다. 평소 아들에게서 느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고백이라서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는데 자퇴까지 하고 싶다고 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아이를 설득하기 위해 어떠한 잔소리와 참견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할 수밖에 없었다.
필자는 나 자신보다는 가족을 먼저 생각하고 가족을 위해 꿈 정도는 양보하고 희생하는 삶이 미덕이라고 믿고 살아왔다. 여느 엄마처럼 아이들을 생활의 1순위에 놓고 희생하며 살아왔는데, 그런 엄마 때문에 미치겠다는 아들과 마주하게 되었다. ‘그동안 무얼 위해 살아왔나?’ 억울하고 허무했다. 아들에 대한 관심을 내려놓으려면 밖으로라도 나가야 했는데, 할 줄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순간 아들에게만 매달려 살아온 너무 무능한 엄마였구나 하는 마음에 참담했다. 그때가 50세 무렵이었다.
당시의 무너져 내리던 마음과 허망함은 어디서도 위로받을 수 없었지만 그래도 의미 있는 삶을 찾으려 노력했다. 우선 필자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생각해봤다. 그러면서 블로그에 일상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필자는 여행을 즐기고 글쓰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여행 이야기를 글로 올리니 필자 이야기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필자가 주는 정보를 유용하게 활용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비슷한 관심을 가진 사람들과는 온라인뿐 아니라 오프라인에서도 즐거운 만남을 이어갔다. 또 간간이 글쓰기로 원고료도 받게 되었다.
필자는 ‘글을 써서 번 돈만큼만 여행을 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열심히 글을 썼다. 글 써서 버는 돈이라고 해봐야 한 달에 20만~30만원이 고작이었지만 어떻게 하면 흥미로운 글을 쓸까 골몰해 있는 시간이 즐거웠다. 그 돈으로 필자가 원하는 여행을 알뜰히 계획하고 실행했다. 제주항공 프로모션으로 끊은 하노이행 비행기 티켓은 9만2400원짜리였다. 정책기자단 기사 하나에 10만원이니 기사 한 편이면 해결되는 참 놀라운 가격이었다. 호텔비는 3박에 173달러, 이 비용은 서울시 소통형 플랫폼 ‘내 손안에 서울’에 쓴 기사로 받은 원고료 19만원으로 충당했다. 필자가 온전히 글을 써서 번 돈으로 떠나는 여행들은 더욱 값지고 의미가 있다. 집 안에서 온종일 무료한 시간을 보내던 2~3년 전과는 몰라보게 달라진 자신이 자랑스럽기도 하다.
요즘은 삶의 결이 달라지고 있다. “글을 쓰면서 생계를 꾸려나가기는 힘들다. 하지만 삶을 꾸리기엔 더없이 좋다.” 도리스 베츠의 말이 내 경우에 딱 맞는 말은 아니지만 글을 쓰는 삶이 나를 꿈꾸게 하고 여행하게 하고 또다시 글을 쓰게 하는 에너지를 준다.
출퇴근 시간대의 지하철은 정말 혼잡하여 마치 전투를 치르는 기분으로 타고 내려야 하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복잡한 상황에서 출입문 위에 걸려 있는 Seoul Metro의 표어가 필자를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열차와 승강장 사이는 생각보다 멀리 있지 말입니다.” 군대에서나 가끔 쓰이는 표현으로
특별한 상황이 아니면 사용하지 않는 형식으로, 도대체 멀리 있다는 말인지, 멀리 있지 않다는 말인지 문장 자체로만 보아서는 얼른 분간되지 않는다. 필자가 우리말 실력이 부족하고 새로운 감각이 없어서 그런가? 하는 의아심이 생긴다. 공사의 공익광고가 어법에 맞지 않는 문장을 사용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며 그냥 지나쳤는데, 며칠 후에 본 또 다른 표어도 비슷한 형태였다.
“먼저 내리고 나중에 타기, 안전을 위한 상식이지 말입니다.” 이 문장도 ‘상식입니다’ 하고 마치면 될 텐데 왜 굳이 ‘상식이지 말입니다.’라고 표현했는지 이해가 안 되었습니다. 근자에 와서 우리말을 제멋대로 사용하고, 쟁점이 되는 국정교과서 개정 문제에서도 우리의 역사를 너무 소홀히 취급한다는 느낌을 숨길 수 없다.
우리가 모두 다 함께 우리말과 역사를 제대로 사용하고 이해하도록 노력했으면 하는 마음과 요즈음 젊은이들의 대화를 알아들을 수 있도록, 그들이 주로 사용하는 신조어와 그 풀이를 나열해 본다:
< 많이 사용하는 신조어 >
가드 올려: ‘맞을 준비해라’또는 ‘아파도 참아라’의 의미. ‘이 앙다물어라’ 또는 ‘이 꽉 깨물어’ 등에 해당하는 형용사.
개~ : 정말 또는 완전이란 뜻이다. 예를 들면, 개 좋음, 개 꿀(정말 재밌다), 개 이득 등
검은 머리 외국인: 핏줄만 한국인, 외국 국적을 가진 한국 사람을 말한다.
개인 톡(갠 톡): ‘개인끼리 하는 게임판’을 뜻한다.
귀요미: 형용사 ‘귀엽다’라는 의미이다. 종종 명사로 ‘귀여운 사람’을 뜻하기도 한다.
귀차니즘: ‘귀찮다’라는 동사와 ~nism 이라는 접미사의 합성명사. 만사가 귀찮을 경우에 쓰이며, 귀차니즘에 빠진 사람을 귀차니스트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글설리: 글쓴이를 설레게하는 리플(답글), 설리로 줄여 쓰기도 한다.
김 여사: 운전을 잘못하는 여성을 지칭하는 말로써 여성운전자가 도로에서 쩔쩔매거나 황당한 사고를 냈을 때 쓰는 호칭이다.
깨알 같다: 무한도전에서 박명수가 ‘깨알 같은 재미를 드리겠습니다’라고 한데서 유래하였으며, 규모는 작으나 그 영향과 반응은 훨씬 큰 것을 표현할 때 사용한다.
낄끼빠빠: ‘낄 때 끼고’ ‘빠질 때 빠지라’는 뜻. 눈치가 없는 사람을 표현하는 멘트(발언).
ㄴ ㄴ: 영어 ‘NO'를 두 개 합친 ’NO, NO'(노노)의 초성으로 ‘아니다‘라는 뜻
노답: NO+답 즉, 답이 없는 답답한 사람이나 짜증 나는 문제 등을 지칭한다.
노잼: NO+재미, 재미가 없다는 의미.
눈팅: 눈으로 채팅의 줄임말. 다른 사람의 대화 글을 읽기만 하고 대화에 참여하지 않고 추천이나 리플 등의 흔적을 남기지 않고 그냥 가는 행위.
느금마: ‘너희 엄마’가 변형된 단어, 상대방의 어머니를 모욕하는 말 (너의 엄마 →너거 엄마 →느그 엄마 → 느금마)
대인배: 소인배의 반대말로 그릇이 크고 아량이 넓으며 신중하고 타인에 대한 배려가 깊은 사람을 의미
마초맨: 남자다운 남자를 뜻하거나, 대마초(마약)를 한 사람을 뜻하기도 함.
반품 남,반품 녀: 결혼했다가 이혼한 남자와 여자를 뜻함.
배사: 배경 사진
볍신: 병신이라는 단어를 순화시켜 쓰고 싶을 때 사용.
빡돌다: 화가 머리 끝까지 나는 것을 이르는 말.
빼박캔트: ‘빼도 박도 못한다’의 의미로 빼도 박도+CAN'T의 합성어.빼박으로 줄여서 쓰기도 함.
뿜다: ‘빵 터지다 ‘와 같이 웃음이 입 밖으로 크게 뿜어져 나오는 현상.
므흣하다: 흐뭇한 기분을 표현할 때 쓰이던 말이나, 점차 야한 사진을 볼 때의 기분을 표현.
이러한 신조어나 약어를 사용할 필요가 있는지 우리가 모두 깊이 생각해보고 우리말과 우리글을 사랑하는 방법에 대해서 좀 더 지혜를 모아야 되겠다는 마음이다.
영화 ‘죽여주는 여자’는 종로 일대에서 노인들을 상대로 성매매를 하며 근근이 살아가는 소위 ‘박카스 할머니’ 이야기 이다. 노인들 사이에서 ‘죽여주게 잘하는 여자’ 로 소문이 나있는 할머니가 진짜로 여러 가지 이유로 죽고 싶은 노인들을 진짜로 죽여주는 줄거리로 안락사 또는 존엄사에 대한 무거운 화두를 던지는 영화이다.
영화를 보기도 전에 이미 공개된 줄거리만 보고도 마음이 무거워지고 왠지 불편한 진실을 피하고 싶어 보고 싶지가 않았다. 그만큼 우리 시니어들에게는 마치 선전포고 하듯 우리 또는 우리 주변에 곧 닥칠지도 모를 문제이기에 더 불편하고 고통스럽게 다가온 영화였다.
주인공을 맡은 여배우도 연기하기 전에 하고 싶지 않은 마음과 해야 한다는 마음에 많이 망설였다고 한다. 언론 인터뷰에서 여배우는 어렵게 영화를 찍기로 결정하고도 촬영 내내 곤혹스러웠고 영화 완성 후에도 우울감에 헤어나기 힘들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주연 배우의 마음처럼 필자도 보고 싶지 않은 마음과 마치 숙제처럼 봐야 한다는 의무감 사이에서 망설이다 결국 막 내릴 즈음 이 영화관을 찾았다. 그리고 그 배우처럼 영화를 보는 내내 불편했고 보고 난 후에도 몹시 우울했다.
돈은 있지만 병들어 수족을 움직일 수 없는 노인, 가난하고 치매 초기 노인, 그리고 몸도 정신도 건강하고 경제적으로 여유도 있지만 고독 사를 두려워하는 외로운 노인 이렇게 세 명의 노인을 하루하루 몸을 팔아 생계를 이어가는 절대빈곤의 여자가 차례로 죽여준다.
죽여주는 사람도 죽임을 당하는 사람도 다 우리나라 노인문제를 지나칠 정도로 사실적이고 덤덤하게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는 미래에 대해 아무런 희망도 없이 연명만 하고 있는 자신의 삶을 죽음보다 고통스러워하고 품위와 자존심을 지켜주고 싶어 하는 노인들을 통해 안락사(존엄 사)에 대한 논의에 물꼬를 트고 싶어 하는 거 같았다.
그러나 영화가 지나치게 덤덤하게 존엄사로 직진하다 보니 주제전달을 위한 것이라는 것을 감안해서 봐도 심하게 말하면 살인(자살) 방조의 느낌이 강하게 들어 불쾌하기까지 하였다.
힘들고 어렵게 남아 있는 자신의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하고 있는 현재 몸이 불편하거나 가난하고 외로운 노인이 삶을 모두 너무 굴욕스럽게 만든다는 잔인함이 느껴지기까지 하였다,
아무리 노후준비를 완벽하게하고 건강관리를 잘한다 한들 절대 병들지 않고, 외롭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예견치 않은 병과 고독은 누구에게나 올 수 있다.
이런 우울한 영화를 피하기보다는 잘 죽는 법에 대하여 생각하고 현명에 맞을 준비를 하게 하는 ‘웰 다잉(well-dying)’에 대하여 생각할 기회를 가져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육체적, 정신적 건강의 통해 건강하고 삶을 유지하며 ‘웰빙(well-being)’ 못지않게 ‘웰 다잉(well-dying)’도 함께 연장선에서 생각을 해야 할 거 같다. 웰빙의 아름다운 완성은 웰다잉이기 때문이다.
대학생 아들을 둔 김성경(45), 자신감 하나는 국가대표급이다. 이것이 오늘의 대체 불가능한 방송인 김성경을 만든 원천이 되었고 그녀는 현재 아나운서가 아닌 방송인으로서 제2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자신보다 훨씬 더 강한 남자가 리드해줄 때 성적 판타지가 충족될 것 같다는 그녀는 이제야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글 이봉규 시사평론가 사진 오병돈 프리랜서(Studio Pic) obdlife@gmail.com
김성경과는 TV조선의 이란 프로그램에서 3년 이상 같이 방송을 하다 보니 너무 친해져서 오누이 같은 착각이 들 정도다. 막말로 성경이가 홀딱 벗고 덤벼들어도 아무 감흥이 없을 것 같다. 남자 친구가 생기면 곧바로 나에게 보고할 정도다. 지금은 특별한 사이의 남자친구는 없고 이 남자 저 남자 만나보고 있는 중이란다.
에서 잡힌 강한 여자 캐릭터 때문에 손해가 막심하다고 투덜댄다. 어찌하다 보니 강하고 드센 여자가 되어버렸고, 남자들이 자기를 어려워해서 잘 달라붙지 않는다는 것이다. 안 그래도 덩치가 큰데(173cm) 캐릭터까지 강하게 잡혀서 속상하다는 자기 진단이다. 실제로 그 이유로 인해 고민하다가 일시적으로 에서 하차했던 적도 있다(나중에 다시 복귀했지만).
본인은 강한 여자 캐릭터가 부담스럽겠지만 이봉규가 분석하기에는 김성경이 오히려 그 덕을 봤다. 그 덕에 아나운서가 아닌 방송인으로서 제2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고, 최근에는 영화 주인공까지 맡아 촬영에 들어갔다. 이 영화에서 김성경 역할은 드세고 강한 성격의 하숙집 주인으로, 최성국과 부부로 나온다. 만약 지금까지 김성경이 연약하고 고상한 여자처럼 억지로 꾸며왔으면 영화 주인공으로 캐스팅될 일도 없고(실제로 감독이 을 보고 김성경을 여자 주인공으로 점찍었다고 털어놨다), 방송인으로서 지금 같은 확고한 입지의 김성경은 없었을 것이다. 자기가 친언니인 김성령처럼 미스코리아(진) 출신의 엄청난 미인도 아니면서 복에 겨워 투덜댄다.
아마 남자들이 못나서 김성경을 잘 다루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봉규의 심야데이트’를 위해 인터뷰하는 날 김성경은 “내가 아무리 강한 척해도 그걸 좋게 귀엽게 봐주는 남자가 드물다”고 털어놓는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자기를 무섭게 여긴다는 것이다. 또박또박 자기주장을 펼치면 강하고 드센 여자로 보고 부담스러워 도망간다는 푸념이다. “남자들의 자격지심이냐?”라고 나에게 쏘아붙인다. 그녀 말이 맞는지도 모르겠다.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겪은 한량 이봉규도 김성경을 가끔 무섭게 느낄 때가 있으니까 얌전하고 젠틀한 남자들은 김성경 앞에 서면 주눅이 들어 도망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의미에서 돈 많은 남자도 괜찮을 것 같기도 하다”고 김성경은 진단한다. 돈이 많으면 자격지심 같은 것은 없을 테고 뭔지 모르게 당당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강한 여자에게 오히려 매력을 느낄 수도 있겠다. 실제로 언니 두 명 다 돈 많은 남자들과 결혼해서 행복하게 잘살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간접적인 영향도 받았을 것이다. 둘째 언니인 톱스타 김성령의 남편은 부산에서 알아주는 준재벌급의 사업가이고, 첫째 언니의 남편은 대형 종합병원 부원장이라 돈 걱정 안 하면서 아주 잘살고 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형부 둘 다 언니들에게 꼼짝 못하고 산다고 하니 김성경은 “돈 많은 남자들이 자격지심 같은 것은 없고 오히려 마음이 여유로울 것 같다”는 판단을 할 수도 있겠다.
‘성적 판타지(sexual fantasy)’를 물으니 아이러니하게도 남자가 자기를 벽에 강하게 밀치고 키스 세례를 퍼붓기를 원한다고 하니 어쩌면 강한 여자의 콤플렉스일지도 모른다. 자신보다 훨씬 더 강한 남자가 리드해주길 원하는 것일까? 고전 영화 에서 율 브린너가 데보라 카를 강하게 리드했듯 그런 판타지를 꿈꾼다고 말하는 김성경의 눈빛이 간절하다. 영화 에서 데보라 카는 정숙하고 우아한 영국 여인이다. 김성경도 데보라 카에 자신을 대입시키고 싶은 마음일까? 하여간 영화에서 데보라 카는 다소 거칠고 자기밖에 모르는 왕(율 브린너)과 사사건건 충돌하지만 그러는 사이 왕에게 묘한 애정을 느낀다.
참고로 이봉규가 보기에는 세 자매 중 첫째 언니가 영화의 여주인공 데보라 카와 가장 닮았다. 그리고 세 자매 중 첫째 언니가 가장 매력적으로 생겼다. 그다음이 성령이고 성경이 인물로는 제일 처진다. 물론 이봉규(나름 고수)의 판단이지만 김성경은 자기가 제일 예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내가 미스코리아 대회에 안 나간 것은 언니가 진으로 뽑혔기 때문에 더 이상 할 것이 없어서”라고 큰소리친다. 자신감 하나는 국가대표급이다. 이것이 오늘의 대체 불가능한 방송인 김성경을 만든 원천일 것이다.
김성경은 어려서부터 어머니의 각별한 사랑으로 자신감 넘치게 살아왔다. 지금도 어머니는 성경이를 세 딸 중에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예쁜 언니들보다 자기 할 말 거침없이 다 해대면서 강한 여자로 방송하고 강연 다니는 막내딸이 자랑스럽다. 어머니는 종갓집의 둘째 며느리로서 내리 딸을 두 명 낳고 셋째는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고 시집에서도 은근 압박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마침 태몽도 좋아서 아들인 줄 확신했는데 또 딸이 태어나니까 아빠는 실망해서 담배만 뻐끔뻐끔 피우고 아무 말이 없었다고 한다. 그때 어머니는 “열 아들 부럽지 않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를 했다. 어머니의 기도가 현실로 이루어졌으니 대견스러움을 넘어 자랑스러워할 만도 하다. 어머니는 성경이 태어나고 세 번 놀랐다고 한다. 당연히 아들이라고 생각했는데 딸이 나와서 놀랐고, 진통도 없이 쑥 순산해서 놀랐고, 구정 날에 태어나서 놀랐다고 한다. 태어나면서부터 가족들을 놀라게 했으니 강한 캐릭터를 가진 것도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강한 여자인 그녀의 인생이 늘 씩씩하고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이혼의 아픔도 겪었고 혼자 힘으로 아들 키우기가 쉽지는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에서도 밝혔듯이 이혼 이유가 남편의 외도 때문이었으니 그 아픔이 남다를 수 있다. 짓궂은 멤버들의 이혼에 관한 질문 공세에 김성경은 쿨하게 대답했다. “10여 년도 더 된 이야기다”라며 “처음에는 성격 차이였다”면서 “하지만 주변에서 ‘여자가 있을 것이다’라는 말을 해줬고, 결국 확인했다”고 방송에서 털어놨다.
그러나 “그 상황에서 이상하게 크게 화가 나지 않았고 그냥 쿨하게 보내줬다”고 한다. 그녀는 한술 더 떠서 “내가 먹고살려고 이런 이야기까지 해야 하나 싶어 방송 중에 울었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나 강한 여자인 그녀도 이혼의 아픔과 혼자 아들을 키워온 자신의 인생 스토리에 눈물이 저절로 나올 법하다. 다행히 아들이 잘 자라주었다. 지금 뉴욕대(NYU)에서 커뮤니케이션을 전공하고 있다. 아들이 대학을 가니까 홀가분해진 느낌이라고 말한다. “예전에는 지성과 미모를 숨기고 살았는데 이제 아들도 잘 키웠으니까 스스로 자신이 자랑스럽다”고 금방 분위기가 뜬다. 이게 김성경의 캐릭터이고 그녀만의 독특한 매력 포인트다.
그녀가 자랑할 만도 한 것이 아들은 남의 나라 말로 그 어려운 공부를 하면서도 엄마의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기 위해 레코드 가게에서 알바하려고 인터뷰 신청을 해두었단다(지금쯤이면 일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도 미국 유학의 경험이 있지만 첫 학기 때는 학업 스케줄을 따라가기가 보통 어렵지 않다. 첫 학기부터 알바를 하려고 마음을 먹는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효심이고 아들 또한 엄마를 닮아서 자신감이 넘친다고 봐야 한다.
아들은 그녀에게 “엄마 왜 결혼 안 해? 앞으로는 내 생각 말고 엄마 행복만 생각하고 좋은 남자 만나서 결혼해!”라고 입버릇처럼 주문을 한다니 대견스럽다. 그녀 생일에 아들에게 온 카톡을 읽으니 가슴이 뭉클해진다. 이 글을 쓰는 데 참고만 하겠다고 내 카톡으로 전달해달라고 부탁해서 겨우 받아냈다. 그녀에게 허락도 받지 않고 지면에 그대로 옮긴다. 나중에 분명 강한 여자 김성경에게 야단을 맞을 게 뻔하지만 절친 오빠인 이봉규만 보기 아까워서 소개한다.
엄마 생일축하해요! 너무나도 감사하고 지금까지 계속 나를 믿고 이해해주셔서 감사해요. 제가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은 다 엄마 덕분이에요. 엄마 때문에 더 노력하고 더 열심히 하고… 저한테 그럴 수 있는 힘이랑 Motivation을 주셔서 너무나도 감사해요! 제가 힘들 때도 있고 엄마도 힘들 때도 있겠지만 둘 다 서로를 사랑하고 도와주는 우리 모자 사이, 전 이런 게 있는 게 너무나도 기쁘고 감사해요. 이런 엄마를 가질 수 있게 해주신 할머니 할아버지도 감사하고, 하늘에 계신 아빠도 너무 감사해요. 제가 지금 곁에 있지 못하는 게 너무나도 안타깝지만 저의 마음과 생각은 바로 거기에 있어요. 엄마가 저한테 힘을 주시는 것처럼 저도 엄마한테 힘이 됐으면 좋겠어요. 생일 축하해요, 사랑해요~~~
대학교 1학년의 아직 어린 나이인데 참 대견스럽다. 그 아들의 바람대로 앞으로 강한 여자 김성경을 벽에 화끈하게 밀치고 키스 세례를 퍼부을 멋진 남자가 나타나길 고대해본다. 그때는 이 오라비가 그놈의 발바닥을 사정없이 다디미 방망이로 후려칠 것 같다.
그녀 아들의 바람대로 앞으로 강한 여자 김성경을 벽에 화끈하게 밀치고 키스 세례를 퍼부을 멋진 남자가 나타나길 고대해본다. 그때는 이 오라비가 그놈의 발바닥을 사정없이 다디미 방망이로 후려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