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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원식이 만난 귀촌(귀티나는 촌사람)] 경남 하동, 지리산 기슭에 사는 조동진씨 부부 "노후 직업으로 농사보다 이상적인 게 다시 있으랴"
- 박원식 소설가 구불구불 휘며 아슬아슬 이어지는 가파른 비탈길의 끝, 된통 후미진 고샅에 준수한 한옥 한 채가 있다. 집 뒤편으로 세상의 어미로 통하는 지리산 준령이 출렁거리고, 시야의 전면 저 아래로는 너른 들이 굼실거린다. 경남 하동군의 곡창인 악양면 평사리 들판이다. 광활한 들 너머에선 섬진강의 푸른 물살이 생선처럼 퍼덕거린다. 호방하고 수려한 산수 풍광을 한눈에 쓸어 담을 수 있는 요지(要地)에 터를 잡은 셈이렷다. 증권사 지점장 출신인 조동진씨(58)가 동갑내기 아내 고미선씨를 대동하고 이곳 지리산 자락으로 귀촌을 한 건 9년 전의 일이었다. 사람들은 흔히 지리산을 애호한다. 지리산의 너그러운 품에 병아리처럼 포근하게 안겨 오순도순 오붓하게 살아갈 꿈을 꾸기도 한다. 조동진씨가 그랬다. 서울에서, 분당에서, 증권맨으로 뛰었던 그는 휴가철이면 매번 지리산을 찾았다. 그렇게 지리산과 교제를 하는 사이 담뿍 정이 들었다. 그 대상이 사람이건 자연이건, 정 들어 사무치게 그리우면 투신하게 마련이다. 나, 퇴직하면 지리산에 살래! 그는 그렇게 안으로 다지고 밖으로는 광고를 했던 것 같다. 그러다가 마침내 일을 저질렀다. 인생의 항해를 결정하는 것은 바람이 아니라 돛이다. 대양의 바람은 한 곳에서 불어오지만 돛의 향방에 따라 어떤 배는 동쪽으로 가고, 어떤 배는 서쪽으로 간다. 조동진은 의지의 돛, 지향의 눈을 돋워 지리산 산골을 겨누었던 것이다. 사연의 보따리를 헤쳐 볼까. “악양의 산자락에 있는 감나무 과수원 3306㎡(1000평)를 미리 사들이는 것으로 거사를 도모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들은 대충 다 컸겠다, 아내만 끌고 내려가면 되는 상황이었어요. 그런데, 아내가 손사래를 치더라고요. 집사람이 원래 도회적 성향이라서 시골살이에 아무런 매력을 느끼질 못했던 겁니다. 세뇌교육에 들어갔죠.(웃음) 그러던 중 아내가 원인 미상의 중한 폐질환에 걸렸습니다. 의사들이 말하길 현대의학으로는 고칠 수 없는 병이라 하더군요. 그렇다면 이걸 어떡하나. 그래, 자연요법으로 고쳐보자. 이왕지사 땅도 사놨으니까 산골로 가자. 그렇게 아내와 합의를 보고 드디어 시골살이를 시작하게 되었던 겁니다.” “지리산의 그 무엇이 그렇게도 좋았을까?” “제가 실은 대학을 다닐 때부터 지리산에 살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었는데요, 그 웅장한 풍경에 사로잡혔던 것 같아요. 게다가 저는 바닷가에 가면 힘이 쭉 빠지는 반면, 산에 가면, 특히나 지리산에 가면 힘이 난다는 걸 자주 느꼈어요. 체질적으로 기질적으로 잘 맞는 거겠죠.” “한옥이 매우 근사해요. 저토록 야무진 한옥을 지은 특별한 이유가 있겠죠?” “아내의 폐질환을 다스리기엔 한옥이 유리하다는 생각이었어요. 황토와 목재를 재료로 한 한옥은 숨 쉬는 집이라 하죠. 그러나 남들에겐 권하고 싶지 않습니다. 건축비가 너무 많이 들고, 공기(工期)도 길고, 관리도 힘드니까.” “저는 말이죠, 이왕에 산골의 자연과 야생을 벗 삼아 살 거라면 작고 소박한 집을 짓는 게 마땅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왜 아니랴. 동감입니다. 그저 값싸고 편리한 현대식 집을 짓는 게 좋을 겁니다. 다만, 사랑채 정도는 제법 운치를 풍기는 작은 흙집을 짓는 것도 재미날 거예요.” 조동진씨의 거처 한편엔 나무로 골격을 세우고 흙으로 벽을 쌓아 지은 사랑채가 있다. 누각이 딸려 있는 소담한 별채로 조씨가 손수 설계해 지었다. 여자로 치면 음전하면서도 은근히 요염한 멋을 풍기는 가인을 닮은 집이다. 부부가 수시로 눈을 맞추며 단란하게 속닥이는 데에 사랑채의 용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멀고 가까운 곳에서 찾아드는 벗들과 마주앉아 술잔을 기울이는 일에도 쓸모가 많겠지만 말이다. 농사일은 노동이 아니라 축제 조씨의 섬세한 조력과 자연의 협찬 덕분일 테지. 다행스럽게도 아내의 병증은 현저하게 개선되었다. 난생 처음 경험하는 시골 생활이지만 마을 주민들과의 관계에도 아무런 흠결이 없다고 한다. 감 농사도 순항이다. 한적한 산골에 입장했으니 그저 한가하게 노닥거리며 자연을 즐기면 그만일 성 싶지만, 조동진씨는 농사일이 오히려 구미에 맞다. 애초에 사들인 땅이 감 과수원이었기에 자연스럽게 감 농사에 뛰어들 수 있었다. “노후의 직업으로 농사처럼 이상적인 게 없습니다. 정년퇴직 없지, 누가 간섭하지를 않지, 적당한 육체노동으로 건강을 챙길 수 있지, 정직하게 땀 흘리는 농사일은 단순히 노동이 아닌 축제에 가까워요.” “세상에서 가장 못 믿을 직업이 농사라고들 해요. 벌이가 되질 않는다는 거죠.” “저도 경제적인 면에 관한 두려움이 많았지만 적절히 극복해 왔어요. 2314㎡(700평) 규모의 감 농사를 지어 곶감이나 감식초를 만들어 판매를 하는데 연간 1200만원에서 1500만원 정도의 수익을 올립니다. 그 정도면 무난해요. 시골에선 말이죠, 골프 할 일 없지, 노래방에 가서 도우미를 부를 일 없지, 수입이 적더라도 지출을 줄일 수 있어 생각보다는 여유를 부릴 여지가 많습니다.” 흔히 귀촌과 귀농을 구분해서 선택을 하거나 판단을 한다. 조동진씨는 라는 책을 펴내기도 했다. 성공한 귀농인 사례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고 농사에 목을 걸다시피 들입다 땅을 파는 인물은 아니다. 농사에 생활의 한 자락을 걸침으로써 한결 뿌듯한 실속과 실리를 구할 수 있다는 이치를 터득했을 뿐이다. 그의 시골살이 촉이 이렇게 살아 있다. “제 경우는 귀농을 가장한 귀촌인이라 봐야 정확할 겁니다. 그저 작은 텃밭을 일궈 소소한 먹거리를 거두는 귀촌 생활도 즐겁겠지만, 농사를 통해 수익을 창출하는 것도 신나는 일입니다. 남자는 퇴직을 했더라도 명함이 있어야 해요. 992㎡(300평) 이상의 농사를 지을 경우엔 누구나 명함을 만들 수 있어요. 일테면 ‘지리산 농원 대표이사’라거나, 그런 식으로 떠억 명함을 새길 수 있는 거예요(웃음). 992㎡(300평) 정도의 농사만 지으면 농업인 등록을 할 수가 있으며, 온갖 지원을 받을 수도 있는데, 그걸 왜 마다할까? 가급적 농업인 자격을 획득하라고 권장하고 싶습니다. 한 달에 하루만 일해도 폼 잡을 수 있는 게 농사에요. 시골에선 말이죠, 하는 일 없이 늘 술이나 마시고 돌아다니면 욕먹습니다. 그러나 농업인으로서 일을 할 경우엔 술을 퍼마셔도 욕먹을 일이 없어져요.” “사전에 열심히 귀농교육을 받고 입촌한 사람들마저 실패하는 경우가 많은 게 현실 아녜요?” “도시 인구를 분산하고, 실업을 해소하고, 도농격차 해결을 위해 정부에서 농촌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이려는 갖가지 지원 정책을 펼치지만, 사실 허점이 아주 많습니다. 귀농교육이랍시고 억대 수입이니, 특작물이나 유기농을 운운하며 과도하게 분위기를 띄우지만 사실 허황한 얘기들에 불과해요. 가령, 농사 경험이 없는 사람이 유기농에 도전하는 건 독립운동을 하는 것처럼이나 어렵고 위험합니다. 제가 힌트를 하나 드리죠. 특수작물이나 유기농을 요란하게 하려 하지 말고, 그 지역의 특산물을 하라는 것! 그래야 생산이나 유통의 이점을 누릴 수 있으며, 원주민들과의 소통도 빨라져요.” “빈손으로 귀촌할 경우엔 어떤 재주를 발휘해야 하죠?” “도시에서는 움직이면 돈이 나가지만 시골에선 움직일수록 돈이 들어옵니다. 극단적으로 말해 양육할 자녀가 없이 부부만 귀농할 경우, 빈손으로 시작해도 무방해요. 퇴직을 한 시니어라 할지라도, 어느 정도의 건강만 있다면, 자세를 낮출 수 있다면, 늘 일손이 부족한 농촌에서 일당 10만원짜리 일감을 찾는 건 일도 아니니까. 한 달에 열흘만 날품을 팔아도 그럭저럭 먹고살 수 있는 겁니다. 문제는 겸손한 마음, 열린 태도이겠죠. 퇴직을 뜻하는 리타이어(retire)는 ‘타이어를 교체한다’는 의미 아니겠어요? 은퇴 뒤 시골에서 살고자 한다면 마음 자체를 싹 바꿔야 합니다. 돈보다는 마음의 행복과 즐거움을 구하는 쪽으로 삶의 잣대가 변해야 하는 거죠.” 시골에서 오히려 진정한 문화생활 누려 사람들은 흔히 시골의 문화적 환경이 열악할 것으로 믿는다. 갖가지 공연과 전시회 따위가 펼쳐지는 도시를 벗어나 시골에 살다 보면, 그저 주야간에 앞산만 멍하니 바라보다가 자칫 우울증에 빠지지나 않을까 걱정한다. 조동진씨에 따르면 이는 미신에 가깝다. “서울에서 공연 구경을 가는 건 어쩌다 한번 아닐까? 공연물이 많다지만 막상 향유하긴 어려운 게 도시살이에요. 요즘의 시골엔 지역축제나 산사음악회 같은 문화 행사가 잦습니다. 아이돌 가수에 밀린 7080 가수들까지 대거 참여해요. 저는 이곳 공연장에서 소찬휘라거나 김재동 같은 연예인들을 처음 봤어요. 게다가 관람료는 전적으로 무료에요. 뒤풀이엔 술과 음식이 푸짐하게 나오고요.” “풍부한 상상력으로 바라본다면 산야 자체가 뮤지엄이겠죠.” “제가 도시에 살며 열네 번이나 이사를 했어요. 이사 때마다 고려한 게 창밖으로 달을 볼 수 있느냐는 점이었어요. 여기 산골의 달밤은 얼마나 좋은지요. 사랑채 정자에 앉아 달빛 흥건한 마당을 바라보며 술 한 잔을 하는 일은 최상의 낙입니다. 달 없는 밤엔 별들이 허공에 모이죠. 때로 반딧불이가 공연을 하고, 빗소리가 악곡을 연주하고, 사시사철 모든 풍경이 장관입니다. 뒷산의 야생화들이 뿜는 향기의 잔치는 또 얼마나 행복한지요. 이 다양한 자연 현상들이 명약이자 보약입니다. 시골엔 의료시설이 빈약하다는 소리들이 있지만, 제 아내가 병을 다스린 걸 보면, 저 산야 자체가 하나의 병원이라는 실감을 할 수밖에 없어요.” “앗! 시골 예찬이 극에 달하셨다(웃음). 도대체 아무런 불만이 없는 거예요?” “제가 외환위기 때 쫄딱 망해 시장에서 전을 벌리고 옷을 팔기도 했어요. 박수를 치며, 싸요, 싸요! 외치면서요. 그런 고통의 시절을 겪은 게 인생의 디딤돌이었습니다. 돈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행복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걸 나름 깨달았어요. 그러하니, 제가 원해서 들어온 산골에서 무슨 불만이 있겠어요? 이제 제가 해야 할 일 하나가 남았는데요, 귀촌을 희망하는 은퇴자들에게 뭔가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해서, 최근 지리산웰빙귀농학교라는 걸 세웠어요. 대차게 밀어붙일 참입니다(웃음).” 10년 가까이 흐른 시골 생활을 통해 조씨는 어언 선수에 이르렀나? 귀촌에 관한 낙관과 긍정에 경계가 없구나. >> 박원식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등의 저서가 있다.
- 2016-09-28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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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가 만난 사람]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불교학부 김성철 교수
- 그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요즘 어린 친구들이 쓰는 말로 표현하면 ‘성공한 덕후(마니아)’ 같다고. 다른 분야가 아닌 ‘불교 덕후’. 그러자 웃으며 그가 화답했다. “맞아요. 덕후는 나쁜 표현이 아니에요. 결국 한 분야에 능통하고 깊은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 미래를 주도하며 세상을 바꿀 거예요.” 이렇게 스스로를 덕후라 말하고 있는 그는 바로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불교학부 교수이자 치과의사이기도 한 김성철(金星喆·58) 교수다. 글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사진 오병돈 프리랜서(Studio Pic) obdlife@gmail.com “들었어? 남일이가 죽었대. 숙명여고 애들이랑 대성리에 갔잖아. 물에서 못 나왔대.” 서울고등학교 1학년 학생 김성철은 친구의 죽음이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남일이와 같은 미술반이었던 그 역시 그곳에 있어야 했다. 하지만 여학교 클럽과의 비공식적인 교류는 학교에서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동행하지 않았다. 그저 혼나는 것이 겁이 났기 때문에. 처음엔 무덤덤했다. 그저 교실에 빈자리 하나만 눈에 띌 뿐이었다. 죽음이라는 것이 실감나지 않았다. 그 사고로 인해 그해 여름방학에 떠난 학교 해양훈련은 엄격해졌다. 선생님들은 안전사고가 생길까 노심초사하며 엄하게 감시를 했다. 아이들은 수군거렸다. 모처럼 신나고 재미있어야 할 행사가 힘들기만 한 것이 죽은 남일이 때문은 아니냐고. 그런 일들을 겪으며 어린 김성철은 조금씩 죽음이라는 것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죽음이라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구나 하고. 김 교수는 당시를 회상하며 이렇게 표현했다. ‘마음의 병’이 시작된 것은 그때부터였다고. “그렇게 마음이 무거워지면서 무작정 책을 보기 시작했어요. 사춘기 소년이었으니까. 알베르 카뮈의 이나 장 폴 사르트르의 와 같은 실존주의 문학 작품들이었죠. 또 엠마누엘 칸트의 같은 철학책들도 있었어요. 뜻도 잘 모르는 책들을 닥치는 대로 읽었죠.” 화가가 되고 싶었던 소년 사실 미술반에 들어갔던 것은 화가가 되고픈 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시절 화가를 꿈꾸는 모든 소년, 소녀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 역시 가족에게 그 꿈을 털어 놓는 것은 쉽지 않았다. 치열한 시대의 평범한 사람들에게 ‘놀고먹는’ 예술에 대한 꿈을 이야기하는 것은 ‘죄악’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좋은 학교에 어려운 시험을 거쳐 들어간 우등생이었기에 주변의 기대를 한몸에 받고 있었다. 고3이 된 김성철 학생은 이과인 전공에 미술이라는 취미를 덧대려면 건축학과가 좋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건축이라면 그림에 소질 있는 손재주도 살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손재주에 대한 담임선생님의 생각은 좀 달랐다. 선생님이 추천한 것은 ‘치과대학’이었다. 그 추천에 반감이나 저항은 없었다. 무엇보다 치과의사가 되면 근무시간이 짧다는 것이 매력이었다. “치과를 하는 친구는 늦게 출근해서 오후 일찍 퇴근한데, 그리고 골프 치러 간다더라”라는 어느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나머지 시간에 그림을 실컷 그리면 되겠다 싶었다. 그림을 그리며 먹고살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니 일석이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그는 큰 고민 없이 서울대학교 치과대학에 입학했다. “치과대에 입학해서도 그림 그리기는 멈추지 않았어요. 학교에서 그림에 관심 있었던 친구들과 함께 아틀리에를 차렸어요. 대학 입학 후 우리가 다니던 화실에 매달 내는 돈만 모아도 월세 정도는 해결할 수 있었거든요. 그렇게 2년을 열심히 그렸어요. 학교가 있는 서울 관악구 봉천동에서 시작해서, 전공이 다른 친구들 때문에 서대문구 북아현동까지 4번을 옮겨 다녔어요.” 마음의 병에 해답을 얻다 김 교수는 그 와중에서 가슴 한편에 풀리지 않는 무엇이 있었다. 바로 친구의 죽음에서 비롯된 마음의 병이었다. 그러다 만난 것이 이다. 밀교사상과 선종 사상을 설한 대승경전으로, 그는 이 경전을 읽다 죽음에 대한 의문이 조금씩 풀려가는 것을 느꼈다고. “책에서 변치 않고 죽지 않는 것은 무엇이냐는 파사익(波斯匿)왕의질문에 부처는 이렇게 대답해요. 저 흐르는 강의 모습이 어릴 때와 지금이나 차이가 없듯, 그대 역시 외모는 바뀌었지만 보는 성품은 그대로라고. 원래의 나는 멸(滅)함이 없다는 설명을 듣고 하나의 깨달음과 함께 불교 교리에 대한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허겁지겁 불교에 관한 책을 독파하기 시작했다. 그의 ‘덕후’적인 기질이 발휘된 것이다. 그래서 시중에 출판된 불교 관련 책들을 읽어 나가기 시작했는데, 문제가 생겼다. 더 이상 읽을 만한 책이 없었다. 서점에 나와 있는 책들을 다 읽고 나니 불교에 관해 더 깊이 알 수 있는 책을 구할 수 있는 곳은 국내에 단 한 곳뿐이었다. 불교학의 요람이라 할 수 있는 동국대학교 도서관. 그 도서관을 편하게 들락날락하기 위한 단 하나의 방법은 동국대학교 학생이 되는 것뿐이었다. 불교연구원을 설립한 이기영(李箕永) 교수의 강의를 청강까지 했지만, 그것 가지고는 성에 차지 않았다. 그래서 1987년 동국대학교 대학원에 입학했다. 이 교수가 있었던 인도철학과였다. “치대에서 만난 아내는 처음에 이해를 못했어요. 책 때문에 대학원에 가다니. 그것도 치과의사가 인도철학과에 말이죠. 그래도 2년만 기다리면, 그 이후에는 마음껏 도서관을 다닐 수 있으니 참아 달라고 부탁했죠. 처음엔 학부 출신 학생들에 비해 많이 모자랄 것 같아 걱정했는데, 별 차이가 나진 않았어요. 알고 보니 제가 닥치는 대로 읽었던 책들이 대부분 불교학과 학부생들의 교과서였어요.” 그렇게 대학원을 다녔다. 하지만 불교라는 학문에 대한 갈증은 더 커지기만 했다. 그런 그의 마음을 읽기라도 했는지 아내는 이번에는 선선히 응해줬다. 박사과정에 입학했다. 당시엔 이미 치과를 차려 개원한 상태였기 때문에, 치과의사와 박사과정 대학원생이라는 두 가지 신분을 유지하게 됐다. 번역서 통해 불교학계에서 ‘주목’받다 그가 불교계에서 이름이 알려지게 된 것은 그가 번역해 1993년에 발표한 이라는 책 덕분이었다. 은 나가르주나(중국에서는 용수(龍樹)라 불림)라는 1800년 전에 활동한 인도의 고승이 쓴 책으로, 나가르주나가 쓴 책들은 대승불교의 뿌리가 된다. 은 인도철학, 불교철학에 있어 매우 중요한 책이지만, 그동안 이 책은 제대로 번역돼 국내에 소개되지 않았었다. 그가 번역하기 전까지. “일반 불교학과는 일본어 정도만 할 줄 알면 됐지만, 인도철학과는 산스크리트어와 티베트어까지 할 줄 알아야 했어요. 영어는 기본이고. 그런데 기대 이상으로 언어를 익히는 것을 잘해서, 그간 번역이 안 된 책들을 읽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내가 불교계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이란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가장 먼저 시작한 것이 입니다. 산스크리트어로 씌어진 원전을 직접 번역하고, 주석을 달아 다른 학자들이 원전과 비교하며 연구할 수 있도록 해놓았죠.” 어쩌면 이 선택도 가장 ‘덕후’다운 방법이었다고 할 수 있을까. 여하튼 그동안 국내의 많은 불교학자들이 해내지 못했던 일을 현직 치과의사가 이뤘다는 점에서 불교계는 주목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1995년 대승불교의 공(空) 사상을 체계화한 개론서인 을 번역해 다시 세상에 내놓는다. 인도의 불교학자 무르띠(Murti)가 영어로 저술한 책이다. 그리고 내놓은 세 번째 책 으로 학계의 찬사를 받게 된다. 은 중론을 쓴 나가르주나가 에 대한 비판을 반박한 책이다. 이 책은 현재 산스크리트어 원전과 티베트역본, 한역본이 남아 있는데, 김 교수는 이 3가지 언어를 각각 우리말로 번역해 정확한 뜻과 번역의 배경을 알 수 있게 했다. 물론 후학을 위한 문법적 해설도 잊지 않았다. 3가지 책에 대한 번역이 끝나 있을 때, 그는 이미 불교학계에서 ‘불교에 관심 있는 치과의사’가 아닌 ‘불교학자’로 인정받고 있었다. 치과 폐업하고 대학으로 박사과정을 마치고 나서 그가 준비한 것은, 치과를 쉬고 인도로 유학을 떠나는 것이었다. 불교 발상지에 가서 좀 더 깊은 공부를 하고 싶은 학문적 욕심이 있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불교학에 대한 욕심’을 멈추게 만든 것은 가족도 치과도 아니었다. 바로 동국대학교였다. “제가 전공한 공(空)사상 분야의 전공교수님이 건강이 나빠져 퇴직하셨다면서, 그 강의를 맡아 달라고 제안이 왔어요. 사실 그 분야는 논리학과 수학이 바탕이 되어야 해서, 일반 불교학자들 중에도 능통한 사람은 많지 않았거든요. 그것을 인연으로 그때부터 지금까지 쭉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어요. 물론 치과는 그만뒀고. 단지 강의를 나가는 것이 아니라 치과의사로, 그리고 서울에서의 삶을 포기하는 것이었지만 주저함은 없었어요.” 공사상은 의 ‘색즉시공’을 떠올리면 쉽다. 물질이 곧 비었고 빈 것이 곧 물질이니 감각과 생각과 행함이나 의식이 이와 같다는 뜻이다. 흔히 공(空)을 무(無)와 혼동하기 쉬운데, 공(空)은 아무것도 없다는 무(無)와는 완전히 다른 개념이다. “흔히 우리가 살면서 큰방, 작은방 이런 표현을 하죠. 하지만 어떤 방을 보고 큰방이라고 부를 땐 이미 우리 기준엔 비교할 수 있는 방이 들어서 있는 거예요. 그런 이분법적 생각이 우리를 힘들게 하죠. 게다가 요즘의 승자가 독식하는 신자유주의는 이것을 더욱 부추겨 우리 삶을 어지럽게 하고 있어요. 늘 비교당하고, 경쟁하는 삶 말이에요. 이 신자유주의는 하나의 경제 원리일 뿐인데 우리는 이것을 행정과 교육, 문화에까지 도입하고 있어요. 예를 들어 나 같은 프로그램을 보세요. 예술을 도구로 경쟁하고 있잖아요. 그 프로그램을 통한 폐해가 여실히 드러나죠. 결국 크게 소리 지르며, 성량이 큰 사람이 이기는 구도로 변질되잖아요. 노래라는 예술이 큰소리를 내는 시합이 아닌데, 경쟁을 통하다 보니 결국 획일화되는 것이죠.” 이런 사회적 변화 속에서 가장 외면 받고 있는 세대 중 하나가 바로 시니어들이다. 육체적 수명은 점점 길어지는데, 성과주의로 인해 설 곳을 잃고 사회적 수명은 짧아졌다. 그들에게 김 교수는 어떤 이야기를 해 주고 싶을까? 죽음에 대한 공포도 나름의 노력과 수행이 더해진다면 극복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이타적인 삶을 사세요. 우리는 기본적으로 종족을 보전하고자 하는 본능이 있는데, 자식이 아닌 다른 사람을 돕는 것도 일종의 종족 보전 본능이에요. 나라는 개체를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동족을 보존하면서 그 욕구가 충족되는 셈이죠. 거기에 수행을 통해 내가 이 우주의 중심이라는 깨달음을 얻게 되면,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아울러 하고 싶은 일을 맘껏 할 수 있는 제2의 삶을 살 수도 있고요. 모든 것이 공하다는 것을 머리로 깨닫고, 수행을 통해 마음에서 욕심, 분노, 교만과 같은 번뇌를 지울 수 있다면 가벼워진 스스로를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빈자리 채워가며 기여하고파 앞으로 그의 목표는 한국 불교학에서 필요한 부분을 채워나가는 것이다. 그가 그동안 번역서들을 내놓으면서 기여했던 것처럼. 그가 2014년에 내놓은 같은 책들이 대표적이다. 그는 이 책을 통해 진화생물학, 일반적으로 종교와 대립각을 세운다고 여겨지는 ‘진화론’을 불교적 관점에서 해석했다. 최근 각광받는 뇌과학도 불교적 관점에 분석해냈다. “뇌과학에서 밝혀내지 못한 마지막 키워드는 바로 ‘마음’이에요. 뇌파나 뇌의 기능에 대해서 뇌과학자들은 많은 연구결과를 내놓았지만 ‘마음’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못하고 있죠. 하지만 불교적 관점에서 접근한다면 과학적 연구 결과를 모두 포용하면서 마음이나 윤회(輪廻)까지 설명할 수 있어요. 그게 불교학의 힘이죠.”
- 2016-09-28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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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을 부탁해 PART8] “잠꾸러기로 만들어 주겠어!”
- 불면증의 시대다. “나는 불만 끄면 잔다”는 행복한 사람은 요즘 찾기 힘들다. 특히 전체 불면증 환자의 68%가 50세 이상이라는 기사로 미뤄봤을 때 독자의 수면시간도 안녕하지는 못할 듯하다. 그래서 준비했다. 잠들지 못하는 ‘가련한 영혼’을 잠의 신세계로 빠뜨려 줄 아이디어 상품! 글 권지현 기자 9090ji@etoday.co.kr 기능성 베개, 잠의 질을 바꾸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최근 5년간(2009~2013) 디스크 진료현황 자료를 분석했다. 그 결과 목디스크 환자가 약 70만 명에서 90만 명으로 근 30%나 늘었다. 과거의 목디스크는 보통 노화가 시작되는 40~50대에나 오는 퇴행성 질환으로 여겼다. 지금은 과도한 스마트폰과 노트북 사용 혹은 익스트림 스포츠에 의한 부상으로 20~30대에서도 나타나는 흔한 병. 따라서 목 건강, 더 나아가 잘못된 습관이 가져다 준 틀어진 몸의 균형을 잡기 위해 기능성 베개에 대한 관심이 높다. 인터넷 검색창에 ‘기능성베개’라고만 쳐도 다양한 모양과 가격의 베개가 시선을 끈다. 그중 가장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두 제품을 소개한다. 바로 전문물리치료사출신이 개발한 ‘가누다 베개’와 자생한방병원이 개발한 ‘자생추나베개’다. 소지섭 베개로 유명한 가누다 베개 ‘몸과 마음을 가다듬어 균형 있고 편안하게 잘 가누다’라는 의미의 가누다 베개는 배우 소지섭이 광고모델로 등장해 더욱 유명해진 베개다. 가누다 베개는 두개천골요법이라는 도수치료법을 응용해 만들었다. 인체의 두개골 구조와 뇌척수액의 흐름을 기초로 바른 수면자세를 도와주는 것. 전문물리치료사가 할 수 있는 도수치료기법(손으로 직접 치료하는 기술)인 후두두개골기저부이완법(목덜미를 풀어주는 기술)과 제4 뇌실압박법(CV4효과: 뒷머리를 지긋이 눌러주는 기술) 등을 응용해 물리적 압력 없이도 잠을 편히 잘 수 있게 해주고 불면증을 완화해 준다고 설명한다. 특히 머리와 뒷목이 이어지는 부분을 부드럽게 받치고 지지해주어 C 자형 목(경추)을 유지해 준다. 자는 동안 치료를 받듯 편안함을 느낄 수 있도록 고안했다. 누울 때 어깨 눌림이 덜해 편하며 옆으로 누워도 어깨와 귀가 눌리지 않도록 설계했다. 가누다 베개는 크게 블루라벨 알레그로와 골드라벨 두 종류로 나뉜다. 블루라벨 알레그로는 대, 중, 소, 주니어 사이즈가 있다. 골드라벨은 보조패드가 있어서 높낮이 조절이 가능하나 블루라벨 알레그로보다 약간 높다. 고밀도 항균 메모리폼과 소취 항균섬유를 사용했으며 생활방수가 된다. 가격은 블루라벨 알레그로 22만8000원, 골드라벨 15만8000원이다. 하지만 인터넷이나 홈쇼핑을 이용하면 더 저렴한 가격과 사은품을 받아볼 수 있다. 자생한방병원의 야심작 자생추나베개 척추전문 한방의료기관인 자생한방병원은 오랜 경험과 축적된 지식을 바탕으로 정기적인 치료를 받기 힘들거나 목 통증이 재발하는 환자들을 위해 자는 동안에도 건강한 C 자형 목으로 유지해 주는 자생추나베개를 개발했다. 두상의 압력뿐만 아니라 소재, 통기성, 발수기능을 두루 고려했다. 자생추나베개는 바른 자세로 누웠을 때 뒷목이 들뜨지 않게 전체를 받치는 곡선형으로 설계했다. C 자형 목을 위해 베개 중앙(목과 머리 경계 부위)에 가로로 ㄷ자 모양의 절개라인을 만들어 목 길이에 상관없이 목의 압력을 골고루 분산해 누구나 편안함을 느낄 수 있게 했다. 옆으로 누웠을 때 척추가 휘지 않을 어깨 높이인 10~15cm를 고려해 베개 높이 또한 맞췄다. 이 베개는 얼굴을 감싸주는 유선형으로 턱이 틀어지지 않게 부드럽게 감싸주며 어깨 안쪽 끝까지 베개가 닿게 만들어 잠에서 깬 뒤 어깨나 팔 저림을 최소화했다. 높낮이 조절패드로 두상 생김새에 맞춰 베개를 조작할 수도 있다. 베개 뒷부분에는 목의 피로를 실질적으로 풀어주는 지압봉 6개를 부착했다. 자생추나베개는 메모리폼이 아닌 공기 세포 모양의 결정구조처럼 생긴 ‘노그노플렉스2소재’를 사용했다. 작은 공기구멍으로 통기성을 유지하고 각기 다른 사람들의 두상과 자세에 맞게 섬세하게 변형되고 원형으로도 회복이 빠른 신소재다. 자생추나베개는 정품 한 개 22만9000원이고 이 제품 또한 각 쇼핑몰에서 다양한 구성과 방법으로 구입할 수 있다. 심신 안정과 숙면이 필요할 때 ‘멘탈닥터’ 멘탈닥터는 집에서 누구든지 손쉽게 이용할 수 있는 심리 안정과 개선을 돕는 기구다. 멘탈닥터는 안구운동을 통해 심리불안의 원인이 되는 나쁜 기억을 긍정적인 기억으로 유도하고 과거 상처도 재인식할 수 있게 해 준다. 멘탈닥터를 안경처럼 착용하고 이어폰을 귀에 꽂는다. 귀로 들리는 지시를 들으며 눈에 보이는 파란 불빛을 따라 눈동자를 움직인다. 이렇게 이어폰으로 들리는 이야기와 함께 안구운동을 반복하면서 뇌 기억에 갇힌 신경세포의 정보를 모아 부정적인 기억들로 인한 감정을 제거해 마음의 고통을 해소해 숙면할 수 있도록 도움 받는다. 안구운동뿐만 아니라 정서적 안정감을 찾을 수 있도록 명상과 음악을 병행한다. 내레이션에는 호흡과 명상, 이미지 요법, 암시 효과, 근육 요법, 자율신경 훈련법 등 여러 가지 심리기법이 적용돼 불면증 개선에도 도움을 준다. 작동 진행 과정과 음원을 이용자 상황에 맞는 콘텐츠를 홈페이지를 통해 무상으로 제공받을 수 있다. 상담을 통해 맞춤 콘텐츠도 제공한다. 특히 마음 건강과 부정의 기억을 처리하거나 증상에 따른 콘텐츠, 명상호흡 등 각박한 삶 속에서 마음의 여유를 주는 콘텐츠를 끊임없이 연구하고 소비자들에게 제공하고 있다. 가격은 멘탈닥터 아이스캔(패밀리고급형)이 49만5000원이다. 집 안 캠핑족이 늘어난다 ‘따수미난방텐트’ 집에서 웬 텐트냐고 하겠지만 생활텐트 전문기업인 아이두젠의 ‘따수미난방텐트’는 집 안에서 사용하는 것이 맞다. 2014년 출시됐을 때 ‘텐트계의 허니버터칩’이란 이름이 붙었을 정도로 인기가 대단했다. 당시 아이두젠 공식 홈페이지의 10종류 텐트가 품절이 될 정도였다. 일명 수면텐트라고도 불리는데 이곳에 들어가서 자면 따뜻하게 온도가 유지돼 잠이 잘 들기 때문이다. 따수미난방텐트가 인기를 얻게 된 이유는 가정에서 쓰는 텐트를 바라보는 시각을 달리했기 때문에다. 우풍이 심한 집에서는 난방텐트가 잠만 자는 공간이 아니라 생활공간일 수 있다. 실내에서 활동을 할 때 가장 제약이 덜 가는 구조로 설계해 현재 ‘디자인특허 출원’에 등록했다. 공기순환이 좋은 실내용 원단을 사용해 내부온도는 강하게 유지하고 수분과 습기는 외부로 배출할 수 있게 했다. 텐트 안이 건조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젖은 수건을 걸 수 있는 고리와 구멍도 만들었다. 따수미텐트의 난방효과는 한 예능프로그램에서도 입증한 바 있다. 올해 초 KBS에서는 가정집 안방에 보일러를 그냥 가동했을 때와 따수미텐트를 설치했을 때를 비교해 온도가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실험했다. 보일러를 켜고 1시간 후 실내 안방 온도는 21.9℃이었는 데 반해 따수미 난방텐트 내부 온도는 26℃로 4℃ 이상의 차이를 보였다. 가습효과도 30% 이상 나타나 난방비를 절감하는 탁월한 효과를 보였다. 따수미난방텐트는 사이즈별로 2만원대에서 7만원대까지 다양하다. 잠들기 참 쉽죠? ‘따스안 온열안대’와 ‘레그셀루션’ 마지막으로 초간단 잠드는 방법이다. 바로 ‘온열안대’와 다리의 피로를 풀어주는 ‘레그셀루션’이다. 평소 느끼지 못하지만 남녀노소 누구나 TV나 스마트폰 등 전자기기 사용에서 벗어날 수 없다. 자외선 노출로 인해 눈의 피로 또한 쌓여만 간다. 이때 필요한 것이 온열안대다. 시중에 눈의 피로와 스트레스를 달래는 다양한 안대들이 다양하게 출시돼 있어 원하는 가격대와 사이즈를 구매하면 된다. 온열안대는 PC와 스마트폰을 많이 사용하는 직장인과 장거리 여행이나 출장을 떠나는 여행객이 꼭 가지고 가야 할 필수품이다. 책을 많이 보는 취업준비생과 수험생, 잠을 잘 못 이루거나 숙면이 필요할 때 간편하게 눈에 쓰고 있으면 금세 잠을 청하게 된다. 마나술의 따스안 온열안대의 경우 40도까지 온도가 올라가 눈 주위가 촉촉하게 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안구 건조증이 있거나 눈이 자주 뻑뻑한 사람이 사용하면 좋겠다. 별도의 향을 첨가하지는 않았으나 주 재료인 황토향이 아로마향처럼 얼굴 한가득 퍼진다. 기분이 쉽게 풀리면서 편안해지는 장점이 있다. 레그셀루션은 종아리나 발목에 붙이는 파스라고 생각하면 된다. 대신 실제 파스보다 청량감이 좋고 촉촉하다. 다량의 수분을 함유한 고밀착 하이드로겔 성분이 다리에 수분을 서서히 공급해 붙이고 있는 동안 상쾌함과 시원함을 느낄 수 있다. 장시간 걷거나 서 있을 경우, 오랜 시간 앉아 있어서 다리가 붓거나 뭉치면 잠들기도 쉽지 않다. 피곤한 부위에 붙이고 쉬면 피로가 풀리면서 몸이 노곤해진다. 따로 마사지를 하거나 사우나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면 레그셀루션을 꼭 써보기 바란다.
- 2016-09-20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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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 잘 자기 위한 나만의 비법] 내외적 조건 갗춰저야
- 1. 잠 못 이루는 밤 누구라도 한 번쯤은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운 경험이 있을 것이다. 잠을 자고 싶은데 도대체 잠은 안 오고 정신이 더욱 말똥말똥해져서 긴 밤을 지새우기도 한다. 그렇게 밤을 새우고 나면 머리는 무겁고 몸은 천근 만근이 되어 이튿날은 거의 녹초가 되어 버린다. 왜 그랬을까? 하고 생각해 보면 뭔가 마음의 근심이 있던가 걱정거리로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이다. 낮에 커피를 지나치게 마셨다든가 회식으로 과음∙과식으로 자다 깨 화장실을 갔다 와서 잠 못 잔 때도 있다. 어쨌거나 이럴 땐 푹 자지 못해 그 다음 날은 생활의 리듬이 깨져 비실거리게 된다. 2. 인생의 평범한 행복 잠을 제대로 못 자고 밤을 새워본 사람들은 안다. 그 고통이 얼마나 괴로운 것인지를..., 그래서 누군가 행복을 말할 때 가장 쉬운 말로 이렇게 표현을 했다. 인생의 행복은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는 것이다.’라고. 좀 저속한 표현 같지만, 이것처럼 진리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인생의 모든 고통과 병은 다 이것 세 가지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해서 오는 병이다. 몸에 맞지 않아서 먹고 싶은 것도 마음대로 먹지 못하는 것은 고통이다. 술 좋아하던 친구가 건강에 치명적이니 술 담배 다 끊으라 했다고 ‘사는 재미가 없다.’라고 한다. 그런가 하면 불면증에 시달려 몸이 바싹 말라 버린 것처럼 체중이 줄어든 친구도 있다. 병원에 가면 배설이 안되어 별도 기구를 사용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니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는 일’이야말로 최고의 행복이 아닌가 싶다. 3. 무엇이 잠 못 이루게 하나? 잠을 잘 못 이루는 원인에는 몇 가지가 있다. 신체적인 요인과 정신적인 요인이다. 신체적인 요인은 보면 개인마다 가진 체질에 따라 다르다. 어떤 사람은 잠들기 전 커피를 몇 잔 마셔도 전혀 잠자는 데 문제가 없다는 사람이 있다. 그런가 하면 낮에 커피 한잔 마신 것 때문에 잠이 안 온다는 사람도 있다. 물론 커피가 카페인 성분이 있어 잠을 이루는데 지장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낮에 커피 한잔 마셨다고 잠이 안 온다면 커피는 좀 억울해할지도 모른다. 그다음이 정신적인 요인이다. 살다 보면 스트레스를 받는 일도 있고 걱정거리가 쌓이기도 한다. 곱씹을수록 근심 걱정이 되고 불안하기도 하다. 그러나 지나고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그렇게 불안해했던 경험도 많다. 어쩔 수 없는 걱정이야 할 수 없지만 그렇지 않은 쓸데없는 걱정은 버려야 한다. 옛날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우산장사 아들과 짚신장사 아들을 둔 어머니의 이야기’는 유명하다. 비 오는 날이면 짚신장사 아들이 짚신이 안 팔릴 것을 걱정하고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날이면 우산 장사 아들이 장사가 안될 것을 걱정하고, 평생을 걱정 속에서 벗어나질 못하였다 한다. 차라리 비 오는 날은 우산장사가 잘 될 거라 생각하고 햇볕 나는 날은 짚신이 잘 팔릴 거라고 생각했다면 평생을 즐겁게 살지 않았을까? 이렇듯 마음먹기에 따라 얼마든지 걱정 근심 버리고 두 발 쭉 뻗고 잘 수도 있는 것이다. 4. 잠잘 자는 나만의 비결 잠 못 이루는 원인에서 살펴보았듯 거기에 따른 처방도 있게 마련이다. 필자의 경험상 잠잘 자는 나만의 비법을 3가지만 공개하고자 한다. 1) 물리적인 원인과 처방 - 잠자리를 안락하게 한다. 우선 잠자리는 안락해야 한다. 창문은 커튼으로 밖의 가로등 불빛도 들어오지 않게 가려줘 야 한다. 또한, 침실의 벽지 색상도 안락한 분위기를 느끼게 골라줘야 한다. - 침실은 어떠한 소음이 들리지 않도록 방음이 될 수 있도록 한다 - 침대나 베개는 편안해야 한다. 침대나 베개는 몸에 맞아야 좋다. 요즘은 광고처럼 ‘침대도 과학이다.’라는 말이 있듯 체형 에 맞는 침대와 벼개도 많이 나와 있다, 편안한 침대를 사용하고 베개도 너무 높거나 낮지 않게 알맞은 것을 골라 사용한다. 2) 신체적인 원인과 처방 - 카페인 성분의 음료는 될 수 있으면 삼간다 커피. 홍차. 콜라 등 카페인 성분의 음료는 저녁엔 주로 먹지 않는다. - 술 담배 등은 삼가거나 과식을 피한다 술 담배 등은 몸에 맞게 적당히 마시고 특히 과식은 피한다. - 적당한 운동과 목욕 저녁 먹고 주로 헬스장에 가거나 아니면 아파트 주변이나 공원을 돌며 운동을 한다. 몸의 긴장을 풀어주고 따뜻한 물로 샤워나 목욕을 하게 되면 잠이 잘 온다 - 밤에 깊은 잠을 자기 위해 될 수 있으면 낮잠을 길게 자거나 하지 않는다. 낮잠을 많이 자 게 되면 밤에 잠드는데 고생을 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 몸 긴장완화를 위해 엄지와 검지 발가락 사이를 문질러 주고 눌러 주면 좋다고 하여 가끔 은 그렇게 하고 있다. 3) 마음 다스리기 - 잠을 잘 못 자는 원인은 주로 근심과 걱정 또는 스트레스이기 때문에 이것을 덜어주는 마 음 다스리기를 한다. 만약 걱정거리가 있으면 가벼운 운동이나 호흡조절 등을 하며 긴장을 풀어준다. - 걱정을 잊기 위해 재미있는 책을 보거나 코미디 프로를 본다 - 명상을 한다. 조용히 앉아 눈을 감고 음악을 들으며 명상을 하기도 한다. - 침대에 누워 편안한 생각을 한다. 특히 잠이 잘 안 오는 날은 마인드 컨트롤을 한다. 눈꺼 풀이 무겁게 느껴지도록 깊은 잠에 빠지도록 생각을 하는 편이다. - 멍 때리기도 효과가 좋다. 가끔은 이것 저것 생각 다 잊어버리고 멍하니 천정을 바라본다. 아무생갹 없이 다 내려놓고 있으면 어느새 잠이 든다. - 잠들기 전 자극적인 TV프로 등은 보지 않는다. 잠드는데 지장이 많았던 탓이다 5. 행복한 밤 잠 못 자는 것도 고통이다. 겪어 본 사람만이 안다. 가끔은 죽은 것처럼. 아이들이 하는 ‘시체놀이’처럼 모든 것을 내 던지고, 있는 그 대로에 자신을 맡겨 보는 것도 좋다. 잠은 생활의 활력소다. 잠을 잘 자야 인생도 즐겁고 행복하다. 마음들 더 느긋하게 먹고 긍정적인 생각을 하면 편안해진다. 행복한 밤을 위하여 ~ 굿 나잇!
- 2016-08-09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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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공감] 동년기자단이 함께한 연극 <첫사랑이 돌아온다> 관객과의 대화
- 77세 현역 극작가 윤대성의 신작 (이윤택 연출·연희단거리패)가 부산 초연에 이어 서울 공연도 성황리에 마쳤다. 이 연극은 치매요양병원에서 벌어지는 치매 노인들의 사랑이야기로, 독자들이 공감할 만한 연극이다. 이에 독자들을 대신해 동년기자단 11명이 서울 공연 첫날이던 지난달 7일 공연장을 찾았다. 연극 관람 뒤 이어진 관객과의 대화를 통해 치매 환자, 가족, 현실과 연극에서 느꼈던 치매에 대한 진솔한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왔다. 녹취정리 권지현 기자 9090ji@etoday.co.kr 사진 오병돈 프리랜서(Studio Pic) obdlife@gmail.com 동년기자단 김종억, 김진옥, 박혜경, 백외섭, 성경애, 양복희, 육미승, 이인숙, 장영희, 장원일, 조왕래 -연출가 이윤택이 말하는 연극 는 100% 하고 싶었던 작품은 아니었습니다. 이 극을 쓰신 윤대성 선생님은 지금 요양원에 계십니다. 공연 팸플릿에 쓴 ‘작가의 글’을 보면 ‘내가 지금 요양원에 있고 내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나이든 노부부가 스스로 요양원에 들어가 생활하면서 쓰신 글입니다. 그리고 아버님이 치매로 돌아가신 연극계 여성의 구술 증언과 윤대성 선생님이 보내주신 ‘제3병동’이라는 제목의 연극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연극입니다. -고령화 사회, 시니어 세대에 접어들었지만 치매 소재 연극은 처음 저도 고령화 사회에 진입했다지만 부끄러운 게 이 소재를 가지고 공연해본 적이 없습니다. 막상 해보니까 이게 사실적으로 표현하면 정말 심각한 비극이 될 것 같더라고요. 사실적으로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나이 든 분들의 진실과 관련된 문제인데 또 가볍게 갈 수도 없었습니다. 굉장히 힘든 작품이었죠. 조심스럽게 사례조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대본 검증을 치매관련 기관에서 받았습니다. “치매에 대한 예방책이 있을 거 아닙니까?”라고 했을 때 원래 대사는 “없다, 끝이다”였습니다. 사실 여러 가지 예방책을 얘기하지만 인간의 의지로서는 이겨낼 수 없는 것이 치매입니다. 그래서 “이제 남은 것은 투쟁이다. 투쟁!”으로 바꿨습니다. “없다”는 말을 “투쟁”으로요. 연극을 만드는 우리로서는 최선을 다해야 했습니다. 제일 중요한 건 치매에 걸린 당사자들이 이 작품을 봤을 때 불쾌하거나 나쁜 기억을 가지지 않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이것도 연극인데 너무 한 쪽만을 보여서 연극을 재미없게 하는 것도 힘들었어요. ‘현실과 연극, 양쪽을 생각하면서 작품을 만든다는 게 힘든 작업이겠구나!’ 생각했습니다. 이 작품을 공연하자마자 전국에서 난리가 났습니다. 한 백화점에서는 작품도 보지 않고 전국 순회공연을 제안했습니다. 내용이 고령화 사회이고, 백화점에 오시는 분들이 연세가 있는 분들이 많고 또 굉장히 심각한 문제라는 것이죠. 많은 지원은 하지 못하겠지만 전국 순회공연을 해달라고 했습니다. 동년기자단도 오늘 단체 관람을 오셨지만 시니어들의 단체 관람이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 이런 연극을 해야겠구나. 정말 시니어를 위한 연극이 없었구나! 문화가 없었구나! 시니어들에게 어떤 공연 문화가 필요할까’를 고민하게 됐습니다. -해피앤딩 대신 따뜻한 이별 이 공연을 하면서 극단과 저의 전략은 ‘없는 희망을 가질 수는 없다. 해피앤드로 끝날 수는 없다’는 것이죠. 그래서 결국은 극 중에서 어르신이 치매로 죽습니다. 죽더라도 아름답게 죽자. 마지막에 여주인공이 “할 말 없지요? 그냥 가세요.”라고 말합니다. 나이 드신 분들에게 삶의 의욕에 ‘사랑’이라고 하는 묘약을 던져서 기분 좋게 돌아가시도록 하는 정도가 목적이었습니다. 공연을 하면서 제일 두려웠던 것이 실제 시니어들의 반응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연극은 나이 드신 분이 보아야 할 게 아니라 치매 노인을 모시는 며느리나 아들, 손자가 봐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이 연극은 창작극입니다. 그것도 77세 현역 극작가가 진짜 자신의 기억을 갉아 먹어가면서 쓰신 작품이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 우리는 막을 올려야 했습니다. 좀 거칠지만 우리 창작극의 역사가 100년밖에 안 되지만 창작극이 가지고 있는 감정적인 동기, 실제로 받아드릴 수 있는 것이 창작극의 매력이 아닌가 하는 심정으로 작품을 올렸습니다. 오늘 저는 보통 서성거리지 않는데 자신이 없어서 문 뒤에 서서 연극을 본 게 아니고 관객을 봤습니다. 관객을 봤는데 모르겠어요. 고등학생에서부터 시니어까지 다양하게 오셨는데 어떻게 재미있게 볼 만 했습니까? 김진옥 치매라는 주제를 가지고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게 다뤄주신 것 같아서 아주 좋았습니다. 이윤택 그렇게 보셨다면 정말 감사합니다. 장영희 이라는 단편영화가 있습니다. 그 영화가 최고상을 받았다고 해서 본 적이 있는데 이 작품과 비슷하게 사랑이 찾아오는 내용이었어요. 저는 연극이 전달하는 의미가 훨씬 가슴이 와 닿았고요, 굉장히 좋았습니다. 선생님께 묻고 싶은 것은 극중 여주인공이 전혀 기억이 전혀 안 나다가 기억이 돌아온 것인가요? 이윤택 마지막에 긴 독백을 하지 않습니까? 그건 본인의 기억이에요. 그런데 그게 여주인공의 기억이기는 하지만 재창조한 거죠. 기억의 재구성이라고 말씀 드렸는데. 사실 이 작품이 쉬운 작품이 아닙니다. 구조적으로요. 이게 의식과 무의식을 왔다 갔다 하죠.특히 이 할머니 역할이 굉장히 어려운 역할입니다. 쓰러졌다 울다, 웃다를 반복하죠.할머니의 고향에서 있었던 이야기가 기본이 되고 그 기억을 밑천으로 남자 주인공이 원하는 기억 속으로 재창조해서 들어간 것입니다. 상상력, 그러니까 창조죠. 그 장면이 이 연극의 압권입니다. 양복희 스토리가 사실은 아니잖아요. 치매 환자는 과거의 기억들을 영롱하게 기억할 수 없잖아요. 이윤택 보통 치매 환자들은 확인해 본 결과 현재 기억이나 현실적인 기억은 잊어버리는 대 신 기억 하는 패턴은 있어요. 그런데 너무나 명확하게 기억한다는 것이죠. 치매라는 것이 제 일 안타까운 것은 치매 환자들의 정신이 이중적으로 갈린다고 해요. 기억이 안 난다는 것을 자신이 안답니다. 기억이 안 나는구나 하는 것을 본인이 알고 있어요. 그런데 그 표정이 너무 힘들어서 연극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라고 하죠. 이성이 살아있지만 한편으로는 모르는 거죠. 이 이중적 거리 때문에 힘들다더라고요. 육미승 그 흥미를 위해서 현실적으로 기억을 되살린 것으로 보였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거 같아요. 치매 환자가 잠깐 알아볼 수는 있지만 그렇게 길게 알아보지는 못한다고 들었는데 극적인 흥미를 위해서 그렇게 표현하신 건가요? 이윤택 아까 잠깐 잠깐이라고 하셨는데 남자 주인공의 어머니가 지금 치매입니다. 어머님이 이 연극을 보셨어요. 쉽게 말해서 어머님이 이 연극을 이해를 못하세요. 그런데 또 어떤 부분은 이해하세요. 인간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연극이 아닙니다. 있어야 하는 현실, 우리가 좀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현실적인 모델을 만든 것이 연극입니다. 대부분의 치매 환자들이 기억을 망각하고 뭘 하지 못하더라도 그 사람들에게 이런 꿈이 있다, 상상할 수 있고 창조할 수 있다는 가설을 만들어내는 것이 연극이라는 거죠. 장영희 호스피스 병동 이야기를 다룬 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본적이 있습니다. 그 곳에 들어가면 평균 21일 안에 사람이 죽기 마련인데 어떤 사람이 살아서 나왔다더라고요. 그래서 영화 초반에 나오다 왜 그 사람 이야기를 후반에 쓰지 않았냐고 영화감독에게 물었더니 “쓸데없는 희망을 갖게 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그분을 배제했다”고 답했습니다. 선생님은 치매 환자를 몇 번씩 살리고 기억도 살리셨잖아요? 이윤택 두 가지 개입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않게 한다는 것도 하나의 판단 선택일 수 있죠. 우리 연극에서 기적이라는 말이 나오잖아요? 우리는 기 적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술의 기능이라는 게 어느 하나만 선택하는 것이 아니고 앞에서 말한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하겠다는 아주 현실적인 사고겠죠? 나는 그래도 기적을 만들어내겠다는 상당히 낭만적인 생각을 가지고 접근 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사고가 다른 것 같습니다. 정원일 질문 하나하고 소감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아까 뒤에서 보셨다고 했잖아요. 관객들의 반응에서 일치된 면과 가장 안 맞아 떨어진 것이 무엇인지 물어보고 싶습니다. 이윤택 안 맞아 떨어진 것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관객들에게 원했던 것은 딴 것은 없고 집중력이었습니다. 관객들이 하품하거나 졸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집중이란 면에서 확실했습니다. 그리고 더 알맞았던 점은 조금 웃어줘야 할 때 다 웃어주셨고 조 금 긴장해야할 때 다 긴장했고요. 저는 오늘 관객에 대해서 상당히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정원일 소감을 말씀드리자면 남녀 주인공이 대화를 가지고 이야기를 이끌어갈 때 가장 재밌었습니다. 다른 배우들에게는 죄송하지만 그렇게 가볍게 장치를 안 해 놓으셔도 두 분이 치고받는 대사들이 집중력 있고 재밌었다. 조왕래 치매관련 연극이라기에 전철로 2시간 거리인 파주 월롱에서 왔습니다. 치매 전문 봉사자 활동을 5년째 하고 있는데 수많은 치매 환자들을 만나고 있어요. 주로 치매 환 자들 중에는 외로운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연극을 통해 일반인들이 치매라는 병을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앞으로 혼자 사는 독거노인이 늘어나게 되면 치 매 환자도 폭발적으로 늘어날 텐데 건강한 노인이 덜 건강한 노인을 돌보는 노노케 어(老老Care)가 될 수 있도록 사회 분위기도 바뀌어야 합니다. 다음에 그런 내용을 연극에 넣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이윤택 치매의 원인은 외로움입니다. 외로움은 가족에서 온다는 게 있습니다. 연극에서 가족 이 재구성되잖아요. “이 사람이 네 아버지다”라고 하는데 실제 아버지는 아니지만 실질적인 가족보다도 진짜 진실이 통할 수 있는 가족인 것이죠. ‘외로움이 치매의 원인이다, 치매를 사랑으로 극복해야 한다’가 애초의 주제였습니다. 성경애 많이 울었어요. 엄마가 생각나서요. 엄마가 그렇게 돌아가셨거든요. 너무 생각이 많이 나고 웃다가 울다가 배우 여러분 너무 감사하고요. 오늘 여기 오기를 너무 잘한 거 같아요. 그냥 저도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나이거든요. 너무 애쓰셨습니다. 다 하 나하나 소중하게 다 잘해주셨습니다. 너무 많이 울었습니다. 이윤택 오늘 주연 배우 두 명이 다 울었어요. 아까 김철영씨도 울었고 김미숙씨도 통곡을 하는데 연습할 때 평소 보지 못했는데 막 울더라고요. 오히려 울어야 해소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김진옥 그런데 실제 치매 환자는 이렇게 고요하고 아름답지만은 않아요. 이중인격처럼 극과 극을 치달아요. 편안하게 살았던 사람도 치매가 되면 폭발을 하고 완전히 다른 사람 이 되는 것을 많이 봤어요. 정말 인품 좋던 분이 정말 저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바뀌는 것도 봤습니다. 너무 잔잔한 것 같은 느낌? 이윤택 그 부분에 대해서 예술적인 동기를 말씀드리면 치매에 대해 불편하게 갈 것인가 하 는 개념에서 고민이 많았습니다. 그 개념에서 프랑스 철학자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1915~1980)의 결핍에 대한 결핍을 채우는 쪽으로 갈 것이냐 프로이트(Sigmund Freud·18561939·오스트리아)로 갈 것이냐 하는 문제였습니다. 프로이트적인 것은 ‘치매의 원인’을 밝혀야 한다. 파헤쳐서 환자가 그 원인을 알아야 낫는다’는 게 프로이트적인 심리치료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오히려 아니라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원래 넌 원래 이런 사람이야’라고 알아버리면 안 된다는 거죠. 오히려 프로이트적인 심리치료가 문제가 있다는 게 드러 났어요. 롤랑 바르트의 방법은 환자들에게 아름다운 것, 환자들에게 결핍된 부분을 계속 이야기하는 거죠. 환자들이 가지고 있는 나쁜 점, 추악한 점은 모르게 해라, 계속 좋은 것만 이야기함으로써 상대적으로 결핍되고 나쁜 것들이 순화된다고 하는 게 롤랑 바르트의 이론이에요. 많은 분들이 치매 환자가 연극에서처럼 곱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정말 리얼하게 보여준다면 치매 환자들은 더 나빠진다는 것이죠. 저 희가 치매병원에 가서 이 공연을 해야 하는데 가서 우리가 이런 공연을 할 때 치매 환자들이 실제로는 막 이러는 사람들도 본인들도 얌전하게 볼 겁니다. 아까 말한 대 로 연극은 현실 그대로가 아닙니다. 연극을 어떻게 만드는가 하는 것은 연극 만드는 사람들의 장마다 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뭐 저나 우리극단이의 입장은 너무 현실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약간 조금은 버전 업 시키는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박혜경 저는요 사실 크게 잘 모르고 왔어요. 굉장히 무거우면서도 슬프면서도 자신을 성찰 하는 시간이었어요. 저도 시니어 초년생인데 앞길에 대한 생각 자식 생각도 했어요. 어린아이들이 와보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고,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공연할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도 느꼈습니다. 의사선생님도 치매에 걸린 건가요? 이윤택 치매 사례 중에 ’오동추 목사’라는 것을 봤습니다. 의사가 치매 많이 걸립니다. 의사 가 치매 환자라는 설정, 정신과 의사들이 많이 정신병에 걸립니다. 현실을 정신병자 시각에서 보는 경우가 많다. 아버님부터 치매로 죽었고, 실제로 ’오 주여’하다가 오동추가 튀어나고는 것이고. 실제 사례였습니다. 결국 치매는 하나님도 도울 수 없는 문 제라는 뜻이었습니다. 극 중에서 의사는 치매요양병원을 자가 운영하던 사람이고 60 대였고 또 딸은 50대였잖아요. 유전이 된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관 객 마지막 장면에 의사나 딸 또한 치매에 걸리면서 끝나는데 젊은 사람들도 안전할 수 없다, 남의 일이 아니란 뜻을 보여준 건가요? 이윤택 작가 선생님이 마지막 장면을 중요하게 해달라고 하셨습니다. 치매가 우리 모두의 문제라는 인식을 주고 싶었다 하더군요. 서로를 이해하는 세대 간 소통 연극이 돼야 하지 않나. 고령화 사회와 아들 세대, 손자 세대 3세대가 봐야하지 않는가 생각합니다. 치매협회 전문가들이 하는 얘기를 들으면서 고쳐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치매에 대한 두려움과 불쾌감 혐오를 가지시는 분들에게 이 연극을 통해서 ‘너무 그러지 마라. 불쾌하게 꺼리지 마라. 인간이 거쳐야 하는 과정이다’라고 인식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런 효과를 노리는 것이죠. 장영희 저는 웰 다잉 차원에서 아름다운 마무리, 마침표에 접근하고 싶습니다. 마지막에 “아 무 걱정 말고 가세요”하는 부분이 너무 마음에 들었어요. 좋은 말로 보내는 것도 좋은 것 같아요. 이윤택 이왕 죽는 데 “편하게 갑시다”라는 뜻이었습니다. 이 외 동년 기단 의견 김종억 동년기자 대개의 사람들은 치매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인지는 하고 있다. 연극 는 무거운 주제를 약간은 극적으로 구성해 무겁지 않게 했다. 실상 치매 환자가 극처럼 전개되지는 않는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고서는 있을 수가 없다. 실생활에서 한두 번쯤은 치매환자를 겪어보았거나, 현재진행형일 수 있기에 더욱 마음이 무겁게 내려앉는 소재이기도 하다. 하지만, 연출자의 말대로 너무 무겁게 전개한다면, 현실적일 수 있으나 보는 이에게 ‘희망적인 메시지보다는 너무 가혹한 현실을 인지시키는 일’ 일 수 있다. 는 조금은 밝게 터치해 나가면서 잔잔한 마음의 울림을 가져오기에 괜찮았다. 치매와 관련된 당사자나 가족들이 드러내 놓고 편하게 얘기할 수 있는 소재는 아니기에 그 상황을 직면하고 있으면서도 그저 안으로 삭이면서 자신의 현상을 괴로워하고 속상해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누구든지 나이가 들면, 올 수 있는 현상으로 자각하고 사회적으로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면서 예방하고 관리하는 분위기가 확산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백외섭 동년기자 좋은 주제로 열정적인 연기를 한 출연진과 공연준비를 한 제작진에 뜨거운 박수를 보낸다. 남달리 관심이 많은 것은 치매 10년차 노모가 노인요양원에 계시기 때문이다. 한 달에 2번 이상 문안드리면서 어머님을 비롯한 다른 환자의 발병 원인과 병증세가 각기 다르다는 사실을 알았다. 발병 원인은 연극에서처럼 유전도 있지만, 사고가 의외로 많다. 필자의 모친께서는 낙상에 따른 고관절 수술 후 치매가 천천히 진행되었다. 고령자는 자기가 의식하지 못하는 조그만 사고가 치매의 원인이 되는 경우가 많다. 주위에서도 모르고 있기 때문에 고령이나 유전으로 치부하고 있다. 다양한 발병 원인을 연극에 가미하면 어떨까 생각해 보았다. 증상도 기억력 상실만이 아니다. 이상발작을 동반하는 경우도 많다. 어떤 때는 정상인보다 더 힘이 넘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치매를 불치병으로 여기는 현재의 의료 환경에 가슴이 미어진다. 시니어는 부지불식간에 닥치는 낙상이나 상처를 특히 조심하는 등 치매예방 노력이 필요함을 절실히 깨달았다.
- 2016-07-25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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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즈엄마의 미국 이민 이야기] (9)백발의 미국 노인들
- 미국은 노인천국이다. 그러나 백인 노인들에게도 부족한 것이 있다면 외로움이 그 한 몫을 차지했다. 미국의 노인들은 대체로 검소하지만 부유하고 고독한 만큼 사랑도 넘쳤다. 미국인들이 인정머리 없고 이기적이라고 누가 그랬는가. 자본주의가 넘치는 미국에 살면서 얻을 것과 배울 것은 끝이 없었다. 하얀 은발머리가 햇빛에 반짝이며 곱게 단장한 백인 할머니 한 분이 지팡이를 짚으며 뒤뚱뒤뚱 세탁소 안으로 들어왔다. 재빨리 소리를 질러 남편을 불렀고 남편은 얼른 뛰어나가 할머니를 두 팔로 부축했다. 필자는 아직 외국인 손님이 어색하기만 해서 선뜻 나설 수가 없었다. 머리가 하얀 할머니는 얼굴에 소녀 같은 천진한 미소를 띠며 카운터 앞 의자에 앉았다. 처음 오는 손님이라고 했다. 언뜻 봐도 80은 넘어 보이는 단아한 모습의 예쁜 미국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두 부부의 모습을 번갈아 보시더니 이것저것 물어왔고, 남편은 상냥하고 친절하게 하나하나 답변을 했다. 그 연세에 운전을 직접 하고 세탁물을 하나 가득 차 트렁크에 담아오셨다. 남편은 밖으로 나가 트렁크를 열고 세탁물을 옮기기 시작했다. 비가 쏟아져 천장으로 세어난 빗물이 옷장으로 들어와 옷들이 망가졌다며 대충 50장은 가져온 것 같았다. 달러로 치면 대략 500달러는 될 것 같아 깜짝 놀랐다. 남편은 친절을 있는 대로 하더니 300달러만 받겠다고 했다. 필자는 조금은 못마땅했지만 참아야 했다. 남편은 신이 난 듯 가게를 돌아나가는 할머니 손님을 차에까지 부축하며 정중하게 모셨다. 필자도 그때는 함께 인사를 했고, 할머니는 고맙다며 몇 번이나 두 손을 잡아주었다. 일주일 후, 백인 할머니는 친구 두 명을 데리고 다시 왔다. 필자 부부가 너무 친절하고 상냥해서 모셔왔다는 것이다. 앞으로도 계속 소개를 해주겠다며 주름진 환한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그 후로는 무슨 때마다 초콜릿과 손수 구운 비스킷뿐만 아니라 각종의 선물도 있는 대로 가져다주었다. 그 이후로도 5년 정도 단골이 되어 꾸준한 왕래를 했고 주위의 사람들로 매상은 늘어갔다. 어느 날부터 그 할머니가 보이지 않기 시작했다. 모습이 뚝 끊겨 필자 부부는 무슨 일인가 걱정을 했다. 얼마 후 보스턴에 사는 아들이 할머니 사망 소식을 전해왔다. 아들은 할머니에게 들었다며 그동안 친절에 대한 감사 인사와 함께 할머니 옷에 대한 거금을 지불하며 모두 찾아갔다. 갑작스러운 비보에 그날은 필자 부부도 행복했던 마음에 그림자가 드리우며 몹시 슬픈 날이었다. 일주일쯤 지났을까, 건장하게 생긴 백인 할아버지가 세탁물 한 보따리를 품에 안고 들어왔다. 돌아가신 할머니가 소개했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치매 끼가 있는지 한쪽 손을 심하게 덜덜 떨었다. 남편은 반갑다며 여윈 두 손을 덥석 잡고 친절하게 인사를 했고, 할아버지는 사우스 코리안이냐고 몇 번을 물었다. 할아버지는 6.25한국 전쟁 참전 용사였다며 필자 부부 만난 것을 무척이나 반가워했다. 자세히 들어보니 할아버지는 파킨슨병으로 혼자 노인 아파트에 사셨고 아들딸은 타 주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미국 노인들은 거의가 자식들과 멀리 떨어져 혼자 살고 있어 안타까웠다. 남편은 한국에 아버지 생각이 난다며 몇 배로 친절을 베풀었다. 어느 때는 직접 집에까지 배달을 했다. 할아버지는 올 때마다 고맙다며 고액의 팁을 용돈처럼 건네주었고 매주 월요일 첫 손님으로 기분 좋은 매상도 채워주었다. 와이셔츠 5장과 바지 2벌로 매주 똑같은 옷과 속옷 몇 벌이 전부였지만 금액은 만만치가 않았다. 반복되는 세탁으로 옷들은 너덜너덜해갔지만 할아버지는 편하고 좋아하는 옷이라며 변함이 없었다. 필자에게 할아버지 옷은 곧 익숙해졌고 그 할아버지 냄새가 배어있어 금방 알 수가 있었다. 미국인들은 자기가 맘에 드는 것이면 똑같은 옷이 몇 벌씩이나 되었다. 어쩌면 그들은 사치가 아닌 굉장히 검소하며 합리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단골 노인 손님들이 하나둘 늘어나기 시작했다. 입에서 입으로 소문이 나는 것 같았다. 노인들은 추수감사절 및 크리스마스뿐만 아니라 누구보다 가장 먼저 각종의 선물을 가져왔다. 시시때때로 이것저것을 가져다주면서 마음의 정을 나누었다. 정이 그립고 외로운 이민자에게는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토박이인 그들도 외로움은 가득했지만 정이 넘치고 마음이 따뜻했다. 그들은 부가 넘치는 나라에 살았지만 고독을 몸에 품고 몸서리를 치고 있었다. 자식들은 있어도 성인이 되면 부모를 떠나야 했고 부모는 나이가 들면 외로움 친구도 품어야 하는것이 그들 전통적 문화의 일부였다. 미국에 노인들은 거의가 자식들과 멀리 떨어져 살고 있다가 어느 날 병원으로 실려가 조용히 혼자 죽어간다. 땅덩어리가 크기 때문에 어쩌면 당연한 것으로 혼자 또는 부부만이 사는 것에도 자연스레 익숙해져 갔다. 노인들은 정부에서 제공해 주는 아주 저렴한 노인 아파트에서 지내며 정부 보조금인 웰 페어(기본보장 연금)나 쇼셜 연금(사회보장 연금)으로 살고 있다. 메디칼(병원)은 물론이고 후드(음식) 스탬프까지 어쩌면 부자로 생활할 수가 있다. 어떤 이는 차곡차곡 저축도 하면서 살고 있다. 그러나 외로움의 단어는 인간이 풀지 못하는 커다란 공통과제로 남아있는 것 같았다. 필자 부부가 조금 친절과 애정을 베푸니 대가는 그 열 배는 돌아왔다. 물론 대가를 바라고 한 일은 아니었다. 그들은 대단히 합리적으로 냉정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결코, 차고 이기적인 사람들과는 거리가 멀었고, 기본적인 질서의 바탕 위에 인간적인 따뜻한 사랑이 마음속 깊이 흐르고 있었다. 사람의 정서는 누구나 비슷했고 겉의 생김새와는 또 다른 것이었다. 진실로 대하니 진실로 통하는 것이었다. 미국에서의 육체적 고생은 참된 삶의 의미를 느끼게 하는 참으로 진솔한 생활이었다. 필자 이민생활 초기에 선배 지인이 말했다. ‘미국은 살수록 매력이 있는 곳’이라고. 물론 전혀 다른 문화가 받아들이기 힘든 것도 있다고 했다. 그러나 살면서 새로운 것에 적응한다는 것은 창조의 세계와도 같았고, 황무지의 낯선 땅에서 매력이라는 단어는 생소할 뿐이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남의 나라 미국도 사람 냄새 풀풀 나는 따뜻한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지금도 생각나는 아름다운 백인 노인들, 부디 건강하고 활기차게 오래오래 살아 주기만을 바라고 싶다.
- 2016-07-11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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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가 만난 사람] 자생한방병원 신준식 이사장
- 나무야 나무야 큰 나무야 사과나무야 힘에 겨워 업에 겨워 모진 삶을 살았느뇨 허리가 휘어지게 서글픈 구절로 시작하는 이 시의 제목은 ‘척추측만증’이다. 이 시인의 다른 작품들의 제목을 살펴보면 ‘인술(仁術)’, ‘골다공증’, ‘약이되는 사람’ 등 다소 생소하다. 그도 그럴 것이 김연아나 박지성 등의 허리를 책임졌던 자생한방병원의 신준식(申俊湜·64) 이사장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인 신준식’의 시는 손이나 약, 사람에 관한 이야기가 많다. 글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사진제공 자생의료재단 신준식 자생한방병원 이사장은 한의사이자 정식으로 등단한 시인이다. 환자의 마음의 병까지 치유하는 심의(心醫)가 되고자 노력한 결과다. 그래서 그의 시에는 ‘아픔’에 관한 이야기가 유독 많다. 한 번은 척추측만증인 여학생이 그를 찾아왔다. 16세밖에 안 된 이 학생은 안타깝게도 척추가 구조적으로 비뚤어져 교정하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였다. 그렇게 치료를 위해 땀을 흘리는 도중 소녀의 눈에서 떨어지는 눈물을 봤다. 소녀의 고통과 아픔을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렇게 탄생한 작품이 ‘척추측만증’이다. 그렇게 시를 쓰기 시작한 지가 20여 년이 됐다. 2012년 종합문예지 월간 의 신인문학상 시 부문에 당선돼 시인으로 정식 등단했다. 그해 에 그의 시 ‘생의 반환점에서’ 등 2편이 선정되기도 했다. 이렇게 꾸준한 작품활동을 통해 지난해에는 네 번째 시집인 를 출간했다. “시에 대한 영감은 주로 진료실에서 나오죠. 선친은 늘 저에게 마음의 병부터 치료하는 심의(心醫)가 되라고 가르쳤습니다.” 이런 그의 마음은 그의 시 ‘인술(仁術)’에서도 엿볼 수 있다. “아버지는 나에게/의사는 시내인술(是乃仁術)이라 하셨다/의사는 의술로만 치료하지 말고/인술로 치료해야 한다/마음의 병부터 치료하는 심의(心醫)가 되라.” 실제로 그는 선친의 뜻을 따라 영혼까지 치료하려 애쓰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임직원과의 소통도 시로 한다. 병원 블로그 등에는 그가 직원들에게 전달하는 시가 심심치 않게 게시되곤 한다. 처음에는 낯부끄럽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내 진심을 담아 한 줄 한 줄 자기 생각을 시로 전달했다. 그러자 직원들에게서도 변화가 일어났다. 환자를 대하는 태도부터 달라졌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지만, 그가 시를 놓지 않는 이유다. “하루는 직원 한 명이 제게 메신저로 수시로 보내주시는 이사장님 시 덕분에 삶의 태도가 긍정적으로 변했다면서, 감사함을 환자에게 갚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빈말일 수도 있겠지만, 그럴 때 시를 쓰는 보람을 새삼 느낍니다.” 이러한 소통 방식은 전국 18개 자생한방병원 분원과 임직원 1500여 명을 하나의 연결고리로 묶고, 국내 최대 규모의 한방 의료재단으로 성장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됐다. 1988년 자생한의원으로 시작해 2013년 11월 국내 최대 한방 공익 의료재단으로 거듭났다. 7대째 이어오는 한의사 집안 신준식 이사장의 집안은 7대째 한의업을 이어오고 있는 한의사 집안이다. 선친은 양의사이면서도 한의사였다. 외과의사로 양·한방을 함께 진료했던, 당시로선 매우 드문 의료인이었다. 한국전쟁 때 충청도 시골 마을로 피란을 갔는데 환자들 때문에 전쟁이 끝난 후에도 서울로 돌아오는 것을 포기했었다. 환자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다니느라 신 이사장의 가족은 무려 17번이나 이사를 했다. 충남 당진에서 한의원을 운영했던 선친은 환자들이 돈이 없다고 하면 쌀이나 감자, 옥수수 등을 받고 병을 고쳐주기도 했다. 그러다 척추 골절과 척추 결핵으로 6년간 앓다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그렇게 병으로 고생하실 때 꼭 낫게 해드리겠다고 약속했어요. 하지만 결국 그 약속은 지킬 수 없었죠. 척추 질환을 꼭 정복하겠노라고 맘먹은 것도 그때쯤이었어요. 경희대 한의대에 들어가서 같은 뜻을 가진 동기들과 추나요법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어요. 해답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죠. 덕분에 전국에 안 가본 곳이 없었어요. 국내에 추나요법에 관한 자료가 많지 않아 공부하기가 쉽지 않았고,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허릿병을 잘 고친다는 사람 따라다니다 쫓겨나기도 부지기수였죠. 비방(祕方)으로 추나요법을 전수받은 한의사를 설득해 배우기도 하고, 때로는 안마사에게도 고개를 숙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연구에 매달리다 보니 빛이 보이기 시작하더라고요.” 2700년 역사 자랑하는 추나요법 척추질환은 현대사회의 대표적인 질환 중 하나다. 과거에는 통증을 줄이기 위해 수술요법을 많이 선택했지만, 수술의 높은 난이도와 재발의 위험성 때문에 비수술 요법에 대한 선호가 높아지고 있다. 양의학에서도 절개를 최소화하는 최소침습시술 방식이 인기를 얻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한방에서 치료하는 ‘추나요법’은 대표적 비수술 요법이다. 대개 비수술 치료는 약물과 추나요법 등을 통해 상태를 호전시킨다. 약물과 추나요법만으로도 2~4주 이내에 회복되는 경우가 많다. 이는 디스크가 빠져나오면 인체는 그것을 이물질로 간주해 강력한 면역작용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추나요법이란 어긋나거나 비뚤어진 뼈와 관절, 뭉치고 굳은 근육을 바로잡아 울체(鬱滯, 막히거나 가득참)된 기혈을 정상적으로 순환시켜 통증을 개선하고, 인체의 자연치유력을 회복하여 질병의 원인을 해소하는 수기(手技) 치료법이다. 골관절과 근육, 인대, 근막 등 주변 연조직의 기능적인 불균형으로 인해 발생하는 척추관절질환을 치료한다. 시술자의 손과 지체(肢體, 팔다리와 몸)의 다른 부분을 사용하거나 보조기기 등을 통해 인체의 특정 부위(체표의 경혈, 근막의 압통점, 척추와 전신의 관절 등)를 조작하고 인체의 생리적·병리적 상황을 조절함으로써 치료 효과를 거두는 것이다. 즉, 한의사가 수기법을 통해 가하는 힘이 관절·골격 또는 환자의 특정 부위를 교정함으로써 치료 효과를 내는 것이다. 추나의 역사는 길다. 2700여 년 전 이라는 한의서엔 안마와 지압이, 그리고 밀고 당겨 어긋난 관절을 맞춰주는 에도 수기 치료가 기록돼 있다. 추나(推拿)라는 말은 한의학 경전인 에 나오는 치료법인 ‘도인’, ‘안교’에서 유래됐다. 그러다 명나라 때 문헌에 처음으로 ‘추나’라는 명칭이 등장한다. 청나라 때는 황실의 의료를 담당하던 태의원(太医院)에 ‘추나과(推拿科)’를 설치하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선 손으로 하는 의술을 천시한 데다 환자들이 신체 노출을 꺼려 빛이 바랬다가 서양의 카이로프랙틱이 들어오면서 역사 속의 추나요법이 부활했다. 물론 부활의 중심에는 신준식 이사장이 있었다. 한의학 세계화 이끌다 1992년 대한한의학회에서 추나학회(현 대한척추신경추나의학회)가 공식 인준되었고 그동안 별다른 관심을 얻지 못하던 추나요법은 마침내 공동 연구의 광장으로 나오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우리나라의 거의 모든 한의대에서 추나학을 교과목으로 채택할 정도로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민간요법의 하나로 홀대받던 추나요법이 이젠 한방 치료법의 하나로 자리를 잡은 것이다 자생의 설립 목적에는 신 이사장의 의료철학이 담겨 있다. 한의학의 과학화·표준화다. 그는 소위 비방(祕方)이라는 명목 아래 등한시해왔던 한의학의 치료 효과를 과학적으로 밝히는 연구를 하고 있다. 이를 위해 SCI급 국제학술지에 논문을 매년 수차례 게재하고 있다. “한의학 또한 양방의학과 마찬가지로 치료의학의 우수성을 입증할 수 있도록 임상을 통한 증명 자료를 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근거 중심의 임상치료 데이터를 모아 우수 논문들을 주류의학인 양방의학계에 발표해 한방을 과학화하고 인정받게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병원 경영이 안정돼야 연구도 하고 논문도 쓸 수 있습니다. 그러지 못할 경우에는 병원의 현상 유지를 위한 행정에만 머무르게 됩니다.” 이러한 연구성과가 뒷받침되면서 신 이사장의 의술은 해외에서도 인정받아 미국 어바인의과대학 선택과목 채택(2002), 미국 하버드대 의대 협력 연구(2006) 외에도, 2011년부터 미국 러시대학메디컬센터, 미시건주립대학교 정골의과대학, 시더사이나이 병원, 러시아국립의과대학교 등 해외 굴지의 대형 종합병원과 의과대학의 초청을 받아 강의하고 있다. 올해 6월에는 키르기스스탄 대통령병원 개원 70주년 기념 국제 콘퍼런스에 초청을 받아 비수술 한방 척추디스크 치료법 강연을 했다. 이 자리에서 신 이사장은 한방 추나요법과 침 치료법(동작침법) 등 강연을 하며 현지 급성요통환자에게 동작침법을 시연하기도 했다.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많은 척추환자가 통증으로 고통 받으며 수술 치료를 고려하고 있습니다. 비수술적 치료방법인 우리 전통 한의학의 우수성을 전 세계에 알리는 것이 저의 사명입니다.” 진정한 명의(名醫)란 명의(名醫). 사전적 의미로는 ‘병을 잘 고쳐 이름난 의원이나 의사’를 뜻한다. 말 그대로 유명한 의사라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신준식 이사장 또한 명의일 것이다. 하지만 신준식 이사장이 생각하는 명의는 명망 있고, 병을 잘 고친다고 해서만 되는 것이 아니다. 환자의 마음까지 다스릴 줄 알아야 ‘진정한 명의’라고 강조한다. “동의보감에는 ‘약을 잘 처방하면 약의(藥醫)로 삼등(三等)의사요, 음식을 잘 조절하면 식의(食醫)로 이등(二等)의사요, 마음을 잘 다스리면 심의(心醫)라 일등(一等)의사’라 했어요. 환자의 아픔을 어떻게 하면 깨끗하게 치료해 더 이상은 고통 받지 않고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지를 아는 것이 진정한 명의예요. 저는 환자들이 아픈 몸을 치료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병원을 찾아다녔고, 적지 않은 비용과 시간을 들이며 힘들어 했는지 잘 압니다. 그러기에 제 방문을 열고 찾아와 도움을 요청하면 따뜻한 미소와 포근한 말과 정성스런 손길로 얼어붙어 있는 환자의 마음을 안아주고 싶습니다.”
- 2016-07-04 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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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니자서전] 기적소리 울리는 인생의 기차를 타고
- 피비린내 나는 동족상잔의 비극인 한국전쟁이 만 3년1개월의 종지부를 찍고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되었으나 전쟁의 후유증으로 피폐해진 농촌은 더욱 먹고살기가 어려워졌다. 필자는 휴전이 끝난 직후인 53년 8월 14일 경기 부천시 영종면 중산리 1385(현 인천 중구 중산동)에서 5남 3녀의 일곱 번째로 태어났다. 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지 않은 채 보릿고개를 겨우 넘기며, 근근이 입에 풀칠하던 시절의 농촌에서 태어났으니 그 생활이야 오죽했을까마는 그래도 아버지의 부지런함과 노력으로 큰 어려움 없이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당시 사랑채에는 몸이 불편하시어 동생에게 얹혀살고 있는 큰아버님이 야학 서당을 열고 있었기에 집안은 늘 사람들로 붐볐다. 희미한 등잔불 아래 밤마다 천자문 읽는 소리가 낭랑하게 창문을 넘었으니 이는 필자가 성인이 된 이후에도 늘 한자에 관심을 가지고 서예를 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특히 필자의 유년기 시절에는 당시 초등학교 근처에 집이 있고 비교적 상태가 좋았던 터라 도시에서 섬마을로 전근해 오시는 선생님들이 필자 집에 방 한 칸을 얻어 자취를 하셨기에 어린 시절부터 선생님들과 가까이 지내곤 하였다. 60년도 3월에 집 근처에 있는 영종초등학교에 입학을 했다, 그 학교는 집안 대대로 어르신들은 물론 부모님과 형님, 누님들이 다니던 학교다. 코 닦는 수건을 가슴에 달고, 학교에 첫 발을 떼어 놓았던 그 모습이 눈에 선하다. 농촌임에도 집안은 비교적 큰 농사와 과수원으로 어렵지 않게 살았는데, 필자는 8남매 중에 일곱 번째 이었다. 서열상 위로는 형, 아래는 막내 동생이 있었다. 중간에 끼인 필자는 늘 사랑에 목말라했다. 형은 형이라서 봐주고 동생은 막내라서 특별대우를 받다 보니 결국은 중간에 끼인 필자는 늘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면서 유ㆍ소년시절을 보냈다. 도맡아 잔심부름을 하기도 하고 어쩌다 다투기라도 하면 꾸중은 비교적 필자에게 떨어졌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서든지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자랐다. 더구나 필자 집에 세를 살고 계시던 선생님들께서 보실 때마다 장난이 심해 단추가 모두 떨어진 옷을 풀어헤친 채 돌아다니는 필자를 보고 유별난 ‘장난꾸러기’라고 하기도 하고 ‘다리 밑에서 주워온 아이’라고 놀리곤 했다. 형제들에 비해 외탁을 해서 키가 조금 작은 편이었는데, 장난삼아 했던 놀림은 청년기 시절 두고두고 상처로 남았다. 왜냐하면 오랫동안 진짜로 다리 밑에서 주워온 고아인줄 알았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필자는 내성적인 성격으로 소심하고 숫기가 없었지만 공부는 곧잘 했다. 아마 반에서 1등은 못했어도 4,5등은 늘 했다. 언젠가 송산 백구지라는 해변으로 가을소풍을 갔는데, 전 학년을 모아놓고 장기자랑을 하던 시간이었다. 우리 학년에서는 필자가 선생님께 호출되어 나갔는데, 고개만 푹 숙인 채 결국은 끝까지 노래를 부르지 못하고 들어오고 말았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다. 그 시절, 집에서는 과수원을 크게 하였기에 원두막에 올라가 파수 보는 일을 돌아가면서 했다. 필자는 그 일이 제일 하기 싫었지만 어쩔 수 없이 올라가서 망을 보곤 했다. 이때 음악책 한 권을 들고 올라가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서 목청껏 노래를 부르곤 했다. 혼자서는 그렇게도 잘 부르던 노래 실력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소풍날, 장기자랑시간에 고개만 숙이다가 들어왔으니 아이들에게 놀림을 받을 만도 했다. 드디어 초등학교 졸업식이 다가왔다. 그 시절에는 중학교 입학시험이 있었기에 졸업을 앞둔, 면소재지 내에 4개 초등학교 아이들이 중학교에 가서 시험을 보았다. 운 좋게 수석은 못했어도 차석으로 합격통지서를 받았는데, 필자는 입학을 포기해야 했다. 이유는 그때 잘살던 필자 집이 마침 빚더미에 올라앉아 빚쟁이들이 집과 전답을 팔아 그들만의 빚잔치를 했기 때문이다. 입학금은 6600원. 차석합격자는 절반을 면제받았기에 3300원 만내면 중학교에 입학을 할 수 있었는데, 그 돈조차 여의치를 않아 포기해야 했다. 등록을 끝까지 안하니 어느 날, 중학교 교감선생님께서 찾아와서 딱한 집안 사정을 알아보고는 등록금은 고사하고 책만 사가지고 보내라고 했음에도 경황이 없으신 부모님이 포기하였다. 나중에서야 교감선생님이 다녀갔다는 말을 듣고는 어린 마음에 받은 상처는 두고두고 잊을 수가 없었다. 결국 필자는 인천으로 나와 유동에 있는 대양알미늄공장에 취직했다. 그 와중에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은 늘 떠나지 않았기에 동인천역 전에 있는 영어ㆍ수학학원에 등록했다.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까싶어 새벽에 신문배달을 하고 공장에 갔다가 돌아와서 저녁에 학원으로 가는 고된 생활이 이어졌다. 그후에 둘째 형이 대학을 졸업을 하고 서울 화양동에 있는 씨티즌 시계회사에 취직됐다. 필자를 포함한 네 명의 형제자매는 서울 뚝섬에 5만 원짜리 단칸 셋방을 얻어 서울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으며, 각자 할 일을 열심히 해 나갔다. 필자는 서울에서도 공장 생활을 이어갔다. 뚝섬 근처에 있던 한일공업사라는 공장에서 일했는데 처음에는 허드렛일을 시작하다가 점차 프레스 기계공으로 발전하면서 월급도 조금씩 올라갔다. 그런데 여사장은 서울에서는 꽤나 유명한 E여고의 전직 교사이었고, 어떤 연유에서인지 창업해서 공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웬만큼 신임을 얻은 후에 사장에게 슬그머니 공부에 대한 속내를 드러내 보였는데, 흔쾌히 야간중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시간을 허락해 주었다. 그렇게 주경야독(晝耕夜讀)의 서울 생활이 이어졌고, 2년 후 비록 친구들보다 1년이 늦었지만 당당하게 고등학교에 합격했다. 합격은 했지만 입학금이 없어 어린 마음에도 그 답답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기에 못 먹는 소주 한 병을 사들고 뚝섬유원지 둑에 홀로 앉아 아련한 강물을 바라보며 밤새도록 홀짝홀짝 술을 마시면서 울기도 하고 푸념도 하다가 잠이 들었다. 그런데, 며칠 후에 고향에서 아버지가 그 이자가 비싸다는 장리쌀 한가마니를 얻어 둘러메고 서울로 올라왔다. 올라오던 날 밤, 농사일에 여윌 대로 여윈 아버지가 전세방에서 곤하게 코를 골고 주무시는 모습을 바라보며 왠지 모를 눈물 한 방울이 뚝 떨어졌다. 어떻게 해서든지 열심히 공부를 해서 효도를 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고등학교 시절에도 주경야독의 고단한 생활은 변하지 않았지만 어둠 속에 빛을 찾아 헤매듯 열심히 공부를 하던 필자는 3학년이 되던 가을에 인생의 터닝 포인트를 맞게 되었다. 서울에서 5만 원짜리 전세방으로 시작한 우리 4남매는 회사로, 공장으로, 학교로, 학원으로 각자 나름대로 모두 열심히 살았다. 힘들고 어렵다는 생각보다는 희망찬 미래를 더욱 소중하게 생각하며, 적어도 행복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만큼 좋은 날들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젊어서 고생은 돈 주고 사서도 한다고 하지 않던가! 어려운 가운데서도 역경을 헤쳐 나갈 수 있었던 것은 긍정적 사고와 순수한 열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험난한 세상 서로 의지하며 열심히 살자던 어느 날, 바로 손위형님이 홀연히 국가의 부름을 받아 군에 입대하게 되었다. 그렇게 형님이 우리 곁을 떠나고 어머님의 생신날이 다가왔다. 군에 가신 형님의 생일은 음력 9월 9일이었고 어머님의 생신은 음력 9월 8일이었는데, 남매들은 어머님 생신날에 맞추어 미리 고향으로 모두 내려갔다. 그런데 내려간 날 저녁부터 필자는 엄청난 복통과 오한에 시달리며 꼼짝 못하고 건넌방 한쪽에 누워 있었다. 그 고통스러운 중에서도 불현듯 군에 간 형님 생각이 떠올랐다. 형님 생일이 오늘인데, 군에서 따뜻한 밥이라도 한 그릇 드셨을까? 이런 생각이 드니 아프다고 그냥 있는 수가 없었다. 가까스로 몸을 추슬러 큰형님과 같이 오매불망 그리워하던 형님을 면회 가기로 했다. 군사우편에 찍힌 부대 번호를 이런저런 사람들에게 물어 그곳이 강원 가평군이라는 것만을 알고 무작정 마장동시외버스터미널에서 그곳으로 가는 버스를 타게 되었다. 그런데 활짝 웃는 얼굴로 우리를 반겨야 할 형님은 싸늘한 시신으로 누워있었다. 아! 이 무슨 청천하늘에 날벼락이던가! 그리고 아버지가 비통하게 울부짖으시는 모습을 나는 그때 처음 봤다. 평소의 아버지는 산처럼 높고 엄하신 분이라 눈물도 없는 분 인줄 알았다. 가족 중에 얼굴을 확인하라고 하여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형님의 얼굴을 확인하셨는데, 그 순간 오열과 통곡을 하시면서 비틀거리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마음속으로 뜨거운, 아주 뜨거운 눈물을 삼키고 말았다. 꿈인가. 생시인가. 그렇게 형님은 사랑하는 가족을 남기고 떠나버렸다. 어떤 사유로 싸늘한 죽음을 맞았는지 너무 궁금한 필자 가족에게 부대 측에서는 순직통지서를 전하려고 서울 뚝섬 집주소로 찾아갔으나 사람이 없어 전달이 안됐다고 했다.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솟아오르는 분노! 애절하게 가족을 그리워하던 형님의 편지! 조금만 기다리면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한 순간에 스러지게 만든 사건! 은행잎이 노랗게 물든 그해 가을, 낙엽처럼 형님은 떠나고 말았다. 그 사건으로 형님은 서울 동작동국립묘지에 묻혔다. 형님이 국립묘지에 묻히던 날은 다음 해 1월 초,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던 날이었는데, 필자는 형님의 영정사진을 안고 묘지까지 행렬을 해야 했다. 행렬 내내 뜨거운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눈보라 속으로 형님의 모습이 언뜻언뜻 스쳐지나갔다. 보이지 않는 분노가 가슴 속 깊은 곳에 소용돌이 쳤다. 형님의 죽음에 항거라도 하듯이 필자는 사관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그리고 1974년 12월 21일 빛나는 육군소위로 임관하게 되었다. 고3 수험생으로 대입 준비를 하던 필자 인생이 전혀 뜻하지 않은 물꼬를 타고 흘러간 것이다. 무난하게 전ㆍ후방에서 군복무를 하던 필자는 1985년 가을쯤, 서울 삼각지에 있는 육군본부 작전참모부로 보직을 받게 되어 서울을 떠난 지 13년 만에 소령 계급장을 달고 금의환향(錦衣還鄕 )게 되었다. 군복무를 하면서도 공부에 대한 열정만큼은 버릴 수 없었던 필자는 이곳에서 일반대학 위탁교육 시험에 합격하여 서울에 있는 건국대학교 경영학과 3학년에 편입하였다. 주경야독의 생활은 결코 필자에게는 낯설지 않았다. 94년 만기전역할 때까지 필자는 공부를 계속하여 서울시립대학교 경영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를 받았다. 필자는 담당 교수님으로부터 박사과정에 대한 권고를 받았으나 이를 뒤로 한 채 새로운 세상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22년간의 군복무를 하면서 대부분의 시간들을 전방에서 보냈던 필자는 대개의 직업군인들이 그러하듯이 오직 진급에만 초점을 맞춘 삶을 살아왔었다. 전역을 앞두고 보니 모든 것이 허무하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전역 후의 삶은 조금은 다른 방향을 생각하게 되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필자는 전역 후에 직업을 갖는다면 누군가를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고 싶다는 원의ㅋㅋ(願意)를 가지고 있던 차에 지인의 추천으로 종교 계통에서 행정직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어린 시절, 글쓰기와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던 필자는 직장 생활을 하면서 여가시간을 활용하여 틈틈이 글쓰기를 게을리하지 않고 정진하여 98년 가을에 순수문학 수필작가로 문단에 정식으로 등단하게 되었다. 아울러 쉬는 날에는 열심히 출사를 나가 사진 찍는 작업을 시작하였다. 수필작가로 문단에 등단한 뒤 2년 후부터는 서예를 시작하였다. 필자의 어린 시절, 사랑방에서 야학서당을 운영하던 큰아버지의 영향을 받아서 늘 관심을 갖고 있던 차에 강포 김상용 선생님을 만나 서예에 정식으로 입문하여 그야말로 혼을 불사르듯 글공부를 하게 되었다. 2013년 9월 13일. 필자는 그동안 열심히 습작했던 글들을 모아 2권의 수필집을 출간 하게 되었다. 필자의 61세 되던 환갑 날, 서울에 있는 가락2동 성당에서 조촐한 축하미사와 함께 출판기념회를 가졌다. 친인척들과 60여 년 동안 살아오면서 이러저러한 신세를 졌던 지인들을 초대하여 식사를 대접하고 수필집을 선물로 드리게 되었다. 약 150여 명의 지인들이 참석하여 성황리에 격려와 축하의 인사가 이어졌다. ‘기적소리 울리는 인생의 기차를 타고’ 는 필자의 제1수필집으로, 태어나 힘차게 시동을 걸며 출발하였던 기차가 어느덧 60여년의 세월을 돌고 돌아 황혼이 아름답게 빛나는 플랫폼으로 멋지게 들어온다는 뜻이다. 내용은 그동안 삶의 애환을 반추하는 내용으로 꾸며져 있다. ‘황금빛 마음의 고향’ 이라는 제2수필집은 어린 시절 고향과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을 글로 표현한 작품집이었다. 필자는 그해 12월, 위 작품으로 순수문학 본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안게 되었다. 또한 같은 해 11월초에는 종로 인사동에서 동인들과 함께 그동안 갈고 닦았던 서예작품 전시회를 열게 되었다. 청년기 크고 작은 온갖 풍상을 겪으면서 살아온 필자는 뒤늦게 자신의 소질을 계발하여 열심히 작품 활동을 하면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되어 무한히 감사한 생각이 들었다. 2014년 12월 31일. 필자는 두 번째 정년퇴직을 맞게 되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쉬지 않고 직장생활로만 만 43년을 살아왔다. 참으로 많은 세월이 흘러갔다는 생각이 들었다. 2015년 12월에는 꿈에도 그리던 자녀들과의 만남을 위해 미국 콜로라도로 출발하였다. 필자는 딸과 아들, 두 자녀를 두었는데, 모두 미국에서 자리잡아 잘 살고 있다. 외손자 녀석이 초등학교 3학년이 되도록 첫 대면을 못했으니 오죽 보고 싶었을까. 2014년 12월부터 약 2개월간 손자 현서를 만나고, 자녀들과 함께 보냈던 것은 축복의 시간이었다. 필자는 정년퇴직을 하면서 그동안 조금씩 저축해 두었던 돈으로 고향인 인천 신공항 근처에 집을 한 채 지을만한 땅을 사두었다. 이제 그곳에 아담한 집을 짓고 집필 활동을 하면서 살고자 한다. 2020년경에는 새로 지은 소박한 집에서 매년 한 번씩 지인知人들을 초대해서 출판기념회와 사진전시회를 번갈아 열고 싶다. 삶의 멋진 이야기가 흐르는 저녁이 되지 않을까가 기대한다.
- 2016-06-24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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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니 자서전] 모성애 꽃은 그렇게 피어났다
- 첫번째 오남매가족사진, 1번 임산부필자 3번 40대의필자 4번 빛바랜 가족사진들 6번 두딸과 필자모습 카네이션 꽃들이 만발하는 5월이 되면 유년 시절의 필자는 그리움 반 미움 반으로 시들어진 꽃다발을 가슴에 품고 엄마를 그리다 잠이 들곤 했다. 어린 마음속에서 흘린 눈물은 차곡차곡 쌓여 강하고 모진 모성애를 잉태하기 시작했다. 눈물 속의 회상 어린 시절 필자 5남매는 주말이면 어김없이 어머니를 면회하기 위해 병원으로 향해야 했다. 필자가 아주 어릴 때부터 시작된 일종의 주말 이벤트였다. 그날도 우리는 큰오빠의 지시 아래 엄마에게 필요한 것과 음식을 정성껏 준비하고 묵묵히 오빠를 따라나섰다. 그리고 버스에 타 자리에 앉자마자 이내 차창 밖으로 시선을 떨군 뒤 멍하니 바깥만 응시했다.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에 얼굴을 들 수가 없어서였다. 버스가 서울 중랑구 면목동을 지나 중곡동 가까이에 닫자 필자의 가슴은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다. 마치 멀고 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변해 있을 어머니를 만나려면 미리 단단한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철창문이 열리고 퉁퉁 부어오른 모습으로 뒤뚱뒤뚱하며 걸어 나오는 어머니. 어머니 얼굴은 오랫동안 빛을 못 봐 하얗게 변해 버렸다. 또 오랜 병원 생활로 비정상적으로 부어 마치 ‘큰 바위 얼굴’ 같았다. 그리고 약에 취해버려 연신 흐느적댔다. 자식들은 그 만남을 어찌해야 할지 몰라 눈을 피하며 안절부절 어머니를 맞이했다. 아버지를 다른 여자에게 빼앗기고 그것도 모자라 구타까지 당했던 어머니. 그 옛날 귀한 집 외동딸로 태어나 심성 바르고 순수하며 착하던 어머니가 한평생을 정신 줄을 놓으시고 병원 생활로 약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어머니 그만 해요. 도대체 왜 그래? 그까짓 아버지 뭐하러 생각해! 우리가 있잖아.” 필자가 보탤 수 있는 말은 이뿐이었다. 이따금 아버지가 자식에 대한 책임감만으로 마지못해 병문안 왔다 가는 날에는 어머니의 병세는 더 나빠지고 어머니의 정서뿐 아니라 자식들 기분도 엉망이 되곤 했었다. 필자는 그런 아버지를 늘 원망했다. 돈 잘 벌어 양쪽 집 9남매 대학 보내 주는 것보다는 차라리 따뜻한 가정 속 아버지를 더 몸서리치도록 그리워했다. 그래서 5남매는 서로 만나면 침묵한다. 그게 더 아프지 않을 유일한 방법이니까 도망치듯 떠나온 어머니의 품 대학을 마치고 도망치듯 같은 캠퍼스 선배와 결혼했다. 그토록 그립던 사랑을 갈구하며 현실을 도피했는지도 모른다. 아니 전쟁 터 같은 생활들이 너무나 싫었다. 그러나 결혼생활 또한 살아온 각자의 삶이 다르듯 많이 부딪쳤다. 대학 졸업 후 시작한 교사직과 함께 나름대로 결혼생활에도 충실했으나 아이를 갖는다는 것은 자신이 없었다. 결혼 2년 후 큰아이를 임신하며 또 고통이 다가왔다. 건축 장교로 제대한 남편이 중동으로 파견 나간 후 필자가 임신 중독증으로 교단을 떠나야 했던 것이다. 혼자 남은 임산부 새댁은 유난히도 겁이 많았고 신혼생활의 달콤함을 접고 시댁으로 들어가 배부름을 혼자 감당해야 했다. 부자인 시어머니와 시아버지는 늘 여행을 일삼아 집을 비우셨고, 아침에 왔다 오후 5시면 돌아가는 도우미 아주머니가 유일한 친구였다. 어쩌다 어머니가 병원에서 퇴원할 때면 시부모의 허락을 받아 친정으로 달려갔다. 그토록 그리던 어머니를 마음으로 느끼며 손을 꼭 잡고 함께 잠드는 밤이면 비록 병든 어머니였으나 그 품이 왜 그리 따뜻했을까. 시댁에서 밤마다 방에 드리운 길다란 옷걸이 그림자가 무서워 잠 설쳤던 한 달 동안의 밀린 잠을 푹 잔듯했다. 중동에서 돌아온 남편은 건설 회사를 차렸고 4년 후 작은아이를 가졌다. 남편은 큰아이 때 못 해준 것을 만회하기 위해 이 아이를 여왕마마처럼 모시겠다고 굳게 약속을 하더니 반대로 필자도, 두 아이도 용서할 수 없는 큰 사고를 쳤다. 남편은 무릎 꿇고 벌벌 떨면서 사죄했지만 용서되지 않았다. 결국 죽을 힘 다해 쌓아 올렸던 가정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필자는 모든 것들은 다 포기 할 수 있었으나 아이들만큼은 손을 놓을 수가 없었다. 커다란 혼란과 방황이 시작되었고 그때부터 자신과의 싸움은 실로 ‘의지의 한국인’ 수준이었다. 그 방황을 감수하기 위한 유일한 수단으로 다시 대학을 다니며 학문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대학 때와는 전혀 다른 전공을 선택해 20세 차이 나는 아이들과 캠퍼스를 누볐다. 배움은 채워지지 않는 상처투성이 사랑의 빈 공간을 그나마 채워주었다. 늦은 나이에 다시 생소한 학문을 하며 젊은이들과 함께한 캠퍼스 생활은 신선한 삶의 충격이었다. 그 충격을 오래 누리고 싶어 대학원까지 다녔다. 그리고 드디어 시간강사, 전임강사가 되어 전국을 누렸다. 자신이 얼마나 멋지고 훌륭한지, 열심히 최선을 다하는지 확인하면서 모습이 무척이나 대견스러웠다. 백 번 말보다는 보여주는 교육이라고 했던가. 다행히도 두 아이들은 필자를 자랑스러워△하며 열심히 그 뒤를 따라와 주었다. 큰아이는 가장 존경하는 사람으로 필자를 추천하여 아이가 다니는 과학고등학교에서 장한어머니상도 받게 해주었다. 이보다 어떤 값진 보석이 또 있을까? 1997년 온 나라에 IMF라는 경제 위기가 몰아 닥쳤다. 하루아침에 남편 회사는 문을 내리고 가족은 빈털터리가 되었다. 고심 끝에 이민의 길을 선택했다. 한 가정의 기둥이 되어 위기를 기회로 삼아 어떻게든 어 다시 지붕을 쌓아가야 한다는 신념으로 가득했다. 남편을 설득해 먼저 보내고 초등학교를 졸업한 작은딸을 그 이듬해에 보냈다. 그리고 큰딸을 한국에 둔 채 필자는 2001년 LA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가족을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만으로 허물어져가는 가정의 든든한 기둥이 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동안 어렵게 오랜 시간 투자해 얻은 교수의 길, 필자의 것들을 다 포기해야만 했다. 무궁화 꽃 속으로 흐르는 눈물 한국과학기술대학교(KAIST)에서 국비 장학생으로 과외하며 생활하던 큰아이는 방학만 되면 가족이 보고 싶고, 엄마 품이 그립다며 열일 제치고 미국으로 날라왔다. 비록 낯설고 물 설은 이국 땅, 남의 나라였지만 그리웠던 가족의 재회는 얼마나 아름답고 귀한 삶의 원동력이었는지 모른다. 힘겨웠던 바닥생활 2년 후, 해변의 도시 싼타모니카에 세탁소를 시작했다. 필자는 바느질을 하고 남편은 빨래하며 자리잡기 시작했고 백인동네에 멋진 이층 집도 장만했다. 주말이면 1박 2일 파티도 열며 나름대로 훌륭한 이민생활을 했다. 다른 사람들은 필자 가족을 무척 부러워했다. 그러나 작은 아이가 우등생으로 ‘캘리포니아주립대 LA캠퍼스(UCLA)’를 졸업하고 언니가 있는 한국으로 나와 버렸다. 왔다갔다 하던 큰아이는 어느덧 멋진 의사가 되었고 작은 아이도 남의 나라에서는 더 이상 꿈을 펼 수가 없다며 훌쩍 떠나와 버렸다. 아이들이 떠나고 난 빈 자리를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가 없었다. 2층 아이의 방에는 덩그러니 아이의 그림자만 남아 있었고, 텅 비어버린 커다란 집은 더 이상의 따뜻한 가정이 아니었다. 심지어는 집에도 들어가지 않고 세탁소 2층에 머무르며 일만하며 살았다. 세탁소 재봉틀 앞에 큰 거울을 붙여놓고 필자 얼굴과 마주보며 외로움을 달래곤 했다. 필자는 또다시 미국 한 의대에 입학했고, 그 길만이 유일한 정신적 버팀목이었다. 세탁소 일이 끝나는 저녁 6시에 가서 밤 11시면 돌아왔다. 장장 8년에 걸쳐 졸업했다. 그리고 작은아이도 1년 후 의대에 합격했다. 어느덧 나이 60세를 향하면서 이민생활도 고갯길에 접어들어 수시로 불안감이 몰려왔다. 남편이 있어도 파고드는 고독함은 중병이 되어 대학병원 응급실을 드나들기 시작했다. 삶과 죽음이 하루에도 수십 번을 머리 속에서 교차했다. 어느 날인가 남의 나라에서 아이들과 떨어져 소리 없이 죽어가는 꿈을 꾸었다. TV 속에 한국 뉴스가 끝나고 애국가만 흘러도 눈물이 주룩주룩 얼굴을 타고 내렸다. 삶의 질을 찾아 떠나온 18년 세월에 늙고 병만 들어 마음은 마냥 연약해져만 갔다. 아이들이 있는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점점 더 몸을 황폐하게 만들어갔다. 마음이 아프면 몸도 아프다고 했던가? 미국은 사람 사는 곳이 아니라 일만 하는 노예의 삶이니 받아들이라며 세탁소에서 일만하던 남편도 필자 뒷바라지에 다리를 못쓰게 되었다. 병들은 부부는 낯설은 이국 땅에 내려앉은 눈커플만 껌뻑 거리며 나란히 누워버렸다. 피붙이라고는 아무도 없었다. 산다는 것에 깊은 회의를 느끼며, 아무리 좋은 선진국, 부와 사치스러운 명예, 그따위 것들이 있어도 아무것도 아님을 철저히 느끼던 날에 다시 아이들 곁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남편을 설득하고 뿌리를 내렸던 세월을 미련 없이 정리했다. 고생하며 정들어온 곳, 아픈 추억들이 고스란히 담긴 땅을 뒤로한 채 고국 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비행기 차창 너머로 피땀 흘려 견뎌온 시간들이 추억과 함께 너풀대며 날아다녔다. 아이들과 함께하는 행복한 꿈으로 온몸이 날아 갈 것만 같았다. 행복은 별 것 아니었다. 하늘에 떠 있는 작은 공간, 부푼 가슴이 천국이었다. 오랜 시간 공들여 모든 것들을 얻었으나 또 다 버리고 선택한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 다시 만나 만들어가는 소중한 가정의 행복을 무엇에 비유한단 말인가. 아이들을 향한 모성애 꽃이 만발하는 날, 한국 행 비행기 날개 가슴에는 무궁화 꽃이 활짝 피어났다.
- 2016-06-22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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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착한 환자 좋은 의사되기] 혈관에 시한폭탄 안은 중년 남성과 심장혈관 전문의의 라뽀
- 눈에 띄는 증상이나 통증 등으로 우리에게 경고하는 질병들은 어쩌면 요즘 표현법에 빗대면 ‘착한’ 질환일지도 모르겠다. 정말 무서운 것은 소리 없이 몸속에 자리 잡고, 시한폭탄처럼 어느 날 갑자기 폭발하는 질환이 아닐까. 경기도 부천시 세종병원에서 만난 최태현(崔太賢·70)씨도 그랬다. 예고 없이 나타난 증상에 당황했고, 더 큰 증상으로 자라는 두 번째 ‘폭탄’의 위험 앞에 서야 했다. 그래도 다행이었던 건 솜씨 좋은 ‘폭탄 해체전문가’ 신경외과 권기훈(權紀勳·44) 과장을 만난 것이었다. 글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사진 오병돈 프리랜서(Studio Pic) obdlife@gmail.com 최태현씨는 늘 그랬듯이 저녁 식사를 마치고 서둘러 순찰에 나섰다. 그가 경비를 맡은 건물은 IT회사들이 모여 있는 가산디지털단지 인근, 입주 기업들의 직원들은 야근이 잦았다. 저녁 순찰이라고 해도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7층 엘리베이터에서 발을 뗀 순간 갑자기 몸이 휘청거렸다. 열까지 나 간신히 벽에 의지한 채 자리에 돌아왔다. 그리고 그간 운동을 게을리한 자신을 자책했다. 한숨 돌릴 수 있게 되자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 보았다. 하지만 울렁거림은 쉬 나아지지 않았다. 속이 문제인가 싶어 위장약을 먹어봤지만 소용없었다. 그냥 비구름이 지나가길 기다릴 뿐이었다. 2013년 5월의 일이었다. 또다시 찾아온 어지럼증 그리고 석 달쯤 지났을 때였다. 증상은 또 느닷없이 찾아왔다. 이번엔 집에서였다. “TV를 보고 있었어요. 편안히 누워 있는 데도 갑자기 어지럼증이 오더라고요. 눈을 감아도 나아지질 않았죠. 이번에도 운동 부족인가 싶어 아령을 들고 진땀이 날 때까지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또 잦아들기를 기다렸죠.” 하지만 이번에는 그 평화가 오래가지 못했다. 그의 몸은 채 열흘도 버티질 못했다. “큰일인가 싶어 병원을 찾았죠. 무조건 큰 병원으로 가야겠다 싶어 근처 대학병원을 향했어요. 그런데 너무 오래 기다려야 하는 거예요. 당장 치료도 어렵다고 하고. 막막하더라고요.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르겠고. 그래서 무작정 택시를 타고 하소연을 했더니 기사가 세종병원을 추천해주더라고요. 심장하고 혈관 치료를 잘한다고. 미심쩍었지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일단 가자고 했죠.” 그를 가장 괴롭혔던 것은 무력감이었다고 최씨는 토로했다. 청춘은 아니지만 뜨겁게 인생을 살아가기에 충분한 나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한순간 몸의 한 부분이 일시에 무너지는 것처럼 무력한 기분이 한 번에 밀려왔다고 기억했다. 권기훈 과장은 그의 환자 최태현씨를 아주 잘 기억했다. UCSF(캘리포니아대학교 샌프란시스코 캠퍼스) 병원에서 뇌혈관 전문의로 연수를 마친 후 세종병원에 부임해 보름도 안 되어 만난 환자였기에 때문이다. “제가 1일 부임하고 13일 최태현씨가 내원하셨으니 첫 환자나 다름없었어요. 가장 기억에 남는 것 중 하나는 무척 우울해 보였다는 것이었죠. 검사 결과 동맥경화로 인해서 경동맥에 심한 협착이 있었어요.” 병원을 믿을 수 있을까 고민도 동맥경화로 인한 경동맥 협착은 목동맥이라고도 부르는 경동맥에 수도관이 녹슬고 이물질이 침착하여 관이 좁아지게 되는 것처럼, 혈관의 가장 안쪽을 덮고 있는 내막에 콜레스테롤이 쌓이고, 혈전이 생겨 혈액의 흐름을 막는 병이다. 이러한 증상이 오래되면 혈관이 탄력을 잃고 딱딱해지는 석회화 현상이 발생해, 인체가 혈압 변화를 통해 혈류 조절하는 것을 막게 된다. 최씨는 당연히 수술을 해야 한다는 얘기에 겁부터 났다. 평생 건강한 몸을 자랑으로 살았고, 체중 관리에 문제가 있었던 적도 없었다. 내 몸을 맡겨도 될까? 더 큰 병원으로 가볼까 하는 유혹에 고민도 했다. 그런 고민을 해결해 준 것은 큰딸이었다. “사실 세종병원은 처음이 아니었어요. 십여 년 전에 온 적이 있었는데, 제 기억엔 지금보다 훨씬 규모가 작은 병원이었거든요. 그렇게 고민하고 있을 때 이곳저곳을 알아본 딸아이가 그러더라고요. 여기서 치료받자고. 믿어도 될 것 같다고. 그래서 수술을 결정했죠. 고민하는 과정에서 교수님이나 다른 분들께 괜한 소리도 한 것 같아 죄송한 마음이 듭니다.(웃음)” 이에 대해 권기훈 과장은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이었다. “환자들이 병원을 고르는 과정에서 심사숙고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전문가가 아니시니까 이것저것 궁금한 것이 많은 것도 당연하고요. 의사의 역할 중 하나는 환자가 질환에 대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죠. 수술할지 말지, 어떤 의료기관을 선택할지 결정하는 것은 환자의 뜻이기 때문에, 고민은 당연히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환자 따르게 하는 유대감이 낫게 해 권 과장의 이야기를 듣고 의구심이 생겼다. 외과의사의 가장 큰 덕목은 수술 실력이 아닐까? 환자와의 관계 형성이 진료에 미치는 영향이 클까? 이런 우문에 권 과장이 내놓은 현답은 이렇다. “최태현씨가 좋은 예후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제 수술 실력이 월등하게 뛰어나서가 아니라 라뽀, 즉 마음의 유대감 때문입니다. 저도 미국과 한국 여러 의료현장을 가 봤지만, 저보다 손기술이 뛰어난 의사들은 정말 많아요. 특히 한국 의사들 수술 실력은 세계에서도 알아주니까요. 좋은 결과가 있었던 것은 다행히 환자가 저를 신뢰해 제가 말씀드린 대로 따라주었던 것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병은 수술만큼이나 수술 후의 약물치료도 무척 중요하니까요. 수술 후 복용해야 하는 혈전용해제를 귀찮다고 건너뛰기 시작하면 되레 수술 전보다 더 상태가 악화할 수 있습니다.” 권 과장이 미국 연수과정에서 느꼈던 것 중의 하나도 의사와 환자와의 관계 형성이었다고 했다. 충분히 환자의 의견이나 요구를 귀 기울여 들어주는 것이다. 실제로 지금도 진찰 과정에서 시간을 많이 쓰는 의사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어렵게 수술이 결정되고 치료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2013년 9월 5일 우측 경동맥에 스텐트 삽입술이 진행되고, 20일 후인 25일에 좌측 경동맥에 다시 스텐트 삽입술이 시행됐다. 동맥경화로 인한 경동맥 협착 수술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굉장한 대수술이었다. 혈관을 직접 절개해야 했기 때문에 전신마취를 하는 것은 기본이고 뇌에 공급되는 혈액을 차단해야 했다. 혈액 차단은 뇌에 산소 공급이 중단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수술시간도 제한적이고 후유증의 위험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최근 사용되고 있는 혈관 성형술은 혈관을 따라 작은 관을 삽입해 끝에 달린 작은 풍선을 불어 혈관을 넓히는 방법이다. 큰 수술도 아니고 후유증도 적다. 석회화가 심한 경우 여기에 금속으로 된 망사형태의 파이프인 스텐트를 위치시키면, 망사 사이로 내피세포가 자라면서 원래의 매끄러운 혈관 안쪽 표면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흔히 동맥경화를 시한폭탄에 비유하는 것은 뇌에 치명적인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동맥경화로 인해 뇌 쪽에 산소가 충분히 공급되지 못하면 별다른 장애 증상이 없는 상태에서 뇌조직에 손상을 준다. 이러한 질환을 뇌경색이라고 부른다. 어지럼증이나 발음이 어눌해지고, 움직임이 둔해지면 뇌경색을 의심해봐야 한다. 심한 경우 안면마비, 반신마비 등이 올 수 있다. 또 혈관에 쌓인 혈전이 뇌혈관을 막고, 심한 경우 뇌혈관이 터져 출혈이 발생하면 뇌졸중이 된다. 뇌경색이나 뇌졸중이 발생하면 정상으로 회복하기는 매우 어렵다. 동맥경화의 조기발견과 치료가 중요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병원 찾는 것 겁내지 말아야 최씨는 수술을 위해 일을 잠시 쉬었지만 휴식은 두 달이면 충분했다. “아프면서 생긴 우울했던 기분은 수술 직후까지 계속되긴 했죠. 하지만 퇴원 이후 꾸준히 약물치료도 하고, 운동도 하면서 몸이 나아지자, 기분도 함께 제자리로 돌아왔습니다. 처음에는 10~15분 정도밖에 걷지 못했는데, 1시간 넘게 걷는 것도 너끈해지자 다시 일을 시작해도 되겠다 싶더라고요. 그래서 두 달 만에 새 직장을 찾고 일을 시작했습니다.” 수술을 하고 나서 달라진 또 하나의 변화는 바로 잠이다. 젊을 때도 깊이 잠들기 어려웠던 최씨는 이제 그 어느 때보다 잠을 깊게 잘 수 있게 됐다고 좋아했다. 수술 이후에 즐겨 먹는 음식은 양파 달인 물이다. 양파 껍질만 구해 말린 다음 구기자, 감초와 함께 달여먹는데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 든단다. 또 집 주변의 가까운 산을 오르면서 건강관리를 해 나가고 있다고. 마지막으로 권기훈 과장은 뇌혈관질환은 일반적인 건강관리 지침만 지켜도 충분히 예방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기본적인 성인병인 고혈압과 당뇨병, 고지혈증만 잘 관리해도 뇌혈관질환은 예방할 수 있습니다. 술과 담배, 과로를 멀리해야 하는 것도 중요하고요. 이런 기본적인 것들만 지켜줘도 상당 부분 예방할 수 있습니다. 특히 동맥경화는 오랜 기간 찌꺼기가 쌓이면서 생기는 병인 만큼 나이가 많을수록 발병 소지는 더욱 높아집니다. 따라서 어지럽거나 두통이 심하거나 시야가 흐려지는 등의 증상이 나타나면 가까운 병원에서 전문의를 꼭 만나보시길 부탁드립니다.” 최태현씨의 마지막 당부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번에 큰일을 겪으면서 큰 병원, 좋은 병원을 찾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빨리 병원을 찾는 것이라는 것을 배웠어요. 대학병원도 장점이 있겠지만, 규모는 작아도 같은 의사가 진찰부터 수술까지 맡아서 해준다는 장점이 있다는 것도 알았고요. 이제는 저도 몸의 이상이 있으면 바로바로 병원을 찾곤 합니다. 주변에도 꼭 그러라고 권하고 다닙니다.”
- 2016-06-22 1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