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 띄는 증상이나 통증 등으로 우리에게 경고하는 질병들은 어쩌면 요즘 표현법에 빗대면 ‘착한’ 질환일지도 모르겠다. 정말 무서운 것은 소리 없이 몸속에 자리 잡고, 시한폭탄처럼 어느 날 갑자기 폭발하는 질환이 아닐까. 경기도 부천시 세종병원에서 만난 최태현(崔太賢·70)씨도 그랬다. 예고 없이 나타난 증상에 당황했고, 더 큰 증상으로 자라는 두 번째 ‘폭탄’의 위험 앞에 서야 했다. 그래도 다행이었던 건 솜씨 좋은 ‘폭탄 해체전문가’ 신경외과 권기훈(權紀勳·44) 과장을 만난 것이었다.
글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사진 오병돈 프리랜서(Studio Pic) obdlife@gmail.com
최태현씨는 늘 그랬듯이 저녁 식사를 마치고 서둘러 순찰에 나섰다. 그가 경비를 맡은 건물은 IT회사들이 모여 있는 가산디지털단지 인근, 입주 기업들의 직원들은 야근이 잦았다. 저녁 순찰이라고 해도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7층 엘리베이터에서 발을 뗀 순간 갑자기 몸이 휘청거렸다. 열까지 나 간신히 벽에 의지한 채 자리에 돌아왔다. 그리고 그간 운동을 게을리한 자신을 자책했다. 한숨 돌릴 수 있게 되자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 보았다. 하지만 울렁거림은 쉬 나아지지 않았다. 속이 문제인가 싶어 위장약을 먹어봤지만 소용없었다. 그냥 비구름이 지나가길 기다릴 뿐이었다. 2013년 5월의 일이었다.
또다시 찾아온 어지럼증
그리고 석 달쯤 지났을 때였다. 증상은 또 느닷없이 찾아왔다. 이번엔 집에서였다.
“TV를 보고 있었어요. 편안히 누워 있는 데도 갑자기 어지럼증이 오더라고요. 눈을 감아도 나아지질 않았죠. 이번에도 운동 부족인가 싶어 아령을 들고 진땀이 날 때까지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또 잦아들기를 기다렸죠.”
하지만 이번에는 그 평화가 오래가지 못했다. 그의 몸은 채 열흘도 버티질 못했다.
“큰일인가 싶어 병원을 찾았죠. 무조건 큰 병원으로 가야겠다 싶어 근처 대학병원을 향했어요. 그런데 너무 오래 기다려야 하는 거예요. 당장 치료도 어렵다고 하고. 막막하더라고요.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르겠고. 그래서 무작정 택시를 타고 하소연을 했더니 기사가 세종병원을 추천해주더라고요. 심장하고 혈관 치료를 잘한다고. 미심쩍었지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일단 가자고 했죠.”
그를 가장 괴롭혔던 것은 무력감이었다고 최씨는 토로했다. 청춘은 아니지만 뜨겁게 인생을 살아가기에 충분한 나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한순간 몸의 한 부분이 일시에 무너지는 것처럼 무력한 기분이 한 번에 밀려왔다고 기억했다.
권기훈 과장은 그의 환자 최태현씨를 아주 잘 기억했다. UCSF(캘리포니아대학교 샌프란시스코 캠퍼스) 병원에서 뇌혈관 전문의로 연수를 마친 후 세종병원에 부임해 보름도 안 되어 만난 환자였기에 때문이다.
“제가 1일 부임하고 13일 최태현씨가 내원하셨으니 첫 환자나 다름없었어요. 가장 기억에 남는 것 중 하나는 무척 우울해 보였다는 것이었죠. 검사 결과 동맥경화로 인해서 경동맥에 심한 협착이 있었어요.”
병원을 믿을 수 있을까 고민도
동맥경화로 인한 경동맥 협착은 목동맥이라고도 부르는 경동맥에 수도관이 녹슬고 이물질이 침착하여 관이 좁아지게 되는 것처럼, 혈관의 가장 안쪽을 덮고 있는 내막에 콜레스테롤이 쌓이고, 혈전이 생겨 혈액의 흐름을 막는 병이다. 이러한 증상이 오래되면 혈관이 탄력을 잃고 딱딱해지는 석회화 현상이 발생해, 인체가 혈압 변화를 통해 혈류 조절하는 것을 막게 된다.
최씨는 당연히 수술을 해야 한다는 얘기에 겁부터 났다. 평생 건강한 몸을 자랑으로 살았고, 체중 관리에 문제가 있었던 적도 없었다. 내 몸을 맡겨도 될까? 더 큰 병원으로 가볼까 하는 유혹에 고민도 했다.
그런 고민을 해결해 준 것은 큰딸이었다.
“사실 세종병원은 처음이 아니었어요. 십여 년 전에 온 적이 있었는데, 제 기억엔 지금보다 훨씬 규모가 작은 병원이었거든요. 그렇게 고민하고 있을 때 이곳저곳을 알아본 딸아이가 그러더라고요. 여기서 치료받자고. 믿어도 될 것 같다고. 그래서 수술을 결정했죠. 고민하는 과정에서 교수님이나 다른 분들께 괜한 소리도 한 것 같아 죄송한 마음이 듭니다.(웃음)”
이에 대해 권기훈 과장은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이었다.
“환자들이 병원을 고르는 과정에서 심사숙고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전문가가 아니시니까 이것저것 궁금한 것이 많은 것도 당연하고요. 의사의 역할 중 하나는 환자가 질환에 대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죠. 수술할지 말지, 어떤 의료기관을 선택할지 결정하는 것은 환자의 뜻이기 때문에, 고민은 당연히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환자 따르게 하는 유대감이 낫게 해
권 과장의 이야기를 듣고 의구심이 생겼다. 외과의사의 가장 큰 덕목은 수술 실력이 아닐까? 환자와의 관계 형성이 진료에 미치는 영향이 클까? 이런 우문에 권 과장이 내놓은 현답은 이렇다.
“최태현씨가 좋은 예후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제 수술 실력이 월등하게 뛰어나서가 아니라 라뽀, 즉 마음의 유대감 때문입니다. 저도 미국과 한국 여러 의료현장을 가 봤지만, 저보다 손기술이 뛰어난 의사들은 정말 많아요. 특히 한국 의사들 수술 실력은 세계에서도 알아주니까요. 좋은 결과가 있었던 것은 다행히 환자가 저를 신뢰해 제가 말씀드린 대로 따라주었던 것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병은 수술만큼이나 수술 후의 약물치료도 무척 중요하니까요. 수술 후 복용해야 하는 혈전용해제를 귀찮다고 건너뛰기 시작하면 되레 수술 전보다 더 상태가 악화할 수 있습니다.”
권 과장이 미국 연수과정에서 느꼈던 것 중의 하나도 의사와 환자와의 관계 형성이었다고 했다. 충분히 환자의 의견이나 요구를 귀 기울여 들어주는 것이다. 실제로 지금도 진찰 과정에서 시간을 많이 쓰는 의사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어렵게 수술이 결정되고 치료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2013년 9월 5일 우측 경동맥에 스텐트 삽입술이 진행되고, 20일 후인 25일에 좌측 경동맥에 다시 스텐트 삽입술이 시행됐다.
동맥경화로 인한 경동맥 협착 수술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굉장한 대수술이었다. 혈관을 직접 절개해야 했기 때문에 전신마취를 하는 것은 기본이고 뇌에 공급되는 혈액을 차단해야 했다. 혈액 차단은 뇌에 산소 공급이 중단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수술시간도 제한적이고 후유증의 위험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최근 사용되고 있는 혈관 성형술은 혈관을 따라 작은 관을 삽입해 끝에 달린 작은 풍선을 불어 혈관을 넓히는 방법이다. 큰 수술도 아니고 후유증도 적다. 석회화가 심한 경우 여기에 금속으로 된 망사형태의 파이프인 스텐트를 위치시키면, 망사 사이로 내피세포가 자라면서 원래의 매끄러운 혈관 안쪽 표면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흔히 동맥경화를 시한폭탄에 비유하는 것은 뇌에 치명적인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동맥경화로 인해 뇌 쪽에 산소가 충분히 공급되지 못하면 별다른 장애 증상이 없는 상태에서 뇌조직에 손상을 준다. 이러한 질환을 뇌경색이라고 부른다. 어지럼증이나 발음이 어눌해지고, 움직임이 둔해지면 뇌경색을 의심해봐야 한다. 심한 경우 안면마비, 반신마비 등이 올 수 있다.
또 혈관에 쌓인 혈전이 뇌혈관을 막고, 심한 경우 뇌혈관이 터져 출혈이 발생하면 뇌졸중이 된다. 뇌경색이나 뇌졸중이 발생하면 정상으로 회복하기는 매우 어렵다. 동맥경화의 조기발견과 치료가 중요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병원 찾는 것 겁내지 말아야
“아프면서 생긴 우울했던 기분은 수술 직후까지 계속되긴 했죠. 하지만 퇴원 이후 꾸준히 약물치료도 하고, 운동도 하면서 몸이 나아지자, 기분도 함께 제자리로 돌아왔습니다. 처음에는 10~15분 정도밖에 걷지 못했는데, 1시간 넘게 걷는 것도 너끈해지자 다시 일을 시작해도 되겠다 싶더라고요. 그래서 두 달 만에 새 직장을 찾고 일을 시작했습니다.”
수술을 하고 나서 달라진 또 하나의 변화는 바로 잠이다. 젊을 때도 깊이 잠들기 어려웠던 최씨는 이제 그 어느 때보다 잠을 깊게 잘 수 있게 됐다고 좋아했다.
수술 이후에 즐겨 먹는 음식은 양파 달인 물이다. 양파 껍질만 구해 말린 다음 구기자, 감초와 함께 달여먹는데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 든단다. 또 집 주변의 가까운 산을 오르면서 건강관리를 해 나가고 있다고.
마지막으로 권기훈 과장은 뇌혈관질환은 일반적인 건강관리 지침만 지켜도 충분히 예방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기본적인 성인병인 고혈압과 당뇨병, 고지혈증만 잘 관리해도 뇌혈관질환은 예방할 수 있습니다. 술과 담배, 과로를 멀리해야 하는 것도 중요하고요. 이런 기본적인 것들만 지켜줘도 상당 부분 예방할 수 있습니다. 특히 동맥경화는 오랜 기간 찌꺼기가 쌓이면서 생기는 병인 만큼 나이가 많을수록 발병 소지는 더욱 높아집니다. 따라서 어지럽거나 두통이 심하거나 시야가 흐려지는 등의 증상이 나타나면 가까운 병원에서 전문의를 꼭 만나보시길 부탁드립니다.”
최태현씨의 마지막 당부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번에 큰일을 겪으면서 큰 병원, 좋은 병원을 찾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빨리 병원을 찾는 것이라는 것을 배웠어요. 대학병원도 장점이 있겠지만, 규모는 작아도 같은 의사가 진찰부터 수술까지 맡아서 해준다는 장점이 있다는 것도 알았고요. 이제는 저도 몸의 이상이 있으면 바로바로 병원을 찾곤 합니다. 주변에도 꼭 그러라고 권하고 다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