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종 송년회가 줄을 잇는다. 올해도 송년 모임이 14개 정도 된다. 저녁 약속이 많은 것은 별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저녁 자리의 술이다. 한창때만큼 마시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기분이 업 될 정도로는 마신다. 분위기 좋은 날은 좀 오버할 때도 있다.
문제는 내가 술 마시는 것을 아내가 싫어한다는 거다. 지난 시절 술로 인해 몇 번 아내의 속을 태웠던 원죄가 있어 아내의 이해 부족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유일한 해결 방법은 술을 마시지 않으면 되는 것인데, 그렇다고 사느라 안간힘을 다해 붙잡고 있는 이성의 질긴 밧줄을 잠시 야들야들하게 해주는 이 묘약을 완전히 놓아버릴 수가...
이틀 전 초등학교 동창 송년회 때 마신 술 때문에 아내가 화가 잔뜩 났다. 그런 상태에서 피치 못할 사정으로 ‘예술의 전당’에서 하는 한국-덴마크 수교 60주년 기념 ‘덴마크 로열 오케스트라’ 초청 공연에 아내와 함께 갔다. 썰렁한 작은 불편함을 마음 한구석에 담아 놓은 채 객석에 앉았다.
570년 역사를 자랑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오케스트라와 세계적인 지휘자 ‘토마스 손더가드’의 첫 내한 공연이었다. 거기에 유명 피아니스트 ‘선우예권’이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을 한국에서 처음으로 선보이는 자리였다.
먼저 ‘헬리오스 서곡(Helios overture), Op.17’로 무대를 열었다. 어둠과 고요 속에서 서서히 호른, 현악기와 목관 악기들의 선율이 등장한 후 트럼펫의 팡파르가 울리며 연주는 신화의 이야기들을 풀어나갔다. 영화 ‘스페이스 오디세이’에 인용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서곡이 연상되었다. 오케스트라는 지구별 빛과 어둠이 닿기 시작하는 새벽에서부터 코발트 빛 하늘이 오렌지빛 석양으로 물들어갈 때까지 에게 해의 하루 풍경을 영혼이 울리는 소리의 빛깔로 그렸다. 밤의 여신이 살포시 고개를 들면서 첫 번째 프로그램 연주는 끝났다.
고개를 돌리니 수많은 별 중 지구별에서, 수많은 사람 중에서 인연이 된 유일한 한 사람이 옆에 있었다.
라흐마니노프의 작품에는 러시아풍의 우수적 정서가 잔뜩 담겨있다 보니 많은 한국 사람들이 그의 음악을 좋아한다. 이날 두 번째 프로그램인 ‘피아노 협주곡 제2번 다단조, Op.18’도 예외 없었다. 처음 부분의 묵직한 베이스 음부터 한국인의 정서에 짝 맞았다. 이어지는 러시아풍 리듬과 차이콥스키의 협주곡 같은 템포와 선율에 이르러서는 점점 깊이 소리에 빠져들어 갔다. 피아니스트의 현란한 연주에 몰입돼있을 때 오케스트라의 격앙된 합주가 정신을 깨웠다. 그 밝고 환한 기세를 몰아 장쾌한 화음으로 연주가 끝났다.
‘인연이 된 유일한 사람을 위해 못 할 게 뭐가 있을까? 한창 연애할 때였으면 나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 술로 인해 불편한 아내가 원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마지막 연주는 무소르그스키의 모음곡 '전람회의 그림'이었다. 스케치와 수채화에서 받은 인상과 감흥을 바탕으로 작곡한 이 음악이 이렇게 재미있는 줄은 처음 알았다. 곡이 연주되는 동안 수십 편의 디즈니 만화영화를 보는 듯한 행복에 빠졌다. 그 소리에는 ‘톰과 제리’ ‘알라딘’ ‘라푼젤’ ‘라이온 킹’등 내가 알고 있는 만화영화의 주인공들이 다 있었다. ‘마음의 정화’ 그렇다! 마음이 정화되는 연주였다. 특히 내게 의미 있었던 소리는 종소리였다. 12월에 들리는 소리로 잘 어울렸다. 연주에서 들은 종소리는 끝을 알림과 동시에 시작을 알리는 의미의 소리였다.
당분간 술을 안 마실 생각이다. 아직 유일한 인연인 사람을 위해 다른 것을 포기할 수 있을 정도의 사랑은 가슴에 남아있는 것 같다. '전람회의 그림' 연주에서 울린 종소리는 누구에게 울린 종소리였을까? 술에게? 나에게?
단풍과 함께 막바지로 흘러가고 있는 가을의 정취를 담은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의 ‘모던 로즈’ 전이다. 이 전시가 특별한 것은 미술관 자체의 역사를 미술로 승화시켰다는 점이다. 우리 역사와 겹치는 기구한 과정이 분야별로 놀랍게 재현되어 있다. 전시는 지난달 15일부터 내년 3월 1일까지다.
전시회 이름이 ‘모던 로즈’인 것은 구 벨기에 영사관이었던 이 건물의 정원에 있던 300그루의 장미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장미는 엄밀히 말하면 ‘모던 로즈’다. 굳이 모던 로즈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은 원래 유럽의 장미는 ‘올드 장미’로 여름에만 피는 꽃인데 동양의 사철 피는 월계화와 접목하여 오늘날의 장미가 되었기 때문이다.
구 벨기에 영사관 마당의 모던 로즈는 영사관 운명만큼 기구하다. 일제강점기에 영사관이 매각되면서 장미는 조선호텔로 팔려 ‘로즈 가든’이 되었다. 마침 이때 이 로즈 가든을 거닐던 사업가 이근무 씨는 이 장미를 바라보며 서양식 백화점 경영을 꿈꿨다고 일기에 적었다. 그 기록이 당시 ‘삼천리’라는 잡지에 실려 지금도 남아 있다.
처음 회현동에 있던 벨기에 영사관은 도시개발로 지금 있는 사당동으로 옮겨졌다. 이러한 현기증 나는 시대의 변화와 속도를 상징적으로 구현한 코너가 김익현 작가의 ‘나노미터의 세계’이다. 영사관의 시대적 변화와 물리적인 변천을 현대의 반도체 기술과 컴퓨터의 기록과 기억이 작동하는 방식을 통해 아날로그적 변화를 디지털로 변용해 표현한다.
1903년 지은 벨기에 영사관은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벨기에 특유의 블루 타일 등 거의 모든 건축자재를 본국에서 배에 실어 가져왔다. 그리스 로마식 기둥과 장식 등은 그 시대를 떠올리며 시간 여행을 하는 듯하다. 여기서 신고전주의 의복 오브제 소재로 창안한 작품이 곽이브 작가의 ‘셀프 페인팅’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리스 로마 문양 천으로 만든 클라미스, 키톤을 걸치고 감상함으로써 작품의 일부가 된다는 점이다.
김영글 작가의 ‘파란 나라’는 벨기에 만화 캐릭터인 스머프가 근현대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그의 시선으로 표현하며 ‘행복이란 무엇인가?’라는 철학적인 질문도 한다. 아이들이 흥미를 느낄 수 있는 작품은 또 있다. 레고를 연상시키는 금혜원 작가의 ‘변칙 조립’이다. 3D 프린터로 만든 퍼즐 조각들의 해체 이동 재건 과정에서 색다른 건축물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을 가상한 것이다. 그 과정을 보며 은연중에 남서울미술관의 변화도 느낄 수 있다.
가상의 세계를 표현한 또 다른 작품은 고재욱 작가의 ‘작품처럼 보이는’이다. 대부분의 인류는 사라지고 AI가 지배하는 세계다. 2551년 그들은 인류의 예술적 유산을 보존하며 남서울미술관에 주목한다. 그 역사적 배경을 소개하며 AI들은 인류에게 미술관은 왜 필요했는지를 상상한다는 설정이다.
그들도 설치물들을 미술 작품으로 판단하지만, 과연 그것이 미술작품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조형물을 설치해 역설적으로 ‘현재의 미술은 무엇인가?’라는 질문도 던진다. AI들이 이러한 건축이나 작품을 만든 인류를 존경하며 그들의 멸종을 막기 위해 힘쓰는 모습도 감동적이다.
건물 귀퉁이 요소요소에 숨겨진 아름다운 문양과 독특한 건축 양식을 하나의 연극 무대로 구상한 이종건 작가의 ‘어느 무대’도 상상력이 돋보인다. 마지막으로 이번 전시의 압권은 40년 만에 공개된 미술관의 다락방이다. 건축할 때 생긴 귀퉁이 돌이나 이전할 때 어쩔 수 없이 남겨진 장식들이 보관된 한 편 굴뚝에는 임흥순 작가의 ‘노스탤지어’가 상영된다. 이곳은 하루에 한 번 오후 4시에 인터넷으로 예약한 5명만 들어갈 수 있다.
다 보고나니 질곡의 삶을 보내며 잘 견뎌낸 남서울미술관이 어느새 의인화되어 존경하고 싶어진다. 함께 늙어가는 동료처럼 느껴져 가는 가을 바라보며 스산한 나의 마음을 위로해준다.
59년 전통 ‘오뎅식당’
의정부 맛집 하면 ‘부대찌개’를 빼놓을 수 없다. 의정부중앙역 인근 부대찌개거리에는 오래된 가게들이 많은데, 그중에서도 ‘오뎅식당’은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50여 년 전, 창업주인 허기숙 씨는 어떻게 처음 부대찌개를 만들게 됐을까? 그의 손자이자 현 주인장인 김민우(37) 씨가 부대찌개의 탄생 비화를 들려준다.
“원래는 어묵을 파는 포장마차였어요. 어느 날부터인가 식당 근처 미군부대에 근무하던 손님들이 햄, 소시지, 베이컨을 가져와 할머니에게 안주거리를 만들어 달라고 했죠. 처음엔 가져온 재료를 볶아서 내놓았는데, 단골들이 밥과 먹을 만한 찌개를 해달라고 한 거예요. 그래서 기존 재료들에 김치랑 장을 더해서 찌개로 만들었는데, 그게 오늘날 부대찌개가 됐습니다.”
부대찌개 전문점이지만 어묵을 팔던 시절 손님들이 부르던 이름 그대로 ‘오뎅식당’이라는 상호를 쓰고 있다. 사실 이곳은 허영만의 만화 ‘식객’을 통해 소개되며 유명해졌다. 만화에서도 묘사된 국물 특유의 부담 없는 단맛은 오뎅식당 부대찌개만의 매력 포인트다. 기본 부대찌개에는 햄, 소시지, 두부, 다진 소고기, 당면, 김치 등이 들어간다. 여기에 저마다 입맛에 맞는 사리를 추가해 먹을 수 있는데, 가장 인기 있는 건 아무래도 ‘라면 사리’라고 한다. 주인장은 사리용 라면에도 특별함이 숨어 있다고 설명했다.
“6개월 연구 끝에 오뎅식당 전용 라면사리를 만들었습니다. 부대찌개에 특화된 면인데, 콜라겐을 넣어 더 쫄깃하고 탱탱한 게 특징이죠. 일반 라면보다도 덜 불고요. 기본 재료와 반찬으로 내는 김치도 여주에 있는 공장에서 직접 담아 숙성시킵니다. 저희 묵은지에 매력을 느껴 찾는 단골도 많아요.”
기본 부대찌개는 옛 방식을 그대로 고수해왔지만, 그때그때 유행을 반영해 사리 메뉴는 달라졌다. 어떤 사리를 넣느냐에 따라 맛이 달라지는 부대찌개의 특성이 남녀노소 모두 즐길 수 있는 장점이자 장수 비결이 됐다. 오뎅식당은 최근 타 지역에도 직영점을 열며 더 많은 고객과의 만남을 꾀하고 있다. 물론 어느 곳을 가더라도 동일한 부대찌개 맛을 자부한다는 주인장이다.
“변함없는 맛이 철칙이기 때문에 직영으로만 운영하고, 체인점을 낼 계획은 전혀 없습니다. 새로 연 가게들은 모던한 인테리어이지만, 제게 가업을 이으라 하셨던 할머니의 흔적들을 남기고 싶어 매장마다 할머니 사진을 꾸며놓았죠. 할머니가 그러셨듯이 저 또한 두 아들에게 꼭 가업을 이어가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의정부경전철 의정부중앙역 2번 출구 도보 2분 거리
주소 경기도 의정부시 호국로1309번길 15
영업시간 매일 8:30~20:30
대표메뉴 부대찌개, 모둠사리, 라면사리 등
※ 본 기획 취재는 (사)한국잡지협회의 지원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일전에 지인으로부터 영화관 메가박스에서 영화를 볼 수 있는 감상권을 선물 받았다. 주변에 있는 메가박스를 모두 검색했건만 어쩐 일인지 오로지 ‘어벤져스 엔드 게임’밖에 볼 수 없었다. 어쨌든 그래서 젊은 관객들 틈에 끼어 장장 세 시간을 앉아 영화를 봤다.
영화는 멜로, 스펙터클, SF 등이 뒤범벅된 성대한 잔칫상이었다. 할리우드의 기술력을 총동원한 CG(컴퓨터 그래픽스)가 화려하게 뒤섞여 꿈인지 현실인지 모를 세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등장인물이 수도 없이 많고, 스토리도 다양한 인물에 맞춰 짧게 스케치하듯 지나가 잠깐 졸았다간 맥락을 놓치기 십상이었다.
나중에야 내가 실수했다는 걸 깨달았다. 이 영화는 소설로 말하면 20권 짜리 대하소설인데 우리가 본 것은 총 등장인물별 스토리를 요약 정리한 마지막 권이었던 것이다. 앞의 영화들을 보지 않았으니 지금 눈앞의 장면들을 이해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아니 이해는 될지 몰라도 감성으로 느껴지는 온전한 즐거움은 누릴 수 없었다. 결국 나는 영화가 아니라 영화 설명서를 강매당한 셈이었다.
한 가지 알게 된 것은 마블이라는 만화의 세계가 얼마나 방대하고 그 속의 세계관이 어떻게 젊은이들을 지배하고 있는지 하는 것들이다. 아날로그 세대인 우리 나이 층에는 영화에 등장하는 상상 속의 괴물 형상이 낯설고 우주 전쟁 시퀀스 등이 애들 장난 같은데 젊은 관객들에게 몰입의 대상이 되는 현상이 흥미로웠다. 이런 것을 세대 차이라고 하는지 모르겠지만, 만화와 사이버에 익숙하지 못한 나에게는 그야말로 희한한 만화 같은 이야기에 불과했다.
영화는 수많은 히어로들이 절대 악이며 절대 힘을 지닌 타노스가 지구 생명체의 반을 절멸한 전 편 ‘인피니티 워’의 뒤를 이어 이들을 되살릴 마법의 구슬(인피니티 스톤)을 찾기 위해 사투하는 모험이 주를 이룬다. 아울러 타노스와의 마지막 전쟁을 앞두고 등장인물 간의 자기희생과 팀플레이, 가족에 대한 사랑 등 감동적인 요소가 사이 사이 배치되는 영화적 문법을 따른다.
흥미로운 것은 절대 악의 존재인 타노스가 생명체의 절반을 사멸시킨 것은 나름대로 지구를 살리기 위한 환경적 목적에서 행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영화는 아무리 목적이 숭고해도 과정이 부도덕하면 결국 악이 된다는 도덕관을 담고 있는 셈이다. 이는 우리 사회에 대한 은유로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서울 송파구 오금로 신천유수지 부근에서 공공 헌책방 ‘서울책보고’가 3월 27일 개관했다. 서울책보고는 서울시가 방치되어 있던 약 443평의 신천유수지 창고를 개조해 만든 공간으로 국내 최초이자 최대 규모의 공공 헌책방이다. 이곳에서는 헌책뿐만 아니라 독립출판물, 전문서적 그리고 책을 기반으로 한 다양한 문화 프로그램도 경험할 수 있다.
서울책보고에 들어서면 책벌레를 형상화한 비정형 나선 구조의 거대한 헌책 장서가 눈을 사로잡는다. 청계천 헌책방 거리에 있던 25개의 헌책방을 모집해 10만여권의 책을 비치해두었다. 시민들은 저렴한 가격에 헌책을 구매할 수 있으며, 10% 위탁 수수료를 제외한 판매 수익은 해당 헌책방에 돌아간다.
헌책 장서 맞은편 북카페 공간에서는 편하게 책을 읽을 수 있고, 독창성과 희소성 있는 독립 출판물 2천여종과 명사의 기증 도서 1만여권이 전시되어 있다. 독립출판물은 비정기적 출판, 조기품절, 한정된 판매처 등 독립출판물의 특수성으로 시중에서 쉽게 접하기 힘들다. 하지만 서울책보고에서는 잡지, 에세이, 만화, 소설 등 다양한 장르의 독립출판물을 만나볼 수 있다. 앞으로 서울시는 독립출판물을 매 분기 수시로 사들여 3천여권으로 확대할 예정이다. 독립출판물과 기증 도서는 구매가 불가하고 서울책보고 내에서 읽는 것만 가능하다.
또 현재 개관 기념 특별전 ‘그 때, 그 책보고’가 진행 중인데, 절판된 옛날 잡지, 1950~90년대 교과서 등 추억의 책들을 만나볼 수 있다. 이 책들은 4월 30일까지 전시되며 이후 직접 구매도 가능하다.
북카페와 이어진 아카데미 공간은 시민들이 책과 교감할 수 있도록 전시, 강연 등 다양한 책 문화 프로그램이 진행될 예정이다.
서울책보고는 2호선 잠실나루역 1번 출구에서 도보 4분 거리에 위치해있으며, 평일 10시 30분부터 19:30분, 주말 및 공휴일 10~21시까지 운영된다. 매주 월요일, 1월 1일, 구정, 추석에는 휴관한다.
수많은 실력파 가수들을 배출했던 대학가요제에서, 우순실(57)은 1982년 ‘잃어버린 우산’으로 동상을 수상하며 화려하게 가요계에 데뷔했다. 발라드 곡 ‘잃어버린 우산’은 1970년대 포크송에서 1980년대의 발라드로 넘어가는 가요계 조류에서 분명하게 각인된 노래였다. 그녀의 묵직한 목소리는 경험을 통해 체득한 깊은 진심이 묻어난다. 그녀의 삶은 가혹했다. 뇌수종으로 잃은 첫째 아들, 전 남편의 사업 실패로 짊어져야 했던 빚 29억 원. 그러나 막상 만나본 그녀의 모습은 밝고 평온했다. 그녀가 겪어야 했던 남다른 삶의 여정과 그 속에서 얻은 깨달음을 들어봤다.
"인생이 순탄하기만 하면 감사함이 없게 돼요. 굽이굽이 좌절도 해봤다가 올라가기도 하고 그래야 참 감사하고 기쁘다는 걸 느끼게 되죠."
인생에 대한 얘기를 할 때, 가수 우순실만큼 그 주제에 어울리는 이도 없을 것이다. 노래를 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였다고 한다. 그녀의 어머니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딸 다섯을 홀로 키워야 했다. 그때에는 여러 가구가 모여 사는 동네에 스피커가 있었는데, 거기서 매일 일정한 시간에 노랫소리가 들렸다. 특히 이미자 등의 트로트 가수들 노래가 자주 나왔는데 어느 순간 그녀는 그 노래들을 따라 부르고 있었다. 동네 아주머니들도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노래를 해보라고 시키기도 했단다. 그래서 음악적 후원자였던 큰언니는 그녀에게 ‘너는 말보다 노래를 먼저 배웠다’고 말하곤 했다.
타고난 가수의 어린 시절
“초등학교 6학년 때는 큰언니가 피아노 학원을 보내줘서 음악적 소질을 발견하게 해줬어요. 고등학교 교련시간에는 휴식시간마다 불려나가 노래를 불렀어요.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가수가 되었죠. 대학교를 작곡과로 들어간 것은 노래하는 데 필요한 지식들을 습득하기 위해서였어요.”
한양대학교 작곡과에 다니던 그녀는 1학년 때인 어느 어스름한 저녁, 국악과 연습실에서 들려오는 청아한 목소리를 듣고 반해버렸다. 그 무렵 대학가요제 출전으로 자퇴를 해야 했고 이후 그녀는 추계예술대학교 국악과를 들어가게 된다. 20대까지의 그녀의 삶에는 순수한 음악적 매혹에 의한 선택들이 있었다. 음악적 욕심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말을 안 하고 있으면 자신을 드러낼 수가 없는데 저 자신을 보여줄 수 있는 게 노래예요. 예를 들어 화가들이 자기 철학이나 인생관을 그림과 조각으로 표현하는 것처럼, 저에게 있어 노래는 간절한 표현 도구인 거 같아요. 아프면 아프다, 슬프면 슬프다 하고.”
병간호 속에서도 행복을 마주했다
우순실은 1991년에 결혼하면서 가수로서의 삶을 접는다. 그리고 첫째 아들이 시한부 뇌수종 판정을 받자 이후 13년 동안 함께 투병생활을 한다. 천생 가수였던 그녀가 대중의 시야로부터 멀어졌던 시간이다. 그때 그녀의 마음은 어땠을까?
“가수가 노래를 놓고 있을 때, 괜찮을 리는 없죠. 아쉬웠죠. 그러나 아이를 순탄하게 키우는 상황은 아니었지만, 그 과정에서 느끼는 행복과 기쁨이 있었어요. 어느 날 시댁 식구들이 모인 자리에서 ‘한오백년’을 부르는데, 감정이 안 살더라고요. 그 순간 행복한 상태에서는 한스러움이 표현되질 않는구나 했어요. 그러니까 그때는 나름 행복하고 만족했던 거예요.”
우리가 보는 그녀의 삶의 굴곡은 마음을 착잡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정작 그녀 자신은 그런 삶과 고통을 덤덤하게 받아들인 것 아닐까. 어쩌면 그 마음의 크기야말로 그녀가 가진 천성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있을 자리는 저 자린데 하면서도 옆에 아이가 있는 게 보이면 지금 할일은 이거라는 생각이 들곤 했죠. 늘 지금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려고 했어요. ‘너무 힘들었겠다’면서 위로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저는 제 앞에 놓인 상황을 잘 받아들이는 편이었죠. 그리고 받아들이면 스트레스도 덜해요.”
많이 겪은 자의 성숙함
인터뷰를 하던 도중 그녀가 잠깐 판소리의 한 대목을 가볍게 불렀는데 그 목소리의 맑음에 놀랐다. 동안만큼이나, 노래 실력만큼이나, 그녀는 세월의 변화에 초연한 듯 보였다.
“1982년에 데뷔를 했으니 벌써 37년의 세월이 흘렀네요. 어찌 보면 그때 노래한 걸 들어봐도 애늙은이 같았죠.(웃음) 감정이 막 요동치는 게 아니라 그냥 평행선이었어요. 어릴 때도 초월해서 살고 싶다고 생각했었어요. 친구들이 캔디 만화에 열광하고 로맨스에 빠질 때 저는 교정 벤치에 혼자 앉아 상념에 잠기고 고독을 씹는 애늙은이 같은 모습이었으니까요.”
그녀가 대학교 1학년 신입생 환영회 때 부른 노래도 ‘한오백년’이었다. 그녀의 안에 그런 한과 우울이 많았던 때였다.
“지금은 더 밝아지고 긍정적인 사람이 되었죠. 뭔가 많이 겪은 자의 예전과는 다른 성숙함이라고나 할까요.(웃음)”
사소한 달콤함에 감사
‘뭔가 많이 겪은 자’ 우순실이 도달한 깨달음은 나 자신의 소중함이다. 그녀는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자신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노래할 때도 컨디션이 좋은 사람은 장비 탓을 안 해요. 내 상태가 좋으면 생마이크에서도 노래가 잘 나오죠. 인간관계에서도 내가 밝은 에너지가 있어야 해요. 그래야 상대가 뾰족한 사람이라도 품을 수 있는 포용심이 생기니까요.”
그녀가 둘째 딸과 셋째 아들에게 하는 말도 이와 같다.
“‘너 자신을 사랑하는 게 첫 번째다, 친구관계가 고민될 때는 너 자신을 사랑하면 된다’고 말해줘요. ‘지금 관계가 꼬여 힘들다면, 그런 자신의 힘든 마음을 먼저 알아줘라, 자신을 위로하는 게 우선이다’라고 말이죠. 그런 일은 상대와 나와의 문제 같지만 실은 내면에서 일어나는 감정의 충돌이에요. 그래서 자신을 사랑하면 상대방과의 문제가 별것 아님을 알게 되는 경우가 많아요.”
사람과의 관계는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되는 바가 크다. 친구와의 갈등이 빚어지는 것은 대부분 상대에게 기대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스스로의 마음만 충만하다면 상대가 나를 사랑하든 안 사랑하든 큰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새로운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는 게 그녀의 설명이었다.
“사실 나 자신은 생각보다 더 큰 에너지를 갖고 있는데 세상사에 치여서 작아지잖아요? 명상을 하면서 스스로를 들여다보면 정말 맑고 순수한 모습이 보여요. 그걸 발견할 때 충만함 그 자체를 느끼게 되죠.”
혼자여서 너무 좋다
홀로 지내는 그녀는 남는 시간에는 이것저것 공부하며 음악 연습과 요가를 한다. 꾸준히 하고 있는 요가는 그녀가 심신이 고달팠을 때 선배 가수가 자신을 돌봐야 한다고 권해서 시작했다. 그녀에게 요가 시간은 곧 에너지가 충전되는 시간이다. 그녀에게 어울리는 운동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몸이 건강해지고 마음이 편안해져요. 노래의 힘과 호흡 등을 좋아지게도 하고요.”
그녀는 자신이 혼자라서 좋다고 말한다. 사람들이 외롭지 않냐고 묻기도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고 한다.
“아주 자유롭고 좋습니다. 혼자만의 시간이 있어 자신을 더 충만하게 채울 수 있으니까요.”
시니어 중에는 유독 고독을 심하게 느끼며 마음을 나눌 친구를 찾는 이가 많다. 그녀가 혼자 잘 지내는 비법은 무엇일까?
“어차피 인생은 외로운 거예요. 같이 살아도 외롭죠. 그러니 인간은 고독하다는 걸 전제하면 그런 감정에 연연하지 않게 돼요. 인정할 건 빨리 인정해야 좋죠. 그리고 나를 위한 선물을 해야 해요.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걸 하는 게 좋아요. 저에게는 그게 음악, 요가, 힐링, 집안청소 등인 거죠.”
벚꽃이 흐드러진 날에 새로운 여정
우순실은 다시 태어나도 여전히 가수를 하겠다며 존 레논처럼 인류가 살아가는 데 메시지를 주는 힐러 역할을 하고 싶다고 말한다. 마침 그녀는 얼마 전 전영록에게서 곡을 받아 새 앨범을 발표했다. 타이틀 곡은 ‘어느 벚꽃이 흐드러진 날에’. 봄날을 연상케 하는 어쿠스틱함이 강조된 발라드 곡이다.
“원래 받을 곡은 이 노래가 아니었어요. 그런데 전영록 선배님이 우순실에게 곡을 줘야겠다 해서 녹음을 하게 됐는데, ‘어느 벚꽃이 흐드러진 날에’가 너무 마음에 들어서 한 번 불러봤는데 바로 선배님이 ‘이건 네가 불러야겠다’고 말씀하시더군요. 그래서 열몇 곡 중 일곱 곡을 추려 앨범을 만들었어요.”
그녀는 오는 4월 26일 여의도 마리나에서의 디너쇼 콘서트를 시작으로 6월까지 공연 스케줄을 잡아 놨다. 그녀가 가장 하고 싶은 것이 관객과의 만남인 콘서트였던 만큼 그 소망을 이루는 시간이 될 것이다.
“저 사람이 노래하면 내가 뭔가 힐링이 되는 거 같다,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 같다, 제 노래를 들으면서 위안이 됐다는 말을 듣고 싶어요.”
멋진 왕언니에게서 사랑스런 여성의 모습도 보인다. 당차고 또 열정적이다. 1990년 이후 30년 만에 다시 노래 부르는 신인처럼 그녀는 눈빛을 반짝였다.
1980년대 뉴욕 이스트 빌리지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미술가 전시회가 네 개나 열리고 있다. 1980년대 뉴욕의 힙합 문화에서 발아한 그라피티 아트(Graffiti, Art 낙서화)와 자유와 저항을 상징하는 스트리트 아트(Street Art, 거리 미술) 작가 작품을 집중적으로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단체전으로는 서울시립미술관의 ‘이스트 빌리지 뉴욕; 취약하고 극단적인’, 서울숲 아트센터의 ‘반항의 거리, 뉴욕’이 있고, 개인전으로는 DDP의 ‘키스 해링: 모두를 위한 예술을 꿈꾸다’, 잠실 롯데뮤지엄의 ‘케니 샤프, 수퍼 팝 유니버스’가 있다.
1980년대부터 활동한 이 전시회 작가들이 1950년대에 태어났으니 같은 세대인 시니어가 관심을 가져보면 좋을 것 같다. 나와 같은 연대에 태어난 미술가들은 젊은 시절 어떻게 예술혼을 싹 틔웠을까. 이런 호기심만으로도 전시장을 찾을 이유는 충분하다.
“새로운 세대 미술이 이스트 빌리지에서 시작되었다”, “진짜 모마(MoMA, 뉴욕현대미술관)는 여기다”라고 외치게 했던 1980년대 뉴욕 이스트 빌리지를 2019년에 돌아보는 감회가 새롭다.
전시장을 둘러보고 공부도 해보니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라는 안도현 시인의 시 구절이 떠올랐다. 예술가들 중에는 끔찍한 환경을 극복하고 열심히 살다 일찍 세상을 떠난 작가가 적지 않다. 그들이 그렇게 치열하게 살다 간 이유는 뭘까? 나는 젊은 시절 무엇을 꿈꾸고 행동했던가. 부끄러웠다. 그들의 작품을 감상하고 감동을 느낄 수 있는 감상안이라도 있다는 걸 감사하자고 스스로를 위로해야만 했다.
‘이스트 빌리지 뉴욕; 취약하고 극단적인’ 전은 1980년대 뉴욕 이스트 빌리지 미술을 조명하기 위해 기획되었다. 이스트 빌리지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작가 26명의 75점 작품, 73권의 ‘이스트 빌리지 아이’ 잡지 아카이브를 선보인다.
뉴욕 맨해튼 동남쪽에 위치한 이스트 빌리지에는 1960년대 후반부터 가난하고 젊은 예술가, 학생, 히피족이 모여 살았다. 자연스럽게 뉴욕의 반체제 문화 중심지, 예술운동 발생지가 되었고 항의와 폭동의 장소이기도 했다. 1980년대의 뉴욕 이스트 빌리지는 무분별한 재개발과 그로 인한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슬럼화되었다. 버려진 거리와 건물이 많았지만 가난한 젊은 작가들이 들어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실험적인 작업을 했다. 회화, 조각, 사진, 비디오, 영화, 퍼포먼스, 비평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자유와 패기로 ‘쿨’하고 ‘힙’한 작품들을 탄생시켰다. 그러나 그 뒷모습에는 고단한 삶과 그늘이 있었다. 이스트 빌리지 예술가들은 계급·성별·인종 차별과 마약, 빈곤, 범죄, 동성애, AIDS 등의 사회적 문제를 작품으로 승화시키며 정치적 목소리를 냈다. 레이건 정부의 보수 정책과 신자유주의 경제 질서 확립에 발맞춘 예술의 상업화와 보수화에 자신들의 예술작품으로 저항했다는 것이 현재의 평가다.
‘19세 이하 관람 불가’라는 과격하고 논쟁적인 작품이 포함되었지만, 어느 전시장이든 그러하듯 흰 벽면에 질서 정연하게 전시된 작품으로, 1980년대 뉴욕 이스트 빌리지의 자유분방한 예술적 분위기를 읽어내기는 힘들다. 또 하나, 한 작가의 대표작을 망라하는 회고전이 아니기에 시대와 작가의 일면만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둬야 한다. ‘인상주의’ ‘야수파’식으로 특징지을 수 없는 작가들의 다양한 활동을 살펴볼 수 있는 계기라 생각하면 좋겠다. 이 글에서는 일찍 세상 떠난 작가 7명의 삶과 예술을 재조명해본다.
1) 키스 해링(Keith Haring, 1958~1990년)
어린 시절 아버지가 그려준 만화를 따라 그리면서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다. 사춘기에는 기독교에 심취했고, 15세 이후에는 록 음악과 마약, 섹스에 빠졌다. 뉴욕 시각예술학교에서 케니 샤프, 장 미셸 바스키아 등 이스트 빌리지 낙서 화가들을 만나면서 낙서화에 대한 관심이 깊어졌다.
당시 주류 미술계에 편입되지 않은 젊은 예술가들은 이스트 빌리지에 모여 퍼포먼스와 전시회 등을 열면서 커뮤니티를 형성했는데, 이러한 이벤트는 주로 클럽에서 일어났다. 키스 해링은 그중 대표적 클럽인 ‘클럽 57’의 큐레이터로 다양한 이벤트를 기획하고 진행했다. 32세에 에이즈로 사망할 때까지, 매해 개인전과 기획전은 물론 대중과의 소통을 위한 공공미술, 기업과의 협업 등 다양한 활동을 했다.
키스 해링은 간결한 표현으로 드러내는 무거운 메시지로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는데, “대중이 이해할 수 없는 예술을 고급 예술이라 고집하는 건 자기 과시를 위한 허튼수작”이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다른 그라피티 아티스트와 마찬가지로 고유 표식인 ‘태그(tag)’를 적극 활용했다. 기어 다니는 아기, 비행접시, 하트 등이 그것이다. 단순하고 밝고 가벼운 만화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기성 미술계와 보수 정권 비판, 퀴어, 에이즈, 마약, 인종 차별, 반핵·반전에 이르기까지 작품 주제가 광범위하다. 말풍선이나 그림 내용을 파악할 수 있는 제목을 달지 않아 관객들이 다양한 해석을 할 수 있게 했다.
2) 아치 코넬리(Arch Connelly, 1950~1993년)
도예를 전공했고, 10년 남짓 작가 생활 후 미국 전역을 덮친 에이즈로 43세에 사망했다. 에이즈로 사망한 수많은 예술가 중 한 명으로 알려진 그는 2012년 회고전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코넬리는 화려하지만 싼 재료(가짜 보석, 작은 꽃다발, 장식 조각, 반짝이, 동전)를 이용해 작업했다. 그러나 당시 이런 재료는 사내답지 못한 ‘호모’의 것으로 여겨졌다. 잡지에서 잘라낸 벌거벗은 남성 모델 사진과 게이 섹스 사진을 싸구려 보석으로 장식하는 콜라주 작품 등 ‘남성적’으로 간주된 몸을 대상화하는 동시에 공격적이고 지배적인 남성성을 격하시키는 작업도 하며 규범적인 성 역할에 의문을 제기했다. 키스 해링, 데이비드 워나로비치, 마틴 웡 등과 함께 이스트 빌리지 게이 예술가 그룹의 주요 구성원으로 활동했다.
당시 제도권 예술의 주류였던 미니멀리즘, 개념미술과 대비되는 코넬리의 작품은 과열된 미술시장에서 부풀려진 예술의 상업적 가치를 조롱하고 비판한다. 이러한 전략은 20세기 중반 미국 모더니즘 예술 이후 등장한 팝 아트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그가 1981~1989년에 만든 7점의 ‘자화상’ 연작을 통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구체적 형상을 그리는 대신 직사각형, 타원형 캔버스에 가짜 진주, 반짝이는 장식 조각 혼합물을 가득 채운 자화상은 형식에 구속되지 않은 자유로움을 드러낸다.
3) 마틴 웡(Martin Wong, 1946~1999년)
중국계 미국인 부모에게서 태어나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에서 자랐다. 부모는 중국인이었지만, 아버지에게는 멕시코인 피도 흐르고 있어, 자신을 ‘중국-라틴계’라고 소개했다. 어려서부터 재능을 보여 어머니의 지지를 받으며 13세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도예를 전공했고, 샌프란시스코에서 활동할 때는 히피운동에도 참여했다.
1978년 뉴욕에 왔을 때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호텔 야간 짐꾼으로도 일했다. “내가 그리는 모든 것은 내가 보고 알고 있는 모든 사람이다”라고 말한 그는 푸에르토리코 출신 시인 미겔 피네로와 함께 살며 작업을 했는데, 둘의 활동은 뉴욕에서 일어난 푸에르토리코계 미국인 예술운동 ‘뉴요리칸(Nuyorican)’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스트 빌리지 그라피티와 아시아 고미술품을 수집했고, 이스트 빌리지에 아메리칸 그라피티 뮤지엄을 설립하기도 했다.
마틴 웡은 1994년에 에이즈 진단을 받고 53세에 숨을 거뒀다. 그의 작품은 PPOW 갤러리에서 관리하고 있고, 어머니가 마틴 웡 장학재단을 만들어 미술가를 후원하고 있다.
작가 4명의 이야기는 후속 기사에서 계속됩니다.
용돈은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부부간에도 서로 말 못할 용돈 사용처가 있고 학생도 부모에게 설명할 수 없는 돈이 필요할 때가 있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였다. 붕어빵을 사 먹는 친구가 부러워 부모님께 용돈을 달라고 말씀드렸다. 하지만 반응이 차가웠다. 집에서 해주는 밥 먹고, 책과 학용품도 다 사주고, 학교도 집에서 가까워 걸어 다니면 되는데 무슨 용돈이 필요하냐는 것이었다.
나는 “그게 아니고요. 친구가 붕어빵 사 먹는 것 보면 나도 사먹고 싶단 말이에요. 만화책도 빌려보고 싶고요. 친구들한테 얻어먹은 것도 갚아야 해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집안 형편을 대충 알고 있던 터라 그 말은 입안에서만 뱅뱅 돌 뿐 아무 말도 못했다. 내 맘대로 쓸 수 있는 용돈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늘 했기에 부모님을 원망할 때도 있었다.
결국 일을 저질렀다. 어느 날 아버지가 소를 팔고 100원짜리 종이돈을 100장씩 묶어놓은 뭉칫돈을 여러 다발 갖고 들어오셨다. 당장 쓸 일이 없어 돈을 장롱 밑에 숨겨둔 걸 내가 알고는 아무도 없는 틈을 타서 몰래 100원짜라 한 장을 돈다발에서 빼냈다.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지만 설마 이 많은 돈다발 속에서 한 장 없어진 것을 알겠느냐는 아주 순진한 생각을 했다.
며칠 후 돈 쓸 곳이 생긴 부모님이 돈다발을 모두 꺼내놓고 세다가 여러 다발 중 한 다발에서 딱 한 장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두 분은 이상하다며 고개를 갸우뚱하시면서 침을 발라가며 돈을 세고 또 셌다. 결국 100원짜리 한 장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나는 야단맞을 게 겁나 자수를 할 수도 없었다. 그저 가슴조리며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돈을 세어보고 똑바로 받아왔어야지요. 당신이 한 장 부족하게 받았네요” 하고 핀잔을 줬다. 그러자 아버지는 ‘분명 잘 세어보고 받았는데…’ 하면서 말끝을 흐렸다. 결론은 돈을 받을 때 한 장 부족한 채 받은 것으로 끝이 났다. 부모님은 이제 와서 돈 준 사람에게 항의하거나 따질 수도 없는 노릇이라며 체념했다. 아무도 범인이 나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 사건은 그렇게 완전범죄가 됐고 두려움에 떨었던 나는 겁이 나서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
그러고 세월이 흘렀다. 어느 날 초등학교에 다니던 아이가 1000원짜리 한 장을 슬쩍했다. 아이는 자기가 훔치지 않았다고 말했지만 나는 아이 양손에 군것질거리가 들려 있는 것으로 상황을 파악했다. 그 뒤로도 그런 일이 두세 번 더 있었다. 어린 시절 그런 경험이 있으면서도 내 아이가 용돈이 필요할 것이라는 생각은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오히려 야단만 쳤다. “너 커서 뭐가 되려고 그러느냐?”, “경찰서에 데리고 가겠다”는 둥 겁박까지 했다. 내심 걱정도 했다. 세상 아이들이 다 그래도 내 자식은 절대 나쁜 짓 하지 않을 것이라 믿었는데, 큰 충격이었다.
아이가 왜 돈을 훔쳤을까 곰곰이 생각해봤다. 저학년이라며 부모가 사주기만 했지 용돈은 한 번도 주지 않은 것이 원인일 수도 있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다음 날 1000원짜리 한 장을 주면서 “네 맘대로 써봐, 그리고 부족하면 말해. 더 줄 수도 있어”라고 말하자 아이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나쁜 짓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군것질의 유혹에 돈을 훔칠 수밖에 없었던 아이의 마음은 얼마나 불편했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아이에게 오히려 미안했다. 물론 그날 이후 아이의 손버릇은 싹 없어졌다.
아이만 용돈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절박하게 용돈이 필요한 사람은 돈벌이 없는 노인도 마찬가지다. 어쩌면 용돈이 밥보다 더 중요할 수도 있다. 복지관에서 만난 80대의 한 할아버지는 한 달에 단돈 5만 원이라도 좋으니 돈 벌 수 있는 일거리 좀 소개해 달라고 하소연했다. 자식들에게 용돈을 달라고 말씀하라고 했더니 자식들이 “하는 일도 없는데 왜 용돈이 필요하냐!”고 소리만 지른단다.
경로당에서 뭘 사먹을 때 각자 주머니 끈을 푸는데 가진 용돈이 한 푼도 없다면 슬픔을 넘어 비참할 것 같다. 먹고 입고 잠을 자는 의식주 해결만이 최저생계의 끝이 아니다. 젊었든 늙었든, 건강하든 병들었든 내 맘대로 쓸 수 있는 용돈이 필요하다. 주머니에 돈이 있으면 배도 안 고프고 춥지도 않다.
‘그리움’의 다른 말 ‘復古’ 이경숙 동년기자
조국을 떠난 지 한참 된 사람도 정말 바꾸기 힘든 것이 있다. 울적할 때, 특히 몸이 좋지 않을 때면 그 증세가 더 심해진다고 한다. 어려서 함께 먹었던 소박한 음식에 대한 그리움이다. 식구는 많고 양식은 빈약하던 시절, 밥상에서는 밥만 먹었던 것이 아니었나보다. 둥근 상에 올망졸망 모여 앉아 모자란 음식을 나눌 때 느꼈던 진한 가족애와 혈육의 뿌듯함이 DNA에 녹아들기라도 했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가마솥 누룽지, 지겹던 보리밥,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프던 시래기죽도 각자의 추억과 함께 잊히지 않는 음식이 되어 ‘그것만 먹으면 내 병이 다 나을 것’처럼 그리워지는 것 같다.
골목에 있는 만화방 주인은 청년이었다. 가끔 내게 만화방을 맡기고 외출을 하기도 했는데, 대신 보고 싶은 신간 만화를 실컷 볼 수 있어 좋았다. 만화방 앞에는 약간의 학용품이 놓여 있어 그것도 팔아야 했다. 그날도 만화방을 봐준다는 명목으로 독서(?)에 빠져 있었다. 누군가 나를 ‘툭툭’ 쳐서 보니 군인 아저씨가 물건을 들고 얼마냐고 묻고 있었다.
그렇게 몰두할 만큼 만화책은 너무 재미있었다. 그 만화방엔 안데르센 동화책도 많았다. 울적할 때면, 나는 동물들과 숲속 방앗간 짚 덤불에서 자던 소녀를 떠올리곤 했다. 샘물을 마시고 동물들과 대화하던 맑고 밝은 소녀가 아직도 가슴속에 있다. 지칠 때면 그 소녀가 가만히 내 창을 두드린다.
나팔바지를 입고 집을 나설 때마다 듣던 말이 있다. “동네 다 쓸고 다닐 거니?” 어깨는 각이 지고 허리는 잘록하고 엉덩이는 딱 맞고 바지통은 아주 넓은 디자인이었다. 그 시절엔 사실 유행이 일률적이었다. 지금처럼 다양한 취향을 주장할 만큼 당당하지도, 식견이 풍부하지도 못했다. 개성을 개인적 취향으로 인정해주기보다는 모자란 사람 취급을 하던 그런 시대였다. 그래서 좀 멋쟁이다 싶으면 일제히 미니스커트, 일제히 맥시스커트를 입는 그런 분위기였다. 어찌 보면 마치 유니폼을 입은 것 같았다.
테이블마다 달랑대는 조명등이 달려 있거나, 촛불을 켜는 낭만적인 카페도 많았다. 종종 작은 무대에서 통기타를 치며 노래를 흥얼거리고, 술이 아니더라도 20대는 늘 무엇인가에 취해 있었다. 쉽게 흥분하고 자주 슬펐던 우리들의 20대. 끝도 없는 논쟁으로 밤을 새우고, 모든 게 다 진지하기만 했던 시절. 사랑하고 싶었던 사람들은 사랑 얘기를 쉼 없이 되풀이했다. 정의란 무엇인가를 고민하며 모두 정의의 순교자라도 되고 싶어 했다.
미팅 땐 생맥줏집, 볼링장, 극장엘 갔다. 애프터 미팅은 카페에서 만나 주로 비원이나 경복궁, 덕수궁을 걸었다. 가난한 젊은 커플들은 버스를 타고 종점을 오가며 대화를 나눴다.
이런 추억들에 젖어보기 위해 옛 시절을 떠올리는 것은 아닐까. 그것이 복고의 매력이라 할 수 있겠다. 그냥 먹고 마시기만 하자니 심심하고 무미건조해 그리움이라도 불러와 옛 필름들을 다시 돌려보고, 식어버린 가슴을 조금이라도 데워보려는 것이다.
벼룩시장에서 보물찾기 윤종국 동년기자
“내가 나를 생각하는 만큼 남들은 나에게 관심이 없다.”
나는 이 말을 엄청 좋아한다. 난 늘 나를 생각한다. 나는 키도 작고 몸집도 작다. 그러나 머리는 크다. 표준 사이즈로 옷을 고르면 거의 맞는 게 없다. 그래서 어느 날부터 드나들기 시작한 곳이 있다. 30여 년은 족히 된 듯하다.
독자들이 궁금해할 것 같아 먼저 알려준다. 바로 ‘벼룩시장’이다. 수백, 수천 가지의 물건이 있는 곳이다. 옛날에는 청계6·7가에 있었고, 지금은 동묘(동대문구) 일대에 시장이 형성돼 있다. 벼룩시장에서 레트로를 본다. 내게는 수만 가지 물건이 레트로 대상이다. 한 달에 두세 번 보물을 찾는 기분으로 간다. 내 작은 체구를 잘 알기에 어울리는 옷도 찾아본다. 손에 주로 들리는 옷은 복고풍의 외투다. 벼룩시장에서 입수한 옷은 꼭 수선 집을 거친다. 그래야 진짜 내 것이 된다.
누구나 알고 있듯 없는 게 없는 곳이 벼룩시장이다. 그렇다고 아무나 덤빌 곳은 또 아니다. 내게는 오랜 세월의 경험이 있다. 레트로를 사랑하려면 요령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레트로인이 된다. 예를 들면 맘에 드는 복고풍 옷을 하나 발견했다 치자. 구매의사가 있을 경우 먼저 입어보고 가격을 흥정하면 초보자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구매자 몸에 어울린다 싶으면 가격이 달라진다. 가격 매기기는 벼룩시장 주인들만의 특권이다. 그러므로 먼저 가격을 물어본 다음에 흥정을 해야 하는 게 원칙이다. 설사 맘에 들더라도 그 맘을 들키면 절대 안 된다. 그래야 원하는 가격에 살 수 있다.
또 하나의 팁. 다른 물건에 관심이 있는 척하다가 진짜 맘에 드는 물건을 들고 슬쩍 “이건 얼마죠?” 하고 물으면 점포 주인은 대부분 낮은 가격을 부른다. 이것이 지혜롭게 레트로에 접근하는 방식이다.
수년 전 딸아이가 벼룩시장이 궁금하다며 따라나섰다. 그날 지나다 발견한 물건은 흙이 묻어 다소 지저분해 보이는 신발이었다. 신을 만해서 단돈 5000원에 손에 넣었다. 집에 와서 닦고 손질해보니 젊은이들이 선호하는 고가 브랜드 신발이었다. 딸아이가 좋아라 했다. 내가 벼룩시장 마니아로 인정을 받은 건 사실 그날이었다.
한 달 전 큰손주의 생일이 있었다. 그날을 위해 몇 번이나 벼룩시장을 찾아 헤맸다. 인라인스케이트를 찾기 위해서다. 신제품도 생각했지만 하루가 다르게 키가 크는 녀석의 발 사이즈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라인스케이트를 선물로 선택한 이유는 내가 좋아하는 운동이기 때문이다. 10여 년 전 전국, 특히 서울에서 인라인스케이트 붐이 일었다. 그러다가 아파트 내에서 어린이 안전사고가 일어났고 그 충격으로 슬쩍 사라져버렸다.
벼룩시장을 갔던 날, 다행히 손주에게 맞을 것 같은 인라인스케이트를 발견하고 흥정을 시작했다. 일단 가격부터 묻고 사이즈를 확인한 뒤 며느리에게 전화를 걸어 손주 발 사이즈를 물어봤다. 그러면서 주인의 눈치도 살폈다. 발 사이즈가 잘 맞지 않을 수도 있다는 듯 대화를 나눈 뒤 주인과 흥정을 했다. 결국 내가 원하는 가격으로 물건을 손에 넣었다. 이런 요령을 터득해야 비로소 벼룩시장의 프로가 된다. 집으로 돌아와 깨끗하게 정비하니 새 물건보다 더 정감이 갔다.
손주 생일에 인라인스케이트를 건네주며 “지금은 키가 부쩍부쩍 크는 나이니까 일단 이것으로 먼저 타는 연습을 하자”라고 말했다. 갖고 싶어 했던 거라 그런지 손주도 아주 만족스러워했다. 그날 나는 손주바보 할아버지에서 멋진 할아버지로 거듭났다.
옛것들에서 한 수 배우며 사는 삶 육미승 동년기자
“넌 조금만 더 나중에 태어났더라면 뭔가 해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심심찮게 이런 말을 해주는 친구들이 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민망하지 않은 표정으로 다정하게 미소를 짓는다. 친구들 말은, 내 패션이나 생각 그리고 사는 방법이 자기들과는 전연 다르다는 의미다. 그도 그럴 것이 레트로가 내 생활이니….
특히 패션에 대한 생각이 그렇다. 옷을 살 때 겉옷은 지금 당장 유행을 타는 것들 중 나중에도 입을 수 있고 멋지게 소화해낼 수 있는 디자인을 고른다. 그리고 다른 옷들은 옷장 문을 열어 예전에 신나게 입고 즐겼던 옷들에서 선택한다. 그날의 모임 콘셉트에 맞고 남의 눈에 거슬리지 않으면서도 유행에 뒤떨어짐이 없는 은은한 멋을 지닌 그런 의상을 즐기는 거다. 나는 옛것을 너무 좋아한다. 옛것들 버리지 않고 여전히 아끼고 사랑하는 나를 보고 “어머 얘, 너무 잘 어울린다아~’ 하고 해주는 말들을 좋아하는 것도 같다.
회상하고 추억에 빠지는 시간은 천천히 꼼꼼하게 내 생각들을 정리하는 데 꼭 필요하다. 그러고 보니 인연이 끝나 지금은 만나지 않는 사람들과의 대화도 마음 한구석에 감춰두고 있다. 어느 날 그들과의 추억을 꺼내 감상하는 게 내 취미다. 나는 옛것들은 대부분 귀하게 여기고 좋아한다. 가끔은 그동안 읽었던 책 속에서 또는 영화 속에서, 예를 들면 사마의 같은 중국의 책사들에게 한 수 배우길 희망한다. 그 놀라운 생각의 회로를 닮아보려고 혼자 부단히도 노력한다. 새로운 아이디어가 반짝이는 젊은이들. 그 두뇌를 못 따라가는 나는 느린 사고방식이 편하다.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단 한 번도 싸워보질 못했다. 갈등이 일어날 것 같으면 슬그머니 자리를 피하거나 가만히 듣고만 있는 게 내 모습이다. 져주는 게 상책이라 생각하며 지내왔기 때문이다. 일처리를 할 때도 나를 뺀 모든 관계자들이 편한 쪽으로 해답을 구한다. 어느 면으로 보면 답답해 보일 수도 있지만 그렇게 나를 길들이며 살아왔기에 불편하지 않다. 그러나 지인들은 불똥이 내 발 바로 앞에 떨어져도 “이게 뭐지?” 하며 그제야 슬쩍 뒤로 물러날 사람이라며 핀잔 섞인 말을 한다.
그렇다. 나는 오래 생각하며 말없이 기다린다. 특히 답이 여러 가지로 나올 수 있는 문제는 더더욱 끝까지 기다린다. 엉망으로 뒤섞여버린 물을 가만히 두면 침전물들이 여러 층으로 가라앉고, 맑은 물이 맨 위로 올라온다. 내 앞의 문제도 그렇게 될 때까지 기다린다. 그러면 마치 무위이화(無爲而化)하듯 저절로 아주 유효하고 명쾌한 답이 나온다. 그 신기함을 몇 번이나 경험했다. 이것이 바로 레트로의 진가라고 믿는다. 새로운 기술과 기교도 좋지만 옛 성현들의 말씀에서 더 많은 답을 찾는다. 레트로는 내 단짝이다. 한 시도 떨어지고 싶지 않다. 앞으로도 복고 속에서 빛나는 다이아몬드를 찾아내는 마음으로 패션, 음악, 미술, 영화, 텔레비전 프로그램 등을 즐기며 여유작작한 삶을 살아가려 한다.
레트로는 ‘마음의 휴식’이다 손웅익 동년기자
1980년. 그 해 나는 대학교 4학년이었다. 건축과 학생들 중 건축설계에 특히 관심이 많은 학생이 모인 동아리에서 활동을 했다. 회원들은 매년 몇 달씩 동아리방에서 합숙을 하며 건축 작품전을 준비했다. 식사는 2학년생들이 돌아가면서 전체 회원이 먹을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이 전통이었다. 그러나 집에서 설거지 한 번 안 해본 학생들이 만든 밥은 그야말로 배가 고파서 억지로 먹을 수밖에 없는 정도의 상태였다. 그런 식사로 몇 달 합숙을 하다 보니 대부분 건강이 나빠졌다. 1980년의 교정은 봄부터 최루탄으로 뒤덮였다. 수업도 대부분 휴강이었다. 그렇게 혼란한 상황에서도 건축과 동아리 회원들은 밤낮으로 모여 작품전을 준비했다. 대체로 밤에 설계를 하고 낮에는 잠을 잤는데, 그 와중에도 매일 데모하러 나가는 회원도 있었다. 졸업을 앞둔 4학년 학생들은 최고참이라 여유를 부릴 수 있었다. 저녁에 가끔 학교 앞으로 나가 막걸리도 한잔씩 했다.
그날도 4학년 동기들은 동아리방에서 저녁을 먹지 않고 학교 앞에서 막걸리를 마셨다. 4학년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다. 막걸리를 마시고 난 뒤에는 학교 교문 근처 문방구점에서 미스코리아 선발대회 중계를 봤다. 당시 텔레비전은 다 흑백이었다. 그런데 선발대회 중에 화면 아래쪽으로 대학교를 폐쇄하겠다는 자막 뉴스가 떴다. 합숙 중이었던 우리는 얼른 짐을 챙겨 집으로 가야 할 것 같아서 학교로 들어가려는데 어느새 장갑차가 교문을 지키고 있었다. 1980년 5월 15일이었다. 17일에는 전국으로 계엄이 확대되었다. 그리고 그다음 날이 5월 18일.
그 해 우리가 준비했던 5월 전시회는 무산되었다. 전국으로 계엄이 확대되면서 집회는 일절 할 수 없었다. 그래도 우리는 회원들 집에서 만나 작품전 준비를 했고 가을에 전시회를 열었다. 당시 동아리 회장이었던 나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잘 준비해서 내 임기 중에 전시회를 마칠 수 있었다. 그렇게 겨울이 또 왔고 어느 날 술친구들이 중국집에 모였다. 텔레비전을 보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고량주를 마시면서 방송 시작 시간을 기다렸다. 그날은 우리나라 텔레비전 역사상 처음으로 컬러 방송을 하는 날이었다. 당시의 자료를 찾아보니 1980년 12월 22일 이었다. 우리는 컬러로 텔레비전을 보면 중국 영화처럼 피가 난무하는 장면은 너무 살벌할 것 같다는 둥, 연예인들이 옷을 더 화려하게 입을 것 같다는 둥 이런저런 추측성 대화를 나눴다. 그날 그렇게 흑백텔레비전 시대가 종료되었고 내 학창 시절도 저물어갔다.
얼마 전에 영화 ‘로마의 휴일’을 텔레비전에서 다시 봤다. 오래전에 갔던 로마 여행의 기억을 떠올리며 영화가 끝날 때까지 한순간도 눈을 뗄 수 없었다. 옛날 영화를 보다 보면 흑백 화면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린다. 흑백이라서 불편하거나 아쉬운 점도 없다. 오히려 로마의 유적이 더 현실감 있게 다가오고 상상을 자극하는 것 같다.
사진도 마찬가지다. 컬러 사진이 보편화하기 전의 흑백 사진들은 그 분위기로 시간을 되돌리는 신비로움이 있다. 흑백 사진을 손에 들면 사진을 찍던 순간으로 순식간에 되돌아가는 듯하다. 흑백이라는 무채색의 아름다움은 그래서 복잡하고 바쁘고 혼란스러운 현대인들에게 향수를 자극하고 잠시 쉬어갈 수 있는 마음의 휴식을 주는 것 같다. 현대인들은 현란한 색과 형태 그리고 자극적인 소리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다. 정보의 홍수와 자극의 파도를 견디려니 모든 감각기능이 극도로 예민해져 있다. 이런 현실에서 흑백은 잠시나마 여백의 세계로 우리를 데리고 간다. 눈이 편안해지면 마음도 편안해진다.
나는 새벽안개를 좋아한다. 특히 두물머리의 새벽안개는 한 폭의 수묵화다.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새벽에는 온 세상이 흑백으로 변한다. 안개의 농담(濃淡)으로 그려놓은 수묵화는 화려한 가을날의 유화 같은 풍경과는 비교하기 어려운 신비로움이 있다. 그 여백은 흑백 사진처럼 아련한 시간의 심연으로 빠져들게 한다.
요즘 펜화 스케치를 하면서 비슷한 느낌을 받곤 한다. 검은색으로만 그림을 그려놓고 원본의 컬러와 비교하면 흑백이 가진 깊이를 분명히 느낄 수 있다. 현대를 사는 우리는 가끔 의식적으로라도 흑백의 세계로 눈을 돌릴 필요가 있다고 본다. 흑백은 레트로다. 나는 레트로에서 마음의 휴식을 찾는다.
유행이 돌고 돌아 올가을에 호피무늬가 대유행이라고 한다.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 치타 여사(라미란 역)가 즐겨 입던 호피무늬 옷을 거리에서 종종 보게 될 줄이야. 몇 해 전부터 불기 시작한 복고 열풍은 스치는 바람이 아니라 문화로 자리 잡아가는 것 같다. 학자들은 이 현상을 ‘삶이 고달파서’라고 해석한다. 사람들이 옛것을 통해 행복했던 시절을 떠올리며 위안을 얻는다는 것이다. 세월은 고생도 아름다운 추억으로 미화시키는 힘이 있으니. 세월을 비껴간 곳을 찾아 추억 여행을 떠나보자.
빈티지의 끝판왕, 을지로 인쇄소 골목
한국전쟁 이후 도시 재건에 필요한 모든 업종이 서울 을지로3가와 4가 일대에 자리 잡았다. 공구 골목, 도기·타일 골목, 재봉틀 골목, 조명 골목, 인쇄 골목 등이 거미줄 치듯 모여 거대한 산업단지를 이뤘다. 주변으로 고층 빌딩이 우후죽순 들어서도 을지로는 여전히 예전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일과를 마친 노동자들이 ‘동원집’의 감잣국으로 허기진 배를 채우고, 1000원짜리 노가리 안주에 시원한 생맥주를 마시며 회포를 풀던 노가리 골목도 여전하다. 노가리 골목은 오히려 지금이 더 전성기인 것 같다.
후미진 인쇄소 골목에는 임대료가 저렴한 건물을 찾아 들어온 예술가와 젊은 창업자들이 정착하고 있다. 카페, 술집, 음식점도 많이 생겼다. 대부분 을지로 특유의 허름한 분위기를 부각해 건물을 꾸몄다. 카페 ‘커피한약방’과 양과자점 ‘혜민당’이 대표적이다. 이곳은 개화기 때 차림으로 입장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다. 촌스러운 색유리 창문, 100년 된 자개장, 페인트칠이 벗겨진 나무 문, 전깃줄이 뒤엉켜 있는 골목 풍경이 내다보이는 2층 테라스마저 멋스럽게 보이니, 내 눈이 ‘복고깍지’를 쓴 것이 틀림없다.
Tip
을지로 일대에 오구반점, 을지면옥, 통일집, 안성집, 양미옥, 을지다방 등 개점한 지 최소 30년 이상 된 노포들이 즐비하다. 노포 순례를 하며 추억을 곱씹어보는 것도 좋겠다.
세월의 사각지대 익선동 한옥마을
북촌과 서촌에 이어 익선동 한옥마을도 인기를 끌고 있다. 익선동은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에 조성된 이후 재개발이 이뤄지지 않아 한옥이 잘 보존돼왔다. 전철 1·3·5호선이 교차하는 종로3가역과 인사동, 운현궁, 창덕궁, 종묘 등 서울 명소가 코 닿을 거리에 있는데도 이 동네 시간만 1970~80년대에 머물러 있는 듯했다. 미로처럼 좁고 복잡한 골목 안에 오래된 식당과 한복집, 점집, 가정집 등 한옥 100여 채가 고요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요즘 익선동에 가보면, 상전벽해를 실감한다. 주택이 대부분 트렌디한 상가로 바뀌었다. 다행히 한옥 형태를 유지하고 내부만 개조해 익선동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다. 한옥인 ‘열두달’, ‘이태리총각’, ‘익선디미방’ 등에서 파스타와 스테이크를 먹는 모습이 낯설지 않다. 가장 인기 있는 곳은 수플레팬케이크를 파는 복고풍 카페 ‘동백양과자점’이다. 평일에도 가게 앞으로 늘어선 줄이 엄청나다. 신생 가게들이 속속 들어서는 중에도 익선동에서 가장 처음 문을 연 전통찻집 ‘뜰안’, 익선동이 인기를 끄는 데 일조한 빈티지 카페 ‘식물’, 착한 맛집 ‘익선동121’, 담장 허문 가맥(가게 맥주)집 ‘거북이슈퍼’ 등이 꿋꿋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Tip
익선동에서는 흥선대원군이 살았던 운현궁이 가깝다. 운현궁을 둘러보고, 고즈넉한 서순라길(종묘의 서쪽 담장길)을 산책한 뒤 종묘까지 둘러보면 알찬 도보 코스가 완성된다.
서울의 사교육 일번지였던 돈의문박물관마을
돈의문(서대문) 터 근처에 있던 새문안 동네는 몇 해 전 돈의문 뉴타운을 조성할 때 근린공원이 될 뻔한 동네였다. 서울시에서 헐지 않고, 도시 재생해 동네를 통째로 박물관으로 조성했다. 조선시대 한옥, 1930년대 일본식 주택, 1960년대 도시 한옥, 1970~80년대 슬래브집 등 각 시대상을 반영한 건축물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보존 가치가 있었던 것. 동네 역사도 흥미롭다. 1960년대에는 명문 중고등학교에 가기 위해 집마다 과외방이 있었다. 1980년 과외 금지법이 시행된 뒤로는 동네의 90%가 식당으로 바뀌기도 했는데 당시 ‘문화칼국수’, ‘풍미추어탕’집이 유명했다.
돈의문박물관마을에는 당시의 가옥 구조를 복원한 집 40채가 있으며 전시관, 연구실, 공예작가의 작업실 및 체험 공방으로 활용 중이다. 방문객은 그림 그리기, 와인 강좌, 쿠킹 클래스 등 40여 가지 프로그램을 선택해 체험해볼 수 있다. 이 중 마을 투어 프로그램을 강력 추천하고 싶다. 도슨트와 마을 골목길을 함께 돌면서 우리나라 근현대사와 건축 양식의 변화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하루 두 차례, 무료로 30분 동안 진행되며, 신청은 돈의문박물관마을 홈페이지(www.dmvillage.info)에서 하면 된다.
Tip
돈의문박물관마을 맞은편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마지막 청사였던 경교장이 있다. 서울 성곽 쪽으로 걸어가다 보면, 홍난파 가옥, 권율 장군이 심었다는 은행나무와 3·1운동을 세계에 처음으로 알린 미국 특파원 앨버트 테일러가 살았던 딜쿠샤를 만날 수 있다.
‘그땐 그랬지’ 국립민속박물관 추억의 거리
국립민속박물관 야외에 ‘추억의 거리’가 조성돼 있다. 1960~70년대 거리 풍경을 실감나게 재현해놓았다. 마치 촬영장 같은 분위기다. 창신사장(사진관), 근대화연쇄점, 장미의상실, 고향식당, 약속다방, 화개이발관, 고바우만화방, 인쇄소, 좋은소리사(레코드점) 등을 실물 크기로 짓고, 소품을 구색 맞춰 비치했다. 구멍가게 안에 진열된 과자, 음료수, 과일, 달걀, 아이스크림을 보며 아련한 기억을 떠올린다. 그 시절의 아이들은 부모님이 구멍가게를 하는 친구를 가장 부러워했다. 화개이발관에는 종로구 소격동에서 2007년까지 약 50년 동안 영업한 이발관의 자료가 전시돼 있다.
창신사장, 약속다방, 북촌국민학교는 내부 입장이 가능한 체험 공간으로 꾸몄다. 창신사장에서는 옛날 교복을 빌려 입고 옛날 사진관에서 사진 찍듯 기념 촬영을 할 수 있다. 추억의 거리가 기성세대에게는 추억을 소환하는 공간으로, 젊은 세대에게는 이색 체험 공간으로, 재미를 선사한다.
Tip
국립민속박물관과 경복궁은 연결돼 있다. 단풍 고운 날, 고궁 산책과 더불어 추억의 거리를 거닐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