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ML 칼럼] 시간 속에 집을 짓는 사람이 되라

기사입력 2016-04-12 08:56 기사수정 2016-04-12 08:56

임철순의 브라보 마이 라이프

▲조선 정조 때의 화가 이명기(李命基) 작 ‘송하독서도(松下讀書圖)’. 글 읽는 선비의 집은 소박하고 청아하다.
▲조선 정조 때의 화가 이명기(李命基) 작 ‘송하독서도(松下讀書圖)’. 글 읽는 선비의 집은 소박하고 청아하다.

“사랑방에는 할아버지가 앉아 계신다./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것은 텃도지가 밀려 잔뜩 주눅이 든 허리 굽은 새우젓 장수다./건넌방에서는 아버지가 계신다./금광 덕대를 하는 삼촌에다 금방앗간을 하는 금이빨이 자랑인 두집담 주인과 어울려 머리를 맞대고 하루 종일 무슨 주판질이다. (중략) 나는 사랑방 건넌방 헛간 안방을 오가며 딱지를 치고 구슬 장난을 한다.//중원군 노은면 연하리 470, 충주시 역전동 477의 49, 혹은 안양시 비산동 489의 43, 서울시 성북구 정릉동 227의 29.(하략)“

신경림(80)의 시 ‘즐거운 나의 집’입니다. 충북 충주 태생인 그는 이 시에서 아무리 옮겨 살아도 어릴 적의 이 그림이 깨어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바다를 건너 딴 나라도 가고 딴 세상을 헤매다가도 돌아오면 다시 그 자리라는 것입니다. 시는 “사랑방과 건넌방과 헛간과 안방을 오가면서/철없는 아이가 되어 딱지를 치고 구슬 장난을 하면서/나는 더없이 행복하다, 이 그림 속에서.”로 끝납니다.

사람은 살면서 집을 얼마나 옮기는 것일까? 알고 보면 순전히 자의에 의해서 자발적으로 집을 옮기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신경림처럼 자신이 살았던 집의 주소를 이렇게 줄줄이 댈 수 있는 사람도 흔하지 않습니다.

삶의 고비마다, 가족 구성원의 변화에 따라, 개인의 기호와 지향에 맞춰 집을 옮길 수 있다면 좋겠지요. 더욱이 노년의 행복과 안락을 위해 스스로 집을 짓거나 고쳐서 살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일 것입니다.

집은 개인과 그 가족에게 하나의 우주입니다. 우주는 집 宇, 집 宙로 이루어진 말입니다. 뜻은 같다 해도 宇는 상하사방이라는 공간, 宙는 고금왕래라는 시간을 말합니다. 우리는 공간 속의 집만 생각하기 쉽지만 인간은 시간 속에도 집을 짓습니다. 대장부 사해위가(大丈夫 四海爲家), 대장부는 천하를 자기 집으로 삼는다는 것은 공간 속의 집에 관한 말입니다. 맹자가 대장부를 논하는 글의 맨 앞에 나오는 “천하의 넓은 집에 살고”[居天下之廣居]라는 말도 공간 속의 집을 말합니다. 정정당당하고 구차스러움이 없는 인격을 천하의 넓은 집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와 달리 학문과 기예 등에서 일가(一家)를 이룬다는 것은 시간 속의 집을 뜻하는 말입니다. 어떤 분야에서 아주 뛰어나 본받을 만한 사람을 뜻하는 대방가(大方家)나 전문가라는 말에도 시간 속의 집이 들어 있습니다.

인간은 이 천지자연과 시간 속에서 하나의 나그네입니다. ‘하이쿠의 성인[俳聖]’ 마쓰오 바쇼(松尾芭蕉)의 시에 “해와 달은 영원한 과객이고 오가는 세월 또한 나그네”라는 게 있습니다. “무릇 천지는 만물의 여관이요/세월은 영원한 나그네”[夫天地者萬物之逆旅 光陰者百代之過客]라는 이백의 시 ‘춘야연도리원서(春夜宴桃李園序)’와 아주 흡사합니다.

바쇼에게는 자연도 시간도 과객이고 인간은 나그네였습니다. 삶은 여기저기 떠도는 방랑의 길이며 집이란 그 방랑의 편의와 일정한 휴식을 위한 최소한의 공간이었습니다. 바쇼는 방랑 속에서 만난 사물과 사람들로부터 삶의 의미를 추출함으로써 불후의 시의 집을 지었습니다.

그러나 바쇼처럼 살 수 있는 자유인은 아주 드뭅니다.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은 안락하고 편한 집을 정처(定處)로 마련하기를 갈망합니다. 그래서 방위와 향을 보고, 산의 남쪽 물의 북쪽, 이른바 산남수북(山南水北)의 양지를 고르려고 애를 씁니다. 산남수북을 양(陽)이라 하고 그 반대인 산북수남을 음(陰)이라고 구분하면서 길지를 찾곤 합니다.

“집을 지으려면 물자리부터 보라”거나 “집이 망하면 지관 탓만 한다”거나 “훌륭한 집을 나쁜 땅에 세우는 자는 스스로를 감옥에 맡기는 자다”라는 각국의 속담과 격언은 다 입지의 중요성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산을 등지고 물을 마주 하는 배산임수(背山臨水)의 명당을 찾는 것은 집을 지을 때나 묘 자리를 고를 때나 마찬가지입니다. 옛사람들은 이렇게 지형과 지세를 살펴 땅을 골랐습니다.

집을 짓거나 살 때 또 하나의 중요한 선택기준은 이웃입니다. “백만금으로 집을 사고 천만금으로 이웃을 산다”[百萬買宅 千萬買隣]는 말이 있습니다. <순자>의 권학편에는 “군자는 사는 곳은 반드시 좋은 환경을 고르고 교유하는 사람은 반드시 학덕이 있는 사람을 택해야 한다”[居必擇鄕 遊必就士]는 말이 나옵니다. 둘 다 이웃의 중요성을 알려주는 명언입니다.

요즘은 마음이 맞는 사람들끼리 함께 집을 짓고 모여 사는 경우도 많아졌습니다. 아동문학가 강지인의 시 ‘집’이 그런 집을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비바람 막아주는 지붕,/지붕을 받치고 있는 네 벽,/네 벽을 잡아주는 땅,/그렇게 모여서 집이 됩니다.//따로 떨어지지 않고/서로 마주 보고 감싸 안아/한 집이 됩니다./아늑한 집이 됩니다.”

이웃에 대한 생각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큰 집을 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의염치와 청빈을 중시하던 사람들의 생각이지만, “큰 집은 죽음을 부르고 작은 집은 복을 부른다”고 합니다. 큰 집을 뜻하는 옥(屋)은 尸(주검 시)와 至(이를 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작은 집을 뜻하는 사(舍)는 人(사람 인)과 吉(길할 길)로 구성돼 있으니 단순한 말장난이나 문자 풀이 같지만 그런 말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조선의 선비 김정국(金正國)이 <사재척언(思齋?言)>이라는 책에서 한 말입니다.

시인 조지훈의 ‘방우산장기(放牛山莊記)’에는 이런 말이 나옵니다. “고루거각이든 용슬소옥이든 본디 일정한 자리에 있는 것이요, 떠메고 다닐 수 없는 것이매 집 이름도 특칭 고유명사가 아닐 수 없으나 나의 방우산장은 일정한 장소, 건물 하나에만 명명한 것이 아니고 보니 내 몸을 담아 그 안에서 잠자고 일하며 먹고 생각하는 터전은 다 방우산장이라 부를 수밖에 없다.”

용슬소옥(容膝小屋)이란 겨우 무릎이나 움직일 만한 작은 집을 말합니다. “언어는 존재의 집”(하이데거)이라는데, 모든 사물은 아름다운 이름을 얻으면 시간 속에 오래 남습니다. 물질보다 정신을 중시하는 사람들에게는 집이 크거나 작은 것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닐 것입니다.

건축가 김중업의 글 ‘집’을 인용합니다. “집이란 크다고만 좋은 것도 아니고 작다고만 불편한 것도 아니다. 집에는 질서가 깃들여야 한다. (중략) 집이란 지나치게 빈틈없이 꾸며졌다는 사실만으로는 만족키 어려운 것, 설령 제한된 비좁은 공간일망정 터진 곳이 있어야 하며 또한 막힌 곳이 있어야 한다. 집이란 패각(貝殼)과도 같아 완벽해야 하나 그 속에서는 생명이 울려야 한다. 마치 그 속에 바다의 물소리가 울리듯이.”

이제 다시 꽃 피는 봄입니다. 계절의 어김없는 순환을 보며 집의 중요성을 다시 실감합니다. 꽃이 가득한 집이 그립고, 시간 속에 오래가는 자신만의 집을 짓는 사람들이 부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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