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미나리, 올추석 133만 명 봤다...식지 않는 윤여정 신드롬
- 추석 연휴에 방송된 영화 중 가장 높은 시청률을 기록한 영화는 ‘미나리’였다. 미나리는 한국계 미국인 리 아이작 정(정이삭) 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은 작품으로, 아메리칸 드림을 안고 미국 아칸소로 이주한 한인 가족의 여정을 그린 작품이다. 배우 윤여정, 스티븐 연, 한예리 등이 출연했다. 23일 시청률 조사회사 닐슨코리아에 따르면 지난 9월 20일 SBS를 통해 방송된 미나리를 133만 명이 시청했다. 추석 연휴 기간 방송된 영화 중 시청률 1위다. 미나리는 제93회 미국 아카데미시상식에서 6개 부문 후보에 노미네이트, 윤여정이 한국 영화 102년 역사상 최초 여우조연상을 받는 쾌거를 이룩했다. 국내 개봉 당시에는 누적 관객 수 113만3978명을 모았다. 그 다음으로 지난 21일 KBS 2TV에서 방송된 ‘담보’가 102만 명 시청으로 2위에 올랐다. 이번 추석 연휴 기간에 지상파와 종편에서 방송된 22편의 영화 중 시청자 수 100만 명을 넘긴 건 미나리와 담보 두 편뿐이다. 담보는 지난해 추석 연휴에 개봉한 가족 영화다. 인정사정없는 사채업자 두석(성동일)과 그의 후배 종배(김희원)가 떼인 돈을 받으러 갔다가 얼떨결에 9살 승이(하지원·아역 박소이)를 담보로 맡아 키우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았다. 이어 MBC에서 방송된 이제훈 주연의 ‘도굴’이 97만 명 시청으로 3위, SBS에서 방송된 ‘자산어보’와 ‘미션파서블’이 각각 79만 명과 45만 명 시청으로 4위와 5위를 기록했다.
- 2021-09-23 11:34
-
- 윤여정, 타임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 거물로 선정
- 영화 ‘미나리’로 한국인 최초 아카데미상 여우조연상을 받은 배우 윤여정(74)이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이 선정한 올해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 선정됐다. 타임은 15일(현지시간) ‘2021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 명단을 발표했다. 타임은 2004년부터 매년 아이콘(Icons)과 거물(Titans), 예술가(Artist), 선구자(Pioneer) 등 6개 부문으로 나눠 그 해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을 선정한다. 윤여정은 이 중 거물 부문에 이름을 올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팀 쿡 애플 최고 경영자 등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윤여정은 소속사를 통해 “늘 하던 일을 했을 뿐인데, 과분한 칭찬을 받은 한 해다. 100인에 제가 뽑혔다는 데 나 역시 놀라고 있다”며 “긍정적인 좋은 영향을 주는 사람이었기를 바라며, 나보다 훨씬 훌륭한 분들과 같이 이름을 올리게 돼 영광으로 생각한다”는 소감을 밝혔다. 이어 “바라건대 긍정적인 좋은 영향을 주는 사람이었기를 바라며, 저보다 훨씬 훌륭한 분들과 같이 타임의 영향력 있는 100인에 제 이름을 올리게 돼 영광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거물 부문에는 팀 쿡 애플최고경영자(CEO), 미국 체조선수 시몬 바일스, 유명 드라마 작가 숀다 라임스 등 11명이 선정됐다. ‘미나리’에 함께 출연한 동료이자 ‘예술가’ 부문에 이름을 올린 재미동포 배우 스티븐 연이 윤여정에 대한 추천사를 썼다. 그는 “윤여정만큼 자신감 있는 사람들을 만나 본 적이 거의 없다. 깊은 곳에서 우러난 자신감이라고 생각한다”며 “이제는 세계가 그의 존재를 알게 돼 기쁘다”고 말했다. 윤여정은 지난 4월 영화 ‘미나리’ 순자 역으로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한국 배우 최초로 여우조연상을 받았다. 아시아 배우로는 ‘사요나라’(1957)의 우메키미요시 이후 64년 만의 수상이다. 이 외에도 미국배우조합상(SAG), 영국 아카데미상(BAFTA) 등 세계 각국 유력 영화제에서 42관왕에 올랐다. 한편 올해 타임의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 명단에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해리 왕자와 부인 메건, 카멀라 해리스 미국 부통령, 미국 팝 가수 브리트니 스피어스, 미국의 체조선수 시몬 바일스, 일본의 야구선수 오타니 등이 포함됐다.
- 2021-09-17 10:10
-
- 추석 특집 프로그램으로 자녀ㆍ손주와 풍성한 연휴를
- 다가오는 추석 연휴가 우리를 설레게 한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탓에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가족들을 오랜만에 볼 수 있는 기회여서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이야기꽃을 피우는 것도 좋다. 하지만 평소보다 특히 긴 연휴를 더욱 풍성하게 보낼 방법이 있다. 지상파 3사의 다양한 특집과 특선 영화를 함께 시청하며 문화를 즐기는 것이다. 이에 자녀 또는 손주와 함께 TV를 시청하며 더 풍부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재밌는 볼거리를 소개한다. KBS 세대를 관통하는 국민가수 심수봉이 26년 만에 안방극장을 찾는다. KBS는 ‘2021 한가위 대기획 피어나라 대한민국 심수봉’을 오는 9월 19일 일요일 오후 8시, 2TV를 통해 방송한다. 이 공연은 대한민국이 사랑하는 심수봉이 펼치는 26년 만의 단독 TV쇼다. 특히 방송에서 공개한 적 없는 심수봉의 2009년 발표곡 ‘아리랑’을 최초로 공개한다. 이어 9월 21일 화요일 오후 10시 10분에는 스페셜 편을 방송한다. 시간 여행 프로젝트 ‘옛날 TV 그땐 그랬지’는 KBS 영상 저장소에 보관돼 있던 오래된 방송 자료들을 공개하기 위해 개설된 유튜브 채널이다. 뉴트로 열풍에 힘입어 ‘전설의 고향’, ‘사랑이 꽃피는 나무’ 등 유명 드라마부터 ‘가족 오락관’, ‘쇼 특급’ 등 추억의 토크쇼까지 소개한 바 있다. 이번 추석에는 코미디언 박준형, 김지혜 부부가 시간 여행의 안내자 역할을 맡아 그때 그 시절을 소개할 예정이다. 1부 ‘식사연대기’는 9월 20일 월요일 오전 10시 35분, 2부 ‘직장생활백서’는 9월 21일 화요일 오전 10시 35분 1TV에서 만날 수 있다. 추석 연휴 사흘 간 가수 이선희를 내내 만날 수 있다. 감성 로드 다큐멘터리 ‘한 번쯤 멈출 수밖에’는 이선희가 절친과 감성 여행을 떠나 노래와 함께 길목의 풍경을 담아낸다. 총 3부작으로 9월 20일 월요일~22일 수요일까지 오전 9시 40분, 1TV에서 방송한다. 이 외에도 KBS에서는 9월 19일(일) 오후 11시 30분 1TV- ‘미스터 주: 사라진 VIP’, 9월 20일(월) 오전 10시 40분 2TV - ‘광대들: 풍문조작단’, 9월 20일(월) 오후 9시 50분 2TV - ‘인피니트’ (국내 최초상영), 9월 20일(월) 밤 12시 10분 1TV - ‘해어화’, 9월 21일(화) 오전 10시 40분 2TV- ‘엑시트’, 9월 21일(화) 오후 8시 2TV - ‘도굴’, 9월 22일(수) 오전 11시 50분 2TV - ‘공작’, 9월 22일(수) 오후 2시 20분 1TV - ‘감쪽같은 그녀’ 등 다양한 영화가 시청자를 찾아간다. MBC MBC는 온 가족이 둘러앉아 즐길 수 있는 음악 축제를 마련했다. 추석 당일인 9월 21일 화요일 오전 8시 20분에 ‘강변가요제’를 빛낸 신화들이 모여 환희와 감동의 순간을 재현할 ‘MBC 강변가요제:레전드’를 방송한다. 이날 방송될 ‘MBC 강변가요제:레전드’에는 1979년 제1회 강변가요제 금상 수상팀인 홍삼 트리오를 비롯해 박미경, 티삼스, 이상은, 이상우, 박선주, 육각수 등 강변가요제가 배출한 대표 뮤지션 7팀과 딕펑스, 라붐, 라포엠, 손승연, 이소정, 정엽, 존 박 등 후배 뮤지션들이 출연해 세대와 장르의 한계를 넘어선 음악 축제를 선보일 예정이다. 이어 연휴 마지막 날인 9월 22일 수요일에서 23일 목요일로 넘어가는 밤 12시 10분에는 실존 또는 가상 인물을 디지털화하는 기술인 ‘디지털 휴먼’ 기술과 ‘홀로그램’ 기술을 활용해 봄여름가을겨울의 보컬 김종진, 드러머 고(故) 전태관, 고(故) 김현식이 함께 꾸미는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의 홀로그램 콘서트 [Re:present]’를 방송한다. 특히 방송에서 '가리워진 길', '비처럼 음악처럼' 등 모든 음악 팬들의 마음을 울린 명곡들과 함께 가수 이적, 거미, 이무진 등 후배 가수들이 각각 무대에 올라 그들만의 목소리로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의 명곡 향연을 펼칠 예정이다. 이 외에도 추석 특선영화로 9월 19일(일) 오후 8시 25분 ‘아이’, 9월 21일(화) 오전 11시 55분 검객, 9월 21일(화) 오후 9시 10분 ‘담보’ 등을 방영한다. SBS 골프 예능 ‘골프 혈전, 편먹고 공치리’는 2부작 추석 특집으로 ‘동상이몽’을 통해 눈길을 끈 연예계 대표 부부 소이현-인교진 부부와 장신영-강경준 부부가 출격한다. 인소 부부는 유현주 프로, 이승기와 강장 부부는 이경규, 이승엽과 각각 팀을 이뤄 치열한 대결을 펼칠 예정이다. 실력자로 소문난 부부 중 필드 위 최후의 승자가 누구일지 기대해 볼 만하다. 해당 방송은 9월 18일 토요일 오후 6시, 9월 22일 수요일 오후 5시 50분에 시청할 수 있다. 9월 18일 토요일 오후 8시 55분에는 ‘펜트하우스 시즌 3’의 마지막 이야기를 다룬 '펜트하우스-540일간의 이야기‘가 방송된다. 펜트하우스의 주요 배우들을 비롯해 펜트 키즈들이 총출동한 이번 스페셜 방송에서는 첫 대본 리딩부터 마지막 방송까지 펜트하우스와 함께한 540일 동안의 다양한 이야기를 배우들의 시선으로 솔직 담백하게 풀어나간다. 특히 첫 만남부터 캐릭터에 대한 연구, 내가 뽑는 명장면 및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 등 제작 기간 동안 배우들의 희로애락을 소개한다. 또 배우들의 소감, 극 중 캐릭터를 떠나보내는 작별 의식, 그동안 펜트하우스를 사랑해 준 시청자들에게 마지막 인사까지 그 여운을 시청자와 함께 나눌 예정이다. SBS는 추석 특선 영화로 ‘미나리’를 안방극장에 선사한다. 영화 미나리는 낯선 땅 미국 아칸소에서 함께 있다면 새로 시작할 수 있다는 희망으로 하루하루 뿌리내리며 살아가는 어느 이민 가족의 아주 특별한 여정을 그린 영화다. 어디서든 잘 자라는 미나리처럼 낯선 이국땅에서 서로를 보듬는 가족의 삶을 보여준다. 이 영화는 9월 20일 월요일 오후 8시 20분에 방송한다. 한편 TV로는 SBS에서 최초 방송되는 영화 ‘미나리’는 93회 아카데미에서 여우 조연상 수상을 비롯해 6개 부문에 노미네이트 됐고, 배우 윤여정은 이 영화로 총 37개의 상을 받았다.
- 2021-09-16 10:58
-
- [50+ 시니어 신춘문예 공모전] 대륙에서 길을 묻다
- 길을 잃다 지천명(知天命)의 나이에 길을 잃었습니다. 사업이 무너지니 가정도 파탄되고 종교생활도 다 무너졌습니다. 그동안 알던 모든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불편하고 싫었습니다. 자격지심(自激之心)인지 저의 현재 상황을 일일이 설명하는 것에 비참함을 느꼈습니다. 방황하며 현실을 도피했습니다. 일부러 서울을 떠나 아무도 모르는 타지(他地)에 가서 머물렀습니다. 그러다가 중국까지 도망치듯 오게 되었습니다. 흔히 인생을 B(Birth)와 D(Death) 사이의 C(Choice)라고 합니다. 태어나서 죽기까지 매번 선택하며 사는 것이 인생이라는 뜻입니다. 그중에 중요한 3대 선택을 결혼, 직업, 종교라고 하는데, 나이 50세에 이 모든 것들의 기반이 한순간에 붕괴된 것입니다. ‘과연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나는 어떤 선택이 잘못된 것일까?’ 지나온 저의 50년을 곰곰이 반추해보았습니다. 나의 1차 꿈 저는 가난한 집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저의 아버님은 1·4후퇴 때 월남해온 이산가족입니다. 남한에 친척이 없었고 저의 어머님을 중매로 만났지만 가정에 정(情)을 못 붙이시고 한평생을 유랑하듯 밖으로만 떠도셨습니다. 그래서 어머님이 홀로 저희 3남매를 키웠습니다. 어머님의 고생을 익히 보고 자란 저는, 빨리 커서 돈 벌어 어머님께 집 한 채 사드리는 것이 1차 목표였습니다. 대학 갈 때쯤 우연히 저의 주민등록초본을 떼어보았는데, 거기에는 제 나이보다도 주소지 이전 횟수가 훨씬 많았습니다. 그만큼 더 싼 곳으로 자주 이사를 다녔다는 의미입니다. 대학 시절엔 저를 특별히 아끼시는 교수님께서 제게 미국에서의 7년간 석·박사 유학 코스를 권하며, 공부하고 돌아와 우리 대학의 교수가 되라고 기회를 주셨는데, 저는 거절했습니다. 제게는 현재의 대학생도 과분하며, 저는 제가 교수되는 것보다, 빨리 돈을 벌어 어머님을 편히 모시는 게 더 중요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랬더니 교수님께서는 “사람이 돈을 쫓으면 추해진다. 돈이 너를 쫓아오도록 해야지” 하시며 저를 훈계하셨지만, 그때 저는 그 말이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군(軍) 입대할때도 경제생활을 고려해 장교를 선택했고, 대기업에 입사했다가 1년 반 만에 대형 증권사로 이직(移職)을 합니다. 거기서 3년 만에 드디어 꿈을 이룹니다. 드디어 어머님께 집을 사드리게 된 것입니다. 그때의 제 나이가 서른 살이었습니다. 이후 증권사에서 저는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고 승승장구합니다. 고민이 시작되다 그리고 이어 제가 서른한 살에 아들을 낳았는데, 그때에 아들 이름을 지으며 저는 처음으로 인생에 대해 고민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저처럼 좋은 집을 사고 좋은 차를 타며, 가족끼리만 잘 먹고 잘 사는 게 목표일까? 그 이상의 인생은 없는 걸까? 나중에 크면 아들에게 인생이란 무엇이라고 말해줘야 할까?’ 그런 생각들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아들의 이름을 지었습니다. ‘금강산(金剛山)’. 저의 성이 김(金)이니, 김강산이나 금강산이나 한자(漢字)의 표기는 같았습니다. 제가 그때는 교회도 열심히 다닐 때였기에, ‘역사의 하나님’께서 앞으로 우리 민족의 미래를 열어주실 때, 제 아들 녀석을 ‘금강산 찾아가는’ 통일의 도구로 써주십사 하는 의미였습니다. 저는 비록 제 가족밖에 모르는 인생이지만, 제 아들만큼은 그 이상의 가치 있는 인생을 살게 해달라는 기도의 산물이었습니다. 한편 증권사 시절은 가히 저의 전성시대였습니다. 최연소 영업추진부장, 지점장, 연수원장, 홍보실장, 강남본부장(11개 지점 총괄), KBS 라디오 증권방송 등 종횡무진(縱橫無盡)했고, 급여도 억대 연봉이었습니다. 20여 년 전에 연봉 1억 원이면 거의 상위 1% 수준이었습니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위치였는데, 언제부터인가 왠지 가슴 한구석이 허전했습니다. 경제적인 풍요가 더 이상 나를 행복하게 하지 않았고, 가시적 1차 목표가 사라진 인생은 조금씩 허무해지기 시작했습니다. 특별히 IMF 때 저는 증권사 신촌지점장이었는데, 문득 제가 하는 일에 회의(懷疑)가 생겼습니다. ‘조국 대한민국은 현재 달러가 없어서 국가부도 사태인데, 지금 내가 하는 일은, 이 혼란 속에서도 돈 있는 사람들에게 돈을 좀 더 벌게 해주는 역할 정도가 아닌가? 과연 이 일을 계속해야 하는 걸까?’ 본질적인 고민이 시작되었습니다. 결국 증권회사에 사표를 제출하게 되었을 때, 저를 아끼셨던 사장님께서 제게 물었습니다. “지금 잘하고 있는데, 왜 갑자기 사표를 내는가?” 그때에 저는 ‘재미가 없어서요’라고 답한 기억이 있습니다. 진심이었습니다. 그 말에 사장님께서는 씨익 웃으시며 “사표는 유보할 테니, 유급으로 한두 달 푹 쉬고 충전해서 돌아오라”고 말씀하셨고 실제로 그렇게 처리해주셨지만, 저는 결국 사표를 철회하지 않았습니다. 헤드헌터(Head Hunter)사의 유혹 증권사 퇴직 얼마 전부터 강남의 유명 헤드헌터사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아시는 것처럼, 대기업이나 국가기관이 소수의 전문가를 특별 채용하고자 할 때는 공개채용을 하지 않고, 헤드헌터사가 보유한 분야별 전문 인력 풀에서 추천을 받곤 합니다. 어찌된 일인지 그쪽 추천 리스트에 저도 포함되어 있었나 봅니다. 기분 나쁘지 않았고 신기했습니다. 첫 번째 제안은 외국계 증권사의 홍보팀장이었는데 제가 거절했습니다. 우선은 IMF 시기에 외국 회사라는 게 싫었고, 저의 공식적인 답변은 그쪽 역할이 지금보다 작고, 연봉도 저의 현재 수준이 더 높다는 이유였습니다. 그러자 2개월 후 다시 제안이 왔습니다. 이번엔 역할도 크고 연봉도 맞춰주겠다고 했습니다. 그게 우리금융그룹 홍보실장이었습니다. 일단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우리금융은 IMF 때 공적자금을 받은 5개 은행을 통합하여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금융지주회사인데, 빨리 회생하여 주가를 높여야 우리나라가 IMF로부터 벗어나는 상황이었습니다. 일단 면접이라도 보아달라는 헤드헌터사의 거듭된 요청을 받아들여, 면접을 보고 결국 입사를 결정하게 됩니다. 가서 만나보니, 하나은행을 성공적으로 경영하셨던 윤병철 회장님께서 우리금융그룹 초대회장으로 오셨고, 이후에 금융감독원장이 되신 전광우 부회장님이 제 직속 상관이셨습니다. 두 분 모두 능력도 탁월하시고 인품도 훌륭하셨습니다. 특별히 저를 많이 아껴주시고 믿어주셔서 가까이서 많은 일들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근무여건은 녹녹지 않았습니다. 산하의 은행들은 지주회사를 마치 점령군처럼 인식하여 노조를 중심으로 사사건건 반발했고, 언론도 호의적이지 않아, 매일 밤 언론사를 찾아가 부정적인 기사를 막아내는 것이 저의 주된 업무가 되었습니다. 또다시 흘러가는 시간이 아깝게 느껴졌고, 저는 결국 1년 만에 최종 사직을 합니다. 저의 사표에 대한 답신으로 윤병철 회장님이 써주신 덕담 가득한 친필 서한(書翰)에, 저는 한 번 더 감동하며 고별인사를 드렸습니다. 새로운 세상을 엿보다 총 18년간의 직장생활을 정말 미련 없이 정리하고 나서는, 직장인 시절에 제대로 할 수 없었던 일들에 관심을 갖고 시간을 보냈습니다. 첫째는 각종 동문회 참가였고, 둘째는 강사 활동이었습니다. 동문 모임으로는 서울시립대학교 대학동창회와 ROTC 총동기회가 있었는데, 나름 열심히 하다 보니, ROTC 21기 총동기회장으로 전국을 누볐고, 당시 ROTC 중앙회장이셨던 5기 차인태(전 MBC 아나운서) 회장님과도 좋은 신뢰를 쌓았습니다. 이어 회사 다닐 때부터 간간이 요청이 있었던 몇몇 대기업에서의 강의 요청을 이제는 편하게 다닐 수가 있어서 좋았습니다. 삼성그룹, 효성그룹, 푸르덴셜생명 등에 리더십, 프레젠테이션, 커뮤니케이션, 네고시에이션(협상기술) 등을 주제로 4~8시간까지 강의를 진행하곤 했습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푸르덴셜생명으로부터 한 가지 큰 제안을 받게 됩니다. 난치병 어린이들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는 ‘한국 메이크어위시(Make A Wish) 재단’의 초대 사무총장을 맡아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제겐 생소한 분야였지만, 자원봉사자 선발 및 교육, 소원행사 감동연출 및 홍보, 그리고 기업으로부터 후원금 조달업무 등을 총괄하는 역할이어서, 저를 적임자로 평가한 것 같았습니다. 저에 대한 기대도 감사하고 좋은 일이어서 흔쾌히 수락했습니다. 한국 메이크어위시 재단의 사단법인 인허가 설립부터 총 2년여를 봉사했는데, 미국재단으로부터 매뉴얼 교육을 받고, 소아암병원으로부터 소원 대상자를 추천을 받아, 최선을 다해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수십 건의 소원성취 행사를 진행했습니다. 그때에 저는 많은 것을 배우고 깨달았습니다. ‘약값이나 치료비를 지원하지 왜 소원성취인가? 스스로는 아무것도 꿈꿀 수 없는 어린이들에게 단 한 번의 소원은 무얼까? 인간에게 진정한 소원이란?’ 이런 물음을 통해 사회봉사에 대해 새롭게 눈을 뜨게 되었고, 이런 생각은 후일 중국에 와서도 나름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새로운 큰 도전, 그리고 실패 직장생활을 그만두고 깊이 생각한 것은, 돈 이상으로 의미 있고 하고 싶은 일을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제게는 ‘한류문화 관광사업’ 이었습니다. 이 사업을 선택한 이유는 첫째, 우리 문화를 사랑하고 상품화하는 것은 제가 잘할 줄 아는 분야였고, 둘째, IMF를 겪고 보니 국가적으로 달러 버는 일이 중요했는데, 이 일이 바로 그쪽 분야의 일이었고, 셋째는 우리나라 환율이 오르니, 이른바 인바운드(inbound, 한국 입국) 관광사업에 경쟁력이 높아졌던 시기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은 2002년 한일 월드컵에 맞춰서 일을 시작하려던 계획이었는데, 여기저기 세상을 엿보다가 좀 늦어져서 2004년에 도전을 시작했습니다. 한국에 오는 외국 관광객들에게 한국적 감동을 추가로 전하며, 1인당 100불씩 더 쓰게 하자는 내부 경영목표를 세우고, 독창적 한류문화 전시 및 상품개발 사업을 기획합니다. 그리고 김포공항 국제선 제2청사 지하 1층에 약 1000㎡ 규모로 ‘한류스타 홍보관’을 제법 호화롭게 개장했습니다. 전시관 조성에만 총 9억 원을 투자했습니다. 당시 일본에 한류 붐이 있었고, 국제선 제2청사는 도쿄 하네다공항을 직행하는 항공편이 매일 16편이 있었습니다. 김포공항의 한국공항공사는 물론, 문화관광부, 한국관광공사 등의 기대와 관심을 한껏 받으며 사업을 자신감 있게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초기에 공동으로 지분투자를 약속했던 일본 도쿄의 파트너 관광사업자가 약속을 어기면서 틀어지기 시작했고, 개장 6개월 후부터 갑자기 일본의 한류 붐이 식으면서 위기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직접 일본 도쿄돔에서 열린 한류 페스티벌 행사에도 참가하고, 말레이시아와 중국 등에도 직접 진출을 시도했습니다. 중국은 그때 처음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수익 다변화를 위해 국내 이벤트 기획사로도 사업영역을 넓혔습니다. 당시 오세훈 시장 시절에 서울시 장애인 예술제도 연출했고, 노인협회 주관의 세계노인문화예술제를 8개국을 초청하여 속초와 설악산에서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그 외에도 포천 양귀비 꽃 축제, 대기업 행사 등을 수주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불황과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개장 4년 만에 전시시설을 김포공항에 기부체납하면서 사업장의 문을 닫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부채청산을 위해 모든 개인 재산 정리를 했고, 가정도 파탄을 맞습니다. 돌이켜보면 뜻만 좋았지 저 자신이 자신감을 넘어 너무 교만했고, 위기대응 준비가 충분하지 못했고, 모두가 저의 부덕한 탓이었습니다. 어머님이 계시기에 졸지에 더 이상 갈 곳도 없고 반기는 곳도 없었습니다. 낮에는 대인기피증이 생겼고, 밤에는 극심한 불면증에 시달렸습니다. 몸도 마음도 피폐해졌습니다. 개인적으로 나쁜 생각도 참 많이 했었지만, 그때마다 어머님이 슬퍼하실 얼굴이 떠올라서 참고 참았습니다. 어머님은 당시에 큰아들이 고생한다고 제가 사드린 집을 처분하여 제게 마지막 힘을 보태주셨는데, 저는 그 기대마저도 부응하지 못하고 무너진 것입니다. 저 때문에 졸지에 어머님마저도 다시 사실 곳이 마땅치 않은 상황이 되었습니다. 사실은 그 몇 해 전부터 어머님은 몸이 많이 상하셔서 거의 거동을 못하시는 상태셨습니다. 한약방에서는 맥박도 약하고 보약도 효험이 없다고 주지를 않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사업이 망하고 가정파탄마저 겪게 되자, 어머님은 기적처럼 아픈 몸을 털고 다시 일어나셨습니다. 이유는, 갈 곳 없는 저의 끼니를 챙기시고 저의 옷을 세탁해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정녕 어머니는 위대하다는 말을 저는 그때 다시금 느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인가, 원인도 모른 채 제가 밤새 심한 복통으로 끙끙 나뒹군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어머님은 두 손으로 저의 아픈 배를 계속 문지르시며, 당신은 평소 불교 신자셨는데 제가 믿는 하나님을 외치시며 ‘우리 큰아들을 제발 살려달라’고 밤새 우셨습니다. 너무도 아프고 길었던 그날 밤, 어머님의 그 뜨거운 눈물과 안타까운 외침 소리를 저는 결코 잊지 못합니다. 중국으로 떠나오다 그런 어머님을 뒤로하고 저는 중국행을 선택합니다. 당시 중국과는 비록 지지부진했지만, 고구려의 420여 년간 수도였던 집안시(集安市) 정부 관료들과 제가 고구려축제를 협의하던 중이었던 바, 거기에 마지막 희망을 걸고, 아니 그것을 핑계로 한국을 도망치듯 떠납니다. 어쩌면 아무도 없는 무인도(無人島)를 찾는 마음이란 표현이 더 솔직할 겁니다. 집안시의 고구려 프로젝트는 3개월 뒤 결국 무산됩니다. 제가 한국인이라는 이유였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한국인이 중국에서 고구려를 거론하는 것은 그 자체가 금기시되는 일이었습니다. 집안시 정부 책임자도 처음에는 그 정도로 민감한 문제인 줄을 미처 몰랐던 것 같았습니다. 집안시 프로젝트는 무산되었지만 저는 한국으로 돌아갈 마음이 없었습니다. 아무런 대책도 목적도 없이 그저 좀 더 중국에 머물기로 하고 지인이 있는 곳을 찾았는데, 그곳이 바로 단동시(丹東市)였습니다. 단동은 압록강을 사이로 북한 땅 신의주와 마주하고 있으며, 북한 대외무역의 약 80%가 단동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단동은 한마디로 우리말 백화점이었습니다. 당시 단동에는 중국 조선족이 1만 5000명, 북한 사람이 1만 명, 북한에서 태어난 중국 화교(華僑)가 1만 명, 요동대학교 한국·조선(북한)어과 학생들이 1000여 명, 그리고 한국인이 총 2000명 정도 살고 있었습니다. 대부분 대북사업 관계자이거나 선교사였습니다. 누구를 만날 일도 없고 아무 일과도 없는 저는, 매일 새벽 혹한의 추위에도 저를 채찍질하듯 하염없이 압록강 산책로를 걸었습니다. 새벽 교회당을 찾아 무릎 꿇고 홀로 숨죽여 울었습니다. 그리고 매일 밤, 강 건너 불 꺼진 북한의 신의주 땅을 멍하니 넋 놓고 바라보았습니다. 그렇게 저의 ‘살아남아 버티기’의 중국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사람이 살고 있었네 그렇게 한두 달을 보내다 보니, 점점 주변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거기에도 저와 똑같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여러 해 전 소설가 황석영이 북한을 다녀와서 쓴 책의 제목이었던 ‘사람이 살고 있었네’가 생각났습니다. 한인교회를 통해 한국 사람들을 접하고 단동한인회도 구경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제가 시간이 많으니 한인회 봉사를 제의받아, 당시 막 설립한 단동한국문화원의 부원장직(원장은 한인회장이 겸직)과 한인회 사무국의 사무총장으로 무료봉사를 시작했습니다. 단동한인사회는 대부분 1992년 한중수교 직후와 1997년 IMF 전후로 중국에 건너오신 소상공인 분들이 많았던 바, 아마도 저와 같은 대기업 출신의 사회 경험자가 드물어, 오자마자 졸지에 감투를 쓰게 된 것이었습니다. 봉사의 길에 들어서다 뜻밖에 할 일이 생긴 저는, 대기업에서의 기획력과 이벤트 기획사 대표로서의 경험을 되살려 많은 일들을 추진했습니다. 우선 요동대학교 한국·조선어과를 찾아서는 한국어 말하기 대회와 글쓰기 대회, 그리고 합동 문화공연을 매년 추진했습니다. 재외동포재단에는 기획서를 보내 한인회관 건축지원금을 50% 받고 나머지는 현지 모금하여 3층짜리 아담한 단동한인회관을 건립했습니다. 한편, 장기체류 단동 한인들의 대부분이 현지인과 결혼한 다문화가족들이었는데, 이들에 대한 지원체제가 없어, 문화원 내에 다문화가족 복지센터를 만들고, 당시 단동을 방문한 국회 통일외교안보위의 박선영 국회의원님과 심양총영사관의 협조를 얻어 다문화가족 합동결혼식과 단체 한국 신혼여행을 추진했습니다. 그리고 조선족학교에 가보니, 70% 이상 대부분 학생들은 부모가 한국에 돈 벌러 가서 없는 결손 가정이거나 조부모 위탁상태였고, 소학교를 졸업해도 별도 우리말도 잘 못하고 중국어도 잘 못하는 언어수준에다, 문화예술 방면 재능교육 발견은 엄두도 내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비록 몸은 건강해도 스스로는 아무것도 꿈꾸지 못하는 조선족 아이들이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저는 먼저 문화원에서 조선족 학생들을 대상으로 우리말 교육과정을 시작했고, 해마다 한국어 말하기 대회를 개최하여 수상자들에게 한국문화체험여행을 제공했습니다. 제가 단동에 머문 4년 동안 총 140여 명의 학생들이 한국을 방문했는데, 여행비용은 경기문화재단과 한국 지인들의 개인적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조선족 학생들의 예술적 잠재력을 끌어내기 위해, 나아가 그들 스스로가 무언가를 꿈꾸게 하기 위해, 제가 예술단장이 되어 직접 학교에 가서 학생 67명을 선발하여 ‘압록강 청소년예술단’을 공식 발족하였습니다. 그 뒤 8개월간의 훈련 후에 5성급 호텔에서 1000여 명의 학교관계자과 학부모들을 모시고 ‘내 마음의 북두칠성’이라는 제목의 예술단 창단공연을 성공리에 추진하였습니다. 대부분 첫 무대를 경험하는 것이라 감동은 컸고, 학교를 향한 후원금도 쏟아졌고, 부모님들은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심양으로 진출하다 이런 저의 활동들이 인근 지역에도 소문이 났던 모양입니다. 심양총영사관에서는 당시 조백상 총영사님의 파격적 배려로 저를 총영사관의 경제문화행사 기획자 겸 사회자로 발탁해서 일을 맡겼습니다. 마침 한중수교 20주년도 겹쳐서, 각 도시마다 한중우호의 밤 행사가 있었고, 중국 동북3성(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 27개 대학을 대상으로 한 ‘한국어 말하기 대회 및 K-Pop 경연대회’, 그리고 한국 국경절(개천절) 기념 총영사관 한복패션쇼 등의 행사를 연출했습니다. 그러면서 항일유적연구소장과 동북3성 한국인연합회 사무총장을 맡게 되어 동북3성 최대도시인 심양으로 진출하게 됩니다. 심양은 단동의 10배 규모로, 외곽까지 도농(都農)인구 합계가 총 2000만 명인 대도시입니다. 중국 동북3성에 와서 알게 된 사실은, 전 세계 한민족 항일유적지의 3분의 2가 중국에 있고, 중국 항일유적지의 3분의 2가 동북3성에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한국인은 물론 조선족들도 우리의 항일역사에 대해 잘 모르고, 항일유적지 찾기에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만든 것이 항일유적연구소였습니다. 연구소를 운영하면서 우리나라는 물론 중국의 항일역사에 대해서도 많은 공부를 했습니다. 저는 연구소장으로서 연구원을 모집하고, 안중근 13일간의 이동경로와 거사일정을 뒤따라가 보기도 했고, 윤동주의 생가, 신흥무관학교의 발자취 등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 많은 항일열사들의 발자취도 찾아다니며 공부했습니다. 그런 중 우리나라 3대 독립선언 중 하나이자 최초의 독립선언인 ‘무오독립선언’의 내용과 의미를 분석, 발굴하여, 심양총영사관과 국가보훈처의 협조 아래 저희 항일유적연구소가 주관하여, 중국 현지 최초로 ‘무오독립선언 기념식’을 개최하였습니다. 저의 가장 큰 보람 중 하나인 이 행사는, 민주평통 선양협의회의 주관으로 지금도 8년째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한중교류문화원을 설립하다 대도시 심양에 와서 저는 새로운 결심을 하게 됩니다. 그동안 제가 잡다하게 벌여놓은 문화예술 봉사활동과 조선족학교 지원, 그리고 항일역사연구와 유적지 방문활동 등을 종합하여, 체계적으로 추진하기 위한 시스템과 공간 확보의 필요성이 커진 것입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한중교류문화원’을 설립 추진합니다. 한중교류문화원은 심양의 코리아타운 지역인 서탑가 인근에 약 2000㎡ 규모로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아 2014년 7월 19일 설립하였습니다. 자체적으로 130여 석 규모의 강당을 갖게 된 문화원은 많은 교육활동과 문화예술 공연행사를 연출합니다. 그중에 최고의 대박상품은 ‘실버대학’입니다. 제1기 실버대학은 2014년 가을에 약 15주의 과정으로 진행되었는데, 50세 중반부터 80세 전후의 조선족 어르신들 93명이 첫 신입생으로 입학했습니다. 노래교실, 역사문화특강, 10년 젊어지기 미용특강, 핸드폰 사용법, 기본생활영어, 도전 골든벨, 그리고 졸업여행에 이어 사각모와 졸업가운 입고 졸업식하기 등의 행사에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습니다. 실버대학은 제가 문화원장으로 재임한 약 3년 반 동안 총 4회가 이어졌습니다. 한편, 실버대학은 제가 특별한 의미로 시작한 것입니다. 바로 한국에 두고 온 저의 어머님을 생각하며 만든 행사입니다. 사실 한국에 있을 때, 어머님의 집에 가면 마음으로는 늘 눈물겹게 고맙고 감사하게 생각하지만, 대부분의 우리 세대 장남들이 그러했듯이 다정다감하게 표현하지 못하고 무뚝뚝한 아들이었습니다. 사실은 어머님과 재미있게 놀아드리고도 싶었는데, 그러지 못한 죄송스러움과 한(恨)을 실버대학을 통해서 조선족 어머님들께 재롱도 부리며 조금이나마 풀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심전심(以心傳心)일까요? 실버대학 어머님들의 공통된 감사인사 표현은 “우리 아들도 못 해준 호강을 실버대학에서 받았네요, 너무 행복합니다!”였습니다. 저도 응답합니다. “아닙니다. 행복하시다니, 제가 더 고맙습니다.” 그밖에도 한중교류문화원에서는 항일사진전, 어린이 K-Pop대회, 한국가수 김광석 가요제, 중국가수 등려군 가요제, 장예모 감독 영화제, 한국영화제, 조선족학교 돕기 프로젝트, 청춘콘서트, 사물놀이 강습, 한국 만화도서관 개관, 한중친선 배구대회와 탁구대회 등의 행사를 연출하였습니다. 동주학당, 동북에 물들다 그렇게 3년 반의 초대원장 자리를 마치고, 조선족에게 한중교류문화원 2대 원장을 물려주었습니다. 경영의사결정 과정에서 오해와 어려움도 있었고, 제가 너무 강하게 한국 문화를 중국 조선족들에게 전파한다는 정치적 오해가 깊어져서, 부득불한 조치였습니다. 대신에 저는 조선족 지식인들과 함께 윤동주의 이름을 딴 ‘동주학당(東柱學堂)’이란 모임을 만들고, ‘한중 문화융합연구소’라는 개인연구소를 차린 후, 다시 독립하여 조선족들을 향한 집중 봉사활동을 재개합니다. 동주학당은 민족시인 윤동주를 한민족 디아스포라(Diaspora)의 대표인물로 생각하여 ‘한민족 디아스포라 사랑방’을 추구하는 가운데, ‘찾아가는 민족문화원’을 표방했습니다. 우선 심양에서 ‘윤동주 100주년 기념 시낭송음악회’를 연출했고, ‘동주학당, 대련에 물들다’, ‘동주학당, 치치하얼에 물들다’, ‘동주학당, 영구에 물들다’ 등 동북3성 여러 지역을 순회하며 ‘찾아가는 민족문화원’의 면모를 과시했습니다. 또한 심양 남부 소가툰 지역에 ‘윤동주 문화원’을 건립하여 실버대학도 성황리에 진행하였습니다. 그리고 중국의 거의 최북단으로, 3만 명의 조선족이 거주하는 흑룡강성 치치하얼에도 ‘치치하얼시 조선족문화원’ 설립을 지원하고, 제가 명예원장을 맡아, ‘치치하얼시 조선족 아리랑 예술제’ 및 대동제를 개최하였습니다. 이어 거기서도 같은 마음으로 실버대학을 진행했는데, 제가 중국에서 총 6번째로 진행하게 된 ‘치치하얼 조선족 실버문화대학’은 무려 1200km 거리(심양-치치하얼)를 3개월간 매주 고속열차로 달려가서 진행한 것이었습니다. 누군가에게 소중한 것의 크기는, 자신의 재물과 시간과 열정을 투자한 것에 비례한다는 말을 저는 온전히 믿습니다. 치치하얼이 제겐 그런 곳입니다. 그곳에서 만난 조선족 동포 분들이 제겐 그랬습니다. 한중 갈등에 아파하다 그렇게 해서 어느 새 10여 년이 흘렀고, 50세에 길을 잃고 도망치듯 중국에 왔는데, 뜻밖에 어쩌다 길이 되어버린 조선족 대상 봉사활동을 하다, 어언 환갑을 지나 올해 63세에 이르렀습니다. 앞에서 제가 제법 많은 일들이 성취되었음을 자랑하듯 나열했는데, 그러나 돌이켜보면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았고, 어렵고 힘든 문제들은 지금도 계속 발생되고 있습니다. 특히나 한중관계가 어려워지면 중국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은 숨이 막힐 만큼 생존에 위협을 느낍니다. 평소에도 역사문제는 중국의 동북공정과 부딪치며 민감해서 매우 조심해야 했지만, 설상가상 사드 사태 등 정치적으로 꼬이면 한국인은 택시 탑승을 거절당할 만큼 배척됩니다. 지금도 한중관계가 소원해지면 겁부터 나는 것이 사실입니다. 가장 가슴 아팠던 것은, 동주학당이 야심차게 윤동주문화원을 설립했으나, 윤동주의 국적문제가 불거지면서 설립 1년 만에 활동을 접어야 했고, 개인적으로는 문화간첩으로 오해받아 특정 지역에 출입이 막힌 적도 있었습니다. 살펴보면, 중국인들은 조건 없는 봉사를 믿지 않습니다. 조선족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분명히 숨겨진 다른 목적이 있다고 의심합니다. 그리고 문화는 정치라고 생각합니다. 문화침투 등 정치적인 오해로 몰면, 어느 친구도 나서서 저를 변호해 주지 못했습니다. 그게 중국이고 그게 조선족의 입장임을, 너무 아프고 안타깝지만 이제는 이해하고 인정합니다. 한편, 한때는 한국 정부도 저를 오해해서, 제가 북한과 중국의 국경지역인 압록강 지역을 자주 오고가니까, 인천공항에 입국할 때마다 혹시 친북간첩이 아닐까 조사를 받기도 했습니다. 어쩌다 한국과 중국이 모두 저를 의심하는 웃지 못할 상황도 있었습니다. 흔히 우리나라 외교를 ‘안미경중’(安美經中)이라고 말합니다. 안보는 미국이요, 경제는 중국이라는 뜻입니다. 양쪽 사이에서 위태로운 줄다리기 외교만큼, 재중 한국교민들의 마음도 불안하고 위태롭습니다. 어찌되었거나 서로 신뢰하고 미래지향적으로 협조하는 훈훈한 한중관계를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조선족 전성시대’가 온다 제가 중국에서 만나본 조선족들은 현재 중국인으로 열심히 살아가고 있고, 아울러 한민족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지만, 그 내면을 살펴보면 어디 가도 비주류요, 이방인처럼 살고 있습니다. 1950년대 초에 중국 소수민족의 하나인 조선족으로 편입되어, 그동안 중국인으로 산 세월이 미처 70년이 되지 않습니다. 아직 중국의 주류인 한족들과의 융화가 문화 차이로 쉽지만은 않고, 마찬가지로 모국인 한국에 와서도 여전히 차별받는 비주류요, 이방인입니다. 현재 조선족 부모와 자녀들은 매우 고민합니다. 중국에서는 점차 조선족에 대한 우대조치가 사라지고, 얼마 전 조선족학교를 향해 앞으로 조선말이 아닌 중국어로 교육하라는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그동안 조선어로 시험 보아 다소 유리했는데, 앞으로는 대학시험도 중국어로 쳐야 합니다. 그러자 조선족 유치원과 학교에는 학생들이 빠져나가고 있습니다. 빨리 중국 한족학교로 옮겨가야 그나마 중국 학생들을 따라갈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조선족 학생들이 한족 학생들과 경쟁에서 이기기는 어렵습니다. 대학을 나와도 갈 곳이 거의 없습니다. 얼마 전 조선족 대학생연합회 대표들과 대화했는데, 그들의 대다수가 원하는 꿈이 커피숍이나 식당을 꾸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아마도 그 외에는 별다른 기회가 없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런 조선족들에게 저는 이제 곧 ‘조선족의 전성시대’가 온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남북한 평화경제시대입니다. 이는 굳이 정치적 통일이 아니더라도, 상호간 화해협력을 기반으로 북한이 경제적으로 개방하는 시대를 의미합니다. 이때가 되면 조선족 역할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바, 이를 잘 준비하자는 것입니다. 저는 외칩니다. “조선족은 어디 가나 비주류요 이방인이 아니라, 향후 ‘남북한 평화경제시대’에 모두가 필요로 하는 핵심인재들입니다. 그래서 하늘이 미리 점지(點指)하고 100년 전부터 중국 땅에 선발대로 보낸, 최고의 일꾼들입니다.” 저는 이런 점들을 우리 조선족들에게 분명히 가르쳐주려 합니다. 저의 그런 주장의 근거는 세계적인 투자자 짐 로저스의 분석에 기초합니다. 이제부터 다시 시작하는 제 인생 이모작의 꿈도 거기서 같이 출발합니다. 20년 전부터 중국의 획기적 성장을 예견했던 짐 로저스는, 이제 일본의 시대는 끝이 났고, 앞으로는 북한의 개방을 주목하라고 말합니다. 북한의 개방은 분명 대한민국과 한민족의 미래에 가장 큰 기회가 될 것이라고 호언장담합니다. 저도 이 주장에 100% 공감하며 진실로 기대하며 설렙니다. ‘조선족 희망전도사’의 꿈 한국에서 그랬던 것처럼, 중국에서도 가끔은 강의를 할 기회가 생깁니다. 대부분은 조선족단체 모임이고, 한국국제학교 학생들에게도 할 기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공통적으로 빠지지 않고 제가 설파(說破)하는 내용이 있는데, 그것은 ‘조선족이여, 남북한 평화경제시대의 실무주역이 되자!’ 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독일 통일 이후의 상황에 주목합니다. 1989년 서독과 동독이 통일할 때 양국의 경제력 차이는 8:1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난 32년간 동독의 발전을 위해 엄청난 투자를 한 결과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서독과 동독은 아직 2:1 이상의 격차 상태라고 합니다. 그런데 한국과 북한은 3년 전 기준으로 경제력 차이가 무려 44:1입니다. 이 격차를 해소하자면 적어도 향후 50년 이상의 투자와 인적교류가 무조건 필요합니다. 그때에 필요한 실무인력으로 조선족보다 더 경쟁력 있는 집단은 없다고 저는 감히 주장하고 있습니다. 만약 북한이 문을 열면, 서울 청년들이 평양 청년들과 별 갈등 없이 일할 수 있을까요? 저는 매우 어렵다고 봅니다. 당장에 한국인과 조선족도 문화인식 차이가 작지 않은데, 남북한 간에는 불가피하게 갈등해소 시간과 비용이 엄청나게 많이 소요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미 한국의 자본주의도 충분히 알고, 중국의 공산주의 체제에도 잘 적응하고 있는 조선족만의 실무역할 영역이, 다가올 남북한 평화경제시대에 차별적 블루오션(Blue Ocean)으로 분명히 생겨날 것이라 저는 판단합니다. 앞으로 적어도 50년 동안은 조선족을 필요로 하는 시대가 활짝 열릴 것입니다. 그러하니 조선족이라면, 기본적으로 우리말은 무조건 똑똑히 배워두고, 능력이 되면 한국의 기술이나 장점을 잘 공부해두라는 조언을 조선족 청년과 부모들에게 진심을 다해 전해줍니다. 그렇게 강의하며 말하고 다니다 보니, 일부 조선족들이 제게 붙여준 별명이 ‘조선족 희망전도사’입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 별명이 참으로 과분하지만 제 마음에도 흡족하게 스며듭니다. 더 노력해서 진짜 ‘조선족 희망전도사’로 살아보자는 꿈도 생겨났습니다. 대륙에서 길을 묻다 나라 잃은 슬픔 속에서 민족시인 윤동주는 그의 시 ‘길’을 통해 이렇게 말합니다. ‘잃어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게 나아갑니다.’ 아마도 나이 50에 직업과 가정과 신앙의 동반 몰락을 경험하면서 도망치듯 중국으로 넘어온 때의 제 심정과 조금은 닮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다시 기운을 차려, 작고 소박하지만 같은 민족으로서의 안타까움과 애정을 담아, 혹시라도 저의 재능을 필요로 하는 곳에, 특별히 조선족들에게 아무 조건 없이 달려갔던 중국에서의 지난 10여 년을 정리해봅니다. 중국의 대문호 노신(魯迅) 선생이 청년들에게 희망을 이야기하면서 말했던, ‘처음부터 길은 없었다. 사람들이 다니면서 비로소 길이 되었다’는 구절이 생각납니다. 처음엔 미처 길인 줄 몰랐는데 저도 어찌어찌 십여 년을 지나고 보니, 이젠 나름 하나의 길처럼 느껴집니다. 제 몸 하나 추스르지 못했던 한심한 존재가, 어쩌다 타국 땅에서 문화 봉사를 통한 희망전도사로 모질게 살아남아 있습니다. 30~40대의 젊고 풍요로울 때 그렇게도 갈구했으나 찾지 못했던 인생의 참 의미와 가치를, 어리석게도 60을 훌쩍 넘어 늙고 가난해지면서 비로소 조금씩 깨닫고 배워갑니다. 그동안 중국에 와서 개인적으로 절망하며 힘들었을 때, 제게 특별한 위로가 되어준 시(詩)가 있습니다. 정호승(鄭浩承) 시인의 ‘봄 길’입니다. 봄 길 -정 호승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 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강물은 흐르다가 멈추고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꽃잎은 흩어져도 보라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없이 봄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김영식이 있다’ 이제 고백합니다. 정호승 시인의 ‘봄 길’은, 제가 대륙에 와서 길을 묻다가 십 수년 만에 찾아내어 저 스스로에게 답한 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때때로 저는 시의 마지막 구절 뒤에 한 줄을 더 보태어, ‘김영식이 있다’를 다짐처럼 홀로 외치기도 했습니다. 오늘도 길을 잃고 다시 길을 찾는 분들에게 지난날 저의 절망도 작은 위로 중 하나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깜깜한 절망 속에서 위로를 받았듯, 많은 분들이 그랬으면 좋겠고, 앞으로 살면서 서로에게 작으나마 위로가 되고, ‘봄 길’의 내용처럼 희망이 되어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만약 하늘이 허락하셔서, 제게도 ‘인생의 이모작’이 가능하다면, 우선은 한국에서 한국인으로 태어난 것에 무한 감사하며, 이제부터는 중국 땅에서 한 핏줄 동포를 향한 희망전도사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나아가 더 축복해주신다면, 30여 년 전 제가 아들 이름을 ‘금강산(金剛山)’이라 지었던 그 기도의 응답까지 받아서, 북녘의 아버지 고향 땅에 달려가 입 맞추고, 거기 그분들을 뜨겁게 보듬다, 그곳에서 그분들과 함께 묻히고 싶습니다. 이런 저의 마지막 소망이 너무 큰 욕심일까요? •수상소감 - 대상 미니자서전 김영식 “중국 조선족 100년의 이야기를 중국판 처럼 작품으로 써 세상에 알리겠다” •대상 수상을 축하드린다. 수상 소감은? 저는 7살 어릴 적 시골에서, 코 흘리게 손수건을 왼쪽 가슴에 달고 소학교에 입학했습니다. 학교 가는 게 너무너무 좋아서, 공부도 열심히 했습니다. 1학년을 마치는 날, 담임선생님께서는 제 이름을 호명하시며 뜻밖에 1등 우등상장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제게는, 태어나 받은 ‘첫 상(賞)’이었습니다. 우등상 상품은 공책 한 권과 연필 두 자루였습니다. 그걸 들고 낮은 언덕의 신작로 길을 뛰어 어머니께로 달려갈 때, 저는 얼마나 가슴이 뛰며 기뻤는지 모릅니다. 만나는 모든 분들에게 막 자랑하고 싶었습니다. 그로부터 어언 56년이 지났습니다. 어쩌면 ‘마지막 상(賞)’일지도 모르는 이번 상이 저에게는 그때만큼이나 기쁩니다. 그때만큼이나 설렙니다. 저에게 이렇게 설레고 행복한 순간을 선물로 주신 ‘50+ 시니어 신춘문예 공모전’의 주최한 브라보와 신한은행의 관계자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인사 드립니다. 이번에 제가 쓴, 미니 자서전 는, 어쩌면 교만했던 인생의 부끄러운 고백이고, 뻔뻔한 반성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에게 특별히 큰 상을 주신 뜻은, 아마도 이 두 가지가 아닐까 저 나름 생각해 봅니다. 하나는, 다시 한 번 힘을 내서 ‘인생 이모작’에 도전하라는 따뜻한 격려로 느껴집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기대만큼 열심히 새로운 길에 도전하며 살겠습니다. 또 하나 이번 상은, 제 글쓰기에 대해 숙제를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글쓰기를 통해, 세상에 조금이나마 ‘선한 영향력을’ 보태라는 명령입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늘 정직하고 공감과 위로를 주며, 보존할 가치가 있는 글을 쓰겠습니다. 다시 한 번, 큰 상을 주신 브라보와 신한은행에 감사드리며, 끝으로, 조국 대한민국의 조속한 코로나 승리를 기도하고 응원하겠습니다. 여러분, 고맙습니다. •‘50+ 시니어 신춘문예 공모전’ 응모 배경이나 동기는? 저는 현재 중국 심양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동안 한국과 중국을 오가며 생활했는데, 코로나로 인해 지난해 설 명절을 지내고 중국에 온 후, 한국에 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지난해 말에는 운동 중 아킬레스건이 파열되어, 중국에서 수술을 받고 3개월을 치료한 후 현재는 재활 중입니다. 한국의 가족도 한국의 소식도 모두 그립습니다. 한국뉴스를 검색하다가 ‘50+ 시니어 신춘문예 공모전’을 발견했습니다. 그중에 특별히 ‘50+’라는 표현에 많은 생각이 스쳤습니다. 제가 사업에 실패하고 도망치듯 중국에 온 것이, 바로 50세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타향살이 어언 13년이 흘러, 갑자기 코로나로 멈춘 일상 속에서 지나온 저의 인생을 되돌아 반추해보는, 귀한 시간을 가져 보게 되었습니다. 뜻밖에 좋은 기회를 주셔서 정말로 감사를 드립니다. 이번 시니어 공모전을 통해 ‘인생 이모작’도 새로이 꿈꾸게 되었습니다. •글을 잘 쓰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글을 잘 쓰기 위한 노력이라기보다는, 기왕에 제가 쓴 글이 독자들에게 재미와 감동을 주며 더 잘 읽히면 좋겠다는 차원에서의 노력은, 제가 많이 부족해서 앞으로도 계속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평소 저의 글은 딱딱하고 설명형입니다. 재미없는 제 성격과 꼭 닮았습니다. 게다가 글쓰기로 처음 상을 탄 것이 대학 때 논문공모대회였고, 대기업에서 기획담당자였기에 더더욱 저의 글은, 사사로운 감정이 담기지 않은, 그래서 재미와 감동이 ‘1’도 없는 필법(筆法)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특별히 개인적으로 지난 10여 년간, 중국에 와서 여러 종류의 한글 잡지를 만들고 배포했는데, 주된 독자층이었던 중국조선족들은 한국인들에 비해 우리말 어휘력이 30% 수준을 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제 글은 그저 수준 높고(?) 어려운 글이었습니다. 로 유명한 미국작가 훼밍웨이가 어느 회고문에서 자신의 독자로부터 받은 편지 하나를 소개했습니다. 전쟁 파병(아마도 한국전쟁) 중인 미군병사가 자신의 소설을 읽고 나서, 어려운 단어가 없어 ‘사전(辭典)찾기 ’없이도 100% 공감하며 큰 감동을 받았다는 감사편지였습니다. 저 역시, 쉽고도 감동적인 글, 그리고 오래 간직하고픈 글을 쓰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겠습니다. •글을 쓰는데 도움을 준 멘토나 동기부여 이유가 있다면? 직접적인 멘토는 아니지만, 제가 특별히 닮고 싶은 작가가 두 분이 있습니다. 한 분은 한국의 유명한 시인 류시화이고, 또 한 분은 의 저자이자 인류학자인 미국의 루스 베네딕트 교수입니다. 시인 류시화는 개인적으로 저와 고등학교 동기동창입니다. 본명은 안재찬이며, 대광고등학교 30회로, 고교 2,3학년을 같은 반에서 공부했습니다. 경희대학교 2학년 때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당선된 그는, 인도 여행을 다녀와서 쓴 수필집 및 시집 등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인기작가가 되었습니다. 그의 글은 쉬우면서도 깨달음을 줍니다. 저도 글을 쓴다면 그런 면을 배우며 닮고 싶습니다. 다음은 미국의 여성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 교수인데, 제가 단동에서 항일유적연구소장을 할 때, 그분의 저서 을 읽었습니다. 2차 대전 전쟁을 종료하기 직전에 미국이 일본에 대해서 분석한 책으로, 70여년이 지난 지금도 전 세계인들에게 일본과 일본인 분석에 관한 제 1의 필독서입니다. 같은 패망국인 독일과는 달리, 일본은 왜 끝까지 반성하지 않는가에 나름의 분석이 명쾌합니다. 일본에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상태에서 쓴 글이라는 점도 놀랍고, 냉철한 대안 제시가 전후(戰後) 미국과 일본의 관계설정에 기준이 되었고, 지금까지도 대단히 유효합니다. 일본에 대해 비판만하고 흥분만하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줄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는 나는 중국인에게 대한민국에 대해 얼마만큼 설명할 수 있는가, 또는 한국에 와서는 중국에 대하여, 그리고 제가 중시하는 중국 조선족에 대해서, 나는 얼마만큼 본질을 명쾌하게 공부했는가에 대해 통렬하게 반성하게 하는 책입니다. 중국판 같은 글에도 도전하고 싶은 이유입니다. •수상을 계기로 앞으로 어떤 글을 쓰고 싶은가? 얼마 전 미국 아카데미상에서 영화 가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70년 전 조선인의 미국 이민사를 소재로 한 영화인데, 이 영화를 보면서 저는 제 주변의 중국조선족들을 한 번 더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대부분 100년 전후로 대륙에 이주해 왔고, 영화 미나리 이상의 휴먼 스토리가 얼마든지 있다고 저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향후 중국 조선족 100년의 이야기를 중국판 처럼 작품으로 써서 세상에 알리는 것도, 이번 상(賞)을 통하여 저에게 주신, 귀한 소명 중 하나라고 느끼고 있습니다. •감사와 고마움을 전하고 싶은 분이 있다면? 많은 사람이 있지만, 딱 한사람만을 꼽으라면 저는 주저 없이 저의 여동생 ‘김경희’를 말하고 싶습니다. 제가 교만한 실패와 방황, 그리고 대륙에서 길을 묻는 지난 10여 년 동안, 개인적으로는 부끄럽게도 맏아들로서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습니다. 저희 어머님께 제가 한 때는 자랑이던 아들이었지만, 이제는 걱정을 끼치는 아들로 살고 있는데, 그 빈자리를 저의 여동생이 말없이 채워주고 있습니다. 여동생 김경희는 제 인생에서 가장 미안하고 가장 고마운 존재입니다. 이번에 받은 저의 수상이, 제 여동생에게도 작으나마 위로가 되고 기쁨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2021-08-27 10:00
-
- 미나리 외할머니 윤여정이 손자와 사이가 좋아진 이유
- 영화 ‘미나리’에서 제이콥과 모니카가 건강이 나쁜 손자 데이빗을 위해서 친할머니 대신 외할머니를 부른다. 많은 엄마들도 모니카처럼 친할머니 대신 외할머니의 도움을 받아 자녀를 양육한다. 그런데 이 같은 결정은 과학적으로 보면 매우 현명한 선택이다. 영화 ‘미나리’에서 모니카는 병아리 감별사로 맞벌이를 해야 하는 사정이 발생한다. 이에 심장이 좋지 않은 아들 ‘데이빗’과 여동생 ‘앤’을 돌봐줄 사람으로 한국에 있는 엄마 ‘순자(윤여정)’를 미국으로 부른다. 데이빗은 처음 만난 낯선 할머니가 진짜 할머니 같지 않다고 투덜댄다. 게다가 다른 집 할머니들처럼 맛있는 쿠키를 구워주지도 않는다. 데이빗은 서툰 한국말과 영어로 외할머니가 싫다고 말하지만 순자는 반대로 알아듣고 기뻐한다. 갈수록 나빠지던 둘의 사이는 옷장 사고를 계기로 가까워지기 시작한다. 그런데 순자가 외할머니가 아니고 친할머니였으면 어땠을까? 친할머니였다면 사이가 계속 나쁜 채로 끝났을 가능성이 높다. 과학적으로 보면 손자는 외할머니가 친할머니보다 더 가깝기 때문이다. 유전적으로 외할머니는 손자와 손녀와 비슷하게 가깝고, 친할머니는 손녀와 가장 가깝다. 실제 과학적인 연구에서도 손자는 외할머니와 함께 살 때 생존율이 높은 것으로 확인됐다. 반면 손녀는 친할머니와 함께 살 때 생존율이 가장 높았다. 영국 케임브리지대학교의 레슬리 냅 교수 연구진은 할머니들의 손주 사랑이 유전자와 관계가 있다고 믿고 관련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다. 그리고 17세기부터 2009년까지 일본과 에티오피아, 감비아, 말라위의 농촌지역, 독일과 영국, 캐나다의 도시 지역 인구변화를 분석했다. 연구진은 2009년 10월 28일 국제학술지 ‘왕립학회보 B’에서 7개 국가의 인구변화 자료를 분석해 손자는 외할머니와 함께 살 때 생존율이 높고, 손녀는 친할머니와 함께 살 때 생존율이 높다는 결과를 얻었다고 밝혔다. XY성염색체를 토대로 조부모와 손주의 관계를 단순하게 분석해보면 손자는 친할아버지로부터 Y염색체를 받고, 외할머니나 외할아버지로부터 X염색체를 받는다. 반면 손녀는 친할머니로부터 X염색체 하나를 받고, 나머지 X염색체를 외할머니나 외할아버지로부터 받는다. 비율로 따지면 손녀는 친할머니와 X염색체를 50% 공유하고, 외할머니와는 X염색체를 25% 공유한다. 반면 손자는 외할머니와 X염색체를 25% 공유하고, 친할머니와는 관계가 전혀 없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전체 유전자 중에서 X염색체가 가지고 있는 유전자는 8%에 얼마되지 않는다. 이처럼 X염색체는 전체 유전자로 볼 때는 적은 부분을 차지한다. 그렇다면 친할머니와 외할머니가 손녀와 손자에게 차별 대우를 하는 것일까? 과학적으로는 할머니가 손주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연구진은 “할머니가 전해준 특정 유전자가 손주의 생존을 더 유리하게 했을 가능성이 있다”며 “X염색체에 지능처럼 생존에 아주 중요한 유전자가 있어서 생존률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 2021-04-29 16:55
-
- 유쾌한 할머니 윤여정, 오스카상 타고 빵 터트려
- 할머니 배우 윤여정이 한국 배우로는 처음으로 오스카 트로피를 품으며, 한국 영화사를 새롭게 썼다. 윤여정은 영화 ‘미나리’에서 외손주를 돌보기 위해 미국으로 간 외할머니를 전형적인 할머니에서 벗어나 유쾌하면서도 여운이 남는 연기로 호평받았다. 25일(현지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 유니언 스테이션에서 열린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윤여정은 영화 ‘미나리'로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 다른 4명의 여우조연상 후보를 제치고 얻은 영예다. '보랏 서브시퀀트 무비필름'의 마리야 바칼로바, '힐빌리의 노래'의 글렌 클로스, '더 파더'의 올리비아 콜먼, '맹크'의 어맨다 사이프리드가 경쟁자였다. 특히 한국 배우가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연기상을 받은 건 한국 영화 102년 역사에서 처음이다. 아시아계 배우로는 두 번째다. 1958년 제10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일본 우메키 미요시가 영화 '사요나라'로 여우조연상을 받은 뒤로 63년 만이다. 윤여정은 1947년에 태어나, 한양대 재학시절인 1966년 연극배우와 TBC 공채 탤런트로 데뷔했다. 중학교 때까지는 공부를 잘 해 어머니에게 의사가 되기를 기대받았다. 하지만 이화여고 재학시절 위염으로 인해 결석이 잦아지면서 성적이 떨어지자 새로운 길을 모색했다. 일흔이 넘어 처음으로 재미교포 2세가 찍는 미국 독립영화에 도움을 주겠다는 마음으로 출연해 뜻하지 않은 성과를 낸 셈이다. 이날 시상식에서 윤여정은 재치 있는 수상소감으로 아카데미 시상식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그는 무대 오른쪽에 서 있던 시상자 브래드 피트를 향해 “드디어 만났군요. 우리가 오클라호마 털사에서 영화 찍을 때 어디 계셨나요?”라는 농담으로 관객을 웃겼다. 브래드 피트는 영화 ‘미나리’의 공동제작사인 플랜B 대표다. 영화 관계자이지만 촬영 현장에서 만날 수 없다는 얘기다. 이어 자신을 낯설어할 영미권 관객과 시청자들에게 “한국에서 온 윤여정”이라고 말하며 “유럽 사람들은 제 이름을 ‘여여’라고 하거나 그냥 ‘유정’이라고 부르는데 오늘 밤만은 모두 용서해드리겠다”고 말했다. 또 “아시아에서 자라면서 TV로만 보던 오스카 시상식에 온 게 믿기지 않는다”며 “이제 정신을 좀 가다듬어야겠다”고 덧붙였다. 예상치 못한 윤여정의 농담에 객석에서는 계속 웃음이 터져 나왔다. 또 여우조연상 후보에 오른 다른 배우들에게도 예우를 표했다. 그는 “내가 어떻게 글렌 클로스 같은 대배우와 경쟁을 하겠느냐. 그의 훌륭한 연기를 너무 많이 봤다”며 ‘힐빌리의 노래’로 여우조연상 후보에 오른 글렌 클로스에게 찬사를 보냈다. 이어 “다섯 명의 배우들은 다른 작품에서 모두 승자다”며 “내가 운이 더 있었던 것 같다”고 덧붙였다. 아카데미 관객들을 빵터트린 수상소감 하이라이트는 미국에 살고 있는 두 아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는 “두 아들이 자꾸 일하러 나가라고 했다”며 “덕분에 엄마가 정말 열심히 일했다. 그랬더니 이런 상도 받았다”고 말했다. 그러자 객석에서 웃음이 터져나왔다. 윤여정은 미국으로 이민을 간 딸 모니카(한예리) 부부를 돕고, 손주들을 돌보기 위해 한국에서 건너간 외할머니 순자를 연기했다. 자식을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하는 전형적인 한국 할머니의 틀에서 벗어났다. 영화에서 외손자 데이빗이 "할머니는 진짜 할머니 같지 않아요"라고 외칠 정도다. 손주를 사랑하지만 손주가 부리는 응석에 끌려다니지도 않는다. 또 손주들에게 화투를 가르치고, 고약한 말도 서슴없이 던진다. 많은 매체들은 윤여정이 "독특한 할머니 순자를 연기했다"고 평가했다. 윤여정의 아카데미 수상에 대해 한 시니어 독자는 “세계에서 한국 할머니의 좋은 모습을 보여준 게 아닌가 싶다”며 “시니어들은 그들에게 맞는 역할이 있다면 잘 수행할 수 있다. 나이가 중요하지 않다”고 말했다.
- 2021-04-26 14:55
-
- ‘오스카의 기적’ 윤여정이 출연한 넷플릭스 영화
- 그야말로 ‘브라보’한 소식이다. 액티브 시니어를 대표하는 배우 윤여정이 최근 영화 ‘미나리’로 제93회 미국 아카데미(오스카) 여우조연상 후보에 올랐다. 한국 배우로는 사상 최초다. 이 소식이 전해지면서 그녀가 걸어온 연기 인생과 필모그래피도 재조명되고 있다. 그녀는 여배우들이 나이 들면 반강제로 얻게 되는 ‘국민 엄마’ 타이틀을 떼고, 55년간 다양한 캐릭터를 소화하며 수식이 필요 없는 배우로 거듭났다. 이번 주 브라보 안방극장에서는 아카데미라는 신대륙으로 새 ‘여정’을 떠나게 된 윤여정을 응원하며, 그녀의 출연작 세 편을 소개한다. 소개하는 작품은 모두 넷플릭스에서 만나볼 수 있다. 1. 돈의 맛 (The Taste Of Money, 2012) 1970년대, 고(故) 김기영 감독의 영화 ‘화녀’와 ‘충녀’로 연예계에 한바탕 센세이션을 일으킨 윤여정은 ‘한국의 팜므파탈’이라는 별명으로 관객들의 머릿속에 각인된다. 그로부터 40여 년 뒤, 그녀는 수십 년 연기 내공을 쌓아 다시 한번 팜므파탈로 변신한다. 영화 ‘돈의 맛’을 통해서다. ‘돈의 맛’은 대한민국을 돈으로 지배하는 재벌가 백씨 가문의 권력을 향한 집착과 욕망을 제목처럼 적나라하게 그린 작품이다. 권력을 손에 쥔 윤회장(김윤식)과 안주인 금옥(윤여정), 비서 영작(김강우), 장녀 나미(김효진)까지 네 사람의 얽히고설킨 관계가 관객들의 혼을 쏙 빼놓는다. 설정만으로 이미 충분히 파격적인 내용이지만, 영화는 윤여정의 무르익은 연기로 한층 더 농밀해진다. 붉은색 립스틱과 무언가를 관통하는 눈빛, 시니컬한 중저음 목소리. 존재만으로 압도하는 금옥을 보고 있으면, ‘윤스테이’ ‘윤식당’ 등 TV에서 접한 윤여정의 정겨운 사장님 이미지가 자동 삭제된다. 31살 연하 배우 김강우와의 수위 높은 베드신도 마다하지 않으며, 원조 팜므파탈의 위력을 입증한다. 2. 고령화 가족 (Boomerang Family, 2013) 사연 없는 집안은 없다고 하지만, 이 집은 많아도 너무 많다. 전과 5범 백수 한모(윤제문), 흥행에 참패한 영화감독 인모(박해일), 이혼이 취미인 미연(공효진)까지 이들은 모두 한솥밥을 먹는 식구다. 영화 ‘고령화 가족’은 나잇값 못 하는 자식들이 어느 날 평화롭던 엄마(윤여정)의 집에 모여들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일반적인 가족과는 달리 콩가루 집안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그려진다. 서로를 향한 비난은 기본, 치고박고 싸우는 것은 일상이다. 하지만 그렇게 으르렁대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얼굴을 맞대고 함께 밥을 먹는다. 영화는 사고뭉치 세 남매를 사랑으로 품는 엄마의 모습을 통해 가족의 의미를 상기시키지만, 동시에 그간 미디어에서 다뤄온 ‘희생하는 엄마’ 역을 답습한다는 점에서 진부한 면도 없지 않아 있다. 그러나 그간 윤여정이 도회적인 이미지로 스크린에 비춰진 것을 떠올리면, ‘고령화 가족’에서의 수더분하고 모성애 가득한 모습은 그 자체로 색다르게 다가온다. 윤여정이라서, 한층 더 신선해지는 영화다. 3. 죽여주는 여자 (The Bacchus Lady, 2016) ‘죽인다’는 말은 중의적인 뜻이 있다. 무언가를 향해 감탄하는 속된 표현으로 쓰이기도 하고, 문자 그대로 살인 행위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영화 ‘죽여주는 여자’의 주인공 소영(윤여정)은 전자일까, 후자일까. 놀랍게도 두 가지 모두에 해당한다. ‘죽여주는 여자’는 종로 일대에서 나이 든 이들을 상대로 성매매를 하는 소영이 뇌졸중을 앓고 있는 송노인으로부터 죽여 달라는 부탁을 받으며 벌어지는 일을 그린다. 성적으로 죽이게 잘한다고 소문 난 소영이 실제로 살인을 저지르게 된 것이다. 영화는 단돈 4만원을 위해 ‘박카스 할머니’가 될 수밖에 없었던 소영의 일생을 돌아보며 노년기 빈곤, 여성에 대한 성 착취 구조 등 오늘날 우리 사회가 직면한 담론을 깊이 있게 던진다. 또 소영의 주변 인물을 통해 트랜스젠더, 장애인, 코피노 등 현실 속에서 소외된 이들에 주목하고, 그들을 향한 따뜻한 시선을 보낸다. 윤여정은 이 작품으로 시니어 배우로서 소화할 수 있는 캐릭터의 한계를 벗어던지고, 연기의 스펙트럼을 넓혔다는 평을 받는다. 그녀의 ‘죽여주는’ 연기가 감탄을 자아낸다.
- 2021-03-19 08:00
-
- [카드뉴스] 연말 연시 간 해독과 피로 해소에 좋은 어패류 레시피
- 엄마의 손맛을 물려받은 딸은 어느덧 엄마가 됐다. 세월이 흘러 그의 딸 또한 한 아이의 엄마가 되어 손맛을 이어간다. 엄마가 딸에게, 딸이 엄마에게 전하는 특별한 레시피. 하숙정, 이종임, 박보경 삼대를 거쳐온 요리 명가의 건강 요리법을 소개한다. 크리스마스와 연말 등이 있는 12월이면 평소보다 술자리가 잦다. 그러다 보면 자칫 알코올로 인해 간에 무리가 가고 체내 독소가 쌓이게 된다. 이럴 땐 해독 작용과 더불어 갖은 영양소를 고루 섭취할 수 있는 어패류를 안주나 해장으로 즐기면 좋다. 그중에서도 굴은 단백질, 칼슘, 철분 등이 풍부할 뿐만 아니라 중금속과 납 배출에 도움이 되는 아연이 다량 함유돼 있다. 또, 다양한 요리에 팔방미인으로 활용되는 바지락은 타우린과 비타민 B12 성분이 많아 간 해독과 피로 해소 및 혈중 콜레스테롤 감소에 효과적이다. 굴카레튀김과 오이요거트소스 재료 굴 10개, 레몬즙 1큰술, 아스파라거스 3줄기, 카레가루 1/4컵, 밀가루 3큰술, 달걀 1개, 빵가루 1/2컵, 튀김용 기름 적당량 오이요거트소스 플레인요거트 80g, 오이 1/4개, 마늘 1알, 식초 1큰술, 레몬즙 1큰술, 설탕 1작은술, 올리브오일 2큰술, 소금·후추 약간씩. 1 굴은 씻어 레몬즙으로 밑간한다. 2 아스파라거스는 한입 크기로 썬다. 3 오이는 잘게 썰고 마늘은 다진 후 분량의 재료를 섞어 오이요거트소스를 만든다. 4 밑간한 굴은 카레가루-달걀물-빵가루 순으로 묻히고 아스파라거스는 밀가루-달걀물-빵가루 순으로 묻혀 튀긴다. 5 접시에 튀김을 담고 소스를 곁들여 완성한다. 바지락미나리전 재료 바지락살 200g, 미나리 30g, 풋·홍고추 1개씩, 부침가루 1/2컵, 생수 1/2컵, 식용유 적당량, 달걀(小) 1개 초간장 간장 2큰술, 식초 1작은술, 설탕 1/2작은술, 송송 썬 실파 1큰술, 통깨 1/2작은술 1 바지락은 소금에 비벼 해감 후 깨끗이 씻어 물기를 제거한다. 2 미나리는 1cm 길이로 썰고 풋·홍고추는 둥글게 송송 썰어 물에 헹궈 씨를 털어낸다. 3 볼에 1, 2의 재료에 달걀을 풀어 넣고 부침가루, 생수를 넣어 바지락미나리전 반죽을 만들어 냉장고에 30분 정도 둔다. 4 팬에 식용유를 두르고 달군 후 중불로 줄인 다음 3의 반죽을 1큰술 정도씩 넣어 기름을 더 두르고 앞뒤로 노릇하게 지진다. 5 초간장을 만들어 함께 낸다. 매콤 바지락토마토볶음 재료 바지락 500g, 방울토마토 12알, 백만송이버섯 80g, 태국고추 3개, 대파 1/3대, 마늘 3알, 청양고추 1개, 레몬슬라이스, 맛간장(볶음용) 2큰술, 청주 1/4컵, 식용유 적당량 1 바지락은 소금에 비벼 해감 후 깨끗이 씻어 물기를 제거한다. 2 방울토마토는 반을 가르고 백만송이는 밑동을 제거해 가닥가닥 뗀다. 3 마늘은 편으로 썰고 태국고추는 반을 가르고 대파와 청양고추는 송송 썬다. 4 팬에 식용유를 두르고 태국고추와 대파, 마늘편을 넣어 볶는다. 5 4에 바지락, 맛간장, 청주, 레몬슬라이스를 넣고 뚜껑을 덮어 익힌다. 6 뚜껑을 열었을 때 바지락 입이 벌어져 있으면, 방울토마토와 청양고추를 넣고 살짝 볶아 마무리한다. 굴무버섯밥과 달래장 재료 쌀 1컵, 생수 1컵, 다시마(5×5㎠) 1장, 굴 200g, 무 150g, 백만송이버섯 100g, 실파 2뿌리 달래장 달래 30g, 다진 풋·홍고추 1개씩, 다진 양파 1/4개, 맛간장 1/2컵, 깨소금·참기름 1큰술씩 1 씻은 쌀과 다시마에 물을 부어 30분간 불린 뒤 다시마는 건져낸다. 2 굴은 소금에 살살 버무려 씻는다. 3 무는 0.5cm 굵기로 채 썰고 버섯은 밑동을 잘라 가닥가닥 뗀다. 4 냄비에 불린 쌀과 물을 넣고 뚜껑을 덮어 한소끔 바글바글 끓인다. 5 4의 솥밥에 무채와 백만송이버섯, 굴을 얹어 10분간 뚜껑을 덮고 밥을 짓는다. 불을 끄고 5분간 뜸 들인다. 6 달래를 1cm 길이로 썬 뒤 분량의 재료를 섞어 만든 달래장을 5에 곁들여낸다.
- 2020-12-25 08:00
-
- 가을 환절기, 기관지를 사수하자
- 여름이 물러나면서 날씨가 선선해지고 있다. 아침저녁으로 부는 서늘한 바람을 맞으면 온몸으로 가을을 느끼게 된다. 지루했던 장마 이후 맞는 상쾌한 가을의 정취가 반가워 자칫 소홀할 수 있는 것이 있는데, 바로 환절기 건강이다. 변덕스런 날씨가 반복되는 가을 환절기를 슬기롭게 넘기기 위해서는 더욱 각별한 주의가 요구된다. 특히 시니어들은 호흡기 질환을 조심해야 한다. 큰 일교차와 건조해진 환경으로 기관지 점막이 마르면 호흡기 기능이 악화되고 체내 면역력이 떨어져 감기, 천식 등 각종 질환이 발생할 위험이 높아진다. 늦여름과 초가을 시기에 기침이나 가래, 콧물 등으로 고생하는 이들이 자주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게다가 환절기가 되면 으레 찾아오는 미세먼지나 황사도 문제다. 미세먼지와 황사가 기승을 부리는 날이면 기침과 재채기가 더욱 심해질 수밖에 없다. 또 기관지를 자극하면 세균이 쉽게 침투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다. 이는 혈관 내 염증 반응을 증가시켜 심혈관계 질환의 위험성도 크게 높인다. 결국 기관지를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따라 가을, 겨울을 건강하게 보낼 수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관지를 튼튼히 유지하기 위해서는 염증 발생을 줄이며 피를 맑게 해주는 음식이 제격이다. 우리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식재료로는 도라지, 오미자, 미나리 등이 있다. 먼저 도라지는 한방에서 폐, 기관지 질환을 치료하는 약재로 널리 쓰일 정도로 폐의 기운을 북돋워주는 데 제격이다. 폐뿐만 아니라 기도를 편안히 해주고 외부 자극으로 인한 기침이나 가래가 생기는 것을 막아준다. 또한 미나리는 피를 맑게 해주고 열과 염증을 가라앉히는 효능이 있다. 폐, 기관지 등 호흡기의 열을 내려 촉촉하게 만들어줌으로써 증상을 완화하는 데도 좋다. 도라지와 미나리는 양념에 무쳐서 먹기도 하고 각종 요리의 재료로 쓰이는 등 활용도가 높다는 장점이 있다. 요즘 제철을 맞은 오미자도 성질이 따뜻해 기침과 헐떡거림을 멈추게 하는 데 효과적이다. 실제로 오미자 추출물을 동물에게 정맥 주사하면 기침을 억제하고 호흡을 촉진한다는 연구 보고도 있다. 오미자는 대개 차로 마시는데, 500㎖ 물에 오미자 10~15g을 넣어 충분히 우러날 때까지 은근하게 달이면 된다. 잦은 기침과 재채기는 기관지를 손상시킬뿐더러 척추 건강에도 악영향을 미친다. 기침과 재채기를 하면 복부의 압력이 상승하고 몸 앞과 뒤로 반동이 빠르게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는 순간적으로 척추에 큰 부담을 주는데 허리가 약한 시니어의 경우 근육 수축과 인대 긴장으로 인해 허리 통증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별것 아닌 듯 보여도 기침은 요통을 발생시키는 주 요인 중 하나다. 심하면 척추 뼈 사이에서 완충 역할을 하는 추간판(디스크)이 제자리를 벗어나는 요추추간판탈출증(허리디스크)이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기침과 재채기는 자연스러운 면역 반응인 만큼 참기가 어렵다. 억지로 참으면 오히려 복부의 압력이 더 크게 척추에 전달될 수 있다. 따라서 기침과 재채기를 막으려 애쓰기보다는 입을 크게 벌려 시원하게 하는 편이 낫다. 기침과 재채기를 할 때 척추를 보호하는 몇 가지 요령이 있다. 먼저 기침이나 재채기가 나올 때 배에 힘을 주고 무릎을 약간 굽혀주면 척추의 부담을 줄일 수 있다. 앉은 상태에서 기침이나 재채기가 나올 경우에는 양손으로 무릎을 잡는 것이 좋다. 주변에 벽이나 가구 등 의지할 수 있는 사물이 있다면 손으로 단단히 짚어 목과 허리가 구부러지지 않게 한다. 특히 시니어의 경우 노화로 의한 골다공증이 많이 나타나는데, 골밀도가 낮은 골다공증 환자들은 기침이나 재채기만으로도 척추 뼈가 주저앉거나 찌그러지는 ‘척추압박골절’이 생길 수 있다. 척추압박골절은 등에도 심한 통증을 유발하므로 더욱 조심해야 한다. 한방에서는 면역력을 높이고 기침과 재채기 증상을 완화시키는 치료법을 시행한다. 대표적인 게 침과 뜸이다. 이 치료법은 기혈 순환 및 경혈 흐름을 촉진하고 체내 노폐물의 배출을 도와 면역력을 상승시킨다. 또 뼈와 신경 재생 및 강화를 촉진하고 기력 회복에 좋은 청파전, 연골보강환 등 한약을 복용하는 것도 큰 도움이 된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몸도 큰 변화를 맞이한다. 이에 잘 적응하려면 건강한 생활 습관을 통해 면역력을 높여야 한다. 하루 30분 이상 걷기, 맨손체조 등 꾸준히 운동을 해주는 것이 좋다. 하루에 6시간 이상 수면을 취해 피로를 풀어주는 것도 필수적이다.
- 2020-09-14 09:12
-
- 중국인들은 '고사리’가 한낱 ‘풀’이었다
-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우리는 무엇을 먹어야 하는가? 이런 의문에 대한, 스스로 미욱하게 풀어낸 해답들을 이야기하고 싶다. 부족한 재주로 나름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틀릴 수도 있다. 여러분의 올곧은 지적도 기대한다. 채소(菜蔬)는 ‘산채’와 ‘야채’를 모두 아우른다. 산나물, 들나물을 모두 아우르면 곧 채소다. 소채라고도 한다. 야채는 일본식 표현이다. 재미있는 것은 산채(山菜)다. 우리만 널리 쓰는 표현이다. 일본, 중국은 산채라는 표현을 널리, 자주 사용하지 않는다. 일본, 중국에도 산채는 있다. 그들은 산채를 즐겨 먹지 않는다. 중국은 버섯 등을 제외하고 거의 먹지 않는다. 일본도 마찬가지. 버섯과 몇 가지 산나물을 먹는다. 한국은 일상적으로 산나물을 먹는다. 곤드레나물로 비빔밥을 만들고 취나물은 곰취, 참취, 수리취, 단풍취, 미역취 등으로 가른다. 이름도 외우지 못할 숱한 산나물을 일상적으로 먹는 나라는 우리가 유일하다. 산마늘, 명이나물이 대유행이었던 적도 있다. 웬만한 고깃집에서는 아직도 명이나물절임을 상 위에내놓는다. 국내 생산량이 부족하니 수입도 많이 한다. 제사를 지낼 때 고사리를 비롯해 여러 종류의 나물, 산나물을 사용하는 나라도 우리뿐이다. 산나물은 우리 민족 특유의 음식문화 한국일보 기자였던 故홍승면(1927 ~1983년) 씨는 “산나물 문화는 우리 핏속에 녹아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일제강점기, 만주, 간도에는 여러 민족이 살았다. 그중 한국인을 찾아내는 방법은 간단했다. 이른 봄 바구니를 끼고 산에 오르는 사람들은 모두 한국 처녀, 아녀자들이었다.”(‘대밭에서 초여름을 씹다’, 삼우반, 2003년) 봄에 산나물을 채취하는 이들은 한국인이 유일했다. 우리는 냉이, 달래, 쑥을 캐며 봄을 맞았다. 흔히 산나물을 가난, 궁핍함, 초근목피(草根木皮)의 상징으로 여긴다. 틀렸다. 당시 간도, 만주 일대에는 여러 민족이 모여 살았다. 한국, 일본인들뿐만 아니라 원주인인 중국인, 중앙아시아인들, 러시아 사람들까지 모여들었다. 먹고살기 어려워 먼 곳까지 온 사람들이다. 대부분 가난했다. 살림살이는 그저 그만했을 것이다. 궁핍한 살림살이다. 유독 한국인들만 더 가난했다고 이야기할 근거는 없다. 그중 한국인들만 봄철이면 산나물을 뜯으러 다녔다. 산나물은 초근목피의 상징이 아니다. 산나물은 우리 민족 특유의 음식문화 중 하나다. 오래전에는 중국, 일본인들도 산나물을 먹었다. 세월이 지나면서 중국, 일본의 산나물 문화는 사라졌다. 중국인들은 버섯을, 일본인들은 들나물을 주로 먹는다. 재미있는 것은 산나물 중 ‘고사리’다.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사육신 성삼문은 단종복위를 꾀하다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죽기 전 그는 시조를 남긴다. 제목은 ‘수양산(首陽山) 바라보며’다. 소재는 중국 수양산에서 고사리를 캐 먹으면서 굶어 죽은 백이, 숙제의 이야기다. 고사리를 캐 먹었다고 ‘채미가’(採薇歌)라고도 한다. 수양산(首陽山) 바라보며 이제(夷齊)를 한(恨)하노라./주려 죽을진들 채미(採薇)도 하난 것가./비록애 푸새엣 것인들 긔 뉘 따헤 났다니. 이제(夷齊)는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를 가리킨다. 은나라 고죽군의 아들이었던 두 사람은 주 무왕이 은 주왕을 정벌하는 것을 말린다. 무왕이 자신들의 말을 듣지 않고 은나라를 정벌하자 수양산에 들어가서 고사리를 캐 먹다가 굶어 죽었다. 곧은 충절과 청렴의 상징이다. 백이, 숙제가 먹은 것은 ‘산나물 고사리’가 아니라 한낱 ‘풀’이었을 것이다. 고사리를 먹을 것으로 여겼다면 굶어 죽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도 중국인들은 우리처럼 고사리를 상식(常食)하지 않는다. ‘고사리를 먹었다’와 ‘굶었다’가 같은 뜻이다. 고사리는 먹을 것이 아니었다. 성삼문은 한글 창제 당시 북경을 갔다. 이때 이제의 묘를 지난다. 이제의 묘를 보고, 남긴 시가 있다. 백이, 숙제를 기리는 글이다. 내용은 ‘수양산 바라보며’와 비슷하다. 그때 말 머리 부여잡고 ‘그르다’ 했음은/대의가 당당하여 일월처럼 빛났네/초목(草木) 역시 주나라 땅에서 자란 것인데/부끄러워라 그대, 수양산 고사리는 어찌 먹었던가 재미있는 것은 ‘초목’(草木)이다. 여기서는 먼저 ‘초목’이라고 하고, 뒤에서 ‘수양산 고사리’를 먹었다고 했다. 왜 한반도에만 ‘산나물 문화’가 전승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중국은 ‘이제’와는 달리 이제는 고사리를 널리 먹지 않는다. 고사리는 생산하되, 대부분 한국으로 수출한다. 일부 먹는 곳도 조선족이 많이 사는 동북 삼성이다. 우리는 고사리뿐만 아니라 모든 산나물을 귀히 여겼다. 농암 김창협의 시다(농암집 제6권). 제목은 ‘저녁에 읍내에 묵으며 숭아의 시에 차운하다’이다. 현령께서 가져오신 술을 따르며/봄 시내 띄운 배에 올라 노닐 제/날 위해 내온 밥상 진기한 음식/때 일러 신선한 산나물일레 배경은 영평현(경기도 포천시 영중면)이다. 현령이 뱃놀이에 상을 내놓는다. 진기한 음식=일찍 나온 산나물이다. 예나 지금이나 포천 주변에는 산이 깊다. 그 산에서 마련한 산나물이었을 것이다. 가난의 상징이라고 부르는 산나물을 진기하게 여겼다. 농암은 명문세가 출신의 벼슬아치다. 굳이 ‘가난한 산채’를 두고 진기한 음식이라고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 벼슬아치들도 산나물을 귀히 여겼다. 산나물은 임금도 귀하게 여겼다 성군 세종대왕(1397~1450)도 여러 차례 산나물을 이야기한다. 세종 25년 1월 14일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이다. 제목은 ‘온천에 가기로 결정하고 민폐를 끼치지 말 것을 충청 감사에게 이르다’이다. 비만에 운동 부족, 과로 등 당뇨병 발병 요건을 다 갖추었던 세종대왕은 말년에 당뇨로 인한 실명도 겪었다. 치료차 온양온천에 여러 차례 갔고, 그때마다 지역 주민들이 고생한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임금이 승정원에 이르기를,/“대개 남의 고생을 스스로 알지 못한다고 하지만, (중략) 대신들이 심히 청하므로 마지못해 억지로 좇겠노라. (중략) 내 민폐를 절대로 없게 하여 (중략) 충청 감사에게 이미 마른반찬을 준비한 것 외는, 비록 산나물이든 들나물이든 쉽게 구할 물건일지라도 올리지 말게 하라.” 하였다. 산나물은, 가난하여 마지못해 먹었던 식재료가 아니었다. 쉽게 구할 수 있지만, 국왕도 귀하게 여겼다. ‘산나물=가난의 상징’은 일제강점기에 비롯되었다. 일본인들이 보기에는 산나물이 곧 풀이었다. 풀은 초근목피다. 산나물을 널리 먹지 않는 일본인들이 보기엔 한국인들이 산으로 들로 다니면서 찾아서 먹는 풀뿌리, 나무껍질이었다. 왕과 관리들은 고기를 먹는다. 일반 서민들은 먹지 못하는 것, 초근목피로 목숨을 잇는다. “자기들만 배를 불리는 썩어빠진 조선의 고관대작 대신, 일본 제국이 너희를 다스리는 것이 낫다”는 말이 나온 이유다. 전형적인 일제 식민사관이다. 산나물의 계절이다. 냉이, 달래, 명이나물 등만 이야기하는 우리 시대가 부끄럽다. 우리 선조들은 제사상에 미나리, 부추, 당귀 등 숱한 산나물, 들나물을 빠짐없이 올렸다. 산나물, 들나물은 한반도의 식문화가 풍성했음을 보여준다. 초근목피라고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다.
- 2020-04-24 08: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