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전당 한가람디자인 미술관에서 ‘시간을 거스르는 아름다운 전설’ 이라는 주제로 세계적인 보석 디자이너인 김정희의 개인 전시회가 열렸다. 지난 5일까지 열린 이 전시회는 포이베 보석 디자인 연구소 소장으로 활동하면서 세계적인 쥬얼리 어워드에서 수상하는 등 한국대표 보석 디자이너로 차근차근 성장해왔던 김정희 작가의 작품들을 한 곳에서 만날 수 있다.
이탈리아 ‘A 디자인 어워드’ 은상 작품과 ‘아시아 태평양 미술대상전’ 우수상 작품 등은 물론이고 26년 동안 작품활동을 해온 150여 작품에 김정희 작가가 옛 보석들을 새롭게 리폼하여 재창조한 고객 소장품 20여점도 소장가들이 흔쾌히 전시에 동의하면서 일반인들에게 공개됐다.
김정희 작가는 “보석 디자이너로 활동해온 26년을 결산하는 이번 전시회가 단순히 미를 추구하는 개성표현의 수단을 넘어 예술적 감성적 가치를 충족시키는 조형 예술로서의 보석 디자인으로 한계를 뛰어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를 위해 전시장은 크게 세 가지 카테고리로 구분됐다.
'인간과 자연' 테마에서는 자연에서 느껴지는 무한한 생명력과 신비로움, 그리고 삶의 언어들이 스토리가 되고 디자인 영감의 원천이 되어 새로운 가치 속에 창조됨을 보여줬다.
'시간 그리고 공존' 테마에서는 자연친화적인 요소를 모더니즘 그리고 고전주의와 접목시켜 과거에 존재했거나 유행했던 것을 현재에 맞게 재해석하여 보석 자체의 가치보다 각각의 감성과 스토리를 가진 디자인을 통해 예술적 가치를 지닌 생활 속의 예술품으로 재탄생 된다는 것을 구성했다.
묵혀있던 추억들은 스토리가 되고 영감의 원천이 되어 새로운 가치 속에 창조된다. 이야기들은 희로애락이 담긴 인고의 과정을 통해 시간과 함께 공존하고 과거의 현재를 넘나든다는 'Reborn'테마로 나뉘어졌다.
특히 이번 전시회에서 인상적인 작품은 2020년작인 ‘나비 되어 날다’ . 몇 년 전 사랑하는 어머니를 떠나 보낸 김정희 작가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작품 활동에 매진하며 잊던 중 생전에 어머니가 가꿔놓으셨던 정원에 날아온 나비를 보게 됐다고 한다.
마치 이 노란 나비는 어머니인 듯 김정희 작가 주위를 돌다 하늘로 날아갔다며 이를 경험하면서 “어머니가 나비가 돼 훨훨 자유롭게 날아다니시는구나. 내 걱정은 말라고 이 딸을 찾아오셨구나’ 이런 마음이 들면서 본인 스스로도 큰 위안을 얻게 됐다고 전했다.
2주간의 짧은 전시회 기간과 코로나 바이러스로 이동이 불편한 가운데에도 많은 분들이 작품을 보기 위해 전시장에 찾아오셨다며 관람객 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의 말을 전하며 앞으로도 꾸준한 작품 활동으로 조만간 다시 전시회로 찾아 올 것을 약속했다.
요즘 시니어의 라이프스타일이 바뀌고 있다. 과거의 시니어가 자녀의 미래를 걱정하며 자신의 모든 삶을 희생했다면, 요즘 시니어는 스스로의 인생에 충실하다. 경제력을 갖춘 이들은 자녀의 미래를 지원하면서도, 젊은 감성으로 자유로운 삶을 만끽한다. ‘오팔 세대’라 불리는 이들 시니어의 우아한 인생을 들여다봤다.
요즘 시니어들의 삶이 달라지고 있다. 전쟁과 혹독한 불경기가 지난 뒤 태어나 사회적·경제적 성장을 이끈 베이비붐 세대가 은퇴하면서 시니어 삶에 변화의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옛 시니어들과 마찬가지로 자녀를 지원하고 응원하지만 경제력을 갖춘 덕분에 이전 세대와 달리 풍요로운 노후를 즐긴다. 이들은 1958년 전후에 출생해 오팔(Old People with Active Life) 세대라고도 불린다.
오팔 세대는 젊은 세대 못지않게 활발한 시간을 보내고, 빛의 각도에 따라 색상이 변하는 오팔처럼 화려한 인생을 즐긴다. 자신을 가꾸고, 여가활동을 즐기면서 남은 노후를 우아하게 장식한다. 은퇴 전의 삶에 대한 보상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되찾으려는 목적이 강하다. 희소가치가 높은 것을 모으거나 그동안 하지 못했던 화려한 문화·예술활동을 즐기고, 재충전을 위해 호화스런 여행을 떠나거나 거친 레포츠에도 뛰어든다.
◇이제 한정판 구입도 거뜬하게
한상민(61세) 씨는 캠핑 마니아이자 한정판 수집광이다. 캠핑과 관련된 한정판 제품이라면 어디든 달려간다. 비교적 저렴한 ‘실리웨어 티타늄 코펠세트’부터, 고가의 ‘힐레베르그 케론4GT’ 텐트까지, 최근 2년간 60여 개의 한정판 캠핑용품을 모았다. 최근에는 20만 원대 ‘조커 사냥용 나이프’ 한정판과 캠핑용품은 아니지만 스마트워치와 블루투스 이어폰으로 구성된 297만 원짜리 ‘삼성전자 갤럭시 Z 플립 톰브라운 에디션’을 온라인으로 구매했다.
‘한정판’ 수집은 대체로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이뤄진다. 국내에 없는 상품은 해외 직접구매 사이트를 이용해야 하고, 판매가 완료된 상품은 온라인 중고카페를 살펴봐야 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인터넷 활용 능력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때문에 옛 시니어들은 일반적인 수집을 취미로 즐기긴 했어도 한정판을 모으는 건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인터넷에 익숙한 베이비붐 세대가 은퇴 후 시장에 뛰어들면서 한정판 수집이 시니어의 새로운 취미로 떠올랐다.
천연 원석 모으는 취미를 즐기기도 한다. 원석은 가공되지 않은 보석이다. 각기 다른 색상과 모양 때문에 희소성이 꽤 높다. 보석보다 가격이 저렴해 상대적으로 부담이 크지 않다. 하지만 보석 가격이 워낙 비싸서 그런 것이지, 원석 가격이 절대적으로 싼 것은 아니다. 주로 파워스톤으로 사용되는 천연 화산암과 흑요석 같은 몇만 원짜리 원석부터 20만 원 안팎의 가넷 원석이 거래되고, 수백만 원에서 수천만 원에 육박하는 다이아몬드 원석도 있다.
경기도 용인에서 원석 전문점을 운영하는 윤정선 대표는 “원석으로 만든 액세서리를 찾는 젊은 여성 손님이 대부분이었는데, 몇 년 전부터 나이 든 손님이 많이 방문한다”며 “시니어 손님들은 인체의 치유와 균형에 도움이 되는 원석을 집 안에 두고 싶어 한다”고 말했다. 윤 대표는 “자수정이 방출하는 원적외선이 혈액순환에 도움이 된다는 연구논문이 있고, 동의보감에도 자수정을 사용해 병을 치료한다는 내용이 있다”며 “사람이 내뿜는 기운이 다른 것처럼 원석도 각기 다른 파장을 방출한다”고 덧붙였다.
◇좋은 안목 기르려고 공부하다
정순철(62세) 씨는 정년퇴직을 한 3년 전부터 그림 경매 일정을 꼼꼼히 체크한다. 만족스러운 작품을 최대한 저렴하게 살 수 있어서다. 미술품의 가치를 평가하는 안목이 부족하면 오히려 제값보다 비싸게 구매하는 실수를 범한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예전에 규모가 좀 작은 옥션에서 위작인 줄도 모르고 사서 손해를 본 적이 있다. 이후 그는 옥션 구매를 하지 않는 날이면 전시회를 가거나 미술품 관련 자료를 찾아보며 공부하고 있다.
은퇴 후 그림이나 도자기 같은 미술품에 관심을 갖는 사람도 늘었다. 나이 들어 공부하는 게 쉽진 않지만, 퇴직 후 여유가 생긴 터라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많다. 시니어들은 보통 수십만 원에서 수백만 원짜리 작품을 관심 있게 살펴보는데, 작품 값 외에도 15~20%의 구매수수료와 특송을 통한 배달료까지 지불해야 하기 때문에 비용 부담이 만만치 않다. 하지만 이들은 가격보다 가치를 더 따진다. 감동과 행복감을 주는 작품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귀는 어두워질수록, 더 좋은 음질을 원한다.” 오디오를 좋아하는 시니어들이 하는 말이다. 나이가 들면 청력이 점점 떨어지게 마련인데, 좋은 음질의 음악을 감상하고 싶은 욕망은 더 커진다는 얘기다. 음악을 틀어놓고 책을 읽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전용 리스닝룸을 만들어 오로지 감상에만 집중하는 이들도 있다. 이들은 후자에 속한다. 오디오를 즐기는 시니어는 좋은 음질을 즐기기 위한 최적의 구성을 늘 고민한다. 오디오를 취미로 삼으려면 생각보다 많은 돈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덴마크 ‘뱅앤올룹슨’의 무선 스피커 하나의 가격은 무려 270만 원에 달한다. 하이파이(Hi-Fi) 오디오의 구성 장비 중 하나인 파워앰프의 경우 미국 ‘제프롤런드’ 제품은 3000만 원이 넘기도 한다. 하이파이 오디오 구성 장비인 CD플레이어와 프리앰프, 파워앰프, DA컨버터, 튜너, 스피커 등을 모두 장만하려면 어마어마한 금액이 필요할 것이다. 게다가 기존 기기보다 두 배 더 비싼 장비를 들여놓는다고 해서 음질이 두 배로 좋아지는 것도 아니다. 오디오가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어가는 취미로 꼽히는 이유다. 그럼에도 이들은 수백~수천만 원을 들여 원음의 재현율을 0.1%라도 더 높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말한다.
◇스스로 계획하고 떠나는 여행
나이가 있는 사람들이니까 단체 패키지 여행 상품을 이용할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의욕이 넘치는 요즘 시니어들은 젊은 세대가 주로 이용하는 자유 여행에 큰 관심을 보인다. 모르는 사람들과 섞여 정신없이 움직이는 패키지 여행보다 직접 계획을 세운 뒤 떠나는 걸 더 선호한다. 이들은 평소에 가볼 엄두를 내지 못한 곳에 흥미를 보이지만, 그날그날의 컨디션에 따라 언제든 변경할 수 있는 여유로운 여정에 따라 움직인다.
취향이 뚜렷한 시니어들은 특별한 여행을 즐기고 싶어 한다. 최근에는 초호화 기차 여행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일본의 ‘트레인 스위트 시키시마’는 객실에 다다미 바닥과 전통적인 삼나무 욕조가 있다. 혼슈 동쪽 섬에 있는 온천과 고대사원 등을 방문하는 이 여행은 1인당 500만 원 정도가 든다. 또 아일랜드의 ‘벨몬드 그랜드 하이버니안’ 열차에서는 라이브 공연도 볼 수 있고, 아름다운 시골 풍경도 여유롭게 감상할 수 있다. 더블린, 코르크, 벨파스트를 방문하는 이 여행의 비용은 1인당 350만 원 정도다.
보호자가 있어야 가능할 것 같은 여행도 혼자 떠난다. 일본 여행사 ‘클럽 투어리즘’이 내놓은 나홀로 여행객을 위한 맞춤상품은 50~70대의 신청만 받는다. 친구 또는 가족과 함께 여행하려는 사람은 신청할 수 없다. 여성 전용 상품도 있어 남성들과 함께 어울리지 않아도 된다. 이 상품은 온천, 꽃놀이, 미술관 투어, 크루즈 여행 등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구성됐다.
여행과 함께 사진을 즐기는 사람도 많다. 오팔 세대는 디지털 카메라 열풍이 불었던 2000년대 초반에 40대 안팎의 나이였다. 그때와 달라진 점이 있다면 덩치 큰 DSLR보다 작고 얇은 ‘미러리스’와 아날로그 감성의 디지털 카메라 ‘라이카’가 대세로 자리 잡았다는 것. 디지털 카메라 조작에 익숙한 이들은 가족과의 즐거운 시간을 사진에 담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리기도 한다.
◇놀 줄 아는 오팔 세대
홈 파티를 열어 지인을 초대하는 시니어도 늘었다. 당일배송 서비스를 활용해 쉽게 식재료를 주문할 수 있게 되면서부터다. 특히 마켓컬리의 경우 ‘레시피 골라 담기’를 통해 음식에 필요한 식재료를 클릭 한 번으로 살 수 있다. 가정간편식(HMR) 메뉴가 다양해져 홈 파티 음식을 대체할 수 있게 된 것도 도움이 됐다. 그동안 HMR은 바쁜 직장인이나 수험생이 메인 수요층이었는데, 이제는 시니어를 위한 보양식도 흔하게 볼 수 있다.
홈 미팅 후에는 인근 커피숍으로 이동한다. 젊은 세대의 놀이터이자 공부방 역할을 해온 이곳에 시니어들이 발을 들이기 시작한 건 이미 오래전 일. 심지어 커피숍을 찾는 시니어 손님이 늘자, 날계란이 들어간 쌍화탕을 메뉴에 추가한 곳도 생겨났다. 지역에 따라서는 스타벅스가 아니라 ‘실버벅스’라는 말이 더 어울릴 정도다. 세련된 인테리어의 커피숍들이 시니어의 아지트로 바뀌고 있다.
이외에 산악바이크나 서핑 등 짜릿한 아웃도어 활동에 도전하는 시니어도 있다. 옛 시니어들은 힐링과 휴식이 목적이었다. 반면 도전적이고 체력에 자신감을 갖고 있는 요즘 시니어들은 성취감을 얻기 위해 레저나 스포츠를 즐긴다. 물론 건강을 위해 운동을 하는 시니어도 많다. 이들은 피트니스, 요가, 필라테스 등으로 몸매를 가꾸거나 체력을 단련한다.
대한민국 1호 여성 시니어 보디빌더인 임종소(76세) 씨는 “허리 협착증을 앓던 중에 근육강화 운동을 해보라는 의사의 말을 듣고 운동을 시작했는데, 한 달 만에 좋아졌다”며 “이왕 시작한 거 ‘나이 먹어도 할 수 있다’는 각오로 열심히 한 결과 피트니스 대회에서 2위를 수상했다”고 말했다. 그는 “최근에는 피트니스 외에도 왈츠, 탱고, 자이브 등 사교댄스를 배우고 있다”며 “매일매일이 바쁘고 즐겁다”고 덧붙였다.
첫인상에서 베테랑 모델 출신다운 훤칠한 매력이 느껴지지만 실은 중견 작가의 자리에 오른 예술가. 국내에서 독보적인 해치상(像) 전문 작가이자 다양한 예술 실험을 통해 지속적으로 자신의 작품세계를 갱신하고 있는 최진호 작가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해치상의 현대화 작업과 공공미술의 영역을 확장해왔다는 평가를 받는 그는 최근 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에서 미술-조각 부문 최우수상을 수상하면서 다시금 주목을 받았다. 그가 말하는 자신의 작품세계와 예술의 가치, 그리고 현시대를 살아가는 이야기를 들어봤다.
서울 광화문에 있는 해치상은 서울 시민이라면, 그리고 서울을 방문하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익숙한, 서울을 대표하는 이미지다. 상상 속의 동물인 해치는 해태라고도 불리며, 요순시대에 중국 동북 지방에서 살며 신선의 먹거리인 먹구슬나무 열매만을 먹고 살았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 상상 속 동물인 해치를 자신의 작품세계의 중심으로 삼고 끊임없이 정진하는 조각가가 있다. 바로 최진호 작가다.
20년 전, 해치와 만나다
최진호 작가는 1990년대 초부터 현재까지 미술계에 몸을 담고 한국 고유의 석조각을 구현해왔다. 그가 처음 해치와 만나게 된 것은 2000년 즈음, 호주 대사 부인 덕이었다. 그러니까 올해로 20년째다.
“그분이 중국에서 오래 근무했는데 한국의 해치상에 대해 저에게 물어봤어요. 뭘 의미하냐고요. 화재를 막는 상상의 동물이라고 간단히 설명해줬는데, 집에 와서 다시 알아보니 또 다른 의미가 많은 거예요. 마침 제가 그때까지 인물상을 주로 작업했는데 전환하고 싶었던 때였죠. 그래서 해치를 공부하며 작품을 만들기 시작했어요.”
그런 그가 해치상으로 본격적인 주목을 받은 것은 2009년. 그가 만든 ‘청렴의 해치상’이 서울시청사에 설치된 것이다.
“사람들에게 유명한 광화문 해치상은 대원군이 경복궁을 재건하면서 제작한 조각이죠. 너무 잘 만들어졌어요. 이세욱이란 석공이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거의 교과서처럼 완벽해요.그런데 2008년에 서울시에서 서울의 상징을 만들고자 했는데 호돌이는 너무 오래 사용해온 캐릭터이다 보니 새로운 마스코트가 필요해 공모를 했어요. 저는 고향이 충정로거든요. 그래서 정동에 있는 시청사 앞 대형 해치 조형물 공모에 응모했고 그해에는 그 일에만 집중했어요. 그리고 다행히 당선됐죠.”
2008년 당시 오세훈 서울시장은 “서울시는 이렇다 할 상징물이 없었다”며 해치를 서울시의 상징 동물로 발표했다.
‘청렴의 해치’가 나온 이유
신선이 먹는 것만 먹는다는 내용처럼, 해치는 사실 청렴의 상징이다. 법(法)이라는 단어가 바로 해치에게서 나왔을 정도다. 한나라 때 양부(楊孚)가 지은 ‘이물지’(異物志)에는 해치에 대한 묘사가 나오는데, “뿔이 하나이며 성품이 충직하고 사람들이 싸우는 것을 보면 바르지 못한 자를 들이받으며 옳지 못한 자를 문다”라고 쓰여 있다. 원래 한자어 ‘法’에는 “해치가 물처럼 고요히 판단하여 틀린 상대를 받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최진호 작가가 해치를 청렴의 상징으로 만든 이유는 충분했다.
“지금은 은퇴하셨지만 최종고 서울대 교수님이 법의 역사에 대해 강의할 때면 항상 해치에 대한 얘기를 하셨어요. 그래서 해치상을 만들 때 비록 상상의 동물이라 해도 내가 맘대로 상상하면 안 되겠다 싶어 스터디를 했고 최 교수님과 많은 논의를 했죠.”
안중근기념관에 해치 설치하고파
해치 전문가로 거듭나게 된 그에게 또 한 번의 역사적인 기회가 왔다. 2014년 외교부에서 네덜란드 헤이그 국제사법재판소(ICJ)에 설치할 기증 예술품을 공모했는데 선정된 것이다. 헤이그는 고종 황제의 명으로 헤이그에서 열리는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서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파견된 특사들이 결국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고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곳이다. 그곳에 자신의 해치상이 법과 정의의 상징으로 설치되는 모습을 본 최 작가는 감회가 새로웠다고 밝혔다.
“12월에 열린 제막식에 입고 있던 재킷이 1987년에 작고하신 아버님께서 맞춰주셨던 옷이에요. 그날 아들과 함께 참석을 했어요. 해치 조각을 하는 저에게는 뜻깊은 작품, 그리고 마음속 3대가 함께했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는 그 후 해치상이 중국 하얼빈 역에 있는 안중근기념관에도 설치됐으면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고 한다.
“대한민국의 상징으로서, 일제에 대한 저항의 의미로서, 그리고 자주 독립을 위한 몸부림과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을 보여주는 상징으로서 해치가 안중근기념관에도 설치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물론 장소가 다른 나라이니까 여러 가지로 절차가 복잡하겠지만, 그런 점을 감내하고서라도 적극적으로 만들어 설치하고 싶은 거죠.”
우리 시대를 상징하는 소재는 ‘철’
이렇듯 최 작가에게 해치는 그야말로 특별한 애정의 대상이다. 물론 생계 문제도 있기 때문에 해치만 만들 수는 없다. 그는 여러 대학교에 출강하는 강사이자 종로구청 도시분과 비전위원이며 천안아산역, 동대구역, 웨스틴조선호텔 등의 명소에 다양한 소재의 작품들을 설치한 중견 작가다. 전국 각지에서 채굴되는 ‘한국 화강석’의 재료적 특성을 오랫동안 연구해 이를 기반으로 ‘물확’(수반) 연작을 제작하기도 했고 미디어 아트에 대한 공부도 게을리하지 않는다.
“다문화에 대한 관심과 함께 해치상의 현대화 작업과 공공미술의 영역을 확장하는 데 관심이 많아요. 그리고 호주에서 2020년 1월 1일부터 열흘간 산불 연기를 피해 피난을 다닌 적이 있었는데, 그 과정에서 기후변화의 환경적 영향과 동물보호에 대한 미술 표현을 해야겠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죠.”
요즘에는 스테인리스 작업에 공을 들이고 있다. 그가 마지막으로 만들고 싶은 작품은 스테인리스 작업이라고 할 정도다.
“스테인리스 단조 작품을 만들고 싶어요. 과거 우리나라 문화를 대표하는 것은 석문화였잖아요. 그런데 현대의 우리나라는 조선, 해양산업에도 쇠를 많이 쓰고 있죠. 미래 첨단 산업에서도 바로 철강 한국이 맞지 않나 싶습니다. 그래서 스테인리스 단조 작품이 현재의 미학을 잘 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배의 존재 의미는 항구를 떠날 때 있다
훤칠한 키와 호남형 외모, 느릿하면서도 조곤조곤한 목소리 등 최 작가는 외모에서부터 강한 인상을 주는 사람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모델 출신이다. 1988년 모델라인 16기로 활동을 시작한 그는 수많은 광고 카탈로그와 CF에 출연했다. 이는 그가 가진 작가론을 뒷받침해주는 중요한 경험이 되었다.
“누군가가 알아주지 않아도, 중요한 한국의 문화유산을 재창조하고 새로운 시각으로 보여주는 그런 작가가 되고 싶어요. 그런데 현재의 미술계에서 미학을 풀어낸다고 할 때 과거와는 다른 조형비의 변화 등이 필요하겠죠. 그 부분을 저는 모델을 해서 잘 알아요. 포즈를 취하거나 가장 이상적으로 표현하는 면에서 미술과 모델은 공통점이 있죠. 그런 걸 알기 때문에 작품을 만들 때도 반영할 수 있고, 도움이 됩니다.”
우리나라의 문화유산을 현재의 미적 기준으로 새롭게 만들고 싶다는 그의 포부는 쉽지 않은 길을 예고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일까. 그는 자신이 현재 “망망대해에 있다”고 표현했다.
“끝을 모르는 거죠. 바람이 불면 옆으로도 가고 뒤로 갈 수도 있으니까요. 그런데 배의 존재 의미는 항구에 정박해 있을 때가 아니라 망망대해로 떠날 때 있죠. 편한 삶, 안정된 직장… 그걸 놓는 순간 안 좋으면 고꾸라질 수도 있지만 항구에서는 못 느끼는 스펙터클을 느낄 수 있죠. 그런 의미에서 보면, 저는 보물섬을 발견하길 바라진 않지만 묵묵하게 항해하는 것과 같다고 봐요.”
돈이 아닌 현대인의 가치를 만드는 작가
“해치가 저에게 말을 걸어 ‘나를 조각해 달라’고 하는 것 같았습니다.”
인터뷰 말미에 와서야 그가 해치에게 그토록 끌리는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자신의 삶과 작품세계를 고독하고 끝이 없는 항해라고 표현하는 이 작가는 올곧고 타협하지 않는 해치의 성격과 닮은 구석이 있었다. 이는 그가 말하는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한 조건과도 관련이 있었다.
“‘해태 눈이 멀었다’는 얘기가 왜 나왔는지 항상 궁금했어요. 안 좋은 뜻이잖아요? 해치가 청렴의 상징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정부패와 탐관오리가 계속 나오니까 그런 말이 생긴 것 아닐까요? 해태나 해치의 의미가 바뀐 적은 없는데 의미 부여는 사람들이 하는 거니까요. 예전에 함석헌 선생은, 진정한 혁명은 남들이 하는 혁명을 따라가는 게 아니라 자기 스스로부터의 혁명이라고 말했죠. 자신의 틀을 깬 사람이라면, 그런 사람에게 10억 원을 준다고 가치관을 바꾸겠느냐는 거죠. 중요한 건 주체적으로 생각하는 겁니다.”
그의 설명을 들으니 해치는 상상 속보다 현실에서 더 많은 문화적 의미를 가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일은 문화를 지키겠다는 사명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는 돈을 넘어서는 가치가 분명히 있다고 믿는 이였다. 그걸 얘기조차 못하고 산술적인 이익만을 위해 움직이는 건 안 될 일이라는 것이다.
“돈이 아닌 현대인의 가치, 정체성도 필요한 것이니까요. 직업 아닌 예술가로서 제가 해야 할 일이죠.”
● Exhibition
◇ 물, 비늘, 껍질
일정 4월 26일까지 장소 복합문화공간에무 B2 갤러리
김정옥의 단독 기획초대전으로, 그동안 작가가 주목해왔던 ‘물고기’ 연작에서 더 나아가 물고기가 살고 있는 환경, 즉 수족관의 영역까지 아우르는 작품들로 이뤄졌다. 작가는 “투명한 수족관은 제한성을 전제로 한 삶의 환경”이라며 “물이 아닌 공기로 치환된 수족관 속에서 인간은 서로 무리 짓고 군중 속에서 부대끼다 동시에 문득 개인으로 반짝인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상상을 바탕으로 수족관 안에서 무리 지어 사는 물고기들의 모습을 통해 인간의 삶을 유추해보고, 살아 있음을 느끼는 순간을 비늘의 반짝임으로 표현했다.
◇ 히말라야... 그리움을 찾아서
일정 5월 17일까지 장소 갤러리 하리&멘탈ART
‘마음을 읽는 작가’로 알려진 김애옥의 2020년도 첫 전시다. 하얀 눈을 휘덮고 있는 설산이 태양의 빛을 받아 마치 카멜레온의 보호색처럼 시시각각 변하는 모습을 그린 작품들로 채워졌다. 작가는 히말라야에 다채로운 컬러를 입힌 데 이어 인간들의 기억 속에 오래 머물러 있던 그리움에 대해 이야기한다. 애쓰지 않아도 순간순간 떠오르는 기쁨과 슬픔의 조각들을 스펙트럼의 파장 이미지로 펼쳐 표현했다. 이번 전시는 관람자가 특정 히말라야 이미지를 선택하면 그에 따른 마음의 상태를 읽어준다. 아울러 그림을 통해 숨어 있던 내면의 그리움을 비추는 등불 역할도 한다.
◇ 추니박, 침묵의 숲
일정 4월 25일까지 장소 사비나미술관
전통과 현대를 아우르는 ‘융합산수’를 개척한 추니박의 ‘검은 풍경’ 연작과 ‘치유의 숲’ 연작을 감상할 기회다. 30여 년간 작가가 확장해온 한국화의 지평을 확인하는 자리인 동시에, 그의 최신 작품세계까지 살펴볼 수 있다. ‘검은 풍경’ 연작은 그동안 한국 풍경화를 그려왔던 작가가 그랜드캐니언, 캘리포니아 등 미국 서부 지역을 여행하면서 만난 광활한 대자연을 한국 전통 필법으로 풀어내 해외에서 큰 호응을 얻었다. 이번 전시에서는 그중 3점의 작품을 선보인다. 또 ‘치유의 숲’ 연작 총 120여 점 중 주요 작품 34점을 선별해 공개할 예정이다.
◇ 툴루즈 로트렉 展: 물랭 루즈의 작은 거인
일정 5월 3일까지 장소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후기 인상주의파 화가이자 현대 그래픽 아트의 선구자,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렉의 국내 첫 단독전이 열린다. 그리스 아테네에 위치한 헤라클레이돈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작품 150여 점으로 구성되며, 모두 국내에 최초로 공개되는 작품들이다. 포스터, 석판화, 드로잉, 스케치, 일러스트 및 수채화를 비롯해 로트렉의 사진과 영상, 당대의 생활용품 등이 19세기 말 생동감 넘치는 파리 몽마르트 언덕과 물랭 루주의 모습을 투영한다. 아울러 로트렉의 일생을 담아낸 미디어 아트와 물랭 루주의 히스토리를 간직한 특별 제작 영상 등 다채로운 장르의 볼거리가 마련돼 있다.
● Stage
◇ 드라큘라
일정 4월 28일~5월 17일 장소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연출 데이비드 스완 출연 김준수, 조정은, 손준호 등
아일랜드 소설가 브램 스토커의 동명 소설을 각색한 뮤지컬로, 수백 년이 지나도록 오직 한 여인만을 사랑한 드라큘라 백작의 판타지 로맨스를 그린다. 뱀파이어라는 매력적인 캐릭터와 프랭크 와일드혼의 드라마틱한 음악이 어우러져 신비로운 분위기를 연출한다. 이번 공연에서는 블랙 스크린을 설치하고, 스탠딩 세트를 플라잉 세트로 전환하는 등 극적인 연출을 보여주기 위해 장비와 세트를 보강해 웅장한 분위기를 한층 끌어올렸다.
◇아트
일정 5월 17일까지 장소 백암아트홀 연출 성종완 출연 이건명, 엄기준, 박건형 등
15년간 유지해온 세 남자의 우정이 허영과 오만에 의해 얼마나 쉽게 무너지는가를 일상의 대화를 통해 표현한 연극이다. 대학로 공연 당시 최고 객석 점유율 103%, 누적관객 수 20만 명을 기록하며 ‘아트 광풍’을 일으키기도 했다. 개성 넘치는 배우들이 인간의 이기심, 질투, 소심한 내면의 심리를 블랙코미디 특색을 살려 거침없이 드러낸다.
◇ 사운드 오브 뮤직
일정 4월 28일~5월 17일 장소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연출 정태영 출연 이연경, 배다혜, 송일국 등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지배를 피해 조국을 떠나야 했던 폰 트랩 가족 합창단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뮤지컬이다. ‘에델바이스’, ‘도레미송’ 등 동명의 영화를 통해서도 널리 알려진 아름다운 넘버들로 꿈과 희망을 노래한다.
● Movie
◇ 프리저베이션 홀 재즈 밴드
개봉 4월 2일 장르 다큐멘터리 감독 T.G. 헤링톤, 대니 클린치 출연 벤 재프, 월터 해리스 등
뉴올리언스 재즈를 대표하는 ‘프리저베이션 홀 재즈 밴드’가 음악의 뿌리를 찾아 떠나는 여행기를 담았다. 쿠바를 배경으로 한 즉흥 버스킹 등 소울 가득한 재즈 선율이 눈과 귀를 사로잡는다.
◇ 밥정
개봉 4월 예정 장르 드라마, 다큐멘터리 감독 박혜령 출연 임지호
임지호 셰프가 자신의 친어머니와 양어머니, 그리고 길 위에서 인연을 맺은 어머니들을 위해 그리움으로 차린 밥상과 인생의 참맛을 함께 담았다. 산과 들, 계곡 등 한국의 아름다운 사계절 풍경도 감상 포인트다.
● Book
◇ 야생의 위로 에마 미첼 저ㆍ심심
25년간 우울증을 알았던 저자가 자연에서 위안을 얻었던 1년간의 소회를 쓴 일기다. 가벼운 무기력증부터 자살 충동에 이르기까지 우울증의 다양한 양상을 경험하며, 그때마다 자신을 위로했던 자연의 모습을 생생한 글과 그림, 사진으로 묘사했다. 섬세한 문장과 감성적인 이미지를 통해 인간을 어루만지는 자연의 따뜻한 손길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다.
◇ 세계사를 바꾼 전염병 13가지 제니퍼 라이트 저ㆍ산처럼
전 세계를 공포에 떨게 한 코로나19 못지않게 역사상 인류가 속수무책으로 당해온 전염병 13가지를 살펴본다. 발병 당시의 상황과 에피소드, 질병 극복 방법까지 소개한다.
◇ 건강 공부 엄융의 저ㆍ창비
건강의 정의부터 올바른 스트레스 및 식습관 관리, 신종 바이러스와 미세먼지 등으로부터 내 몸을 지키는 방법을 정리했다. 주제별 건강 상식과 더불어 일상생활 수칙 등도 제시한다.
◇ 내가 사랑한 시옷들 조이스 박ㆍ포르체
죽기 전에 읽어야 할 세계의 명시 30편을 사랑, 사람, 시라는 ‘시옷’의 단어들로 풀어냈다. 저자는 숨 가쁘게 달린 하루의 끝에서 ‘시’와 마주하며 내일을 살아갈 힘을 얻길 바란다.
◇ 햇볕이 아깝잖아요 야마자키 나오코라 저ㆍ샘터사
베란다 작은 정원을 가꾸며 마음을 치유하는 과정을 그린다. “베란다는 세계의 축소판, 그 작은 공간에 우주가 있다”고 말하는 저자의 신선한 통찰력이 곳곳에서 빛난다.
쓸쓸한 폐교였다. 마을 아이들이 재잘거리던 초등학교였으나, 시간의 물살이 굽이쳐 교사(校舍)와 운동장만 남기고 다 쓸어갔다. 적막과 먼지 속에서 낡아가다가 철거되는 게 폐교의 운명. 그러나 다행스레 회생했다. 미술관으로. 시골 외진 곳에 자리한 미술관이지만 1000명 이상이 관람하는 날도 많다 하니 이게 웬일? 이곳에서 관람할 게 미술 작품만은 아니다. 오래된 건물 안팎에 내려앉은 시간의 더께. 사계의 문양을 저마다 자동기술법으로 표현하는 정원수들의 동향. 야트막한 뒷산 위에 얹힌 하늘의 표정. 보란 듯이 있는 볼 것들이 많다. 충남 당진시 순성면에 있는 아미미술관이다.
화가 부부가 운영하는 미술관이다. 남편 박기호(65, 회화)가 관장으로, 아내 구현숙(58, 설치미술)이 큐레이터로 손발을 맞춘다. 애초 미술관을 만들 생각은 없었단다. 지난 1995년, 그저 작업 하나만 마음껏 하고 싶다는 바람으로 폐교를 빌려(나중엔 아예 사들였다) 둥지를 틀었다. 폐교의 환경은 이상적이었다. 공간은 헐겁도록 널찍하고, 어지러운 잡사는 침범 못할 시골 산자락이니 창작을 능사로 삼을 만한 환경이지 않은가.
이후 부부는 작업에 매달려 살았다. 미술만 작업은 아니었다. 퇴락한 교사를 단장하는 일에도 공을 들였다. 원형을 살려둔 채, 가필처럼 조심스레 부분적인 보수만을 한 건, 학교 건물에 서린 유서(由緖)를 존중해서였다. 시간이 머물다 간 흔적을, 시간 속에서 쌓여 이제는 숨결로만 남은 수많은 옛이야기들을, 그 애틋한 가치들을 또한.
복합문화공간으로 변신한 폐교
외부 조경에도 정성을 쏟았다. 바지런히 수백 종의 나무와 화초를 심어 가꾼 건 식물을 좋아하는 부부의 취향 탓이기도 하겠지만, 자칫 건조한 느낌을 줄 수 있는 폐교 공간에 미감을 부여하려는 뜻도 컸다. 교장 관사로 쓰였던 한옥의 보일러 시설을 뜯어내고 구들장을 들이는 작업도 부부가 손수 해치웠다. 먼 데서 주워온 돌들로 쌓은 담장엔 한 드럼 이상의 땀방울이 흘러내렸을 것이다. 이렇게 온갖 단장에 몸이 닳도록 힘을 쓰고 시간을 썼다. 어느 한 구석, 어느 한 모롱이도 부부의 품이 들어가지 않은 곳이 없도록.
그렇게 보낸 15년. 어느덧 알아주는 눈들이 많아지고, 멀리까지 소문이 나면서 일부러 찾아드는 사람이 늘기 시작했다. 신역(身役)을 마다않고 공간을 꾸민 건 오직 부부 자신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미술관이라는 이름의 공유공간으로 개방할 경우엔 더 가치 있는 일이 생길 것 같았다. 지역의 복합문화공간으로 키우고 싶은 생각, 역량 있는 청년작가들을 밀어줘야겠다는 포부도 옹골찼다.
그렇게 아미미술관이 태동했다. 이후 10년이 지난 지금, 당진과 충남 지역을 넘어 전국적 명소로 부상했다. 부침이 없는 안정적인 성장을 거듭한 결과로. 근래 5년여 사이에 다녀간 유료 관람객 누적 인원은 자그마치 30여 만 명. 지역 미술관이, 그것도 시골의 폐교 미술관이 거둔 성과가 놀랍다. 자본력을 펀치로 약자를 링에 눕히는 승자독식 사회에서 미술관들의 경쟁은 치열할 수밖에 없다. 재력으로 무장한 전문화랑, 공적자금이 투입된 공공미술관, 대기업 문화재단이 설립한 대형 미술관이 결국은 독주한다. 화가 부부가 맨몸을 우직하게 던져 가꾼 아미미술관이 그 틈새에서 기세를 돋우고 있으니 이 무슨 야무진 진격인가.
청춘들에겐 ‘취향 저격 핫플’
아미미술관이 지닌 힘과 매력은 한둘이 아니다. 우선은 산기슭 자연 속에 자리해 그야말로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띠고 있다는 점을 꼽아야 한다. 부부가 공들여 가꾼 정원마저 아름다워 한결 순수한 휴식을 누릴 수 있게 한다. 도시의 화려하지만 딱딱한 느낌을 주는 미술관에서 맛보기 어려운 자연미. 그건 미술 작품을 감상하는 즐거움 이상의 만족감을 선사한다. 자연 속에서 얻는 담백한 쾌감보다 개운한 게 다시 있던가.
원형을 해치지 않은 지성적인 개량으로 근대 건축의 고태(古態)를 고스란히 유지한 교사, 즉 전시관의 멋과 맛은 아마도 이 미술관이 보유한 최대 자산이다. 쓸모를 잃고 폐기될 운명에 처한 사물이 인간의 혜안을 만나 부활, 다시금 쓸모를 되찾은 특유의 사례에 속할 건물이지 아니한가. 이 명물에 우련히 뒤엉긴 건 시간이다. 죽어라 내빼기만 하는 게 시간이지만(시간은 허무주의자?), 여기에선 아쉬워 차마 다 훌쩍 떠나지 못했나. 잔영으로 남은 시간의 형적인가, 무늬인가. 노랑 병아리처럼 동동거리며 복도 마루를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모습이 어룽거린다. 그립고 애잔하다, 아, 옛날이여!
우수 절반, 향수 절반으로 짜인 그리움이 가슴을 친다. 학동 시절을 거치지 않은 사람이 있는가. 과거로 돌아가는 의식이란 허망한 것이지만 그 옛날의 교실에 왔거들랑, 그대여 맘껏 추억에 잠기라! 교실이 두런거리는 소리의 뜻이 그렇다. 중장년 관람객의 거의 대부분은 어쩌면 추억을 움켜쥐기 위해 아미미술관을 찾아올 게다. 젊은 관람객에겐 근사한 빈티지 컬렉션처럼 느껴질지도. 근대와 모던이 결합된 이채를 오래 남기기 위해 그들은 인증샷을 찍는다. 자랑할 인생샷을 건지기 위해 연신 셔터를 누른다. 다음에 만나 아미! 그러고선 다시 오기도 한다.
화가 부부에 따르면, 아미미술관이 단박에 부상한 건 순전히 젊은 디지털 유목민들 덕분이다. 그들은 미술관의 거의 모든 공간에 매력을 느낀다고 한다. 건물의 내·외벽은 물론, 외부 정원 공간의 다양한 사물들에, 하다못해 나뭇가지에조차 모빌이나 조각 소품, 에스키스 등으로 데커레이션을 해둔 효과가 그렇게 크다. 어디건 포토 존이 되는 것이다. 그러자 청춘 군상들이 환호하며 사진을 찍어 블로그, 유튜브, 페이스북 등에 올렸고, 이게 ‘일파만파의 파장’을 일으켰단다. 미처 예상하지 못한 홍보대사들이 대거 출현한 셈이다. 고즈넉한 운치를 좋아하는 이들에겐 좀 과한 데커레이션으로 느껴질 테다. 청춘들에겐 ‘취향저격 핫플’로 많이 알려졌지만.
기획전시전이 열렸다. 부부는 어떤 작가를 선정하느냐에 따라 미술관의 품질이 결정된다고 믿는다. 신중을 다해 매번 참여 작가를 엄선한다. 아내가 큐레이터이지만 또 한 명의 큐레이터를 고용한 이유가 거기에 있다. 첨단 트렌드의 작품을 하는 유망한 젊은 작가를 주로 고른다. 현재 진행되는 4인전의 타이틀은 ‘Selfie시대의 자화상展’이다. 셀피족(스스로 자신의 사진을 찍길 즐기는 사람, 또는 그런 무리)이 넘쳐나는 이 사회를 작가들은 어떻게 해석하는가? 그걸 보여주는 전시회다.
작가 김태헌의 가벼운 소품 한 점이 재미있다. 꽃 속에 들어간 행복한 사내를 그려놓고, ‘나는 거짓말쟁이 화가’라 화폭 안에 써넣었다. “알고 보면, 나 나쁜 놈이야! 근데 넌?” 작가는 그리 묻고 있다. “나? 나라고 별수 있음?” 관람객은 그리 답하기 십상이지 않을까. 우리가 외면하고 사는, 심지어 믿을 수 없는 세상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보신책이라 여기는 내 안의 위선, 가식, 내로남불! 작가는 그걸 까발리고, 관람자는 뭔가 켕기면서 ‘나’를 모처럼 들여다본다. 속된, 너무도 속된 외부로만 편재된 눈을, 두뇌를, 욕망을 내부로 돌린다. 잠시 잠깐이나마. 미술관 그림들은 이렇게 우리에게 삶을 환기시킨다. 족쇄를 풀고 자유롭게 살 생각을 해보게 한다. 너무 가르치려 드는 그림은 따분하지만.
아미미술관장 박기호
바닷가 소금창고, 통째 예술로 바꾸겠다
지난 1983년, 박기호 관장은 대한민국미술대전 서양화 구상 부문에서 대상을 받았다. 부상으로는 프랑스 여행의 기회가 주어졌다. 그게 계기가 돼 파리국립미술학교에서 유학을 했다. 아내 구현숙 역시 영국에서 공부한 뒤 프랑스 디종 국립미술학교를 졸업했다. 이들은 파리에서 우연한 인연으로 만나 사귀다 결혼에 이르렀다. 결혼과 동시에 귀국, 대학에서 강의를 하다 여기 당진으로 내려온 것이다. 당진은 박 관장의 고향이다.
널찍하고 천장 높고. 그는 그런 작업 공간을 찾다 폐교에 자리를 잡았다. 원하는 공간을 얻었으니 작업에의 몰두가 깊었을 게다. 폐교를 다듬는 데에도 비지땀을 쏟았다. 4600평 부지 안에서 폐허의 표정을 짓고 있었을 교사와 부속건물, 그리고 운동장. 이 모든 걸 쓸 만하게 바꿔놓는 게 어디 쉬운 일일까보냐. 청소를 하는 데만 반년이 걸렸단다. 방독면을 쓰고 천장을 털어냈을 때 쏟아진 쓰레기가 트럭으로 열 대 분량이었다. 쥐들의 낙원이기도 했다. 교실 한 칸에 꾸민 침실의 커튼을 타고 부산히 오르내리는 쥐들로 잠을 설친 밤도 많았다. 쥐보다 더 바삐 움직인 건 박 관장이었다. 다듬고 고치고 칠하느라고. 그러니까 청소부이자 수리공, 목수이자 페인트공으로도 살았던 셈이다. 어디서 이런 뚝심과 요령이 나왔을까.
“파리로 유학을 갈 때 1원 한 장 지닌 게 없었다. 생활이 어려울 수밖에. 고암 이응로 화백께서 쓰던 작업실을 한동안 얻어 쓰는 행운이 있었지만, 숙식 문제부터 늘 곤란했다. 부지런히 그림을 그려 팔았다. 그리고, 알바 삼아 집 고치는 업자들을 따라다니며 돈을 벌었다. 그때 공사판에서 익힌 기술을 폐교 수리에 활용했다.”
“당신은 화가다. 폐교 단장에, 그리고 미술관 운영에 힘을 너무 소모하는 건 아닌가? 그림밖엔 난 몰라! 화가들은 흔히 그런 말을 하는데.”
“캔버스 안의 그림만 예술이 아니다. 나는 여기에서 긴 세월 동안 실로 많은 작업을 해왔다. 공간 곳곳을 디자인하고, 손수 가구를 만들고, 돌담을 쌓고, 심혈을 기울여 조경을 했다. 사람들은 이것들을 단순한 인테리어라 규정할지 모르지만, 최상의 디자인이 가미된 작품으로 보길 바란다. 관점을 넓히면, 세상의 모든 사물과 일상에 이미 예술이 들어가 있는 걸 알 수 있다.”
소변기에다 ‘샘’이라는 제목을 붙여 전시장에 내놓았던 마르셀 뒤샹. 그는 공장에서 나온 기성품도 예술일 수 있다고 보았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게 예술이라 했다. 박 관장이 뒤샹과 같은 얘기를 하고 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 관점을 확장하고 틀을 깨는 거. 그게 자유로운 삶이자 예술이라는 얘기이겠지. 그는 요즘 오브제로 사들인 해변 마을의 소금창고를 통째 작품화하기 위해 구상 중이다. 폐어선 한 척도 같은 용도로 이미 접수해뒀다.
먹고살 만한 일을, 그리고 한 잔의 커피와 낭만적인 음악을 즐길 여유만 있다면 여기에서 무엇을 더 바라랴. 마음이 지극히 평온할 땐 그런 가상한 생각이 찾아든다. 그러나 ‘평온’은 흔전만전하기는커녕 희귀종에 가깝다. 위태로운 곡예를 연상시키는 게 생활이지 않던가. 광장시장의 빈대떡처럼 수시로 뒤집어지는 게 일상이다. 이 난리법석을 피해 흔히 주점을 찾아 소주병을 쓰러뜨린다. 그게 용한 대책이 아님을 아는 사람들 중에 어떤 이들은 미술관으로 피난을 간다. ‘피난’이라 썼지만 정확하게는 충전을 위한 행차, 또는 옹골찬 감성여행이다.
미술관은 창고에서 태동했다. 과거 유럽의 왕족이나 귀족들은 진귀한 물건들을 수집해 창고에 쟁이길 즐겼다. 이 저장공간은 개인전시실로 진화했으며 뮤지엄(museum)이라 불렀다. 그러니까 왕궁이나 귀족의 저택 자체가 뮤지엄이었다. 이후 절대왕정의 붕괴와 산업혁명으로 상층부가 몰락하면서 뮤지엄은 시민사회의 문화공간으로 탈바꿈했다. 근엄한 권위를 칭칭 두른 왕궁 루브르가 대중적인 뮤지엄으로 전환된 게 또렷한 사례다. 뮤지엄은 원래 박물관을 의미하는 단어였지만 미술관의 유전자도 뮤지엄에서 유래했다.
정신 일깨우는 감각의 제국
미술이 없는 세상을 상상해봤는가. 미술관이 없는 공공사회를 생각해봤는가. 그런 게 없더라도 지구는 돌고 인간의 삶은 무사히 흘러가겠지만, 미감을 누릴 성좌 하나가 사라진 허전함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미술관이란 우리의 둔한 정신을 일깨우는 ‘감각의 제국’이지 않던가.
삶은 일쑤 속되고 진부하지만, 미술관의 작품들은 사람의 감성을 슬쩍 흔들어 잠시나마 새로운 지평을 바라보게 한다. 그렇기에 카오스로 미만한 세상에서도 미술관을 찾는 발길은 더욱 늘고 있다.
미술작품이 봄날에 내리는 이슬비처럼 가슴을 촉촉이 적셔준다고 믿는 애호가들의 향유 욕구. 이에 부응한 미술관의 진화와 변신은 이미 하나의 추세가 됐다.
이제 미술관은 미술품을 소장하고서 그저 작품 감상의 기회만을 제공하는 공간이 아니다. 할 수 있는 건 다 하겠다는 듯 바지런히 새로운 콘텐츠를 개발하고 시스템을 보완하고 있으니 말이다. 야외공간을 확보하거나 다양한 부대시설을 만들어 복합문화공간의 기능은 물론, 자못 우아한 휴식공간의 역할까지 도맡고자 하는 것 같다. 듣자 하니 예전 미술관의 전시공간과 부대공간의 비율은 9대 1이었지만 요즘은 1대 2로 역전됐다는 게 아닌가. 도서관, 체험관, 교육장, 카페, 식당, 아트숍 등을 설치해 덩치를 키워나가고 있는 것이다. 미술관 건축 자체를 예술적으로 기발하게 디자인하고 있으며, 정원 조성에도 공을 들인다. 도시의 안통을 벗어나 자연 속으로 스며드는 미술관도 많다. 이른바 전원형 미술관이다. 자연이라는 모티브만큼 매력적인 호객 매체가 다시 있겠는가.
승효상 건축가가 설계
나는 지금 신라의 천년 고도 경주시 엑스포공원 안에 있는 솔거미술관에 와 있다. 경주시에 열린 첫 공립미술관이다. 한국화의 거장 소산(小山) 박대성 화백(76)이 평생토록 그린 작품 830점을 기증하면서 건립에 착수, 2015년에 개관했다.
기부문화의 토양이 척박한 한국 사회에서 소산의 화통한 쾌척은 의표를 찌른다. 어차피 작품들을 등에 짊어지고 내생으로 떠날 방법은 없는 법. 그간에 신세진 세상에게 돌려주는 게 순리라 여겼으리라.
솔거미술관은 전형적인 전원형 미술관이다. 야트막한 야산이 푸근하게 늘어뜨린 치맛자락을 거머쥔 미술관이다. 토함산 슬하의 막내둥이에 속할 야산의 이름은 대덕산. 1921년, 당시 남한 땅에 생존했던 마지막 호랑이가 이 산 갈피에서 사람들에게 잡혔다고 하니 애석하다. 그것이 생명이건 무생명이건, 세상에 존재했던 것들의 모든 ‘마지막’은 애잔한 기분을 일으킨다.
미술관 뒤편 산 아래엔 자그마한 자연호수 아평지(阿平池)가 있다. 옷을 훌훌 벗고 늘어선 호숫가의 겨울나무들이 물에 드리워진 제 그림자를 내려다보고 있다. 이 역시 그림이라 눈길이 한참 거기에 머문다.
초록빛 수면을 노니는 물오리들은 오늘도 기쁜가. 생동하는 풍경이 아닐 수 없다. 이쯤이면 미술관에 입장하기 전에, 또는 미술관 관람을 마친 뒤 풍경 속으로 걸어 들어갈 수밖에 없다. 그러라고 미술관을 산자락 호숫가에 들어앉힌 게 아니겠는가.
‘빈자의 미학’ 스민 건축
“어눌한 게 달변보다 낫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나를 광야로 추방해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는 비판자로 살겠다”고도 했다. 건축가 승효상이다. ‘빈자의 미학’으로 삶과 건축을 구현하는 사람으로 알려진 그는 인간을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존재로 봐 모두가 집다운 집에서 살 수 있기를 소망하는 것 같다. 집다운 집은 어떤 것인가. 그가 말하는 요점은 ‘가짐보다 쓰임을, 더함보다 나눔을, 채움보다 비움을 중시해 지은 집’을 짓고 사는 게 척박한 삶에서 벗어나는 길이라는 데 있다.
승효상의 설계로 지어진 솔거미술관을 보면 그의 건축적 지향이 실감으로 다가온다.
산자락 초목들을 곁에 둔 미술관의 외관은 들썩이는 구석 없이 수굿하다. 건축과 자연이 서로 눈짓을 하며 말없는 말을 두런거리나? 숲은 묵연하고 미술관은 겸손해 불화 없이 조응한다.
노출 콘크리트 공법으로 세운 벽과 벽 사이엔 나무쪽을 켜켜이 채워 콘크리트의 투박한 본성을 자연스럽게 누그러뜨렸다. 나무도 콘크리트도 나이를 먹어갈 것이다. 비와 바람과 햇볕에 마모되고, 색이 바래고, 티끌과 이끼가 틈서리마다 배어 세월이 흐를수록 음영이 짙어지겠지. 마침내 잘 늙은 집으로 변모할 게다. 깊은 운치를 풍기며 미술관의 역사를 웅변할 게다.
미술관 내부 역시 승효상의 철학을 느끼게 한다. 2층에서 1층으로 내려가는 회랑엔 계단과 함께 슬그머니 휘어지는 경사로를 조성해 물 흐름처럼 자연스러운 리듬을 부여했다. 미로에 들어선 것 같은 흥미마저 자아낸다. 계단을 이용하기 어려운 노년층 관람객을 위한 섬세한 배려일 수도 있겠다.
전시공간마다 적절히 배분된 자연광과 인공광. 싱그럽게 자란 대나무와 열린 허공으로 흐르는 구름이 보이는 중정(中庭). 차경(借景, 외부 자연풍경을 안으로 끌어들이기)을 위해 제3전시관의 벽을 뚫어낸 통유리 프레임의 이채. 전시작품이라는 주체를 효과적으로 북돋우는 객체들의 조합과 질서가 정교하다. 전시관의 천장이 매우 높은 건 미술관의 방장에 해당할 소산 선생의 어마어마한 대작들을 고려한 방책이다.
관람 인원 해마다 급증
경주의 핫 플레이스로 이미 두둥실 떠올랐다. 인기 작렬! 솔거미술관 말이다. 개관 5년 차 신생 미술관이지만 관람 인원이 해마다 급증했다. 어느 하루는 자그마치 2000여 명이 관람했단다. 서울에 있는 유명 미술관들이 긴장하는 분위기라니 통쾌하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솔거미술관의 매력은 산책을 즐길 수 있는 자연 경관과 동거하는 미덕, 그리고 유명 건축가가 설계한 건물이라는 강점에 있다. 그러나 진정한 매혹은 소산 선생의 작품이 뿜는 아우라. 전시관 벽에 걸린 선생의 수묵화 앞에 선 심취한 표정들을 보라. 거무튀튀한 건 먹빛이요, 허연 건 화선지 맨살이구나, 그저 그리 여겨 심드렁히 스쳐 지날 것만 같은 젊은 관람자들이 눈을 끔벅이며 골똘히 그림을 들여다본다. 와우! 그런 찬탄을 터뜨리며.
전시장에 가득한 소산의 수묵화들은 실로 압권이다. 자유자재한 작풍으로 먹의 향연을 펼쳤다. 바위를 후벼낼 듯 거침없는 운필로 산수를 그리고 화조(花鳥)를 찍어냈다. 10m 너비의 대작을 예사롭게 그려내는 괴력으로 예술혼을 불사르는 거장의 진면목을 알아보게 하는 작품들이다. 서양화에 밀려 푸대접을 받는 게 한국화다. 수묵화단의 체면이 이거 말이 아니다. 서양화의 진격에 맥을 놓고 있다. 이 와중에 소산이라는 거목이 떠억 버티어 현실을 일갈하고도 남을 수작들을 그려냈다.
미술관을 나서자 저녁 어스름이 내린다. 장쾌한 수묵 세례를 받아서겠지, 마음 기슭에 밝은 달덩이 하나 떠오르는 이 기분은.
솔거미술관 탄생시킨 소산 박대성 화백
“나에게 작업실은 유배지와 마찬가지요!”
소산 선생 말하길, 예닐곱 살 때부터 붓을 노리개 삼았더란다. 집안 제사 때면 펼쳐지는 사군자 병풍, 그걸 보고 그림이라는 걸 끼적이기 시작한 게 외골수 화업(畫業) 인생의 싹눈이었다. 마냥 붓질을 놀 만한 형편은 아니었다. 배를 곯지 않기 위해 들일을 해야 했으니까. 뒷산에 뛰어올라 땔감을 져 나르거나, 똥장군 짊어지는 일도 소싯적의 다반사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게, 그는 일찌감치 양친을 잃었다. 한국전쟁이 터지기 직전 어머니는 병으로, 아버지는 끔찍한 변고로 타계했다. 산에서 내려온 빨치산들이 아버지를 반동 지주로 몰아 낫으로 살해했다니 참혹하다. 당시 겨우 네 살배기 어린애였던 그의 몸에도 낫날이 들어와 팔 하나를 앗아갔다. 현재 소산의 왼팔은 의수다.
어린아이 때부터 겪었을 시련과 캄캄한 고독을 짐작할 만하다. 그럼에도 붓을 내던지지 않았다. 외팔로 삶에 가담해 밥을 벌기엔 그나마 지필묵이 상책이라 본 친척 어른들의 독려 덕이기도 했다.
“몸에 핸디캡이 있으니 어느 한 가지 쉬운 게 없었지. 그러나 불편한 조건들이 결과적으로 내겐 복이었어요. 부족함과 불편함이 오히려 행운이었던 거요. 나를 무쇠처럼 담금질할 수 있었으니까.”
그의 예전 작업실엔 ‘불편당’이라는 당호가 붙어 있었다. 불편이 차라리 길이라는 걸,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가치들은 고통 속에서 태어난다는 걸, 불편을 통해야 자연의 이치를 깨달을 수 있다는 걸, 수묵으로 도달할 수 있는 정신의 높이도 불편과의 동행으로 얻을 수 있다는 걸 당호로 다짐했던 셈이다. 이 ‘불편의 사제’의 붓놀림은 성정처럼 쾌활해 일필휘지에 능란하다. 깊고 아득한 먹색이 내려앉으면 그윽한 산경이 화폭에 아롱진다. 분출하는 화산의 기세로 묵을 써 화선지를 한바탕 희롱하고 나면, 거기에 웅장한 대자연이 꿈틀거린다. 정밀한 필선의 운용에 물이 올라 극사실화로도 이미 극치에 이르렀다. 서예는 또 어떻고? 김생과 추사를 진즉에 섭렵한 소산의 서(書)는 빼어나, 듣느니 늘 명필 소리다. 이렇게 그의 예술 생태계는 다중변주로 비옥하다.
“동양의 필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얼마나 완벽한가. 소필, 중필, 대필로 구분되는 필(筆)을 좌우사방, 맘대로 돌려 그림을 그릴 수 있어요. 서양화 붓은 이게 안 되거든. 우리의 필은 자유로워 걸림이 없지. 대 그림자가 물에 스치듯 평화롭단 말여.”
830점의 작품을 기증한 이후 소산은 고향의 외진 산속으로 작업실을 옮겼다. 이전보다 작품량은 더 늘어났고, 대작을 그리는 습(習)도 깊어졌다.
“내게 작업실은 유배지와 마찬가지요. 산고(産苦)와 다르지 않은 창작 하나에 집중하기 위해서는 외로움 속으로 나를 밀어 넣을 수밖에 없으니.”
“전에 이런 얘기를 했지요. 추사를 때려잡겠다!”
“하하핫! 선문(禪門)에 전해오길,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祖師)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 추사는 성인 반열에 오른 분인데 감히 넘볼 수 있을까. 그러나 추사는 했는데, 나는 못한다? 그럴 리가. 내가 필묵을 닦기를 추사 못지않을 만큼은 하고 있소.”
소산에게 추사는 서화의 이상적 아이콘을 상회하는 존재다. 그는 선지식으로서의 추사를 타넘고 싶은 것이다.
● Exhibition
◇ 레안드로 에를리치:그림자를 드리우고
일정 3월 31일까지 장소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아르헨티나 출신의 세계적인 설치 작가 레안드로 에를리치의 개인전이다. 에를리치는 주로 거울을 이용한 착시 현상에 착안해 엘리베이터, 계단, 수영장 등 친숙한 공간을 소재로 한 작품활동을 이어왔다. 특히 눈으로 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물리적 체험까지 가능한 그의 작품은 누구나 쉽게 이해하고 몸소 즐길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받는다. 총 4개의 전시공간으로 구성된 이번 전시는 작가의 작품 이미지를 활용해 제작한 영화 포스터 13점으로 꾸민 ‘커밍 순’으로 시작한다. 이어 ‘탑의 그림자’, ‘자동차 극장’ 등 대형 작품을 비롯해 남·북한 지도를 모티브로 한 ‘구름(남한, 북한)’까지 만날 수 있다.
◇ 뜻밖의 발견, 세렌디피티
일정 4월 25일까지 장소 사비나미술관
‘예술가에게 창의적 아이디어가 떠오른 순간, 뇌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우연한 발견이 예술적 발상과 작품으로 연결되기 위해 필요한 환경적 조건은 무엇인가’ 등의 물음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한 시도로 기획된 전시다. 창작에 영감을 준 이미지를 발견한 당시의 순간과 그 특별한 발견을 작품으로 옮겨나가는 창의적 행위의 과정에 대해 그린다. 이세현, 손봉채, 베른트 할프헤르 등 세렌디피티(뜻밖의 발견)를 경험한 작가 21명의 예술작품 78점과 더불어 흥미로운 일화와 사례, 작가노트 등을 공개한다. 이를 통해 아름다움의 발견에는 의식적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을 일깨운다.
◇ 환상의 에셔展: EXIT-에셔의 방
일정 4월 30일까지 장소 서울웨이브아트센터
20세기를 대표하는 초현실주의 네덜란드 작가 마우리츠 코르넬리스 에셔의 특별전이다. 이번 전시는 193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에셔의 그래픽 디자인, 판화 에디션, 아카이브 영상과 더불어 VR 작품과 특별 제작된 대형 오브제 등으로 다채롭게 꾸며졌다. 미술에 수학과 과학을 접목한 작가 특유의 기하학적 구조가 돋보이는 작품들을 통해 예술가의 이성적인 논리와 날카로운 통찰력을 엿볼 수 있다. 특히 ‘뫼비우스의 띠’, ‘펜로즈 삼각형’ 등을 직접 체험하며 작품 속 에셔가 표현했던 원리들을 마치 수수께끼를 풀어나가듯 감상하도록 구성한 점이 흥미롭다.
◇ 볼로냐 일러스트 원화전 2019
일정 4월 23일까지 장소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볼로냐 일러스트 원화전’은 1967년부터 시작된 역사와 전통을 지닌 전시로, 매년 세계 80여 개국에서 3000명이 넘는 아티스트가 도전장을 내밀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2019년 볼로냐 올해의 일러스트레이터 수상자 76명의 작품 300여 점을 선보인다. 영향력 있는 심사위원단을 통해 선정된 실험적이고 창의적인 작품들을 만날 기회다. 2019년 수상작 전시 외에도 2018년 수상자 벤디 베르니치의 특별전이 함께 열린다. 더불어 어린이 책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라가치상’ 수상 도서 16권이 전시되는 등 다양한 콘텐츠를 통해
세계 일러스트 트렌드를 살펴볼 수 있다.
● Movie
◇ 찬실이는 복도 많지
개봉 3월 5일 장르 드라마 감독 김초희 출연 윤여정, 강말금, 김영민, 윤승아 등
‘우리 순이’, ‘산나물 처녀’ 등으로 주목받은 김초희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제24회 부산국제영화제 3관왕, 제45회 서울독립영화제 관객상 수상 등 작품성과 대중성을 인정받으며 화제를 모았다. 평생 일복에 시달리며(?) 살던 주인공 ‘찬실’에게 전에 없던 행운이 굴러들어오며 벌어지는 에피소드가 유머러스하게 펼쳐진다. 누구나 공감할 만한 여성 서사의 작품에 따뜻하고 희망적인 메시지를 더했다. 배우 윤여정은 무심한 듯 보이지만 속정 깊은 주인집 할머니 ‘복실’ 역을 맡아 극에 훈훈한 감동을 불어넣는다.
◇ 다크 워터스
개봉 3월 11일 장르 드라마 감독 토드 헤인즈 출연 마크 러팔로, 앤 해서웨이, 팀 로빈스 등
독성 폐기물 유출로 인류의 99%를 위험에 빠뜨린 미국 최고 화학기업 듀폰. 그들의 만행을 고발하며 전 세계를 뒤흔든 일간지 ‘보스턴글로브’의 심층취재팀 ‘스포트라이트’의 실화를 스크린에 옮겼다.
◇ 리암 갤러거
개봉 3월 12일 장르 다큐멘터리 감독 개빈 피츠 제럴드, 찰리 라이트닝 출연 리암 갤러거 등
세계적인 록밴드 ‘오아시스’의 멤버였던 리암 갤러거의 삶과 음악에 대해 엿볼 수 있는 다큐멘터리. 화려한 시절을 지나 험난한 시간을 보낸 그가 자신의 진솔한 심정을 고백하며 관객과의 소통에 나선다.
● Book
◇ 오팔세대 정기룡, 오늘이 더 행복한 이유 (정기룡 저ㆍ나무생각)
경찰서장을 지내다 정년퇴임 후, 온몸으로 부딪히고 깨지면서 자신의 잠재력을 발견한 오팔세대 가장의 파란만장 인생 후반전을 담았다. 진솔하게 풀어낸 저자의 다채로운 에피소드를 통해 공감뿐만 아니라, 용기와 위로의 메시지도 얻는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터득한 은퇴설계 노하우를 아낌없이 공개하며 오늘날 오팔세대의 활기찬 제2인생을 응원한다.
◇품위 있게 나이 드는 법 (버나드 오티스 저ㆍ검둥소)
노년기 마음가짐과 실질적 조언의 비율을 3대 7로 구성해 현명하게 나이 드는 방법을 제시한다. 가입할 보험 조건, 병에 걸렸을 때의 대처, 유언 준비 등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도록 돕는다.
◇ 인간의 모든 죽음 (최현석 저ㆍ서해문집)
현대인의 생활 습관과 죽음의 관계, 죽음의 유형과 특징, 치매·간병·호스피스·사별 등 웰다잉을 위한 실용적 지식을 총망라했다. 죽음에 대한 117개의 키워드를 꼽아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
◇ 정년 아저씨 개조계획 (가키야 미우 저ㆍ㈜소미미디어)
가부장적인 태도를 지녔던 ‘정년 아저씨’가 손주를 돌보기 시작하며 자신의 편견을 깨 나가는 과정을 그린 소설. 주인공의 인식 전환을 통해 가족과 사회를 위한 긍정적 변화를 촉구한다.
◇ 양준일 MAYBE (양준일 외 공저ㆍ모비딕북스)
최근 JTBC ‘슈가맨’을 통해 19년 만에 돌아온 가수 양준일이 그동안 말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털어놨다. 좌절과 상처를 극복할 수 있었던 그가 깨달은 삶의 본질과 철학을 엿볼 수 있다.
‘인플루언서’(Influencer)라는 말이 있다. 영어로 ‘영향을 주다’라는 뜻의 ‘인플루언스’ 뒤에 접미사 ‘er’을 붙여 ‘대중에게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사람’을 칭한다. 연예인, 운동선수 혹은 잘나가는 유튜버 크리에이터일 수도 있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인플루언서’로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이들은? 누가 뭐라고 해도 부자다. 특히 부자들의 삶에서 예술에 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경매시장에 나온 예술품은 범상치 않은 이의 손과 손을 거치며 본연의 가치를 드러낸다. 그들의 입소문을 타면 예술의 가치가 올라갔고, 문화로 정착했으며, 새로운 예술가가 탄생하기도 했다.
‘부’를 업고 문화를 껴안다
재력을 쌓아올린 부자들은 먹고사는 일에서 해방되자 규칙을 정하고 그들만의 영역을 확장해나갔다. 최고급, 최상품, 최고 가치는 부자들의 눈썰미에 최적화되어 분류됐다. 도시가 생겨나고 산업이 발달하던 시기, 예술의 가치를 논할 수 있는 자는 결국 시간과 정서적 여유가 있는 부자들이었다. 먹고사는 데 불편함이 없었던 이들은, 예술세계를 알면 또 다른 차원의 즐거움과 카타르시스가 있음을 일찌감치 깨달았다. 인플루언서였던 그들은 시대의 경계를 넘나드는 예술을 찾아내고 성장시켜왔다. 당장 빵 한 조각이 없어 굶어죽을 수도 있는 사람이 예술을 탐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예술과 문화에 대한 지원은 결국 부자들이 했다. 그것은 미래 가치에 대한 투자였다.
예술과 학술 활동을 후원하고, 문화 가치의 보존에 힘쓴 역사 속 수많은 부자 중에는 15세기의 메디치 가문이 있었다.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섬유 사업으로 가세를 키워 금융업으로 성장해 유럽 최고 부호가 된 가문이다. 막대한 자본을 기반으로 피렌체 정치도 좌지우지했다. 그다음으로 한 것이 바로 예술인 후원. 온갖 고서를 찾는 책 사냥꾼을 고용해 전 세계의 서적을 모았고 문화, 조각, 회화는 물론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을 후원했다. 산드로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 등 14세기에서 17세기에 이르기까지의 예술 작품을 메디치 가문이 보존했다.
한국판 메디치 가문을 꼽자면, 간송 전형필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일제강점기 우리 문화재가 일본에 넘어가거나 훼손, 말살되는 것을 막기 위해 수집하고 보호하는 데 일생을 바쳤다. 간송은 증조 때부터 배우개(현 종로4가) 중심의 상권을 장악해온 대부호 집안의 상속권자였다. 일본 와세다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한 그는 중국어 역관이자 서화가, 수집가였던 오세창과 함께 민족문화재 수집 보호에 힘을 쏟았다. 대대로 물려받은 막대한 재력과 오세창의 탁월한 눈썰미, 그리고 두 사람의 민족문화운동에 감명을 받은 지식인들의 후원으로 순조롭게 문화재를 회수했다. 추사 김정희와 겸재 정선의 작품을 집중적으로 수집하고 연구했다. 심사정, 김홍도, 장승업 등 조선시대 전반에 걸친 화적, 서예 작품까지 총망라했다. 고려자기와 조선자기를 비롯해 불상, 불구, 와전 등의 문화재도 수장했다. 우리 미술사 연구를 위해 중국 역대 미술품도 수집했다.
제2의 메디치 가문을 꿈꾸는 ‘메세나’
지난해 가수 헨리가 10년 동안 써왔다는 바이올린이 자선경매에서 1000만원에 낙찰되는 모습이 MBC의 ‘나 혼자 산다’를 통해 전파됐다. 이 낙찰금은 ‘2017 오사카 국제콩쿠르’ 파이널에 진출하고 ‘2018 티보르바르가 국제콩쿠르 심사위원 특별상’을 받은 한국예술종합학교 기악과 김주선 양에게 전해졌다. 현재도 다양하고 굵직한 무대에서 가능성을 인정받고 있는 김주선 양이 세계무대에서 활발한 활동을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대기업의 지원이 있었다. 2013년 LG(회장 구광모)와 함께하는 사랑의 음악학교 장학생, 2014년 현대자동차그룹(회장 정몽구) 아트드림콩쿠르 장학생으로 재정적 지원을 받아 바이올린 연주에 몰두할 수 있었다.
‘메세나’는 기업들이 문화, 예술, 스포츠 분야를 지원하는 활동을 의미한다. 현재 249개 기업이 (사)한국메세나협회에 가입해 문화 지원활동 분야에서 사회 공익 사업을 펼치고 있다. 지원 규모나 스케일도 꽤 크다. CJ문화재단은 음악 장학생을 선발해 청년 음악가를 후원한다. 특히 2014년부터 유재하 음악경연대회 후원을 시작해 2018년부터는 공동 주관사로 대회 운영을 함께한다. 실력 있는 가수들을 배출한 전통 있는 유재하 음악경연대회를 이끌어가는 것 또한 대중예술과 창작자를 돕는 사회 공익 사업 중 하나. 한류 문화의 중심에 있는 기업이다 보니 대중문화 지원 활동이 눈에 띈다. 두산그룹(회장 박정원)은 매년 두산아트센터에서 청소년아트스쿨이라는 워크숍을 열어왔다. 우리나라 최고 연출가와 극작가를 만나는 자리이기 때문에 무대예술에 관심 있는 청소년에게 뜻깊은 프로그램이다. 연출가 박근형, 김수정 등 한국을 대표하는 연출가들이 참가해 청소년들에게 꿈을 불어넣어줬다. 한화그룹(회장 김승연)의 한화청소년오케스트라도 반향이 크다. 2014년부터 시작한 이 프로그램은 평소 클래식 악기를 접하지 못한 소외계층 청소년에게 연주를 가르치고, 연주회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작년에는 천안과 청주 지역 청소년들에게 정통 클래식 악기를 가르쳤으며 연말에는 이틀에 걸쳐 정기 음악회도 열었다. 이러한 각 기업들의 활동은 더 나은 예술 환경을 조성할 뿐만 아니라 미래 인재를 위한 소중한 씨앗 뿌리기가 되고 있다.
◇ 모네에서 세잔까지: 예루살렘 이스라엘 박물관 인상파와 후기 인상파 걸작 展
일정 4월 19일까지 장소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클로드 모네의 걸작 ‘수련연못’을 포함해 폴 고갱의 ‘우파 우파’, 폴 세잔의 ‘강가의 시골 저택’ 등 인상주의와 후기 인상주의 대표작 106점을 공개한다. 이번 전시는 수경과 반사, 자연과 풍경화, 도시 풍경, 정물화, 초상화 등 총 다섯 개의 섹션으로 구성되며, 예루살렘 이스라엘 박물관 컬렉션에서 엄선한 인상주의 작품들로 채워졌다. 최근 인터렉티브나 미디어 아트에 편중된 전시에서 벗어나 원화 고유의 진가를 확인하는 동시에 인상주의 작품과 작가들이 현대 예술에 끼친 영향을 조망할 기회다.
◇ 가능한 최선의 세계
일정 4월 5일까지 장소 플랫폼엘 컨템포러리아트센터
정지돈 소설가와 국내 젊은 작가 10인이 함께한 단체전으로, 문학과 시각 예술 간의 적극적인 협업을 시도한다. 전시와 글이 어우러지는 형태로, 관객 스스로 전시에 직접 참여하며 자신만의 스토리를 완성하는 관람 방식이 돋보인다. 전시 주제인 ‘가능한 최선의 세계’는 정지돈이 그린 미래의 모습으로, 관객은 시놉시스에 등장하는 인물처럼 두 갈래 길을 마주한다. 자신의 선택에 따라 색안경과 지시문을 전달받고 전시장을 헤매며 작품과 함께 배치된 이야기들을 수집할 수 있다. 이렇게 저마다 모은 이야기는 다시 재배열 과정을 통해 자신만의 ‘가능한 최선의 세계’로써 완성된다.
◇ 에릭 요한슨 사진전: Impossible is Possible
일정 3월 29일까지 장소 성남큐브미술관 기획전시실
스웨덴 대표 초현실주의 작가 에릭 요한슨의 아시아 최초 순회전이다. ‘상상을 찍는 사진작가’라 알려진 그는 여타 초현실주의 사진처럼 단순한 디지털 기반의 합성이 아닌, 작품의 모든 요소를 직접 촬영 후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세계를 한 장의 작품에 담아낸다. 특히 포토샵 기술을 이용한 이미지 조작에 관한 한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번 전시는 어릴 적 상상, 꿈꾸던 미래, 어젯밤 꿈 등 상상력을 주제로 한 4가지 섹션이 마련됐다. 작가의 유명 작품들을 비롯해 세계 최초로 선보이는 신작들, 비하인드 메이킹 필름, 다양한 소품과 설치 작품까지 다채롭게 만날 수 있다.
바쿠의 구도시를 걷다 보면 누군가 옆으로 다가와 근교 일일투어를 권한다. 사실 택시나 대중교통을 이용해 자유여행으로 바쿠의 근교 투어를 하는 건 시간 면에서 비효율적이다. 가격을 좀 깎아달라고 하니 여행사 사무실을 안내해줘 그곳으로 갔다. 결국 1인당 20AZN(한화 약 1만4000원)을 할인받아, 다음 날 4만9000원짜리 일일 투어를 했다.
아침 9시, 구시가지 성문 앞에서 가이드와 각기 다른 나라에서 온 외국인 6명을 만나 일일투어를 시작했다. 준비된 미니버스를 타고 아름다운 카스피해를 바라보며 남쪽으로 한 시간 정도 달려갔다. 고부스탄(Gobustan)에 도착한 뒤에는 대기해 있던 여러 대의 낡은 승용차로 갈아탔다. 왜 차를 바꿔 타야 하는지 이해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곳에서 목적지인 머드 볼케이노(진흙 화산)까지 울퉁불퉁한 비포장 길을 10여 km 더 가야 했기 때문이다. 운전기사는 그 길을 ‘사파리 투어’라 표현했다. 그러나 마케팅 목적으로 그렇게 말하는 것일 뿐 동물 구경은 할 수 없었다. 억지스러웠지만 귀여운 느낌이 들었다. 차창 밖 풍경은 영화에서 봤던 모습과 비슷했다. 미국의 텍사스나 어느 사막 지역처럼 풀 한 포기 제대로 자라지 못하는 척박한 땅이었다.
전 세계 700여 개의 진흙 화산 대부분이 아제르바이잔에 있다고 한다. 그중 일부가 이곳에 있었다. 용암 대신 진흙이 흘러내리는 화산 가까이 다가갔다.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화산 분화구에서 진흙이 끊임없이 부글거리며 기포가 부풀어 올랐다가 터졌다. 피부에 좋은 효과가 있는지 남자 몇 명이 머드팩을 즐기고 있었다.
진흙 화산에 오기 전 미니버스에서 내렸던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선사시대로 여행을 갈 수 있는 관광지가 있다. 200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고부스탄 암각화 문화경관구역’이다. 공원 입구에는 박물관이 있었고, 암각화 구역은 입구에서 1km를 더 가야 했다. 탐방로를 따라 걸으면 넓은 사암지대에 흩어져 있는, 약 5000년에서 2만 년 전에 원시인들이 돌에 그린 그림을 불 수 있다. 지나온 시간의 무게가 주는 중량감 때문에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물 모습, 사냥하는 모습, 바다에서 고기 잡는 모습, 춤추는 모습 등이 실감나게 그려져 있다.
풀, 돌, 바위만으로 구성된 암각화 공원을 본격적으로 탐방하기 전 앞서 가던 가이드가 넓고 평평한 바위를 만나자 갑자기 타악기처럼 두드리기 시작했다. 돌에서 맑은 소리가 났다. 이 지역의 타악기 ‘가발 대시’(Gaval Dash)를 만들 때 사용하는 석재라고 했다.
조로아스터교 사원의 꺼지지 않는 불
불을 접하기 쉬워서 그랬는지 바쿠의 동쪽 외곽에 조로아스터교 성지인 ‘아테시카 사원’(Ateshgah Temple)이 남아 있다. 사원 안에는 470년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꺼지지 않고 타고 있는 불이 있다. 불을 숭배해서 배화교로 알려진 고대 페르시아 종교 조로아스터교. 현재는 신도 통계가 없을 정도로 사라져가는 종교다. 하지만 최근 이슬람 극단주의에 환멸을 느낀 쿠르드족들이 개종하면서 그쪽 지역에서 새롭게 관심을 받고 있다고 한다. 또 얼마 전 한국에서 신드롬을 일으켰던 록 밴드그룹 ‘퀸’의 ‘프레디 머큐리’가 조로아스터교의 후손인 파르시(Parsi) 출신이기도 하다. 수도원이었던 사원 내부는 박물관으로 개조됐다. 방마다 조로아스터교에 대한 설명과 모형, 사진들이 전시돼 있었다. 교세는 미약하지만 조로아스터교를 경험할 수 있는 건 바쿠가 가진 또 하나의 매력이었다.
이외에도 바쿠 외곽에는 불과 관련한 ‘야나르 다그’(Yanar Dag)라는 이름의 불타는 언덕도 있다. 지하에 어마어마한 양의 천연가스가 매장돼 있어 가스가 나오는 분출구에서는 계속 불이 타고 있었다. 그러나 자원 개발로 지하 압력이 내려가 과거에 비해 불꽃이 많이 약해졌다고 한다.
아제르바이잔 여행을 해야 하는 이유
현재와 과거의 절묘한 조화, 손님과 이방인에게 친절한 문화, 동서양의 경계선 위에서 유럽을 향해 있는 도시, 맛있는 음식과 쉽게 친해질 수 있는 사람들. 바쿠 여행을 하면서 받았던 인상이다. 아직 구 소련 치하의 흔적도 남아 있고, 에어컨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 등 여행 인프라가 부족한 면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제르바이잔 관광청이 글로벌 캠페인으로 선정한 ‘기대, 그 이상의 아제르바이잔’(Take Another Look)이라는 캐치프레이즈가 그들 사회에 내재돼 있는 역동성과 경계를 넘나드는 수용의 문화를 잘 표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트빌리시행 야간 특급열차
한여름의 뜨거운 햇볕이 주황빛으로 바뀌면서 나란히 뻗어 있는 녹슨 철길 위로 떨어졌다. 검은색 섞인 파란 하늘이 배경이 될 무렵 그림자도 사라져가는 플랫폼 앞으로 둥근 쇳덩이가 슬며시 발을 들이밀었다. 흰 수증기를 내뿜으며 거친 숨을 내쉴 것만 같은 짙은 암녹색 기차였다. 톨스토이 소설 ‘안나 카레니나’에서 ‘브론스키’와 ‘안나 카레니나’를 운명처럼 만나게 했던 그 기차다. 조지아의 고리 시(市)에 전시돼 있는 스탈린 전용 열차도 같은 색이다. 소설 내용처럼―창 너머로 플랫폼에 서서 기차를 전송하고 있는 사람들이 마치 뒤쪽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을 물끄러미 내다보고 있었다. (…) 규칙적으로 덜커덕덜커덕 흔들리면서 플랫폼을 지나고 (…) 열차는 점점 신나고 매끄럽게 경쾌한 소리를 내며 레일 위를 미끄러져 갔다―그렇게 바쿠와 이별했다.
오래된 열차이지만 2인 1칸인 1등석은 불편한 점이 전혀 없었다. 새것으로 바꾼 하얀 침대 시트가 마음에 들었다. 바쿠를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유전 시추공에서 나오는 가스 때문에 큰 불꽃이 타오르는 공장들이 창밖으로 스쳐지나갔다. 때맞춰 창틀에 올려놓은 스마트폰에서 쇼스타코비치의 재즈 모음곡 2번 ‘왈츠 Ⅱ’가 흘러나왔다. 출발 전 역에서 산 와인으로 영혼을 적셨다. 그렇게 떠나는 아쉬움과 새로운 풍경을 만나러 가는 길의 떨림을 가라앉히며 수없이 꿈꿔왔던 침대열차에서의 밤을 보냈다. 기차는 쉬지 않고 트빌리시를 향해 달려갔다.
저녁 9시에 출발한 기차는 꼬박 12시간을 달려 다음 날 아침 9시경 트빌리시에 도착했다. 도착하기 전 새벽 5시쯤 조지아 입국 절차가 한 차례 있었다. 카메라가 연결된 노트북을 들고 조지아 군인들이 열차로 올라왔다. 입국신고서 작성, 여권 제출, 사진촬영, 그리고 이어진 간단한 가방 검사로 국경 통과 절차가 끝났다. 조지아는 한국 여권 소지자의 경우 무비자로 360일 체류할 수 있는 나라다.
미국 조지아가 아니고 ‘조지아’
“조지아? 미국 조지아?” 이번 여행 목적지는 ‘조지아’라고 하니 주변 사람들의 반응이 한결같았다. 몇몇 사람은 구 소련이 지배하던 시절의 ‘그루지야’는 알고 있었다. 1991년에 독립하면서 국명을 ‘조지아’로 바꿨다고 설명하면 미국과 가까워지고 싶어서 이름이 그러냐는 반응들을 보였다. 정말 그랬는지는 확인하지 않았다. 일반적으로는 ‘농부’를 뜻하는 그리스어 ‘게오르기오스’에서 빌려왔다는 설과 트빌리시의 핫플레이스 ‘자유광장’에 황금동상으로 우뚝 서 있는 조지아 수호성인 ‘성 조지’에서 따왔다는 이야기가 가장 많다.
조지아에는 스위스처럼 아름다운 자연이 있고, 프랑스처럼 풍요로운 와인, 이탈리아처럼 맛있는 음식, 그리고 스페인처럼 정열적인 춤과 음악이 있다.
트빌리시는 재즈다
종착역이 가까워지면서 기차 속도가 느려졌다. 트빌리시는 BC 4세기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해 AD 5세기 말에 조지아의 수도가 된 오래된 도시다. 창문 밖으로 트빌리시의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폐쇄된 기지창에 아무렇게나 방치돼 있는 녹슨 객차와 화차들, 네모반듯한 현대식 건물들이 늘어서 있는 신도시, 트빌리시의 랜드마크인 나리칼라 요새와 ‘조지아 어머니 상’이 있는 구도시가 줄지어 얼굴을 드러냈다. 마치 한 곡의 재즈를 듣는 것 같았다. 이곳 사람들은 ‘재즈적’이라는 단어를 자주 쓴다.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이 연결될 때 주로 사용한다. 그만큼 조지아 사람들은 뭐든 잘 받아들인다. 혼합에 익숙하다. 트빌리시라는 도시도 그랬다. 색소폰의 끈적한 느낌과 와인의 나른한 분위기가 뒤섞여 있는 듯 보였지만 퇴폐적 숨결이 느껴지지는 않는 골목의 모습이 그랬고, 클래식함과 모던함이 서로 뒤엉켜 하나가 된 도시의 풍경이 그랬다.
올드 트빌리시가 보여주는 것들
트빌리시는 도시를 관통하는 ‘므츠바리’(Mtkvari) 강(쿠라 강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을 중심으로 남쪽의 ‘올드 트빌리시’(구도심)와 북쪽으로 나누어진다. 잘 알려진 관광지 대부분이 구도심에 몰려 있어 걸어 다닐 만하다. ‘아블라바리’(Avlabari) 전철역에서 내려 강 언덕에 있는 ‘메테키 교회’(Metekhi Church)로 먼저 갔다. 13세기에 세워진 이 교회는 서른일곱 번이나 다시 지어진 사연으로 수많은 전쟁에 시달렸던 조지아의 얼굴이 됐다. 구 소련 시절에는 감옥과 극장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최근에서야 교회 역할을 하고 있다. 교회 옆에는 수도를 트빌리시로 옮긴 ‘바흐탕 고르가살리’(Vakhtang Gorgasali) 왕의 기마상이 도시를 바라보고 있다.
기마상이 있는 곳에서 북쪽을 보면 물살이 빠르게 흐르는 강 오른쪽으로 ‘리케 공원’(Rike Park)이 있다. 시민과 여행자들에게 은은한 꽃향기로 피로를 풀어주는 곳이다. 강변에는 1200개의 LED 전구가 빛을 내는 ‘평화의 다리’가 있어 므츠바리 강의 밤을 화려하게 장식한다. 2GEL(한화 약 810원)을 내면 ‘메테키 다리’를 건너 므타츠민다 산 정상에 있는 나리칼라 요새까지 케이블카로 올라갈 수 있다.
도시 전체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이 요새는 4세기에 페니키아인들에 의해 세워졌다. 요새 바로 옆 능선에는 왼손엔 와인 잔, 오른손엔 칼을 들고 있는 ‘조지아 어머니 상’이 있다. ‘친구에게는 와인 잔을 건네지만 적에게는 칼을 든다’는 의미로 건국 1500년을 기념해 만든, 높이 20m의 대형 석상이다.
트빌리시를 사랑한 작가들
러시아의 문호들은 조지아를 사랑했다. 막심 고리키는 이곳에서 일하며 처녀작 ‘마카르 추드라’를 썼다. 이때 사용한 필명이 ‘고리키’다. 그는 “코카서스 산맥의 장엄함과 낭만적 기질을 지닌 이곳 사람들 덕분에 방황에서 벗어나 작가가 됐다”고 회고했다. 톨스토이도 이곳에서 주둔군으로 4년을 복무한 후 조지아를 배경으로 몇 편의 소설을 썼다. 푸시킨의 시 제목을 그대로 가져다 쓴 ‘코카서스의 죄수’가 대표적이다. 누구보다도 조지아의 와인과 음식을 사랑한 푸시킨은 대표적인 친조지아 인사였다. 그래서인지 구도심 자유광장 옆에는 ‘푸시킨 공원’이 있다.
구도심 중앙에 위치한 ‘자유광장’은 주변의 아름다운 건축물과 교통의 요충지로 트빌리시의 시작이자 끝이 되는 장소다. 마치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카탈루냐 광장 같은 곳이다. 레닌 동상이 있던 광장 중앙에는 조지아 수호성인 ‘성 조지’의 황금동상이 있다. ‘자유광장’에서부터 ‘루스타벨리 메트로 역’까지 이어지는 거리를 걸었다. 러시아 간섭에 저항하는 조지아인들의 데모가 토요일마다 열리는 국회 앞 광장, 조지아 국립박물관, 루스타벨리 극장, 트빌리시 오페라·발레 극장, 트빌리시 현대미술관들이 이 거리에 있다. 중간중간 보이는 작은 카페와 거리의 화가들 작품이 여행자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트빌리시의 숨결을 애써 들으려 하지 않아도 트빌리시의 과거와 현재의 눈부신 이야기들이 자연스럽게 숨 쉬는 소리가 들린다. 행복했다. 아무리 걸어도 질리지 않는 하염없이 걷고 싶은 길이다
므츠바리 강을 건너는 ‘사브뤼켄’(Saarbruecken) 다리 옆 ‘데대나’(Dedaena) 공원에서는 트빌리시 최대 규모의 벼룩시장이 열린다. 구 소련의 군용 제품에서부터 은식기, 오래된 카세트테이프 등 온갖 물건들이 거래된다.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오랜 세월이 빚어낸 추억의 물건들이 과거를 되돌아보게 한다. 지치지 않고 무언가를 기다리며 살아가는 조지아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찰나에 그들의 얼굴을 스쳐지나가는 희망과 그리움, 설렘도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