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hibition
다빈치 얼라이브: 천재의 공간
일정 2018년 3월 4일까지 장소 용산 전쟁기념관 기획전시실
예술, 과학, 음악, 해부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인류사적 업적을 남긴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생애를 색과 빛, 음향으로 재조명한다. 전시는 ‘르네상스, 다빈치의 세계’, ‘살아있는 다빈치를 만나다’, ‘신비한 미소, 모나리자의 비밀이 열린다’ 등 총 3개의 섹션으로 나뉜다. 제1섹션에서는 실물 크기로 재현한 다빈치의 발명품을 직접 만지고 체험할 수 있다. 이밖에 베네치아에 보관된 ‘비트루비우스의 인체비례도’를 이해하기 쉽게 설명한 영상을 볼 수 있다. 다빈치의 걸작으로 꼽히는 ‘모나리자’에 관심이 있다면 제3섹션을 확인하자. 세계적 미술 감정 기업인 뤼미에르 테크놀로지가 모나리자 원화를 10년간 분석해 밝혀낸 25개의 비밀을 공개한다. 당시의 색감을 그대로 복원해 재현한 진짜 모나리자를 감상해보자.
더 아트 오브 더 브릭
일정 2018년 2월 4일까지 장소 아라아트센터
전시회의 주인공인 네이선 사와야는 세계 최초로 오직 ‘레고’만을 사용해 작품을 만드는 예술가다. 지구본, 전화기 등 아기자기한 생활 소품부터 인체의 다양한 움직임을 표현한 작품까지 약 100만 개의 레고를 사용해 제작한 총 100여 점의 작품을 선보인다. 구스타프 클림트의 ‘연인(키스)’, 에드바르트 뭉크의 ‘절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 오귀스트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등 유명 예술가들의 대표작도 만나볼 수 있다.
전시품 관람 이후엔 레고를 활용해 작품을 직접 만들어보는 체험 공간도 마련되어 있다. ‘디 아트 오브 더 브릭’전은 세계에서 꼭 봐야 하는 10개의 예술 전시 중 하나로 소개되었으며 미국 대통령 빌 클린턴과 버락 오바마로부터 극찬을 받기도 했다.
◇book
나무를 심은 사람 (장 지오노 저·나무생각)
늙은 양치기 엘제아르 부피가 매일 100개의 도토리를 심으며 기적의 이야기를 만들어나간다. 황량했던 언덕이 생기를 되찾고, 말라버린 하천에 물이 흐르기 시작한다. 우리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게 무엇인지, 진정으로 옳다고 믿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무언가를 처음 시도하는 사람의 용기가 얼마나 대단한지를 깨닫게 해준다.
환자 혁명 (조한경 저·에디터)
현직 의사가 기존의 의료 상식에 반기를 들었다. 환자를 향해 ‘자기 병에 더 큰 관심을 가지라’고 잔소리하는 저자는 ‘약과 병원에 의존하지 말고 건강 주권을 회복하라’고 주장한다. 성인병 치료의 열쇠는 환자에게 달려 있다며 스스로 건강을 지킬 수 있는 쉬우면서도 다양한 ‘혁명’을 제시한다.
◇movie
스타워즈: 라스트 제다이
‘스타워즈’ 시리즈가 첫선을 보인 지 40년이 되는 올해 또 하나의 시리즈가 탄생했다. “선과 악의 전쟁, 거대한 운명이 결정된다”는 문구가 눈에 띄는 이번 영화는 비밀의 열쇠를 쥔 ‘레이’를 필두로 ‘핀’, ‘포’ 등 새로운 세대가 중심이 되어 운명을 결정지을 빛과 어둠, 선과 악의 대결을 보여준다.
이번 영화는 ‘레아 공주’ 역으로 얼굴을 알린 캐리 피셔가 지난해 작고하기 전 연기한 시리즈로 그의 마지막 ‘레아 공주’를 감상할 수 있다. 전편에서 감독으로 활약한 J.J. 에이브럼스가 제작에 참여하고 향후 시리즈 3부작 연출이 확정된 라이언 존슨이 연출을 맡았다.
개봉 12월 14일 장르 액션, SF 감독 라이언 존슨 출연 마크 해밀, 캐리 피셔, 아담 드라이버 등
아들에게 가는 길
코다(CODA, 청각장애인의 정상인 아이) 가정의 한 장애인 부부가 아들을 키우면서 겪는 문제를 다룬다. 아들의 미래를 위해 시골 할머니 댁에 보내지만 떨어져 지내는 만큼 아이와의 거리도 멀어진다. 진심으로 다가서려 하는 부모와 자신의 말을 듣지 못하는 부모가 답답한 아이.
자식은 어떤 존재이고 부모는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 묻고 가족 해체가 가속화하고 있는 이 시대에 가족의 소중함을 제대로 느끼게 해준다. 이 영화로 2016년 제17회 장애인영화제에서 우수상, 관객심사단상을 수상한 최위안 감독은 장애인에 대한 인식 개선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개봉 11월 30일 장르 드라마 감독 최위안 출연 김은주, 서성광, 이로운 등
◇stage
빌리 엘리어트
2010년 한국에서 최초로 초연된 뮤지컬 가 7년 만에 다시 한국 무대에 오른다. 1980년대 영국 북부 탄광촌이 배경이다. 복싱 수업 중 우연히 접한 발레를 통해 꿈을 이뤄가는 소년 ‘빌리’의 여정을 보여준다.
장소 디큐브아트센터 일정 2018년 5월 7일까지 연출 스테판 달드리 출연 천우진, 김갑수, 최정원 등
블라인드
시각을 잃은 후 세상과 단절된 청년 ‘루벤’과 몸과 마음이 상처로 가득한 여자 ‘마리’가 만나 마음으로 서로를 느끼며 교감을 해나가는 사랑 이야기다. 오로지 마음으로만 교감하는 둘의 관계를 통해 우리가 진정으로 봐야 하는 본질이 무엇인지 질문하게 만든다.
장소 수현재씨어터 일정 2018년 2월 4일까지 연출 오세혁 출연 박은석, 이재균, 김정민, 정운선 등
거미여인의 키스
남성 2인극으로, 이념이 다른 두 주인공인 몰리나와 발렌틴이 감옥에서 만나 서로를 이해하며 다가가는 슬픈 사랑을 연기한다. 몰리나 역은 배우 이명행과 김호영이, 발렌틴 역은 송용진과 김선호가 지난 공연에 이어 재연을 확정했다.
장소 아트원씨어터 2관 일정 2018년 2월 25일까지 연출 문삼화 출연 이명행, 이이림, 김주헌 등
타이타닉
타이타닉 사건이 발생한 지 105년, 브로드웨이 초연 20년 만에 한국 무대에 상륙한다. 영화가 이 사건의 비극적인 사랑에 집중했다면 영화보다 앞서 제작된 뮤지컬 은 배가 항해하는 5일 동안의 사건과 인물들의 모습을 그려냈다.
장소 샤롯데씨어터 일정 2018년 2월 11일까지 연출 에릭 셰퍼 출연 김용수 왕시명 이상욱 등
국립발레단장을 맡고 변방의 한국 발레를 르네상스 시대로 이끈 최태지의 업적과 지금의 아름다운 모습이 중첩되어 한량 이봉규는 살짝 주눅이 들었다. 한국의 대표 발레리나 최태지와 올해 마지막 데이트를 했다.
1959년생이라는 것이 믿겨지지 않는 가녀린 몸매와 청초하면서 귀족같이 우아한 최태지와 마주하니까 오드리 헵번의 조용하고 아름다운 카리스마가 연상된다. 이봉규의 눈에 포착된 최태지의 기품에 한량도 살짝 주눅이 들었을까? 라운지에서 만나자마자 “왜 그렇게 젊어 보여요?”라고 따져 물었다. 그녀는 “모자라게 살아서 그럴까요?”라며 웃음으로 내쳐버린다. 시작부터 의문의 1패를 당한 꼴이다. 아름다운 외모뿐만 아니라 내공의 깊이까지 느껴진다. 어설픈 한량이 차분하게 분석해보면 아마 평생 발레를 해서 세포조직도 건강하고 정신적으로도 좋은 에너지를 한껏 받아 아직도 아름다운 젊음을 유지하는 것 같다.
정작 본인은 “발레리나 현역 활동에서 은퇴한 후에도 레슨하면서 항상 거울을 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거울 앞에서 젊은 무용수들과 같이 있으면 긴장하기 때문에 자기관리를 자연스럽게 할 수밖에 없다는 의미다. 살이 퍼지게 놔둘 수가 없다는 것. 그녀의 성공은 어쩌면 이 같은 승부근성 때문일 것이다. 내일모레면 육십을 바라보는 나이다. 거울 앞에 선 전성기의 젊은 무용수들을 보며 경쟁심이 우러러 나온다니 부럽기 그지없다.
20년 전에 미국 워싱턴 D.C.에서 발레리나 문훈숙을 인터뷰한 적이 있는데 그때도 뭔지 모를 압박감을 느꼈다. 육십이 되어 최태지와 마주앉으니까 그때보다 몇 배 더 한 발레리나의 기품에 눌리는 것이 감지된다. 국립발레단을 12년간 이끌며 아시아 최고의 발레단으로 성장시킨,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발레리나 출신의 최태지 단장의 업적과 아름답게 나이 먹은 모습이 중첩되어 그럴 것이다. 그녀는 최근 광주시립발레단장에 임명되어 화제가 되고 있다.
‘최태지’ 이름만으로도 발레단이 주목받다
국립발레단장을 역임했던 그녀인지라 관계자들은 조심스럽게 국립발레단과 유니버설발레단으로 양분되는 한국 발레 무대가 광주시립발레단을 포함하는 3강 체제가 될 것임을 전망하기도 한다.
최태지라는 이름만으로 광주시립발레단은 일약 중앙의 두 발레단과 비교 대상으로 언급되기 시작했다는 것. 이로써 최태지·문훈숙·강수진으로 이어지는 세 스타 발레리나 출신 단장들의 대결은 현재진행형이다.
최태지는 1959년 일본 교토에서 태어나 가이타니 발레학교, 프랑스 프랑게티 발레 아카데미, 미국 조프리 발레 스쿨 등에서 발레를 전공했고, 한국인 최초로 로잔국제발레콩쿠르와 모스크바국제발레콩쿠르 심사위원에 위촉되었다. 그야말로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발레를 발전시킨 산 증인이다.
하지만 발레의 명성만큼 그녀의 인생은 화려하지 않았다. 첫 번째 남편과 이혼하고 두 번째 남편과는 사별한 아픔을 간직한 채 살고 있다. 지금은 성장한 두 딸과 함께 주말이면 서울에서 살고 주중에는 혼자 광주의 한 오피스텔에서 지낸다. 실례를 무릅쓰고 어려운 질문을 던졌다. “이혼과 사별 중에 어느 것이 더 아프냐?”고 물으니, 그녀는 “눈물도 안 나올 정도로 사별이 슬펐다”고 대답한다. 발레를 하지 않았으면 견디지 못했을지도 모른다고 부연한다. 사별한 지 5년 정도 되었기에 지금은 상처가 어느 정도 아물었다.
발레 인생도 굴곡이 많았다. 결혼 후 발레를 그만두려고 80kg까지 일부러 살을 찌웠다. 그런데 뉴욕에서 첫 아이를 낳고 산후우울증에 시달리면서 치료를 위해, 그리고 자기 자신을 찾기 위해 발레학원에 등록했다.
국립발레단의 수석 무용수 출신이 뉴욕이라고는 하지만 허름한 대중 발레학원에 수강생으로 등록할 정도로 절실했다.
그렇게 다시 시작한 발레 생활 3~4개월 만에 몸도 마음도 가벼워졌다.
그 후 곧바로 한국에 들어와 국립발레단에 다시 복귀했다. 아이를 낳고 활동한 국내 최초의 발레리나가 되었다. 둘째 아이를 낳고 체중이 또 80kg으로 늘었다. 다시 발레를 시작했다. 발레로부터 도망치고 싶어 그만두면 어느새 또 발레를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발레는 내 운명!”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그녀의 인생은 프랑스어로 세라비(C'est la Vie, 영어로 That is Life) 같다. 중학교 시절 일본에서 한창 발레 연습에 몰두해 있을 때 그녀를 지도했던 선생은 “‘발레의 하느님’이 너를 붙잡으면 평생 도망칠 수 없을 거야!”라고 말했다.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그 말이 생각났다고 고백한다. 그 선생은 일본에서 최초로 ‘백조의 호수’를 공연한 발레리나다.
국립발레단장을 그만두고 4년 남짓 그냥 아줌마로 편하게 살며 나름대로 행복한 삶을 이어가고 있었는데, 광주발레단장을 맡은 것도 아마 ‘발레의 하느님’이 아직도 그녀를 꽉 붙잡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도 공연을 위해 새로운 무대에서 새로운 무대 의상을 입고 공연을 하는 무용수들과 함께 땀을 흘릴 수 있다는 것이 행복할 따름이고 들뜬다. ‘발레의 하나님’이 그녀를 선택해서 붙잡은 것이 아니라 최태지가 발레의 하느님을 먼저 꼭 붙잡고 놓지 않는 건지도 모를 일이다.
막내딸을 한국의 대표 발레리나로 키우고 싶었던 부모님
1970년대 중반 일본에 살 때 어머님과 부산에 있는 할아버지 산소에 갔는데 당시만 해도 한국은 일본에 비해 열악한 환경이었다. 어린 최태지는 상당히 놀랐다고 한다. 그 때문에 오빠들도 “한국에 가서 잘 적응하고 살 수 있을까?” 걱정하며 한국행을 만류했지만 대한민국 국립발레단 무용수가 꿈인 어린 최태지를 막을 수는 없었다. 일본 이름인 ‘오타니 야스에(おたに やすえ)’로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란 최태지가 대한민국 최고의 발레리나가 된 것은 부모님의 강한 의지와 희생 덕분이다.
일본 사회에서 재일교포로 심한 차별을 견디며 살아온 부모님은 무용에 탁월한 소질을 발휘하던 막내딸만큼은 한국의 대표 발레리나로 키우고 싶었다. 아버님은 항상 어린 막내딸에게 “일본에서 왜놈들에게 머리 조아리며 돈을 벌고 있지만 너는 그렇게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겠다”고 울면서 다짐했다. 그래서 일부러 민단이 운영하는 교포 학교에 보내지 않고 일본 학교에서 공부시킨 뒤 프랑스로 발레 유학을 보냈다. 경제 사정이 좋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후 일본 무용계에서 프리마 발레리나로 활약하다 1983년 의 객원 주역으로 초청되면서 국립발레단과 인연을 맺었다.
1987년 국립발레단 프리마 발레리나로 특채되면서 고국에서의 본격적인 활동이 시작됐다. 에서 오데트, 에서 키트리, 에서 에스메랄다, 에서 사탕 요정, 에서 메도라 등 많은 작품에서 출중한 공연으로 발레 팬들의 박수를 받았다. 국립발레단 지도위원을 거쳐 1996년에는 국립발레단장을 맡아 변방의 한국 발레에 르네상스 시대를 열어준 주인공이다. 특히 그녀가 국립발레단장 시절 ‘해설이 있는 발레’와 ‘찾아가는 발레’를 시작할 때만 해도 지나친 대중화라는 비난을 받았지만 지금은 정말 잘한 일이었다고 자타가 공인한다.
발레학교를 만드는 게 꿈
발레리나로서 이 같은 성공은 부모님의 의지와 희생 덕분이지만 막내딸의 강한 독립심이 스스로 이룩한 면도 크다고 볼 수 있다. 오빠들은 나약해서 부모님에게 의지하는 습성이 강했지만 막내딸 최태지는 어릴 때부터 독립심이 강했고 부모의 기대와 사랑도 각별했다. 오빠들은 사업의 어려움으로 부침을 겪으며 재산을 탕진했지만 막내딸인 그녀는 탄탄대로를 달렸다.
부모덕을 본 최태지는 자식 복까지 터졌다. 두 딸들의 사진을 보여주는데 역시 핏줄은 못 속인다. 엄마처럼 얼굴도 예쁘고 승부욕도 강해 잘 자랐다. 첫째(리나·30)는 러시아 보리스 에이프만 발레단의 솔리스트로 활동하다 귀국해 지금은 예고와 대학에서 강의하면서 한양대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중이다. 둘째(세나·28)도 발레를 배우다가 엄마와 언니가 너무 힘들어 보여 뉴욕대에서 경제학을 공부하고 현재 서울대 외교학 석사과정에 있다.
발레리나로서 모든 걸 누린 그녀에게 앞으로의 꿈을 물어봤더니 발레학교를 만드는 것이란다.
“창작발레도 많이 만들어야 하지만 발레학교가 꼭 필요하다. 한국에서 너무 놀란 것은 사교육비가 비싸 발레를 배울 수 있는 사람이 한정돼 있다는 사실이었다. 10세부터 18세까지 다닐 수 있는 학교가 있어야 한다. 세계적으로 봐도 발레단보다 국립발레학교가 먼저 생긴다. 한국은 거꾸로다. 기숙사가 있는 학교에서 일반 교육과 발레 교육을 받으며 중·고교 과정을 거친 뒤 전문 발레단에 입단하거나 대학에도 갈 수 있는 그런 학교가 필요하다.”
그녀의 꿈이 우리 사회의 꿈이다.
세상 다양한 무용 중 가장 범접하기 어려운 장르가 발레 아닐까? 단단하게 몸의 중심을 잡고 팔과 다리를 뻗는 화려한 동작들. 이미 굳어버린 내 몸은 허락하지 않을 듯싶다. 발레를 주제로 한 예능 프로그램이 전파를 타면서 관심이 가지만 유독 전문가에게만 허락된 듯한 느낌은 떨칠 수 없다. 이에 과감하게 발레 무대에 도전장을 내민 시민들을 만나봤다. 올해로 다섯 번째로 모인 과천 시민발레단이다. 나이와 몸무게쯤은 싹 다 잊고 화려한 춤사위에 몸을 맡겨볼까?
발레 슈즈를 신고 사뿐히 자세를 잡다
매주 화요일 7시, 과천시설관리공단 상주 단체인 서울발레시어터(단장 나인호)의 연습실.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 거울 앞에 선다. 이들은 지난 6월 초 공개 오디션을 통해 선발된 과천 시민발레 5기 단원들. 비전공자와 비전문가로 구성된 이들은 11월로 다가온 공연 준비에 한창이었다. 평생 한 번일지도 모를 발레 공연을 위해 선생님의 구령에 귀 기울이고 동작을 맞추는 모습이 진지하다. 4개월여 짧은 연습기간이지만 등을 타고 흘러내리는 땀방울을 보니 꽤 발레리나·발레리노 느낌이 난다. 과천 시민발레단은 2013년부터 공연을 시작했다. 서울발레시어터의 전문 발레 공연에 시민발레단이 잠깐 출연한 것이 첫 무대였다고. 이듬해부터는 시민발레단 전 단원이 올라가 무대를 꾸미는 형식으로 바뀌어 지금에 이르렀다. 과천 시민발레단의 김치훈 강사는 특히 이번 공연이 시민 발레가 한 걸음 더 나아가는 도전의 무대라고 귀띔했다.
“지난 2회부터 작년까지 7분에서 길게는 9분 정도로 작품을 짧게 만들어 공연을 올렸어요. 그런데 올해는 1막 2장을 무대에 올립니다. 저희도 도전을 해보는 거예요.”
는 발레 작품 중에서도 어려운 작품에 속한다. 차후 시민발레단을 어떻게 꾸려나갈지 알 수 있는 중요한 시험 무대라고 했다.
“시민발레단원은 매년 바뀌니까 새로울지 모르지만 저희는 아니잖아요. 매번 좋은 방향을 찾고 연구하려고 애씁니다. 음악은 같지만, 구성이나 돌아가는 패턴을 조금 다르게 구성하고 있어요. 그렇다고 모든 동작이 새로운 것은 아니고 한 50% 이상을 새로운 동작으로 꾸몄습니다. 기본 틀은 두되 쉽게요.”
무대에 오르는 그날까지 하나, 둘, 셋, 넷!
일생 한 번뿐일지 모를 기회이자 도전이라는 생각 때문일까? 이들의 연습시간은 끝날 줄 모른다. 재미있게 발레 연습에 임하는 것은 기본이고 밤 10시를 넘기면서 개인 연습을 하는 단원도 쉽게 찾을 수 있다. 같은 동작을 하는 팀끼리 모여 발과 선, 동작을 맞춘다. 심지어 지난 추석 때도 모여 연습을 감행한 열혈 단원도 있었다고.
“매 기수는 네이버 밴드에서도 소통하는데 단원들끼리 너무 잘 뭉쳐서 따로 관리할 필요가 없어요. 서로 필요한 음악이나 영상 자료도 올려주고 말입니다. 열의가 대단하세요. 미리 와서 연습하고 나머지 연습도 쉬지 않으시는 것 같아요.”
아이들의 뒷바라지, 직장에서의 쳇바퀴 같은 삶을 잠시 잊고 난생처음 무대 위에 오르는 시민들의 신선한 도전이 아름답다. 공연은 11월 18일 오후 5시 과천시민회관 소극장에서 열린다.
mini interview
유일한 남자 단원입니다 (배상운·44·푸르덴셜생명 강남지점)
사실 어렸을 때 개그맨이 꿈이었어요. 초등학교 때부터 학예회 같은 데 나가서 사람들 웃기는 것도 좋아했어요. 옷도 남들이랑 다르게 멋지게 입으려고도 했고요. 그런데 제가 아이스하키 선수 생활을 했는데 한 가지라도 잘하는 게 좋아서 동기 중에서 운동을 가장 오래했습니다. 지금까지 했던 운동보다 좀 더 예술적인 것을 배워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발레에 도전했습니다. 운동할 때는 남자가 무슨 발레냐고 했는데 정말 해보니까 체형이 달라져요. 다리도 사실 잘 안 붙었는데 제 나이에도 교정이 되더라고요. 그리고 마침 유일한 남자 단원이라 남자 주인공 역할을 맡았어요. 책임이 막중합니다. 잘 안 되는 부분이 정말 많은데 최선을 다해보려고 영상을 계속해서 봅니다. 발레는 예술적인 면도 있고 확실히 운동으로서도 좋은 것 같아요, 기회가 되면 꾸준히 하고 싶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도 권하고 싶어요.
초등4학년 때 느낌 그대로 (이수자·54·과천맑은물사업소장)
과천 시민발레단이 생겼다기에 예전부터 생각이 있었어요. 3기, 4기 때도 마음엔 있었는데 ‘내가 뭘 나가’ 이러다가 5기 때 신청했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발레를 좀 배워 발레 대회도 나갔었어요. 그 이후 처음 이렇게 하는 겁니다. 사실 과천시청 직장인 바이올린 동아리 회장을 14년 동안 하고 있어요. 저는 칩거형이라 책보고 숨 쉬는 거밖에 안 해요. 그래도 공무원이다 보니 어쨌든 시민들과 함께할 수 있는 프로그램에도 참여하고 건강도 챙기고요. 그래서 시민발레단원이 됐습니다. 오디션 당일에는 시장님 모시고 하는 큰 행사가 있어서 올해도 아닌가보다 했는데 시장님이 ‘어서 오디션 보러 가라’고 해주셔서 조금 늦게 도착해서 오디션을 봤어요. 10개의 동작을 하는데 정말 앞에 분 따라 하느라고 힘들었습니다(웃음). 저 불쌍해서 뽑아주신 것 같아요. 시민발레단원이 된 이후 다들 발레 잘하고 있냐고 물어보는 통에 열심히 하려고 노력은 하고 있습니다. 마침 시민발레단이 끝나면 아카데미를 운영한다고 해서 쭉 발레를 하고 싶어요. 서울발레시어터가 과천에 있는 게 소중하다는 걸 새삼 깨닫고 있습니다.
아침 6시 40분 부산행 무궁화호 열차에 몸을 실었다. 덜컹덜컹 몸이 흔들린다. 바깥 풍경은 오랜만에 선명히 잘도 보인다. 세련되지 않지만 뭔가 여유롭고 따뜻한 느낌이랄까? 한국 예술인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부산포 주모(酒母) 이행자(李幸子·71)씨를 만나러 가는 길. 옛 추억으로 젖어들기에 앞서 느릿느릿 기차 여행이 새삼 낭만적이다. 한껏 기대에 부풀어 들어간 부산포. 작은 낙서, 그림 하나, 스치는 공기까지 어느 것 하나 특별하지 않은 것이 없다.
부산의 마지막 주모를 만나다
부산 지하철 1호선 중앙역에서 용두산 공원 방향으로 걸어가는 길은 깨끗하고 단정하다. 신식으로 잘 닦인 거리. 오래된 주점을 찾아 두리번거리다 오른쪽으로 난 작은 골목에 釜山浦(부산포)라고 쓰인 간판이 보인다. 이곳에 우리나라 예술인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아온 주모 이행자씨가 있다. 깡마른 체구에 걸걸한 목소리가 매력적인 이행자씨는 중앙동 바로 옆 동광동에서만 42년째 주모로 살고 있다. 혹자는 이행자씨를 부산의 마지막 주모라고 말한다. 남들 다 떠나갈 때 그 자리를 지키고 앉아 옛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주막은 현재 부산포 하나다. 의미를 모르면 동네 흔하디흔한 주막, 조금만 마음을 열고 귀를 기울이면 세상 그 어느 것보다 값진 역사와 예술가의 정이 흐르는 곳, 부산포다.
주막의 분위기는 주모가 잡는다
부산의 중앙동과 남포동 일대는 10여 년 전만 해도 부산의 굵직한 화랑들과 함께 인쇄 골목이 형성돼 있어 문인과 화가들이 넘쳐나는 이른바 예술의 거리였다. 지금은 해운대 일대로 예술 관련 사업이 옮겨가 작가들의 발길이 뜸해진 지 오래다. 외딴섬처럼 덩그러니 남겨진 부산포지만 그 안에는 옛 예술가들의 체취와 발자취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낙서 하나하나, 벽에 펜으로 휘갈긴 듯 그린 그림 속 인물은 한국 문단과 화단을 주름잡던 일류 작가군단이다. 매일 문지방이 닳도록 부산포를 오간 문화 예술인만 수백은 될 것 같다. 부산포 주모 이행자씨가 이토록 작가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가 뭘까?
“내 고집대로 한 거지 뭐. (화장) 진하게 하고 나와서 하하 호호 하는 꼴을 내가 못 봐. 그러니까 손님은 없어. 옛날이야 줄 섰지만. 내 성질이 개떡 같아. 손님들도 내쫓아요. 욕하는 사람, 슬리퍼 신고 오는 사람 다 쫓아내. 슬리퍼는 점심에 밥 먹을 때는 괜찮은데 저녁엔 옛날 어르신들 계시고 이라니까. 분위기도 내가 만들어주는 거지. 그냥 손님들이 만드는 게 아니야. 그래서 뺨때기도 때리고 젊을 때는 말 못해. 마대자루 들고 패지, 물바가지로 퍼붓지. 소문이 났어. 좋게 날 리가 없지.”
베테랑 주모의 애틋한 고객 관리(?)는 바로 어르신들을 제대로 알아보고 보살피는 게 전부였다. 이행자씨가 말하는 그 어르신들이란 1900~1920년생 한국 예술계 전설적 인물이 줄을 잇는다. 독립운동가이자 예술인 먼구름 한형석을 비롯해 오제봉, 김정한, 김종식, 오영재, 천재동, 공초 오상순, 하인두, 시인 구상까지 평생을 살아도 만나 뵙지 못할 귀한 인물들을 주모로서 극진히 맞이했고 술동무로 가시는 날까지 정성을 다해 모셨다. 손님을 가려서 받게 된 것도 문화계 원로 선생님을 모시는 일종의 방법이었다.
“손님들이 이상한 행동 하는 꼴을 내가 못 봐. 들어왔는데 뭔가 느낌 이상한 사람이 들어오면 장사 안 한다고 하고, 소주 보여도 소주 없다고 하고. 보면 알지. 매너가 엉망인 사람이 보인다고. 술 먹고 변할 사람들도 보이고.”
그런데 이행자씨에게는 철칙 하나가 있다. 절대 욕은 안 한다.
“내는 고함은 지르는데 욕은 하지 않아. 근데 누가 나더러 욕쟁이 할머니래. 와? 내가 욕하는 거 봤나. 내가 욕하면 쫓아내는데. 욕하는 사람이 나는 제일로 혐오스럽다. 나도 욕할 줄 알거든. 그런데 안 할 뿐이야.”
누부야 누부야 그냥 갈 수 없잖아展
이행자씨는 서른 초반이던 1970년대 말 ‘대구집’으로 문을 열었다. ‘골목집’이란 이름을 지나 1994년 지금의 부산포로 주막 간판을 바꿨지만 주모도 그대로 추억도 그대로다. 그렇다고 마냥 행복한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2003년에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몸에 이상신호가 왔다. 일생일대의 위기였다.
“믿고 지냈던 사람에게 보증을 서줬다가 건물이고 가게고 순식간에… 30여 년 동안 차곡차곡 쌓아온 것을 한 번에 다 날렸으니 난 어땠겠어.”
며칠씩 잠도 안 자고 하루 종일 담배만 3갑씩 피웠다.
“1세대 선생님들은 동동주하고 맥주하고 타서 ‘동맥’이라고 하시면서 섞어 드셨다 아이가. 그게 맛이 괜찮아. 30~40대부터 그렇게 술을 먹었는데 일 터지고 한 달 내내 그렇게 마셨어. 돈이고 뭐고 다 귀찮고. 술도 안 받는데 계속 그렇게 먹었어. 결국 몸이 고장 난 기지.”
안색이 점점 어두워지더니 한 달도 안 돼 치아가 빠지기 시작했다. 위암 초기였다. 그때 이후로 술은 끊었지만 담배는 손에서 떼지 못했다. 그렇게 쓰러진 주모 이행자를 위해 부산 예술인들을 주축으로 대단한 일이 벌어졌다. 판화가 주정이가 주축이 돼 주모 이행자씨를 돕는 특별전을 펼친 것. 그게 바로 ‘누부야 누부야 그냥 갈 수 없잖아展’(2009. 7. 14~8. 31)이었다.
“옛날 1세대 어른들을 내가 잘 모셨어. 부산포를 살려야 한다 그라셔서 살려주신 거지. 대학에 있는 분들도 있지만 대부분 전업 작가들이시고. 정말 십시일반 해서 도와주셨어. 부산비엔날레 운영위원장 하시던 이두식 선생님도 돌아가시기 전에 작품을 내주셨고.”
이 전시회를 통해서 3000만원이 훨씬 넘는 자금이 모였다. 그래서 현재의 부산포 자리로 옮겨 명맥을 다시 이어갈 수 있었다. 새로운 곳으로 이전해 다시 활기차게 생활을 하지만 몸은 성한 곳이 없다. 예전에는 일하는 사람을 뒀지만 지금은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다 주모 이행자씨의 손을 거친다. 이렇게 한 것이 6년째. 손가락에는 류마티스가 왔고 복숭아뼈 양쪽에 물이 차 추석쯤 병원에 가 치료를 받을 생각이다. 위암 정기검진을 받아야 할 시기가 지났는데도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
“나는 지금 병원에 가면 눕혀서 못 나와. 병원 가면 문 닫아야 해. 그래서 안 간다 아이가. 한 1년 넘었어. 병원에서 전화 오면 ‘괜찮소. 나 아직 빨딱거리고 잘 돌아다니거든’ 이런다(웃음)! 약만 먹고 안 간다.”
젊었을 때부터 그렇게 좋아하던 산도 다리가 좋지 않아 갈 수 없다. 지리산이고 설악산이고 선생님들과 많이 오르고 종주도 했다.
“그 대신에 용두산 공원은 좀 걸어. 시간 있으면 올라가. 이제 아픈 것도 모르겠어. 이러다 병도 친구 삼아서 함께 같이 있다가 같이 죽자 한다(웃음).”
부산포 주모, 문화계 원로와 어깨를 나란히
“그림 작품 같은 거 잘 보시겠어요?”
이 질문에 피식 웃으면서 짧게 대답한다.
“살다 보면 눈에 보이지 뭐. 세월이 40년인데 좀 안 보이겠어?”
문화계 원로에 대한 얘기를 듣다 보니 주막 주모가 아니라 화랑 관장님과의 대화라 해도 믿을 것 같다. 이행자씨도 그런 얘기를 여러 사람에게 들었다. 주모가 아니라고.
“많이 배우지. 좋은 얘기를 많이 듣고 해서 가끔 보면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입으로만 떠드는 사람들도 보여. 자기 스스로 공부한 것이 아니라… 시인들한테도 이게 시냐? 편지 썼냐? 그런다(웃음).”
문화계 인사는 물론 방송국, 신문사 등 언론인, 대학 총장, 의사 등등이 주모 이행자씨의 고객이자 친구, 모시는 선생님들이었다.
“여행도 그런 분들이랑 많이 다녔어. 1993년도에 러시아에 갔었는데 그때만 해도 러시아 가는 게 쉽지 않을 때잖아. 근데도 갔었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발레 을 봤는데 정말 너무 잘 봤어. 진짜 값진 인생 살았다. 돈 주고도 못 사는 삶을 살았어. 결혼? 안 해도 돼. 외로워? 뭣 때문에 외롭노?”
결국 이 특별한 주모는 선생님들의 사랑에 부족함을 느끼지 못했고 일평생 결혼은 생각해본 적이 없다.
“나는 안 갔어. 그때 당시만 해도 희귀동물 같은 사람이었어. 드레스를 입고 싶다거나 하는 생각 해본 적이 없어.”
행여나 프러포즈를 해오고 연애하자는 자가 있으면 이행자씨한테 걷어차이기 일쑤였다.
“내가 깡패가 됐잖아. 우리 집에 옛날에 왔던 손님들, 어르신들 빼고 내 발로 팔꿈치로 안 차여본 사람이 없다. 어른들 말고는 다 맞았을 거다. 하도 집적거리니까.”
이행자씨는 어떤 누구를 만나는 것보다 매일 찾아오는 어르신과 대화하고 이야기 듣는 그 시간을 기다리고 사랑했다. 나름대로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대가라는 사람들이랑 대화라도 하려면 내가 얼마나 노력하고 신경 써야겠어. 아닌데도 맞다고 해줘야 하고 달래줘야지. 문인들이 아주 잘 삐진다. 붙어 싸우다 술 먹으면 또 화해하고 그랬다.”
당시에는 거의 가족이었다. 옛날 1세대 어르신들이 한창 부산포에 드나들 때는 젊은 사람들은 들어와 앉을 자리도 없었다.
“그 시절에는 흥이 나서 놀다 누군가 지명하면 무조건 노래를 불러야 했어. 근데 절대로 젓가락 숟가락 못 두드리게 했다. 여기는 그냥 막걸리집 아니라고 절대 못하게 했다. 끝나면 박수치고 흥 나면 소리 안 나게 박수쳤지.”
이렇게 부산포 안을 가득 채우는 작가들이 많았지만 지금처럼 정확하게 돈을 받을 수 없을 때였다. 가난한 시절 라면값도 없던 분들이 많았다.
“대학교수도 있었지만 작품 활동만 하는 사람들도 있잖아. 그래서 그때부터 감자 주고 우거지 주고 그럼 술 마시고 잡숫고 그냥 가셨다. 어른들이라 외상값 장부도 없었다.”
그냥 술만 팔면 될 텐데 스스로 예술가의 가치를 흠뻑 느꼈기에 정성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다르다고 했잖아. 요즘은 택도 없다(웃음). 주는 만큼 받아야지.”
주막이니까 주모로 불러야지
지금도 주모로 부르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이모로 불리는 건 싫다. 누군가 무심코 그렇게 부르면 “내가 느그 이모도 아닌데 왜 그리 부르노!” 하며 부산 사투리가 강하게 터져 나온다.
주모라고 불리는 게 그럼 왜 좋을까?
“옛날에 동동주 팔고 그러던 곳을 주막이라고 했잖아? 어르신들이 있었던 곳. 그러니까 주모지. 원래 여기 세 집이 있었는데 지금은 이거 하나 남았어. 강나루는 시인 마누라가 하는 곳이었는데 거기도 어려울 때 시인들이 시화전도 열어주고 했던 곳이야.”
그렇다고 모두가 주모라고 부를 수 있는 게 아니다. 적어도 부산 사진의 역사라고 불리는 김탁돈(동아대 전 신문방송학과 교수) 정도는 돼야 부를 수 있단다.
“내가 올해 일흔두 살이니까 한 10년 더 살면 될까?”
갑작스러웠다. 아직도 젊고 생생한 주모의 입에서 그리움이 느껴졌다.
“어른들 참 많이 모셨지. 부산 세관장, TBC 사장, 대학 총장, 회장. 안 온 사람이 없어. 근데 이제 다 돌아가셨다. 나도 선생님들 따라갈 때가 얼마 남지 않았네. 지금도 선생님들 모여서 동맥 한잔씩들 하시겠지?”
부산포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에게 물려주고 싶은데 아직 물색 중이라고 했다. 술 팔고 밥 팔면서 예술을 하는 사람이 이 자리를 지켰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리고 정말 부산포를 다 접고 나면 뭘 하고 싶은지 물었다.
“옛날에 건물 있을 때는 시골 들어가 살려고 했는데 그건 안 되겠고. 슬슬 산책하고 살 수 있을까 몰라. 성질이 급해서 뭘 할는지. 뭐 일하면서 살겠지.”
영화 는 몇 번을 봐도 재미있다. 다 아는 내용인데도 지루하지 않다. 포레스트 검프로 나오는 톰 행크스가 천연덕스럽게 바보 연기를 하는 것도 재미있다.
이 영화에 포레스트 검프가 사랑하는 여자, 제니가 나온다. 어렸을 때부터 끼가 많아 발레도 하고 기타 치며 노래도 하고 운동권에도 들어가서 활동하는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여자이다. 포레스트는 그녀와 어릴 때부터 가깝게 지냈고 첫사랑이었지만, 그녀를 잡지 못한다.
살면서 몇 번을 다시 만나지만, 그녀는 떠난다. 포레스트의 아이를 임신하고도 연락도 안 했다. 나중에 다시 포레스트에게 돌아온다. 돌아온 탕자이다. 알 수 없는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곧 죽을 운명이다. 결국 제니는 포레스트의 아들을 남기고 포레스트의 품에 안겨 편안히 세상을 떠난다. 포레스트는 어린 시절 제니와 자주 가서 놀던 자기 집 큰 나무 밑에 제니의 무덤을 만들어준다. 가장 바람직한 죽음이다.
제니와 포레스트의 사랑을 보면 제니는 사람들 앞에서 기타 치며 노래하고 갈채 받기 좋아하는 스타일이다. 포레스트는 좋은 사람이지만, 남자로서의 매력도, 짜릿한 삶의 재미도 없는 사람이라 인생을 같이 할 사람으로 치지 않는다. 그러나 말년에는 변함없이 자기를 사랑해주는 포레스트에게 돌아온다.
남녀의 사랑과 결합은 참으로 미묘하다. 한 사람은 좋아하는데 다른 한 사람은 그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 부 조합 때문에 마음 아파하는 사람들은 수없이 많다.
포레스트는 사람은 운명대로 살아야 하는 건지, 바람에 뒹구는 낙엽처럼 살아야 하는지 갈등한다. 둘 다 맞는다고 결론짓는다. 제니는 운명은 개척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여러 분야에 도전하고 인생을 만끽한 사람이다. 인생은 현재에서 즐기는 것이 가장 남는 것이라며 살았다. 자기 할 것 다 하고 그랬는데도 다행히 기다려준 포레스트가 있어서 행복한 사람이다.
평범한 남자들은 대부분 포레스트 스타일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지만, 극소수이고 대부분은 기다리는 스타일이다. 잘 난 여자를 잡을 능력이 없다. 잘 난 여자는 주변에 남자들이 들끓어 그 치열한 경쟁을 뚫고 그녀를 쟁취할 자신이 없는 것이다. 잘 난 여자는 그런 것을 즐긴다.
남들은 댄스 계가 화려하다고 보고 있지만, 댄스 계도 마찬가지로 부조화가 심하게 나타나는 세계이다. 예쁘고 몸매 좋고 춤 잘 추는 여자는 제니 스타일이다. 남자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고 있어 그것을 즐기거나 잘난 남자가 채 가서 독점한다. 나머지 남자들은 포레스트 신세이다.
그렇다면 남자들은 어떨까? 춤 잘 추고 화려한 경력까지 갖추고 있으면 주변의 인기가 높다. 늘 여자들이 들끓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한 여자에게 국한하면 다른 여자들은 외면한다. 그래서 불가근불가원 하는 것이다. 물론 좋은 여자를 만났다면 올인 해야 한다. 그러나 가능성은 희박하다. 여자가 볼 때 남들 앞에서 춤 잘 추고 노래 잘 부르고 인기 있는 것은 좋지만, 막상 반려자로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제니 같은 남자로 보는 것이다. 미국도 아니고 한국에서는 제니 같은 여자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수만 가지의 수를 내다보고 절대 실패하지 않는 삶을 사는 알파고형 인간을 만났다. 계획적이면서도 일정하다. 돌다리는 두드려볼 생각 없이 잘 닦여진 길을 선택해왔다는 사람. 수학이나 과학자를 만나러 갔더라면 대충 짐작이라도 했을 텐데. 그의 직업은 음악 칼럼니스트다. 음악과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천국 무지크바움 대표이자 음악 칼럼니스트 유형종(劉亨鐘·56)을 만났다. 인생역전 드라마만 재밌다는 편견은 접으시고, 유형종 대표의 기막힌 인생설계 이야기에 귀 기울여보시라.
클래식 놀이터 주인장 유형종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찾는 놀이터(?) 무지크바움의 주인장인 유형종 대표. 그는 클래식 예술 관련 칼럼니스트로, 예술을 강의하는 강연자로서 삶을 살아간다. 압구정역 근처에 자리하고 있는 무지크바움에서는 요일마다 오페라, 클래식, 발레 감상 동호회 모임을 비롯해 음악과 관련한 각종 강연이 이뤄지고 있다. 클래식 음악을 찾아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늘 유형종 대표와 눈을 맞추고 알고 싶은 것들에 대해 이야기 나눌 수 있다.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대화를 나눠야 하는 직업 특성 때문일까? 유형종 대표는 사람들과 잘 어울리고 활발할 거라 생각했는데 정작 만나서 한다는 말이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든다.
“저는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 좀 폐쇄적이죠. 그런데 여기는 클래식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라 좋아요. 욕심 같은 거 별로 없어요. 그저 저의 기쁨을 위해 살아가는데 그 원천이 음악? 클래식인 거죠.”
자발적 은둔형 외톨이의 삶을 택하다
유형종 대표는 주로 오페라와 발레 등 서양 예술의 결정체와도 같은 분야를 전문으로 글을 쓴다. 역사적으로 사교계와도 친밀한 예술이 오페라와 발레 아닌가. 그런데 그가 클래식 음악에 눈뜬 이유가 기가 막히게 남다르다.
“제가 남들 하는 걸 안 해요(웃음). 가령 카카오톡도 안 합니다. 중학교 때는 친구들이 영어공부한다며 팝송을 듣더라고요. 저는 그때 팝송이랑 대중가요 대신 클래식 음악만 듣겠다고 결정했죠.”
마침 집에는 어머니가 가지고 계셨던 클래식 음반들이 여러 장 있었다. 그중에 기억에 남는 것이 바로 아르투로 토스카니니(1867~1957)가 지휘한 푸치니의 라 보엠(La Bohe‵me)과 베르디의 아이다(Aida)였다.
“그거 말고 몇 장 더 있었는데 기억에 남는 것은 ‘토스카니니’라고 적혀진 음반들과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입니다. 그게 제 인생 첫 음반인 거죠. 중학교 들어가서 오페라 음반을 사기 시작하면서 ‘내 취미는 음악이야!’라고 생각했어요.”
친구들과 노는 것보다 집 안에서 혼자 노는 것을 좋아했던 유형종 대표는 다행히 네 살 터울의 동생과 죽이 잘 맞았다.
“동생이 동아일보 유윤종 기자입니다. 음악이나 문화 쪽으로 저보다 유명할걸요? 둘이 집에서 뭐했냐면 클래식 음악 모음집 15곡을 쭉 듣고 난 다음에 점수를 매겨요. 그러고는 둘이 합산해서 종합 1위를 뽑는 거죠. 그리고 한 달 있다가 또 해요. 순위가 바뀌었는지 확인하는 게 우리 형제의 놀이였습니다.”
클래식 음악만큼 발레의 매력에도 빠져버렸다. 1984년 빈 국립 발레단(오스트리아)과 내한한 러시아 발레리노 루돌프 누레예프의 춤사위를 보는 순간 마치 신이 춤추는 것 같았다. 남자가 무슨 발레냐고 하던 시절이었지만 그렇게 자신만의 세상에서 기쁨을 만끽하고 살아왔다.
“그래서 그런지 저는 팝송이 싫어요. 뮤지컬도요. 그냥 내가 좋아하는 오페라와 발레를 감상하고 이것에 관심 있는 사람들과 사는 게 재밌습니다.”
내 인생의 원동력은 확률과 통계
클래식을 듣고 오페라를 감상하는 취미는 끝이 없었다. 잠시나마 꿈꿨던 음악대 진학을 접고 상경대를 선택했다.
“성악을 전공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어머니가 저는 체력도 약하고 성공할 것 같지 않다고 말씀해주시더군요. 여러 가지 생각을 했죠. 나는 튼튼하지 않으니 애호가로 사는 게 더 행복할 수 있겠다 생각했죠. 그런데 어머니 앞에서는 삐져서 다시는 노래를 부르지 않았습니다(웃음).”
음대 포기의 이유에 맏이라는 가정 안에서 위치도 작용했다. 역사학도 좋았지만 맏이면 당연히 돈 벌어야 한다는 생각에 일찌감치 상경대 진학을 생각했다. 어린 나이에 도전 한 번 안 해보고 너무 빨리 포기한 것 아니냐고 물었더니 자신은 이상을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
“저는 경영학을 전공했어요. 수를 좋아했죠. 경영학에도 회계학이 있는데 그것도 재밌었고요. 회사에서도 기획 재무 쪽 일을 했어요. 고등학교 때 미적분은 좋아하지 않았지만 확률과 통계는 아주 좋아했어요. 그래서 제 모든 생활 전반이 확률 통계적 사고로 돌아갑니다. 성악을 선택하지 않은 것도 그렇습니다.”
유형종 대표는 음악대학에서 음악사 수업 외에 공부를 더 해보겠다는 생각으로 화성악 청강을 해봤다. 그런데 음대생의 영역을 따라갈 수 없다는 것을 그때서야 알았다고 한다.
“음대생이 전공하는 영역은 음악 애호가로서 확률과 통계적으로 좇아갈 수 없는 영역이었어요. 저는 예술가 기질은 없어요.”
무모한 짓은 안 하고 평생을 살았다는 유형종 대표. 굉장히 좋아 보여도 무엇을 희생해야 한다면 하지 않았다. 목적지향, 확률통계. 이런 것을 고려해서 원칙을 세우고 의사결정하는 것이 습관화됐다고 말한다.
“대신 재미가 없죠. 어떤 사람들은 저보고 냉소적이라더군요.”
취미가 인생의 큰 그림이 되다
경영학과에 들어간 뒤 공부보다는 음악감상 동아리에서 살다시피 했다.
“그때는 클래식을 듣는 음악감상 동아리의 규모가 꽤 컸습니다. 지금과 비교도 안 됩니다. 동아리에서 음악감상실을 운영했기 때문에 DJ 활동을 의무적으로 했어요. 감상실에서 트는 곡목을 칠판에다 적는 것도 일이었습니다.”
물론 감상실에 들어오는 사람들의 절반이 숙면에 들기는 했지만 감상실 운영으로 동아리를 유지했다. 가을에 열리는 교내 합창대회는 음악감상에 방해돼 싫었다.
“합창 시즌만 끝나면 속속 커플들이 탄생했어요. 헤어지면 커플이 동시에 탈퇴를 하니까 동아리 모습이 말이 아니었죠. 연애금지령도 있었는데 저는 철저히 그 법칙을 따랐습니다(웃음).”
대단한 모험을 즐기지 않고 확률과 통계를 바탕으로 살아왔다는 유형종 대표. 그는 대학생활 이후에도 나름 순탄했다고 말한다. 1987년 첫 직장인 대우증권에 입사해 2006년 한국신용보증보험의 임원으로 20년 직장생활을 마무리할 때까지 그는 영락없는 금융인의 모습으로 인정을 받아왔다. 칼럼니스트로서의 이중생활도 멋지게 즐겼다.
“졸업 후에 동호회 후배들이 창립기념일 문집을 만들 때 저에게 의뢰하기에 글을 쓰게 됐고, 1995년부터 잡지에 정식으로 음악 칼럼을 쓰기 시작했어요. 음악감상 동아리 후배인 의 기자가 저를 칼럼니스트로 추천했어요. 그때부터 음악 칼럼니스트라는 직함을 얻게 됐습니다.”
금융업계에서 대리, 과장으로 승진하는 동안 업무와 야근으로 음악회는 꿈도 못 꿨다. 대신 음반을 들으며 아쉬움을 달랬다. 매달 밀려오는 잡지사 음악 칼럼을 쓰는 작업도 일상의 큰 업무(?)였다.
“금융회사는 아침 8시가 되면 일을 시작해요. 저는 6시 반에 출근을 했어요. 부서장님이 저더러 부지런하다고 칭찬하셨는데 오해죠. 저는 글을 쓰기 위해 회사에 빨리 간 것이잖아요.”
한 달에 한 번씩 월간지에 기고를 하고 짬짬이 공연 프로그램 글도 썼다.
“그런데 어떤 계기로 제가 하는 다른 일에 대해 사장님이 알게 되셨어요. 표정이 좋지 않더라고요. 임원이 그런 일 하는 것을 몰라서 언짢으셨을 겁니다.”
진짜 인생의 문을 열다
유형종 대표는 2003년 은퇴를 준비해야 할 시기가 왔다고 느꼈다. 회사에서 돌아가는 분위기를 보니 딱 3년이란 시간이 남아 있었다.
“회사에서 나와야 한다는 것을 확률적으로 알고 있었어요. 다른 회사로 가느냐 아니면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느냐 선택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나의 즐거움을 희생해서까지 돈을 벌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클래식 음악 해설가로 살기 위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지금까지 해오던 일이었지만 좀 더 밀도 있는 공부를 하며 강의자료를 준비했다. 연재하던 글을 모아 은퇴 시기에 맞춰 단행본 출간을 계획했다. 결국 2006년 9월 은퇴, 12월 1권과 2권(시공사) 출간. 꽤 멋진 은퇴 작전이 성공했다. 20년 남짓의 넥타이 삶을 청산하고 난 유형종 대표는 무지크바움에서 음악과 예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칼럼을 쓰고 외부 강의를 하면서 여전히 음악에 파묻혀 살고 있다. 올해 우리 나이로 쉰일곱인 유형종 대표는 스스로 2년 전까지가 음악 칼럼니스트로서 전성기였다고 생각한다.
“음악 칼럼니스트라고는 하지만 글 써서 먹고살겠어요(웃음)? 제 공간인 무지크바움에서 동호회나 강좌를 열고 외부 강의도 다니고요. 그런데 제 나이가 이제 기업체 특강 강사로는 좀 많아요. 왜냐하면 기업체 사장이 저랑 나이가 같거나 어리거든요. 물론 저도 이제 돈을 열심히, 많이 벌 생각은 없어요. 생업은 55세까지 충분히 했다고 봐요.”
이런 날을 생각해서 20년 직장생활을 했다. 먹고사는 데 당장 큰 문제는 없다. 벌어놓은 돈도 있으니 즐기면서 오래오래 이 일을 하고 싶다.
“마음은 천국이죠.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하면 되니까. 대신 제가 일정을 짜놓고 많은 일들을 정해야 하니까 좀 바쁘죠. 마음은 천국, 몸은 지옥? 앞으로도 10년은 잘할 수 있을 거 같아요. 그리고 10년은 골골거리면서 잘할 수 있을 거 같아요(웃음).”
음악과 함께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최근 귀찮지만 꼭 해야 할 일이 생겼다. 슈베르트에 관한 글을 쓰게 됐다고. 예술서 100권, 문학서 100권, 사상서 100권 총 300권 시리즈를 기획하고 있는 한 대형 출판사에서 유형종 대표에게 제안을 해왔다. 아직 정해진 바는 없지만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이제부터 자료조사를 새로 해야죠. 그런데 사실 쓰겠다고 한 이유가 딴 게 아닙니다. 제 동생도 쓰기로 했더군요. 괜찮은 필자를 출판사에서 저자로 섭외했던데 내가 안 쓰면 소외될 거 같아서 할 수 없이 쓰는 거거든요(웃음).”
그래도 적잖은 사명감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 물어보았다.
“불명예는 막아야죠(웃음). 적어도 대한민국 예술 필자 100명 중에 끼지 못한다는 소리는 들으면 안 되잖아요. 불타오를 정도는 아니고 약오름?”
말은 이렇게 해도 어떤 주제로 쓸지에 대해 찾아보고 있다. 너무 어렵게 않게 슈베르트에 대해 사람들이 알 수 있고 공감할 수 있는 방향으로 책을 쓰게 될 것 같단다.
유형종 대표는 어떤 것을 평가하고 논하는 평론가의 삶을 구하지 않는다고.
“칼럼니스트로서 내가 좋아하는 것에 관심은 갖되 너무 깊숙이 관여하지는 않아요. 관객으로서 내 시선을 내려놓고 싶지 않습니다. 누군가 공연장 사장 할래? 그러면 전 아마 안 할 거예요. 사람 임명하고 관리하는 거 하기 싫어요. 육체는 힘들지만 영혼의 자유를 누리면서 살고 싶어요.”
인터뷰하는 동안 그가 20년 금융 전문가에서 음악 칼럼니스트로 변신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저는 원래부터 직장생활 20년 하고 난 다음에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겠다고 마음을 먹었어요. 그러니 지금이 제1인생이죠. 제1의 인생을 위해 기반을 마련하고 돈을 번 것입니다. 합리적으로 살려고 노력합니다.”
처음부터 그의 시작은 음악이었고 지금도 그렇게 살아가는 느낌이다. 평생 제1의 인생을 위해 살아온 집념과 고집이 앞으로도 영원하기를 기대해본다.
세르비아 수도 베오그라드에서 북쪽 90km 지점에 있는 ‘노비사드(Novi Sad)’는 세르비아 제2의 도시다. 세르비아어로 ‘새로운 정원’을 뜻하는 도시 명을 가진 노비사드. 19세기,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통치 시절 때 세르비아인 중심으로 경제발전을 이뤘다. 도심 메인 광장에는 번성기의 멋진 건축물이 남아 아름답게 빛을 낸다. 거기에 도나우 강변과 페트로바라딘(Petrovaradin) 요새의 어울림은 환상적이다. 현지인들은 참으로 친절하고 순수하다. 누군들 이 도시에 머물고 싶지 않겠는가.
여행 안내소 여직원과 ‘안드리아’의 친절에 감복
세르비아 수도 베오그라드 역내에 있는 여행안내소의 여자 스태프의 친절은 반할 만하다. 기차역에서 노비사드로 가는 표를 사들고 밖으로 나가려는데 안내소 부스에서 밖으로까지 나와 반긴다. 이렇게 적극적인 친절은 동유럽 관광지에서 단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다. 그녀는 궁금해하는 것들에 대해 상세하게 알려준다. 또한 묻지도 않았는데 그날 저녁, 도나우 강변의 보트타기가 무료라는 정보를 알려주며 꼭 예약해야 된다는 말도 잊지 않는다. 그녀는 분명히 세르비아의 애국자다. 노비사드행 기차는 곧 폐차해야 될 정도로 낡아 보인다. 기차 안팎으로 그려진 그래비티가 어지럽다. 빈자리를 찾아 앉아 있다가 몸을 완전히 돌려 플랫폼에서 잠시 스쳤던 귀여운 청년 ‘안드리아’에게 말을 건다. 기차 안 사람들의 시선이 쏠린다. 그에게 이것저것 여행 정보를 묻는다. 말 튼 김에 수다도 떤다. 노비사드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현재 유명 호텔에서 근무하고 있다는 그. 영어뿐만 아니라 스페인어, 프랑스어도 가능하단다. 그날은 애인을 만나러 가는 중이란다. 내친 김에 여행 안내소 직원이 말해준 “오늘 유람선이 무료라고 하니 예약 좀 해줄래”라는 부탁까지 한다. 그가 기차 안이 시끄러워 안 된다고 해서 ‘가도 그만 안 가도 그만’인 유람선 타기는 포기한다. 그런데 노비사드역에 내리자마자 보트 회사에 전화를 하고 있다. 결국 정보 착오로 보트타기는 실패했지만 생판 모르는 여행객에게 베푸는 친절함에 감동이 물결친다. 시내버스 타는 곳까지 그를 따라가면서 “버스비 내가 내줄게” 했다. 전화비는 줘야 한다는 한국적 사고의 행동이다. “왜? 뭐하러?”라는 그의 말에 또 감동받는다. 그날 그에게 교훈을 얻는다. 고국에서 외국인을 만나면 안드리아와 같은 친절을 베풀겠다고 다짐했으니 말이다.
19세기의 문화 부흥을 알려주는 중심 광장
노비사드 극장 거리에 내리자마자 소낙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우산이 필요할 찰나에 발견한 중국인 가게. 빨간 우산 하나 사들고 노비사드에서 교수로 있다는 젊은 중국 여성을 만나 또 한참 수다를 떨다가 길 건너 성모 승천 교회를 보고 세르비안 국립극장으로 다가선다. 1861년에 세워진 국립극장은 남부 슬라브인들의 첫 번째 극장으로 유고슬라비아의 연극, 클래식 오페라, 현대 발레 등이 공연되고 노비사드 재즈 축제도 열린다.
몇 걸음 더 걸어 노비사드의 가장 번화한 슬로보데(Slobode, 자유) 거리에 이른다. 네오르네상스 스타일의 웅장한 시청사의 건물 중심부에 뿔 같은 탑(60m)이 불쑥 솟았다. 시청사 말고도 첨탑이 뾰족한 성 마리 성당, 보이보디나 호텔을 비롯해 화려한 건축물들이 주변에 한가득이다. 노비사드의 기원은 7세기경, 남슬라브족이 정착하면서 시작되었지만 18세기,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제국 때 황금기를 맞는다. 17세기 오스만 제국이 발칸에 진출하자 투르크족의 지배를 거부하는 인근 세르비아인들이 도나우 강을 넘어 이곳으로 이주해오면서 일궈낸 영광이다.
매일 축제가 열리는 즈마이 요비아 거리
자유 광장에는 스베토자르 밀레티치(1826~1901)의 청동상이 있다. 작가, 극작가이자 이 도시의 시장(1861년, 1867년)이었던 밀레티치는 노비사드 발전에 큰 역량을 발휘한 위대한 인물. 그의 청동상은 20세기 유고슬라비아의 미켈란젤로라 불리는 이반 메슈트로비치(1883~1962)의 작품이다. 이어 즈마이 요비아(Zmaj Jovina) 거리로 들어선다. 길 양쪽으로 쇼핑가, 식당가가 쭉 이어진다. 매일 축제가 열리는 흥겨운 거리라지만 이른 시간이라 그런 모습은 볼 수 없다.
우선 마음 내키는 식당에 들어가 풍요로운 늦은 조식을 먹고 거리 끝으로 간다. 두나브스카(Dunavska) 광장이다. 비누거품 놀이에 빠진 아이들의 천진한 모습을 배시시 웃음 지으며 쳐다보다 요반 요바노비치 드래곤(1833~1904)의 동상을 발견한다. 의사이자 서정시인이었던 그는 매일 같은 시간에 이 골목을 걸었던 듯하다. 1984년에 그 모습 그대로 재현된 기념비다. 동상 앞에는 주교 궁전이 있다. 1741년에 만들어진 정교회는 1849년에 폭발해 새로 지었다. 세르비아의 유명한 건축가인 블라디미르 니콜리치(1857~1922)가 1899년에 지어 1901년에 완공했다. 비잔틴 스타일에 동양적인 요소가 가미된 멋진 궁전이지만 아쉽게도 관광객들에게 개방하지 않는다.
메인 타운을 벗어나 도나우 강 쪽으로 향하면 거리는 다소 한적해진다. 이 거리의 외국인 아트 컬렉션 건물 앞에서 또 동상을 만난다. 기자, 정치가, 작가였던 자사 토미치(1856~1922)다. 그는 이 도시의 시장이었던 밀레티치의 사위였다. 부인 밀리카 토미치(1859~1944)를 모함한 상대 정치인(Branik 매거진 편집자)을 찔러 죽여 7년 동안 복역했지만 출옥 후 다시 정치에 출마해 현세에도 위대한 정치인으로 남았다. 동상의 손가락에 끼워진 빨간 반지는 눈이 좋아야만 보게 될 것이다.
이어 도나우 공원과 길거리 시장을 지나 근대 미술관을 보고 도나우 강 앞에 선다. 대교와 부서진 다리 등이 있고 강 너머 야트막한 언덕(40m) 위에는 페트로바라딘 성채가 있다. 그 모습이 그림같이 아름답다. 그래서 ‘도나우 강의 지브롤터(Gibraltar, 스페인의 영국령 반도)’라는 별칭으로 불린다. 강변에는 레이드(Raid) 희생자 조각(The Family)이 서 있다. 1942년 1월, 3일(21~23일)간 헝가리의 파시스트들은 세르비안, 유대인, 집시 등 1000명이 넘는 사람들을 이곳에서 처형했다. 비극적인 역사의 기록을 노비사드 출신의 유명한 조각가 요반 솔다토비치(1920~2005)가 작품(1971년)화했다.
도나우 강변의 페트로바라딘 요새
다리를 건너 페트로바라딘으로 가면 시내 중심가와는 확연히 비교될 만큼 낡은 건물들이 즐비하다. 낡은 건물들과 112헥타르(33만8800평)나 되는 요새가 촉촉이 비에 젖었다. 성채는 긴 세월 동안 파괴, 복구, 확장 등의 과정을 겪어 오늘에 이르렀다. 요새에는 시립 박물관, 시계탑, 카페, 아티스트들의 공방과 작품 숍 등 볼거리가 많다. 창조적인 디자인 숍에서는 기념품을 판매한다. 또 강에서 고기를 잡는 어부를 위해 시침보다 분침을 더 길게 한 시계탑도 볼 만하다. ‘한눈에도 예술가’처럼 보이는 화가 라이코 페트코비치의 아틀리에가 있다. 그 외 조각가 요반 솔다토비치의 기념관도 있다. 이 성채의 지하에는 무덤이 있어서 매년
7월 ‘EXIT 페스티벌’이 열린다. 비에 젖은 성채의 커피숍에 앉아 한참 한가로운 시간을 보낸다.
다시 도시로 되돌아와 유대인 회당도 보고 아인슈타인과 그의 부인인 밀레바 마리치(1875~1948)의 기억 접시관도 찾는다. 밀레바는 노비사드에서 멀지 않은 티텔(Titel)에서 태어나 노비사드에서 중등학교(1886년)를 다녔다. 아쉬움이 남는 노비사드 여행이었지만 두말이 필요치 않은 아름다운 도시다. 언젠가는 현지인처럼 이 도시에 머물고 있을 듯하다.
흔히 나이가 들면 새벽잠이 없어진다고 한다. 멀뚱멀뚱 자리에서 일어나 서성이기도 하고, 여기저기 두리번거려보지만 세상은 아직 단잠에 코골이 중이다.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이른 새벽, 일찍이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다정한 목소리가 있다. “안녕하세요. 박영주입니다.” KBS 1라디오 의 박영주(朴英珠·57) KBS 아나운서가 그 주인공이다. 매일 아침 97.3MHz의 라디오 주파수를 타고 들려오는 그녀의 모닝콜은 전국 방방곡곡 시니어 애청자들에게 비타민주스처럼 신선한 에너지를 선사한다.
새벽 4시, 평범한 사람이라면 침대에 누워 여전히 어제의 꼬리를 붙잡고 있을 법한 시간이다. 그러나 이토록 이른 시각에도 활기찬 하루의 포문을 여는 이들이 있다. 바로 의 애청자들이다. 상냥하고 은은한 박영주 아나운서의 목소리는 덩그러니 놓인 새벽의 허전함을 사뿐히 채운다. 이미 애청자들과 끈끈한 교감을 이루고 있지만, 방송을 놓치고 있을 이들을 위해 박 아나운서에게 직접 소개를 부탁했다.
“새벽 4시부터 4시 40분까지, 시니어를 위한 종합 매거진 프로그램입니다. 새벽잠은 없고 그 외로움과 적적함을 달래기 위해 일찍 일어나는 분들이 이 프로그램을 듣는 것 같아요. 예전에는 라는 이름으로 방송했어요. 청취자 층을 50대까지 확장하려는데, 그들을 실버라 부르긴 어울리지 않아 ‘시니어’를 사용하면서 가 됐죠. 이름이 바뀌고 얼마 뒤에 제가 진행을 맡아 3년째 이어오고 있습니다.”
건강, 추억의 음악, 영화 그리고 한시까지
새벽 프로그램인지라 다소 밋밋하게 흘러가리라 예상했다가 코너 편성표를 보고 입이 떡 벌어졌다. ‘9988 치매완전정복’, ‘행복밥상’, ‘낭독으로 읽는 고전소설’, ‘유성기로 듣는 우리 음악’, ‘그 시절 그 노래’, ‘추억의 영화’, ‘꿈꾸는 책방’ 등 건강을 비롯한 문화 전반에 대한 14가지의 콘텐츠가 한 주를 가득 채운다. 그녀가 소개한 ‘종합 매거진 프로그램’이라는 문구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매일 리포트와 더불어 두 가지의 주제를 40분 동안 꾹꾹 눌러 담아 들려주니 시간이 부족하게 느껴질 정도다. 거기에 친근한 박영주 아나운서의 목소리까지, 그야말로 빈틈이 없다. 그중 청취자들의 반응이 가장 좋은 코너는 무엇일까?
“치매에 관한 정보 제공과 상담까지 해드리는 ‘9988 치매완전정복’이 반응이 좋아요. 또 ‘한시 산책’을 선호하는 분들도 많고요. 요즘 젊은이들은 한자를 잘 모르지만, 시니어 세대는 어린 시절 학교에서 한자를 다 배웠잖아요. 다들 그런 향수가 있는데, 일반 방송에서는 잘 안 다루죠. 그런 주제를 즐길 수 있다는 점에서 좋아하는 것 같아요.”
각양각색 코너를 마련하는 데 제작진을 비롯한 진행자의 노고도 상당할 터. 여느 교양 프로그램 못지않은 탄탄한 구성은 시니어 청취자를 향한 그들의 깊은 고민에서 비롯됐다.
“프로그램 기획 단계에서 제작진과 함께 논의해요. 우리 작가는 20여 년 문화 쪽에서 오랜 경력을 쌓았는데, 나와 또래도 비슷하고 취향도 잘 맞아요. 그래서 문화에 관해서는 속속들이 다 다룬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죠. 책, 음악, 영화, 시, 소설 등 미술이 빠지긴 했는데, 아무래도 라디오라서 미술이 지닌 시각적 요소를 어떻게 풀어낼 수 있을지 고민 중이에요.”
평소 일주일에 두 번은 영화를 보고, 한 달에 두세 번, 많게는 대여섯 번 음악회, 발레, 오페라 등을 즐긴다는 박 아나운서다. 그녀의 폭넓은 문화적 소양과 더불어 어린 시절 추억은 다채로운 코너 구성에 힘을 실었다.
“중학교 3학년 때 학급 배정을 받아 교실에 가보니 담임선생님께서 커다란 전지에 윤동주의 ‘서시’를 써서 붙여놓으셨어요. 매일 조회, 종례시간이면 ‘차렷, 경례’를 하고 그 시를 다 함께 낭송하곤 했죠. 한 달 동안 매일 하나의 시를 외우다시피 읊다가, 다음 달이 되면 또 다른 시를 그렇게 써놓으셨어요. 그 순간이 굉장히 좋았고, 잊을 수 없는 추억이죠. 그렇게 어떤 식으로든 우리 사회에 시가 넘쳐나면 보다 더 좋은, 행복한 사회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서 ‘시’ 코너를 넣게 됐어요. 그건 제가 강력하게 추진했던 코너라 남다른 애착이 있죠.”
사연 속 사연이 담긴 ‘부모님 전 상서’
요일별 달라지는 코너 중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것은 토요일 방송분인 ‘부모님 전 상서’다. 청취자가 부모님께 띄우는 편지를 성우가 낭송하는 시간인데, 매주 애잔하고 감동 어린 이야기로 많은 이의 가슴을 적신다.
“부러웠던 사연이 있어요. 주인공이 어린 시절 동네에 전염병이 퍼졌는데 아무도 그 시신을 거두지 않아 아버지께서 홀로 수습하시다가 결국 전염병에 걸려 돌아가셨대요. 비록 아버지를 여의었지만 자녀들의 우애가 대단했죠. ‘의좋은 삼 형제’라고 불렀는데, 큰형이 나무를 하면 꼭 두 동생의 집에 몇 단씩 놓고 가고, 작은 형이 시장에서 뭘 사면 그것을 셋으로 나눠 형과 아우의 집에 주고…. 결혼해서도 윗집 아랫집 다 같이 살았죠. 그러고도 아쉬워서 나란히 묻힐 곳을 마련하고 묘비명도 미리 써두었다는 거예요. ‘우리 삼 형제는 한평생 함께 살면서 우애를 나눴는데 그 정을 두고 가기 아쉬워, 밤하늘의 별을 보고 비가 오면 비를 맞으며 이야기를 나누고자 여기 나란히 묻힌다. 후세들도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를 기억하며 잘 지내라.’ 그런 이야기를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들으신다면 얼마나 뿌듯하실까요. 참 부러운 마음으로 사연을 소개했어요.”
이 코너는 편지의 내용에서 오는 감동뿐만 아니라, 편지 그 자체에서도 특별한 정을 느낄 수 있다. 스마트기기의 발달로 휴대폰 문자로도 라디오 사연을 받는 요즘, 의 청취자들은 젊은 시절 라디오 사연을 보냈던 그때의 기억을 더듬어 정성 어린 손편지를 보내온다. 한평생 일하던 회사에서 쓰던 누런 갱지, 신문지 사이에 들어 있는 광고지 뒷면, 아들의 회사 로고가 찍힌 기안용지 등 빳빳하고 깨끗한 종이가 아닌 저마다의 알뜰함이 묻어나는 편지지가 인상적이다. 또 한글을 잘 몰라 구술을 해서 아들이 대신 적어 보낸 편지부터, 할아버지가 늘 하는 이야기를 타이핑해서 사연으로 보낸 손주, 손에 힘이 풀려 삐뚤빼뚤 쓰인 필체 등 그들이 보낸 사연에는 또 다른 사연이 담겨 있다.
청취자를 위하여, 그리고 청취자로부터
온기 어린 사연들만 보아도 어딘가 모르게 시니어의 감성이 물씬 느껴지듯, 청취자의 특징이 드러나는 몇 가지 귀여운(?) 오해들이 있다. 그러나 이런 부분을 가볍게 넘기기보다는 청취자들이 불편함이 없도록 개선하고자 노력한다는 박 아나운서다.
“우리 방송 이름이 ‘행복한 시니어’인데, 어떤 청취자께서 사연을 보내면서 ‘행복한 신녀’라고 써서 보내셨더라고요. 아마 ‘선녀’처럼, ‘신나는 여(女)’ 이런 식으로 의미를 생각하신 모양이에요. 우리는 당연히 안다고 생각하지만 그들이 모를 수 있다는 것을 늘 염두에 두려 해요. 또 제 이름을 ‘백영주’라고도 하고, ‘박영희’라고도 하고, 청력이 약해지셔서 그런 건데 더 또박또박 말씀드리려고 신경 쓰고 있죠. 가끔 리포터가 현장에 나가 청취자를 만나면 (코너가 많다 보니) ‘박영주 아나운서가 참 똑똑하다, 어떻게 그 많은 것을 아느냐’고 칭찬하신대요(웃음). 그러면 작가가 따로 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설명해드리곤 하죠.”
그 외에 대표적으로 오해하는 것 중 하나는 새벽 4시 생방송 진행으로 안다는 것이다. 대체로 라디오는 생방송이지만, 새벽 시간대 방송의 경우 사전 녹화로 만들어진다. 박 아나운서가 실제 방송을 녹음하는 시각은 오전 9시 출근시간 이후다. 그러고 보니 그녀도 벌써 33년째 KBS에 출근 도장을 찍고 있다. 몇 년 후면 은퇴를 맞이하게 될 박 아나운서에게 는 남다른 의미를 지닌다.
“1985년에 입사해서 초창기에는 TV 프로그램을 많이 했죠. 15~20년쯤 지나면 TV 프로그램은 후배들에게 물려주고, 시니어 아나운서들은 라디오 프로그램에 주력하게 돼요. 이제 퇴직이 4년이 채 안 남았는데, 선배들도 그랬고 아마 이 프로그램을 하다가 떠나지 않을까 생각해요. 젊어서 한참 아이 키우고 할 때는 정말 앞만 보고 달려왔거든요. ‘음미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는 말이 있죠. 이제는 상당 부분이 온전히 나의 시간이거든요. 일상의 성찰도 있지만, 지난날을 되새겨보는 시간이 참 많아요. 아주 느린 호흡으로 참되게 나를 위해 집중해서 살 수 있는 시간을 복되게 가꿔나가 보려고요.”
현재도 시간을 내서 사단법인 ‘공감인’에서 진행하는 ‘누구에게나 엄마가 필요하다’의 집단 치유 프로그램 치유활동가로 활약하는 그녀는 은퇴 이후에도 이를 유지하며 시각장애인 녹음 봉사자 교육 등에도 힘쓰고 싶다고 했다. 또 한 가지, 곁에 계시는 부모님과 함께하는 시간도 늘릴 계획이다. 이러한 다짐에는 ‘부모님 전 상서’ 코너가 교훈이 됐다.
“부모님은 늘 거기 계시고, 당연히 뒷바라지해주는 분들로 여겨왔는데, 이 코너를 하면서 생각이 바뀌었어요. 여러 사연 속 공통 메시지는 ‘살아 계실 때 한 번이라도 더 찾아뵀더라면, 식사 한 끼 함께할 수 있으면 여한이 없겠다’는 거예요. 저는 부모님이 살아계셔서 그걸 할 수 있는 처지거든요. 원래는 냉랭한 딸이었는데, 가능하면 더 자주 찾아뵙고, 더 살갑게 하려고 노력하죠.”
행복한 시니어, Just Do it!
는 청취자들의 노후뿐만 아니라 다가올 박 아나운서의 노후까지 행복으로 이끌어가는 듯했다. 그녀가 생각하는 ‘행복한 시니어’는 어떤 모습일까?
“글쎄요, 사람들은 행복을 어떤 특별한 상태라고 생각해요. 여행할 때, 친구와 대화할 때, 좋아하는 활동을 할 때 행복을 느끼죠. 그런데 진짜 그럴까요? 춤출 때 행복한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봅시다. 그가 춤을 출 때는 단지 춤추고 있고, 춤에 몰입해 있을 뿐이에요. 그럼 정확하게 행복한 순간은 언제일까요? 춤을 추고 나서 아닐까요? 그건 이미 춤을 추는 행복에서 벗어난 상태죠. 궤변 같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행복은 어떤 ‘상태’가 아니라 ‘과정’이라고요. 삶은 행복을 추구하는 과정이고, 아마 삶이 끝나는 순간에는 ‘아! 그래도 행복했구나’라고 생각할 거예요. 그러니 지금 ‘살아 있다면’ 행복한 시니어가 아닐까 해요.”
끝으로, 의 청취자와 독자를 위한 응원의 한마디를 부탁했다. 영화 마니아답게 노아의 방주를 모티브로 한 영화 의 대사를 언급했다.
“영화에 이런 내용이 나와요. ‘네가 신에게 이 난국을 헤쳐갈 용기를 달라, 그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사랑을 달라고 기도했을 때, 신이 과연 어떤 형태로 용기와 사랑을 줄 수 있을까. 용기? 사랑? 그게 뭔데? 네가 행동을 하면 거기에 용기가 얹어진다. 또 네가 작은 호의를 베풀었을 때 거기에 사랑이 얹어지는 거다. 신이 주는 것이 아니라, 네가 무언가를 했을 때 생겨나는 것이 용기이고 사랑이다.’ 나이 들면 뭔가를 하려다가도 못할 이유와 핑계를 찾거든요. 그럴 땐 그냥 무엇이든 일단 해보셨으면 해요. 무언가를 했을 때 거기 길이 있고 답이 얹어질 거예요. 자신을 믿고 저질러보세요. 저스트 두 잇(Just do it)!”
>박영주 아나운서
KBS 11기 아나운서로 입사이후, KBS 제3라디오 , , KBS 1TV 등 다수의 프로그램을 통해 대중과 만났다. 현재는 를 진행하며 KBS 편성본부 KBS한국어팀 팀장을 맡고 있다.
한국인들은 기계처럼 일해왔다.
그게 한국을 2차 산업의 승자로 만들어왔다.
그러나 이제는 기계처럼 일하는 인간은 기계를 이기지 못하는 세상이 왔다.
인간이 인간다워지는 게, 4차 산업혁명의 핵심이다.
인간으로의 회귀,
그것은 보다 많은 실패를 경험해야 한다는 말이고,
그것은 보다 천천히 가야 한다는 말이고,
그것은 보다 멍청해져야 한다는 말이며,
그것은 보다 양심적인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실패가 용인되는 사회,
결과보다 과정을 중시하는 사회,
똑똑하지 않아도 재미있고 기발한 아이디어가 가득한 사회,
그리고 도덕적인 사회,
그것이 바로 창조적 사회이며, 4차 산업혁명을 이끌 사회라고 나는 생각한다.
한국이, 한국인들이 그렇게 될 수 있을까.
나는 아직, 그렇다고 믿고 싶다.
30대 중반인 아들이 오늘 페이스북에 올린 글이다.
"야! 물무지개다!"
감탄하며 어린 아들의 고사리 손이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아주 작은 물웅덩이에 차에서 떨어진 기름이 번져 있었다. 시외버스 터미널에서였다. 아들은 필자를 깨우쳐줬다. 사물을 다른 눈으로 보라고.
"엄마 아까부터 올챙이들이 계속 내려오고 있어요."
"어디? 어! 정말이네?"
어린 아들의 말을 듣고 보니 버스 창을 타고 내려오는 빗물이 정말 고물고물 움직이는 올챙이 같았다. 비 오는 날 아이들을 데리고 나들이한 날이었다.
어린이는 모두 천재이고 시인이다.
어린이의 눈으로 보는 세상은 모두 아름답고 신기하다.
어린이들과 같이 있다는 것은 세상의 아름다움에 눈을 뜨게 되는 축복의 시간이다.
영국의 계관시인 워즈워스는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라고 말했다.
"엄마 나 내릴래."
"왜?"
"엄마 힘들까봐."
아들이 네 살 때였다. 퇴근해 힘없이 누워 있는 아들의 이마를 만져보니 열이 펄펄 끓었다. 부랴부랴 아들을 업고 병원으로 달려가는데 그런 말을 해서 순간 눈물이 앞을 가렸다. 평소에도 곰살맞은 아들은 필자가 안아주면 고사리 같은 손으로 필자를 더 꼬옥 안아주곤 했다. 아픈데도 엄마를 걱정해주던 아들. 아들의 고운 마음이 두고두고 생각난다.
가을 밤길
귀뚜라미 귀뚤귀뚤 우는 밤길을
나 혼자 걸어봅니다.
소리를 밟을까봐 조심조심
소리를 쫒아버릴까봐 조심조심
나 혼자 가을 밤길을 걸어봅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아들이 쓴 시다.
'소리를 밟을까봐'라는 탁월한 표현에 감탄해 동료 국어선생님들께 보여드리니 타고난 시인이란다.
"엄마 저를 자유롭게 키워주셔서 고마워요."
몇 년 전 아들이 필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들은 고3때도 학교에서 강제로 시키는 자율학습을 하지 않았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집에서 자유롭게 공부했다. 좋아하는 바로크 음악을 들으며. 어차피 공부는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다. 어려서부터 아이들은 배움에 대한 의욕이 넘쳤다. 피아노, 컴퓨터, 성악, 발레, 지점토, 홈패션, 영어, 수영, 일본어, 태권도, 미술 등 학원을 열 곳 이상 다녔다. 아이들이 하고 싶은 공부가 있으면 시켰더니 결과적으로 이렇게 많은 학원을 다니게 되었다. 하지만 학원 가는 게 싫다고 하면 언제라도 그만두게 했다.
"억지로 시키면 창의성이 나올 수가 없어요."
아들의 주장이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욕심 많고 의욕이 넘쳤던 필자는 어렸을 때부터 발레가 너무 하고 싶었다. 잠자리 날개 같은 옷을 입고 하늘하늘 춤추고 싶었다. 피아노도 치고 싶었다. 정말로 미치도록 치고 싶었다. 그러나 가난 때문에 어느 것도 못해봤다. 그래서 필자는 아이들이 하고 싶은 공부가 있으면 즉시 배울 수 있게 했다. 우리 아이들에게는 필자의 한을 대물림하고 싶지 않았던 강렬한 의지 때문이었다.
"아들, 엄마는 한국에서 살아남을 테니 너는 일본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열여덟 어린 나이의 아들을 홀로 일본에 보내며 비장한 심정으로 말했다.
"아드님은 분명 한국을 빛낼 몇 안 되는 인물 중 한 사람이 될 거예요."
아들의 고등학교 졸업식 때 학생부장님은 필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들은 일본의 명문 게이오대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지금은 IT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다.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작년 12월 마지막 날이었다. 압구정에 있는 뮤지크 바움 오페라 동호회 모임에서였다. 그녀는 30여 명 되는 회원들 모두에게 두세 송이의 꽃을 선물하고 있었다. 화사한 연핑크와 보라색의 리시안셔스라는 서양 꽃이었다. 예쁜 꽃을 선물 받으면 늘 행복하다. 마음이 예쁜 그녀와 대화를 나눠보니 그녀도 필자와 같이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곧바로 의기투합해 필자가 수강하고 있는 '라임'이라는 탱고 교습소를 같이 다니게 되었고 그녀와 필자는 매주 일요일 오후, 탱고를 배우며 우정을 쌓았다. 키 크고 체구도 당당한 그녀는 몸치인 필자와 달리 금방 유연하게 춤을 잘 따라 하며 흥미를 보였다. 그러던 중 그녀가 새 학기를 맞아 고향인 창원으로 발령을 받아 내려가게 되었다. 초등학교 교사인 그녀는 다양한 문화생활을 할 수 있는 서울이 좋지만 직장 때문에 내려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아니 이게 꿈이야? 생시야?”
창원에 있어야 할 그녀를 뮤지크 바움에서 만나게 될 줄이야! 깜짝 놀랐다. 발레 감상을 하기 위해 지난 토요일 무지크 바움에 갔는데 그녀가 서울을 떠난 지 몇 개월 만에 그곳에 온 것이다. 이런 우연이 있나? 필자도 일정이 바빠 몇 개월 만에 간 날이었다. 반가워서 얼싸안는 필자에게 그녀는 대뜸 '애란 언니'라고 부르며 안겼다. ‘애란 언니?’ 오랜만에 듣는 그 호칭이 필자를 여간 들뜨게 하는 것이 아니었다. 딸보다도 한참 어린 후배 여교사였다. 언니는 언니 값을 해야만 한다. 발레 감상이 끝난 후 인근에 있는 안동국시 집에 데려가 점심을 사줬다.
차를 마시며 무언가 걱정이 있어 보이는 그녀의 얘기를 들어주었다. 물가 비싼 신사동에 얻은 집이 빠지지 않은 상태에서 내려가 계속 많은 금액의 월세와 대출받은 보증금의 이자가 몇 달 동안 나가고 있다고 했다. 젊은 여교사의 피 같은 돈이 엉뚱하게 빠져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듣다 보니 부동산 업자의 행태에 분노가 치밀었다. 다른 업자와는 계약을 할 수 없으며 반드시 자신들하고 해야 일이 처리된다고 했단다. 집주인과 직접 만나 사정을 이야기하고 싶어도 전화번호를 가르쳐줄 수 없다고 말하더란다.‘한참 연장자인 인생 선배가 딸 같고 동생 같은 젊은이에게 이래도 되는 건가?’하며 울분이 일어났다. 걱정하실까봐 부모님께는 털어놓지도 못하고 필자에게 처음으로 얘기한다며 그녀는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동안의 마음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닌 듯싶었다. 이런 얘기를 듣고 가만히 있을 애란 언니가 아니다. 이럴 때는 정의의 사도인 애란 언니가 나서야 한다. '이 악당아~ 정의의 칼을 받아라~ 얍!' 당장 부동산 업자의 전화번호를 알아내 집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전화를 걸었다. 장장 24분이나 통화하며 업자를 설득했다. 퇴근 후의 휴식을 깨트리는 것이 미안하긴 했지만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
"애란 언니, 그 집 7월 말에 새 세입자가 들어오기로 했대요."
어제와 달리 그녀 목소리는 아주 밝았다.
이렇게 쉽게 나갈 수 있는 것을 그동안 왜 그렇게 그녀의 속을 썩였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필자가 좀 더 일찍 알았다면 손해를 최소화시키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았을까? 만시지탄이었다. 어쨌든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필자가 도움이 된 것 같아 여간 기쁘고 후련한 것이 아니었다. 전화통화로 해결이 안 되면 사무실로 직접 찾아가 항의하고 사안별로 문제를 조목조목 따져보려고 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이런 악덕 업자들을 대할 때마다 인간에 대한 회의가 밀려온다.
후배야, 애란 언니 역할을 어느 정도 해낸 거 맞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