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출산율을 높이고자 최근 매년 10조 원 이상을 쓰는데도 출산율은 2015년 기준 1,24명으로 1.3명의 벽을 뚫지 못하고 있다. ‘1960년 합계 출산율(여성 1명이 평생 동안 낳을 것으로 예상되는 평균 자녀수) 6.0명→1990년 1.5명→2013년 1.22명→2015년 1.24명인 것이다. (2015.1.11.통계청‧‧보건복지부 잠정집계)
삼성경제연구소에 따르면 이대로 가다간 2100년 인구는 지금의 절반인 2,468만으로 줄어들 것이란 예상이다. 심지어 2500년에는 중남미 소국인 바하마 인구수준인 33만 명 수준이 될 것이란 최악의 시나리오를 내놨다. 전문가들은 취업-결혼-첫 출산-둘째 출산으로 이어지는 연결고리가 끊어졌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문제가 심각하다. 아이를 낳아 기를 수 있는 환경이 안 되는 것이다. 옛날에는 남편은 벌고 아내는 아이를 기르는 것이 보편화 되어 있었다. 아니면 할아버지 할머니가 함께 살면서 자녀를 봐주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은 혼자 벌어 집 장만하기가 요원하다. 둘이 죽자 하고 벌어야 집도 마련할 수 있다. 핵가족 시대가 된 요즘 아이만 덜컥 어른들에게 맡기기도 여의치 않다. 그나마 국공립 어린이집은 경쟁이 치열할 정도다.
아는 지인 중 한 사람이 의대를 나와 고향에 가서 산부인과를 개업하고 고향에 봉사하고자 했다. 그런데 몇 년 만에 접고 올라와야 했다. 아기를 받아본 것이 몇 명 안 된다는 것이다. ‘이래 가지고야 입에 풀칠하기도 어렵다.’라는 그의 말이다. 어느 TV에서는 일부 산부인과는 폐업하고 피부과를 개업하였다며 비싼 산부인과 기계가 먼지가 쌓인 채 덮여 있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시골 마을에 아기가 없다. 노인들만이 마을을 지키는 시골이 늘어난다. 그러다 보니 폐교도 늘어난다. 어린 학생들로 넘쳐나야 할 학교가 전교생 다 합쳐 4명이라는 뉴스를 보며 마음이 아프다. 그 학교도 6학년 두 명이 졸업하면 조만간 문을 닫을 것이라 한다.
출산에 따른 가족계획표어를 살펴보면 격세지감을 느낀다.
1963년 ‘덮어놓고 낳다 보면 거지꼴 못 면한다’
1966년 ‘3명의 자녀를 3년 터울로 35세 이전에 단산하자’
1971년 ‘딸·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
1980년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안 부럽다’
1986년 ‘하나로 만족합니다. 우리는 외동딸’,
1990년 ‘엄마건강 아기 건강 적게 낳아 밝은 생활’ 등 이었다.
2004년 “아빠! 하나는 싫어요. 엄마! 저도 동생을 갖고 싶어요.”라는 내용의 가족계획 표어가 선보였고, 2006년 “낳을수록 희망 가득 기를수록 행복 가득”으로 보다 적극적으로 출산을 장려하는 내용으로 변했다.
2010년대 ‘하나는 외롭습니다. 자녀에게 가장 좋은 선물은 동생입니다.’라는 표어와
‘아들딸 구별 말고 많이 낳아 잘 기르자!’ 하는 표어가 등장했다.
출산장려에 나선 보건 복지부가 전 국민에 출산장려 공모를 시행하기에 이르렀다. "자녀는 평생 선물, 자녀끼리 평생 친구." 이 표어가 2014년 7월 제3회 인구의 날에 보건복지부가 실시한 출산장려 국민표어 공모전에서 우수작으로 선정된 작품이다. 물론 표어가 출산장려를 촉진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노년인구는 늘어나는데 생산인구가 줄어든다는 것은 심각한 일이다. 가분수 형의 인구구조로는 밝은 미래를 기약할 수 없다. 지금이 그 전환점인 것만은 확실하다.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모든 여건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 이제 그 몫은 정부에 있다. 여건만 되면 더 낳겠다고 한다. 국가가 그들에게 믿음을 주어야 할 차례다. 국가가 아이들을 키워준다는 믿음이다. 그래야 아이 울음소리가 도심 한가운데서 부터 저 지리산 꼴짜기 마을까지 우렁차게 울려 퍼질 것이다.
1, 지리산 청학동서 세상을 만나다
필자는 촌놈이다. 지리산 삼신봉 아래 청학동 계곡에서 세상을 만나서다. 청학동은 경남 하동군 청암면 묵계리 일원을 이른다. 삼신봉에서 발원한 맑은 물이 기암괴석으로 둘러쳐진 계곡을 돌고 돌아 섬진강으로 이어진다. 하동읍까지 40리(약 15.7㎞), 진주시까지 100리(약 39.3㎞)다. 지금은 관광지로 많은 사람이 찾지만, 앞산 토끼와 뒷산 토끼가 서로 발맞출 수 있는 두메산골이었다. ‘정감록’을 비롯한 몇몇 옛 문헌에 신선들이 사는 이상향으로 등장한다. 청학이 노닐고 흉년, 질병, 난리가 없는 지상 낙원으로 신라 말기부터 전해오는 마을이다. 할아버지도 거창군 가조면 율리에서 그 이상향을 찾아 이곳에 삶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유불선합일경정유도교"의 신자들도 1960년대 초반부터 이곳에 보금자리를 틀었다. 한복을 입고 결혼 전에는 댕기 머리를 땋고 결혼 후에는 남자는 상투를 틀고 여성은 쪽 지은 머리에 비녀를 꽂는 풍습의 도인촌이다.
이곳으로 이주한 조부모와 부모는 화전을 일구어 밭농사를 지었다. 계곡 주위의 다소 반반한 터를 잡아 다랑논을 만들었다. 어느 가을날 그 밭에서 일하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빨치산에게 붙잡혔다. 부역을 시키거나 총살을 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소나무 둥치에 포박하여 둔 채로 그들은 떠나갔다. 어둠이 깔리자 두 분은 묶인 손의 밧줄을 간신히 풀고 일궈놓았던 논밭과 익어가던 곡식을 팽개친 채 빈 몸으로 10리(약 3.9㎞) 떨어진 대밭 몰이라는 아랫마을로 소개하여 삶의 터전을 새로 마련했다.
필자는 청학동서 배태하여 이곳에서 삼 형제 중 늦둥이 막내로 태어났다. 음력으로 1950년 2월 초나흘 새벽닭이 울 무렵이었다. 배냇저고리에 쌓여 한국전쟁을 겪었고 그곳에서 유소년시절을 보냈다. 끼니를 챙기는 어머니 곁에서 딸처럼 아궁이에 불을 지피어 드리기도 하고 들녘에서 나물을 캐기도 하였다. 닳고 닳은 놋쇠 숟갈로 감자 껍질을 벗겨드리기도 하였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하동읍에 있는 하동중앙중학교에 입학했을 때도 등잔불을 켜고 살았다. 밤에 공부하고 나면 콧구멍이 까맣게 그을렸다. 등잔불에 넣을 기름도 40~ 50분 걸어가야 하는 면사무소 근처의 가게에서 기름때 진득하게 낀 됫병에 짚으로 꼰 새끼줄을 묶어 조심스레 들고 와야 했다.
어머니 나이 33세에 필자를 낳았다. 큰 형님과는 10세, 둘째 형님과도 6세 터울이다. 할아버지의 만류로 9세에 초등학교에 입학(1958)했다. 징검다리가 있는 개울을 건너 신작로 고갯길을 돌고 도는 1시간 거리에 있는 청암초등학교였다. 공부 잘하고 달리기, 웅변, 그림 그리기 등 모든 부분에서 두각을 보였고 전교 학생회장도 했다. 중학교 역시 수석으로 입학하였고 3년 동안 1등을 놓친 적이 없는 수재로 지역주민의 기대를 받고 자랐다. 중학교 때는 같은 학년의 친구 집에 입주하여 공부를 도와주고 숙식을 해결한 적도 있다. 중학생이 가정교사로 일한 것이다. 중학교를 졸업한 후 초등학교 모교 졸업식에서 축사한 특별한 경험이 있다. 동네 결혼식의 축사도 도맡아 했다.
2. “당신은 중책을 맡게 될 거야!”
거창대성고등학교를 졸업(71)한 후 72년 곧바로 국민대학교 행정학과에 입학하여 1학년을 마치고 공군에 자원입대하여 관제병으로 3년 만기 전역했다. 이후 77년 10월, 대학 졸업 직전에 쌍용그룹 고려화재해상보험㈜에 공채로 입사했다. 특종보험 언더라이팅 업무를 하다 기획조사부로 발령되어 신상품 개발 업무를 하여 국내 최초 골프보험, 낚시보험 등의 레저보험을 개발하였다. 79년 4월 15일, 다섯 살 아래인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결혼하였다.
보험감독원 등 외부기관 연수에서 늘 우수한 성적을 거두고, 재무부 장관 표창도 받았다. 83에는 스위스 취리히에 있는 스위스보험연수소(SITC)를 수료(사진)했다. 중견 사원이 되었을 때는 운영상 문제가 있었던 제주지점, 대전지점, 동대문지점장으로 부임하여 업적을 크게 올렸다. 그런 덕으로 96년 초 직장의 별인 임원으로 승진해 부산, 경남, 제주를 관장하는 본부장(부산 주재)을 지냈다.
3, 47세에 용도폐기
호사다마라 했던가? 임원으로 승진한 지 2년이 채 되지 않았던 1997년 12월 말 갑작스럽게 해임되었다. 충격이었다. 나이 47세 때다. 유능한 직원으로 인정받으며 회사 일에 매달려온 지난 날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한창 일할 나이였고 두 아들도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다닐 때였다. 아버지로서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이 필자에게 거는 기대를 생각하면 더 얼굴을 들 수 없었다. 넥타이를 매고 정상 출근하듯 집을 나서 공원에서 배회하다가 퇴근 시간에 맞춰 귀가하는 사람들의 얘기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필자가 바로 그 처지가 되었다.
4. “당신 제 명에 살게 하려고”
해임된 그 날 집으로 돌아가면서 어떻게 아내에게 알려야 하나를 고민했다. 믿고 있는 아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망설여지기도 하였으나 그날로 아내에게 사실을 알렸다. 가족의 의미가 무엇인가? 서로를 알고 서로를 도울 수 있어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지만, 용기를 내어 알렸다.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던 일이어서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잠시 시간을 보낸 아내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참 잘 됐어요. 당신 제 명에 가게 하려고 하늘이 도왔나 봐요! 그동안 애 많이 쓰셨어요. 어디 산 입에 거미줄 치겠어요.” 우리 세대들이 다 그러했듯 나 역시 목표달성을 위하여 몸을 사리지 않고 밤낮으로 일했다. 거래처 접대와 직원 격려를 위한 회식 자리로 자정 무렵에야 겨우 혼자 살던 사택으로 돌아가기 일쑤였다. 이렇게 살다가는 필자가 제 명에 갈 수 없겠다 싶은 생각을 수차례 하였을 것이다.
5. “설상가상”, 이런 때 쓰는 말이구나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퇴직한 다음 해 IMF 위기가 닥쳤다. 먹고 사는 일이 걱정거리로 등장했다. 재취업하려 발버둥 쳐봤지만, 필자가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다단계 모집 광고에 빠져들기도 하였다. 그런 현실은 분노를 부추겼고 속이 더 상했다. 분노를 일간신문 독자 투고란에 토로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행동은 필자에게 도움이 되지 않음을 깨닫고 마음을 비워가기 시작했다. 체면이나 자존심을 조금씩 버렸다. 그런 과정에서 마음을 가장 잘 가라앉혔던 생각은 “나의 직장 운이 거기까진 데 어이하겠어”라고 현실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마음이 한결 안정되었다. 주어진 현실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를 찾기 시작했다.
6, 마당쇠가 되다
생계유지를 위한 일을 찾아야 했다. 퇴직 6개월이 지나서야 고용노동부 고양시고용센터에 들러 실업급여를 청구했다. 처음엔 쑥스럽고 창피하여 신청을 미루고 있었다. 국민연금을 해지하여 생활비로 사용했다. 다른 보험도 모두 해지하였다. 그 후 별별 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아는 사람의 도움으로 만화방을 창업했다. 누워서도, 엎드려서도 만화책을 볼 수 있는 새로운 시스템 도입으로 좋은 호응을 얻어 사업이 잘됐다. 수입을 조금이라도 늘리기 위하여 라면을 직접 끓여 팔기도 하였다. 하지만 시대조류였던 PC방이 성업하면서 이 업종도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그래서 이 사업을 접고 경기 부천시 상동에서 부대찌개 음식점을 창업해 운영했다. 90% 이상이 성공하지 못한다는 통계를 누누이 들으면서도 많은 퇴직자가 덤벼드는 것이 요식업이다. 필자도 그런 사람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처음엔 고전을 면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회사 다닐 때 몸에 익힌 고객서비스 정신이 도움되어 친절한 음식점으로 소문이 나기 시작하면서 수익이 괜찮아졌다. ‘이런 맛에 음식점을 하나보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몸이었다. 계속 아팠다. 특히 나이도 환갑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진정한 삶이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계기를 맞았다. 때마침 가게를 욕심내는 사람이 나타나 적정한 가격 협상 끝에 가게를 넘겼다. 그 후에도 먹고 살기 위해서 다양한 일을 이어갔다. 월 40만 원을 받으며 작은 회사의 조경관리사로 취업하여 매일 아침 긴 대나무 빗자루로 마당을 쓸고 쓰레기봉투를 치우는 일도 하였다. 마당쇠가 된 셈이다. 대형 고깃집 일산한우마을 점장도 하였고 일당을 받기 위하여 MBC 드라마 ‘주몽’ 엑스트라 출연도 해보았다. 마음을 내려놓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좋은 경험이 되었다. 강의 콘텐츠가 생산되었기 때문이다.
7, 친구의 비명횡사, 인생의 전환점 되다
57세 때 가까운 친구를 비명횡사로 잃었다. 두 살 아래의 직장 친구였다. 평소 술은 하지 않았고 담배도 수년 전에 끊어 건강한 사람이었다. 그는 추석 전날 다른 친구들과 남한산성에 올랐다. 산행 중 가슴에 통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구급 차량을 불렀으나 고향 가는 차량 행렬에 막혀 늦게 도착한 119차량에 실려 가까운 성남시의 한 병원으로 가는 도중에 숨을 거두었다. 정말 황당했다. 친구의 죽음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퇴직 후 보낸 10년의 세월을 되돌아보았다. 열심히 산다고는 했지만, 내로라할만한 일은 이루지 못하였다. 이렇게 살다가는 필자도 친구와 같이 무의미한 생을 마감하겠구나 싶었다. ‘100세 장수시대를 맞아 보람 있고 즐거운 생활을 하기 위해선 무엇을 해야 할까’하는 고민을 시작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이제부터는 필자를 위한 삶을 살아야겠다는 것이었다.
8, 60살에 사진 배우다
직장생활과 생업으로 잊고 있었지만, 은퇴하면 햇살 좋은 언덕에 캔버스를 세우고 수채화를 그리는 꿈을 꾸곤 했었다. 그런데 우연한 기회에 필자가 사는 고양시에서 무료로 하는 사진강좌를 알게 되었다. 당시에 필자는 블로그 ‘촌놈의 세상보기’를 운영하면서 사진을 곁들인 글을 쓰고 있었다. 좀 더 좋은 사진을 생각하고 있던 때여서 강좌에 참여했다. 화필 대신에 카메라를 잡은 셈이다. 2010년 7월부터 한 달에 3회 6개월 강좌를 들었다. 필자 나이 60대 중반이었다. 사진에 특별한 재능이나 솜씨를 갖고 있지 않은 초보자였다. 카메라도 소형 디지털카메라 한 대가 전부였다. 하지만 지리산 청학동 계곡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감성과 초등학교 때 수채화를 그렸던 경험, 전 직장에서 맡았던 홍보 관련 일과 사보편찬 업무가 도움돼 일취월장했다.
사진 취미활동은 여가를 무료하지 않게 보내면서 건강도 챙기고 여러 사람이나 자연과 함께함으로써 외롭지 않게 보낼 수 있게 했다. 때로는 작품으로 부가적 소득과 재능기부도 하면서 평생을 현역처럼 살 수 있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 했다. 사진을 배우기 시작한 3개월 뒤인 2010년 10월부터 공인 사진작가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일반인이 사진작가가 되는 길은 한국사진작가협회가 인정하는 전국사진공모전에서 입선 이상을 하여 획득한 점수가 50점을 넘겨야 했다. 입선하면 2점을 받는다. 일 년 동안에 28회 출품해 절반 이상 낙선하였으나 어쨌든 15회의 수상으로 사진작가 명함을 달았다. 첫 번째로 출품했던 제1회 너브내전국감성사진공모전에 ‘형상II’이 동상의 영예를 안겨주어 출발이 순조로웠으나 다른 공모전에선 잘 뽑히지 않아 포기할 생각도 수차례 하였다. 그러나 사진 자체가 재미있었다. 꾸준하게 찍으며 관련 서적을 사서 공부하고 기회가 되면 망설이지 않고 재능기부도 마다하지 않았다. 사진을 배우기 시작한 3년 만인 2013년 7월 국전인 대한민국사진대전에 ‘무한 질주’라는 작품이 입선했다. 2013년 10월에는 보건복지부와 국민연금공단에서 주관한 ‘8만 시간 디자인공모전’의 사진 부문에 ‘몰입’이라는 작품이 우수상을 받았다. 11월에는 부산일보 주최 제21회 ‘부일 전국사진대전’에 출품한 ‘닭장’이 1,166점 중에서 좋은 심사평으로 2위인 우수상 영예를 안았다. 부산일보는 2013년 12월 26일 자 기사에서 이렇게 전했다. "변용도 씨의 우수상 '닭장'은 울타리 안에서 바깥세상을 바라보는 닭의 붉은 머리 부분을 어두운 배경에서 강렬하게 보여 주어, 닭의 모습에서 감옥에 갇힌 사회의 한 단면을 풍자하는 듯한 표현이 출중했다는 평을 받으며 수상작으로 선정됐다."
9. 사진취미, 인생이막의 텃밭이 되다
필자는 사진을 ‘카메라로 쓰는 이야기’로 정의하고 ‘포토스토리텔러’라 자칭한다. 사진은 찍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다.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하여 끊임없는 노력을 한다. 지금까지 찍은 사진의 숫자가 37만 장이다. 카메라는 가장 아끼는 친구다. 늘 함께한다. 사진은 취미가 아닌 일상이 됐다.
사진 활동이 바탕이 되어 다양한 분야로 활동영역이 확대되어 다용도(多用途)로 후반생을 바쁘고도 보람 있게 산다. 사진이 인생이막의 텃밭이 되었다. 필자는 그 텃밭에 글솜씨, 강의 솜씨를 추가로 뿌렸다. 그런 씨앗에서 싹이 돋고, 잎이 무성해지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기 시작했다. 2008년에는 ‘미역국’ 외 다수의 작품으로 ‘순수문학지’ 신인상에 당선되어 수필가 명함을 달았다. 2012년에는 필자의 블로그 ‘촌놈의 세상보기’가 대한민국 100대 우수블로그로 선정됐다. 사진작가, 사진 칼럼니스트, 수필가, 저자, 강사(은퇴준비, 생애 재설계, 변화관리, 사진), 방송인(KBS 1TV ‘아침마당’, SBS라디오 ‘유영미 마음은 언제나 청춘’ 시니어리포터, 머니투데이 행복특강, 토마토TV 강연, 아리랑TV, CBS라디오, 한국직업방송), 기자(시니어조선 사진명예기자, 사회연대은행 KDB시니어브리지센터 두드림기자), 유어스테이지 시니어리더 겸 시니어리포터, ‘디카와 놀자’와 세화포토클럽 운영자다. 최근엔 경제신문 이투데이 자매지 브라보 마이라이프의 동년기자로 활동을 시작했다.
2013년 11월 ‘아름답게 보니 아름다워’, 2016년 1월 ‘카메라로 쓴 아름다운 이야기’를 출간하여 인터넷 교보문고에서 판매 중이다. 대우조선해양㈜와 미래창조과학부 산하 국가과학기술인력개발원, 고려대 평생교육원 액티브시니어전문가과정 전임강사다. 서울시 서초구 우면동에 있는 우면청춘대학의 사진강좌를 2년째 맡아오고 있다. 사진이 근간이 되어 활동 영역이 확대되었다.
10. 도랑 치고 가재 잡다
대학을 입학하면서 서울 생활이 시작되었고 지금은 경기 고양시 외곽의 한적한 전원 마을에서 자그마한 주택을 지어서 살고 있다. 경제적으로 넉넉하지는 아니하여도 현실을 인정하고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하고 싶은 일 하며 일상을 즐긴다. 즐겁지 않으면 인생이 아니라고 한 어느 노부부 여행가의 생활 철학을 닮아가려 한다. 젊은 시절에 느끼지 못하였던 보람을 느끼며 산다. 전반생보다 후반생을 더 바쁘고 활기차게 보낸다. 그 바탕에 사진이 있다. 많지는 않아도 용돈도 번다. 그야말로 도랑 치고 가재 잡는 형국의 삶을 산다. 2차 성장을 한 셈이다. 하버드대 성인발달연구소 윌리엄 새들러 교수가 “내 생애 최고의 순간을 재창조하는 것이 인생의 2차 성장이라고 말하고 있듯이 제2의 절정기를 만들기 위해 성장을 멈추지 않는다. 변함없는 도전이다. 필자의 이름을 ‘변함없는 용기로 도전하는 남자’로 풀이해본다. 그런 덕분에 누구나 한 번쯤 출연해보고 싶은 KBS 1TV의 ‘아침마당’(2014, 11, 24)에 섭외를 받아 출연했다. ‘다시 시작하는 인생- 나의 두 번째 직업을 소개합니다’란 주제였다. 사진작가로, 은퇴준비강사로 안사람과 함께 출연해 삶의 정점을 새로 찍었다.
11, 생애 최고의 순간을 찾아
세계적 사진작가 프랑스의 마크 리부가 있다. ‘에펠탑의 페인트공’, ‘꽃을 든 여인’ 등 유명한 작품을 만든 현존하는 사진작가다. 기자가 물었다. “선생님의 작품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은 어느 것입니까?” 리부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일 찍을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를 감동하게 한다. 세계 최고의 경지에 이른 작가이지만, 더 나은 작품을 얻기 위하여 계속 노력하겠다는 꿈을 꾼다. 희망으로 산다. 진정한 대 작가의 마음이란 생각이 든다. 그런 마음과 자세가 새로운 경지로의 작품세계를 창조한다고 볼 수 있다. 오늘에 머무르지 않고 발전을 거듭하려는 삶의 철학이, 남이 넘볼 수 없고 흉낼 수 없는 작품 세계를 만드는 것이라 여겨진다. 미래를 향해 또 다른 꿈을 꾼다. 필자 또한 늘 이제 시작이라는 마음으로 아직 오지 않은 생애 최고의 순간을 찾아 도전의 발길을 멈추지 않으련다. 또한 하늘이 인생의 구석구석에 베풀어주신 은혜에 보답하고 경험과 지혜를 이웃과 사회를 위하여 아낌없이 다 쓰고 가리라.
글 배국남 대중문화 평론가 knbae24@hanmail.net
1987년 부산에서 쌍둥이로 태어난 지 3개월 만에 각각 미국과 프랑스로 입양된 사만다 푸티먼과 아나이스 보르디에가 4년 전 SNS를 통해 극적으로 재회한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를 보면서, 그리고 “저 역시 입양아로서 살아온 삶에 대해 긍정적이었고, 아나이스 역시 입양의 어두운 면이나 슬픈 이야기들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저희는 대부분 좋은 시간을 보냈다”는 사만다의 말을 들으면서 우리의 입양 현실에 시선이 향한다.
보건복지부가 최근 발표한 입양 현황 통계에 따르면 2015년 한 해 국내 법원에서 국내외 입양을 허가받은 아이는 1057명에 달했다. 이 가운데 국내 입양은 683명으로 2014년의 637명보다 약간 늘어났지만, 국외 입양은 374명으로 2014년의 535명에 비해 줄었다. 국외 입양아 현황을 보면 미국이 전체의 74.3%로 가장 많고 이어 스웨덴(9.6%), 캐나다(5.9%), 노르웨이(2.7%) 순이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2001년 4206명이던 입양 아동은 2003년 3851명, 2006년 3231명을 거쳐 2013년 2652명으로 크게 줄었다. 그리고 2014년 1172명, 2015년 1057명으로 감소하는 등 입양이 활발하지 못한 상황이다. 입양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 역시 크게 개선되지 않고 있다.
이런 가운데 아이들을 입양해 행복한 가정을 꾸려 입양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며 국내 입양을 활성화하는 데 일조하는 연예인들이 있어 눈길을 끈다. 차인표-신애라 부부, 중견 연기자 송옥숙, 탤런트 이아현, 개그맨 엄용수, 연극배우 윤석화, 가수 조영남, 개그우먼 이옥주 등이 자녀를 입양해 키우는 대표적인 연예인들이다.
여러 아이를 입양해 건강하고 행복하게 키우고 있는 브래드 피트-안젤리나 졸리 부부 등 할리우드 스타들이 일반인의 입양에 대한 인식 전환에 크게 기여한 것처럼 입양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이 엄존하는 한국에서도 차인표-신애라, 이아현 같은 대중의 시선을 받는 연예인 스타들이 입양 문화 활성화에 일조하고 있다.
자녀를 가슴으로 낳아 키우는 연예인들은 입양은 특별하거나 칭찬받을 일이 아니며 입양으로 인해 오히려 자신과 다른 가족이 더 행복해졌다고 입을 모은다.
“정민이(큰아들)에게 하나님이 우리를 부모로 선택하게 했듯 둘째 예은이, 셋째 예진이는 우리가 입양한 것이 아니라 정민이와 다른 방법으로 이 아이들이 우리를 부모로 선택했습니다. 입양은 가정이 절실하게 필요한 아이에게 울타리를 쳐주는 것이며 새 가족과 사랑을 나누는 것입니다. 새 가족이 생기면서 아이가 사랑을 알게 되고 다른 가족들도 입양한 아이로 인해 많은 것을 깨닫습니다. 입양한 예은, 예진으로 인해 가족들이 더 행복해졌어요.” 두 아이를 입양한 차인표-신애라 부부의 말이다.
“결혼 전 입양을 해 아이를 키우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가슴으로 낳은 아이도 배 아파 낳은 아이와 똑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둘째를 입양하고 키우면서 정말 좋았어요. 그래서 셋째도 입양을 하게 됐지요.”신애라의 말이다. 신애라의 적극적인 입양 의사에 남편 차인표를 비롯한 다른 가족들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입양단체 관계자들은 스타 부부 차인표-신애라의 두 아이 입양은 많은 사람들에게 입양에 대해 관심을 끌게 하고 국내 입양 활성화에 크게 기여했다고 말한다.
“입양했다고 하면 왜 칭찬받는지 솔직히 저는 반감이 듭니다. 내 딸들은 나를 있게 해준, 살게 해준 사람들입니다. 딸들이 아니었으면 너무 힘들어서 내가 지금 어떤 모습일지 상상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2007년 첫째 딸 유주(9)를, 2010년 둘째 딸 유라(6)를 입양한 탤런트 이아현이다. 이아현은 입양은 특별한 일이거나 찬사를 받을 일이 전혀 아니라고 했다.
혈연에 대한 집착, 법과 제도 문제 등 한국에서 입양이 활성화하지 못한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자녀들을 입양한 연예인들은 강연과 홍보대사, 그리고 방송 등을 통해 입양에 대한 인식 전환을 위해 다양한 활동을 펼치기도 한다.
입양한 아이를 잘 키워 결혼까지 시킨 코미디언 엄용수는 방송 등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녀 셋 중 둘이 ‘가슴으로 낳은 애들’이다. 피 한 방울 섞이고 안 섞이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사랑으로 가족을 이루면 되는 것이다”라며 입양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설파한다.
입양 홍보대사로 활동하는 연극인 윤석화는 방송 등 대중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우리가 유교적인 사상이 많고, 국내 입양에 대한 편견이 아직도 많은 것 같아요. 외국의 사례나 제 개인적인 경험으로 보면, 정말 아이들이, 생명이 크는 것은 사랑이 가장 우선이고, 오히려 DNA(혈연)보다 더 중요한 게 사랑이고, 환경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아직도 많은 아이가 해외로 입양 가고 국내 입양이 잘 안 된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안타깝죠”라며 국내 입양이 활성화했으면 하는 바람을 강력하게 피력한다.
입양 문화가 이전보다 개선됐다고 하지만 장애아나 혼혈아 입양을 꺼리는 인식은 여전하다. 2015년 한 해 장애나 건강에 이상이 있는 아동 중 국내 입양은 24명이었지만, 해외 입양은 99명이나 됐다. 정부가 해외 입양을 통제하지 않았던 시기인 2002년에는 해외로 입양 간 장애아가 827명에 달했고 국내 가정에 입양된 장애아는 16명에 불과했다.
필리핀계 혼혈아를 2007년 입양해 가정을 이룬 중견 연기자 송옥숙은 “입양한 아이가 혼혈이냐 아니냐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고 혼혈아에 대한 사회의 시선에 개의치 않았다. 아이가 건강하고 행복하게 자라는 것만이 중요했다”고 말하며 장애아나 혼혈아에 대한 입양이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했다.
입양아 가정에서 고민이 많은 입양 공개 여부에 대해서도 연예인의 역할이 커지고 있다. 자녀를 입양한 연예인들 대부분은 외국처럼 입양 공개에 대해 찬성하고 있다. 가수 조영남은 “아이를 입양한 것은 세상의 빚을 갚는 심정이었어요. 아이를 공개 입양한 것은 입양 문화에 대한 인식을 바꿔보려고 한 거예요. 결과적으로 입양 사실을 공개함으로써 아이를 밝게 키운 것 같아요”라고 했다. 차인표-신애라 부부는 “저희가 얼굴이 알려진 사람이기 때문에 비밀 입양이라는 게 거의 불가능합니다. 비밀 입양은 아이에게 그늘을 만들어 주는 것 같아요. 부모야 본인이 선택한 거지만 아무 잘못도 없는 아이들은 비밀 입양을 할 경우 숨겨야만 하는 음지가 생기는 것이지요”라며 입양 공개 찬성 이유를 밝혔다.
개그맨 엄용수는 여섯 살 때 입양해 2007년 결혼해 가정을 꾸린 딸 엄현아(35)씨가 아이를 낳고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며 입양은 세상에서 가장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이라고 다시 한 번 깨달았다며 더 많은 사람이 입양에 대해 긍정적인 인식을 했으면 한다고 당부했다.
“입양은 버려진 아이를 데려다 키우는 게 아니라 소중하게 태어난 생명을 하나의 인격체로 키워내는 것이다. 모든 아이들은 따뜻한 가정 안에서 사랑을 받으며 성장할 권리가 있고, 어린아이들을 사회적 인재로 키워내는 것은 어른들의 몫이다. 입양은 내 삶에 가장 잘한 일이다.” 2003년 공개 입양으로 아들 매튜를 가족으로 맞은 영화배우 故 김진아가 생전에 나와 인터뷰하면서 한 말이다.
사주나 점을 믿지는 않지만, 매번 '무난’, ‘평탄’ 같은 단어가 튀어 나온다. 전반적으로 필자 삶을 돌아 볼 때 과연 맞는 말인 것 같다.
인생 전반의 삶
인생의 여러 중대사가 결정되는 1970년대가 필자 20대 나이였다. 그 시기 대학교에 입학하고 군대에 갔다 오고 취직해서 결혼했으니 말이다. 아들딸까지 낳았으니 더 바랄 것이 없었다. 운이 좋았는지 대학교도 단번에 합격하고 군대도 카투사로 갔다 왔다. 취업도 서로 오라는 데가 많아서 골라서 들어갔으니 요즘 청년들에 비하면 정말 운이 좋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첫 직장에서 아내를 만나고 건설회사인 둘째 직장에서 사우디아라비아, 독일 근무를 하면서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 덕분에 스포츠 장갑을 만들어 수출하는 중소기업에 스카우트 되어 임원으로서 12년간 마음껏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전혀 연고도 없던 회사에 기존 임원들보다 10세 연하인데도 젊은 패기로 승승장구하며 탄탄대로를 걸었다. 입사 6년 만에 단일 바이어에게 거의 의존하던 매출구조를 미국, 유럽, 내수시장으로 확장해 건전한 포트폴리오대로 만들면서 세계 스포츠장갑 1위 업체로 부상시켰다.
1997년 IMF 금융위기는 당시 대표를 맡고 있던 스포츠 브랜드 UMBRO 사업에도 직격탄이었다. 미화로 지급해야 하는 로열티와 수입대금도 막대했지만 국내 시장이 초토화되어 더 이상 사업을 끌고 나갈 수 없었다. 결국 경영책임을 지고 퇴사한 것이 21세기를 두 달 앞둔 1999년 10월이었다. 직장 생활 23년을 마감하게 된 것이다. 나이 49세였다.
묘하게 퇴직 1주일 후 섬유의날 시상식에서모범경영인으로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재직 중이었더라면 큰 축하를 받을 수 있는 자리였으나 찜찜하게 퇴직하고 난 처지라서 가족들과 단출하게 자축할 수밖에 없었다. 퇴직했으니 앞으로가 막막했으나 대통령 표창은 큰 용기를 주었다. 뭔가 큰 힘이 될 것 같은 느낌을 받은 것이다. 실제로 표창은 위력을 발휘했다. 이탈리아 스포츠 브랜드 KAPPA의 한국 런칭도 그 덕분에 이뤄졌다. KAPPA의 성공 덕분에 JAKO 등 다른 스포츠 브랜드 도입도 수월했다. 비즈니스뿐 만 아니라 각종 서류 심사 때도 떨어져 본 적이 없다.
밀레니엄 시대라는 2000년부터 퇴직 이후의 새 삶이 시작되었다. UMBRO 대표 시절에 여러모로 도와줬던 업자가 동대문 사무실에 나와 소일하라며 권유했다. 그의 사업도 도울 겸 필자 사업으로 스포츠 장갑을 수출하던 시절에 가까웠던 바이어들과 연락하며 지냈다. 주문량이 적은 바이어들은 본사에서도 귀찮아하던 것을 필자가 주문을 대신 처리해줬다. 한 바이어는 당시 솔트레이크 동계올림픽의 공식 스폰서가 되면서 대량주문을 해 와서 그때 꽤 짭짤한 수익을 건졌다. 그러나 9.11테러 이후 미국 경기가 급속하게 하락하면서 이 비즈니스도 하락세를 면치 못했다. 중국의 저임금을 활용하여 그나마 주문을 소화했었는데 중국의 인건비가 급속하게 올라 결국 손을 들고 말았다. 여기서 더 비즈니스를 이어가려면 중국보다 임금이 더 저렴한 나라를 찾아다니며 바이어들도 지속적으로 확보해야 했으나 비즈니스는 이쯤에서 접자는 생각이 들었다. 필자 인생도 50 줄인데 돈을 더 벌겠다고 이리 뛰고 저리 뛰다 보면 인생을 낭비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 무렵 필자랑 비슷한 위치에 있었던 사람들이 퇴직 대열에 합류하면서 실패하는 사람도 봤고 건강을 잃고 쓰러지는 사람이 많았다. 건강을 잃으면 모두 잃는 것인데 이럴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번뜻 든 것이다. 그래서 자전거, 등산을 비롯하여 건강을 위한 삶 쪽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여러 가지 시도해본 결과 댄스스포츠가 가장 잘 맞는 운동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댄스 이야기
93년 한국에 댄스스포츠가 체계를 갖춰 상륙하자 백화점 문화센터에 등록했었다. 당시만 해도 댄스스포츠를 제대로 알고 가르치는 곳도 드물던 시절이었다. 독일에 주재원으로 근무할 때 어느 와인 촌 홀에서 백발의 할아버지와 고등학생은 되어 보이는 소녀가 같이 춤을 추는 것을 보고 완전히 매료된 충격적인 일이 기억났다. 그 춤을 제대로 배워보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몇 몇 선생을 거치도 갈증이 그치지 않았다.
그러고는 10년 만에 다시 댄스스포츠에 빠져 들었다. 집 근처 올림픽공원 스포츠교실에서 라틴댄스를 가르치는 데 완전히 매료된 것이다. 한번은 50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댄스 경연대회를 했는데 하루 종일 예선부터 뛰어 최종 챔피언으로 등극하는 일이 생겼다. 춤에 대한 재능을 처음으로 확인한 일이다. 다음 해에도 챔피언 자리를 유지했다.
이 정도 했으면 필자도 배우는 입장에서 가르치는 입장이 되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경기대학교 사회교육원의 ‘댄스스포츠 코치아카데미 코스’에 도전했다. 1년 만에 1, 2급 자격증을 손에 쥘 수 있었다. 이때 올림픽공원에서 가르치던 선생이 영국 유학을 권했다. 댄스스포츠의 본고장은 영국이며 거기 가서 공부하고 국제지도자 자격증을 따가지고 오면 우리나라 댄스 역사에 드문 일이 될 거라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영국에 유학할 준비로 개인 레슨을 받으며 국제지도자 자격증 코스를 공부했다. 6개월 공부 후에 영국 런던의 유서 깊은 ‘쌤리댄스스쿨’에 갔다. 지도교사로 'Technique of Latin Dancing' 이라는 책을 낸 라틴댄스 계의 전설 월터 레어드의 비서였으며 현존 최고의 지도자 준 먹머르도 여사를 만났다. 2개월간 새벽부터 밤늦은 시간까지 집중적인 댄스 공부와 연습을 하며 결국 ‘국제지도자 자격증(IDTA:International Dancesport Teachers Association)’을 따 냈다. 우리나라 사람으로 영국에 가서 이 자격증을 따 온 사람은 몇 몇 댄스 계 원로에 불과했는데 동호인에 불과한 필자가 이 자격증을 들고 들어온 것이다.
개선장군처럼 귀국한 필자 주변에 댄스동호인들이 모여들었다. 그렇게 해서 ‘댄스엔조이’라는 댄스 동호회를 만들었다. 무려 5년 동안 회장을 맡으며 댄스스포츠 동호회를 키웠다. 당시에는 1주일의 거의 절반을 댄스 강습으로 보냈다. 그 과정에 샤리권(권금순)이라는 학원 원장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영국에서 귀국 직후 ‘댄스엔조이-라틴댄스’라는 책을 내려고 ‘댄스스포츠코리아’라는 잡지사에 찾아 갔다가 그 자리에서 편집 기자 자리를 제의받았다. 책도 나왔고 3년 후에는 ‘댄스엔조이-
라틴댄스 실전과 이론’, ‘댄스엔조이 – 모던댄스’, ’댄스엔조이 - 즐거운 댄스 라이프‘ 3권을 동시에 냈다. 그리고 10년 후 낸 ’캉캉의 댄스이야기‘까지 내면서 댄스 칼럼니스트로서 자리를 굳건히 했다. 특히 ‘댄스스포츠코리아' 잡지사의 기자 자리는 필자에게 날개를 달아준 격이 되었다. 세계적으로도 댄스 잡지는 드물지만 국내에서 발행되는 유일한 댄스 잡지라서 권위가 있었다. 국내 댄스 경기 대회나 행사에는 언론사 자격으로 VIP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국내 댄스 계 중요 인사들을 만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취재 과정에서 세계적인 챔피언들을 인터뷰하여 기사화할 수 있었다.
댄스 인생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을 얘기하자면 장애인들과의 만남을 빼 놓을 수 없다. 원래 장애인들과의 만남은 94년 ‘댄스 동호회’에 나온 시각장애인들을 통해서였다. 몇 사람을 가르치고 있는데 혼자는 힘들다며 도와달라고 하여 갔던 것이다. 자이브를 중심으로 가르쳤는데 시각장애인들도 곧잘 했다. 처음에는 물론 막막했으나 그들도 노력했고 필자도 가르치는 노하우가 생겼다. 그들과 함께 여성의날 행사에 오프닝 무대에서 춤췄는데 노무현 당시 대통령이 참석한 자리였다. 시각장애인의날 행사 때도 함께 오프닝 무대를 자이브로 장식했는데 그때는 당시 영부인 권양숙 여사가 참석했었다. 시각장애인의날 행사 때 객석을 보니 대부분 시각장애인이라 보이지도 않는데 춤을 춰봐야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시큰둥했던 필자가 부끄러웠다. 보이지도 않고 댄스화 갈아 신기도 귀찮으니 운동화 신고 그냥 하자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필자 파트너는 진지하게 임했다. 끝나고 사진을 같이 찍자고 해서 또 한 번 놀랐다. “사진을 찍어 봐야 볼 수가 없는데 왜 찍느냐”고 물었더니 아이들에게 자랑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아이들은 정상적인 시력을 가졌다고 했다. 이들과의 만남은 여기까지였다. 그 당시만 해도 장애인댄스대회가 없어 더 이상 끌고 나가기 어려웠던 탓이다.
또 다시 10년만인 2013년 서울시장애인댄스연맹에 코치 겸 선수로 들어가게 되었다. 장애인댄스스포츠연맹이 정식으로 발족하여 전국적으로 경기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너무 나약해서 안마사 시험에도 떨어졌다는 40대 할머니를 파트너로 하여 선수로 출전했다. 처음엔 왈츠 단일 종목으로 동메달을 겨우 땄는데 스탠더드 5종목을 다 연습하고 나니 금메달까지 딸 수 있었다. 한 대회에 3개 부문까지 출전할 수 있으니 출전만 하면 메달을 수확했다. 이 할머니 파트너가 은퇴하고 나서 만난 파트너 중 최고였다. 나이도 40대라 젊고 체형이 날씬했다. 국내 ‘스타킹’이라는 TV 프로그램에 출연할 정도로 플라멩코 춤에서는 인정받는 사람이었다. 이 파트너 덕분에 국립극장에서 있었던 ‘대한민국 장애인 문화예술 대상’에서 대중무용 댄스스포츠 부문에서 수상을 했다. 장애인 댄스경기 대회는 대개 오전 중에 끝나지만 이 파트너와는 일반인들끼리 겨루는 댄스경기대회에도 출전했다. 2014년 여수에서 벌어진 ‘아마추어선수권대회’에서는 오전에 장애인 부문에서 3경기를 뛰고 오후에 일반인들끼리 겨루는 장년부, 일반부, 아마추어부까지 결승에 올라 나란히 우승, 우승, 준우승하는 쾌거도 이뤘다. 스탠더드 5종목을 뛰려면 대단한 체력이 요구돼 세 부분을 연속해서 출전하는 선수도 처음이라며 화제가 되었다. 이 파트너도 건강상 그만두게 되어 아쉬웠다.
2015년에는 새 파트너를 만나 ‘전국체전’에서 동메달을 따는 쾌거를 이뤘다. 비록 동메달이나 덕분에 서울연맹이 ‘댄스스포츠 전국대항전’에서 간발의 차이로 우승할 수 있었고 전체 장애인종목에서도 만년 단골 우승인 경기 다음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글쓰기
필자에게 글재주가 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초등학교 5학년 때이다. 국어시간에 다음 배울 것을 짧게 축약해 오는 ‘짧은 글짓기’에서 늘 선생님의 칭찬을 받았다. 받아쓰기는 늘 만점이었고 국어 성적도 거의 만점을 받았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하는 것. 그래서 글쓰기가 좋아졌다. 그 당시만 해도 책은 구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만화를 많이 본 것이 어휘 구사에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초등학교 5학년 무렵에는 전국적으로 글쓰기 열풍이 불어 학교 내에서는 물론 서울 단위에서도 ‘어린이글짓기대회’가 열렸다. 당시 대회에서 필자는 후배 여학생과 단 둘이 입상하고 돌아와 교내 스피커를 통해 방송도 하고 전체 조회 시간에 교단에 서서 수상작 낭독도 했다. 그 인기 덕분에 전교어린이회장까지 했다.
중학교 때는 문예반 활동을 한 것도 아닌데 당시 ‘학원’이라는 학생 잡지에서 하는 ‘학원문학상’에 응모했더니 수상했다. 당시 학교 정문에 플래카드가 붙기도 했다. 당시 그림도 좋아해서 미술반에 들어갔으나 저녁 식사도 못 한 채 매일 밤 10시까지 버티기가 힘들어 그만 두었다.
대학교에 들어가서 중학교 때 못한 그림 공부에 미련이 남아 사진반에 들어갔다. 그림은 한 장 그리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사진은 셔터만 누르면 되니 적성에 맞았다. 예술사진이니 작품성도 있어야 하고 설명과 제목도 멋지게 달아야 하는데 그림과 글쓰기에 대한 갈증을 한꺼번에 충족시켜주는 것 같아 한동안 사진에 빠져 들었다. ‘전국대학생사진동아리’도 구성해서 활동했다.
사진에 꽂혀 있떤 필작 다시 글에 손을 댄 것은 40대 초반으로 직장에서 자리가 잡혔을 때였다. 젊었을 때부터 외국을 자주 다니면서 느낀 점들을 신문에 독자 투고했는데 인정받았다. 1000여 편의 독자투고 내용을 책으로 3권 냈고 서울 서초구청장으로부터 기록인증서도 받았다.
독자투고는 글이 짧아 하고 싶은 말을 간단명료하게 담아내야 했다. 그러나 글이 길지 않아 갈증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2003년 댄스 동아리를 만들면서 이 갈증을 충족할 수 있었다. 당시 인터넷에 댄스 칼럼을 길게 올린 것이다. 이 칼럼은 인기도 높었다. 그 글들을 모아 2004년 영국 유학 후 ‘댄스엔조이’라는 책을 4권 냈다.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2007년 ‘유어스테이지’에 시니어 리더로 합격하면서부터였다. 블로거를 모집했는데 당시 필자는 블로그가 뭔지도 몰랐으나 그간 인터넷에 올린 글들 덕분에 합격한 것이다. 그때부터 ‘캉캉의 글모음’이라는 블로그를 만들었다. 이 블로그로 2012년에는 ‘대한민국 100대 블로거상’도 받았다. 필자 블로그는 하루 방문객 1500명 내외이더니 2016년 5월 드디어 누적 방문객 300만 명을 돌파했다.
2010년에는 보건복지부에서 주관한 ‘액티브 시니어 자서전 공모전’에서 우수상으로 2등상을 수상했다. 1등상을 수상한 사람은 필자보다 10세 이상 연배로 전쟁도 직접 겪었고 인생을 모범되게 살아 충분히 자격이 있었다. 그런데 정작 방송, 잡지 등에서는 필자에게 출연 교섭을 많이 해왔다. 춤이 그림이 되기 때문이다.
블로그의 힘은 대단했다. 필자 블로그를 검색한 방송, 잡지 등에서 섭외가 많이 들어 왔다. ‘시니어 파트너즈’에서 지원해준 덕도 많이 봤다. 한국의 모든 공중파에 나갔고 케이블 TV까지 합하면 셀 수도 없을 정도로 출연했다. 한 방송국에서는 휴먼 다큐멘터리를 찍는다며 무려 10일간을 매일 녹화하기도 했다.
블로그는 현재 중요한 일과 중 하나이다. 하루에 글 하나는 꼭 올린다. 글을 쓸 때 가장 마음이 편하고 생각이 정리되어 힐링되는 것 같다. 자꾸 희미해지는 기억력을 붙잡으려면 일상이든 독후감이든 영화 감상문이든 바로 써둬야 한다.
사회 활동
초등학교 때 어린이회장을 한 이래로 감투 복은 있는 모양이다. 대학 시절에 4학년이 관례로 맡던 사진반 회장을 2학년 올라가자마자 맡더니 ‘전국대학생사진동아리’’를 결성하여 회장단을 꾸리기도 했다. 군 생활 때도 동기들과 선배들이 즐비한데도 중대 전체의 선임자 역할을 했다. 그리고 참여하는 곳마다 크고 작은 모임에서 회장을 많이 했다. 리더십도 있는 편이지만 말이 많지 않아 카리스마가 있다고 한다. 틀이 좋다거나 돈이 많거나 말을 잘하는 일반적인 요소는 없으나 중심을 잘 잡고 전체와 미래를 보는 시각이 있다는 평이다.
퇴직 후 삶은 IMF 외환위기로 고통받을 때를 생각해 보면 드디어 자유의 몸이 된 것 같은 해방감을 느꼈다. 직장 생활 때 인적 관계는 퇴직 이후 거짓말처럼 멀어져 갔다. 새로 새로운 세계의 사람들을 만나게 된 것이다. 댄스스포츠에 집중한 덕분에 ‘댄스엔조이’라는 동호회를 만들었고 5년간 회장을 맡았다. 동호회를 운영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유어스테이지’에서 공모한 시니어 리더들의 모임에서도 5년째 회장을 하고 있다. 회장 맡은 것을 자랑하려는 게 아니라 회장을 맡은 덕분에 책임감을 가지고 여러 좋은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많다는 것이 좋다. 그런 면에서 ‘브라보 마이라이프’ 기자 활동과 새로 맡은 운영위원회장 자리도 기대가 크다.
요즘은 유난히 발이 넓은 동네 친구 덕분에 ‘한국시니어블로거협회’에 대표로 참여하고 있다. 그 덕분에 ‘KDB 시니어 브리지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동문회 등 거기서 파생되는 여러 모임에도 나가고 있다. 협회 자체의 행사나 프로그램도 많다.
강의도 자주 나간다. 퇴직을 앞둔 우리은행 지점장급 직원들을 대상으로 생산성본부에서 해마다 인생 이모작 강의를 했었다. 200명을 대상으로 하루 8시간 하는 강의이다. 퇴직 후 16년차에 들어섰으니 인생 이모작 선배로서 그간 경험한 퇴직 이후의 삶에 대한 경험을 전해주는 강의이다. 노사발전위원회에서도 공모전 입상을 한 덕분에 비슷한 내용으로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도심권 이모작 센터’’, ‘사회연대은행’ 등에서도 강의를 해오고 있다. 댄스스포츠 강의도 하지만 홀로 살기, 파워 블로거 되기 등 테마도 다양화하고 있다.
필자 스케줄 표를 보면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꽉 차 있다. 동호인들끼리 댄스하는 날, 노래배우러 가는 날, 책 만들러 가는 날, 댄스 동아리 강의 하는 날, 장애인 댄스 교습 및 댄스 선수 연습하는 날이 고정되어 있다. 일요일만 비워두고 있다. 그렇다고 전혀 틈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루는 24시간이고 그런 스케줄은 대부분 저녁 모임이거나 한 나절 정도 걸리기 때문에 나머지 시간에는 다른 스케줄을 소화할 수 있다. 특히 남는 시간은 집 근처에 공유사무실이 있어 글쓰는 데 활용한다.
어떤 면으로 보면 너무 바쁘게 살고 있기 때문에 매력 없는 남자라는 소리를 듣기도 한다. 여유 있게 차 한 잔 하면서 같이 대화라도 나누고 싶은데 필자처럼 바쁜 사람에게 전화했다가는 바쁘다며 거절당할 게 빤하다는 것이다. 휴먼 다큐멘터리를 찍을 때 가까운 사람들 인터뷰가 있었다. 필자도 동석한 자리이므로 좋은 대답을 기대했는데 그런 말을 들으니 충격적이었다. 그래서 절대 바쁜 척 하지 않기로 했다. 그전에는 댄스 하러 가는 날이면 다른 스케줄은 아예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댄스는 어차피 여기저기서 하고 있고 한두 번 쯤 빠져도 큰 문제 아니니 결석을 택한다. 다른 고정 스케줄도 마찬가지이다.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가 60대 중반에서 70대 중반이라는 말이 있다. 과연 그런 것 같다. 아직 건강하고 활동력도 있다. 노후 대비 경제력을 걱정할 정도는 아닌 것도 다행이다. 사주에서 보듯 무난하고 평탄하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인생의 정점에서 ‘브라보 액티브 시니어 인생’을 사고 있는 셈이다.
‘도랑 치고 가재 잡다'는 속담이 있다. 한 가지 일하다 보면 곁들여 또 다른 좋은 일이 겹쳐진다는 의미다. 늦깎이로 시작한 사진 취미가 바로 그런 예가 되었다. 60세에 사진을 배우기 시작하였고, 지금은 그 사진취미가 바탕이 되어서 KBS 1TV ‘아침마당’ 출연을 비롯한 방송활동, 강사, 기자, 저자로 인생이 막을 의미 있고 재미있게 보내고 있어서다. 그뿐만 아니라 용돈도 벌고 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여가를 어떻게 쓸모가 있게 보내느냐를 고민한다. 나이가 들면서 그런 상황은 많아지게 마련이다. 퇴직하면 매일이 일요일인 셈이다. 직장을 다닐 땐 대부분 시간을 바깥에서 보내게 되고 동료나 선후배, 관련 기관이나 거래처의 고객과 어울리며 시간을 무료하지 않게 보낸다. 하지만 직장을 그만두고 난 후에는 그런 인간관계에서 서서히 벗어난다. 그리고 일상이 따분해진다.
수명은 날로 늘어난다.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늘어난다. 머지않아 120세에 이른다고 예측한다. 은퇴 후 보내야 할 시간이 엄청나게 길어진다. 보건복지부와 국민연금공단의 발표로는 60세에 은퇴하여 80세까지 산다고 가정하였을 때도 하루 여가가 11시간으로 따져보면 잔여 시간이 8만 시간에 달한다. 그 긴 시간을 즐겁게 보낼 수 있는 것 중의 하나가 취미생활이다.
그래서 취미활동의 하나로 사진을 택했었다. 나이 60세, 그러니까 2010년 7월부터 사진을 배우기 시작했다. 물론 일반인들과 같이 자동모드로 예전에 사진을 찍기는 하였으나 사진에 대한 지식을 다른 사람으로부터 배우기는 처음이었다. 필자가 사는 고양시 일산동구청에서 무료로 진행한 사진교실에 참가한 것이다. 6개월 과정이고 한 달에 1시간 반씩 세 번의 학습이 있었다. 이 과정에서 사진에 대한 기초지식을 익혔다.
물론 카메라는 큰아들 녀석이 인터넷 쇼핑몰을 할 때 사용하던 작은 콤팩트 카메라를 얻어 사용했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했듯이 취미활동에 끝날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인정하는 공인 사진작가가 되기 위하여 사진을 배우기 시작한 3개월 후부터 도전하였다. 사진작가 명함을 얻는 방법은 여러 갈래가 있을 수 있다. 그중에 하나가 한국사진작가협회가 인정하는 전국사진공모전 수상을 통하여 당해 협회의 정회원이 되는 길이다.
필자는 그 길을 택하고 공모전에 출품하기 시작했다. 다행스럽게 첫 번째로 응모한 제1회 너브내감성사진전국공모전에서 작품 '형상I'이 동상에 입상되는 쾌거를 이루었다. 동상의 경우 사진작가로 등록하기 위한 점수가 3점에 불과하다. 입선의 경우는 2점이다. 지금은 규정이 바뀌었지만, 당시에는 그런 점수의 합계를 50점을 넘겨야 했다. 이를 달성하기 위하여 꾸준히 응모하였다. 입선이 잘 안 되어 포기할까도 수없이 망설인 적도 많다. 그러나 한번 시작한 일을 중도에 포기할 수 없었다. 나태해지는 마음을 재차 다스리며 또 도전하고, 도전하기를 반복하였다. 수도 없이 낙선되었다. 필자의 서재에는 당시에 낙선한 작품들이 가득하다. 지금 다시 그 사진을 살펴보면 역시 낙선할 수밖에 없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떻게 보면 우물 안 개구리였다. 일 년이 채 되지 않는 기간에 목적을 이루긴 하였어도 그 과정에는 수많은 고뇌를 반복하였다.
늘 카메라를 손에 놓지 않고 사진에 대한 공부도 계속하고 있다. 사진 관련 서적도 꽤 쌓였다. 찍은 사진도 500기가 용량의 외장 하드가 6개를 넘어서고 있다. 사진 촬영을 위한 명소로의 촬영여행은 잘 가지 못하여도 이른 아침부터 거의 매일 사진을 찍고 있다.
그리고 사진을 통한 재능기부와 봉사도 곁들인다. 사진강의와 촬영지도를 하며 사진과 관련하여 조선일보사 시니어조선의 사진 명예 기자로도 활동을 한다.
물론 작품을 사진대전을 비롯한 공모전에 출품하여 공개적인 평가를 받기를 좋아한다. 2013년에는 사진의 국전인 대한민국사진대전에 '무한질주'라는 작품을 출품하여 입선하였고, 같은 해 10월에 부산일보사가 주최한 제21회 부일전국사진대전에 '닭장'을 출품하여 우수상을 받은 것도 그런 과정이다.
이러한 사진에 대한 도전과 취미활동은 의 생활에 더없는 보람과 즐거움을 준다. 특별한 재주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가지고 있는 카메라 장비도 일반인과 다를 바 없다. 한 동안 필자는 똑딱이라고 칭하는 소형 디지털 카메라를 사용했다. 그 다음에 며느리가 사용하지 않는 캐논 400D 구형 카메라를 주기에 사용하다가 50만원을 주고 산 중고 500D를 지금도 사용 중이다. 물론 렌즈도 번들형에 가까운 저가형이다.
필자 카메라 장비를 보고 사진을 좀 한다는 사람들은 고개를 갸우뚱한다. 그런 장비로 어떻게 그런 작품을 만드느냐고 되묻는 눈치다.
좋은 카메라는 촬영자를 편하게 한다. 카메라 장비가 뒷받침되지 못하는 필자의 경우는 다른 사람이 겪는 노력의 몇 배를 하여야 한다. 쉽게 말하여 몸으로 때워간다. 자신의 현실을 받아들이며 사는 생활이 노후를 편하게 한다. 뱁새 황새 따라가면 가랑이 찢어진다. 필자 방식대로, 내 형편대로 사는 자세가 필요하다.
사진은 누구나 한번 도전해 보아도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요즘은 주변에 사진을 무료로 배울 기회와 공간이 많다. 그리고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장비도 무척 편해졌다. 스마트폰이 그 중에 하나이지 싶다. 침팬지가 카메라를 들고 있는 모습이 신문의 기사로 뜬 적이 있듯이 사진 촬영이 손쉬워졌고 소셜미디어 시대를 살고 있어서 사진을 찍지 않으면 아니 되된다. 우리는 살아오면서 사진 촬영 경험을 많이 했다. 사진을 잘 찍을 수 있음이다. 다만 사진이론적 측면에서 몇 가지만 가미하면 훌륭한 작가가 될 수 있다. 여러 사람과 또는 자연과 어울리며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사진 취미는 노후에 한번 도전해 볼만한 취미다.
기초연금은 65세 이상 소득하위 70% 이하 노인에게 국가에서 소득에 맞게 차등 지급되는 연금이다. 전 국민에 지급하겠다는 당초 계획이 축소, 시행되고 있으며 상당수 국민은 잘 모르고 있는 실정이다. 65세가 되면 동 주민자치센터에 신청하여야 한다.
국민연금 노령연금은 60세까지 소득 있는 업무 종사 시에 의무적으로 국민연금을 납부한 뒤, 10 년 이상 납부했을 경우 본인이 납부한 기간과 보험료에 따라 연금으로 받는다. 기초연금은 예산은 국가가 부담하고 국민연금공단의 업무협조로 동 주민자치센터에서 매월 지급한다.
2016년 1월부터 개정 시행하는 기초연금 수급자격은 다음과 같다.
65세 이상 대한민국 국민으로 다음 ‘소득인정액’이 단독가구 100만 원, 부부가구는 160만 원 이하자가 신청자격이 있다. 단 공무원연금, 사립학교교직원연금, 군인연금, 별정우체국연금 수급자는 제외한다.
‘소득인정액=1.소득평가액+2.재산의 소득환산액’이다. 소득인정액 산정은 배우 복잡하므로 해당기관에 문의하거나 홈페이지에서 확인이 필요하다.
1.소득평가액=(근로소득-52만 원)*0.7+기타소득
1)근로소득->일용근로, 공공일자리, 자활근로소득 제외
2)기타소득=사업소득+재산소득+공적이전소득+무료임차소득
무료임차소득=시가표준액 6억 원 이상 자녀주택에 거주->연0.78%
2.재산의 소득환산액= {(1+2-부채)*4%+3 }/12
1)일반재산-기본재산(대도시: 1억3500만 원, 중소도시: 8500만 원, 기타지역: 7250만 원) 2)금융자산-2000만 원
3)고급자동차(3000cc 이상) 회원권(4000만 원 이상)의 가액
국가에서 국민을 위하여 시행하고 있는 기초연금! 월 10~20여만 원이 작은 금액이 아니다. 시니어 30년을 재설계해 보면 그 크기를 실감할 수 있다. 월 10만 원이면 원금으로 3600만 원, 20만 원이면 7200만 원이 된다.
국가예산으로 지급을 보장하는 기초연금은 시니어에게 제일 확실한 수입원이 된다. 엄청 큰 재산으로 인식하여야 할 이유이다.
65세가 되면 ‘지공거사’ 신청은 잘하고 있으나, 기초연금에 대하여는 대부분 무관심하다. 기초연금 수급자에 해당되는지 국민연금공단이나 동 주민자치센터에 문의하고 신청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보건복지부 기초연금 홈페이지 www.basicpension.mohw.go.kr
고령화 사회에서 건강한 노인이 덜 건강한 노인을 돌보는 노노케어(老老Care)는 시대적 소명이다. 선진국일수록 보건환경 개선으로 고령화는 필연이며 반면 출산율은 점점 줄어들어든다. 당연히 전체 인구는 고령화와 저 출산이 서로 상쇄되어 별로 줄지 않지만 사회인구는 점점 고령화가 되어간다. 고령화 사회의 노노케어는 젊은이들에게 생산과 후세 교육에 전념토록 할 수 있는 여력을 주고 활동적인 시니어에게 새로운 일자리 창출된다. 필자는 퇴직 후 제2의 인생을 노노케어의 선두에 서겠다는 각오로 이론적인 재무장을 위해 사회복지사 자격을 취득하고 노인운동지도사. 수지침사, 맛사지사 등 다수의 민간자격 시험에 합격하고 지금 치매지원센터에서 치매전문 자원봉사자의 일을 하고 있다.
치매는 고령화 사회에서 환자도 그렇지만 가족도 제일 겁먹는 질환이다. 중풍은 의식이 있는 본인이 괴로운 병이라고 하면 치매는 가족이 고달픈 병이다. 가죽 끈 같은 끈끈한 가족의 유대감이 없으면 한식구라는 관계가 어느 날부터 해체되고 심지어 치매 환자를 죽이기까지 한다. 치매는 병인데도 일반인이 치매에 대해 너무 모르기 때문에 제발 정신 차리라고 환자를 때리기도 한다.
일본에서는 80대의 치매할아버지가 철로를 걷다가 열차에 치여 사망한 사고가 발생했는데 치매할아버지의 법률상 보호자인 할머니에게 열차 지연에 대한 벌금을 부과 하였다. 할머니도 고령인 데다 할아버지의 매 순간을 감시할 수 없었다고 항변하였지만 판사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더욱 의외인 것은 아들에게는 무죄를 선고하며 그 이유로 같이 살지 않는 다는 점을 들었다.
치매환자를 돌보는 봉사자의 한사람으로 치매는 외로워서 생기는 병이라고 감히 말한다. 치매는 영어로 Dementia라고 하고 일본에서는 인지증(認知症)이라고 하지만 한자로는 치매(癡呆)라고 쓴다. 치매 글자는 癡(어리석을 치) 呆 (어리석을 매 )자로 무릎을 탁 칠만큼 치매환자의 상태를 글자의 의미에 잘 담고 있다. 癡 는 병질부 즉 암(癌),병(病)과 같은 병질부를 쓰고 있으며 안에는 의심할 의(疑 )자가 들어있다.
인간관계에서 서로 소통이 없으면 남을 의심 하게 된다. 소통이 없는 치매환자는 의심이 많다. 자기 물건을 자기가 숨겨놓고 숨긴 사실을 잊어버린 채 누가 훔쳐갔다고 남을 의심한다. 심지어는 요양보호로 방문한 요양보호사와 남편과의 관계를 의심하기도 한다.
서로 소통이 원활한 사람은 의심이 있을 이유가 없고 이런 사람은 치매가 없다. 매(呆) 자를 자세히 보면 나무(木)위에 입(口)을 내미는 형상이다. 얼마나 말을 하고 싶었으면 말할 상대를 찾으러 나무위에 올라가서 입을 내밀어 보겠나?
결국 대화 상대를 못 찾고 어리석을 매(呆)자가 되어 치매환자가 된 것이 아닌가하는 연민의 정을 느낀다. 바꾸어 말하면 혼자 외롭게 살면서 말할 사람이 없는 사람이 치매에 잘 걸린다. 사람의 의사소통의 기본이 말인데 말할 상대가 없으면 외로워지는 것은 당연하다. 이렇게 치매 한자를 풀어 의미를 새겨보면서 치매는 외로워서 생기는 병이라는 확신을 갖는다. 치매는 외롭게 혼자 있는 사람들에게 친구하자고 찾아온다. 최근 치매는 노인성 질환이라는 통념과 달리 20∼30대 청년층 치매 환자가 매년 증가하고 있는데 전문가들은 서구화된 식생활과 운동부족, 음주 및 우울증 등을 원인으로 꼽고 있습니다. 필자는 이런 이유 말고도
사람사이의 대화소통에 주목하고 있다. 예전에는 대가족사회며 농경사회여서 가족, 이웃 간 소통은 저절로 이루어 졌다. 나이 들어 노동에 종사 못하고 집에 혼자 남게 된 노인들이 치매에 많이 걸린다. 치매 봉사활동을 하면서 많은 치매 환자분들을 만나보면 대개가 외로운 사람들이다.
현대의 치매 환자의 증가는 점차 대화가 없어지는 가정과 이웃, 현대 사회가 주범이라 생각한다. 1인 세대가 늘어가고 혼자 밥 먹는 사람이 폭발적으로 늘어간다. 사람끼리 모여 있어도 각자 스마트폰으로 카톡으로만 대화한다.
카톡으로 반갑게 대화하던 사람도 실제 만나면 시들해진다. 카페인 중독이라 하여 카톡이나 페이스북 인터넷은 중독에 가깝도록 이용하지만 사람 냄새나는 직접대화는 점점 줄어든다.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서로 키스하는 감질내는 형국이다.
보건 복지부 자료에 의하면 치매로 인한 비용도 2008년 8,625억 원에서 2012년 1조9,234억 원으로 123%나 늘었다. 세부적으로는 의료비(4,826억원→1조1,891억원), 교통비(10억원→23억원), 간병비(3,146억원→6,217억원)와 같은 직접비용이 모두 2배 이상 급증한 것으로 나타났다. 치매로 인한 사회·경제적 손실이 10년마다 두 배씩 증가하는 것으로 추정돼 2020년에는 18조9000억 원, 2030년에는 38조9000억 원으로 예상한다. 그동안 의료과학의 발전으로 획기적인 치료약이 개발되겠지만 가족이 해체되고 이웃과 고립화되어 혼자 살아가는 외톨이들 에게는 치매는 피하기 어렵다고 본다.
은퇴하기 전에 누구랑 어디서 무엇을 하고 지낼 것인가 고민하기 전에 남들과 어울리는 소통력을 시니어들은 키워야 한다. 부부가 함께 해외여행을 가는 것보다 친구랑 함께 가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난다. 부부가 함께 행동을 하면 좋겠지만 3,4십년을 서로 다른 생활을 바쁘게 해오다가 어느 날 퇴직했다고 젖은 낙엽처럼 딱 붙어서 함께 지내려고 하면 평소 못 보던 단점을 자주 보게 된다. 퇴직 후 부부싸움이 잦아지는 부부를 방송에서도 주제로 다룬다.
평소 이웃사촌이라는 동네친구를 사겨야 한다. 좋은 이웃친구란 나와 경제력이 비슷하고 성격이 잘 맞는 사람이다. 시니어들은 살아온 세월이 있어 나와 잘 맞을지 않을지는 금방 알아낸다. 성격상 잘 맞지 않는 부분을 고치려하거나 한두 가지 좋은 점이 있다고 계속 친구로 지내려는 생각은 더 큰 스트레스를 받는다. 나이 들면 성격은 고치기 어렵다. 빨리 헤어져야 한다. 지금 가입해 있는 스포츠나 취미 동호회가 있다면 목숨 줄처럼 꼭 붙들어야 한다. 나이 들어 새로운 모임에 가입하려고 하면 잘 받아주지도 안을뿐더러 혹 받아준다고 해도 개밥에 도토리처럼 외톨이가 되기 쉽다. 그런 면에서 탁구나, 배드민턴이나 테니스 등 적성에 맞는 스포츠를 좀 젊었을 때 배워두면 좋습니다. 필자는 테니스를 30년이나 함께한 동호회가 있는데 주말이면 함께 늘 운동을 하고 식사를 하며 즐거운 시간을 갖는다.
나이 들수록 인문학 공부를 해야 한다. 인문학은 사람과 소통하는 도구요 자산. 필자는 해마다 실시하는 동네 도서관의 독서마라톤 대회에 참가하여 5만 페이지의 책을 읽고 독후감을 제출하면서 상도 받는다. 막연히 하는 것보다 무슨 일이든 목표를 세워서 하면 동기부여가 확실하여 달성하기가 쉽다. 읽은 책의 내용은 자연스럽게 남들과 대화를 할 때 녹아 나온다. 남들과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어울리며 소통하는 여유로움이 치매예방주사다.
담배를 피우는 게 당연했던 시절이 있었다. 담배 한 대 입에 물고, 세상고민을 이야기하는 게 멋있는 모습으로 비치곤 했다. 사회적 분위기 자체가 흡연에 대해 관대했다. 버스나 택시, 극장, 사무실 어디에든 재떨이가 있었다. 끽연가들의 삶에 제약은 없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흡연은 사회적 문제가 됐다. 담배의 성분처럼 흡연자들은 백해무익한 존재로 전락했다. 담뱃값도 껑충 뛰었고, 자칫 잘못하면 벌금도 물어야 한다. 과거와는 달리 비흡연자들이 존중받는 시대로 변했다. 흡연자들은 사회적 인식과 대접에서 거의 천덕꾸러기가 됐다. 폐암 등 각종 질병에 노출될 수 있으니 백 번 끊어야 한다고 말해도, 본인이 느끼지 않으면 금연은 어렵다. 솔직히 말하면, 기자 역시 하루에 한 갑반을 피우는 흡연자로, 주변사람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고 있다. 그래서 더 궁금한 부분이 많았다.
글 박근빈 기자 ray@etoday.co.kr 도움말 임민경 국립암센터 암예방사업부장
흡연은 국제기준(국제질병분류, 미 정신의학회 정신질환 진단 및 통계편람) 상 약물중독으로 기록된다. 흡연을 하면 신경전달물질 니코틴은 인위적으로 뇌 보상회로를 활성화시킨다. 흔히 말하는 도파민으로 인한 쾌감을 일으키는 것. 영화나 뉴스에서만 보고 들었던 코카인, 필로폰 중독과 같은 형태를 띤다.
금연은 남녀노소 모두에게 중요하고 즉각적으로 건강에 이득이 된다. 흡연 관련 질병의 유무와 상관없이 모두에게 적용된다. 경제적 이득이 생기는 것은 물론이고 불쾌감을 조성하는 담배연기, 쩐내도 사라진다. 보다 ‘젠틀한 인간’으로 변한다.
만약 지금부터 금연을 한다면
금연 후 20분이 지나면 혈압과 맥박이 정상으로 떨어지고, 손발의 체온이 정상으로 증가한다. 8시간 후 혈액 속 일산화탄소량이 정상으로 떨어지고, 혈액 속 산소량이 정상치로 올라간다.
2주~3개월이 되면 혈액순환이 좋아지고 폐기능이 증가하기 시작한다. 1~9개월에는 기침, 호흡곤란이 감소하고, 폐의 섬모(점액을 외부로 밀어내는 털과 유사한 작은 구조체)가 정상기능을 회복해 점액배출이 증가하고 폐가 깨끗해지며 감염 위험이 감소한다.
1년이 지나면 관상동맥질환(심장병)에 걸릴 위험이 흡연자의 절반으로 감소한다. 5년 후 구강암, 후두암, 식도암, 방광암 위험이 절반으로 감소하며, 뇌졸중에 걸릴 위험이 비흡연자와 같은 수준으로 낮아진다. 10년이 지나면 폐암사망률이 흡연자의 절반 수준으로 떨어지며 15년 동안 담배를 피우지 않으면 관상동맥질환에 걸릴 위험이 비흡연자와 동일한 수준이 된다.
그러나 금연하기 어려운 이유
담배를 끊어야 하는데 끊기 어렵다는 점을 굳이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본질적으로 이 부분은 누구나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흡연은 폐암 등 각종 질병의 원인’이라는 말로 시작하는 담뱃갑의 경고 문구는 흡연자들에게 너무도 익숙하다.
특히 50대가 되면 암, 심혈관질환, 호흡기질환 등을 포함한 흡연관련 만성질환이 급증한다. 흡연, 그 자체가 수십 년간의 직장생활을 마치고 노년의 건강한 삶을 꿈꾸는 많은 퇴직자들의 삶을 질병으로 좌초시키킨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하지만 담뱃값이 올라도, 피울 사람은 피운다.
그래서 국가 금연사업을 설계하고 있는 임민경 국립암센터 암예방사업부장에게 ‘흡연자를 비흡연자로 만들기 어려운 이유’에 대해 설명을 부탁했다.
“우리나라는 오랫동안 흡연율이 높은 상태였다. 특히 사회를 움직이는 권력계층인 남성흡연율이 높았던 점은 흡연이 ‘정상적’이라는 인식을 갖게 만들었다. 국가금연사업을 진행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부분은 ‘정상적’인 흡연을 ‘비정상적’으로 바꾸는 일이었다. 때문에 개인의 기호를 침해한다는 이유를 시작으로 수많은 항의를 받고 있는 것이 금연사업이다. 그래도 최근 7~8년 사이에 국민의식이 많이 바뀌게 됐다. 다행스러운 부분이다.”
사실 금연의 동기는 굉장히 직접적인 형태이다. ‘아침에 일어나기 힘들다’ 부터 ‘폐암에 걸렸다’까지 몸에 이상이 생겨야 끊으려는 의지가 강하게 생긴다. 몸소 체험하기 전에 하루 빨리 끊어 버리는 ‘해답’을 얻기 위해서는 본인 의지와 함께 도움이 필요하다.
금연 지원사업을 잘 이용하자
우리나라의 금연 지원사업은 다양한 채널을 통해 전국 단위의 금연지원 서비스를 하고 있다는 점에서 선도적 사례로 인식되고 있다. 담배규제기본협약의 조항별 이행률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실제로 금연클리닉은 2005년부터 전국 보건소에서 연간 약 44만 명 정도의 흡연자를 대상으로 금연상담과 니코틴 대체요법을 포함한 금연지원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금연 상담전화의 경우도 2006년부터 전문상담사가 서비스를 제공하기 시작해 최근에는 35명의 전문 금연 상담사가 연간 약 15만 건의 전화 상담을 진행하고 있다.
각각 서비스의 금연 성공률도 높아 보건소 금연클리닉 이용자의 6개월 금연 성공률은 약 49.2%, 금연 상담전화 이용자의 1년 금연 성공률은 약 26% 수준으로 비슷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 국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성공률이 높다.
>>> 금연상담 전화서비스(1544-9030)
금연을 생각했다면, 우선 금연상담 전화서비스(1544-9030)를 이용해 보자. 일반인 누구에게나 금연과 흡연 예방을 위한 정보 제공은 물론 전문 금연상담사가 흡연자에 대해 금연의지 확인, 금연 결심, 금연 실천, 금연 유지 등의 단계별 금연상담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30일 금연프로그램(첫 상담~금연 30일까지)
금연을 원하는 사람이 성공적으로 금연할 수 있도록 30일 동안 정해진 수순에 따라 상담을 해 주는 프로그램. 예약 상담제로 운영하고 있으며 상담 외에 금연지침서와 SMS 문자서비스를 제공한다.
유지프로그램(30일 금연 이후~금연 1년)
30일 금연프로그램을 성공적으로 진행한 비흡연자를 대상으로 지속적인 금연 유지를 위해 지속적인 금연상담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5주째 재흡연 방지하기에 이어, 6주째는 금연이유를 재확인시킨다. 18주째는 금연이득을 생각하게 하고 20주부터는 체중관리 상담도 진행한다. 1년 동안 약 14개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 보건소 금연클리닉
실질적인 치료가 필요하다면 인근 보건소를 찾아가 보는 것이 좋다. 전국 보건소에서는 각 지역 내 흡연자에게 무료로 금연상담 및 금연 치료서비스를 제공(주민등록상 지역주민이 아니더라도 이용자의 접근성과 편의를 고려)한다. 등록 후 금연상담 결심일로부터 6개월간 9회차 이상의 금연상담과 함께 일산화탄소 측정을 포함한 다양한 금연 행동요법을 안내하고 니코틴 보조제, 행동강화 물품을 제공한다.
금연성공 클리닉(등록~6주) 금연 시작과 동시에 보건소에 개인정보가 등록되며, 본격적으로 금연을 위한 상담이 이뤄진다. 금단증상 파악과 대처방법 등을 상담하고 약물요법을 시행한다. 4주, 6주째 금연 성공을 확인하고 보건소 정보시스템에 6주차 성공이 기록된다. 대면상담은 3회 이상, 전화상담은 2회 이상 진행된다.
재흡연 예방(7주~12주) 12주 금연 성공이 확인되면 기념품을 받게 된다. 이때부터 절주, 운동 등 건강행위에 대한 상담을 이어간다. 대면상담과 전화상담은 각 1회 이상 진행된다.
금연 유지기간(13주~24주) 24주(6개월)간 금연 성공이 확인되면 금연성공 수료식을 해준다. 금연 유지를 위한 상담은 계속된다. 추후관리(24주 이후) 24주부터 12개월까지는 금연유지 관리단계다. 대면, 전화, SNS, 이메일을 통해 확인을 받게 되며 금연사업 정보시스템에 기록된다.
>>> 지역금연지원센터
보건복지부는 지역 금연지원센터 18곳(국립암센터, 서울성모병원, 인하대병원, 충남대병원 등)을 선정, 4월부터 3년간(2015~2017년) 기관별로 연 평균 10억원의 국비를 지원키로 했다.
지역 금연지원센터는 의지만으로는 금연 성공이 어려운 중증·고도 흡연자를 대상으로 체계적·전문적 금연 지원서비스를 제공하는데, 금단현상이 발생하는 시기에 금연상담, 의학적 치료, 영양 및 건강상담 등이 포함된 전문치료 서비스를 해준다.
그래도 중요한 것은 역시 의지
다양한 프로그램에 참여한다 하더라도 금연 성공은 본인의 의지 문제로 귀결된다. 실제로 흡연에 대한 갈망으로 금연 초기 3개월 이내에 많은 사람들이 금연에 실패한다. 금연을 한 번에 성공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포기하지 않고 시도하면 할수록 성공률이 높아진다.
무료함, 외로움, 배고픔, 분노, 피곤함을 최대한 피하고 아침식사를 거르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흡연 욕구를 다스리는 네 가지 방법을 소개해본다.
>>> 흡연욕구 다스리기(4D)
Delay(지연하기) 흡연욕구가 생길 때 반응을 지연시킨다. 흡연욕구는 담배를 피우나 안 피우나 몇 분만 지나면 사라질 것. 막연히 참지 말고 당근, 오이, 미역이나 다시마 줄기, 호박씨, 무가당 껌, 은단 등 ‘금연간식’을 활용한다.
Drink water(물 마시기) 물을 마시는 것은 금연을 위한 좋은 방법 중 하나다. 시원한 물은 입속의 감각을 다르게 하여 흡연욕구를 많이 없애준다. 또 물은 니코틴과 각종 노폐물의 배설을 촉진한다.
Do something different(다른 생각하기) 흡연욕구가 강렬할 때는 다른 것에 몰두해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린다. 예를 들면 걷기, 근육이완 체조, 샤워나 목욕, 취미에 몰두하는 것이 좋다.
Deep breathing(심호흡하기) 심호흡은 담배연기를 깊게 빨아들이는 흡연습관을 대체할 수 있으므로 흡연욕구와 금단증상을 다루는 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베이비붐세대의 맏형, 1955년생. 그들은 어떻게 살아왔으며 모든 것이 격변하는 2000년대를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그들의 신념과 가치관, 그리고 맏형으로서 지탱할 수 있는 원동력은 무엇일까? 1955년생의 대표주자를 만나 그들의 삶과 미래를 파악해보기 위해, 먼저 그 첫 주자로 진수희 前 보건복지부 장관을 만나봤다. 새누리당의 브레인인 여의도연구소 소장으로서 17, 18대 국회의원을 역임하며 NGO시민단체 선정 국정감사 우수의원에 6년 연속 자리매김한 그녀는 제48대 보건복지부 장관까지 거치면서 자신의 길을 탄탄히 쌓은 1955년생 대표주자다. 그녀가 말하는 삶과 미래의 이야기.
사진 최유진 기자 strongman55@etoday.co.kr
오랜만에 다시 보게 된 진수희 전 장관의 모습에 조금 놀랐다. 그녀가 과거에 공직에 있었을 때, 항상 정장을 반듯하게 입고 어딘가 경직된 모습으로 사안에 대해 얘기하는 모습이 아직도 인상 깊게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선글라스를 낀 채 캐주얼하게 옷을 입고 정동극장에서 만난 그녀의 모습은 한층 자유롭고 부드러워 보였다. 정치에서 물러난 후 뭔가 달라진 것일까? 영화광이기도 한 그녀는 얼마 전 개봉한 을 보고 오는 길이었다.
“제 별명 알푼수(알면 알수록 푼수)에요”
“요즘은 조용히 지내는 편이에요. 주로 중고등학교 오래된 4인방 단짝 친구들과 만나며 시간을 보내고 있죠. 희한한 게, 이 친구들과 점점 가까워지는 느낌이에요. 10년 전만 해도 만나면 뭔가 미묘하고 서로에 대해 완전히 열지 못한다는 느낌이 있었는데 지금은 모든 걸 털어놓고 얘기하는 사이가 됐죠. 자연스럽게 그리 되더라구요.”
시간이 흐르면서 달라졌다는 건 그런 생활적인 면도 있을 것이다. 예전에 만났을 때보다 지금이 훨씬 부드러워졌다고 말하자 웃으며 대답했다.
“언론을 통해서 절 보면 날카롭고 차갑다고 하지만 직접 만나면 푼수끼도 있다고 하고 그래
요. 제 별명이 알푼수(알면 알수록 푼수)거든요.”(웃음)
어렸을 때부터의 꿈, 기자
1955년 생, 진 전 장관은 대전에서 7남매의 여섯 째, 딸 중에선 막내딸로 태어났다. 중학교, 고등학교 때 서울을 가고 싶었지만 이미 그녀의 형제자매들이 모두 서울로 간 상황이어서, 아버지가 다 보낼 수 없다 하여 대전에서 계속 공부해야 했다. 그러나 대학교는 어쨌든 서울로 가야 할 상황이 됐고, 대개 여자들은 이화여자대학교를 가는 걸 목표로 삼았지만 그녀는 연세대학교를 선택했다.
“공부는 반에서 한 5등 내외였어요. 우리 때 대학 진학률은 높지 않아서, 고3 때 부지런히 공부하면 대학 갈 수 있었거든요. 그런데 담임 입장에서는 연세대를 간 선배가 없어서 연세대에 나를 지원한다 해도 갈 수 있을지 안 될지 확신이 없어서 안 써주려고 했어요. 그래도
난 바락바락 가겠다 하여 마침내 갈 수 있었죠.”
연세대에서 그녀가 선택한 학과는 사회학과였다. 어렸을 적부터 기자가 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기자가 되어 사회의 부조리를 없애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곤 했다. 그러나 그녀는 연구원, 교수라는 연구직을 거쳐 국회의원, 장관의 길을 걷게 됐다. 그녀의 삶은 자
신이 바라는 걸 못 이뤘다고 할 수 있는 걸까?
성공한 삶의 기준은 아이들의 눈
“사실 제 삶이 기자가 되고 싶다는 꿈과 비슷한 행보였지 않았나 싶어요. 기자를 꿈꿨던 것과 삶의 커리어가 비슷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살면서 제가 하고 싶었던 걸 하려고 노력했다고 판단해요. 성공이란 표현까지 쓰긴 그렇지만.”
그녀는 삶의 성공 기준을 돈을 많이 벌고 무언가를 물려주려고 하고 그런 게 아니라 ‘우리 아이들에게 엄마라는 사람이 어떻게 기억되느냐’가 성공의 기준이라고 밝혔다. 자신이 판단하는 게 아니라 자신을 보는 아이들이 판단하는 게 더 옳다는 것이다.
“제가 판단이 흐려질 때면 그런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아이들이 나를 보며 바르게 살려고 하게 만들고자 하는 걸. 제 자식들이 엄마처럼 살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건 싫었어요.”
그녀는 자신이 치열하게 살았다는 말을 듣기도 하지만 순간순간 열심히 산 것뿐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그 ‘열심히’라는 것에는 모종의 자기반성적 측면이 꾸준히 따라다니고 있었다. 정치인이라면 수없이 내놓는 도서 커리어에서도, 그녀는 지금껏 단 한 권의 책만을 썼을
뿐이었다. 장관직을 수행한 이후 내놓은 가 그것이다.
“당시에는 복지 차원에서 매우 중요한 시기였어요. 그래서 복지에 대한 고민을 담은 책을 내놓을 필요가 있었죠. 사람들에게 읽히지 않을 책은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부끄럽거든.”
열심히 살았다는 그녀의 말은 돌아가고 싶은 시절이 있느냐는 질문에 대한 정직한 답으로도 확인할 수 있었다.
“돌아가고 싶은 시절? 별로 없는데…, 제가 다니던 때는 툭하면 휴강에 휴교에 서슬퍼런 시절이라 대학 4년간 공부를 잘 못했던 거 같아서 돌아간다면 그 시절로 가고 싶어요. 굳이 꼽자면 여행 많이 가고 싶다는 생각 들고.”
74학번 대학생 진수희에 물었다. 그녀는 한달 2만~3만원을 주는 입주과외를 하는 등 과외아르바이트를 해야 하는 가난한 고학생이었다고 회고했다. “입주과외는 대학생이 과외 학생의 집에 상주하면서 학습과 생활 전반을 살펴주는 방식이지요. 1970년대에는 대학생 수가 적었고 마땅한 사교육 인프라도 구축되어 있지 않던 터, 주로 정부의 고위 관료나 기업가들이 이런 식으로 대학생을 고용해 자녀들을 교육시켰던 시절이었습니다.”
아직 자신의 집을 갖지 않은 그녀는 집 외에 소유하고 싶은 것에 대해 묻자 ‘내 일, 내 시간’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쯤되면 진 전 장관의 삶에 대한 애착을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지 않을까.
곡절 속에 키워온 어울림과 개척정신 그녀의 삶은 일견 순탄했던 코스로 보인다. 그러나 대
학생 시절엔 아버지가 사업 사기로 인해 집안이 몰락했고 그로 인해 경제적인 고생에 시달려야 했다. 1955년생들이 이후의 격동하는 시대 속에서 겪어야 했던 곡절 또한 그녀에게 어김없이 찾아왔던 것이다.
“1955년생의 특징이라면, 다형제들이 많다는 걸 들 수 있겠네요. 그리고 시골 사람들이라는 것. 장·단점이 있는데, 장점이 많다고 생각해요. 우선 형제자매들이 많은 가족 안에서 자라는 게 좋아요. 독선적이지 않을 수 있고 서로 어울릴 수 있는 방법도 알게 되고. 그리고 우리 부모 세대가 어려운 세대다보니 각자 알아서 커야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자율성과 개척정신,절실함을 갖게 됐죠. 뭔가 이뤄야 한다는 마음을 품을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어요.”
그녀는 요즘 세대는 부모들이 여유가 있다 보니 절실함과 자율성이 다소 약하다고 지적했다. 잘 살아 보겠다는 치열함과 절박함의 원초적인 힘이 사회에 더 기여한다는 자부심. 그 자부심에서 1955년생답다는 증거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못 이룬 꿈 완성시키고 싶어
진 전 장관은 앞으로 대학교에서의 강의는 3년 정도 더할 예정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뒤로, 다시금 자신의 중심을 여의도로 옮기고 싶다는 생각을 밝혔다.
“국회의원을 두 번 하면서 정말 하고 싶고 해야 했던 것들 중 못한 것들이 있습니다. 너무 큰 얘기일 수도 있겠지만, 정치를 바꾸는 일을 좀 하고 싶어요. 초선 재선일 때는 뭣 모르고 분위기에 휩싸이는 정치를 했었어요. 우리 정치가 욕을 먹을 때 저도 그 일원이었던 게 부끄럽기도 하고 죄송스럽기도 하고. 세 번째 기회가 온다면 뭔가 더욱 의미 있는 기여를 하고 싶다는 욕심이 있어요.”
그녀는 2012년 총선 때는 공천 과정에서의 불공정함으로 인해 기회를 가질 수 없었다고 말했다. 민심의 선택을 받지 못한 거였다면 억울하지 않겠지만 그렇지 않았다는 것. 만약 다시 정치의 기회가 온다고 했을 때, 그녀는 다시 복지를 파고들 것이라고 밝혔다.
“정책적으로는 고령화와 저출산 등 복지 쪽에 여전히 관심이 많아요. 특히 보건복지부 장관을 하면서 통계 수치 두 개가 저를 괴롭혔어요. 바로 저출산율과 노인자살률이었죠. 그런 데다 고령화는 너무 빠르게 진행되고 있으니….”
그녀 개인적으로, 다시금 보다 넓은 자리로 가고자 하는 사명감이 확고한 것처럼 보였다.
“이제 제 아이들은 자기들이 알아서 다 커 갈 때니까, 제삶 자체가 중요한 때가 온 거 같아요. 제가 오랫동안 있었던 영역에서의 마지막 도전을 통해서 사회적으로 기여를 하고 싶습니다.”
인생2막, 시니어들의 모델 진출이 활성화되고 있다. 광고에서 런웨이까지 시니어 모델들의 역할이 두드러지고 있고 그 수요도 늘어나는 시점이다.
꽃중년들이 일어날 시기가 찾아왔다. 물론 늦지 않았다. 주목해야 할 교육과정과 선발대회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알아보기로 했다.
시니어모델의 시작 ‘뉴시니어 라이프’
2007년에 시니어 모델사업을 시작해 교육과정이나 인프라가 상당한 곳이다. 서울시설공단과 함께하는 청계천 패션쇼를 비롯해 독일, 연변 등 해외무대에서도 나름 지명도가 높다. 강남캠프, 일산캠프, 성북캠프 총 3개의 교육장을 운영하고 있으며 3~4년차 수강생들이 많이 포진된 것이 특징이다.
‘행복한 패션기업’이라는 비전을 가지고 구하주 디자이너가 설립한 이곳은 교육, 공연, 모델, 제품 사업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주목할 점은 시니어 관련사업의 연령대를 낮추고자 노력한다는 점이다. 60대 기준에서 50대로, 베이비부머를 위한 콘텐츠를 만들겠다는 목표를 잡은 것.
뉴시니어라이프 구다원 국장은 “통상 시니어나 실버의 구분이 없이 관련 사업들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신중년세대들이 완벽히 적응할 만한 콘텐츠가 부족한 것이 현실”이라며 “편하고 하기 쉬운 부분에 초점을 맞추는 것도 중요하지만 질적인 측면에서 완성도를 높이는 교
육을 만들어 가는 데 주력할 시기”라고 말했다.
또 “우리는 관련 교육기관 중에 가장 역사가 오래된 만큼 모델 인프라나 활동 영역에서 독보적인 성과를 보이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녀는 시니어 모델 전문 프로그램에 대한 자부심이 넘쳤다.
뉴시니어라이프에는 경력 3년차 3인방 모델이 유명하다. 이들은 50대, 60대, 70대로 구성됐으며 나이차와 관계없이 친구처럼 편한 모습을 보였다.
맏언니 이오영(70)씨는 지난 세월 외국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남편이 외교관이었기 때문이다. 남편의 퇴직으로 한국에 다시 정착하게 되면서 느낀 외로움을 모델 워킹을 통해 극복했다고 한다.
“손주들이 좋아해서 너무 즐겁고 행복하다. 모델 워킹을 교육받으며 새로운 삶을 얻는 것 같다”는 그녀의 미소에서 넉넉함이 느껴졌다.
특히 “그동안 관절염으로 고생했는데 자세 교정을 통해 건강해졌다”고 말했다.
평범한 전업주부로 살아온 권혜영(62)씨는 모델수업을 통해 성격이 달라졌다. “그동안 자녀들 뒷바라지하느라 시간적 여유가 없었고 선천적으로 내성적인 성향을 가졌었다”는 그녀는 “모델 워킹을 통해 활기찬 모습으로 바뀌어 놀랍다”고 언급했다.
또 “많은 사람들 앞에서는 무대의 긴장감이 있다”며 “이런 긴장감을 통해 에너지와 용기를 잃지 않아 신난다”라고 말했다.
김경순(54)씨는 3년 전 수강생으로 들어왔지만 이제는 보조강사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체형관리와 건강 관리, 순식간에 찾아오는 갱년기 우울증에 이만한 프로그램은 없다고 생각한다”며 “보조강사로 도움을 줄 수 있어 그 행복은 배가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특히 “큰언니와는 나이차가 많이 나지만 같은 관심사로 친구가 될 수 있다”며 자신감을 내비쳤다. 그녀는 지난 30여 년간 골프용품 사업에 매진하며 꾸준한 마라톤으로 몸매 관리를 해왔다고 한다.
뉴시니어라이프 패션쇼 교육은 기초, 전문, 워킹클래스 총 3개 파트로 나눠진다.
기초과정은 50세 이상을 대상으로 4개월(주1회 3시간)간 진행되는데 기본교육, 패션쇼 준비, 패션쇼 공연 순으로 진행된다.
수료 후에는 시니어패션쇼 공연활동에 참가 할 수 있다. 전문과정은 기초과정을 이수한 수료자를 대상으로 6주(주1회 5시간)동안 전문모델교육을 받게 된다. 전문과정을 마치면 본격적으로 시니어모델 활동(광고/사진/패션/미디어/이벤트) 및 시니어모델 워킹강사로 활동할 기회가 주어진다.
워킹클래스 역시 기초과정을 이수한 자를 대상으로 매주(주1회 3시간) 수업이 진행되며 준비훈련을 통해 시니어패션쇼에 올라서게 된다.
재충전의 다크호스 ‘강남시니어플라자(시니어모델워킹)’
“강남시니어플라자의 모델 워킹반이 재미있다고 입소문이 나고 있다” 이 한마디를 듣고 찾아가봤다.
교육은 올해 시작돼 기간이 길지는 않지만 열정 가득한 수업이 매력적인 곳이다. 강남권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 시니어들도 주목하고 있어 분기별로 진행되는 수강신청을 빠르게 해야 한다.
수강생들에게 무대의 현장감을 전달하기 위해 강사 채용에 신경을 쓴 흔적도 보인다.
지난 10년간 패션모델로 일했던 모델 워킹반 이나영 강사는 “시니어를 대상으로 하는 모델 워킹수업은 현 시대가 요구하는 여러 측면을 만족시킬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녀는 현재 대학 강단에 서고 차밍스쿨을 운영하고 있지만 시니어 모델 교육에도 남다른 열의를 보였다.
그녀는 “고령화 시대에 접어든 우리나라 시니어들의 건강, 자신감 그리고 열정을 심어주는 데 큰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며 “우선적으로 소통을 통해 새로움 아름다움을 찾는 것에 주안점을 두고 가르치고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수강생들의 만족도는 어떠할까.
우선 모델 워킹반 수강생 대표를 맡고 있는 홍의정(66)씨는 “나이가 들면 걸음걸이로 나이를 가늠할 수 있다고 하는데, 저는 여기서 배운 올바른 자세 교정으로 뒷모습은 아직도 아가씨 같다는 말을 자주 듣곤 한다”며 자신감을 내비쳤다.
“모델워킹을 하면서 10년은 젊어 진 것 같다”는 그녀의 말에 생기가 돌았다. 그녀는 젊은 시절부터 워킹이나 모델 활동에 관심이 많았지만 잠시 꿈을 포기하고 살았다고 한다.
하지만 지인으로부터 모델 워킹을 배울 수 있는 프로그램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수강신청을 한 후 본격적으로 활동에 집중하고 있다.
김쏙니(64)씨는 “40년간 강남에 거주하며 강남시니어들의 꽃이라 할 수 있는 모델워킹반의
시작과 함께해 개인적으로는 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그녀는 “모델 워킹반에서 재충전의 시간을 갖게 돼 행복하다”며 “앞으로도 꾸준한 활동을 통해 긍정적인 자세로 나이도 몸도 늙지 않는 건강관리에 매진하겠다”며 건강과 미모 두 마리 토끼를 잡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강윤순(64)씨는 “처음에는 습관이 되지 않아 어색했지만, 수업을 통해 건강한 습관으로 자리
잡게 되어 좋았다”고 소감을 밝혔다. 또 “외부 시니어패션쇼에도 용기내서 참여하니 보람차
고 톱 모델 못지않게 나도 멋진 여성이 된 것 같다”는 말도 했다.
시니어 모델 워킹 클래스는 기초와 프로 2단계로 나눠지는데 각각 6개월씩 주1회 수업이 진행된다.
기초과정의 경우 초반 3개월은 자세교정과 기본 워킹을 중심으로 모델로서 가져야할 태도에 대해 교육받고 후반3개월은T자형무대,원형무대등모델워킹실습을받게된다. 프로과정은기초과정 수강한 자를 대상으로 진행되며 본격적으로 패션쇼에 참가하기 위한 전문적인 교육으로 구성된 상태다.
미즈실버코리아 2014
올해 시니어모델을 위한 유일한 선발대회는 미즈실버코리아뿐이다. 시장이 좁기 때문에 경쟁률도 만만치 않다. 참가대상은 50세 이상 여성이라면 누구나 가능하지만 태생적인 아름다움이나 시간을 거스르는 안티에이징이 관건은 아니다.
주최측은 “자신이 살아온 인생 속에서 묻어나오는 경험과 연륜이 몸에서 절로 발현되는 아름다움을 미의 기준으로 삼았다”고 강조했다. 심사 역시 수상자의 삶의 역사, 건강, 지속 가능한 아름다움, 사회봉사에 가장 큰 방점을 두고 있다.
지난 2002년 전주의 한 복지가가 소외된 노년층의 꿈과 미소를 되찾아주기 위해 만든 순수한 목적의 이벤트성 대회로 시작했지만 사단법인 세종문화원과 서울공연 예술센터가 주최하고 보건복지부와 문화예술계의 후원을 받는 큰 규모의 행사로 변모하게 됐다. 대회수상자들에게는 다양한 대외활동 기회가 주어진다.
우선적으로 수상자들은 한류 ‘뷰티 퀸’으로 데뷔하며 방송 MC와 쇼호스트, 연기 등의 분야로 나갈 수 있다. 시니어 뷰티 리더로서 사회봉사활동과 주부 모델, 미즈 모델, 실버 모델로 활동하며 각 단체 및 업체들과 연관된 평생 교육프로그램에도 지도자로서 발돋움할 수도 있다.
“시니어 모델이 된다는 생각으로 무대에서 연습을 해보니 가슴이 벅찰 정도로 희열이 느껴진다. 이제는 프로 모델로 거듭나고 싶다.”
미즈실버코리아 참가자 김지영 (61)씨는 이 같은 포부를 갖고 있었다.
지난 세월동안 육아용품과 화장품 사업에 인생을 바쳤던 그녀는 이번 선발대회를 통해 제2의 인생을 새롭게 설계하고자 마음먹은 것.
그간 사업적인 영역에서 힘써왔다면 이제부터는 제대로 된 모델로서 성장하고 싶다는 말이다.
“탄탄한 몸매를 가꾸기 위해 틈틈이 피트니스센터를 다녔고 화장품 관련업계에 종사했던 만큼 미를 가꾸는데 남다른 소질이 있죠.”
당당한 그녀의 말투에는 내달 진행될 선발대회의 승패와 관계없이 뚜렷한 목표가 보였다.
김지영 씨는 “우선적으로 시니어 모델로서 TV광고나 지면광고, 또 패션쇼 등에 참여하고 싶다”며 “저를 써주신다면 그에 합당한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자신감을 내비쳤다.
그녀는 “모델 활동과 함께 제 인생의 장기적인 목표는 우리 시니어들을 위해 운동이나 화장법, 패션 등을 가르치는 강사로서 나아가는 것”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