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정원사는 우리에게 그리 익숙한 직업은 아니다. 좁은 주거 지역에 많은 인구가 밀집되어 있는 국내 대도시의 특성상 대다수의 한국인은 정원이 없는 주거 형태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그저 사다리에 올라 큰 나무의 모양을 전정가위로 다듬는 영화 속 등장인물이 떠오르는 정도다. 그러나 이제는 아파트에서도 작은 정원을 만드는 사람이 많아지고, 공원이나 화단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정원사는 최근 주목받는 직업이 되고 있다.
콘크리트 빌딩이 빽빽이 들어선 도심 속에 언제부턴가 공원이 들어서고 있다. 이러한 추세는 실제 숫자로도 확인된다. 올 3월 서울시의 발표에 따르면, 지난 2012년부터 2016년까지 5년간 서울 시내에 새로 조성된 공원·녹지는 197개로 나타났다. 총 면적은 188만㎡로 여의도공원의 8배와 비슷한 수준이다.
도시 내의 녹지를 넓히려는 목적은 다양하다. 가장 먼저 지역 주민의 심리적 안정이 가장 크다. 실제로 녹지 공간의 유무는 노령층의 뇌 활동에 영향을 준다는 해외의 연구사례도 있고, 올 초 서울대학교 연구진은 녹지가 적은 지역에 살면 고지혈증에 걸릴 가능성이 1.5배 높다는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도심의 폭염이나 열대야와 관련이 있는 열섬현상을 막기 위해서도 녹지를 계속 늘려야 한다는 의견도 많다. 녹지 공간의 확대는 결국 관리 인력의 수요를 만들어낼 수밖에 없는데 그 직업이 바로 정원사다.
각 지자체에서 앞다퉈 양성
정원사에 대한 개념이 최근 들어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과거에는 개인 정원이나 공공기관의 녹지공간을 관리해주는 개념이 컸다. 조경은 건설과 함께 이뤄지고 정원사는 관리만 한다는 개념이었다. 그러나 최근 정원사의 업무 범위가 넓어졌다. 경기도와 함께 시민정원사 교육을 진행하고 있는 신구대학교 식물원 박종수 과장은 이렇게 설명한다.
“최근에는 정원사의 개념이 확대돼 정원 조성을 위한 디자인과 식물의 구성을 기획하고, 식수(植樹)와 관리 능력까지 두루 갖춘 사람을 말하고 있어요. 정원의 디자인만 하는 ‘디자이너’가 독립적으로 활동하는 경우도 있지만, 요즘엔 정원사가 모든 과정에 관여하고 있어요.”
도시의 녹지가 늘어나면서 각 지자체에는 시민정원사 혹은 시민가드너 양성에 열을 올리고 있다. 지역 주민에게 화초 등 식물의 생육에 대한 정보와 전문지식을 제공하는 대신, 일정시간 이상 자원봉사나 재능기부를 통해 이들을 지역주민을 위한 녹지 공간 형성에 활용하는 방식이다.
대부분의 경우 특별한 자격증을 요구하지는 않지만 국가기술자격으로 한국산업인력공단에서 시행하는 조경기능사, 원예기능사, 화훼장식기능사가 있다.
최근 함께 각광을 받고 있는 도시농업과는 개념이 다소 다르다. 도시농업이 ‘생산’에 초점을 맞춰 건물 옥상 등 사람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 유휴 공간을 활용하는 것이라면, 정원사는 사람의 왕래가 잦은 곳에 녹지를 구성하는 일을 한다.
이러한 제도를 가장 먼저 도입한 지자체는 경기도다. 경기도는 2013년 제1기 시민정원사 84명의 인증을 시작으로 경기도 시민정원사 인증제도를 실시하고 있다. 경기도는 오는 2023년까지 3000명의 시민정원사를 배출할 계획이다.
경기도에서 시민정원사가 되는 일은 그리 쉽지만은 않다. 기본 교육과정인 조경가든대학을 이수하거나 대학에서 관련학과를 졸업해야 지원이 가능하다. 대신 경기도민에게는 75만원의 교육비 중 50만원을 지자체에서 지원한다. 시민정원사 자격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2년간 96시간의 자원봉사에 참여해야 한다.
이들은 수료 후 지자체에서 관리가 필요한 녹지로 파견돼 자원봉사를 하게 된다. 일부 교육기관에 조성된 ‘학교숲’이나 마을의 공한지나 자투리땅의 공원화 등에 참여한다. 땅의 공원화는 범죄율을 낮추는데도 도움이 돼 각 지자체에서는 공원화에 열을 올리고 있다. 식물의 식생에 관한 교육이 청소년의 교화에도 긍정적 역할을 해서, 전북경찰청 등 일부 기관에선 지역 교육기관과 함께 원예치료 프로그램을 운영하기도 한다.
시민정원사 혹은 시민가드너 교육과정은 지자체별로 조금씩 다르다. 각 지자체별로 호칭도 다르고 교육시간이나 운영방식도 지역 현실에 맞추다 보니 제각각이다. 그러나 지역에 자원봉사 형태로 기여할 수 있다는 점은 대부분 비슷하다.
교육 후 소득 기대는 아직 ‘흐림’
화초의 재배나 관리 등은 시니어의 주된 관심 분야이다 보니 실제 교육과정에서도 수강생들이 대부분 은퇴자들이다. 한 지자체 교육 담당자는 “정원을 가지고 있는 참가자가 많다 보니 독특한 교육문화가 형성되고, 커뮤니티의 결속력도 상당합니다”라고 말한다. 지역에 따라서는 경쟁률이 높은 곳도 있다. 일부 지자체는 경쟁률이 2대 1에서 3대 1가량이나 되어 교육생보다 대기자 수가 더 많다. 재수, 삼수가 기본인 곳도 있다.
박종수 과장은 “기본적으로 제대로 된 정원사가 되기 위해서는 1년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나라가 봄부터 겨울까지 사계절이 뚜렷한 기후이기 때문이죠. 또 아름다운 정원을 위해서는 고려해야 할 것이 많습니다. 꽃의 크기, 키, 화색(花色)까지 선택해야 합니다. 우리가 정원에 흔하게 심는 팬지만 해도 50종이 넘습니다”라고 설명한다.
교육 효과는 상당하다. 정원사 교육은 생활 속에서 활용이 쉽기 때문에 개인 정원에서 화초부터 실습해볼 수 있다. 또 심리적 변화는 덤이라고 귀띔한다.
앞으로 정원사의 수요는 더 늘어날 전망이다. 기본적으로 녹지가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데다 다양한 활용 방안이 개발되고 있기 때문. 각 지자체에서 도시정원사 자격을 앞다퉈 도입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가장 최근에는 대구시의회에서도 시민정원사 인증제 도입이 발의된 상태다.
문제는 시민정원사를 바라보는 지자체의 시선이다. 늘어나는 녹지나 공원에 비해 관리할 인력이 턱없이 부족하다 보니 한정된 예산으로 ‘열정페이’만을 강요하는 구조로 정책이 진행되는 것이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 대부분의 작업을 자원봉사에만 의존하는 구조는 결과적으로 직업으로서 정원사의 가치를 떨어뜨리게 된다는 이야기다. 실제로 현장의 교육 관계자들도 아직까지 취업이나 창업은 쉽지 않다고 말한다. 정부기관이나 기업의 수목관리자로 일부 취업이 되고 있기는 하지만 일자리가 극히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소수이지만 화초 판매와 생육 방법 교육을 함께하는 플라워카페를 창업하는 사례도 있다.
서둔야학은 우리 집에서 걸어서 약 20분 정도의 거리에 있었다. 들판을 지나서 가다 보면 5월의 훈풍이 필자의 볼을 간지럽혔고 넓은 들판의 보리가 바람에 넘실대는 모습은 마치 한 폭의 수채화 같았다.
보리밭 한가운데서 종달새는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내려왔다 까불대며 명랑하게 지저귀었고, 멀리서 구슬프게 들려오는 뻐꾸기 소리는 필자의 가슴을 깊이깊이 파고들었다. 그 소리 듣기를 너무 좋아했던 필자는 걸음을 멈추고 귀 기울여 한참 듣다가 다시 발걸음을 떼곤 했다.
논둑길 옆에는 씀바귀와 냉이의 작고 하얀 꽃이 무리 져서 피어 있었다. 토끼풀의 소담스런 하얀 꽃도 귀여운 모습으로 피어 있었다. 토끼풀 꽃을 줄기째 따서 꽃반지를 만들어 끼우기도 하며 학교 가는 길은 마냥 즐거웠다.
“신은 자연을 만들고 사람은 도시를 만들었다”는 말이 있는데, 세상의 어느 것보다도 가장 위대한 스승, 자연은 필자가 혼자 있는 시간을 충분히 만끽하도록 해줬다.
배움의 길은 멀고도 험했다. 아직 어린 시절의 딸애가 그림을 그리며 동생의 눈은 커다란 쌍꺼풀에 왕방울만하게 그리면서 엄마 눈을 그릴 때는 왜 그렇게도 인색한지 볼펜으로 점만 한 번‘콕’찍어놓으면 그만이었다.
대개는 눈이 큰 사람들이 겁이 많다는데 필자는 작은 눈인데도 겁이 많았다. 일단 도착하면 집보다도 더 포근하고 정다운 야학교였지만 사방이 어둑해질 때는 숲길을 가로질러 가야 하는 상황이 질색이었다. 그래서 매번 식은땀을 흘려야 했다. 세상의 온갖 유령과 귀신들이 한꺼번에 몰려와 필자를 괴롭힐 것 같았다.
‘아유 무서워, 언제 다 가지…’
부지런히 걸어도 야학교 가는 길은 매번 까마득했다. 초긴장이 된 필자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온갖 무서운 상상을 떨쳐버리려 애를 쓰며 급히 걸어가던 어느 날이었다. 별안간 앞에 서 있는 소나무 뒤에서 사람이 ‘쓰윽’ 나타났다. 순간 너무 놀랐던 필자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때 황급히 필자를 붙잡으며 “애란아, 나야 나. 괜찮니? 응? 괜찮아?” 하며 누군가 다급히 소리치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알고 보니 선배인 옥희 언니였다. 필자가 오는 것을 본 언니가 슬그머니 장난을 쳤던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얼굴이 하얘지며 쓰러지려고 해서 오히려 언니가 더 놀라며 ‘휴우’ 하고 가슴을 쓸어내렸다고 한다.
“한 글자라도 더 배워보겠다고, 금방 뭐가 불쑥 튀어나올 것 같은 산길을 마구 달려가면 저 멀리 희미한 불빛이 보였지. 기억나니? 전깃불도 없이 호롱불을 켜놓았었지. 바닥에는 가마니를 깔아놓고….”
최근에 야학교 모임에서 만난 민자 언니의 회상이다.
그랬다. 야학교는 이래저래 뛰어서 가야만 했다. 무서워서 또 빨리 공부가 하고 싶어서(공부에 신물이 난 지금 애들에게 상상이 되는 얘길까?)였다. 그리고 빨리 가야 하는 중요한 이유는 더 있었다.
아늑한 산골짝 작은 집에
아련히 등잔불 흐를 때…
미국 민요 ‘산골짝의 등불’의 가사인데 농대 연습림 끝자락에 있었던 서둔야학교는 산 중턱에서 내려다보면 그 가사 그대로였다. 저 멀리 아련히 등잔불이 켜진 것을 보고 있으면 필자 가슴에 뽀얀 봄 안개 같은 그리움이 피어올랐다. 선생님들이 미리 호롱불을 밝혀놓고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책가방이 없어 넓은 소창보자기에 책과 연필 몇 자루 담긴 필통을 넣고 허리에 질끈 동여매고 다녔던 필자는 야학교에 갈 때마다 뛰었다. 선생님들을 빨리 보고 싶어서 길게 자란 풀숲을 헤치며 숨이 턱에 닿도록 뛰었다. 어제도 만났고 조금 후면 보게 될 분들인데도 그새를 못 참고 마음이 그렇게 급했던 것이다. 그때마다 허리춤에서는 연필들이 아프다고 ‘달그락달그락’ 소리쳤다.
훗날 알고 보니 필자만 선생님들을 보고 싶어 한 것이 아니라 선생님들도 우리들이 너무 보고 싶어 방학기간에는 개학날을 손꼽아 기다리곤 하셨단다.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전할 수 없는 상황이 돼서 마음만 동동 구르는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의 문을 두드려주셔요. 이번 호에는 시인이자 야생화 사진작가인 박대문님께서 풀꽃들에게 쓴 글을 보내주셨습니다.
계속되는 가뭄 끝에 단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단비를 가득 품은 바람 소리가 쏴 밀려옵니다. 주룩주룩 낙숫물 듣는 소리가 어느 고운 음악보다 감미롭게 들려옵니다. 얼마나 애타게 기다리던 단비입니까?
어제 산에서 만났던 풀꽃, 그대! 참 안타까웠습니다. 오랜 가뭄에 시들시들 연명하듯 버티는 모습이 참으로 애잔했습니다. 게다가 가뭄 탓에 꽃망울과 새순 줄기에 온갖 물것들이 달라붙어 진을 빠는 통에 제대로 꽃도 피우지 못하더군요. 힘겹게 열리는 꽃잎이 처량해 보이기조차 했습니다. 그런데도 시원한 물 한 바가지 뿌려주지 못하고 진딧물 한 무더기 털어주지도 못했습니다.
가뭄과 물것에 시달려 제대로 피우지도 못한 풀꽃, 사람으로 치면 화장기 없는 병색 짙은 민낯에 카메라만 들이댔습니다. 아니 민낯이 아니라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대의 생식기에 확대경을 들이댄 것입니다. 목마른 갈증, 물것의 시달림을 번연히 보고서 도움도 못 주면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그대의 은밀한 곳만 훑고 지나쳤습니다.
돌이켜보면 그대에게 참 많은 잘못을 저지르고 다녔습니다. 삭막하고 황량한 겨울 지나고 이른 봄이 되면 발밑에 보이지도 않는 작은 풀꽃 하나에 넋을 잃고 홀딱 빠졌습니다. 그러다 보니 같이 나온 새순이나 꽃망울이지만 좀 더 크고 먼저 핀 꽃에만 카메라 앵글 들이대고 옆에 돋아나는 새싹은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밟고 뭉개기 일쑤였습니다.
온갖 꽃들이 다투어 피어나는 봄날과 초여름이면 작고 빈약한 꽃은 본체만체 제치고 화려하고 멋진 꽃에만 매달렸습니다. 꽃이 귀한 시기에는 발밑의 사소한 풀꽃도 애지중지하다가 여기저기 온갖 꽃이 한창일 때는 크고 화려한 것만 중시하고 그렇지 못한 것은 차별하는 변덕을 부린 것입니다. 심지어 예쁜 꽃 곁에 뻗은 다른 줄기를 사진 화면에 잡티 된다며 제치고 꺾기도 했습니다. 어려운 역경 속에 생을 위해 악전고투하는 데도 도움 주지 못하면서 아무런 배려도 없이 은밀한 치부를 사진 찍어 자랑스럽게 내놓고 공개했습니다.
태어난 생체로서 소명을 저버리지 않는 풀꽃, 그대! 좋아하고 사랑합니다. 선택의 기회도 없이 주어진 최악의 환경일지라도 생을 포기하지 아니했습니다. 온갖 주위 역경과 고난을 감수하며 새싹 틔어 꽃피우고 열매 맺어 씨앗을 남기는 데 전력을 다했습니다.
지금은 어디에 가든 경애하는 마음으로 눈 맞춰 인사하고 이름을 불러주며 가슴 깊이 사랑합니다. 꽃 사진 찍으면서 혹시나 새싹을 밟을까봐 삼각대도 거의 쓰지 않습니다. 특히 이른 봄에는. 또한 옆에 다른 풀과 가지가 끼어들어도 웬만하면 그대로 찍습니다. 그동안 관심 밖에 두고 낮춰 보며 함부로 하고 차별한 것 반성하고 뉘우칩니다. 너그러이 용서하고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지금 그대를 사랑하는 마음만큼 ‘나도 그래’라고.
-2017년 8월 모일, 풀지기 올림
말도 느낌도 통하지 않는 풀꽃에게 편지를 보내다니? 이런 편지를 쓰게 될 줄은 생각조차 못했습니다. 우연히 에서 ‘부치지 못한 편지’를 써보라 하기에 생뚱맞게 용기를 냈습니다.
직장생활을 그만두고 무료한 일상을 메꾸기 위해 풀꽃에 관심을 두고 탐사활동을 시작한 지 10년이 되어갑니다. 지금은 생활 중 대부분의 관심 사항이 풀꽃에 있어 카메라 들고 산과 들에 나가 풀꽃을 찾고 때로는 멀리 여행도 갑니다.
풀꽃 탐사활동을 하기 이전에는 풀과 나무를 주변에 그저 널브러져 있는, 아무런 느낌도 감각도 없는 사물로만 여겼습니다. 눈에 띄게 예쁘고 화려한 꽃을 피우면 화초, 아닌 것은 모두 잡초로만 여겼습니다. 이름을 안다는 것이 고작해야 농작물과 채소 일부 그리고 과일 몇 종류뿐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뜻하지 않게 직장생활을 생각보다 일찍 그만두고 나서 무료한 일상과 나름 정신적 안정을 찾기 위해 산·들·꽃에 관심을 두게 되었습니다. 언제든지 찾아가면 만날 수 있고 미소 짓는, 앙증맞게 고운 꽃이 마치 나를 반기는 듯 여겨졌습니다. 그러는 사이 차차 풀꽃 이름을 하나둘 알아가면서 비로소 풀꽃과 새로운 관계가 이루어져갔습니다.
아무리 좋고 귀한 것도 내가 관심이 없으면, 즉 내가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나하고는 아무 관계가 없는 허상입니다. 내가 관심을 갖고 내용을 알아 의미를 두고 보았을 때, 비로소 나와 새로운 관계가 설정되고 서로 의미 있는 상대가 됩니다.
이 세상에 이름 없는 풀꽃은 없습니다. ‘이름 없는 풀’이라며 잡초를 천덕꾸러기 취급하지만, ‘잡초’라는 이름의 풀은 없습니다. 다만, 사람들이 그 이름을 모를 뿐입니다. 풀꽃은 좋든 싫든 선택의 기회도 없이 주어진 환경에서 싹을 틔워야 합니다. 선택 없이 태어난 우리 사람과도 같습니다. 오직 살아야 한다는 대명제를 안고 끈질기게 참고 견디며 살아갑니다. 닥쳐오는 시련 모두를 벌거벗은 몸뚱이 하나로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역경에 아랑곳하지 않고 꽃피워 결실을 보아야 하는 생체로서의 신비로움과 경이로움을 이제야 하나둘 느끼기 시작합니다.
그동안 말 못 하고 느낌 없고 귀하지 않다고 함부로 여기고 다루어왔습니다. 알고 보면 이 세상의 생명체 중 가장 막내가 인간이라 합니다. 그런데도 인간은 마치 지구 상 모든 생명체 가운데 으뜸이고 주인인 양 착각하고 있습니다. 지구에 태어난 것으로 치자면 현생 인류는 식물과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현생 인류의 탄생은 4만 년 남짓입니다. 고생대 석탄기의 양치식물은 차치하고 꽃이 있고 생식기관으로서 씨방이 있는 속씨식물이 탄생한 것만 해도 약 1억4000만 년 전인 중생대입니다. 감히 대비할 수 없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 모두를 좋아하고 사랑합니다. 멀리 해외에 나가서도 우리 땅에 자라는 같은 풀꽃을 만나면 고향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갑고 다정스럽습니다. 외국에 있으면서도 고향 땅인 것처럼 푸근한 마음이 생깁니다. ‘오! 너도 여기에 있네.’ ‘천지만물이 나와 함께 존재하고 한 형제[天地與我 竝存, 萬物與我 爲一]’라는 장자(莊子)의 말이 더욱 실감 납니다.
이제까지의 저의 잘못을 반성하고 뉘우치며 한 말씀 올립니다.
“풀꽃, 그대! 사랑합니다. 그대도 한 말씀만 하소서 ‘나도 그래’라고.”
>>박대문 야생화 사진작가
환경부에서 공직생활을 하는 동안 과장, 국장, 청와대 환경비서관을 역임했다. 우리 꽃 자생지 탐사와 사진 촬영을 취미로 삼고 있다. 저서로 시집 . , 가 있다.
추억은 그리움이고 행복의 고리다.
감감히 멀어져 가는 어린 시절의 아름다운 기억을 되살리는 순간은 더 없는 기쁨이다. 나이가 들어가고 인생의 황혼기에 가까워가면 그 심정은 간절해지기까지 한다. 지나간 날은 고난의 시간이었어도 좋은 날로 기록된다. 그래서인지 사람은 늘 고향을 그리워하게 된다. 고향의 품에 안기면 그냥 여유로워지기 마련이다.
정지용 시인이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 러뇨”라 읊었듯 때로는 달라진 고향 산천에 어리둥절하기도 하다. 그러나 추억은 늘 그대로이다. 고향을 찾은 날은 옛 시절을 떠올리며 추억에 잠기는 즐거움과 잔잔한 행복으로 가득해진다.
필자는 오랜만에 올봄에 고향산천을 찾았다. 지리산 청학동 마을이 있는 청학 계곡이다. 행정상으로는 경상남도 하동군 청암면 일원이다. 지금의 청학동 도인촌에 살던 조부모님은 빨치산을 피해 십여 리 떨어진 아랫마을, ‘대밭 몰(죽동)’로 이주해 살았고 그 마을도 지금은 하동호 댐에 묻혔다. 초등학교 시절에 뛰놀던 동네와 마을 앞을 흐르던 냇물, 설날이면 연 날리던 들녘이 물에 잠겼다.
초등학교 동창들과 밤 새우듯 이야기꽃을 피우다 잠시 눈을 붙였다. 호수에 어리는 아침의 고향 풍경이 보고 싶은 마음에 자는 듯 마는 듯 이르게 눈을 떴다. 어찌 보면 사진을 찍고 싶은 사진작가의 일상적 버릇인 셈이다. 덜 깬 눈을 비비며 카메라를 챙겨 하동호 둘레의 오솔길 자락에 섰다. 태양이 동산을 오르기 전이다. 물안개가 산허리를 옅게 두르고 있다. 산 그림자는 호수에 선명히 드리워져 대칭을 이룬다. 호수로 가지를 뻗은 소나무의 짙은 향내가 코끝에 와닿고 풀잎에 조심스레 앉은 이슬방울이 바짓가랑이를 적신다. 호수를 전망할 수 있는 가장자리에 섰다. 그리고 카메라로 한 폭의 수채화를 그렸다. 청학동이 저 멀리 그려지고 옛 고향 마을이 배치되는 풍경의 구도를 잡았다. 잔잔한 미소의 필자도 하나의 배역이 되었다. 혼자여서 타이머를 활용하여 스마트폰 카메라의 셀카 기능으로 찍었다.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담았다. 필자는 조용히 눈을 감아본다. 추억의 장면들이 주마등처럼 어렴풋이 떠오르고 스쳐 지나간다. 잊혔던 기억이 현장에서 하나둘 살아나고 스르르 행복이 가슴을 흔든다. 호수를 둘러싸고 있는 앞산 건넛산 산자락 숲속에 장끼, 뻐꾸기 울어 에고 산울림 된다. 소년이 되어 “뻐꾹, 뻐꾹~” 흉내 내어본다. 이슬 머금은 여린 풀잎을 꺾어 풀피리 불어보나 예전 같지 않다. 소 풀 먹이던 뒷동산 언덕배기에 밤꽃이 은은한 향기를 흩뿌린다. 호수 가의 대나무 댓잎은 바람결에 서로 부딪히며 고향의 봄을 연주한다. 죽순이 자라는 소리 들리는 듯하다. 옷가지 하나 걸치지 않은 맨몸으로 멱감던 냇가의 조약돌은 물속에 자리해 보이지 않아도 필자는 어느새 고운 돌멩이 하나를 집어 들고 호수를 향해 던진다. 물 위를 튕겨가며 물방개 물결을 만든다. 추억을 둥글게 그렸다 사라진다.
하동호에 묻힌 예전 고향 풍경이 눈에 보이지 않아도 마음속에 뚜렷이 다가온다. 언제 찾아도 좋은 마음의 고향이다. 세월이 쌓이고 인생을 마무리해갈 즈음이면 고향에 돌아가고 싶은 이유인지 모른다. 가끔은 고향의 품에 안겨 지친 다독이며 추억을 되돌려 봄으로써 행복한 시간을 만들 필요도 있지 싶다. 고향의 품에 안겨 커다란 또 한 겹의 행복한 시간 나이테를 그렸다.
허비되기 쉬운 건 청춘만은 아니다. 황혼의 나날도 허비되기 쉽다. 손에 쥔 게 많고 사교를 다채롭게 누리더라도, 남몰래 허망하고 외로운 게 도시생활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머리에 들어온 지식, 가슴에 채워진 지혜의 수효가 많아지지만, 알고 보면 우리는 모두 은하계를 덧없이 떠도는 한 점 먼지이지 않던가. 그러나 살아 있는 동안 한 걸음 더 나아가야만 한다. 어둠 속을 부유하는 먼지의 신세를 면하기 위해, 저마다 나름의 별이 되기 위해, 타성에 젖은 삶을 바꾸는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
스스로 자청한 귀촌이라는 점에서는 유쾌한 도발이거나 즐거운 실험이다. 정착에 성공한다면 주야간에 얻어 누릴 것이 많은, 자못 성대한 사업이 바로 귀촌이라는 논평도 널리 돌아다니는 게 사실이지 않던가. 서울에서 이름 난 회사의 간부로 근무했던 김창승(58)씨. 그는 오래도록 그저 평범하고 무난한 인생을 끌어왔더란다. 퇴근 뒤 주점에 들러 한잔 마시는 일이나, 휴일에 느긋하게 골프를 즐기는 정도를 여흥으로 알고 살았다. 뭐 하나에 빠지면 수면 밑바닥까지 함빡 빠져드는 버릇, 그게 특유의 개성이라면 개성이라지. 본인이 선택한 일을 숭상하는 사람임을 알 만하다. 그런데 아마도 김창승씨가 가장 애호하는 건 아내 김태영(57)씨라는 존재였던 모양이다. 아내는 귀촌의 깃발을 들고 앞장서 나섰으며, 그는 즉각 응했다는 게 아닌가. 그는 ‘충성!’을 속으로 외치며 대번에 아내의 뜻을 따랐던 것 같다. 이를 부부애의 한 절경이라 봐도 무리가 없을 터. 세상의 모든 아내들이 부러워할 정경이렷다. 동쪽으로 가자 하면 일쑤 당나귀처럼 어깃장을 부려 서쪽으로 냅다 뛰기도 하는 게 남편이라는 종족이니 말이다.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아내가 원하는 귀촌을 결행하기 위해 자신의 내부에 들어 있는 생각과 가치관 따위를 새삼스럽게 신중히 점검한 김창승씨는, 귀촌이라는 종목이 사실상 자신에게도 어울리는 탁월한 선택일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고, 이후 매우 신속하게 일을 서둘렀다. 그는 곧장 회사에 사표를 냈다. 2014년 1월 엄동 철에 부부는 마침내 전남 구례군 토지면의 시골로 귀촌했다.
“아내의 고향이 구례입니다. 고향으로 돌아가 인생 후반을 맞이하고 싶다는 게 아내의 소망이었어요. 이 사람은 초등학교 교사인데, 고향의 작은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텃밭농사를 통해 순수한 먹거리를 거두어 먹고, 자연의 품안에서 평온한 생활을 하며 늙어가고 싶다는 바람이 있었던 거죠. 어릴 적의 추억이 서린 시골에 대한 향수가 소박하지만 절실한 꿈으로 부푼 것 같았어요. 가만히 생각해보자니 저에게도 신선한 전환일 수 있겠더라고요. 그래서 바로 일에 착수했습니다. 집안 어른들의 반대가 심했지만 밀어붙였어요. 어느덧 귀촌 3년의 세월이 흘렀는데요. 아내는 물론 저 역시 크게 만족하며 살아갑니다.”
김창승씨 내외가 깃들어 사는 집은 오래된 기와집. 마당엔 갖가지 나무와 화초들이 자라고, 온갖 작물들이 자라는 텃밭도 솔숲처럼 싱그럽다. 낡고 빛바랜 태로 세월의 풍상을 웅변하는 고가(古家)가 자아내는 푸근한 정감. 길차게 자란 채 집을 빙 에두른 대나무들이 뿜는 청신한 기운. 남도의 전형적 농가의 구색이며, 수더분해서 다분히 이상적인 조경이며, 꾸민 바 없이 자연스럽게 잘 꾸며진 미학의 공간이다. 아니, 이토록 고리타분한 집에서 살려고 시골을 내려왔소? 하고 딴죽을 걸 사람이 드물지 않겠지만, 인간이란 저마다 다양한 취향을 관철하며 즐기며 살아가게 돼 있는 동물. 김씨 내외는 이 옛집이 취향과 구미에 맞아 오직 만족스럽다는 거다. 집 뒤 저편으로는 지리산이 거인의 눈을 껌벅이고 있으며, 집의 전면으로는 수려한 섬진강이 요요히 남실거린다. 명당에 들어앉은 집이라 간주한 내외는 이 집을 아예 사서 내 것으로 만들고 싶었으나 여의치 않았단다. 집주인이 집을 팔 의향이 눈곱만치도 없어서였다. 그래서 당분간 그냥 빌려 쓴다.
먹거리 정도는 자급하기로
귀촌이나 귀농을 하는 사람들이 맨 처음 해결할 문제는 단연 거처나 땅을 확보하는 일이다. 게다가 시골의 집값, 땅값은 늘 생각보다 비싸며, 매물 자체가 드물며, 뭘 모른 채 엄벙덤벙 순진하게 덤벼들었다가는 잔머리 굴리는 재주를 가진 이들의 농간에 깜박 속아 넘어갈 수도 있다.
“귀촌 시 가장 어려운 문제는 역시나 들어가 살 집을 장만하는 일입니다. 시골에 빈집은 드물지 않지만, 대부분의 집주인들이 절대 팔지 않겠다는 태도를 취하고 있어요. 도시에 나가 사는 자제들이 언젠가는 들어와 살거나 별장 용도로 쓰겠다는 생각들이니까요. 그렇다면 현지의 사정도 파악할 겸 잠정적으로 세 들어 살 집을 마련하는 게 현명한 방법이지만, 딱히 임대할 만한 집도 드문 게 현실입니다. 저희도 상당한 공을 들이고서야 이 집을 빌릴 수 있었습니다. 우선은 부지런히 발품을 파는 수밖에 없지요.”
“집 지을 땅이나 농토를 구입하려고 10년을 돌아다녔다는 사람도 있습디다. 뜸들이다 늙어버리는 것이죠. 이상적인 터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도 과욕이지 않을까 싶어요.”
“자연 경관이 빼어난 땅을 덜컥 샀다가 낭패를 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개발이나 건축을 할 수 없는 땅을 속아서 사는 케이스죠. 계절마다 땅 사정이 다르다는 점도 유념해야 해요. 여름엔 바람골이라 시원하겠다 싶어 사들였다가 겨울이 돼서야 유난한 얼음골이라는 걸 알고 낙심하는 수가 있으니까요. 땅이나 집의 거래 때 마을의 내부 가격과 부동산 업체에 내놓는 가격차가 크게는 두 배에 달한다는 점도 염두에 둬야 해요.”
“선생 내외는 혹한기 1월에 여길 들어왔어요. 춥고 외롭고 불안하진 않았나요?”
“고가의 보일러를 손보고, 벽지를 바르고, 그러곤 그냥 살았어요. 당시엔 TV도 없었어요. 온천지에 깜깜한 밤이 내리면 7시부터 잠을 잤죠. 그렇게 긴긴 겨울을 좀 스산하게 지냈으나, 어느덧 봄이 왔고요, 그 첫봄은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몰라요. 이어 여름이, 가을이 오가고, 절기에 맞춰 농사가 시작되거나 마무리되고, 온갖 꽃들이 피고 지고, 참으로 감동적이었어요. 꿈꾸듯이 지낸 날들이었어요.”
“일은? 농사는? 그저 자연 풍경을 관람하며 지냈나요?”
“아내가 교직에 있고, 나름 물적 여력도 좀 있고 해서 황급히 돈벌이에 나서진 않아도 되는 여건이었어요. 그렇지만 이왕에 시골에 살게 됐으니 부부의 먹거리 정도는 자급을 하자, 뭐든 소소하게나마 농사도 지어보자는 생각으로 농토 400평을 샀습니다. 거기에 주로 콩을 심어 된장을 만들기 시작했어요. 귀촌과 귀농을 겸한 방식으로 살아온 셈이죠.”
도시라고 왜 매력 요소가 없을까마는, 한결 안전한 삶이 시골에서라고 거저 주어질 리가 있을까마는, 인구와 차량과 소음이 거품처럼 바글거리는 도회의 생활이란 시골에 비해 피로와 고독을 가중시키는 게 사실이다. 차갑고 쓸쓸한 인간관계에서 벗어나기 쉽지 않은 곳, 타산이 없는 동행을 만나기 어려운 장소가 도시이기도 하다. 그러나 경쟁과 긴장이 덜한 시골에서 권태를 피해 생기를 유지하고 행복을 구가한다는 게 용이한 일만도 아니다. 적막하거나 적적한 시골살이에 무기력하게 코 꿰게 된다면 그 역시 낭패가 아닐 수 없다. 김창승씨는 가급적 일을 만들어 거기에 온전히 투신하는 게 복된 삶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 같다. 이즈음의 그는 거의 일벌레다.
“시골 인심은 정말 순후해”
“콩농사와 벼농사, 그리고 양봉도 합니다. 벌통 20개를 운영하고 있어요. 왜 양봉이냐? 지리산 지구인 이곳엔 산야초가 타지에 비해 두 배 정도 많아요. 벌들이 꿀을 물어올 꽃들이 지천이라는 얘기죠. 과수농사도 좀 합니다. 아내는 저보고 일을 벌이지 마라, 좀 편하게 살자, 그렇게 투정처럼 말하지만 일이 즐거우니 어떡하나요? 물론 농사로 아직 수입을 올리진 못하고 있어요. 경험을 축적하는 단계라는 거.”
“구례군 귀농귀촌협회장이기도 하죠? 귀농귀촌인들의 실태에 훤하겠어요. 그들은 어떤 문제에 가장 큰 애환을 느끼죠?”
“만족할 만한 소득을 올리기가 어렵다는 점이죠. 농사로 돈을 만지기란 실로 어려워요. 더구나 막연히 뭔가 잘되겠지 하고 무작정 들어온 경우는 실패하기 십상이에요. 시골에 내려와 살고자 한다면 미리 도시에서 한 가지쯤 기능을 익혀두는 게 현명하다고 봅니다. 목공, 배관, 전기기술, 중장비 또는 숲 해설사라거나, 유용하게 써먹을 기능 분야가 많으니까.”
“마을 주민들과 흐뭇한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어떤 처신이 필요할까요? 융화에 실패하고 패잔병처럼 철수하는 이들이 드물지 않아 묻는 질문입니다.”
“가장 중요한 대목이죠. 흠. 전통 농경사회의 특성이랄까, 시골 주민들은 ‘외지 것들’ 또는 ‘도회지 놈들’에게 일단 경계심을 품게 마련입니다. 개나 끌고 다니며 괜히 거들먹거리는 사람들, 온갖 참견을 하고, 육하원칙을 내세워 따지고 비판하는 부류들을 좋아할 리가 없죠. 제가 온몸으로 느낀 거지만, 시골 인심은 정말 순후해요. 주민들 속으로 겸손하게 들어가야 합니다. 돈 드는 일도 아녜요. 경로당에 수박 한 덩이 들고 가서 노인들과 어울리는 일은 사실 즐거운 일입니다. 마을 사람 하나와 싸움을 하면, 그건 결국 마을 전체에 싸움을 거는 일과 마찬가지라는 걸 알아야 해요. 존중하라! 그리 말하고 싶어요. 우리네 어버이들이 대부분 시골 출신 아니겠어요?”
자아도취엔 리스크가 많지만 겸허한 실천으로는 길이 열린다. 시골이라는 공동체에서 나를 낮추면 뜻밖에도 쏟아져 들어오는 것들이 많다. 우호적인 눈길, 미더운 관심, 끈끈한 유대감이 시골살이를 안정적인 쪽으로 데려다준다. 그렇다면 귀촌이란 수신(修身)이구나! 교만하거나 우매한 나를 독사의 눈으로 냉철하게 돌아봐 교정하는 교실에 들어선 것이라 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자신을 세우되 이웃을 품는 일, 끔찍한 아귀다툼의 세태에서 한발 떼어 자연과 인간에게 순하게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맺는 일, 이는 음풍농월만큼이나 발랄한 자아실현의 길이지 않겠는가.
“아침저녁으로 새롭게 변하는 자연 풍경들이 정신과 영혼을 정화해주는 것 같아요. 이건 도시에선 도저히 느낄 수 없는 행운이죠. 산과 들과 강, 하늘과 별과 숲을 바라보면 때로 눈에 눈물이 가득 차오르기도 하고, 때로는 환희가 가득하기도 합니다. 마치 감동적인 영화를 보고 난 뒤에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할 때처럼…. 이런 경험을 반복하면서 내가 비로소 내 삶의 주인이 되었다는 주체의식과 생기를 깨달아요. 예전엔 아내가 곁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외로운 섬처럼 저를 느끼곤 했으나, 이젠 온전한 기쁨을 느껴요. 뭔가 한층 높고 고결한 곳에 있다는 실감이랄까, 그걸로 만족스러운 겁니다.”
삶의 일상에 자연이 붙어 있을 경우, 행복의 빈도는 더 잦아진다. 강바람에 들이 일어서고 눕는 풍경을 바라보는 일, 나뭇가지 하나를 집 삼아 밤을 나는 박새를 바라보는 일, 별이 모이는 걸 바라보는 일, 이 모든 소소한 풍경들에서 내 심장의 볼륨이 높아지는 걸 깨달을 수 있는, 시골살이란 어쩌면 낙원으로의 입문이다. 낙원의 한 치 곁엔 늘 연옥이 있는 법이지만.
매달 첫 휴일 산행하는 고교동창 산악모임 서등회(박찬선 회장) 회원들은 4호선 대공원역에서 모였다. 더위를 피하여 숲이 우거진 서울대공원 삼림욕장을 탐방하기로 했다.
이곳에 산림욕장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대공원 산림욕장은 경기 과천시의 대공원 외곽을 빙 둘러서 조성되었다. 지하철 4호선 대공원역에서 정문까지는 걷거나 코끼리열차를 이용한다. 산림욕장 출입구는 동물원 안에 있기 때문에 입장료를 지불해야 하므로 동식물원 관람과 산림욕을 함께 할 수 있는 계획을 세우는 것이 좋다.
가뭄 끝에 밤새 쏟아진 단비 덕분에 산천초목이 깨끗하게 목욕하였다. 전철역에서 공원 정문까지 친구끼리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면서 걸었다. 신분증을 들고 줄을 서서 무료입장권을 받았다. 꼼짝 없이 ‘어르신’이다. 이곳은 숲이 우거져 여름철에도 걷기 좋지만 붐비지 않고 시골길처럼 한적하다.
정문을 통과하여 삼림욕장 안내판을 따라 산행을 시작하였다. 대공원 산림욕장은 일반적인 산책보다는 등산에 가깝다. 오르막 내리막이 연달아 이어지기 때문에 간편한 옷차림과 등산화를 꼭 착용해야 한다. 출발점은 서울동물원 호주관 옆으로 나 있는 출입구를 이용하였다.
부채꼴 모양을 따라 산림욕장 전체를 여럿이 도는 데는 4시간 이상 소요된다. 흙산길 탐방로는 비에 젖어 먼지가 나지 않아서 좋았다. 이 산림욕장은 1994년 서울대공원 외곽 청계산 능선에 8km의 길을 정비해 조성됐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연결되는 주길 6.92km, 서울대공원으로 다시 빠져나올 수 있는 샛길 1.08km 구간이다. 등산을 하다 지칠 만하면 벤치와 쉼터가 등장해 한숨 돌려가는 여유를 준다.
산림욕 코스가 동물원 안에 출입구가 있는 데다 청계산 등산로와는 연결되지 않기 때문에 이용객이 적은 편이다. 그래서 봄ㆍ여름ㆍ가을ㆍ겨울 어느 때나 울창한 숲을 독점한 듯 여유롭게 산을 즐길 수 있는 것도 서울대공원 산림욕장의 매력 중 하나다.
산책로 중간 쯤 이르렀을 때, 한 줄기 소나기가 쏟아졌다. 울창한 대숲이 바스락 소리를 내어 속삭인다. ‘소나기는 지나기를 기다리며 피하라’던가. 전망대에서 우산을 들고 빙 둘러서서 임시 뷔페식당을 차렸다. 오이ㆍ토마토ㆍ참외 과일전을 벌이고, 막걸리ㆍ과일주 한 잔으로 이야기꽃을 피웠다.
소나기가 그쳤다. 지나는 사람조차 별로 없는 한적한 산림욕장! 최근 들어 몇 차례나 탐방한 '신대륙‘이다.
요즘 사람들은 ‘김유정’ 하면 아역배우에서 여배우로 잘 자란 김유정을 생각하겠지만 시니어 세대는 단연 소설 과 의 작가 김유정(1908~1937)을 떠올린다. 그 김유정이 아직도 살아 있다면 믿겠는가? 경춘선 김유정역에 내려 유정반점과 유정부동산을 지나 오른편에 김유정우체국이 있는 것을 확인하고 나면 김유정문학촌이 나타난다. 여인의 사랑 대신 만인의 사랑을 지금까지도 흠뻑 받고 있는 작가 김유정이 지금 그곳에 살아 있다.
강원도 실레마을에 김유정이 살고 있다
김유정역에 내려 걸어서 5분도 안 되는 거리에 김유정문학촌이 있다. 김유정문학촌이 자리하고 있는 강원도 춘천시 신동면은 과거에 ‘실레마을’로 불리던 작은 마을로 김유정이 나고 자란 고향이다. 낮은 산으로 둘러싸인 모습이 마치 떡시루 같다 해서 강원도 말로 ‘떡시루’를 뜻하는 ‘실레’가 마을 이름으로 불렸다. 8만 평 규모의 문학촌 안에는 복원된 김유정의 생가터는 물론 소설 속 배경이 됐던 장소들이 곳곳에 숨어 있다. 무엇보다 이 동네가 재밌는 것은 모든 것이 김유정으로 통한다는 점. 전국을 통틀어 사람 이름으로 지어진 역은 김유정역이 유일하다. 또한 ‘봄·봄’, ‘이쁜네’ 등 동네 안의 상점, 음식점, 소소하게 이름 붙여진 모든 것이 김유정과 연관됐다. 작고 조용했던 실레마을은 김유정과 그의 소설들이 살아 숨 쉬는 풍요의 공간이 됐다. 작가들을 기리는 대부분의 공간은 ‘문학관’이라고 불리지만 이곳은 ‘문학촌’이라 이름 붙였다. 사실 이곳에 김유정이 남긴 유품은 따로 없다. 휘문고보 시절부터 절친으로 알려진 작가 안회남(1909~?)이 월북하면서 김유정의 유품도 함께 가지고 갔기 때문이다. 살아생전 작가의 물건이 없기 때문에 생가터를 복원하고 체험관을 열어 일종의 김유정 테마공원으로 조성했다.
김유정의 동백은 노란색이다.
“그리고 뭣에 떠다밀렸는지
나의 어깨를 짚은 채 그대로 픽 쓰러진다.
그 바람에 나의 몸뚱이도
겹쳐서 쓰러지며 한창 피어 퍼드러진
노란 동백꽃 속으로 푹 파묻혀 버렸다.
알싸한 그리고 향깃한 그 내음새에 나는 땅이
꺼지는 듯이 왼 정신이 고만 아찔하였다.”
- 김유정의 중에서
지금까지 김유정의 소설 에 나오는 동백꽃이 흔히 아는 빨간색이라고 생각했다면 소설을 다시 읽어야 할 것 같다. 동백꽃 하면 익히 남쪽에 피는 꽃만 연상해왔는데 알고 보니 전혀 다른 색과 형태를 가진 동백꽃이었다. 강원도 사람들은 노란 생강나무 꽃을 동백꽃 아니면 산동백으로 불렀다. 김유정이 말하는 동백꽃은 노란색 별꽃같이 생긴 것이 촘촘하게 핀 것이다. 언뜻 보면 산수유처럼 생겼는데 꽃 향을 맡아보면 생강 냄새가 난다. 김유정의 동백나무가 궁금하면 동백꽃이 피는 3월과 4월에 꼭 김유정 문학촌에 가보시라. ‘한창 피어 퍼드러진’ 동백꽃의 은은한 향기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루지 못한 사랑 이야기
29세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김유정은 살아생전 두 명의 여자를 짝사랑했다. 인간문화재 제5호로 지정된 명창으로 당대 최고의 인기스타였던 박녹주(1904~1979)와 시인 박용철의 누이동생이자 시인인 박봉자(1909~1988)였다. 일곱 살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여윈 김유정은 휘문고보를 졸업한 해 어머니를 닮은 박녹주를 만난다. 소위 갓 대학에 들어간 남학생이 당대 최고의 인기스타에게 도를 넘어선 구애를 펼친 것. 2년여에 걸쳐 박녹주에게 사랑을 넘어서 집착에 가까운 행동을 했지만 완강한 박녹주의 거절에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고향인 실레마을로 돌아와 주옥같은 글을 남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 한 명의 여자 박봉자가 있다. 1936년 5월호에 ‘그분들의 결혼플랜-어떠한 남편 어떠한 부인을 마지할까’라는 제목으로 김유정과 박봉자가 나란히 글을 올렸다. 일면식도 없던 그녀에게 빠지게 된 것. 30통의 편지를 보냈으나 박봉자는 김유정과 알고 지내던 문화평론가 김환태와 혼인했다. 이후 10개월 후 김유정은 세상을 떠난다. 죽기 전까지 아픈 몸을 이끌고 , , 등을 발표하며 창작에 열을 올렸다. 김유정이야기집에 마련된 오래된 전화기의 수화기를 들어 귀에 가까이 대면 김유정의 구애를 거절하는 한 여성의 단호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문학계에서는 김유정이 누구와 사랑을 이루었다면 좋은 작품을 쓸 수 없었을 것이라 말하기도 한다.
연간 100만 명가량이 방문하는 김유정문학촌은 김유정 문학과 관련한 다양한 문화행사와 공연을 열어 관람객들의 발길을 모은다. 특히 5월의 김유정문학제 ‘봄·봄’이 가장 큰 행사라고. ‘봄·봄’, ‘동백꽃’의 점순이 찾기 대회와 ‘실레마을 닭싸움’ 등이 인기 프로그램. 닭싸움은 실제 닭들이 겨루는 행사였으나 동물학대 논란이 있어 올해부터 사람들이 닭싸움을 하는 놀이로 바뀌었다. 매년 3월부터 10월까지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김유정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과 호흡하는 ‘김유정문학촌’이다.
이용 정보
주소 강원도 춘천시 신동면 김유정로 1430-14
전화 033) 261-4650
관람시간 동절기 9:30~17:00 /하절기 09:00~18:00
휴관일 매주 월요일, 1월 1일, 설날 및 추석 당일
입장료 개인 2000원 / 단체(20인 이상) 1500원
아침 출근길에 ‘기다리고 기다리던’ 비가 내린다. 정말 모처럼의 단비다. 제발 대지를 흠뻑 적셔주면 좋겠다. 바싹바싹 타 들어가는 농심이 얼마나 고대한 비인가. 그러나 좀 내리나 하던 빗줄기는 야박하게도 금세 그쳐버린다. 또 태양이 쨍쨍한 햇볕을 내리비추며 심술궂게 혀를 내밀고 있다.
태양을 피하는 방법? 뭐 그런 게 있을까 싶지만 문득 떠오르는 곳이 있다. 피하기보단 오히려 태양을 기꺼이 즐길 수 있는 대표적인 곳, 바로 부산이다. 부산은 가끔이 아니라 수시로 생각하는 곳이다. 벚꽃이며 목련이며 봄꽃 소식에서부터 부고장이며 청첩장까지 줄줄이 달리는 SNS 댓글들 속에서 말이다.
지난 6월 1일 전국에서 처음으로 해수욕장을 개장한 부산은 지금쯤 작열하는 태양을 피해 해운대로 찾아든 사람들로 벅적일 것이다. 필자도 이참에 올여름 휴가지로 부산여행이나 추천해볼까?
부산이 처음이라면 동백섬 한 바퀴 돌고 해운대 백사장 거닐다 달맞이고개에서 야경에 취할 수 있는 데이트 코스도 있고, 줄서서 먹는다는 대연동 쌍둥이 돼지국밥에서 민락동 회센터로 이어지는 식도락 코스도 좋고, 남포동 자갈치시장과 국제시장을 누비는 지름신 쇼핑 코스도 있다는 것을 알고 가면 좋겠다.
필자는 초등학교 3학년 때 전학 와서 대학 졸업 때까지 약 18년간을 살았으니 그야말로 청춘의 황금기를 오롯이 보낸 곳이 바로 부산이다. 몇 년 전엔 졸업 후 약 30여 년 만에 초등학교를 찾아가기도 했다. 학교 정문 앞에 있던 문방구가 아직까지도 있는 걸 보고선 너무 놀랍고도 반가워 한참을 쳐다보며 닫힌 문이 열리길 기다렸다. 그리고 간절함이 통했는지 이젠 칠순이 훌쩍 지난 그 옛날의 문방구 아저씨와도 짧게나마 재회의 기쁨도 누렸다. 추억의 키워드를 나열하자면 끝이 없을 것이다.
오륙도의 윤슬!
남구 용호동 끝자락을 밟으면 눈앞에 좌~악 펼쳐지는 장관이 있다. 부산을 대표하는 아이콘 중 하나인 오륙도가 바로 그곳이다. 오늘 같은 날 햇빛에 아롱질 그 눈부신 윤슬(햇빛이나 달빛에 비치어 반짝이는 잔물결)은 정말 혼자 보기엔 아까운 풍경이다.
좌측으론 광안대교를 굽어보며 우측으론 해운대 달맞이고개를 조망할 수 있는, 해안절경을 따라 이어진 길도 너무 매력적이라 쉽게 설명할 길이 없다. 또한 몇 년 전에 개장된 스카이워크에서 내려다보이는 벼랑 끝, 그 넘실대는 파도에 부서지는 바위섬은 아찔한 스릴과 폐부를 찌르는 쾌감을 가져다준다. 그리고 이때다 하고 ‘부산 아지매’들이 권하는 회 한 접시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재주가 없다. 흥정 연습이라도 미리 해둬야지 싶다.
철썩이는 밤바다에 풍경소리, 해동 용궁사!
해운대를 돌아 기수를 북쪽으로 돌리면 금방 닿는 곳이 있는데 최근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와 '몸살'을 앓고 있다는 용궁사다. 바닷가 해안을 따라 조성된 덕분에 용궁사라는 이름이 정말 기가 막히게 어울리는 절이다. 낮 시간대의 비경도 일품이지만 필자는 밤 시간대의 관람을 권하고 싶다. 칠흑 같은 어둠속에서 철썩철썩 귓가를 때리는 파도소리와 바람결에 실려오는 풍경소리가 로맨틱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곳, 그 밤바다의 ‘콜라보레이션‘은 한마디로 끝내준다.
‘Kiss in the dark’은 바로 이런 곳에서 해야 한다. 애독자들이시여, 부디 ’낮 뜨거운‘ 시간을 피해 어둠을 틈 타 살짝궁 다녀가시길 권한다. 참고로 인근의 송정해수욕장 바다 산책로도 추천한다.
제주에 올레길이 있고 서울에 둘레길이 있다면, 부산엔 갈맷길
와우~ 여긴 또 어디일까? 부산 앞바다 남서쪽 끝부분에 위치한 송도해수욕장에서 암남동으로 이어진 해안절경 길인 송도 갈맷길을 빼놓을 수 없다. 최근엔 케이블카까지 재가동 했다고 하니 올 여름 ’핫 플레이스‘가 되지 않을까 싶다. 빨리들 다녀가시라.
어떤 투어이든 일단 여행길엔 입이 심심해선 안 된다. 돼지국밥이나 곰장어 구이, 밀면, 물회도 있으니 입맛 따라 고르면 된다. 부평시장 야시장(일명 깡통시장) 구경하며 거인통닭 시식도 권할 만하다. 인근의 보수동 헌책방 골목에서 독서삼매경에 빠져보는 것도, 단팥죽 한 그릇 하는 것도 이열치열엔 그만이겠다.
아~ 부산, 그곳에 가고 싶다.
가문 땅을 적시는 단비가 내린 다음날 아침, 서울시가 주최하고 국제 펜클럽 한국 본부가 주관하는 서울 詩 기행을 나섰다. 미세먼지도 말끔히 걷히고 길가의 초여름 나무들은 상큼하고 싱그러워 내 삼십대를 떠올리면서 정동골로 향했다.
정동은 근대사가 곳곳에 살아 쉼 쉬는 곳이요 덕수궁 돌담길은 내 데이트 코스이기도 했기에 감회가 새로웠다. 덕수궁의 동문인 대한 문을 들어서자 비운의 역사가 되살아나는 듯 마음이 침울했다. 고종이 야심차게 자주적으로 선포한 이란 국호와 란 년호의 맥이 끊긴 곳이기도 하다. 고종황제가 러시아 공사관으로 아관파천 했던 곳도 다시 돌아온 곳도 이 곳 경희궁(덕수궁)이었다. 1918년 경술국치로 완전히 국권을 일제에 빼앗겼으며물론 외교권도 빼앗겼다 얼마 후 이곳에서 강제 퇴임 당하는 치욕의 장소이기도 했다. 비운의 왕 고종의 승하는 3.1운동의 기폭제가 되기도 했다. 주인 잃은 석조전은 유일한 서양식 건축물인데 고종이 귀빈을 만나거나 외국 손님을 만날 때의 장소였다. 지금 봐도 품위 있고 멋이 있었다. 그 앞 느티나무 한 그루가 옛 주인을 생각한 듯 푸른 잎을 떨어뜨려 날리고 있었다.
배재학당 박물관에 가니 보수중이어서 들어가지 못했으나 부활절 아펜젤라의 기도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조선 백성을 얽어맨 결박을 끊고 자유와 빛을 주옵소서”라는 간절함을 담은, 그는 한양 정동에 한옥을 구입하여 4명의 학생으로 교육을 시작하고 고종으로부터 배재학당이란 학교명을 부여 받고 배재학당을 세웠다고 한다. 이곳에서 서재필과 이승만이 나왔고 시인 김소월이 나왔다. 그리고 후에 카프문학의 발상지가 되기도 했다. 카프문학의 주 멤버인 박세영 박팔양 나도향 이런 시인들이 배재학당 출신들이다. 박세영의 그 유명한 시 는 노래로도 불려져 북한에서는 성악가 조청미가 불렀다 한다.
1 임진강 맑은 물은 흘러흘러 내리고
뭇새들 자유로이 넘나들며 날건만
내 고향 남쪽 땅 가고파도 못가니
임진강 흐름아 원한 싣고 흐르냐
2,3 단원 중략
남극에서 왔나
북극에서 왔나
산상에도 상상봉
더 오를 수 없는 곳에 깃들인 제비.
너희야말로 자유의 화신 같구나,
너희 몸을 붙들자 누구냐
너희야말로 하늘이 네 것이요 대지가 네 것 같구나
녹두만한 눈알로 천하를 내려다보고,
주먹만한 네 몸으로 화살 같이 하늘을 꿰어
마술사의 째찍 같이 가로 세로 휘도는 산꼭대기 제비야
중략
나는 차라리 너희들 같이 나래라도 펴 보고 싶구나
생략
나더러 진달래꽃을 노래하라 하십니까
이 가난한 시인더러 그 적막하고도
가냘픈 꽃을
이른 봄 산골짜기에 소문도 없이 피었다가
하루 아침 비바람에 속절없이 떨어지는 꽃을
무슨 말로 노래하라 하십니까?
노래하기에는 너무도 슬픈 사실이외다
백일홍처럼 붉게붉게 피지도 못하는 꽃을
노래하느니 차라리 붙들고 울 것이외다
친구께서도 이미 그 꽃을 보셨으리라
이분들의 시를 읖조리다보니 역사의 숨결이 아프게 다가오는듯 하다.
시인 송시월은
전남 고흥 출생, 1997년 월간 으로 등단, 계간 책임 편집.
저서로는 시집 시문학사 이 있다.
한의학에서는 약재와 사람에 대해 차갑다, 뜨겁다는 말을 자주 한다. 한의학을 모르는 사람이라도 자신의 체질이 더운지 찬지 어림짐작은 하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더운 체질, 찬 체질은 어떻게 구분하는 것일까?
덥다는 것과 춥다는 것은 활동성의 차이다. 더워지면 빨리 움직이고, 차가워지면 천천히 움직인다. 일종의 운동에너지라고 할 수 있다. 자연을 살펴보자. 더워지면, 봄여름이 되거나 낮이 되면 만물은 땅 위로 솟구쳐 자란다. 잎과 꽃을 틔우고 피우며 움직이며 에너지를 발산한다. 추워지면, 즉 가을겨울이 되거나 밤이 되면 만물은 땅속 또는 집 안으로 들어간다. 잎과 꽃을 오므리고 움츠리며 활동을 최소화시키고 잠이 든다. 여름에는 음식물이 빨리 부패하지만 겨울에는 잘 상하지 않는다.
동물은 크게 변온동물과 항온동물로 구분한다. 변온동물은 계절과 낮밤의 변화에 그대로 순응한다. 하지만 사람은 항온동물이라 계절 변화에 그대로 따라가지 않고 항상성을 유지하려고 한다. 즉 36.5℃의 체온을 유지하려고 한다. 여름에 덥거나 운동해서 열이 나면 인체는 열을 식히기 위해 땀을 흘린다. 겨울에 춥거나 몸이 차가워지면 인체는 추위를 극복하려고 몸을 떨거나 이를 부딪친다.
인간의 체온은 36.5℃ 근방이라고 하지만 실제로 체온은 늘 변한다. 화가 나도 올라가고 술을 마셔도 올라가며 밥을 많이 먹어도 올라간다. 반대로 굶으면 내려가고 마음이 안정되어도 내려간다. 한의학에서 사람의 체질에 대해 ‘뜨겁다, 차갑다’고 표현하는 것은 체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체온이 올라가려는 성향인지, 내려가려는 성향인지를 두고 표현하는 말이다. 즉 체질이라는 것은 속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가속도를 말하는 것이다.
더운 체질의 사람의 체온은 36.5℃보다 높아지려는 경향이 있다. 이럴 때 몸은 땀을 흘리거나 소변과 대변을 보거나 가래, 탈모, 눈꼽 등으로 열을 밖으로 배출하거나 찬물을 찾는다. 일종의 자가 수랭식으로 열을 식혀 36.5℃의 체온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또는 피를 체표면으로 보내 얼굴이나 손바닥, 피부가 붉어지는데, 일종의 공랭식으로 체온을 조절하는 것이다. 더 심하면 피부병, 염증으로 열을 내보내 몸을 식히기도 한다. 이렇게 해서 36.5℃의 항상성을 늘 유지하려고 한다. 그래서 더운 체질의 사람은 기운이 충만해 목소리도 크고, 활동량도 많으며, 식욕도 좋다.
찬 체질의 사람의 체온은 36.5℃보다 낮아지려는 경향이 있다. 이런 사람은 자주 오한을 느껴 옷을 껴입거나 움츠리거나 따뜻한 물을 찾는다. 또 핫팩을 껴안고 살거나 밤에 소변을 자주 본다. 이런 식으로 36.5℃의 체온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그래서 찬 체질의 사람은 기운이 약해 목소리도 작고, 활동량도 부족하고, 식욕도 좋지 않다.
이처럼 더운 체질, 찬 체질이라는 표현은 36.5℃라는 수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뜨거워지거나 차가워지려는 경향성, 즉 벡터(vector)를 말하는 것이다.
약재의 성질이 뜨겁다, 차갑다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살아가는 환경에서 더워지려는 노력을 하는지, 차가워지려는 노력을 하는지 그 경향성을 보는 것이다. 바나나, 야자는 무더운 열대에서 살아남기 위해 증산작용으로 땀을 흘려 차가워지려고 노력한다. 두리안도 열대에 살지만 자신의 몸을 뜨겁게 해서 외부 열기가 열기로 느껴지지 않도록 적응했다. 그래서 그 약성도 뜨겁다. 사막의 선인장은 고온건조한 환경에 대응하기 위해 진액을 머금고 스스로 서늘해지기를 선택했다. 가평의 잣나무와 소나무는 잎을 침엽수로 만들어 열을 보존한다. 그래서 겨울에 잣을 먹고 송편에 솔잎을 넣고 쪄서 추위를 이기도록 돕는 것이다. 이러한 약재의 노력을 몸에 재현시키는 것이 한약이다.
시베리아에 사는 근골이 단단한 사람에게 제주도의 잣을 먹이면 열 보존에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제주도에 사는 허약한 사람에게 시베리아의 잣을 먹인다면 열과 에너지 보존에 효과를 발휘할 것이다. 환경에 적응하려는 생물의 선택이 한열로 나타난다. 따라서 같은 종이라도 살아가는 환경에 따라 한열의 정도가 다를 수 있다.
더운 체질은 식욕이 좋아 많이 먹는 경향이 있다. 또 몸에 찌꺼기가 남아 피가 탁하고 성인병이 생기기 쉽다. 이런 사람은 열대의 서늘한 열매나 넓은 잎채소를 먹어 피부를 통해 열이 쉽게 발산되도록 해줘야 한다. 쌀은 안남미나 묵힌 쌀, 통곡을 먹는 것이 좋다. 그리고 수생식물과 해조류 섭취를 통해 피를 맑게 해주는 것이 좋다. 여름에 더위가 심하면 미숫가루나 콩국수를 자주 먹는데, 더운 체질에게는 평소에도 적합한 음식이다.
찬 체질의 사람은 식욕이 없는 편이고 기운도 없다. 이런 사람에게는 속을 따뜻하게 해주는 음식이 좋다. 둥글둥글하고 속이 꽉 찬 씨앗류, 열매류(밤, 복분자, 오미자)가 좋다. 밥에는 좁쌀, 찹쌀을 섞어 먹는 것이 좋다. 구운 마늘, 부추, 보신탕, 사골국도 좋다. 몸이 찬 체질의 사람은 너무 싱겁게 먹지 말아야 한다. 염도를 맞추기 위해서는 죽염이나 토판염을 쓰는 것이 좋다. 겨울에 추위가 심하면 면, 떡, 빵, 묵을 먹는데 찬 체질에 좋은 음식들이다. 다만 소화가 잘되도록 반찬이나 양념을 곁들여야 한다.
봄, 여름, 가을, 겨울에 따라 음식의 한열은 조금씩 달라야 한다. 뜨거운 체질이라고 해서 겨울에도 차가운 음식이 좋은 것은 아니고, 찬 체질이라고 해서 여름에도 뜨거운 음식만 먹을 수는 없다. 체온을 잘 유지하도록 도와주는 것이 관건이다. 에서는 봄에는 서늘하게, 여름에는 차게, 가을에는 따뜻하게, 겨울에는 뜨겁게 먹으라고 했다. 하지만 이는 개괄적인 조언일 뿐이다. 여름에도 가끔씩은 뜨겁게 먹어줘야 하고, 겨울이라도 차갑게 먹어줘야 할 때가 있다. 즉 여름에 수박을 자주 먹다가도 보신탕, 삼계탕을 한 번씩은 먹어주라는 말이다. 여름에는 겉은 뜨거워지고 속은 차가워지기 쉽기 때문에 보신탕, 삼계탕을 한 번씩 먹어 속을 데워줘야 한다. 마찬가지로 겨울에는 면, 떡, 빵, 만두, 고기를 자주 먹다가 가끔씩 냉면, 메밀국수를 먹어주면 좋다. 겨울에는 겉이 차가워지고 속이 뜨거워지기 때문에, 냉면, 메밀국수, 동치미 등의 음식으로 속을 식혀주면 좋다는 의미다.
최철한(崔哲漢)
본디올대치한의원 원장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졸업.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본초학교실 박사. 생태약초학교 ‘풀과나무’ 교장. 본디올한의원네트워크 약무이사. 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