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 전주시 하면 생각나는 것이 있다. 바로 비빔밥, 콩나물국밥, 한옥마을이다. 옛것을 중심으로 도시가 이어지고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이른바 ‘핫’한 도시로 거듭난 지도 오래. 살 뽀얀 아가씨들의 화려한 한복 차림을 쉽게 볼 수 있는 것도 전주만의 매력이다. 떠들썩, 사람 넘쳐나는 한옥마을을 지나 ‘도란도란 시나브로길’이란 표지판이 서 있는 구름다리 앞에 다다른다. 그 건너에는 따뜻한 햇살 아래 예술가들의 온기와 사람 사는 향기 그윽한 자만벽화마을이 있다.
젊은 작가들의 꿈같은 작업 현장
전주한옥마을 끝자락 도로 건너에 있는 자만마을은 최근 지역 명물로 자주 소개되고 있는 옛 달동네 벽화마을 중 하나다. 형형색색 예쁜 지붕과 벽화가 멀리서도 눈에 띈다. 굽이굽이 오르락내리락. 동네의 작은 골목 사이, 회색빛이던 벽에는 그리움 넘치고 정감 묻어나는 벽화들이 곳곳에 흩어져 있다. 자만마을은 원래 한국전쟁 피란민이 들어와 정착한 달동네다. 4~5년 전, 전주의 한옥마을 일대가 관광지로 유명해진 반면 이 지역 문화 예술인이 설 자리를 잃어갔다. 이에 자만마을이 젊은 작가들에게 예술활동을 할 수 있도록 자리를 내어주면서 벽화마을로 탈바꿈한 계기가 됐다. 동네 곳곳에 벽화가 하나둘 그려지기 시작했고 음악이 흐르고 사람의 발길이 늘어나는 활기 넘치는 문화마을로 거듭났다. 옹기종기 만화 속 마을 같은 한옥마을을 지나 구름다리를 건너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서 걷다 보면 자만마을 입구가 보인다. 코흘리개 아이들이 책가방을 메고 연신 뛰어다녔을 것 같은 달동네에 올라서면 벽화들이 서서히 눈앞에 펼쳐진다. 벽 속에서 꽃들이 날고 분홍빛 버스가 느릿하게 움직이는 곳, 한 시대를 풍미했던 유명 스타를 벽화로 만날 수 있는 곳이 자만마을이다. 생각 내려놓기, 그냥 걷기 생각보다 북적이지 않았던 따뜻한 봄. 덥기는 했지만 간간이 바람이 불어 걷기 좋았다. 어린 시절 친구 집에 따라가던 기억으로 골목길을 걷고 있으면 옆을 스치는 벽화들이 추억처럼 따라와 붙는다. 혼자라도 어색하지 않고 친구와 또는 가족과 걸어도 조용히 낭만을 즐길 수 있다. 이곳에서 벽화를 그리는 사람들은 ‘나을자만’이라고 불리는 자만마을 청년모임 소속 작가들이다. ‘나을’은 ‘낫다’ 또는 ‘나아지다’라는 의미로 보다 더 나아진 문화, 더 나아진 청년을 꿈꾸는 젊은이들의 공동체다. 초기에는 벽화를 그리거나 음악을 하는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 개인 활동을 하다가 2015년 4월, 1인 기획사 제이알 이벤트의 이정길 대표가 주축이 돼 지금의 ‘나을자만’을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 현재 공연팀과 벽화팀, 플리마켓팀으로 나뉘어 자만벽화마을에 활기를 불어넣고 있다. 벽화마을이라는 특성에 걸맞게 봄·가을 미술전을 개최하고, 문화 공연, 콘서트, 플리마켓 등을 정기적으로 열어 관광객들의 발길을 잡고 있다.
달동네에서 바라본 하늘은 바다다
달동네 커피숍 꼬지따뽕은 나을자만과 자만벽화마을의 메카와도 같은 곳이다. 고즈넉한 자만벽화마을 길을 한적하게 걷다가 알록달록 원색의 세상으로 풍덩 빠지는 느낌이 든다면 꼬지따뽕에 도착한 것이다. 전주 시내가 옹기종기 눈 아래 펼쳐진 전경도 꼭 마음속에 담아야 할 풍광 중 하나. 더운 여름 아이스커피 한잔 들고 선베드에 몸을 뉘이면 푸른색 하늘이 마치 바다처럼 쏟아질 것이다. 이곳의 초록 너른 마당은 ‘나을자만’의 공연이 이뤄지는 공연장이기도 한 ‘우모네모’ 쉼터다. 정기공연기간에는 이곳에서 다양한 이벤트와 콘서트를 열어 관객을 맞이한다. 선베드와 흔들의자가 놓인 모습이 편안함 그 자체다.
전주 토박이 작가는 작업이 한창
한낮 뜨거운 햇살 아래에서 나을자만 소속 작가이자 전주 토박이인 이지현(26)씨가 벽화 작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림을 전공한 건 아니지만 벽화를 그리다 보니 자만마을에서 터 잡고 작품을 만들고 그리는 예술가가 됐다. ‘이자벨 장난감’이라는 작업실을 열어 하고 싶었던 그림 작업도 하고 판매도 직접 하고 있다. 3년 전부터 취미로 벽화를 그리기 시작했는데 지금은 어엿한 자만마을 대표 작가다. 이렇게 자만벽화마을은 별다른 지원 없이 예술가와 주민들이 자력으로 꾸리는 공간이다. 이곳에 가면 벽화만 볼 것이 아니라 작은 것 하나, 마실 것 하나 꼭 먹고 사기를 권한다.
자만벽화마을을 유지하고 보수하는 데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자만벽화마을은 젊은 세대의 남다른 감각과 옛 정취의 조화가 돋보인다. 형형색색 꼬지따뽕 같은 카페가 있다면 나무판자에 술값을 휘갈겨 쓴 동네 구멍가게도 있다. 전주에 한옥마을만 있다고 생각했던 여행객들, 다시 한 번 전주행 티켓을 끊길 바란다. 전통뿐만 아니라 소박한 현재 우리의 문화 또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늘 함께하려고 남편과 혼인서약을 했고 언제까지나 함께하는 줄 알고 살았던 적이 있다. 신혼 무렵엔 남편이 출장만 가도 허전했고 하루만 지나도 보고 싶었다. 요즘처럼 봄꽃이 눈부실 때는 같이 봐야 하는데, 집안 모임에 같이 가야 하는데 하며 남편의 부재를 아쉬워했다. 창밖으로 아스라이 한 점 비행기가 날아갈 때면 그가 보고 싶어져 가슴이 저릿해지기도 했으니 내게도 분명 풋풋한 시절은 있었다.
하지만 누구에게든 한가할 틈 없도록 희로애락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 그래서 예기치 않은 변화무쌍한 일상들이 이어지고, 인간은 도전하듯 주어진 시간을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그런 날들 속에서 아이를 키워내고 일상에 치이면서 나만의 시간을 갖고 싶어 안달도 난다. 그러나 결코 쉽지 않은 일인 줄도 잘 알기에 극도의 인내심을 발휘하며 살아간다.
필자는 남편이 출장이라도 가면 혼자 해결해야 하는 소소한 일상들이 힘들고 불편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남편의 출장이 은근히 기다려지기 시작했다. 남편이 필자 옆에 있어야 세상이 돌아갔는데 이제는 달라진 것이다. 출장 가는 남편의 뒷모습이 예뻐 보인다는 말에도 공감이 갔다.
그래도 출장을 떠나는 남편이 내게 주는 것이 자유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주부에게 진정한 자유란, 정신적 홀가분함과 함께 가사노동을 포함한 모든 일에서 풀려날 때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남편이 떠난 후에도 자녀교육이 남아 있고 노동도 여전히 이어진다. 그럼에도 한결 가벼워진 기분은 어쩔 수 없다.
남편의 자리는 큰 만큼 부담스럽기도 했고 인내심도 필요했다. 인내심이 필요 없는 인간관계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하물며 평생 한집에서 살아야 하는 사람에게는 인내심보다 더한 마음을 내야 하리라.
남편의 부재가 확인되는 순간 쾌재를 지르며 샐러드 한 접시로 간단히 끼니를 때운다. 친구를 만나 고궁도 거닐고 무뎌진 감성으로 밤늦도록 음악을 들으며 가슴 떨리는 시간도 가져본다.
그러나 필자가 꼭 해보고 싶은 것은 한없이 늘어져 있어보는 것이다. 평화로운 시간 속에서 온전히 혼자 있어보는 것. 다용도의 삶을 살아온 내 자신에게 심심하다 못해 지루할 정도의 시간을 선물하고 싶다.
요즘도 난 심심함을 꿈꾼다. 이런 심리를 남편에게도 반영해본다. 출장을 떠나는 그의 마음에도 자유라는 생각이 스며 있을 것이다. 또는 필자와 아이들이 며칠 집을 비울 경우 남편도 혼자 있는 시간을 반길 것이다. 텅 빈 집에서 혼자 멍하니 창밖의 풍경을 쳐다보며 “아, 좋은 시간…” 할 것이다. TV 리모컨을 들고 야구 채널과 골프 채널을 돌려가며 보다가 출출해지면 달그락거리며 혼자 라면도 끓여 먹을 것이다.
부부란 몇 번쯤 서로 이런 시간을 꿈꾸다가 결국에는 상대를 그리워하는 존재가 아닐까. 손짓이나 눈빛 하나만으로도 마음이 읽히는 사이. 함께 쌓아온 시간의 힘이란 실로 대단한 것이다.
서로에게 길들여진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기도 하지만 익숙한 관계의 행복을 깨닫는 기회도 된다.
“네가 나를 길들이면 우리는 서로 필요해져.”
어린 왕자가 말했듯이, 한 사람의 부재가 전하는 건 그 사람이 내게 큰 의미였음을 알게 하는 시간이다.
6월 녹음이 짙어지면서 자잘한 풀꽃들은 흔적도 없이 스러집니다. 이른 봄 숲에 생기를 불어넣었던 봄꽃들이 사라진 자리엔 어느새 산앵도나무와 때죽나무, 쪽동백, 박쥐나무 등 나무 꽃들이 붉거나 노랗거나 하얀 꽃들을 풍성하게 피우며 숲의 주인 행세를 합니다. 이에 질세라 큰앵초와 감자난초 등 제법 키 큰 풀꽃들도 우뚝 솟아나 벌·나비를 부르는 경쟁 대열에 합류합니다. 민백미꽃도 그중 하나입니다. 큰 것은 1m 이상 자랍니다. 훤칠한 키에 꽃송이를 가득 달고 선 줄기가 곧고 단단해 얼핏 키 작은 관목으로 착각하지만 엄연히 풀꽃입니다.
“연분홍 꽃 색을 처음 보는 순간 심장이 녹아내리는 줄 알았다. 그 어떤 목석같은 사내라도 연분홍 민백미꽃의 아름다운 충격에 움찔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한 꽃 동무가 홍색(紅色)의 민백미꽃을 본 감동을 이렇게 말합니다. 흰색 꽃만 있다고 생각한 민백미꽃이 연분홍 꽃을 피운다는 말에, 그리고 ‘심장이 녹아내릴 것 같았다’는 찬사에 구미가 당겨 물어물어 자생지를 찾았습니다.
꽃 찾아다니면서 겪는 일이 있는데, 꽃마다 만나게 된 사연이 다르고 또 일종의 징크스 같은 게 얽히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민백미꽃이 ‘세상사, 인연이 따로 있다’는 걸 알게 해주었습니다. 보고 싶어 한다고, 찾는다고, 찾아간다고 다 만나지는 게 아니고 인연 따라 만나기도 하고, 못 만나기도 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알게 됐다고나 할까요. 전국의 산과 들에 흔히 자생한다는 민백미꽃.
그런데 초기 수년간 이 산 저 산 다녔지만 단 한 송이도 보지 못해 꽤나 애를 태웠습니다. 그러다 수년 전 6월 중순 영실에서 윗세오름까지 한라산을 오르는 동안 초록의 숲에 눈이 내린 듯 핀 민백미꽃을 숱하게 만났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5월 서울에서 가까운 연천의 지장산에서 다시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색색의 변이종 민백미꽃까지 만났습니다. 역시 한 번 보기가 어렵지, 길 트면 수시로 만나게 된다는 걸 경험으로 알았습니다.
민백미꽃은 본디 꽃 색이 아니라 뿌리가 희고 가늘어서 백미(白薇)란 약재로 쓰이는 백미꽃의 유사 종으로, 열매에 털이 없다는 뜻에서 ‘민’ 자가 붙었습니다. 그런데 털의 유무뿐 아니라, 꽃 색도 다릅니다. 백미꽃은 이름의 이미지와 달리 흑자색 꽃을, 민백미꽃은 흰색 꽃을 피웁니다. 또 다른 유사 종인 푸른백미꽃은 녹색이 감도는 꽃을 피웁니다. 그런데 분홍색과 자주색, 살구색 그리고 옅은 녹색 등 색색의 꽃이 피는 민백미꽃이 있다는 말에 “그럴 리가…”라는 마음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흰색 일색이 아닌, 다양한 색의 꽃이 달린 것을 확인했습니다. 민백미꽃은 꽃대와 꽃자루가 꽃보다 길어 꽃들이 대롱에 매달린 채 우산처럼 공중에 떠 있다고 하는데, 실제 본 모습은 도감 설명과 똑같습니다. 덧붙여 애간장을 녹인다는 찬사, 더도 덜도 아닌 딱 맞는 말이었습니다.
Where is it?
민백미꽃은 제주도를 비롯해 전국의 산지에서 자생한다. 키가 1m 정도까지 자라고 5~7월 흰색 꽃이 우산 형태[傘形]로 달리는데, 녹음이 짙은 숲에서 유심히 살피지 않으면 놓치기 십상이다. 6월 제주도 한라산을 오르면 숲 위로 돋아난 흰색의 민백미꽃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연분홍 및 진한 자주색, 살구색, 연두색 등 다양한 색의 변이를 보여주는 민백미꽃은 강원도 홍천 내면의 한 야산에 자생한다. 인근 지역에서 분홍색 은방울꽃이 발견되는 것으로 미뤄, 홍천 지역의 석회질 지질이 꽃 색 변이에 영향을 주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지난 4월의 첫 번째 금요일은 아내와 오랜만에 저녁 데이트 하는 날이었다. 국립극장 달오름에서 창극 흥보씨( Mr. Heungbo)를 함께 보러가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녹색의 푸름과 꽃들로 봄이 무르익어가는 아름다운 장충단 공원길을 걸었다. 장충단은 1895년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 민씨가 영면한지 5년 후 고종은 장충단을 꾸며 을미사변 때 순직한 장졸들의 영혼을 배향하여 매년 봄 과 가을에 제사를 지냈던 곳이었다고 한다. 우리의 단골식당이 된 ‘다담에뜰’에서 식사와 차를 한잔하고 손을 잡고 걸어서 달오름에 올랐다. 다담이란 불가에서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내어놓는 다과라는 뜻이다.
서양에 오페라가 있다면 우리에게 창극이 있다. 판소리가 한 명의 소리꾼이 북장단에 맞추어 노래로 이야기를 엮어나가는 극음악이라면 창극은 여러 명의 소리꾼들이 역할을 나누어 노래하고 연기하면서 이야기를 엮어나가는 극음악이다. 지난해 해오름에서 창극 향연을 처음 함께 본 후 아내와 나는 창극을 좋아하게 됐다.
창극 흥보씨는 한 마디로 우리의 전통 흥부전(흥부가)을 집으로 치면 대들보와 기둥만 남기고 완전히 현대판 흥부전으로 바꾼 새로운 창작이었다. 우리 내외가 창극에 대해서는 문외한 이었지만 아내도 아주 재미있게 잘 봤다고 만족할 정도로 좋았다. 흥보씨의 새로운 버전으로 창작 스토리를 소개하면 대략 아래와 같은 것들이 예상을 불허하는 것들이었다.
첫째 흥보와 놀보의 아버지 연생원은 아이를 갖지 못해 흥보는 길에서 주워와 길렀다. 가문이 흥하라고 흥보, 아내가 바람을 피워 뒤늦게 출산한 놀보는 귀한 자식이라 놀랍다는 의미로 놀보라 이름 지었다. 이런 출생의 비밀로 시작된 이야기는 관객들의 흥미를 돋우기 시작 하였다. 흥보가 형, 놀보가 아우였으나 착한 흥보는 아우를 위해 계약서 작성을 통해 형과 아우를 바꾸어 생활하는 부분도 연출가의 기획이다.
둘째 강남의 제비는 오늘날 바람둥이 제비로 묘사하고 제비가 갖다 준 씨앗은 박 씨보다 찬란한 구슬 같은 씨앗이었다. 호랑이가 말을 하고, 우주인이 나타나고 흥보의 처로 등장하는 이소연의 가난타령, 제비 유태평양의 제비 노정기, 무대장치, 보리수 나무의 등장이 특이하였다. 그럼에도 무대장치의 핵심은 칼, 몽둥이, 톱의 기능을 한 부채였다. 그 씨앗이 물질적인 부를 갖다 주는 것이 아닌 정신적인 안정을 갖다 주는 것으로 묘사되는 점이 오늘날 물질보다 정신문명의 중요성을 부각시킨 것 같았다.
셋째 창극을 관통하는 줄거리는 통상 전래 판소리와 같이 권선징악이다. 그래서 현대적인 노래와 춤을 삽입하여도 관객들에게 친근미를 안겨준다. 그리고 극 전체를 흐르는 비움의 철학은 물질적인 풍요보다 가난하더라도 바른 생활을 하는 흥보가 원래 형의 위치로 다시 돌아가게 되는 스토리다.
마지막으로 창극 흥보씨가 재미있는 창작극으로 성공할 수 있었던 점은 흥보와 놀보 역을 맡은 두 주인공의 뛰어난 연기, 예측을 불허하는 극본 과 연출, 캐릭터에 맞게 각자의 역할을 충실하게 연기해준 전 단원들, 그리고 우주의 신비스러움과 판소리의 맛을 살리면서도 젊음과 경쾌함을 선물한 음악 감독의 합작의 결과라는 느낌이 들었다. 특히 서양음악과 춤을 차용하여 창극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한 극이었다.
이런 훌륭한 창극단이 있는 한 우리 고유의 전통문화 창극이 서양의 오페라처럼 세계화로 되는 날이 멀지 않은 것 같았다.
(흥부를 흥보로 놀부를 놀보라고 표기하기도 한다. 정확한 정설은 아직 없는 것 같아 기획자의 표현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늦은 봄을 노래한 시 중 필자가 좋아하는 시는 두보(杜甫)의 ‘곡강(曲江)’이다. 이 시는 두보가 47세 되던 AD 758년 늦은 봄, 좌습유(左拾遺) 벼슬을 할 때 지은 작품이다. 좌습유라는 벼슬은 간언(諫言)을 담당하던 종8품의 간관(諫官)이다. 당시 그는 오랫동안 알고 지내온 재상(宰相) 방관(房琯)이란 사람이 죄목을 뒤집어쓰고 파면되는 일이 발생하자 ‘죄가 가벼우니 대신을 파직함은 옳지 못합니다(罪細,不宜免大臣)’라는 상소를 올린다. 그러자 숙종(肅宗)은 매우 노하여 삼사(三司)를 시켜 두보를 문초하게 한다. 이때 재상 장호(張鎬)가 얘기하길, ‘(간관인 두보가 간언한 것을 가지고) 죄를 묻는다면 그것은 간관의 언로를 막는 것입니다(甫若抵罪,絕言者路)’라고 하여 이 일은 일단락된다. 그러나 황제의 눈 밖에 난 두보는 여름이 되자 결국 화주(華州) 사공참군(司功參軍)으로 좌천된다. 이 시는 당시 황제의 눈 밖에 난 두보가 좌천되기 이전, 자신의 괴로운 심정을 늦봄에 실어 읊은 걸작이다. 2수 중 첫 번째 시의 전련(前聯)을 먼저 살펴보자.
一片花飛減却春(일편화비감각춘)
한 조각 꽃잎이 날려도 봄빛이 줄어드는데
風飄萬點正愁人(풍표만점정수인)
만 점 꽃잎이 바람에 흩날리니 정녕 사람을 시름 잠기게 하네
且看欲盡花經眼(차간욕진화경안)
장차 다 지려는 꽃잎, 눈앞을 스쳐가는 것을 보노니
莫厭傷多酒入脣(막염상다주입순)
몸이 많이 상했다 하여 술 마시는 것을 마다할 수 있으리오…
‘한 조각 꽃잎이 날려도 봄빛이 줄어든다’는 의미의 ‘일편화비감각춘(一片花飛減却春)’은 참으로 뛰어난 명구로서 역대로 수많은 문인들에 의해 애송되어왔다. 이 구절은, 대조를 이루는 ‘하나의 나뭇잎이 떨어지는 걸 보고도 천하에 가을이 왔음을 안다’라는 의미의 ‘일엽낙지천하추(一葉落知天下秋)’ 구절과 더불어 각각 봄이 짐과 가을이 옴을 읊은 천고의 절창으로 꼽힌다. 황제의 신임을 잃은 신세에, 떨어지는 꽃잎을 보니 어찌 심란하지 않았겠는가? 마지막 구절을 보면 ‘몸이 이미 많이 망가졌다(傷多)’는 표현을 통해 심적 고생이 이미 건강을 해치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 시를 짓고 난 뒤 두보는 같은 제목의 두 번째 시를 짓는다. 이 시의 전련에는 ‘인생칠십고래희’라는 유명한 시구가 등장한다.
朝回日日典春衣(조회일일전춘의)정에서 돌아오면 날마다 봄옷을 저당 잡혀
每日江頭盡醉歸(매일강두진취귀)매일 강가에서 만취하여 돌아온다
酒債尋常行處有(주채심상행처유)외상 술값이야 으레 가는 곳마다 있기 마련…
人生七十古來稀(인생칠십고래희)사람은 예로부터 70년 살기도 드문 일 아니겠는가
이 시를 보면 그는 더욱 심해진 마음고생을 술로 풀고 있음을 보여준다. 어차피 칠십도 못 사는 인생, 몸을 아낄 필요가 있겠냐고…. 이어지는 후련(後聯)이다.
穿花蛺蝶深深見(천화협접심심견)꽃을 파고드는 호랑나비 깊숙이 보이고
點水蜻蜓款款飛(점수청정관관비)물 위를 스치는 잠자리 사뿐히 날아오르네
傳語風光共流轉(전어풍광공류전)말을 좀 전해다오, (우리 인생과) 함께 흘러가는 경치에게…
暫時相賞莫相違(잠시상상막상위)“잠시나마 함께 즐기면서 서로 거스르지 말자고”
두보는 자신이 존경했던 도연명의 형식을 빌려 아름다운 봄날 경치에 대한 자신의 헌사를 이렇게 마무리하고 있다.
>>하태형(河泰亨) 전 현대경제연구원장
아호는 양우養愚. 1958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와 KAIST 대학원에서 경영학과 경영과학을 전공했다. 미국으로 유학하여 뉴욕주립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제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수원대 금융공학대학원에 교수로 복귀하여 강의하고 있다. 오랜 소망이었던 서예와 한학을 다시 공부하게 됐다. ‘난정서’를 접하게 된 이후 국내외 문헌을 찾아가며 난정서 연구에 심혈을 기울여 왔다. 저서로는 가 있다.
눈이 크고 얼굴이 까무잡잡한 동급생 보배가 소풍날 흥겹게 부르던 노래였다.
서둔야학은 매년 봄에 한 번, 가을에 한 번 소풍을 갔다.
가까운 칠보산이나 반월저수지 혹은 화산목장 등으로 걸어서 갔다.
소풍날이 오면 비가 오면 어쩌나 싶어 밤잠을 설쳤는데 막상 날이 밝아서 보면 온누리에 햇살이 하얗게 부서지곤 했다. 소풍날 아침의 햇님은 왜 그렇게도 사랑스러워 보였던 것일까?
부모님들도 소풍날이면 신경을 쓰셨던 것인지 아이들은 후줄근한 평상시 옷이 아닌 산뜻한 옷차림을 하고 나왔다. 소풍날이면 입은 블라우스가 유난히도 하얗게 보였던 여자아이도 있었다. 눈이 커다랗고 피부가 까만 2학년 후배였다
아이들은 입을 다물지 못하고 연신 싱글벙글 웃으며 뛰어다녔고, 그런 아이들 곁에는 늘 선생님들의 부드러운 미소가 있었다. 선생님들과 같이 걸어서 가는 소풍길은 마냥 즐거웠다. 대화를 무척 좋아했던 필자는 흙먼지가 ‘폴폴’ 날리는 논둑길을 재잘거리며 걷기도 했고 다른 사람이 노래를 시작하면 같이 따라 부르기도 했다. 들판에는 온통 생기가 넘쳐흘렀다. 실바람은 초록빛 벼 위를 사뿐히 날았고 길섶에는 이름 모를 작은 풀꽃들이 귀엽게 웃음 짓고 있었다.
이렇게 바람과 꽃들을 벗 삼아 걷다 보면 처음에는 끝도 없이 이어질 것만 같았던 황톳길은 어느새 끝이 나고, 목적지인 화산목장이 펼쳐져 있기도 했고 칠보산이 우뚝 서 있기도 했다. 목적지에 도착하면 마음이 들떠 아침을 못 먹은 데다가 먼 길을 걸어왔기에 모두들 시장기를 느끼기 마련이어서 서둘러 점심을 먹었다.
“애란아, 애란아~~”
어느 해 소풍날 점심시간이었다.
선생님들과 야학생들이 일제히 한 목소리로 필자 이름을 불렀다.
필자는 못 들은 척하고 더 깊은 숲속으로 자꾸 들어갔다.
그들에게 들킬까봐 가슴은 연신 두근두근했다.
점심시간이 시작될 것 같아 얼른 그 자리를 피했던 거였다.
두부를 굉장히 좋아했던 필자는 그날 아침 엄마에게 고집을 부렸다.
“밥하고 같이 싸가야지 두부만 어떻게 먹니?”
“괜찮아요, 두부만 먹어도 되니까 두부만 싸갈래요.”
결국 밥은 안 싸고 커다랗고 네모난 양은도시락에 두부부침만 잔뜩 쌌다.
그런데 막상 점심시간이 되자 ‘아차’ 싶었고 ‘엄마 말을 들을걸’ 후회가 됐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친구들과 선생님 앞에서 두부만 들은 도시락 뚜껑을 도저히 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숲속으로 슬금슬금 도망을 갔던 것이다.
소나무 밑 그늘에서 호젓하게, 커다란 양은도시락 뚜껑을 열고 보니 아침에 싼 두부부침들이 얌전히 누워 있었다. 두부만 먹으려니까 목이 메어서 3분의 1가량만 억지로 먹고는 하릴없이 시간을 흘려보냈다. 점심시간이 다 끝난 무렵에야 어슬렁어슬렁 내려가니 선생님이 반가워하며 물었다.
“아까는 어디 갔었니? 너를 얼마나 찾았는 줄 아니? 점심은 먹었어?”
“일이 좀 있어서요. 네, 먹었어요.”
선생님께 걱정을 끼쳐드린 것이 죄송했으나 사정을 말할 수 없었던 필자는 적당히 얼버무렸다. 사실 필자가 숲으로 도망갔던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다. 소풍 때마다 도시락을 여유 있게 준비해오셔서 도시락을 못 싸온 아이들이 먹을 수 있도록 마음을 써주시던 선생님들 때문이었다.
어디에 단체로 주문해서 가지고 온 것 같은 그 도시락은 김밥은 아니었다. 얇은 나무도시락에는 고슬고슬해 보이는 흰 쌀밥이 담겨 있었고 한쪽 귀퉁이에 콩장과 함께 까만 통깨가 뿌려진 단무지가 있었다.
아마 필자가 도망가지 않았다면 도시락을 주시려는 선생님과 죽어도 받지 않으려는 필자가 또 한바탕 힘겨운 실랑이가 벌어졌을 것이다.
-계속-
*서둔야학은 2000년 서울대 농업생명과학대학장이 건물 입구에 세운 ‘서둔야학 유적지’ 안내판에 역사가 요약돼 있다. 이 안내판에는 “이곳은 1965년부터 1983년까지 서울대학교 농업생명과학대학과 수의과 대학의 학생들이 수원 서부지역 청소년을 대상으로 야학활동을 하였던 곳이다.… 1965년 당시 학생이던 황건식 등의 야학 교사들이 성금을 모금하여 이곳 부지를 구입해 교사와 학생들이 직접 건물을 설계하고 건축했으며,… 야학교사와 졸업생들은 현재 서둔야학회를 설립하여 사회 각 분야에서 사회 발전에 공헌하고 있다…”고 쓰여 있다.-[원희복의 인물탐구] 내용에서-
라디오를 한창 듣던 시절. 라디오 광고에서 최명희의 장편소설 이 10권을 끝으로 완간된다는 소식을 들었다. 소설가의 의지가 아니었다. 손가락으로 바위를 뚫어 글씨를 새기듯 처절했던 몸부림을 생의 마감과 함께 알린 것이다. 길고 긴 소설, 아쉬움 속에 마침표 찍고 너울너울 혼불 돼 날아가버린 작가 최명희. 그녀의 살아생전 활동과 다양한 모습들을 만날 수 있는 최명희문학관에 다녀왔다.
소설 의 작가 최명희를 만나다
거리는 화사했다. 어린 학생들의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 상춘객들의 밝은 얼굴. 기분 좋은 전통 도시 전주는 여행객들과 신나게 어울리고 있었다. 이렇게 한옥마을 거리를 걷다 만나는 곳이 최명희문학관이다. 2006년, 전주 지역에 처음으로 세워진 최명희문학관은 전주시가 건설한 뒤 민간 전문가가 운영하고 있다. 작년 최우수 문학관에 뽑힌 최명희문학관은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지역주민들과 함께하는 문화예술현장으로 자리 잡았다.
최명희문학관은 말 그대로 작가 최명희를 기리고 만나는 장소다. 1980년에 등단해 1981년부터 대하소설 을 집필하던 도중 1998년 난소암으로 세상을 떠난 작가 최명희. 살아생전 오로지 모국어에 대한 집착스런 사랑과 강한 필력을 바탕으로 마음을 사로잡더니 결국 독자들 가슴에 묻히고 말았다. 그녀의 혼이나마 편히 돌아와 살아 있는 곳이 바로 이곳, 최명희문학관이다. 물론 작가 최명희를 모르고 관심이 없다면 앞문을 통해 뒷문으로 나가는데 단 3초면 된다. 처마 밑에 내려놓은 돌 하나, 목각 하나에 담긴 의미를 되새기고 느낄 수 있는 사람이라면 하루 종일 이곳에서 시간을 보내도 멋질 것이다. 문학관 어느 한 공간에도 혼불이, 그리고 최명희가 없는 곳이 없다. 친구 혹은 지인들과 나눴던 엽서들도 전시하고 있다. 특히 드라마 작가 이금림이 기증한 최명희의 이력서가 눈에 띈다.
소설의 끝은 누구도 알 수 없다
최명희 하면 을 꼽을 수밖에 없다. 1981년 5월 동아일보 창간 60주년 기념 장편소설 공모전에 당선된 이후 17년간 소설 쓰기에 집중했다. 당시 고료로 받은 2000만원은 강남의 아파트를 살 수 있을 만큼 많은 돈이었다. 최명희는 그 상금으로 강남의 성보아파트를 장만했다. 앉아서 글만 쓴다고 해서 지인들은 그녀의 아파트를 ‘성보암’이라 불렀고 그녀에게는 ‘성보살’이라는 별명을 달아줬다.
은 1930~1940년대 일제강점기의 전라북도 남원이 배경이다. 유서 깊은 가문 ‘매안 이씨’ 문중에서 무너져가는 종가(宗家)를 지키려는 종부(宗婦) 3대와 이씨 문중의 땅을 부치며 살아가는 상민마을 ‘거멍굴’ 사람들 이야기를 다룬 소설이다. 사실 최명희는 10권을 끝으로 을 끝낼 생각이 아니었다. 열 번째 책을 완성할 때쯤 난소암에 걸렸고 더 이상 집필을 할 수 없게 됐다. 최명희가 남긴 취재수첩 속에는 앞으로 쓰려고 했던 목록들이 수십 가지가 있었다. 그녀가 생존했다면 일제강점기 뒤 어떤 이야기가 펼쳐졌을지 아무도 모를 일. 끝을 알 수 없었던 작가 최명희의 열정을 사랑하고 기억하고 싶어 했기에 문학관이 생겨나고 많은 사람들이 찾는 것 아닐까.
최명희문학관을 다녀간 이름 하나, 하나…
최명희문학관은 초·중·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백일장과 문학상 공모뿐만 아니라 전 세대를 아우르는 프로그램으로 대중과 소통하는 살아 있는 문학관이다. 시니어층 참여가 많다는 ‘2017 꽃심소리’는 을 함께 읽어나가는 프로그램이라고 한다. 2006년 개관 때부터 이곳을 찾았던 사람들의 방명록은 모두 아크릴 상자에 담겨 전시되고 있다. 창고에 넣어둘 계획이었으나 공간이 협소해 방명록을 쓰는 한쪽에 놓아두었다. 방명록에 쓴 글은 스캔을 해서 홈페이지에도 올려놓는다. 최명희문학관에 방문해 방명록을 남겼다면 인터넷을 통해 언제든지 자신이 썼던 방명록 글을 찾아볼 수 있다.
여전히 사랑받는 소설가 최명희
하늘의 별이 돼서도 극진한 사랑을 받는 사람이 또 있을까 싶다. 눈과 귀를 자극하는 다양한 매체의 발달로 문학의 설 자리가 점점 좁아지고 있는 세상이지만 그녀를 기리는 문학관과 공원은 전북 지역에 세 곳이나 된다. 의 배경이 된 남원에는 소설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낸 혼불문학관(2009년 개관)이 있고, 최명희 작가의 모교인 전북대 옆에는 작가의 묘소와 함께 혼불문학공원이 자리하고 있다. 산책로 곳곳에 소설 속 문장을 적어놓은 비석이 인상적이다. 그중에서도 전주한옥마을 속 최명희문학관이 사람들의 발길이 제일 잦은 곳. 다양한 세대와 소통하며 매일이 바쁜 문학관이다. 현대를 살다 간 ‘최명희’라는 작가가 영원히 기억될 수 있는 곳으로 오래오래 함께하길 바라본다.
이용 정보
관람시간 오전 10시~오후 6시
휴관일 매주 월요일, 1월 1일 설날과 추석
주소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최명희길 29
5월, 캘리포니아는 눈부시다. 겨울 내내 인심 좋게 내린 비에 캘리포니아는 몇 년째 심각했던 가뭄이 완전히 해갈됐다. 덕분에 온갖 풀이며 나무들이 싱그럽게 초록을 품었고 꽃들은 만개했다. 도저히 집 안에서는 감당이 안 되는 날씨. 꽃무늬 스카프라도 두르고 나서보기로 했다.
마침 시간을 내서 꼭 한 번 가보고 싶은 곳이 있었다. 언젠가 ‘LA 인근 가볼 만한 곳’이라는 검색어로 눈에 담아두었던 곳이다. 남가주에서 프러포즈와 결혼식 장소로 손꼽힌다는 곳. 그러나 이름만 들어서는 전혀 로맨틱할 것 같지 않은 ‘닉슨 기념관’이다. 캘리포니아 오렌지 카운티의 작은 도시 요바린다는 미국의 37대 대통령이었던 리처드 닉슨의(1913~1994) 고향이다. 요바린다 시에 있는 닉슨 기념관은 미국 내 13개의 전직 대통령 기념관 중 하나로 대통령 기록 전시관, 닉슨 생가 그리고 닉슨 부부의 묘지가 있다. 총 9에이커(약 1만1000평)에 이르는 이곳은 원래 닉슨의 아버지 프랭크 닉슨의 오렌지 농장이었다. 1990년 닉슨의 가족과 지지자들이 닉슨 재단을 설립해 기념관을 만들어 관리하다가 지금은 미국 문서보관소가 운영하고 있다. 중앙 홀에 들어서는 순간 한눈에 닉슨의 대형 초상화가 눈에 들어왔다. 그의 이름 앞에 항상 붙어 다니는 ‘임기 중 불명예 퇴진한, 미국 역사상 가장 불명예스러운 대통령’이라는 수식어 때문일까. 그림 속 그의 눈빛엔 회한이 담겨 있는 듯하다. 비슷한 상황에 있는 고국의 한 얼굴이 떠올랐다. 아마도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그렇지 않을까. 조금 무거워지는 마음에 봄나들이 장소를 잘못 택한 것이 아닐까 후회하며 한 무리의 사람들을 따라 걸음을 옮겨본다. 빨강머리 앤이 살고 있을 것 같은 하얀 이층집이 눈에 들어오자 마음엔 다시 봄바람이 분다. 지금도 사람이 사는 것처럼 잘 보존되어 있는 닉슨의 생가다. 완벽히 어울리는 커다란 호두나무는 수령이 100년도 넘은 고목이다. 닉슨은 이곳에서 5형제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나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낸다. 우등생이었던 닉슨은 하버드대학으로부터 입학 허가를 받지만 집안 사정으로 인해 근처 휘티어칼리지에 입학한다. 후에 듀크대학 대학원에서 법학을 전공, 변호사가 되지만 워싱턴 정가에서 그는 학력으로 인한 콤플렉스가 적지 않았다는 후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해군에서 군복무를 마친 닉슨은 1946년 공화당 하원의원으로 정치인생을 시작한다. 이후 상원의원에 이어 1952년 아이젠하워의 러닝메이트로 나와 부통령에 당선된다.
1960년 기세를 몰아 대통령에 출마하지만 젊고 파워풀한 이미지의 존 F. 케네디에게 패배하고 만다. 그 유명한 TV 생방송 토론이 바로 이때의 이야기다. 하지만 8년 후, 닉슨은 결국 미국 37대 대통령에 당선된다. 이때부터 닉슨은 어쩌면 미국의 가장 위대한 대통령으로 기록되었을 만한 많은 업적을 만들어낸다. 닉슨독트린 발표로 베트남전을 끝내고 중국과의 수교로 냉전시대를 종식시킨 평화 대통령. 그는 세계사를 다시 만든 인물이었다. 적어도 ‘워터게이트’ 사건이 터지기 전까지는. 닉슨의 업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기념관을 지나면 마지막 ‘워터게이트’ 전시관에 닿게 된다. 전시 내용은 이곳이 닉슨기념관이라는 사실이 민망할 정도로 노골적이다. 이전까지 닉슨의 업적과 미국의 위대함에 감동하던 관람객들은 하나같이 얼굴이 굳어진다. 닉슨의 수치이자 미국의 민낯이기 때문이다. ‘워터게이트’는 미국 역사상 최대의 정치 스캔들이다. 1972년, 워싱턴 D.C.의 ‘워터게이트’ 건물에 입주한 민주당 전국위원회 본부에 도청장치를 설치하려던 침입자들이 체포된다. 이들은 공화당 비밀조직 멤버들. 당시 재선 선거운동 중이던 닉슨은 자신의 관련 여부를 단호히 부인했고 그해 압도적인 표 차이로 재선에 성공, 38대 대통령에 취임한다. 하지만 그의 부정 행위는 결국 서서히 드러난다. 닉슨은 기자회견에서 “나는 사기꾼이 아니다”라며 기자들을 쏘아붙였지만 결국 그가 가담했다는 증거가 담긴 비밀 테이프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진다. 국회청문회가 열렸고 끝까지 아니라고 잡아떼던 닉슨은 결국 18분 30초가 사라진, 편집된 녹음 테이프를 내놓았다. 거짓말을 일삼고 국민과 국회를 기만한 대통령은 신임을 잃었다. 국회에서 탄핵소추안이 통과되고 탄핵이 확실시되자 1974년, 닉슨은 스스로 사임한다. 장장 2년에 걸친 싸움이었다. 전시관은 이 모든 것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심지어 헬기에 올라 백악관을 떠나던 닉슨 부부의 모습이 비디오로 무한 리플레이되고 있다. 닉슨의 생가 뒤편에는 닉슨과 그의 아내 패트 여사의 묘지가 있다.
퇴임 후 포드 대통령의 사면으로 법정에 서지는 않았지만 닉슨은 변호사 자격까지 박탈당하고 1994년 뇌졸중으로 사망할 때까지 20년을 초야에 묻혀 살았다. 바로 이곳에서 거행되었던 닉슨의 장례식에는 당시 대통령이었던 클린턴과 포드, 카터, 레이건, 부시 전 대통령이 참석했고 전 국민의 애도 속에 그 어느 전직 대통령의 장례식보다 성대하게 치러졌다. 전시관에는 그의 마지막 생전 인터뷰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저는 사랑하는 친구, 내 조국 그리고 나의 정부를 실망시켰습니다. 또 무엇보다 조국을 위해 일하기를 꿈꾸는 젊은이들에게 정부와 공무원들이 부패한 집단이라는 인식을 심어주었습니다…. 남은 평생을 저는 이 엄청난 짐을 지고 살아갈 것입니다….’ (1977년 인터뷰 중) 실패한 대통령이지만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고 처절하게 사죄한 닉슨. 역사는 그의 업적과 잘못 모두를 공평하게 끌어안고 있었다. 그 영욕을 담고 있는 장소는 아이러니하게도 젊은이들이 사랑을 속삭이며 미래를 약속하는 명소가 되어 있다. ‘지도자의 자격’이라는 말이 그 어느 때보다 피부로 다가오는 지금, 닉슨 기념관은 봄나들이 이상의 의미를 안겨줬다.
봄의 끝, 여름이 시작되는 즈음이다
그 들판엔 뜨거운 한여름의 태양을 방불케 하는 더위가 쏟아지고 있었다.
언덕으로 오르는 길 옆 냇가에는 여름꽃들이 활짝 피어 있었고 몸부림치듯 엉킨 덩굴들이 옥천의 들길에서는 자유로워 보인다.
나무 그늘에는 더위를 피해 동네 사람들이 쉬고 있었고, 언덕 아래엔 초여름의 강태공들이 텐트를 치고 하세월 유유자적한 모습이다.
옥천의 보정천, 그리고 그곳에 섬처럼 떠 있는 정자 상춘정이 보인다.
시인 정지용의 고향 옥천 땅.
그의 시처럼 아름다운 땅에서 우리가 살고 있다.
어릴 적 여름방학 때 고모네 집에 놀러가던 길, 그 들판에서 사촌들과 뛰어 놀았지. 순진무구했던 어린 시절의 필자가 거기 아직 있는 듯하다. 그리움에 가슴에 뭉클해져 온다. 온몸으로 땀이 흐르던 날이었다. 그럼에도 그 들판을 걸으면서 마냥 행복했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그리고 저 넓은 냇가에 안개가 휘감겨 있을 새벽에 올 수 있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
실개천이 휘도는 그 넓은 벌을 떠나오며 문득 돌아보니 상춘정이 내게 인사를 하는 듯하다. “안녕, 잘 가요.”
“안녕, 다시 오고 싶을 거예요.”
산책길에 나섰더니 어느새 새빨간 덩굴장미가 지천이다.
이제 연분홍 벚꽃이나 샛노란 개나리, 백목련, 자목련 등 봄꽃이 지나간 자리에 이렇게 예쁜 장미꽃이 피었다.
높은 축대가 있는 집 담장에도 흘러내릴 듯 빨간 장미가 넝쿨 졌고 산책길 한 편에도 무리 지어 아름다운 모습을 자랑하고 있어 보기에 여간 예쁜 게 아니다.
이렇게 탐스러운 덩굴장미를 보니 옛날 장미로 뒤덮였던 장미 터널이 떠오른다.
초등학교부터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필자는 돈암동 한옥 한곳에서만 살았다.
우리 집, 골목에는 문화재급 되는 한옥도 여러 채 있었고 대부분의 집이 단정하고 아름다운 한옥의 멋을 자랑하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 동네의 명칭은 동소문동이었고 미아리 쪽으로 한 정거장 올라간 곳에 돈암동 전차종점이 있었다.
필자는 전차 세대이다. 지금의 아이들은 전차가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하겠지만 필자는 여중 시절 전차로 통학을 했다. 필자가 살던 돈암동에 전차종점이 있었고, 또 동대문에 있는 종점, 경전이라는 곳에서는 한 달씩 쓸 수 있는 자유 티켓, 패스권을 팔았다. 그 패스권을 사면 한 달 동안은 무제한 프리로 전차에 탑승할 수 있었다.
용무가 없어도 을지로나 시내 쪽으로 타보기도 하면서 필자는 프리패스 권을 잘 이용하였다.
우리 집이 돈암동이어서 필자는 돈암동에서 전차를 타고 종로4가 광장시장 앞에서 내려 갈아타고 동대문 밖 창신동에 있는 학교에 다녔다. 돈암동에서 종로4가까지 가는 동안 혜화동 로터리를 지나가는데, 잊을 수 없는 건 봄이 지나 초여름 될 때쯤 로터리의 철제 터널에 하나 가득 피어있는 새빨간 덩굴장미다.
상상해보시라. 전차에 앉아 빨간 장미로 온통 뒤덮인 꽃 터널을 지나는 기분을... 지금 생각해도 너무 로맨틱하고 아름답던 광경이다.
3년 내내 봄, 여름이면 꽃 터널을 지나다니며 동화 나라를 지나는 듯한 상상을 하며 필자의 감수성을 키웠다.
필자가 고등학생이 되는 무렵 전차는 없어졌다. 그 낭만도 따라서 사라져버렸다.
전차가 지나가는 철로를 둘러싸고 있는 로터리에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무덤이 하나 있었다. 도시 한복판의 무덤이라 옮겨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다는데 오랫동안을 그 무덤이 그곳에 있었던 건 그 무덤을 훼손하는 사람은 죽는다는 미신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물론 미신이었겠지만, 그래도 지금은 없어진 걸 보면 누군가 용감하게 그 무덤을 옮겼나 보다.
이제 둥그런 로터리 동산은 없어지고 일직선으로 차가 다니게 되었다. 오늘도 그 혜화동 로터리를 직진으로 지나왔는데, 동그란 모습이었던 로터리와 댕댕댕~하며 달리던 전차의 기억. 어린 날의 예뻤던 추억이 그리워 가슴이 서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