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눈을 뜨면 덥고 습한 공기 대신 서늘하고 건조한 바람이 잠을 깨우는 계절. 얇고 까슬까슬한 리넨 소재 셔츠가 아닌 포근하고 부드러운 카디건에 손이 가는 계절. 가을이 왔다. 계절의 변화에 맞춰 옷도 한층 두툼하게 챙겨 입었지만, 특유의 스산한 기운에 이유 모를 쓸쓸함과 공허함이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래서인지 가을만 되면 적적한 마음을 달래줄 진한 멜로 영화 한 편이 생각난다.
이번 주 브라보 안방극장에서는 가을 타는 브라보 독자를 위해 감성 가득한 한국 멜로영화 세 편을 준비했다. 소개하는 작품들은 모두 넷플릭스에서 만나볼 수 있다.
1. 내 머리 속의 지우개 (A Moment To Remember, 2004)
유달리 건망증이 심한 '수진'(손예진)은 어느 날도 어김없이 지갑과 편의점에서 산 콜라를 카운터에 두고 나왔다는 사실을 깨닫고 돌아간다. 그때 편의점 앞에서 콜라를 들고 있는 '철수'(정우성)를 발견한다. 철수가 자신의 콜라를 훔쳤으리라 생각한 수진은 그의 손에 들린 콜라를 뺏어 들이킨다. 강렬한 첫 만남 이후 수진의 회사에서 다시 만난 두 사람은 서로에게 끌려 마침내 결혼까지 골인한다. 하지만 행복한 신혼 생활도 잠시 수진의 깜빡하는 증상은 더욱 심해져 가고, 철수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을 듣게 된다.
조기 치매를 앓고 있는 수진과 가난한 목수 철수의 사랑 이야기를 담은 영화 ‘내 머리 속의 지우개’는 손예진과 정우성의 애틋한 감정 연기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특히 정우성이 포장마차에서 소주를 따르며 “이거 마시면 우리 사귀는 거다”라고 고백하는 장면은 오랜 시간 지난 지금까지 명장면으로 회자된다.
2. 시월애 (A Love Story, 2000)
1999년, '은주'(전지현)는 자신이 살던 집 '일마레'를 떠나며 새로 들어올 집주인에게 바뀐 주소로 우편물을 보내 달라는 편지를 남긴다. 한편 1997년, 일마레에 이사 온 '성현'(이정재)은 짐 정리를 하다 우편함에서 이상한 편지 한 장을 발견한다. 1999년에 살고 있는 누군가가 자신이 살 집에 대한 이야기를 적어놓은 것. 반신반의하던 성현은 편지에 답장을 보내고, 편지는 2년을 뛰어넘어 은주에게 도착한다. 마침내 서로의 존재를 알게 된 두 사람은 우체통을 매개체로 소통하고, 같은 공간 다른 시간 속에서 서서히 가까워져 간다.
영화 ‘시월애’는 엇갈린 시간을 소재로 한 판타지 로맨스물이다. 한국 영화 최초로 할리우드에서 리메이크됐다. 작품의 중심 배경이 되는 일마레는 일몰 명소로 유명한 강화 석모도에서 촬영한 것으로, 주인공 두 남녀의 애절한 연기와 함께 아름다운 풍광을 감상할 수 있다.
3. 봄날은 간다 (One Fine Spring Day, 2001)
소리 채집자 '상우'(유지태)는 어느 겨울 지방 방송국 라디오PD '은수'(이영애)를 만난다. 마침 자연의 소리를 틀어주는 프로그램을 준비하던 은수는 상우와 녹음 여행을 떠나고, 자연스레 눈이 맞은 두 사람은 여름이 올 때까지 뜨겁게 사랑한다. 하지만 두 계절이 지나고, 이혼 경험이 있는 은수는 결혼을 해야 한다는 사실에 부담을 느껴 서서히 상우를 멀리하기 시작한다. 결국 변하지 않을 것 같던 사랑이 변하면서 상우는 예상치 못한 실연을 맞이한다.
영화 '봄날은 간다'는 두 남녀의 만남과 사랑, 이별을 계절에 빗대 그린 작품이다. 흔들리는 보리밭과 대나무숲, 고요한 사찰 등 청아한 풍경이 작품의 서정적인 분위기를 더한다. 영화에서 이영애는 "라면 먹고 갈래요?", 유지태는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라는 명대사를 남겼다.
경남 함양을 이렇게 부르기로 했다. ‘지리산 자락이 숨겨놓은 보물’.
별 기대 없이 찾아간 곳이었다. 이리저리 여행 코스를 검색해 봐도 딱히 눈길을 끌 만한 곳을 발견하지 못했다. 논계 서원을 방문하고 함양에서 몇 군데 돌아볼 곳을 리스트업했다. 여행자 추천 사이트에서 가장 많이 추천해준 개평 마을로 운전 경로를 입력했다.
하회 마을 버금가는 기품 흐르는 ‘개평 마을’
한옥 마을은 어디에 있는 곳을 방문해도 좋다. 최근에 지어져 콩기름 반짝이는 한옥만 아니라면 말이다. ‘좌안동 우함양’이라고 하더니 옛말 그르지 않게 개평 마을은 고즈넉하고 기품 있는 모습으로 여행객을 반겨줬다.
안동 하회 마을의 시끌벅적한 투어리스트들의 소음이 불편하다면 우클릭하여 함양의 개평 마을을 거닐어보는 것도 좋을 듯싶다. 안동 하회 마을 버금가는 개평 마을에는 조선 성종 시대 대학자인 일두 정여창 고택이 자리 잡고 있다. 박경리 선생의 대하소설 ’토지’의 드라마가 촬영된 곳이다. 3000여 평의 너른 대지에 12동의 건물이 배치된 남도지방의 대표적 고택으로 중요민속문화재 제186호로 지정돼 있다.
흔히 안동이나 경주를 방문할 때 느껴지는 관광지의 익숙함이 싫어질 때가 있다. 자연스러운 모습에서 역사의 숨결을 느끼고 수백 년 전의 삶들을 유추해보고 싶은데 관광지에서는 그런 생각이 정지된다. 그저 관광객 물결에 휩쓸려 돌아다니다 어느새 그곳을 떠나야 할 시간이 되는 순간들이 언제부턴지 싫어졌다.
그런데 함양은 달랐다. 나에게 느리게 말을 거는 듯싶었다. 마치 시간이 아주 천천히 흐르는 듯 말이다. 개평 마을 일두 정여창 고택 대청마루에 걸터앉아 나지막한 담을 한참 바라보았다. 또 골목 어귀 길들을 구석구석 다니며 오랜 세월의 흔적을 이리저리 살펴보기도 했다. 만족스러웠다. 안동 하회 마을 버금가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향유하기에는 하회 마을보다 훨씬 더 풍성한 품이었다.
굽이굽이 모래 섞인 오도재 길, 불빛 받는 밤이면 반짝거려
개평 마을을 떠나 오도재를 넘어보기로 했다. 오도재는 이 지역에서 지리산으로 가기 위해 꼭 넘어야 했던 고개다. 말이 고개이지 정상에 있는 지리산 제일문이 위치한 높이가 750m가 넘는다 하니 작은 산이다.
이 산을 넘어 지리산에 갈 수 있도록 길을 닦으면서 180도 굽이굽이 오도재 길이 만들어졌다. 오도재 길로 인해 경남 내륙에서 보다 안전하게 지리산을 갈 수 있게 되면서 이 길을 통과하는 이가 많아졌다고 한다.
원래 이곳 토양은 모래가 많이 섞인 땅이라 지반이 매우 약해, 급경사로 길을 낼 경우 무너져 내릴 수 있어 경사를 최대한 완만하게 만들게 됐단다. 함양의 원래 토양인 모래와 흙이 섞인 마사토(자잘한 모래와 흙이 섞인 토양을 일컫는 일본식 조어)를 섞어 도로를 포장하면서 밤이면 불빛에 반짝이는 모래알들이 더욱 환하게 길을 밝힌다.
이 장관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전국의 사진작가들이 몰려들어 오도재의 낮과 밤을 렌즈에 담았고 그렇게 오도재 길은 2006년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선정됐다.
비운의 천재, 최치원이 조성한 함양의 산소 탱크 ‘상림공원’
함양에는 상림공원이 군 중심부에 큰 숲을 이루고 있다. 상림공원은 신라시대 최치원이 천령군(현 함양) 태수로 있을 때 인공적으로 조성한 숲이라고 한다. 비만 오면 마을이 잠기고 논밭이 유실되는 것이 안타까워 함양을 흐르는 강에 둑을 쌓아 상림과 하림을 만들었다는데 현재 하림은 유실됐고 상림만 남아 함양을 대표하는 공원으로 사랑받고 있다.
상림공원에는 뿌리가 다른 두 나무의 몸통이 합해져서 하나가 된 연리목이 있다. 부부간의 금실이나 남녀 간의 깊고 애절한 사랑을 연리목 혹은 연리지로 비유한다. 상림공원 안에 있는 연리목은 수종이 다른 느티나무와 개서어나무 몸통이 결합돼 더욱 상서로운 나무로 여겨진다. 이 나무 앞에서 손을 잡고 기도하면 부부간의 애정이 돈독해지고 남녀 간의 사랑도 이루어진다니 갈등과 불화에 시달리는 남녀라면 함양으로 가볼 일이다.
상암공원 연리목 앞에는 연리목을 설명하는 게시판이 세워져 있다. 게시판 설명에 따르면, 연리목은 워낙 상서롭고 귀한 나무로 여겨져 역사서인 ‘삼국사기’에도 등장한다고 한다. 삼국사기에 연리목에 대한 기록이 총 4번이 나온다는데 ◆신라 내물왕 7년 ◆고구려 양원왕 2년 ◆고려 광종 24년 ◆성종 6년이다.
서암정사 암반에 새겨진 석공들의 10년 불사
장마 끝자락 비가 쏟아지는 와중에 찾아간 서암정사는 함양에서 가볼 만한 곳을 검색했을 때부터 내 눈길을 사로잡았던 곳이다. 장대비가 쏟아지고 낮은 안개가 계곡을 굽이굽이 감싸며 올라간다. 이 집중 호우에 사찰을 찾는 이 누가 있으랴?
차에서 내려 쏟아지는 비를 피하며 요리조리 산길을 올랐다. 마침내 서암정사 입구가 눈앞에 나타났다. 벌어진 입이 닫히지 않았다. 여기가 어드메냐? 한국인가? 아니면 천상계 어디인가? 한국의 사찰 중에 이런 곳이 있었다고?
자연 암반에 새겨진 사천왕상을 옆으로 하고 위로 쭉 뻗은 돌계단을 밟아 오른다. 돌계단을 하나하나 오를 때마다 마치 천상계로 올라가는 입구를 걷는 듯하다. 서암정사는 조계종 해인사의 부속 사찰로 인접해 있는 벽송사의 암자였다. 창건주인 원응 스님이 벽송사에서 참선을 하던 중 서암정사의 자연 석굴을 발견했다고 한다. 한국전쟁 당시 그 어느 지역보다 빨치산과 국군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라 벽송사는 당시 빨치산들의 야전 병원이었다고.
폐허가 된 사찰을 보듬고 재건하면서 인근 서암정사의 자연 석굴을 발견하고 이곳에서 석불 불사를 일으켜 전쟁으로 죽은 원혼들을 위로했다고 한다. 서암정사의 역사는 그렇게 시작됐다.
1988년 암자까지 차량이 통행할 수 있는 도로가 개설되자 이듬해부터 석굴 불사를 시작했다. 서암정사를 천년만년 도를 닦는 만년 도량으로 만든다는 계획 아래 석공 6명이 30년 동안 조각한 석굴과 문수보살, 보현보살 등이 곳곳의 자연 암반에 새겨져 있다.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장엄하고 이국적인 사찰. 한여름 쏟아지는 장맛비 헤치고 올랐던 꿈같은 여행이었다. 장대비로 제대로 사진 촬영을 할 수 없었던 것이 한이 돼, 오는 가을 다시 한번 서암정사로 가볼 참이다. 서암정사의 가을 모습은 어떨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저·메이트북스)
로마의 전성기를 이끈 ‘철인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 삶과 죽음, 세상의 본질 등에 대해 날카롭게 통찰해 급변하는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인생 지침서가 되어준다.
# 호모 엠파티쿠스가 온다 (최배근 저·21세기북스)
글로벌 금융위기, 동일본 대지진, 코로나19 등 2000년대 인류에게 발생한 여러 위기를 예리하게 분석한다. 저자는 이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공감과 호혜의 가치를 역설한다.
# 심판 (베르나르 베르베르 저·열린책들)
수술 중 사망한 주인공이 지난 생을 심판하는 천국의 법정에 도착해 삶을 돌아보는 이야기다.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인간' 이후 시도한 희곡으로, 특유의 상상력과 유머가 돋보인다.
# 50이라면 마음청소 (오키 사치코 저·센시오)
라이프스타일 전문가인 저자가 청소를 통해 마음을 다스리는 법을 소개한다. 공간을 향기롭고 쾌적하게 정리해나가면서 마음속에 묵혀뒀던 찌든 때까지 지워나갈 것을 제안한다.
# 예술가의 편지 (마이클 버드 저·미술문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이력서, 프리다 칼로의 연서 등 희대의 예술가들이 손으로 주고받은 90여 편의 기록물을 담았다. 실물 편지 스캔본을 첨부해 시각적 즐거움도 제공한다.
# 아름다운 사찰여행 (유철상 저·상상출판)
여행전문기자 출신 저자가 20여 년 동안 전국의 사찰을 다니며 기록한 책이다. 총 56곳의 산사를 테마별로 소개하며 사찰여행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마음 치유 효과도 설명한다.
코로나19의 여파로 세상이 바뀌고 있다. 당연히 여행 풍속도도 달라졌다. 여럿이 다니는 여행은 점차 사라지고 혼자 혹은 둘이 떠나기 좋은 한적한 드라이브 코스가 인기를 얻고 있다. 인적이 드문 곳, 적당한 거리두기를 할 수 있는 곳을 선호하는 추세다. 그렇게 훌쩍 떠나 갑갑했던 마음을 풀어놓고 당일치기로 놀기 딱 좋은 곳이 있다. 바로 강화도다!
강화도령이 살았던 터전, 용흥궁
조선 25대 왕 철종(哲宗)이 강화도령이었던 시절에 지냈던 곳이다. 임금으로 추대된 사람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을 잠저(潛邸)라고 하는데, 당시 강화도령은 가족이 모반사건에 연루되는 바람에 14세 때 이곳 강화로 유배되었다. 원래는 보잘것없는 초가였으나 훗날 강화도령이 왕위에 오르자 강화 유수 정기세(鄭基世)가 집을 보수 단장해 용흥궁이라 불렀다. 사람이 살지 않아 좀 휑한 모습이지만 관리는 잘되어 있었다. 150년 된 고택의 안채와 사랑채, 별채, 마루, 작은 정원, 우물, 반질반질한 문고리를 보며 강화도령 이원범으로 살던 철종의 모습이 느껴져 짠했다. 14세부터 19세까지 동네 아이들과 어울리기도 하고 산으로 땔감을 구하러 가기도 하며 평민으로 살았던 터전이다. 강화도령 이원범, 철종의 이야기가 깃든 용흥궁 담장에는 능소화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용흥궁은 강화 나들길 1코스다. 강화읍 관청리 441-0
한옥의 멋, 대한성공회 강화성당
용흥궁 담 넘어 건너편 언덕에 전통 한옥으로 지어진 성당의 외양이 독특하다. 얼핏 보면 성당 같지 않고 마치 절처럼 보인다. 바실리카 양식과 동양 불교 사찰 양식을 융합한 건축물로 알려져 있다. 마당 한쪽에는 불교를 상징하는 나무 보리수가 100년 넘도록 자리를 지키고 있다. 사찰의 범종처럼 생긴 종도 보인다. 분명 성당인데 절의 분위기가 더 느껴지는,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간직한 건물이다. 서로 다른 전통문화를 존중하고 함께하는 남다름을 본다.
성당 입구의 가파른 돌계단을 오르며 마음을 가다듬어본다. 상사화가 바람에 흔들리는 마당엔 초대 주교 고요한 신부의 비석과 성당 축성 100주년 기념비가 있다. 강화 시내가 한꺼번에 눈에 들어오는 높은 언덕이다.
댓돌 위에 신발을 벗고 들어서면 목재로 이루어진 깔끔한 실내가 성스러움을 더한다. 동서양의 오묘한 분위기가 잘 조합된 실내다. 열린 창으로 자연의 풍경이 한가득 들어온다. 양 벽면에는 강화성당의 역사를 보여주는 사진들이 진열돼 있다. 밖으로 나가면 뒤편으로 낮은 담장의 사제관이 조용히 자리 잡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약탈당한 계단 난간 등 건축물의 일부가 복원된 모습도 볼 수 있다. 주변의 풍경과 자연스럽게 잘 어울리는 성당이다. 강화읍 관청길 27번길 10
소창길’을 아시나요
용흥궁과 대한성공회 강화성당을 나와 내려오다 보면 길가에 서 있는 커다란 굴뚝이 보인다. 1960~70년대에 강화도 산업의 전성기를 주도했던 심도직물의 흔적이다. 직물 공장은 강화도 경제의 대표적 징표다. 강화도서관 옆으로 이화직물 터가 있고, 아기들 기저귓감으로 많이 쓰였던 친환경 직물 ‘소창’을 만들어내던 유명 직물 업체들이 터를 잡고 있다. 그래서 이 골목에 ‘소창길’ 코스가 새롭게 더해졌다. 강화 중앙시장 B동 3층에 위치한 ‘관광플랫폼’이 스토리워크 길 출발지다. 1960년대의 직물공장 전경과 소창 만드는 과정을 구경하고 체험할 수 있는데 현재는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한산하다. 가는 길에는 100년의 세월을 품은 낡은 건물에 자리 잡은 ‘낙원 떡집’이 있다. 순수한 떡 맛을 자랑한다. 질 좋은 강화 쌀에 첨가물은 소금 한 가지밖에 안 넣는다고 자부심이 대단하다. 소박한 식사를 하고 싶으면 읍내 중심에 있는 50년 전통의 ‘강화국수’ 집으로 가면 된다. 강화도에 가면 알싸한 순무김치 맛도 봐야 한다.
※소창길 코스 중앙시장 관광플랫폼에서 출발해 심도직물 굴뚝 - 천주교 인천교구 강화성당 - 이화직물 터 - 금융상사 - 조양방직 - 동광직물 - 남화직물 - 상호직물 - 경도직물 - 소창체험관으로 이어진다. 2시간 정도 소요.
빈티지 감성 카페, 조양방직
과거의 방직 공장을 그대로 살려서 빈티지한 매력을 보여주는 레트로 감성 카페다. 조양방직은 1933년 홍 씨 형제가 민족자본으로 설립한 방직공장으로 한때 엄청난 전성기를 누렸다고 한다. 그 시절의 흔적들이 빈티지한 멋으로 탈바꿈해 핫한 카페가 됐다. 그 옛날 우리의 언니와 누나들이 가족들을 먹여 살리느라 기계를 돌리던 시절을 상상하도록 자극한다. 강화읍 향나무길 5번길 12
평화로운 궁궐터, 고려궁지
끊임없는 외세의 침략에 저항해온 우리 민족의 역사가 있는 곳. 고려 왕조가 몽골에 대항하기 위해 고종 19년(1232)부터 원종 11년(1270)까지 38년간 머물렀던 궁궐의 터다(사적 제133호). 당시의 궁궐은 1270년 송도로 환도할 때 몽골의 압력으로 모두 허물어졌고 행궁과 장녕전, 만녕전, 외규장각 등은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에 의해 불타 없어졌다. 지금은 강화 유수가 업무를 보던 동헌과 유수부의 경력이 업무를 봤던 이방청만 남아 있다. 푸른 잔디가 시원하게 깔린 자연 풍경이 평화롭기만 하다. 강화읍 강화대로 394
조용한 마음의 울림, 교동마을과 향교
느릿느릿 옛 시간을 즐기고 싶다면 시간이 멈춘 듯한 교동마을로 가볼 일이다. 예스럽고 정감 있는 마을을 둘러보다 보면 지치고 복잡했던 마음이 어느새 가라앉는다. 사회적 거리 두기가 완화되면 강화읍에 위치한 강화 향교(고려 전기에 창건)와 우리나라 최초 향교인 교동 향교 방문도 빠뜨릴 수 없다. 강화나들길 1-18코스다. 강화군 교동남로 229-49
해안도로 따라 의미 있는 드라이브 코스, 덕진진
강화도에는 월곶진, 제물진, 용진진, 덕진진, 초지진의 5진(鎭)과 광성보, 선두보, 장곶보, 정포보, 인화보, 철곶보, 승천보의 7보(堡)를 합친 강화 12진보(鎭堡)가 있다. 그중 덕진진은 김포 덕포진과 더불어 해협의 관문을 지키는 강화도 제1포대였다. 적당한 거리 두기를 하며 해안도로를 따라 볼 수 있는 ‘강화나들길 2코스 호국돈대길’ 전적 시설 풍경은 산책과 드라이브 코스로 의미 있다.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846
섬에서 즐기는 슬기로운 문화생활 ‘도솔미술관’, ‘해든뮤지엄’, ‘전원미술관’
최근 서울과 같은 대도시를 떠나 작품 전시를 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고즈넉한 강화 땅에서 감상하는 개성 있고 멋진 미술관. 언택트 여행으로 유유자적 멋진 시간을 누려보자.
도솔미술관은 초지진과 가깝고 고즈넉해서 좋은 사람과 조용히 산책할 겸 가보면 좋은 장소다. 강화 들판을 달려 소나무가 예스러움을 더해주는 작은 마을에 다다르면 단정한 한옥 갤러리가 눈에 들어온다. 총 4개의 전시관이 있는 도솔미술관은 야외전시관, 2개 층의 실내 전시장, 별관으로 나뉘어 있다.
뜰안채 야외전시장에서는 사진작가의 아프리카 바오밥나무 작품이 전시돼 있다. 실내로 들어가면 별관을 비롯해 2개 층으로 이루어진 전시장에서 매달 바뀌는 전시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전시장 창가에 걸터앉아 강화 들녘을 유유자적 내다보며 함께 온 사람과 조용조용 대화를 나누는 다정한 풍경이 아름답다. 강화군 길상면 길상로 210번길 52-71
해든뮤지엄은 갤러리로 걸어 들어가는 입구의 긴 경사면에서부터 설레게 된다. 자연과 잘 어우러지는 건축물로 2013년 한국건축가협회에서 선정하는 ‘올해의 건축 베스트7’에 뽑히기도 했다. 실내 사진 촬영이 안 돼 아쉽지만 야외의 조각작품과 설치미술, 그리고 대형 미러가 볼 만하다. 정원의 휴식공간과 잘 어울리는 자연이 아름다운 곳. 강화군 길상면 장흥로 101번길 44
전원미술관은 강화도에서 출생한 한국화가 유광상 씨가 운영하는 갤러리다. 작가의 예술세계를 보여주는 작품과 일본 유학 시절에 그린 그림 등을 다양하게 감상할 수 있다. 강화군 송해면 솔정리 561
이색적이고 따뜻한 ‘동네 책방’
강화군청 부근엔 볼거리가 많다. 강화성당과 용흥궁, 중앙시장, 궁터, 중앙시장 청년몰, 소창길…. 이곳들을 다 돌아본 뒤 한숨 돌리며 조용히 서점을 들러보는 건 어떨까. 소금빛 서점, 국자와 주걱, 책방 시점 등은 강화도 간 김에 누리는‘소확행’이다.
‘소금빛 서점’ 이 있는 고택 계단을 올라서면 대문 바로 앞 양옆으로 ‘그 여자 그릇 유림상회’와 ‘그 남자 책방 소금빛 서점’이 있다. 그 남자의 안목으로 고른 책들이 진열된 소금빛 서점은, 얼마 전 방영 종료된 SBS 드라마 ‘더킹: 영원의 군주’에서 배우 이민호가 책 읽는 장면을 찍은 장소로 더 알려졌다. 그 여자의 그릇 유림상회는 채색이 독특한 그릇 한 점쯤 갖고 싶게 하는 곳이다. 그 남자, 그 여자의 책과 그릇이 있는 감성 공간이다(서점과 그릇가게 앞의 대문을 열면 100년 고택 대명헌을 만난다. 김구 선생이 한동안 머물렀다는 운치 있는 한옥 숙박업소로 예약제로 운영된다).
강화읍 남문안길 7
‘국자와 주걱’은 한적한 마을의 한옥을 책방으로 꾸민 시골 책방 겸 북 스테이다. “작은 책방. 작고 불편함. 그러나 좋은 책. 따뜻한 밥상. 깨끗한 잠자리. 그리고 많은 정”이라는 책방 소개글이 다정하다. 책만 보러 갔다가 주인장의 푸근한 인심에 다시 찾는 곳이다. 큰 도로에서 마을길로 접어들어 꼬불거리는 좁은 길로 주춤주춤 운전해 들어가면 이 특별한 책방과 만난다. 강화군 양도면 강화남로 428번길 46-27
아름다운 일몰에 반하다, 장화리
강화도의 마지막 코스는 누가 뭐래도 일몰 풍광이 장관인 장화리다. 강화도 남부 해안도로를 따라 펼쳐지는 강화 갯벌과 서해의 해넘이는 여행자들의 관심사다. 이곳에서의 일몰 시간은 아주 짧다. 찰나의 장화리 노을 앞에서 두근두근하면서도 경건한 시간을 맛보며 강화 여행을 마무리할 수 있다.
강화군 화도면 장화리
코로나19로 해외여행이 어렵게 되자, 이국적인 국내 여행지가 주목받고 있다. ‘바다 위의 식물 낙원’이라 불리는 경남 거제도의 외도 보타니아도 그중 한 곳이다. 사실 외도 보타니아의 인기는 새삼스럽지 않다. 1995년 개장 이래 누적 방문객 수가 2000만 명이 넘는 거제 대표 명소이니 말이다. 나만 해도 그 방문자 수에 ‘4’를 더했다. 이번 방문 때는 비가 왔다. 비 오는 날의 섬 여행도 꽤 낭만적이었다.
바깥 섬이 식물의 낙원이 되기까지
거제도 남쪽 외딴 섬 외도(外島)는 미운 오리 새끼였을까. 마음 심 자를 닮아 ‘지심도’, 보배에 비길 만한 풍광을 지녀 ‘비진도’라 불리는 거제도의 다른 섬들에 비하면 이름조차 초라한 섬이었다. 그랬던 외도가 부침개처럼 운명이 뒤집히는 일이 벌어졌다. 50여 년 전 이창호(1934∼2003) 씨가 낚시하러 외도에 들른 것이 인연이 되어, 몇 년에 걸쳐 외도를 매입한 것이다.
이창호 씨와 그의 아내 최호숙 씨는 1969년부터 외도를 해상식물원으로 가꾸기 시작했다. 무시로 닥치는 태풍과 거친 파도에 맞서며 척박한 땅에 나무를 심고 꽃을 피웠다. 외도는 기후가 따뜻하고 물이 풍부해 종려나무, 야자나무, 선인장 같은 아열대 식물이 자라기에 적합했다. 첫 삽을 뜬 지 26년이 지난 1995년에 이르러서야 세상에 외도 보타니아를 선보일 수 있었다. ‘보타니아’(botania)는 ‘botanic’과 ‘utopia’의 합성어로서 바다 위 ‘식물의 낙원’이라는 뜻을 품고 있다. 외도는 ‘보타니아’라는 이름에 걸맞게 아름답고, 이국적인 모습으로 다시 태어났다. 마치 미운 오리 새끼가 백조가 된 것처럼.
국내 최초 해상식물원의 인기는 개장한 지 25년째인 지금도 여전하다. 외도행 유람선 선착장이 거제도에 7곳이나 있으며, 유람선이 매일 여러 차례 외도 보타니아를 왕복한다. 바람의 언덕과 더불어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가 선정하는 ‘2019~2020 한국관광 100선’에도 들어 제2의 전성기를 맞고 있다.
해금강 유람선 타고 바다 위 정원으로
외도 선착장 7곳 중에 도장포를 애용한다. 도장포 가까이에 외도 보타니아와 인기 쌍벽을 이루는 바람의 언덕과 신선대가 있어서다. 외도로 가는 길에 즐기는 해금강(海金剛) 유람은 덤이다. 선실 밖으로 나가 출렁대는 유람선에 몸을 맡기고, 파도를 가르며 달리는 기분이 상쾌하다.
해금강은 강이나 바다가 아닌, 바다 위로 솟은 바위섬이다. 금강산처럼 경치가 아름답다고 하여 ‘바다 위의 금강산’이라 부른다. 해금강 해안 절벽 위에는 거센 바람을 견디며 살아온 노송들과 석란, 풍란 같은 희귀한 난초들이 자생한다. 절벽 아래에는 파도가 오랜 세월 조각해놓은 십자동굴, 부엌굴 등의 해식동굴이 있다. 선장의 설명을 들으며 해금강의 기암을 바라보면 사자, 촛대, 기도하는 소녀처럼 보인다.
30분가량의 해금강 유람이 끝나면 외도 보타니아에 도착한다. 외도 모양을 형상화한 빨간 등대가 맨 먼저 반긴다. 선장이 1시간 반 뒤에 유람선으로 돌아오라고 당부한다. 순환형 산책 코스대로 걸으면 되므로 관람시간 90분이 턱없이 부족하진 않다.
유럽식 정원과 건축물로 꾸민 외도
외도 보타니아 관광은 아치 모양의 작은 정문을 지나면서부터 시작된다. 세계 각국 방문객을 맞이하는 외도 광장에는 한글·영어·한자로 쓴 ‘외도 보타니아’ 조형물들이 장식돼 있다. 광장을 지나면 향나무 여러 그루를 연결해서 한 몸처럼 다듬어놓은 나무 작품이 보인다. 이곳의 인공미를 대표하는 작품이 아닌가 싶다. 이 나무는 눈이 부리부리한 뿔 달린 도깨비 또는 기세등등한 불꽃을 닮았다. 산책로 입구에 턱 버티고 서 있어 사찰의 사천왕상 같은 존재로 느껴진다.
선인장, 알로에, 용설란 등이 자라는 선인장가든을 지나면 외도 보타니아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는 비너스가든이 나온다.
지중해풍의 건축물과 고속도로처럼 시원하게 뻗은 정원,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세워진 하얀 비너스상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최호숙 씨가 영국 버킹검 궁의 뒤뜰을 모티브로 직접 구상하고 설계한 공간이라고 한다. 비너스가든 끝에 있는 유럽식 사택 ‘리하우스’는 KBS 드라마 ‘겨울연가’(2002)의 마지막 촬영 장소였다. 외도 보타니아를 전국에 소문낸 일등 공신이다.
이탈리아어로 ‘환영합니다’라는 뜻을 지닌 벤베누토정원은 사계절 꽃이 피는 꽃동산이다. 철따라 튤립과 양귀비, 수국, 동백 등이 피고 진다. 이 꽃들은 관람객들의 감탄을 먹고 자란다. 꽃길을 걷다 보면 짙푸른 동백숲길과 대숲길이 나타난다. 밀감나무 3000그루와 편백나무 8000그루가 늘어선 ‘천국의 계단’을 내려서면 야자수 산책로가 기다린다. 프랑스식 연못과 조각상을 배치해 이국적인 정취가 가득하다. 외도 보타니아는 구석구석 아름답다. 귀부인이 그려진 화장실 이정표마저 예쁘다. 화장실 벽 둥근 창으로 보이는 해금강과 외도 등대는 또 어떻고.
바람의 고향 도장포
외도 관람을 마치고 도장포로 돌아와 바람의 언덕에 오른다. 하늘이 맑으면 언덕 아래에 제주도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비췻빛 바다가 일렁인다. 바람의 언덕은 바다로 돌출한 곶이라 늘 세찬 바람이 분다. 풀들이 바람 부는 방향으로 일제히 누워 있다. 언덕 위의 풍차는 신나서 춤추듯 바람개비를 씽씽 돌린다. 비바람에 우산이 뒤집혀도 시원한 바람이 그저 반갑다. 만약 이 언덕을 ‘도장포 잔디공원’이나 ‘도장포 민둥산’이라고 이름 지었다면 얼마나 낭만이 없었을까.
풍차 왼쪽, 숲속 계단을 오르면 호젓한 동백숲길이 나온다. 이 숲길이 도장포마을 윗길로 이어진다. 윗길에서 굽어본 도장포마을 전경도 엄지를 치켜세울 만큼 장관이다. 마을 뒤로는 산이, 앞으로는 바다가 마을을 포근히 감싸고 있다.
도장포마을 남쪽 바닷가에는 신선이 머물렀다는 신선대가 있다. 부안의 채석강과 지형이 비슷하다. 책을 포개놓은 듯 가로지층이 차곡차곡 쌓여 있어 태곳적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공룡 발자국 같은 작은 웅덩이도 수없이 많다. 깎아지른 절벽 사이로는 파도가 으르렁대며 들락거린다. 신선대를 본 사람들이 웅장한 기암절벽과 절벽 아래 몽돌해변을 두고두고 이야기하는 이유를 알 만하다.
◇이색 명소&맛집◇
매미성 매미성은 2003년 태풍 매미 때문에 바닷가 경작지를 잃은 백순삼 씨가 자연재해로부터 작물을 지키기 위해 16년 동안 혼자 쌓아 만든 성벽이다. 처음에는 시멘트 벽돌로 쌓아 볼품이 없었다. 점차 네모반듯한 화강암을 쌓고 시멘트로 메우는 방식으로 바꿔 지금의 모습을 갖췄다. 유럽 중세시대의 성을 연상케 해 이국적인 명소로 인기를 끌고 있다. 실제 풍경보다 사진에 담았을 때 더 멋지게 보여 인생사진 명소로 유명해졌다.
경남 거제시 장목면 복항길
외도널서리 외도 보타니아 설립자인 최호숙 씨가 구조라해변에 유리 온실 콘셉트 카페인 외도널서리를 개장했다. ‘널서리’(nursery)는 ‘묘목을 기르는 땅’이라는 뜻으로 외도 보타니아와 통하는 면이 있다. 유럽풍으로 지어 외국에 여행 온 듯한 기분을 낼 수 있다는 점도 같다. 테라스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빛깔 고운 구조라에이드 한 잔 어떨까. 계절에 상관없이 초록 식물을 감상할 수 있는 게 큰 매력이다.
경남 거제시 일운면 구조라로4길 21, 매일 10:00~21:00
예이제게장백반 거제도에서 이름난 무한리필 게장 백반집이다. 본점은 도장포에 있다. 바람의언덕점은 도장포와 가까워 외도 관광 전후에 들르기 좋다. 메뉴는 게장백반 한 가지다. 메인 요리인 간장게장과 꽃게장을 비롯해 불볼락구이, 간장새우, 충무김밥, 조개미역국 등 반찬이 한 상 가득 나온다. 작은 꽃게를 사용하지만, 살이 제법 차 있어 먹을 만하다. 쫀득한 맛이 일품인 간장새우도 리필된다.
경남 거제시 남부면 해금강로 132, 매일 10:30~21:00, 게장백반 1인분 1만5000원
한국의 서원을 보고 싶다는 생각에 불현듯 떠난 여행길. 가장 보고 싶었던 곳은 단연코 병산서원이었다. 안동 하회마을을 돌아보고 난 후, 병산서원을 향해 차를 몰았다. 지도에서 보면 낙동강의 물줄기는 S자로 흐른다. S자가 만든 골짜기 안에 하회마을과 병산서원이 나란히 있다. 하회마을을 투어하고 병산서원을 방문하면 꽉 찬 1일 코스로 손색이 없다.
병산서원은 하회마을에서 6km 떨어진 거리에 있으니 멀다고는 할 수 없지만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불편하기 그지없다. 하회마을에서 곧장 갈 수 있는 대중교통 수단이 없다 보니 버스를 타고 가다 중간에서 내려 한참을 걷든지 아니면 다시 안동까지 가서 병산서원으로 가는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한다. 안동의 관광 구역을 묶어 투어 버스를 운행해보는 것이 필요해 보였다.
운전하면서 온갖 아이디어로 안동 지역 관광을 증진하는 말의 향연을 나누고 있을 때였다. 신장이 족히 190cm 정도는 되어 보이는 체격 좋은 외국인이 땀을 뻘뻘 흘리며 걸어가고 있었다. 무거운 배낭 차림으로 포장도 안 된 도로를 걷고 있는 옆을 아무 생각 없이 지나쳤다.
“잠깐, 저 친구 병산서원 가는 거 아닐까?” 우리 일행은 동시에 같은 생각을 했고 길 한쪽에 차를 세우고 그가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다. “Are you going to Byeong San?” 맞았다. 안동 하회마을에서 걸어오는 길이란다. 아직 4km도 넘게 남은 길이었다. 이 친구를 앞좌석에 태우고 병산서원을 향해 다시 출발했다. 연세대학교에서 석사과정을 밟고 있는 독일 청년이었다. 1년 전에 한국에 왔고 시간이 날 때마다 한국 곳곳을 혼자서 돌아다닌다고 했다.
한국어도 거의 하지 못하는 독일 청년이 안동까지 혼자 여행 와서 걸어 다니는 것을 보니 마음이 짠했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지만 습하고 무더운 여름 날씨에 고생이 심해 보였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가다 보니 어느새 병산서원 주차장이었다. 돌아갈 때도 태워줄 테니 편하게 서원을 관람하고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한 후 독일 청년과 헤어졌다.
이제부터 병산서원을 차근차근 훑어볼 시간. 중장년층 세대의 병산서원에 대한 관심은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3’에서 시작됐을 듯싶다. 유 교수는 “인문적·역사적 의의 말고 미술사적으로 말한다 해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원 건축으로 한국 건축사의 백미”라며 병산서원의 아름다움을 극찬했다. 아울러 “하회의 답사적 가치는 어떤 면에서는 하회마을보다 꽃뫼 뒤편 병산서원이 더 크다고 할 수 있다”고 했다.
많은 사람이 병산서원에 들어서자마자 만대루에 감탄한다. 다른 서원에서는 볼 수 없는, 200여 명은 함께 모여 강학할 수 있을 만큼 규모가 큰 망루다. 만대루를 떠받치고 있는 휘어진 모습 그대로의 기둥들과 주춧돌, 커다란 통나무를 깎아 만든 계단까지 자연의 모습이 건축물에 생생하게 살아 있다. 모래사장의 풍경과 낙동강 물줄기를 감싸 안은 산세들을 만대루에서 내려다보고 있으니 옛 서생들이 품었던 기개가 느껴진다. 자연의 섭리를 깨우치며 공부할 수 있도록 대자연을 건축으로 끌어들인 한국 건축의 백미라는 유홍준 교수의 찬양에 고개를 끄덕였다.
만대루 밑을 통해 마당으로 들어서면 좌우로 동재와 서재가 있고 맞은편으로는 입교당이 있다. 입교당에 앉아 만대루가 들어선 서원의 앞쪽을 바라보면 산을 끼고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이 한눈에 들어온다. 만대루 기둥 사이사이로 보이는 모습이 마치 한 폭의 그림인 듯해 잠시 말을 잃을 정도다.
병산서원 곳곳에는 배롱나무가 심어져 있다. 예로부터 선비, 유학자들이 서원 혹은 향교에 심었고 사찰에서도 많이 심었던 꽃나무다. 이 나무를 심는 데는, 1년에 한 번씩 나무껍질이 벗겨지는 배롱나무처럼 정진을 거듭해 심신을 수련하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한다. 그러나 꽃이 흐드러지게 핀 배롱나무가 너무 황홀하다. 가끔 수련에 지장이 되는 날도 있지 않았을까 싶다.
배롱나무 자태에 취하고 만대루 풍경에 취하다 보니 어느새 해가 떨어지고 있었다. 병산서원을 나서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독일 청년이 의자에 앉아 우리를 기다리다 반겨준다. 우리가 떠나버린 건 아닌지 걱정한 모습이다. 오늘 밤 숙소를 물어보니 다시 서울로 올라가야 한다며 안동버스터미널에 내려줄 수 있는지 물어본다. “Of course!!” 병산서원의 황홀한 자태에 취한 저녁, 우리는 안동버스터미널에 눈동자 파란 외국인을 내려주며, 저 친구가 오늘을 평생 기억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봤다.
병산서원
병산서원은 고려 중기부터 안동 풍산에 있던 교육기관인 풍악서당(風岳書堂)을 모체로 건립됐다. 지방 유림의 자제들이 모여 공부하던 곳으로, 고려 말 공민왕 때 홍건적의 난이 일어나 왕의 행차가 풍산을 지날 무렵, 풍악서당의 유생들이 난리 중에서도 학문에 열중하는 것을 보고 왕이 크게 감동하여 많은 서책과 사패지(賜牌地)를 주어 유생들을 더욱 학문에 열중하도록 격려하였다.
200년이 지나면서 서당 가까이에 가호가 많이 들어서고 길이 생기며, 차츰 시끄러워지면서 유림들이 모여 서당을 옮길 곳을 물색하던 중에 서애 류성룡 선생께서 부친상을 당하시고 하회에 와 계실 때 그 일을 선생에게 문의하니, 서애 선생께서 병산이 가장 적당할 것이라고 권하게 되었고 유림들은 선생의 뜻에 따라 1575년(선조 8) 서당을 병산으로 옮기고 ‘병산서원’이라고 고쳐 부르게 됐다.
1614년(광해 6)에 우복 정경세, 창석 이준, 동리 김윤안, 정봉 안담수 등 문인들이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존덕사를 창건하여 선생의 위판을 봉안하였다. 1662년(현종 3)에 선생의 셋째 아들인 수암 류진(柳袗, 1582~1635) 공의 위패를 종향하였다.
병산서원은 1863년(철종 14)에 조정으로부터 '병산서원'으로 사액을 받았으며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이 내려졌을 때에도 훼철되지 않고 존속한 47개 중 하나다. 1978년 3월 31일에 사적 제26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서애 선생의 문집을 비롯하여 각종 문헌 1000여 종 3000여 책이 소장되어 있다. (병산서원 공식 홈페이지에서 발췌)
땅끝마을은 그 이름만으로도 아득하게 먼 느낌이다. 그래서 한 번 다녀오고 나면 언제쯤에나 또다시 가보나 늘 그래 왔던 곳이었다. 아주 오래전 무덥던 여름날 어린 아들 손에 유홍준 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한 권 들려서 삐질삐질 땀 흘리며 남도 땅을 누비며 다녔던 날들이 있었다. 그때의 감흥을 다시 얻기는 어렵겠지만 땅끝마을 해남은 언제나 기대를 품게 하는 곳이다.
이 땅의 끄트머리 해남엔 바다를 내다보며 세상을 품은 듯이 장엄하게 우뚝 선 달마산(達摩山)이 있다. 그 장대한 산세에 천년고찰 미황사(美黃寺)를 있게 했다. 신라 경덕왕 8년에 인도에서 경전과 불상을 싣고 온 돌배가 닿은 곳이 이곳 갈두항이다. 이때 경전과 불상을 싣고 앞서가던 소가 누운 곳에 절집 미황사를 창건했다는 설화가 있다.
절 입구부터 위로 올려다보면서 한참을 걸어서 닿은 미황사는 산에 스며있는 절이라는 인상을 준다. 산이 감싸 안은 안온함이 느껴진다. 산을 다듬어서 평지에 지어진 모습이 아니다. 높낮이가 다른 산에 그대로 맞추어 각각 앉혀졌다. 건물마다 비탈길이나 계단으로 오르내려야 하는 높낮이가 있다. 그래서 아래서 올려다보는 절의 처마나 기둥, 그리고 바람에 흔들리며 소리 내는 풍경소리가 남다르다.
비탈진 길을 따라 달마선원 뜰에 올라서 비로소 적요한 세상을 내려다보는 시간, 눈앞에 바다를 펼쳐 놓았고 남도의 들녘에 바람을 담아두었다. 그리고 저 멀리 매일 달라지는 일출과 일몰을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매월당 김시습은 일출은 낙산사, 일몰은 해남 미황사를 꼽았다고 한다.
이번 여행길에는 늘 하고 싶었던 템플스테이 일정이 있다. 비록 하루 머무는 짧은 프로그램이지만 깊은 산사에서 보냈던 그 시간은 깊은 힐링이었다. 방 배정과 함께 사찰 안내와 예절, 예불, 저녁 공양 후 참여했던 남도 문화체험은 해남 여행을 실감시킨다. 구수한 남도 소리를 바로 눈앞에서 들으며 함께 추임새도 넣어보는 시간, 비로소 우리 문화에 다가가 보았던 산사의 밤이었다. 이 모든 것들을 수행하면서 내 머릿속이 정돈되고 살짝 기분 좋은 긴장감에 뿌듯하다.
꾸밈없이 정갈한 텅 빈 방에서 지낸 하룻밤. 새벽녘 정적을 울리는 목탁 소리에 잠을 깼다. 문을 여니 어둠이 가득한 절 마당으로 가만히 오가는 발자국 소리들이 들린다. 조용히 일어나 내다본 산속의 사찰도 세수한 듯 신선하고 상쾌하다.
아침 공양 후 달마 선원의 찻방에서 금강 스님과 함께한 다도 시간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안경 너머로 느껴지는 스님의 눈빛이 엄격한 듯 따뜻하다. 스님께서 만들어 주시는 차를 두 손에 감싼다. “스님, 은은한 향이....이게 무슨 차인가요?”빙그레 웃으시며 스님이 말씀하신다. “차 이름은‘미황사 차’입니다.”이 무슨 바보 같은 물음이었는지.‘미황사 차’를 마시며 우리가 함께해야 하는 자연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들려주신다.
“매일매일 살아있는 숲을 순례하는 마음으로 대했으면 좋겠습니다. 산길을 걸은 후 기운이 충만해지길 바라요. 그리고 이 길이 천 년이 지나도 반가운 길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자연을 그대로 두는 길을 만들었습니다.”
중장비나 기계가 아닌 호미와 삽, 괭이와 지게를 이용한 순수 인력으로 있는 그대로의 길을 내었다. 해마다 쌓이는 낙엽이 스며들고 그 길을 걷는 발아래 편안함이 있도록 자연 속의 흙과 돌을 그대로 고집했다. 길 가다가 정신을 차려야 한다며 걷는 도중에 큼직한 돌들이 쏟아져 내린듯한 너덜길을 몇 번쯤 만난다.
미황사를 둘러싼 뒤편의 달마산에 달마고도(達磨古道) 길이 차분히 열려 있다. 총 17.74km의 4개 코스다. 그중에 한 코스를 걷기로 했다.
달마 고도는 각 4코스가 있다. 총 17.74km / 약 6시간 30분 거리. 제1코스 2.7km 미황사~큰 바람재, / 제2코스 4.37km 큰 바람재~노지랑골,/ 제3코스 5.63km 노지랑 골~몰고리재, / 제4코스 5.03km 몰고리재~인길~미황사
땅끝마을에 명품 둘레길 달마고도(達磨古道). 그 길을 세 시간여 걸었다. 땅끝에서 산길을 걷고 돌길을 걸으며 속세의 고단함도 함께 한다. 태고의 매력 속에서 자연의 기운을 듬뿍 받는다. 힐링 트래킹이다. 걸으며 사색과 명상을 하며 미약하게나마 성찰의 시간이 된다면 더 바랄 게 무엇일지.
달마산의 숲에 난 조붓한 길은 적당히 걷기 좋았고 숲을 이룬 나무 사이로 햇살이 눈 부시다. 이렇게 걷는 행복을 만끽한다. 심신이 정돈되는 느낌이다. 평소에 운동하지 않는 편이다 보니 때로 숨차서 헉헉거리면서도 그리 어렵지 않다. 걸을수록 그 길을 걸어나갈 힘이 생겨난다. 언제라도 찾아와 걸어보고 싶은 길이 또 하나 생겼다.
생각만으로 막연히 멀다 했다. 이젠 언제라도 한반도 끄트머리 땅끝마을 해남으로 훌쩍 떠나볼 만하다. 그곳엔 붉은 동백이 피고 지고 있었고 애끓는 남도 창이 고단한 마음을 달래준다. 푸근한 인심과 맛있는 밥상엔 인정이 넘치던 곳, 지금 거기엔 싱그럽게 일렁이던 청보리가 누렇게 패고 있겠다.
*해남 미황사 가는 길 - 자동차로 약 6시간 정도 // *대중교통: 강남고속버스터미널(호남선)출발-해남터미널-미황사행 버스 // * 미황사. 달마고도(達磨古道) : 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서정리
(해남군은 신종 코로나19 확산으로 나 홀로 여행자를 위한 한적하고 안전한 걷기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6월 27일까지 매주 토요일 오전 9시 30분 미황사 일주문 앞에서 트레킹 가이드와 함께 출발한다.)
△ 주변에 더 가 볼 곳 & 맛집
*해남 청보리밭 - 두 눈이 시원하다. 황산 연호 보리밭은 바라만 보아도 싱그럽다. 구릉의 높낮이를 그대로 살린 완만한 지형이 자연스럽다. 고두심 주연의 영화 '엄마'의 한 장면이 이 청보리밭에서 연출되어 화제가 된 곳이기도 하다. 지금쯤 보리가 패어 누런 황금 물결이겠다. 전남 해남군 황산면 연호리 482-2
*해남 공룡박물관 - 세계 최초로 익룡, 공룡, 새 발자국이 동일 지층에서 발견된 지역이 바로 해남이다. 그 앞으로 펼쳐진 바다처럼 넓은 호수를 보며 걸을 수 있는 산책길은 마냥 평화롭다. 전남 해남군 황산면 공룡박물관 길 234
*대흥사- 우리 국토의 최남단에 있는 두륜산(頭崙山)의 빼어난 절경을 배경으로 자리한 대흥사(大興寺)는 땅끝마을 해남의 대표적인 사찰이다. 특히 천불전 남쪽의 동국 선원은 1978년 문재인 대통령이 머물며 사법 시험공부를 했다고 해서 유명해진 곳이다. 소박한 방에서 누군가의 큰 꿈을 이루어가던 시간이 거기 있었다.
입구에 있는 100년 전통의 한옥 구조인 '유선관 여관'과 그 뜰의 누렁이가 유명하다. 이제 그 누렁이는 간데없고 근래엔 TV 예능 알쓸신잡의 잡학박사들이 이곳에서 토론을 하던 장면을 떠올릴 수 있다. 전남 해남군 삼산면 대흥사길 376
*녹우당(綠雨堂)- 고산 윤선도의 산중신곡의 무대 비자림 숲. 500년 된 은행나무가 입구에서 든든히 지키고 있다. 바람이 불 때 정말 녹우(綠雨) 소리가 날까 귀 기울여 보라.
*땅끝마을- 한반도 육지의 남쪽 끝 43.5km 지점에 있는‘땅끝마을’. 마을 입구에 땅끝 표지석이 서 있다. 156m 갈두산 정상에 전망대가 있다.(모노레일 이용 가능) 전남 해남군 송지면 송호리
*보리향기 - 음식점도 자그마하고 가족 느낌의 보리밥 정식. 고소하고 찰진 차조밥과 '자줏빛의 작은 새우'라는 뜻의 '자하젓'이 맛깔스럽다. 막걸리 한 잔이 잘 어울리는 남도의 밥상.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대흥사길 158-1 보리향기
*원조장수통닭 - 닭 한 마리로 다양하게 먹는 닭 코스 요리가 있다. 해남군 해남읍 고산로 295
*미황사(美黃寺)에서 하룻밤 템플스테이 하면서 먹은 특별했던 ‘공양’. 단 한 가지도 나무랄 것 없이 모두 맛있다. 채식의 사찰요리여서 먹은 후 속도 편하다. 그리고 미황사 금강스님이 만들어주신 '미황사 차 한 잔'. 이번 여행에서 가장 으뜸의 맛 기억이다.
당신은 섬에 가고 싶지 않은가? ‘그 섬에 가고 싶다’란 말에는 막연한 그리움이 담겨있다. 배를 타야만 들어갈 수 있던 섬이 다리가 놓이면서 바퀴가 달린 탈 것으로도 갈 수 있게 된 곳이 많아졌다. 접근은 쉽고 섬이 주는 그리움을 느끼게 해주는 곳으로 여행을 떠나보자. 그곳이 강화도다.
봄이 채 오지 않은 겨울 끝 무렵에 서울에서 멀지 않은 강화도로 향한다. 섬이지만 섬이 아닌듯한, 역사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어 지붕 없는 박물관이라고 불리는 강화도에서 어렴풋이 남아있는 섬이 주는 그리움과 시간의 터널을 지나온 역사의 자취를 만나볼 것이다.
섬과 육지를 연결하는 연륙교가 놓인 후에는 섬이 섬답지 않아졌다. 이것을 아쉬워해야 할 것인가, 기꺼워해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개인의 몫이다. 어찌 되었든 다리가 놓여 섬 주민들의 생활이 한결 수월해진 것은 사실이다. 여행자의 입장에서도 섬 나들이가 한결 편해졌다. 초지대교를 지나 강화도에 입도한다. 강화도와 육지를 연결하는 연륙교는 두 개다. 처음으로 연륙교가 놓인 때는 1969년이다. 시간이 지나면 낡아지듯 다리는 노후되었고 1997년에 재시공하여 만들어진 다리가 지금의 강화대교다. 김포시와 강화도를 잇는 초지대교와 강화대교 외에 강화도와 교동도를 잇는 교동대교, 2017년에 개통된 석모대교까지 합치면 네 개의 다리가 강화도를 사통팔달로 연결하고 있다.
강화도가 육지와 연결된 지는 어언 50년 세월이 흘렀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섬이 육지가 되다시피 한 후 많은 시간이 지났다. 섬이라기보다는 육지처럼 느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섬 느낌이 남아있는. 그래서일까? 강화도를 제2의 터전으로 삼으려는 이들이 많다. 가까운 이도 강화도에 집을 짓고 강화도 자연을 해설하며 활기찬 인생을 살고 있다. 역사의 섬 강화도에는 휴식과 새로운 용기가 꿈틀거린다.
강화도가 섬이라는 사실은 초지대교를 건널 때 실감한다. 마니산을 오를 때도 마찬가지다. 마니산은 일종의 전망대다. 여유만 된다면 꼭 올라보길 추천한다. 전체 전경을 확인하려면 전망대에 올라가야 하지 않는가. 마니산 능선을 타면서 만나는 경치는 삭막함이 진을 치고 있는 이런 계절에도 충분히 경이롭다. 근육처럼 뻗어 내린 산줄기가 서해바다를 향해 두 팔로 벌리고 있고 바다 위에는 크고 작은 섬이 올망졸망 떠 있다. 이런 풍경만으로도 오를만한 가치가 있지만 정상에 있는 첨성단이 갖는 역사적 의미를 되새긴다면 흘린 땀방울이 아깝지 않다.
첨성단은 고조선 시대 단군이 제를 지내기 위해 쌓았다고 전해진다. 하늘을 숭배하고 제사를 지내는 제천 행사는 선사시대부터 시작되었다. 그 후 신라, 백제, 고구려의 왕들과 고려의 제관과 왕 그리고 조선시대에까지 국가적으로 단군왕검에 대한 제를 이곳에서 지내왔다.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본래의 모습을 확인할 수는 없지만 현재에는 둥근 기단 위에 네모난 제단의 형태로 되어있다. 하늘에 대한 제사는 현재에도 개천절에 의식을 진행하고 있다. 제단과 함께 눈여겨볼 것은 제단을 지키기라도 하듯 서 있는 소사나무 한 그루다. 유난히 바람이 센 정상, 돌 틈 사이에 뿌리를 내린 150년 된 소사나무는 지금도 의연하다. 천연기념물 제502호로 지정되어 있다.
마니산의 첨성단은 강화도 역사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상징과도 같다. 선사시대부터 삼국시대, 고려와 조선을 지나 근세기에 이르는 역사의 자취를 따라서 강화도를 한 바퀴 휙 돌아본다.
강화도의 굴곡 진 역사를 만나기 전 바다가 보고 싶다면 동막해변부터 가보자. 해변 가까이 분오리둔대에서 바라보는 서해 풍광은 시름을 잊게 할 정도로 시원하면서도 애잔하다. 서해바다가 갖는 먹먹함 때문이다. 갯벌에서 느껴지는 끈끈한 바다의 흔적을 삶의 흔적인 양 곱씹으며 강화도 대표 사찰인 전등사로 향한다. 역사의 현장에서 살아남은 전등사는 그리 화려하지 않으나 시간의 결을 품고 있다. 대웅전 앞 느티나무가 현실의 위태로움을 잊고 쉬어가라며 부른다. 전등사는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였던 절이다. 명부전에서 100m 정도 오르면 정족산사고터가 나온다. 초지대교가 보이는 너른 풍경을 앞에 두고 잠시 쉬어 가도 좋다.
전등사를 주변으로 삼랑산성의 흔적이 남아있다. 삼랑산성은 삼국시대에 쌓았던 토성이다.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점령했던 5세기경부터 백제, 고구려, 신라가 번갈아 가며 강화도를 점령하였고, 강화도에 요새를 설치하였다. 강화도는 한강을 낀 전략적 요충지였다. 고려시대에는 강화도로 도읍을 옮겨 39년간 몽골에 대항하였고 조선시대로 넘어오면서 5진, 7보, 54돈대를 설치하여 외세의 침입을 막고자 하였다. 초지진, 덕진진, 광성보, 갑곶 돈대 같은 군사 시설이 강화도 곳곳에 남아있다. 조선말 병인양요, 신미양요가 강화도를 무대로 벌어진 전투다. 꼭 가봐야 할 곳으로 추천하는 광성보에는 광성돈대, 손돌목돈대, 용두돈대 등이 있다. 송림 사이를 지나 용두돈대까지 이어지는 길은 사계절 언제 걸어도 좋은 산책로다. 길 끝, 좁은 강화 해협을 향해 용머리처럼 쑥 튀어나온 돌 위에 서 있는 용두돈대는 천연방어지다.
시대를 거슬러 삼국시대 이전의 유적인 강화도 부근리 고인들을 만난다. 강화도 북부에 위치하여 이동 경로에서 뒤로 밀린 때문이다. 고인돌은 청동기시대 무덤이다. 부근리 고인돌은 규모가 워낙 커서 무덤이 아니라 제단이 아닐까라는 의견도 있다. 두 개의 굄돌 위에 53톤에 달하는 덮개돌이 얹어져 있는데 그 옛날 이 돌을 옮기기 위해 동원되었을 사람 수를 떠올려 보면 이것이 과연 믿음의 힘인지 권력인지 궁금해진다. 부근리에 16기의 고인돌이 있고 오상리에 탁자식 고인돌 군락지가 있어 청동기시대의 주 생활무대가 이곳 강화도였음을 알 수 있다.
역사의 현장을 짚어가며 나름 알찬 여행을 했다 싶다. 이제는 추억의 소환이다. 강화도와 교동도를 잇는 교동대교를 지나 대륭시장으로 간다. 제비집이 처마 끝에 붙어있고 고개를 쳐들지 않아도 시장통이 눈에 들어오는 키가 작은 시장이다. 좁고 가파른 계단을 올라 옛날식 다방에 앉는다. 달걀 동동 쌍화차에 옛 기억을 앞에 두고 겨울 볕을 쬔다. 좁은 골목길은 꽈배기 도넛 하나에도 웃음이 스민다. 교동도는 강화도 섬 속의 섬, 당신의 옛 시간을 만나게 해주는 여행지다.
강화도는 지붕 없는 박물관이라고 할 정도로 선사유적부터 고려, 조선의 문화재가 즐비하다. 섬을 빙 둘러 53개의 돈대가 자리하고 있고 어느 돈대나 조망이 시원하다. 최근에는 강화 나들길이 인기다. 해안 절경을 끼고 오르는 고려산, 마니산 산행도 해볼 만하다. 요즘 여행을 자제하는 분위기 탓에 식당이나 여행지가 한산하다. 달리 말하면 여행을 여유롭게 할 수 있는 시기라는 이야기다. 주변 환경에 주눅 들어 있기보다는 겨울 햇볕을 쬐며 기지개를 켜 몸과 마음을 쫙 늘인 뒤 단단하게 움켜쥐는 그런 시간이 필요하다. 강화도 한 바퀴에서 답을 찾는다.
그 외 가볼 만한 곳
정수사
마니산 자락에 호젓한 분위기의 정수사는 강화도의 대표 사찰인 전등사와는 또 다른 맛이 있다. 이곳에서 마니산 첨성단까지 오를 수 있는 짧은 산행코스가 있다. 자그마한 절, 정수사는 여행의 호흡을 가다듬기에 좋은 소박하면서 고즈넉한 산사다.
연미정
고려시대에 지어진 정자로 월곶돈대 앞 물길이 제비꼬리 같다고 하여 이름이 연미정이다. 정자에 서면 확 트인 전경이 눈길을 끈다. 미세먼지가 없는 날에는 북녘 땅과 파주시, 김포시가 선연하게 보인다. 두 그루의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멋스럽다.
강화 추천 살 거리
순무김치
순무김치는 매콤하면서도 쌉싸래한 맛이 일품이다. 비타민 함량이 높고 소화를 촉진하는데 특효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관광지 앞에서도 구입이 가능하나 강화풍물시장에 가면 맛을 보고 입맛에 맞는 것을 고를 수 있어 좋다. 순무김치는 처음 담갔을 때보다는 익었을 때 더 맛있다. 잘 익은 순무김치는 무와는 다른 쫀득하게 씹히는 아삭거림과 혀가 아리다 싶게 톡 쏘는 맛이 난다. 한번 맛을 들이면 그 매력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다.
강화도 먹거리
밴댕이회무침
가장 인상에 남는 맛은 강화풍물시장 2층에 있는 식당에서 먹은 밴댕이회무침이다. ‘서울식당’에서 투박하지만 찰진 그 맛을 처음 보았다. ‘밴댕이 가득한 집’, ‘밴댕이로 왕창 잘되는 집’이 꽤 이름이 알려져 있다. 시장에서 먹는 것도 좋지만 포구에서 여유롭게 밴댕이 맛 탐방을 즐겨도 좋다. 다양한 밴댕이 요리와 찬거리가 강화도 만찬으로 기억될 만한 후포항의 ‘청강횟집’을 추천한다.
생활이란 우리가 자주 착각하는 것처럼 멍에가 아니라 사방으로 열린 활공장일지도 모른다. 문제는 지향에 있다. 오체투지처럼 궁구하는 삶이 있으며, 경주마처럼 각축하는 삶이 있고, 바람의 사주를 받아 가뿐히 떠도는 삶이 있다. 연극인 최영환(49)은 아마도 바람과 동맹을 맺은 계열에 속할 것이다. 그는 한결 자유로운 삶을 원해 귀촌했다.
누군들 자유로운 삶을 갈구하지 않으랴. 단 한 번 주어진 생을 가급적 자유롭게 쓰고 가고자 하는 갈망. 이는 거의 가당찮은 꿈일망정 고달픈 일상을 견디게 하는 힘과 탄력을 가져다준다. 인생이란 근본적으로 고(苦)라지. 그러나 고통 속에 나뒹굴 때라야 비로소 자유로운 지평을 절박하게 찾아 나서는 게 사람이다. 최영환이 그랬다. 요컨대 그는 삶을 바꾸고 싶었던 것이다. 자유롭다고 믿었던 그간의 삶에 섞인 혼선에 몹시 식상했던 것 같다. ‘괴로운 자각’이라 할 만한 격렬한 회의가 우레처럼 그의 머리를 쳤던 모양이다.
그는 서울에 살며 연극판에서 땀 흘려 뛰었다. 극단 ‘죽죽’에 소속, 연기활동을 해왔다. 일찍이 열일곱 나이 때 연극에 입문했던 그는 1991년, ‘부산연극제’ 최연소 신인연기상을 받으며 본격적으로 배우로 나섰다. 이후 서울의 대학로를 근거로 삼아 20여 년간 연극인으로 살았다. 그러나 대차게 덤벼들어 긴 세월 비지땀을 쏟은 만큼의 결과가 돌아오지 않는 이상한 현실을 발견하고 남몰래 울상을 지었던 것 같다. ‘나, 연극배우 맞아? 이건 뭐 이룬 게 없질 않은가?’ 그는 아마도 그렇게 독백했을 게다. 그간 수없이 무대에 서서 대사를 읊조렸겠지만, 오직 자신에게만 들려준 그 독백의 톤은 연극이 아니라서 한결 절절했을 것이며, 번뇌의 산물이었기에 그 맛은 유감스럽게도 소태처럼 쓰디썼을 테지.
“배우로서의 정체성이 사라지는 느낌이었어요. 날마다 대학로에서 살다시피 하며 연극활동을 해왔고, 딴에는 자유롭게 살고 있다고 자부했지만, 사실은 점점 퇴행하고 있다는 회의가 몰려들었던 거죠. 딱히 스케줄 없는 날이 늘어났고, 그저 술이나 마시게 되고. 야, 이건 참 무의미한 생활이구나, 타성에 젖어 휩쓸려가고 있구나, 그런 자각으로 괴로웠지요. 연기자다운 활동의 미비와 열악한 생계 상황, 이중고가 있었던 겁니다.”
그는 새로운 생활 속으로 뛰어들어야 할 필요를 느꼈다. 황급히 활로를 찾아야 했다. 궁리 끝에 찾은 대안이 시골살이였다. 그즈음 마침 일단의 대학로 연극인들이 단양군의 농촌으로 귀농을 했다. 최영환도 거기에 합류했다. 적적하고 적막한 농촌에 연극판을 펼쳐 고독한 시골 사람들의 삶을 어기영차 북돋우고, 손수 농사까지 지어 생계를 해결함으로써 연극과 농사가 융합된 새로운 문화 공동체의 모델을 본때 있게 구축하겠다는 취지를 표방한 동아리였다. 독특한 패기에 찬 이 공동체에 동참한 최영환은 서울의 집과 단양을 오가며 지냈다. 즉 절반쯤 귀농한 상태로 3년여를 살아왔다. 그러다 성향이라는 게 맞질 않아 동아리를 탈퇴했단다. 그리곤 팍팍한 서울생활을 아예 싹 청산, 처자를 대동하고 단양군 영춘면 면 소재지로 본격적인 귀촌을 했다.
달랑 3000만 원 들고 귀촌
이후 2년이 흐른 현재, 그는 찻집을 운영하며 낯선 객지생활에 적응하기 위해 용을 쓰고 있다. 그가 추구하는 건 언제 어디서건 자유로운 영혼. 해서, 사방팔방으로 자신을 개방하고 새로운 환경과 새로운 사람들을 척척 받아들이기 위해 그간의 반백년 인생에서 쌓은 모든 재능을 쏟아 붓고 있다. 이번 여로의 종착만큼은 근사한 것이길 기대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만만치 않은 게 귀촌생활이다. 또 그러나 최영환 역시 만만치 않은 인간이 보유할 만한 자질을 가지고 있을 터인즉, 이 사람이 펼쳐 보이는 귀촌생활의 양상이란 어쩌면 연극보다 흥미진진할지도.
“이곳에 내려온 지 불과 2년이 지났지만 5년 이상이 지난 것처럼 친숙함을 느낍니다. 주민들과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해 노력한 결과죠. 서울은 머릿속에서 거의 지워졌어요. 전화통화량을 가만히 따져봤더니 서울 지인들과는 10%, 이곳 주민들과는 90%. 어느 사이에 그렇게 변해 있더라고요.”
“별안간 대학로를 떠난 당신을 두고서 지인들이 아쉬워하지 않았어요? 연극 동네 특유의 동지 의식이라는 게 있을 텐데.”
“웬 귀촌? 그러면서 다들 놀라는 눈치이던걸요. 아예 인생 포기한 걸로 알더라고요.(웃음) 사실, 연극인들의 이탈은 흔합니다. 대략 60% 정도가 중도에 분야를 바꿔 빠져나가죠. 경제문제 등 여러모로 한계 상황에 봉착해서.”
“연극배우란 배고픈 직업이라고 알려졌죠. 유능한 데다 열정마저 겸비한 인재들이 결국 견디지 못하고 다른 길을 찾아가는 건 참 섭섭한 현실이에요.”
“이름난 배우들에겐 큰 문제가 아니겠지만 저 같은 사람에겐 난감하기 마련이죠. 대리운전 기사를 하는 식으로 생활비를 벌며 버텼으나, 뭔가 확실한 타개책이 아니면 더 가혹한 상황에 처할 수도 있겠더라고요. 그렇다면 시골에 가서 소박한 생활을 하자, 그런 작정을 했던 겁니다.”
혼자 살 때엔 그럭저럭 지냈더란다. 혼밥과 혼술도 홀가분한 자유의 증빙으로 보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40대 중반, 좀 늦은 나이의 결혼으로 아이까지 얻은 뒤론 사정이 급박해졌다. 아자아자! 시골에서 나를 맘껏 풀어놓고 생활의 야전 속으로 들어가자! 그는 그리 자신과 담판을 짓고 귀촌했던 것이다.
연극이야 버릴 수 없는 동행. 미련 이상의 관습으로 삶에 이미 들러붙은 것이라서 이삿짐에 실려 함께 시골에 내려왔다. 연극 행위가 없는 삶은 식물인간처럼 절망적일 지경은 아닐지라도 좌우간 탁 놔버릴 수 없는 애착이 이미 깊었기에, 그는 귀촌의 나날을 연극을 위해서도 사용하기로 했다. 다시 말해, 어엿이 먹고 살 수 있는 생활 방편을 찾고, 덩달아 연극활동에도 새로운 피를 수혈하자는 것. 최영환의 귀촌 청사진엔 그 두 가지 목표가 새겨져 있다.
“이곳에 오자마자 이웃들에게 제가 어떤 사람인가를, 무얼 하기 위해 귀촌했는가를 기탄없이 밝혔지요. 연극단체를 만들어 주민들과 함께 공연을 하고 싶다는 뜻을 전하자 모두들 귀를 기울이더군요. 물론, 호의적인 반응만 있는 건 아니었어요. 아하, 그 무슨 극단을 만들어 지원금이나 빼먹으려는 속셈 아니여? 그런 의심에 찬 소문들이 돌기도 했으니까.”
“낯선 사람 하나가 시골에 등장한다는 건 시골이라는 무대 위에 배우 하나가 올라선 것과 같은 효과를 낳게 마련이죠. 모두가 그의 동태를 예의주시 감상하게 되니까. 감상 평론도 중구난방으로 무성하고요.”
“통과 의례라는 게 있게 마련이죠. 면 소재지 상가 거리 복판에 찻집을 차리자 주변 상인들이 긴장하는 분위기도 완연했어요. 그렇잖아도 가뜩이나 영세한 상가에 경쟁자 하나가 출현했다고 본 거죠.”
“다양한 자영업 중에 찻집을 선택한 건, 그게 가장 유망하다 판단해서?”
“아내가 바리스타예요. 커피집이 적격이라 봤어요. 소자본으로 오픈할 수 있는 업종이기도 했고요. 저희는 달랑 3000만 원을 가지고 귀촌했는데, 가게를 차리고 셋집 주택을 얻는 데 다 썼지요. 찻집 운영으로 연 1500만 원 정도의 매상을 올립니다. 월세 나가지, 겨울 비수기엔 힘들지, 아직 자리가 잡히지 않았지만 차차 호전될 거라 봐요.”
찻집엔 ‘꽃피는 커피’라는 상호가 걸려 있다. 아담하고 소박해서 정겹다. 가게 좌우로는 식당, 옷집, 식육점, 주점, 빵집 등속이 있고, 맞은편엔 하나로마트가 있다. 상업이 성행할 리 없는 고즈넉한 시골이지만 그나마 요지에 자리를 잡았다. 그렇더라도 세 식구의 믿을 만한 호구지책이라고는 할 수 없다. 해서, 최영환 부부는 찻집일 외에 수입을 올릴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해치운다. 가게는 한 사람이 지키면 되기에 나머지 한 사람은 일거리가 생기면 쪼르르 달려간다. 의외로 일거리가 많은 게 시골이란다. 주로 막노동이지만 최영환은 가리지 않고 일을 찾아 전전해왔다. 아로니아 가공공장에 단기 취업을 하기도 했다. 아내는 인근 사찰에서 총무 일도 봤다. 생존하기 위해 할 수 있는 건 뭐든 다 해야만 한다. 그보다 더 절박한 진실이 달리 어디에 있겠는가.
첫발 내딛은 ‘청춘극단’
면 소재지의 하오 풍경은 나른하다. 부스스 마른 볏짚처럼 광택 없는 거리. 별 목적 없어 보이는 한가한 걸음새로 어슬렁거리는 사람들. 저녁 반찬거리를 사기 위해 마트를 드나드는 몇몇 아낙네들. 수족관처럼 조용한 정경이지만 스피커로 외쳐대는 물오징어 판매 차량이 등장하자 별안간 사람들이 북적이며 몰려든다. 최영환도 덩달아 바빠진다. 아는 사람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일을 참을 수 없어서다. 2년여 사이에 발휘한 사교성 덕분에 이미 그는 이 동네 사람 다 됐다.
“제가 서울에서보다 더 바쁘게 삽니다. 이웃들과 적극적으로 어울리며 사는 것이죠. 청년회나 탁구동호회 등 소소한 모임들에 참여하고 있으며 감투를 쓰기도 했어요. 시골의 배타성이나 텃세에 대해 많이 듣고 내려왔지만 여기는 다르더라고요. 상당히 개방적이고 우호적이에요.”
“원주민들과 좋은 관계를 맺는 일. 이건 귀촌 성공 필살기 1칙이라 할 만하죠.”
“제가 원래 가만히 있질 못하는 스타일입니다.(웃음) 체육대회나 축제에서 사회를 보기도 하고 마이클 잭슨 춤을 신나게 추기도 했어요. 이웃과 어울려 살지 않고선 무슨 재미가 있을까? 극단을 꾸려 키워나가기 위해서도 주민 속으로 파고드는 일이 필요해요. 부지런히 눈도장 찍으며 살아왔어요.”
“서울의 연극단체들도 흔히 가시밭길을 걸어요. 도발적인 투지가 아니고선 시골 극단을 착상조차 하기 어려울 것 아니겠어요? 현재 어떤 연극활동을 하고 있죠?”
“겨우 첫발을 내딛은 단계입니다. 천천히 가되 충실히 기반을 다지고자 해요. 참여 인력은 이 지역 사람들로 영입할 생각이고, 우선은 제가 연기와 연출 등 모든 걸 도맡아 해나갈 참입니다. 구상과 포부는 크지만 재정 문제 등 하나하나 해결해나갈 과제들이 산적해 있어요. 극단 이름은 ‘청춘극장’입니다. 올여름엔 낭독공연물 ‘절대사절’을 선보였지요.”
“단원은 몇 명이나 되죠?”
“저를 포함, 세 명입니다. 당분간은 2인극 정도 공연할 수 있는 상황이에요. 단원 중 한 명은 제 아내이지요. 연극에 대한 아내의 열정이 은근히 대단해요. 작은 동네이지만 열심히 씨를 뿌리면 열매를 맺을 거라 굳게 믿으며 함께 노력하고 있지요. 일단은 생활 안정이 화급한 과제이지만, 부부가 공히 추구하는 가치 있는 일과 목표를 가지고 산다는 게 즐겁습니다.”
최영환은 대학로 극장에서 아내 이동순을 만났다. ‘관객모독’이라는 작품에 출연 중 관객으로 찾아온 이동순과 눈이 맞았던 것. 연극 애호가였던 이동순은 ‘관객모독’을 자그마치 100여 회나 관람했더란다. 그 바람에 극단 단원들의 환대를 받았는데, 유독 최영환에게 필이 꽂혔던 거다. 부부 사이엔 어여쁜 유치원생 딸 하나가 있다. 아내의 나이는 올해 33세로 최영환보다 열여섯 살 연하. 남녀의 가슴에 연정이 돋으면 술 취하듯 흥겨운 황홀이 밀려드는 법이니 그걸 사랑이라 한다. 여기엔 경계나 모순이 없어 나이 차 따위는 무의미하다. 세상을 보는 촉에선 세대 차가 있겠지만.
“아내가 워낙 긍정적인 스타일이라서 매사 공감대가 넓은 편입니다. 다소 이견이 있어도 합리적이다 싶으면 곧바로 긍정하지요. 어! 그래? 해보지 뭐! 이게 우리 부부가 살아가는 방식이에요. 뭐든 두려움 없이 해보자는 것, 하다하다 안 되면 다른 방법을 찾으면 된다는 것, 그런 낙관을 공유하며 사는 겁니다.”
오랫동안 스타 등극을 소망하며 연극배우로 진력했던 사람.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흥흥거리며 살아왔으나, 이제야 세상 무서운 걸 알겠노라’고 술회하는 남자. 그, 최영환은 여전한 물적 부실 앞에 서 있으나 훌훌 벗어던져야 할 껍질은 이미 벗어던졌다.
◇ 최영환이 주는 귀촌 Tip ◇
•이민보다 더 힘든 게 귀촌일 수 있다는 생각으로 목적 설정부터 정확하게 하자. 막연한 낭만이나 도피적 망상에 의한 귀촌은 절대 금물이다.
•경관을 기준 삼아 귀촌 지역을 선택하는 건 위험하다. 충분한 사전답사와 원주민 접촉을 통해 지역의 인심과 풍토를 면밀히 검토해야 한다.
•소읍이나 면 소재지에서의 자영업은 그리 이상적이지 않다. 친척이나 동창 등 인맥 중심으로 고객이 형성되는 게 시골의 자영업이기 때문이다.
•원주민과의 융화를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 누군가 무거운 짐을 들고 갈 때 같이 거들어줄 수 있는 정도의 심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와 동대학원 졸업. 광주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천년 산행’, ‘암자에서 듣다’, ‘산골로 간 예술가’ 등의 저서가 있다.
로마 시내에 있는 ‘포로 로마노’는 로마 제국의 번영을 상징하는 건축물이다. 돌과 기둥 몇 개만 남아있는 이곳이 로마 제국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대표적 유적지가 된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바로 시간을 넘나드는 우리들의 상상력 때문이다. 이곳에 입장하면 사람들은 제일 먼저 드라마나 영화에서 한 번 이상은 보았던 장면을 상상한다. ‘전쟁에서 승리한 후 포로 로마노 가운데 큰길을 행진하는 로마의 개선장군 행렬.’ 그때부터 사람들의 마음에서는 길 양쪽에서 뒹굴고 있던 돌들이 고대 로마의 공회당, 바실리카, 무녀의 집, 각종 신전으로 만들어진다. 지붕 골격과 기둥만 남은 폐허는 대리석으로 만든 아름다운 개선문으로 탈바꿈한다. 마음속에서 자유롭게 그려진 상상은 논증을 기준 삼아 과학적으로 복원한 모습보다 훨씬 더 아름답다. 있던 것이 없어서 누릴 수 있는 감동이다.
고대 유적지를 만나는 일은 잃어버린 시간의 마력을 깨닫게 하는 시간이다.
백제는 국력이 회복되자 고구려의 위협으로부터 방어하기에는 좋으나 협소한 지역 때문에 부족한 면이 있던 웅진(공주)에서 사비(부여)로 수도를 옮긴다(538년). 그 후 123년 동안 사비(부여)에서 후기 백제의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다. 늦가을에 떠난 백제 역사 유적지로의 여행은 ‘포로 로마노’에서의 경험처럼 과거를 ‘체험한’ 알찬 시간이었다.
부여 관북리 유적과 부소산성
사비(부여)의 새 왕궁은 부소산 기슭에 세워졌다. 그래서 현재의 관북리 유적을 왕궁으로 보고 있다. 관북리 유적의 대표 유적은 왕과 신하들이 회의하던 중심 궁전인 ‘정전’으로 추측되는 대형 건물지다. 그 외에도 목곽 수조 2곳과 연못, 지하저장시설 등의 흔적들이 있다. 왕궁의 뒤편은 왕궁의 후원이자 비상시 방어성으로 사용된 부소산성이다. 천천히 왕궁터와 부소산성을 걸으면 백제의 기품과 기상을 만날 수 있다. 왕궁터에서 산성으로 가는 길 중간에 ‘사비도성 가상체험관’이 있다. 이곳에도 잠시 들러 관람과 가상 체험을 하면 백제 문화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산성 내부에는 낙화암과 고란사 등 백제의 전설과 흔적들이 곳곳에 있다.
부소산성에서 가장 유명한 3천 궁녀의 전설지인 낙화암으로 갔다. 낙화암은 금강의 부여 지역 구간 이름인 백마강가에 있는 높이 40m의 바위 절벽이다. 직접 가서 보니 3천 명이 떨어져 죽을 정도가 되는 지형은 아니었다. 절벽 위에 있는 백화정에 앉아 유유히 흐르는 백마강을 보았다. 3천 궁녀의 이야기는 기록에 없는 과장된 이야기로 전해지는 전설이다. 하지만 확인 안 된 그런 이야기에 대한 의구심보다는 현재를 사는 우리들의 아름다운 이야기들도 몇천 년 후까지 전해지는 전설로 남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백제의 품격 정림사지
부여에는 백제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명소로 정림사지 박물관이 있다. 중국에서 들어와 일본에 영향을 준 백제 고유의 불교 문화와 정림사지에서 출토된 유물을 중심으로 전시하는 박물관이다.
박물관 옆에 있는 정림사지는 사비(부여)의 중심부에 있는 사찰 터로 백제 사찰의 특징인 1탑 1금당(절의 본당) 양식으로 지어졌다. 또한, 백제의 독창적 기술인 와적기단을 적용하였다.(※ 와적기단: 건물터를 반듯하게 다듬은 다음에 터보다 한 층 높게 쌓은 단)
사찰 터에 있는 정림사지 5층 석탑은 국보 제9호로 백제 고유의 양식을 갖추었다. 석탑은 목탑의 구조적 특징을 보여주는 탑으로 높이 8.3m에 완벽한 균형미와 비례미를 갖추고 있다. 안타까웠던 것은 석탑에 당나라가 백제를 멸망시킨 전승 기념 내용이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정림사가 백제 왕조의 운명과 직결된 중요하고 상징적인 공간으로 존재했음을 말한다. 부여시대의 백제가 강대국은 아니었지만, 탑에 새겨진 글씨를 보는 마음은 씁쓸했다.
여행이 아름답고 좋은 것만 보는 것은 아니다. 아름답고 빛나는 것들도 포화상태가 되면 감도가 떨어지고 피곤해진다. 그래서 가끔은 부끄러운 과거도 보고, 이름 모르는 작은 마을도 다니고, 도시의 뒷골목도 다녀 보아야 한다.
오후의 햇살이 뉘엿뉘엿 넘어가는 가을날에 빈 공간이 많은 정림사지의 가운데에 섰다. 이 넓은 터에 모든 것이 있었던 한 때를 반추해 보았다. 지금은 없는 것들이 한때는 빛났었다는 것을, 지금 빛나는 것들도 언젠가는 소멸하리라는 것을.
가을의 끝 무렵에서 만난 부여의 오랜 역사 유적지들은 나에게 성찰의 공간이 되었다.
▪ 관북리 유적과 부소산성: 부여군 부여읍 관북리 33, 77.
▪ 정림사지 박물관: 부여군 부여읍 정림로 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