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 명소&맛집
문탠로드
해운대 달맞이공원 안에 있는 솔숲길로 ‘달빛을 즐기는 거리’라는 뜻이다. 미포에서 청사포까지 걷는 순환산책로이며 길이가 약 2.5km이다. 천천히 걸으면 한 시간 정도 걸린다. 경사가 거의 없는 솔숲길을 거닐며 바다와 해월정, 해변열차를 감상할 수 있다. 해변열차는 편도만 이용하고, 문탠로드를 걸어 출발점으로 되돌아오는 방법도 있다.
부산 해운대구 달맞이길 137 근처에서 문탠로드 시작
송정물총칼국수
구덕포와 송정 사이에 있는 칼국수 전문점이다. 그린레일웨이를 걷다 보면 철길을 건너 송정물총칼국수 식당으로 나갈 수 있는 쪽문이 열려 있다. 동죽과 홍합이 듬뿍 들어 있어 국물 맛이 시원하다. 면발은 특별한 반죽 비법으로 만들어 오래 두어도 퍼지지 않는다. 양이 푸짐해 1인분이 2인분 같다. 2인이 가면 칼국수 하나, 파전 하나 주문하면 알맞다.
부산 해운대구 송정중앙로6번길 184, 11:00~21:30, 물총칼국수 1인분 8000원
청사포역 카페
청사포 등대가 바라보이는 언덕에 자리한 한옥 카페다. 뒤로는 해변열차 청사포정거장이 보인다. 청사포 어촌마을의 단층 주택을 레트로풍으로 꾸몄다. 자개 가구와 라탄 가구가 섞여 있어 한옥에 동남아 휴양지의 분위기가 오묘하게 배어 있다. 앞마당은 물론 뒷마당에도 좌석이 있다. 실내외 자석 배치를 여유롭게 배치해 답답한 느낌이 없다. 와인과 맥주도 팔며 자정까지 영업한다.
부산 해운대구 청사포로58번길 121, 11:00~00:00, 아메리카노 4500원
바다와 가장 가까운 철길이 강원도 강릉 정동진이라고 했다. 달맞이고개에서 동해남부선 열차를 봤을 때 이 철길은 바다와 두 번째로 가까울 거라로 생각했다. 빨간 무궁화열차가 바다에 닿을락 말락 실랑이하듯 달렸다. 그 낭만적인 풍경을 다시 보고 싶어 다음 열차를 한참 기다렸던 적이 있다. 이제 그 철길에 새 해변열차가 달린다.
동해남부선은 역사의 뒤안길로
옛 동해남부선의 역사가 파란만장하다. 부산~포항을 오갔던 동해남부선 열차는 1935년 일제가 개통했다. 자원을 수탈하고, 일본인이 해운대를 편하게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해방 후 무궁화호가 부산~울산~경주~포항을 오가며 오랫동안 서민의 발이 돼주었다. 2013년 동해남부선을 이설해 복선 전철화했다. 기존 철로를 복선화하려면 극복해야 할 문제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설된 동해남부선은 2016년부터 영덕까지 가는 동해선으로 편입됐다. 동해남부선은 그렇게 영영 사라졌다.
동해남부선 노선 중 해운대 미포~청사포~송정 구간은 바다와 가까워 아름다운 철길로 꼽혔던 곳이다. 이 구간을 재활용할 방안을 두고 관련 기관과 전문가들이 고심했다. 레일바이크, 산책로, 자전거길, 노면전차 등 아이디어가 쏟아졌다. 최종적으로 해변열차, 스카이캡슐, 산책로, 쉼터가 어우러진 철길 공원 ‘블루라인파크’를 조성하기로 했다.
2015년 9월부터 공사를 시작해 드디어 올해 10월 해변열차를 개통했다. 철로 옆에는 덱 보행로인 그린레일웨이를 놓았다. 미포~청사포 구간에는 공중 레일을 설치해 스카이캡슐을 운행한다. 11월 말 개통할 예정이다.
영화 ‘해운대’와 미포의 추억
약 6년 동안 열차가 다니지 않던 철길에 다시 열차가 다닌다기에 기쁜 마음으로 미포로 향했다. 미포는 해운대해수욕장 동쪽 끄트머리에 있는 작은 포구다. 미포의 ‘미’는 꼬리 ‘尾’ 자를 쓴다. 아름다울 ‘美’ 자를 써도 억지스럽지 않은 바닷가다. 미포에서 초승달처럼 해안선이 고운 해운대해수욕장과 동백섬, 광안대교, 오륙도가 한눈에 들어온다.
미포가 유명해진 계기는 1000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해운대’(2009) 덕이 크다. 피서객 수백만 명이 모인 해운대해수욕장에 초대형 쓰나미가 시속 800km로 밀려와, 미포 횟집 거리와 미포 건널목 일대를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뛰어난 CG 기술로 참혹한 재해 현장을 실감나게 표현한 장면이 생생하다.
미포 건널목의 실제 풍경은 고요했다. 건널목이 있는 언덕길의 끝은 바다였고, 바다 한가운데 오륙도가 떠 있었다. ‘땡땡땡’ 다급한 종소리가 언덕에 울려 퍼지면 차와 오토바이들이 건널목 앞에 섰다. 차단봉이 내려오고, 잠시 뒤 무궁화열차가 쌩하니 지나갔다. 열차 너머로 미포 앞바다가 반짝였다.
바다와 해송과 사람을 만나는 해변열차
지금 미포 건널목은 흔적만 남았다. 옛 건널목에서 청사포 방향으로 조금 걸어가면 해변열차 출도착역인 미포정거장이 나온다. 이국적인 모양의 해변열차가 기다린다. 빨강, 노랑, 파랑, 초록색 넉 대의 열차가 20분 간격으로 운행한다. 해변열차의 객차는 2량이며, 좌석이 창을 향해 두 줄로 배열돼 있다. 객차 앞뒤에는 독립된 4인 좌석이 있다. 줄을 빨리 서면 이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
해변열차는 미포정거장을 출발해 달맞이터널, 청사포, 다릿돌전망대, 구덕포를 지나 송정정거장까지 약 5.4km 구간을 달린다. 시속 20km 내외로 천천히 달리므로 풍경을 여유롭게 즐긴다. 철로 옆 보행로를 걷는 사람들이 열차가 지나갈 때 손을 흔든다. 열차 탑승객도 손을 흔들어 화답한다. 열차 안에서 바다, 솔숲, 어촌마을 구경하는 것 못지않게 사람 구경도 흥미롭다. ‘도심 속 해변열차’ 콘셉트가 해변열차의 매력 포인트인 것 같다. 보행로와 철로 사이에는 펜스가 설치돼 있고, 건널목 구간에는 안전요원이 지키고 있어 안전하다.
열차가 달맞이터널을 지나자 안내방송이 나온다. “해운대 달맞이고개 해월정 앞바다는 동해와 남해의 경계입니다. 날씨가 좋으면 11시 방향으로 대마도가 선명하게 보입니다.” 부산 앞바다는 동해일까, 남해일까 묻는 퀴즈에 이제는 정확하게 답할 수 있다.
등대가 아름다운 청사포와 다릿돌전망대
해변열차 자유이용권을 사면 맘에 드는 정거장마다 내려 관광하고 다시 탈 수 있다. 청사포정거장에 내려 청사포를 천천히 둘러본다. 청사포는 일출과 초저녁 달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포구 너머 빨간 등대, 하얀 등대가 연인처럼 서 있는 풍경도 그림 같다. 바닷가에는 오래된 조개구이집이 늘어서 있다. 이곳의 조개구이는 양념이 들어가는 게 특징이다. 가리비, 키조개 같은 큰 조개에 모차렐라와 양파를 듬뿍 넣은 고추장 양념을 얹어 굽는다.
청사포정거장에서 다릿돌전망대정거장까지는 가까워 걸어갈 만하다. 다릿돌전망대는 청사포 마을의 수호신이라는 푸른 용을 형상화해 유선형으로 만들었다. 높이가 20m, 길이는 72.5m에 달한다. 전망대를 상공에서 보면 용이 꿈틀대며 바다로 들어가는 것 같다. 전망대 끝자락에는 반달 모양의 강화유리를 설치해 바다 위를 걷는 듯한 짜릿한 스릴을 느낄 수 있다. 다릿돌이란 이름은 전망대 앞으로 펼쳐진 암초들이 징검다리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졌다.
다릿돌전망대를 지나면 기암괴석이 많기로 소문난 구덕포가 나온다. 철길가에 분위기 있는 레스토랑, 카페, 숙박 시설들이 들어서 있다. 도착점인 송정은 부산의 3대 해수욕장이라 불린다. 수심이 얕고 경사가 완만해 서핑 성지로 인기 있다. 추운 겨울에도 서퍼들을 볼 수 있다. 바닷가 주변이 해운대보다 한적해 송정을 더 좋아하는 사람도 많다.
바다에서 보는 부산 야경
송정에서 다시 미포로 돌아오니 해 질 녘이다. 부산은 야경이 아름다운 도시이므로 야경 유람선을 타보기로 했다. 6시 10분 배가 첫 야경 유람선이다. 겨울에는 오후 6시 전에 해가 지므로 야경 보기에 좋은 시간이다. 승객이 혼자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의외로 손님이 많다. 연령대도 다양하다.
유람선이 출발하자마자 눈이 휘둥그레진다. 해운대 바닷가에 늘어선 고층 빌딩과 호텔, 동백섬의 누리마루 Apec 하우스, 신도시 마린시티가 휘황찬란한 빛을 내뿜는다. 그 빛이 수면에 비쳐 황홀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야경에 방점을 찍은 것은 광안대교다. 해상에 건설된 국내 최대 규모의 2층 현수교로 높이 비상하는 갈매기를 형상화했다. 국내 기술진이 만든 다리여서 의미가 크다. 밤이 되면 10만 가지 이상의 색상을 표현하는 조명이 광안리 바다를 보랏빛으로 수놓는다.
뒤에 앉은 청년들이 “와 광안대교 야경 진짜 쩐다. 유람선 탄 건 신의 한 수다. 살아 있어 다행이다”라며 감탄사를 연발한다. 이런 멋진 야경은 처음 본다는 뜻이리라. 젊은 나이에 유람선에서 부산 야경을 봤으니 행운이라면 행운이다. 유람선이 광안대교 밑을 통과해 다시 미포로 돌아온다. 승선 시간 50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쌀쌀해지는 늦가을 날씨는 지도의 남쪽을 훑게 만들었고, 일행의 눈길을 잡은 곳은 담양이었다. 시니어들은 인터넷의 사진이나 댓글들을 믿지 않는다. 직접 보고 냄새 맡는 현장 답사를 중시한다. 그렇게 메타세쿼이아 길에 근접해 최근 숙박 중심지로 각광받고 있는 메타프로방스 구역에 짐을 풀었다. 그리스 산토리니처럼 하얀 건물들이 군집을 이루고, 같은 색깔의 다양한 카페들이 입점을 서두르고 있는 곳이었다.
중국산에 밀려 죽제품들이 없어지긴 했지만, 긴 세월 담양의 상징으로 자리 잡아온 대나무숲을 보러 죽녹원부터 찾았다. 하루에 1m 이상 자라 총 30m까지 크는 큰 키의 왕대부터 분죽, 맹종죽까지 다양한 종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그래서 여름에는 주변보다 3~4℃가 낮단다. 이곳에 오니 유난히 더위를 타던 남편을 위해 죽부인을 사오셨던 어머니가 생각났다. 아버지가 매일 껴안고 주무시던 그것의 이름에 하필이면 ‘부인’이 들어가, 어린 마음에 질투가 나기도 했었다.
현장에서의 공부를 통해 이름만 대나무일 뿐 대나무는 나무가 아닌 풀의 일종이라는 것과 1년 안에 다 큰 후에는 계속 딱딱해지기만 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렇게 안내판들을 읽으며 죽림욕을 할 수 있다는 산책로를 돌다 보니 금방 한 시간이 지났다.
죽녹원에서 나와 바로 길을 건너면 관방제림이다. 관방제는 과거에 관비(官費)로 연인원 3만여 명을 동원해 만든 제방이다. 둑 위로 약 2km에 걸쳐 거대한 풍치림들이 늘어서 있는데 이를 ‘관방제림’이라고 부른다. 추정 수령 300~400년에 달하는 천연기념물들이 이 구역 안에만 185그루가 있다. 모두 이름표(00호)를 달고 어린 인간들을 압도하고 있다. 왕복 한 시간 정도를 걸으면서 아름드리나무들을 껴안고 세월의 냄새를 맡다 보면 허기가 느껴진다. 그럴 때는 다리 건너 ‘국수거리’로 이동해 멸치국물국수 한 사발로 속을 데우면 된다.
여행지에서의 늦가을 아침 식사는 뜨끈한 것으로 해야 온몸의 기가 돌기 시작한다. 그래서 TV조선 프로그램 ‘식객 허영만의 백반기행’이 추천한 곳을 찾았다. 연로하신 주인장 부부는 점심까지만 식당을 운영한단다. 그렇지만 밥상을 받자마자 오랜만에 탄성들이 튀어나왔다. 전라도 밥상이라 은근히 기대를 했는데 그것을 훨씬 뛰어넘고도 남는, 다양하고도 맛깔 나는 반찬들 때문이었다. 전날 저녁, 석쇠에 구워 먹음직스럽게 나올 떡갈비를 기대하며 인터넷 검색 1위인 큰 식당에 갔다가, 햄버거 패티 같은 맛에 실망했던 우리는 신음에 가까운 탄성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다음 날 아침도 그곳에서 먹었다. 법성포의 친정에서 직접 올린다는 조기를 비롯해 손수 마련한 반찬들의 맛을 다시 보고 싶으니 우리를 위해서라도 오래 사셔야 한다는 부탁을 드리며 식당 문을 나섰다. 마침 식당 앞에서는 오일장(2일, 7일)인 담양전통시장이 열렸다. 하지만 죽제품들은 사라졌고 살아 움직이는 토끼와 닭 그리고 검은 고무줄 같은 예전의 일용품들만이 과거의 모습을 가늘게 전하고 있을 뿐이었다.
담양의 관광 명소인 메타세쿼이아 길은 50년 전 가로수 조성 시범사업 당시 8.5km의 국도변에 5000그루의 묘목들을 심어 조성했다. 원산지가 중국인 메타세쿼이아는 30m 이상까지 곧게 뻗으며 자라 시원한 기상이 남다르게 보일뿐더러 이국적인 경관까지 자아낸다. 어제 본 왕대까지 연이틀, 목을 빼 올려다볼 정도로 키가 큰 담양의 키다리들을 만나며 걸었다. 매표소부터 걸어 왕복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한 시간 남짓이지만 카메라 렌즈를 유혹하는 황홀한 가을 색깔은 시간 개념을 상실하게 만들었다. 진한 가을의 풍취가 일행들의 가슴속 깊이 박혔는지, 상경하는 내내 큰 가로수만 보이면 “저기도 메타, 여기도 메타”라며 소리칠 정도로 메타세쿼이아의 잔상은 강렬했다.
오후에는 담양호를 걸었다. 일명 가마골은 영산강의 발원지인데 이곳에서 흘러나온 물은 담양호에 모인다. 담양호 국민관광지에서 시작하는 둘레길은 두 시간 정도 걸으면 된다. 호수 둘레에 설치된 목재 덱은 크고 작은 물고기들과 물속에 투영되는 마지막 단풍도 가까이 감상할 수 있게 도왔다.
풍경에 빠져 느리게 걷고 있는데 친구 사이로 보이는 늙은 남자 둘이 뒤따라왔다. “네가 이렇게 나를 잡으니 나도 힘들고 너도 불편하잖아. 서로 요렇게 잡아보자고!” 돌아보니 몸이 불편한 두 사람이 상대방의 손을 꼭 잡고 휘청거리며 걷고 있었다. 순간 가슴이 아려왔지만, 성치 않은 몸에 여기까지 와서 가을 호수를 같이 볼 수 있는 친구가 있는 행운아들이라고 마음을 고쳐먹으니 마음이 좀 편해졌다.
소쇄원 방문 일정까지 끝내고 상경하는 길, 백수 중 하나가 못내 아쉬운 속내를 드러내며 유혹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여기까지 왔는데, 언제 여기를 또다시 오겠느냐!”라는 초식을 펼친다. 여기에 홀라당 넘어간 일행은 내장산 백양사로 차를 돌려 연장 여행에 돌입했다. 고즈넉하면서 깊은 가을의 마지막 담양 풍경은 그렇게 시니어들의 가슴에 담겼다.
바다가 발밑으로 떨어지는 언덕 위에서 눈이 동그랗게 떠지는 예술작품들을 만나며 그 기발함에 놀란다. 깜짝 놀랄 만큼 신기해하다가, 숨겨진 위트에 웃고, 예술성에 감탄하며 시간이 어찌 가는 줄 모른다. 몇 시간의 짧다면 짧은 관람시간이지만 마음속으로는 기나긴 예술기행을 나선 듯하다. 현대미술품과 옛 추억을 되새기게 해주는 작품들이 삭막한 현실에 웃음을 찍는다.
가을 바다가 보고파서 간 강릉
그곳에서 만난 아트 뮤지엄. 횡재했다는 기분이 든다. 바다를 마주하며 예술작품과 함께 힐링하는 시간을 선물하는 강릉 하슬라아트월드. 하슬라(何瑟羅)란 말이 외국어인가 싶었는데 순수한 우리말, 그것도 고구려 때 강릉을 부르던 이름이다. 하슬라 또는 아슬라(阿瑟羅)라고도 불리었는데 ‘큰 바다’, ‘아름다운 자연의 기운’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하슬라라는 이름값을 제대로 할 만한 곳이 어디일까?
이름을 내건 만큼 자부심 가득한 복합예술공간, 하슬라아트월드에 답이 있다. 푸르디푸른 바다가 넘실거리는 절벽 위에 우뚝 선, 외관이 유리로 된 사각형 건물이 하슬라아트월드다. 그 안에 뮤지엄 호텔, 현대미술관, 피노키오&마리오네트 박물관, 20’s 카페가 있고 외부에는 야외 조각공원과 바다카페가 있다. 바다를 품고 산허리를 안은 복합예술공간에서 촘촘하게 예술이라는 보물찾기에 나선다.
지금은 복합예술공간으로 자리 잡았지만 첫 시작은 야외 조각공원
실내 전시장에 아기자기한 볼거리가 많지만 아껴두고 호흡부터 가다듬을 겸 야외로 나가 조각품들을 만났다. 통나무와 빛이 만드는 최옥영의 ‘우주’라는 작품은 쏟아지는 햇살 그림자 위에 의자를 놓아둠으로써 우주 안의 휴식을 부른다. 오른쪽의 바다카페를 지나 언덕을 따라 솔숲 사이로 난 덱 산책길을 걷다 보면 풍요와 바다를 상징하는 빌렌도르프의 비너스 상이 나타난다. 이곳에서 하슬라아트월드 건물과 바다가 어우러진 일품 전망을 볼 수 있다. 드라마틱한 변화를 보여주는 바다와 하늘은 드넓은 스케치북이 되어준다. 그 위에 톡톡 튀는 아이디어와 예술성이 결합된 작품들을 곳곳을 채운다.
입구에는 붉게 단풍이 든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저것은 무엇일까? 해시계다. 양철통을 사선으로 절단한 것 같은 구조물 안으로 들어가면 다른 공간으로 이어지는 터널이 나온다. 터널 너머에는 하늘을 향해 날아오를 것 같은 남자와 상하 대칭의 자전거, 하늘 위에 거꾸로 매달려 있는 사람 등 눈길을 끄는 작품들이 산책로 따라 이어지듯 나타난다.
자연의 숨결을 음미한 후 현대미술관에 들어서면
하슬라아트월드의 공간 디자인이 강릉의 바다와 햇살이 비쳐 든 창가 안에서 따뜻하게 느껴진다. 아비지 갤러리이자 현대미술관 1관은 색색의 타일과 곡선미가 흐르는 작품들이 골동품, 커피 소품, 도자기, 난로 등 옛것들과 혼재한다. 2관으로 가기 전 화려한 실과 소금으로 이루어진 작품들에 멈춰 선다. 2019 베니스비엔날레 특별전 ‘Personal Structures’에 참가한 최정윤 작가는 소금으로 만든 청동 검에 우주의 무한한 색을 담은 실을 휘감아 작품을 완성하고 있다. 전시관을 둘러보는 내내 나만의 보물을 찾아낸다. 평소에 좋아하던 판화가 이철수의 작품을 만났을 때는 살포시 미소 지었고, 에밀리아노 로렌조(Emiliano Lorenzo)의 빙하 위 북금 곰들을 볼 때는 집에 있는 폴라 베어 인형을 떠올렸다.
키네틱 아트 작품과 설치미술, 수학과 예술이 만나는 프랙털 아트를 관람하며 피노키오가 제페토 할아버지를 구하러 들어갔던 고래 뱃속을 연상시키는 터널설치미술을 통과한다. 현대미술관 3관을 지나면 피노키오 박물관이 나온다. 바다가 도화지처럼 한눈에 보이는 이곳에 전 세계 예술가의 피노키오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마리오네트와 함께 동화와 현대미술의 만남이 줄 끝에서 섬세하게 움직이는 듯하다.
하슬라아트월드는 보물찾기를 하듯 한 곳 한 곳 시선을 가벼이 둘 수 없다. 예술품에 집중하다가 휴식하고 싶다면 뮤지엄 안의 카페나 바다 전망이 펼쳐지는 야외 카페에서 가을 햇살을 음미하면서 가을을 즐겨도 좋다.
주소 : 강원 강릉시 강동면 율곡로 1441
관람시간 : 09:00~18:00 (매주 수요일 휴관)
관람요금 : 성인 1만2000원, 어린이 1만1000원
주변 맛집 : 바다마을횟집(강릉시 강동면 정동등명길 23)
등명해변에 위치한 음식점으로 섭해장국과 물회로 부담스럽지 않은 점심을 먹기에 좋다. 섭은 강원도 사투리로 시장에서 흔히 보는 홍합의 열 배는 됨직한 자연산 홍합을 말한다. 섭해장국은 커다란 홍합 살을 적당한 크기로 잘라 넣어 끓인 해장국으로 시원한 맛보다는 듬직한 맛이 난다. 회무침을 곁들이면 궁합이 잘 맞는다.
강원도라 하면 누구라도 산과 바다가 고루 펼쳐진 대자연이라는 걸 자연스럽게 떠올린다. 그래서 사람들은 동해로 떠나고 바다를 둘러싼 수려한 강원도의 산으로 향한다. 그런데 그것뿐만이 아니다. 그 자연 속에 문화 예술의 멋이 자리 잡고 있다. 폐교에 펼쳐진 예술의 풍성함과 메밀꽃 이야기의 정취 속에서 조용하게 보낼 수 있는 공간이 기다린다.
언제부터인가 시골 학교의 폐교가 늘면서 비어 있는 공간 이용의 다양한 모습을 감상하게 되었다. 농촌 인구가 도시로 유출되면서 아이들도 부모와 함께 떠나버려 폐교가 되고 있는, 어쩔 수 없는 현상이 잇따르며 생긴 공간이다. 이제는 아이들이 떠난 학교가 미술관이나 창작실, 도서관 캠핑장, 또는 카페와 같은 휴식 공간으로 탈바꿈하여 지역 주민은 물론이고 세상 사람들과의 소통을 이끌어내고 있다.
강원도 평창의 무이예술관은 시골마을의 자그마한 무이초등학교였다. 폐교된 이후 서양화가 정연서, 이천섭, 조각가 오상욱, 도예가 권순범 등의 예술인들이 뜻을 모아 예술관으로 변신시켰다. 폐교를 이용한 공간을 여러 군데 가본 적이 있는데 무이예술관은 실내와 실외로 나누어 예술작품이 넘쳐나는 게 특별하다.
교실마다 장르별 작품들이 꽉꽉 채워져 있다. 가끔은 조각 작품을 앞에 두고 버스킹도 한다. 무이예술관, 이곳이라면 꽉 채운 가을날 하루를 보낼 만하다. 이곳을 서성이다 보면 어느덧 어릴 적 추억이 소환되고 감성은 더없이 말랑해져서 비로소 숨통이 트여 있는 자신을 느끼게 된다.
무이예술관은 입구부터 눈길을 사로잡는 거대한 조형물이 시골 학교를 그저 조촐하게 꾸민 예술관이 아니라는 걸 대번에 전한다. 복도에 발을 들이면 창가의 새하얀 커튼이 바람에 살랑이고 흰색 천의 직조 틈 사이로 복도 가득 빛이 쏟아진다. 창가에 줄지어 전시된 조각 작품들은 가을볕에 멋스럽게 빛난다.
둘러보니 원래도 작은 학교였던 것 같다. 몇 개의 교실이 있는 건물 한 동이 전부인데 교실(전시실)마다 회화, 조각 작품, 도예 작품들이 가득하다. 빽빽하게 전시된 서예 작품도 고요히 묵향을 풍긴다. 또 한쪽 전시실에는 역시 봉평의 예술 공간답게 새하얀 메밀꽃 그림으로만 가득 채워져 있다. 복도에서는 이효석의 소설 ‘메밀꽃 필 무렵’의 삽화와 함께 스토리텔링을 감상할 수 있어 문학적 분위기에도 잠겨보게 된다.
볼거리는 끝이 없다. 스튜디오 겸 작업실이 열려 있어 예술가의 공간을 훔쳐보는 맛도 쏠쏠하다. 체험 공간과 아트 숍이 함께 꾸며져 있어 참여 활동도 가능하다. 복도 창가나 틈새 공간도 그냥 놔두지 않고 예술가들의 손길이 닿아 있다. 계단참의 소품들을 구경하면서 위층에 오르면 모임이나 파티를 열 수 있는 공간이 따로 마련되어 있다. 문 열고 옥상으로 나가면 무이예술관의 바깥 풍경을 내려다볼 수 있다. 가슴이 탁 트이는 공간이다.
예전엔 운동장이었을 조각공원은 자연이 주는 넉넉함이 있어 천천히 둘러볼 수 있는 여유를 준다. 잔디 마당은 발걸음마다 부드럽다. 아이들은 조각품들 사이에서 뛰어놀고 엄마 아빠는 예술작품 앞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그 모습이 그림처럼 아름답다. 가을이 깊어가는 운동장엔 노랗게 빨갛게 물든 단풍잎이 날리고 발아래는 낙엽이 바스락거린다. 이곳을 오가는 누구라도 갬성 충만이다.
커피 향 따라 가본 전시관 끄트머리의 갤러리 카페. 사방으로 널찍한 덱에 앉아 운치 있게 차 한 잔 할 수 있는 공간이다. 카페 안은 운동장을 향해 문을 활짝 열어놓아 테이블에 앉아 편안히 풍경을 감상하며 휴식시간을 누릴 수 있다. 예술적 상상력과 소통이 공존하는 무이예술관에 가면 가슴 가득 예술의 기운을 얻어 나오게 된다.
살다가 잠시 멈추고 천지의 가을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깊게 숨을 쉬어볼 만한 곳. 폐교에 담긴 예술 작품과 따스한 휴식 공간에서 충분한 감성 충전을 했던 참으로 괜찮았던 가을날 하루, 자연스럽게 힐링이 되었던 시간이다.
▲주변에 가볼 만한 곳
-이효석 문학의 숲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이효석의 소설 ‘메밀꽃 필 무렵’. 이 소설의 배경지인 봉평엔 메밀밭뿐 아니라 소설 속 내용을 모형으로 재현해놓은 ‘이효석 문학의 숲’이 있다. 발걸음에 따라 30분에서 1시간 정도 걸리는 산책로가 마련돼 있다. 덱 주변에는 자작나무가 하늘 높이 솟아 있다. 산책길을 따라 소설 속 장터와 등장인물들이 막걸리를 마시던 충주집과 물레방아 등 소설 속 내용이 길목마다 새겨져 있어 하나씩 읽다 보면 어느새 전편을 다 읽게 된다. 가을이 깊어지는 계절에 이효석 문학의 숲에서 단편문학 한 편 읽으며 산책하는 시간, 좋지 아니한가.
산이 높아 숲은 무성하고 마을은 밝다. 피고 지는 꽃이나 명멸하는 별, 그 덧없는 것들을 벗 삼아 지내기 좋은 곳이다. 마을 입구엔 ‘예술인 마을’이라 쓴 팻말이 있다. 아늑한 자연 환경에 이끌린 몇몇 예술인들이 들어와 사는 마을이다. 터줏대감은 서양화가 유휴열(71)이다. 그는 이곳에서 33년을 붙박이 장롱처럼 눌러 살며 그림을 그렸다. 다작(多作)을 하기로 소문난 화가다. 그가 올봄에 개인미술관을 개관했다. ‘유휴열미술관’이라는 이름으로.
화가라면 다들 치열하게 그림을 그리고자 한다. 그림밖엔 난 몰라! 이렇게 속으로 외치며. 그들은 그림으로 존재의 가치를 돋우고, 그림으로 자유로운 인간이 되길 바라며, 나아가 상상력을 무한 확장한 그림 작업으로 자신만의 심미적 제국을 구축하고 싶어 한다. 그러자면 일단 열심히 그려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취약점이 많은 게 인간의 정신. 뜻대로 밀어붙이기가 쉽지 않다. 이를테면 자만심, 혹은 매너리즘이 방문해 화가를 나태의 늪에 집어던지기 십상이지 않던가. 이 점에서 유휴열은 귀감으로 회자된다. 그는 그리지 않고서는 숨 쉴 수 없다는 양 치열한 창작을 하기를 평생토록 일관했다. 그렇게 해서 수장고가 미어터지도록 쌓인 작품이 자그마치 5000여 점.
“미술의 공익성, 공공성을 생각했다"
이 많은 작품을 다 어이하나? 노령에 접어든 유휴열은 숙고했던 것 같다. 머잖아 생을 다하는 시간이 찾아올 텐데, 그림들을 등짐지고 함께 떠날 방법은 없고, 다 불태워 없애는 광란(?)은 적성에 맞지 않고, 그는 다소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고민했을 것이다. 이건 유휴열만의 문제가 아니다. 화가의 사후, 그의 분신에 해당할 작품들이 처할 운명에 관해 많은 화가들이 심각한 모색을 하고 대책을 찾는다. 이상적이기로는 작품을 공공미술관에 기증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받아주지 않을 공산이 크다. 공공미술관이라 하더라도 기증 작품을 수용하기 위한 물적 여건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유휴열은 결국 개인미술관을 만들어 문제를 해결하기로 했다.
개인미술관을 가지고 싶어도 가질 수 없는 화가가 대부분이라는 걸 고려하면 유휴열은 행운아다. 그리고 그 행운은 하늘에서 툭 떨어진 게 아니고 오직 자신의 힘으로 불러들였다. 어쩌면 꽤 오래된 숙원이었을 미술관을 드디어 출항시킨 그는 이제 사후에도 행운과 동행하기를 염원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영혼까지 다했다고 자부해도 좋을 자신의 작품들이 시간을 초월해 후세까지 불멸하길 바라면서 말이다.
그런데 유휴열이 미술관을 만든 목적이 다만 작품의 보전을 위한 데에만 있지는 않다. 그가 보기에 전주권, 혹은 전북권의 미술계 토양은 척박하다. 남원시에 있는 김병종시립미술관 외에는 개인을 기리는 기념미술관이 전무했던 현실을 그 하나의 증거로 꼽는다. 따라서 그는 유휴열미술관이 지역 미술계에 활력을 불어넣기를 바라며 일을 추진했다. 유휴열을 알아보는 눈들은 서울에도 많지만, 전주권 문화예술계에선 단연 친숙하게 알려진 원로 화가다. “신기할 정도로 유휴열을 믿고 따르는 인사가 많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다. 유휴열은 이처럼 그를 알아주는 지역의 애호가들에게 미술관으로 화답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의 얘기는 이렇다.
“지역에서 이만큼이나 화가 행세할 수 있었던 게 다만 나 혼자만의 노력으로 가능했겠는가. 늘 남들의 도움을 받았다. 알고 보면 내가 도움 준 일이 드물었다. 이제야 철들어 미술의 공익성, 공공성이라는 걸 생각하며 미술관을 만들었다.”
모악산 치맛자락에 안긴 미술관
유휴열미술관은 유휴열이 33년간 살아온 거처를 다듬어 만든 공간이다. 원래 있었던 살림채와 작업실, 수장고는 그대로 둔 채 전시공간과 카페공간을 증축해 틀을 구축했다. 초목들이 길차게 자란 널찍한 정원도 섬세한 보완을 해 야외 조각 전시장으로 탈바꿈시켰다. 자력으로 조달한 불충분한 자금 사정에 맞춰 시설을 구비하느라 미처 완성을 보지 못한 대목도 있다. 너무 작은 규모의 전시실이 그렇다. 차후 넓혀나갈 예정이라지만 현재로서는 흠이라면 흠이다.
그러나 전체적인 풍치와 구성은 아름답고 안정적이다. 목가적인 전원에 터를 둔 근본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전주 사람들이 즐겨 등산을 하며 서기가 아롱진 산이라 예찬하는 모악산의 치맛자락에 안긴 집이지 않은가. 33년간 이곳에 살며 그림을 그려온 유휴열은 33년간 나무를 심고 꽃을 가꾸어 주변의 자연과 동화를 이룬 정원 공간을 빚어냈다. 시인 김용택에 따르면 그는 “너부데데한 미륵을 닮은 사람”이다. 유휴열의 외적인 경관과 내면을 아울러 빗댄 표현이겠으나 일단 근골이 두루 짱짱한 외양부터가 돌미륵을 닮아 투박하다. 정원을 일부러 세심하게 가꾸는 버릇을 가진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심심파적으로 수목들을 즐겼으리라. 초목들은 햇빛과 물을 끌어들여 저절로 자랐으리라. 저 태연한 풀과 나무들, 무엇이 아쉬워 사람의 손길을 기다리랴.
신생 미술관이라고 얕잡지 말자. 있을 것 다 있고, 볼 만한 것 다 볼 수 있다. 돌담을 따라 이어지는 산책로는 노루꼬리처럼 짤막하지만 고즈넉해 마음을 풀어놓을 만하다. 키 큰 노송들, 붉은 꽃떨기 매단 배롱나무들 사이를 거닐며 커피가 식는 속도보다 빨리 식어버린 사랑의 달착지근한 허무를 반추하기에 적당한 정원이다. 산책로 끝에선 계류가 솰솰 흐른다. 흐르는 물은 무정하다. 떨어진 꽃잎과 누런 낙엽을 속절없이 흘려보내다니.
전시실에선 ‘유휴열-산·나무·꽃’전(展)이 펼쳐지고 있다. 화가의 심상에 포착된 자연 풍경을 거친 붓질로 그려낸 유화 작품들을 내건 전시회다. 눈을 씻고 들여다봐도 예쁘장하게 그려진 형상이 하나 없다. 자연물의 외형보다 내적 생명감의 표출에 치중한 유휴열의 의도가 여실히 비친다. 유정한 마음과 관조의 눈길이 아니고선 끄집어내기 어려운 추상적 구상이다. 속사포처럼 빠른 터치로 물감을 짓이겨 두텁게 바른 질감에서는 자연의 기운생동을 가급적 강렬하고 질펀한 화풍으로 드러내려 한 작의가 읽힌다.
속 깊은 그림이다. 분방하나 심층적이다. 거칠지만 흥겹다. 유휴열의 미술세계를 잘 아는 이라면 사족 없이도 금시에 알아차릴 것이다. ‘아하, 보지 않고도 알겠다, 유 화백이 흥겨워 시원하게 물감을 갈겼구나!’ 그렇게. 흥이라는 것, 이건 유휴열 그림의 키워드다. 우리 민족의 토착 정서를 흔히 한(恨)으로 보지만 그는 흥에서 원형을 찾는다. 한이 무르익으면 역설적이게도 신명이 뻗고, 신명에 겨우면 흥이 돋아 어깨춤들을 추며 삽시에 놀이판을 짜는 사람들. 이게 유휴열이 보는 민족의 초상이다. 해서 진정으로 토속적인 것, 전통적인 것, 정신으로 유전된 원초적인 것을 형상화하기에 주력해온 그의 미술 작업의 뿌리는 흥이라는 대지를 탐닉하는 것이며, 오방색을 즐겨 사용하지만 기법은 다분히 모던하다. 미술평론가 박영택의 촌평을 볼까.
“유휴열의 그림은 현대미술의 어법을 공유하고 있지만 그 저변에는 명확히 설명하기 어려운 우리 전통미술의 특성과 한국인의 기질 같은 것들이 마구 요동친다. 화면은 그 박동을 격렬하게 들려준다. 그것은 거의 색채와 붓질로 이루어진 춤이고 노래이고 판소리 사설이고 구음과도 같다.”
유휴열미술관에는 현기증이 나는 공간이 하나 있다. 바로 유휴열의 작업실이다. 이 미술관엘 왔다가 그 뜨거운 작업실을 구경하지 않는 건 어처구니없는 일에 속한다. 다산성을 본분으로 여기며 무슨 광포한 충동에 휩싸인 사람처럼 작품 생산에만 매진하는 사람의 예술적 생태계를 한눈에 확인할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무진장한 작품들, 열정의 징후들, 또는 노화가의 미묘한 고독까지를 느낄 수 있는 일종의 명소가 아닐 수 없다.
< 2편에 계속 >
코로나19로 해외여행이 어렵게 되자, 이국적인 국내 여행지가 주목받고 있다. ‘바다 위의 식물 낙원’이라 불리는 경남 거제도의 외도 보타니아도 그중 한 곳이다. 사실 외도 보타니아의 인기는 새삼스럽지 않다. 1995년 개장 이래 누적 방문객 수가 2000만 명이 넘는 거제 대표 명소이니 말이다. 나만 해도 그 방문자 수에 ‘4’를 더했다. 이번 방문 때는 비가 왔다. 비 오는 날의 섬 여행도 꽤 낭만적이었다.
바깥 섬이 식물의 낙원이 되기까지
거제도 남쪽 외딴 섬 외도(外島)는 미운 오리 새끼였을까. 마음 심 자를 닮아 ‘지심도’, 보배에 비길 만한 풍광을 지녀 ‘비진도’라 불리는 거제도의 다른 섬들에 비하면 이름조차 초라한 섬이었다. 그랬던 외도가 부침개처럼 운명이 뒤집히는 일이 벌어졌다. 50여 년 전 이창호(1934∼2003) 씨가 낚시하러 외도에 들른 것이 인연이 되어, 몇 년에 걸쳐 외도를 매입한 것이다.
이창호 씨와 그의 아내 최호숙 씨는 1969년부터 외도를 해상식물원으로 가꾸기 시작했다. 무시로 닥치는 태풍과 거친 파도에 맞서며 척박한 땅에 나무를 심고 꽃을 피웠다. 외도는 기후가 따뜻하고 물이 풍부해 종려나무, 야자나무, 선인장 같은 아열대 식물이 자라기에 적합했다. 첫 삽을 뜬 지 26년이 지난 1995년에 이르러서야 세상에 외도 보타니아를 선보일 수 있었다. ‘보타니아’(botania)는 ‘botanic’과 ‘utopia’의 합성어로서 바다 위 ‘식물의 낙원’이라는 뜻을 품고 있다. 외도는 ‘보타니아’라는 이름에 걸맞게 아름답고, 이국적인 모습으로 다시 태어났다. 마치 미운 오리 새끼가 백조가 된 것처럼.
국내 최초 해상식물원의 인기는 개장한 지 25년째인 지금도 여전하다. 외도행 유람선 선착장이 거제도에 7곳이나 있으며, 유람선이 매일 여러 차례 외도 보타니아를 왕복한다. 바람의 언덕과 더불어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가 선정하는 ‘2019~2020 한국관광 100선’에도 들어 제2의 전성기를 맞고 있다.
해금강 유람선 타고 바다 위 정원으로
외도 선착장 7곳 중에 도장포를 애용한다. 도장포 가까이에 외도 보타니아와 인기 쌍벽을 이루는 바람의 언덕과 신선대가 있어서다. 외도로 가는 길에 즐기는 해금강(海金剛) 유람은 덤이다. 선실 밖으로 나가 출렁대는 유람선에 몸을 맡기고, 파도를 가르며 달리는 기분이 상쾌하다.
해금강은 강이나 바다가 아닌, 바다 위로 솟은 바위섬이다. 금강산처럼 경치가 아름답다고 하여 ‘바다 위의 금강산’이라 부른다. 해금강 해안 절벽 위에는 거센 바람을 견디며 살아온 노송들과 석란, 풍란 같은 희귀한 난초들이 자생한다. 절벽 아래에는 파도가 오랜 세월 조각해놓은 십자동굴, 부엌굴 등의 해식동굴이 있다. 선장의 설명을 들으며 해금강의 기암을 바라보면 사자, 촛대, 기도하는 소녀처럼 보인다.
30분가량의 해금강 유람이 끝나면 외도 보타니아에 도착한다. 외도 모양을 형상화한 빨간 등대가 맨 먼저 반긴다. 선장이 1시간 반 뒤에 유람선으로 돌아오라고 당부한다. 순환형 산책 코스대로 걸으면 되므로 관람시간 90분이 턱없이 부족하진 않다.
유럽식 정원과 건축물로 꾸민 외도
외도 보타니아 관광은 아치 모양의 작은 정문을 지나면서부터 시작된다. 세계 각국 방문객을 맞이하는 외도 광장에는 한글·영어·한자로 쓴 ‘외도 보타니아’ 조형물들이 장식돼 있다. 광장을 지나면 향나무 여러 그루를 연결해서 한 몸처럼 다듬어놓은 나무 작품이 보인다. 이곳의 인공미를 대표하는 작품이 아닌가 싶다. 이 나무는 눈이 부리부리한 뿔 달린 도깨비 또는 기세등등한 불꽃을 닮았다. 산책로 입구에 턱 버티고 서 있어 사찰의 사천왕상 같은 존재로 느껴진다.
선인장, 알로에, 용설란 등이 자라는 선인장가든을 지나면 외도 보타니아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는 비너스가든이 나온다.
지중해풍의 건축물과 고속도로처럼 시원하게 뻗은 정원,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세워진 하얀 비너스상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최호숙 씨가 영국 버킹검 궁의 뒤뜰을 모티브로 직접 구상하고 설계한 공간이라고 한다. 비너스가든 끝에 있는 유럽식 사택 ‘리하우스’는 KBS 드라마 ‘겨울연가’(2002)의 마지막 촬영 장소였다. 외도 보타니아를 전국에 소문낸 일등 공신이다.
이탈리아어로 ‘환영합니다’라는 뜻을 지닌 벤베누토정원은 사계절 꽃이 피는 꽃동산이다. 철따라 튤립과 양귀비, 수국, 동백 등이 피고 진다. 이 꽃들은 관람객들의 감탄을 먹고 자란다. 꽃길을 걷다 보면 짙푸른 동백숲길과 대숲길이 나타난다. 밀감나무 3000그루와 편백나무 8000그루가 늘어선 ‘천국의 계단’을 내려서면 야자수 산책로가 기다린다. 프랑스식 연못과 조각상을 배치해 이국적인 정취가 가득하다. 외도 보타니아는 구석구석 아름답다. 귀부인이 그려진 화장실 이정표마저 예쁘다. 화장실 벽 둥근 창으로 보이는 해금강과 외도 등대는 또 어떻고.
바람의 고향 도장포
외도 관람을 마치고 도장포로 돌아와 바람의 언덕에 오른다. 하늘이 맑으면 언덕 아래에 제주도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비췻빛 바다가 일렁인다. 바람의 언덕은 바다로 돌출한 곶이라 늘 세찬 바람이 분다. 풀들이 바람 부는 방향으로 일제히 누워 있다. 언덕 위의 풍차는 신나서 춤추듯 바람개비를 씽씽 돌린다. 비바람에 우산이 뒤집혀도 시원한 바람이 그저 반갑다. 만약 이 언덕을 ‘도장포 잔디공원’이나 ‘도장포 민둥산’이라고 이름 지었다면 얼마나 낭만이 없었을까.
풍차 왼쪽, 숲속 계단을 오르면 호젓한 동백숲길이 나온다. 이 숲길이 도장포마을 윗길로 이어진다. 윗길에서 굽어본 도장포마을 전경도 엄지를 치켜세울 만큼 장관이다. 마을 뒤로는 산이, 앞으로는 바다가 마을을 포근히 감싸고 있다.
도장포마을 남쪽 바닷가에는 신선이 머물렀다는 신선대가 있다. 부안의 채석강과 지형이 비슷하다. 책을 포개놓은 듯 가로지층이 차곡차곡 쌓여 있어 태곳적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공룡 발자국 같은 작은 웅덩이도 수없이 많다. 깎아지른 절벽 사이로는 파도가 으르렁대며 들락거린다. 신선대를 본 사람들이 웅장한 기암절벽과 절벽 아래 몽돌해변을 두고두고 이야기하는 이유를 알 만하다.
◇이색 명소&맛집◇
매미성 매미성은 2003년 태풍 매미 때문에 바닷가 경작지를 잃은 백순삼 씨가 자연재해로부터 작물을 지키기 위해 16년 동안 혼자 쌓아 만든 성벽이다. 처음에는 시멘트 벽돌로 쌓아 볼품이 없었다. 점차 네모반듯한 화강암을 쌓고 시멘트로 메우는 방식으로 바꿔 지금의 모습을 갖췄다. 유럽 중세시대의 성을 연상케 해 이국적인 명소로 인기를 끌고 있다. 실제 풍경보다 사진에 담았을 때 더 멋지게 보여 인생사진 명소로 유명해졌다.
경남 거제시 장목면 복항길
외도널서리 외도 보타니아 설립자인 최호숙 씨가 구조라해변에 유리 온실 콘셉트 카페인 외도널서리를 개장했다. ‘널서리’(nursery)는 ‘묘목을 기르는 땅’이라는 뜻으로 외도 보타니아와 통하는 면이 있다. 유럽풍으로 지어 외국에 여행 온 듯한 기분을 낼 수 있다는 점도 같다. 테라스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빛깔 고운 구조라에이드 한 잔 어떨까. 계절에 상관없이 초록 식물을 감상할 수 있는 게 큰 매력이다.
경남 거제시 일운면 구조라로4길 21, 매일 10:00~21:00
예이제게장백반 거제도에서 이름난 무한리필 게장 백반집이다. 본점은 도장포에 있다. 바람의언덕점은 도장포와 가까워 외도 관광 전후에 들르기 좋다. 메뉴는 게장백반 한 가지다. 메인 요리인 간장게장과 꽃게장을 비롯해 불볼락구이, 간장새우, 충무김밥, 조개미역국 등 반찬이 한 상 가득 나온다. 작은 꽃게를 사용하지만, 살이 제법 차 있어 먹을 만하다. 쫀득한 맛이 일품인 간장새우도 리필된다.
경남 거제시 남부면 해금강로 132, 매일 10:30~21:00, 게장백반 1인분 1만5000원
사람들은 꽃철이 되면 아랫녘으로 떠나고 수목원을 찾지만 나는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양천 향교에 간다. 서울시 강서구에 위치한 이곳에 가면 조용한 향교 담장 위로 피어난 능소화를 볼 수 있다. 옛 교육기관에서 꽃과 함께 고즈넉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시간이다.
도심 속에서 옛 시간과 소통하는 양천 향교는 마을 골목길을 따라 잠깐 걸어 들어가 사찰 홍원사 뒤편으로 가면 있다. 산을 등지고 안정감 있게 들어앉은 모양새다. 향교는 옛 성현들의 덕을 기리고 제를 모시며 지방 향리들을 교육하던 기관이다. 현대적 교육기관이 생겨나면서 대부분 해체되었지만 아직도 전국적으로 230여 개의 향교가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서울에서는 유일하게 양천 향교만 남아 있어 그 의미가 크다.
조선 태종 연간(서기 1411년경)에 설립된 양천 향교는 옛 선비정신을 잊지 않기 위해 지금도 성인과 청소년을 대상으로 맞춤형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또 미디어 시대에 맞는 생활예절 교육과 함께 다양한 소통 창구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그러나 현재는 코로나19 여파로 휴관 중이다. 그래서 더 조용해진 향교다.
담장을 둘러쌓았던 능소화도 예년에 비해 많이 줄어든 모습이다. 그래도 잊지 않고 피어나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에 귀 기울이려는 듯 꽃잎을 활짝 열었다. 능소화의 전설 속에는 그 옛날 구중궁궐에 살던 소화라는 궁녀 이야기가 있다. 어여뻤던 소화는 임금의 사랑을 얻었으나 어찌된 일인지 어느 날부터 임금이 자신을 찾지 않자 그리움에 점점 병이 들어갔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담장 밑을 서성이고 내다보며 오매불망 임금만을 기다리다가 안타깝게 세상을 뜬 소화. 그녀는 “담장 가에 묻혀 내일이라도 오실 임금님을 기다리겠노라”고 했고 그 영혼이 깃들었는지 소화가 지냈던 처소의 담장을 덮으며 꽃이 주렁주렁 피어났는데 그 꽃이 바로 능소화다.
능소화는 오래전 사신들이 중국을 드나들며 가져온 꽃으로 화사한 색상과 모습이 기품 있어 양반꽃으로 불리기도 한다. 주로 사대부 뜰에서만 볼 수 있었고 민가에서는 함부로 심지 못했다. 사람들은 능소화가 다 피고 질 때 미련 없이 꽃송이를 톡 하고 떨어트리는 모습이 마치 소화의 지조를 닮은듯하다고 풀이한다. 능소화의 꽃말은 '영광', '기다림', '명예'다.
예전에는 능소화가 흔치 않았다. 그래서 이맘때면 멀리 경상도까지 내려가 운치 있는 한옥 담장을 뒤덮으며 피어난 능소화를 촬영한 적도 있다. 그러나 이제는 한강변 산책길에서 굵은 나무 기둥을 칭칭 감으며 피어난 능소화를 볼 수 있고 고속도로변의 높은 벽을 뒤덮으며 피어난 모습을 보기도 한다. 그뿐 아니라 능소화 터널을 이룬 신식풍 조경의 공원도 생겨났다. 어느덧 주변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꽃이 되었다.
능소화는 역시 담장을 타고 피는 게 제일 어울린다. 마침 향교 관리인이 굳게 잠긴 문을 잠깐 열어주어 동재와 서재, 그리고 강학 공간이 있는 마당까지 들여다봤다. 향교 옆길로 한 걸음 옮기면 궁산 근린공원으로 이어진다. 울창한 숲길은 여름인데도 서늘하다. 길을 따라 나지막한 산책로를 걷는 즐거움이 있다. 아울러 겸재정선미술관과 궁산땅굴, 구암공원, 허준박물관으로 연결되는 강서 역사문화 둘레길을 알차게 돌아볼 수 있지만 생활 속 거리두기 때문에 실내 관람은 어렵다.
바이러스로 조심스러운 세상이다. 지금은 향교를 속속들이 들여다보지는 못하지만 주변 뜰을 거닐며 유생들의 선비정신과 능소화의 전설을 떠올리는 시간도 제법 괜찮다. 게다가 한적한 분위기가 유유자적 생활 속 거리 두기에 적당하다.
향교를 고리타분한 구시대의 유물처럼 생각하기 전에 한 번쯤 옛 성현들의 흔적을 통해 차분한 시간을 가져보는 건 어떨지. 유생들의 글 읽는 소리가 들리는 듯한 뜰에서의 담백한 어느 하루, 여름 햇살을 받은 능소화가 향교 담장 위에서 눈부시다.
주소: 서울특별시 강서구 가양동 234
△ 주변 볼거리
△서울식물원을 비롯해 겸재정선기념관, 구암공원, 허준박물관, 궁산땅굴이 이어져 있다. 향교 입구 부근에 위치한 사찰 홍원사와 전통 방식으로 면을 만들어 국수를 주렁주렁 널어놓은 ‘옛날국수’ 집 구경은 덤이다.
△이타제면소의 잔치국수(5000원)와 굴림만두(4000원)로 맛난 한 끼가 가능한 곳이 근처에 있다.
서초구 양재천 영동1교에서 영동2교 방향으로 걸어 내려가다 보면 양재천 한가운데에 작은 섬이 하나 있다. 하천 퇴적물이 쌓여 생긴 이곳에 철학자 칸트를 테마로 한 산책길이 있다. 2017년에 조성된 공간이다. '사색의 문'으로 불리는 부식 공법 철제문을 지나 작은 목조다리를 건너면 바로 칸트의 길이 나온다.
독일 철학자의 이름이 왜 양재천 산책길에 등장한 걸까? 생뚱맞다고 생각했던 사람들도 벤치에 앉아 있는 칸트 청동상 옆에 새겨진 문구를 읽다 보면 금세 이해하게 된다. 벤치 좌우에는 칸트의 행복론이 씌어 있다. “첫째, 어떤 일을 할 것. 둘째, 어떤 사람을 사랑할 것. 셋째, 어떤 일에 희망을 가질 것.”
산책로 작은 숲속 길 곳곳에 만들어진 벤치에 앉아 흐르는 물을 바라볼 수도 있고 원형으로 만든 나무 데크에 누워 나뭇잎에 가려진 푸른 하늘을 볼 수도 있다. 매트를 깔고 요가를 하기에도, 책을 읽기에도, 가만히 눈 감고 명상하기에도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원형 데크다.
사색 깊은 철학자의 행복론이라 하기에는 너무 평범해 보인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행복은 산 너머 먼 곳에 있지 않다는 걸 말이다. 그래서 작은 일상이 중요하고, 내 옆에 늘 있어주는 가족과 지인들이 소중하며, 내게 맡겨진 일과 해야 할 일들을 하는 것이 행복의 시작이라는 것을. 어느덧 50대를 훌쩍 넘겨 장년층에 들어가니 걷고 산책하며 주위를 바라보는 게 좋아졌다. 운전하고 다닐 때는 느낄 수 없었던 소소한 즐거움이다.
특히 마음이 복잡할 때나 머리가 어수선할 때는 운동화에 모자 하나 푹 눌러쓰고 이 길 저 길 가리지 않고 걸어 다닌다. 단지 두 다리로 걷기만 했을 뿐인데 걷고 난 후 땀에 흠뻑 젖은 몸이 개운하다. 이리저리 마음 괴롭히던 잡생각들도 사라져 마음도 한결 가볍다.
칸트는 매일 산책을 하며 사색했다고 한다. 하루 종일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 가만히 앉아 나를 되돌아보는 일은 ‘잠시 멈춤’을 넘어 스스로를 다독이고 격려하는 힐링의 시간이다. 또 격조 있는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는 자양분이 된다. 서울 도심 속 양재천 한복판에 있는 작은 섬, 칸트의 산책길이 내게 소중한 이유다.
지금은 코로나19 때문에 주춤하지만 한때 젊은이들이 일본 교토로 여행을 많이 떠났다. 그 여행 코스에 빠지지 않는 곳이 있었는데 바로 은각사 옆에 위치한 철학자의 길이다. 일본의 철학자 니시다 기타로가 산책하면서 사색을 즐겼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
작은 마을을 흐르는 천 옆에는 오래된 벚나무들이 늘어서 있다. 벚꽃이 만발하는 봄에 방문하면 벚꽃이 눈처럼 날리는, 말 그대로 꽃비가 내리는 운치 있는 길이다. 하지만 이곳에선 이제 사색을 할 수 없다. 관광객이 길을 가득 메워 길을 걷다가도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 참 아이러니하다.
양재천 칸트의 산책길을 걸으며 문득 교토의 철학자 길이 떠오른 건 ‘본질에 충실하기’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산책길을 한 바퀴 돌고 오니 다시 출발했던 그 길이다. 들어갈 때는 행복에 관한 문구를 봤는데 나올 때는 다른 글이 보인다. “한 가지 뜻을 세우고 그 길로 가라, 잘못도 있으리라, 실패도 있으리라. 그러나 다시 일어나서 앞으로 나아가라, 반드시 빛이 그대를 맞이할 것이다.” 칸트의 행복론을 새기며 걷다가 이번에는 나의 꿈과 미래에 대해 생각해본다. 양재천의 흐르는 물을 잠깐 바라봤다. 두 아이가 물을 건너기 위해 징검다리를 조심조심 걸어가고 있다. 아이가 물에 빠질까봐 다정스레 손을 잡아주는 아빠의 모습도 보인다. 작은 일상의 행복을 그들은 알고 있을까? 아니 모른다 해도 상관없을 듯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작은 미소가 퍼지고 마음이 따뜻해지니 말이다.
어딜 가도 좋을 때다. 혼자여도 좋고 함께라도 좋다. ‘걷기의 3요소’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함께 걷기의 3요소’는 확실히 있는 것 같다. 날씨가 좋아야 하고, 풍광이 좋아야 하고, 마지막으로 함께 걷는 일행이 좋아야 한다. 특히, 처음 가보는 곳에 해설자가 있다면 금상첨화다. 같은 풍경도 해설을 들으면 다르게 보이고, 안 보이는 것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강서지역의 테라피 장소인 개화산 둘레길로 트레킹을 간다’는 공지가 올라왔다. 서울 근교를 걷는 ‘감성테마여행’ 밴드에 가입한 건 몇 년 전이었다. “북한산과 한강을 동시에 조망할 수 있고, 김포공항이 보이는 하늘길 전망대에서 풍경을 감상하겠습니다. 초록의 숲에서 ‘힐링 오침과 음악감상 테라피’의 시간도 가질 예정이니 개인용 돗자리를 준비해서 오시기 바랍니다.”
도보여행가이자 ‘여행과 인간’ 호비문화연구소장 이성한 씨의 안내 글이 걷기 욕망을 충동했다.
햇살이 따가운 평일 오전에 40대부터 60대까지 남녀 회원 25명이 모였다. 출발 지점인 개화산 미타사를 시작으로, 공원 조망점, 해맞이 전망대, 약사사, 치현산 꿩고개, 메타세쿼이아 숲을 거쳐 돌아오는 11km를 5시간에 걸쳐 걸었다. 미타사는 큰 절의 말사 같은 곳으로 암자처럼 규모가 작았다.
강서 둘레길이라고도 불리는 개화산 둘레길은 오르막이나 내리막의 경사가 심하지 않다. 초급자나 시니어들도 쉽게 걸을 수 있다. 마스크를 쓰다 보니 초반부터 땀이 쏟아졌지만 앞서거니 뒤서거니 두세 명씩 짝을 지어 녹음이 우거진 숲길을 걸었다. 이렇게 천천히 걸으면 주위를 둘러보게 된다. 하늘은 파랗고, 산은 초록이고, 망초꽃은 하얗다.
개화산은 서울시 강서구 방화동에 있는 산으로 한강을 사이에 두고 행주산성과 마주 보고 있다. 높이는 약 128m이며 신라시대 주룡거사(駐龍居士)가 득도를 하기 위해 머무른 곳이란다. 그런 이유로 한때 주룡산이라고 불리기도 했는데, 그가 열반한 자리에서 꽃이 피어나 개화산(開花山)이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멀리서 바라보면 산 모양이 꽃의 형상처럼 보인다.
특히 이곳은 주변을 두루 살필 수 있는 군사 요새로 활용됐다. 산 정상 두 곳에 있는 봉수대는 서쪽과 남쪽에서 봉화를 받았고, 임진왜란 당시 군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래서 불화(火) 자를 넣어 개화산(開火山)이라 부르기도 했다. 풍수지리상으로는 ‘화리생연(火裏生蓮)’, 즉 불꽃 속에서 연꽃이 피는 형국이다. 말하자면, 개화산은 ‘활활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꽃이 피어나는’ 산세라 할 수 있겠다.
한강, 방화대교, 북한산 등 멀리까지 보이는 해맞이 전망대를 지나 약사사, 치현산 꿩고개 둘레길을 거쳐 메타세쿼이아 숲에 들어서자 키 큰 나무들이 세 줄로 길게 늘어서 있었다. 초록 잎이 무성한 길을 걸으며 피톤치드를 들이마시려 심호흡을 했다. 산책로 끝까지 걷고 난 뒤에는 인적이 드문 숲속에 자리를 잡고 점심을 먹었다.
이날 걷기의 하이라이트는 식사 후 1시간가량 숲에서 낮잠을 자는 것이었다. 평소 잠을 깊이 자지 못하는데 숲의 기운 때문이었는지, 편안함 때문이었는지 눕자마자 바로 잠이 들었다. 일행은 ‘숲속의 잠자는 공주’가 아니라, ‘숲속의 잠자는 시니어’가 되었다. 얼마 후 해설자가 틀어주는 음악소리에 부스럭거리며 일어났다. 피곤이 가셨는지 개운했다. 숲에서 잠이 든 것은 처음이었고, 깊은 잠을 잔 것도 신기했다. 사소한 피로와 가벼운 감기는 숲에 머물러 있으면 치료가 된다고 하던데 산림욕 효과를 톡톡히 본 셈이다.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해설사는 ‘걷기 예찬’의 작가 다비드 르 브르통의 책 ‘느리게 걷는 즐거움’을 꺼내 몇 구절을 읽어줬다.
"걷기는 세상의 쾌락으로 이어지는 통로이다. 잠깐 쉬었다 갈 수도 있고, 내면의 평정도 찾을 수 있으며, 주변 환경과 함께 끊임없이 살을 맞대며 아무런 제한도 장애도 없이 장소의 탐험에 몰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여행은 감각을 통한 전진이요, 관능으로의 초대이다. 행복한 감각들은 내가 존재하고 있음을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순간, 그곳에 있음을 수없이 확인시켜준다."
서울 근처에는 걷고 싶은 길이 많다. 개화산 둘레길도 그중 하나다. 원점 회귀 직전의 하늘길 전망대에서는 김포공항 활주로에 줄지어 있는 비행기들과 그 옆으로 광활하게 펼쳐진 논, 멀리 녹음이 우거진 계양산까지 보였다. 순간 바람이 불어왔다. 무겁게 마음을 누르고 있던 것들이 바람과 함께 흩어지는 듯했다. 상쾌했다. 디톡스란 생리학적 용어로 신체에서 노폐물이나 독성물질을 없애는 방법이다. 풍광이 좋고, 일행이 좋고, 날씨까지 좋을 때의 걷기는 마음의 불순물들을 사라지게 하는 것 같다. 불꽃 더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 꽃중년들이 함께 걸었다. 함께 걷는다는 것은 그 꽃들을 하나하나 만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