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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천 영화] 7월의 추천 영화
- ◇ 고행길에서 극복하는 인생의 고난 작가 겸 방송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하페 케르켈링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책 을 원작으로 한 작품이다. 과로와 무기력증에 빠져 있던 하페 케르켈링이 800km 산티아고 순례 길에 오르며 얻은 깨달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홀로 걷는 주인공의 모습이 담긴 포스터에는 ‘이 길은 당신을 무너뜨리는 동시에 다시 일으켜 세운다’라는 문구가 고난과 희망이 공존하는 곳임을 짐작하게 한다. 개봉 7월 14일 장르 코미디 감독 줄리아 폰 하인츠 출연 데비드 스트리에소브, 마르티나 게덱, 카롤리네 슈허 등 ◇ 좌절의 순간 찾아온 삶의 희망과 행복 갑작스럽게 아내를 잃은 후, 소소한 삶의 모습을 돌아보게 된 한 남자의 이야기다. , 의 장 마크 발레가 감독을 맡은 작품으로 제40회 토론토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됐다. 6월 10일 시사회에서 작가 이외수는 “상실감에 빠진 한 남자로부터 비롯되는 아픔, 고독감에 대한 이야기다. 어떻게 하면 뼈저린 아픔에서 헤어나올 수 있는지를 주도면밀하게 잘 보여준다”라고 설명했다. 개봉 7월 13일 장르 드라마 감독 장 마크 발레 출연 제이크 질렌할, 나오미 왓츠, 쥬다 루이스, 크리스 쿠퍼 등 ◇ 아름다운 풍경 속에 담긴 상실의 여운 1995년 개봉해 그해 베니스국제영화제 황금오셀리오니상, 밴쿠버국제영화제 용호상, 일본아카데미 신인여우상 등 각종 영화제를 휩쓸며 주목받았던 작품으로, 20년 만에 재개봉한다. 그동안 국내에서는 몇 차례 특별전으로만 상영됐을 뿐 정식으로 개봉한 적은 없었다. 개봉일에 앞서 열린 ‘스크린문학전 2016’과 ‘무주산골영화제’를 통해 선보이며 전회 매진기록을 세웠다. 개봉 7월 7일 장르 드라마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 출연 에스미 마키코, 나이토 타카시, 아사노 타다노부 등
- 2016-07-01 0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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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니 자서전] 삶의 노을이 지기 전에
- 밥만 해 먹는 여자 공인중개사 사무소를 폐업 하고나서 꼭, 10년! 집에서 밥만 해먹고 사회활동은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 밥만 해 먹으면서 가정 살림만 한다고 하면 누구든지 한심하게 본다. 그것도 그럴 것이, 사회활동을 해야만 훌륭하고 대단하게 여겨 주는 것이 요즘 사회의 현상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집에만 있다. 그렇다고 살림살이를 반짝반짝하게 닦아 빛이 나게 하며 살아가는 주부도 아니고, 요리솜씨가 뛰어나 특별하게 내세울 나만의 ‘필살기 메뉴’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살림도 대충하고, 청소도 대충하면서도, 남들처럼 취미하나도 계발하지 못하고 무취미로 살아가는 ‘게으른 은둔자’다. 게으른 은둔자 사람들은 동호회다, 친목계다, 동창회다 해서, 갖가지 모임을 만들어 가며 사람들을 사귀고, 만난다. 그러나 필자는 집에만 있어도 세상 편하고 좋다. 밖에 나가는 일은 꼭 필요 할 때만 나간다. 병원갈 때, 은행이나 관공서에 볼 일이 있을 때, 가끔 언니들이나 지인을 만날 때, 교회에 갈 때, 그리고 대부분 반찬거리 사러 대형마트에 갈 때뿐이다. 집에 화수분이라도 하나 있어서 반찬거리가 저절로 생겨난다면 외출 할일도 없을 터이지만, 불행하게도 그런 화수분이 내게는 없다. 그래서 주 1회 정도, 반찬거리 사러 할 수 없이, 사람이 북적거리는 대형마트엘 간다. 사람 많은 곳에서 휘둘리다가 오면, 너무 피곤해 초주검이 되곤 한다. 집에만 있다고 하면, 사람들이 필자에게 묻는 말은 하나같이 ‘심심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천만의 말씀! 그것은 사람들이 몰라서 하는 말이다. 이렇게 살아도 하루 24시간이 항상 모자란다. 재미있는 영화보기, 다양한 프로의 TV시청, 그리고, 살아가는데 필요한 책들을 읽기에 하루는 너무나 짧다. 그러니 살림을 대충 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필자는 사람들과 대화를 하는 것보다 책이 더 좋고, 영화나 TV가 더 재미있다. 이렇게 은둔자가 된 것에 대해 주변 사람들은 대부분 답답해하는데, 이런 은둔을 반기는 사람이 딱 한 사람 있다. 필자에게 마음 놓고 밥을 시켜 먹으려는 사람, 바로 남편이다. 구석기사람이라도 본 것처럼 하루는, 오전에 야쿠르트 영업사원이 우리 집의 벨을 눌렀다. 문을 열고 나가니 깜짝 놀란다. 벨을 눌렀기에 나간 것뿐인데 왜 필자를 보고 놀라는 것인지 물어 보았다. “이 시간에 집에 계시네요?” 마치 신기한 뭔가를 보듯 한다. 내가 물었다. “이 시간에 우리 집에 내가 있는 게 그렇게 이상해요?” 야쿠르트 판매사원이 대답했다. “아니요, 요즘은 이 시간엔 집집마다 주부들이 나가고 집에 없거든요. 돈을 벌기 위해 나가든지, 취미활동을 하러 나가든지, 다들 나가고 없는데, 그런데 집에 계신 분도 있네요” 그녀는 집에 있는 필자가 마냥 신기한가보다. 마치 구석기사람이라도 본 듯이 그런 표정으로 바라본다. ‘그렇게 이상한가?’ 하긴 요즘은 모두들 바쁘게 살아가는데, 혼자서만 한없이 늘어져 있다는 생각도 가끔 하긴 했으니까, 야쿠르트 판매사원의 말을 전혀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다. 가족들의 건강을 위해서 밥을 열심히 했다는 것이 자랑스러울 것 까지는 아니라도, 당당한 일임엔 틀림이 없다. 그런데도 나쁜 짓을 하다가 들킨 것처럼, 야쿠르트 판매사원의 말에 필자는 은근히 민망하고 부끄러운 생각까지 든다. 경제활동을 꿈꾸며 며칠을 두고 은둔생활에 대해 곰곰이 생각을 해 보았다. 나이가 더 많아져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가 오기 전에, 어서 털고 일어나 경제활동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지인들은 취득하기 어려운 자격증을 묵혀 두는 것이 너무 아깝다고 공인중개사 사무소를 다시 개설하라고들 한다. 그러나 그건 부동산 중개업을 몰라서 하는 말이다. 많이 걸어 다녀야 하고, 누군가 에게는 전 재산일 수도 있는, 고객의 큰 재산이 오가는 일을 해야 하므로 순발력이 있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젊은 사람들이 해야 하는 직업이지, 시니어들이 할 수 있는 직업은 절대 아니다. 또, 멀지 않아 대기업과 외국기업들이 부동산 법인을 만들어서 부동산 중개업시장에 진입하는 날이 다가 올 것이다. 게다가 요즘은 부동산중개업의 경기가 좋지 않을 때이고 보니, 더더욱 사무소 개업은 할 수가 없다. 오랜 시간 고민한 끝에 인터넷에 들어가 ‘서울시일자리플러스센터’에 구직 신청을 했다. 취업교육을 받다 하루는 ‘서울시어르신취업훈련센터’에서 취업교육을 받으라는 문자가 왔다. 취업교육을 받으러 가보니까, 여러 가지 교육이 다양하게 있어서 그때부터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들꽃 가드닝 교육, 동년배 상담가 교육, 도슨트 교육, 취업설계아카데미 교육등 그 외에도 다수의 교육을 더 받았다. 교육을 받고나서 그걸로 취업을 해보려고, 내게 맞을 것 같은 교육만 골라서 받았다. 그러다보니, 1년이 어느새 꿈결같이 흘러갔다. 취업을 못해 크게 실망 교육을 받고나면, 처음에 내가 그 교육을 선택 했을 때와는 결과가 달랐다. 필자가 직업으로 가지기에는 힘들고, 자신도 없고, 취업할 분야를 선택할 수가 없었다. 실망도 많이 되고, 회의를 느끼게 되었다. 교육 받을 때, 강사들이, 정말로 재미있고, 취미로 즐길 수 있는 분야를 직업으로 선택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일이 재미있어야 싫증 내지 않고 오랫동안 할 수 있을 테니까, 뭘 잘 할 수 있을지 꼭 취미부터 찾으라는 것이다. 나는 맞는 취미를 못 찾아서 지금까지도 취미생활을 못하고 있다. 그래서 취업도 어려운가보다. 취업을 포기할까? 아니면 진로를 바꿔 볼까?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 결과, 진로를 ‘상담’ 쪽으로 바꾸어 보려고 굳게 마음먹었다. 적성 진로검사를 받다 센터에는 그만 다니려고 상담분야의 교육기관을 알아보고 있는 중이였는데, 센터 강사님이 ‘취업설계아카데미교육’을 받아 볼 것을 적극 권유 하셨다. 뿌리칠 수가 없어서 이번 교육만 한 번 더 받아보고 그만 둬야겠다고 생각하고, 교육을 받았다. ‘취업설계아카데미교육’은 직업상담 분야의 프로그램이 들어 있어서 ‘진로검사’도 받게 되었다. 이때는 이미 상담 쪽으로 마음이 많이 기울어 있어서 결과가 상담관련분야로 나올 줄 알았다. 그러나 뜻밖에도 ‘예술적, 진취적, 탐구적’ 뭐 이런 단어만 나오는 것이 아닌가! 상담분야로 전환 하려던 계획에 브레이크가 걸렸다. 갑자기 앞이 캄캄하고 막막해졌다. 지금 까지는 예술하고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해 온 사람인데, 예술이 왜 별안간 튀어 나오느냐 말이다. 상실감에 허탈해하는 이 모습을 본 담당 복지사가 ‘본인이 좋아하는 교육만 받지 말고, 관심 없는 분야도 골고루 받아 보면, 의외로, 관심 없던 분야에서 적성에 맞는 직업을 찾을 수도 있다’고, 절대 포기하지 말라고 격려해 주었다. 생각해보니 복지사의 조언이 정말 맞는 말이다. 그래서 그때부터 교육을 골고루 다 받아 보기로 결심 했다. 방송인 교육을 받으며 ‘취업설계아카데미교육’을 마치고 났을 때, 마침 ‘방송인교육’의 교육생을 모집하고 있었다. 복지사의 조언대로 평소엔 전혀 관심조차 없었던 ‘방송인교육’을 신청했다. 방송인 교육은 시니어 연기자, 모델, 리포터와 같은 방송 일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전문직 교육이다. 연기엔 관심 없지만, 커리큘럼을 살펴보니 방송기사작성과 리포터교육은 글쓰기가 있어서 받아보면 좋을 것 같았다. 리포터교육을 받으면서, 자기 소개하는 글을 발표했을 때와 리포터 기사작성을 했을 때 두 번 모두 강사에게 칭찬을 들었다. 고칠 것이 하나도 없고, 지금 바로 현장에 가서 리포터를 해도 되겠다고 했다. 큰 박수도 두 번이나 받았다. 도슨트 교육과 시니어 기자교육을 받을 때도 같은 칭찬을 받았다. 이렇게 여러 번 강사들에게 칭찬을 듣고 보니, 교육생들 사이엔 필자가 글을 잘 쓴다고 소문이 났다. 시니어 잡지 ‘브라보 마이 라이프’의 기자가 되다 시니어기자교육이 끝날 무렵에, 마침 경제신문 ‘이투데이’에서 만들고 있는 시니어잡지 ‘브라보 마이 라이프’에서 시니어기자를 모집하고 있었다. 그 모집광고를 보고, 필자는 무릎을 탁 쳤다. “그래! 바로 이거다. 여기서부터 시니어의 새 삶을 시작해야지!” 필자는 그 길로 ‘브라보 마이 라이프’에 시니어기자 지원서를 냈다. 운이 좋게도 합격되어서, ‘기자’가 되는 어릴 적 꿈은 이루게 되었다. 그래서 현재는 ‘브라보 마이 라이프’의 시니어기자인 ‘동년기자’로 활동하고 있다. 글쓰기로 삶을 꽃 피우리라! 글을 잘 쓴다고 소문이 나고 보니, 소문 난대로 정말 글 잘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런데 글쓰기를 해볼 용기를 낼 수 있었던 이유가 하나 또 있다. 중학교 2학년 때의 일이다. 문예반은 아니지만, 방과 후에 집에서 원고지를 묶어놓고, 혼자서 취미로 틈틈이 시를 썼다. 그 덕분에 중학교 3학년 때는 학교 대표로 뽑혀서 대학교 백일장에 나가 장려상도 탔다. 상을 타고 보니, 시인이 되어서 기자를 해보고 싶다는 꿈을 꾸게 되었는데, 그건 언니들이 보던 여성월간지를 보고서 부터였다. 시인인데, 유명 인사를 인터뷰하러 다니는 걸 읽어본 후로는 필자도 ‘시인이면서, 기자가 되면 얼마나 멋질까!’ 하고 생각했다. 그 티끌만한 작은 경험을 움켜지고, 지금부터라도 ‘글쓰기’를 위해 꾸준히 노력하면 언젠가는 ‘시인’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또, 시인이 되지 못하면 어떤가! 글쓰기를 하는 순간들이 행복한 날들이 될 것이고, 필자의 남은 삶을 아름답게 꽃피워 낼 것이다. 이 화려한 꿈을 이루기 위해서 삶의 노을이 지기 전에, 서둘러야겠다.
- 2016-06-20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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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휴가지에서 생긴 일] 바다에서 죽을 뻔 했던 사연
- 여름휴가철이 돌아오면 대개는 낭만적인 일을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필자는 그런 것과 거리가 먼 사건 하나가 툭 하고 마음에서 일어난다. 지금부터 43년 전 일이나 필자 ‘기억의 창고’에서는 조금도 스러지지 않은 채 생생하게 남아 있다. 대학 3학년 때 일이다. 아르바이트하면서 열심히 살아가느라 학교생활은 늘 따분했다. 대학 캠퍼스는 낭만과는 거리가 멀고, 사회는 우리에게 그럴 틈을 주지 않았다. 빈번하게 이어지는 데모와 휴교는 더욱 상실감을 느끼게 했다. 그해 여름은 유난히 더웠던 것으로 기억난다. 고등학교 친구들이 마음을 모아 여름방학에 경포대로 가기로 했다. 말이 나온 후부터 이미 마음은 바다로 가 있었다. 당시 필자가 탄 기차는 정말 느렸다. 그래도 동해 바다를 보고 싶은 마음에 조금도 지루하지는 않았다. 바다 앞에 서는 순간 가슴이 확 펴지는 듯한 해방감이 들었다. 바다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이미 마음이 넓어지는 느낌이었다. 대천에는 두어 번 갔지만 바닷물 색깔부터 달랐다. 한참을 눈으로 감상하다가 환상적 물색깔이 보내는 유혹을 참지 못하고 물로 들어갔다. 세 명의 친구가 모두 수영할 줄 몰랐기에 유끼(물 위에 뜨는 돗자리 같은 것)을 띄우고 그 위에 올라앉아 한껏 기분 좋게 즐기고 있는데 갑자기 유끼가 뒤집어졌다. 누군가 장난을 친 것이다. 셋은 각자 영문도 모른 채 물 밖으로 나오려고 필사적으로 발버둥쳤다. 그러나 아무리 발을 흔들어 봐도 발에 걸리는 것은 까마득한 물뿐이었다. 계속 허우적대며 실오기라도 잡으려는 노력은 허사였다. 이제는 기운도 빠지고 이러다 죽는구나 하는 순간 손에 잡히는 게 있었다. 유끼였다. 버둥대며 간신히 그 위에 올라앉은 순간 다른 친구 한 명이 이미 그 위에 누워 눈도 뜨지 못했다. 그리고 곧 이어 다른 친구도 올라왔다. 지쳐서 말할 힘도 없었다. 알고 보니 장난을 쳤던 사람이 필자 일행이 모두 물속에서 나오지 못하는 걸 보고 겁이 났던 모양이다. 유끼를 필자 일행이 허둥대는 곳으로 밀어놓고 모두 올라온 후 백사장 가까이 끌어다 놓고는 어디론가 도망갔다. 같이 갔던 일행 중 다른 두 명은 설악산으로 가려던 계획이어서 바다에는 들어가지 않고 백사장에서 바다를 보며 얘기하는 것으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 친구들도 처음에는 우리가 장난하는 줄만 알았단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상하다 여겨 바다 가까이로 왔는데 그제서야 사태를 알게 됐다. 그날 셋은 병이 나서 밤새 고생하고 다음 날 집으로 돌아왔다. 피서.. 바다.. 가슴 부풀게 하는 이 단어가 한순간에 지옥 같은 기억으로 바뀌었다. 우리는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의 장난질에 죽음을 생각하는 데까지 갔었다. 얼굴도 제대로 본 적 없고, 항의 한 번 하지 못한 채 고스란히 마음에 쌓인 두려운 기억만 남았다. 장난으로 던진 돌에 연못에 있던 개구리가 죽는다는 말이 실감나는 사건이었다.
- 2016-05-31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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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효철 반려동물 프랜차이즈 ‘쿨펫’ 대표 [3]
- “한 번 선택하면 18년을 좌우합니다.” 순간 그의 눈빛이 변했다. 만난 후 내내 온화한 의사선생님의 모습을 하고 있던 그였는데, 이야기 주제가 동물 입양으로 옮겨지자 갑작스레 진지해졌다. “사람을 입양하는 것과 같죠. 개와 고양이 모두 최근 수명이 길어져 평균 18년 정도 사는데, 함께 하는 사람 입장에서도 굉장히 긴 기간입니다. 신중해져야 하는 것도 이 때문이죠.” 글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박효철(朴孝哲·55) 대표는 국내 최대의 애견 프랜차이즈의 최고경영자이자 진료도 함께하는 대표원장 역할도 하고 있다. 그가 운영하는 동물병원 프랜차이즈 쿨펫(Cool Pet)은 전국에 150여 개 가맹점이 있고, 전국의 롯데마트나 이마트 등 대부분의 대형마트를 선점하고 있다. 이 밖에 호텔이나 놀이터 서비스를 제공하는 반려동물 서비스 전문의 프랜차이즈 위즈펫(Wizpet) 등 그가 론칭한 크고 작은 애완동물 브랜드는 모두 5개나 된다. 수명 얘기가 나오니, 돈벌이만 생각한다면 순환이 빠른 것이 좋지 않을까 하는 나쁜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지만, 그의 진중한 태도에 얄팍한 이야기는 입 밖에 내지도 못한다. 박효철 대표의 말에 따르면 애완동물, 반려동물 시장은 최근 급속도로 커지며, 많은 변화를 겪고 있다고 한다. “최근 혼자 사는 인구가 늘면서 반려동물을 키우는 애견인(愛犬人), 애묘인(愛猫人)들이 늘었어요. 최근에는 자녀들과 떨어져 지내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에, 빈자리를 반려동물로 채우려는 시니어들이 늘어났습니다. 동물별 비중을 살펴보면 과거에는 개를 선택하는 인구가 90% 정도를 차지했지만, 최근에는 고양이의 인기가 늘어나면서 20% 이상을 차지합니다. 고양이를 키우는 애묘인들이 빠른 속도로 늘어나고 있어, 이 추세라면 30%를 넘는 것도 얼마 남지 않은 상태입니다.” 시니어 중에서 반려동물을 키우는 인구가 늘고 있는 것은 선진국의 사례에 비춰보면 자연스러운 변화라고 했다. 특히 일본의 경우 반려동물을 키우는 독신인구 중 70% 정도가 시니어층이라고 한다. 시니어들이 개보다 고양이를 더 많이 선호하는 것도 한국과는 다른 특징이다. 시니어의 반려동물로 선택되는 개와 고양이의 비율은 4대 6 정도다. 생활공간 등의 문제로 망설였던 반려동물의 사육을 이제라도 시작하려는 시니어들에게 어떤 준비가 필요할까 물었더니 의외의 답이 돌아온다. 그의 사업영역인 동물병원이나 관련 매장을 찾아 도움을 요청하는 것도 좋지만, 가까운 지인 중에서 이미 반려동물을 기르고 있는 사람을 찾아 살펴보는 것이 좋다고 조언한다. “실제 기르고 있는 사람을 찾아 밥은 어떻게 주는지, 훈련은 어떻게 시키는지, 그 외의 관리상 주의사항은 무엇인지 미리 듣고 학습하는 것이 좋습니다. 실제 사육하는 과정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 눈으로 확인하고 현실을 인지하는 것이 중요하니까요. 그 이후에 본인이 기르고자 하는 동물의 특징을 공부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입양은 맨 마지막 단계입니다. 천천히 해도 늦지 않습니다.”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턱대고 입양을 하다보니 유기견의 증가가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것이다. 이로 인해 일각에선 유기견의 입양도 캠페인처럼 펼쳐지지만, 사육을 처음 시작하는 초보 시니어는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는다. 유기견의 경우 몸과 마음을 모두 다친 상태에서 구조되는데, 관련 기관에서 육체적인 상처는 치료해도, 마음의 상처는 그대로 둔 채 입양을 보내기 때문에 받아들이는 사람의 준비가 몇배 더 필요하다는 것. 실제로 입양된 유기견들이 파양(罷養)되어 돌아올 확률은 절반에 육박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시니어에게는 어떤 동물이 키우기 좋을까? 물론 개인의 취향이 우선시되어야겠지만, 개와 고양이 중에서 선택하라면 고양이가 편하다고 조언한다. “개는 의존적이어서 항상 곁에서 돌봐줘야 하지만, 고양이는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물과 음식만 준비된다면 며칠 동안 집을 비워도 문제없을 정도죠. 배변 훈련도 모래만 준비하면 됩니다. 가르칠 필요가 없죠. 그래서 키우기 편한 쪽은 당연히 고양이입니다. 만약 강아지 중에서 추천하자면 몰티즈나, 요크셔테리어, 푸들, 시추 같은 소형견이 적합하죠. 하지만 인위적으로 몸집을 줄인 아주 작은 견종은 추천하지 않습니다. 건강하지 않은 경우가 많아요.” 최근 반려동물 관련 산업이 확대되면서 관리에 대한 다양한 상품이나 서비스 등이 늘어났지만, 지나치게 과잉보호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 박 대표의 설명이다. 너무 병원을 자주 찾거나, 보호에 힘쓰는 것보다는 산책을 하는 등 같이 함께 보내는 시간을 늘리는 것이 더 중요 하다고 설명한다. “사람처럼 반려동물도 병원을 가 버릇하면 계속 탈이 나게 되어 있어요. 병원은 큰 문제가 없으면 일년에 한 번 정도 예방접종하러 가면 되고, 먹는 것도 그냥 사람 먹는 것을 함께 먹어도 큰 문제는 없습니다. 인류는 그동안 그렇게 동물들을 키워왔고, 동물들은 그렇게 살아남았으니까요.” 입양할 동물이 결정되고 집에 들이게 되면 가장 중요한 것은 집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라고 조언했다. “개든 고양이든 한 일주일 정도는 일부러 만지려 들지 말고, 먹이를 줄 때를 제외하고는 내버려 두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고 나서 적응이 되면 먼저 가까이 다가올 겁니다. 산책할 때도 목줄을 조금 여유 있는 길이로 맞춰, 가고 싶은 곳으로 따라가는 형태로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게 함께 지내다 보면 상대도 마음을 열게 되고 서로 가까워졌음을 느낄 수 있을 겁니다.” 반려동물과 함께 지내는 것을 통해 얻는 장점을 박 대표는 ‘교감’으로 이야기했다. 사람과 사람은 말로 교감을 하지만, 사람과 동물은 원초적 감정을 통해 소통하기 때문에 좀 더 근원적인 교감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과정을 통해 마음의 안정과 위안을 받을 수 있다는 것. 일부에선 동물이 수명을 다할 때의 상실감을 우려하기도 하지만, 죽기 전에 동물을 한 마리 더 입양해 충격을 최소화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추천했다. 나이 많은 동물에게도, 그를 잃는 사람에게도 새로운 식구가 힘이 되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가장 하고 싶은 이야기는 신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니어가 동물을 키우게 되면, 동물이나 사람의 수명을 고려할 때 평생을 함께하는 셈이니까요. 그래서 반려동물이라는 말 그대로 남은 생을 함께 할 식구를 찾는다는 마음으로 입양에 임해주셨으면 합니다.”
- 2016-03-30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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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토리가 있는 여행
- 굽이굽이 꺾인 골목길을 따라 무너져 내린 성곽 끝자락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일행의 시선을 붙든 건 음습한 기운 속에서 마지막 숨을 토해내는 작고 허름한 벽돌집. 그렇게 한 세기 이상을 숨죽여 지내온 과거의 시간은 세월의 모진 풍파를 피해 몸을 잔뜩 웅크린 채 그 흔적이나마 보전을 허락받을 수 있었다. 잊혀진 역사를 더듬어 떠나는 여정, 촌철살인의 역사학자 전우용 교수가 동반자로 나섰다. 글 임도현 프리랜서 여행 기자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흔히 서울 앞에 ‘역사도시’라는 수식어가 붙습니다. 말로는 동의하지만 왠지 마음 한구석에선 납득이 가지 않는데요. 여러분은 수긍하십니까?” 전우용 교수가 던진 화두에 강의실에 모인 사람들의 표정이 아리송해지기 시작한다. 조선 600년 역사와 더불어 고려, 삼국도 모자라 상고시대를 거슬러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민족의 후예들에게 서울이 역사도시로서의 면모가 부족하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그것도 조선왕조의 상징인 경희궁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정동 경향신문사 사옥에서 말이다. “옆 동네 사람들이 재산권을 지키기 위해 문화재를 파괴한다면 여러분은 분명 그들을 비난할 겁니다. 하지만 우리 동네에 유적이 발견되고 그것으로 인해 개발이 지연되어 집값이 떨어진다면 여러분들 역시 문화재 파괴범이 될 수밖에 없을 거예요. 그동안 우리는 서울을 허물기에만 바빴습니다.” 서촌 성벽 귀퉁이에서 만난 백범 서대문에서 서소문 사이 도성을 기대고 남북으로 길게 형성된 마을의 이름은 서촌(西村). 현재 옥인동 일대를 일컬어 서촌이라 부르지만 전우용 교수는 “엄밀히 말해 그곳은 하급관리들이 모여 살았던 향촌(鄕村)”이었다고 정정한다. 역사를 조목조목 꿰뚫고 있는 전우용 교수로부터 그동안 몰랐던 이야기를 듣기 위해 20여 명의 본지 독자들이 모였다. 브라보마이라이프가 매월 진행하는 ‘BRAVO TOUR’여행 그 첫 번째로 서울 역사기행을 택했고 2016년을 이틀 앞둔 지난해 12월 30일, 그와 함께 생생한 역사의 현장을 더듬어 보기로 했다. “서울의 성곽 주변 서북촌 일대엔 문화재가 많아 전쟁 당시 폭격을 피할 수 있었고 청와대가 들어선 뒤에는 엄격한 개발제한을 받아야 했습니다. 덕분에 대부분의 한옥이 파괴된 와중에도 이곳만큼은 일제시대 당시 지은 근대 한옥을 비롯해 옛 건물을 보존할 수 있었죠.” 물론 거주민들의 상실감은 무척 컸을 것이다. 고층빌딩이 올라가고 아파트 투기가 서울 온 장안을 떠들썩하게 했던 시대에 서촌 일대는 개발에서 제외된 열외자들이 촘촘하게 은거하는 도심 속 버려진 유물로서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다. 일행의 발길이 처음 닿은 경교장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경교장(京橋莊)의 원래 이름은 일본식 한자인 죽첨장(竹添莊)입니다. 일제시대에 금광으로 부호가 된 최창학이 일본이 패망한 뒤 친일 행적을 만회해보겠다며 임시정부 요인들에게 당시 초현대식 저택인 이 집을 헌납했어요. 김구 선생은 바로 아래 흐르는 만초천에 놓인 다리인 경교를 따 이 집의 이름을 바꾸게 되었고, 그 후 경교장은 전쟁을 거치면서 대부분 파괴되었고 몇 해 전에서야 당시 이곳에 출입했던 사람들의 기억을 되살려 복원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경교장에는 안두희의 흉탄에 저격당했던 순간 백범 선생이 입었던 선혈 낭자한 옷가지가 벽에 걸려 있다. 일제 패망과 함께 보란 듯이 환향하여 민족반역자들을 단죄하고 대한민국 정부수반으로 추대 받았어야 마땅한 그를 서촌의 그늘진 성벽 귀퉁이에서야 만날 수 있다는 사실에 일행은 안타까운 탄식만을 남겨둔 채 다시금 길을 나선다. 악덕 장사꾼 쁘레샹 집터에선 씁쓸함이 경교장을 시작으로 한양도성을 따라 오르는 길, 학자의 입에선 숱한 역사의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반쯤 폐허의 모습으로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간신히 철거를 모면한 유한양행 터를 지나 기초가 통째로 뽑혀진 채 속살을 그대로 드러낸 프랑스 영사 안토니 쁘레샹(Paul A. Plaisan)의 집터 앞에서 일행은 100년 전 옛날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1901년 조선에 온 쁘레샹은 서울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상품이 땔감이란 것을 알아차리곤 사업에 뛰어듭니다. 땔감을 잔뜩 지고 무악재를 넘어오는 나무꾼들에게 쁘레샹은 커피를 한 잔씩 대접하는 로비를 펼치는데요. 달콤한 커피 맛에 단단히 중독된 나무꾼들이 하나둘씩 쁘레샹과 거래를 트면서 쁘레샹은 장안의 유통채널을 모조리 접수하게 되죠. 조선 최초의 땔감 브로커가 탄생한 배경입니다.” 쁘레샹의 영악함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내친김에 이름을 ‘부가 들어오는 상서로움’ 이라는 뜻의 부래상(富來祥)으로 개명한 후 본격적인 재산 불리기에 나섰다. “쁘레샹은 이후 부래상 상회를 열어 화란국 명예영사라는 번쩍번쩍한 금박 간판을 내걸고 장사를 시작합니다. 만주사변을 계기로 모든 물품이 수입 금지된 틈을 타 값싼 국산 화장품을 대량으로 구입해 포장지를 뜯고 프랑스 라벨을 붙여 귀부인들을 상대로 폭리를 취하게 되죠. 하지만 곧 철창신세를 지고 맙니다.” 훗날 쁘레샹은 땔감 브로커와 짝퉁 사건을 계기로 역사가들로부터 두 번이나 ‘조선 최초’라는 수식어를 부여받는 영광(?)을 누린다. 그런 쁘레샹의 흔적도 이제는 뿌리가 뽑혀나간 부래상 상회와 함께 연기처럼 사라지고 말았으니 조만간 역사의 흔적을 간직한 서촌 전체가 돈의문 뉴타운 개발로 언제 갈아엎어질지 모를 일이다. 성벽아래 곳곳엔 외국인들 양옥 흔적 “재미있는 것은 성곽주변에 유독 외국인들이 집을 많이 짓고 살았다는 점이에요. 죽은 사람이 산다는 이유로 사찰 외에 산에다 집을 짓지 않았던 풍습과 더불어 왕궁보다 높은 곳에 건물을 지을 수 없다는 세속적인 제약에 따라 우리 조상들은 절대로 높은 곳에 집을 짓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석조건축 위주인 서양에선 높은 언덕이나 성곽에 기대어 집 짓는 것을 선호했기 때문에 지금도 성곽 곳곳에 외인들의 흔적이 남아 있어요.” 조선 최초의 교회인 정동교회는 성벽에 기대어 첨탑을 세웠고, 정동교회를 지은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는 아예 성벽을 자기 집 울타리로 이용하는 배짱을 보였다. 도성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이유로 나무로 만든 사대부집 한옥들이 예외 없이 소실된 반면, 도성을 끼고 벽돌로 쌓은 외인들의 집은 오늘날에도 건재하다. 홍난파 가옥 역시 그러한 운을 타고났다. “이 집은 독일 영사관으로 사용되어 오다가 홍난파 선생이 돌아가시기 직전 5년 동안 기거하신 곳입니다. 만약 이곳이 강남이나 광화문에 있었다면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을 거예요. 성벽 밑 후미진 곳에 있어서 그나마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것이죠.” 홍난파 가옥을 지키는 안내자의 설명에 일행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이곳저곳을 둘러본다. 홍난파 선생이 사용했던 침대에선 창밖으로 인왕산이 훤히 보인다고 하니, 선생께선 아마도 창밖에서 들어오는 햇살에 잠을 깨어 악상을 떠올리며 하루를 시작했을 것이다. 서촌의 좁은 골목길을 수백 번도 넘게 올랐을 전우용 교수가 걸음을 재촉하더니 붉은색 벽돌로 지은 2층 양옥집 앞에서 멈추었다. 3·1운동을 외국에 타전해 독립유공자로 인정받고 있는 UPI 특파원인 앨버트 타일러가 기거했던 딜쿠샤다. “일본과 미국이 전쟁을 벌이면서 앨버트 테일러는 미국의 스파이로 몰려 강제로 추방됩니다. 일본인 손으로 넘어간 딜쿠샤는 해방과 함께 적산가옥을 차지하려는 치열한 싸움에 휘말려 불법으로 점거당한 채 지금도 17세대가 거주하는 무허가 주택 신세로 전락해있습니다.” 내력을 알 길이 없어 한 세기 동안이나 방치됐던 딜쿠샤는 2006년 앨버트의 아들인 브루스가 한국을 방문하면서 숨겨진 이야기들이 낱낱이 밝혀지게 된다. 지난해 늦게나마 서울시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고 기획재정부 소유로 법적 절차를 온전히 마쳤음에도 딜쿠샤는 여전히 버려진 유물 그 이상의 대우를 받지 못하는 처지다. 파워블로거 김민영씨도 안타까워하기는 마찬가지다. “불법으로 점거된 채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우리가 많이 안다고는 하지만 실상 모르는 것이 너무나 많아요. 당장 돌아가서 딜쿠샤에 대해 더욱 공부해야겠어요.” 누군가에 의해 자물쇠로 겹겹이 둘러쳐진 딜쿠샤를 뒤로 하고 일행은 종착지인 경희궁을 향해 무겁게 발길을 돌린다. 유네스코 문화유산 등재를 의식해 복원을 마친 경희궁 근처의 성벽은 어딘지 모르게 어색하고 불편하다. 육중한 중장비를 동원해 네모반듯하게 쌓아 올린 성벽이 전우용 교수의 눈에도 탐탁지 않아 보인다. 문화재, 방치와 보존 사이에서 길을 잃어 “18킬로미터에 이르는 한양 도성길을 모두 중장비로 신속하게 복원했습니다. 문화재라 함은 사람 손을 통해 창조되어야 마땅할 텐데 이런 식으로 유네스코에 등재한들 어떤 의미가 있는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어요. 과거 서울올림픽을 개최했을 때 개최 조건이 서울시가 운영하는 미술관을 보유하는 것이었습니다. 경희궁 앞에 부랴부랴 시립미술관을 짓고 역사박물관을 세운 것도 그런 맥락으로 볼 수 있죠. 오늘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2016년에도 건승하길 빌겠습니다.” 결론은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갔다. 무엇이든 허물기 바빴던 과거, 그리고 허문 것을 재빨리 일으켜 세우려는 현재의 어리석음이 반복되면서 서울은 종잡을 수 없는 의문의 도시가 되고 말았다. ‘버려짐’과 ‘방치’가 곧 ‘보존’이요 ‘문화재’라는 아이러니한 등식 앞에 역사도시의 면모가 견고한 시멘트바닥에 눌려 신음하고 있다. 늦었지만 해답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본디 역사란 시작하고 흘러야 하는 법, 더 이상 허물지 않고 그저 가만히 내버려두는 것이 역사도시를 감상하는 현명한 방법이 아니던가.
- 2016-03-03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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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 투어] 스토리가 있는 여행 브라보 투어
- 굽이굽이 꺾인 골목길을 따라 무너져 내린 성곽 끝자락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일행의 시선을 붙든 건 음습한 기운 속에서 마지막 숨을 토해내는 작고 허름한 벽돌집. 그렇게 한 세기 이상을 숨죽여 지내온 과거의 시간은 세월의 모진 풍파를 피해 몸을 잔뜩 웅크린 채 그 흔적이나마 보전을 허락받을 수 있었다. 잊혀진 역사를 더듬어 떠나는 여정, 촌철살인의 역사학자 전우용 교수가 동반자로 나섰다. “흔히 서울 앞에 ‘역사도시’라는 수식어가 붙습니다. 말로는 동의하지만 왠지 마음 한구석에선 납득이 가지 않는데요. 여러분은 수긍하십니까?” 전우용 교수가 던진 화두에 강의실에 모인 사람들의 표정이 아리송해지기 시작한다. 조선 600년 역사와 더불어 고려, 삼국도 모자라 상고시대를 거슬러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민족의 후예들에게 서울이 역사도시로서의 면모가 부족하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그것도 조선왕조의 상징인 경희궁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정동 경향신문사 사옥에서 말이다. “옆 동네 사람들이 재산권을 지키기 위해 문화재를 파괴한다면 여러분은 분명 그들을 비난할 겁니다. 하지만 우리 동네에 유적이 발견되고 그것으로 인해 개발이 지연되어 집값이 떨어진다면 여러분들 역시 문화재 파괴범이 될 수밖에 없을 거예요. 그동안 우리는 서울을 허물기에만 바빴습니다.” 서촌 성벽 귀퉁이에서 만난 백범 서대문에서 서소문 사이 도성을 기대고 남북으로 길게 형성된 마을의 이름은 서촌(西村). 현재 옥인동 일대를 일컬어 서촌이라 부르지만 전우용 교수는 “엄밀히 말해 그곳은 하급관리들이 모여 살았던 향촌(鄕村)”이었다고 정정한다. 역사를 조목조목 꿰뚫고 있는 전우용 교수로부터 그동안 몰랐던 이야기를 듣기 위해 20여 명의 본지 독자들이 모였다. 브라보마이라이프가 매월 진행하는 ‘BRAVO TOUR’여행 그 첫 번째로 서울 역사기행을 택했고 2016년을 이틀 앞둔 지난해 12월 30일, 그와 함께 생생한 역사의 현장을 더듬어 보기로 했다. “서울의 성곽 주변 서북촌 일대엔 문화재가 많아 전쟁 당시 폭격을 피할 수 있었고 청와대가 들어선 뒤에는 엄격한 개발제한을 받아야 했습니다. 덕분에 대부분의 한옥이 파괴된 와중에도 이곳만큼은 일제시대 당시 지은 근대 한옥을 비롯해 옛 건물을 보존할 수 있었죠.” 물론 거주민들의 상실감은 무척 컸을 것이다. 고층빌딩이 올라가고 아파트 투기가 서울 온 장안을 떠들썩하게 했던 시대에 서촌 일대는 개발에서 제외된 열외자들이 촘촘하게 은거하는 도심 속 버려진 유물로서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다. 일행의 발길이 처음 닿은 경교장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경교장(京橋莊)의 원래 이름은 일본식 한자인 죽첨장(竹添莊)입니다. 일제시대에 금광으로 부호가 된 최창학이 일본이 패망한 뒤 친일 행적을 만회해보겠다며 임시정부 요인들에게 당시 초현대식 저택인 이 집을 헌납했어요. 김구 선생은 바로 아래 흐르는 만초천에 놓인 다리인 경교를 따 이 집의 이름을 바꾸게 되었고, 그 후 경교장은 전쟁을 거치면서 대부분 파괴되었고 몇 해 전에서야 당시 이곳에 출입했던 사람들의 기억을 되살려 복원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경교장에는 안두희의 흉탄에 저격당했던 순간 백범 선생이 입었던 선혈 낭자한 옷가지가 벽에 걸려 있다. 일제 패망과 함께 보란 듯이 환향하여 민족반역자들을 단죄하고 대한민국 정부수반으로 추대 받았어야 마땅한 그를 서촌의 그늘진 성벽 귀퉁이에서야 만날 수 있다는 사실에 일행은 안타까운 탄식만을 남겨둔 채 다시금 길을 나선다. 악덕 장사꾼 쁘레샹 집터에선 씁쓸함이 경교장을 시작으로 한양도성을 따라 오르는 길, 학자의 입에선 숱한 역사의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반쯤 폐허의 모습으로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간신히 철거를 모면한 유한양행 터를 지나 기초가 통째로 뽑혀진 채 속살을 그대로 드러낸 프랑스 영사 안토니 쁘레샹(Paul A. Plaisan)의 집터 앞에서 일행은 100년 전 옛날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1901년 조선에 온 쁘레샹은 서울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상품이 땔감이란 것을 알아차리곤 사업에 뛰어듭니다. 땔감을 잔뜩 지고 무악재를 넘어오는 나무꾼들에게 쁘레샹은 커피를 한 잔씩 대접하는 로비를 펼치는데요. 달콤한 커피 맛에 단단히 중독된 나무꾼들이 하나둘씩 쁘레샹과 거래를 트면서 쁘레샹은 장안의 유통채널을 모조리 접수하게 되죠. 조선 최초의 땔감 브로커가 탄생한 배경입니다.” 쁘레샹의 영악함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내친김에 이름을 ‘부가 들어오는 상서로움’ 이라는 뜻의 부래상(富來祥)으로 개명한 후 본격적인 재산 불리기에 나섰다. “쁘레샹은 이후 부래상 상회를 열어 화란국 명예영사라는 번쩍번쩍한 금박 간판을 내걸고 장사를 시작합니다. 만주사변을 계기로 모든 물품이 수입 금지된 틈을 타 값싼 국산 화장품을 대량으로 구입해 포장지를 뜯고 프랑스 라벨을 붙여 귀부인들을 상대로 폭리를 취하게 되죠. 하지만 곧 철창신세를 지고 맙니다.” 훗날 쁘레샹은 땔감 브로커와 짝퉁 사건을 계기로 역사가들로부터 두 번이나 ‘조선 최초’라는 수식어를 부여받는 영광(?)을 누린다. 그런 쁘레샹의 흔적도 이제는 뿌리가 뽑혀나간 부래상 상회와 함께 연기처럼 사라지고 말았으니 조만간 역사의 흔적을 간직한 서촌 전체가 돈의문 뉴타운 개발로 언제 갈아엎어질지 모를 일이다. 성벽아래 곳곳엔 외국인들 양옥 흔적 “재미있는 것은 성곽주변에 유독 외국인들이 집을 많이 짓고 살았다는 점이에요. 죽은 사람이 산다는 이유로 사찰 외에 산에다 집을 짓지 않았던 풍습과 더불어 왕궁보다 높은 곳에 건물을 지을 수 없다는 세속적인 제약에 따라 우리 조상들은 절대로 높은 곳에 집을 짓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석조건축 위주인 서양에선 높은 언덕이나 성곽에 기대어 집 짓는 것을 선호했기 때문에 지금도 성곽 곳곳에 외인들의 흔적이 남아 있어요.” 조선 최초의 교회인 정동교회는 성벽에 기대어 첨탑을 세웠고, 정동교회를 지은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는 아예 성벽을 자기 집 울타리로 이용하는 배짱을 보였다. 도성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이유로 나무로 만든 사대부집 한옥들이 예외 없이 소실된 반면, 도성을 끼고 벽돌로 쌓은 외인들의 집은 오늘날에도 건재하다. 홍난파 가옥 역시 그러한 운을 타고났다. “이 집은 독일 영사관으로 사용되어 오다가 홍난파 선생이 돌아가시기 직전 5년 동안 기거하신 곳입니다. 만약 이곳이 강남이나 광화문에 있었다면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을 거예요. 성벽 밑 후미진 곳에 있어서 그나마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것이죠.” 홍난파 가옥을 지키는 안내자의 설명에 일행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이곳저곳을 둘러본다. 홍난파 선생이 사용했던 침대에선 창밖으로 인왕산이 훤히 보인다고 하니, 선생께선 아마도 창밖에서 들어오는 햇살에 잠을 깨어 악상을 떠올리며 하루를 시작했을 것이다. 서촌의 좁은 골목길을 수백 번도 넘게 올랐을 전우용 교수가 걸음을 재촉하더니 붉은색 벽돌로 지은 2층 양옥집 앞에서 멈추었다. 3·1운동을 외국에 타전해 독립유공자로 인정받고 있는 UPI 특파원인 앨버트 타일러가 기거했던 딜쿠샤다. “일본과 미국이 전쟁을 벌이면서 앨버트 테일러는 미국의 스파이로 몰려 강제로 추방됩니다. 일본인 손으로 넘어간 딜쿠샤는 해방과 함께 적산가옥을 차지하려는 치열한 싸움에 휘말려 불법으로 점거당한 채 지금도 17세대가 거주하는 무허가 주택 신세로 전락해있습니다.” 내력을 알 길이 없어 한 세기 동안이나 방치됐던 딜쿠샤는 2006년 앨버트의 아들인 브루스가 한국을 방문하면서 숨겨진 이야기들이 낱낱이 밝혀지게 된다. 지난해 늦게나마 서울시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고 기획재정부 소유로 법적 절차를 온전히 마쳤음에도 딜쿠샤는 여전히 버려진 유물 그 이상의 대우를 받지 못하는 처지다. 파워블로거 김민영씨도 안타까워하기는 마찬가지다. “불법으로 점거된 채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우리가 많이 안다고는 하지만 실상 모르는 것이 너무나 많아요. 당장 돌아가서 딜쿠샤에 대해 더욱 공부해야겠어요.” 누군가에 의해 자물쇠로 겹겹이 둘러쳐진 딜쿠샤를 뒤로 하고 일행은 종착지인 경희궁을 향해 무겁게 발길을 돌린다. 유네스코 문화유산 등재를 의식해 복원을 마친 경희궁 근처의 성벽은 어딘지 모르게 어색하고 불편하다. 육중한 중장비를 동원해 네모반듯하게 쌓아 올린 성벽이 전우용 교수의 눈에도 탐탁지 않아 보인다. 문화재, 방치와 보존 사이에서 길을 잃어 “18킬로미터에 이르는 한양 도성길을 모두 중장비로 신속하게 복원했습니다. 문화재라 함은 사람 손을 통해 창조되어야 마땅할 텐데 이런 식으로 유네스코에 등재한들 어떤 의미가 있는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어요. 과거 서울올림픽을 개최했을 때 개최 조건이 서울시가 운영하는 미술관을 보유하는 것이었습니다. 경희궁 앞에 부랴부랴 시립미술관을 짓고 역사박물관을 세운 것도 그런 맥락으로 볼 수 있죠. 오늘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2016년에도 건승하길 빌겠습니다.” 결론은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갔다. 무엇이든 허물기 바빴던 과거, 그리고 허문 것을 재빨리 일으켜 세우려는 현재의 어리석음이 반복되면서 서울은 종잡을 수 없는 의문의 도시가 되고 말았다. ‘버려짐’과 ‘방치’가 곧 ‘보존’이요 ‘문화재’라는 아이러니한 등식 앞에 역사도시의 면모가 견고한 시멘트바닥에 눌려 신음하고 있다. 늦었지만 해답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본디 역사란 시작하고 흘러야 하는 법, 더 이상 허물지 않고 그저 가만히 내버려두는 것이 역사도시를 감상하는 현명한 방법이 아니던가. 글 임도현 프리랜서 여행 기자
- 2016-02-12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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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사와 함께하는 북 人북] 경희대 전호근 교수, 시련 속에서만 얻을 수 있는 인생의 보물
- 청소년기부터 클래식 음악을 좋아했고 베토벤의 곡을 즐겨 들었다는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전호근(田好根·54) 교수. 10년 전, 메이너드 솔로몬이 쓴 베토벤 평전 은 자연스레 그의 손에 들렸다. 처음 책을 접했을 당시에는 평전 글쓰기의 모범이라 생각할 만큼 저자의 분석력에 감탄하며 읽었다. 그때는 자료를 읽어내듯 눈으로 읽고 머리로 기억했는데, 그는 최근에 들어서야 같은 책을 마음으로 읽게 됐다. 지난해 여름, 국제학술대회 참가차 오스트리아 빈에 다녀오고부터다. 글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베토벤의 생가와 묘소를 둘러본 그는 한국에 돌아와 다시 을 꺼내 들었다. 과거 글쓰기를 염두에 두고 읽었을 때와는 다르게 감성적으로 느끼며 읽게 된 것. 그러자 베토벤의 삶이 보이기 시작했고, 인간 베토벤을 이해할 수 있었다. “베토벤이 남긴 작품이 총 135곡이에요. 거의 모든 곡을 샅샅이 신물이 날 정도로 들었죠. 그렇게 익숙한 멜로디가 빈에 다녀오고 다시 이 책을 읽고 들으니 새롭게 들리는 거예요. 지식을 많이 알게 돼서 다르게 들렸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음악에 접근하는 감수성의 차이가 작용했던 것 같아요. 베토벤의 삶을 더 이해하게 되면서 음악도 좀 더 깊은 수준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 거죠.” 많은 사람이 베토벤의 음악적 재능을 인정하고 주목하지만, 전 교수는 베토벤의 인간적 면모에 관심을 기울였다. 1802년에 남긴 베토벤의 유서는 철학을 전공하는 그에게도 큰 깨달음을 주었다. “유서를 보면 베토벤처럼 절대적인 재능을 가진 사람조차도 인간적으로 인정받고 싶어 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어요. 자신이 인격적으로 얼마나 노력했는가를 끊임없이 강조하죠. 나 같은 철학자는 부당한 권력과의 관계를 어떻게 가지고 갈 것인가, 자기 수양은 제대로 됐는가 등으로 평가를 하는데 그런 까다로운 기준을 굳이 베토벤 같은 예술가에게 적용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베토벤의 유서를 읽고 생각을 바꿨어요. 아, 모든 사람은 인격적으로 인정받을 때 행복할 수 있구나. 아무리 권력과 부를 쌓아도 인격적으로 훌륭하다고 평가받지 못하면 불행한 거구나. 그게 인간의 보편적 욕구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어요.” 베토벤은 서른두 살에 유서를 썼지만, 18세기 당시 평균수명이 30대였던 것을 감안하면 중년이나 다름없다. 30세 무렵부터 귀가 먹기 시작했기에, 음악가로서 중년의 베토벤은 자살을 결심하고 유서를 남긴 것이다. 전 교수는 위기를 지나 더욱 뛰어난 작품을 남긴 베토벤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며 이 책을 소개한 이유를 말했다. “중·장년이 되면 기회도 오지만 어려움도 많이 찾아오잖아요. 베토벤은 작곡가인데 귀가 먹어가니 심적으로도 힘들었고, 통증도 심각했죠. 그러한 시련을 오히려 자신의 창작력을 불태우는 원동력으로 삼거든요. 구애가 실패로 돌아가도 걸작으로 나오고, 귀가 먹어가는 고통이 있어도 그런 어려움이 뛰어난 작품으로 생산하죠. 그런 걸 보면 고난이 다가왔을 때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를 베토벤이 잘 보여준다고 생각해서 이 책을 추천하게 됐어요.” 추운 계절의 소나무를 칭찬하는 까닭 전 교수는 공맹(孔孟) 유학과 조선 성리학을 전공하고, 16세기 조선 성리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지난해 원효부터 장일순까지 한국 지성인 35명의 철학을 담아낸 를 펴냈다. 그런 전 교수가 베토벤을 보면 떠오르는 한국의 역사적 인물은 누구일까? 그는 단연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라 답했다. 글쓰기와 그림 그리기뿐만 아니라 경학과 실학 등의 다양한 학문까지 아우르며 학예일치의 경지에 오른 추사, 절대적인 명성을 얻은 점 또한 베토벤과 유사했다. “베토벤이 몸에 병이 생기며 찾아온 내적 고통을 앓았다면, 추사는 역적으로 몰려 유배를 갔으니 외부에서 온 고난에 시달린 셈이죠. 베토벤이 고난을 이겨내고 위대한 곡들을 작곡했듯, 추사 역시 세한도 같은 작품을 탄생시켰어요.” 전 교수는 그들의 삶을 통해 시련의 가치에 대해 이야기한다. “추사는 시련을 겪으며 우정을 얻게 됐죠. 유배를 가서 정치적 생명이 다하고 나니 가까웠던 친구들이 하나둘씩 연이 끊기게 되거든요. 그런데 이상적(李尙迪, 1804~1865)이라는 제자는 그를 이전과똑같이 대하고 더욱 살뜰히 챙기죠. 고난의 시절이 있었지만 그를 통해 우정과 이상적의 인격을 확인할 수 있었던 거예요.” 그때 이상적의 우정에 감동해 추사가 남긴 작품이 ‘세한도’이다. 그는 세한도에 공자의 말을 덧붙여 마음을 전하는데, 내용은 이러하다. ‘세한연후(歲寒然後) 지송백지후조(知松柏之後凋)’, 추운 계절이 오고 다른 나무들이 시든 후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여전히 푸르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대가 나를 대하는 것은 이전에도 더함이 없고, 이후에도 덜함이 없다. 나의 곤경 이전 그대는 칭찬할 만한 것이 없지만, 이후의 그대는 성인의 칭찬을 들을 만하지 않겠는가? “삶이 평온하면 그 사람의 진정한 인격을 발견하기 힘들죠. 인격이라는 것은 사람 사이의 신뢰이기도 한데, 역경이 없으면 서로 간에 그런 것을 확인할 방법이 없으니까요. 소나무가 푸르렀음을 알게 해준 추운 계절처럼, 인간에게 고난의 시간은 깨달음을 주죠.” 앞만 보고 달려온 중년, 이제는 나를 바라볼 시간 흔히들 요즘 중·장년들을 말할 때, 앞만 보고 달려온 세대라는 표현을 쓰곤 한다. 그만큼 열심히, 진취적으로 살았다는 의미가 있지만, 전 교수는 이제 자신을 바라봐야 할 때라고 조언했다. “앞만 보고 달린다는 것은 성취, 다른 말로 욕망입니다. 돌아볼 줄 모른다는 거니까요. 그렇게 되면 자기 내면과 대화할 기회가 적은 거죠. 나이가 들고 어떠한 상실감을 느꼈을 때, 자신의 내면과 대화를 하면서 그동안 얼마나 많은 것을 잃었는지 자각하면 자연히 겸손해지거든요. 잃어버린 게 많을수록 삶의 무게는 높아지고, 고통이 클수록 내면은 더 단단해지죠. 그러니 어느 순간 공허한 기분이 들었다면 그나마 다행인 거예요. 자신을 마주하고 대화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으니까요.” 전 교수는 지난 삶을 돌아보고, 자신의 내면을 돌볼 줄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며 이상을 지키는 노력 또한 필요하다고 했다. “젊어서든 나이가 들어서든 근본적인 철학이 변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애초부터 철학사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봐도 중요한 비중을 두고 기술되지 않은 사람들은 젊은 시절부터 자신을 지키는 데 실패한 사람들이죠. 권력이나 출세 등의 외압에도 끝까지 자기를 지키는 사람들이 있는데, 지킨다고 하는 게 반드시 사회적 지위를 기준으로 말하는 것은 아니에요. 젊은 시절에 가졌던 이상, 그 이상을 포기하거나 모독하지 않고 끝까지 유지하는 게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것을 바꾸고 변절시키려고 외부에서 강요를 하겠지만 어떻게 지키는가가 자기 수양이죠. 결국 그런 신념이나 이상을 잘 지키는 게 성공한 삶이라고 생각해요.”
- 2016-01-12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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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가 만난 사람] 조용경&오선희 부부, 사진과 놀다
- 은퇴 후 늘어난 시간에 취미생활을 하면 상실감 해소와 부부 관계 개선에 좋다고들 하지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그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닌 일을 훌륭하게 해내고 있는 남편 조용경(趙庸耿·64), 아내 오선희(62·吳仙嬉) 부부는 야생화 사진과 새 사진을 찍으러 국내외 산과 강을 찾아다니며 더없이 풍요롭고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사진과 함께하는 은퇴 후 삶의 즐거움, 그리고 부부가 함께 누리는 행복의 비결을 살펴봤다. 글 김영순 기자 kys0701@etoday.co.kr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강원도 춘천에 있는 김유정문학관을 가기 전에 있는 삼포교차로에서 좌회전을 하자마자 산으로 둘러싸인 아담한 전원주택이 나타난다. 건설업계에서 30년 동안 활동했던 조용경 전 포스코엔지니어링 부회장과 아내 오선희 부부의 집이다. “부부는 시소를 함께 타는 것이죠. 내가 올라가면 다음엔 아내를 띄워줘야 하잖아요. 내 과거를 버리고 나니 조금은 편해지더군요. 제가 내려놓는 훈련을 하는 동안 적응의 시간을 기다려주는 아내가 있어 고맙고 든든합니다.” 부부는 시소를 함께 타는 사이 새 전문 사진작가이기도 한 아내인 오선희씨처럼 사진으로 은퇴 후 새로운 삶을 유유자적 누리고 있는 조용경씨에게 요즘 삶의 에너지와 영감을 주는 것은 두 명의 손주들이다. 그는 라는 제목의 에세이를 블로그에 올리면서 손주들을 위해 할아버지의 추억을 기록하는 일도 하고 있다. 에세이는 세상 그 어떤 순간보다 행복한 찰나를 담아낸 가족사진, 손자 사진들과 글로 만들어져 큰 울림과 흐뭇함을 선사하고 있다. 조용경씨는 이를 손주에게 할아버지가 남겨주는 영원한 선물이라고 믿으며 훗날 가족 자료로 남기는 것을 지상 목표로 삼고 있다고 한다. 조용경, 오선희 부부는 손주들과 함께 자주 시간을 보내며 사회활동에 바쁜 부모들이 채워줄 수 없는 부분을 담당해왔다고 생각한다. 나이를 먹어가며 가족 내에서도, 사회에서도 새롭게 역할을 정립해야 하는 입장에 처하게 됐는데, 조부모로서의 활동이 삶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b>아내와 손잡고 산과 강을 휘젓고 조용경씨는 1993년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대학교에 머물 때 6개월 동안 사진 아카데미를 수강했다. 주로 실기 수업이었는데, 학교에서 20㎞ 정도 떨어진 베니스 비치에 가서 망원렌즈로 사람을 촬영하곤 했다고 한다. 마리화나를 피우는 사람들로 붐비는 곳이었는데 그때 촬영한 사진이 학교 캘린더에 실려 작품료로 25달러를 받게 됐다. 사진가로서 프로페셔널이 될 수도 있었던 인생의 한 분기점이었으리라. 그가 피사체 가운데서도 유독 야생화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꽃을 좋아하는 아내의 영향이 컸다. 어느 날, 아내가 가꾼 마당의 꽃들이 비로소 그의 눈에 들어왔다. 꽃에 사진기를 들이대며 촬영하던 그는 어느새 아내의 손을 잡고 꽃을 찾아 전국 곳곳을 다니기 시작했다. “강원도 정선 석회암 지대의 동강할미꽃이나 바닷가 바위틈에 피는 해국에서 놀라운 아름다움을 발견했어요. 흙 한 줌 안 되는 곳에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올려 꽃을 피우는 동강할미꽃이나 절절 끓는 바위 위에서 염분과 비바람에 시달리며 꿋꿋하게 견디는 해국을 보면 감동스럽지요. 그 모습을 보면서 왜 나만 힘들다고 불평해 왔는지 싶더군요.” 꽃과 눈높이를 맞추자 지나온 세월이 보였다 그는 하기 싫은 작업을 억지로 하면 진정한 작가가 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자신이 원하는 걸 쫓는 우직함 역시 사진을 하는 작가가 갖춰야 할 덕목 중 하나라고 확신하게 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꽃을 찍기 위해 자신이 찍을 꽃에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해주기로 했다. “꽃을 제대로 찍으려고 꽃과 대화를 했어요. 눈높이를 맞췄죠. 그런데 이름도 모르는 야생화를 찍기 위해 이렇듯 공을 들이는데, 그간 내가 회사 직원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그만한 정성을 갖고 대했는지 반성이 되더군요. 사진을 하다가 사람 소중한 것을 배웠어요.” 새치름하게 고개를 떨구고 있는 오대산의 흰금강초롱꽃, 강원도 매봉산의 솔나리, 강원도 홍천의 깽깽이풀, 선운사의 꽃무릇, 한라산의 노란제비꽃, 태백산의 참기생꽃, 함백산의 투구꽃…. 우리나라 자연 곳곳에 숨어 있는 들꽃을 찾아내 가장 아름다운 자태를 포착해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한 꽃을 200장, 300장씩 찍어 그중 최고의 컷을 뽑아낸다. 그래서 좋은 작품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는 수많은 노력과 수고를 필요로 한다. 옆에서 아내인 오선희씨가 그의 말을 거들었다. “꿈이 있다면 알래스카에 가서 흰 올빼미를 찍고 싶어요. 기다리고 기다리며 생명과 교감하는 수많은 작업을 통해 나를 찾는 시간을 갖게 됐어요. 찍으면 찍을수록 자아가 풍성해지는 느낌이 듭니다.” 흔히 ‘뱁새’로 불리는 붉은머리오목눈이. 나뭇잎 밑에 숨어 까만 눈동자를 빛내는 모습이 사랑스럽다. 덕소에서 촬영한 오색딱따구리의 색도 곱다. 오선희씨는 “돌아보지 않아 그렇지 우리 주변에 예쁜 새들이 많다”고 했다. 이 부부에게 시대가 변하고 나이를 먹는다는 건 크게 의미가 없었다. 사진 가방을 메고 들로 산으로 쏘다니는 그들은 오히려 상상력과 호기심이 나날이 커져만 간다고 했다. 야생화 사진에서 기다리는 삶을 배웠다 나이를 먹어 사진을 하니 좋은 점이 무엇일까? 그는 우선 주말마다 산으로 들로 헤매고 다니게 되니까 운동량이 적지 않아서 자연스럽게 운동이 된다는 점을 꼽았다. “그리고 카메라를 메고 나가면 그 순간부터 세상의 모든 스트레스를 깡그리 잊게 된다는 점이 참 좋습니다. 무엇보다도 좋은 건 인내를 배우게 된다는 점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어느 정도는 다 ‘빨리빨리병’에 걸려 있는데, 야생화 사진은 기다릴 줄 모르는 사람은 절대로 좋은 작품을 만들 수가 없거든요. 저도 그전에는 성격이 꽤 급한 사람이었는데, 스스로 생각해도 사람이 참 많이 됐다고 생각합니다.” 사진에 빠져 주말이면 몇 박 며칠 집을 비우는 부부들이다. “그러다 보니 며느리들이 우리를 보려면 미리 전화하고 와야 해요. 우리가 너무 바쁘거든요. 다른 부모들은 자주 왕래 안 해서 걱정인데 우리는 그런 걱정 없어요” 하며 오선희씨가 말을 덧붙였다. “아내와 함께하는 시간이 급격히 늘어났음에도 오히려 대화가 단절되는 경우가 있지요. 부부가 매일 비슷한 상황에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소재가 반복되거나 단답형으로 대답하게 되죠. 이렇게 은퇴 후 부부가 함께하는 시간은 늘었음에도 서로에게 집중하지 않으면, ‘침묵’으로 부부 사이의 골이 더 깊어질 수 있어요. 은퇴 후 더 이상 나눌 대화가 없는 무미건조한 부부가 되고 싶지 않다면 공동의 취미생활을 만들어 보는 것을 추천해봅니다.” 마지막까지 함께 하는 사람이 누군지 생각해보길 서로 많은 시간을 같이 다니다 보면 아무래도 대화의 기회도 많아지고, 더구나 같은 취미 활동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는 폭이 넓어지게 되기 마련이다. “부부가 함께 운동을 즐기거나 동호회에 가입하고, 악기를 배우거나 동물을 키우고, 봉사활동에 참여하면 자연스럽게 공통의 대화 주제가 생겨 관계 개선에 도움이 되거든요. 부부 사이에서도 서로를 배려하고 예의를 지키려 노력한다면 대화의 질도 높아지고 더욱 가까워질 수 있어요. 하루에 한 번씩 ‘고맙다’거나 ‘미안하다’, ‘사랑한다’ 등의 마음속에 있는 말을 밖으로 꺼내 표현해 보세요. 마지막까지 함께하는 사람이 누군지 생각해보세요.” 말로 표현하지 않았을 때보다 속마음을 표현했을 때 부부의 관계가 더욱 가까워진다고 말하는 아내 오선희씨의 말 속에는 뼈가 숨어 있었다. 이들 부부에게도 늘 밝은 날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아내는 일생 동안 나의 허물과 부족함을 모두 받아주었다”라고 털어놓는 조용경씨의 말처럼 아내에게 남편은 서운함을 많이 안긴 사람이기도 했다. 부부는 2005년, 들꽃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들꽃마을(www.flover-vill.net)’에 가입한 다음 주말마다 들꽃을 찾아 전국의 산과 들을 다니기 시작했다. 일반 회원 2000명, 정회원 100명이 활동하고 있는 들꽃마을 회원들과 어울려 다녔다. 그 때문에 좋아하던 골프는 포기했다. “들꽃을 만나러 다니면서 생명의 존귀함에 대해 더욱 많이 생각하게 됐다”고 그는 말한다. 날이 맑은지 흐린지, 빛의 방향이 어디에서 오는지에 따라 카메라에 포착되는 들꽃의 모습은 달라진다. 그는 답답하고 서글퍼질 때 주말마다 들꽃 촬영을 나가면 그동안의 답답함과 아득함을 잊고 마음이 정화되는 것 같다고 말한다. 세상이 참 아름답다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된다고. 평생을 홀로 있게 했던 아내와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진 것도 큰 보람이다. 현장에서는 각자 촬영에 몰두하느라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않지만, 이심전심 통하는 게 많아졌다고 한다. 그동안 개인전도 했고, 매년 연말에는 사진으로 달력을 만들어서 지인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했다. “은퇴한 우리들에게 ‘행복한 삶’의 제1조건은 ‘아내와 함께 화목하게 사는 삶’이 아닐까 합니다. 욕심이 많아 크든 작든, 삶의 목표를 설정하고 사는 것이 좋습니다. 아무래도 생활이 더 활기차죠. 은퇴 후 부부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의 공통점은 나누고 나쁜 점은 모른 척 덮어주는 것입니다.” 공감하면 행복해져요 “행복해지는 법을 찾은 것은 어느 날 갑자기 눈뜨자마자 엄청난 용기가 솟아나서도 아니고 누군가가 알려줘서도 아니었어요. 처음엔 단순히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손대기 시작한 사진, 아내를 위해 카메라 들어주기, 사진 올리기, 동호회 사이트 회원들과 커뮤니티 등등 이런 ‘딴짓’ 속에서 행복의 단서가 보였어요. 내가 무얼 할 때 즐겁고, 무얼 잘할 수 있는지를 정확하게 알아내는 과정 속에서 말이죠.” 그는 아름다운 야생화를 찍을 때처럼 아내와 같은 생각, 감정을 가지고 계획을 세워보려고 노력한다. 함께 목적지, 가는 방법, 하고 싶은 일 등을 적으며 여행 준비를 하는 것도 좋다. 그리고 출사를 다녀온 후 찍은 사진을 정리하고 느낌을 적는다. 두 부부는 이런 활동을 같이 하면서 공감의 폭이 넓어지며 행복을 느낄 수 있었다. 그 과정 속에는 서로를 아끼고 보듬으며 살아가는 부부의 진심이 오롯이 녹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인터뷰 내내 좋은 사진이 주는 감동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게 해줄, 그리고 ‘좋은 작품을 나누니 행복하다’라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를 깨닫게 해주는 부부였다. 큰 욕심 없이 나누면서 살고 싶다는 부부의 살아가는 모습을 함께 하고 나니 마음 한쪽에 뜨거움이 느껴진다. 단풍이 물들어 가는 가을의 어느 날, 큰 수확을 얻고 돌아가는 기분이다.
- 2015-12-22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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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꽃중년을 노크하다 PART2] 여전히 중년은 기회가 주어진 가능성의 시간
- 누군가의 엄마, 누군가의 아내, 누군가의 시어머니와 장모, 어느 회사의 CEO. 미혼 여성은 미혼 여성대로, 기혼 여성은 기혼 여성대로, 대한민국 중년여성들은 각자 주어진 책임과 의무감을 짊어지고 살아간다. 바쁜 일상 속에서 여자로서 가졌던 꿈과 정체성을 잃어가기도 한다. “나와 함께 늙어가자. 가장 좋을 때는 아직 오지 않았다. 인생의 후반, 그것을 위해 인생의 전반이 존재하나니.” 영국 시인 로버트 브라우닝이 쓴 시 ‘랍비, 벤 에즈라’의 한 구절이다. 통념과는 달리 인생의 절정기가 인생 후반에 온다는 이 구절은 나이 듦과 잘사는 법에 대해 고민하는 중년 여성들에게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꽃중년은 걸어온 길에 대한 자부심과 다른 길을 향한 갈망, 성취감과 상실감, 자신감과 회의, 체념과 희망, 흥분과 무력감 등이 동시에 찾아오는 시기다. 여전히 중년은 기회가 주어진 가능성의 시간이다. 한평생을 자식과 남편, 가정을 위해 살아온 사람의 열정과 역량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인간의 에너지는 샘물처럼 끊임없이 솟구치지 않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바퀴가 돌다 보면 어느 한쪽이 부서지고 닳게 마련. 무엇이 더 필요한지, 버릴 것은 없는지 구석구석 들여다봐야 한다. 그러기 위해 멈추고 쉬어야 한다. 자신을 내어주는 일과 내게 필요한 것을 재충전하는 것 사이에 균형을 잡아야 한다. 그 시기가 바로 50대, 60대, 70대인 것이다. 관계 맺기에 로그인을 잘해야 할 꽃중년 중년을 가장 위협하는 것은 ‘고립’이다. 나이가 들면서 여성들은 기존의 외부 인맥이 끊어진다. 개인적인 인맥을 유지하기에는 이사, 가사, 육아 등등 주어진 일들과 벌어지는 일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런 부분에 대하여 가족들에게서 보상을 받는 것도 아니다. 가족은 사람과 사람이 만나 꾸려지는 공동체다. 그러나 여성들은 어느 순간 사람은 간 데 없고 역할만 남은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엄마로서의 역할, 아내로서의 역할. 자신이 갖고 있는 개인적인 감정과 생각은 그 ‘역할’들 속에 파묻히게 되기 때문이다. 남편은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맺은 가장 소중한 인연(人緣) 나이 들수록 소수정예 친구와 좁고 깊게 사귄다. 부부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중요한 포인트다. 한 심리학 교수는 사람은 타인의 생각을 해석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시간이 지날수록, 높은 지위에 오를수록, 돈을 벌수록 남을 이해하는 능력이 저하된다고 한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할 이유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64세 최인순 씨는 “남편이 저와 대화하고 싶지 않은 이유는 제가 한 번 이야기를 시작하면 멈추지 않기 때문이라고 해요. 남편 입장에서 보면 제가 정말 쉬지 않고 말하는 것처럼 느낄 수 있고요. 게다가 남편은 제가 하는 모든 말을 ‘수다’라 칭하며 쓸데없는 시간 낭비라고 여기기도 해요” 라며 솔직한 심정을 드러낸다. 그렇다면 여성의 인간관계는 어디서부터 올까? 바로 ‘말’이다. 여성이 대화를 하는 가장 큰 목적은 ‘상대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데 있다. 자신의 의견을 상대방에게 전달하는 게 주목적인 남성과 달리, 여성은 내 기분을 상대방과 함께 나누고 공감을 얻기 위해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많다. 즉, 대화 자체를 즐기는 것이다. 여성들에게 수다 금지령을 내린다면 많은 우울증 환자가 발생할지도 모른다. 이런 이유로 여자가 말이 많다며 인신공격하는 남자는 더 이상 신사가 아니다. 어떤 남편들은 아내가 한창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그래서 결론이 뭔데?”라고 말을 끊는다. 길어지는 대화에 남편은 점점 지루해진 것이다. 하지만 여성은 용건만 간단히 말하기보다는 최근에 재미있고 슬픈 일 등 새로운 정보를 말하면서 상대방이 공감해주기를 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심정을 디테일하게 설명할 수밖에 없다. 더 잘 나누기 위해 여성은 대화를 시도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남성의 뇌는 이미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 남편은 결과가 중요하지만 아내는 과정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남녀의 대화 속도는 절대 같을 수가 없다. 아내는 남편에게 어떠한 결정을 해달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그저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아내는 많은 걸 바라는 게 아니다. 그냥 자신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거나 짧은 응대만 해줘도 아내는 행복해한다. 그렇다. 부부클릭 전문가 소장은 “여자는 감정에 매우 민감하다. 그래서 감정이 좋은 사람과의 관계와 그렇지 않은 사람과의 관계가 확연히 달라진다. 여자들이 남성에 비해 말을 많이 하는 것은 자신의 감정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파악하는 단계”라고 분석했다. 그래서 여자들에게 있어 수다는 단지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인간관계를 만들어가는 데 매우 중요한 수단인 것 같다. 남편 아닌 다른 인연과의 관계 맺기 가족 아닌 관계를 잇고 싶은 여성들은 사는 지역에서, 혹은 종교 단체에서의 만남을 통해 자신이 잃어버린 것들을 되살리려 하기도 한다. 하지만 어렸을 적에 만난 친구들이 평생 친구가 되는 이유는, 서로를 판단하지 않고 있는 모습을 솔직히 보여줄 수 있는 나이 때에 만나서 그걸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결혼하고 아이를 키우면서 만나게 된 인연들은 서로를 솔직하게 보여줄 수 없을 뿐더러, 보여준다 해도 상처를 받는 경우가 많다. 가족, 그리고 가족 외 관계에서 부딪히게 되는 이 모든 상황들은 중년 여성에게 고립감을 느끼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중년 여성이 관계를 확장하기 위한 첫 번째 방법은, 새로운 관계를 만드는 건 어려우니 현재 있는 관계, 그중에서 정말 내가 믿어볼 수 있는 관계 속에서 솔직하게 내 감정과 생각을 드러내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솔직하게 감정과 생각을 드러내지 못하니 자꾸 가리게 되고 서로 오해가 쌓이고 친해졌어도 왠지 공허하게 된다. 그걸 극복하기 위해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내라는 것이다. 그게 가능한 기존 관계 중에서는 가족, 그중에서 우선 배우자를 들 수 있다. 중년이 되면 남성들은 남성 호르몬이 내리막길이고 사회적으로 특별하게 잘나가는 사람이 아니면 사회가 아닌 가족과 보낼 기회가 많아질 수밖에 없어서 아내와 같이 늙어간다는 걸 보다 현실적으로 인지하게 된다. 반면 여성들은 나이가 들면서 시댁과 남편 눈치를 안 봐도 되는 시점이 오고, 그렇게 되면 조금 더 당당하게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중년 여성들이 조금만 마음을 열고 남편을 영혼의 동반자로 생각해서 솔직한 대화를 하면 관계 회복이 가능해진다. 자녀들과의 관계도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재설정할 수 있다. 이미 장성한 아이는 어른 대 어른으로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족은 서로를 믿을 수는 있지만 그간 살아온 시간과 경험들 때문에 너무 서로를 무시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그런 경우, 서드 에이지 여성은 오랫동안 관계를 맺어온 오랜 친구들에게 “우리 좀 더 솔직해지는 게 어떠냐”라고 속 시원하게 이야기하면서 관계 개선을 추구하는 방법도 있다. 강현식 누다심심리상담센터 대표가 이런 방법도 제안했다. “지역 문화센터나 집단상담을 진행하는 곳에 가는 방법이다. 그곳에 가서 서로의 감정에 대해 솔직하게 털어놓고 이야기하면 마음이 풀리고 인맥이 넓어지기도 한다. 잘 보이려 애쓰지 말고, 솔직해져 보라.” 이 모든 방법들에서 중요한 것은 숨기지 않고 솔직해지려는 자신의 다짐이다. 그 다짐이 없으면 변화는 찾아오지 않는다고 강 대표는 강조했다. 중년은 관계 속에서 자신을 찾아가는 여행 특히 강 대표는 “우울증, 울화병, 쇼핑중독 현상은 모두 공허감을 채우기 위해 뭔가에 몰두하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그러나 그렇게 몰두한다고 해도 공허감이 채워지지는 않는다. 마음의 공허함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 속에서만 해소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어떤 여성들은 그러한 공허감을 해소하기 위한 관계를 맺을 때, 남편이나 자녀 같은 가족과의 관계 개선은 뒤로 미룬다. 그 이유는 명백하다. 그 여성들은 가족 안에서 그동안 관계가 아니라 역할과 희생만을 했기 때문이다. 중년 여성들은 그토록 쉽게 소외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밖에서 관계 개선이 잘 된다고 해도 가족과의 관계 회복이 이뤄지지 않으면 공허감은 채워지지 않는다. 결국 돌아오게 되는 곳은 집이고 그 안에는 가족이라는 반드시 만날 수밖에 없는 관계들이 있기 때문이다.
- 2015-11-27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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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꽃중년을 노크하다 PART1] 서드 에이지(third age), 어떻게 지나갈것인가
- 지금 우리를 향해 빠르게 다가오고 있는 ‘고령사회’는 인류가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미지(未知)의 세계다. 인류 역사를 통틀어 이토록 많은 노인들이 동시에 생존해 있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행여 아들 며느리로부터 정성스레 효도 받던 옛날을 그리워한다면 그건 시대착오적 환상에 가까울 것이다. 어차피 장수(長壽)가 축복으로 받아들여지던 시절에, 먹고 사는 문제를 걱정하지 않았던 소수의 양반층에서나 가능했던 일이기 때문이다. 고령화 사회를 향해 첫발을 내디딘 2000년대 초반만 해도 노인이란 부양의 대상이자 사회적 부담의 온상이란 부정적 표현이 주를 이루었고, “부모님을 모신 마지막 세대요, 자식으로부터 버림받는 첫 세대”란 자조적 표현이 뒤를 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회색빛 실버(silver) 세대 대신 ‘황금빛 골드(gold) 세대’란 애칭으로 불리기 시작했고, 날이 갈수록 그윽한 풍미를 자랑하는 ‘와인 세대’란 별칭도 얻게 되었다. 여기서 와인(wine)이란 현명하게(wisely) 인생을 하나로 엮어내는(integrated) 신(new) 노년(elderly)의 첫 글자를 딴 조어(造語)라 한다. 오늘날 생애주기 이론가들은 성인 이후의 나이 듦을 향해 세심한 관찰과 흥미진진한 해석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삶의 단계를 유년기, 사춘기, 오디세이기(성인으로 진입하는 것이 매우 어려워졌음을 강조하기 위해 고안된 용어), 성인기, 은퇴 후기(後期), 노년기, 이렇게 6단계로 업데이트하기도 했다. 또, 성인발달과정에 애정을 쏟아온 윌리엄 새들러는 마흔 이후 30년을 ‘서드 에이지’라 명명하면서 이제 “안전벨트를 매고 착륙할 준비를 해야 하나 보다” 하고 인생을 관조하려던 중년을 향해, “다시금 새 타이어(re-tire)로 갈아 끼우고 이륙할 준비를 하라”는 충고와 더불어, 20세기 부모님 세대의 경험 속에선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신선한 길을 제시해 주기도 한다. 노후의 삶의 질에 대한 관심이 부쩍 늘어난 요즘 부동산, 펀드, 주식 투자 등 경제적 준비도 중요하지만, 이에 못지않게 사회적 상실감을 딛고 정서적 성숙함과 심리적 안정감을 위한 준비를 게을리해선 안 된다는 충고를 들려주고 있는 셈이다. 실제로 일본에서의 정년 65세란 인류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연령이란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고, 독일에서 은퇴를 65세로 못 박았을 때는 연금 수령 자격이 있는 모든 이들이 그 이전에 세상을 떠날 것으로 가정했다 한다. 결국 인간은 죽을 때까지 몸을 움직여 의미 있는 활동을 해야 한다는 암시가 담겨 있는 게 아닌지. 우리가 특별히 서드 에이지에 주목하는 이유는, 바로 이 시기가 인생의 쇠락기가 아니라 2차 성장 및 성숙이 이루어지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새들러가 만났던 주인공들은 ‘중년의 위기’란 허상에 사로잡혀 상실과 허무감에 허우적대기보다, 오히려 역동적이고 활기찬 생을 즐기면서 성공적으로 라이프스타일 이주(移住)를 실천하고 있었다 한다. 일례로 갱년기를 지난 여성들이 삶의 재충전을 위해 스포츠에 도전하는 경우가 빈번하게 관찰되었는데, 이들 여성이 선택하는 스포츠는 번지 점프, 산악자전거, 록클라이밍 등 예상외의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거친 종목들이었다고 한다. 50대 후반 여성들은 거친 스포츠에 도전하면서 잃어버린 자신감을 되찾았음은 물론 삶의 에너지를 풍성하게 충전하게 되었음을 고백하였다. 뿐만 아니라 은퇴 이후 새로운 외국어를 배우기 위해 도전하거나, 숙련된 기술을 습득하는 데 성공한 경우는 우리 뇌 내부에 이전엔 없던 구조가 만들어지는 기적적 현상도 관찰되었다고 한다. 물론 서드 에이지를 지나가는 과정은 때론 복잡하기 그지없는 미로를 통과해야만 하는 상황도 기다리고 있고, 그 결과를 예측하기 어려운 때도 무수히 많은 데다, 한 번에 풀기 어려운 역설적 문제를 해결해야만 하는 난관에 봉착하기도 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시기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삶의 균형감각을 유지하면서 한 번도 가지 않은 길을 향해 성큼 발을 내디뎌보는 것이란 조언은 우리에게도 넓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첫째 서드 에이지의 ‘위기의식’과 ‘도전’ 사이에서 긍정적 정체성 확립하기, 둘째 ‘일’과 ‘쉼[休]’의 조화를 이루기, 셋째 ‘자신에 대한 배려’와 ‘타인에 대한 배려’의 균형을 유지하기, 넷째 ‘현실주의’와 ‘낙관주의’ 사이에 다리를 놓기, 다섯째 ‘진지한 성찰’과 ‘과감한 실행’ 중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으면서 성숙한 선택지를 찾아가기, 여섯째, ‘개인의 자유’와 ‘타인과의 긴밀한 관계’를 동시에 실현하기. 이들 6가지 과제 속엔 언뜻 보면 서로 반대되는 의미로 들릴 수 있는 두 요소들 간의 조화와 균형의 필요성이 설득력 있게 펼쳐지고 있는 셈이다. 직장과 가족을 책임지고 돌보느라 정작 자기 자신을 배려하고 돌보는 법에 무지하고 무관심했던 세대를 향해, 서드 에이지를 지나며 필히 수행해야 할 과제가 바로 ‘자신을 배려하는 법’이라고 속삭이는 목소리는, 급격한 사회 변화를 겪어 오면서 자신의 존재는 잠시 묻어둔 채 쫓기듯이 살아온 한국의 중·장년들에게 새삼 눈시울을 젖게 할 것 같다. 그런가 하면 상자에 갇힌 듯한 직장 생활을 답답해하면서도 정작 이로부터 탈출했을 때 오는 해방감을 두려워하지 않기 위해서는, 일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개념의 지평을 확대하면서 일과 쉼의 조화를 꾀하라는 이야기를 듣노라면, 구조조정 및 정리해고가 일상화된 삶 속에서 늘 불안감에 허덕여야 하는 우리들을 향해 유연한 생각의 미덕을 일깨워주는 것 같다. 스스로 주인공이 되어 자신의 생(生)에 관해 진지하게 성찰해 온 경험이 빈곤한 우리네로선, 더 늦기 전에 지금부터 30년 이후의 삶을 그려보며 상상의 기쁨과 도전의 의욕을 다질 수 있길 소망해본다. >>글 함인희 (咸仁姬) 교수 이화여자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미국 에모리대학교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사회학전공 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요 논문으로는 , , 등이 있다.
- 2015-11-12 09: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