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영화도 있나 싶다. 뚜렷한 줄거리도 없이 하루하루 일상을 마치 일기를 쓰듯 영상으로 그려 낸다. 무료하게 반복되는 날들에 생기를 불어넣는 것은 주인공이 틈틈이 노트에 꾹꾹 눌러 담는 시(詩)뿐이다. 굳이 비교하자면 우리나라 홍상수 감독의 영화와 같은 과로 볼 수 있다. 다만 홍상수가 평범하고 지루한 나날들 속에서 인간의 추잡함을 드러낸다면 짐 자무쉬는 일상 속에서 비범한 아름다움을 본다.
이 영화에 대한 소문은 일찍부터 들었다.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되고 칸의 경쟁부문에 출품되어 평론가들의 호평을 받았다는 기사를 접했다. 게다가 짐 자무쉬가 아닌가. 독립영화의 대부라 평가받는 그는 흥행과는 거리가 멀지만, 꾸준히 예술영화를 만들어 대가의 반열에 오른 인물이다. 기대감 속에 모처럼 시간을 내어 영화관을 찾았지만 아뿔싸! 영화 시작과 함께 간간이 조는 실례를 범하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영화는 별다른 사건 없이 비슷비슷한 날들이 반복된다. 게다가 화면 전개마저 나른하니 졸기를 권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영화는 월요일에 시작하여 다음 월요일에 끝난다. 배경은 미국 뉴저지주의 패터슨이라는 소도시다. 시에서 운영하는 노선버스의 운전기사인 주인공의 이름도 패터슨(아담 드라이버)이다. 그를 연기한 배우 이름도 드라이버니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그는 매일 6시에서 6시 반 사이에 기상하며 시리얼을 먹고 출근한다. 버스를 몰기 전에 생각을 정리해 시작노트에 적고 점심은 지역 명물인 폭포공원의 벤치에서 아내가 싸준 도시락을 먹으며 또 시를 쓴다. 퇴근하면 아내 로라(골쉬프테 파라하니)와 저녁을 먹고 난 후 애완견 마빈과 산책을 하다가 동네 허름한 바에서 맥주 한 잔을 마시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마치 인생이란 그런 것 아니냐고 말하는 듯하다.
사실이 그렇다. 우리의 삶도 특별한 변화 없이 하루하루가 비슷하게 흘러간다. 큰 틀에서 보면 인생이란 이렇게 지루하게 늙어가는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감독은 그렇지 않다고 귀띔한다. 비슷한 듯해도 조금씩 다르다. 아침에 잠에서 깰 때 아내와 누운 자세가 다르고 길에서 만나는 이가 다르고 버스에 탄 승객이 다르고 폭포 위를 나는 새가 다르고 바에 술 마시는 손님들이 다르다.
시인의 눈은 이 다름을 포착한다. 이 세상의 작은 틈을 열고 그 다름이 주는 가치와 아름다움을 작은 목소리로 속삭인다. 그러니까 결국 이 영화의 주인공은 시인 셈이다. 패터슨은 무표정하면서도 간혹 미묘한 미소를 흘리며 평범한 일상 속에서 어떻게 시를 길어 올리는지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정작 그는 그것이 시인 줄을 모른다. 이 영화의 두 번째 주인공인 개가 시작노트를 찢을 때까지는.
어쩌면 이 영화의 가장, 그리고 유일한 극적인 장면이라면 애완견 마빈이 그의 노트를 물어뜯어 갈기갈기 파쇄해 놓은 장면일 것이다. 패터슨은 비로소 상실감을 느끼고 폭포공원을 찾는다. 그때 감독은 자신의 시론을 마무리 짓기 위해 느닷없이 일본인 관광객을 등장시킨다. 그 뜬금없는 일본인은 어쩌면 이 작은 시 패터슨을 사랑했던 시인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즈의 환생일지 모른다.
그는 패터슨에게 시란 별것 아니고 ‘아하!’ 하는 작은 깨달음임을 깨우친다. 그러면서 빈 노트를 선물하며 이렇게 말한다. “텅 빈 페이지는 많은 가능성을 선사하죠.” 이 대사는 바로 감독의 메시지일 것이다. 극장을 나서며 행복이란 큰 거 한방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작은 행복을 이어가는 것이란 말이 떠올랐다. 갑자기 우리 삶의 빈틈을 한번 들여다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세계 최고수준의 대중교통은 전철무임으로 꽃을 피우고 있다. ‘전철무임교통카드’는 시행초기에 일종의 전철무임 신분증 역할을 하였다. 대중교통 환승할인제를 시행하면서 이 기능을 부여하여야 했다. 지금은 환승할인이 되지 않아 말썽꾸러기가 된지 이미 오래다. 더구나 서울에서는 특정은행에서 독점 발행한 카드에만 ‘전철무임’ 기능을 부여하고 있다. 은행들이 수많은데 특정은행에서 ‘어르신교통카드’ 발급을 독점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묻고 싶은 대목이다.
전철무임을 일부에서는 퍼주기 복지라면서 이의 폐지를 주장하는 실정이다. 하지만 어르신들은 환승할인이 되지 않는 이 카드를 사용하면서 일반인에 역차별을 받는 경우도 허다하다. 전철무임커녕 오히려 요금폭탄을 맞고 있다. ‘이게 복지냐?’고 분노한다. 일반 국민들은 물론 어르신 본인들도 이런 기막힌 사정을 잘 모르고 있다. 오죽하면 전철무임을 포기하고 일반인교통카드를 하나 더 가지고 다니면서 요금폭탄을 피하고 있을까.
환승할인이 되지 않는 전철무임카드 때문에 나라에서 전철사업자에게 전철무임 보상이 과다하게 이루어져 예산낭비가 심각하다. 전철무임 대상자의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다. 과연 그 예방대책이 있는가. 일반인보다 어르신이 과다하게 부담하고 있는 버스요금에 대한 개선대책은 있는가. 그들의 상실감은 어떻게 차유할 수 있는가.
과다하게 계산한 전철요금은 고스란히 전철사업자의 수입이 되고, 어르신이 초과 부담한 버스요금은 오롯이 버스운송자의 운송수입만 늘리고 있다. 운송업자는 일반인과 똑 같은 조건의 운송을 하고도 초과 수입을 올리고 있다. 이 문제를 어떻게 개선할 수 있는가.
서울의 경우, 전철무임카드는 특정은행의 독점이다. 자유경쟁시대에 123만 어르신은 이 은행의 카드를 사용하여야만 ‘전철무임’을 받을 수 있다. 전국 677만 어르신도 마찬가지다. 환승할인 논란이 많은 특정은행의 전철무임 교통카드만을 사용하여야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어르신의 선택권을 제한하고 불합리한 카드만 사용하도록 언제까지 할 것인가.
국가는 공정거래와 국민의 선택권을 존중하여야 한다. 어르신도 환승할인이 잘 되는 기존의 일반인교통카드를 사용하도록 허용하면 이런 문제를 한방에 해결할 수 있다. ‘참다운 국민복지’를 실현하는 길이다. 세상은 빛의 속도로 변하고 있다. 하루 빨리 시정하여야할 병폐다.
전철무임카드를 특정은행이 독점해서는 아니 된다. 수요자가 선택할 수 있어야 된다. 전철ㆍ버스 환승할인 기능이 있는 기존 일반인교통카드에 개방하자고 제안한다. ‘청구할인’ 기능 하나만 추가하면 모든 문제가 다 풀린다. 광속으로 변하는 세상의 변화속도에 맞춰서 확 바뀌어야 한다.
인간의 심리는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일전에 친구들 모임에서 있었던 일이다. 친구 A는 10여 년 전 남편 사업이 기울어져 그동안 어렵게 살아왔는데 최근 재기에 성공해 친구들이 모두 축하하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A의 오랜 친구이며 유독 A의 어려움을 걱정하고 격려의 말을 아끼지 않던 친구 B가 마지못해 함께 축하했지만, 표정에는 혼란함이 역력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흔쾌히 축하하지 못하는 마음이 이해되지 않아 이런저런 말을 걸어보다가 한 가지 단서가 감지되었다. 그 마음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아마도 상실감이 아닌가 추측되었다. 어쩌면 그동안 B에게는 A의 불행이 자신의 행복을 확인하게 해주는 수단이었다는 의미다. 그동안 누려왔던 심리적 우월감이 사라지니 잠시 공황 상태에 빠졌던 것일까?
사실 B가 평소 심성이 나쁜 친구가 아니었으니 한순간 동요했다고 해서 그 친구를 매도할 이유는 없다. 어쩌면 우리 모두 그런 심리를 조금씩은 가지고 있지 않은가. 말하자면 팍팍한 삶 속에서 절대적인 행복을 얻기가 쉽지 않으니 타인의 불행에 나를 비교하면서 마음의 위안을 삼는 상대적 행복감 같은 것 말이다. 그런데 그 행복감을 빼앗겼으니 내심 억울(?)하지 않겠는가.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자살률은 높고 행복 순위는 낮은 나라로 유명하다. 자살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행복량이 제로일 때 오는 충동일 텐데 도대체 우리가 이렇게 행복에 쪼들리며 사는 이유는 무엇일까? 흔히 하는 말로 가난했던 나라가 급격한 경제발전으로 살림살이가 나아지면서 물질만능에 빠졌기 때문일까? 아니면 치열한 사회적 경쟁 때문일까?
어쩌면 우리가 행복을 제로섬 게임으로 보기 때문은 아닐까? 이를테면 ‘행복 총량의 법칙’ 같은 것이 있어 남이 행복하면 내 행복이 줄어드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말이다. 그러니까 물질만능적 사고가 행복을 물질로 측정하게 만들어 행복의 속성을 왜곡해버린 셈이다. 물질은 나눌수록 줄어들지만, 행복은 나눌수록 커진다는 이치를 우리가 망각한 것이다.
사실 쪼들린 생활을 하면서 물질을 나누는 것이 생각만큼 쉽지는 않다. 션, 정혜영 부부 같은 이는 정말 특별한 사람들이다. 물질을 나누며 살기 어렵다면 까짓것 돈 안 드는 무형의 행복이라도 나누는 것이 현명한 삶 아니겠는가. 정치의 세계에서 권력은 가까운 가족과도 나누지 못한다지만, 권력을 얻는 데 아무 소용도 없는 행복을 나누지 못할 일이 무엇인가.
우리가 무엇이든 나누는 데 인색한 것은 가혹한 가난 속에서 나온 생존본능 때문인지 모른다. 그래서 나누라는 말을 들으면 본능적인 위기감을 느끼는 것이다.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 식으로 말하면 행복을 존재가 아닌 소유로 본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발상을 전환해 나누지 말고 합하면 어떨까.
‘우분투’라는 말이 있다. 아프리카어로 ‘우리가 함께 있기에 내가 있다’라는 뜻인데 보통은 ‘우리의 성공이 나의 성공, 모두의 행복이 나의 행복’이라는 의미로 쓰인다. 여성 선교사 한 분이 선교지 부족 어린이들에게 달리기 시합을 제안하고 큰 과일 바구니를 1등 상으로 내걸었더니 모든 아이가 손잡고 들어왔단다. 그 이유를 물으니 “우분투!”라고 소리쳤다고 한다.
아마도 부탄이 행복한 나라 1위인 것도 세상 물정을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우분투’를 실천하는 까닭일 터이다. 행복은 나눌수록 커진다. 그러나 합할 때 더 커진다.
지인 중에 환갑나이가 되어 남편과 1년간 별거를 선언하고 원룸으로 옮겨 생활하는 분을 만난일이 있다. 그 당시에는 좀처럼 납득이 가지 않았다. 왜냐하면 누가 봐도 부러워할 정도로 잘사는 집안으로 큰 아들은 변호사이고 작은 아들은 의사다. 남편도 잘 나가는 고위공무원 출신으로 연금만 해도 3백만 원 이상을 탄다. 황혼이혼도 생각해보았으나 단지 남편이 보기 싫다는 이유만으로는 이혼사유가 되지 않아 결국 남편과의 합의하에 이 길을 택했다고 한다. 수년전 폭발적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엄마가 뿔났다’에서 엄마 김혜자씨가 남편의 허락아래 1년간 안식휴가라는 명목으로 원룸을 얻어 자유를 구가하는 장면을 떠올린다.
놀랍게도 남편이 싫어진 이유는 단한가지였다. 정말 착실했던 남편이 2년전 정년퇴직을 하고 나서 그동안 소홀했던 와이프를 위한 집안 서비스를 시작했다고 한다. 마누라 힘들까봐 그동안 도와주지 못한 빨래는 물론, 밥도 짓고, 시장을 보아 반찬도 직접 만들어 바치고, 이른 아침부터 먼지하나 없을 정도로 집안 청소를 깔끔하게 해놓는 것이 아닌가?
처음에는 정말 좋았고 대한민국 최고의 남편이라고 친구들한테 자랑하고 다니기도 했다. 그런데 3개월이 지나서부터 무언가를 송두리째 남편한테 빼앗겼다는 상실감이 들기 시작하면서 생각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집에만 있는 남편만 생각하면 식은땀이 나면서 가슴이 답답해지고 삶이 무기력해지며, 소화도 되지 않았다. 심지어는 나를 잃어버렸다는 생각에 우울증까지 찾아왔고, 급기야 도저히 같이 살수 없다고 생각하여 이혼까지 생각하게 된 것이라고 했다.
의학적으로 ‘남편 재택(在宅) 스트레스증후군’이라는 것이 있다. 일본의 심리내과의사인 구로카와 노부오(黒川順夫)박사가 명명한 것이다. 주로 정년 후 집에 있는 남편이 귀찮게 여겨져 스트레스를 받고 심해지면 우울해져 다양한 이상증세가 몸에 나타나기 때문에 엄연한 질병이라는 것이다.
남편으로서는 그동안 열심히 일만하다가 모처럼 자신이 집에 있을 뿐인데 왜 그렇게까지 심각해지는지 좀처럼 납득이 가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남편이 나쁜 것도 부인이 나쁜 것도 아니다. 하지만 오랫동안 남편이 집에 없는 전제하에 자신의 생활이나 인간관계를 구축해온 부인으로서는 남편의 정년으로 갑자기 자유를 빼앗기게 되어 참기 어려운 것이다. 이러한 상태가 지속되면 심한 초조감과 우울한 기분에 휩싸일 뿐 아니라, 두통, 어깨 결림, 위궤양 같은 소화기계통의 이상이나 과민성 대장증후군, 심장이 두근거리고 숨이 가쁜 등 신체적 부조화가 나타나는 일도 적지 않다고 한다.
오랜 기간에 걸쳐 굳어진 생활습관과 남편의 정년 후의 생활 차이를 갑자기 조정하지 못하는 것이 원인이기 때문이다. 남편 재택 스트레스증후군은 부인이 한 마디 말대꾸도 하지 않고 자신을 억제하는 성격인 경우 더 걸릴 확률이 높다고 한다. 그래서 노년을 바라보고 가는 연령이 되면 서서히 뺄셈을 해 두는 것이 좋다. 뺄셈이 필요한 것은 바램이나 욕망, 어깨의 힘, 잘나가던 과거의 생각 등이다. 특히 점점 바램이나 욕망을 낮추어 갈수록 오히려 만족도는 더 깊어진다.
일본의 사이토 시게타(斎藤茂太)씨의 글 중에 ‘40%의 마누라’가 걸작이다. 그의 부인은 ‘40%의 마누라’를 자칭하고 있고, 본인은 그것을 매우 만족하게 받아들이고 있다고 한다. 부부는 원래 다른 인격체이므로 내가 생각하는 바램의 반만 충족해 줘도 ‘그것으로 대만족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게다가 나이가 들면 모든 바램의 레벨을 낮추어서 80%정도로 만족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함께 나이를 먹고 있는 부인에게 이랬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50% X 0.8=40% 이루어졌다면 대만족, 즉 40%의 마누라는 훌륭히 합격이라는 것이다.
사실 지금까지 부부관계에 큰 문제가 일어난 적이 없고, 평온무사하게 잘 지내고 있다는 부부라도 정년을 맞이하면 정년은 부부관계의 새로운 출발점이라고 분명히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평온했던 집안에 언제 시한폭탄이 터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주일쯤이야 마누라가 집을 비우거나, 반대로 남편이 집을 비운다 해도 서로가
“그까이꺼....” 하고 너털웃음으로 넘겨버리자.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전할 수 없는 상황이 돼서 마음만 동동 구르는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브라보 마이 라이프의 문을 두드려주셔요. 이번 호에는 젊은 시절부터 문학적 사유를 함께했던 오랜 벗을 그리워하며 서종택 고려대 명예교수이자 소설가께서 글을 보내주셨습니다.
서종택 소설가ㆍ고려대 명예교수
한형,
‘부치지 못한 편지’를 써보려니 자네와 함께했던 시간들이 줄을 서누만. 나의 기억력은 참으로 한심한 편인데도 신기하게도 나에게는 60여 년 전의 자네 주소가 그대로 떠올랐네. 경기도 평택군 팽성면 본정리 산 12번지. 내가 자네에게 처음 쓴 편지의 지번이지. 우린 그때 중2였고 당시의 학생잡지 지에 다투어가며 소설(콩트)들을 발표했지. 그때 나는 자네의 인가 하는 작품을 읽고 긴 편지를 보냈고. 자네는 그보다 더 긴 장문의 답장을 보내왔고. 우리는 그때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거나 무엇을 그리거나 끄적거리지 않으면 안 되었던 외롭고 허기에 찬 소년 시절을 보내고 있었지.
한형,
나는 지금도 자네가 나에게 처음 소개해주었던 모차르트를 잊을 수 없네. 우리가 처음 만난 겨울이었지 아마. 나는 천안에서 내려오는 자네를 마중하기 위해 옆구리에 이보 안드리치의 (아마 그즈음 노벨상 수상작이었을 거야)를 끼고 광주역 플랫폼에 서 있었지. 최인훈의 에 흥분하고 방 한 칸을 찾아 밤길 헤매는 마렉 플라스코의 의 젊은 애인들을 가슴 아파하고, 그러나 이제는 이 아닌 이나 을 옆구리에 낀 채 담배를 넣고 다니던 오만방자한 고2의 겨울이었지. 진눈깨비 어지럽게 흩날리던 그해 겨울 역 광장에서 우리는 처음 수줍게 악수했고 악수가 끝나자마자 자네는 굵은 안경테를 밀어 올리며 광주엔 클래식 감상실이 있느냐고 물었어. 그리고 충장로의 그 지하다방에서 자네가 리퀘스트 곡으로 써낸 모차르트의 ‘바이올린 콘체르토 5번’을 그때 처음 알았지. 대학생이 되어 종로의 ‘르네상스’를 들락거리면서부터 나도 덩달아 고전음악을 듣기 시작했는데, 어느 날 문득 모차르트와 하이든이 대책 없이 감미롭고 경쾌해지기 시작했고 베토벤이나 브람스가 대책 없이 무겁고 둔중하게 가슴을 울리기 시작했다네. 평생 이어폰을 끼고 지낸 나의 음악 사부인 한형의 후광이었지.
한형,
그리고 그즈음 나와 함께 아파준 한형께 감사하네. 청파동의 어느 대학에 우리들의 ‘그녀’들이 있기도 했지만 우리는 무엇보다도 다른 누구와도 함께 기숙하기를 꺼렸기 때문에 하숙집을 함께 옮겨 다녔지. 한쪽이 각혈을 시작하자 의사의 휴학과 별거 권유를 무시한 채 우리는 국 따로 반찬 따로 먹기를 맹세했지만 이내 3개월 간격으로 결핵 감염을 확인했고 주사와 투약으로 병원을 함께 들락거렸지. 떨어져 지내는 것보다는 함께 지내는 게 편했노라고 자네는 훗날 그때를 회고했고, 문단 데뷔도 못한 주제에 식민지 시대 작가의 폐결핵 동기들 흉내만 냈노라고 우리는 함께 웃었지. 우리가 앓았던 결핵은 그대로 60년대의 절망과 우울의 상징이 아니었나 싶기도 했어. 억압과 감시, 수배와 투옥, 휴교와 계엄령으로 이어진 이 시기의 정치적 억압과 사회적 혼란의 시기를 지나는 동안 문과대학의 실속 없는 문학청년의 꿈은 서서히 마모되고 스러지기 시작했지. 문청 시절의 자존심이 대학에서 구겨지기 시작했고 우리는 비로소 문학은 책에서 배우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고 문학은 더 이상 우리에게 약속의 땅이 아니라는 사실도 알아차리고 말았지.
한형,
창작을 접어두고 대학의 연구실이나 강단에서 우리가 보낸 세월은 결국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1970년을 전후해서 문단에 함께 데뷔했고 1980년을 전후해 함께 대학의 교수 자리는 얻을 수 있었지만, 그리고 논문에 각주를 달고 이론서를 꾸려내고 학생들에게 문학론을 강의했지만, 막을 수 없는 허허로움을 어떻게 삭이고 있었는지는 서로가 다 짐작하는 비밀이었지. 화려한 문청 시절은 추억으로 끝나고 동년배 작가의 베스트셀러 소설들이 서점가의 중심 코너를 차지하고 있을 때 우리는 다만 그것을 바라보고만 있었고 그 안타까움은 엉뚱하게도 강의실에서의 폭언으로 표출되기도 했어. 사실 어느 해 자네가 대학원 강의실에서 퍼부었다는 당시의 어떤 대하소설에 대한 폄하는 좀 심했었네. 자네는 그때 그 소설을 김승옥의 에 빗대면서 그 작품의 반만큼의 감동도 없는 지루한 다큐멘터리에 불과하다고 당시의 소설을 비난했다지. 나 역시 그와 비슷한 열등감을 학생들에게 들키고 만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네. 가령 어느 소설에 대한 평가를 질문받고는 나는 짐짓 ‘너무 길어서’ 읽지 못했노라고, 한 권으로 마칠 이야기를 열 권으로 써내는 일은 창작가들이 저주를 퍼부어야 마땅하다고, 언어의 감각이나 경제성이야말로 서사미학의 종점이라고 갈파(!)했지. 창작보다는 비평에 몰두해버린 우리들의 파행(?)은 그러나 상실감이나 공허감으로만 채워진 것은 아니었네. 자네가 펴낸 은 서사학계의 쾌거이자 성과였어. 이 책은 서사에 관련한 용어를 풀이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개념이 형성된 배경과 이론의 전개 과정을 소논문 형식으로 서술함으로써 서사의 개념들과 그 쟁점들을 아울러 익히게 한 획기적인 책이었지. 이혼하지 못한 부부처럼 창작과 비평의 어색한 동거를 계속하면서 우리는 정년을 맞았고, 문학은 써내는 즐거움 못지않게 향유하는 즐거움도 있다고 우리는 서로를 위로했었지.
한형,
자네가 보여준 그동안의 편식과 편애와 편파를 나는 존중하네. 그리고 자네의 폭력마저도. 그것은 자네가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자 이념이었어. 도선불여악(徒善不如惡), 어쭙잖은 선은 차라리 악함만도 못하다 했던가. 자네는 기름기 있는 음식을 기피했고 과시하는 사람을 용서하지 못했으며 위선을 경멸했었지. 호불호가 분명했고 어떤 제자에 대한 편파적인 애정은 징그러웠고 그 반대 또한 무서울 정도였다니. 그래서 사람들은 자네를 성질 더러운 인간이라 했고 60년 지기인 또 하나의 우리의 친구 오탁번은 그러한 자네를 대책 없는 놈이라 말하곤 했지만, 우리는 그것을 단연코 ‘개성’으로 결론지었다네. 이 편파적인 판정을 비난할 사람은 없을 거네. 왜냐면 우리보다 자네를 더 잘 아는 친구들은 없다고 자부하기 때문이지. 자네는 편식했지만 그 음식은 순정했고 편견은 심했지만 결백했으며 사람을 편애했지만 그들을 감식하지는 않았지. 폭력 교수로 몰아세우는 학생 대표를 폭력으로 제압했던 자네의 80년대식 무용담은 지금 들으면 자네는 운도 많이 따랐었지.
한형,
자네가 중환자실로 옮겨가기 하루 전, 자네는 나에게 “당분간은 죽을 기미가 안 보인다”고 껄껄 웃었고 나는 “그래, 우린 아직 갚아야 할 것이 있다” 어쩌고 지껄였지. 그것이 자네와 주고받은 마지막 대화였네. 자네는 그날 담당 간호사에게 생뚱맞게도 멘델스존을 좋아하느냐고 물었다지. 잠깐 당황하던 간호사가 이내 그의 무언가를 좋아한다고, 봄노래를 좋아하노라고 대답해 자네를 감동시켰고, 자네는 이런 병원이라면 편하게 입원할 수 있겠노라고 기뻐했다지.
한형,
아버지께서 음악을 듣고 책을 읽을 수 있을 만큼의 후유증만을 허락해달라는 아들 근이 녀석의 기도도 헛되이 자네는 의식을 잃은 지 2주일 만에 먼 길 떠나고 말았지. 삼우제를 준비하면서 근이 엄마에게서 연락이 왔어. 짧은 묘비명이 필요하다고 했네. 나는 주저 없이 자네의 짧은 소설의 긴 제목을 그대로 옮겨 보냈네.
“이다음 우리는 누구의 가슴에 따뜻한 별빛으로 남을 수 있으랴.”
>>서종택
1944년 전남 강진 출생, 광주 사레지오고를 거쳐 고려대 국문과와 동 대학원 졸업, 현재 고려대 명예교수. 1969년 , 에 첫 소설을 발표하며 문단에 등단했다. 주요 작품으로 , , , , , 등의 창작집과 , , 등의 논저가 있다.
‘죽여준다’는 말은 ‘아주 잘 한다’는 뜻의 속어이다. 이 영화의 배경이 종로일대에서 노인들을 상대로 성매매를 하는 나이든 여자, 소위 박카스 음료수를 파는 것으로 위장하여 접근한다는 박카스 아줌마이다. 그래서 섹스를 아주 잘하는 여자라는 선입견을 갖고 봤다. 영화에서는 노인들 사이에서 입소문도 그렇게 났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보다는 외로운 독거노인들과 기구한 운명의 한 여인과의 인간적 정을 보여준다. 이 여인은 병고로 고통 받는 노인들이 죽기를 원할 때 죽는 것을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이재용 감독 작품이며 윤여정, 전무송 등이 출연한다. 윤여정은 1947년생으로 필자보다는 나이가 많지만 이 영화에서는 5살 적은 65살 소영 역으로 나온다. 소위 ‘박카스 아줌마’ 역이다. 종로 일대 공원 근처에서 노인들을 유혹하여 성매매를 하지만, 인간적인 사람이다. 갈 곳 없는 필리핀 소년을 데려다 돌보기도 하고, 트랜스젠더 집주인 티나, 불구의 작가 도훈, 등 소외된 이웃들과 평화롭게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녀가 인생의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는 것은 한때의 단골이었던 송노인이 뇌졸중으로 쓰러지고 병문안을 갔더니 자신을 죽여 달라는 간절한 부탁을 받고 부터이다. 죄책감과 연민 사이에 고민하다가 감나무 살충제라는 농약을 먹여 죽게 해준다. 송 노인은 자식들을 미국에 보냈었고 자식들은 2세들을 낳아 미국인이 되었지만, 정이 없고 냉랭한 이방인이 되었다. 반신불수로 희망도 없고, 몸을 움직이지 못하고 고통 받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결심한 것이다.
이일을 시작으로 치매에 걸린 다른 노인은 같이 등산 갔다가 절벽에서 밀어 떨어뜨려 죽게 한다. 재우(전무송 분)라는 노인은 같이 호텔에 가서 과량의 수면제를 먹고 죽는다. 노인은 영원히 잠드는 것이고 여인은 잠시 잠들었다가 다시 깨는 것이다. 병든 노인들은 번호표를 타 놓고 죽음을 기다린다는 대사가 나온다.
이 여인은 결국 경찰에 체포된다. 법적으로는 살인죄 및 살인 방조죄에 해당하여 범법행위인 것이다. 프랑스 영화 ‘아모르’에서는 치매에 걸린 아내를 남편이 베개로 질식사 시킨다.
이 영화가 시사하는 점은 여러 가지이다. 가장 눈이 띄는 것은 노인의 성문제이다. 아내가 있어도 잠자리를 응해주지 않는 노인부부가 많다. 아직 성욕이 꿈틀거리는 독거노인은 성문제를 풀 방법이 없다. 자연스럽게 ‘박카스 아줌마’라는 직업이 생겨나는 것이다.
필자도 모임 장소가 종로 3가라서 종로일대의 그런 풍경은 낯설지 않게 볼 수 있다. 아직도 왜 노인들이 탑골 공원 안에서 소일하고 있는지 궁금하지만, 그 부근은 음식 값이 싸고 메뉴가 우리 세대에 맞아서 좋다보니 어느덧 종로 노인의 대열에 끼었다.
두 번째로는 노인들은 외롭다. 2세들은 자기들 살아가기 바쁘다. 비록 성매매로 만났지만, 소영은 죽음의 순간에 마지막 까지 남아 주고 조력자 역할까지 한다. 외롭다는 것은 애처로운 일이다. 돈도 없으면 아무도 상대해 주지 않는다.
세 번째로는 노인 건강 문제이다. 병고로 시름하느니 차라리 죽고 싶은 심정일 것이다. 치매는 아프지는 않지만, 정신적인 상실감으로 더 이상 살고 싶은 욕망이 없어지는 무서운 병이다. 노인이 되면 여기저기 아프고 병이 생긴다. 죽음이 가까워 오고 있다는 징조이다. 그래서 노인들은 건강이 최우선이다. 건강이 무너지면 삶의 의욕도 함께 무너진다.
대학로 소극장에 가보면 느끼는 것이 하나 있다. 로비가 없다. 문을 들어서자마자 무대이고 공연이 끝나면 서둘러 현실 속으로 달려 나와야 한다. 공연이 끝나고 대화를 나눌 공간도 허락되지 않는 실정. 그런데 최근 공연의 여운을 조금이나마 오래 남길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됐다. 창경궁 돌담길 옆 카페 ‘꽃을 바치는 시간’이다. 극장 ‘30스튜디오’ 개관과 함께 등장한 이곳은 배우와 관객 모두를 주인공으로 만들어주는 공간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배우가 내리는 커피 어떠세요?
작년 10월 28일, 연희단거리패는 창립 30주년을 맞아 공연장이자 각종 문화공간으로 활용할 ‘30스튜디오(이하 30)’를 서울 종로구 창경궁로에 열었다. ‘30’의 짝꿍(?), 카페 ‘꽃을 바치는 시간(이하 꽃바시)’도 같이 관객을 맞이했다. ‘30’ 앞 작고 아담한 공간을 온실처럼 꾸며놓고 간단하게 커피와 차를 내다 파는 곳이 ‘꽃바시’다. 안에는 연극 관련 서적과 대본이 꽂혀 있는 책장이 있고, 무엇인가에 몰두해 앉아 있는 배우들이 늘 눈에 띈다. 커피를 내리고 차를 만드는 이들 또한 배우다. ‘30’을 준비하면서 연희단거리패 예술감독인 연출가 이윤택은 극장에 카페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공연은 공연자와 관객의 만남인데 이들이 만나 얘기할 공간이 없다고 느낀 것. 조금이나마 더 만나고 얘기하고 공연의 깊이를 안고 나갈 장소로 극장 앞 카페만큼 좋은 게 어디 있을까. 더 나아가 조금은 서툴더라도 연희단거리패의 배우와 스태프가 직접 운영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온전히 공연자와 관객들을 위한 공간으로 이용하고자 했다. 현재 10명 정도의 단원이 바리스타 교육을 받았으며, 보건증도 받아 순환 운영을 하고 있다. ‘대학로콩집’ 원두를 공수해와 안정적인 맛을 자랑한다. 공연 전 카페를 이용하다 보면 유독 진한 분장을 한 배우가 커피를 내리고 또 차를 내주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공연장에서만 보던 배우를 카페 직원과 손님으로 만나는 느낌도 남다르다.
블랙리스트 작가의 해탈적 발상
‘꽃을 바치는 시간’은 이윤택이 쓴 희곡으로 이른바 블랙리스트 역풍을 맞은 작품이다. 아르코 문학창작기금(문학창작기금사업 희곡 부문)에서 1위로 선정됐지만,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산실 우수작품 제작지원에서 탈락했다. 순수예술작품을 공연하는 극장에 주던 지원사업도 통보 없이 흐지부지 사라졌고, 해외공연 항공료 지원도 끊기는 등 쓰디쓴 칼바람을 체감했고 체감 중이다. 문화계의 연륜 있는 공연단체로서 다른 공연 팀과 상생할 수 있는 다양한 사업을 펼쳐왔는데 이마저도 할 수 없는 실정에 놓이게 돼 상실감은 더욱 컸다고. 결국 자구책 마련을 위해 단원들 숙소와 극장을 처분해 살림을 하나로 합친 것이 ‘30스튜디오’였던 셈. 그리고 카페 이름이 ‘꽃을 바치는 시간’이 된 계기다. 연희단의 중역 배우인 오동식씨는 “여러 가지로 생각을 하다가 어차피 ‘30스튜디오’라는 곳이 생기게 된 원인이 희곡 ‘꽃을 바치는 시간’이었기에 카페 이름을 그렇게 정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공연을 준비하는 시간을 관객에게 꽃을 바치는 시간으로 표현했습니다”라고 설명했다.
반짝이는 불빛 따라 골목 안으로…
카페는 상시 열려 있다. 지금은 상주하는 단원과 배우들이 오가지만 누구든지 이곳을 이용할 수 있다. 일주일에 한두 팀 정도의 손님이 카페를 찾는다고. 시내하고 가깝지만 고궁 옆의 고즈넉한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무엇보다 아직은 한적하다. 공연 전후 분위기도 물론 사뭇 다르다. 공연을 기다리면서는 차 한잔, 공연이 끝나고 난 뒤에는 만나고 싶었던 배우들을 가까이서 만날 수 있는 장소다. 공연이 끝나면 배우들도 지인들과 이곳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사진도 찍고 말이다. 로비가 없는 소극장이 많아지면서 공연에 관한 얘기 한 번 안 나눠보고 술집으로 밥집으로 무조건 흘러들어가도 되지 않으니 배우들 또한 반가운 곳이다.
어른들의 놀이터로 꽃바시 어떨까?
계절이 따뜻해지면 꽃바시가 좀 더 바빠질 것 같다. 읽을 책을 좀 더 가져다 놓고 북카페로 활용할 계획이다. 인문학 강좌나 시, 희곡과 관련한 워크숍도 생각하고 있다. 단지 공연만 하는 곳이 아니라 문화와 문학이 만나는 중년, 시니어층의 놀이터로도 모색하고 있다. 이곳에 와서 공부도 하고 좋은 얘기도 나누면 좋을 것이다. 무엇보다 ‘꽃바시’가 바로 창경궁과 붙어 있다는 것을 잊지 말라. 여름이 되면 2층과 옥상 공간의 끝내주는 전망을 무기로 공개할 생각이다. 특별하게 시끄럽지 않다면 배우들의 팬 미팅이나 ‘작은 연극’ 등을 선보이는 문화공간으로 이용할 계획이다. 벌써 한여름 밤의 꿈을 연상케 하는 옥상의 정취가 기대된다.
카페 이용정보
주소 서울 종로구 창경궁로 27길 27-6
전화 02-766-9832
영업 11:00~22:00 월요일 휴무
고도원(高道源·64) 아침편지문화재단 이사장은 2001년 8월부터 시작한 ‘고도원의 아침편지’를 통해 360만 명이 넘는 독자들에게 꿈과 희망을 배달하고 있다. “좋은 글귀 하나가 하루를 행복하게 한다”는 그는 인생의 고독을 마주한 이들을 위한 글귀를 모아 이라는 책으로 펴냈다. 홀로 있는 시간이야말로 고갈된 마음의 우물을 채우고 창조의 샘물을 퍼 올릴 수 있는 값진 시간이라는 그의 깨달음을 나누고자 한다.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절대고독’이라는 화두는 오래전부터 그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고 김대중 대통령의 연설담당 비서관으로 지내며 대통령의 고독을 바라보고, 자신의 고독과 마주했던 고도원 이사장이다.
“청와대에 있으면서 대통령의 고독한 시간을 견문하게 됐어요. 아무도 대신해줄 수 없고, 책임져줄 수 없는 외로운 시간. 그런 모습을 지켜보면서 비단 한 국가의 지도자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남이 가지 않는 길을 가는 사람, 저는 그것을 꿈이라고 표현하는데, 꿈을 가진 사람 그리고 많은 이들 앞에 서야 하는 사람에게는 고독의 시간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됐죠. 그걸 우리 일상에 비춰보면 자식 앞에 서 있는 부모, 작은 가게를 운영하는 사장 등 누구에게나 절대고독은 찾아오거든요. 그걸 어떻게 견뎌내고 일어설 것인가에 대해 명상을 하며 깊이 고민했죠. 그때의 생각을 나누고, 용기를 주고 싶었어요.”
잠깐 멈춤, 쉬어가는 용기도 필요하다
단지 ‘고독’이 아닌 ‘절대고독’이라는 제목이 강렬하게 느껴졌다. 절대긍정, 절대사랑처럼 강조하는 의미도 있겠지만, 그렇게 말하는 데는 더 깊은 뜻이 담겨 있었다.
“개인이 겪는 고독은 당사자에겐 절대적 상황이죠. 때론 그 순간이 생사가 걸린 문제가 되기도 하고, 삶의 분기점으로 작용하기도 해요. 다른 이와는 비교할 수 없는 나만의 고독, 그런 점에서 누구나 절대고독의 시간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고 이사장에게 절대고독의 순간은 언제였을까? 그는 작은 개울에서부터 깊고 넓은 강까지, 지금까지 무수히 많은 고독의 강을 건넜노라고 털어놨다.
“시골 목사의 아들로서 겪어야 했던 궁핍한 생활이 저에게 고독을 안겨줬어요. 다른 사람들은 밥을 먹는데 나만 덩그러니 떨어져 굶어야 했고. 자주 이사를 다니면서 친구들과 헤어지는 게 반복되니까 상실감이 컸어요. 대학 때는 긴급조치 9호로 제적당하면서 고난의 세월을 보내야 했고, 청년기에는 이력서를 받아주지 않는 사회에 대한 분노, 절망감 등으로 범벅돼 있었죠. 기자생활을 할 때, 대통령 연설문을 쓸 때도 고독했어요. 글은 누가 대신 써줄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아등바등 스스로 해결해야 했죠. 그런 절대고독의 강을 건너면서 두렵고 힘들기도 했지만 그 시간이 있었기에 내면이 더 단단해질 수 있었어요.”
고 이사장은 예방주사를 맞듯 고독에도 훈련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그래야 불시에 강물이 밀려오더라도 그 깊이를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강물의 깊이를 알면 두려움은 사라지고, 슬기롭게 고독의 순간을 넘기는 힘이 생긴다고.
“수많은 절대고독의 강을 경험하면 직관과 통찰력이 생깁니다. 강물의 깊이를 어림잡을 수 있게 되죠. 그러면 그 깊이에 맞춰 대비할 수 있어요. 때론 일부러라도 스스로 고독한 시간을 만드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저는 그걸 ‘잠깐 멈춤’이라고 표현해요. 잠깐 멈춰서 내 안의 고요함, 평화 등을 찾는 거죠. 그렇게 고독의 면역력을 키워야 느닷없이 황량한 고독을 만났을 때 그것을 이겨내는 에너지로 삼을 수 있어요.”
‘멈춤’이라고 하면 일상을 내려놓는 행위라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가 말하는 멈춤은 더 나아가기 위한 ‘쉼표’와 같은 것이다.
“자동차로 치면 기름 떨어지기 전에 주유소 가는 거예요. 일을 아주 놓는 게 아니란 말이죠. 더 일하고, 더 달리기 위해서 잠시 쉬어가는 겁니다. 쉬는 것도 대단한 용기예요. 다들 마치 멈추면 큰일 날 것처럼 생각하잖아요. 놓아버리면 다 잃어버릴 것만 같고. 그러나 쉬지 않고 계속 가다가 깜빡 졸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죠. 브레이크를 밟는 용기를 내서 잠깐 멈춰 쉬어가야 오히려 안전하고 슬기롭게 고비를 넘어 나아갈 수 있어요.”
내 얼굴 풍경이 주변 풍경을 만든다
잠시 멈춰 쉬어가는 방법으로 그는 ‘명상’을 적극 추천한다. 그는 그가 머무르고 있는 ‘깊은산속 옹달샘(아침편지문화재단)’을 찾아와 명상하는 이들에게 “미소를 지어라. 그리고 그 미소를 삼켜라”라고 제안한다.
“마흔이 넘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하잖아요. 그동안 살아온 대로 다 얼굴에 나타나거든요. 나이 들수록 자기 표정을 인위적으로라도 바꾸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미소 짓는 훈련을 하고 그것을 내 안의 미소로 바꾸는 것, 외면의 미소를 목구멍으로 탁 넘기고 그것을 꿀꺽 삼켜서 가슴과 배를 채워 얼굴의 표정과 내면의 표정이 일치하도록 해야 해요. 그래야 아름답게 늙어갈 수 있죠. 미소를 짓고 나무를 보세요. 나무 이파리들도 미소 짓습니다. 웃는 표정으로 구름을 보세요. 구름이 웃는 입꼬리 같기도 하고, 웃는 눈썹처럼 보이기도 해요. 한 걸음 더 나아가 내가 남에게 미소로 다가가면 그 사람도 나에게 미소로 다가와요. 내가 살아가는 세상이 황량하다면 그럴수록 좋은 표정을 지어야 내 삶의 조건들도 개선될 수 있습니다.”
고 이사장도 젊은 시절엔 표정이 어두워 무섭고 날카롭다는 지적을 많이 들었다고 한다. 그런 자신의 모습을 자각하고 미소를 머금으려 노력하다 보니 요즘은 “표정이 참 좋다”라는 칭찬을 자주 듣는다. 기분 좋은 표정과 더불어 그가 항상 다스리고 신경 쓰는 것은 ‘아우라’다.
“흔히들 포스, 카리스마 이런 이야기하잖아요. 그 사람이 주는 느낌이 있어요. 주파수라고도 하죠. 우연히 지나치는 사람도 어떤 이는 기분이 좋은가 하면 또 어떤 이는 괜히 불쾌할 때가 있어요. 이런 아우라도 표정과 같은 차원인데, 결국 자기가 만들어내는 겁니다. 고독의 강을 건너면서 얼마만큼 내면의 근육을 다지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어떤 의미부여를 하느냐에 따라 주파수가 다르게 생성되죠. 객관식처럼 딱 나오는 답은 아니지만, 뭔가 설명할 수 없는 오묘한 기운 같은 거예요. 저 사람에게 신뢰가 가, 가까이 다가가고 싶어. 이런 느낌을 주는 게 좋잖아요. 나이가 들수록 얼굴뿐만 아니라 자기가 내뿜는 기운, 그런 아우라도 책임질 줄 알아야 해요.”
스스로 터닝하지 않으면 거꾸로 터닝당한다
그는 내면과 외면을 가꾸기 위한 노력은 인생 후반전 중요한 터닝포인트로 작용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터닝포인트의 원래 의미는 전환점이지만, 중년 이후의 삶을 사는 이들에게는 조금 다른 해석을 내놓았다.
“젊은 시절 터닝포인트는 인생을 180도 전환할 수도 있지만, 나이든 사람에게 그런 변화는 위험부담이 될 수밖에 없어요. 그러나 단 1도씩 변화하더라도 그것을 멈추면 안 돼요. 휴대폰을 출시하면 생명력이 6개월 정도밖에 안 간다고 하잖아요. 그럼 이 휴대폰을 만든 사람은 6개월 후에 조금이라도 덧붙일 무언가를 미리 연구해두지 않으면 시장에서 밀리게 되겠죠. 앞서 이야기한 1도, 그걸 바로 덧붙이는 무언가로 보면 됩니다. 지식도, 인격도 계속 새로워지지 않으면 밀리게 돼 있어요. 고정관념과 편견에 갇혀 지내면 언젠가는 추락하고 슬럼프에 빠지겠죠. 작더라도 그런 터닝포인트를 가지고 스스로 노력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강제로 터닝당하고 말아요.”
변화는 더디지만 끊임없이 노력하는 삶 속에서 그는 ‘만년 청춘’을 만끽하고 있었다. 육체적 한계는 있지만, 파릇파릇한 꿈을 꾸고 있기에 정신적 한계는 없다고 말한다.
“육체적으로 힘이 소진되니 빨리 지치잖아요. 근데 뇌는 젊었을 때보다 더 팔팔해요. 20~30대 때 못 보던 것들이 이제야 비로소 보이기 시작하는 거예요. 계속 새로운 꿈이 생겨나서 밤새 꿈을 꾸다 보면 몸은 피곤한데 가슴은 마구 뛰죠. 최근 김형석 교수가 강연에서 100세를 살아보니 65~75세가 인생의 전성기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그렇게 보면 내가 지금 전성기, 최고의 청춘을 시작하고 있는 셈이죠.”
지난날 폭압정치를 경험한 세대들은 좀처럼 정치적 의사표시를 하지 않고 입을 다물고 살았다. ‘1987년 6·10 항쟁 이후, 190만 명 이상이 운집한 최대 집회’가 현재진행형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명예를 훼손하는 루머’는 어느새 ‘합리적 의심’으로 변했다. 이제 그것은 장막을 걷고 있다.
겨울의 문턱에 다다른 11월 마지막 휴일, 오랜 친구 몇 명이 산에 올랐다. 동네를 지나면서 붉게 익은 늦가을 감나무에 눈길이 멈췄다. “까치밥 남겼던 그때가 좋았다.” 누군가 탄성을 질렀다. 세상일에 무관심한 것처럼 보이는 친구들이지만 세상사 관심은 누구나 같았다.
수첩공주 ‘수첩’의 정체
요술주머니처럼 보였던 수첩의 ‘품질’은 몇 개월 만에 바닥이 났다. 의사표현도 못하는 허깨비의 수첩을 누가 작성하였는가. 영혼 없이 받아쓰기 바빴던 종사자들의 고생이 컸다. 덕분에 깨알같이 작성된 ‘수첩’이 허깨비의 실체를 여지없이 드러내고 말았다. 종잡을 수 없는 지시에 책잡히지 않으려고 한 녹음이 중요한 증거물이 되었다.
세월호 7시간의 진실
상상만 난무할 뿐, 진실을 말해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무엇을 했는지 묻는데 대답하지 않는다.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 굿을 했건 성형수술을 했건 다른 사생활이 있었건 그것을 묻는 게 아니다. 세월호 수습이 잘되었다면 전혀 관심의 대상이 될 만한 일도 아니다. “왜 직무 수행을 하지 않았는가?” 그 이유는 반드시 물어야 하고 책임을 지게 해야 한다. 국민의 생명을 버린 직무유기다. 세월호가 침몰할 때 그 장면을 하나하나 지켜보면서 어찌하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면서 가슴을 쳤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재단법인 출연금 갹출
세상에 공짜 없다. 부자간에도 공짜는 없는 것이 진리다. 거래에는 반드시 대가가 있다. “개별 접촉 자체가 문제다.” 왜 동네 아줌마의 꼭두각시가 되어야 했는지 그 이유부터 밝혀야 한다. 몇 년 전 큰소리쳤던 유전자 검사부터 해서 모든 의혹을 낱낱이 규명해야 한다. 재벌 총수 불러서 뻔한 대답을 백번 들어봐야 머리 끄덕일 사람 아무도 없다.
헌정중단ㆍ위헌논란
헌정중단이란 5·16 쿠데타ㆍ12·12 군사반란 때처럼 ‘헌법 기능이 정지되는 상황’을 말한다. 대통령 유고 시 권한대행과 60일 내 대선은 헌법에 정해져 있는 절차다. 대통령 개인의 사임ㆍ탄핵은 헌정중단과 아무 상관이 없다. 주판알 굴리는 일부 정치인들의 염치없는 주장이다.
헌법에 정한 60일 내 선거가 불가능하다고 일부에서 주장하고 있다. 30년이 지난 지금은 통신ㆍ교통 등 과학기술 발달로 60일 내 대선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준비 타령은 아전인수식 꼼수에 불과한 진영논리일 뿐이다.” 지금이나 1년 후나 그 나물에 그 밥이다. 달라질 상황도 아니고 하늘에서 흑기사가 나타날 일도 없다.
‘허깨비 정리’가 제일 큰 과제다. 국민이 허탈감과 상실감을 털어내고 밝은 미래를 설계하도록 모두가 지혜를 모아야 한다. 제왕도 싫지만 허깨비는 더 큰 문제다. 우리나라는 산업화와 민주화에 성공했지만, 지금은 선진국 문턱에서 허덕이고 있다. 모두가 정신 바짝 차리고 ‘합리적 의심’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올해에도 노벨문학상 유력 수상 후보로 거론됐던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그의 소설 에서 “죽음은 삶의 대극(大極)이 아니라, 우리 삶 속에 잠재해 있다”고 말했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일상과 무관하고, 삶과 거리가 있게 느껴지지만 사실 죽음은 늘 우리와 함께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가? 대단히 죽음에 인색하다. 입에 올리는 것마저 거북해한다. 매일 죽음을 접하는 사람은 다르게 느낄까? 이 단순한 질문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 가톨릭관동대학교 국제성모병원 마리아 병동(호스피스 병동)의 이인순(李仁順) 수녀를 만났다.
글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사진 오병돈 프리랜서(Studio Pic) obdlife@gmail.com
“저는 죽음이 삶의 완성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인간은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존재니까요. 하루하루 죽어가는 존재라는 이야기도 있고요. 모든 여정에는 그 끝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자가 던진 우문(愚問)에 이인순 수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래도 소인의 입장에선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매일 죽음을 맞닥뜨리는 일이라니. 일이 어렵거나 도망치고 싶을 것 같다고 얘기했더니 이인순 수녀는 되레 의아해한다. 소임받은 일에 의문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인순 수녀가 이 호스피스 병동에 부임한 것은 국제성모병원이 개원한 2년 전. 가톨릭대학교 인천성모병원에서 근무하다 수녀회로부터 소임 이동 명을 받고 이곳 병원의 호스피스 병동에서 일을 시작했다고 한다. 물론 이 일을 하기 위해서는 자격이 필요한데, 이 수녀는 간호사이면서도, 호스피스 전문 간호사 대학원 과정을 이수했다.
“물론 이곳에서 일하는 간호사들에겐 이곳 일이 쉽지만은 않아요. 다들 젊은 나이이기도 하고요. 24시간 교대근무를 하는 간호사들은 환자와 가족들과의 만남 시간이 상대적으로 많은데 병동에서 함께 산다고 볼 수도 있죠. 돌보던 환자가 돌아가시면 습(襲)까지는 아니지만 시신을 정성껏 닦고 새 옷을 입혀드립니다. 그리고 장례식장으로 보내드리는 일까지 모두 직접 해요. 스트레스도 적지 않아요. 그래서 함께 일하는 팀원들의 소진 예방을 위한 프로그램도 운영합니다.”
가족이 치료 대상이 되는 이유
이렇게 어려운 일인 호스피스는 무엇일까? 호스피스 완화의료는 말 그대로 더 이상 적극적인 치료로 긍정적인 효과를 기대하기 어려운 환자를 대상으로 치료보다는 통증 경감과 기타 신체적 증상 조절, 심리·사회·영적 돌봄을 통해 ‘남은 삶의 질 향상’을 목적으로 진행되는 의료서비스를 말한다. 완치를 기대하기 어렵다고 죽음만을 기다리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다운 생의 마감과 가족과의 이별을 돕는 것이 목적이다. 정부에선 지난해 7월부터 호스피스 완화의료를 국민건강보험 적용 대상으로 지정해 운영 중이다. 국민건강보험에서는 말기 암 환자만을 대상으로 하지만, 앞으로 그 대상이 다른 질환의 환자까지 확대될 예정이다. 현재 이인순 수녀가 있는 마리아 병동에는 33개 병실이 있다. 환자가 머무는 시간은 평균 한 달 정도. 물론 길면 두 달, 짧으면 일주일 이내에서 몇 시간까지 차이가 있다.
호스피스 병동이 일반 병동과 다른 것 중 하나는 바로 ‘가족’에 대한 관점이다. 호스피스 병동에선 가족도 돌봄의 대상으로 바라본다고 이 수녀는 말한다.
“‘사별 상실 스트레스’라는 말이 있어요. 말 그대로 가족을 잃은 상실감이죠. 보통은 13개월에서 3년 정도면 사별 상실 스트레스를 극복할 수 있다고들 해요. 하지만 그 이상 길어지는 경우도 적지 않아요. 그 정도 되면 전문적인 치료가 필요하죠. 여전히 배우자와의 사별이 가장 큰 충격, 즉 삶의 스트레스 1위이지만 최근에는 형제·자매와의 사별도 그 충격이 매우 큰 것으로 보고되고 있어요.”
이러한 사별을 극복하는 방법 중 하나는 비슷한 고통을 겪은 다른 사람들과 슬픔을 나누는 것이라고 한다. 사별의 아픔을 겪고 있는 사람에겐 이야기를 들어줄 누군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사별 상실 스트레스를 겪는 분들이 말합니다. 자녀나 가족들로부터 ‘이제 그 얘기 좀 그만해. 잊을 때도 됐잖아’라는 말을 듣는다고요. 죽음을 터부시하고 외면하고 싶은 심리가 있으니까, 고인에 대한 이야기도 못 꺼내게 하는 것이죠. 하지만 이런 태도는 사별 가족 모두에게 좋지 않아요. 심한 경우 50년이 지나서 사별 상실의 슬픔이 터져 나오는 경우도 있어요. 사별을 겪었던 당시에 상실의 슬픔을 충분히 표현하거나 극복하지 못한 채 마음속 깊이 묻어두고 건드리지 않았던 것이 결국은 표출되고 마는 것이지요. 이러한 슬픔은 마음속에 묻어두었던 ‘나’와 ‘슬퍼하고 있는 그 당시의 나’를 대면하고 인정하면서 극복해나가야 합니다.”
병명 알고 죽음 맞는 환자 적어
현재 호스피스 병동은 말기 암 환자를 대상으로 운영되고 있기 때문에 일단 입원하면 모든 환자가 암 환자다. 그러나 실제로 병명과 상태를 정확히 알고 오는 환자는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 이 수녀의 설명이다.
“호스피스 병동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가족에게 권하는 것이 ‘진실 통고’ 혹은 ‘나쁜 소식 전하기’예요. 환자의 알 권리를 존중하자는 것이지요. 환자에게 병명이나 의료적 상태를 정확히 알리고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데 보호자, 즉 자녀분들이 당사자들에게 말기 암이라는 사실을 밝히는 것을 꺼리는 경우가 많아요.”
환자에게 가벼운 병명으로 둘러대거나 거짓말을 하는 것은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쉽게 볼 수 있다. 심지어 미화시키는 경우도 있다. 왜 이런 거짓말을 하는 걸까?
“‘진실 통고’를 권하면 보호자들 반응이 대부분 비슷해요. ‘아마도 충격을 받으실 겁니다, 얼마 안 남으셨는데 꼭 그런 얘기까지 해야 하나요, 삶의 끈을 놓으실 것 같습니다’ 등등 이유가 많습니다. 하지만 삶의 주인공은 나 자신, 환자 본인이잖아요. 자신의 남은 삶을 삶의 주인이 갈무리해야 하는데, 그것을 자녀들이 막는 셈이죠. 환자의 권리를 앗아가는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본인들에게 진단명이라는 이름으로 말기 암을 알리고 현재의 의료적 상태를 알렸을 때 심리적으로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어요. 만약 환자에게 진실 통고를 할 때 심적 부담이 된다면, 보호자가 그 짐을 떠안을 필요는 없어요. 원래 그 이야기를 전하는 것은 의료진의 몫이니까요. 가족 중에 말기 암 환자가 있다면 환자는 물론이고 가족 모두가 환자 상태에 대해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손주들, 즉 어린아이까지요.”
어린아이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고 이 수녀는 말한다. 어린아이들이 놀란다는 이유로 혹은 어리다는 이유로 부모 사별 현장 또는 조부모 사별 현장에서 배제된다. 결국 남는 것은 기억뿐인데, 부모와의 마지막 추억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 이 수녀의 이야기다.
병명을 확실하게 언급하지 않고 숨기더라도, 환자는 병 진행에 따른 본인의 몸 상태의 변화나 병동의 환자들, 주변 분위기를 보고 눈치를 채는 경우도 있다. 그럴 경우 환자는 자신이 어떤 상태라는 걸 안다는 사실을, 또 가족은 환자가 눈치 챘다는 것을 알아도 입을 닫는다. 서로가 서로를 안타까워하며 현실을 외면하고 숨기는 것이다. 슬프게도.
시한부 환자가 겪는 5단계
그렇게 알게 된 말기 암에 대한, 본인의 몸 상태에 대한 환자의 심리적 반응은 어떨까.
“호스피스의 어머니라고 불리는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Elizabeth Kubler Ross)는 죽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5단계로 설명했어요. 맨 처음엔 부정하죠. 결과를 믿지 않고 다른 병원을 찾아가요. 그러나 같은 결과를 듣게 되지요. 그럼 ‘하필 내가 왜?’라며 자신이나 가족 또는 병원 직원, 더 나아가 신에게까지 분노를 직접적으로 표현합니다. 그러나 환자가 존경과 이해와 지속적인 관심을 받으면 격한 분노가 한결 누그러집니다. 진실과 인내가 필요하죠. 그러면서 사실을, 죽음을 인지하지요. 하지만 타협하는 과정을 거쳐요. 종국에는 신과의 타협입니다. 그것이 끝나면 우울해지고 수용하는 과정을 맞게 됩니다. 하지만 실제로 현장에서 만나는 환자들은 반드시 이 순서대로 감정 상태를 보이지는 않아요. 감정의 기복이 큽니다. 누구를 만났는지, 어떤 말들이 오갔는지에 따라 완전히 달라져요.”
그렇게 죽음을 수용하는 과정을 거친 후 우리는 어떤 준비를 해야 할까. 어떤 준비를 하는 것이 좋은 죽음일까. 또다시 튀어나온 모호한 질문에 이 수녀는 아주 현실적인 이야기들을 분명하게 해줬다.
“그 전에 바르게 사셔야 해요. 잘살아야 잘 죽을 수 있는 것이지요. 흥청망청 살다가 인생 말년에 웰다잉하겠다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입니다. 가족과의 불협화음이 있는 경우의 환자들은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도 순탄치 않아요. 마지막까지 외롭고 힘든 과정을 거치게 되더라고요. 환자 본인이 해결해야 할 문제는 확실하게 의사표현을 해서 정리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특별히 경제적인 문제는 남은 가족한테 떠넘기지 말고 본인이 해결하셨으면 좋겠어요. 사별의 아픔을 겪는 가족들에게 또 다른 고통을 남기는 셈이니까요.”
냉정하게 들릴 수 있지만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당연한 이야기다. 죽음 역시 인생의 방점이고 현실이니까. 로맨틱할 이유도, 동정만 할 일도 아니다. 죽음을 앞두고 있다고 해서 책임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자택 임종’ 하고 싶어도 못해
호스피스 병동에서는 의학적으로 임종 시기가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하단다. 때문에 그 시기가 가까워지면 환자를 임종실로 모시고 차분히 마지막을 맞이할 수 있도록 배려한다. 가족들과 이별할 시간도 마련한다.
“임종실을 해밀방이라고 불러요. 해밀은 비온 뒤 맑은 하늘을 뜻하는 우리말이에요. 해밀방으로 옮겨지면 환자와 가족들이 그간 하지 못했던 말, 하고 싶은 말을 모두 하라고 권해요. 서로가 청할 것이 있으면 청해서 용서받고, 화해하라고요. 이런 과정은 환자와 가족 모두에게 도움이 돼요. 한번은 의식이 없는 아버지(환자)와 가족 모두가 마지막 인사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환자의 의식이 살짝 돌아와, 네가 했던 말 다 들었다고 하면서 고맙다고 표현하신 거예요. 환자의 큰아드님이 감격스럽고 아름다운 추억을 가지고 가셔서 감사하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환자는 의식이 없어 반응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귀는 열려서 듣고 있었던 거죠.”
그렇게 환자가 임종하면 이 수녀와 담당 간호사는 고인의 몸을 닦고 준비해뒀던 옷, 생전에 좋아했던 옷으로 갈아입힌다. 이 수녀는 이 과정을 사명이라고 생각하고 보람 있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마지막에 피를 토하는 환자가 있어요. 그러면 고인의 얼굴을 잘 닦아드리고 정돈된 모습으로 가족과 마지막으로 인사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해드려요. 그러면 가족들이 기억하는 고인의 마지막 모습은 피 토한 흔적 없는 깨끗하고 편안한 모습이에요. 그 모습에 가족은 위로를 받아요. 편한 얼굴을 보고 편하게 돌아가셨다고 믿고 싶은 거죠.”
환자들은 생의 마지막 장소로 병원을 어떻게 생각할까. 사실 많은 환자들이 임종 장소로 집을 원한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고 한다. 그런데도 병원이 선택되는 이유는 현실적인 문제들 때문이다.
“집에서 환자를 24시간 간호한다는 것이 쉬운 문제가 아니잖아요. 환자를 돌보는 문제도 있지만, 집에서 임종을 맞이하고 난 뒤에도 문제가 있어요. 사망 확인을 위한 행정적인 절차가 꽤 복잡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보호자들이 겁을 먹는 경우가 많아요. 죽음의 현장이 자연사임에도 불구하고 죽음 자체가 익숙하지 않고 낯선 것이니까요. 죽음을 터부시하는 문화의 영향이 지배적인 거죠. 현재는 꼭 가정에서의 임종이 아니어도 가정형 호스피스 제도를 통해 호스피스 서비스를 가정에서 받으실 수 있어요. 올 3월부터 시범사업을 시행 중인데, 병원에서와 같은 돌봄을 가정에서 받을 수 있고 돌봄 제공자들이 연계되어 가정으로 방문합니다. 환자들이나 가족들의 반응도 좋아요.”
죽음 앞에서 가족들의 모습은 어떨까. 이 수녀는 예외 없이 모두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고 했다. “수고했다. 고통 없는 좋은 데로 가라”고.
“다들 그러세요. 고생 많았다. 수고했다. 고통 없는 데로 먼저 가라고 하면서 덧붙이는 말이 있어요. 다시 만나자고. 아마 우리네 민간신앙이 바탕에 깔렸겠지만, 죽음 너머에는 여기가 아닌 어딘가가 있다고 믿는 것이죠. 그래서 이야기해요. 좋은 곳에 먼저 가 있으라고. 다시 만나자고.”
이 수녀는 마지막으로 잘 죽는다는 것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송나라의 주신중(朱新中)이 훌륭한 죽음에 대해 5멸(五滅)의 실천을 이야기했어요. 멸재(滅財), 재산을 남기지 말고 죽을 것. 멸원(滅怨), 원한을 남기지 말 것. 멸채(滅債), 남에게 빚을 남기지 말고 죽을 것. 멸정(滅情), 정분을 남기지 말고 죽을 것. 마지막으로 멸망(滅亡),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죽을 것이라고요. 인생 여정의 붙잡고 있기와 놓아주기를 균형 있게 한다면 하루하루 잘 죽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