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명동을 좋아한다. 서울의 심장부라는 이유도 있지만, 그보다는 젊은 날의 추억이 빼곡히 담겨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대학을 다닐 때도 학교에서 공부하는 것보다 명동에 나와 노는 시간이 더 많았다.
한때는 겉멋이 들어 사보이호텔 골목의 ‘화이어 버드’나 예쁜 이름의 칵테일 집을 찾아다니며 커피보다 두세 배는 더 비싼 슬로우 진이나 스쿠르 드라이버, 카카오 주스 같은 칵테일을 마시고 다니기도 했다.
명동은 바둑판 같은 모양으로 펼쳐져 있어 어디를 가든 어떤 골목이든 예전 모습과 같다. 물론 거리를 장식한 쇼윈도의 업종은 많이 바뀌었지만, 그때의 낭만과 추억을 찾아보기에는 그리 어렵지 않다.
요즘 길거리에 나가 보면 쭉쭉 뻗은 각선미를 자랑하는 젊은이의 모습이 넘쳐난다. 너무하다 싶을 정도의 차림새도 간혹 있지만 대부분 건강해 보이고 예뻐서 한참을 바라볼 때가 있다. 비록 나이는 많이 들었지만 필자도 미니스커트를 좋아한다. 그렇다고 다리를 훤하게 내놓는 짓은 하지 않는다. 겨울날 긴 코트를 입으면 그 안에 살짝 미니스커트를 착용하는 정도다.
젊었을 때 미니스커트에 얽힌 에피소드가 있다. 대학 3학년인가 4학년 때 우리나라에서는 장발과 미니스커트 단속을 했다. 장발을 한 청년이 단속에 걸리면 머리카락 일부가 가위로 싹둑 잘려나가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여자들은 그 당시 얼마나 단속이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옷을 양장점에서 맞춰 입던 시절이었는데, 가봉을 할 때마다 양장점 아저씨 아줌마(디자이너)들과 실랑이를 벌이곤 했다. "조금만 더 짧게요, 더, 더.", "안 돼!! 그만 올려!" 하면서 말이다.
어느 날 단짝 친구 영주와 명동엘 갔다. 물론 필자는 초미니 차림이었다. 그런데 명동예술극장 근처에서 필자가 경찰관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파출소에 가 보니 장발한 청년들로 북새통이었다. 요즘도 가끔 옛 생각을 하며 그리운 명동을 거닌다. 그러다가 파출소가 보이면 그날이 생각 나 항상 미소가 지어진다.
그날 필자 친구 영주는 쇠창살을 두른 유리창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며 발을 동동 굴렀다. 필자는 죽고 싶을 정도로 창피했고 또 무서워서 벌벌 떨었다. 경찰이 학교에 연락하겠다고 엄포를 놓았기 때문이다. 학교와 과를 물은 뒤 훈방되었지만 무척이나 가슴을 졸였던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하면 필자 인생에서 그런 에피소드라도 있어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니면 밋밋하고 싱거웠을 인생이었을 테니 말이다.
다음 날 학교에 가니 교수님이 "자네 어제 명동파출소에 갔었나?" 하고 물으셨다. 필자는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너무 창피했으므로.
"아닌데요…."
그때 우리 과에 필자랑 이름이 같은 친구가 있었다.
"아, 그럼 그 녀석인가보군."
그쯤에서 사건은 마무리되었는데, 교수님이 그 친구에게도 같은 질문을 하셨는지는 모르겠다. 어찌되었든 그렇게 무사히 아무 일 없이 지나갔다. 죽고 싶을 만큼 부끄럽고 창피했던 일도 훗날에는 하나의 추억이 되기도 한다. 그 시절이 자꾸 그리워지는 요즘이다.
한 극장이 오랜 세월 명맥을 유지하기란 쉽지 않다. 지금까지 힘없는 연극인들은 도시 개발, 상권 확장에 쉽게 자리를 내줘야 했다. 기억 속으로 사라진 극장만도 헤아릴 수 없는 요즘, 부산의 가마골소극장이 다시 문을 열었다. 소극장의 옛 추억을 간직한 시니어 세대와 무대를 지키고 싶은 젊은 연극인의 꿈이 담겨 있는 공간 가마골 소극장에 다녀왔다.
오늘도 내일도 극장문은 활짝 열린다
지난 7월 7일, 부산시 기장군 일광면. 조용했던 마을에 풍악이 울리고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낯익은 배우가 박자에 맞춰 덩실덩실 춤추고 모두의 얼굴은 상기돼 기쁜 모습이었다. 한산했던 시골 동네에 부산 연극의 중심이던 가마골소극장이 들어섰다. 6층짜리 화려한 건물 안에는 공연장을 비롯해 주점, 카페 등 연극인과 시민이 어울릴 수 있는 공간으로 채워졌다. 1986년 부산 광장동에서 처음으로 문을 연 가마골소극장은 극단 연희단거리패의 산실을 담당하던 곳이다. 연희단거리패의 활동 무대가 부산에서 서울로 옮겨졌을 때도 꾸준히 실험연극을 비롯해 새로운 시도를 거듭하면서 시민의 사랑을 받았다. 중앙동과 광안리, 다시 광복동을 거쳐서 거제리로 무대를 옮겨 다니면서도 다수 공연의 매진 행렬과 최대 유료객석 점유율을 기록한 내실 있는 극장이었다. 그러나 시대 기류에 못 이겨 폐관이 기로에 서기도 했다. 결국 길고 길었던 셋방살이 30년에 종지부를 찍고 100년 길이 남을 극장으로 기장군에 세워졌다.
역사와 추억을 품다
“현재 부산 기장군에 신축 중인 6층짜리 가마골소극장의 건물 1층은 포장마차로, 2층은 카페 오아시스로 꾸밀 생각이라고 한다. 위층은 극장과 극단 사람들을 위한 공간이 될 것….”(2017년 7월호 브라보가 만난 사람, 연극연출가 이윤택 인터뷰 中)
가마골소극장에 관한 계획은 작년 7월 연희단거리패의 꼭두쇠 이윤택 인터뷰를 통해 본지에 소개된 바 있다. 막연한 계획이 아니었다는 것을 극장 건립을 통해 보여준 것. 1층에는 목로주점 양산박이 있다. 이윤택이 신문기자이던 시절 한 시인을 돕기 위해 부산일보 기자 네 명과 함께 출자해 부산시 광복동 입구에 차렸다던 ‘양산박’의 이름을 그대로 따왔다. 2층은 부산 국제시장 근처에 있던 클래식 음악 카페 오아시스의 향수가 묻어나는 곳으로 꾸몄다. 이윤택이 20대이던 시절 당시 돈 80원이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음악 듣고 시 쓰고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문학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곳이 바로 카페 오아시스였다고. 그때처럼 LP판은 아니지만 지금의 카페 오아시스도 클래식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이곳 천장에는 지금까지 연희단거리패가 공연했던 작품의 포스터가 촘촘하게 붙어 있다. 극단과 극장의 세월을 가늠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각종 문화 콘서트, 세미나, 북콘서트를 통해 시민과 교류하는 만남의 장소로 이용할 계획이다.
2층에는 가마골소극장과 연희단거리패를 대표하는 여배우이자 연출가였던 故 이윤주의 기념관과 북카페 ‘책굽는 가마’가 함께 자리했다. 2015년 투병생활에 마침표를 찍고 꽃같이 사라진 배우이자 연출가 이윤주를 기리는 이윤주기념관에서는 그녀 연극생활의 시작과 끝을 만날 수 있다. 가마골소극장의 대표로서 서울보다는 부산 연극무대를 지켜왔던 이윤주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신비한 몸짓과 목소리를 가졌던 배우이자 연극쟁이였다. 아동극 연출과 연극 에서 배우를 마지막으로 영영 사라진 그녀를 잠시나마 느낄 수 있는 공간이다. 북카페 ‘책굽는 가마’에는 연희단거리패가 지금까지 출판했던 도서와 연희단거리패 연극 200선을 구비해놓고 판매도 한다. 조용히 책을 읽고 차를 마시기에 좋다.
3층과 4층이 바로 가마골소극장이다. 120석 규모의 극장은 작은 무대이지만 높이와 경사각이 깊어 무대가 답답해 보이지 않는 장점이 있다. 5층과 6층은 배우들의 숙소와 연희단거리패의 전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아카이브도 마련돼 있다.
배우와 스태프가 직접 만들고 운영까지 하는 곳
가마골소극장에는 남다른 시스템이 있다. 바로 극단의 모든 구성원이 운영 주체다. 1층과 2층의 주점과 카페에서 일하는 종업원들도 배우들과 스태프다. 분장을 하고 커피를 만들거나 서빙을 하고, 셔틀버스를 운행한 배우가 곧바로 무대에 올라가기도 한다. 극장의 무대, 조명, 음향, 객석 등 사람들이 오가는 곳곳에도 극단 사람들의 수고와 노력이 서려 있다.
연희단거리패 조명감독 겸 가마골소극장 대표인 조인곤씨는 “가마골소극장은 연희단거리패와 극단가마골, 가마골소극장의 역사 저장창고라고 생각한다”며 “시간이 지나도 계속 이어나갈 수 있는 역사적 유물이 됐으면 한다”고 밝혔다. 기장에는 미역도 있고 멸치도 있고 해수욕장도 있다. 그리고 가마골소극장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라!
5070세대 대부분은 보릿고개가 있을 정도로 먹고살기 힘들던 지난날이 있었다. 청년들에게 나의 어린 시절 경험을 들려주면 마치 임진왜란 때의 이야기를 듣는 것 같은 표정을 짓는다. 그만큼 우리 사회는 현재의 청년들이 체감하지 못할 정도로 많은 발전을 이루었다. 하지만 식민지배와 전쟁을 겪으면서 개개인의 삶은 완전히 무너졌다. 당시 어른들이 굶주리며 일할 때 지금의 시니어들은 가사를 도와가며 열심히 공부했고 달려왔다. 책도 부족하고 TV나 라디오도 흔치 않았던 시대, 아이들의 정서 함양은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친구와 싸웠을 때 어떻게 풀어야 할지, 친구는 어떻게 사귀어야 할지, 부모님께 꾸중 들으면 화가 나는 마음을 어떻게 해야 할지, 다른 사람 마음을 헤아리기 힘들 때 아이들 옆에는 만화가 있었다. 그 시절 우리에게 세상을 알려준 만화에 대한 기억들을 꺼내보자.
최초의 단행본 만화 작가 ‘코주부’ 김용환
코가 뭉뚝하고 키는 작달막하지만 다부진 모습의 ‘코주부’는 김용환 작가의 대표 캐릭터다. 때론 모자를 쓰고 점잖은 어른으로 나와 신문에서 당대의 사회문제를 다루는 시사만화 주인공으로 등장하기도 했다. ‘코주부’가 알려진 것은 한국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은 1952년, 잡지에 연재된 를 통해서였다. 청소년 교양지였던 은 10만 부 가깝게 판매되었다는 증언이 있을 정도로 인기 잡지였다. 책이 부족했던 시절, 읽을거리가 풍부했던 이 세간의 주목을 받은 것은 당연했다. 그곳에 빼어난 이야깃거리인 를 그림으로 만날 수 있었으니 당시 청소년들에게 얼마나 인기가 있었는지 짐작할 만하다. 에 연재된 ‘코주부 삼국지’는 1955년 만화책 로 발행되면서 지속적인 인기를 누렸다.
김용환의 만화는 세련된 그림, 재미있는 이야기로 아이들에게 친숙하게 다가갔다. 그는 를 발표하기 이전부터 이미 아동만화를 많이 발표한 작가였다. 최초의 단행본 만화를 발표한 작가도 김용환이다. 우리나라에 처음 발표된 만화는 1909년 ‘대한민보’에 실린 이도영의 만평이라고 소개하지만, 어린이에게 친숙한 만화책이 처음 나온 것은 해방 후였다. 바로 동화작가 마해송의 작품인 를 김용환이 만화로 각색해 1946년에 발표한 다. 이 작품은 해방 후 아동문화를 만들기 위해 을유문화사에서 만든 아협만화문고 시리즈 중 하나다. 한국 최초의 단행본 만화로 기록되었고 2013년, 등록문화재 제537호로 등록되었다.
김용환은 만화 발표 외에도 만화신문과 만화잡지를 직접 발행하고 기획하기도 했다. 1948년, 최초의 만화신문인 의 기획자, 작가로서 참여했고 도 직접 발행했다. 또 한국전쟁 후인 1956년엔 성인시사만화잡지인 를 통해 시사만화의 새로운 장을 열기도 했다. 물론 각종 신문에도 시사만화를 발표했다. 이렇듯 김용환은 한국 만화의 선구자 역할을 했다.
방송인 만화가 신동우
가정에 TV가 흔하지 않았던 시절, 한 만화가가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듣고 즉석에서 슥슥슥 그림으로 그려냈는데 그 속도가 너무 빨라 충격적이었다. 바로 신동우 작가였다. 그가 유명 방송인이 된 것은 의 영향력 때문이었다. 1967년 1월 7일 서울 대한극장을 비롯해 많은 극장에서 상영된 한국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만화영화)이 전국을 강타했다. 이 작품의 탄생은 신동우 작품 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은 1965년부터 1969년까지 에 연재된 후 단행본으로 출판된 작품인데, 이 연재만화를 대본으로 신동우 작가의 형인 신동헌 감독이 우리나라 최초로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를 만든 것이다. 홍길동에 관한 만화는 이전에도 많았고 이후에도 많은 작품이 발표되었다. 하지만 신동우 작가의 은 홍길동에 대한 이미지를 고착화시킬 정도였다. 이 작품은 허균의 에 대한 가슴 벅찬 이야기도 흥미롭지만 ‘홍길동’ 외의 주변 인물인 ‘호피’와 ‘차돌바위’, ‘곱단이’ 등의 캐릭터도 개성 있게 묘사되어 있어 매력적이다.
신동우는 1970년대에 유행했던 잡지의 만화 광고로도 유명하다. 오랫동안 진주햄소시지 제품을 일상 만화로 풀어냈는데, 광고임에도 불구하고 인기를 끌었다. 요즘 유행하는 브랜드 웹툰의 시조격이라 할 수 있다.
슬픔의 미학으로 전쟁의 상흔을 위로한 김종래
휘영청 밝은 달은 금준의 마음을 알듯 구름을 머금고 내려다본다. 나쁜 사또에게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옥중에 있는 아버지를 대신해 일하러 간 엄마가 돌아오지 않자 엄마를 찾아 나선 금준은 괴나리봇짐을 지고 풍천노숙을 하며 전국을 떠돌다 지쳐 장승에 기대어 엄마를 불러본다. 김종래의 중 한 장면이다. 김종래는 한국전쟁 이후 많은 사람이 파괴된 삶과 가족과의 이별로 고통스러워할 때 슬픔을 어루만져주는 감동 만화로 인기를 누린 작가다.
1956년에 발표한 은 한국전쟁 당시 충남 예산의 한 가족사를 다룬 만화다. 주인공 김일, 최도천, 향순이가 전쟁을 겪으면서 비극적인 운명에 처하게 되는 내용으로, 전쟁 후유증을 겪던 이들의 심금을 울리며 김종래라는 이름을 독자들에게 알렸다. 특히 1958년 에 연재했던 는 당시 독자들의 폭발적인 관심을 받았다. 엄마를 찾아 길을 떠난 금준이 전국을 떠돌며 온갖 위기에 맞서 나가는 사이, 두만강 건너로 팔려간 엄마는 모진 수모를 겪으며 아들에게 돌아가기 위해 이를 악물고 버틴다. 이렇게 아들과 엄마가 만날 듯하면서도 만나지 못하는 아슬아슬한 이야기 구조는 독자들의 마음을 온통 빼앗아버렸다. 구구절절한 사연은 독자들의 눈물샘을 자극했고 청소년은 물론 어른들까지 그의 만화 속으로 빠져들었다. 1962년에 발표된 은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에서 피란을 가던 한 가족이 엄마와 헤어져 무일푼으로 서울로 올라와 생활하며 겪는 이야기다. 엄마 없이 힘겹게 살아가는 영진이네 가족 이야기이지만 전쟁 이후 사람들의 사나운 인심, 영진이 선생님 같은 선량한 사람들의 모습을 감동적이면서도 사실적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김종래의 만화는 치밀한 구성과 감성적인 문장으로 이산가족의 아픔을 애잔하게 보여주며 사람들의 힘든 마음을 위로했다. 또한 길가의 돌부리까지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섬세한 필체가 특징이다. 25년간 400여 편의 작품을 발표했으며, 그중 시리즈는 빼놓을 수 없는 수작이다.
소녀들의 판타지를 보여준 엄희자
1960년대 초반에는 예쁜 공주들이 만화책 속에 등장했다. 이전에도 소녀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만화가 다수 있었지만 엄희자 작가의 등장으로 순정만화의 신세계가 펼쳐졌다. 큰 눈 속에 들어가 있는 빛나는 별, 머리를 장식한 예쁜 리본,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아름다운 주인공은 순식간에 소녀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주로 영화나 영미소설의 스토리를 각색한 작품이 많았는데, 현대적인 패션들을 한껏 뽐내며 등장하는 주인공들이 최고 인기였다.
소설 을 만화로 만든 , 소설 을 각색한 등 서구를 배경으로 한 작품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치장한 화려한 패션이 눈길을 끌었다. 그래서 만화방에서 빌려온 엄희자의 만화책을 보면 찢긴 페이지가 많았다. 아름다운 드레스를 걸친 주인공의 모습이 소녀들의 소유욕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당시 대부분의 만화 주제는 권선징악이었고 순정만화는 그러한 교훈이 더 강했다. 만화 속에 나오는 악당은 착한 주인공을 질투, 음해하고 모함하지만 결국은 주인공의 선행으로 회개하고 반성하며 해피엔딩으로 끝났다. 엄희자의 작품에 그려진 아름답고 순수하고 맑은 감성도 이 스토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소년·소녀들의 명랑사회를 보여준 길창덕
1970년대는 ‘꺼벙이’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쟁 이후부터 1960년대까지만 해도 만화 속의 주인공들은 모범생이나 천재나 능력자가 많았다. 당시 사회가 요구하는 어린이상이 그러했던 것이다. 비록 아이일지라도 어른들의 몫을 나눠서 해냈어야 했다. 그러나 조금씩 먹고사는 것이 안정이 되던 1970년대엔 아이들에게 더 이상 어른의 몫을 나누지 않아도 되었다. ‘개구장이라도 좋다. 튼튼하게만 자라다오’라는 광고카피가 등장할 정도로 아이들의 철부지 같은 모습이 사회에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이런 시대의 모습을 담은 작품이 길창덕의 다. 1970년에 에서 연재를 시작해 으로 옮겨 1977년에 완결된 작품으로 잡지뿐 아니라 단행본으로도 만들어져 1970년대를 풍미했다.
머리의 기계충 자국과 졸린 눈에 약간 모자란 듯하지만 착하고 여린 심성의 꺼벙이는 엉뚱한 생각과 행동을 많이 해서 항상 부모님과 선생님들을 기절초풍하게 만드는 명랑 어린이다. 시골에서 할아버지와 살다 상경한 여동생 꺼실이가 후에 등장하면서 그 재미는 한층 더 배가되었다. 뿐만 아니라 , , , 등 그의 작품 속 어린이들은 하나같이 말썽을 부리고 엉뚱했다. 그러나 그 모든 사건 속에는 개인의 이기심이 아니라 가족들과 친구들, 동네 사람들과 함께 잘 살자는 마음이 숨어 있었다.
가족의 희로애락 그려낸 이상무
가난하지만 명랑한 아이인 독고탁은 학교 갔다가 집에 돌아올 때면 항상 대문에서 주저한다. 대문을 열면 집에서 키우는 개가 아직 어린아이인 독고탁의 키만큼 달려들기 때문이다. 개는 독고탁이 좋다고 달려들지만 그는 자기 몸집만큼 큰 개에 겁을 먹는다. 무서운 티를 내지 않으려고 항상 머리를 굴리며 대문을 들어서기 위한 다양한 방법을 구사한다. 이상무의 에 나오는 한 장면이다. 귀여운 모습과는 달리 희귀 성인 ‘독고’와 강한 이름인 ‘탁’이라 불리는 이 아이는 6남매의 막내로 식구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한다. 그러나 병으로 일찍 돌아가신 엄마의 자리를 무엇으로도 채울 수가 없어서 슬프다. 아버지의 실직과 교통사고, 일찍 가장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권투 유망주였던 형은 돈을 받고 경기를 하게 된다. 독고탁의 가족에게 벌어진 시련은 1970년대 여느 가정에서 겪었을 법한 일들이다. 독고탁은 누나들의 살뜰한 보살핌이 필요할 정도로 어렸지만 집 안의 어두운 분위기를 재빨리 눈치 채는 섬세한 아이였다. 또, 그런 독고탁을 통해 가족 드라마의 희로애락을 만화 속에 진하게 담아낸 작가가 이상무였다.
그의 작품에는 가족과 스포츠가 등장한다. 특히 같이 야구를 소재로 한 만화는 끝없는 경쟁을 해야 하는 스포츠 세계의 현실을 만화 속에서 시련을 극복하는 자기훈련과 노력들로 보여준다. 좌절의 순간에는 가족들의 응원이 있었고 무한 경쟁이 아닌 사람 간의 교류가 있었다. 이상무 작품의 인물들은 악인이라도 사람 냄새가 난다.
얼마 전 신문에 보도 된 바에 의하면 성수동에 있는 서울 공기 오염의 원인이라고 말이 많은 삼표 레미콘 공장이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고 그 곳에 현재 있는 서울의 숲이 확장 되어 들어선다고 한다.
서울의 숲은 필자가 살고 있는 청구동에서 자동차로 10분 거리이다.
필자는 결혼 후 강남의 반포에서 30년 가까이 살다가 아들을 결혼 시키고, 수 년 전에 우연히 강북의 약수역 근처인 청구동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항공 회사에서 근무하는 아들의 직장이 김포 공항 근처라 공항 가까운 목동에 집을 마련 해주고 우린 옛날 어릴 때 살던 장충동과 가까운 이 곳으로 오게 된 것이다.
이 동네로 이사를 오고 보니 우선 서울의 중심인 중구이기 때문에 국립극장이나, 덕수궁, 경복궁 등의 문화재가 집과 아주 가까워서 만약의 경우 택시를 타게 되어도 돈 만원 정도면 해결이 된다. 또 광화문이 가까워 세종 문화회관의 공연도 가기가 편해서, 교통의 불편으로 악마의 장소로 불리는 예술의 전당의 공연보다 훨씬 쉽게 즐길 수 있다. 또 남산 공원이나 장충단 공원도 가까워 답답한 날에는 drive를 즐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물건 값이 싸다는 것이다.. 동대문 의류 시장이 가까워 옷 값이 싸고, 과일 야채도 재래 시장이 멀지 않고 저소득 층 상대라 강남에 비해 너무 싸고, 물건도 아주 싱싱하고 좋다.
또 의류 시장에 납품하는 의류 수선 점이 많아 수선비가 싸서 몸이 불어서 못 입는 옷을 얼마든지 내가 원하는 대로 수선할 수 있다. 또 최근에 젊은이들의 뜨거운 장소로 뜨고 있는 이태원의 경리단 길이나 서울의 Central park 라고 불리는 연남동의 ‘연트랄 파크’의 이름난 중국 요리 집도 자동차로 가면 멀지 않아 어렵지 않게 가서 외식도 즐길 수 있다.
또 날씨 좋은 가을 날에는 가끔 뚝섬 역 가까이에 있는 서울 숲에 가서 산책을 즐기는데 너무 넓어서 한 바퀴 돌려면 휠체어를 타야만 한다. 필자는 10여 년 전에 뇌졸중으로 쓰러져 장애인이 되었고 후유증으로 지금도 몸의 한쪽이 불편하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먼 거리는 혼자서 걷지 못하고 올해 77세인 남편이 밀어주는 휠체어에 의지해야 한다. 물론 집안 살림은 거의 남편이 맡아서 하고 또 하루에 3시간 씩 오는 도우미 아줌마에게도 많은 의지를 한다.
평생 오로지 한길만을 걸으며 위대한 족적을 남긴 이들의 모습은 언제 봐도 멋있다. 여전히 젊음을 잃지 않은 목소리로 무대에 오르고,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는 연출력과 필력을 뽐내는 네 명의 연극 원로가 제2회 늘푸른 연극제에서 만났다. 바로 대한민국 연극을 대표하는 배우 오현경과 이호재, 연출가 김도훈과 극작가 노경식이 올해 주인공들이다. ‘원로연극제’라는 이름으로 시작해 ‘늘푸른연극제’로 문패를 바꿔 달은 이 연극제는 원로들의 노고를 격려하고 응원하는 따뜻한 예술가들의 잔치였다. 8월 한 달, 평균 연령 79세 젊은 오빠(?)들의 무대로 대학로 극장가가 뜨거운 박수로 넘쳐났다.
범접할 수 없는 화술의 대가, 배우 오현경
연극계 후배들은 오현경을 ‘학 같은 배우’라 부른다.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후배를 꾸짖는 목소리는 카랑카랑하고 곧다. 화술의 대가, 그의 연기를 말할 때 빠지지 않는 표현이다. 국내에서 가장 정확한 한국어를 구사하는 배우로 통하는 오현경은 사비를 털어 ‘송백당’을 열고 후학을 위해 화술을 가르치기도 했다. 이번 연극제의 개막작이자 오현경의 출연하는 연극 은 1984년 초연 때부터 오현경이 아버지 역을 맡아왔던 작품이다. 젊음을 향한 늙은 아버지의 주책스런 욕망을 해학과 능청스러움으로 표현해 초연 때부터 관객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고. 이번 무대에서도 또한 강단 있고 깊은 대사와 호흡으로 나이를 잊은 열연을 보여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사실주의극에 시적 분위기를 불어넣는 연출가 김도훈
혹자는 연출가 김도훈을 일컬어 ‘돈과 억세게 거리가 먼 연극인’이라고 부른다. 관객의 입맛에 맞는 연극은커녕 자신만의 연출 스타일을 끈질기게 고집하고 남녀의 애증과 갈등, 인간의 본질 파악에만 집중한다. 이 때문에 그의 작품은 진지하고 무거우며 당연히 관객이 많이 들지 않는다. 대중과 타협하지 않고 자신만의 스타일을 고집하는 연출가 김도훈. 1976년 극단 뿌리 창단 이후 40년 동안 100여 편이 넘는 작품을 선보였다. 그러나 역시 그의 대표작은 이다. 남루한 집을 배경으로 한 가족이 붕괴되고 해체되는 과정을 그린 테네시 윌리엄스의 은 1976년 첫 연출 후, 그가 가장 자주 무대에 올렸던 레퍼토리다. 이번 공연에는 국회의원을 지낸 배우 최종원이 주인공 톰으로 출연했다.
역사를 통해 현실을 환기시키는 참여적 극작가 노경식
“작가로서는 이런 자리는 처음인 것 같습니다. 한평생 처음으로 포스터에 나온 작가가 아닌가 싶습니다. 연극 잘 만들어서 후배나 선배들에게 부끄러움 없었으면 합니다.” 극작가 노경식
극작가 노경식은 1965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희곡 로 등단했다. 지난해 까지 50여 년 동안, 약 40여 편의 희곡을 발표했다. 그가 작품을 통해 들려주고자 했던 것은 우리 한국인의 이야기였다. 늘푸른연극제의 작품으로 무대에 오른 는 일제강점기 일본에 협조했던 친일 부역자를 처벌하기 위해 설치했던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부패권력에 의해 해체되는 과정을 그린 작품. 2005년 극단 미학(정일성 연출)에 의해 초연된 바 있다. 작가 특유의 역사적 안목으로 완성된 기록극이다. 의 총연출은 극단 동양레퍼토리의 상임연출가 김성노와 협력연출 이우천이 공동으로 맡았다. 권병길, 정상철, 이인철, 김종구, 유정기 등 노련한 60대와 40~50대의 중장년 및 젊은 배우들 등 총 30여 명의 연기자들이 종횡무진 새롭게 무대를 석권하는 대형 파노라마로 꾸며졌다.
첫사랑을 찾아가는 노년을 연기하다, 배우 이호재
이호재는 1964년 를 시작으로 그동안 출연한 작품만 200여 편이 넘는다. 연극평론가 구히서는 그의 연기에 ‘연기의 교과서, 대사의 달인’이라는 별칭을 만들어주기도 했다. ‘무대 위에서의 유연성과 순발력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배우’라고 극찬하기도 했다. 는 2007년에 초연된 작품으로 극작가 이만희가 이호재에게 헌정한 작품이다. 50년 만에 만난 동창이 첫사랑이었음을 뒤늦게 깨닫고 고백하는 동창생들의 이야기다. 젊은이들이 주는 풋풋함이 아닌 시니어의 우정과 사랑의 감정을 잘 녹였다. 얼마 남지 않은 생의 끝에서 따질 것 없이 던지는 그들의 모습이 귀여우면서도 애잔하게 그려졌다.
필자는 한 달에 한 번 친한 친구와 셋이서 영화를 보고 있다. 가능한 한 화제를 불러일으킨 개봉작을 선택해서 보고 있으며 아직 못 봤어도 시작한 지 오래된 영화는 그냥 넘긴다. 영화 값도 비싸져서 조조를 보려고 아침 9시에 약속한 적도 있다. 하지만 요즘은 이런저런 할인카드를 동원하면 영화표를 거의 반값에 살 수 있어 굳이 조조를 보지 않아도 된다.
필자가 활동 중인 블로거 협회에서는 한 달에 한 번 회의도 할 겸 문화의 날로 잡아 명보극장을 통째로 빌려 모임을 하고 있다. 명보극장은 필자가 젊었을 때 개봉영화를 보러 자주 갔던 곳으로 원로 영화배우 신영균씨가 주인이었는데 지금은 신영균씨가 서울시에 시니어를 위한 공간으로 써달라고 기부했다고 한다. 시니어들이 저렴한 가격으로 추억의 명화를 볼 수 있는 공간이 생겨 반갑고 감사하다.
이번에는 오전 10시, 이전의 명동 코스모스빌딩 영화관 앞에서 만났다. 신용카드를 활용해서 세 명이 1만2000원에 티켓을 샀다고 우리는 희희낙락이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한 사람당 8000원씩 들었고 주말에는 9000원도 내고 영화를 봤기 때문에 항상 억울한 생각이 들었는데 올해부터는 우리도 질세라 젊은 아이들처럼 제휴카드, 할인카드를 활용해 반값에 영화를 보면서 아주 뿌듯해한다.
역시 영화는 극장에서 봐야 제맛이다. 그런데 요즘 극장은 모두 멀티 관이 되어 한 극장에서 여러 영화를 골라 볼 수 있다. 그래서인지 상영관 화면도 작아졌다. 큰 화면과 넓은 객석이 있어야 극장이라는 느낌이 있는데 처음 멀티 관에서 영화를 봤을 때는 무척 생소했다. 화면도 좁고 객석도 얼마 안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적응이 되어 그러려니 한다. 다만 우리가 젊었을 때처럼 와이드스크린을 가진 대형 영화관이 그립다.
예전에는 충무로의 대한극장이 가장 큰 화면을 가진 제일 좋은 극장이었다. 여고 시절 중간고사나 기말고사가 끝나는 날이면 학교 전교생이 단체로 영화를 보러 갔다. 대한극장의 큰 화면과 넓은 객석에서 빼곡히 앉아 보았던 나 , 등 수많은 대작 명화를 감상하면서 멋지고 안타까운 내용에 가슴도 많이 졸였다. 또 중후하고 멋진 찰톤 헤스톤이나 잘생긴 로미오 ‘레오나르도 화이트’와 줄리엣 역의 ‘올리비아 핫세’를 동경하기도 했다.
개봉관으로 을지로의 스카라와 명보극장도 많이 찾은 영화관이다. 근처의 국도극장은 한국영화만 상영하는 국산영화 전용 개봉관이었다. 이라는 영화가 개봉됐을 때 그 일대가 인산인해를 이룬 사람들로 가득했다는 뉴스도 있었다. 광화문에 있었던 비슷한 이름의 국제극장은 외국 영화만 상영한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명동성당 근처의 중앙극장도 추억이 많은 곳인데 지금은 문을 닫아 안타깝다. 종로의 서울극장, 단성사, 피카디리극장도 필자가 좋아했던 극장이다. 영화 표를 사고 영화가 시작할 때까지 남은 시간을 보내던 피카디리극장 앞 ‘사루비아 다방’에 대한 전설도 남아 있다. 한국 영화를 찍은 감독들이 영화 개봉 날 자신들의 영화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보러 오는지 이 ‘사루비아 다방’ 2층 유리창 가에 앉아 마음 졸이며 내다보았다는 이야기다.
이렇게 일류 개봉관도 있었지만 이류, 삼류 영화관도 많았다. 영화 보는 걸 좋아했던 필자는 여중․여고 시절부터 학생 관람불가 영화를 삼류극장에서 보곤 했다. 선도부 선생님께 걸릴까봐 조마조마하면서도 무척이나 많이 보러 다녔던 기억이 있다. 일류극장보다는 삼류극장들이 학생인 줄 알면서도 통과시켜주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생각나는 곳은 대한극장 건너편 골목에 있던 아테네극장이다. 이곳에서 당시 최고의 인기를 끌었던 클리프 리처드의 영화를 본 건 정말 신나고 즐거운 추억이다. 라는 영화의 감미로운 주제곡이 흐르고 기타와 함께 여행하는 내용의 영화를 보며 열광했던 그 시간들이 생각난다. 요즘은 복합 멀티 관의 작은 상영관에서 영화를 보고 있지만, 와이드스크린의 시원한 화면으로 명작을 관람하던 그 시절이 무척 그립다.
요즘은 장마가 계속되어 야외 활동이 제약을 받는다. 갑자기 스케줄이 취소되고 나면 막상 할 일이 없다. 아까운 하루를 그대로 보내고 나서 영화라도 볼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메이저 상영관은 볼만한 영화가 없고 서울극장, 대한극장에서 상영하는 ‘옥자’가 눈에 띄었다. 영화 배급사 넷플릭스와 국내 3대 메이저 상영관이 서로 갈등하면서 마이너 상영관으로 밀려난 것이다.
비가 억수같이 내리는 날 서울극장을 찾았다. 아주 오래전에 가봤던 영화관이라 여기쯤이겠지 하고 갔는데 종로5가까지 갔다가 다시 종로 3가 서울극장에 겨우 도착했다. 바지와 신발이 다 젖어 꿉꿉했다. 영화관은 에어컨 시설은 잘 되어 있어 서늘한 온도였다. 5층에서 티켓을 사고 다시 지하 1층으로 가서 보게 하는 시스템이었다. 평일 낮 시간이라 관객을 많지 않았으나 시니어들이 입소문을 타고 자리를 채웠다. 원래 티켓 값은 9,000원인데 경로할인을 받으면 4,000원이다. 영화가 시작되었는데도 계속 관객들을 입장시키는가 하면 자리에 앉아서 계속 얘기를 해대는 시니어들 때문에 감상 분위기를 거슬렸다. 청력이 떨어지니 자신의 목소리가 얼마나 큰지 모르는 것이다. 휴대폰 통화소리도 거슬리기는 마찬가지였다.
영화는 봉준호 감독이 만들고 미자 역에 안서현, 할아버지 역에 변희봉 등이 출연했다. 세계적인 화학회사 미란도 그룹은 화학제품이 환경 파괴 제품이라 이미지 변신이 필요했다. 식량문제를 해결한다며 칠레의 한 농장에서 돼지 한 마리를 친환경적으로 품종 개량하여 보통 돼지보다 엄청나게 큰 동물을 만들었다. 전 세계 사육업자에게 보내 10년 동안 키우게 한 후 이를 알려 본격적인 마케팅을 하려는 의도였다.
강원도 산골 마을에서 할아버지와 같이 미자는 옥자를 가족처럼 키우며 평화롭게 산다. 옥자는 온순한 돼지이다. 그러나 몸집이 코끼리만 하다. 어느 날 미란도 그룹은 사람을 보내 옥자를 뉴욕으로 데려 가려 한다. 본격적인 마케팅에 등장시키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옥자가 끌려가는 동안 여러 가지 소동이 난다. 서울시내 상점가를 질주하는가 하면 카 액션도 나온다. 이때 복면을 쓴 무리들이 나타나 미란도 그룹의 추악한 실상과 옥자의 태생의 비밀을 미자에게 알려준다. 동물자유연맹 회원들이다. 작전은 옥자를 뉴욕에 보내되, 옥자의 귀 쪽에 달아놓은 미란도 그룹의 블랙박스를 자기네 블랙박스로 바꿔 미란도 그룹의 실험실의 실체를 공개하자는 것이다.
미란도 그룹은 미자도 뉴욕에 데려와 옥자와의 극적인 상봉 장면을 마케팅에 활용하려 한다. 그러나 이 장면에서 동물자유연맹은 미란도 그룹의 추악한 실체를 알리고 난장판이 된다. 옥자도 다른 슈퍼 돼지처럼 도살장에서 도살당하기 직전 미자는 할아버지에게 받은 금 돼지와 바꾸자는 협상에 성공한다. 옥자는 다시 강원도산골 마을에서 평화롭게 산다.
이 영화는 봉준호 감독이 2006년도에 만든 ‘괴물’을 연상하게 만든다. 상상의 동물도 그렇고 한강의 다리, 서울의 거리 풍경도 그렇다. ‘괴물’에 나왔던 변희봉씨가 다시 할아버지로 나온다. 영화 ‘킹콩’에서 거대한 오랑우탄을 현대판 마케팅에 활용하기 위해 뉴욕에 데려 오는 설정과도 비슷하다. ‘킹콩’도 인간과의 따뜻한 교류를 보여줬지만, 이 영화도 미자와 옥자의 교류가 따뜻하다. 특히 이번 옥자라는 상상의 동물을 실감나게 만든 봉준호 감독의 솜씨가 볼만하다. 상상의 동물인데도 질감이 사실적이다. 이런 발전은 상상의 호랑이가 나오는 영화 ‘대호’에서 이미 봤다.
“개굴개굴 개구리 노래를 한다. 아들, 손자, 며느리 다 모여서….”
노래와 함께 인형극이 시작된다. 거리를 걷다 멈춰 서다를 반복하다 간이의자에 자리 잡고 앉는 시민 관객들. 서울역 고가 보행길 ‘서울로 7017’ 개장과 함께 어린이들과의 교감을 담당하기 위해 탄생한 인형극단 ‘오늘’의 공연에 구름관객이 몰렸다. 활기차고 밝은 에너지로 중무장한 시니어들을 만나봤다.
시니어의 장점이라면 바로 노련함 아닐까? 인형극을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다는 이들이라고 했다. 그런데 어린이 관객들 앞에 서서 웃고 눈높이를 맞추며 노래하는 모습이 전문배우 못지않다. 인형극단 ‘오늘’은 ‘서울로 7017’을 지원하는 자원봉사단 초록산책단의 동아리반 활동 중 하나다. 평균연령 65세, 시니어 파워를 자랑하는 인형극단 ‘오늘’은 올해 1월부터 6개월간 맹훈련을 거듭해 인형극 ‘오늘이’를 들고 서울로 7017 담쟁이 극장에 입성했다.
인형극단 ‘오늘’에는 왜 지원했나요?
이인웅 초록산책단 안에 전체 자원봉사 활동 외에 동아리 활동반이 있습니다. 각자가 원하고 좋아하는 모임에 지원한 것이죠. 서울시 후원으로 전 국립극단 어린이청소년연구소 부소장인 유홍영 예술감독을 비롯해 많은 스태프가 도움을 줘서 열심히 연습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배우가 하고 싶었어요. 끈을 놓지 않았어요(웃음).
장광자 저는 사실 인형극단보다는 야생화반에 들어가고 싶었어요. 제가 여기서 나이가 제일 많아요. 인형극단은 대사 외우는 게 무서워서 생각도 못했어요. 그런데 오라고 하더라고요. 다행히 대사가 많이 없는 백주 할머니 배역을 주시더군요. 그래도 대사는 까먹고 또 까먹고 해요.
김정자 저는 손주들하고 하려고 시작했어요.
백남재인형극단이 처음 모이던 날 남자 배우가 없다고 빨리 들어 오라고 하더라고요. 첫 모임에는 일이 있어 못 갔는데 배역은 이미 주어졌고 빠지지도 못하겠고. 재밌게 지내고 있어요. 한 장면씩 지나갈 때마다 잘 넘어간다, 좋다 이렇게요. 잘 끝났으면 하죠 늘. 그런데 우리 여배우들 나이가 너무 많아서 불만이에요(웃음).
주인공인 오늘이는 어떻게 발탁됐나요?
양희선 제가 원래 어린이들에게 동화를 들려주고 있거든요. 인형극을 하면 꼬마 친구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줄 때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지원했어요. 주인공이 된 건 아무래도 제가 동화구연 경험이 있다 보니 목소리 흉내를 좀 냈던 것 같아요. 미모도 한 미모 할까요 ?(웃음)
이야기꾼은 특별히 연출가가 직접 뽑았다면서요? 목소리가 듣기 좋았어요.
김정자 카랑카랑한 목소리는 아들 셋 키우면 나옵니다(웃음). 맨날 소리 지르다 보면요.
관객들이랑 호흡할 때 느낌이 어땠나요?
이숙경 저는 많이 설레던데요? 아이들이 아직 어리잖아요. 눈높이에 맞춰서 노래도 불러주고요. 구연동화 활동가로 일하고 있는데 여기서 공연하면서 많이 배우고 있어요. 또 아이들이 우리를 바라봐주니까 좋아요.
오늘 무대는 어땠나요?
강부형오늘까지 총 4회 공연을 했습니다. 오늘이 제일 좋은 것 같아요. 나름 집중했고 관객 호응과 몰입도도 높았어요.
배우로 공연하는 느낌 어떤가요?
이인웅 아직은 좀 긴장된 상태예요. 공연을 시작하면 정말 얼마 안 있어 끝나는 거 같아요.
왜 인형극을 선택했나요?
조정자나이 들면서 다양한 것을 해봤어요. 인형극도 도전할 수 있는 새로운 분야였어요. 사람도 만나고, 매일 대사 암기를 하면 치매도 안 걸릴 거고요. 날마다 신나요. 연습하러 와도 즐겁고요.
인형극으로 하고 싶은 작품이 있다면?
강부형 지금 제가 라는 대본을 쓰고 있어요. 완성이 되면 인형극으로 무대에 꼭 올리고 싶어요. 줄거리는 어느 정도 나온 상태입니다.
일반봉사하면서 동아리 활동을 한다고요?
김정자인형만들기 체험학습이에요. 목요일 4시부터 인형 만들기를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놀아주는 프로그램입니다. 늙을 시간이 없어요. 못 늙어요(웃음).
가족들은 뭐라고 하나요?
구경희 엄마가 어떻게 거기에서 그걸 하냐고 하더라고요. 저 어렸을 때 천 보자기 붙들고 연극하고 그런 시절을 보냈어요. 그때는 TV도 없었고요. 그런 게 항상 마음속에 있었는데 나이 먹고 기회가 있어서 하는 게 즐거워요.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이인웅 거리에서 비보이가 춤을 추거나 가수들 노래하는 것들을 볼 수 있잖아요. 그런데 이런 연극은 많이 없는 거 같아요. ‘서울로 7017’에서만큼은 계속 다양한 공연을 하면 좋겠습니다. 누군가 지나다 우리 인형극을 보고 힐링을 할 수도 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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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바다가 떠오르는 계절 여름! 그러나 막상 바닷가로 피서를 떠나면 시원함이 아닌 태양 아래 모래사장의 뜨거움과 마주하게 된다. 그렇다고 해변에서 에어컨을 켤 수도 없는 노릇. ‘시원하게 바다 구경을 할 수 없을까?’라는 생각이 스친다면, 코엑스 아쿠아리움(서울시 강남구 영동대로 513)으로 나들이를 떠나보자. 대형 수족관에서 헤엄치는 물고기 떼를 바라보면 바닷속으로 들어온 듯 시원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어린 손주와 함께라면 더욱 유익하고 즐거운 시간이 될 것이다.
매표소에 도착하면 바닥에서 천장으로 연결되는 거대한 게이트 수조 속 알록달록한 물고기들이 관람객을 반긴다. 이곳부터 시작해 총 16개의 코스로 꾸며진 테마 존을 둘러보는 데는 2시간 정도면 충분하다. 순서에 따라 걷다 보면 각양각색의 해양생물뿐만 아니라 육지 동물 등 4만여 마리의 생물을 만나게 된다.
코스 초반에는 피라미, 송사리, 어름치 등 정겨운 우리 물고기들이 전시돼 있다. 특히 네 번째 코스인 ‘한국의 정원’에서는 경복궁 내 향정원을 축소해 옮겨놓은 비단연못이 눈에 띈다. 한국적인 분위기가 돋보이는 코스들을 지나면 현대식 인테리어가 돋보이는 ‘상상 물고기 나라’가 나온다. 전화박스, 냉장고, 정수기 등 우리 생활에 밀접한 곳곳에 물고기들이 담겨 친근하면서도 흥미롭다. 닥터피쉬(가라루파)가 사는 욕조 모양 수족관에 손을 넣어 물고기와 접촉해보는 체험도 할 수 있다.
그다음 코스 ‘아마조니아 월드’ 입구로 들어서면 다소 습한 기운이 느껴진다. 아마존 강 일대에서 서식하는 생물들이 살고 있어 열대우림과 비슷한 생태 환경을 유지한다. 세계에서 제일 큰 민물고기(3~5m)인 피라루쿠를 비롯해 식인 물고기 피라냐, 이집트 과일박쥐, 수달, 비버, 악어, 거북 등을 볼 수 있는 다채로운 구간이다.
보고 만지며 교감하는 오감만족 나들이
아이들과 함께라면 ‘마린터치 연구소’에 꼭 들러보자. 조개, 불가사리, 멍게, 해삼 등 직접 수중생물을 관찰하고 만져볼 수 있는 쌍방향 체험이 가능하다. 아울러 아쿠아리움의 전반적인 생물 배양 및 양육 기술에 대한 지식을 습득할 수 있는 공간이다.
포토타임을 즐기기 좋은 코스로는 ‘산호 미술관’을 꼽을 수 있다. 액자 형태의 수족관에 화려한 색상의 산호와 열대어들이 어우러져 멋진 그림이 완성된다. 그다음 코스인 ‘바다왕국’ 역시 많은 관람객이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곳이다. 상어, 바다거북, 가오리 등 성인 키를 훌쩍 넘는 대형 어류들이 유유히 위엄을 과시한다.
후반으로 갈수록 ‘해저터널’, ‘펭귄들의 꿈동산’ 등 남녀노소에게 인기 있는 테마 코스가 이어진다. 한 가지 염두에 둘 것은 프로그램 일정이다. 정어리 공연, 펭귄 먹이주기, 상어극장 영화상영 등 다양한 전시 및 체험을 즐길 수 있는 시간이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코엑스 아쿠아리움 홈페이지에 접속하면 자세한 일정을 살펴볼 수 있다.
모든 코스를 둘러보고 나면 선물상점이 나온다. 손주가 나들이의 추억을 간직할 수 있도록 귀여운 물고기 인형 하나 선물해보는 것도 좋겠다.
파란 하늘에 떠 있는 흰 구름이 한 폭의 수채화 풍경 같은 쾌청한 5월의 어느 날, 필자가 활동하고 있는 시니어 블로거 협회 회원 40여 명이 군산으로 근세 문화를 둘러보러 나들이에 나섰다.
군산은 전라북도 북서부에 있는 도시이며 일제강점기 이후 군산항을 중심으로 성장한 항구도시로 1899년 개항 이후 일제강점기에 우리나라 곡창에서 나는 좋은 쌀을 일본으로 빼앗아가는 항구도시의 역할로 급성장했다는 슬픈 역사가 있다.
언젠가 TV에서 일제강점기 때 우리나라 물자를 수탈해가는 관문이었던 군산을 소개하는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군산은 일본인이 많이 자리 잡고 살았던 곳으로도 설명되었다. 그래서 아직도 일본 문화와 건축물이 남아 있고 역사를 잊지 않으려는 취지로 잘 보존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어떤 동네에서는 서울의 고궁 근처에서 한복을 빌려 입고 한국 문화를 체험하는 것처럼 일본의 기모노를 빌려 입고 일본 문화를 체험해 보는 곳이 있다고 한다. 일본 옷을 입고 거리를 활보하는 모습이 좋아 보이지는 않았지만 일제강점기 역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아픈 역사이므로 보존할 가치가 있다는 설명에 이해가 되기도 했다.
필자가 일제강점기를 겪은 세대는 아니어서 일본 문화에 그리 큰 관심은 없었지만 일본의 건축물이나 일반인들이 살던 가옥은 보고 싶었다. 어린 시절 필자가 좋아했던 외갓집도 적산가옥이라 불리던 일본식 가정집이었기 때문에 무언가 아련한 그리움이 남아 있어서다.
일본의 정원문화가 고스란히 담겨 있던 외갓집은 꿈의 궁전으로 생각될 만큼 필자에겐 아름답게 기억되고 있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집 건물이 있고 왼쪽으로는 넓은 마당이 있었는데 커다란 팽나무에는 할아버지께서 필자를 위해 매어주신 그네가 있었다.
마당에는 또 아이들이 숨바꼭질할 수 있을 정도의 동산과 돌다리가 걸쳐진 연못이 있었다. 그 연못 속에 있던 돌로 만든 거북이도 멋있었고 연못 속에서 피어난 늘씬하게 쭉쭉 뻗은 수선화의 초록 이파리와 보라색 꽃도 아름다웠다.
건물 가장 끝에는 부엌이 있었고 그 옆에 칸칸으로 나누어진 커다란 미닫이 유리창은 안방 문이었다. 부엌 앞에는 마중물을 부어 위아래로 빨리 움직이면 언제나 콸콸 시원한 물이 쏟아지는 펌프가 있었다. 작은방 옆에는 석류나무가 한 그루 있었는데 새빨간 석류가 딱 벌어지면 그 안에 가득 들어 있는 보석 같은 알맹이를 보는 게 즐거웠다.
다다미로 이어진 건넌방, 긴 복도 끝의 화장실로 가는 길은 좀 으스스했지만 모두 그리운 추억의 장소로 기억된다. 그 기억을 떠올리며 군산에서의 근세 문화와 일본 가옥 돌아보기를 시작했다.
먼저 근대 역사박물관에서는 1930년대로 시간여행을 떠났다. 필자가 신어본 적은 없지만 상표는 알고 있는 경성 고무 만월표 신발가게, 조선 주조인 술도가, 군산극장, 군산역이 재현되어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납작 고무신이 정겨웠고 술도가의 술 만드는 기구와 술통이 흥미로웠다. 이곳엔 국제무역항 군산의 과거, 현재, 미래와 관련한 전시물과 함께 의병장 등 독립 영웅들의 자취 등 많은 자료가 잘 보존되어 있었다.
군산 개항 후 일본인과 함께 들어왔다는 동국사는 일본 사찰 건축 양식을 따랐고 대체로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었다. 우리나라 개화기와 근․현대사의 역사를 증명하는 건축물로서 식민지의 아픔을 확인할 수 있는 교육 자료로 활용가치가 높다고 한다.
큰 관심을 갖고 돌아본 일본식 가옥은 필자가 기억하고 있는 외갓집과 비슷한 모습이었다.
나무 창살이 촘촘한 창문도, 둥그런 유리창도 모두 추억 속 외갓집과 닮아 있어서 어린 날로 돌아간 듯 그리움이 밀려왔다.
낯설고 새로운 모습을 보는 여행도 즐겁지만 이번처럼 어린 시절을 추억해볼 수 있는 나들이도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었다. 필자에겐 더없이 행복한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