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1년만 있다 돌아가자’ 하고 한국에 들어왔다. 타국에서의 시절이 호락호락할 리 없었다. 체념도 희망도 아닌 시간들이 안간힘을 쓰며 흘러갔고 20대 네팔 청년은 어느새 40대 중반이 되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토끼 같은 아이들도 태어났다. 섬유공장 30여 만 원 월급으로 시작해 인도·네팔 요리전문점 ‘두르가’를 7호점이나 연 네팔인 비노드 쿤워(Binod Kunwor·45), 이제는 귀화해 ‘서민수’라는 이름으로 살고 있다. 주한 네팔인협회장을 거쳐 국제부위원으로 지내는 그의 하루는 너무도 바빠, 인터뷰하러 간 날 하마터면 바람맞을 뻔했다.
오후 2시 ‘두르가’ 종로 1호점에서 그를 기다린 지 30분이 지나도 연락이 없었다. 만나기 전 미리 문자메시지도 보냈는데 무슨 일인가 해서 전화를 했더니 병원이라고 했다. 30여 분 뒤 그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네팔에서 일하러 온 사람이 뇌출혈로 쓰러졌다고 해서 급하게 병원엘 다녀오느라 인터뷰가 있는 걸 그만 까맣게 잊었네요. 돈 벌러 왔다가 다치면 의사소통도 안 되고 병원비도 없어 딱한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제가 주한 네팔인협회 일을 보고 있는데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도와주고 있습니다. 현재 한국에 거주하는 네팔인들이 4만 명가량 되다 보니 일도 많이 생기고, 그래서 늘 바쁩니다.”
인도·네팔 요리전문점을 7개나 운영하는 대표라 점포 일로만 바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한국에서 지내는 네팔인들에게 일이 생기면 통역도 해주고 모금활동을 통해 물질적 도움을 주는 등 보호자 역할을 자처하느라 더 눈코 뜰 새 없었다.
미지의 나라에서 묶여버린 발
그가 한국에 온 것은 1992년, 스무 살 때였다.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고등학교 때 교과서에서 배운 내용이 전부였다. 당시에는 북한이 자원이 풍부한 나라로 더 많이 소개됐는데, 남한과 북한이 한민족이라는 사실도 몰랐다. 경제적 차이가 많이 나는 것도 한국에 와서야 알았다.
“법대에 다니고 있었는데 좀 따분한 나날들이었어요. 그 무렵 동네에서 알고 지내는 형이 한국에 갔다 왔다는 얘기를 하더군요. 저도 네팔을 떠나 새로운 경험을 해보고 싶었습니다. 일본에 갈까 한국에 갈까 고민하다가 한국행 비행기를 탔어요.”
네팔에서 그의 집은 꽤 유복한 편. 어느 날 한국에 가겠다고 차비 좀 달라고 하자 아버지는 “가려면 네 힘으로 가라”며 꿈쩍도 안 했다. 계속 고집을 피우자 부모님은 결국 100만 원을 내놓았다. 현재 가치로 따지면 꽤 큰돈이었다. 제 앞가림 알아서 잘하는 자식이라 믿고 지원해준 돈이었다. 하지만 한국에 와서 그는 난감한 시간들을 보내야 했다.
“처음엔 염색공장에서 일했어요. 한 달 일하고 손에 쥐는 돈이 30만 원 남짓밖에 안 됐는데 그 돈마저 떼이기 일쑤였죠. 요즘은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대우가 좋아졌지만 그때만 해도 노동 환경이 정말 열악했어요. 차별도 심했고 피해를 입어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죠. 딱 1년만 일하고 돌아가자 하고 왔는데, 한 푼도 모으질 못한 거예요. 월급을 떼이면 직장을 옮기고 거기서 또 월급을 떼이는 일이 반복됐으니까요.”
인도·네팔 요리전문점 대표가 되다
그 후 1년만 더 있어보자 한 것이 귀화까지 하게 됐다. IMF, 금융위기를 차례로 겪으며 경제적 활동이 순조롭지 못했지만 그의 도전 욕구는 오히려 불타올랐다. 그 사이 결혼도 하고 아이들도 태어났다. 가장으로서 식구들을 먹여 살려야 했기에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면서 국면 전환의 기회를 엿봤다. 사정이 조금씩 나아진 건 한국과 네팔을 오가며 무역업을 시작하면서부터였다.
“동대문에서 옷, 가방, 모자 등을 떼어다 네팔에 팔았어요. 돈을 모아 식료품점도 열었죠. 그때 동남아 바이어들과 자주 만났는데 그분들이 한국에 오면 갈 만한 식당이 전혀 없었어요. 특히 인도 사람들은 고기를 안 먹는 사람이 많아 식사 대접이라도 하려면 곤란했죠. 그러다 문득 한국 사람들도 카레 음식을 좋아하니 인도 음식점을 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네팔 사람이니까 네팔 음식도 곁들여 선보이면서요. 인도 음식은 향신료를 좀 더 쓸 뿐 네팔 음식과 거의 비슷해서 복잡할 건 없었어요.”
그는 판단이 서면 과감하게 밀어붙이는 사람이었다. 사업 계획을 세우자마자 본격적으로 시동을 걸었다. 그렇게 해서 2006년 서울 종각역 근처에 1호점을 연 인도·네팔 요리전문점 ‘두르가(Durga, 힌두 여신 가운데 가장 숭배받는 여신)’는 현재 7개 점포나 된다. 물론 그동안 부침(浮沈)이 없었던 건 아니다.
“‘두르가’를 오픈할 때 자신감 하나로 덤볐어요. 처음에는 손님이 없어서 힘들었죠. 월세 400만 원에 주방장과 직원들 월급 주느라 허리가 휘었어요. 그러자 동업자가 겁이 났는지 슬금슬금 손을 빼더군요. 이대로 혼자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고심하고 있을 때 언론에 저희 음식점이 소개됐어요. 며칠 뒤 전화통에 불이 나더군요. 기사를 본 손님들이 몰려오고 매상이 쑥쑥 올라갔죠. 그렇게 1년간 입소문을 타면서 비로소 안착할 수 있었어요.”
두르가 주방장은 모두 네팔인이다. 인도·네팔 요리를 맛보고 싶어 하는 손님들에게 제대로 된 요리를 제공하려면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동안 그의 점포는 물론 한국의 네팔 요리점에 그가 소개한 주방장이 100여 명이나 된다. 알게 모르게 네팔인 일자리 창출에도 기여해온 셈이다. 한국에 와서 이만큼 성공했으면 유연자적하듯 살 만도 한데 그는 여전히 바쁘다. 아내는 그래서 불만이 한가득이다. 좀 천천히 살라는 의미에서 남편에게 서(俆) 씨 성까지 지어줬건만 소용이 없었다.
“아내가 어느 날 밖으로만 돌아다니는 저를 보고 ‘너 이럴 줄 알았으면 결혼 안 했어’ 하더라고요. 아이들과 아내에게는 미안하죠. 좀 쉬면서 일해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만 그게 잘 안 되네요. 제가 해야 할 일이 너무 많거든요.”
이 정도면 일 중독자가 분명하다. 일을 벌이는 데도 거침이 없다. 요즘은 한국과 네팔 양국에 도움이 되는 사업을 구상 중이라면서, 이미 네팔에서 수력발전 사업을 추진해 곧 공사에 들어갈 예정이라고 했다. 얘기를 들어보니 모노레일 사업, 심지어 해외송금 관련 금융 사업까지 그의 머릿속은 일 생각으로 가득차 있었다. 네팔 정부 고위층도 한국에 오면 꼭 그를 찾는다고 한다. 서민수 씨만큼 한국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다문화 가정 아이들에 대한 차별, 속상하다
한국에 온 지 5년째 되던 해에 그는 아내 이지형 씨를 만났다. 이웃으로 지냈는데, 함께 밥 먹고 대화하다가 정이 들어버렸다. 그가 먼저 프러포즈를 했다. 처가의 반대가 심했지만 무사히 결혼에 골인했다. 네팔 부모님도 섭섭해하긴 했어도 큰 반대는 하지 않았다. 한국에서 성공을 이룬 건 아내 덕이 크다. 한국 문화에 어두워 곤란한 일이 생길 때마다 해결사 노릇을 톡톡히 해냈다. 그가 일을 벌이면 아내가 쫓아다니며 궂은 업무를 도맡아 하는 식이었다. 2005년도에는 아이들 교육을 위해 귀화도 결정했다. 아들딸에게 부족한 부모가 되지 않으려 두 사람은 부단히도 노력했다. 그런데 경제적 여유도 생기고 30여 년간 살며 적응도 되어 한국에서의 생활이 별 문제 없을 줄 알았는데, 그는 요즘 꽤 깊은 고민에 빠져 있다.
“귀화를 해도 다문화 가정에 대한 차별은 여전히 심한 것 같습니다. 우리야 상관없지만 아이들은 어린 마음에 상처가 큰 모양입니다. 아들이 고등학교에 다니는데 힘들어하더군요. 아이 입장에서는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한국 사람인데 생김새가 다르다고 외국인 취급하니까 억울하고 이해가 안 되는 거죠. 지금 학교에서 겪는 일들을 앞으로 직장에서도 겪을 테고, 또 결혼할 때도 분명 문제가 생길 것입니다. 부모로서 자식의 험난한 인생 여정이 예상되는데 어떤 말을 해줘야 할지 답답하네요.”
그는 경제적 어려움까지 겪는 다문화 가정 아이들은 더 심한 상처를 받고 있다며 속상한 마음을 내비쳤다.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게 있구나’ 하면서 상심할 때도 있다고 했다. 그도 가끔은 “그럼 그렇지, 네가 네팔인이지 무슨 한국인이냐?” 하는 소리를 듣는데 아이들이 그런 말을 들으면 정체성 혼란은 물론 감당하기 힘들 것이라 말했다.
“대안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아들을 2~3년간 유학 보내볼까 합니다. 좀 더 큰 세상에서 살면서 마음이 열리길 바라면서요. 내가 바뀌지 않으면 어떤 문제도 해결되지 않는다는 걸 아이가 빨리 알게 되면 좋겠습니다.”
그에게도 차별로 인한 번민의 시절이 있었을 터. 아들의 상처가 어떠하리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아는 그의, 아비의 눈은 순간 한없이 깊어졌다.
이름 그대로 ‘땅 한가운데’에 바다가 있다는 의미를 지닌 지중해. 그중에서도 이탈리아와 북아프리카 한가운데 라임스톤 보석이 박힌 것처럼 은은하게 빛나는 나라가 있으니 바로 ‘몰타(Malta)’다. 코발트빛과 에메랄드빛의 바다에 풍덩 빠져 있다가 고개를 들면 부드러운 라임스톤의 세계가 펼쳐진다. 복잡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미니멀리즘의 미학! 지중해는 수없이 들어본 이름이지만 몰타는 생소하다. 고작해야 제주도의 6분의 1 크기, 인구도 45만 명밖에 안 되는 나라. 이 작은 섬나라에 발을 딛는 순간, “이곳을 모른 채 살았다면 참으로 억울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대표 섬인 몰타와 고조, 아프리카와 가장 가까운 어촌 마을 마샬슬록까지, 지중해의 진수를 만나고 싶다면 몰타로 떠나보자.
164년 동안 영국의 지배를 받았던 독특한 역사
시칠리아 섬에서 100km 떨어진 곳에 고요히 앉은 몰타는 이탈리아와 북아프리카 사이에 떠있는 탓에 영어를 공용어로 쓰게 될 줄은 생각 못했던 것 같다. 1800년부터 무려 164년 동안이나 영국의 지배를 받다가 1964년에 독립한 몰타에는 정치·문화적으로 영국의 전통과 시스템이 많이 남아 있다. 영어와 이탈리아어를 공용어로 쓰기 때문에 여행할 때 어려움이 없으며, 한국의 어학 연수생들이 많이 찾는 나라이기도 하다. ‘월드워Z’나 ‘왕좌의 게임’ 촬영지로도 유명한 몰타는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이 나라만 찾는 여행자보다는 튀니지, 모로코, 알제리 등 북아프리카 국가들을 여행할 때 거처 가는 사람들에게, 평화로운 휴양지로 각광받고 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있다
몰타의 국민 96%는 가톨릭 신자다. 그래서 어디를 가든 성당을 쉽게 볼 수 있다. 현지인들의 여유로움 가득한 미소는 여행자의 마음을 누그러뜨리기에 충분하다. 몰타가 바다 한가운데 고립되어 있는 탓일까? 국민들이 보수적 성향이 강하며 가족 간 유대도 끈끈해 이혼율이 낮다고 한다. 치안과 위생도 잘되어 있다. 정직하고 깨끗한 국민성은 유럽 내에서도 손꼽을 정도다. 복지도 확실해서 거리에서 구걸하는 사람을 볼 수 없다. 눈만 마주쳐도 반갑게 손을 흔들어주는 사람들. 노부부가 벤치에 나란히 앉아 해가 지는 쪽을 말없이 바라보는 평화로운 모습은 몰타가 어떤 나라인지를 말해주는 듯하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제목의 영화도 있지만 몰타는 이 세상에 노인을 위한 나라도 있으니 한번 와서 살아보지 않겠냐고 말을 건네는 듯하다.
중세로 떠나는 시간여행, 발레타와 음디나
몰타의 수도이자 7000년 역사를 지닌 요새도시 발레타는 세계에서 가장 밀집된 역사지구인 동시에 유럽에서 가장 작은 크기의 수도다. 도시 전체는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몰타’라는 국가명은 6개 섬 중 대표 섬인 몰타에서 따왔다. 몰타는 수도 발레타가 있는 가장 큰 섬 몰타와 고조 섬에 모든 것이 집중되어 있고, 나머지 섬엔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다. 발레타는 행정과 비즈니스의 중심지로 언제나 관광객들로 북적인다. 성 요한 대성당과 몰타 기사단장 궁전, 국립고고학박물관이 유명하다. 아름다운 건축물들 사이에선 아방가르드 예술에서부터 전통적인 교회 연회에 이르기까지 연일 다양한 이벤트가 펼쳐진다. 아기자기한 가게들과 보석가게들, 로맨틱한 카페와 레스토랑은 여행자들의 발길을 붙잡는다.
옛 수도인 음디나는 중세시대의 건물이 많이 남아 있어 노블시티(novel city)로 불리는데, 오늘날에는 몰타의 최고 부유층이 사는 곳으로 유명하다. 중세와 바로크시대의 건축물이 독특하게 조화를 이루는 골목길들은 작은 자동차가 겨우 지나갈 만큼 좁다. 이런 도시 구조는 적들이 쏜 화살이 멀리 날아가지 못하게 하고 말도 빨리 달리지 못하게 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세상 어느 것 하나에도 이유 없는 것이 없다. 밤이면 정적에 가까울 만큼 조용하고 절제된 분위기를 풍겨 ‘침묵의 도시’라고도 불리는 이곳은 고즈넉한 휴식을 취하기에 더없이 좋다.
블루와 라임스톤이 조화된 미니멀리즘 도시
몰타는 크게 두 가지 색깔로 표현할 수 있다. 하나는 블루와 에메랄드빛 바다이며, 또 하나는 구시가지를 기억나게 하는 부드러운 라임스톤색이다. 두 가지 컬러로 세상을 보여주는 몰타는 단조롭다기보다 정갈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훼손되지 않은 자연의 미로 가득한 고조 섬에 비해 몰타 섬은 좀 더 현대적이라고 말하지만 인공미 가득한 세상에서 온 여행자의 눈엔 고조 섬도 몰타 섬도 그저 아름다울 뿐이다.
크리스마스가 임박한 몰타의 풍경. 산타클로스 인형이 건물에 대롱대롱 매달려 벽을 타고 올라가고 있다. 그 모습만으로도 이 나라 국민들이 얼마나 낙천적인지를 알겠다. 매순간 숨이 막힐 정도로 진지하고 투쟁적인 나라에서 온 여행자는 벽에 매달린 산타클로스 인형을 보며 삶이 매사 그렇게 진지하고 투쟁적일 필요가 있는 건지 스스로에게 물었다.
몰타의 과거 흔적이 남아 있는 고조 섬
고조 섬은 ‘칼립소의 섬’으로도 불린다. ‘칼립소’는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바다의 요정인데, 오디세우스가 아름다운 그녀와 함께 7년을 머물렀던 동굴이 고조 섬 북쪽에 있다 한다. 몰타 섬에서 40분이면 닿는 고조 섬. 그곳으로 가는 페리 안에서 만난 아이들의 쾌활한 웃음은 여행자의 피로를 한방에 날려버릴 만큼 맑고 눈부셨다. 그 순간 여행자의 나라에 사는 아이들의 그늘지고 지친 표정이 떠올라 한없이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고조선이라는 이름을 연상시키는 고조 섬에는 이름과 어울리게도(어울리는) 선사시대 유적지 간티야 거석사원이 원래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17세기 고조 섬의 주도(主都)였던 빅토리아 요새도 그대로 남아 있다. 작은 성당과 성채(城砦), 아기자기한 카페와 와이너리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모습은 몰타 섬과는 또 다른 정취를 느끼게 한다. 고조 섬 북쪽에 있는 간티야 거석사원은 기원전 3600년에서 3000년경 건축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이는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이집트의 피라미드나 영국의 스톤헨지보다 100년이나 앞선 것이라 하니 놀라울 따름이다. 우리가 얼마나 강대국 우선으로 순위를 매기며 살고 세계 곳곳에 있는지 깨닫게 됐다. 그동안 원조로 알려진 것이 사실은 원조가 아니었다. 알고 보면 역사가 더 깊고 가치 있는 진짜들이 숨어 있는 경우가 많다. 몰타도 그중 하나다.
현지인들의 삶의 향기가 느껴지는 마샤슬록 어촌 마을
몰타 최대의 어촌 마을 마샤슬록은 15~16세기에 터키군과 나폴리군이 격전을 벌인 곳이라한다. 알록달록한 무지갯빛의 몰타 전통 배 ‘루츠(Luzz)’가 코발트빛 바다 위에 떠 있는 모습을 보면 마치 예쁜 그림엽서를 보는 듯하다. 건물 사이의 네모난 틈새로 보이는 바다가 액자 속 그림처럼 아름답다. 이곳에서는 매주 일요일에 최대 수산시장인 선데이마켓이 열린다. 앤티크 상품을 파는 벼룩시장도 인기다. 마을 풍경을 바라보며 고조 섬 사람들이 만든 와인에 취해본다. 떠나기 하루 전날에는 아쉬운 마음이 들어 부둣가로 나갔다. 몇 시간이나 우두커니 앉아 사람들이 낚시그물을 걷어 올리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러다가 문득 드는 생각. ‘저들은 원래 어부이지 않았는가? 이곳이 지중해의 아름다운 섬이어서 그렇게 보이는 걸까? 이 나라 어부들의 모습에서는 삶의 고단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구나.’ 그러면서 다시 바다로 눈길을 돌린다. 바다 속이 훤히 보일 만큼 맑게 출렁이는 바다가 어느새 여행자의 마음을 보석처럼 반짝이게 한다.
Travel Tip
몰타로 가는 직항은 없다. 보통 두바이를 경유해서 가는데 중간에 키프로스를 경유하기도 한다. 이때 대기시간은 대략 한 시간이다.
통도사는 신라 선덕여왕 15년(646) 자장율사가 창건한 천년고찰로, 자장율사가 당나라 구법(求法) 중에 모셔온 부처님의 사리와 가사 및 경책을 금강계단을 쌓은 뒤 봉안하였다. 절이 위치한 영축산(靈鷲山)이 부처님이 법화경을 설(說)하신 인도 영축산과 통한다는 뜻으로 통도사라고 하였다. 대한불교 조계종 15교구 본사 통도사는 산기슭에 계류를 끼고 펼쳐진 비교적 평탄한 지형에 위치한 규모가 매우 큰 절집으로 통도사를 일컫는 표현은 여러 가지다.
첫째가 5대 적멸보궁(석가모니 부처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모신 법당) 중 제1적멸보궁이라는 자부심이다. 5대 적멸보궁은 통도사 외에는 모두 강원도에 있다. 오대산 상원사, 설악산 봉정암, 사자산 법흥사와 태백산 정암사이다. 이 중 태백산 정암사를 제외하고는 모두 신라시대에 자장(慈藏)이 당나라에서 귀국할 때 가져온 불사리 및 정골(頂骨)을 직접 봉안했다. 정암사에 봉안된 사리는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泗溟大師)가 왜적의 노략질을 피해서 통도사의 것을 나누어 봉안했다. 불교도 간에는 이들 5대 적멸보궁을 모두 찾아보는 순례적 숭배를 뜻깊게 생각하며 가장 신봉하는 기도처로 손꼽힌다. 최근에는 용연사와 건봉사, 도리사를 합쳐 8대 적멸보궁이라고도 한다.
두 번째, 통도사는 불(佛), 법(法), 승(僧)의 삼보(三寶) 중 불보(佛寶) 사찰이다. 법(法)에 해당하는 팔만대장경을 모신 법보(法寶) 사찰 해인사, 승(僧)을 뜻하는 승보(僧寶) 사찰 송광사와 함께 삼보(三寶) 사찰로 부른다. 그중 부처님의 진신사리와 금란가사(금실로 수놓은 가사)를 모셨기에 삼보사찰 중 으뜸인 불보종찰(佛寶宗刹)이라 한다. 이는 일주문 좌우에 걸린 '불지종가(佛之宗家)' '국지대찰(國之大刹)'이라는 말로 통도사의 품격과 사세(寺勢)를 가늠할 수 있다.
세 번째는 '영축총림(靈鷲叢林)'이다. 우리나라(조계종)에는 ‘5대 총림’으로 통도사, 해인사, 송광사, 수덕사, 백양사를 손꼽는다. 승려의 참선수행 전문 도량인 선원(禪院)과 경전 교육기관인 강원(講院), 계율 전문교육기관인 율원(律院)을 모두 갖춘 사찰을 총림(叢林)이라고 한다. 그만큼 규모가 크고 조직과 체계가 정비된 큰 절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최근에는 동화사, 범어사, 쌍계사를 추가하여 ‘8대 총림’이라 한다. 통도사에는 국보 제290호 대웅전 및 금강계단과 25점의 보물이 있으며, 성보문화재 4만여 점을 소장한 국내 최대 규모의 성보박물관을 운영하고 있다.
영축산(靈鷲山) 통도사(通度寺)
통도사의 가람(승려가 살면서 불도를 닦는 곳)배치는 금강계단을 서쪽에 정점으로 두고 동쪽의 일주문을 들어서면 천왕문과 불이문 사이에 ‘하로전’이 있다. 불이문을 지나면 대웅전 못미처 세존비각까지가 ‘중로전’이다. 대웅전과 금강계단이 있는 지역을 ‘상로전’이라 한다. 이렇게 노전(爐殿)이 세 개라는 것은 통도사가 3개의 가람이 합쳐진 복합 사찰이라는 의미이다. 그만큼 크고 역사가 오래된 절을 의미하며 특히 금강계단이 있는 상로전이 통도사 핵심지역이다. 중로전에는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대광명전과 용화전, 관음전이 있다. 하로전에는 극락전과 영산전, 약사전 등이 있다.
통도사로 들어가는 경부고속도로 IC 명칭이 통도사이다. 특정 종교시설을 나들목 명칭으로 한다고 말도 많았지만 이 근처에서는 통도사를 대치할 지명이 없다. 절 아래 마을은 기념품점과 식당이 모여 있다. 사하촌(寺下村) 수준을 넘어 작은 신도시를 연상케 한다. 어린이집부터 양로시설까지 통도사 시설이 여럿 눈에 띈다. 시가지가 끝나는 지점에 거대한 산문(山門)이 매표소를 겸한다. 걸어가거나 차량에 탄 채로 표를 끊고 십 분여 들어가면 두 번째 산문인 총림문(叢林門) 옆이 주차장이다. 길옆에 흐르는 맑은 시내는 차고 시원해 여름철 피서지로도 인기있다. 영축총림(靈鷲叢林) 대형 현판을 단 총림문(叢林門) 앞에는 제법 큰 규모의 석당간(石幢竿)이 있다. 오른쪽에는 경내 승탑과 탑비를 한 곳에 모아놓은 부도원(浮屠院)이 조성되어 있다. 총림문 지나 오른쪽으로는 성보문화재 40여 만점을 보관, 전시 중이라는 국내 최대 규모의 성보박물관이 있는데 목재와 석재 사찰 장승이 2기씩 서 있다. 초입부터 볼거리가 많은 통도사. 성보박물관을 지나면 비로소 일주문이 나오는데 여기서부터 사찰영역이며 하로전이다. 통도사는 일주문도 여느 절집에 비하여 결코 작지 않은 규모이나 이미 지나온 2개의 문이 워낙 크고 화려해서 오히려 작아 보인다. 보통 2개의 기둥을 한 줄로 세우지만 이곳은 네 개의 기둥을 세운 세 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에 다포형식이 화려하며 좌우 앞뒤로 또 4개의 활주를 받쳐야 할 만큼 크고 무거운 일주문이다.
일주문 앞 2개의 돌기둥에는 구하(九河) 스님이 쓴 '이성동거필수화목(異姓同居必須和睦)', '방포원정상요청규(方抱圓頂常要淸規)' 즉 '각 성들끼리 모여 사니 화목해야 하고, 가사 입고 삭발했으니 규율을 따라야 한다'는 뜻으로 통도사 스님들에게 주는 경구라고 보면 될 듯하다. 일주문 현판 ‘영축산(靈鷲山) 통도사(通道寺)’는 흥선대원군 친필이다. 일주문 가운데 기둥 2곳에 걸린 주련은 남쪽 지방 사찰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해강(海岡) 김규진(金圭鎭)의 글씨. 앞서 통도사의 위상을 설명할 때 나온 2가지 표현, '불지종가(佛之宗家)' '국지대찰(國之大刹)'은 통도사의 사격(寺格)을 나타내는 글귀다.
천왕문을 들어서면 하로전이다. 왼쪽에 2층 건물 범종루가 있고, 오른쪽에 극락보전이 있다. 그 앞마당에는 왼쪽에 만세루, 오른쪽에 영산전, 극락보전 맞은편에는 약사전이 중앙의 3층 석탑을 중심으로 'ㅁ자' 꼴로 모여 있다. 하로전을 독립된 하나의 사찰로 간주했을 때 만세루를 입구로 하여 중앙에 3층 석탑을 세우고 정면에 영산전, 오른쪽에 극락보전, 왼쪽에 영산전을 갖춘 모양새로 이해할 수 있다. 즉, 하로전의 중심건물은 영산전으로 보이는데 사람들 발길은 극락보전으로 먼저 향한다. 들어오는 입구에 있기도 하거니와 극락보전 외벽에 그려진 벽화가 눈길을 끌기 때문인데 극락전 후벽 중앙에는 반야용선 벽화가 그려져 있어 모든 이들이 감탄해 마지않는다.
하로전의 중심건물은 영산전으로 극락전마저 이곳에서는 부속 불전이다. 만세루와 마주 보며 서 있는 영산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다포계 양식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내외 벽화는 매우 주목되는 작품으로 외벽의 그림은 풍화(風化)를 받아 많이 훼손되었으나 내벽의 그림은 그런대로 잘 남아있다.
하로전에는 앞에서도 언급한 만세루와 약사전이 있다. 뜻밖에도 눈길을 끄는 건 천왕문 왼쪽에 숨은 듯 자리 잡은 작은 가람각(伽藍閣)이다. 가람을 수호하는 가람신을 모신 사방 1칸짜리 법당이다. 아홉 마리 중 남아있는 한 마리 용신을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어서 목수 한 사람이 도끼 하나로 쇠붙이를 전혀 쓰지 않고 지었다는 불이문(不二門)을 지나면 중로전이다. 불이문(不二門) 편액은 송나라 미불의 글씨이다. 그 아래 원종제일대가람(源宗第一大伽藍) 편액은 명 태조 주원장 친필로 전해지는데 원래는 일주문에 걸었다고 한다.
몇 개의 계단을 올라 하로전보다 약간 높은 지형의 일주문을 지나 중로전으로 들어서면 먼저 관음전이 나타난다. 그 오른쪽 뒤편으로 용화전, 대광명전이 있으니 이 세 불전이 중로전의 중심건물이다. 관음전은 정면, 측면 공히 3칸의 정사각형 건물로 주심포식 팔작지붕이다. 자비로운 관음보살을 모셔 항상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드리느라 분주한 곳이다. 관음전 앞에는 3m가 넘는 큼직한 석등이 하나 서 있다. 네모난 화창에 팔각 받침과 지붕돌을 얹은 고려시대 형식으로 경남 유형문화재 제70호이다. 관음전 뒤 용화전 안에는 하얗게 호분칠을 한 석조미륵불 좌상을 모셨다. 내부 벽체에는 절집에서는 유일하게 서유기 벽화가 그려져 있다. 특히 용화전 앞에는 봉발탑(奉鉢塔)이 서 있다.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석물이나 무슨 용도인지 알 수 없다.
용화전 뒤에는 비로자나불을 모신 중로전의 중심건물 대광명전(大光明殿)(보물 제1827호)이 있다. 통도사에서 가장 오래된 곳으로 대웅전과 함께 통도사에서 중요한 목조건물 꼽힌다. 내부의 삼신불 탱화는 보물 제1042호이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불을 질러 통도사가 모두 타 버렸을 때도 대광명전만이 불타지 않았다. 내부 들보에 화재를 예방하는 묵서가 쓰여 있어 그랬다는 말이 전해온다.
吾家有一客(오가유일객) 定是海中人(정시해중인)
우리 집에 한 분의 손님이 계시니, 바로 바닷속에 사는 사람이다
口呑天藏水(구타천장수) 能殺火精神(능살화정신)
입에는 하늘에 넘치는 물을 머금어, 불의 정신을 소멸할 수 있네
이후 통도사에서는 위 문구를 적은 종이로 밀봉한 소금단지 60여 개를 크고 작은 당우(堂宇)마다 처마에 올려놓아 화재를 예방했다. 매년 양기가 가장 세다는 단오에는 새 소금을 담은 소금단지로 교체하는 용왕재를 올린다. 그 밖에도 불전마다 댓돌 계단 아래 아귀발우(餓鬼鉢盂)가 있다. 아귀밥통이라고도 하며 부처님께 올린 청정수나 공양을 마친 후 물을 버리는 용도로 퇴수대(退水臺) 혹은 청수통(淸水筒)이라고도 한다.
‘아귀는 늘 배고파서 아우성인데 목구멍은 바늘만 해서 물만 마실 뿐 음식을 먹지 못하니 소중한 물을 버리지 않고 아귀에게 준다’는 의미다. 음식 찌꺼기 하나도 버리지 않겠다는 절약과 검소함을 익히려는 한국불교의 귀한 풍습이기도 하다.
중로전 마당 왼쪽의 원통방과 감로당은 법회 시 대중을 수용하는 대방(大房)으로 공양간이 함께 있는 편의시설로 쓰고 있다. 원통방 처마 밑에는 원통소(圓通所) 편액이 있다. 이 역시 흥선대원군의 친필로 석파(石坡) 호가 쓰여 있다.
그밖에 원통전 옆 서쪽에는 개산조당(開山祖堂)과 해장보각(海藏寶閣)이 있다. 사대부집에나 있을 솟을대문 형식의 삼문(三門)에 개산조당(開山祖堂) 현판을 달았다. 그 뒤편의 전각이 통도사 창건주 자장율사의 영정을 봉안한 해장보각이다. 개산조당 삼문 앞에는 고려시대쯤으로 보이는 고식(古式)의 석등이 하나 서 있다. 그 오른편에는 야간에 불 밝히는 정료대(庭燎臺)처럼 보이는 석물이 있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 수행하는 37가지 방법을 새겨 놓은 삼십칠 조도품탑(三十七 助道品塔)이라고 한다.
개산조당 삼문 옆 금강계단 축대 아래 붙여지은 작은 비각은 세존비각(世尊碑閣)이다. 자장율사가 중국에서 사리를 모셔온 일과 임진왜란 당시 사명대사가 불사리를 보호하기 위해 크고 작은 2개의 함 안에 보관하였다. 그 후 한 개는 통도사 금강계단에 봉안하였고, 또 다른 하나는 태백산(太白山) 갈반사(現 정암사)에 봉안되었음을 새긴 비석이다.
이렇게 하로전, 중로전의 중요한 전각만 둘러보았어도 웬만한 절집 두 곳 넘게 본 셈이나 정작 통도사에서 가장 중요한 지역 상로전이 남았다. 상로전에는 별도의 문이 없어 정(丁) 자 형태의 특이한 대웅전이 바로 나타나는데 오른쪽 뒤에 있는 금강계단과 함께 국보 제290호이다.
상로전의 주 건물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5칸 규모인데 동, 서, 남, 북 네 곳 모두에다 현판을 걸어놓았다. 들어가는 방향인 동쪽에는 대웅전(大雄殿), 서쪽은 대방광전(大方廣殿), 남쪽에는 금강계단(金剛戒壇), 북쪽에는 적멸보궁(寂滅寶宮) 등 각기 다른 현판을 걸었다. 적멸보궁(구하 스님 글씨) 외에는 모두 흥선대원군 글씨이다.
대웅전은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45년(인조 23)에 중건했다. 건물 기단은 통일신라시대 석조기단과 같은 구조다. 남측 정면과 양측면 지붕이 합각인 특이한 모습에 일부는 철제 기와도 보여 보통 건물이 아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지붕 정상에는 찰간대(刹竿臺·큰 절 앞에 세우는 깃대)라고 통칭해 부르는 청동제 보주(寶珠)에 철주(鐵柱)가 솟아있다. 이는 규모가 있는 절 또는 부처님의 연궁(蓮宮)을 나타낸다. 처마 끝 지붕에는 도자기 연봉 장식이 있어 불사리 금강계단과 적멸보궁 장엄에 온갖 정성을 쏟았음을 알 수 있다. 대웅전의 내부 우물천정은 목단, 국화문 등을 조각한 위에 단청(丹靑)했다. 동쪽 대웅전 현판 아래 두 장의 꽃살문 역시 조각이 우아하다. 연화문, 옥단문, 국화문 등을 새겨 문살을 장식했다.
통도사 절터는 원래 큰 연못이었다고 한다. 그곳에 살던 아홉 마리 용을 교화시켜 승천하게 한 뒤 연못을 메운 후에 금강계단(金剛戒壇)을 쌓아 자장율사가 통도사를 창건했다. 아홉 마리 중 한 마리는 남아서 절을 지키겠다하여 연못 한 귀퉁이에 살게했다. 천왕문 옆 가람각은 용을 위한 전각으로 전해진다.
계단(戒壇)은 ‘계(戒)를 수여하는 의식이 행해지는 장소’이다. 부처님 진신사리가 모셔진 금강계단에서 계를 받는 것은 부처님으로부터 직접 계를 받는 것과 동일하다. 통도사 창건의 근본정신이 깃든 곳이라 할 수 있다.
한동안 금강계단에 직접 참배를 금지하였으나 최근에는 지정된 날자와 시간에 안으로 들어가 가까이에서 참배할 수 있다. 음력 초하루부터 초삼일, 음력 보름날 그리고 지장재일인 음력 18일과 관음재일인 음력 24일의 오전 11시부터 오후 2시까지이다.
대웅전의 서쪽으로는 산령각과 삼성각, 응진전이 있다. 비좁은 공간에 작고 예쁜 연못이 하나 있는데 남아서 절집을 지키겠다던 한 마리 용이 살던 구룡지(九龍池)이다. 연못자리에 절이 지어졌다는 창건설화를 증명하듯이 일 년 내내 마르지 않는 연못으로 멋스러운 공간이다. 상로전의 나머지 공간에는 응진전과 명부전, 일로향각이 있고 보광전과 선원 구역이 있는데 일반인의 출입을 금지하거나 관리 목적의 건물 등이다.
흔히 과거를 회상하다 보면 어떤 운명적인 순간들과 마주친다. 그럴 때마다 묘한 감정에 휩싸인다. 당시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다면 나의 인생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그 선택들은 우연이었을까? 필연이었을까? 만약 다른 선택을 했다면 어떤 인생이 펼쳐졌을까? 작가 이언 매큐언은 자신의 소설 ‘체실 비치에서(On Chesil Beach)‘에서 이에 대한 답을 찾고자 한다. 우리는 이를 영화로 만나는 행운을 얻었다.
나무와 꽃과 새 이름을 무수히 많이 알고 자연을 사랑하는 역사학도 에드워드(빌리 하울)와 부유한 집안에서 자라고 클래식을 전공한 옥스퍼드 출신의 재원 플로렌스(시얼샤 로넌)는 운명적인 만남의 결실로 결혼에 골인하여 지금 이곳 체실 비치에 있는 작은 호텔로 신혼여행을 왔다. 영화는 체실 비치의 아름다운 풍광과 끊임없이 흐르는 배경음악을 통해 이들의 운명을 암시한다.
신혼 첫날 호텔 방에 들어선 둘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사랑해!”를 연발하지만, 내심 초조하고 불안하기 짝이 없다. 성이 조금씩 개방되기 시작한 1962년 영국의 젊은이들에게 섹스는 아직 서툴고 어색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거칠고 감정적인 에드워드는 무작정 서둘렀고 성에 엄격한 영국 사회의 문화에 익숙하며 어린 시절 성적 트라우마를 겪은 플로렌스에게 첫 경험은 너무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결국 둘의 합방은 실패로 끝나고 거친 언사를 주고받은 끝에 플로렌스는 방을 뛰쳐나간다. 바로 이 순간이 이들의 운명을 결정한다. 플로렌스는 밖으로 나가 체실 비치의 긴 조약돌 백사장을 걸어 낡은 나룻배에 앉아 있고 뒤를 따라 나간 에드워드는 그녀에게 모진 욕설을 퍼붓고 그녀는 마음의 결심을 그에게 토로한다. 가장 행복했던 날 그들은 헤어진 것이다.
물론 스토리는 간단하지만, 이 영화가 그렇게 단순한 것은 아니다. 영화는 사이사이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과거를 교차 편집한다. 그곳에서 그들의 만남과 연애 과정이 드러난다. 런던 변두리 지방대이긴 하지만, 역사학과를 수석 졸업한 에드워드는 자신의 기쁨을 함께 나눌 대상이 없다. 집을 뛰쳐나간 그가 어느 대학 반핵 행사장에서 플로렌스를 만나 한눈에 반한다.
아버지가 변두리 시골 초등학교 교장이고 어머니는 그림을 그리지만, 뇌 손상을 당한 사건으로 정상이 아닌 에드워드 가정에 비해 전기회사를 경영하는 중상층 가정으로 돈을 중시하는 플로렌스의 환경은 애초 어울리기 힘든 조건이다. 그럼에도 플로렌스는 에드워드의 부모를 존중하고 에드워드는 플로렌스 부모에게 무시당하고 멸시받지만, 참아내면서 사랑을 키운다.
이렇게 어려움 속에서도 굳건히 키워왔던 사랑이 한순간에 허무하게 끝나버린 배경에는 이런 환경과 계층 간 보이지 않는 간격이 있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욱하는 성격으로 싸움을 즐기던 에드워드의 거친 감성이 플로렌스의 차분하고 예술적인 감성을 포용해내지 못한다. 어쩌면 이들의 헤어짐이 찰나의 행동에서 유발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이런 감정의 누적이 원인이라는 말이다.
가지런하게 뻗어 있는 조약돌 해변도 자세히 보면 작은 돌 해변과 큰 돌 해변으로 구분되어 서로 섞이지 못한다. 배경으로 흐르는 음악도 플로렌스의 클래식과 에드워드가 좋아하는 로큰롤로 양분된다. 결국 이언 매큐언은 모든 운명은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라는 해석을 드러낸다.
영화 후반부 동료 첼리스트와 결혼한 플로렌스가 45년간의 연주 생활을 마감하는 고별 연주회에 서로 다른 삶을 살아낸 에드워드가 일찍이 그녀와 약속했던 C 5번 좌석에 앉아 눈물을 흘리는 장면은 엇갈린 삶의 회한이 응축되어 있다.
발은 거실 소파에 편히 앉아 있지만 눈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TV 화면 속 할배들과 동행하여 체코 프라하의 추억을 반추해 본다. 한국에서 동유럽 여행 코스는 대부분 독일에서 시작하여 체코 프라하, 체스키크룸로프를 경유하여 비엔나로 향한다.
프라하는 체코 공화국의 수도이며 프라하 구시가지에는 체코의 상징물인 프라하성이 있다. 남쪽 오스트리아 국경지대근처에는 아름다운 체스키크룸로프성과 중세의 마을이 자리 잡고 있다. 체코 공화국은 지역적으로 10세기 이전부터 세계사를 끊임없이 움직인 강대국 사이에 위치해 우리나라 못지않게 역사의 부침이 심했다. 2차 세계대전의 피해국이었지만 직접 전쟁에 가담한 나라는 아니기 때문에, 유적만은 찬란하게 보존되어 있다.
약 10세기를 전후해 이전 신성로마제국 영토 일부에 건설된 보헤미아 왕국이 체코공화국의 전신이다. 보헤미아는 프라하의 옛 명칭이기도 하다. 14세기 세계적인 유적지 프라하 블타바강의 카를대교를 건설하고 유럽 최초의 대학인 프라하대학을 세운 카를 4세는 보헤미아왕국의 전성기를 이끈 인물이다.
16세기 체코는 바로 옆 나라이면서 유럽의 최강국인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에 속해 지배를 받다가 1918년 체코와 슬라브족의 슬로바키아를 합병한 체코슬로바키아라는 국명으로 독립한다. 하지만 다시 독일의 나치정권하에 속하게 된다. 2차 세계대전 후 독일로부터는 독립하지만 동유럽 공산국가로 옛 소련(소비에트 연방)의 영향권으로 편입하고 그 후 끊임없이 공산당과 비공산주의자들의 투쟁, 민주정권 수립을 갈망하던 중 개혁파가 정권을 잡기에 이른다. 이런 노력의 변화를 세계사에서는 ‘1968 프라하의 봄’이라고 부른다.
‘프라하의 봄’ 자유화 운동은 실패하여 다시 긴 겨울이 찾아오게 되지만 1989년 소련의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사회주의 체제 개혁에 힘입어 체코의 민주 시민 시위가 성공한다. 1993년 비공산주의자 바츨라프 하벨 대통령 취임 후 바츨라프 광장에서 평화적인 무혈혁명을 연설했는데, 이를 상징적으로 ‘벨벳혁명’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드디어 체코 공화국과 슬로바키아는 분리됐다.
이후 체코 프라하는 세계인의 관광 여행 주 무대에 오르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이 보고 싶어 하는 프라하성은 9세기 보헤미아 왕국 시절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건축되기 시작하여 고딕, 르네상스를 거쳐 18세기 바로크에 이르기까지 900년에 걸쳐 개축됐다. 그야말로 건축 역사의 진수를 보여주는데, 세계인은 그 아름다움에 놀라고 경탄을 금치 못한다. 프라하성에는 스테인드글라스창이 유명한 비투스 대성당과 대통령궁, 박물관, 유명한 야경 등 볼거리가 즐비하다.
역시 보헤미아왕국에 의해 13세기 고딕형식으로 건축되었던 체스키크룸로프성은 16세기에 르네상스 양식으로 개축이 되어 르네상스풍의 둥근 지붕이 특징이다. 체스키크룸로프성 인근에는 중세의 문화를 그대로 간직한 마을, 미로 같은 뒷골목과 상점들이 어우러져 아름답고 경이로운 풍경을 자랑한다.
관광객들은 활기찬 골목 쇼핑과 사진 찍기에 정신이 쏠려 언제 공산주의가 이곳에 있었는지 가늠해볼 겨를도 없다. 체스키크룸로프 마을은 ‘체스키크룸로프 역사지구’라 불리며, 마을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에 등재됐다. 체코의 음악가로는 우리가 잘 아는 안토닌 드보르작이 있고, 교향시 ‘나의 조국’의 작곡자 베드르지흐 스메타나가 있다.
여름은 무더워 신체가 상하기 쉬운 계절이다. 누구나 기진맥진해하고 힘들어한다. 선풍기나 에어컨의 도움을 받기도 하지만 몸이 허약하면 선풍기나 에어컨 바람도 싫어진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계절이다. 나이 든 사람일수록 더 힘들다. 고산이나 북쪽의 서늘한 곳으로 피서를 떠나는 것이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한두 달 피서를 가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외부의 더위를 피할 수 없다면 신체 내부의 환경을 바꿔 열을 식혀야 한다. 여름 무더위는 한의학적으로 습열이라 하는데, 폐가 이 습열을 식혀준다. 그런데 몸이 약해지면 폐가 손상되어 습열을 제거하지 못해 비위와 콩팥 기능까지 떨어진다. 이것이 바로 여름 병증이다.
이번 호에는 무더위를 이기는 맛에 대해 설명하고자 한다. 무더위를 이기는 맛은 약한 신맛과 약한 짠맛, 그리고 단맛이다. 이미 우리의 음식 문화에는 이런 맛이 여름 먹거리로 녹아들어와 있다.
첫째 약한 신맛은 약간 시큼한 맛이다. 황매실차, 오미자차를 먹어보면 새콤한 맛이 느껴지면서 침이 고인다. 그리고 전신의 피부가 닭살처럼 일어난다. 새콤한 맛은 피부의 땀구멍을 닫아주는 효과가 있다. 더위를 먹는다는 것은 폐의 기운이 부족해 피부의 땀구멍이 열려 땀이 줄줄 흐르는 상태를 말한다. 그러면 기운이 떨어지고 밥맛도 없어진다. 새콤한 맛은 땀구멍을 닫아 기운이 새어나가는 것을 막아준다. 중국 명의인 손진인 선생이 “여름철에는 늘 오미자를 복용해 오장의 기운을 보해야 한다”고 말한 것은 이 때문이다. 매실차는 3년쯤 묵힌 황매실차가 좋다. 갓 담근 매실차는 강하게 시큼한 맛이라 체했을 때 소화제로는 좋지만 여름 보양 음료로는 적합하지 않다.
장수 음식으로 꼽히는 흑초도 좋다. 현미식초를 먹어보면 강하게 시큼한 맛이 느껴지다가 끝 맛이 쓴데, 이런 맛은 체한 것을 풀어주지만 여름 보양 음료로는 적합하지 않다. 흑초나 홍초는 약간 시큼하다가 끝 맛이 달면서 입에 침이 고인다. 이런 맛이라야 여름 보양 음료라 할 수 있다. 또 당연히 오래 묵힌 것일수록 효능이 있다. ‘동의보감’에서는 오미자가 들어간 생맥산(生脈散)을 여름 보양 음료로 추천한다. 맥문동 8g, 인삼 4g, 오미자 4g을 물에 달여 여름철에 늘 마시면 좋다고 했다. 여름철 보양식으로 유명한 보신탕도 약한 신맛이 나는 음식이라 구분할 수 있다. 보신탕에 넣는 부추도 약한 신맛을 낸다.
둘째 약한 짠맛이다. 약한 짠맛이란 처음에는 약간 짭짜름하다가 단맛이 나면서 입에 침이 고이는 맛을 말한다. 찌는 듯이 더운 사막을 횡단하는 카라반은 소금을 늘 먹어서 기운이 땀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한다. 약한 짠맛을 먹으면 진액을 끌어당겨 땀이 덜 나가게 한다. 몸의 열을 내려주는 효과도 있다. 음식점에 가면 보통 고춧가루나 식초가 놓여 있다. 그런데 여름에만 특별히 놓이는 양념이 있다. 바로 소금이다. 여름철에 콩국수를 주문하면 소금이 따라 나온다. 보신탕, 삼계탕을 주문해도 소금을 준다. 여름철 별미인 우무에도 소금이 들어간다. 뱀장어도 여름에는 소금을 곁들여 먹는 것이 좋다. 운동하고 나서 땀을 많이 흘린 후 마시는 미네랄 음료도 약한 짠맛이다. 약한 짠맛은 흡수가 빠르고 소변을 잘 보게 해 열을 가라앉혀준다.
그런데 어떤 소금을 쓰는가가 중요하다. 정제염이나 갓 만든 천일염은 아니다. 이들 소금은 매우 짜면서 끝 맛이 쓰고 입이 말라 물이 당긴다. 3년 이상 묵힌 천일염이나 구운 소금, 죽염, 함초 소금은 약간 짜면서 끝 맛이 달고 입에 침이 고인다. 여름에 기운이 없을 때는 생수 1ℓ에 죽염 4g 정도를 녹인 물을 한 모금씩 마시면 좋다. 기운이 나고 땀도 덜 난다. 너무 싱겁게 먹으면 여름이 힘들고 기운이 없어진다.
셋째 단맛이다. 더운 여름에는 체력 소모가 많아, 이를 보충하기 위해 단것을 많이 먹는다. ‘동의보감’에서도 “더위는 기를 손상시키니 진기를 보하는 것이 요체다”라고 했다. 더운 동남아와 중동 사람들은 단것을 엄청 많이 먹는다. 수박과 참외, 야자 등 여름철 과일과 열대 과일류는 대부분 달다. 이때의 단맛은 정제 설탕 맛과 다르다. 정제 설탕을 먹으면 달달하다가 입이 텁텁해지면서 물이 당긴다. 초콜릿을 먹어도 달다가 입맛이 쓰면서 물이 당긴다. 이런 맛은 여름 먹거리로 적합하지 않다. 야자즙, 망고 등 천연과일은 달달하면서 입에 침이 고인다. 이런 단맛이라야 여름 더위를 이길 수 있다. 그런데 참외나 수박처럼 차가운 과일은 적당히 먹어야 한다.
‘동의보감’에서는 사계절 중 여름철 건강관리가 가장 힘들다고 했다. 더워서 겉으로는 땀이 나지만, 속은 반대로 차가워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땀을 과도하게 흘려 탈진하거나 더위를 먹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더워도 위장은 차갑기 때문에 차가운 음식을 주의해야 한다. 여름철에 얼음물과 차가운 채소와 과일을 많이 먹으면 가을철에 추웠다 더웠다 하면서 배변 상황이 나빠질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현대인은 에어컨 때문에 여름에 오히려 냉방병에 걸리기 쉽다. 머리가 아프고 몸이 쑤시면서 발열, 오한, 복통, 구토, 설사를 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중간중간 따뜻한 음료를 마셔야 한다. 곽향정기산(藿香正氣散)을 쓰면 효과가 있다.
여름은 콩팥이 가장 약해지는 시기이기도 하므로 과도한 성생활이나 음주를 주의해야 한다. 콩팥이 손상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무더울 때 갑자기 찬물로 세수를 하면 눈에 혈액공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시력이 나빠질 수도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더운 곳에 나갔다가 돌아오면 찬물로 양치하되 삼키지는 말아야 한다. 인체 내부로 갑자기 찬물이 들어가면 손상을 일으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최철한(崔哲漢) 본디올대치한의원 원장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졸업.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본초학교실 박사. 생태약초학교 ‘풀과나무’ 교장. 본디올한의원네트워크 약무이사.
저서: ‘동의보감약선(東醫寶鑑藥膳)’, ‘사람을 살리는 음식 사람을 죽이는 음식’
“자신을 비운 자리에 상대를 받아들이듯 서로 다른 나무가 한 몸이 되어야 비로소 하나의 가구가 완성됩니다.” 50여 년 ‘외길 인생’에 값하는 사유의 언어로 ‘전통 짜맞춤’을 설명하는 소병진(蘇秉辰·68) 씨. 1960년대 중반, 가난 때문에 학교 공부도 포기한 그는 열다섯 살에 가구공방에 들어가 ‘농방쟁이’ 목수의 삶을 시작했다. 이후 맥이 끊긴 조선시대의 가구 전주장을 재현해내고 대한민국 가구제작 명장 1호, 국가무형문화재 제55호 소목장 보유자가 됐다. 한 치의 오차도 허락하지 않았던, 작업대 위의 시간들이 가져다준 당연한 결과였다.
전북 완주에서 작품활동을 하며 제자들을 가르치는 그는 마침 서울에 올라와 있었다. 6월 4일까지 열렸던 2018한옥박람회에서 ‘전통예술과 현대미술의 만남’을 주제로 자신의 작품을 선보이기 위해서였다. 인터뷰가 잡힌 날,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약속 시간을 조금만 미뤄달라는 부탁을 해왔다. 그의 작품과 제자들이 출품한 가구를 관람하고 전시장을 몇 바퀴 돌고 난 뒤에야 그가 나타났다. 사실은 오랜만에 만난 지인들과 늦게까지 술을 마시느라 늦잠을 잤다고 털어놨을 때 아직 건강한 그의 시절이 반가웠다. “좀 더 일찍 국가무형문화재가 되었더라면 제자들을 많이 길러냈을 텐데…” 하고 아쉬워했지만 그는 여전히 필드에서 펄펄 날고 있는 선수처럼 보였다. 고희(古稀)를 바라보는 나이도 믿기지 않았다.
“평생 나무와 함께해서 건강한 거 같아요. 가구를 만들다 보면 스트레스와 잡념이 사라지거든요. 못을 사용하지 않고 목재끼리 서로 끼워 맞추는 게 짜맞춤인데 이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뇌를 써야 하니까 치매 예방에 좋지, 온몸을 움직여야 하니 운동을 따로 할 필요가 없지, 시간도 잘 가지, 정서적으로도 좋지, 성취감도 있지, 무엇 하나 부족한 것이 없어요. 미래학자 피터 드러커도 ‘전통문화는 미래산업의 최후 승부처’라고 했잖아요. 곧 시니어에게 짜맞춤이 최고의 직업이 되지 않을까 전망해봅니다.”
실제로 완주에 있는 그의 교육관에는 퇴직자들이 꽤 온다. 대부분 취미로 배우지만 제2직업으로 삼는 사람도 있다. 물론 후계자의 길을 걷기 위해 청년들도 문을 두드리기는 하지만 1년 정도 지나면 버티지 못하고 나간다. 경제적 이유 때문이다. 그는 전통문화의 부가가치를 내다보고 적극 지원하는 일본에 비해 우리나라의 현실은 매우 열악하다면서 안타까워했다.
“전통 짜맞춤 기법은 총 45가지인데 지금은 5가지밖에 안 가르쳐요. 돈 내고 그걸 다 배우려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죠. 교육생들에게 손 연마(수공구 연마)만 시키면 지루해합니다. 빨리 물건 하나 만들어보고 싶은 거예요. 6개월이면 사방탁자 정도는 만들 수 있어요. 하지만 흉내 내는 것밖에 안 돼요. 기술자가 되려면 눈을 감고도 나무를 다룰 수 있어야 하고, 이음매를 딱딱 때려보는 것만으로도 짜맞춤이 제대로 되었는지 감각적으로 알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세대가 가구를 배울 때는 청소와 심부름 등 온갖 잡일을 해가면서 스승 밑에서 10년 이상 공을 들여야 겨우 인정을 받았어요. 그러나 요즘 같은 세상에 그렇게 공부할 젊은이들이 과연 있을까요. 정부가 전통문화를 짊어질 이수자들에게 지원을 해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가난 때문에 배우기 시작한 소목장 기술
‘농방쟁이’. 과거에는 가구 만드는 사람을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그가 소목장이 된 인연은 54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전매청에 다니던 아버지가 직업을 잃으면서 가세가 급격히 기울자 열다섯 살 소년은 일찍 철이 들어버렸다. 젓갈장사 등을 하며 7남매 뒷바라지하는 어머니를 보며 무슨 기술이든 배워 빨리 돈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중학교를 중퇴한 채 8촌 형을 따라 들어간 곳이 ‘전주 중앙가구’ 목공부 소목반. 그곳에서 운명처럼 전통 소목 기술자 이해민 명장을 만나 사사한다. 어린 소병진은 하나를 가르쳐주면 둘을 알 정도로 눈썰미가 남달랐다. 남들은 10년 넘게 배우는 기술을 2년 반 만에 통달했다. 이 똘똘한 소년을 주변에서 그냥 놔둘 리 없었다. 어느날 그의 솜씨를 눈여겨보던 유명 목수 유춘봉 씨가 자기 집으로 오라 했다.
“유춘봉 선생님은 서울에서 일하던 최고 기술자였지요. 전주 중앙가구에서 디자인 개발을 위해 모셔왔는데 그렇게 인연이 된 거죠. 내게 넓고 새로운 세계를 보여준 은인입니다. 음료수 한 박스 사 들고 갔더니 ‘자네 인사성도 좋고 성실하고 솜씨도 참 좋네. 여기 놔두기 아까워서 하는 말인데 돈 벌고 싶은가, 기술 배우고 싶은가? 내가 만약 동일가구 보내주면 갈랑가?’ 하고 물으시더군요. 깜짝 놀랐죠. 동일가구는 아무나 들어가는 회사가 아니었거든요.”
더 큰 기술을 배우고 싶었던 그는 유춘봉 씨가 써준 편지를 들고 서울로 올라갔다. 과연 소문대로 시스템이 잘 갖춰진 회사였다. 그는 일본으로 가구를 납품하는 수출반에서 일하게 됐다. 최고급 가구를 제작하는 곳이었다. 그동안 어디서도 보지 못한 수려한 디자인의 가구들을 보며 그는 가슴이 뛰었다. 함께 일할 사람들은 모두 머리가 희끗희끗했다. 국내에서 내로라하는 장인들이었다. 이때 배운 기술, 특히 디자이너를 귀찮게 따라다니면서 배운 디자인 기술은 그가 조선시대 가구 전주장을 복원해낼 때 큰 도움이 되었다.
‘전주장’을 대표하는 브랜드가 되다
“전주장을 처음 본 것은 동일가구에서 일할 때였어요. 휴일이면 인사동엘 자주 나갔는데 어느 날 골동품 가게에 있는 물건이 눈에 확 들어왔어요. 자그마하면서도 기품이 느껴지는 가구였어요. ‘전주태극이층장’이라는 이름표가 붙어 있길래 직원에게 물어보니 조선시대에 전주 지방에서 부잣집 마님들이 쓰던 가구라는 거예요. ‘우리 고향에서 조상들이 쓰던 가구라고?’ 귀가 번쩍 뜨였죠.”
그때부터 전주장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언젠가는 꼭 한 번 만들어보리라 마음먹고 월급을 타면 죽은 느티나무와 먹감나무를 사서 고향집에 쌓아 뒀고 전주장이 있는 곳이라면 전국 어디든 달려갔다. 박물관이나 개인이 소장한 가구를 통해 형태와 장석문양도 꼼꼼히 기록했다. 그것으로도 성에 안 차면 어렵게 구한 전주장을 분해해서 제작 기법을 하나하나 분석했다. 그러기를 20여 년 그는 마침내 전통가구 전주장의 원형을 재현해내는 데 성공했다.
“전주장 앞면에 들어가는 문양과 장석 하나까지 정통 그대로 살려냈어요. 장석은 너무 번쩍거리지 않도록 처리했고, 가구 보존을 위해 마무리는 동백기름으로 칠했지요. 전주장은 지방에서만 쓰이던 가구가 아니에요. 한때는 하사품으로 이용될 만큼 명성이 있었던, 조선시대 가구의 백미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사명감을 갖고 내가 알고 있는 기술을 모두 쏟아 부었어요. 2004년 전승공예대전에 ‘전주버선장’을 출품해 대통령상을 받았을 때 ‘내가 결국 해냈구나’ 하며 자부심을 느꼈지요.”
그 후 소병진은 ‘전주장’을 대표하는 브랜드가 됐다. 2014년에는 마침내 대한민국 중요무형문화재 제55호 소목장 보유자로 선정이 됐다. 한눈팔지 않고 최선을 다한 세월이 가져다준 보상이었다. 한때 부도를 맞아 ‘그만 살자, 격포에 가서 죽어버리자’ 하고 바위 위로 올라갔다가 어린 아들이 눈에 밟혀 다시 돌아왔던 날들은 이제 추억이 됐다. 그는 자신의 기술이 3대를 잇는 기술이라고 했다. 스승의 선대 기술까지 배웠으므로 100년의 기술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살아 있을 때 전주장 기술을 보존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면 좋겠다고 말한다. 그 일환으로 최근에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소목장(전주장) 등재를 위한 노력을 다방면으로 하고 있다.
좋은 나무만 보면 아직도 설레는 사람
짜맞춤 가구에 사용되는 목재는 주로 오동나무, 느티나무, 먹감나무 등으로 보통 100년 이상 된 나무들이 쓰인다고 한다. 그는 지금도 좋은 나무만 보면 탐이 나고 설렌다고 말한다.
“나무를 들여오면 눈과 비바람과 햇볕을 맞히고 건조 과정을 거쳐 가구를 만들기까지 20여 년이 걸려요. 지금 내 나이가 곧 70인데 20년 뒤면 90입니다. ‘내가 이 나무를 사용할 수 있을까? 미쳤지! 그만 사야지’ 하면서도 좋은 나무만 보면 ‘얼마여?’ 하고 물어요. 이게 바로 정신 같아요. 여기 쟁여놓은 나무들, 누가 10억 준다 해도 안 팔아요.(웃음)”
그의 교육관에는 귀한 목재들이 가득하다. 스승은 제자를 위해 나무를 구하고 제자는 그 나무를 쓰며 스승을 생각할 것이다. 그렇게 서로에게 가는 마음의 길은 비움과 받아들임을 반복하며 상대를 꽉 안은 채 열릴 것이다. 순환의 사랑이 100년의 기술만큼 오래도록 이어지길 그가 기대하고 있는 것처럼.
로마인들의 휴양지에는 몇 가지 특색이 있다. 목욕을 좋아해 자연 용출장이 있는 곳에 휴양지를 만들었다. 목욕 즐기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어김없이 볼거리, 즐길거리도 만들었다. 연극이나 스포츠를 동시에 즐길 수 있는 극장과 원형 경기장도 만들었다. 로마인들의 대표적인 휴양지 중 한 곳은 터키의 파묵칼레다. 고대 도시, 히에라폴리스의 부서진 유적 위에 만들어진 온천 수영장에서의 물놀이는 클레오파트라도 부럽지 않다.
거대한 흰 석회암 언덕이 있는 작은 마을
터키 여행을 할 때 파묵칼레(Pamukkale)를 여행 코스에 넣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다. 파묵칼레에 대한 홍보 영상물을 한 번이라도 봤다면 그곳에서 발산되는 매력을 저버릴 수 없다. 터키 여행 10일 정도 지날 즈음 파묵칼레로 간다. 고국에서 여행 온 후배들을 그곳에서 만나기로 했다. 만날 수 있는 방법은 어렵지 않다. 날짜를 정하고, 같은 숙소를 따로 예약하면 된다.
후배들보다 좀 더 일찍 여행을 왔기에 여유 부리며 터키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닌다. 대부분의 터키 여행자들은 카파도키아에서 안탈리아로 이동해 파묵칼레로 이동하지만 카시~페티예~달얀에서 시간을 더 보냈다. 무계획 여행은 이래서 좋다. 달얀에서 파묵칼레까지는 결코 가까운 거리가 아니다. 하지만 한국에 비해 12배나 영토가 큰 터키이기에 긴 이동거리도 당연지사처럼 생각하게 된다. 달얀에서 승합차처럼 작은 돌무시를 타고 페티예로 나와 오토가르(터미널)에서 파묵칼레로 가는 버스표를 구입한다. 분명히 파묵칼레로 가는 표를 구입했는데 데니즐리(Denizli)가 종점이다. 돌무시로 바꿔 타고 10km를 더 가야 파묵칼레다. 통일성 없는 터키의 교통법은 쉽게 익숙해지지 않는다.
35℃ 온천수가 변화시킨 석회암 덩어리
파묵칼레는 아주 작은 동네다. 게스트하우스 앞으로 거대한 ‘설산’처럼 보이는 석회암 덩어리가 불쑥 솟아 있다. 편안한 차림으로 마을의 석회암 언덕으로 오른다. 사방팔방 온통 흰빛이다. 파묵칼레는 터키어로 ‘목화의 성’이라는 뜻이다. 온천수가 빚어낸 석회암 덩어리를 빗대어 붙인 지명. 석회 성분을 다량 함유한 35℃ 온천수가 수 세기 동안 바위를 타고 흐르면서 표면을 탄산칼슘 결정체로 뒤덮은 것이다. 석회암 언덕은 보기와 달리 미끄럽지 않다. 따뜻한 물이 흐르고 용액의 흐름을 보여주는 ‘층리’가 사방으로 펼쳐진다. 이 석회 언덕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여러 차례 그 색이 변한다. 녹은 석회암이 물결 모양을 만들었다. 마치 다랑이논처럼 보이기도 한다.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수십 개의 서멀 풀(thermal pools)의 물줄기는 청옥빛이다. 종유석 등은 없지만 딱 석회동굴이 노출되어 있는 형상이다. 서멀 풀은 1988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면서 입욕은 불가하고 맨발로는 들어갈 수 있다. 그럼에도 한여름에는 수영복 입은 여행자들이 부지기수다.
석회 언덕 정상에 오르면 또 한 번 깜짝 놀란다. 부서진 문화 유적들이 무수하게 흩어져 있고 박물관도 있다. 이곳은 고대 페르가몬(Pergamon) 왕국이 기원이다. 기원전 130년경, 로마인들이 정복해 ‘성스러운 도시(히에라폴리스)’라고 불렀다. 그리스어 ‘히에로스’는 신성함을 뜻한다. 히에라폴리스는 로마에 이어 비잔틴제국의 지배를 받으면서도 여전히 번성했다.
고대 로마의 히에라폴리스 유적지
‘파묵칼레’라는 지명은 11세기 후반 셀주크투르크족의 룸셀주크 왕조의 지배를 받으면서 만들어졌다. 이후 1354년, 이 지방을 강타한 대지진으로 도시 전체가 폐허가 되었다가 1887년, 독일 고고학자 카를프만이 발견해 복원했다. 로마시대의 원형 극장, 신전, 공동묘지, 온천욕장 등 귀중한 문화 유적이 남아 있다. 특히 최대 1만5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의 원형 극장은 현재 봐도 어마어마한 규모다.
또 증기가 발생하는 단층 위에는 아폴로신전이 세워져 있고 세베루스(Severus) 시대에 만들어진 극장도 있다. 1200기의 무덤이 남아 있는 거대한 공동묘지도 있다. 서아시아에서 가장 큰 공동묘지 유적 중 하나인 이곳에는 지금도 수많은 석관 뚜껑이 열려 있거나 파손된 채 여기저기 널려 있다. 이 석관들은 치료와 휴양을 위해 몰려들었던 병자들의 무덤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곳 또한 고대 도시 유적으로 1988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클레오파트라 온천 수영장에서 물놀이
흩어진 문화 유적지와 박물관을 관람하고 클레오파트라 온천 수영장으로 들어간다. 폐허가 된 유적지에 온천물을 담아 언덕 위에 온천 수영장을 만들었다. 수영장엔 나무들을 심어 그리스, 로마식으로 만들었다. 간이 탈의실도 있고 식당도 있다. 물 온도는 35℃로 생각보다 높다. 물속에는 그리스, 로마시대 때의 대리석 기둥이 그대로 잠겨 있어 발밑이 평평하지 않다. 얕은 곳도 있지만 키를 훌쩍 넘는 곳도 있다.
이 온천수는 류머티즘, 피부병, 심장병 등에 효과가 있다고 전해져 그리스, 로마, 메소포타미아 등지에서 많은 사람이 몰려왔다. 특히 로마시대에는 여러 황제와 고관들이 이곳을 찾았다. 테르메라고 하는 온천욕장은 온욕실·냉욕실은 물론 스팀으로 사우나를 할 수 있는 방, 대규모 운동 시설, 호텔과 같은 귀빈실, 완벽한 배수로와 환기 장치까지 갖추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이 이곳으로 와 물을 가져갔는데, 이 물은 양모를 씻고 염색하는 용도로 쓰이기도 했다.
어쨌든 고대, 로마시대 때부터 있던 온천장에서 즐기는 온천욕. 수심이 깊은 곳에서 수영도 하고 밧줄에 매달리기도 하고 물도 먹기도 하면서 두어 시간 놀고 나니 몸이 가뿐해졌다. 클레오파트라도 방문했다고 하니 아무리 바빠도 온천욕은 필히 해야 한다. 파묵칼레는 사실 이게 전부다. 단 이틀 동안 후배들과 함께하고 아쉬운 작별을 한다. 헤어지는 날, 후배는 싸갖고 온 햇반과 깻잎을 건네준다. “선배. 정말 힘들고 외로울 때 이거 먹어. 그러면 아픔이 싹 가신대.” 아끼고 아껴뒀다가 힘들었을 때 꺼내 먹으면서 파묵칼레의 기억을 어찌 떠올리지 않았겠는가? 여행이란 단지 풍치만 보는 게 절대 아니라는 말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내 기억 속의 파묵칼레는 그래서 더 좋다.
Travel Data
찾아가는 방법 인천에서 이스탄불까지 직항이 있다. 이스탄불에서 데니즐리까지 항공으로는 1시간 10분 소요된다. 버스 등 대중교통으로는 10시간가량 걸린다. 데니즐리 터미널에서 파묵칼레행 미니버스가 운행된다. 이스탄불 ~ 카파도키아 ~ 안탈리아 ~ 파묵칼레 순으로 대부분 여행 코스를 짠다.
음식 정보 파묵칼레는 한국인들이 즐겨 찾는 관광지. 한국 음식을 파는 식당들이 제법 있다.
숙박 정보 파묵칼레 마을은 크지 않다. 대부분 가정집을 개조한 게스트하우스가 많다. 가격은 조식을 포함해 2~3만 원대다. 대부분 수영장도 갖추고 있다.
날씨 정보 터키는 지중해성 기후다. 생각보다 햇살이 따갑다. 4월부터 기온이 풀리고 곧 뜨거워진다. 봄옷을 준비하면 된다. 아침과 저녁은 일교차가 크므로 겉옷을 하나 준비하는 게 좋다.
물가와 화폐 정보 터키 화폐는 터키 리라(Turk Lirasi)다. 물가는 한국보다 싸다.
시니어 여행 포인트 파묵칼레 인근에는 또 다른 온천 명승지가 있다. 제2의 파묵칼레로 불리는 카클르크(카크리크) 동굴은 최근에 발견된 종유동굴인데, 광천수가 뿜어져 나온다. 파묵칼레에서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려면 여행사를 통해 표를 구입해야 한다. 여행사가 두어 곳 있는데 가격 차이가 크다.
스페인 바르셀로나를 가 보면 안다. 많은 한국인이 이 도시를 떠나지 못하고 장기적으로 머물고 있는 이유를 말이다. 매력이 넘치는 바르셀로나는 영화 로케이션 장소로도 큰 인기다. ‘내 남자의 여자도 좋아’, ‘비우티풀’, ‘스페니쉬 아파트먼트’ 등은 모두 바르셀로나를 배경으로 찍은 영화다. 또 몬주익 언덕에는 마라톤 선수 황영조 기념탑이 있다.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때 우승을 안겨줬던 도시. 낯선 나라에서 한글을 보면 가슴이 짜르르해지고 눈시울이 젖는다.
100년 넘게 공사 중인 대성당
스페인 북동부의 카탈루냐 자치주의 주도인 바르셀로나는 17세기에 건설된 항구도시다. 바르셀로나는 최근 카탈루냐가 스페인으로부터 분리 독립을 시도하고 있어 국제 뉴스에 자주 오르내리는 지역이기도 하다. 이곳은 관광도시로 유명한데 특히 안토니 가우디(Antoni Gaudi, 1852∼1926)의 건축물은 탁월한 명소다. 라 사그라다 파밀리아, 카사 밀라, 카사 바트요는 건축 문외한의 눈길도 저절로 이끈다. 특히 라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은 여행자들의 필수 방문지다. ‘사그라다 파밀리아’의 뜻은 ‘성 가족’이라는 의미로 예수 그리스도, 마리아, 요셉을 뜻한다.
이 성당의 원 설계자는 가우디의 스승인 비야르. 성 요셉 축일(1882년 3월 19일)에 착공을 했으나 건축 의뢰인과 의견 충돌로 중도 하차했고 이듬해부터 가우디(당시 31세)가 맡게 된다. 가우디는 1926년까지, 총 12년간을 오로지 이 성당에만 매달린다. 그러나 성당을 완공도 하기 전, 그는 전차에 치여 갑작스럽게 세상을 뜬다. 그가 사망할 당시 이 성당은 ‘예수 탄생’ 파사드, 종탑 한 개, 네 개의 탑, 지하 납골당만 완성된 상태였다. 그날 이후 공사는 끊임없이 진행되었고 가우디 사후 100년(2026년)이 되는 해 완공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 성당은 천천히 자라나지만, 오랫동안 살아남을 운명을 지녔다”는 생전 가우디의 말이 이뤄질 것 같다. 입장료가 비싸지만 매표소는 늘 장사진을 친다. 매표 요금은 완공을 위한 기부금 형태로 쓰인다.
바르셀로나를 빛내는 건축가 가우디
일단 엘리베이터를 타고 맨 꼭대기 층으로 올라가 400여 개의 회오리계단을 따라 내려오면서 구경하면 된다. 가우디의 유해는 지하 박물관에 있다. 1869년(17세), 가우디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형이 이미 가 있는 바르셀로나로 터전을 옮겨 건축학교에 입학한다. 고향과는 달리 큰 도회지인 바르셀로나에서 처음은 적응이 어려웠지만 그 시절, 많은 자극과 동기를 받는다. 1874년(22세), 바르셀로나의 유명한 건축학교에 입학한다. 그러나 그의 특이한 창조성은 호평보다는 혹평을 많이 받는다. 그는 늘 말이 없고 허름한 차림새에 이상한 실험들을 일삼았기에 평생 괴짜라는 꼬리표를 안고 살아야 했다. ‘귀족적이면서 천박한, 댄디(dandy)이자 방랑자, 박식하지만 오락가락하는, 기지가 넘치지만 재미없는 사람’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근대 건축의 거장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 1887~1965)가 있었다. 그는 가우디를 천재라고 칭찬했다. 사후 30년 뒤인, 1960년대부터 그는 인정받기 시작했고 바르셀로나를 영원히 빛내고 있다.
카사 밀라에서 구엘 공원까지
바르셀로나에는 성 가족성당 말고도 가우디의 모더니즘 건축의 최고로 꼽히는 카사 밀라가 있다. 산을 주제로 디자인하고 석회암과 철을 이용해 만들었다는 독특한 건축물로 파도가 치는 것 같은 곡선이 인상적인 건물이다. 또 바다를 주제로 디자인한 카사 바트요(200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는 도자기 타일과 유리 모자이크가 아름답다. 그러나 가장 마음에 드는 곳은 구엘 공원(198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이다. 가우디와 구엘 백작의 합작품. 가우디의 후원자였던 구엘 백작은 이상적인 전원도시를 만들 목적으로 바르셀로나의 펠라다 지역 땅을 매입한다. 구엘은 가우디에게 영국의 전원도시를 모델로 해서 그리스의 팔라소스 산과 같은 신전을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공원 부지가 돌이 많은 데다 경사진 비탈이어서 작업에 어려움이 많았다. 그럼에도 가우디는 자연스러움을 살리기 위해 땅 고르는 것도 반대했다고 한다. 그는 이 단지를 위해 무려 14년(1900~1914)이나 매진했지만 결국 자금난 등으로 미완성으로 끝났다. 1922년, 바르셀로나 시의회는 구엘 백작 소유의 이 땅을 사들여 이듬해 시영공원으로 탈바꿈시켰다.
자연 친화적 건축물, 구엘 공원
구엘 공원은 세계에서 가장 매력적이고 독특한 공원 중 하나다. 바르셀로나를 여행하는 사람은 꼭 방문해봐야 하는 곳으로 손꼽힌다. 멀리 지중해와 바르셀로나 시내가 한눈에 보이는 언덕바지에 구엘 공원이 있다. 초콜릿을 닮은 듯한 돌기둥, 과자의 집처럼 생긴 건물, 반쯤 기울어져 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인공 석굴, 계단 위에 타일로 만들어진 도롱뇽, 기념품 파는 건물 등 가우디만의 색깔이 분명한 건축물이 오롯이 모여 있다. 또 그리스 로마 신화에 관심이 많았던 구엘 백작의 요청으로 만든 도리아식 기둥도 눈길을 끈다. 녹색 식물들 사이로 자연스럽게 들어앉은 독창적인 건축물들이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 한마디로 자연을 거스르지 않은 채 만들어졌고 사방팔방으로 시내가 조망되어 가슴속까지 시원해진다. 입장료를 받지 않는다는 점까지 가세하면 두말할 필요 없이 행복한 공간이다. 단 과거 가우디가 살았던 집은 박물관으로 공개해 유료다. 가우디가 사용했던 침대, 책상 등 유품과 데드 마스크가 전시되어 있다. 가우디가 직접 디자인한 독특한 가구들이 감상 포인트다.
Travel Data
찾아가는 방법 대한항공, 아시아나항공 등 직항이 운행된다. 소요시간은 13~14시간.
현지 교통 바르셀로나는 규모가 커서 대중교통을 필히 이용해야 한다. 지하철이 제일 편리하다. 도심이 복잡하므로 1일권을 사서 무제한으로 이용하는 것이 좋다.
음식정보 보케리아 시장에서는 해산물을 구입해 즉석요리를 해 먹을 수 있다. 기다리는 사람이 많을 때는 근처의 레스토랑을 이용하자. 흥정으로 절반짜리 해산물 요리를 먹을 수 있다.
숙박정보 바르셀로나는 관광도시라 물가가 비싼 편이다. 고급 호텔 가격은 1박당 50만 원 이상. 아파트, 한인 민박, 호스텔 등을 이용하면 비용을 줄일 수 있다. 아파트 숙박은 1박당 10만 원 정도.
화폐 유로화 통용.
날씨 바르셀로나의 4월 평균 최저기온은 8.5℃, 평균 최고기온은 17.6℃로 서울의 4월 중순 기온과 비슷하다. 예측 없이 비가 내릴 수 있으니 비옷과 우산은 꼭 챙겨서 외출하자.
시니어 여행 포인트 바르셀로나는 서둘러 여행하는 곳이 아니다. 천천히 여유를 갖고 둘러봐야 할 도시다. 몬주익 언덕은 꼭 올라가 봐야 한다. 도시를 한눈에 전망할 수 있다. 경기장 근처로 내려오면 차도 옆으로 황영조 동상이 있다. 차도를 따라 내려가면 미로 미술관을 만난다. 바르셀로나를 기점으로 근처 소도시 여행은 꼭 해야 한다. 몬세라트 성지와 타라고나를 적극 권한다. 누드 비치에 관심이 있다면 바르셀로나에서 30분 거리에 있는 시체스(Sitges) 해변을 찾으면 된다.
요즘은 ‘둘레길 걷기’가 대세다. 매일 30분에서 1시간 정도 집 근처에서 산책하고, 둘레길 걷기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 하는 것이 좋다. 걷기 왕초보인 필자가 걸어보니 건강을 지키는 데 알맞은 거리와 시간은 10km 안팎의 3시간 정도다.
아무리 건강을 위해 걷는다 해도 무작정 걷기만 하는 곳은 지루하고 재미가 없다. 걸으면서 역사나 문화를 접할 수 있는 길이 좋다.
성곽 따라 낙산공원
한양도성박물관을 관람한 뒤, 성곽길을 따라 올라간다. 낙산 성곽은 영화나 드라마 촬영이 많이 이루어지는 곳인데, 석양과 야경이 특히 아름답다. 낙산공원 전망대에서는 서울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성 밖으로 나가면, ‘지봉유설(芝峰類說)’을 쓴 이수광이 살았다는 ‘비우당(庇雨堂)’이 있다. 단종의 비 정순왕후가 빨래를 하면 자주색 물이 들어서 ‘자지동천(紫芝洞泉)’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는 샘도 있고, 정순왕후가 기거했던 정업원(淨業院)도 있다. 낙산공원에서 내려오는 길에는 이화동 벽화마을과 이승만 대통령이 해방 후 귀국해서 살았던 이화장(梨花莊)도 관람할 수 있다.
✽동대문역 10번 출구→동대문성곽공원→한양도성박물관→낙산공원→중앙광장→동숭동 어린이집 길→이화동 벽화마을→이화장(사전예약)
성북동 동네 한 바퀴
길상사는 법정 스님의 저서 ‘무소유’를 읽고 감명을 받은, 요정 ‘대원각’ 주인 김영한이 대원각을 기증해 만든 사찰이다. 길상사에는 특별한 것 3가지가 있다. 김영한과 시인 백석의 사랑 이야기가 담긴 시비(詩碑), 법정 스님의 유품실인 진영각, 성모 마리아 상을 닮은 관세음보살 상이다. 최순우 옛집은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낸 혜곡(兮谷) 최순우가 살던 집이다. 이곳에서 그는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를 집필했다. 최순우 옛집을 나와 대로변을 따라 위로 걸어가다 보면 덕수교회가 나온다. 이종석 별장은 덕수교회 뒤편에 있으며 교회에서 교육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 별장은 마포에서 젓갈을 팔아 대부호가 된 상인 이종석이 지은 별장이다. 마지막 코스인 심우장(尋牛莊)은 독립운동가 만해 한용운이 3·1운동으로 옥고를 치르고 나왔을 때 지인이 마련해준 곳으로, 한용운의 유품과 그가 직접 심은 향나무가 있다.
✽한성대입구역 6번 출구→길상사(마을버스 02번 이용)→최순우 옛집→이종석 별장→심우장
조선의 정궁(正宮), 경복궁
경복궁 안에는 왕실의 역사와 문화를 알 수 있는 국립고궁박물관과, 서민의 생활 문화를 알 수 있는 국립민속박물관이 있다.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5번 출구로 나가면 바로 고궁박물관이 나온다. 관람을 끝내고 경복궁을 돌아본 뒤, 신무문(神武門)을 통해 청와대 정문 앞길로 나와 경복궁 담을 따라 걸으면 다시 경복궁역 3번 출구 방향이다. 여기서 횡단보도를 건너면 ‘세종마을 음식문화거리’가 있다. 일명 ‘체부동 먹자골목’이다.
✽경복궁역 5번 출구→국립고궁박물관→경복궁